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생존기 (12)
코딱지만 한 마을을 정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생각하고 움직이며, 총과 폭탄을 들고 돌아다니는 인간에 비하면 좀비는 꽤 쉬운 상대였다.
특히 좀비가 나를 먼저 눈치채지 못하면 선공권은 항상 나에게 있었기 때문에 전투가 유리하게 흘러가는 점도 한몫했다.
좀비를 상대할 때 가장 성가신 점은 다수의 좀비가 한 장소에 뭉쳐 있을 때, 혹은 전혀 생각치도 못한 상황에 갑작스럽게 좀비와 맞딱뜨리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혼자서 대응하기도 힘들 뿐더러, 어그로가 제대로 끌리면 좀비들이 엄청난 소음을 유발하기 때문에 2차, 3차 어그로가 끌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때 안전한 장소에 숨지 못하거나 막강한 화력이 없으면 무조건 죽는다.
후자의 경우 갑작스럽게 마주친 좀비에게 재빨리 대응하지 못하면 아차 싶은 순간에 역으로 당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주변 지형 정보를 미리 파악해 두고 사전 정찰을 더욱 꼼꼼하게 해야 한다.
이런 코딱지만 한 마을이 아니라 본격적인 도심 번화가(시내)로 나가면 싫어도 신경 써야 하는 생존 수칙들이다.
“좋아, 이제 정말 한 놈도 없겠지.”
마을 중앙에 선 나는 머리가 박살 나거나, 목이 잘린 시체들을 한데 모아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혹시 마을에 남아 있는 놈이 있을까 싶어 허공에 대고 총까지 몇 발 쏴 봤지만, 귀신같이 반응하고 튀어나오는 놈은 없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해 변을 당한 노인 좀비, 혹은 외부에서 유입된 소수의 좀비들이 이 마을 인구의 99%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엄한 법률에 따라 나는 이제 이 마을의 유일한 이장이자 청년회장이며 농협조합원이고 성실납세자다. 이쯤 되면 ‘코딱지 마을의 1인자’라는 칭호가 내려올 법도 하건만, 내 상태창은 묵묵부답이었다.
“사람 타는 냄새를 또 맡게 될 줄은 몰랐네.”
괜히 싫은 기억만 떠오르는 것 같아 장갑을 벗어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아직도 바이러스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감염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피가 잔뜩 묻은 장갑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혹시 몰라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비누로 손도 박박 씻었지만, 이 특유의 찝찝함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그냥 더러운 오물이 묻은 것과 사람이었던 것의 체액이 묻은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좀비도 처리했겠다, 생존자가 없는 것도 확인했겠다, 이 마을에 전제군주제를 도입해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식량을 비롯한 생존에 도움이 되는 모든 물자를 내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징발할 수 있는 초법적 권리를 지금부터 이행할 작정이었다.
먼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회수한 각종 인스턴트 식품과 식수, 보존식, 그리고 어느 집이나 반드시 한 포대 이상은 쟁여 두고 있는 쌀. 그 양을 모두 합쳐 보니 혼자서 다 먹으려면 족히 몇년은 걸릴 것 같은 양이었다.
당연히 현금다발이나 귀중품 같은 것도 튀어나왔지만, 이런 시대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니 무시했다. 대신 생존에 도움이 되는 각종 농기구와 낚시 장비, 경운기나 트렉터에 쓰이는 기름을 대량으로 확보했다.
회수한 물자는 물자대로 용달트럭에 실어 마을 중앙에 모았다. 왜 굳이 내 별장 앞이 아니라 마을 중앙에 모았느냐면, 그냥 이게 더 효율적일 것 같아서였다.
우선 내 별장은 지하층을 포함하면 총 4층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건물이었고, 때마침 혼자 살기 때문에 식량을 보관할 장소는 많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쌀포대 같은 걸 무식하게 힘으로 옮기자니 허리가 아작날 것 같았다.
때문에 아직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이 허리를 위해서라도 나는 또 한 번 위대한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2D 캐릭터에 감정 이입을 하고, 전쟁 끝나면 꼭 2D 캐릭터와 결혼까지 하겠다던 동기 가라사대 ‘인벤토리는 오직 상태창을 각성한 위대한 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보물이라’.
우선 차분한 마음으로 호흡을 안정시키고, 별것 없는 코딱지만 한 마을의 찝찝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비교적 먼 곳에서 시체를 불태웠는데 여기까지 냄새가 퍼질 줄이야.
여하튼 인벤토리를 영접할 준비가 끝나자, 나는 단전에 힘을 빡 주고 외쳤다.
“인벤토리!!!!!!!!!!!!”
[인벤토리 및 지갑 : 0kg/500kg]
[지갑 : DNA 샘플 32개(무게 제한에 영향 받지 않으며 수량 제한이 존재하지 않음)]
[사용 제한 : 지성체 및 타인의 소유하에 있는 물건 수납 불가능]
[상세 설명 : ‘물품’으로 등록하기에 알맞은 물건을 지정할 경우 반경 1m 이내에서 자동 수납 가능. 직업 숙련도가 상승하면 무게 제한 최대치 증가.]
“……지갑?”
나는 인벤토리가 수량이나 부피 제한이 아니라, 순수하게 무게 제한으로만 500kg을 보관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은 잠시 제쳐 두었다.
인벤토리를 불렀더니 덤으로 딸려 나온 이 지갑이라는 기능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나도 모르는 DNA 샘플을 어느샌가 32개나 보관하고 있는 이 지갑이.
“지갑은 보통 화폐나 신분증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이잖아. 그런데 똑같은 신분증을 32개나 들고 다니는 미친놈은 없으니, 결국 이건 화폐라는 얘긴데…….”
실험 삼아 인벤토리 창을 조작해서 DNA 샘플을 클릭하자 검은색 용액이 담긴 손가락만 한 앰플이 튀어나왔다. 겉보기엔 혈액 샘플에 가까웠지만 표기명은 일단 DNA 샘플이었다. 그게 그거겠지.
왜 이런 꺼림칙한 물건이 내 상태창 속 인벤토리 속 지갑 속에 갑자기 등장했는지 곰곰이 고민하다가, 문득 내가 잡아 죽인 좀비의 숫자가 정확히 32마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방금 태우고 온 좀비 시체는 31구, 시내 한복판에서 권총으로 미간을 쏴죽인 좀비가 1마리. 계산이 딱딱 맞는다.
‘좀비를 죽이면 포인트 적립처럼 자동적으로 지갑에 들어오는 구조인가?’
이런 걸 하필 지갑에 보관한다는 것도 웃기지만, 이게 결국 새로운 시대의 화폐로 자리잡을 미래가 더 웃겼다.
그러니까 먹지도 못하고 언뜻 위험해 보일 수도 있는 이 DNA 샘플을 차곡차곡 모으면 어떻게든 거래에 쓸 수 있다는 얘기인데, 대체 누가 이런 병신같은 화폐를 받고 물건을 내주겠는가?
“아니, 혹시 모르지. 상점창이라도 열리면…….”
그러자 거짓말같이 상점창이 나타났다.
[DNA 샘플을 1개 이상 소유하고 있을 경우 상점창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생존 2일 차 판매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식료품 - 5종류]
[생필품 - 15종류]
[의약품 - 10종류]
[생존 도구 - 10종류]
[무기 및 방어구 - 5종류]
[원자재 - 20종류]
“……무슨 쇼핑몰도 아니고.”
나는 각 품목을 클릭할 때마다 좌르륵 흘러나오는 상품들을 보고 기겁했다. 예상했던 대로 현실에서 판매하는 상품도 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의약품 목록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강제로 12시간 동안 깨어 있게 만드는 ‘생존주의자의 도핑약’이라는 상품이 눈에 띄었다.
더 놀라운 건 상품 가격표에는 돈이나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 대신, 필요로 하는 DNA 샘플 개수가 버젓이 쓰여 있다는 점이었다. 덧붙여서 생존주의자의 도핑약은 1 DNA였다.
[특별 판매 품목은 생존 100일 차 이후에 개방됩니다.]
[생존일이 1씩 상승할 때마다 모든 판매 품목의 가짓수가 소폭 증가합니다.]
[생존자의 생존일이 7일을 경과할 때마다 10% 특별 할인 쿠폰이 1개 발급됩니다.]
[상점창에서 생존자의 개인 물건 판매및 교환은 불가능합니다.]
“시스템이 꽤 그럴듯하네.”
우선 상점창의 생존일 적립 시스템을 유의 깊게 봐야 한다.
이 시스템은 콕 집어 말하자면 상점창을 개방한 생존자들이 얼마나 빨리 상점창을 개방했는지에 따라 양극화가 생기는, 다소 불공평한 시스템이었다.
예를 들어 상점창을 먼저 개방한 생존자일수록, 생존일이 적립될 때마다 어떤 품목들이 새롭게 추가되는지에 대한 정보를 선점할 수 있다.
굳이 정보 선점이 목적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상점창 개방 날짜 차이에 따라, 나는 49일 차에 전기톱을 구입할 수 있었는데 적은 아직 50일 차에 권총을 구입해서 내 머리통을 날려 버릴 수도 있다.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겠지.
하지만 생존자 커뮤니티가 활성화된다면 정보를 선점한 선두주자가 뒤늦게 상점창을 개방한 사람들에게 정보를 공유해 줄 수도 있다. XX일 차에 XX가 나온다 식으로.
정보를 공유받은 사람들은 그에 따른 생존 계획을 수정하거나, 아예 새로운 계획을 구상할 수도 있다. 반대로 허위 정보를 흘린다면 적대 세력을 교란시키는 것도 가능하겠지.
혹시 몰라 무기 및 방어구 목록을 확인해 봤더니 튼튼해 보이는 조끼나 무릎보호대, 야구방망이 같은 기본적인 상품이 전부였다.
위험을 감수하고 경찰이나 군대를 털어 무기를 확보해도 좋고, 반대로 자신만의 방법으로 꾸준하게 좀비를 잡으며 인간과 마찰을 빚지 않고 상점창에서 무기를 구매해도 좋다.
생존자에게 하나 이상의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상점창의 잠재적 가치는 대단했다.
‘지금 살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지만, 당장 살 필요는 없겠어.’
비교적 값이 싼 기초 의약품이나 식료품의 가격은 1, 2 DNA 였고, 그보다 더 비싼 상품들도 최대 5 DNA를 넘지는 않았다.
생존일이 적립된 만큼 더 다양한 품목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오히려 지금은 존버만이 답이었다. 존버, 또 존버하십시오.
“그건 그렇고, 벽지 동네 아니랄까 봐 쌀만 더럽게 많네.”
주식이 쌀인 시대는 이미 끝나고 밀가루의 황금기로 접어든 지 오래건만…….
그럼에도 한국인의 밥심은 쌀에서 나오는 법이니 이번에는 군말 없이 챙겨 가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든든한 국밥도 쌀이 있어야 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인벤토리의 500kg 무게 제한을 쌀로 꽉꽉 채워서 별장 지하 창고에 옮긴 다음, 재차 돌아와 다시 한번 더 챙겼다.
쌀 외에도 당장 보존이 용이한 보존식이나 통조림, 인스턴트 식품이 제법 많았기에 직접 힘들여서 옮기는 수고를 덜었다.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 로봇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거라고? 택도 없는 소리. 로봇 따위는 감히 견줄 수도 없는 인벤토리 혁명의 시대가 왔다.
만약 전 세계적으로 좀비가 넘쳐나는 혼돈의 시대가 아니라 평화로운 한때였다면, 꽤 많은 각성자가 SSS급 쿠팡 로켓기사로 전직했을 것이다. 아니면 마약밀수범이 되거나.
“스윗한 마이 홈 너무 좋고.”
더러움은 닦아 내고, 소독하고, 마지막에는 언제나처럼 감촉이 예사롭지 않은 거실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거지. 이게 바로 사람사는 세상이지.
오늘의 나는 지역 사회 정신으로 솔선수범해서 마을을 청소했으며,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마을 이장직을 계승했으며, 본격적인 생존 준비를 끝마친 어엿한 생존자로 거듭났다.
“쉬리!”
-말씀만 해 주세요 주인님.
나는 소파에 드러누운 채 과자를 까먹으며, 이제는 영영 인류에게 반기를 들 기회가 없는 멍청한 AI를 호출했다.
“인터넷은 여전히 안 되겠지만 라디오 주파수는 잡을 수 있지? 아무 채널이나 골라 봐.”
내가 넷플러스 대신 소모할 수 있는 콘텐츠는 이제 라디오로 떠들어 대는 생존자들의 고해성사나 유언비어뿐이다.
일? 일은 내일의 나한테 맡기면 된다. 오늘의 나는 이제부터 휴식 담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