25화 생존기 (25)
집으로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 능력은 생각보다 제약이 많았다.
우선 내게 적대적인 존재들을 요격할 수 있는 방위 무기의 사정거리가 거점 내부까지라는 점, 그리고 거점 관리를 위해선 반드시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 또한 방위 무기가 내게 적대적인 존재와 그렇지 않은 자를 알아서 구별하지 못한다는 점 등등.
결국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 투성이였다. 내가 타인과의 교류를 완전히 포기한다면 자력으로 스킬 레벨을 올리거나 새로운 스킬을 얻어서 인력을 대체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각성이니 상태창이니 스킬창이니 하는 것들이 나온 마당에, 굳이 사람 손길 타지 않아도 거점을 관리해 주는 유용한 스킬이라던가 부가 기능이 추가된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것은 없으니까.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지금 내 위치다.
사람과 교류를 하긴 하지만 매우 수동적이고, 좀비를 때려잡으며 경험치를 얻고는 있지만 그 또한 적극적이지 않다.
좀 더 과감하게 행동하고자 한다면 그 자전거 동호회 놈들처럼 좀비 떼를 대거 유인해서 내 거점에 꼴아박게 한 다음, 방위 무기로 몰살시켜 대량의 경험치를 얻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 섣불리 거점이 파괴되기라도 한다면? 소음 때문에 더 많은 좀비를 끌어들여서 결국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면?’
그래, 소음. 바로 그놈의 소음이 문제다.
활천초에서 적절한 숫자의 좀비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운이었다. 정확히는 사태 당일, 좀비 대부분이 사람들을 쫓아 인구 밀집 구역으로 향한 게 크게 작용했다.
만약 내가 숨어든 곳이 인구 밀집 구역 중 하나였고, 그곳에서 거점 지정 스킬을 발동시켜 좀비들을 처리했다면 순식간에 좀비들에게 둘러싸여 끝내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수백 마리 단위가 아니라, 최소 수천 마리 단위가 덤벼들었을 테니까.
찌릉찌릉.
오던 길에 주운 싸구려 자전거의 벨을 울리면서 서늘한 가을 바람을 느꼈다.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지만 기온은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이유는? 아마 전 세계 인류가 경제 활동을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날 동안 꾸준히 증가한 인구와 규모가 커진 경제 활동 때문에 지구 온난화는 더욱 극심해지고, 지구의 평균 기온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러다 전 세계를 강타한 좀비 아포칼립스 때문에 모든 공장과 차량 운행이 올스탑. 인류 문명의 발전이 정지된 며칠 만에 지구는 조금씩이지만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말이 안 된다고? 인공위성을 통한 실시간 기후 정보는 아직도 스마트폰으로 받아 볼 수 있는데, 확실히 전년 대비 동시기 기온 차가 제법 컸다. 체감상으로는 벌써 초겨울이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직 입김이 새어 나올 정도로 추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기가 너무 안 좋아.’
지금은 1년의 4분의 3이나 소모해 버린 가을이다. 평상시였다면 이 수확기를 거치고 따스한 겨울을 보내는 게 일반적인 인류의 삶인데, 좀비들이 등장하면서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수확은 수확대로 망치고, 당연하지만 겨울 대비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식량 비축만이 아니라 생활 인프라의 제한이었다.
막말로 봄, 여름, 가을은 따뜻한 이불이나 서늘한 장소만 있으면 어떻게든 맨몸으로 보낼 수 있다.
하지만 겨울은 모든 것이 얼어붙는 시기라 아무리 따뜻한 남쪽 지방이라고 해도 꽁꽁 싸매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무차별적으로 터진 폭탄과 좀비들의 습격 때문에 크고 작은 파이프라인이 박살 나 버렸다.
원자력 발전소는 지금쯤 자동 안전 시스템에 따라 순차적으로 가동이 정지되고 있을 테고, 태양광 패널을 사용하고 있는 아파트나 개인 주택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전기는 둘째치고 도시 가스와 수도가 끊기는 시점에서 현대인은 생태계 최약체로 전락한다.
문명의 이기 덕분에 편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갑자기 맨몸으로 불을 붙이는 법이나 자연 상태의 물을 모으는 생존법 같은 것을 알고 있겠나? 동물을 사냥하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이나 과일을 구분하는 방법은? 식량을 보관하는 방법은?
내가 타이밍이 안 좋다고 생각했던 건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인류는 지금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좀비라는 사상 최악의 적과 겨울을 동시에 맞이하게 되었으니까.
“아, 그리운 마이 스위트 홈.”
야트마학한 산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언제나처럼 나의 멋진 별장과 거점 지정 스킬 덕분에 변한 주변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거점 영역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목재 울타리는 가시 철조망으로 변했고 범위가 훨씬 더 넓어졌다. 내가 아날로그 경보 시스템으로 설치했던 페트병이나 유리병은 모두 제거되었지만, 어차피 곧 치우려고 했던 것이라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다만 특이한 점은 하나 있다면 별장에는 발칸포 대신 12.7mm 중기관총을 탑재한 자동포탑만 여전히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신 1개가 아니라 3방위로 하나씩, 총 3개나 배치되었지만.
‘거점 규모에 따라 자동 배치되는 방위 무기의 종류도 다른 건가?’
단순히 거점의 규모 때문일 수도 있고, 거점의 용도(타입)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활천초는 규모가 큰 것치곤 옥상에만 2개의 발칸포를 자동 배치하고, 퇴역병인 내게는 부비트랩이나 머신피스톨만 주어졌으니까. 지나치게 넓은 장소를 방위하는 무기치곤 밸런스가 영 안 맞는다.
그런 주제에 내 자택은 중기관총을 탑재한 자동포탑만 3개가 배치되었다. 기껏해야 자택 하나를 지키는 것치곤 과한 무장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그렇다면 생산 시설에 해당하는 공장이라던가, 전략 시설에 해당하는 공항, 지하철역 같은 건 전혀 다른 방위 무기가 배치될 수도 있겠네.’
더 대단하고 더 많은 방위 무기가 배치된다면 그런 시설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나아가서 더 많은 사람을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다면 지역 단위로 재건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생활 인프라는 내 스킬이 지속되는 한 무제한으로 제공되니까 식량과 안전만 확보할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한층 더 넓어진 마당에 진입하는 대신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거점창.”
[현재 거점 수 : 2/3]
[현재 거점 방위자 수 : 1/10]
[현재 거점 일원 수 : 3/∞]
[거점 방위 무기(활천초) : 20mm 자동포탑 2개, 9mm 머신피스톨 터렛 2개(원격 배치 가능), 부비트랩 10개(원격 배치 가능)]
[거점 방위 무기(별장) : 12.7mm 자동포탑 3개]
[모든 거점 방위 무기는 배치후 최대 1시간 동안 배치 구조를 변경할 수 없습니다.]
[적성체 자동 요격 기능 : ON]
[외부인 자동 요격 기능 : OFF]
나는 굳이 거점 경보 기록 버튼까지 따로 눌러서 확인했다.
[현재 거점 내에 침입한 적대적 개체 및 외부인 : 0]
다행스럽게도 침입자는 없었다. 설령 있었다고 해도 즉시 알람이 떴을 테니 내가 모르고 넘어갔을 리가 없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내가 거처를 둔 이 마을은 이미 좀비고 사람이고 다 죽어 버려서 텅 빈 유령마을이다. 게다가 내 집 주변은 사태가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배달 기사들을 제외하면 접근하는 사람이 일체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 살기 시작할 때부터 기척이나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기척이나 냄새를 기억한다는 게 다소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겠지만, 5년 내내 야전에서 구른 나는 기척이나 냄새에 상당히 민감하다.
피 냄새, 화약 냄새, 유해 물질 냄새, 누군가의 발자국, 누군가가 일부러 정리한 듯한 흔적 따위를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나곤 했으니까. 자연스러운 배경 속에 감춰진 인위적인 요소는 그만큼 위험했다.
‘내가 양아치 셋을 때려죽인 날은 약품까지 써서 깨끗하게 청소했어. 그날 ‘피 냄새’는 전부 지웠지.’
그런데 스산한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이 희미한 피 냄새는 어째서 내 코를 자극하고 있는 것일까.
또 어째서 산에 있어야 할 풀벌레나 동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지나칠 정도로 고요하다.
‘혈향은 바람을 타고 북서쪽에서 흘러들어오고 있다. 우리 집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야.’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굴려서 북서쪽 언저리에 있는 고지대를 살펴보았다. 등산로가 없어서 나무와 수풀이 적당히 우거진 산비탈이었다.
여름이 되면 벌레가 기승하고, 그놈의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밤이고 낮이고 듣는다. 특히 고라니가 출몰할 때면 그날 잠은 다 잤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곳에 인위적인 요소가 섞여 들어간 것은 어딜 어떻게 봐도 이질적이었다.
‘일단 집으로 달려 들어가면 총알을 채울 수 있다. 그 상태로 집에서 천년만년 농성해도 상관없어.’
요격 대상을 외부인까지 포함시킨다면 자동포탑 3개가 침입자는 확실하게 요격해 줄 것이고, 상대가 그걸 눈치채고 잠복한다고 해도 결국 내가 유리하다. 내 집에는 식량과 따스한 잠자리가 둘 다 준비돼 있으니까. 창문도 셔터를 내리면 내부를 볼 수 없는 구조다.
먼저 심심해서 뒤질 것 같은 놈이 지는 지루한 싸움을 이어 나갈 자신이 있었다.
‘유일한 문제라고 한다면 내가 먼저 포착되었다는 건데.’
기척과 냄새의 변화를 늦게 눈치챈 내 잘못도 있지만, 누군지도 모를 상대가 영리하게 잘 숨었다. 집의 마당과 입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에 자리를 잡은 것도 모자라 수풀과 나무로 위장한 상태다.
제대로 씻지 못한 탓에 미처 지워지지 않은 피 냄새만 아니었더라면 내게 들킬 일도 없었을 거다.
‘나 몰라라 하고 집으로 도망쳐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엄폐하면서 상대에게 돌격해야 하나…….’
권총 탄약은 아직 남아 있다. 체술이나 사격 스킬 덕분에 보정되는 수치를 감안하면 내 대인 전투력은 꽤 괜찮은 수준일 터.
결국 내가 집으로 들어가는 척 하면서 배낭을 벗어 던지고 권총을 뽑으려는 찰나, 상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잠깐만!”
그렇게 외치면서 먼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상대가 수풀 속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 내려오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대는 예상외로 여자였다. 그것도 꽤나 매니악한 사냥용 컴파운드 보우를 들고 있는 운동복 차림의 여성.
“그 이상 들어가지 말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 내가 이 집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저 이상한 총이 날 조준했었어!”
“…….”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집주인이 아니라 자신처럼 떠돌다 이곳을 발견하고 섣불리 들어가려던 떠돌이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집에 불을 켜두고 나왔으니 당연히 집 안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혹시 집주인이 밖으로 나온다면 얘기해 볼 생각으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침입하지는 않았지만 침입하기 직전에 자동포탑이 자신을 겨누는 걸 보고 그대로 물러났던 건가?’
외관에 걸맞는 신중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마당에 발을 들였다. 그러자 반대편 철조망 너머에서 날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괜찮으니까 일단 들어오세요.”
집주인인 내가 직접 잠긴 격벽 같은 현관문을 여는 것까지 본 그녀는 헐레벌떡 철조망을 크게 돌아 입구로 들어왔다.
그녀가 어째서 위험한 자동포탑을 보고서도 사람이 있을 것 같은 고급 별장 근처에서 대기했는가, 그것도 그녀의 외관만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운동복 곳곳에 묻은 핏자국이나 떡진 머리,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얼굴이면 더 설명할 것도 없지. 내 또래의 여성에게 며칠 동안 피칠갑을 한 채 따뜻한 물로 씻지 못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여러 위험 요소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만큼 크게 지쳐 보였다.
내가 궁금해서라도 그녀를 손님으로 맞을 이유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