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생존기 (17)
김해처럼 우중충한 분위기의 베드타운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 또한 그런 쪽으로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유일한 위안은 하루가 멀다하고 출근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따뜻하고 안락한 집구석에 처박혀 24시간을 알뜰살뜰하게 쓸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가끔 답답해지면 가볍게 바람이라도 쐬려고 마을 인근을 돌아다닌 적은 있지만, 어지간하면 시내로 나가지 않았다.
특별히 만날 사람도 없었고, 만남을 추구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배달의 민족이다 보니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택배를 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우중충한 분위기에 조금씩 침식되어 나또한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되고자 했건만, 설마 인류의 발목을 진득하게 물고 늘어지던 유행병이 하루아침에 무시무시한 좀비 바이러스로 탈바꿈할 줄 누가 알았을까.
김해 시내를 누비고 있는 내가 중간에 편의점을 들러 필요한 물품을 인벤토리에 쓸어담고 있는 것도, 식료품 창고 안쪽에서 무언가가 연신 쿵쿵 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이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소리를 내서 반응하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기척을 느낄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와서 반응하기 시작한 건지 헷갈리네.”
편의점의 새하얀 타일 바닥에서부터 창고 문까지 쭉 이어진 검붉은 핏자국. 그 끝에는 피묻은 손자국이 잔뜩 남겨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당시 이 편의점이 어땠을지 상상이 된다.
본격적으로 김해 시내에서 판데믹이 터지기 시작하고, 지하철역과 가까운 이곳이 가장 먼저 습격을 받았을 것이다.
깨진 문 너머로 어지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의 수만 봐도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 혹은 좀비가 밀려들어왔는지 알 수 있다.
늦은 사람은 잡혔고, 빠른 사람은 식료품 창고에 숨어들었다. 편의점 창고 문은 보통 통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는 데다 창문도 없기 때문에 튼튼하다.
하지만 무사히 창고로 도망쳐 들어간 사람들 모두가 멀쩡했을까? 누군가가 도망치는 도중에 물렸다면? 처음에는 다들 정신이 없어서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어갔겠지.
그러다 내부에서 감염이 터진 거다.
나는 투명한 음료수 냉장고를 지나치면서 유리창 너머로 희번덕거리는 수많은 눈동자를 흘겨보았다.
놈들은 장시간 추운 음료수 창고 안에 있었기 때문에 몸이 굳은 지 오래였다. 아직 편의점 전기가 끊이지 않았던 덕분이다.
‘얼추 열 명은 숨어들어갔구만.’
창고 문 앞에서 쿵쿵대는 놈들, 음료수 창고에서 눈알만 굴리고 있는 놈들. 그 짧은 시간에 자신들만 살겠다고 편의점 창고로 숨어들어간 ‘사람이었던’ 것들이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음료수캔 사이로 총구를 밀어 넣었다. 마침 딱 좋은 표적이 그대로 서 있는데 내버려 두고 가는 건 아까웠다.
타앙!
묵직한 총성과 함께 흩뿌려진 뇌수와 피는 뜨거운 김조차 내뿜지 않았다. 전신이 이미 딱딱하게 얼린 생선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냉장고 문을 열고, 쏘고, 다시 닫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나마 총성에 자극받은 몇몇 놈들이 팔을 휘적휘적 움직이긴 했지만 기껏해야 음료수 사이로 팔을 내뻗는 게 전부였다.
냉장고에 멍청하게 서 있던 놈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서 검붉은 체액이 묻지 않은 음료수와 생수만 조심스럽게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실제로 놈들의 체액이 묻은 것을 인벤토리에 보관하면 ‘오염된 솔의 눈’, ‘오염된 데자와’, ‘오염된 맥콜’ 이런 식으로 따로 표기되었다.
오염된 건 정말 안타깝지만 마실 수 없으니 포기하자!
상한 음식, 난리통에 파손된 음식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대신 장기간 보관이 용이하고 겸사겸사 내 취향에 맞는 음식만 적당히 챙겨 나온 그때였다.
이 앞으로는 크고 작은 상가가 쭉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좀비들은 비교적 적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사태 당일에 좀비에게 모조리 휩쓸려서 물건만 멀쩡하게 남아 있는 상가를 노리는 사람들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사생팬처럼 뒤쫓는 좀비들도 있었다.
혹시 내가 총성을 내서 그런 건가 싶어서 움찔했는데, 오히려 좀비에게 쫓기고 있는 사람들은 내 총성 따윈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전거를 타고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면서 코너링을 돌고 있었으니까.
가장 선두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남자는 짱짱한 허벅지 근육을 자랑하며 열심히 페달을 밟아 댔다. 도로는 차량으로 꽉 막혀 있었기 때문에 자전거는 괜찮은 이동수단이었다.
‘아니, 근데 왜 이쪽으로 오는데?’
수상쩍은 자전거 동호회는 바람처럼 내 옆을 지나쳐서 지하철역 인근 길목으로 빠져나갔다. 상점가의 좀비들을 대놓고 바깥으로 유도하는 움직임이었다.
“씹!”
그제야 지나가다 재수 없이 얻어맞았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서둘러 스쿠터에 올라타 스로틀을 감았다.
자전거 동호회가 열심히 경적을 울리며 질주한 덕분에 쏟아져 나온 좀비의 수는 어림잡아도 수백 마리에 달했다.
소총을 미친 듯이 갈긴다고 해도 열 마리나 쓰러지면 다행일 만큼, 아무렇게나 버려진 차량을 미친 듯이 밟고 뛰어오는 좀비 떼였다.
“캬하아아아아!”
“미친!”
무슨 액션 영화 프로 스턴트맨도 아니고, 버려진 차량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열심히 뛰어온 놈이 나를 향해 온몸을 내던졌다.
움직임은 또 어찌나 역동적인지, 지그재그로 열심히 뛰어오는 모습이 흡사 깡총거미를 보는 듯했다.
타앙!
재빨리 허리춤에 차고 있던 리볼버를 뽑아 놈의 미간에 구멍을 내주고, 내 위로 떨어진 시체를 어깨로 받아서 흘려넘겼다.
부아아아아앙!
뒤늦게 급가속한 스쿠터에 몸을 싣고, 조금 전 자전거 동호회가 사라진 길목과는 반대로 방향을 꺾었다. 마음 같아선 자전거 동호회 놈들을 뒤쫓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이미 수백 마리의 좀비가 나를 새로운 어그로꾼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내가 질질 끌고다니는 것보다. 차라리 확실하게 처리해서 이득을 챙기는 게 더 나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해한 동호회 삼형제 중 하나인 저들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산악 동호회와 흉가 체험 동호회, 그리고 자전거 동호회.
이 이승권에게 던지기를 한 시점에서 자전거 동호회는 ‘싸이클충’ 단계까지 내려간 것이다.
거리에서 자잘한 어그로가 끌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더욱 속도를 올려서 어그로를 완전히 내쪽으로 집중시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 보자는 생각으로 경적을 울리며 서로 밟고, 타오르면서 우르르 몰려오는 좀비 떼를 살랑살랑 자극했다.
그렇게 자극당한 놈들이 한층 더 격하게 울부짖으면서 달려드니, 흡사 좀비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이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덤벼드는 기분이었다.
‘야외에선 놈들을 모두 상대할 수 없다.’
내가 폭탄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또 모를까, 저렇게 앞뒤 안가리고 덤벼드는 좀비 떼를 일거소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일방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사격할 수 있는 포인트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방이 탁 트인 넓은 부지, 나는 쉽게 들어올 수 있어도 좀비들은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안전성, 최적의 사격 포인트까지 갖춘 장소.’
지도 어플로 인근 500m 이내에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가 있는지 재빨리 곁눈질로 훑었다. 천만다행스럽게도 그런 장소가 딱 하나 있었다.
‘김해활천초등학교!’
혹시 몰라 사진으로 확인해 보니 자로 잰 듯한 완벽함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초등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철제 펜스가 학교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며, 건물의 높이나 규모가 크다, 게다가 옥상의 전망이 탁 트여 있으니 운동장으로 접근하는 모든 적들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거리도 가까웠다.
“끼이이이이이이이!!”
저 앞에서 소란을 듣고 뛰쳐나온, 입가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아줌마 좀비가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하필 스쿠터의 방향을 꺾기 전이 감속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한번 권총을 뽑아 들었다.
탕!
뒤로 훅 젖혀지는 두개골, 이미 알록달록한 지면에 한 번 더 피와 뇌수가 흩뿌려지며 새로운 물감을 처발랐다.
학교에 들어가서 준비를 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좀비들을 살랑살랑 자극하지 않고 무조건 속도를 높였다.
초등학교 앞은 차량이나 셔틀버스로 가득 막혀 있었지만 스쿠터나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정도의 공간은 남아 있었다.
‘학교 안에 사람이나 좀비가 있는지 확인하진 못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곧장 운동장을 가로질러 문이 잠겨 있는 본관 건물에 도착했다. 대충 적당해 보이는 창문 하나를 깨고 들어간 다음 총을 들었다.
다행히 유리창이 깨지는 시끄러운 소음에도 무언가가 다다다다 복도를 달려오지 않는 걸 보니 내부에 좀비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텅 비어 있거나, 생존자들만 몰래 숨어 있다는 얘기다.
가능하면 전자이길 바라면서 힘차게 옥상으로 향했다.
잠겨있는 옥상 문을 박살 내고 들어가 미끄러지듯이 달려가 옥상 난간에 몸을 걸쳤다.
“후욱! 후욱! 후욱!”
달리기로 어지러운 호흡을 정돈하면서 콘크리트 난간 위에 소총을 거치했다. 높이가 딱 맞아서 조정간을 단발로 바꾸니 지정사수소총(DMR)처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준경은 없었지만 맨눈 사격도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내 사격 스킬은 A급이니까.’
아, 군 시절에는 A급 특등사수였다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소음을 추적해 온 좀비들이 학교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제 내가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하면 시끄러운 총성이 사방팔방으로 울려 퍼지면서 놈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나는 사격을 실시하기 전, 탄창을 즉시 교체할 수 있도록 모든 탄창을 꺼내서 옆에 늘어놓았다. 만일에 대비한 도주를 위해 본관 건물과 바짝 붙어 있는 옆 건물 옥상 높이도 확인했다.
전력을 다해 뛰어서 낙법을 취한다면 별일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와 높이였다.
‘좋아, 해보자.’
오늘 여기서 DNA 샘플과 직업 숙련 레벨 경험치를 잔뜩 챙기는 거다. 결코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타앙!
가장 먼저 머리통이 날아간 것은 대문 앞에서 얼쩡대고 있던 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