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생존기 (9)
“굿모닝 레모네이드는 항상 옳다.”
무려 12시간을 넘게 자 버린 나는 꽤 오랜만에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시원달달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거실 외창의 셔터를 올려 보니 바깥은 아직도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본격적인 가을이라 해 뜨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마을을 아주 조져 놨네 조져 놨어. 후르릅.”
일부 불타고 있는 가구가 보인다. 불이 나도 크게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작은 마을이지만, 반대로 가구 몇 채가 사라진 것만 해도 이 마을에는 충분히 큰 피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또 하나의 깡통을 확보했다.
마을 사람들 중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진즉에 군의 보호를 받기 위해 인근 군 부대나 방공호에 들어갔을 것이다. 여전히 작은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 것 같다.
십중팔구 수관교를 타고 넘어왔을 부산발 감염자 떼에 휩쓸렸거나, 화마에 집어삼켜졌으리라. 어느 쪽이든 씁쓸함밖에 남지 않는 최후다.
어제 경찰이 말했던 것처럼 경찰이든 군이든 만능이 아니다. 인력 부족, 장비 부족, 혹은 실전 경험 부족이라는 여러 문제들이 겹쳐서 아주 끝장났겠지.
나 또한 충분한 무장을 갖춘다고 해서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영웅은 아니다. 나는 6년 전까지만 해도 어디에나 있던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지금은 퇴역병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자신의 분수에만 맞게 살 생각이다.
예를 들어, 피난민이 우리 집을 찾아와 물 한 잔 달라고 하면 줄 것이다. 물 한 잔 주는 게 어려운 건 아니니까. 식량을 조금 나눠 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 대뜸 우리 집에서 머물게 해 달라고 하면 곤란하다. 그때는 정중하게 거절해야겠지. 이 집의 적법한 계승자는 바로 섹시한 27세 미혼 인간 남성 이승권(무직)이니까.
덧붙여서 불쌍한 피난민인 척하는 분충 범죄자는 무관용으로 처리할 생각이다. 곧바로 투항했던 북한군은 얌전히 후방 격리시설로 보냈지만, 끝까지 덤벼드는 놈은 철저하게 벌집으로 만들어 줬던 것처럼.
“그런데 용케 전기가 안 끊겼네.”
거실 전등 스위치를 몇 번이나 딸칵딸칵 누르면서 확인했다.
솔직히 전 세계가 갑작스럽게 변종 바이러스의 피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어제 대한민국의 피해는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더 심했다.
우선 전쟁 후에도 인구 천만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대도시 서울이 함락됐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크루즈선의 트롤링 덕분에 제2의 수도인 부산까지 시원스럽게 먹혔다.
덕분에 부산 바로 옆에 위치한 김해와 양산, 그리고 울산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피해를 보는 중이다. 창문을 열고 시원한 새벽 공기를 마실 때 희미한 총성과 폭음을 들었다.
사방이 온통 암흑천지이기도 했고, 더 이상 군대만으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나빠졌는데, 솔직히 이쯤 되면 누구나 인프라의 단절을 예상했을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의 튼튼한 인프라 구조가 고작 하루 이틀 동안 관리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단절되겠느냐마는, 그래도 내가 조심성이 없었던 것은 팩트였다.
왜냐하면 어제 드럼통에 물을 한가득 받아 둘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잠들었으니까.
집에 식수는 차고 넘칠 만큼 있고, 주택용 정수 처리 장치도 있지만 당장 깨끗한 물을 확보해 두는 건 무조건 이득이었다. 최소한 집에 비축해 둔 식수로 몸을 씻는 사치는 부리고 싶지 않았다.
“하…… 넷플러스만 됐으면 정말 완벽한데.”
여느 때처럼 감촉이 예사롭지 않은 가죽 소파에 앉아 TV를 틀어 봤지만 모든 채널이 먹통이다.
공영방송국조차 감염자에게 죄다 당해 버렸는지, 아니면 방송할 짬이 안 나는 건지 깜깜무소식이었다. 스마트폰을 들어 인터넷을 뒤져 봤지만 그나마 서버가 살아 있는 커뮤니티 사이트의 활동량도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대다수의 인간들이 인터넷이 안 터지는 지하 방공호에 숨어들어갔거나, 감염자에게 당했거나 둘 중 하나인 상황. 여전히 인터넷을 계속하고 있는 인간들은 나처럼 집에 처박혀 있는 안성맞춤주택형 인간이리라.
그나마 인터넷을 하고 있는 인간들도 대부분 자신들의 주변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인증샷을 찍어 올리거나, 애써 괜찮은 척하기 위해 유쾌한 생존 신고를 하는 놈들뿐이었다.
혹은 아직도 이 현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양 헛소리를 지껄이는 놈들도 있었다.
-아니 씨발 전쟁 터지자마자 북한군 다 쓸어버리던 지상최강 K-육군은 대체 뭐 하고 있냐고;;;
-나 아직도 여의도역 화장실에 갇혀 있다. 근데 휴지가 없다…….
-옆 지역 전기 끊겼다는데 곧 우리 지역도 전기 끊길듯ㅋㅋㅋㅋ
-[인증] 기껏 물 받아놓은 거 엎었다…….
-혹시 여기에 각성한 게이 있음? 나 상태창 뜨는데?
-└지랄
-└이 상황에 상태창 ㅇㅈㄹㅋㅋㅋㅋㅋ
-└저거 사실임. 나도 어제 병신 같은 좀비 새끼 집에 들어오려고 하길래 야구방망이로 뚝배기 컷 하니까 상태창 떴음;;;
-└응 인증 없으면 구라야~ 나만 상태창 없는 거 억울해서 절대 안 믿어~
-└좀비는 믿으면서 상태창은 안 믿쥬? 믿고 싶은 것만 믿쥬?
-병신들아 헛소리하지 말고 인터넷 아직 살아 있을 때 노아의 방주 만들어 놔라. 오늘 추천 품번은…….
-행님덜 지금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좀비한테 쫓기는 거 찍으면 천만 구독자 쌉가능한 부분?
-└곧 뒤질 새끼 방송은 왜봄?ㅋㅋ
-└고건 맞지ㅋㅋㅋㅋ
“하여간 뒤져서 삼도천 건널 때도 주둥이만 둥둥 떠서 건널 놈들이라니까.”
혹시 몰라 대한민국의 대표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떡하니 홈페이지 메인에 ‘긴급 상황’이라는 로고를 박아 놨다.
로고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면 재난 상황에 대비한 행동 강령이나 안전 수칙, 생존에 필요한 기술 등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중 인터넷이 된다면 이거라도 보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의미로 박아 둔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상식이 있을까 싶어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읽어 본 다음, 전부 스크랩해서 스마트폰에 저장했다. 결과적으로 내게 꼭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혹시 정보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알려 줄 때 용이해 보였다.
“후우, 해 떴으니 밥 먹고 일해야겠네.”
반쯤 무의식적으로 부엌에 가서 냄비를 꺼내고 수돗물을 받았다.
“……단수가 안 됐네?”
솔직히 전기는 그렇다 쳐도, 군의 무분별한 무기 사용 때문에 물이 흐르는 파이프라인은 진즉에 박살 나거나 수도 관리자 부재로 단수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수도꼭지를 비틀자 깨끗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니 조금 의외였다. K-인프라는 어쩌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튼튼하고 막강했던 게 아닐까? 내 방탄복은 그렇게 튼튼하지 않았는데.
“전기도 들어오고 물도 나오면 게임 끝났지. 다 뒤졌다.”
원래 집 뒤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비탈을 올라가 간간이 약수나 받아 올 작정으로 사 두고 정작 약수터는 한 번도 안 가서 쓴 적 없는 드럼통. 치킨 시켜 먹을 때마다 착착 저축되었던 1.5리터 콜라 페트병까지 총동원해서 물을 꽉꽉 채웠다.
사람이 밥 좀 굶는다고 해서 당장 뒤지는 건 아니지만 물 없이는 오래 못 버틴다.
별장에 욕조가 있는 화장실은 모두 돌아다니면서 물을 한가득 받아 둔 후에야 나는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자, 물도 받아 놨고, 아침도 먹었고, 넷플러스는 여전히 먹통이고.”
이제 뭐 해야 하지?
가볍게 집 주변을 산책이라도 하면서 굳어진 몸을 풀어야 하나? 아니면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마당에서 국군도수체조라도 할까?
‘이참에 알통구보로 이 섹시한 육체를 좀 더 단련해 봐?’
생각해 보니 그건 썩 좋은 생각인 것 같지도 않고, 남자의 알통구보는 역겹기만 할 뿐이라 깔끔하게 포기했다.
사실 정말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 만약 그걸 해 버리면 나도 하루에 한 번씩 발작하듯 ‘밀리애니!’ 라고 외치던 놈이랑 똑같아질까 봐 꾹꾹 참고 있었건만. 결국 미루고 미뤘던 ‘그것’을 해야 할 때가 왔다.
“후우, 좋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깔끔하게 한 번 해 주지. 딱대.”
처음 한 번이 어렵지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최고의 명언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배에 힘을 빡 주었다. 변비로 고생하는 중년 샐러리맨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내 몸은 언제라도 공기 반 소리 반으로 외칠 준비를 끝마쳤다.
준비된 놈부터 전방을 향해 힘찬 함성 3초간 발사!
“상태창!!!!!!!!!!!!!!”
[생존자 : 이승권]
[직업 : 퇴역병]
[직업 숙련 레벨 : 1]
[칭호 : 없음]
[생존기간 : 1일 차]
아직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스탯창!!!!!!!!!!!!!!”
[신체 상태 : 매우 건강]
[정신 상태 : 매우 ■■]
[근력 : B]
[심폐지구력 : B-]
[반사신경 : B+]
[사고회전 : B]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스킬창!!!!!!!!!!!!!!”
[직업 고유 스킬 : 거점 지정(E), 거점 경계 강화(E), 거점 방어 강화(E) 최후의 보루(A+)]
[개인 고유 스킬 : 사격(A), 체술(B), 야간 경계(B++), 통증억제(D)]
[획득 및 특전 스킬 : 없음]
“후우…… 후우…… 후우……!”
일단 이 정도인가? 참 많기도 하지. 동기 놈은 하루 한 번 감사의 마음을 담은 정권지르기와 밀리애니를 외쳤는데, 나는 고작 3개의 ‘창’을 불러낸 것만으로도 10년은 폭삭 늙은 기분이다.
우선 스탯부터 스킬까지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한 나는 굳이 외치지 않고 의식대로 ‘창’을 조작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푸르스름하고 반투명한 창을 손으로 직접 조작하는 건 아무래도 선을 씨게 넘은 정신병자 같아서 최대한 눈빛, 의지만으로 조작하려 시도해 보았다.
결과부터 말하면 창을 불러내거나 도로 집어넣는 것은 의지만으로 가능했지만, 창을 직접 조작하는 것은 반드시 구두 명령이나 손가락을 사용해야 했다. 제3자 시선에서 보면 정신병자 확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제처럼 갑작스럽게 시야를 채운 상태창이 아니라서 손가락으로 눈을 찌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걸 받았는지 한번 알아보자고.”
상태창과 스탯창의 내용들은 현재의 나에 대해 표시해 주는 ‘현황판’ 같은 느낌이라 딱히 건드릴 것이 없어 보였다.
누군가가 나에 대한 신랄한 평가에 알파벳 기호를 덧붙여서 내 눈앞에 들이민 느낌이었다. ‘넌 대충 이런 놈이고, 이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이렇게.
하지만 앞선 둘에 비해 스킬창은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어제 사용했던 거점 지정을 제외하고도 직업 고유 스킬이 3개나 더 있다는 점, 그리고 아마도 내 인생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졌을 게 분명한 괴랄한 개인 고유 스킬 목록.
마치 누군가에게 내 인생이라는 소설을 설정집부터 낱낱이 읽힌 기분이라 굉장히 꺼림칙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있었다. 그래서 직업 고유 스킬부터 직접 조작해서 상세 설명을 살폈다.
[거점 지정(E) : 자신의 소유로 인정되는 거점, 혹은 소유주가 사망하거나 통제를 상실한 거점을 지정하여 자신만의 영역으로 삼을 수 있다. 숙련도에 따라 거점의 범위, 지정 수를 확장할 수 있다]
[거점 경계 강화(E) : 거점에 존재하는 모든 경계 시스템 및 거점 방위자의 경계 레벨을 일시적으로 상승시킨다. 적대적 존재를 10% 빨리 감지할 수 있다. 숙련도에 따라 감지 능력이 향상된다.]
[거점 방어 강화(E) : 거점으로 지정된 건물 및 시스템, 거점 방위자의 내구도가 일시적으로 50% 상승한다. 숙련도에 따라 내구도 상승량이 증가한다.]
[최후의 보루(A+) : 거점의 내구도가 50% 이상일 경우 생활 인프라가 상시 유지된다. (거점 손상, 파괴 혹은 거점 지정 취소 시 효과 자동 해제)]
“…….”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걸 받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