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시간이 멈추지 않듯 계절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매서운 마녀의 북풍이 잦아들고 처녀의 하얀 치맛자락처럼 산들거리는 바람이 굴속에서 폭 얼굴을 내미는 산쥐를 어루만진다.
검은 산맥에 봄이 찾아들었다. 매년 반복되는 봄이라도, 잠든 숲이 깨어나는 것은 언제나 풀꽃 같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이 피어나는 풀꽃은 장소를 가리지 않아서, 죽음이 휩쓸고 간 피육이 튄 현장까지도 형형색색으로 자라났다.
영역 다툼으로 괴멸 직전까지 이른 토굴 개미와 석굴 개미의 시체는 겨우내 내린 눈 속에서 조용히 썩어 가 다른 생명의 근원으로 섞여 들어갔다. 자연의 섭리로 인해, 검은 산맥은 언제 전쟁이 벌어졌냐는 양 평화로운 봄맞이를 시작했다.
요한나는 눈에 띄게 포근해진 봄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봄이 왔음을 실감했다.
치릇치릇. 날개의 움직임이 불과 한 달 전보다 수월했다. 겨울과 달리 바람을 타는 게 퍽 편해졌다. 앞서가는 흰개미가 그녀에게 닿는 바람을 일차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덕도 있을 것이었다.
바람결에 흰개미 특유의 체취가 묻어 나왔다. 킁킁, 코를 실룩거리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배, 고파?”
고개를 저었다.
“힘들어?”
그렇게 얘기한다면 당장 껴안고 이동할 기세다. 요한나는 잠깐 고민했다. 그들은 지금 검은 산맥의 최남단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뭐라도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흰개미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선물?”
“응. 초대받아 가는 게 아닌 데다가, 성의를 보이면 더 잘 대해 줄지도 모르잖아.”
“…….”
“게다가 넌 괜찮다고 해도, 막상 얼굴을 보면 그쪽에서 화를 낼 수도 있고.”
요한나는 등 뒤에서 가늘게 진동하는 반투명한 날개를 힐끗했다. 그들이 찾아가려는 곳은 검은 산맥의 남쪽, 사시사철 물안개가 자욱한 호수에 산다는 물푸레 요정 군락이었다.
검은 산맥에 살며 신기한 일을 많이 겪었던 그녀도 괴생물체라고 평했던 물푸레 요정. 토굴에서 흡수하고 날개가 솟았던 바로 그 물푸레 요정의 원류다.
‘내가 먹은 게 자연사한 요정의 사체라고는 하지만 동족의 사체를 달라는데 순순히 주겠냐고.’
흰개미와 달리 반쪽짜리 개미인 그녀가 날개를 유지하려면 물푸레 요정이 필요했다. 흰개미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부탁하는 입장인데 선물을 준비해서 나쁠 건 없지 않나.
흰개미는 고개를 약간 비딱하게 한 채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무심한 얼굴이 생각에 빠져드는 모습을 요한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토굴과 석굴이 무너진 후, 다시 그와 함께한 지 거의 반년이 되어 간다. 재개된 동행은 전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흰개미가 그녀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은 같으나 접촉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루에 세 번, 영양 공급을 위해 입을 맞추는 게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즉 그들은 반년 동안 한 번도 교미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산뜻하게 시선을 마주쳐 오자 흠칫한 요한나는 그가 보기 전에 재빨리 태연한 안색을 유지했다.
흰개미는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더니, 묘하게 관조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
“…….”
“요정은, 꿀을, 좋아, 해.”
* * *
흰개미는 뭐 하러 살까?
요한나는 나뭇가지 사이 튼튼하게 자리 잡은 벌집을 보며 의문에 사로잡혔다. 왜 죽지 않고 사는 거지, 하는 빈정거림이 아니었다. 진실로 궁금했다.
이따금 흰개미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군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자신이 검은 개미에게 무슨 짓을 당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스치는 눈에 가득했던 무료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동족들을 위해선 헌신한다 싶더니, 석굴 개미에게 괴멸당하는데도 무관심한 태도였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마치 태어난 이상 귀찮지만 할 일은 한다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만 해도 그렇다. 흰개미의 투명한 눈은 벌집을 털어 꿀을 얻어 내는 데 전혀 의욕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자신이 하자니까 하는 거다.
이거야 원, 인형도 아니고. 인형이라는 앙증맞은 단어를 붙이기엔 힘이 너무 사기적이긴 하지만.
“음, 내가 벌집을 따 본 적은 없어서 말이야. 그냥 떨어뜨리는 건 안 되겠지?”
요한나는 다소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겉으로 보기엔 고요해 보이나, 살짝만 건드려도 미친 듯 웅웅거릴 터였다.
벌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지만, 꼬리에 검은 반점이 있는 건 퍽 독하다고 벌꿀 술을 좋아하는 사냥꾼에게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그때 주워들었던 몇 안 되는 벌꿀 채집 상식을 떠올리며 말했다.
“일단 내가 벌집 아래에 불을 피울게. 그런 다음에 모닥불 근처에 벌집을 떨어뜨리면, 타 죽기 싫어서라도 도망갈 거야.”
믿기지 않을 만큼 무식한 방법이었다. 계획이라고 할 수 없는 방안을 지껄인 요한나도 탐탁지 않았지만 제대로 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양봉업자도 없는 상황에서 시도해 볼 방법은 많지 않았다.
“넌 여기 있어. 내가 잽싸게 해치우고 올 테니까.”
자신의 제안에 응해 준 것뿐, 관심 없는 흰개미에게 심부름시킬 생각은 없었다. 물푸레 요정을 보러 가는 것도 순전히 그녀의 필요 때문이지 않은가.
‘흰개미는 대체 뭘 원해서 날 따라다니는 걸까.’
‘좋아한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지만 금세 시들시들해졌다. 무미건조한 흰개미가 단지 그것 때문에 행동하다니, 글쎄. 그녀를 태어나게 한 사냥꾼도 그러지 않았다.
요한나는 사랑이 사람을 무엇까지 하게 하는지 아는 바가 없었기에, 누군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녀를 위해 행동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수풀 밖으로 한 발 내민 요한나는 제 손을 붙잡아 다시 앉히는 흰개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해?”
다시 일어서려 했으나 흰개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대로 앉자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묘해졌다.
그녀를 끌어 앉히는 데 성공한 흰개미는 벌집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 바보 같은 계획을 실행할 생각인가?
멍청히 생각하다가, 그가 그대로 벌집을 따자 입이 떡 벌어졌다.
“저 멍청이.”
흰개미는 저 벌의 위험성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충인의 서식지엔 벌이 살지 않기라도 한 걸까? 몸은 손톱처럼 작아도 수십, 수백의 침에 꽂히고 나면 건장한 산양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
과연, 처음에는 불길하도록 고요했던 벌집에서 벌이 한두 마리씩 빠져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웅웅, 웅웅.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잔뜩 독이 오른 벌이 침입자를 공격했다. 순식간에 수천 마리의 벌에 휩싸인 흰개미는 새카매져서 살갗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요한나는 입을 떡 벌렸다.
손을 휘휘 젓는 그를 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일으켰다. 딱 달라붙어 있는 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으나 저렇게 뒀다간 아무리 흰개미라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때 흰개미가 요한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흔들거리는 손바닥을 보고 요한나는 인상을 썼다.
“가만히 있으라고?”
흰개미는 대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뭘 가만히 있어. 저 멍청이 같은 게.
들은 척도 안 하고 요한나가 움직이자 흰개미가 고개를 떨구었다. 마치 한숨이라도 쉬는 모양새라 발끈한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로 솟구치는 흰개미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걸음이 멈추었다. 벌 떼가 그의 뒤를 따라 솟구치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벌 떼를 뒤에 단 흰개미는 금세 점처럼 변했다. 요한나의 눈이 심각해졌다.
“쟤는 사실은 그렇게 똑똑하지 않을지도 몰라.”
흰개미는 차 한 잔을 비울 만큼의 시간이 흘러서야 나타났다. 손에는 크기가 조금 줄어든 벌집이 들려 있었다. 벌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요한나는 벌집은 쳐다도 보지 않고 흰개미만 응시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고, 손에 든 벌집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으로 잘린 벌집에서 진득한 꿀이 뚝뚝 떨어졌다. 냄새를 맡은 벌이 쫓아오면 곤란했다.
요한나는 대충 치맛자락을 쭉 찢어 벌집을 감싸고는 어깨에 멘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뿌듯한 얼굴을 한 흰개미를 흰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표정에 흰개미가 의아한 듯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왜?”
“…….”
“벌집.”
벌집을 갖고 왔는데 왜 그런 반응이냐는 뜻이다. 요한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그다지 기뻐하지 않자, 흰개미의 눈이 미묘하게 처졌다. 그를 감싼 청량한 공기도 약간이지만 무거워졌다. 시무룩하던 흰개미는 뺨에 닿는 온기에 눈을 끔벅였다.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요한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의 뺨과 콧잔등 이곳저곳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괜찮아? 쏘인 데는 아프지 않고?”
흰개미는 다소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응.”
“아프지 않다고? 대단하네. 피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침이 꽂히지 않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침독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감탄한 요한나가 걱정을 떨친 얼굴로 손을 떼려고 하자, 흰개미의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아.”
“…….”
“……아파.”
어딘지 늦은 대꾸가 낯설어 요한나는 어리벙벙한 얼굴을 했다.
“어?”
“아픈, 것, 같아.”
“방금까지 괜찮다며?”
멈칫하다가 입술을 달싹인다.
“괜, 찮지만, 좀, 따, 가워.”
“둔한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많이 아픈 거 아니야?”
뭔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흰개미가 이런 식으로 통증을 호소하는 건 처음인지라 요한나는 덜컥 걱정되었다. 독이라는 게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니 늦게나마 통증이 올라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침독이 그렇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지만.
요한나는 흰개미를 끌고 물가에 갔다.
“눈 감아.”
얌전히 눈을 감는 그의 얼굴에 차가운 개울물을 끼얹었다. 이마와 뺨, 목덜미, 드러난 팔뚝과 손. 벌들이 다닥다닥 붙었던 살갗에 물을 끼얹고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제 손에 몸을 맡기고 있는 흰개미를 보자 묘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흰개미를 이런 식으로 돌봐 주는 건 처음인가?’
늘 씻김을 당하는 입장이었던지라, 반전된 상황이 색달랐다. 실없는 웃음이 나오는 것이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킥킥거리는 웃음을 참고, 요한나는 생각보다도 더 꼼꼼하게 그의 피부를 물로 씻어 내었다.
그런데 물을 머금어 촉촉하게 빛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 뿌듯한 한편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독 때문에 열 오른 피부를 식히고, 자극받은 상처를 진정시키려는 의도였는데, 물을 다 퍼부은 후에도 체온은 전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괜찮은 것 같은데…….”
아픈 거 맞아? 흰개미가 ‘아픈 척’을 한다는 선택지를 전혀 떠올리지 못한 요한나는 의심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직후, 콧속을 훅 파고드는 향기 입자에 입매가 빠르게 굳어졌다. 턱을 치켜들고 콧등을 실룩였다. 착각이 아니다.
“이거……?”
홱, 고개를 돌려 흰개미를 보자 그는 이미 그녀보다 먼저 냄새를 감지했는지 태연한 얼굴이었다. 요한나는 가슴이 벌렁거리는 감각에 끄응, 곤란한 소리를 냈다. 신경을 타고 심장까지 흘러 온몸을 달뜨게 하는 냄새.
교미 페로몬이다.
“근처에 개미가 있나?”
흰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혼롓날, 인, 모양이군.”
“이 근처에서?”
신기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요한나는 문득 미간을 좁히고 흰개미를 보았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끔벅였다.
“뭐야?”
요한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페로몬, 뭐냐고.”
이건 공주들의 페로몬이 아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짙은, 흰개미의 교미 페로몬.
하아. 입술 새로 달뜬 숨이 흘렀다. 요한나는 난감해졌다.
‘반응이 너무 빠르잖아.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흰개미는 느리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몸짓에 기가 막혀 그녀는 실소를 흘렸다. 왜 그러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너무 오랫동안 교미하지 않았다. 자신이 꺼렸기 때문이다. 거부한 덴 사실 대단한 이유가 있진 않았다.
흰개미와 헤어지기 전 나누었던 ‘정사’를 떠올리면 두려운 마음부터 들었다. 그때의 쾌감이 너무 강렬해서, 섣불리 몸을 섞는 것이 두려웠다. 그에 거부감이 들었다. 꿈까지 꾸지 않았던가. 흰개미 대신 레놀드를 발견한 일까지 떠올린 요한나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저 때문인 줄 알았는지 흰개미의 교미 페로몬이 주춤했다. 눈치를 살피는 그를 보며 요한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흰개미가 내보내는 교미 페로몬은 끈끈할 정도로 진득하고 농밀해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기가 더 힘들다.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요한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러 더 무뚝뚝하게 굳혔다.
사실 두려움과 거부감은 그간 상당히 희석되었고, 그 대신 억눌렸던 반작용인지 욕정이 슬금슬금 머리를 내밀던 상태였다.
한 번도 맛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인식해 버린 쾌락을 잊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생각이 반쯤 기울었지만, 요한나는 냉랭한 눈빛을 풀지 않았다. 혹하는 마음과 별개로 이런 식으로 구는 흰개미가 괘씸했다.
“어지간히 하고 싶었나 보지? 그럼 얘기하지 그랬어?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페로몬부터 풀지 말고.”
“그야 네가, 싫어, 하니까.”
“…….”
“이런, 건, 인간, 식이, 아닌 건가?”
충인은 숨기거나 속일 필요가 없어 솔직한 편이다.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당장에 몸을 들이밀었을 텐데, 흰개미가 이만큼이나 욕구를 티 내지 않았다는 건 그의 기준에서 ‘인간’처럼 굴려고 했단 것이다.
요한나는 순식간에 풀어지는 마음을 느끼고 헛기침했다.
“그래서 날 강제로 발정시키고 싶으셨다.”
불온한 뉘앙스에 흰개미의 홍안이 파충류의 것처럼 가늘어졌다. 자신의 의도를 헤아리느라 머리를 굴리는 게 뻔히 보인다. 요한나는 화가 풀리지 않은 척 눈에 힘을 주었다.
“너랑은 절대 안 해.”
“절대?”
충격을 받은 얼굴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아 볼 안쪽을 재빨리 깨물었다. 이렇게 안달복달하면서 그동안 그렇게 아닌 체를 했다 이거지.
“네 멋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거였지 이런 식으로 굴라는 건…….”
짐짓 준엄하게 훈계하던 요한나는 폭발하듯 짙어진 페로몬 밀도에 말을 멈추었다. 멀리서부터 흘러오던 페로몬이 급격히 강렬해지고 있었다.
‘한둘이 아니야. 뭐지?’
당혹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뭐가 오고 있는 거야?”
불쾌하도록 달콤한 냄새에 코가 아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코를 움켜쥐었다. 설탕물처럼 끈적거리는 무형의 공기가 온몸을 음탕하게 쓸어 댔다. 다리 사이를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수개미들의 페로몬과는 달랐다.
‘공주다.’
공주가 다가오고 있다. 요한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우연인가? 아니면 이쪽을 눈치채고 직접?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 본능적으로 골치가 아플 것을 예상한 요한나는 흰개미의 팔을 붙들려고 했다.
그때, 숲 한복판에 개미가 떨어져 내렸다.
쿵!
요한나는 뻣뻣해진 목을 쳐들었다. 그들의 앞에 ‘공주’가 있었다.
그녀는 흰개미만큼이나 하얀 생김이었다. 거미줄로 엮은 듯 윤기가 흐르는 반투명한 옷이 안쪽의 실루엣을 노골적으로 비추었다. 치맛자락이 하늘하늘, 유혹하듯 흔들렸다.
석굴 개미와 토굴 개미와도 달랐다. 남쪽의 공주는 날개가 요한나의 것보다 작고 몸집도 아담한 편이었다.
요한나는 땅에 떨어진 그녀가 미끄러지듯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단단히 경계하는 태세를 갖추는데, 가까워지는 공주의 얼굴이 이상했다. 꽃물을 칠한 듯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벌어진 입술로 가쁜 숨을 내쉰다.
요한나는 저를 향하는 눈동자가 두려운 듯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뭐야. 저게 공주라고?’
인간 세상에서 공주라는 어감이 주는 연약한 느낌과 달리 개미 공주는 사납고 강인하다.
예상과 다른 존재에 요한나가 당황하는 사이, 하얀 공주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직진했다. 작은 날개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세차게 펄럭거렸다. 그러고는 흰개미에게 찰싹 달라붙는다.
“어?”
무슨 상황인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요한나는 어리둥절하게 그녀와 흰개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끝이 아니었다.
쿵!
쿵!
쿵!
곧바로 비슷한 생김새의 공주들이 대거 나타났다. 그들은 역시 요한나는 두려운 눈으로 보고서, 흰개미는 꿀이라도 발라 놓은 양 냅다 몸을 붙여 댔다.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큰 동공이 이질적이나, 인간의 기준으로 퍽 아름다운 외양을 하고서 몸을 꼬며 근육질 팔뚝에 제 가슴을 비볐다.
성감을 북돋는 교미 페로몬이 없더라도 충분히 야릇한 광경을, 요한나는 멍청히 응시했다.
어째서 흰개미에게?
뒤늦게 그들이 흰개미의 교미 페로몬에 이끌렸음을 깨달았다.
“여기 공주들은 코가 좋은가 봐.”
그 말이 조금 얼빠지게 들려서, 요한나는 기분이 저조해졌다. 다섯 명이나 되는 공주들이 달라붙어 있는데도 흰개미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았다. 기분이 더 나빠졌다.
“하아, 하아.”
공주들이 흰개미의 목덜미에 대고 뜨거운 숨을 퍼부었다. 근육의 갈라진 홈을 따라 나비 다리같이 느릿한 손가락이 훑어 내렸다. 그 손끝에 요한나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공주들의 흥분한 페로몬은 눈으로 보일 만큼 짙어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저릿해졌다.
“하아, 후으, 하아.”
공주들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흰개미의 페로몬을 흡입했다. 요한나는 성감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어쩐지 흰개미와 둘이 있을 때보다도 흥분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공주들이 여기 있으니 곧 수개미들도 오겠네.”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자 흰개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끝이었다. 요한나는 점점 짜증이 났다.
“왜 가만히 있는 거야?”
“공주, 자극, 하면, 귀찮아져.”
공주들은 단순히 강한 개미의 교미 페로몬에 홀려 있는 것뿐이니 무리하게 떼어 냈다가 전투태세라도 갖추면 곤란할 터였다.
한 번뿐이지만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공주의 혼롓날을 떠올린 요한나는 어렵지 않게 납득했지만, 기분은 다른 문제였다.
공주의 가슴이 흰개미의 팔뚝에 뭉개지자 흰개미가 그녀를 흘끗했다. 요한나의 눈꼬리가 위로 꺾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미하고 싶은 건 아니고?”
흰개미가 팔짱을 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개가 슬쩍 기울어진다. 그리고 끄덕이자, 요한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험한 말이 혀끝에 당도하고, 튀어 나가려는 찰나.
“하고, 싶어.”
“…….”
“요한나.”
“…….”
“너랑.”
공주들을 향할 때는 귀찮은 것을 보듯 심드렁했던 홍안이 열기로 눅진눅진했다. 페로몬으로 수작을 부리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다고, 요한나는 인정했다.
“그럼 얼른 걔들 떼어 내고…….”
흰개미의 등에 매달렸던 공주가 그의 사타구니 사이로 파고들자 요한나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하얀 손이 흰개미의 모피를 거침없이 헤치고는 이미 반쯤 서 있는 성기를 붙잡았다. 공주들의 숨 막히는 교미 페로몬을 정통으로 흡입했으니 아무리 흰개미라도 본능적으로 자극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합리적으로 생각했지만, 역시 기분은 다른 문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주가 흠뻑 젖은 제 아래에 성기를 꽂으려 했다. 간신히 평정을 찾고 있던 요한나는 눈이 뒤집혔다.
빡!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바로 공주의 이마에서.
주먹의 얼얼한 통증을 느끼며, 요한나는 뒤늦게 공주의 머리를 밀어 내려는 흰개미의 손을 발견했다.
상식적으로 흰개미가 공주가 멋대로 행동하길 내버려 두지 않을 텐데. 흰개미의 커진 눈을 보자 급격하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힉…….”
기묘한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얻어맞은 공주의 눈이 울먹울먹했다. 일반적인 개미에 비해 부드러운 생김과 어리숙한 표정에 꼭 죄 없는 아이를 괴롭히는 듯해서 요한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저기.”
간신히 말문을 틔웠을 때 공주가 울음을 터뜨렸다.
끄아아아아아아아!
울음이라고 표현했지만, 아이가 엉엉 우는 것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은 공기가 찢겨 나가는 비명이었다.
요한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공주 한 명이 울자 다른 공주들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교미 페로몬이 방향을 바꾼 창처럼 삽시간에 뾰족해졌다. 올망졸망한 눈도 귀신 같은 형상이 되었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전투 페로몬에 요한나는 품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꺼냈다. 휘두르려는 생각보다는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 순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든 요한나는 하늘을 빼곡하게 메우는 어마어마한 개미 떼에 입을 벌렸다.
차릇차릇. 치릇치릇.
날갯짓 소리가 한데 섞이자 귓전을 웅웅 울려 댔다. 꼭 벌집을 건드렸을 때의 벌 떼처럼.
기가 질린 요한나의 낯빛이 해쓱해졌다. 울부짖는 공주를 발견한 개미들이 꿈에 보기도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부르는 것처럼 공주들의 울부짖음이 커지자 페로몬에 반응한 수개미들이 눈을 표독스럽게 뜨고 요한나에게 달려들었다.
츠즈즈즈즛!
요한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비수를 가슴까지 쳐들었다. 머릿속에 동선이 그려졌다. 선두 수개미의 목을 따고 그 육신을 방패 삼아 다른 공격을 막으며 복잡한 나무 사이로 뛰어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동선대로 움직이기 전에 몸이 휙 떠올랐다.
팍!
흰개미는 요한나를 품에 안고 달려드는 수개미의 머리를 터뜨렸다. 그러고는 손날을 세워 가볍게 휘둘렀다. 보기에는 가벼웠지만, 손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부나방처럼 달려들던 수개미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바닥을 뒹구는 개미들의 목젖이 있는 부위가 쩍 벌어지며 피를 내뿜었다. 전투 페로몬에 고무된 개미들이었지만 코끝에 와 닿는 죽음의 악취에 본능적인 뒷걸음질을 쳤다.
흰개미는 차분한 얼굴로 그들을 갈라 유유히 움직였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긴장이 되지 않기도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도 요한나는 땀을 뻘뻘 흘렸다. 흰개미의 빤한 시선에 뺨이 따끔거렸다.
“갑자기, 왜, 그랬어?”
“지금 그런 거 물어볼 때야. 으악! 쟤네 달려오잖아!”
잠시 머뭇거렸던 수개미들이 악에 받쳐 달려들었다. 위기 상황이기는 했지만, 요한나는 과할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흰개미는 넘어가지 않고 성가신 듯 달려드는 수개미의 머리를 부수었다. 사방에 피육이 후드득 떨어졌다.
다른 개미보다 덩치가 큰 수개미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쿵!
보통의 수개미가 아니라 장군 계급이었다. 그가 허무하게 죽자 소리 없는 경악이 수개미들을 휩쓸었다. 압도적인 힘은 전투 페로몬에 신경 중추가 마비된 개미들에게도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요한나는 그들의 눈에 박힌 공포심을 보고, 그들이 다시 흰개미에게 덤비지 못할 것을 알아챘다.
흰개미에게 몸을 비비적대던 공주 개미들은 어느새 제 호위 수개미에게 착 달라붙어 있었다.
생명은 소중하다는 명제를 따져 보면 이쯤에서 끝나는 게 좋은 일이지만, 또한 곤란한 일이었다. 요한나에게는.
“왜, 그랬어?”
집요한 새끼.
속으로 이를 간 요한나는 못 들은 척 콧잔등을 찌푸렸다.
“으, 비린내. 호수로 가자. 좀 씻어야겠어.”
“말, 안, 하면, 안, 갈 거야.”
“…….”
“계속, 이렇게, 있을, 거야.”
요한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가 어린애야?”
흰개미는 묵묵부답이었다. 뚱한 얼굴에 원망이 어리자 요한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수개미들이 웅성거렸다. 왜 안 가냐는 불만 어린 시선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양 떼 무리에 죽치고 있는 눈치 없는 늑대가 된 기분이었다. 더는 딴청을 피울 수가 없었다.
집요한 놈. 눈치 없는 놈. 약이라곤 쓸데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늑대 가죽 같은 놈……. 요한나는 속으로 욕설을 쏟아 내며 잔뜩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다른 개미들과 뒹굴어 대는 걸 누가 용납할 줄 알고.”
흰개미의 눈이 그녀의 입술에 못 박혔다.
“넌 내 괴물이야.”
말해 놓고 보니 뉘앙스가 이상했다. 흰개미의 눈이 묘하게 변하자 요한나는 서둘러 부연했다.
“그러니까 개. 개 같은 존재라고. 내 말만 들어야 하는, 그래, 노예 같은 거. 알겠어? 노예 알지, 노예?”
“알아.”
흰개미가 빙그레 웃었다. 그답지 않게 극명한 표정 변화였다. 얼굴 근육이 부드럽게 풀리며 완벽한 미소를 그리니, 잠깐 멍해졌던 요한나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요한나, 것.”
노예는 주인의 소유다. 그러니 그 말이 맞기는 맞는데 또 뉘앙스가 이상했다. 라나 일행에게 그 꼴을 겪었으면서도 멍청한 놈이 노예가 뭔지 아직도 제대로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저렇게 기쁘다는 듯이 웃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와 눈이 마주친 흰개미가 또 환하게 웃자 요한나는 발끈해서 길길이 날뛰었다.
“좋아하지 마. 좋아하지 말라고!”
“응응.”
그러면서 나직하게 뭐라고 웅얼거렸다. 그게 콧노래라는 것을 깨달은 요한나는 경악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이 멍청한 놈아!”
“응, 좋아, 요한나.”
“제발 제대로 들어.”
그 후로 무슨 말을 해도, 흰개미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제풀에 지친 요한나는 축 늘어져서 흰개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드러난 귓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공포에 오들오들 떨던 남쪽 개미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 *
풍덩!
찬 기운이 뼛속까지 침투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도 육체의 더러움이 모조리 씻겨 나가는 기분이 퍽 상쾌했다.
푸우!
얼굴부터 빠져나온 요한나는 제법 생기로운 손놀림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쳐 냈다.
첨벙, 첨벙.
물 튀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흰개미가 물가에 앉아 물에 넣은 다리를 휘적거리고 있었다. 교미 페로몬이 가득 묻었는데도 딱히 불편하지 않은지, 꽤 심상한 얼굴이다.
요한나는 비딱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 공주들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던 거 아니야?’
물론 흰개미의 습성을 보면 딱히 흑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쪽에 가깝겠지만 기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기분이.
이제는 익숙한 그의 아무 생각 없는 모습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의 행동을 통제하고 싶어서일까?
요한나는 물뱀처럼 익숙하게 물가로 헤엄쳐 나가며 생각했다.
흰개미에게 갖는 마음은, 바렌타에게 품었던 마음과 같지는 않았다.
바렌타에게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였던 세니아는 그가 마음이 없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약혼 관계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던 이슬라를 만났을 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끝없이 슬플 뿐이었다. 바렌타의 마음이 그녀에게 있다는 것에, 자신보다는 그녀가 누가 봐도 더 잘 어울리는 짝이라는 것에.
그러나 흰개미를 대상으로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흰개미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모르지만, 그가 자신을 떠나는 상상은 영 들지 않아서일까?
공주들이 흰개미에게 치댔던 장면을 떠올리자 슬프기보다는 울컥, 분노가 치솟는다.
흰개미에게 갖는 감정은, 바렌타를 향했던 것보다 더 파괴적이고 이기적이다.
풍―덩!
발목이 잡힌 흰개미가 호숫가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머리끝까지 잠기도록 어깨를 발로 밟고 꾹꾹 눌렀다. 그러다가 그가 몸부림을 치거나 반항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발에서 힘을 뺐다.
보글보글. 물방울이 솟아올랐다. 흰개미는 얌전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다.
‘수영도 못 하는 놈이 폐활량은 자신이 있다는 건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
숨통이 막히기 충분한 시간이 지나도 흰개미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요한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모르는 새 눈썹은 날카롭게 치솟아 있었다.
결국 물속으로 손을 넣어 흰개미의 멱살을 붙잡아 위로 끌어 올렸다. 순순히 끌려 나온 흰개미는 물가에 앉아 옅은 기침을 했다. 숨을 참고 있었던 게 쉬운 일은 아니었는지 창백한 얼굴이 더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하얀색 속눈썹에서 보석 같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지상에서 최강인 흰개미라지만 물은 낯설어한다.
‘그런데도 반항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요한나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눈을 가늘게 떴다. 흰개미의 붉은 입술에 어린 반짝이는 물방울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째서 라나가 흰개미를 그녀의 노예라고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한나는 불시에 그의 멱살을 잡아채고 뒤로 젖혔다.
부드러운 풀 위에 순순히 몸을 누이는 흰개미의 붉은 눈동자가 요한나에게 박혀 들었다. 맑고 투명한 홍안을 보며 요한나는 바지를 벗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흰개미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왔다. 그 눈빛에 요한나는 공주들의 교미 페로몬보다도 흥분이 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 달라.’
바렌타는 한 번도 깔아뭉개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걸.
“요한나?”
요한나는 몸을 숙여 흰개미의 하얀 가슴께에 고개를 파묻었다. 젖은 모피를 벗기고 코를 파묻으니 차가운 물 냄새가 났다. 그 사이로, 미처 씻겨지지 않은 불쾌한 냄새를 맡았다.
“네 몸에서 암컷의 냄새가 나.”
“공주들, 교미, 페로몬.”
요한나가 코끝으로 가슴을 비빌 때부터 뻣뻣하게 굳어진 흰개미가 속삭였다. 요한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술을 벌려 목과 어깨 사이의 우묵한 살을 강하게 깨물었다. 흰개미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응. 그런데 페로몬이 묻도록 내버려 둔 건 네 탓이잖아.”
“…….”
“네 잘못이야.”
요한나는 제 목소리가 끈적하게 잠겨 드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육체가 흥분함에 따라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교미 페로몬이 깔고 앉은 수컷을 파고들었다.
흰개미는 눈매를 가늣하게 접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잘, 안, 보여.”
역광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흰개미에게 어둑하게 보이리라.
“넌 날 볼 필요 없어.”
“…….”
“나만 보면 되니까.”
뻔뻔하게 지껄인 요한나는 뒤로 손을 뻗어 흰개미의 성기를 붙잡고 흠칫했다. 성기가 꼬챙이처럼 단단하게 서 있었다.
언제부터? 공주들이 몸을 비비며 교미 페로몬을 퍼부었을 때보다도 더 꼿꼿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요한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역광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을 흰개미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점차 뜨거워지는 홍안을 응시하며 꺼떡거리는 그것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자 흰개미가 가늘게 신음했다. 낮게 깔리는, 짐승이 목을 울리는 듯한 소리에 등골이 저릿하게 달아올랐다.
요한나의 척척한 손이 흰개미의 몸 중에서 제일 뜨거운 살에 착 달라붙었다. 적당히 힘을 주고 손장난을 쳤다.
“넌 내 거라고 했잖아. 노예는 주인의 허락 없이 함부로 몸을 내돌리면 안 된대.”
“…….”
“이걸 다른 데 넣었다간 잘라 버릴 거야. 이해했어?”
싸늘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자신이 듣기에도 흥분이 넘실거리는 목소리였다. 요한나는 시선이나마 냉정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녀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흰개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드러난 목에는 굵은 핏줄이 솟아 있었다.
“그래.”
바닥을 기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대꾸했다.
“그렇게, 할게.”
“…….”
“요한나, 안에만, 들어갈, 거야.”
“네가 원할 때가 아니야. 내가 원할 때 그렇게 할 거야.”
‘잘도 지껄이는군, 나.’
흰개미는 잠시 원망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가 요한나가 성기를 힘주어 쥐자 미간을 좁혔다.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렀다.
“하아, 요한, 나…….”
탁탁, 탁탁탁.
요한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리드미컬한 손놀림에 물기 젖은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귓전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그녀는 일어나려고 몸을 움찔하는 흰개미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하나뿐인 홍안이 번뜩였다. 당장이라도 해치우고 싶다는 양 짙어지는 눈빛에 요한나는 달뜬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흐응…….”
목으로 신음을 울리자 뭐에 자극받았는지 흰개미의 팔뚝이 꿈틀거렸다. 엉덩이를 붙잡는 손을 찰싹 치자 흰개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의 몸을 녹일 듯이 핥아 대는 변태 성욕자 주제에 퍽 순진한 표정이었다.
“아, 요한, 나. 요한나.”
할 수 없이 손을 내리는 그를 보고 요한나는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제 손 아래에서 흥분해서 몸을 꿈틀거리는 흰개미를 보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울컥해서 홧김에 행동한 것치고는 수확이 크다.
타의에 의한, 상황에 의한 강제적인 교미만 해 왔던 요한나는 새로운 장난감을 알게 된 아이처럼 색사의 쾌감에 손을 뻗어 갔다.
엄지로 흰개미의 두툼한 성기 끝을 문지르고 손가락을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적절히 조였다 풀었다 하며 기둥을 훑자 흰개미의 숨이 좀 더 거칠어졌다.
“쌀, 것, 같아. 요한, 나.”
애타는 눈으로 흰개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안에 처넣고 싶다는 뜻이 노골적으로 비쳤다. 흰개미의 몸으로 장난을 치는 동안 요한나도 젖어 들어 아래가 축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도 이 흉기 같은 것으로 배 속을 휘젓고 싶었지만, 지금은 더 큰 즐거움을 위해 인내를 발휘해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 증거로, 습해지는 흰개미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불끈 달아올랐다.
“응. 내 손안에서 가.”
“…….”
“싸 봐, 흰개미.”
물론 혼자 사정하는 흰개미도 보고 싶고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말을 뱉자마자, 손바닥에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뿜어져 나왔다. 요한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흰개미의 근육이 갈라진 배가 꽉 조여들었다. 생물이 아닌 돌로 만든 조각을 깔고 앉은 것 같았다.
크릉. 꽉 다문 입술 아래, 툭 튀어나온 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요한나는 그의 반응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덩어리진 희뿌연 액체가 온 손에 다 묻어 있었다. 손가락을 쫙 편 채 둘러보자 뚝, 하고 느릿하게 낙하해 흰개미의 굴곡진 가슴에 떨어졌다. 얄궂게도 분홍빛 젖꼭지 근처다.
요한나는 저도 모르게 젖은 손을 가져가 체액을 비벼 보았다. 손이 닿자 움찔하는 가슴에 흥미가 돋아 그 주변에 체액을 펴 바르듯 문질렀다. 정점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손가락을 움직이다 툭, 예고 없이 웅크린 좁쌀처럼 작은 정점을 건드렸다.
흰개미의 반응은 컸다. 대뜸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릉, 목을 울린다.
외면적으로는 인간과 다름이 없는데 본능이 앞서니 맹수가 따로 없다. 요한나는 잠깐 놀랐지만, 곧 쌀쌀맞게 그의 손을 털어 냈다.
“나한테 손대란 말은 하지 않았어.”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속내를 숨기고 차가운 눈을 하자 흰개미가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는 손과 달리 일그러진 눈동자는 마뜩잖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요한나는 모른 척하며 검지로 젖꼭지를 꾹 눌렀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을 상기하며 맘껏 비볐다. 크기가 작아 손가락으로 집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혀를 차며 대신 허전한 다른 쪽 젖꼭지를 혀로 핥았다. 몸에 잔뜩 힘을 주며 자극을 버티던 흰개미의 상체가 크게 튀어 올랐다.
그 반응이 재미있어 요한나는 혀로 젖꼭지를 콕콕 찌르고 젖은 살갗에 하아, 입김을 퍼부었다. 흰개미의 몸이 바르르 떨리자 전율이 흐르는 것처럼 머릿속이 오싹했다.
“하.”
요한나는 상체를 일으키고 흰개미를 내려다보았다. 한쪽 가슴은 백탁액에 젖어 번들거렸고, 다른 가슴은 그녀의 타액으로 축축하다. 분홍빛이었던 정점은 하도 괴롭혀진 나머지 살갗이 벗겨질 듯 붉게 달아올라 있다.
흐으. 홍조를 띤 아름다운 얼굴이 잔뜩 억누른 숨을 토해 냈다. 터질 것처럼 붉어진 홍안이 그녀를 주시했다. 먹잇감을 노리고 도사리는 맹수처럼. 하지만 결코 멋대로 손을 올리진 않는다. 그저 애타 하며 기다릴 뿐.
맹세코, 그녀가 보았던 것 중 가장 자극적인 장면이었다.
요한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이 뜨거워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열기는 비슷했으나 분노와는 결이 다른, 극도의 흥분이 몸을 잠식했다.
엉덩이를 슬금슬금 뒤로 물리자 탁, 하고 뭔가 닿았다. 어느새 꼿꼿하게 기립한 성기가 그녀의 벗은 엉덩이골에 찰싹 달라붙었다.
뜨겁고 부드럽고, 단단한 감촉.
요한나는 무심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대로 엉덩이를 들고, 곧추선 성기를 깐 채 부드럽게 몸을 내렸다.
흰개미의 시선이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좇고 있었다. 기세 좋은 초반과 달리 볼기로 느껴지는 성기의 감촉에 요한나는 잠깐 주춤했다. 한 번 사출했음에도 두툼한 양감은 본능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요한나는 바로 삽입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음부 아래에 그의 성기를 깐 채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였다. 이미 새어 나왔던 애액으로 미끄럽게 움직였다. 뜨거운 살결이 부딪치자 그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녹진하게 달아올랐다.
퍽!
흰개미가 허리를 튕겼다. 요한나는 두 손을 뒤로 짚어 허리만 움직인 채 달뜬 숨을 몰아쉬었다.
흰개미의 숨이 위험스럽게 거칠어졌다. 허공에 떴던 시선을 아래로 끌어 내린 요한나가 검붉게까지 보이는 흰개미의 홍안을 주시했다.
“가만히, 있어.”
“흐으…….”
“착하지.”
“하…….”
흰개미가 입꼬리를 올렸다. 화가 난다는 듯,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비웃는 듯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미소였다.
착하다고 한 건 좀 그랬나? 겸연쩍었지만 잡념은 곧 열기에 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느새 행위에 열중한 요한나는 간질간질하게 올라오는 쾌감을 좇아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고는 클리토리스와 갈라진 성기가 한 번에 비벼지도록 툭 튀어나온 흰개미의 성기에 대고 정신없이 비벼 댔다.
느끼는 표정이 흰개미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요한, 나. 그만.”
요한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흰개미를 응시했다.
“흐, 터질, 것, 같다.”
입까지 벌린 채 허리를 흔들었던 요한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고 상체를 세웠다. 엉덩이를 다시 띄우자 애액으로 흠뻑 젖은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말대로 끄트머리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게, 조금만 더 자극하면 사출할 기세였다.
이성을 잃었던 흔적이 조금 창피해졌지만 이미 흥분으로 벌게진 얼굴은 다행히 티가 나지 않았다.
‘좀 더 기분 좋고 싶어.’
무심코 입술을 핥자 흰개미의 시선이 따라왔다. 흰개미는 꼼짝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건 자신인데 저 시선 때문에 먹잇감이 된 기분이다.
역시 이놈은 벌이 필요해.
속으로 중얼거리며 흰개미의 성기 기둥을 붙잡아 제 구멍에 맞추었다. 뭐라도 넣어도 될 정도로 흠뻑 젖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크기는 ‘뭐라도’에 해당이 되지 않아 요한나는 끄트머리만 살짝 넣었다가 뺐다. 정상위로 해도 버거웠는데 이 자세는 더 힘들 테니 조금씩 안쪽을 넓힐 생각이었다.
요한나는 조금씩 더 깊이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반쯤 기둥을 삽입했다가 빼려 했을 때였다. 흰개미가 불시에 허리를 들어 올렸다. 박혀 있던 성기가 안쪽을 푹, 찔렀다.
“하악!”
급작스러운 충격에 신음한 요한나는 눈을 치뜨고 흰개미의 기둥을 꽉 붙잡았다.
“그만!”
손을 내려 팽팽하게 당겨진 고환을 쥐어뜯을 듯 붙잡자 흰개미가 허리에 힘을 뺐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기는 했으나 다시 얌전해진 흰개미를 주시하며 요한나는 다시 성기를 넣었다 뺐다.
충분히 안쪽이 여유로워진 이후에도 몇 번 더 반복한 것은, 흰개미를 더 괴롭히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더 참기 어려워진 요한나는 황급히 흰개미의 것을 온전히 속에 품었다.
“흐으!”
오래 공을 들였음에도 흰개미의 끄트머리가 닿았을 배 속이 저릿저릿했다. 혹시나 싶어 손으로 배를 더듬자 배꼽 바로 아래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후. 흰개미가 신음을 흘렸다. 요한나는 그를 흘끗하고는 장골을 붙잡고 천천히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흐읏, 흐.”
흰개미의 억눌린 신음을 듣는 동안 점차 빨라지기 시작한 허리 짓은 마침내 팍팍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해졌다.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다가 위아래로 팡팡 엉덩이를 내리찧으며 요한나는 가까워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쾌감을 갈구했다.
찰박찰박. 젖은 성기끼리 마찰했다가 떨어지는 음란한 소리가 고요한 호숫가를 울렸다. 요한나가 온몸의 무게를 이용하여 내리찧는데도 흰개미는 조금도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그녀의 힘과 무게를 거뜬히 견디어 냈다.
다만 미간은 미미하게 좁혀져 있었는데, 깊어진 주름은 허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답답함에서 기인했다. 움찔거리던 손이 결국은 요한나의 허벅지를 붙들었다.
하늘을 향했던 요한나의 시선이 흰개미에게 와 닿았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그러나 전과 달리 그의 손을 쳐 내지는 않았다.
“하, 하아. 좋, 좋아. 좋아. 흑, 하아.”
거친 호흡과 달콤한 신음을 흘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흰개미는 핥는 듯한 눈으로 제 위에서 허리를 흔드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팍팍 내리찧자 교접 부위에서 투명한 물 몇 방울이 튀었다. 눈을 내린 흰개미는 맞닿는 거웃 사이 불그스름하게 드러난 요한나의 성기를 응시했다.
소리 없이 손을 뻗어 젖은 살점을 젖혔다. 새초롬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살점을 단단한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자 요한나의 몸이 퍼뜩 튀었다. 안쪽에 힘이 들어가며 성기를 강하게 압박했다.
흰개미는 혀로 입술을 할짝거리고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클리토리스를 좌우로 강하게 쳤다. 요한나가 허리를 활처럼 휘며 고개를 젖혔다.
“하윽……!”
질이 마구 떨리며 흰개미의 성기를 쥐어짤 듯 조였다. 덩달아 신음한 흰개미는 집요하게 요한나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얼굴에 떠오른 홍조. 열기 띤 눈과 눈이 마주친 요한나는 안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아아!
숲이 떠나가라 교성을 지른 요한나가 목을 꼿꼿이 세운 채 바들바들 떨었다. 흰개미도 그녀의 안에 사출했다. 완연한 흥분에 요한나의 미끈한 몸이 안 그런 데 없이 발갛게 물들었다.
“미치, 겠군.”
방금 쌌는데도 성기가 다시 힘을 얻어 빳빳해졌다. 흰개미는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클리토리스를 강하게 문질렀다.
“하앗!”
요한나가 몸을 뒤틀자 풍만한 가슴이 출렁거렸다. 붉어진 살덩이가 눈앞에서 흔들리자 흰개미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잡아 아래에 눕혔다.
요한나의 붉어진 눈가 아래로 생리적인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쾌감의 여운에 젖어 제정신이 아닌 그녀를 흰개미가 형형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잠깐, 흰개미, 잠깐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흰개미를 보며 요한나는 뒤늦게 손을 휘저었지만, 힘이 빠져 어깨에 얹어진 수준이었다. 제 손짓이 저지가 아닌 자극이 되었다는 것을 요한나는 금방 깨달았다. 다리가 활짝 벌어졌기 때문이다.
* * *
마지막 정사가 끝났을 때는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크진 않아도 체온을 북돋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근처의 호숫가에서는 물이 찰랑찰랑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숲에 잔잔히 퍼져 나갔다.
흰개미는 아기를 안듯이 요한나를 안아 들고 체액으로 범벅이 된 몸을 꼼꼼히 씻어 냈다.
물에서 빠져나온 그는 요한나의 턱을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는 한 손으로만 배낭을 뒤적여 모포를 꺼내 땅에 깔았다. 그러나 그대로 그녀를 눕힌다면 모포가 금방 젖어 버리고 말 터였다.
마른 옷을 꺼내 수건 대용으로 물기를 닦아 낸 후에야 그녀를 모포에 눕히고, 자신은 대충 닦은 뒤 요한나의 옆 풀숲에 누웠다. 요한나는 가물가물하게 실눈을 뜨고는 꿈지럭거리며 옆으로 움직였다.
“여기 누워.”
잔뜩 쉰 제 목소리에 요한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흰개미는 눈을 끔벅이고 그녀가 비켜 준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그녀의 몸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 붙은 살갗에서 온기가 피어났다. 그 느낌이 좋은지 흰개미는 그녀의 서늘한 피부에서 손을 떼지 않고 지분거렸다.
요한나는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반년 만에 불붙은 교미는 질척하기 짝이 없어서, 꼬박 하루를 새워도 끝나지 않았다. 덕분에 탈력감에 온몸이 흐물흐물 늘어졌다. 전과 달리 교미 후 곧잘 따라붙던 찝찝함은 없었다. 외려 나른하게 늘어지는 기분이 썩 상쾌하여 나쁘지 않았다.
‘흰개미랑 하는 게 좋아. 교미 페로몬 때문이 아냐. 흰개미가 아닌 다른 개미는 싫어. 오로지 흰개미만이.’
생각에 잠긴 요한나는 문득 귀밑이 간지러웠다. 흰개미가 큰 손으로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귀밑을 건드리니 대놓고 만지는 것보다 신경이 쓰였다.
요한나가 슬쩍 고개를 흔들자 흰개미가 고개를 숙여 손으로 쓰다듬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땀을 잔뜩 내 보송보송한 살갗을 쓸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움직이며 살갗을 빨아들이자 야릇한 감각에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렇게 느꼈는데도 몸이 반응하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딱딱한 것이 장골 부근을 쿡쿡 찔렀다. 요한나는 굳어졌다.
‘벌써 섰어?’
흰개미가 또 요구할까 봐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그는 그저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에 깃털처럼 부드러운 키스를 퍼붓기만 했다. 이토록 안온한 후희는 익숙하지 않은 탓에 요한나는 어색하게 꿈지럭거리다가 이내 편안히 몸을 늘어뜨렸다.
석굴 개미의 틈바구니에서도 느꼈듯이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세상에 위험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매우 편안하고, 안심된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입술로 귓바퀴를 지분거리던 흰개미가 나직하게 물었다.
“자?”
“……으응.”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그녀를 응시하며 그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요한나, 내 거야.”
“뭐라고?”
반쯤 눈이 감긴 요한나가 졸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요한나, 거.”
“…….”
“요한나가, 그랬, 지.”
그녀는 눈을 지긋하게 감았다. 수면의 바다에 빠져들던 정신이 반쯤 멱살이 잡혀 끌려 나왔다.
“나, 요한나, 거라고.”
“……그거 아니라니까. 귓등으로도 말을 안 들어 처먹네.”
거친 말에도 흰개미는 눈을 휘며 방긋방긋 웃었다. 표정이라곤 지을 줄 모르던 무심한 얼굴이 근육을 움직이며 만들어 내는 표정은 열받게도 매력적이었다. 흰개미의 외양을 아름다움보다 기괴함으로 인식해 온 그녀마저도 새삼스럽게 움찔할 정도로.
“요한나, 좋아.”
“진짜 싫다…….”
“내가, 싫어?”
요한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흰개미의 축축한 홍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 알면서도 멍청한 척을 하는 것 같단 말이야.”
체념한 요한나는 몸을 떨어뜨리는 대신 몸을 돌려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흰개미가 가만가만한 손으로 요한나의 귓바퀴와 목, 둥그스름한 어깨를 쓰다듬었다.
부엉부엉, 멀리서 산새가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고요함에 빠져든 밤의 숲에서 흰개미는 은밀히 고개를 숙여 잠든 요한나의 뺨에 입술을 깊게 찍었다. 낙인처럼, 깊고 오랫동안.
그들의 위로 밤하늘 총총 박힌 별빛이 화려하게 휘몰아쳤다.
* * *
바스락.
바스락바스락.
빼꼼.
검은 산맥의 덤불 위로 창백한 얼굴이 솟아올랐다. 이어 비슷하게 생긴 얼굴이 둘 더 고개를 내밀었다.
일개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석굴, 개미, 없지?”
“없어.”
“없다, 없다.”
이개미와 삼개미가 분주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덤불에서 빠져나온 셋이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공주와, 흰, 개미에게, 가기, 전에, 죽을, 뻔, 했다.”
“공주, 흰개미, 여기, 있는 것, 맞아?”
이개미가 의심스럽게 묻자 일개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내가, 들, 었다. 흰, 개미가, 토굴, 만들었, 다고. 흰개미, 일족! 공주는, 여왕이, 됐다. 흰개미의, 여왕.”
“그런데, 공주가, 우리를, 반길까?”
삼개미의 걱정에 신나게 떠들던 일개미가 입을 딱 다물었다. 셋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일개미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우, 리를, 도와, 줬잖아. 공주도, 알고 보면, 우리를, 좋아할, 수도!”
“그냥, 불쌍해서, 도와준, 거면?”
“…….”
말문이 막힌 일개미는 버럭 역정을 냈다.
“그게, 어디야! 적어도, 우리를, 쫓아내진, 않을, 거다!”
“공주가, 아니라도, 흰개미가, 쫓아내면?”
계속해서 부정적인 걱정을 늘어놓는 삼개미의 머리에 일개미가 주먹을 꽂아 넣었다.
“아야! 왜, 때려!”
“닥쳐, 닥쳐! 일단, 흰개미, 토굴부터, 찾고, 얘기, 해!”
“치이…….”
자질구레한 식량 따위가 가득 든 짐을 주섬주섬 챙긴 셋이 검은 산맥의 어두운 숲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 길 끝에 흰개미와 요한나가 살고 있다는 토굴이 있기를 바라며.
토굴 공주_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