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요한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물론 자력은 아니었다.
석굴 개미는 기본적으로 토굴 개미보다 체격이 크고 우락부락한 몸집을 가져서, 양쪽에 팔짱을 끼게 된 것뿐인데 단단한 돌벽 사이의 샌드위치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를 납치한 석굴 개미는 어림잡아 스물은 되어 보였지만 그중 날개가 달린 수개미는 셋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석굴 개미들은 땅을 타고 가는 중이었다.
하나 스물에서 셋으로 줄었어도 근육질의 개미들을 떨쳐 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한나는 꼼짝없이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강제로 연행되었다. 석굴 개미 특유의 유황 냄새가 나는 체취를 들이마시며.
‘젠장. 이 바보 같은 놈들이.’
요한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처음에는 이들이 왜 자신을 데려가는지 알 수 없었다.
재수 없게 마주쳤다 하기에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답은 하나다. 석굴 개미들은 그녀를 알고 찾아온 것이다.
짚이는 건 토굴 개미뿐이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니, 역시나 토굴 개미 때문이었다. 레놀드가 언급했었던 영역 전쟁은 아무래도 이들과 토굴 개미가 엮인 얘기였던 듯싶었다.
자신을 인질로 삼으려는 것 같은데 정말이지 멍청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난 이제 인질로의 가치가 없단 말이야.’
자신은 분명 토굴에서 공주이며 여왕이었으나 그건 표면적인 모습일 뿐, 진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외자나 다름이 없었다. 석굴 개미가 자신을 들이밀었을 때 검은 개미가 보일 반응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들은 정보전에서부터 패배했다. 요한나는 곁눈으로 제 팔을 결박한 굵은 팔뚝을 살폈다. 팔을 칭칭 감은 꼴이 백 년 묵은 구렁이가 감싼 듯하다.
‘저렇게 붙들고 있으니 가는 도중에 도망치는 건 힘들 것 같은데. 방심을 틈타는 수밖에 없나. 나를 인질로 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바로 죽일까?’
머리를 굴리는 요한나를 왼쪽의 석굴 개미가 흘끗했다.
“악!”
어깨에 우악스러운 격통이 치달았다. 석굴 개미의 입가가 피로 흥건했다. 요한나가 노려보자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검은 눈알이 시뻘건 게 자칫 성질을 잘못 건드렸다간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라 요한나는 입을 꾹 다물고 성질을 죽였다.
어깨의 통증을 인지하자 몸 이곳저곳이 욱신거렸다. 석굴 개미가 물어뜯은 건 어깨뿐만이 아니었다. 이동하는 동안 열받으면 곧장 살점을 물어뜯어서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일전에 뜯긴 귀밑 목덜미에서 나온 피는 빗장뼈까지 흐른 채 굳어 있었다. 목덜미의 상처는 잡히는 도중에 있었던 격전의 흔적이나, 오는 동안 석굴 개미의 화풀이로 인한 상흔도 적지 않았다.
‘내 손에 죽은 석굴 개미가 넷은 되었나?’
아무래도 우습게 보였던 건지 수개미들이 나서기 전에 달려들던 놈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관망하던 수개미들이 나서기 전에 도주했다면 좋았을 텐데.
“네가, 쓸모, 있기를, 바라는, 게, 좋을, 것.”
혀 차는 소리를 들었는지 오른쪽의 석굴 개미가 바닥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성대를 자주 쓰지 않는 개미들은 대체로 목소리가 허스키한 편이었는데, 토굴 개미보다 이들의 목소리가 더 듣기 거북했다.
원래도 불그스름했지만, 분노로 한층 더 울긋불긋해진 낯빛은 인간이 아닌 자 특유의 위압감이 있었다.
요한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내 명줄이 끝날지도 모르겠군.’
얌전해진 그녀를 내버려 두고 석굴 개미들이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 토굴, 개미가, 이, 공주를, 구하려, 들까? 그들은, 우리의, 여왕을…….”
이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쓸모, 있을, 것. 전 세대, 의, 여왕. 충성, 심, 있을 것. 흔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
요한나는 내심 코웃음을 쳤지만, 왼쪽의 개미는 납득했는지 조용하다. 오른쪽 개미가 쉭쉭대며 말했다.
“속도를, 더, 내자.”
“붉은, 얼굴, 혼자선, 위험.”
“흰, 개미, 검은, 개미, 모두, 감당하긴, 힘들, 것.”
대화 속에서 언급된 존재에 요한나의 눈이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석굴 개미들은 원한이 깊은지 까드득 이를 갈았다.
심각하게 쑥덕거리던 개미들이 이윽고 속도를 높이자 얼굴로 세찬 바람이 부닥쳐 왔다.
요한나는 실눈을 뜨고 이곳이 어디쯤인지를 헤아리려고 애썼다.
석굴 개미들의 비행은 예상외로 금방 끝났다.
온전히 눈을 뜨자 전혀 알지 못하는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가 기억하는 토굴은 하얀 자작나무가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땅에 봉긋하게 솟아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석굴 개미가 멈춰 선 곳은 붉은색 이파리가 바다를 이루는 단풍나무 군락이다.
‘토굴이 아니라 석굴 쪽으로 온 건가.’
석굴 개미들이 고도를 낮추자 시야에 가득한 붉은 단풍잎 사이로 입구가 뻥 뚫린 바닥의 굴이 보였다. 토굴이었다.
개미들이 주기적으로 굴을 바꾼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억수같이 퍼붓던 비. 뿌연 안개가 내려앉은 자작나무 숲의 마지막 기억 위로 꽃처럼 붉은 단풍나무 군락의 생명력이 덧씌워졌다. 요한나는 기억과 눈앞의 괴리감에서 시간의 흐름을 실감했다.
잠깐 멍해져 있던 요한나는 귓전을 자극하는 기묘한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퍽!
단풍나무 사이로 붉고 창백한 개미들이 박투를 벌이고 있다. 연인처럼 손깍지를 끼고 있지만 손등엔 힘줄이 불룩하게 도드라졌고, 이를 드러내며 서로의 목덜미를 노렸다.
승자는 덩치가 더 큰 붉은 피부의 개미였다.
목이 뜯긴 개미가 키에엑!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자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다른 토굴 개미가 석굴 개미의 등을 덮쳐 왔다.
바닥을 뒹구는 싸움이 이어졌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개미들이 뒤엉켜 싸우는 현장이었다. 진득한 피가 바닥에 흩뿌려져 대지를 적셨다.
석굴 개미들은 동족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며 얼굴을 굳혔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들은 뭔가를 찾고 있었다.
쿵!
가까운 데서 굉음이 울렸다.
“크아아아아아아!”
이어진 괴성에 요한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목소리에 담긴 가공할 힘에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저건 뭐지?’
긴장한 그녀와 달리 석굴 개미들은 기다리는 것을 발견한 듯 반색했다.
“붉은 얼굴!”
석굴 개미들이 소리가 난 쪽으로 날개를 놀렸다. 그들의 굵은 팔뚝 사이에 낀 요한나도 물론 함께였다.
쿵, 쿵!
소리는 연달아 울렸다. 요한나는 곧 그것이 나무가 무너지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석굴 개미 장군으로 추정되는 자의 고함도 한 번 더 울렸다.
바람이 뺨을 스치는 속도만큼 그들이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자, 갑자기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긴장하는 이유를 알고 있기에 요한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기 있, 다!”
석굴 개미가 손가락을 들었다. 요한나의 시선도 움직였다. 석굴 개미가 가리키는 곳에는 석굴 개미 중에서도 눈에 띌 만큼 우람한 체격의 개미가 서 있었다.
위로는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반 배는 더 긴 듯했고, 옆으로는 둘을 합쳐도 비견될 정도로 흉곽이 넓었다. 석굴 개미답게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한 피부에 하체는 암갈색 가죽으로 감싸였는데, 몸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아우라에 멀리 있는데도 숨이 막혔다. 바로 그가 석굴 개미들의 정신적 지주인 장군, 붉은 얼굴이었다.
그들이 지켜보는 사이 붉은 얼굴이 근처에 있는 나무를 끌어안았다. 팔뚝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곧이어 요한나는 눈을 부릅떴다. 성인 남성이 겨우 껴안을 수 있는 굵기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오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힘이었다.
붉은 얼굴은 그대로 나무를 내던졌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가던 나무는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튕겨졌다. 뿌리와 함께 흩뿌려진 모래가 가라앉자 주먹을 움켜쥔 거대한 토굴 개미가 드러났다.
“검은 개미…….”
석굴 개미가 신음을 흘렸다. 요한나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검은 개미를 미묘하게 스치고 있었다.
눈길은 검은 개미의 근처, 붉은 얼굴이 내던진 단풍나무 옆에서 멈추었다.
그곳에 그가 서 있었다. 달빛으로 빚은 것처럼 창백하게 하얀 얼굴,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듯 투명한 붉은 눈동자는 하나뿐이었다.
우뚝한 콧대와 뚜렷한 안와가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는 그는 몹시도 무료해 보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과 핏물에 젖은 모피가 아니었더라면 이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가 이쪽을 볼 리가 없건만 숨소리마저 죽였던 요한나는 뒤늦게 그의 옆에 붙어 있는 존재를 알아챘다. 흰개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자는 가늘게 찢어진 눈을 위로 치뜨고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아 풍만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바닥까지 닿는 긴 머리카락이 옷자락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아 중요 부위를 가렸다.
요한나는 제 것이라는 양 그녀가 끌어안은 흰개미의 팔을 바라보았다.
돌처럼 굳었던 가슴이 요동쳤다.
불그스름한 피부. 그녀를 지키는 검은 개미와 흰개미. 금방 여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토굴의 새로운 여왕.
‘석굴 개미 여왕.’
흰개미를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매달려 있는 걸 보면 지금은 사이가 퍽 나쁘지 않은 듯했다.
“여왕. 여왕. 나의 여왕.”
붉은 얼굴은 검은 개미를 상대하면서도 흰개미에게 찰싹 달라붙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영원을 맹세한 연인을 보는 것처럼 애틋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가슴이 아릿하게 절절했다.
나무를 검은 개미 쪽으로 던져 버리고 여왕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걸음은, 나무를 빠르게 쳐 내고 달려드는 검은 개미로 인해 무산되었다.
붉은 얼굴은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고는 검은 개미와 충돌했다.
쾅, 쾅!
나무가 떨어지는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굉음이 울렸다. 짧은 순간 손속을 나눈 그들은 금방 떨어졌지만 피해는 적지 않았다. 어깨가 뚫린 검은 개미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붉은 얼굴도 비틀거리긴 했지만 검은 개미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유리한 상황임에도 검은 개미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검은 개미와 아직 움직이지 않은 흰개미를 바쁘게 오갔다. 검은 개미와 싸우다가 흰개미가 가세하게 되는 상황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누가 유리한지는 겉으로 드러난 상처만 봐도 알 수 있다. 흰개미는 핏자국을 제외하면 멀쩡해 보였고, 검은 개미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붉은 얼굴도 검은 개미 못지않지만, 육신이 워낙 강건하여 쓰러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둘을 상대, 로는 역부족.”
요한나는 저를 붙든 석굴 개미의 목소리에 담긴 초조함을 느꼈다. 다시 흰개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마음이 이해할 수 없게 울렁거렸다. 이제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했지만, 내심으로는 검은 산맥에서 살아가는 동안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엄밀히 말하면 지금 그녀가 이런 꼴이 된 건 흰개미의 잘못이 아니었다. 뜻대로 되지 않은 상황으로 인한 답답함과 짜증, 하필이면 이런 모습이라는 착잡함, 민망함, 모든 부정적이고도 혼란한 감정 저변에 깔린, 부인할 수 없는 반가움.
그랬다. 그를 보는 순간, 그녀는 그가 반가웠다.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기는 해도 틀림없이. 요한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흰, 개미, 검은, 개미이이이이!”
오른쪽의 개미가 껄끄러운 쇳소리가 섞인 고함을 질렀다. 목구멍에서 피가 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만큼 큰 소리를 내는 게 괴로워 보였지만 석굴 개미는 멈추지 않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여길, 봐라! 너희들의, 공주, 우리, 손에, 있, 다!”
그리고 요한나는, 유령처럼 고개를 돌린 흰개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사치라면 사치스러운 감정이겠지만 이런 꼴로 마주한 게 수치스러웠다.
잠시 어리둥절했던 검은 개미가 석굴 개미 사이에서 대롱거리는 요한나를 발견했다. 상황을 파악한 그의 얼굴이 음험한 웃음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며 그녀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타올랐다.
“그것은, 우리, 일족이, 아니다.”
“뭐?”
당황하는 석굴 개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팔이 짜부라질 듯했다. 그 통증에 요한나는 도리어 침착해졌다.
석굴 개미들은 새끼 멧돼지를 만난 어미 멧돼지처럼 검은 개미가 어쩔 줄 몰라 하길 바랐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자신의 미묘한 위치를 알았더라면 이런 시도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정보전의 패배가 뼈아픈 실책이 될 터였다.
토굴 개미 일족은, 검은 개미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치를 생각이 없다.
‘예상했었어.’
문제는 석굴 개미들의 반응이다. 더는 그녀가 필요 없으니 순순히 놓아주는 것을 기대하기엔, 궁지에 몰린 그들의 심기가 시시각각 헝클어지는 게 보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순순히 잡히는 게 나았을지도.’
동족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기회가 있지 않았겠는가.
지금 상황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린 요한나는 움찔했다. 흰개미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붉은 얼굴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저 혼자 침묵의 장막을 두른 듯 고요했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침착함을 지켜 왔던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랜만에 보는데도 그림같이 완벽한 얼굴과 속을 꿰뚫어 보는 투명한 시선이 자신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 같았다.
잘났다는 듯이 제발 그만 보자고 했는데 붙잡혀서 협박거리로 쓰이고 있는 꼴이라니. 그녀의 분노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석굴 개미들에게 향했다.
요한나는 거칠게 버둥거렸다.
“제기랄. 나 필요 없단 소리 못 들었어? 놔, 이 괴물 새끼들아.”
그리고 그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불이 붙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심지 같은 상태였던 석굴 개미가 두꺼운 손으로 그녀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퍽!
“으윽!”
한 대만으로도 머릿속이 진탕 되고 속이 메스꺼웠다. 하나 그걸로는 석굴 개미들의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어려운 상황에 간신히 공주를 찾아 데려왔는데 쓸모없는 패였다니!
“이 여자만, 아니면, 동족을 더 살릴 수, 있었, 는데!”
악에 받쳐 손을 들었던 석굴 개미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흠칫해서 고개를 들었다.
흰개미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등골을 내달리는 섬뜩함에 허공에 뜬 손이 가늘게 경련했다.
“뭐, 뭐야!”
“온다!”
동족의 말이 없더라도 그는 보고 말았다.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흰개미를.
모든 개미의 최우선 임무는 여왕을 지키는 것이다.
그 누구도 흰개미가 여왕을 버리고 움직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요한나를 들고 협박하던 석굴 개미도 마찬가지였다.
얼빠진 얼굴이 무서운 속도로 확대되는 흰개미를 보았다. 그게 그의 눈에 비친 마지막 장면이었다.
팟!
수박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뇌수와 살점이 섞인 핏물이 분수처럼 사방에 흩어졌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무너졌다.
흰개미는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요한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정적 속에서 움직이는 건 그 하나뿐이었다.
충격에 빠진 개미들의 눈이 흰개미의 움직임을 고요히 좇았다. 소리 없는 경악이 좌중을 휩쓸었다.
충격을 깨고 제일 먼저 움직인 건 붉은 얼굴이었다. 어째서 흰개미가 여왕을 버렸는지는 모르나 지금이 기회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움직이자 검은 개미가 비어 버린 여왕의 앞을 가로막으며 포효했다.
“흰개미이이이이이! 돌아, 와! 실망, 시키는, 거냐!”
흰개미를 애타게 부르는 여왕의 째지는 비명을 분노에 찬 고함이 덮어 버렸다.
정작 여왕과 검은 개미가 간절히 부르는 흰개미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요한나에게만 고정된 시선에 검은 개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배신자!”
악의가 넘실거리는 목소리는 흰개미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다른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품속의 존재를 소중히 끌어안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요한나는 가물가물한 눈을 떴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 토악질이 치밀었으나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건 없었다.
그녀는 시야를 가득 채우는 붉은 눈동자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눈앞이 어지러운데도 가까워지는 흰개미는 똑똑히 보였다. 눈빛이 약간 이글거렸는데, 지금도 그랬다. 그것을 제외하곤 기억 속에 있는 무심한 얼굴과 똑 닮았다.
‘어째서 나한테 왔어?’
그토록 위하던 토굴 개미들을 내버려 두고, 왜.
토굴의 번영을 위해 자신을 몰아세우던 흰개미였다. 그랬던 그가 이 위험한 상황에 석굴 개미 여왕도, 공주도 아닌 저를 붙들고 있다.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북받친다. 가슴이 또 한 차례 울렁거렸다.
그녀가 넋을 놓는 사이 흰개미는 이곳에 있는 어떤 개미보다도 무자비하고 파괴적으로 움직였다. 보지도 않고 손을 움직이자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던 석굴 개미들의 머리통이 일시에 터져 나갔다.
피슉!
이전의 피 냄새와 비교할 수 없이 짙어진 비린내에 요한나는 콧등을 실룩였다. 주변에 넘실거리는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불편한 기색으로 주위를 돌아보려고 하자, 흰개미가 그녀의 얼굴을 제 가슴에 고정하고 몸 곳곳을 꼼꼼히 살폈다.
새끼 사자를 둘러보는 수사자처럼 엄중한 눈빛이 다친 상처를 훑으니 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탐색을 마친 흰개미가 요한나의 피 묻은 뺨을 길게 핥아 올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얼굴을 타고 내려간 혀끝이 피가 말라 굳어진 목덜미를 진득하게 핥고 빨았다. 피딱지가 까슬까슬한 혓바닥에 쓸려 사라지자 벌건 속살을 보이는 상처가 드러났다.
흰개미는 상처 주변을 살살 핥으며 새어 나오는 핏물을 삼켰다. 요한나는 무심코 앓는 소리를 냈다. 촉촉하고 까끌까끌한 혀. 흰개미의 혀다.
그와 마주한 건 상당히 오랜만인데도, 이 감촉은 익숙해서 시간의 공백을 느낄 수 없었다.
하아. 배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청량한 숲의 냄새와 서늘하고 건조한 손길. 어디에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듯 꽉 끌어안고 있는 묵직한 힘에 내내 꿈틀거리던 마음이 안정을 찾았다. 불쾌했던 부유감도 가라앉아 비로소 닻이 내려진 기분이었다.
한참을 흰개미의 품에서 핥아지던 요한나는 살갗에 닿는 서늘한 바람에 느리게 눈을 떴다. 그녀는 공중에 떠 있었다.
치릇치릇. 흰개미의 날개가 부드럽게 유영하는 하늘은 맑고 깨끗하지만, 지상은 그렇지 않았다. 피와 살점이 분수처럼 터져 붉은 단풍잎을 더 붉게 만들었다.
요한나는 죽음이 산재한 야만을 내려다보았다.
사라졌던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키에에엑!”
“캬악!”
죽어, 죽어, 죽어!
매캐한 전투 페로몬에 휩쓸린 광기가 더한 죽음을 몰고 오는 그 광경을 요한나는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건 토굴 개미와 석굴 개미의 원한에 얽힌 전쟁이었다.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렇지만 흰개미에게는 아닐 것이다.
요한나는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흰개미는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요한나를 침 범벅으로 만드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개미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을 보아도 요한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잘됐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들었다.
토굴 개미가 전멸한다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녀를 옭아매던 악몽의 근원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그들을 위한 흰개미가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흰개미는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 건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요한나는 그가 언제 제게서 몸을 떼고 토굴 개미들을 구하러 갈지 궁금해하며 아래의 상황을 구경했다.
사나운 고함과 날카로운 비명이 혼재된 지상은 지옥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해서, 마치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무심하게 개미들의 힘겨루기를 지켜보던 그녀는 그 틈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온갖 잡일도 군말 없이 해내고, 수개미들의 윽박지름에 놀라 벌벌 떨던 힘없는 일꾼개미들이 석굴 개미의 두꺼운 손을 피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도망을 가지는 않았다.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새알이 될지언정 동족의 팔다리를 뽑아내는 적에게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그들 중에 일개미가 있었다. 이개미도 있었다. 삼개미도 있었다. 자신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으려는 탈의 여왕에 맞서 나가떨어지던 이름 없는 일꾼개미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공주, 공주. 이것, 먹어. 맛있음, 고기.’
‘아파? 어디, 아파? 큰일, 큰일. 약, 약을, 구해, 올게!’
‘공주, 예뻐. 제일, 좋아. 우리의, 공주.’
그저 스쳐 지나가던 장면에 불과하던 것이 현실감이란 색을 입고 튀어 올랐다.
요한나는 어느새 꽉 움켜쥐고 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안 가?”
자신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흰개미가 어깨의 상처에 혀를 날름거렸다. 따끔한 아픔에 몸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자연스럽게 얘기하고자 했으나 제가 듣기에도 딱딱한 목소리였다.
“안 도우러 가?”
그제야 흰개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길, 원해?”
단순한 질문이지만 지레 찔린 요한나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내가 원하긴 뭘 원해. 네 동족이잖아.”
흰개미는 가만히 있었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공포에 질린 비명에 요한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흰개미가 그녀의 눈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그녀가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요한나는 이번만큼은 그의 몰이해를 핀잔줄 수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토굴 개미는 그녀의 원수였다. 석굴 개미에게 얻어터지든 죽어 나가든 당연히 상관없어야 했다. 실제로 잠깐은 잘됐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나.
하지만.
“네가 하지 않으면…….”
크아악!
요한나는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든 석굴 개미가 일개미에게로 쇄도한다. 나뭇가지의 끝이 일개미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내가 할게.”
가만히 방관할 수가 없다.
요한나는 날개를 펼치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개미에게로 달려들었다.
적을 향해 사납게 이를 드러내면서도 손을 달달 떨던 일개미는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의 등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 냄새 사이로 그리운 냄새가 났다.
“공주?”
요한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살피는 석굴 개미만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공주, 공주, 공주.”
하염없이 제 이름만 부르는 목소리에 담긴 떨림에 요한나는 가슴이 저릿해졌다.
확실히 일꾼개미들은 충인이다. 자신이 그렇게 끔찍하게 여기던 괴물이다. 괴물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나 요한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답받지 못함에도 헌신하고, 위하며, 배신당했는데도 자신을 반가워하는 상대를 단지 괴물이라는 이유로 죽도록 방치하지는 못하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것이 인간성인가.’
바라던 답을 얻은 기분이다. 팔을 떨치는 움직임이 시원해졌다.
“캬아아악!”
요한나는 달려드는 석굴 개미의 목을 움켜쥐었다. 석굴 개미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부서져라 힘을 주었다.
등 뒤에 일개미와 일꾼개미들을 두고, 그들을 보호하듯 석굴 개미에게 맞서는 지금 이 순간, 요한나는 자신에게 날개가 달렸든, 흉물스러운 갑각 표피가 달렸든, 스스로가 인간임을 확신했다.
빠각!
요한나는 어렵지 않게 석굴 개미의 두꺼운 목을 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을 잡으러 온 석굴 개미 일당 때문에 힘을 뺀 상태였으므로 여유롭지는 않았다.
동족이 죽자 포효하며 달려드는 석굴 개미를 살피는 그녀의 눈에 긴장이 어렸다. 가장 선두에 선 석굴 개미가 요한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주의하고 있던지라 곧바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덩치 큰 석굴 개미 뒤에서 튀어나오는 작은 석굴 개미는 판단 외였다.
그의 아담한 손에 들린 날카로운 비수가 요한나의 가슴을 정확히 노리는 그때, 일개미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짓이야, 너!”
요한나는 일개미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일개미를 잡아 옆으로 밀어 내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꿰뚫으려는 비수를 잡고, 그대로 쳐 내려는 순간 석굴 개미의 머리가 펑! 터져 나갔다. 일련의 과정은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흰개미!”
일개미가 기쁘게 소리쳤다.
일꾼개미들에게 둘러싸인 채, 요한나는 흰개미가 석굴 개미 사이를 누비는 것을 응시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붉은 피 분수가 터졌다. 백발마저 빨갛게 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하얀 얼굴이 일으키는 죽음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고, 흩날리는 핏방울 속에서 흔들리는 유려한 움직임은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 같았다. 같은 편인 토굴 개미조차도 그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고 요한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토굴 개미들을 위해 석굴 개미를 학살하고 있는데도, 더는 그가 토굴의 일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와 토굴을 한 몸처럼 여겼던 걸 생각하면 판이한 변화였다.
‘왜 이제 와서 움직인 거지? 내가 먼저 행동하길 기다린 건가?’
하지만 스스로가 보기에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생각이었다. 흰개미는 정말로 상관이 없었던 걸까. 여기서 토굴 개미들이, 자신의 일족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그게 말이 되나?’
요한나는 흰개미의 생각과 그의 진심이 헷갈렸다. 인간이 아닌 자의 생각을 가늠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석굴 개미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흰개미의 시원시원한 움직임을 물끄러미 지켜보는데, 그녀의 곁을 스쳐 가던 토굴의 수개미가 동족에게 소리쳤다.
“검은, 개미는, 어디 있, 지?”
“붉은, 얼굴과, 싸우고, 있다!”
검은 개미!
요한나의 눈이 일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공주, 위험, 위험, 해.”
“난 괜찮아. 네 몸이나 챙겨, 바보야.”
걱정하는 일개미를 밀어 내고 그가 붙들기 전에 날개를 떨쳐 몸을 띄웠다.
츠츳, 츠츳.
공중에서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감을 펼치자 안개처럼 퍼져 있는 전투 페로몬이 피부에 밀착된 습기처럼 확 느껴졌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세포가 싸우라고 명령한다.
요한나는 페로몬의 흥분에 휩쓸리지 않으려 주의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페로몬의 홍수 속에서도 두드러지게 매섭고 강한 페로몬이 뇌관을 쏜살같이 통과해 나갔다.
킁,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결에서 유황 냄새가 감돌았다.
환경에 적응한다는 건 본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음이 가까워지기에 살고 싶은 생물들이라면 바뀐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아등바등한다.
삶에 대한 의지가 남다른 요한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끔찍하게 싫었던 괴물 소굴에 어느샌가 적응한 스스로를 깨달을 때면 허탈한 웃음이 새곤 했다.
폐쇄된 공간에 흐르는 답답한 공기, 백돌에서 나오는 희뿌연 빛에 의지하여 사위를 구분하는 일, 사각사각 치릇치릇 기묘한 소리를 내는 개미들, 형편없이 딱딱한 나무 의자보다도 차갑고 거친 토굴의 벽, 처음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그 환경도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감정도 그랬다. 하루가 다르게 곱씹던 증오와 원한도, 잊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수면 아래 깔린 자갈처럼 모난 부위를 깎으며 얌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검은 개미가 나가도 된다고 했을 때 분노보다는 안도를 느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실제로 한동안은 스스로의 무력감과 불행에 짓눌려 복수라는 단어를 생각하지도 않았잖은가.
하지만 사냥꾼은 적응이 빠른 만큼 상황 판단력도 뒤지지 않는 족속이다.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들자 웅크리고 있던 새카만 살의가 수면을 맹렬한 기세로 뚫고 나왔다.
달려드는 석굴 개미를 피해 날래게 몸을 움직이면서, 요한나는 언젠가 피를 토하듯 외쳤던 제 목소리를 회상했다.
‘기다려. 넌 내가, 반드시 죽이고 말 테니까.’
* * *
내리찍는 것만으로도 근육을 파열시킬 수 있는 각진 턱이 부르르 떨렸다. 돌처럼 딱딱한 붉은 피부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흉신처럼 일그러진 얼굴에 고통이 스쳤다. 그러나 그 안의 눈은 여전히 꺾이지 않고 활화산처럼 활활 타올랐다.
검은 개미는 새액새액 불안정한 숨을 내쉬며 붉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뼈가 부러진 다리와 깎여 나간 기력. 육신이 더는 움직일 수 없다고 외치고 있었다.
검은 개미는 여기까지가 자신의 한계라는 것을 알았다. 다소 아슬아슬했지만, 붉은 얼굴을 이만큼이나 몰아쳤다는 것이 흡족하다.
그의 시선이 핏덩이가 울컥울컥 새는 붉은 얼굴의 옆구리에 닿았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그는 붉은 얼굴의 손에 무릎이 부서졌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했다기에는 조금 더 내준 것 같으나, 이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석굴 개미 군락의 정점에 선 붉은 얼굴과 토굴 개미의 정점에 있는 검은 개미의 싸움은 한 호흡 차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의 생사를 가르는 길목에 섰다는 것을 인지했다. 옆구리가 뜯겨 나간 붉은 얼굴이 쓰러지느냐, 아니면 버텨서 전투 불능인 검은 개미의 목숨을 앗아 가느냐.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각 일족의 절대자들은 서로를 고요히 쏘아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보이지 않는 붉은 실처럼 그들을 칭칭 얽어맸다.
하지만 생명의 원천인 피가 빠져나가는 건 역시나 치명적이었다.
‘결국 내가, 이길, 거다.’
검은 개미는 득의양양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빛이 꺼져 가던 붉은 얼굴의 눈 깊은 곳에서 갑작스레 의지가 샘솟았다. 삶을 향한 맹렬한 투지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여왕.
그가 빼앗긴 여왕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충심이 그를 죽음에서 건져 내려 하고 있었다.
검은 개미는 일족의 수개미에게 맡겨 둔 한때는 붉은 얼굴의 여왕이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토굴 개미의 페로몬에 잠식되었음에도 석굴 개미 일족을 그리워하던 여왕이 완전히 돌아선 건 흰개미가 돌아온 이후였다.
적대적이었던 처음과 달리, 그녀는 그의 강력한 페로몬과 힘에 매료되었다.
모든 개미를 공평히 사랑해야 할 여왕의 압도적인 편애에, 검은 개미는 약한 질투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여왕의 첫 번째 수컷이었던 입장에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나, 알량한 질투심보다는 안도감이 컸다.
흰개미가 토굴에 돌아왔다.
그는 여왕의 교미에 응하지는 않았지만, 전처럼 일족을 위해 군말 없이 일했다. 예전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오늘에 이르기 전까진.
‘흰개미. 실수한, 거다.’
검은 개미는 입매를 비틀고, 배신한 여왕에 대한 사랑으로 죽음을 극복하려는 불쌍한 붉은 얼굴을 응시했다.
“아직도, 모르, 겠나?”
“흐으, 흐으.”
“너의, 여왕은, 더는, 없, 어.”
붉은 얼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축하는 검은 동공에 담기는 제 모습이 생각보다도 형편없어 검은 개미는 히죽히죽 웃었다.
“보지, 않았, 나? 여왕은, 흰, 개미를, 사랑, 한다. 네, 가, 아니, 라.”
“닥쳐, 닥, 쳐라. 이, 간악한, 검은, 개미.”
“날, 죽여도, 여왕은, 네게로, 돌아, 오지, 않아. 그녀는, 이제, 토굴의, 여왕.”
죽어.
여기서 죽어라.
으르렁거리면서도 흔들리는 눈동자에 검은 개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의지가 위태로워지자 억지로 붙들고 있던 정신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그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흰개미의 팔을 구원처럼 꼭 붙들고 그녀를 되찾기 위해 날아온 그를 침입자 보듯 노려보던 여왕을.
붉은 얼굴의 상체가 흔들렸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검은 개미는 비열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붉은 얼굴은 석굴의 최강자였다. 비틀거리면서도 한 발, 한 발 떼며 가까워진다.
검은 개미는 혀를 찼다.
‘쉽게는 쓰러지지 않겠다는 건가.’
이러다가는 앉은 자리에서 죽을 판이었다. 초조해진 검은 개미는 영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그러는 사이에도 붉은 얼굴은 게으른 죽음처럼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결국 마지막 힘이 다했는지 붉은 얼굴의 무릎이 툭 꺾였다. 검은 개미는 긴장으로 부릅뜬 눈으로 무너지는 그를 지켜보았다.
“나의, 여왕…….”
일순 반짝였던 눈빛은 마지막 생명력이었는지, 간절한 부름을 마지막으로 까만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 잿빛으로 변한 눈동자는 죽음으로 채워져 있었다. 석굴의 희망이었던 붉은 얼굴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검은 개미는 당장 팔을 휘둘러 그 시체를 치워 버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간단한 동작마저 취하기가 힘들었다.
붉은 얼굴의 죽음에 안도한 것도 잠시, 이 상태로는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기도 힘들 터였다. 동족이 상황을 알고 자신을 찾아오면 좋겠지만 섣불리 불렀다가 석굴 개미가 꼬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모험을 할 것인가. 이대로 누군가 찾아오길 기다릴 것인가.
고민할 무렵, 붉은 얼굴의 몸뚱이가 기우뚱했다. 검은 개미는 그의 어깨 위로 덥석 올라온 창백한 손을 바라보았다. 하얀 살결을 보니 토굴 개미가 분명했다.
다행히 동족이 자신을 먼저 찾았구나. 안도했던 검은 개미의 얼굴은 곧 어두워졌다.
“안녕, 검은 개미.”
붉은 얼굴이 버티고 섰던 위치에 자리한 요한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 순간 온 세상을 하얗게 비추던 해가 희끄무레한 구름에 가려졌다. 구름의 어둑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한 줄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태산보다 무거운 정적을 환기하는 바람이었다.
“그런 말 알아?”
요한나가 덤덤하게 말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검은 개미가 날카롭게 변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눈빛에서 분함과 살기가 읽혔다.
요한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야말로 너덜너덜하네.’
거대한 벽 같던 이 단단한 몸이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붉은 얼굴과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짐작이 되었다. 그러나 개미들의 회복력은 인간의 수준으로 생각해선 안 되었다. 이렇게 다쳤어도, 얼마간의 시간과 보살핌이 주어진다면 금세 회복할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개미들이 발견하기 전에 자신이 찾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처음 그를 만난 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했던 다짐을 실행할 순간이고,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요한나는 잠시 지체했다.
그녀는 궁금했다.
“검은 개미.”
“…….”
“후회해?”
죽음 앞에 선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살기 위해 굴복할까?
아니면.
“후회, 함.”
의외의 대답에 놀란 요한나를 보며 검은 개미가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흰개미가, 아무리, 뭐라 해도, 널, 죽였어야, 했어.”
그녀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잠깐 검은 개미를 보다가 픽, 웃음을 흘린다. 검은 개미의 까만 눈알에 칼처럼 뾰족한 날붙이가 비쳤다.
“넌 내가 지금까지 만난 것 중에 가장 강한 사냥감이야.”
요한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덤덤히 속삭였다.
“마지막까지 그런 모습이라 기뻐.”
“…….”
“지옥에서 아버지에게 안부 전해 줘.”
차가운 얼굴로 의연했던 검은 개미지만 그 말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가 무슨 저주의 말을 퍼붓기 전에, 사신의 칼날이 휘둘러졌다.
검은 개미는 원한에 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원한으로 그녀의 인생을 바닥으로 끌어내린 일을.
그래서 그녀도 후회하지 않았다. 무엇도, 아무것도.
죽음이 내린 몸은 생전에 대적할 자 없이 강인했을지라도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무토막과 다를 바가 없다.
심장이 멈춘 검은 개미의 시체는 지금까지 그녀 손에 죽어 나자빠진 개미들과 엇비슷했다.
요한나는 몇 년간 자신을 옭아맸던 악몽이 추락한 모습을 눈에 담고, 가슴속을 파고드는 헛헛한 공허를 느꼈다.
바라 마지않던 일을 이뤘음에도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다.
아버지의 원한을 풀었다기엔 그와 나누었던 교류가 개울물보다 얕고, 지나간 자신의 원한을 풀었다기엔 이미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았다.
엉망.
엉망이다.
“요한나.”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축 처졌던 요한나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왜?”
잇새로 나간 목소리는 생각보다도 날카로웠다. 요한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흰개미의 기척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보지 않고도 그의 시선이 검은 개미에게 닿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동족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가. 그런 모습을 제 앞에서 보인다면 욕설을 퍼부어 줄 것이다. 너도 이놈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악다구니를 써 줄 마음이 만만했다.
그러나 팔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있던 그녀는, 등에 닿는 딱딱한 가슴의 감촉에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은 양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흰개미는 격한 움직임에 상처가 터져 피가 새는 어깨를 느릿느릿 핥았다. 이번에야말로 요한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뭐 하는 거야?”
“지혈. 상처, 에서, 자꾸, 피가, 나.”
흰개미가 우울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피를 조심스럽게 빨아들였다. 그 부위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 그게 중요해?”
요한나는 혼란스러웠다.
“난 네 동족을 죽였어.”
“잘, 했어.”
흰개미의 언동이 예측을 계속해서 빗나간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어.”
흰개미는 단조로운 투로 속삭였다. 슬픔과 연민 따위의 온정이라곤 조금도 배지 않은 메마른 목소리가 섬뜩하게 등골을 간질였다. 목덜미를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차가운 뱀의 숨결 같았다.
요한나는 아릿한 목을 움직여 제 어깨에 달라붙은 흰개미를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굴려 시선을 맞추었다. 천진하고 무구한 눈빛에 풍랑을 맞은 배처럼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그녀가 침묵을 지키자 흰개미는 힐끗, 이미 혼이 없는 몸뚱이가 된 검은 개미에게 시선을 던졌다.
“말이, 너무, 많았, 어. 귀찮, 고.”
“…….”
“요한나, 도 싫, 었지?”
요한나는 손끝이 차가워졌다. 흰개미를 괴물로 치부하고 그렇게 생각해 왔음에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를 ‘인간’과 가깝게 여기고 있었던 걸까? 실제로 그간 둘뿐이었을 때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었다.
흰개미는 괴물이다. 검은 개미나 기타 일개미들과도 다른 차원의, 괴물. 그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대체 언제쯤이면 깨닫게 될까.
그녀의 동조를 구하는 흰개미의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얼굴은 일견 해맑게까지 느껴졌다.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신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죽음과 더 잘 어울렸다.
검은 개미를 죽인 것은 자신임에도, 그녀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생생하게 느꼈다.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함께 자라 왔잖아.”
그래서 기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죽어서 잘됐다니. 네 뇌 구조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흰개미가 눈을 끔벅였다. 이해하지 못할 때 짓곤 하던 그 표정을 안다.
“단지, 일족을, 위해, 필요, 했을, 뿐.”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거야?”
“글쎄.”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요한나는 그 얼굴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을까 하여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흰개미의 고개가 좀 더 비스듬해졌다.
“더는, 중요, 하지, 않아.”
검은 개미가?
아니면 일족이?
둘 모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는 것과 엮인 게 아닌가 하는 때늦은 공포가 발밑을 간질였지만, 요한나는 애써 외면했다.
흰개미는 예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는 놈이었고, 이해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카아아아악!”
멀리서 석굴 개미가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붉은 얼굴의 페로몬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한층 흉포해진 비명에 고개를 돌린 요한나는, 몸이 허공으로 번쩍 떠오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흰개미가 그녀를 끌어안고 유유히 몸을 날렸다.
요한나는 흰개미의 뒤로 보이는 붉은 단풍나무 숲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여왕과 살아남은 토굴의 수개미들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이는 게 보였다. 흰개미가 고도를 높여 날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상황은 알 수 없었다. 일개미가 저를 찾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멀어지는 붉은 숲을 보며 요한나는 어렴풋이 토굴과의 악연이 끊어졌음을 느꼈다. 손에 닿는 온기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흰개미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어깨를 부서질 듯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아, 토굴과의 인연이 아직은 하나 남아 있다.
핏자국이 남은 얼굴이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전쟁의 흥분과 코가 욱신거리는 피비린내에서 퍽 멀어진 곳까지 이동해서야 흰개미는 비행 속도를 늦추었다. 지대가 높은 땅에 내려선 그는 평평한 바위 위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저쪽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새들이 평화롭게 지저귀고, 가을을 품은 산뜻한 바람이 스치자 긴장감에 억눌렸던 피로가 기지개를 켰다.
정신이 없던 영역 다툼의 한복판에서와 달리 고요해진 풍경이 미뤄 왔던 복잡한 심경을 더욱 부채질했다.
속이 뒤숭숭한 요한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발치를 응시했다. 핏물로 얼룩덜룩해진 가죽신은 더는 못 신을 성싶었다.
살점 조각이 묻은 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침묵이 감돌았지만, 부득부득 시선을 아래에 고정했다.
아직은 흰개미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얼굴 양옆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과 가마밖에 보이지 않는 정수리가 그녀의 불편하고도 혼란스러운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미안.”
무의미한 시선을 바닥에 흩뿌리던 요한나의 눈매가 움찔 경련했다. 고요하지만 형체를 갖춘 것처럼, 묵직한 흰개미의 눈길이 그녀에게 닿아 있었다. 요한나는 입술만 달싹였다.
“뭐가?”
“다시, 나타, 나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나타났다니? 누가? 설마 그 자신을 말하는 걸까? 흰개미가 제 앞에 나타난 게 아니라 자신이 그의 앞까지 잡혀 온 건데.
검은 개미를 죽였을 땐 잘했다던 놈이 고작 이런 일로 미안하다고 하다니.
무엇이 그의 본모습이고 진심인지도 이제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뜻밖의 답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의도치 않은 침묵을 지키자, 흰개미가 다시 말했다.
“여기서, 쉬어. 난, 다른, 곳으로, 가지.”
요한나의 미간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이렇게 쉽게 끝낸다고?
자신에게 날아오던 그를 보는 순간, 석굴 개미의 머리통을 으깨고 자신을 품에 안는 그의 열기 어린 눈빛을 보는 순간, 다시 발목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수렁에 빠진 줄 알았다.
흰개미의 하나뿐인 눈에서 엿보였던 집착과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영 일치가 되지 않았다.
요한나는 고개를 들었다. 흰개미가 고요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핏물에 절인 듯 본연의 흰색을 잃고 온통 붉은 그를 보는데, 돌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언제 그렇게 뜨거운 눈을 했었냐는 양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맑고 투명한 눈.
이런 눈을 하고.
‘여왕과 교미했을까?’
여왕과 함께 있던 흰개미가 떠올랐다. 그녀의 매끈하고 탄력 있는 팔과 얽혀진 그의 팔과 뿌리 깊은 기둥처럼 여왕을 지탱하고 있던 모습까지.
절박하다기엔 기이하게도 무료한 눈빛이었으나 여왕을 보호하려는 의지는 진짜였다. 검은 개미가 죽었어도, 석굴 개미마저 받들어 모시던 여왕과 흰개미의 조합이라면 토굴을 재건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터였다.
흰개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요한나는 부지불식간에 그의 손목을 붙든 제 손을 원수라도 되는 양 노려보았다.
“요한나?”
그녀는 갓 말을 배운 아이처럼 더듬거렸다.
“토, 토굴로 돌아가려는 거야?”
흰개미가 미끈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뱀처럼 서늘한 눈이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그녀를 살폈다. 그 얼굴은 언제 천진난만한 적이 있었냐는 양 음침한 데가 있었지만 제가 잡은 그의 손목만 노려보는 요한나는 알 길이 없었다.
“다시 일족을 번영시킬 거야?”
“모르, 겠어.”
“모르겠다니, 멍청한 놈. 기억 안 나? 그게 네 의무라고 했잖아.”
요한나가 다소 거칠게 지껄였음에도 흰개미는 어벙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예전에는.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어.”
그녀는 핏기가 빠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색이 빠졌던 입술이 피가 돌아 금세 붉게 변했다. 통통해진 입술에 흰개미의 시선이 잠깐 닿았다.
요한나는 고무줄로 조인 것처럼 좁아진 머릿속으로 자신이 대체 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했다. 토굴 개미들이 죽어 나가는데도 신경 쓰지 않았던 흰개미다. 그렇게 위했던 동족마저도 생판 타인인 양 외면하는 흰개미를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괴물이 비인간적인 건 당연한가. 그럼 당연히 상종을 안 하는 게 제일 좋은 선택일 터였다. 하지만 어째서, 이 손을 놓기가 꺼림칙한가.
“그럼 만약 내가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타인의 말처럼 들렸다.
“토굴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
“어떡할래?”
흰개미는 침묵했다. 길어지는 적막감에 요한나의 혀 아래 축축한 타액이 고였다.
“이해가, 가지, 않아.”
꿀꺽.
침을 삼키고 말했다.
“가지 말란 소리야.”
그는 괴물이지만.
괴물임에도.
요한나는 고개를 들었다. 몹시 힘든 얘기를 한다는 듯 한껏 일그러진 그 얼굴을 흰개미의 붉은 시선이 핥듯이 응시했다.
“그냥, 곁에 있어.”
목구멍이 막힌 듯 쉰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다른 의미는 없어. 그냥…… 그냥 너라도 있는 게 혼자인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니까.”
요한나는 무거운 추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시선을 위로 올렸다. 흰개미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라도, 있는, 게, 낫다고?”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게 한 말이 아닌 듯했지만, 요한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 뭐 이렇게 말해서 기분 나빠?”
그렇다고 한다면 다 없던 말로 만들겠어.
요한나는 누구를 향하는 건지 모를 분노를 터뜨렸다.
사냥을 하는 데 있어 차갑고 맑은 정신은 기본이었다. 갈대처럼 흔들리던 때도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평정을 찾곤 했던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발 디딜 땅마저 사라진 기분이었다.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그때 흔들리는 그녀의 눈앞으로 흰개미의 얼굴이 바짝 가까워졌다. 훅 좁혀진 거리에 요한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서늘하고 건조한 손이 경직된 뺨을 소중히 감싼다. 당황하는 눈을 들여다보며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석처럼 투명한 홍안이 점점 짙은 열기에 휩싸이는 것을, 요한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입꼬리에 닿는 상쾌한 숨결에 그녀는 어느새 서로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럴, 리가.”
흰개미가 코와 뺨 사이를 입술로 짓누르며 속삭였다.
“기쁘다, 요한나.”
“…….”
“내, 심장이, 아플 만큼.”
얼굴 이곳저곳을 입술로 지그시 누르는 간지러운 감각에 요한나는 무심코 진저리를 쳤다.
‘이 자식, 부끄러운 말을 잘도…….’
멀어지는 그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와락 끌어안은 흰개미가 입을 벌려 그녀의 뺨을 흡입했다. 자국이 남을 만큼 강하게 빨고는 구렁이가 먹이를 기절시키는 것처럼 그녀를 꽁꽁 휘감았다.
숨 막히는 포옹에 헐떡이며 요한나는 생각했다. 토굴을 향했던 그의 집착과 헌신은 사라진 게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꾼 것뿐인가.
다시 한번 발을 들이면 안 되는 곳에 발도 아니고 몸을 빠뜨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선택했다. 이 선택이 잘한 것인지, 한순간의 그릇된 감정에 치우친 치명적인 오류인지는, 하늘만이 알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