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생존기 (15)
마땅히 주인(각성자)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알려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침묵하고 있을 줄이야!
검경이 제대로 기능만 하고 있었다면 능히 고소장을 넣고도 남았으련만,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반 게임처럼 3포인트, 5포인트씩 막 퍼주는 게 아니라서 좀 아쉽네.”
지금 내가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것은 흔히들 SP(Skill Point 혹은 stat point)라고 부르는, 게임 업계에서 가장 직관적인 캐릭터 성장형 시스템 요소 중 하나다.
투자하면 그만큼 캐릭터의 스탯이나 스킬 수치를 상승시킬 수 있으며, 레벨업이나 특정 아이템 획득, 퀘스트 클리어, 업적 달성등 여러 경로로 입수할 수 있는 귀중한 포인트다.
특히나 레벨 제한이 있는 RPG 게임의 경우 획득할 수 있는 SP의 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투자하지 않으면 소위 ‘망캐’가 된다.
그렇다고 밸런스를 챙기겠다며 구석구석 평균적으로 투자하면 ‘잡캐’ 소리를 들으니, 이런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자연히 고민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면 E급 스킬이나 스탯에 투자할 경우 1포인트당 + 보정 수치가 하나씩 붙는 구조라는 건데…… + 보정 수치를 3개까지 채우면 다음 등급으로 넘어갈 수 있겠지.”
E급까지는 보정 수치 하나당 숙련 포인트 하나, 그 윗등급부터는 숙련 포인트 요구치 설명대로다. 정말 단순명쾌한 구조이면서도 참 고민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그도 그럴 것이, E급은 가장 낮은 등급이라서 조급하게 고작 1포인트 투자해 봤자 별 효율을 뽑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숙련 포인트를 꾸준히 모아서 C급 이상의 스킬이나 스탯에 투자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내가 숙련 포인트를 10만큼 모아서 야간 경계(B++) 스킬에 투자한다고 치자, 그럼 + 보정 수치가 3개로 꽉 차기 때문에 이후에 A-나 A급으로 등급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지간하면 C, 본격적으로 효율을 뽑고 싶다면 B 이상의 스킬이나 스탯에 투자하고 남는 포인트는 존버가 반강제되는 구조.
생각해 보면 생존자라는 컨셉에 꽤 잘 어울리는 시스템이기도 했다. 생존자는 살아남는 게 목적이지 싸우는 게 목적인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비폭력적인 생존만 강요하는 무조건 강요하는 시스템은 또 아니었다.
‘마음먹고 좀비를 잔뜩 때려잡아서 숙련 포인트를 모은다면 충분히 전투 특화형 캐릭터가 될 수도 있다.’
사격 스킬을 S급으로 올린다면? 체술 스킬을 S급으로 올린다면? 신체 스펙을 모조리 S급으로 맞춘다면?
흔히 서브 컬쳐에서나 등장하는 먼치킨 회귀자처럼 나혼자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SSS급 독식 같은 래퍼토리도 노려봄 직하다.
결과 : 숙련 포인트는 존버만이 답이다.
하지만 답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답만 따르리란 법은 없다.
인간이 어떤 동물인가? 호기심으로 가득 차다 못해, 그 호기심 때문에 심심찮게 죽기도 하는 동물이다. 콘센트에 젓가락 쑤셔 넣는 짓쯤은 다들 한 번씩 해 보면서 크는 법이니까.
이 세상은 오직 강한 호기심과 강한 육체를 지닌 아이들만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구조였다.
“+ 보정 수치에 대한 대략적인 감이 필요해.”
+ 보정 수치가 하나씩 붙을 때마다 스킬이나 스탯에 유의미한 변화가 있는가? 아니면 너무 희미한 변화라서 신경 쓰는 의미가 없는가? 그에 대한 실험 결과가 필요하다. 따라서 E급 스킬인 거점 지정(E)에 투자해 보면 알겠지.
퇴역병 직업인 내가 최후의 보루(A+) 스킬과 연계하면 ‘나혼자 먹고 산다’ 시즌 50을 찍어도 문제없는 스킬이다. 다만 지금은 그냥 집 한 채를 보호해 주는 어설픈 목재 울타리와 셔터를 추가해 준 게 전부인 비루한 스킬일 뿐.
당장 나만의 영역을 넓힐 것도 아닌데 거점 지정(E)에 투자하는 게 아깝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툭 까놓고 말하면 큰 의미는 없다. 궁금한데 의미 따위 부여할 시간이 어딨어.
스킬창을 직접 조작해 숙련 포인트를 투자하자 곧 스킬에 변화가 생겼다.
[거점 지정(E) > 거점 지정(E+)]
[거점 지정(E+) : 자신의 소유로 인정되는 거점, 혹은 소유주가 사망하거나 통제를 상실한 거점을 지정하여 자신만의 영역으로 삼을 수 있다. 숙련도에 따라 거점의 범위, 개수를 확장할 수 있다]
[보정 수치 효과 : 소규모 거점 범위 확장, 울타리 소재 변경]
기껏해야 목재 울타리가 조금 더 튼튼해지거나 멋들어진 우체통이 하나 더 추가되겠거니 싶어 가만히 기다렸다.
드드드드!
곧 예상했던 지진에도 나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진동이 멎고 바깥을 확인하기 위해 현관을 나선 순간, 나는 현관문 옆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기이한 구조물을 발견했다.
가정집 우산 보관함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위치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구도로 배치되어 있어서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다.
“……+ 보정 수치 하나밖에 안 붙었는데?”
마당 청소도 자주 하지 않아 언제나 낙엽이 쌓여 있던 별장 인근은 어느샌가 푹신푹신한 잔디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또한 친절하게도 입구에서부터 현관까지 이어지는 길목에는 벽돌로 된 타일이 아름답게 박혀 있었다. 산책할 맛이 나게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울타리의 범위가 조금 더 확장된 것은 물론, 울타리가 약간이지만 더 튼튼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까지라면. 딱 거기까지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좀 더 쾌적한 환경이 되었겠거니 하고 넘어갔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현관 옆에 절묘한 구도로 배치된 이 구조물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E급 스킬이라며!!!!!!!!”
숙련 포인트 하나당 + 보정 수치가 하나씩 붙는 이 밑바닥 등급 스킬이!
고작 숙련 포인트 하나 받아먹었다고 남의 집앞에 12.7mm 기관총을 떡하니 설치해 준단 말인가!
그것도 수동 조작 방식이 아니라 자동 감지형 무인포탑 방식으로! 세상 어떤 미친 스킬이 이러는데!
“왜 이렇게 혜자인데!!!! 조금만 더 창렬이어도 되잖아!!!!!!!”
투자 대비 창렬한 효과였으면 좀비도 설렁설렁 잡고!
혹시 만나게 될 생존자 그룹과의 교류 관계도 대충대충 생각하고!
이젠 나를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냥 집구석에 틀어박힐 생각이었는데!
“왜 쓸데없이 퍼주는데! 왜!!”
이러면 매일 입에 단내 나도록 뛰어다니면서 하루 종일 좀비만 잡고!
하루라도 몸에서 좀비 체액 냄새가 마를 날이 없어서 급기야 씻는 것마저 도외시하고!
그러다 SSS급 좀비 슬레이어로 등극해서 혼자 세상 다 씹어먹고!
딱 봐도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난 벌써 3D 프린팅까지 다 했다.
“후우…….”
결론부터 말하자면 E급 스킬이라서 투자 대비 효율이 별로일 거라는 내 생각은 틀렸다. 훌륭한 실험 정신 덕분에 쓸데없는 사실까지 알아 버렸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보정 수치를 하나씩 늘리고, 스킬 등급도 올리다 보면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물건이 튀어나오겠지.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승권(27세/무직/고졸) 인생 최대 위기!
이 성장세라면 D급에 도달했을 땐 또 뭐가 튀어나올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정말로 S급까지 성장시킨다면 대충 나만의 거점을 국가화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겠지. 그렇기 때문에 더 속이 쓰리다.
이런 사실은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얌전히 존버해서 스탯 포인트에만 투자하고 혼자 무쌍 찍고 다녔을 텐데.
우월한 S급 신체 능력으로, 생존이 천박한 농담으로 전락한 시대의 거리를 휘적휘적 돌아다니니면 뽕이 차오르다 못해 터져 죽었을 텐데.
방금 나는 알량한 실험 정신 하나로 그 가능성을 스스로 지워 버렸다. 바이바이 내 예쁜 S급 근육아.
이젠 싫어도 거점 지정 스킬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매일같이 수많은 좀비를 때려잡고, 레벨도 올리고, DNA 샘플도 모아서 나만의 대한민국 타이쿤을 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비신사적인 스포츠맨 정신의 소유자였다면 쌩까고 스탯에만 투자해서 이기적인 섹시남 인생을 즐겠으나, 내 안의 이승권(연애 경험 없음)은 아직 이 세상을 구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내 안의 이승권 : 내가 언제까지 급떨어지게 오른손이랑 놀아야 해?
나는 오른손과는 완전히 반대 타입인 왼손으로 극적인 합의를 노렸으나, 내 안의 이승권은 한시코 거부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지금도 360도 전방위 회전이 가능한 감시경을 돌리고 있는 약 1.5m 높이의 검은색 자동 감시형 기관총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기관총을 연결되어 있는 원통형 동체가 빙글 돌아갈 때마다 무시무시한 총구 역시 조금씩 움직였다. 총구가 내쪽을 향할 때마다 아닌 걸 알면서도 괜히 흠칫흠칫했다.
생각해 보니 내 거점은 최후의 보루 스킬 덕분에 전력도 무제한 제공이라 이놈이 작동을 멈출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딱 봐도 사람 손길 안 타게 생겼다. 스마트하다는 말이다.
E급 스킬이라고 내심 무시하고 있던 거점 지정 스킬이 내게 시원한 사이다를 먹였으니, 노예 생존자는 얌전히 스킬 육성에 필요한 숙련 포인트나 벌러 다녀야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지하게 국가 전복 한번 노려 봐?’
이론상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숙련 레벨을 올리고, 숙련 포인트를 모으고, 스킬에 투자한다.
간단한 3단계를 거쳐 나만의 영토(거점)는 점점 더 확장될 것이고 동시에 막강한 방위 능력도 갖추게 될 터. 지금 내 옆에서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는 12.7mm 자동 감시형 기관총처럼.
무엇보다 내 거점 내에선 내가 허가한 거점 방위자만이 이 무한한 인프라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외부인이 내 거점의 무한한 인프라의 수혜를 노린다고 한들, 근본적으로 내게서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내가 국가에 필적하는 영토를 확보한다면, 진정한 의미로 독재자가 될 수 있다.
언제나 죽창을 조심해야 하는 독재자 신분이 싫다고 해도 거점 지정 스킬을 키워야 하는 건 이미 필수 사항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쉬고 싶으니까.
그냥 쉬고 싶은 게 아니다. 재미있게, 지루하지 않게, 내 마음대로 쉬고 싶다!
소파에 드러누워서 배를 긁으며 넷플러스나 보고, 게임도 하고, SNS에 새벽 갬성이 담긴 뻘글도 싸지르면서 곱게 늙고 싶다. 우리 부모님은 불가능하셨던, 소박한 일반인의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
그러려면 거점 지정 스킬을 육성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자연스럽게 내 휴식이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배제해야 한다. 그게 사람이든 좀비든.
실행하기도 힘들고 성공하는 건 훨씬 더 힘들겠지만 내 밝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무거운 엉덩이를 떼야 할 시간이다.
이 나라에 위험한 좀비도, 내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없어져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나만의 궁극적인 평화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