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22화 (23/227)

22화 생존기 (22)

해가 뜨고 해가 진다는 건 어제의 내가 어떤 빌드업을 쌓았으며, 오늘의 나는 그 ‘어떤’ 빌드업의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은 절대로 뒤로 흐르지 않기에.

그래서 나는 동쪽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볼 때마다 어제의 이승권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곱씹으며, 오늘은 또 어떻게 추한 삶을 연명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우선 어제의 이승권이 저지른 만행부터 곱씹어 보자.

1. 갑작스럽게 등장한 자전거 동호회로부터 좀비 떼를 ‘던지기’ 당했음.

2. 그걸 또 호구처럼 넙죽 받아먹고 ‘이 정도면 이득 아니냐?’고 정신 승리를 했음.

3. 기껏 어렵게 확보한 두 번째 거점에 난데없이 난입한 생존자 그룹(4명)을 받아 줌.

3번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쌉이득이었기 때문에 패스하고.

1번과 2번이 문제다. 어제의 이승권은 더럽게 무능했으며, 더럽게 호구 같았고, 더럽게 고구마만 먹이는 암덩어리였음이 입증되었다.

“일본인 주인공은 가해자에게 복수를 안 하고, 중국인 주인공은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복수를 하는데, 한국인 주인공인 나는 왜 그때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건지 모르겠네.”

“예?”

“아이 씻팔! 깜짝이야!”

“흐앗?!”

학교 옥상에 올라와 20mm 자동 포탑과 함께 끈적하게 붙어서 체온을 나누고 있던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상대도 깜짝 놀랐는지 귀여운 비명을 내질렀다.

지난 1년 동안 ‘나 혼자 잘 먹고 잘 산다’를 찍고 있던 나는, 솔로 사색 모드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게 굉장히 어색했다.

오죽했으면 최근 1년 동안 나랑 가장 오랫동안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이 스팸 전화를 걸었던 김미영 팀장이었을까.

그런 나의 반응에 상대는 작은 체구를 움찔거리며 쪼그라들었다.

여행 동아리원 중 최연희와 함께 여성 맴버에 해당하는 정선혜였다. 궂은 일로 다져진 털털한 여장부 스타일 최연희와 달리 그녀는 조용히 친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소극적 인싸였다.

토끼보다는 적극적이면서 다람쥐 같은 분위기를 가진 묘한 타입이었다. 실제로 체구도 작고 귀여운 인상이었기 때문에 토끼나 다람쥐에 비유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저기…… 그, 희연이가 아침 식사 준비 다 됐다고 해서요.”

“아, 식사요. 곧 내려갈게요.”

파괴된 옥상 문과 계단은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멀쩡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거점창에 로그 같은 것이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 포탑과 터렛의 탄약이 자동 생산되는 것처럼 거점의 내구도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자동 복구되는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인프라가 유지된다는 전제하에 자동 복구가 된다는 것이겠지.’

예를 들어 인프라가 끊길 만큼 심각하게 파괴된다면 해당 거점은 사람의 힘으로 직접 복구하든가, 거점 지정 취소를 해서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이다.

퇴역병의 거점 지정 스킬은 분명 사기적이지만, 그 거점을 보호할 만한 능력이 없다면 끝없이 적들의 습격을 피해 이사를 가야 하는 철새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구석까지 몰리게 되면, 정말로 최후의 보루에서 버티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겠지.

가능하면 많은 거점을 확보해서, 거점의 영역을 넓히고, 거점과 거점을 병합해서 이윽고 나만의 구역을 만들어야 한다. 구역화 작업이 이루어지면 더욱 많은 물자와 생존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

‘그만큼 내가 고가치 표적이 될 테니 집중적으로 위협을 받겠지만, 어차피 그럴 거 감안하고 이 짓거리 하고 있는 거니까.’

우선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지키자. 덧붙여서 현역 시절엔 백두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썼었다.

“캡틴 온 더 급식실!”

급식실 입구 옆에 서 있던 얍실한 인상의 남자가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외치자 거점 방위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누가 보면 미사일 발사 명령이라도 내리러 온줄 알겠네.

“대학생 잼민이 시절 모른다더니.”

피식 웃어보인 나는 미리 준비된 급식판을 받아들었다. 전기, 수도, 가스가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요리를 하는 것 자체는 문제없었던 것 같다.

어제 내가 나눠준 식수(500ml 페트병)는 개인이 들고 다니며 짬짬이 마시라고 소량만 나눠준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콸콸 쏟아져 나오는 수돗물을 끓이거나 정수기 필터로 걸러 마실 것이다.

어젯밤 이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내 거점이 유지되는 한 인프라 걱정은 없을 테니 전기든 수도든 가스든 마음대로 쓰라고 알려 줬을 때는 또 어찌나 놀라던지.

지금쯤 원자력 발전소가 안전 절차에 따라 자동 가동 중지 단계를 밟고 있기 때문에 슬슬 지역 단위로 전력이 공급되지 않는 상황이다. 태양광, 수력, 풍력, 지력 발전만으로는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겠지.

급식판을 들고 인싸 무리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더니, 역시나 이들은 밥을 먹는 와중에도 입을 쉬는 법이 없었다.

“성호 오빠, 밥 다 먹고 나면 급식실 식자재 창고 정리 좀 도와줘. 전기가 끊겨 있는 동안 상한 음식이 좀 많더라고. 그거 싹 다 버리거나 묻어야 해.”

“비료로 쓸 만한 건 따로 모아서 갈아 버린 다음 물기 빼고 마른 재료랑 섞어서 발효시키면 되겠네. 마침 여기 학교니까 적당한 땅 골라서 관리하면 밭을 일굴 수 있을지도 몰라.”

“땅에 심을 종자 같은 건 어디서 구하게?”

“그건…… 농협 마트?”

“형, 나중에 적당히 농가 몇 개 털면 씨 종자쯤은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침 가을이라서 종자 비축해 둔 농가가 좀 있을 것 같은데.”

“그거 괜찮네.”

커뮤니케이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미스터 승권 Lee?

인싸들은 뭘 하는 와중에도 입은 절대 쉬지 않는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떠드는 주제가 심히 아포칼립틱(Apocalyptic)하지만 중요한 건 끝없이 누군가와 교류한다는 점이다.

자칫 심적으로 피폐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서로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신경 쓰며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사실 꽤 건설적인 행위였다.

‘나도 6년 전에는 친구들과 항상 이러고 다녔다고 하면 다들 안 믿겠지.’

특히 신검 받고 군 입대가 가까워질수록 노래방과 술집이 내 안방이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좀 더 멍청하고 비현실적인 얘기나 늘어놓고 있었다는 점이 이들과의 유일한 차이점이리라.

“그래서 대장은…….”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여기가 내 거점인 건 맞지만 그런 걸로 눈치 볼 필요는 없으니까.”

물론 당연히 내가 남들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긴 내 거점이고 내가 군주니까. 내가 곧 법이자 진리요, 빛과 소금일지니. 누가 나의 권력에 대적하려 든단 말인가?

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 법.

“어, 그럼 우리보단 나이 많으신 것 같으니까 편하게 승권 오빠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럼 저도 편하게 부르는 걸로…….”

“형님으로 부르겠슴다. 흐흐.”

“이왕이면 승권 오빠도 말 편하게 해 주세요.”

“……그럴까?”

역시 인싸들답게 친화력이 남다르다고 해야 하나. 나와 급격하게 거리를 좁히려는 모습에서 희미한 광기가 느껴질 지경이다.

나만 모르는 인싸경전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통성명을 나눈 순간부터 친구, 형제자매, 최종적으로는 도원결의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라도 쓰여 있나?

“흠흠, 그래서 형님은 오늘 뭐 하실 거예요? 저흰 오늘부터 학교 돌아다니면서 물자 확보하고 교실 정리해서 창고도 만들 생각인데.”

박성호의 옆에 앉은 싹싹한 인상의 남성, 조금 전에 내게 캡틴 온더 브릿지 드립을 친 전현석이 질문을 던졌다.

“어제 자전거 타고 다니던 정신병자 집단에게 좀비 던지기를 당해서 주변을 좀 둘러보려고.”

“……이런 상황에 자전거를 타고 다녀요?”

“타고 다니더라고. 그것도 싸이클 쫄쫄이까지 제대로 차려입고.”

잠깐 스쳐지나간 인연들이긴 했으나, 난 정말로 그놈들이 미친놈들인 줄 알았다.

나는 좀비에게 물릴 것까지 감안하고 두꺼운 옷에 박스까지 덕테이프로 감아서 집을 나섰는데, 그놈들은 소위 말하는 쫄쫄이 옷을 입고 미친 듯이 패달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전거를 타는 데 두꺼운 옷이 방해되는 건 사실이니까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인 복장으로 당당하게 시내를 돌아다닐 줄 누가 알았겠나.

어쩌면 좀비들에게 자신들의 탄탄한 말벅지를 보여 주고 싶었던 변태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던지기를 당했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좀비들한테 어그로 끌린 상태에서 무책임하게 어그로 떠넘겼다는 얘기 아니야? 그래서 어제 좀비들 엄청 많이 죽이셨다고 했잖아.”

“아아, 그래서 ‘던지기’구나.”

“그거 순 미친 놈들이네. 사실상 살인 미수 아냐?”

“자전거에 미쳐 사는 인간들치고 정상은 없다던데…….”

“괜히 자라니 라고 불리겠어? 도로 위의 암덩어리라니까.”

크! 바로 이거지!

내가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무형의 안정감을 얻는 것 같은 느낌.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느끼는 소속감이다.

제3자의 입장일 땐 그렇게나 띠꺼웠던 것이, 막상 내가 겪게 되자 팔이 안쪽으로 굽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공감! 연대! 지지! SNS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벌써 새벽 갬성 뽕으로 가득 찬 글 한 줄 올리고도 남았다.

날 대신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욕해 주고, 날 위로해 주고, 날 격려해 주는 사람들. 인간 이승권이 시원하게 똥 한판 때리고 와도 일단 박수부터 쳐줄 사람들!

‘이 맛에 친목질 하는 거구나.’

내일모레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틀딱 이승권은 대학 새내기 시절을 벌써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다. 어떤 의미에선 이 또한 신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 혹시 도시락 필요하세요? 요리하던 거 좀 남았는데.”

오늘의 급식을 책임지신 최연희 영양사님께서 엄마 손맛 수제 도시락이 필요하시냐고 아뢰셨으메, 이 비천한 틀딱 모쏠은 황송함에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만 끄덕였다고 하더라. 아멘.

“챙겨 주면 고맙지. 솔직히 오늘 나가면 내일쯤에나 돌아올 수 있을 것 같거든.”

소총 탄약이 다 떨어졌고, 스쿠터 기름도 채워야 한다. 어제 내게 던지기를 한 자전거 동호회의 흔적도 찾아야 하고, 겸사겸사 좀비를 처리하면서 인근 지역 수색도 해야 한다.

분명 내 인생 최대 목표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불가역적이고 완전무결한 휴식이었는데, 어느샌가 할 일이 산더미처럼 불어나 버렸다.

박성호 일행을 거점 방위자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먹여 살려야 할 입이 4개나 늘어나 버린 건 덤이니, 거점이 안정화되기 전까지 이들에게 가져다줄 물자도 확보해야 한다.

내 집에 쌓아 둔 걸 무턱대고 갖다 줄 수는 없으니, 인근 마트나 편의점을 뒤져서 그때그때 얻은 것을 가져다줘야겠지. 인벤토리 기능을 이용하면 수송 자체는 어렵지 않을 테니 수색 활동에 포함시키면 된다.

‘게다가 분위기 좋은 남녀들끼리 있으니, 서로 눈이 맞으면 이 삭막한 시대에도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를 김해 군주로 떠받들어 줄 백성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며 고슬고슬한 밥을 김치찌개에 말아 후르륵 넘겼다. 한국인의 아침은 쌀밥과 찌개로 시작한다는 공식을 잘 지킨 한 끼였다. 음식점을 하던 부모님 아래에서 요리를 배웠다는 게 구라는 아닌 모양이었다.

식사를 끝마친 나는 박성호 일행이 각자 할 일을 하러 흩어지기 전, 어젯밤에 미처 말하지 않았던 한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혹시 다른 생존자나 집단이 접촉해 온다면 일단 의심부터 해. 딱 봐도 안전해 보이는 거점에 순해 보이는 대학생 4명만 있는 꼴을 보면 급발진해서 거점을 빼앗으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이곳으로 피신 오는 사람은 전부 거절해야 하나요?”

최연희의 당연한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행색이 초라하거나, 좀비나 다른 범죄자들에게 쫓기고 있는 사람만 일단 받아 줘. 그리고 외부인을 받아 줬다면 반드시 2인 1조로 감시를 해. 그 외에 수상해 보이는 놈들은 전부 터렛으로 겁을 줘서 쫓아내 버려.”

“혹시 군인이나 경찰이 접근해 오면…….”

“화력으로 밀릴 것 같다 싶으면 일단 받아 줘. 그땐 내가 돌아와서 직접 처리할 테니까. 다만 일반인이 총기나 흉기를 들고 폭력적으로 나온다면 터렛이나 옥상의 포탑을 수동 조작해서 직접 처리해.”

거점 방위자들은 거점 방위 무기를 수동 조작해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덧붙여서 사각지대마다 배치해 둔 부비트랩은 외부인 살상 모드를 ON으로 설정해 뒀기 때문에 몰래 침입하려는 놈들은 얄짤없이 폭사할 것이다. 좀비는 말할 것도 없고.

장비와 도시락을 챙긴 나는 교문 앞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스쿠터를 일으켜 세웠다.

“사이다 마시고 오는 동안 학교 잘 지키고 있어라.”

내가 뿌린 고구마 전개를 수확해야 할 시간이 왔다.

아니면 최소한 그럴 떡밥이라도 뿌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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