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생존기 (20)
후문을 통해 달려들어온 4인 그룹이 철조망과 구덩이를 피해 본관 건물로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꽤 익숙하게 문을 따는 걸 보니 이곳에 몇 번 방문했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저쪽 일행의 모습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후문 바리게이트에 9mm 머신 피스톨 터렛을 설치했다.
9mm 머신 피스톨 터렛은 대충 007 가방을 넓게 펼친 것 같은 형태와 크기를 자랑했다. 넓게 펼쳐진 받침대가 탄통과 피스톨을 고정시켰으며, 아담한 총구가 삐익삐익 소리를 내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9mm 머신 피스톨 Lv.1]
[현재 잔여 탄약 : 100%(500/500)]
[탄약 1% 재생성에 소모되는 시간 : 1분]
[적용되는 스킬 : 거점 지정(D-), 거점 경계 강화(E), 거점 방어 강화(E), 최후의 보루(A+)]
[현재 전력이 정상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의 : 전력 공급이 중단되면 탄약이 재생산되지 않습니다.]
[주의 : 자동포탑의 내구도가 50% 이하로 떨어질 경우 ‘파괴’됩니다. 1회용 수리킷으로 수리 가능.(도구 제작 스킬 필요)]
[주의 : 거점 범위 바깥의 존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휘유~”
탄약의 대용량 휴대가 용이한 9mm를 저 작은 머신 피스톨 터렛이 무려 500발이나 가지고 있다는 건가. 레벨 1 터렛인 것치곤 상당히 좋은 기능이었다.
탄약 재생산 속도도 발칸포에 비하면 훨씬 더 빠르지만, 내구도가 50% 이하로 떨어지면 기능 정지가 아니라 파괴가 된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이제 남은 건 9mm 머신 피스톨 터렛의 성능을 확인하면 끝이다.
“끼이이이이이!”
학교 부지 바깥의 도로를 쭉 내달려 가장 먼저 도착한 좀비에게 얌전히 들어온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가시 철조망을 향해 냅다 몸부터 던지는 모습이 A급 스턴트맨을 방불케 했다.
덕분에 날카로운 가시 철조망에 몸이 걸리자 살갗이 거칠게 찢어지면서 검은 핏물을 왈칵 쏟아 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다른 좀비들도 연이어 나타나 철조망과 바리게이트에 몸을 처박기 시작했다.
버려진 차량을 타넘어 오는 놈들처럼 자신들의 동료를 짓밟고 뛰어오는 기회주의적인 좀비도 있었으나, 그러한 돌파 시도는 터렛에 의해 간단하게 저지당했다.
드르르르르르륵!
발칸포나 소총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한 총성이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격언을 당당하게 선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100, 200발을 퍼붓더니, 후문에 몰려든 좀비 수십 마리를 처치하는 데 무려 300발 넘게 퍼붓는 기염을 토해 냈다. 고작 몇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탄약 재생산 속도가 빠른 이유가 있었구만.’
터렛이 9mm 탄을 폭풍처럼 쏟아붓고 남은 것은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학교 후문이었다. 본래 머리를 노려야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좀비들인데, 9mm 머신 피스톨은 머리고 나발이고 그냥 폭력적인 화력을 쏟아붓는 것에만 집중하는 몰빵 타입이었다.
저지력이 대단하지만 그만큼 탄약 소모도 심하기 때문에 주 화력으로 사용하는 것은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칸포처럼 한 발 한 발의 위력이 강하지 않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예를 들어, 내가 소총이나 기관총을 사용하고, 정면에 터렛을 박아 둔 채 대규모 방어전을 벌인다면 어떨까?
터렛은 매우 효과적으로 주변에 탄을 흩뿌리며 좀비들을 저지할 것이고, 나는 터렛이 꼼꼼하게 처리하지 못한 좀비들의 머리통을 하나씩 따면서 수월하게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다음부터는 그렇게 운용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후문 근처에는 부비트랩을 3개 정도 설치해 두었다.
부비트랩은 가까이 접근하거나 강한 충격을 주면 자동적으로 폭발하는 대인 지뢰였다. 부비트랩 또한 외부인 요격을 별도로 ON/OFF 할 수 있었다.
‘부비트랩은 소모 시 하나당 재생산 시간이 1시간이고, 폭발 범위는 반경 3m인가.’
사실 부비트랩의 용도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고화력보다, 매우 더럽고 치사한 방식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게 목적이다.
아군이 건드릴 수밖에 없게끔 아군 시체에 대인 지뢰나 수류탄을 박아 둔다던가, 섣불리 연쇄폭발을 유도시켜 제거하려들면 생화학 독가스를 내뿜는 생화학탄이라던가.
국군이 북한 전역에 존재하는 땅굴을 전부 처리하는 데 자그마치 5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하 도시에 처박혀서 작정하고 존버만 외치던 놈들이었으니까.
어쨌든 42마리의 불쌍한 좀비 떼는 모두 DNA 샘플이 되어 내 지갑으로 들어갔다. 혹시 몰라 인벤토리를 살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희귀하다는 설계도 역시 한 장 획득한 참이었다.
[소독 붕대 설계도(E)]
[필요 스킬 : 도구 제작 or 의약품 제작]
[필요 재료 : 깨끗한 천 or 붕대 + 소독제 + 테이프]
[예상 결과물 : 소독 붕대(E)]
[예상 효과 : 상처 오염 예방 및 경미한 상처 치료 효과]
[TIP : 거점창을 이용해 통제 중인 거점에서 물자(재료)를 자동으로 노획하여 즉시 조합할 수 있습니다. 즉시 조립한 아이템은 자동적으로 인벤토리에 저장됩니다.]
“오.”
하나를 알면 두 가지 정보를 더 물어다 주는 시스템의 열일에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멍청한 상태창이라고 꼽을 줬던 것이 제법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사람이든 짐승이든 상태창이든 갈궈야 말을 듣는다니까.
이번에야말로 상황 정리가 확실하게 끝나자 드디어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쉬기 전에 내 거점에 무단으로 침입한 외부인들과 얘기를 좀 나눠 봐야겠지만.
‘오랜만에 내 또래랑 얘기하려니까 괜히 찝찝하네.’
옥상 출입구는 수리하기 전까지 당분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내린 탓에 하는 수 없이 짚라인을 걸고 아래로 내려왔다.
수백 마리 좀비의 습격에 1층은 난장판이 됐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내가 거점으로 지정하는 것과 동시에 리모델링 작업을 거치면서 말끔한 새 건물로 변한 상태였다.
페인트를 칠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외벽이나 손때 하나 묻지 않은 투명한 유리창, 광이 번쩍이는 매끈한 복도까지. 누가 보면 아예 새로 학교를 지은 줄 알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1층 교무실에서 예의 4인 혼성 생존자 그룹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봤냐?! 갑자기 이상한 총이 하나 생기더니 좀비 떼를 싹 쓸어버린 거!”
“지금도 있어. 저거 빙글빙글 돌면서 자동으로 감시하는 것 같은데?”
“우리랑 마주칠 때마다 삐익! 소리내는데 이러고 있으면 큰일 나는 거 아냐?”
“우릴 공격할 거였다면 벌써 했겠지.”
“이 학교는 우리가 먼저 발견해서 숨어 지내고 있었잖아. 그런데 저건 어디서 갑자기 솟아난 건지 모르겠네.”
“갑자기 거대한 돌담이 생긴 것도 그렇고, 없던 바리게이트나 철조망이 깔린 것도 이상해. 그렇다고 군 부대가 왔다기엔 너무 조용하고.”
저 혼자 후문 바리게이트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9mm 머신 피스톨 터렛을 신기한 동물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대뜸 교무실 문을 박차고 들었다.
남자는 박력!
* * *
“이 몸, 등장.”
그렇게 말하며 교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한 남성이 있었다.
한 손에는 경찰들이나 사용할 법한 .38 구경 리볼버 권총을 든 청년은 말없이 자신들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반응한 박성호가 일행을 뒤로 제치며 앞을 막았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
인근 대학교에서 여행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는 박성호는 평소처럼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지만, 동시에 앞으로 나선 것을 조금 후회했다.
그 기괴하고 끔찍한 좀비들로부터 동아리원들을 지키기 위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건만, 자신보다 조금 더 연상으로 보이는 청년 앞에선 알량한 용기마저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가을용 재킷과 청바지 차림이라 체격의 세세한 부위까지 살피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들은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자신감이 넘쳐나는 법이다. 그것이 일종의 오오라처럼 주변을 잠식한다. 헬스장 트레이너가 빵빵한 근육을 자랑하며 접근하기만 해도 무심코 압도되는 것처럼.
사실 그런 것은 다 제쳐 두고서라도 박성호가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 것은 상대방의 눈이었다.
닳을 대로 닳은 탓에 색채를 잃어버린 눈은 정말로 같은 인간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생기가 없었다. 마치 인간의 얼굴에 인형의 눈을 박아 둔 것 같았다.
‘저런 눈을 한 사람들을…… 어디서 봤더라.’
만사가 귀찮고, 잃을 게 없고, 자신들의 인생이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부류. 지하철역 근처에서 볼 수 있는 노숙자들과 비슷한 눈이었다.
‘총을 들고 있으니 섣불리 자극하지 말자.’
설마 다짜고짜 총으로 사람을 쏴 죽이는 미친놈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박성호는 동아리원들에게 눈짓으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신호를 주었다.
평소에도 그를 믿고 따르는 동아리원들은 조용히 뒤로 물러섰고, 박성호가 그들을 대변하듯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섰다.
“갑작스럽지만 오해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 저흰 사태가 터지자마자 이 학교에서 숨어 지내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인제대학교 다니고 있는 1학년, 2학년들인데 사태가 벌어진 당일에 시내에서 놀고 있다가 급하게 여기로 숨어들어온 겁니다.”
“예, 그래 보이네요.”
“……선선하게 믿어 주시네요?”
“미필이잖아요? 그럼 대학생 1, 2학년 맞겠죠 뭐.”
미필인 건 맞지만 박성호를 포함한 남자들은 이미 신검을 끝마치고 입대까지 얼마 안 남은 상황이었다. 제발 북한 땅에 가서 복무하는 일만 없기를 바란다면서 함께 술이나 퍼마시고 있던 신세였다.
그런데 상대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어조로 미필이라는 점을 지적하자 조금 의아했다.
군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대학 선배들이 1, 2년 전쯤에 반강제적으로 입대했다. 때문에 2학년인 박성호가 얼떨결에 동아리 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체격이나 분위기로 꿇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미필인지 어떻게 아셨어요?’ 같은 질문을 던질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지금 눈앞에 있으니까.
“여긴 저희가 3일 전부터 쓰고 있던 피난처인데, 혹시 그쪽은 뭐 하러 여기에 오셨는지……?”
“어떤 미친 자전거 동호회 놈들한테 좀비 던지기 당해서 여기로 도망쳐 왔죠. 여기서 싹 쓸어버린 참에 마침 그쪽 일행이 학교 후문으로 들어오는 걸 봤고요.”
“혹시 여기서 굉장히 시끄러운 총성이 울려 퍼졌던 건……?”
“좀비가 워낙 많이 밀려와서 처리하는데 애 좀 먹긴 했죠.”
“아, 감사합니다. 총도 있으신 걸 보니 거짓말 같지는 않고…… 어떻게, 저희 거점에서 며칠 쉬시다 가시겠습니까?”
갑자기 학교 전체를 감싸는 돌담은 어떻게 생겼는지, 저 이상한 총은 어디서 났는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일단 참았다.
자연스럽게 상대를 손님처럼 대접해서 호감부터 사야겠다고 생각한 박성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과 마주했다.
“아,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오늘부터 여긴 그쪽 일행 거점이 아니라 ‘제’ 거점이에요. 제게 법적인 소유권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문자 그대로 제 거점이에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혹시 좀비를 처리해 줘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으신 거라면 다른 건물을 쓰셔도 저희는 딱히 상관없…….”
“그게 아니라 이 학교 부지 전체가 제 거점이라고요. 시스템적인 소유권이 있어서.”
“…….”
뭐지 이 미친놈은?
“그러니까 그쪽 일행이 여기서 머무르려면 오늘부터 제 허락을 받아야 해요.”
대뜸 폭탄 선언을 한 청년은 허공에 손을 휘휘 젓는 듯하더니, 바깥에 배치된 것과 똑같은 이상한 총을 갑자기 허공에서 꺼내 들었다.
이내 업무용 책상 위에 설치된 이상한 총이 박성호 일행을 겨누며 삐이! 삐이! 하는 불길한 소음을 자아냈다.
“그러니까 면접을 보죠. 자기는 여기서 꼭 살고 싶다, 이 거점에서 꼭 필요한 인재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부터 옆방으로 오세요.”
그가 가리킨 곳은 교무실과 연결된 교장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