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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16화 (17/227)

16화 생존기 (16)

나는 본격적으로 집을 나서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지도 어플을 켜서 현재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할 장소와 피해야 할 장소를 우선 선별했다.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배제되는 장소는 김해국제공항이었다.

젊은 내가 군 부대와 접촉하는 순간 무조건 강제 징집 당할 테고, 한술 더 떠서 그들도 상태창에 대해 알고 있다면 나를 인프라 노예로 이용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군대는 잠재적 적성체로 규정한다.

설령 군대와 접촉할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건 내가 우위를 점한 상황이거나 최소 동등한 입장을 갖췄을 때나 시도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는 대한민국 군대가 가장 깔보는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니까.

나는 머릿속에서 시내의 몇몇 장소를 동그라미치거나, 아예 검게 칠해서 없는 장소처럼 만들었다.

검게 칠한 장소는 예상 위험도가 굉장히 높은 곳이다.

김해 시내가 싹 쓸려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던 지하철과 보건소, 백화점과 마트. 마지막으로 탈출이 용이하지 않아서 밀려들어온 좀비 떼에게 점령당했을 아파트단지.

김해에서 사실상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구세계백화점 주변에는 하필 아파트단지와 교회, 보건소까지 모두 갖춰져 있다. 즉 김해 시내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그곳이 사실상 접근 금지 구역으로 전락한 셈이다.

봉황역부터 연지공원역까지 이어지는 골목에 대체 얼마나 많은 좀비가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으니, 해당 지점은 모조리 검은색으로 덧칠했다.

농담이 아니라 해당 지점은 본격적인 화력 지원을 받는 대규모 군 부대를 투입해도 탈환하기 힘들 것이다.

여하튼 김해의 중심지를 공략 목록에서 제외하고 나면 딱 3개가 남는다.

김해의 중심지와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뒤로는 산, 앞으로는 강을 끼고 있는 삼방초등학교 인근 구역이 첫 번째 후보다.

근처에는 주유소부터 편의점, 마트, 그리고 병원까지 필수 생존물자를 모두 갖춘 시설이 있으면서, 사건 당일에 사람이 그나마 적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는데 과연 부모들이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을까? 설령 랩실의 노예인 대학원생이라고 해도 그날만큼은 교수를 배신하고 각자도생을 택했을 것이다.

‘지하철역에서 좀비 떼가 쏟아져 나오던 그때도 상당수가 거리에 나와 있었어. 다들 그만큼 불안에 떨었다는 거지.’

따라서 나처럼 운 좋은 소수의 생존자를 제외하면 삼방초등학교 인근은 사실상 텅텅 비어 있을 것이다.

다음 후보는 온갖 대기업의 공장으로 가득한 김해 남부 해안가의 산업단지. 사실상 김해라는 도시를 베드 타운으로 만들어 버린 원흉이다.

정말 많은 기업이 김해 산업단지에 투자를 했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선 연구소나 공장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공장 도시라고도 불리우는 창원과 비슷한 케이스다.

요즘 대기업 공장은 자동화가 기본이라 관리직과 정비공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근무 인원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주제에 건물은 또 어찌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바다를 배경 삼아 쭉 늘어선 공장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것이야말로 현대의 성이 아닐까 싶었다.

공장이나 연구소는 생존에 필수적인 장소가 아니지만, 생존 그룹의 번영에는 필수적인 원자재와 각종 설비는 한가득 쌓여 있다. 나는 생존 그룹이 아닌데 왜 공장을 노리냐고?

당연히 도구 제작(E) 스킬 때문이지. 예를 들어, 총기 설계도를 얻는다고 가정하면 그곳에서 재료를 보충해서 즉시 제조할 수도 있다. 거점으로 지정하면 인프라가 무한정 제공되는 만큼 나만의 공장으로 만들 수도 있다.

개인이 자동화 공장과 대량의 물자, 그리고 안전한 생활권까지 모두 확보하게 되면 대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게 될까?

최소한 그 시점에서 내 몸값은 억만금을 주더라도 지불할 수 없을 만큼 비싸질 거다.

다음은 장소가 아니라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다.

“종말론자, 폭도, 혹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무장 경찰과 군인, 그리고 나와 같은 상태창 각성자(생존자).”

종말론자는 흔히 볼 수 있는 사이비종교 교주나 기회를 엿보다 튀어나온 천생 사기꾼들이 주를 이룬다. 오히려 진짜 종말을 주장하는 정신병자나 선구안을 가진 예언자는 의외로 적다.

이런 놈들은 대체로 개인으로만 놓고 보면 무력하고 무능하고 무지하기까지 하지만, 일단 선동에 성공하여 집단을 이루는 순간 군대만큼이나 골치 아파지는 단체가 된다.

자신들끼리 you say 종! im say 말! 이러고 놀기만 하면 상관없는데, 문제는 그러한 악질적인 사상을 꼭 바이러스처럼 주변에 퍼뜨리려 한다는 점이다. 이성이 멀쩡하다는 점만 빼면 좀비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

폭도는 갑작스럽게 변해 버린 사회의 모습을 보고 브레이크가 터진 사람들이다. 작게는 폭행부터 크게는 살인까지. 더 이상 사회라는 거대한 울타리가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도덕과 윤리라는 옷을 벗어 던진 짐승들이다. 평균적으로 위험하면서, 평균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부류이기도 하다.

‘말이 안 통하는 놈들과 달리 폭도들은 경우에 따라서 힘이나 말, 어느 쪽으로도 찍어 누르는 게 가능하니까.’

강약약강의 전통은 고구려 벽화 수박도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위험한 부류인 타락 경찰과 군인. ‘타락’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서 그런지 괜히 더 멋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폭도보다 훨씬 더 위험한 놈들이다.

폭도의 상위 호환, 혹은 폭도 무리를 이끄는 수장격 존재로 등극할 가능성이 높다. 총화기와 폭약을 이용한 압도적인 무력으로 공포감을 조장할 테니 교전보다는 회피가 상책이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나처럼 특별한 상태창을 각성한 생존자들이다.

대체 몇 명이나 각성했는지, 그들은 나와 다르게 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같이 정상적인 것들은 아닐 것이다.

나만 해도 퇴역병이라는 직업 컨셉에 맞게 홈그라운드(거점)에서 존버하며 버티는 타입이 아닌가? 정작 퇴역병인 내가 홈그라운드를 벗어나면 위험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내 직업 스킬은 지나치게 우수하다.

하물며 내 인생 경험과 성향을 토대로 선정한 직업이라고 했으니, 다른 사람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예를 들어 살인마가 문자 그대로 살인마라는 직업을 얻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아마도 사람과 좀비를 죽이는 데 특화된 스킬을 획득했을 것이고, 또한 시국이 시국인 만큼 거리낌 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닐 게 뻔하다.

‘물론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예를 들어 의사라든가, 엔지니어 같은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요구하는 전문 직업들.’

나는 민간인 생존자를 제외한 다른 부류를 모두 잠재적 적성체로 지정한 대신, 나와 같은 생존자에 한해서 ‘교섭 대상’으로 정했다.

필요하다면 내 거점에 그들을 들여 충분한 인프라와 안전을 제공하고, 거점 방위자로 등록해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맡겨도 되겠지. 아주 좋은 생각이다.

나는 지도 어플에서 주요 위치마다 핑(Ping)을 찍어 두고 다시 한번 스쿠터에 탑승했다.

단순히 마을 정리나 할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여러 상황을 상정해서 본격적인 무장을 갖췄다.

내 집 옷장이나 지하실 벽을 무너뜨린다고 온갖 무기가 튀어나오는 건 아니지만, 파출소에서 확보한 무기와 탄약, 그리고 방탄복이 있었다.

보호되지 않는 팔목이나 다리는 적당히 골판지 상자를 잘라 내서 덕테이프로 감았다. 좀비에게 물리면 아프기야 하겠지만, 바이러스가 체내에 침투해서 감염되는 것보단 낫다.

철컥!

마을 청소를 할 땐 총을 사용하지 않고 조용히 움직이며, 늙은 좀비들의 머리통을 하나씩 연장으로 박살 내 버렸다.

하지만 시내에선 소음으로 인한 어그로를 감수하고서라도 총기를 써야 할 거다. 상대가 좀비든 사람이든 총이 연장보다 훨씬 더 안전한 건 팩트니까.

그리고 가능하면 DNA 샘플과 숙련 포인트를 남들보다 많이, 빨리 모아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좀비를 잡아야 한다.

좀비 떼에게 쫓기는 게 무섭다고 좀비 사냥에 소극적이면 내 퇴역병 노후 생활은 영영 그림의 떡으로만 남는 거다.

정말로 그런 미래를 원하는 거냐 내 안의 이승권?

내 안의 이승권(섹시함) : 아니. 난 그런 미래는 감당할 수 없어.

내 안의 이승권도 그렇다고 하니 지금 내가 하는 행동도 맞는 거겠지. 아무튼 맞는 거다.

“미래에 쉬고 싶으면 지금 일을 해야 한다니. 늙어서 받지도 못할 국민연금 받으려고 젊을 때 국민연금에 돈 꼴아박는 것 같잖아.”

아마 지금쯤 국민들에게 국민연금을 지급할 의무가 사라진 국민연금공단 직원들은 좋아 죽을 거다. 정말로 죽었거나.

* * *

스킬이 나를 먹여 살리는 게 아니라, 내가 스킬을 먹여 살려야 퇴역병의 노후가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불편한 진실은 내 신경을 돋구었다.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거리두기 255단계를 무시하고 겁도 없이 집 밖으로 기어나올 만큼 짜증난다.

집에 넘치도록 쌓여 있는 식량, 외세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목재 울타리와 셔터, 그리고 잘나신 12.7mm 자동 감시형 기관총. 그것들만 있어도 내 인생은 이미 안정권인데도 내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지독한 행군 및 야전 생활 경험 덕분에 등에 뭘 메는 게 익숙해서 그냥 커다란 배낭을 들처맸다.

.38 구경 리볼버는 언제든지 뽑아 들 수 있게 홀스터와 함께 허리춤에 장착핬고, 탄약을 넉넉하게 챙긴 소총까지 들었다.

스쿠터를 타고 김해 시내로 쭉 이어져 있는 긴 대동 터널을 지나칠 무렵, 나는 지독한 흙먼지와 함께 가을 바람에 실려오는 피비린내를 맡았다.

사태 당일에 누구도 대동 터널을 거쳐 양산으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동 터널은 오히려 텅텅 비어 있었지만 시내는 달랐다.

불암역 인근, 불암육교에서부터 시작된 교통체증은 처음 시내에 나왔을 때보다 훨씬 더 심한 상태였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사방 천지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와 흩어진 살점, 그리고 뼛조각이었다.

한때 인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의 살덩어리는 성한 곳이 없었다. 마치 하이에나 떼가 달려들어 무차별적으로 물어뜯은 것처럼 꼴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대퇴골 아래 부위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고 내장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상반신만 남은 살덩어리가 반쯤 튀어나온 눈으로 나를 포착하더니, 뼈가 드러난 양팔로 엉금엉금 기어오기 시작했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용케 먹잇감을 포착하고, 또 그걸 물어뜯기 위해 움직이려 한다는 점이 대단했다.

“그어어어어…….”

“너한테까지 총알 쓰기는 좀 아깝다.”

잠시 세웠던 스쿠터의 스로틀을 다시 힘차게 감았다.

급가속하며 앞으로 튀어 나가면서 검은 체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놈의 안면을 힘껏 걷어찼다.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목뼈가 그대로 부서지면서 간신히 연결되어 있던 두개골이 축구공처럼 날아가 버렸다.

DNA 샘플 하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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