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10화 (11/227)

10화 생존기 (10)

“생활 인프라가…… 상시 유지된다고?”

뭐지? 방장 사기맵인가?

거점 내구도 50% 이상 유지라는 미심쩍은 조건이 붙어 있긴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장난 아니었다.

상세 설명을 보기 위해 해당 스킬을 꾹 누르자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나왔다.

[직업 고유 스킬 : 최후의 보루(A+)]

[설명 : 지정한 거점에 한하여 인프라가 상시 유지된다.]

[제한 : 퇴역병과 거점 방위자, 거점 일원에게만 효과 적용 + 외부인에게 해당 효과를 제공할 시 극도로 제한된 양을 판매 가능(거래 형태 제한없음)]

“거점 방위자라는 건 나를 포함해서 거점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겠지. 그럼 거점 일원은…… 그냥 거점에 소속된 우리 편 일반인을 말하는 건가?”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기본적으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우리 집에 몰래 들어와서 수도꼭지를 비튼다고 한들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허락한 거점 방위자 및 거점 일원은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물을 마실 수 있고, 전기와 가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거점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전제 조건하에.

생존에 특화된 직업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딱 봐도 지 혼자 잘 먹고 잘 살 것 같은 퇴역병이라는 직업답게, 우리 편 아니면 다른 놈들은 노골적으로 배척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배타적인 스킬도 인상적이었다.

이거 완전 나잖아?

거점에서 자동적으로 생산되는 인프라의 혜택을 다른 생존자들에게 판매할 때는 제공량이 극도로 제한된다지만, 어쨌든 거래 행위 자체는 가능하다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예를 들어, 외부인에게 하루에 1L의 식수만 판매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게 수백 명, 수천 명으로 불어난다면 어떨까? 돈은 쓰레기가 되었으니 식수 1L와 걸맞는 물건으로 교환할 수 있겠지.

그게 생존에 필요한 식량이나 자원일 수도 있으며, 혹은 노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귀중한 정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시대에도 기어코 컵라면을 끓이고자 하는 우직한 인간들이여 우리 집으로 오라. 신성한 얼음 정수기에서 세례(뜨거운 물)를 받을 수 있으리라. 아멘.

나는 굉장히 사기적인 스킬 ‘최후의 보루’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거점만 잘 지키고 식량만 잘 구하면 평생 혼자 살아도 문제없고, 반대로 사람을 모아서 다 함께 거점을 지키며 나만의 방위 마을, 방위 도시, 방위 국가를 건국할 수도 있다는 거네.”

거점 지정 스킬의 숙련도를 높인다면 지정할 수 있는 거점의 수나 범위가 더 넓어지기 때문에 이론상 국가를 재건하는 것도 마냥 꿈은 아니다.

내가 지정하는 곳이 곧 내 땅이고, 내가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진정한 홈그라운드가 되는 거니까.

‘나쁘지 않아. 나쁘진 않은데…….’

내가 짊어져야 할 잠재적 리스크가 너무 크다.

지금 이 상태만 유지하면서 평생 혼자 먹고살 식량만 확보하면, 비록 외롭겠지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쾌적하게 살 수 있다. 다만 세상이 원상 복구되지 않는 한 넷플러스는 영원히 볼 수 없다. 무료하면서도 안전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보내게 되겠지.

반대로 국가를 재건하겠답시고 외부의 온갖 위험 요소와 목숨 걸고 맞선다는 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나 영웅 같은 게 아니니까.

‘그래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국가를 재건하는 게 맞긴 해.’

넷플러스가 평생 유지된다면 또 모를까,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집구석에 평생 홀로 처박혀서 살아가는 건 휴식이 간절한 퇴역병이라고 해도 힘들다. 다른 의미로 지치니까.

그러니 리스크를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후자를 택해서 국가를 재건한다면…… 최소한 심심해서 죽을 일은 없겠지.

문제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무려 5년 동안 이 병신 같은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몸을 던져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는데. 과연 내가 이미 망해 버린 국가를 위해 뭔가 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긴 할까? 아니, 애초에 고마워하긴 할까?

그럴 리가 있나. 이 나라는 희생자들에 대해 눈곱만큼도 배려해 주지 않는 나라다. 내가 고생 고생해서 이 사기적인 스킬을 이용해 수많은 생존자를 구제해 준들, 그들의 감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애초에 전역한 후에도 감사 따위 받아 본 적도 없으니까.

“이참에 나도 빨간맛으로 전향해서 아예 독재를 해 버려?”

생수 한 병을 대가로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고, 통조림 한 캔을 사람의 목숨과 저울질하고, 나만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거점의 인프라 혜택과 무력을 이용해 공포 정치로 막 나가 버려?

“……하도 빨갱이를 때려잡았더니 나도 물들었나?”

그건 독재 이전에 그냥 빌런이지 빌런.

전역한 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 바람은 딱 하나였다.

바로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에서 평생 넷플러스나 보며 유유자적 사는 것.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고난 인싸였다면 퇴역병 출신 캡틴 코리아 컨셉으로 당당하게 초선 국회의원이 되어 임기 첫날부터 게이트가 열리는 꼬라지를 봤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머리 복잡한 정치 같은 건 나랑 안 맞는다는 얘기다.

‘전자를 택하자니 넷플러스도 없이 평생을 혼자 심심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고, 후자를 택하자니 나라와 국민들이 쌍으로 좆같고.’

세상에 이보다 더한 난제가 어디 있을까. 수학자들이 희대의 난제랍시고 들이미는 것들은 이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아니지. 꼭 지금 결정할 필요는 없잖아?”

원래 인간의 마음은 갈대 같은 법이다. 오늘 저녁에 치킨을 먹겠다고 다짐해도 막상 시간되면 피자를 시키는 모순적인 동물이 바로 인간 아닌가?

깔끔하게 자기합리화에 도달한 나는 개인 고유 스킬도 차례차례 살폈다.

사격 스킬은 문자 그대로 총기를 활용한 공격에 반동, 정확도를 높은 수치로 보정해 주는 스킬이었다.

체술은 사격 스킬의 보정 수치를 육체 버전으로 옮긴 놈이었고, 야간 경계 스킬은 수면 효과를 억제하는 대신 맑은 정신으로 오랫동안 깨어 있을 수 있게 해 준다고 한다. 물론 잠을 자지 않는 만큼 나중에 더 많이 자게 되는 부작용이 뒤따르겠지만.

마지막으로 통증 억제는 별도의 진통제를 사용하지 않고도 일부 통증을 경감시켜 주는 능력이라고 하니, 하나같이 전장에서 굴러먹다 온 퇴역병에게 어울리는 스킬들이었다.

‘처음 시내에서 좀비 같은 걸 잡으면서 생존할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었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추측이지만, 갑작스럽게 세상을 뒤덮은 감염자(좀비)를 때려잡으면 내가 얻은 스킬과 직업 숙련도를 육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 말고는 달리 연관되는 게 없다.

인터넷에서 봤던 뻘글에서도 상태창을 각성했다는 놈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처럼 좀비를 잡았거나 생존과 직결되는 어떤 행위를 한 것으로 상태창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게 또 웃긴 게, 그렇게 따지면 좀비라는 놈들이 등장하자마자 격렬하게 싸웠을 군대와 경찰들이 떼거지로 상태창을 각성하고, 사기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놈들을 일망타진했어야 정상이다.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고 보는 게 타당한가?’

무작정 좀비만 때려잡는 게 상태창 각성 조건이 아닌가? 아니면 정말로 게임 속 용사처럼 상태창의 ‘선택’이라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1. 나처럼 상태창을 각성한 놈들은 아마도 ‘생존할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것이다.

2. 우리는 ‘생존자’로 분류되며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인생 경험과 성향에 따라 그에 걸맞는 직업을 부여받는다.

3. 생존자는 직업에 따라 다양한 스킬을 부여받는다.

4. 전 세계가 큰 난리를 겪은 것으로 보아, 모든 인류가 상태창을 각성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5. 절대다수인 좀비 무리에게 평생 쫓겨다니다 죽거나, 반대로 놈들을 몰아내야만 생존자들은 진정한 의미로 ‘생존’할 수 있다.

“답 나왔네.”

나는 소총과 리볼버를 다시 꺼내서 한 정씩 챙긴 뒤 외출 준비를 했다.

최후의 보루 스킬이 유지되는 한 식수나 난방 걱정은 없겠지만, 식량은 창고에 쌓아 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평생 나 혼자 먹고 사는 것도, 혹은 내게 도움이 되는 누군가와 함께 나눠 먹으며 사는 것도.

‘대교를 건너면 부산이나 양산, 더 멀리까지 가면 울산도 갈 수 있다. 하지만 안전을 생각하면 김해 내부를 뒤지는 게 합리적이야.’

부산발 판데믹은 좀비를 가득 채운 일본 크루즈선이 부산항에 들이닥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순식간에 군대가 밀려날 정도였다고 하니, 놈들이 부산에 얼마나 많을지 감도 안 잡힌다.

머릿속 지도에서 부산에 X 표시를 하고 김해 내부에서 물자 징발이 가능한 유력지를 검토했다.

우선 김해의 자랑이자 김해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김해국제공항은 이론상 엄청난 양의 물자가 쌓여 있을 것이다.

부산에서 후퇴한 군 부대가 김해국제공항 만큼은 넘겨주지 않기 위해 사상구에서 2차 저지선을 형성했을 정도라고 하니, 군의 보급 물자도 자연스럽게 방어와 수송이 용이한 공항에 집중되었을 터.

게다가 김해국제공항은 원래 물자가 차고 넘치는 곳이다. 각종 상가부터 편의점, 화물보관소, 여객기에 쓰이는 기름이나 고급 부품, 중장비들. 추가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축복받은 지형까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곳이다.

설령 그곳을 군대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거나, 반대로 좀비들이 점령했다고 해도 반드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가치가 있다.

물론 오늘 당장 그곳부터 노리겠다는 건 아니고. 가볍게 시내로 나가서 식량도 확보할 겸, 직업과 스킬 육성 및 효과에 대한 실험부터 해 볼 생각이다.

“쉬기는 글렀네.”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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