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생존기 (19)
그 20mm 발칸포라니. 심지어 자동으로 적을 감지하고 타격한다니.
가슴이 웅장해지는 성능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전력이 정상적으로 공급되기만 하면 10분마다 1%에 해당하는 탄약(10발)이 재생산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기적인 효과였다. 최소한 내가 직접 탄약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닐 필요는 없다는 뜻이니까.
그래도 굳이 단점을 꼽자고 한다면 분당 발사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탄의 소모가 너무 극심한데 비해, 거대한 드럼형 탄통에 들어 있는 탄약의 수는 기껏해야 1천 발이라는 점이다.
이론상 분당 3~6천 발을 쏘는 놈인데 고작 1천 발이라는 제한이 걸려 있다면 아무리 탄약을 재생산한다고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막말로 짧은 시간에 왕창 쏟아붓고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화력 조루 아닌가.
12.7mm 기관총보단 좋다. 좋지만…… 아깝다!
“숙련 포인트를 더 투자해서 더 강하고 효율 좋은 무기를 소환하든가, 아니면 모종의 방식으로 거점 방위 무기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겠지.”
거점 방위 무기에도 레벨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분명 성장시킬 건덕지가 있을 터.
갑작스럽게 게임 시스템이 적용된 이 비현실에 그런 작은 배려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저 벨트형 탄띠가 연결되어 있는 드럼형 탄창을 좀 더 크게 바꿔 버린다면 화력 조루라는 단점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또 하나의 단점은…… 거점 영역 바깥에 있는 존재는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페널티인데. 이건 사실 무차별적인 탄약 소모를 막아 주고 쓸모없는 어그로를 끌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작정 패널티라고 볼 순 없어.”
이런 SF 느낌 물씬 나는 자동포탑이 고작 수 km 떨어진 좀비도 타격할 수 없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시스템 때문에 철저하게 퇴역병의 거점 방위 용도로만 생성된 것이라 컨셉에 잘 어울린다.
딱히 거점 바깥의 문제에 대해서 신경 쓰진 않겠지만, 무단으로 내 거점에 침입하면 믹서기처럼 싹 갈아 버리겠다는 전형적인 인간 불신 타입 퇴역병의 컨셉 말이다.
나는 그렇게까지 심한 인간 불신은 아니지만, 굳이 내가 나설 필요 없다고 느낀 일은 ‘딴 나라 이야기’ 취급할 정도는 된다.
좀비 사태가 터진 뒤에도 괜히 남들을 돕기보단 바깥에서 내 이익을 먼저 챙기고 다시 집으로 숨어들었던 것처럼.
don't be a hero.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군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다.
전사자들의 가르침이자 생존자들의 깊은 상처 속에 새겨진 교훈이기도 한 그 말은 퇴역을 한 지금도 나를 지탱하고 있다.
“자동포탑이 거점 방위에 최적화된 건 사실이지만 이 넓은 거점을 고작 자동포탑 2개로 막는 건 조금…….”
힘들지 않을까 라고 말하려던 순간.
나는 넓은 운동장과 학교 부지를 둘러싼 철제 펜스가 확 바뀌어 있음을 눈치챘다.
우선 넓은 운동장에는 입구에서부터 각 건물로 이어지는 주요 통로마다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에 다른 침입로는 일체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수많은 가시 철조망과 구덩이가 존재했다.
특히 기껏해야 1.5m 높이 정도였던 철제 펜스는 무려 3m에 달하는 높은 담벼락으로 바뀌었는데, 담벼락도 함부로 타넘을 수 없도록 뾰족한 마름쇠가 다닥다닥 박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가 이 광경을 봤더라면 잘 훈련된 군 부대가 학교를 통째로 요새화시켰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 김해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활천초등학교 옥상을 보게 하라. 발칸포는 답을 알고 있으니.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E급까지는 목재 울타리였던 것이 D급에선 벽돌담으로 바뀌었다. 그럼 C급부터는 강화 철근을 넣고 콘크리트를 부어만든 격벽이라도 쌓아 준단 말인가?
정말로 그 정도 성능을 자랑한다면 거점 지정 스킬은 C급까지만 키워도 충분할 것 같다는 유혹에 잠시 빠졌다. 국가 복구 사업이고 나발이고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 자신이 있었다.
‘아냐, 그래도 넷플러스를 포기할 순 없어.’
넷플러스가 없는 삶은 너무 지루해서 돌아 버릴 것이다. 하다못해 회사 서버에 저장되어 있을 방대한 양의 드라마와 영화 파일만이라도 빼내야 한다. 그것만이 향후 내 50년을 책임져 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잠시 숨 좀 돌릴 겸, 빌어먹도록 맑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점심 시간을 넘은 탓에 해는 크게 기울어진 상태였고, 뒤늦게 내 배꼽시계가 고장 났다는 걸 눈치챘다.
이것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바쁘다고 굶기만 하면 금세 비쩍 말라 버리겠지.
늦은 점심 식사를 할 겸, 상황이 워낙 급해서 미처 살피지 못했던 5레벨 달성 추가 획득한 효과를 살피기로 했다.
이 상태창 시스템은 특이하게 직업 숙련 레벨을 올릴 때마다 랜덤한 확률로 추가 효과나 스킬을 제공해 주는데, 아무래도 3레벨과 4레벨 구간에선 운이 없었던 모양이다.
우선 상태창과 스탯창을 살펴봤지만 딱히 변화는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스킬창을 살폈더니 눈에 띄는 변화를 하나 발견했다.
[직업 고유 스킬 : 거점 지정(D-), 거점 경계 강화(E), 거점 방어 강화(E), 최후의 보루(A+)]
[개인 고유 스킬 : 사격(A), 체술(B), 야간 경계(B++), 통증억제(D)]
[획득 및 특전 스킬 : 도구 제작(E), 짚라인(D-)]
획득 및 특전 스킬에 떡하니 박혀 있는 짚라인 스킬. 레벨업을 하면서 랜덤한 확률에 따라 획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날 흥분시키는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흥분된다.
랜덤한 확률로 운 좋게 획득한 것치곤 처음부터 D- 등급이라는 것도 괜찮고, 무엇보다 짚라인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무슨 스킬인지는 까봐야 알겠지만, 사실 까보지 않아도 대충 알 것 같다.
그래서 클릭했고, 이내 내 상상력은 현실이 되었다.
[짚라인(D-) : 최대 20m 거리에 후크를 발사할 수 있다. 후크에 연결된 짚라인을 타고 빠르게 이동 가능(쿨타임 30초), 또한 짚라인 사용 중 모든 원거리 무기 정확도 40% 감소, 원거리 공격에 25% 추가 피해를 받음.]
“짚라인.”
조용히 스킬명을 중얼거리자 내 팔목을 감싸는 튼튼한 장치 하나와 등에 금속 용기가 하나 생겼다.
접이식 후크를 발사할 수 있는 기계 장치와 짚라인이 보관된 금속 용기가 팔목을 따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나름대로 폼나게 손목 스냅을 이용해 후크를 발사한 순간, 절묘한 각도로 날아간 후크가 바로 옆 건물 옥상 난간에 고정되었다.
그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아아, 죽여 주는 이동수단이다.
‘짚라인 사용 중 모든 원거리 무기 정확도 40% 감소, 원거리 공격에 25% 추가 피해를 받음’ 같은 디버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시 후크를 회수한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박수를 쳤다.
이거지. 이래야 사는 맛이 있지.
그 ‘회사’가 정말로 멸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주저 없이 쫄쫄이 슈트를 입고 마음껏 저작권 침해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식량을 꺼내 들었다.
오늘은 우리 이승권 친구가 열심히 했으니까 특식을 주도록 하자.
집에 처박아두고 아껴 먹으려고 했던 고급 쿠키와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신선한 우유로 가을의 정취를 느끼면서…….
삐이! 삐이! 삐이!
[침입자 경보 : 거점 내에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이 침입했습니다.]
[적성체를 제외한 외부인의 자동 요격 여부는 별도로 설정해야 합니다.]
[침입한 외부인 수 : 4]
[거점에 접근 중인 적성체 수 : 42]
“이런 씹!”
초코 쿠키를 막 우유에 담궈 먹으려는 순간, 난데없이 울린 경보에 화들짝 놀라 쿠키를 우유 속에 빠뜨렸다.
신은 어찌하여 쿠키를 만들고 우유를 만들고 나를 만들었단 말인가! 결국 모두 파멸에 이르는 치명적인 삼각관계인 것을!
벌써부터 새하얀 우유를 갈색으로 타락시키고 있는 진득한 초코 쿠키의 힘이 만만치 않다. 액체로는 싫다고 말하면서도 서서히 갈색으로 물들어 가는 우유를 보고 있자니 착잡한 기분만 들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버터 쿠키를 고를걸!
쿠키와 우유의 명복을 양손으로 비비고 원샷한 뒤 침입자를 살피기 위해 옥상을 빙 돌았다.
넓직한 운동장이 있는 정면 방향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형이 바뀌면서 좀비들의 시체도 자동적으로 처리되었는지 쥐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러다 측면, 후방까지 살폈을 때 내 눈에 뭔가 포착됐다.
학교 후문의 비교적 허술한 바리게이트를 타넘고 있는 4인의 남녀였다. 그 뒤로는 도로 끝에서 전력질주로 4인분 고깃덩어리를 뷔페 풀코스를 노리는 좀비 떼가 있었다.
4인 그룹은 모두 등 뒤에 크고 작은 가방을 하나씩 짊어지고 있었으며, 손에는 잡히는 대로 막 가져왔을 야구 방망이나 쇠파이프, 대걸레 자루에 덕테이프로 식칼을 감아 둔 조잡한 무기를 하나씩 쥔 상태였다.
아마 식량을 구하기 위해 멀리 나갔다가 좀비 떼에게 들켜 이곳으로 도망쳐온 것 같았다.
저들에게는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후문에 별도의 자동포탑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저들이 침입하는 동안 행동을 저지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야, 여기 갑자기 왜 이렇게 확 바뀐 거지?!”
“저도 모르죠 형! 우리가 잠시 다녀온 사이에 군 부대라도 왔나 보죠! 일단 들어가자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우리가 나갔다 온 지 1시간밖에 안 됐는데 그새 군대가 도착해서 없던 담벼락을 쫙 세우고 바리게이트에 철조망까지 설치했다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빨리 안 도망치면……!”
“그, 그래요! 일단 빨리 넘어가요!”
꽤 흥미로운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길래 나는 잠자코 옥상에서 저들의 외침을 들었다.
생각해 보니 모든 침입자를 대상으로 자동 요격 기능을 켜두었다면 옥상의 발칸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포구의 각도가 안 맞아서 요격 자체가 불가능할 텐데.
이 넓은 학교를 고작 발칸포 2개로만 막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뭔가 다른 방위 무기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일일이 거점을 돌아다니며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마침 앉은 자리에서 편하게 거점 정보를 살필 수 있는 거점창을 사용하기로 했다.
“거점창.”
[현재 거점 수 : 2/3]
[현재 거점 방위자 수 : 0/10]
[현재 거점 일원 수 : 0/∞]
[활천초 거점 방위 무기 : 20mm 자동포탑 2개, 9mm 머신피스톨 터렛 2개(원격 배치 가능), 부비트랩 10개(원격 배치 가능)]
[모든 거점 방위 무기는 배치후 최대 1시간 동안 배치 구조를 변경할 수 없습니다.]
[적성체 자동 요격 기능 : ON]
[외부인 자동 요격 기능 : OFF]
[퇴역병 및 거점 방위자, 거점 일원은 요격 대상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E급과 D급 스킬의 차이가 심각하다.
자동 포탑은 D급부터 주어지는 거점 지정 스킬의 기본 혜택이라고 생각하면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거점창을 슥슥 조작하는 것만으로도 원격 배치가 가능한 9mm 머신피스톨 터렛 2개와 부비트랩 10개? 역시나 D급 스킬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대단했다.
마치 스킬 보유자에게 ‘이래도 숙련 포인트 더 안 지를래?’ 하고 과금 욕구를 자극시키는 것 같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완전 혜자인데?
전쟁 터지기 전만 해도 스마트폰 게임에 꼬박꼬박 과금하던 동기 놈에게 한 번은 이런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다. 그런 데이터쪼가리에 대체 왜 그렇게 돈을 쓰지 못해서 안달인 거냐고.
그리고 내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을 받았었다.
-안 지르면 나만 손해잖아.
“……네 말이 맞았다. 안 지르면 나만 손해처럼 느껴지는 상품이 떡하니 놓여 있는데 안 지르곤 못 배기지.”
나는 저들과 만나기 전, 기어코 내 거점으로 침입하려는 좀비 떼를 처리하기 위해 거점창을 조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