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반년 후.
검은 산맥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만 한 시간이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처음 몇 달은 흰개미가 할 일이 있다며, 또는 이제는 됐다며 자연스럽게 떠나기를 기다렸고, 그다음 몇 달은 검은 산맥에서 태평하게 빈둥거리는 시간을 누렸다.
흰개미가 있어 사냥하거나 먹을 것을 구할 필요가 없었던 데다가 토굴과 달리 어딜 가든 자유로우니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다. 흰개미의 존재도 익숙해져만 갔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난 후에는 거짓말처럼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때때로 착각과 혼란 속에 나누었던 레놀드와의 입맞춤이 생각이 났다. 그럴 때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뒤척이기 일쑤였다.
잠이 부족한 어느 날, 요한나는 건조한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들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흔들흔들. 꺾일 듯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꽃대를 응시하는 그녀의 옆엔 흰개미가 자리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요한나의 눈이 향한 곳에 시선을 뿌려 댔다. 그러다가 요한나가 입을 여는 순간, 언제 뭘 봤냐는 양 당연하게 그녀를 본다.
“바렌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무 전조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말. 흰개미의 붉은 입매가 단단히 굳어졌다.
“갑자기, 그는, 왜?”
한참 뒤에 튀어나온 흰개미의 말에 요한나는 즉시 대꾸했다.
“궁금해.”
대답하고 나서야 요한나는 제 마음에 부는 돌풍을 알아차렸다.
평온하게 사는 듯했지만, 서서히 크기를 키운 바람의 씨앗이 이제는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자라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잊은 줄 알았던 마음의 미련이 뿌리를 단단히 내려 버렸다.
레놀드와의 입맞춤에서 바렌타를 겹쳐 보았던 그때, 이미 눈치챘지만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 며칠간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건 그날 밤의 바렌타였다. 마을에서 정신없이 도망쳤을 때 바렌타가 불렀던 자신의 이름.
그때는 환청으로 여기며 넘겼지만 되짚을수록 선명해졌다. 그가 불렀던 이름의 어조, 목소리, 그에 담긴 다급함.
확실하다. 바렌타는 자신을 불렀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을까?’
그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대답을 듣고 싶어.”
요한나는 흰개미를 의식하지 않고 혼잣말했다. 그 이름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이 지긋지긋한 미련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부른 것이라면. 어떻게든 벌어진 일을 돌이키고 싶어 외쳤던 것이라면.
연이은 가정을 떠올린 요한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분홍색 꽃잎을 펼친 들꽃 아래 나뒹구는 뾰족한 자갈이 시야를 의미 없이 차지했다.
“보고, 싶어?”
“응?”
“그, 인간, 사내.”
“…….”
“보고, 싶어, 요한나?”
요한나는 흰개미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한 얼굴에 붉은 눈빛이 일렁거렸다. 좋든 싫든 3년을 가까이에서 얼굴을 맞대고 산 괴물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요한나는 여전히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심기가 불편한 것도 같고, 단순히 호기심을 품은 것 같기도 했다.
흰개미는 인간을 궁금해했으니, 그렇게 당하고도 인간을 그리워하는 자신이 신기한 걸까?
요한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응. 보고 싶어.”
망설임 없는 대꾸. 흰개미는 우는 듯 마는 듯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흰개미? 요한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던 참에 그가 길쭉한 몸을 일으키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물끄러미 내민 손을 보자 흰개미가 말했다.
“보러 가지.”
“…….”
“네가, 원한다면.”
잠시 머뭇거린 요한나는 그의 손을 천천히 붙잡았다. 어느새 그를 붙잡는 것이 퍽 익숙해졌다. 새삼스러운 생경함에 멍해진 요한나에게 흰개미가 말했다.
“안 갈 거야?”
드물게 빠른 말투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흰개미를 상처 입히는 일이라도, 어쩔 수 없다.
‘미혹은 해결해야 해.’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 * *
새끼를 먹일 먹이를 노리며 올빼미가 부엉부엉 우는 밤이었다.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린 요한나는 희미한 빛을 흩뿌리는 초승달이 구름에 가려질 때에서야 비로소 움직였다.
바렌타를 보고 싶기는 했으나 잠잠해진 일상에 새로운 구정물을 뿌리려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 상처 입은 것을 되갚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미련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그를 조금 닮은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흔들렸던 순간이 여전히, 계속, 신경 쓰인다.
‘다시 보면 결론이 나겠지.’
미련이 남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이 할 일은 정해져 있을 테지만.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괴물로 분류됐을 게 뻔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 치안대의 반응은 전처럼 느슨하지 않을 터였다.
얼핏 봐선 별 볼 일 없는 마을. 하나 검은 산맥 아래에 자리 잡은 만큼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우습게 볼 수 없다.
사람들을 부러 다치게 하고 싶은 마음도, 바렌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도, 불필요한 소란을 피우고 싶은 마음도 없어 요한나는 어두운 시간대를 틈타 밤손님처럼 하늘을 날아올랐다.
검은 옷을 입고 날개를 떨치자 달빛마저 가려진 밤하늘이 그들을 장막처럼 뒤덮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요한나는 오렌지색 지붕 저택의 후원으로 사뿐히 발을 디뎠다. 이런 작은 마을은 기름을 아끼기 위해 불을 오래 피워 두지 않았다. 오는 길에 불이 켜진 집은 두 채밖에 없을 정도였고, 그건 바렌타의 집도 다르지 않았다.
“저기 봐.”
요한나는 고요하기 짝이 없는 저택을 둘러보다가 문득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바렌타의 본가와 담장 하나를 두고 맞대어 있는 또 다른 저택이다. 한때 바렌타의 배려로 머문 적이 있었던 곳인지라, 추억 속 장소를 마주한 요한나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주목한 건 별택의 2층으로, 그곳에서부터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요한나는 흰개미에게 눈짓을 하고 조심스럽게 날개를 펼쳤다.
치릇. 치르릇. 어쩔 수 없이 나는 날갯짓 소리에 주의하며 천천히 별택의 2층 창틀에 가까이 다가갔다.
툭 튀어나온 창틀에 발이 튀어나오도록 걸치고 잠시 등을 대고 있었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더 그렇게 기다리고 슬쩍 고개를 창 쪽으로 내밀었다. 기억 속에서 이곳은 책을 가득 넣어 둔 다락방이었다. 서재라고 하기에는 좁아서, 바렌타가 읽고 싶은 책을 빼낼 때만 들락날락했었다. 지금은 싹 비워진 듯했다.
좁은 다락방을 꽉 채웠던 커다란 책장과 틈 없이 가득했던 책 대신, 푹신해 보이는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와 쿠션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요한나가 발견했던 빛은 한쪽에 마련된 책상에서부터 흘러나왔다. 거기 누군가 앉아 있었다. 바렌타인 줄 알고 움찔했던 요한나는 젊은 청년이라기엔 미묘하게 둥글고 구부정한 허리에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렌타의 아버지인 롯타 질레이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롯타에 관해서는 좋은 기억이 없다. 자신을 볼 때마다 여느 마을 사람들처럼 못마땅한 눈을 했으니까.
요한나는 한참 동안 늙은 사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그가 뭘 하고 있는지 분간이 갔다.
그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기성품이 비싼 작은 마을인지라 기본적인 생활용품을 만드는 것은 흔했다. 완성되는 천은, 성인 남성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작고 아담했다. 요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기 옷?’
어디에다 쓰려는 거지?
궁금했지만 몸을 돌렸다. 중요한 건 롯타가 아니라 바렌타였으므로.
요한나는 별택을 포함한 저택을 뱅글뱅글 돌았으나 바렌타의 옷자락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을 터.
저택의 커다란 철문 앞에 선 요한나는 문고리까지 만졌지만, 결국 열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쳐다보는 흰개미에게 속삭였다.
“돌아가자.”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고 검은 산맥으로 돌아오며 요한나는 자문했다.
바렌타를 못 봐서 아쉬운가?
아니면 다행인가?
* * *
그 뒤, 요한나는 앞으로도 그를 만나기는 요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는, 적이 놀랐다. 행운이다. 하나 그녀가 겪은 인생이 늘 그랬듯이 행운은 마냥 해맑은 형태만은 아니었다.
마을에서 검은 산맥과 가장 인접한 동쪽 부근.
요한나는 나무 꼭대기 가지에 올라서서 마을의 한복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렌지색 지붕이 멀리서나마 희미하게 보이고 그 근처로 굴뚝의 연기가 정감 있게 피어오른다.
저 굴뚝 아래 화덕에는 지금쯤 빵이 구워지고 있을까? 장작을 태우고 있을까? 마을의 풍경을 생각하자 어김없이 포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옆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흰개미가 쳐다보고 있었다. 작지 않은 덩치로 저렇게 고요하게 앉아 있는 건 봐도 봐도 신기한 일이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었지.’
검은 개미의 존재에 혼비백산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나뭇가지 위에 있던 그를 보고 느꼈던 충격이란.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기억의 떠오름에 마음이 쓰라렸다. 그녀의 시선이 차가워지자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겹도록 본 얼굴인데 바렌타의 근처에 있기 때문일까, 새삼스럽게 거북살스러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선 언제 또 마을에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적절한 시기를 꼽아 보았다. 그때 미세한 소음이 청각을 자극했다.
툭, 탕! 툭, 탕!
규칙적인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나무를 베고 못질하는 소리다. 요한나의 시선이 어지럽게 늘어선 나무를 지나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나무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어 나뭇가지를 몇 개 타 넘자 소리가 선명해졌다.
그녀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한 사내가 나무로 그네를 만들고 있었다.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탕! 망치를 내려친 후에 몸을 일으킨다. 그 뒷모습이 눈에 익어, 요한나는 무심코 숨을 멈추었다.
“바…….”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그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기 전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요한나의 시선도 절로 옮겨졌다.
“다 됐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치맛단이 풍성한 원피스를 입은 늘씬한 여자가 그에게로 걸어갔다.
요한나의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이슬라……?’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네에 앉자 품에 안고 있는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소중하게 안고는 그네에 앉았다. 남자가 그 뒤를 살짝 밀어 주었다. 조심스러웠던 여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솜씨 어디 안 갔네. 삐걱거리는 데 없이 잘 만들었잖아.”
“좋아?”
“재밌어! 비샤도 즐겁대.”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가 꺄르르 웃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손톱보다도 작은 앞니 두 개가 보였다. 통통하게 튀어나온 뺨이 갓 구워 낸 흰 빵처럼 보드라워 보였다.
아이가 사랑스럽다는 듯, 바렌타의 입술이 헤벌쭉 벌어졌다.
“재밌어, 비샤?”
세게 문지르면 다칠까 검지로 뺨을 조심스럽게 쓸며 웃는다.
꿈에 그리던 얼굴이었는데, 인간에 대한 동경만큼 끈덕지게 들러붙었던 그 얼굴인데, 요한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눈빛에서, 미소에서 새어 나오는 숨길 수 없는 행복감은 절대로 꾸며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보는 사람도 미소를 짓게 하는 감정이었다.
어쩌면 요한나도 따라 웃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가 바렌타가 아니라면. 그토록 보기를 원했던 옛 연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행복하구나.’
떨리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바렌타 정도의 위치라면 그새 다른 여자와 약혼했을 거라고.
‘아이까지 낳았을 줄은 몰랐지만.’
대체 언제 낳았을까? 이 상황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아이는 어려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갓난애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떠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결혼했던 건가?
‘역시 이슬라와 했구나. 그때 끝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네. 그녀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니, 그것도 거짓말이었군.’
의심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음에 약한 둔통이 일었다가 곧 가라앉았다. 바렌타를 보면 속상하고 북받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는 아무렇지 않았다.
바렌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행복한 모습이 슬프다. 하나 이 일을 예상하기라도 했던 걸까? 언제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마음은 평온하다.
바렌타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여자였구나. 그저 불쌍해서 마음을 썼던 여자일 뿐이었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 사실은 조금, 씁쓸하다.
별안간 턱 끝에 냉기가 닿았다. 흰개미가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요한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닿는 손은 소름이 끼치기보다는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요한나는 그 손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의 서늘한 입술이 닿았을 때도 거부하지 않았다.
흰개미를 깊이 받아들이며 요한나는 눈앞의 상황을 외면했다. 뭐라도 매달릴 게 필요했다. 설사 그게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흉일지라도.
* * *
요한나는 바렌타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대화를 나눌 마음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뒤돌아서니 그래도 인사 한두 마디 정도는 하고 싶었었구나 싶었다.
근처의 개울가에서 얼굴을 씻고 멍하니 발을 담그고 있는 그녀의 근처에 흰개미가 날아왔다. 요한나가 부은 눈으로 그를 흘끗했다.
“왜 이제 와?”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는 척하지 마. 나 떠나고도 거기 남았었잖아. 뭐 했어?”
“…….”
“설마 바렌타에게 뭔 짓 한 건 아니겠지?”
요한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자 흰개미가 보란 듯이 인상을 썼다. 예전에 비해서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표정 변화가 미미한 그였기에 이 정도면 꽤 큰 반응이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안에 푸른빛 식량 식물 줄기가 가득 쥐어져 있었다.
“거기, 근처에, 있었어.”
한심하다는 눈빛에 살짝 머쓱할 뻔했던 요한나는 되레 신경질을 부렸다.
“그럼 그렇다고 얘기하고 움직여야지. 네가 거기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
“뭘 봐. 먹기나 해.”
흰개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억울하다고 할 참이야?”
요한나도 눈을 마주 치뜨는 순간, 흰개미가 불쑥 다가왔다. 입술이 격렬히 맞부딪쳤다.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 내려던 요한나는 달콤한 맛이 번지자 가슴을 밀치는 대신 옷깃을 그러쥐었다.
혀가 요한나의 혓바닥을 쓸면서 지그시 눌렀다. 청량함이 허한 속을 채우기라도 할 것처럼 가득 차올랐다.
요한나는 기꺼이 그가 선사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목에서 가릉, 하고 만족스러운 소리가 샜다. 그 소리에 반응한 흰개미가 결합을 더 깊게 했다. 몸이 찰싹 달라붙으며, 식량 식물이 떨어졌다. 두 사람 모두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방금까지 바렌타로 인해 허망했던 마음이 요한나의 안에서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건 흰개미였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그토록 바랐던 것 같은데, 결국 남은 건 이 괴물뿐이다.
이런 걸 꿈꾸지 않았던 건 확실한데 어째서일까. 동경했던 인간은 하나도 남지 않은 이 상황이 그다지 서글프지 않은 것은.
‘왜 네 곁에서 이런 충만감을 느끼는 걸까.’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안온감을, 다른 어떤 인간도 아닌 흰개미에게서 느끼고 있다.
팍!
나무 기둥에 등이 부딪쳤다. 통증을 호소할 틈도 없이 밀어닥쳐 오는 입술에 요한나는 입 안쪽으로만 가는 신음을 뱉었다.
그러자 흰개미가 입술을 떼고는 가늘게 진동하는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까칠한 혀와 달리 차갑고 부드러운 입술이 목빗근을 쓸며 내려오자 간질간질한 감각이 요동쳐 얼굴을 젖혔다.
젖은 눈을 열자 풍성한 나무 이파리 사이로 햇볕이 보석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요한나는 목에 퍼부어지는 흰개미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녀 개인에게 어떤 불행이 닥치든 늘 평온하고 고요한 하늘은 허망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문득 다리에 힘이 빠져 요한나는 주룩, 미끄러졌다. 성인 남성의 허리만 한 나뭇가지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그녀가 미끄러진 만큼 따라 내려온 흰개미가 이번에는 그녀의 젖은 피부를 빨아들였다. 광대의 살이 흡입되자 통째로 먹히는 기분이다. 오싹했다.
무심코 뒤로 물러서다가 균형을 잃어 비틀거리는 그녀를 흰개미가 무자비한 힘으로 붙잡았다. 그녀의 팔뚝을 붙들고 혀를 내밀어 눈물의 짠맛이 느껴지는 볼을 집요하게 핥아 올렸다.
나뭇가지에서 추락할 뻔한 감각에 일순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든 요한나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들이 위치한 나뭇가지는 바닥까지 까마득하게 멀었다. 떨어진다면 죽지는 않겠지만 어디 하나 부러지긴 할 터였다.
점처럼 작게 보이는 자갈을 보며 요한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흰개미가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개처럼 핥아 댔다. 축축한 감촉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만해.”
“왜?”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흰개미가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구한 홍안이 투명하게 빛났다.
“요한나, 위로, 필요, 해.”
“…….”
“응? 아냐?”
그럴 리 없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눈빛과 목소리에 울컥 울음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그렇지 않다는 말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고개를 저었지만, 흰개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을 뿐이었다. 비웃음이라고 생각한 요한나가 입술을 깨물자 그가 하얀 손가락으로 치아에 박혀 붉어진 입술을 섬세하게 어루만졌다.
손가락이 닿았을 뿐인데 자동 반사적으로 척추가 저릿했다. 야릇한 감각에 움찔하는 그녀의 귓전을 입술로 잘근잘근 물고 흰개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생각, 하지, 마.”
찰나 흰개미가 다시 키스해 왔다.
이번에는 요한나도 거부하지 않았다.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는 힘껏 퍼부어지는 그의 키스를 집어삼켰다. 입술이 잘근잘근 씹히고 혀뿌리가 뽑혀 나갈 것처럼 강하게 빨렸다.
과격한 키스에 등골에 소름이 훅 끼쳤다. 점막이 부딪치는 젖은 소리가 청각을 자극하고, 흰개미의 청량한 풀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요한나의 감은 눈꺼풀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이래도 되는지 하는 고민 때문만은 아니었다. 흥분해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 흥분감이 당혹스러웠다.
달뜬 흥분과 쾌감에 머릿속 잡념이 밀려 나가는 감각은 퍽 기묘했다. 문제가 분명 존재함에도 그 현실에서 눈 돌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 점이 불길한 한편, 그럼에도 이 흥분을 마다할 마음은 들지 않는 게 제일 기묘하다.
생각이 통째로 날아간다는 점이 못 견디게 매력적이었다. 바렌타도, 이슬라도, 그들의 아이도 머릿속에서 차차 사라져 간다.
결국 요한나는 약간의 망설임과 아득한 찝찝함을 외면하고 흰개미의 혀를 깊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반응을 눈치챈 흰개미의 손놀림이 대범해졌다.
“다리, 벌려, 요한나.”
떨어질까 봐 나뭇가지를 꽉 붙들고 있던 허벅지에서 힘이 빠졌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아래로 떨어질 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그녀와 달리 흰개미는 떨어질 위험 따위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듯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녀의 발목을 덥석 붙잡아 나뭇가지 위로 올리자 불안정하게 깨진 균형에 요한나가 잇새로 비명을 씹었다. 한 번에 그녀의 바지와 속옷을 벗겨 아래에 깐 흰개미가 두 다리를 잡아당겼다.
몸이 훅 끌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뭇가지 위에 누운 채였다. 흰개미는 그녀의 양 발목을 붙잡고 그대로 쭉 올려 음부가 자신의 입가에 위치하도록 했다.
요한나는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는 흰개미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아흐……!”
큰 소리에 제가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아래를 핥는 물컹한 혀가 빠르게 움직였다.
혀를 길게 빼서 구멍에서부터 음핵까지 한 번에 핥아 올리다가 구멍 부근을 마구 쑤셔 댔다. 안으로 들어갈 듯하면서도 들어가지 않으며 주변을 찔러 대는 움직임에 요한나의 허벅지가 움찔움찔 튀었다.
할 듯 말 듯, 움직임에 감질이 났다.
“차라리……!”
푹 쑤셔서 휘저어 주지.
고여 드는 간지러운 열기에 엉덩이 근육이 조여들었다. 그녀의 애타는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흰개미의 혀가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은밀하고 좁은 내부에 축축한 이물질이 침입하는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흣…….”
어느새 요한나는 허공에 뜬 허리를 더 들어 올리고 있었다. 흰개미가 요한나의 질에 혀를 집어넣은 채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흔드는 그녀를 흘끗했다.
커다란 손이 탄력적인 엉덩이를 터뜨릴 것처럼 세게 쥐었다. 다소 아플 텐데 요한나는 희미한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달뜬 흥분에 하얀 피부가 발그스름해졌다. 그 야릇한 색에 흰개미의 홍안이 불에 달군 돌처럼 달아올랐다.
그가 손을 위로 뻗어 공기 중에 훤히 노출된 도톰한 음핵을 지그시 눌러 그대로 원을 그렸다. 손끝에서 작은 살점이 뭉개지기를 반복했다.
요한나의 목이 뒤로 홱 젖혀졌다. 목빗근이 또렷하게 도드라진 아름다운 목에 흐르는 한 줄기 땀방울이 관능적이었다.
흰개미는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손과 혀를 집요하게 놀렸다.
“아, 흣, 아아!”
혀를 최대한 길게 집어넣고 휘저었다. 까칠한 혀가 말랑한 내벽을 비벼 대자 이상야릇한 기분에 요한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혀를 쑥 빼낸 흰개미가 타액과 체액에 젖어 반질거리는 음핵을 쭉 빨아들이더니 고개를 들고 잔뜩 젖은 음부를 내려다보았다. 가볍게 손을 내리쳤다.
찰싹!
어느새 눈을 감고 끙끙대던 요한나가 흠칫 놀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흰개미는 폭이 좁은 나뭇가지 위라는 게 걱정되지도 않는지 주저 없이 그녀의 머리 위를 손으로 짚고 몸을 드리웠다.
축축하고 뜨거워진 그의 입술이 헐떡이는 목에 닿았다. 땀으로 척척하게 젖은 살결을 핥자 충분히 민감해진 요한나가 흐으, 헐떡이는 소리를 냈다.
다음 순간, 흰개미의 손가락이 입으로 쏙 들어왔다. 요한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흰개미는 갸름한 턱을 입술로 훑으며 그녀의 입 안에서 손가락을 휘저었다. 마디가 각진 손가락이 말캉한 혀를 꾹 누르고 긁어 댔다.
구역감이 올라와 혀로 그의 손가락을 밀어 냈다. 그러나 흰개미는 손가락을 빼기는커녕 가위질하듯 움직여 그녀의 혀를 위아래로 문질렀다.
“뭐, 하는, 흐, 거야!”
뭉개진 발음으로 항의하자 흰개미는 귓불을 씹어 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서 번들거리는 하나뿐인 홍안이 그녀를 발라 먹을 듯 응시했다.
“소리, 내는, 거, 좋, 아서. 하.”
“…….”
“요한나 혀, 말랑, 말랑, 해.”
기분 좋은 감촉이야. 흰개미의 눈매가 휘어졌다. 혀를 하도 움직여 대서 숨이 부족했다. 요한나는 흰개미의 손가락이 마음껏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며 거칠게 숨을 쉬었다.
평소답지 않다. 이질감이 강하게 들었다.
흰개미와의 ‘교미’가 이런 느낌이었나? 넣고 싸는 것이 다였던 게 교미였다.
언제부터 그가 교미하며 ‘기분이 좋다’고 표현했었지?
요한나는 혼란스러웠다. 문득 삽입의 시간보다 물고 빠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어졌음을 깨달았다. 이런 행위를 교미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교미보다는…… 차라리 정사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 생각에 요한나는 얼음을 삼킨 듯 머릿속이 띵해졌다. 그때 흰개미가 삽입해 들어왔다. 젖은 질을 꽉 채우며 들어오는 성기에 혼란이 일시에 걷히고 요한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교성을 질렀다.
사고가 정지할 정도의 충격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른 채 요한나는 나뭇가지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몸을 흰개미에게 의지했다. 목을 끌어안고 있는 힘껏 매달리며, 더는 소리를 참지 않았다. 한가로이 쉬던 새들이 놀라 푸드덕 날아가는 것을 습윤한 눈으로 응시하며 색스러운 신음을 마음껏 내질렀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나무 위에서의 정사. 미칠 듯이 몰려오는 쾌감. 푹푹 박힐 때마다 아랫배에서 폭발하는 뜨거운 열기, 그 감각.
제동 장치가 다 풀어진 것처럼 그녀는 쾌감에 신음하며, 머릿속을 말끔히 날려 버리는 폭풍에 기꺼이 몸을 내던졌다.
중천에 걸렸던 해가 서쪽으로 완연히 기울어지고서야 나무 위의 정사는 끝이 났다. 요한나는 나무 위에서 흰개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탈력감에 방심한 그녀가 떨어질 뻔한 뒤로, 흰개미는 마치 끈끈이 풀처럼 그녀를 제 팔다리로 칭칭 감아 고정했다.
요한나는 여전히 까마득하게 보이는 나무 아래를 흘끗하고는 나른하게 하품했다. 머릿속을 비우고 싶어 교미에 응했던 판단은 퍽 적절했다. 거대한 망치로 지그시 눌린 것처럼 머리가 무거워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잔뜩 느끼고 뿜어낸 몸은 금방이라도 실이 끊길 것처럼 나른했는데, 현실이 아닌 듯한 기묘한 부유감이 현 상태의 호오를 잊게 했다. 딱 기분 좋게 노곤하다.
‘한 가지, 자세는 좀 불편하네.’
요한나의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곤혹스러운 마음에 자꾸만 흰개미의 동태를 살피게 됐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과 목덜미를 야금야금 훑어 대는 움직임이 신경이 쓰였다.
‘나 설마, 이 괴물 자식이라도 옆에 있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건가?’
바렌타의 ‘가족’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뒤따르던 흰개미의 날갯소리.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었나. 요한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안심했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마침내 깨달은 자신의 진심에 요한나는 볼 안쪽의 점막을 잘근 깨물었다. 불쾌한 통증이 번지자 막연했던 위기감이 선명하게 크기를 불렸다.
혼자여도 얼마든지 괜찮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혼자임을 의식하지 못했다. 어딜 가든 함께하는 보폭에, 날갯짓 소리에, 집요한 시선에, 시도 때도 없이 내뻗어지는 손에, 하루에도 세 번씩 마주쳐 오는 서늘한 입술에,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가랑비에 어깨가 젖듯이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절대 익숙해지면 안 되는 놈의 존재를, 이제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제 모습에 요한나는 소름이 끼쳤다.
‘젠장, 진작 찢어졌어야 했어.’
이러다 말겠지. 곧 떠나겠지. 안이하게 내렸던 그 순간의 결정이 뼈아파지는 순간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요한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 그 말이 떠올랐다.
‘왜 자꾸 마을 정착을 권유하냐고? 그거야, 너 혼자 이런 곳에 있는 게 불안하니까 그렇지.’
이제는 희미해진 다정한 목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거든.’
추억을 더듬는 건 형체 없는 공기에 색을 입히고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요한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그가 그 말을 한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그게 괴물이더라도? 그렇더라도 혼자 있는 것보단 나을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인간의 무리에서 버림받고 토굴에서 뛰쳐나온 뒤, 반년이 넘는 시간이 답해 주었다.
오두막에 있는 내내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던 고독감과 외로움은 없었다.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슬프지 않았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요한나는 그냥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억지로 납득하는 것이어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상태를 깨고 싶지 않았다.
문득 턱이 간지러웠다. 양팔로 그녀를 끌어안은 흰개미가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비비적대고 있었다. 거미줄같이 가늘고 하얀 그의 머리카락이 턱과 뺨을 간지럽혔다.
비키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코가 간지러웠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코를 살랑살랑 건드렸다.
요한나의 눈매가 가늣해지고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다. 고개를 젖혔다가 앞으로 숙이며 크게 재채기를 했다.
“에취, 에취, 에취!”
“…….”
흰개미가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고도 몇 번 더 작게 재채기한 그녀가 눈을 치떴다.
“재채기하는 거 처음 봐?”
그냥 빈정거린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흰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봐.”
“…….”
그랬나? 무안해져서 괜히 더 눈을 부라렸다. 그때 흰개미가 검지로 그녀의 눈가를 쓸어 눈꼬리에 맺혀 있던 생리적인 눈물을 훔쳤다.
“눈물.”
툭 뱉고는 흰개미가 그녀의 눈가를 계속해서 문질렀다. 정사 때 올라갔던 체온이 다시 낮아져서, 그의 피부는 겨울바람을 맞은 듯 서늘했다. 그러나 냉기와 달리 흐물흐물 풀린 얼굴은 자비로웠다.
“귀, 여워.”
“미친 거야?”
흰개미가 험악하게 이를 가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말문이 막힌 그녀는 흰개미의 혀가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혀를 맞이했다.
등과 가슴이 맞닿고, 고개는 옆으로 트는 불편한 자세임에도 입맞춤은 깊어지기만 했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요한나는 느리게 눈을 떴다.
뒤늦게 너무 자연스럽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얼떨떨했다. 교미와는 관련이 없는 행위인데 거부감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같다.
흰개미가 툭 튀어나온 손가락 관절로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진 요한나는 뚱한 얼굴로 흰개미를 바라보았다.
“뭐 해?”
흰개미의 애꾸눈이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처음 보는 눈빛이다. 꼭 요정의 장난질에 홀린 듯하다. 워낙 차갑게 생긴 인상이라 저래도 바보 같아 보이지 않는 게 어이가 없달까.
요한나는 픽 코웃음을 쳤다가 흰개미가 입술을 달싹이자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좋아.”
단 두 음절뿐인 그것이 머릿속에 꽂혔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쳐다보자 흰개미가 나른하게 풀어진 눈을 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져가 입을 맞추었다.
따라오는 시선에 눈을 맞추며, 흰개미가 다시 말했다.
“좋아, 요한나.”
“…….”
“너무, 좋아서, 가슴이, 아프다.”
어느새 멈춰 있던 숨이 벌어진 분홍빛 입술 사이로 샜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고, 산뜻한 가을바람이 뺨을 살랑살랑 간질인다. 숲을 닮은 흰개미의 향이 들숨에 섞여 들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굳었던 요한나의 눈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좋아’가 교미의 ‘좋아’가 아니라는 걸 알 터다.
‘아, 왜 찝찝했는지 알겠어.’
미묘하게 거슬렸던 이질감의 정체가 선명히 드러났다. ‘좋아’라니. 그 단어가 통용되는 관계는 따로 있다. 그게 흰개미와 자신의 관계가 아니라는 건 명확했다. 가당찮았다. 말도 안 된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는 걸 보고 말지. 흰개미와?
이제껏 요한나에게 ‘좋아’는 바렌타였다. 자신은 바렌타를 좋아했고, 바렌타도 자신을 좋아했다. 그 시간이 좋았다. 하나 바렌타는 한 번도, 흰개미가 자신을 보는 것처럼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가장 행복했었던 때조차.
북받치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나 알아?”
“…….”
“괴물 주제에.”
흰개미가 눈을 깜박거렸다. 눈꺼풀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속도가 다른 때보다 빨랐다.
“나는, 네가, 나랑만, 있었으면, 좋, 겠다.”
“…….”
“이건, 좋아, 하는, 게, 아닌, 가?”
“그거로는 좋아한다고 할 수 없어.”
칼로 자르듯 무정하게 대꾸했다. 멍하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꿋꿋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것. 사실 잘 모르겠다. 바렌타를 좋아한다. 좋아했다. 자신에게 친절한, 모두에게 인기 많은 그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좋아한다는 게 뭔데?
복잡한 미궁에 빠진 기분이다.
흰개미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움찔, 요한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흰개미의 차가운 손이 미끄러지듯 그녀의 뺨에 닿았다. 머리를 터뜨리거나 힘을 주는 기색 없이, 도리어 깃털을 매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뺨을 쓰다듬는다.
무심코 그 손길을 ‘기분 좋다’고 생각해 버려, 요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제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흰개미가 곁에 있어서 안심된다. 그를 전처럼 싫어하지 않는다. 이미 예전에 기억에서 잊힌 라나 일행과 비교하면, 망설임 없이 흰개미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흰개미일까. 다른 사람, 심지어 마물이어도 상관없었을 텐데. 혼란스럽다. 엄청나게 혼란스럽다.
‘너 때문에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데.’
흰개미가 좋다. 하지만 여전히 증오스럽다.
이 모순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흰개미를 따라붙게 하는 게 아니었어.
뒤늦은 후회가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탁!
요한나는 흰개미의 손을 아프도록 강하게 쳐 내고 나뭇가지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날개를 펼치자 뒹구는 일 없이 바닥에 착지했다.
저 위에서 흰개미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 하나 까딱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날개가 차릇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그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요한나는 잇몸이 시려 올 만큼 이를 세게 물었다.
그날 밤, 요한나는 꿈을 꾸었다.
수개미들이 수도 없이 몸을 타 넘는다. 막대기 같은 성기가 들락날락하며 뜨겁고 물컹물컹한 체액을 싸질렀다. 제 몸이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괴물을 위해 존재하는 몸뚱이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두려운 건 그런 불쾌한 감촉이 아니었다.
건강한 알을 갖기 위해. 공주. 일개미를. 우리에게, 일꾼을, 강한 개미를. 공주, 공주. 우리의 공주.
쉴 틈 없이 귓가에 퍼부어지는 말은 흡사 저주와 같았다.
요한나는 번쩍 눈을 떴다.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요요한 어둠이 괴롭게 움츠러든 어깨에 내려앉았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그보다 더 전으로 돌아간다.
아버지가 죽었다. 사지가 조각나고, 내장이 파인 채 그가 생전에 사냥했던 짐승보다 더 끔찍한 몰골로 죽었다. 죽음의 흔적을 따라간 곳에는 죽음보다 더한 것이 있었다.
검은 개미는 상어처럼 뾰족한 이빨을 들이대며 그녀를 난자했다. 발목이 으스러지고 난생처음 겪어 보는 고통이 몸을 두 쪽으로 갈랐다.
몸부림치던 자신을 지켜보는 홍안.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를 때도, 통증에 익숙해진 몸이 무감각해질 때도, 소름이 끼칠 만큼 아름다운 보석의 눈동자는 내내 무심했다.
지켜보는 홍안. 변하지 않는 홍안. 무정하고, 비정한 홍안. 두 눈에 깃든 아름다움만큼이나 잔인했던, 붉은 눈동자.
“헉.”
요한나는 거친 숨을 토하며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축축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손안에 말아 쥐고 요한나는 하아, 숨을 내쉬었다.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애꾸눈. 무심코 그쪽을 향하려는 시선을 하늘로 내던지고, 요한나는 빛나는 별들을 향해 물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저 괴물과 뭘?
혼자보다는 괴물이라도 함께 있어 주는 게 낫다고?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애초에 이 꼴이 되어 버린 게 누구 탓인데.
‘빌어먹을. 젠장. 젠장!’
요한나는 눈물을 흘렸다. 속세의 일은 속세의 일이라는 듯, 조금도 흠집 없이 고고한 별들이 자신을 단죄해 주길 바랐다.
식은땀으로 축축한 몸이 불쾌한 것과는 달리 머릿속은 침잠한 호숫물처럼 냉랭하고 맑았다. 반짝이는 별이 요한나의 까만 동공에 떠올랐다. 깨끗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안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아늑한 꿈에서 깼을 때의 허망함까지 똑같았다.
* * *
흰개미가 입을 맞추려는 걸 요한나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어제 비둘기 잡은 거 있잖아. 그거 먹을래.”
요한나는 흰개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말했다. 흰개미는 살피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뚝뚝하게 나뭇가지에 꿰어 놓은 비둘기를 꺼내 불가에 꽂아 두었다. 오래지 않아 노릿한 고기 냄새가 피어오르기까지, 아무런 말소리도 오가지 않았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그녀는 나뭇가지를 돌려 가며 고기를 구웠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공기는 서리가 낀 것처럼 냉랭했다.
“요한나.”
“…….”
“요한나.”
냄새와 달리 밍밍하기만 한 비둘기 살을 한 움큼 크게 깨물고, 질긴 것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씹었다. 뜯고, 씹고, 삼킨다. 삼박자에만 집중했다.
“요한나.”
“…….”
항상 의문이었지. 네가 정말 눈치가 없는 건지, 그런 체하는 건지.
억지로 맛없는 고기를 씹어 삼킨 요한나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틀어졌다. 억지로 외면하던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들었다.
먹을 생각도 없는지 식량 식물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시무룩한 얼굴의 흰개미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실룩였다.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의 선이 고명한 화가의 붓칠만큼이나 유려했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돌려 말하는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하는 요한나는 직진하는 걸 선택했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훌훌 털어 버리고자 검은 산맥의 중추로 훌쩍 떠나 버리길 반복했던 그녀였다.
마을 사람들과 부대낄 때는 그것이 가능했는데, 어딜 가든 두려워하지 않고 쫓아오는 흰개미를 상대로는 어림도 없었다.
‘마음’이 부딪치는 것도, 갈등의 기로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학습해 본 적이 없다.
이 아름답지만 잔혹한 괴물은, 좋게 돌려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요한나는 눈을 깜박이는 그에게 재차 물었다.
“나한테 뭘 원해?”
평온해진 만큼 목소리는 눈길처럼 서늘하고 온기 하나 없이 무정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양, 흰개미가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뿐인 홍안이 제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요한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새 길게 자란 손톱이 손바닥의 질긴 살을 파고들었다.
“내가 좋다며. 그래서 묻는 거야.”
“…….”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냐고.”
“아.”
무덤덤하게 눈을 끔벅이는 그를 보자 울컥 답답함이 치밀어 올라, 차분히 기다리자는 결심이 허무하게 스러진다.
“뭐야. 설마 내가 같이 좋아해 주길 바라?”
“…….”
“하, 설마.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까먹지 않았으면 그럴 리 없지.”
짧은 사이 ‘설마’가 두 번이나 나왔다. 말을 하면서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요한나는 차갑게 실소했다.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가 시린 냉기를 풍겼다.
“잘 들어, 흰개미.”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맑은 보석처럼 투명한 붉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눈이었다.
생각해 보면 흰개미는 시선을 피한 적이 없었다. 처음, 검은 개미에게 겁탈당했을 때, 무료하게 딴청을 피우던 그때를 제외하고 흰개미는 늘 그녀를 똑바로 마주쳐 왔다.
하지만 그것 하나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가 지나치게 또렷해 요한나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난 네가 끔찍하게 싫어.”
“…….”
“제발 꺼져 줬으면 좋겠어.”
그가 시선을 피하지 않은 만큼, 그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인한 말을 퍼부었다.
“내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거 기억나?”
요한나는 이 말이 그를 동요시킬 것임을 알았다. 근거는 없어도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어하는 마음이 희미하게 감돌았지만, 그 정도의 망설임은 가볍게 덮어 숨겨 버렸다.
“너와 있으면, 난 언젠가 또 그렇게 될 거야.”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흰개미가 말했다.
“너는 기뻐, 했어. 화도, 냈지. 슬퍼했, 고, 눈물, 도, 흘렸다. 나를, 싫어, 하면서도, 웃어, 줬지.”
“…….”
“너는, 찬란해, 요한나.”
냉소를 유지하던 요한나의 입꼬리가 경련했다.
“그런, 네가, 어리석은, 선택을, 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아.”
“…….”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달라.”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의 자신을 지칭하고 있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요한나의 눈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인간이든, 충인이든 상관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았던 이가 눈앞의 흰개미뿐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밀려들었다. 하나 그 깨달음에 샘솟는 건 기쁨보다는 분노였다.
어째서 그게 너냔 말이야.
“지금은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회의적인 물음표에 흰개미가 입술을 휘었다. 믿음으로 가득한 눈. 그것이 회피하는 자신을 비웃는 듯했다.
요동치는 마음이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야.”
조급해하지도, 불안해하지도, 애원하지도 않았다.
“좋아한다면, 더는 날 따라오지 마.”
그저 진심이 담겨 외려 건조해진 목소리로 호소했을 뿐이다. 흔들리지 않는 까만 눈빛에 흰개미의 홍안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더는 널 싫어하지 않을게. 그러려고 노력할게.”
“…….”
요한나는 시간이 지나도 이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 보자.”
눈물을 흘리는 흰개미라니.
“토굴로 돌아가 줘.”
무덤덤하게 끝을 맺으면서도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하얗고 무표정한 얼굴 위로 손톱만 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광경은 어딘지 비현실적이었다.
흰개미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언제?”
그가 물었다.
“지금.”
대답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멍멍하게 울렸다.
“이거 다 먹기 전에, 떠나 줬으면 좋겠어.”
흰개미는 그러겠다느니, 싫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도 재촉하지 않고, 식어서 더 맛이 없는 비둘기 고기를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빨리 먹어야 하나? 그럴 필요까지야. 평소처럼 먹는 게 낫겠지?
쓸데없는 의문을 품고 식사를 하는 사이에도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흰개미는 미동도 없이 그녀가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치 이 순간을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양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아서, 간만의 악몽으로 기분이 너저분해진 요한나는 심기가 더욱 혼란해졌다.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인력처럼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고 요한나는 얼마 남지 않은 비둘기의 가슴살을 뜯어냈다. 손과 입가에 묻은 기름기가 불쾌하다.
마침내 맛없는 식사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흥건해진 흰개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은 왜 흐르는 걸까?’
눈물로 젖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흰개미의 얼굴은 무섭도록 무표정해서, 그녀는 그가 왜 우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세간의 상식을 들이밀기에 흰개미의 존재는 지나치게 비상식적이다.
대답도 하지 않은 주제에 흰개미는 그녀의 마지막 요구를 충실히 따라 주었다.
그가 몸을 일으킨다. 요한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틀고 그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식사 내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만을 보았던 것과 달리 그는 이번에는 지체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기척이 느껴진다. 근래 한 몸처럼 느껴 왔던 흰개미의 아우라가 희미해지자 요한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점처럼 변한 흰개미의 뒷모습이 보였다.
멍하게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제 몸을 휘감고 있던 무거운 사슬이 떨어져 나가는 상상을 했다.
흰개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시선을 느꼈을 테지만, 뒤돌아보지도 않고,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가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걸어서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검은 산맥은 평소의 풍경을 되찾았다. 다람쥐가 나무 사이를 쪼르르 오갔고, 산새들이 지저귀며 동료를 불렀다.
“…….”
우두커니 앉은 채 요한나는 불가로 시선을 돌렸다. 흰개미가 사라졌음에도, 물기로 반질거리는 홍안이 뇌리에 박힌 듯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꽃이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그의 눈을 연상시켜, 요한나는 못 볼 것을 본 양 홱 고개를 돌렸다.
사지를 옭아매고 자유를 박탈했던 사슬은 이제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이유 모를 눈물이 사슬보다 무거웠다.
* * *
지긋지긋한 토굴의 마지막 굴레와 작별을 고한 지 세 달이 지났다. 처음 며칠간은 그래도 흰개미인데,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가 다시 돌아올까 식사하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면 노루가 튀어나오는 일이 반복되자 어느새 긴장은 사라졌다.
두 달이 지난 시점까지도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흰개미는 다신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요한나는 낡은 소파 위에 앉아 창밖으로 날아가는 새 떼를 응시했다. 그녀가 현재 지내고 있는 사냥꾼 라가스의 집은, 깨끗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
그녀가 살았던 오두막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무너, 져, 있었어. 아마도, 마을, 인간들의, 짓. 그래도, 한번, 가, 볼래?’
오두막을 그리워하는 뉘앙스를 흘렸을 때 훌쩍 사라졌다가 돌아온 흰개미가 들고 온 소식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바렌타는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을 거야.’
자신이 충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분노한 사람들의 등쌀에 집이라고 멀쩡하진 않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그래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고로 요한나는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했다. 망가진 오두막을 수리해서 살자면 못 할 것도 없으나 토굴의 개미에게도, 마을 주민들에게도 노출된 곳은 부담스러웠다.
흰개미와 헤어진 후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걷다 여기에 이르게 되었다. 오두막의 주인인 사냥꾼 라가스는 아버지의 오랜 동료로, 같은 스승을 두었다가 성인이 되어 갈라진 이였다.
요한나는 오두막에 머물게 된 대신 청소와 요리를 도맡고 오래된 곳을 수리했다. 라가스는 사냥 때문에 며칠이나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 대개 혼자 식사하고는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냥을 떠난 라가스로 인해 그녀는 벌써 일주일째 혼자였다.
멍하니 있던 요한나는 기울어진 해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덫을 살피러 갈 시간이네.’
간단히 채비를 마치고 오두막을 나섰다.
오두막 주변에 여우잡이 덫을 놓으며 그녀는 제법 비싼 물건들이 많이 있는 오두막을 떠올렸다. 먹고살기 위해 사냥하는 보통의 사냥꾼들과 달리 라가스는 고지를 점령하는 것처럼 더 사납고 위험한 것을 잡아 댔다. 평범한 짐승이 아닌, 이를테면 아인종이나 마물 같은 생물 말이다.
‘마물 현상금이 꽤 짭짤한가 봐.’
검은 산맥은 마물의 피와 힘줄 등의 부산물을 원하는 마법사들에게 비싼 값을 주고 팔 수 있는 것들이 많아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사냥꾼이 적잖은 편이었다.
충인의 시체도 가격을 잘 쳐주는 편인지 궁금했다.
‘라가스는 도시로 내려갈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돈을 버는 걸까.’
아버지와 또 다른 의미로 기인이다. 어쩌면 도시에 집이 하나 더 있을지도 모른다. 어지간히 성공한 사냥꾼들은 마을이나 도시에 처자식을 만들고는 했으니 라가스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여길 떠나면 차라리 동굴에서 지낼까? 집을 짓는 것도 귀찮은데.’
과거와는 달리 인간들과 지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수를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사냥꾼의 오두막에서 먹고살 만큼만 사냥하며 혼자 지낼 수밖에 없다.
‘혼자…….’
단어가 주는 울림을 곱씹는 그때 익숙한 것이 눈에 띄었다. 식량 식물이다. 나무 사이에서 자생하는 푸른 식물을 손에 쥔 채 한 입도 먹지 않았던 누군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가 흐려졌다.
멈칫했던 요한나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식량 식물을 채집했다.
“……저녁 전에 입가심으로 먹으면 좋겠네.”
귀에 들려오는 제 목소리가 약간 어색하게 느껴졌다. 일주일가량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한 탓에 소리를 내는 것도 퍽 오랜만이었다.
“혼잣말이라도 많이 해야 하나?”
그건 좀 우스운 꼴일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덫을 모두 설치했다.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트는 순간, 요한나의 귓바퀴가 꿈틀했다.
바스락.
범인이라면 듣지 못했을 테고, 들었더래도 이런 산중에서는 바람에 스친 소리겠거니 무시하겠지만 사소한 소음을 눈치채지 못해 늑대 무리에게 포위되었던 경험이 있는 그녀에겐 충분한 사인이었다.
살금살금.
소리를 없애고 걸어갔다. 목표는 정면의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떡갈나무. 그건 저 뒤에 있다.
사냥감을 상정한 요한나의 눈빛이 완연한 사냥꾼의 그것으로 돌변했다. 맹수든, 마물이든 간에 대응하기 쉽게끔 온몸의 근육이 가벼운 긴장 상태로 돌입한다. 허리를 살짝 숙인 채 걸음을 옮기고, 죽창을 움켜쥐고 때를 기다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순간.
‘지금!’
죽창을 들며 나무 옆으로 빠져나간 그녀는 곧장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눈을 크게 떴다.
‘……!’
그녀처럼 손에 든 무기를 내리치려던 레놀드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 * *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요.”
끝이 이상한 요한나의 말투에 갈색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종마처럼 탄탄한 목을 시원하게 내보인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편하게 해.”
고개를 끄덕이며, 요한나는 영락없이 사냥꾼처럼 보이는 그를 훑어보았다.
‘거의 1년 만인가.’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는 여전했다. 얼굴에서 풍기는 사나운 분위기와 여유로운 표정, 바렌타와 닮은 상냥한 색을 했으면서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은 위험스럽게 번뜩였다.
다만 옷차림은 전과는 차이가 있다. 외투를 벗은 안쪽은 약간 누런빛이 감도는 리넨 튜닉이었는데, 소매를 자르기라도 했는지 울퉁불퉁한 팔뚝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따뜻하지만은 않은 날씨인데 저렇게 입다니. 아무리 외투가 있어도 그렇지.’
내심 딱, 혀를 찼다. 그새 더 살벌한 근육질로 변한 몸을 보니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믿겠다.
‘근육만 따지자면 라가스와도 견줄 수 있겠는데.’
팔씨름이라도 한다면 볼 만하겠다. 상상이 우스꽝스러운데도 딱히,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짐승만 보다가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반가움도 없다.
“차 더 줄까?”
“이걸로 충분해.”
레놀드가 아직 찰랑거리는 찻잔을 흔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당신 집이야?”
“아니. 아버지 지인에게 잠시 신세를 지고 있어.”
“그런데 내가 자고 가도 돼?”
“침낭이 망가졌다면서.”
그렇게 부탁한 사람이 새삼스럽게. 무덤덤한 대꾸에 레놀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또 만나서 반가워.”
“그렇게 말하니 기분은 나쁘지 않네.”
“그런 것 같았어. 전보다 눈빛이 부드럽잖아. 내가 반갑나 보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데 아까부터 이 사람이.
“왜 날 그렇게 봐?”
“보면 안 돼?”
되묻는 질문에 황당해서 눈썹을 까딱였다. 레놀드는 일전에 만났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방랑객인데도 나름대로 깔끔했던 전과 달리 좋게 말해서 야성적이고 나쁘게 말해서 야만적인 차림으로 변한 것도 그렇거니와, 성격도 영 딴사람이 된 듯했다.
그때도 자유롭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느슨했지만 존재했던 고삐조차 풀어진 듯했다.
‘이쪽이 본성인가?’
“그건 아니지만.”
“그럼 내버려 둬.”
요한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걸로 실랑이할 생각은 없다. 그럴 문제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피곤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요즈음은 뭐 한 가지를 깊이 생각하지를 못한다. 얕은 개울물에서 반복적으로 헤엄치기만 하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이랬더라.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귀찮아져 그만두었다.
“차 맛있네. 찻잎은 좀 오래되어 보이긴 해도.”
“집주인이 이런 걸 즐기지는 않거든.”
“나도 차 맛은 잘 몰라. 도시에서 줄기차게 마셔 봤어도.”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는 레놀드를 보며, 요한나는 라나 일행의 경비 무사로 일하는 것보다 이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냥꾼으로서의 모습인가.”
“어색해?”
“잘 어울려.”
레놀드는 말없이 씨익 웃었다. 올라간 입꼬리는 호방한 모양이었지만 어쩐지 술에 잔뜩 취한 것처럼 방탕해 보였다.
“어째서 혼자야? 라나에게 고용된 입장인 줄 알았는데.”
레놀드는 입맛을 다시더니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계약은 파기됐어.”
“그래?”
“피터가 죽었거든.”
뜬금없는 부고다.
“어쩌다가?”
“비탈에서 굴렀어.”
“…….”
“꽤 가팔랐거든.”
말문이 막힐 만큼 허무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냥꾼의 기준에서일 뿐, 일반인들의 추락사는 흔해 빠졌다. 노련한 사냥꾼도 가끔은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하는 만큼, 요한나는 피터의 한심한 이미지를 지우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유감이야.”
“그래. 운이 없었지. 하루만 더 가면 검은 산맥을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말이야. 그 머저리가 세이렌에게 홀리지만 않았어도.”
세이렌은 바다 괴물의 이름을 딴, 아름다운 형상을 취한 마물이다. 바다의 세이렌과 달리 언뜻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다는 골치 아픈 특징이 있다.
“마물이라는 걸 알았어도 달려 나가지 않았을까 싶지만.”
“…….”
“미녀라면 환장하는 놈이어서 말이야. 너도 알잖아?”
요한나는 얼굴을 구겼다. 크게 웃은 레놀드는 덕분에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검은 산맥으로 되돌아왔다며, 그다지 안타깝지 않은 얼굴로 투덜거렸다.
“현명한 선택이네. 여긴 현상금 사냥꾼도 잘 들어오지 못하니까.”
“피터의 가문에서 고용한 청소부가 잠잠해질 때까지는 있으려고.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내 탓을 하는 건지, 속 좁은 놈들이라니까.”
그의 사정을 파악한 요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의문점이 있어 고개를 갸웃했다.
“라나는? 그런 일이 있었다면 도와줬을 텐데.”
“…….”
“그녀는 당신을 신뢰하고 있었잖아.”
다양한 의미에서 말이다.
“은신처를 구해다 줄 테니 있으라고 하더군.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거라고.”
“그런데 어째서?”
검은 산맥에서밖에 있을 수 없는 자신과 달리 레놀드는 이곳을 그리 기꺼워하지 않는 눈치다. 사냥꾼의 차림이 제법 잘 어울리는 지금도, 그에게선 숨길 수 없는 도시의 향락과 방탕함의 냄새가 났다.
“잊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피터의 핏줄이야. 한심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안위를 맡길 수는 없지.”
합당하면서도 차갑게 느껴지는 말이다.
요한나가 침묵을 지키자 잠깐 생각에 잠겼던 레놀드가 피식 웃었다.
“물론 그녀가 날 많이 좋아하긴 했어. 그 충인 노예에게 한눈을 팔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날 곁에서 떼어 놓지 않았거든.”
레놀드는 찻물의 물기도 말라 건조한 입매를 매만지며 요한나를 눈짓했다. 충인 노예. 움찔한 그녀는 그의 묘한 눈빛을 받고 조금 찝찝해졌다.
“그거 알아? 네가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반응을 했더라면 라나는 성 한 채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 노예를 사들였을 거야. 상대도 해 주지 않는다며 무지하게 약 올라 했거든.”
“…….”
“그러고 보니 너야말로 그 노예를 어떻게 한 거야? 어째서 안 보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못 알아들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도시인인 그라면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의중을 충분히 파악했을 텐데도, 레놀드는 화제를 돌리지 않았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잘생긴 놈이었으니. 애꾸인 게 좀 흠이었나.”
“…….”
“팔아먹었어?”
말도 안 되는 농담.
“그는 노예가 아니야.”
“뭐?”
“노예가 아니라고.”
“아아, 그랬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인다.
“난 충인을 노예로 길들였다는 얘긴 들어 본 적 없는걸. 의심스러웠지.”
“그런 것치고 노예 취급이 충실하던데.”
빈정거렸더니 농담인 줄 알았는지 가볍게 웃는다.
“그래도 좀 아쉽게 됐네.”
“뭐가?”
“요즘 충인들 동태가 심상치가 않아. 여긴 그들의 권역과 거리가 있으니까. 넌 몰랐던 모양이지?”
“들은 적 없어.”
“사냥꾼들 사이에선 화제가 되고 있어. 충인 놈들이 평소엔 얌전해도 영역 싸움이 있을 땐 무시할 수가 없잖아. 근처에 있다간 낭패를 겪게 될 테니 신경을 쓸 수밖에.”
“…….”
“널 봤을 때 기대했던 것도 그거고. 네 충인이라면 아는 게 있을 테니.”
“……정말 아쉬웠겠네.”
“아니. 말했잖아. 널 본 것 자체만으로도 반갑다고. 충인의 영역이야 적당히 피해 다니면 되니까.”
요한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흰개미가 언급된 탓일까. 호숫물에 침잠해 가는 조약돌처럼 기분이 저조해졌다.
타인을 만났다는 데서 오는 약간의 즐거움과 반가움까지 사라져서, 요한나는 레놀드와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사냥꾼의 관용을 베풀게. 돈은 받지 않을 테니 오늘 밤만큼은 편히 쉬다 가.”
레놀드는 싱긋 웃더니 정수리에 살짝 걸쳐 두었던 챙이 좁은 모자를 벗어 가슴으로 끌어오며 고개를 숙였다. 도시인의 예의인가? 예법이라곤 딱히 없는 사냥꾼의 몸짓답지는 않았지만 멀쑥하게 생긴 그에겐 나름 잘 어울렸다.
“좋아. 그럼 신세를 좀 질까. 저기서 자면 돼?”
레놀드가 얼마 전에 옻칠해서 반질반질한 장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는 곧바로 누워 잠을 청했다. 요한나는 모자를 얼굴 위에 올려 둔 레놀드를 잠깐 보았다가 뒷정리를 했다.
‘영역 다툼이라니. 전쟁이라도 하는 건가.’
충인이라고는 하나 그게 개미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인데도 왠지 개미들의 싸움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 무리에선 질서정연한 놈들이지만 다른 군락과 엮이면 얼마나 사나워지고 잔인해지는지, 그 토굴에서 생생히 겪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당연히 흰개미와 검은 개미도 나서겠지.’
문득 그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토굴과 엮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탓일 터. 찻잔을 닦아 내는 그녀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여우잡이 덫은 내일쯤 확인하면 될 일이고, 청소도 진작 끝내 놓았다.
산중의 밤은 길고 고요하다. 요한나는 의자에 멍하니 걸터앉아 귓가를 간질이는 이질적인 숨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것밖에 없었던 오두막을 울리는 타인의 숨소리는 어색한 한편 편안했다.
‘오늘 밤만큼은 혼자가 아니겠군.’
요한나의 눈도 슬며시 감겼다. 이윽고 두 개의 숨소리가 파장을 같이하여 공기 중을 맴돌았다.
* * *
꿈을 꾸는 중이었다. 꿈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있을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질척한 입술이 문대졌다. 윗입술과 윗입술이 맞닿고, 아랫입술과 아랫입술이 맞닿은 채 까칠한 촉감의 혀가 입 안을 휘저었다.
맑은 홍안이 그녀를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시야에 가득 찬 홍안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그녀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요한나는 돌처럼 단단한 팔뚝을 움켜잡고 신음했다. 혀가 빨리는 것뿐인데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그와의 접촉은 늘 그랬다. 온몸을 샅샅이 핥아 대는 혀는 어린 짐승을 돌보는 어미의 움직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요한나는 그의 혀끝에서 오싹한 흥분을 느꼈다.
이렇게 빨리다가 먹혀 버리고 말 것이다.
근거를 알 수 없는 본능적인 공포가 머릿속을 마비시켰다. 그런데 피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혀뿌리를 빨아 올리자 전류가 아랫배까지 흘러 온몸이 저렸다.
부정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다른 자신이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흰개미의 팔을 강하게 잡고 가슴을 부딪치는 몸짓은 명백한 성적 함의를 담고 있었다. 흰개미가 강인한 팔로 허리를 감고 끌어당기자 환영하는 것처럼 다리가 벌어진다. 치골끼리 비벼지는 꼴이 음란했다.
사내에게 교태를 부리는 모습이 이렇게 천박할 수가 없다. 비웃고 빈정거려도 가슴을 달구는 열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흰개미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굴곡진 눈매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눈꼬리를 휘었다. 고요하고 정적인 얼굴이 교미를 앞둔 수컷처럼 붉은 색기를 흘렸다.
큼직한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이미 젖꼭지를 꼿꼿하게 세운 풍만한 가슴살을 어루만졌다. 손끝은 섬세하게 움직이며 가슴 하부의 살을 살살 만져 댔다. 간지러울 만큼 가볍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젖꼭지가 더욱 성을 내며 옷자락을 밀어 냈다. 도드라진 형태가 민망해질 즈음, 손놀림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이 가슴살이 움푹 파묻히고 엄지가 만져 달라며 곤두선 젖꼭지를 꾹 눌러 둥글게 문질렀다.
하아, 으응.
비음이 섞인 신음을 흘리며 다리를 꼬았다. 부끄럽다는 자각도 없었다. 흰개미가 입을 맞추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꽉꽉 문질렀다. 검지로 빠르게 치대고는 자극당한 살점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비벼 댔다. 능수능란한 애무에 신음을 참지 못하던 요한나가 가물거리는 눈을 떴다.
‘잠깐, 뭔가 이상해.’
그놈은 이런 식으로 날 만지지 않아. 능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애무라고는 평생 해 본 적 없어, 서툰 감이 가시질 않았던 손길이었다.
이질감을 느끼자 솟구쳤던 흥분감이 날개 잃은 짐승처럼 빠르게 추락했다.
요한나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곧 열쇠로 열어젖히듯 두 눈이 활짝 열렸다.
이상한 기분.
잠에 취해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허벅지 사이로 들어와 무릎을 꿇은 레놀드가 가슴에 달라붙어 있었다.
옷자락이 빗장뼈 부근까지 올라가 가슴이 훤히 드러났고, 그 끝의 정점은 레놀드의 모양 좋은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가 있었다. 모닥불의 주홍빛에 물들여진 가슴살이 타액으로 반질거렸다.
“뭐 하는 거야?”
깊게 잠들었던 탓인지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젖꼭지를 우물거리며 레놀드가 눈만 위로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러려고 날 들인 거 아니었어?”
그도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었던지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다소 헝클어져 있다. 요한나는 몸을 굳혔다.
그녀가 일어났음에도 레놀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쪽 가슴을 빨며, 다른 손으로는 침으로 젖어 식어 가는 젖꼭지를 콕콕 건드리는 그에게 말했다.
“그만해.”
차가운 목소리. 입 속에서 젖꼭지를 굴리던 레놀드가 비로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참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가 천천히 가슴에서 입과 손을 떼기까지, 요한나는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담담했고, 일말의 흥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레놀드의 탄식이 상황을 요약했다.
“내가 착각했네.”
“…….”
“자면서도 신음을 흘려서, 간만에 나도 엄청 흥분했는데.”
요한나를 흘끗하고 난감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실수했군.”
“…….”
“좋아 좋아. 알았으니까 이거 좀 치우지 그래?”
그러면서 손을 가볍게 들었다. 그가 더는 진행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요한나는 경동맥을 겨누고 있던 비수를 천천히 물렸다. 완전히 내려놓지는 않은 그것이 어둑한 오두막에서도 예리하게 빛났다. 사람의 혈관 정도는 금세 난자할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레놀드는 과장되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별로였나?”
요한나는 가슴 윗부분에 걸친 옷자락을 내리며 그를 싸늘히 바라보았다. 옷 아래로 사라지는 풍만한 가슴을 바라보며 레놀드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싫은 사람과 억지로 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
“흥.”
흘끗 눈치를 보고는 뒷덜미를 긁적인다.
“속은 좀 쓰리네.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는데.”
“…….”
“헤어지기 전에 말했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너한테 관심이 있었다고.”
요한나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무관심한 얼굴.
“내가 네 충인보다 재미없게 하지는 않을걸.”
그 말에는 반응이 있었다. 새카만 눈에 냉기가 어리자 레놀드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구니까 그 충인은 어땠는지가 더 궁금해지잖아.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
“뭐,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니.”
“당장 쫓겨나고 싶은가 보지?”
“오해하지 마. 여기서 뭘 어떻게 하겠단 소리가 아니야. 검은 산맥에 있다면 언제든 마주치지 않겠어? 그사이에 외로워진 네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외로워진 네가’라는 부분에서 요한나는 코웃음을 쳤다.
“외로움에 죽어 가도 네가 그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도시인.”
“도시인이라니! 같은 사냥꾼이잖아, 지금은.”
“…….”
“단단히 미움을 샀군.”
뒤통수를 긁적인 레놀드는 생각을 접었다는 것을 보여 주듯 몸을 멀리 떨어뜨렸다. 거리가 벌어졌음에도 요한나는 비수를 가슴까지 치켜든 채 내리지 않았다.
레놀드는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터질 것처럼 부푼 바지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런 상태로도 레놀드는 용케 태연히 말했다.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잘 자.”
“…….”
“목젖이 잘리고 싶진 않다고, 나도.”
쥐똥만큼 있던 신뢰도 박살 난 상황이다. 요한나가 냉기를 풀지 않자 레놀드는 뒷머리를 헤집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산책이나 하고 올게. 나도 이거 이렇게 된 상태로는 잠이 안 올 테고.”
레놀드가 나가자 요한나는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비수를 품에 집어넣었다. 잠시 텅 빈 오두막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가 다리를 의자 위로 끌어 올려 모았다.
옹송그린 어깨 위로 어두운 먼지가 내려앉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격한 감정으로 한껏 부풀었던 가슴이 푹 꺼졌다. 숨을 길게 토한 요한나는 격정을 참는 듯 입술을 꽉 물었다.
바라 왔던 사람의 온기가 닿았는데 불쾌하기만 했다. 결국 벌떡 일어나 수건을 물에 적셔 레놀드가 빨고 움켜쥔 곳을 박박 닦아 냈다.
어째서 이렇게 싫은 느낌이 들까.
‘흰개미와는 조금 더…….’
요한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랜만에 꿈에 그가 나왔다. 오랜만에. 꿈에서 벌였던 짓거리가 뇌리를 스친다.
손놀림이 점차 느려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멈추었다.
그렇게 바라 왔던 결별이었는데, 어째서 그놈 생각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거야.
누군지 모를 상대를 향한 환멸이 뜨거운 용암처럼 꿈틀대며 가슴을 기어올라 왔다. 답답함에 요한나는 눈을 꾹 감았다.
여태껏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오늘따라 아버지가 즐겨 마시던 목구멍이 홧홧해지는 독주가 생각이 난다.
* * *
설치한 덫을 쭉 돌아보다가 요한나는 두꺼운 아름드리나무 밑동에 자라난 푸른빛 식량 식물을 발견했다. 수분과 각종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식량 식물은 양식이 불가능해 자생지를 찾는 게 꽤 어려운데, 전에 이쪽을 돌았을 때는 발견할 수 없었던 걸 생각해 보면 최근에 자란 모양이다.
요한나는 회수한 덫을 허리춤에 달고 식량 식물 줄기 하나를 꺾어 무작정 입으로 가져다 댔다. 허기진 상태긴 했지만 역시, 기대한 청량한 맛은 나지 않았다.
“……맛없어.”
흰개미를 통해 간접적으로 먹었던 그것은 상쾌하면서도 달콤했었지만, 이건 익히지 않은 식물 특유의 풀 비린내가 강했다. 쓴맛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뱉지 않고 억지로 씹었다.
‘흰개미는 이걸 맛으로 먹었던 건가?’
레놀드가 돌아간 뒤, 요한나는 종종 그를 떠올렸다. 억지로라도 생각하지 않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흘러가는 대로 지내려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은 숱하게 생각나는 흰개미에 대한 감상도 흐려질 테고, 마침내는 그 일을 유쾌하지 않은 추억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악몽으로 떠오르지 않게 되는 것이 현재의 목표였다.
바스락.
요한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발을 살며시 떼자 짓이겨진 낙엽이 나타났다. 눈을 가늘게 떴다. 청각에 신경이 집중되었다.
고요한 주변이 거슬렸다. 공간을 가득 채운 적막감은 억지로 욱여넣은 퍼즐 조각처럼 이질적이다.
요한나는 커다란 바위와 주변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과 그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아름드리나무를 살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설마, 흰개미?”
그 즉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워낙 희미하여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잔뜩 집중하고 있던 그녀에겐 충분히 큰 소음이었다.
홱 고개를 돌리자, 잿빛 털의 덩치 큰 토끼가 폴짝거리며 도망쳤다. 긴장으로 솟구친 뾰족한 귀. 어깨가 탁 풀렸다.
‘이제 와서 그럴 리가 없나.’
쓴웃음을 지었다. 그간 나타나지 않았던 흰개미가 새삼스럽게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는 여왕의 옆에서 전처럼 일족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그쪽 세계와 나의 인연은 끝났어.
속으로 되뇌자 기이한 불안으로 일렁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사냥꾼의 감이라는 게 있고, 요한나는 제 감을 믿는 편이었지만, 레놀드와의 만남 때문에 싱숭생숭한 탓이라 여겼다. 그래서 괜히 과민 반응 하는 것이리라.
고무줄로 대충 묶은 머리를 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뒤돌아서 몇 걸음 옮기던 그때, 요한나는 우뚝 멈추었다.
“…….”
풀어졌던 눈매를 독수리처럼 날카롭게 치떴다. 잠시 그대로 있던 그녀가 소리 없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까 토끼가 도망쳤던 곳이 보였다. 여전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적막감이 가득한 공간. 선선한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렸다.
사아, 사아.
바람에 동조한 이파리들이 가늘게 울부짖는다. 요한나는 눈을 가늣하게 떴다. 좁혀진 동공이 번뜩이며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그러나 한참 지나도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고, 찝찝함을 안고 고개를 돌리려던 참이었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그녀를 향해 불어왔다. 킁킁.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냄새가 익숙하게 뇌리를 자극했다.
이건?
그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거대한 바위 위에 불쑥 올라온 얼굴.
일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
즉시 요한나는 눈을 홉떴다.
‘아니야!’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불그스름한 피부. 입을 열자 물고기의 것처럼 뾰족한 이빨이 가득 드러났다.
그것은 요한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길게 찢었다.
“찾, 았, 다!”
환희하는 까만색 눈에 요한나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언젠가의 악몽이 파도처럼 몰려든다.
요한나는 볼 안쪽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피비린내에 동요하던 머릿속이 억지로 평정을 찾았다.
‘침착해. 충인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고개를 내밀었던 충인이 휙, 바위 위로 올라섰다. 조금의 준비 동작도 없이 그대로 달려든다. 그에 맞서 자세를 취했던 요한나는, 석굴 개미의 뒤로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비슷한 형상들에 아연했다.
곧이어 석굴 개미가 벌 떼처럼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