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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23화 (24/227)

23화 생존기 (23)

난 항상 재미있고 쿨하고 섹시한 남자로 있고 싶다. 줄여서 펀쿨섹.

하지만 이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기괴한 운명을 가지고 있는데, 덕분에 나는 인싸로 시작해서 인싸로 끝날 수 있었던 내 청춘을 홀라당 날려먹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내가 얻은 교훈은 착한 어린이는 절대로 나라를 위해서 한몸 바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간부와 장교, 장성은 병사의 적이라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막상 이렇게 허무하게 나라가 망해 버리니까 좀 빡치네.”

아직 맛보지 못한 배달음식도 많고, 즐기지 못한 유흥도 많고, 보지 못한 미드도 많은데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해서 내가 지금 이러고 있다.

박성호 일행에게는 내게 좀비 던지기를 한 자전거 동호회를 찾아서 복수하겠다는 뉘앙스로 설명하고 나왔지만, 사실 나는 복수보다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동기에 조금 더 흥미가 있었다.

칠성 사이다를 기대했는가? 안타깝지만 내가 줄 것은 나랑드 사이다뿐이다.

그야 혈관에 피 대신 사이다가 흐르는 족속이라면 분기탱천해서 좀비 던지기를 한 놈을 꼭 찾아내 구족을 멸하겠다고 다짐하겠지만, 나는 그 정도로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우선 나라가 망했으니 자전거 정비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놈들이 자전거를 탈 수 없도록 자전거 안장을 뽑아서 브로콜리로 바꿀 것이고, 필요하다면 부품 몇개를 빼 버릴 의향도 있다.

자전거에 미친놈들을 진짜 미치게 만드는 건 자전거를 통으로 훔쳐 가는 것보다 자전거 부품을 몇 개 빼 버리는 것이라고 들었던 적이 있다.

자전거를 통으로 훔쳐 가면 어떻게든 CCTV 추적으로 찾아내서 정상적인 형태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기 때문에, 처음부터 부품 몇 개를 빼 버리는 게 한층 더 깊은 절망을 줄 수 있다나 어쨌다나.

‘내 예상이 맞다면 그 자전거 동호회 놈들도 나와 같은 각성자일 가능성이 높다.’

각성자가 아니면서 위험한 차림새로, 위험한 상황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당장 저 순진한 박성호 일행만 해도 좀비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잡다한 무기로 무장하고,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고작 자전거나 타는 놈들이 무방비하게 운동이나 즐겼을 리가 없다.

내가 퇴역병이었고 그에 걸맞는 직업 스킬과 스탯 보정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 또한 ‘자전거충’이나 ‘자라니’ 같은 직업을 부여받았을 것 같다.

대충 자전거를 타면 지치지 않는 체력 버프 스킬이나 속도 증가 스킬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좀비들에게 물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 쫄쫄이티 차림에 자전거만 타고 나왔던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역시 자전거 동호회와 함께 움직이는 생존자 집단이 있다는 건데…… 위치는 대충 삼안동이겠네.’

활천초등학교에서 위로 올라가면 곧바로 나오는 삼안동. 시내 한복판임에도 꽤 규모가 큰 공장 단지나 연구소 단지가 존재하며, 좀 더 위쪽으로는 각종 마트와 아파트 단지가 존재한다.

만약 내가 김해 시내 한복판에서 좀비 판데믹 사태를 겪은 일반인이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삼안동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주변에 학교도 많아서 숨어 지낼 만한 장소가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제대학교로 피신하지 않고 활천초등학교에 남은 박성호 일행이 이상했던 거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자전거 동호회가 좀비를 바깥으로 끌어내기 전이었기 때문에, 좀비 무리를 뚫고 삼안동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였을 거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그러니까 정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전거 동호회는 매우 높은 확률로 나와 같은 각성자이다.

2. 자전거 동호회는 꽤 규모가 큰 생존자 그룹에 속해 있다.

3. 자전거 동호회가 좀비 무리를 유인한 이유는 생존자 그룹이 물자 확보를 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결론 : 자전거 동호회를 찾아서 조지려면 규모를 알 수 없는 생존자 그룹과 적대해야 한다.

“더러운 인맥빨.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가 열려도 사람 사는 세상은 똑같네.”

단신으로 삼안동까지 올라가서 좀비 무리를 뚫고, 생존자 그룹의 위치와 규모를 파악하고, 생존자 그룹에게 들키지 않도록 자전거 동호회를 조지고, 마지막엔 폭발 엔딩을 등진 채 유유히 빠져나온다?

내가 비록 문예창작을 해 본 적은 없지만 B급 영화 각본을 발로 써도 그것보단 잘 쓰겠다.

재미있지도 않고, 쿨하지도 않고, 섹시하지도 않은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 이 한몸 불사르느니,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서 기회를 엿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내 별장을 꿀꺽하려던 양아치 셋을 쳐죽이고 강에 담궈 버린 것과는 별개로, 자전거 동호회에게선 직접적인 악의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겸사겸사 다른 생존자 그룹에 소속된 이들의 인물상을 파악하는 김에 정보도 좀 얻어 두고 싶었다.

정말로 악질적인 놈들이었다면 단호하게 처단하여 스프라이트를 마실 것이고, 그게 아니었다면 박성호 일행처럼 조건부로 노예처럼 부려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침 삼안동에는 모든 생존자 그룹을 민감하게 만들 만한 무대가 떡하니 준비되어 있지 않은가.

바로 삼방동 우체국 바로 아래에 위치한 홈마트다.

“거점창.”

[현재 거점 수 : 2/3]

[현재 거점 방위자 수 : 1/10]

[현재 거점 일원 수 : 3/∞]

[거점 방위 무기(활천초) : 20mm 자동포탑 2개, 9mm 머신피스톨 터렛 2개(원격 배치 가능), 부비트랩 10개(원격 배치 가능)]

[모든 거점 방위 무기는 배치후 최대 1시간 동안 배치 구조를 변경할 수 없습니다.]

[적성체 자동 요격 기능 : ON]

[외부인 자동 요격 기능 : OFF]

현재 내가 지정한 거점은 별장과 활천초등학교를 포함해서 2개. 임명한 거점 방위자는 1명이다.

여기서 아직 지정할 수 있는 거점 수가 하나 남아 있다는 게 핵심이다. 해당 건물의 법적인 주인이라고 해 봤자 이미 죽었을 게 뻔하니 거점으로 지정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

주요 입구에 터렛과 부비 트랩을 설치해 두면 자동적으로 무력 시위가 된다. 건물 외벽이나 옥상에 20mm 자동 포탑까지 설치된다면 고층 건물인 아파트에서 직접 확인해 봐도 무서워 보이겠지.

한국인은 태생이 전투민족이라 상대방이 띠꺼운 짓을 하면 참질 못한다.

대좀비 아포칼립스 시대가 열리기 전에는 목소리 큰 양반이 무조건 이기고 들어갔지만, 지금이라면 각성자의 유무, 그리고 강력한 스킬의 유무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구조라고 할 수 있겠다.

당장 나만 해도 뛰어난 사격 스킬이나 체술 스킬을 가지고 있고, 일단 거점을 먹으면 그곳에서만큼은 반쯤 무적이 될 수 있다.

각성자는 필시 같은 각성자를 알아볼 테니, 자전거 동호회 놈들이 나와 같은 각성자라면 분명 반응할 것이다.

‘그전에 보급부터 해야겠네.’

홈마트를 집어삼키든 자전거 동호회 놈들을 찾아내서 조지든, 준비가 안된 상태로 달려들면 나만 피볼 게 뻔하다.

그때 좀비를 싹 쓸어버렸기 때문에 활천초 주변에는 더 이상 기웃거리는 좀비가 없었지만, 번화가와 가까워질수록 정확한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좀비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아직도 먼 곳에서 이따금씩 들려오고 있는 총성이나 포성에도 놈들이 크게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빛이나 소음을 감지하는 범위에 어느 정도 제한이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활천초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김해 시내의 모든 좀비가 몰려들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자전거 동호회 놈들이 좀비들을 끌고 다니던 코스를 지도 어플로 확인해 보면, 번화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한적한 주택가를 골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전거의 속도가 꽤 빨랐으니 중간에 자전거 동호회 놈들을 쫓아가다 낙오한 좀비들도 상당히 많았겠지.’

좀비가 지치지 않고 뛸 수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쫓고 있던 표적을 놓쳤다면 그냥 그 지점에서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자전거 동호회 놈들을 쫓아온 좀비들이 ‘고작’ 세 자리수밖에 되지 않았던 거다.

그렇다는 건 처음부터 어느 생존자 집단이 자전거 동호회를 이용해서 조금씩 좀비들을 다른 지역으로 걷어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위험하게 전투를 치르지 않고도 없이 안전지대를 확보할 수 있으니 그들 입장에선 충분히 남는 장사였겠지. 고생한 자전거 동호회 놈들에겐 따로 생명 수당을 챙겨 준다고 가정한다면…….

‘존나 말 되네.’

단순 추측이 아니라 꽤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진다.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가 도래하자마자 나처럼 우연찮게 각성하고, 시스템을 명확히 이해해서, 발빠르게 적응한 사람.

그런 사람이 규모가 큰 생존자 집단을 이끌고 있다는 가정하에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있다면 내 가설은 더 이상 가설로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다행히 주유소 인근에는 좀비가 얼마 없었다.

사태 당일 좀비는 대부분 사람들이 자아내는 비명을 쫓아갔고, 그곳에는 더 많은 비명과 살점, 그리고 총성과 폭음이 뒤따랐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가장 먼저 좀비 사태가 발발했던 구역이 가장 먼저 깨끗해지는 아이러니한 효과를 낳았다.

좀비들의 행동 원리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광경이 펼쳐진 듯했다.

그렇게 사람 하나, 좀비 하나 남지 않게 된 주유소에서 홀로 덩그러니 스쿠터에 기름을 채우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어째서인지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아아, 캬아아아아, 하는 전형적인 좀비의 울음소리.

이쯤 되면 내가 클리셰로 범벅된 소설 속 SSS급 먼치킨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독식하는 회귀자가 아닌가 싶다. 실제로 나한테 상태창이 생기기도 했으니까.

그건 둘째치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던데, 지금 막 좀비 구경이라는 새로운 아포칼립스식 유흥 콘텐츠가 탄생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삼스럽지만 마침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저런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기에, 나는 스쿠터의 기름을 다 채우자마자 곧장 확인하러 나섰다.

좀비들이 떼 지어 건물 외벽을 둘러싸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김해전문장례식장이었다.

“셀프 장례식 치르게 해 달라는 고객님들이셨네.”

저렇게들 서비스를 원하시는데 고객 대우 낭낭하게 해 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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