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생존기 (21)
최초의 생존자 그룹과 조우하자마자 대뜸 여긴 내 영역이니 오늘부터 허락받고 지내라고 말한 뒤 면접을 보자고 말한 이유는 정말 별것 아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생존자 그룹은 대체 어떤 시선과 가치관으로 이 괴현상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 자신들이 이런 험난한 시대에서 살아남기에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저들 모두 거점 방위자로 받아 줘도 상관없겠지.
이 넓은 학교에서 혼자 생활하고, 혼자 관리하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니까. 그러니 저들에게 ‘임대’해 줘도 딱히 내가 손해 볼 것은 없다.
하지만 옛말에 따르면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법이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저들이 내 집을 습격하고 집주인을 살해하려던 그 양아치 놈들 같은 짐승인지, 아니면 최소한의 상식과 예의를 갖춘 사람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냥 반 정도는 호기심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똑똑똑.
“박성호입니다.”
“들어오세요.”
교장실 의자에 편히 앉아 있던 내가 그리 답하자, 곧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자신을 박성호라고 밝힌 생존자 그룹의 실질적 우두머리인 남자였다.
“역시 제가 처음인 게 나은 것 같아서 먼저 왔습니다.”
“자신감이 남다르시네요. 일단 앉아 보세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접객용 소파에 앉힌 나는 배낭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잽싸게 생수를 받아든 그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내가 또 다른 생수를 꺼내 마시자 자신도 따라 마셨다.
“면접이라고 해서 고민 좀 했을 것 같은데, 사실 별것 없어요. 그냥 그쪽 일행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을 뿐이거든요.”
“그…… 혹시 면접에서 떨어지면 정말로 여기서 나가야 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껄끄러운 사람을 자기 집에 들여놓는 바보는 없으니까요.”
“저, 저희 애들은 모두 착한 애들입니다! 여행 동아리라서 서로 단합도 잘 되는 편이고, 돈이나 이성 관계 문제로 다툰 적도 없습니다.”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니까 의심할 필요는 없다?”
박성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필사적인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건 없어요. 겉보기엔 순박하고 불쌍해 보이는 사람도 갑자기 갓난아기로 위장한 폭탄을 우리 사이에서 터뜨릴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그랬던 적도 있고.
“조금 전에 제가 건넨 물을 그냥 마셨죠? 왜 그랬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총 들고 위협하는 사람이 건네준 물은 안 마시는 게 정상인데.”
“그쪽도 똑같은 걸 마셨으니까…….”
“그거랑 이거랑 똑같은 물이라는 증거는?”
“…….”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믿어도 된다, 믿을 만한 상황이니까 믿어도 된다.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 문제가 되는 거라고요. 정작 중요한 순간에선 판단력이 흐려지고 결단이 늦어지기만 할 테니까.”
“하지만 보통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특히나 우리 동아리 애들처럼 가깝게 알고 지낸 사이라면 더더욱…….”
“지금 이 세상 어디에 ‘보통’이 있는데요?”
내 반문에 그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금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렸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정 때문에 하나하나 챙기다 보면 큰일 난다는 의미…… 입니까?”
“큰일만 날까요? 다 같이 좆되겠죠. 드라마나 영화 좀 봤죠? 이런 시대에선 도덕이나 윤리, 예의범절부터 따지는 놈들이 가장 먼저 골로 가요. 그러니까 감성적으로 나서지 마세요.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적절한 답을 찾아보세요. 힌트를 좀 드릴까요?”
“……부탁드립니다.”
“그쪽이 제게 먼저 해야 할 말은 ‘우리 애들은 다 착하니까 이 거점에서 지내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우리 애들은 분명 어딘가 써먹을 구석이 있을 테니 이 거점에서 지내게 해 주세요’가 돼야 해요.”
박성호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직 멀었지만.
“거기서 그칠 게 아니라 본인의 입장도 생각하세요. 본인이 생존자 그룹을 이끄는 실질적인 리더다? 그렇게 생각해서 모두를 대표해 나섰다면 그에 걸맞는 준비를 해야죠. 대기업 취업 문턱을 넘는 비결 중 하나가 자기 PR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자신이 이끄는 생존자 그룹을 상대가 받아들여 주면 단기적, 장기적 관점에서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교섭 재료로 삼을지 생각해야죠.”
“……아무리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다지만 동료들에 대한 제 가치관을 그렇게 싹 바꾸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요, 바로 그거라고요. 자기주장! 우리 애들 착해요 라고 말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낫구만! 잘 하면서 왜 그러실까?”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작정 나대는 놈과 필요할 때마다 적절하게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최소한 그런 사람은 상황을 볼 줄 아는 넓은 시야와 적절한 자기주장을 펼치기 위한 사고력,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배팅을 할 수 있는 담력이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
나는 못난 놈들까지 하나하나 다 떠먹여주면서 불필요한 것을 버릴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 그런 이들의 심성을 이용해 무임승차하는 베짱이들은 필요 없다.
항상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스스로 생각하고, 양심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 최소한 ‘사람’이기만 하면 되는 거다.
“당신이 동료들을 믿는 만큼, 동료들 또한 당신에게 행동으로 신뢰를 보여 주겠죠. 이제 나가 보시고 다음 사람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럼 저는 여기 머물러도 되는 겁니까?”
[‘박성호’를 거점 방위자로 지정하시겠습니까?]
[Y/N]
“자진해서 나서는 인재를 마다할 이유는 없죠.”
[최초로 거점 방위자를 지정하였습니다.]
[모든 거점 방위자는 수동으로 방위 무기를 조작할 권한이 있으며, 그들이 처리한 적성체의 DNA 샘플은 모두 퇴역병에게 전달됩니다(경험치는 50% 분배).]
[모든 거점 방위자 및 거점 일원은 아군간의 교전이 불가능하며 거점에 피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또한 특정 스킬이나 아이템을 보유 시 거점의 내구도를 회복시키거나 일부 개조가 가능합니다.]
[당사자가 거점 방위자 신분을 포기할 경우, 혹은 비인도적 행위로 자격을 상실할 경우 즉시 적성체로 간주됩니다.]
[퇴역병이 직접 거점 방위자 지정을 취소했을 경우 외부인으로 간주됩니다.]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인 그는 교장실을 나가자마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동료들을 차례차례 들여보냈다.
박성호의 말대로 정말 여행 동아리원들은 딱 평균적인 보통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나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에 띌 만큼 선인도 아닌, 언뜻 보면 그냥저냥 착하게 보이는 사람들.
남자들은 대체로 인싸 기질이 다분한 활동적인 인물들이었으며, 여자들은 그런 남자들에게 맞춰 주는 누나 같은 타입이었다.
박성호에게서 내가 자기주장을 할 줄 아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 들은 모양인지,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떤 각오로 도움이 되겠다는 등의 포부를 늘어놓았다.
동아리원 4명 전원 아옷도어파였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기본적인 노숙 생활, 요리, 간단한 보수 작업 정도는 할 줄 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기야, 직접 차를 몰고 다니면서 야산이나 강가에서 캠핑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 정도도 못 하는 게 이상하다.
‘이런 사람들은 적절하게 보상만 해 준다면 우직하게 자기 할 일 잘 하는 편이지. 거점에 박아 두면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거점 관리 정도는 알아서 해 줄 거야.’
기본적으로 질서와 법치, 그리고 평화와 안정을 사랑하는 부류이기 때문에 안전한 거점과 생활 인프라, 식량을 제공해 주면 훌륭한 노동력이 되어 줄 것이다.
혹여나 등 따뜻하고 배가 불러지면 다른 생각을 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땐 내가 직접 처리하면 된다.
사람들과 반목하기보단 친목을 도모하려는 인싸들이라,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내몰리지 않는 한 어지간해선 범죄를 저지를 일도 없을 것이다.
특히 자진 참여와 노동이 중심이 되는 캠퍼들의 특성상 동료들에게 무임승차 하는 걸 굉장히 미안해할 게 분명하다. 서로 얼굴 붉힐 일 없게끔 본인들이 먼저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려고 노력하겠지.
가능하다면 굳이 내가 시키지 않아도, 협박하지 않아도, 저들이 자연스럽게 조직으로 시작해 대규모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복구하게끔 만들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하는 건 존나 귀찮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성호 일행은 거점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거점창.”
[현재 거점 수 : 2/3]
[현재 거점 방위자 수 : 1/10]
[현재 거점 일원 수 : 3/∞]
[거점 방위 무기(활천초) : 20mm 자동포탑 2개, 9mm 머신피스톨 터렛 2개(원격 배치 가능), 부비트랩 10개(원격 배치 가능)]
[모든 거점 방위 무기는 배치 후 최대 1시간 동안 배치 구조를 변경할 수 없습니다.]
[적성체 자동 요격 기능 : ON]
[외부인 자동 요격 기능 : OFF]
저들을 이곳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으니, 이참에 이곳의 방위에 대해서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부비트랩은 거점에 몰래 들어오려는 범죄자들과 좀비가 노릴 만한 길목에 집중적으로 설치해 두는 게 좋겠지.’
학교 부지를 나타내 주는 자그마한 미니맵에 부비트랩을 드래그해서 옮기면 원격 배치가 가능한 심플한 구조였다.
학교 본관 옥상의 자동 포탑의 사각지대, 그리고 상대적으로 방위가 부실한 후문에 집중적으로 설치했다. 혹시나 이곳이 재차 습격당하더라도 절대 쉽게 함락당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신경썼다.
거점의 대략적인 정리를 끝낸 나는 교무실에 옹기종기 모여 앞으로의 생활 방식과 규칙에 대해 논의 중인 일행에게 다가갔다.
이들은 오늘부터 나의 충실한 일꾼이 되었기 때문에 K-전제군주제에 따라 할당량만큼 일일 노역을 해야 한다.
이것이 권력. 나는 즐겁다.
“다들 오늘부터 이곳에서 머무르게 될 텐데, 미리 역할을 정해 두죠. 야간 경계는 기본적으로 2인 1조 기준 3교대제로 하고, 평시에는 학교에 있는 자재를 이용해서 거점 보강에 힘써 주세요.”
그때 박성호가 모범생처럼 질문을 던지고 싶어 안달난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혹시 거점 보강 외에 우리가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식량이나 무기를 구해 온다던가…….”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말 안 했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서 그들 앞에 충분한 양의 식량과 식수를 꺼내 놓았다.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쏟아져 내리는 식량과 식수 더미에 일행이 기겁했다.
그들은 못 볼 것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바닥에 쌓여 있는 물자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이 시점에서 이들은 나와 같은 각성자가 아닌 것이 확실해졌다.
“이건 대체?!”
“제가 저 터렛을 꺼냈던 것처럼 가지게 된 특수 능력 중 하나인데, 아무래도 이 중에 ‘각성자’는 없는 것 같으니까 설명은 생략할게요. 상식적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말도 안 되는 현상이라서.”
“우리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무슨 마법도 아니고…….”
진짜 마법이었다면 진즉에 내 영혼을 7개로 찢어서 각기 다른 물건에 보관했겠지. 그리고 스스로를 ‘이름을 말하면 안 되는 자’로 칭하면서 동네 일진 놀이나 했을 거다.
이건 판타지스러운 마법이라기보단 초고도 문명의 위대한 기술 같은 느낌이다. 둘 사이에는 정통 판타지와 SF만큼 큰 차이가 있다.
“쉽게 생각하세요. 제가 하숙집 주인이고 여러분들은 하숙생이에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노동력(월세)을 받으면서 생존에 필요한 최저한의 생계를 보장해 주는 거죠. 최저임금 받으면서 건물 관리해 준다고 생각하면 편해요.”
“저, 저희야 환영이죠!”
무어라 말하려던 박성호를 제치고 앞으로 나선 장발의 여성은 자신이 요리 하난 끝내주게 잘한다고 어필했던 최연희였다. 양친이 함께 음식점을 해서 어릴 때부터 요리를 배웠다나 어쨌다나.
부모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조금 씁쓸한 표정이었지만, 믿을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정신적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물이기도 했다. 이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여기 급식실도 있으니까 재료만 있으면 책임지고 맛있는 한 끼를 만들 수 있어요!”
“그럼 다른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전제하에 최연희 씨가 알아서 관리하세요. 식량은 매주마다 일정량 지급해드릴 테니까. 너무 아끼지도, 너무 낭비하지도 마시고요.”
극한 상황에서 음식으로 사기 관리를 하는 건 꽤 중요하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막상 내가 마구 퍼주기만 하는 호구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이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포석이다. 정확히는 저들이 아래고, 내가 웃대가리라는 선을 긋기 위한 정리.
만약 웃대가리가 아무것도 안 주고 죽어라 일만 시킨다면 누구라도 붉은 혁명이 마렵지 않겠는가? 설령 내게 죽창을 찌를 수 없다고 해도 차라리 이곳을 떠났으면 떠났지, 끝까지 날 위해 움직여 주진 않을 것이다.
짜증나는 웃대가리의 명령을 수행하고 소소한 보상을 받는 행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래퍼토리 아닌가?
-나는 너희들이 할 일만 잘 하면 터치 안 하는 거 알지? 주말에 쉴 땐 쉬더라도 청소랑 일광건조는 다 하고 쉬어라.
그러니까 빌어먹을 간부들에 비하면 난 굉장히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거다.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이승권! 넌 여전히 섹시해!
“기본적으로 항상 2인 1조로 움직이세요. 이 투박한 학교를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꾸시고, 그러는 김에 창고도 몇개 만들어서 물자나 자재별로 정리해 두세요.”
“좀비들이 오면 저희가 나서야 합니까?”
“옥상이랑 후문에 있는 포탑과 터렛이 대부분 알아서 해 줄 테니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나설 필요 없어요. 부비트랩도 몇개 깔아 놨으니까 혹시 좀비들이 좀 많이 몰려온다 싶으면 적당히 간 보다가 빠지세요. 사람 목숨이 더 귀한 법이잖아요?”
언제든지 지정과 취소가 가능한 거점이 대체 불가능한 노동력보다 더 귀중할까? 그럴 리가.
요즘 같은 시대엔 이런 충성스러운 노동력이 더 귀하다. 그러니까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써야지. 마른 걸레를 쥐어짜내서 물 한 방울이라도 얻을 작정으로.
이들의 대략적인 역할과 생활 양식을 지정해 주니, 지배당하길 좋아하는 어리석은 백성들답게 그들은 나에 대한 명칭을 ‘대장’이라고 정하며, 절대 군주 이승권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왜 정치인들이 권력에 죽고 못 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