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생존기 (2)
자취하는 남자들은 언제나 인생의 갈림길에서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한다.
오늘 저녁은 어떻게 조지지? 내일은 장을 어떻게 보지? 그냥 배달 시킬까? 같은 무한 선택을 강요받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배달을 시키는 것이지만 가성비가 맞지 않고, 가성비를 챙기자니 요리를 해먹어야 하는데 너무 귀찮다.
그렇다면 가성비와 조리의 간소화를 동시에 챙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라면이다.
나는 부엌 찬장에 한가득 쌓아 둔 인스턴트 식품 중 라면을 꺼내 들었다. 치킨을 못 받았으니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내 뇌를 위해서 오늘은 매운 라면을 조지기로 했다.
감촉이 예사롭지 않은 고급 소파에 앉아, 고추와 파를 송송 썰어 넣은 라면에 잘 익은 김치 한 조각 올려서 후루룩 먹으면 남부럽지 않을 거다.
“하…… 라면 하니 옛날 생각나네. 야간 근무 끝나고 조지는 보급 컵라면이 진또배기였는데.”
그땐 한반도 북부의 가혹한 추위를 버티며, 언제 어디서 북한군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극도의 긴장 상태였기 때문에 라면의 약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바깥에서 사이렌이 울리건 말건 나는 인덕션에 눈대중으로 물을 채워 넣은 냄비를 올렸다. 통짜 대리석으로 만든 깔끔한 싱크대 위에는 이미 조져질 준비가 끝난 계란과 고추, 대파 그리고 라면 두 봉지가 놓여 있었다.
“라면은 1인당 2개가 국룰이지.”
다이어트 해야 하니까 1개? 배가 덜 고프니까 1개 반? 그런 선택장애 환자들을 위해 라면 회사가 야심차게 준비한 1.5개 분량의 라면 한 봉지?
아니. 적어도 내 집에서, 내 주방에서, 내 식탁에서 그런 같잖은 논리는 용납되지 않는다.
상남자는 아무리 배가 덜 고프다고 해도 일단 라면을 끓이기로 마음먹었다면 무조건 두 봉지를 끓여야 한다. 입맛 따라 취향 따라 고추나 파, 양파, 고춧가루, 후추, 비누 맛 고수, 뭐든 넣어도 상관없지만 두 봉지를 끓이는 건 절대 어기면 안 된다.
전장에선 보급 컵라면 딱 하나면 충분했지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총을 들어야 할 일이 없는 내 집에선 컵라면 하나로는 택도 없었다.
“요즘 세상 참 좋아졌다니까. 엄마 손맛 김치도 직접 배달해 줘, 본인인증만 되면 버튼 하나로 공과금도 척척 내줘, 힘들게 촌구석까지 내려가서 농사 지으며 주민들한테 텃세나 당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조용하게 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원했을 뿐,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극강의 인프라와 편의성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눈뜨면 배달 시켜 먹고, 넷플러스 보고, 게임도 좀 하고, 그러다 눈 감기면 죽은 듯이 자고, 다시 무한반복하는 삶.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
발에 피가 날 만큼 행군할 필요도 없고, 귀가 먹먹해지도록 총을 쏴야 할 필요도 없다.
언제나 먹고 싶으면 먹고, 놀고 싶으면 놀고, 자고 싶으면 자는 게 지난 5년간 시달린 내 인생에 대한 보답이다.
여긴 20대의 절반을 반강제적으로 전쟁에 갈아 넣은 나를 위한 발할라였다.
“후우, 진정한 성평등주의자라면 포르노 규제나 신경 쓸 게 아니라 라면에 규제를 걸어야 해. 라면만큼 야한 음식이 대체 어딨냐고.”
아직 입도 안 댔는데 벌써부터 목이 칼칼해질 만큼 얼큰해 보이는 빨간 국물, 탱탱한 식감이 일품일 것 같은 샛노란 꼬들면, 앙증맞은 흰 덩어리를 젓가락으로 쿡 찌르면 부끄럽게 노란 속살을 드러내는 반숙 계란.
이 천부적인 에로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상위 1%의 자취생 정도는 돼야 치명적인 유혹을 이겨 내고 라면과의 플라토닉 러브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덧붙여서 찬밥 한 공기만 있으면 쉬지 않고 2차까지 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단언컨대 라면은 가장 야한 음식이다.
“스읍, 후우우우. 이거지. 이승권 넌 존나 멋져. 이토록 완벽한 라면을 끓일 줄 아는 섹시한 남자는 세상에서 너뿐이야.”
줄여서 라섹남. 왠지 눈이 좋아질 것 같은 칭호다.
“크! 국물 때깔 봐라. 진짜 다 뒤졌다.”
이제는 귀에 익어 버린 사이렌 소리를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썰 때 듣는 클래식 BGM 취급하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아삭하면서도 새콤한 김치는 오늘 자신이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때임을 눈치챈 듯했다.
그 증거로 면발 위에 김치 한 조각을 얹은 순간 내 젓가락은 이미 면발을 한 움큼 퍼올리고 있었다.
MSG가 다량 첨가된 라면의 열기가 내 안면에 묵직한 스트레이트를 날렸지만 개의치 않고 면발을 입속에 욱여넣었다. 후후 불어서 식힐 틈 같은 건 없었다. 상남자라면 라면의 온전한 맛과 온도를 둘다 즐길 줄 알아야 한다.
“후우…… 치킨 먹었으면 후회할 뻔했네.”
오히려 내 치킨을 끝내 가져다주지 않은 배달 기사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바삭바삭한 핫후라이드 치킨에 가볍게 소금이나 머스타드 소스 찍어 먹는 것도 충분히 황홀하겠지만, 꼬들꼬들한 면발에 김치 한 조각 얹어서 폭풍 흡입을 강요하는 라면도 만만치 않다.
들리는가? 내 혓바닥의 미뢰를 푹 절여 버린 MSG의 하모니가? 국가에서 허락한 마약은 비단 군용 모르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퇴역병 팔자가 완전 상팔자네. 끄윽.”
라면 한 그릇을 순식간에 뚝딱해 버린 나는 배를 두들겼다. 빵빵해진 레후.
연신 서울 소식만 전하는 뉴스는 그냥 꺼버리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한국 대표 포털사이트도 긴급 속보를 알리는 뉴스로 도배되어 있을 테니 커뮤니티 사이트 위주로 살폈다.
대규모 폭동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백화점에 침투해 그 귀하다는 트러플 5% 첨가 라면을 훔쳐 왔다는 놈의 인증사진부터, 사람이 사람을 물어뜯고 있는 흉측한 혐짤로 테러하는 놈들까지 다양했다.
원래 커뮤니티 사이트라는 게 현실의 똥덩어리를 인터넷에 모아 둔 쓰레기통이라고들 하지만, 새삼 이렇게 보니 유쾌한 인생에 목숨을 건 그들이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중에서도 눈여겨봐야 할 놈들은 소위 말하는 ‘컨셉충’들이었다.
-제목 : 나 방금 상태창 뜸
-내용 : 5년 전에 2차 남북전쟁 터질 때도 안 떴는데 오늘 뜨더라 이제 나 [이세카이]로 불려가서 엘프 노예랑 파티 맺고 SSS급 용병 되는 거냐?
이세카이 이 지랄.
“하, 방송국은 이런 놈들 채용 안 하나? 인생 그 자체가 코미디인 놈들인데.”
개그맨 특채로 뽑아서 병풍처럼 세워 놓기만 해도 수신료의 가치를 느끼게 해 줄 놈들이다. 무심코 피식 웃어 버린 게 괜히 쪽팔렸다.
커뮤니티 사이트는 떡밥이 한번 돌기 시작하면 장작처럼 빠르게 불타서 화제몰이가 되기 때문에 비슷한 짓을 하는 놈들이 금세 늘어난다.
컨셉충이 스타트를 끊으면 모방 컨셉충들이 2차 웨이브를 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ㄹㅇㅋㅋ’만 치는 방관자들이 무한동력기관처럼 웨이브를 계속 돌려 주는 구조다.
그 증거로 자기도 상태창이 떴다며 함께 이세계로 떠나자는 놈이 등판하고, 자기는 사실 특수한 시계를 차고 다니는 국가 비밀 요원이라면서 이제 움직일 때가 됐다고 말하는 놈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늘부터 자신도 폭도 1일 차라면서 쇠못 박힌 몽둥이를 인증하는 놈도 있었다. 북한과 전쟁 터졌을 때 북한 수령 사진을 액자에 걸어 놓고 인증했던 모 유저가 영원한 레전드로 남았던 걸 기억한 모양이다.
갑자기 나이 26세, 무직, 대학중퇴(고졸), 개인 주택 소유자(인생유일업적)인 노말 휴먼 남성 이승권은 극심한 꼬움을 느꼈다.
인증…… 나도 인증할 거야!
“뭐 인증하지? 집에 인증할 만한 게 있나?”
광기로 얼룩진 이 분위기에 나도 동참하고 싶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여친과 함께 모텔에서 인증샷 찍어 올리는 기만충들처럼.
쓸데없이 큰 TV를 인증할까? 아니면 가죽 감촉이 예사롭지 않은 고급 소파? 그것도 아니면 다 큰 사내새끼가 뒹굴거려도 문제없는 킹사이즈 침대?
아냐. 그건 그냥 돈 좀 있어 보이는 기만충처럼 보인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평범함과 거리를 둬야 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왕 병신이 되고자 한다면 신박한 병신이 돼야 한다고. 나도 이 혼란스러운 커뮤니티 속에서 익명이라는 가면을 쓴 신박한 병신이 되고 싶다.
이미 삶에 지친 퇴역병도 집 밖으로 기어 나가지 않고 모두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유쾌한 인증!
“띵킹을 해 띵킹을…… 넌 할 수 있어 이승권!”
마침 기가 막힌 타이밍에 서로 총알이 다 떨어진 북한군과 마주했을 때 개머리판으로 후려칠지 대검을 뽑아서 멱을 따버릴지 속전속결로 판단했던 그 뇌는 지금 뭘 하는 거냐!
주인인 내가 탄수화물을 지급해 줬으면 그만큼 일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래. 생각해 보면 고작 인증샷 따위에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 대충 만든 쇠못방망이나 훔친 물건도 인증하는 놈들이 넘치는 마당에.”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독보적인 차이점을 찾아내라.
“가만, 우리 집에 쌓아 둔 물건이 엄청 많잖아.”
그제야 나는 지하실 창고에 한가득 쌓여 있는 비상 물자들을 떠올렸다. 내가 세상이 멸망하길 바라는 멸망존버충이라서 그랬던 건 아니고, 그냥 돈은 많은데 밖에 나가기 귀찮아서 대량으로 주문한 것들이었다.
혼자서 다 먹어 치우려면 족히 몇 년은 걸릴 법한 대량의 통조림과 보존식, 그리고 유통기한이 긴 인스턴트 식품과 술.
전부 밖에 나가기 귀찮아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으며, 오래 보관이 가능한 것들로 채워 둔 거다.
지하실로 후다닥 내려와 일렬로 쭉 늘어서 있는 선반의 풍경을 찍기 위해 스마트폰을 머리 높이 처들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상시였다면 그냥 서바이벌리스트 컨셉충 취급받겠지만, 지금이라면 적당히 유쾌한 아포칼립스 존버충인 척 이 흐름에 끼어들 수 있다.
제목은 대충 ‘아포칼립스에 대비한 퇴역병 식량 창고 ㅍㅌㅊ?’ 정도면 충분하겠지. 게시글 내용은 인증샷과 함께 ‘24시간 무제한 넷플러스 시청 가능해서 존버 쌉가능’이라고 쓸 것이다.
예상되는 댓글 반응은 ‘킹플릭스는 무제한 시청은 못참지ㅋㅋㅋㅋㅋㅋ’ 혹은 ‘퇴역병이 아니라 퇴역장군이었누?’ ‘└누르웨이ㅋㅋㅋㅋㅋㅋㅋ’ 정도겠지.
어느 경제 감각이 없는 부호가 만든 대형 별장이라 그런지 지하실 크기도 남달랐기 때문에 리얼함이 장난 아니다. 이제 이 인증샷을 커뮤니티에 올리기만 하면 나도 저들과 같은 동질감을 만끽할 수…….
-서버 과부하로 인해 잠시 셔터 내립니다.
“……?”
국내 최대 규모의 커뮤니티 사이트 주인장이 전례 없는 국가적 혼란에 서버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셔터를 내려 버렸다.
기껏 준비한 내 인증샷도, 다 함께 떡밥을 즐기기 위해 잔뜩 올려 뒀던 텐션도 순식간에 물거품이 됐다.
“아이 씻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