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생존기 (14)
“사상구 저지선은 포기하기로 한 모양이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부산에서 터져 나온 대량의 감염자를 김해에서 모두 막는 건 불가능했던 것 같다. 애초에 김해도 시내에서부터 터진 판데믹 때문에 내부가 엉망이 되었으니, 김해와 부산 사이에 있는 김해국제공항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입장이겠지.
지리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해 보면 김해국제공항은 작은 섬 위에 지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외부에서 김해국제공항과 연결된 육로는 총 12개.
해안에서 군함이 함포 사격을 하거나, 육군이 직접 움직여서 폭파시킨다면 좀비 떼거지를 획기적으로 막을 수는 있다. 김해국제공항을 둘러싼 강의 폭이 꽤 넓기 때문이다.
지금쯤 서해안과 남해안의 수많은 섬들도 군 부대가 자체적으로 대교를 폭파하는 작업을 구상 중이거나 이미 진행했을 것이다.
제주도를 제외한 남해안에서 가장 안전한 섬 후보는 크게 진도, 남해(섬), 그리고 거제도를 꼽을 수 있겠다.
위의 세 섬들은 다리를 하나, 혹은 둘만 끊으면 비교적 넓은 섬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최고의 대피 후보다. 농업과 어업으로 먹고사는 따뜻한 섬동네라서 자급자족으로 어떻게든 먹고살 여건이 된다.
반대로 해남, 고흥, 여수, 통영은 모두 육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무리 좁은 길목을 잘 틀어막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위험해질 것이다.
충청도와 강원도에서 버티고 있는 군 부대와 피난민들도 결국은 선택을 해야 하는 시간이 올 테고, 그들은 한정된 자원과 인력이라도 살리기 위해 꽤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대충 한국군이 6년 전보다 얼마나 더 기괴하고 끔찍한 똥덩어리를 생산할지 상상하다가, 스피커로부터 흘려넘길 수 없는 발언을 들었다.
[또한 현재 대통령을 비롯한 국회의원 및 일부 장, 차관급 인사들은 무사히 구출되어 독도함에 피신하신 상황임을 밝혀드립니다. 현재 통일 대한민국 정부는 건재하며…….]
“예상은 했는데 막상 진짜 구출됐다고 하니까 좀 띠껍네. 웃대가리 목숨줄은 무슨 강철로 꼬아서 만들었나?”
북한군이 불시에 선제 포격을 갈길 때도 잘 살아 있던 놈들이 이젠 좀비 사태가 터졌는데도 어찌어찌 살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우주가 직접 나서서 정치인부터 죽이는 클리셰를 원천봉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렇게 몇 시간이나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이 시국에도 따스한 난방이 되는 집에서 편히 잠들었다.
* * *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서 꼼지락대는 사람을 은둔형 외톨이라고 하던가?
지난 1년간은 은둔형 외톨이로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생각이었던 나는 아포칼립스 시대가 도래한 지 정확히 3일째 아침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아침에 잠드는 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는 정상인의 정상적인 생활 패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일출이 보고 싶어 재빨리 창문 셔터를 올리고 아침의 시원한 바깥 공기를 들이켰다.
아아, 이 서늘하고도 상쾌한 감각. 1년 만이구만.
“역시 사람은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살아야 돼.”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은 다른 건 몰라도 공기 하나만큼은 지독했다. 호흡기가 멀쩡한 사람도 몇년 빡세게 살다 보면 호흡기질환이 생길 만큼.
하지만 남부지방은 따뜻하면서도 바다와 가까운 탓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덕분에 겨울에는 눈이 잘 내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여름 장마철에는 태풍에 시달린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도 공기와 물이 좋은 건 팩트다. 오죽하면 병치레를 한 사람이 요양을 위해 남부지방을 찾는 일이 허다할까.
천고마비의 계절에 붉은 지상을 비추며 푸른 하늘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배가 고파졌다.
나와 같이 또 한 번 무사히 밤을 보낸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것이고, 아침 해를 보지 못한 이들은 지상을 붉게 덧칠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일 것이다.
“아침에는 무조건 저혈당이라 달달한 걸 먹어 줘야지.”
안타깝게도 더 이상 우리 집에 우유 배달을 와 줄 사람은 없다. 하는 수 없이 호랑이 기운이 솟구치는 시리얼을 생으로 와작와작 씹어먹으면서 프렌치 토스트를 구웠다. 빵과 달걀은 모두 보관 기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빨리빨리 처리해 버리는 게 낫다.
프렌치 토스트에 설탕 왕창 뿌리고 고기 통조림을 곁들이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중세 유럽 귀족을 능가하는 아침 식사였다.
어제부로 김해의 변두리 마을의 적법한 군주가 된 것치곤 지나치게 평화로운 아침이다. 보통 이쯤 되면 우리 집을 노리는 좀도둑이나 좀비 무리가 들이닥쳐야 정상이건만.
“클리셰가 꼭 왕도는 아니지.”
따뜻하게 데운 인스턴트 코코아 한 잔을 마시면서 1일 권장 당분 섭취량을 아득히 초과하고 있던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매우 낯익은 폭음에 나는 머그컵을 쥔 채 자세를 바짝 낮췄다. 꽤 먼 거리였음에도 폭음이 크게 들렸다는 건 그만큼 폭압이 굉장했다는 의미다.
오늘은 또 어떤 천덕꾸러기가 실시간으로 대한민국을 조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테라스로 나가 봤다. 폭음의 진원지는 반쯤 예상했던 대로 수관교였다.
“방어할 수 없는 다리부터 끊어 놨구만.”
저 아래쪽, 그러니까 지금 내가 거주하고 있는 변두리 마을에서 직진으로 남하하면 곧장 김해국제공항으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대저교를 박살 낸 게 분명했다.
엄청난 양의 흙먼지와 폭연이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김해국제공항은 생존자들이 합류할 수 있도록 24시간의 유예를 주겠다고 했지만 대저교를 먼저 끊어 버린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방어를 포기한 부산과 대저교 바로 위쪽을 곧장 이어 주는 대동화명대교가 있기 때문이다. 대동화명대교를 건너면 곧장 대저교로 진입해서 김해국제공항으로 향할 수 있다.
김해발 좀비 떼는 둘째치더라도 부산발 좀비의 유입만큼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대교 폭파용 폭탄과 견인포를 사용했나?’
어쩌면 남해안에서 대기중인 해군의 함포사격지원으로 박살 냈을 가능성도 있다. 현대 군함의 함포사격은 사거리도 길고 정확도도 높은 편이니까.
내 집은 산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다행이었다. 수관교와 딱 붙어 있는 마을 한복판이었다면 확실하게 데인저 클로즈(Danger close)였다.
이유야 어찌 됐든 아침 댓바람부터 대교가 최소 3개 이상은 날아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덕분에 엄청난 소음에 이끌린 좀비들은 진원지 인근에서 더욱 미쳐 날뛸 것이다.
“……아 씹.”
바로 어제 마을 정리를 했는데 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수관교에서 폭음이 터졌다 > 새롭게 유입될 내 영지민의 총합을 구하시오(5점)
상상도 못한 군대의 트롤링에 나는 이마를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물론 군대 입장에서야 당연히 부산발 좀비의 유입을 막고 싶을 테니 수관교를 폭파한 건 이해한다. 저놈들이 김해국제공항이 아니라 김해 전체를 틀어막으려는 대작전을 계획 중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네 새끼들은 그냥 김해국제공항만 방어할 거잖아…….’
그럼 최소한 수관교는 그냥 내버려 둬도 상관없는 것 아니냐고. 거긴 어차피 뒤죽박죽으로 얽힌 차량 때문에 좀비가 오고 싶어도 못 온다고.
그래서 수관교를 통제하고 있던 군 부대도 대교를 폭파하는 대신 그냥 조용히 물러났던 건데.
왜냐하면 부산발 좀비들은 조용한 수관교보다 시끄러운 사상구 쪽 대교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으니까.
부산에서 퍼져 나간 좀비들이 양산에서 수를 불렸다고 해도 밀양이나 울산으로 갔으면 갔지, 조용한 김해 변두리로 쳐들어오겠냐고.
“역시 대한민국 군대는 사람을 좆같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쌀쌀한 날씨 덕분에 금세 식어 버린 코코아를 원샷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장비를 주섬주섬 챙겼다.
2일 전에 한 마리, 바로 어제 31마리나 좀비를 처치했는데 정작 인벤토리와 상점창만 살피고 하루 일과를 끝냈었다.
하지만 3일째 아침을 맞이한 지금, 나는 자신이 있었다.
상태창을 펼치면 최소한 내게 어떤 변화가 생겼으리라는 자신이.
“상태창.”
[생존자 : 이승권]
[직업 : 퇴역병]
[직업 숙련 레벨 : 2]
[칭호 : 없음]
[생존기간 : 3일 차]
오. 역시나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다. 놀랍게도 직업 숙련 레벨이 1에서 2로 증가했다. 좀비를 30마리도 넘게 때려잡았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변화이기도 했다.
“스탯창.”
[신체 상태 : 매우 건강]
[정신 상태 : 매우 ■■]
[근력 : B]
[심폐지구력 : B-]
[반사신경 : B+]
[사고회전 : B]
“스탯창은 그대로네. 이건 정말 특별한 일 아니면 거의 고정이라고 봐야겠지?”
예를 들어, 내가 한 달 동안 닭가슴살만 먹으면서 빡세게 운동을 조지면 근력이 B에서 조금 더 상승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바꿔 말하면 좀비 몇 마리 좀 때려잡았다고 확확 변하는 성질의 능력치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스탯창은 성장보다 유지를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력과 심폐지구력이 약해지고, 늙을수록 뇌기능이 저하될 테니 반사 신경과 사고 회전도 자연스레 떨어질 터.
상태창을 각성했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슈퍼맨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 가설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잠깐. 직업 숙련 레벨을 올리면 추가 스킬이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추가 스킬이나 효과. 굉장히 애매모호한 표현이지만 전제조건이 직업 숙련 레벨 증가인 만큼 나도 그 혜택 대상자라고 할 수 있겠다.
“스킬창.”
[직업 고유 스킬 : 거점 지정(E), 거점 경계 강화(E), 거점 방어 강화(E), 최후의 보루(A+)]
[개인 고유 스킬 : 사격(A), 체술(B), 야간 경계(B++), 통증억제(D)]
[획득 및 특전 스킬 : 도구제작(E)]
“오.”
정말로 뭔가 생겼다.
시험 삼아 도구 제작(E)이라는 직업 고유 스킬을 클릭해 보니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무언가를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여러 개의 빈 칸과 ‘제작’이라는 버튼이 튀어나왔다. 매우 심플한 인터페이스라 금방 용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뭔가를 만들고 싶으면 그에 걸맞는 재료를 조합해서 제작하라는 거네.”
삼겹살을 만들고 싶다면 돼지와 정육도를 조합하면 되는 건가?
이론상 재료만 갖춰진다면 핵 미사일조차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제작창 위쪽에 떠 있는 물음표 표시를 발견했다.
보통 물음표는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 그래서 꾹 눌러 봤더니…….
[현재 도구 제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설계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구 제작 스킬은 최초 제작 시 반드시 최초 설계도를 필요로 합니다.]
[설계도는 희박한 확률로 감염체에게서 획득하거나 상점창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설계도 등급에 따라 다양한 성능과 효과를 자랑하는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에 따라 조합할 수 있는 재료의 가짓수 증가 및 제작 아이템의 등급이 상향 조정됩니다.]
추가 스킬이라고 마냥 좋아라 했더니만 꼭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쉽게 말하면 삼겹살을 제작하기 위해서 SSS급 삼겹살 설계도를 구해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그렇게 만든 삼겹살은 어떤 천상의 맛을 자랑할지 상상도 안 되지만, 첫 레벨업부터 꽝을 뽑은 느낌이라 조금 띠꺼워졌다.
그렇게 모든 창을 닫고 다시 강행 정찰을 나가려던 순간, 상태창 끄트머리에 처음 보는 문구를 발견했다.
[숙련 포인트 : 1]
[숙련 포인트는 직업 숙련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획득합니다(특정 레벨 구간에서는 더 높은 숙련 포인트를 획득 가능)]
[숙련 포인트는 특정 스킬, 혹은 스테이터스에 투자할 수 있습니다.]
[스킬의 등급에 따라 숙련 포인트 요구치가 상승합니다.]
[각 등급에 따른 숙련 포인트 요구치 : E(1), D(3), C(5), B(10), A(15), S(20)
[숙련 포인트 투자 예시 : E 등급 스킬에 1 만큼 투자 > E+ 로 등급 상승(+ 보정 수치는 최대 3개)]
“이걸 가장 먼저 알려 줬어야지 이 멍청한 상태창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