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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11화 (12/227)

11화 생존기 (11)

비상계엄령, 국가재난사태, 전시체제 같은 건 사실 확 와닿지 않는 말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이 무너지고, 계좌와 개인 금고에 한가득 쌓아 두고 있던 화폐가 쓰레기로 전락하는 상황은 좀처럼 겪기 힘들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전쟁과 테러가 발발하는 아프리카나 중동이라면 모를까, 대한민국처럼 안전한 국가의 국민들이 생활과 생명이 동시에 위협받을 일은 어지간하면 없다.

그런 일이 약 6년 전에 한 번 터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았던가?

종전이 선언되자마자 통일 대한민국의 잠재적 성장을 꿰뚫어 본 해외 자본이 그럭저럭 밀려들어 왔었다. 염병할 바이러스 때문에 다들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사꾼들은 투자 가치 하나만 봤던 거다.

“이 나라에 뭐 그리 먹을 있다고 달려들었는지…….”

당연하지만 나는 곧장 시내로 향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저 좀비들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일반인을 감염시키는지, 또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탄약을 넉넉하게 챙겨 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장 상태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 흔한 박격포나 유탄발사기는 둘째 치고 수류탄조차 없다.

뭐든 부족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좀비가 들끓고 있을 시내로 향하느니, 차라리 별장 인근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마을들부터 뒤져 보는 게 현명했다.

수관교는 아이러니하게도 도로를 통제하고 있던 군 부대가 철수했음에도 좀비들의 주요 진입로가 되지 않았는데, 엄청난 수의 차량이 수관교를 꽉 틀어막고 있는 까닭이다.

사람들도 이미 다 빠져나갔거나 좀비화된 마당에, 굳이 부산에서 퍼진 좀비들이 저 차량의 격벽을 뚫고 수관교를 통과하려 할까?

‘놈들이 살아 있는 생물, 혹은 단순한 소음이나 빛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면 절대로 수관교를 힘들게 넘을 필요가 없다.’

수관교에는 살아 있는 생물도, 소음이나 빛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유입된 좀비도 적었을 것이다.

‘수관교를 지키고 있던 군 부대가 갑작스럽게 철수한 이유는 부대에서 철수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겠지.’

김해와 부산을 이어 주는 다리 하나를 포기하는 대신, 매우 높은 확률로 김해공항 방어를 위해 인근 병력에 철수 명령을 내렸을 게 뻔했다.

군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완벽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그 부분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변두리 마을에 얼마나 많은 좀비가 유입되었으며, 또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감염되었느냐다.

터널을 쭉 지나쳐서 곧장 내려가면 금세 시내로 들어갈 수 있지만, 바꿔 말하면 이곳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마을이었다.

특산품도 없고, 관광지인 것도 아니고, 그냥 중년부터 노년층 사이의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군소 마을.

나는 완만한 산길을 타고 곧장 내려와 핏자국이 선명한 아스팔트 도로를 살폈다.

가을 특유의 건조한 날씨와 햇빛 덕분에 마른 지 제법 시간이 지난 핏자국은 페인트 통을 엎은 것처럼 전위적으로 흩뿌려져 있었다.

피를 이렇게나 많이 쏟았다면 그 사람은 과다 출혈 쇼크로 그 자리에서 사망해야 정상이다. 아니면 피를 쏟은 만큼 신체가 크게 결손되었을 테니 살점이나 내장 같은 것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있어야 할 시체는 없고, 피 범벅이 된 도로 한복판에는 각기 다른 발자국만 수십 개가 찍혀 있다.

최소 수십 마리에 달하는 좀비가 하이에나처럼 사람의 살점 하나 안 남기고 포식했을 가능성, 혹은 변종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 증상 때문에 과다 출혈이었을 가능성.

전자라면 좀비는 소음이나 빛보단, 감염되지 않은 인간 그 자체에 끌린다는 것이겠지.

‘우효오오옷! 아직 감염되지 않은 신선한 고기!!’ 같은 느낌으로. 그게 사실이라면 멀쩡한 인간을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포식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반대로 후자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어디선가 다른 이유로 감염이 됐든 일반인이 주화입마(감염)를 견디지 못해 칠공분혈(七孔噴血)을 해 버리고,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섰다는 해피 엔딩이니까.

‘그러고 보니 시내에서 지하철을 뚫고 올라왔던 놈들은 하나같이 피 범벅이었지.’

그게 불쌍한 희생양의 피였는지, 아니면 본인이 생전에 몸에 담고 있던 100% 인간과즙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또한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전에 신경 써야 할 것은 딱 하나. 감염 경로다. 그리고 그건 꽤 높은 확률로 체액 감염일 것이다.

공기 감염이었다면 내가 멀쩡한 게 말이 안 되니까.

단풍이 지고 있는 마을 나무를 지나쳐, 누군가가 제대로 청소하지 않은 낙엽을 밟으며 한적한 마을을 둘러봤다.

소소하게나마 가축을 기르고 있는 집도 있었는데, 닭이나 개, 소가 우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좀비들의 포식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포함된다는 거겠지.

“이장 집은 아예 박살이 났네.”

평소부터 띠꺼웠던 마을 이장. 그의 2층짜리 전원주택은 대문부터 창문까지 아주 개박살이 나버린 상태였다.

어느 부호가 거액을 들여 건설한 3층짜리 고급 별장에 나 같은 젊은 놈이 이사 온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그는 다짜고짜 내게 ‘지역사회 정신’을 강조하며 마을부흥기금이라든가, 청년회 출석을 강요했던 놈이었다.

물론 나는 그 멍청한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고, 혹시라도 내 삶의 터전을 훼손하거나 생활을 방해하는 양반은 임플란트도 심을 수 없도록 아가리를 개박살내 주겠다는 엄포까지 놨었다.

힘깨나 쓸 것 같은 동네 어른들이 찾아오면 나는 서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다이다이를 받아들였고, 덤벼든 놈들은 문자 그대로 복날 개패듯 조졌다.

그 이후로 나와 내 집을 건드리는 놈들은 없어졌지만, 마을 이장만큼은 꿋꿋하게도 내가 보일 때마다 노골적으로 악담을 퍼붓곤 했다. 버르장머리가 없다느니, 밥상머리 교육이 엉망이라느니 같은 말은 애교였다.

‘부모 없이 자란 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앞뒤 안 가리고 척추를 반으로 접어 버릴 뻔했지.’

사람이 좀 착하게 살았으면 걱정이라도 해 줬을 텐데, 눈앞에서 좀비에게 당하기 직전이라고 해도 하품만 나올 것 같은 인간이었다.

“그르르르…….”

이장 집을 그냥 지나치려던 찰나, 돌담 안쪽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나는 자세를 바짝 낮췄다.

선선한 가을 공기를 마시며 마을 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도 뭐했다.

부서진 대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들이밀자, 돌담 안쪽에는 개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좀비 한 마리가 보였다. 놀랍게도 매번 똑같은 점퍼를 입고 다니는 마을 이장이었다.

바지는 언제나 군용 디지털 도색이 된 카고 바지, 카키색의 낡은 점퍼, 그리고 땀이 진득하게 배었을 것 같은 농부 모자. 패션만으로도 타인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마을 이장이 틀림없었다.

‘매일 시끄럽게 짖어대는 똘똘이는…… 먹었겠지.’

개집 앞에는 황구 믹스견이었던 똘똘이의 개털과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목줄에 묶여 있었을 터인 불쌍한 똘똘이는 그렇게 주인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더 이상 목청껏 짖을 수 없는 너를 위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져주마.

2초 만에 묵념을 끝낸 나는 당초 계획했던 대로 좀비의 습성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좀비는 무엇에 반응하는가? 어떻게 해야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가? 또 인간과는 얼마나 많이 다른가?

이런 확실한 정보도 없이 무작정 김해 시내를 돌아다니고, 경찰서나 군 부대를 털 자신은 없었다.

나는 우선 주변에 굴러다니는 금속 파편 하나를 집어 던졌다. 대문에서 떨어져 나온 이 작은 조각은 집 외벽을 맞고 떨어지며 적절한 소음을 내주었다.

“그르륵?”

‘소리 반응 오케이.’

다음은 시각과 후각 반응이다.

우선 돌담에서 크게 물러난 나는 부서진 대문을 향해 한 번 더 금속 파편을 던졌다. 금속끼리 부딪쳐서 그런지 이번에는 소음이 조금 더 컸다.

이장 좀비 역시 새로운 호구(외지인)를 발견한 것처럼 다급한 몸놀림으로 뛰쳐나왔다. 어쩜 사람이고 좀비고 저렇게나 행동거지가 똑닮았을까.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지 않고 길 한복판에 서서 이장 좀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실 이건 예상이 빗나갔으면 했지만, 이장 좀비는 정확하게 나를 포착하고 뛰어오기 시작했다.

‘시각 반응도 오케이. 사실상 반쯤 살아 있는 좀비구만.’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는 일반적인 좀비들은 반드시 신체적 결함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보지 못한다, 뛰지 못한다, 살이 썩는다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지나칠 정도로 멍청하다는 점이 있는데, 우선 이장 좀비는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정확히 포착하고, 포식 대상으로 판명했으며, 포식하기 위해 전력질주하고, 겉으로 보기엔 피부 괴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총성을 터뜨리면 마을 안에 얼마나 숨어 있는지도 모를 좀비들이 다 뛰쳐나올 거다. 일단 총으로 무장은 했지만 그런 사고는 가급적 피하고 싶다.

그래서 그냥 나도 전력질주했다.

마을 이장이 아무리 좀비가 되었다고 한들, 툭 튀어나온 올챙이 배와 작달막한 다리로 완벽한 육체미를 갖춘 나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1m를 움직이면 나는 2m를 움직이는 메뚜기 같은 남자였으니까.

기럭지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휴먼? 아니, 좀비.

그렇게 전력으로 도망친 나는 파손 흔적이 일체 보이지 않는 집의 담벼락을 타넘고 뛰어들어갔다.

좀비들은 먹잇감을 발견하면 저 이장 좀비처럼 매우 열정적으로 달려들 테니, 자연스럽게 파손 흔적이 없는 집이라면 좀비의 습격도 받지 않은 집일 것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남의 집 창고 지붕을 점거한 나는 과연 도둑인가?’

마침 주변에 널려 있던 삽 하나를 집어들고 두꺼운 플레이트 판이 깔려 있는 창고 지붕으로 올라오자, 뒤늦게 도착한 2번 주자가 내게 의미없는 헛손질을 해댔다.

“지능은 떨어지는군.”

나는 창고 옆에 놓여 있던 쓰레기 분리 수거함을 밟고 올라왔지만, 이장 좀비는 생전과 똑같이 자신의 멍청함을 자랑하듯 내게 팔을 뻗은 채 울어대기만 했다.

“크하아아아! 캬아아아아!!”

“자, 이장 선수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승권 님은 이 마을의 빛이자 소금이며, 한낱 마을 이장 따위는 감히 고개도 들 수 없는 위대한 존재이십니다. 라고 말해 보세요.”

“캬아아아아아아!!”

“친구 전화 찬스도 드리겠습니다! 아, 친구가 안 계신가?”

쯧쯧, 혀를 찬 나는 삽을 들고 아래에서 작달막한 키로 폴짝대고 있는 이장의 머리를 내려쳤다.

까앙!

“……크흐으으으으!”

“인간이면 기절할 정도의 공격을 받고도 안 쓰러진다라…… 맷집 확인 오케이.”

혹시 힘 조절을 잘못했나 싶어 연거푸 삽 끝으로 이장 좀비의 머리를 후려쳤지만, 놈의 머리가죽이 벗겨지고 두개골이 움푹 패여도 멀쩡하게 움직였다.

이 정도 맷집이면 사실상 과다 출혈, 신체 결손은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액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날붙이로 깔끔하게 목을 자르든가, 아니면 오함마로 대갈통을 박살 내던가 해야겠지.

‘총으로 머리를 터뜨리는 게 가장 합리적이긴 해.’

그건 김해 시내를 빠져나올 때 이미 해 봤으니 안다.

하지만 좀비가 떼거지로 몰려온다면 그 인파 속에서 어떻게 핀포인트 사격으로 좀비의 머리통을 하나씩 쏘겠는가. 나처럼 숙련된 전직 소총병이라고 해도 그건 조금 힘들다.

‘애초에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 여유를 부릴 수도 없겠지.’

어디 군대처럼 거대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탄이 존나게 걸리는 K3 기관총만 갈겨댈 수 있다면 또 모를까.

정보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삽날 끝으로 이장의 안면을 내려찍었다. 물렁한 입안을 파고들어간 삽날이 볼을 찢으면서 정확히 두개골과 경추의 연결부를 깨부쉈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 반쯤 박힌 삽자루를 발로 밟아서 확실하게 때려 박았다.

좀비들은 아마 인간이나 짐승이 자신들과 같은 동류로 전락하기 전에 다 포식해 버리면 먹잇감, 반대로 감염이 훨씬 더 빨라서 동류가 되면 함께 돌아다닐 든든한 친구 좀비로 인식할 것이다.

이장네 똘똘이가 좀비화되기도 전에 깔끔하게 포식당했으니 아주 틀린 가설은 아니리라.

“마을부터 싹 정리하고 식량을 옮겨야겠네.”

급하게 대피한 사람들은 식량을 얼마 가져가지 못했을 테고, 반대로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식량과 함께 죽었거나 좀비화 되었을 터.

좀비의 습성과 특성을 대략적으로 파악했으니 이제 처리할 일만 남았다. 고마워요 이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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