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9)

16

파삭파삭.

흰개미가 지나갈 때마다 이파리 달린 나뭇가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한결 편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원래 지금까지 이동할 때는 흰개미가 제일 앞, 그 뒤가 요한나, 그리고 라나와 피터가 번갈아 서고 레놀드가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순서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요한나는 두껍고 튼튼한 옷과 모자로 몸을 보한 채 이동하는 라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검은 산맥을 오가는 여행자는 모두 비슷한 차림이다. 제법 맵시에 신경 쓰는 피터까지도 초반 몇 번의 경험으로 그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군말 없이 둔해 보이는 차림을 했으니 더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나 역시 껴입은 차림이지만 요한나는 그녀가 생각보다 몸매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날 레놀드의 허리 짓에 격렬하게 반응하던 엉덩이는 군살 하나 없이 탄탄했고 그 아래 뻗은 다리는 적당히 살이 붙어 육감적이었다.

‘왜 저러는 거지?’

그런데 지금 요한나가 주목하는 건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 육체의 소유자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라나의 시선은 줄곧 정면을 향해 있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또는 관찰을 하는 듯, 은밀하게 반짝거리는 눈길을 따라가자 수풀을 헤치며 걷는 흰개미가 있다.

요한나는 눈을 좁혔다.

“누나가 갑자기 왜 저렇게 열심히 움직이는 거야? 업어 달라는 소리도 안 하고.”

평소와 다른 그녀의 행동을 수상쩍게 여기는 건 피터도 마찬가지인지 뒤에서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글쎄.”

궁금하지 않은 레놀드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파삭파삭.

기묘한 정적 속에 흰개미가 방해물을 베어 내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이어졌다.

* * *

점심 메뉴는 비둘기 소금구이였다. 날개를 떨쳐 솟구친 흰개미가 모가지를 낚아챈 비둘기 네 마리에 라나가 소금을 뿌려 굽기만 한, 요리라고 할 것도 없는 간단한 식사였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썩 맛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맛있는 것 같았다. 통통한 가슴살을 씹어도 그다지 감흥이 없는 요한나와 다르게 입맛 까다로운 피터가 뼈에 붙은 살점까지 싹싹 핥아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나는 비둘기 살을 질겅질겅 씹다가 뺨에 닿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라나가 싱긋 웃는다.

‘흐음.’

요한나는 한참 전에 부드러워진 비둘기 살을 짓이기듯 느리게 씹어 댔다.

식사 후 정리 담당은 라나와 요한나였다. 모닥불 위에 마른 흙을 덮고 있을 때 라나가 다가왔다.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요한나는 당황하지도 않고 그녀를 흘끗했다. 라나는 먹다 남은 비둘기 뼈와 부산물을 근처의 땅 아래에 묻고 있었다.

“아까 대단하더라고요.”

“뭐가요?”

“충인 노예가 비둘기를 잡은 거 말이에요.”

“그게 뭐가 대단해요?”

어깨를 으쓱인다.

“사실 나, 충인의 날개를 본 건 처음이에요.”

“그래요?”

“아, 정확히는 살아 있는 개미의 날개요. 다른 충인 종족들은 몇 번 봤네요. 가문의 창고에 박제된 게 있어서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요한나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박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게 아니다. 10여 년이 넘게 사냥꾼으로 살며 알게 된 사냥꾼 중에는 귀한 짐승을 잡아 살은 취하고 남은 건 살아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게 취미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보기 드문 짐승에 한정될 뿐, 충인을 박제했단 소리는 처음 들어 보았다.

“외할아버지가 수집가셔서 말이에요.”

부호들의 별난 취미 생활이다. 당연히 요한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에 라나가 후후, 하고 낮게 웃었다.

“요한나 씨는, 보기보다 참 순진하네요.”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지 않은 발랄한 웃음이었지만 요한나는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래서 놀랐어요.”

“뭘…….”

“성적으로 봉사하는 것도 가능하다니.”

요한나는 눈을 끔벅였다. 라나가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고는 손에 턱을 괴었다.

“실례지만 보고 말았어요. 둘이 그러고 있는 거. 조금 놀랐는데 괜찮아요. 겉으로는 안 그래 보여도 뒤에서는 반반한 노예랑 재미 보는 친구들이 제 주위에도 많거든요.”

무엇을 상상하는지 미소가 음험해졌다.

“노예라고는 했지만 충인을 그런 용도로 쓸 수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지 뭐예요.”

“…….”

“근데 생각해 보니 못 할 게 없더라고요. 그런 외양을 가지고 있으니까, 오히려 생각을 못 한 게 이상할 정도잖아요.”

“…….”

“게다가, 아주 좋았어요. 오랜만에 가슴이 떨리더라니까요? 요한나 씨의 노예, 아주 격렬한 섹스를 하네요. 제 스타일이에요.”

요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흰개미가 습관적으로 하던 몸짓과 비슷했지만, 정말 할 말이 없어서 보인 반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한테도 빌려줄 수 있어요?”

“흰…… 그놈을요?”

“그래요. 어머, 왜 그렇게 놀라요? 성노예를 주고받는 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닌데, 그런 얼굴을 하니까 뭐라고 더 얘기해야 할 것 같네요.”

라나는 민망하다며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지만, 요한나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나는 뭐, 충인이라고 꺼림칙하거나 그런 건 없어요. 보니까 훈련도 잘 된 것 같고, 온순해 보이고.”

요한나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온순해 보인다고?

“몸은 어지간한 기사들보다도 좋고, 내가 어깨를 좀 보거든요. 그게 만족스러워요. 무엇보다 얼굴이요. 이목구비만 잘생겼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보기 드문 매력이 있어요. 신비함이라는 희소성. 꼭 갖고 싶어요.”

라나가 눈을 반짝였다. 흰개미의 등을 내리훑던 그 눈길과 비슷한 반짝임이었다.

“비용은 충분히 낼게요. 원하는 만큼 다.”

도시인들은 다 이런 건가?

충인이라면 덮어놓고 경멸하고 두려워하던 사람들만 접해 왔던 요한나는 라나의 말 하나하나가 제정신으로 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레놀드 씨와 그런 사이 아니었나요?”

“레놀드?”

갑자기 그가 왜 나오냐는 투로 라나가 눈썹을 올렸다. 요한나는 그날 밤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나도 봤어요. 두 사람이 그러고 있는 거.”

“아아, 그랬어요? 그건 눈치 못 챘네.”

라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힘든 여정 중에 즐거움을 주는 사이죠. 요한나 씨, 레놀드에게 관심 있어요? 그럼 내가 말해 줄까요? 레놀드도 영 생각 없어 보이는 건 아니던데.”

“아니!”

큰 소리에 라나가 눈을 깜박거렸다. 요한나는 목소리를 한 톤 낮춰 강하게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이참, 레놀드가 있었으면 굉장히 아쉬워했겠네요.”

의미가 모호한 웃음을 흘리며 라나가 품속에서 궐련을 꺼내 들었다. 부싯돌을 사용하여 빠르게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길게 뿜었다.

나른하게 풀어지는 얼굴을 보며 요한나는 모닥불의 남은 불씨까지 신발 밑창으로 비벼 끄고 허리를 폈다.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해? 우리 레놀드에게 관심 있는 거요?”

라나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요한나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레놀드라니. 그러면서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이해하기를 포기한 요한나가 라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요한나는 신장 자체는 평균적인 여성보다 조금 클 뿐이지만 생활 근육으로 다져진 몸은 탄력이 있고 비율이 좋아서,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끌어당겼다.

담배를 피우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본 라나가 탄성을 흘렸다.

“와, 요한나 씨도 이제 보니 엄청난 미인이네요. 그동안 왜 몰라봤을까? 어쩐지, 피터가 계속 요한나 씨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투덜이 철부지가 말이에요.”

그런 얘기는 아무래도 좋다.

“난 레놀드 씨에게 흥미 없어요. 그냥 아는 사람이랑 좀 닮아서, 그래서 그런 거니까.”

요한나는 말을 흐렸다. 처음에는 분명 레놀드가 바렌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두 사람은 아주 달랐다.

일단 바렌타는 생각보다 고지식해서, 어딘지 경계와 선이 흐린 레놀드의 자유분방함과 거리가 있다.

두 사람의 이미지가 완전히 흐트러진 건 그날 밤이었다. 요한나는 누군가를 안는 바렌타를 상상할 수 없었다.

“흐음.”

“그리고 그거는, 라나 씨가 그에게 직접 얘기해 봐요.”

“네?”

“아무리 노예라도 난 그런 것까지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기 싫거든요.”

무덤덤하게 얘기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 말은 다소 차갑게 들렸다. 라나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거참 관대한 주인인걸요?’라며 놀리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녀는 잘됐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당연히 원하는 대로 될 거라고 여기는 눈치다.

콧노래를 부르며 라나는 곧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마 흰개미가 있는 방향일 것이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

요한나는 혀를 내둘렀다. 도시인이 다 그녀 같다면 도시에서 사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거칠 것 없는 발랄한 성격은 그녀로서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매력적으로 여기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저 여자가 교미하자고 하면, 흰개미는 뭐라고 할까?’

요한나는 라나가 사라진 방향으로 돌아가는 시선을 애써 반대로 틀었다.

* * *

새액!

푸드덕!

레놀드가 날린 화살이 꿩의 목을 꿰뚫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라나의 의견에 따라 덫을 놓는 대신 사냥을 하기로 했는데, 레놀드의 실력이 생각보다 출중하다. 요한나는 내심 감탄했다. 예전에 사냥꾼으로 살았다고 하더니, 허언은 아닌가 보다.

‘주변에서 인정깨나 받았겠어.’

도시에서 다른 직업을 가진 건 사냥꾼 생활을 청산하길 원해서였을까. 보고 자란 게 이런 일이니만큼 사냥꾼의 자식은 사냥꾼이 되는 게 보통이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도시를 동경해서 부호나 귀족의 아래로 들어가길 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요한나는 산중에 박혀 살기에는 제법 멀끔한 레놀드의 얼굴을 흘끗했다. 꿩의 목에 박힌 살을 빼낸 레놀드가 말했다.

“여기서 손질하고 가죠.”

꿩은 요한나가 돌팔매질로 잡은 것까지 포함하여 두 마리였다. 둘은 단풍나무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각자 꿩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어제 라나와 그런 얘기를 해서인지, 레놀드와 함께 있는 시간이 못내 불편했다. 말 한마디 없이 손질하는 데만 집중하던 때였다.

“애인이에요?”

“네?”

“나와 닮았다는 사람이요.”

깃털을 제거하던 칼이 멈추었다. 요한나가 고개를 들자 깃털을 뜯던 레놀드가 흘끗했다.

“라나에게 들었어요.”

색이 짙은 입술이 시원한 호선을 그리자 요한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왜 물어요?”

“눈이, 자꾸 마주치잖아요.”

“…….”

“그쪽이 날 너무 봐서 오해할 뻔했어요. 나한테 관심이 있나 하고. 라나 얘기를 듣고 아니란 걸 알았지만.”

“…….”

“그래서 애인인가 했죠.”

요한나는 간신히 대꾸했다.

“그랬었어요.”

“…….”

“지금은 의미 없어요.”

“그래요?”

요한나는 레놀드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슴에 가시가 콕콕 돋아난 것처럼 불편하다.

“아쉽네.”

“……?”

“솔직히 설렜어요. 그 눈으로 나 그렇게 쳐다볼 때.”

뭐?

요한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어, 하는 사이 레놀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갈색 눈동자, 갈색 머리카락. 이제 닮은 거라곤 그런 것뿐인데 어째서일까. 순간적으로 바렌타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굳어진 요한나의 입에 그의 입술이 포개졌다. 태양 빛에 건조된 나무토막의 냄새를 닮은 남자의 체취가 콧속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그 위로 바렌타에게서 맡았던 톱밥 냄새가 겹쳐지자 요한나는 일순 감각의 혼란에 빠졌다. 꼭 바렌타와 입을 맞대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 때문에 가슴이 한 차례 크게 뛰었다.

깃털처럼 입술이 맞닿는 보드라운 키스는 요한나가 가만히 있자 진득한 느낌으로 변모했다. 레놀드의 키스는 거칠면서도 능숙했다. 여자를 잘 아는 사람의 손이고 입술이었다.

레놀드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혀가 더 깊이 들어왔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혀가 깊숙하게 얽히자 담배 냄새가 났다.

‘어딘지 익숙한데.’

몽롱한 머릿속으로 그것이 라나가 피우던 궐련과 같은 냄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한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번개라도 맞은 듯 정신이 깨어났다. 황급히 손을 들어 아슬아슬하게 맞닿았던 그의 가슴을 밀어 냈다. 레놀드의 젖은 입술을 보자 지금 무슨 짓을 했나 싶었다.

“나, 난 다른 곳에서 손질할게요.”

떨어졌던 꿩을 들고 자리를 피했다. 마치 도망치는 듯한 모양새라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멀뚱히 있어 불편한 것보단 나으리라고 위안했다. 요한나는 이파리가 풍성하게 달린 단풍나무를 피해 정신없이 움직이며 혀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제 바렌타 생각은 안 하게 된 줄 알았는데.’

자괴감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한숨을 푹푹 쉬던 순간, 요한나는 한발 늦게 누군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닥을 바라보던 시야에 까만색 신발이 들어와 있었다. 고개를 들자 거짓말처럼 흰개미가 서 있었다.

흰개미, 하고 읊조리자 그가 요한나의 손에 든 꿩을 흘끗했다. 손질되다 만 어중간한 상태였다. 다시 돌아온 시선에 요한나는 어쩐지 목이 말랐다.

어째서 눈치가 보이는 거지?

“불은 다 피운 거야? 왜 여기까지 왔어?”

“…….”

“손질해서 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

“여기서.”

“어?”

“여기서, 해.”

단호한 말투. 요한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흰개미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싫어?”

잠시 후,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못 할 거 없지.”

요한나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였다. 왜 이렇게 당황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저 눈 때문인가? 하나뿐인 홍안이 이상하게도 집요하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피려는 양. 눈 치우라고 하려다가, 또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랄할까 봐 말았다.

요한나는 선 채로 꿩의 깃털을 떼어 내고 몸통을 해체하며 곁눈질했다. 가만히 서 있는 흰개미가 신경 쓰여 거슬릴 지경이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요한나는 결국 지나가는 것처럼 물었다.

“저기, 봤어?”

“뭘?”

“……아냐. 됐어.”

꿩 손질은 금방 끝났다. 손질한 부산물을 버리고 미리 준비했던 봉지에 토막 난 꿩을 담았다.

“다 됐어. 가자.”

바스락.

낙엽을 밟는 소리만 간간이 이어졌다.

흰개미는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었기에 정적은 대수롭지 않았으나 지금의 침묵은 어쩐지 가슴을 답답하고 불편하게 했다.

요한나는 얌전히 따라오는 흰개미를 힐끗했다. 묵묵히 걷는 그의 얼굴에선 별다를 것이 읽히지 않았다.

‘정말 우연히 마주친 건가? 아님 계속 감시하고 있었나?’

요한나는 흰개미의 낯에서 흔적을 찾다 말고 인상을 썼다.

흰개미가 봤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라나를 만난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레놀드와 그러고 있는 걸 봤더라면. 깔깔대며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 여자는 흰개미에게 관심을 가졌지.’

얼굴만 보고 그런 종류의 관심을 가진다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도시인들의 습성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말이다.

그녀라면 자신이 이해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충인의 흉악함을 알고 있을 텐데도 외모의 매력을 우선하다니. 목숨이 중요하지 않은 걸까.

성노예로서 흰개미의 희소성을 운운하는 순간, 요한나는 라나라는 인간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흰개미에게도 그렇게 얘기했을까? 성적으로 봉사하라고?’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문득 못 견디게 궁금해졌다.

묻는다고 이상할 건 없겠지?

요한나는 갈등에 휩싸였다.

보이는 것과 달리 본능적인 욕구가 꽤 센 흰개미다. 요한나는 라나가 유혹했을 때 그가 보였을 반응이 알고 싶었다.

만약 긍정했다면.

그의 집착적인 관심이 제가 아닌 라나에게 향했다면.

이 기형적인 관계도 여기서 멈출 수 있을까.

“라나 씨가 뭐라고 했어?”

결국 호기심이 이겼다.

흰개미의 붉은 시선이 뺨에 와 닿았다.

“무슨, 말?”

표정은 변화가 없으나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말을 꺼내는 것을 머뭇거렸다.

뭐라고 얘기한단 말인가? 라나와 교미했느냐고? 심경의 변화가 있었느냐고? 지금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하든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흰개미는 입을 다문 그녀의 얼굴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너는.”

요한나는 생각에 잠겨 있다 물음표를 띄웠다.

“어?”

“관심, 있나?”

“…….”

“그, 인간, 사내와.”

“뭐, 뭘 말이야.”

다 봤구나. 내심 당황했음에도 요한나는 못 알아들은 척을 했다. 이러면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하거나 그냥 넘길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흰개미는 이 문제에 퍽 관심이 있나 보았다.

“교미.”

“뭐?”

한순간 속삭이는 것처럼 낮아진 목소리에 요한나는 귀를 의심했다. 흰개미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멈추어 서 있었다.

흰개미의 어두운 눈빛에 요한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

“뭐 문제 있어?”

사뭇 거칠어진 목소리에 흰개미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했다. 무슨 소리를 하나 보자. 내심 이를 간 요한나가 그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어.”

“…….”

“문제, 있어.”

순순히 긍정할 줄은 몰랐다. 요한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굳어졌다.

“이상해.”

흰개미가 속삭였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눈가를, 그녀는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아픈데.”

“…….”

“왜, 이런, 거지?”

“…….”

“기분이, 좋지, 않아.”

“어째서…….”

“네가, 다른 인간, 여자, 얘기를, 하는 게, 싫다.”

“…….”

“다른, 사내와, 입을, 맞추는, 것도, 싫다.”

“…….”

“그래서, 기분이, 나빠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궁금해, 요한나.”

흰개미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째서, 이런, 거지?”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어디 아픈가 보지.”

“…….”

“속병을 앓는 거라면 잘 듣는 약초를 알고 있기는 한데, 그게 근처에 자생하는지는 모르겠네. 그렇게 몸이 안 좋은 거라면 토굴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

흰개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표정한 얼굴이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시선을 돌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던 요한나는 불현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건데?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

“안 돼.”

“왜?”

흰개미가 빠르게 되물었다. 요한나는 당황했다.

“왜냐니. 인간이잖아. 죽이면 안 되니까.”

“하지만, 나는, 인간이, 아니야.”

새삼스러운 말이었다.

“알아. 너는 충인이잖아.”

그녀의 대답에 흰개미는 실망한 얼굴을 했다. 요한나는 그가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죽이면, 넌, 다시 나를, 떠나겠지.”

흰개미가 그린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박제된 짐승도 저것보다는 즐거울 것 같다고 생각될 만큼 인위적인 미소였다.

“내가, 너와 훨씬, 오래, 있었는데도.”

“…….”

“그는 인간이고, 나는, 네게, 괴물이니까.”

그가 스스로를 괴물이라 칭하는 것에 당황한 나머지, 요한나는 침묵하고 말았다. 흰개미는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어디 가는 거야?”

소리치는 요한나에게 대꾸 없이 흰개미는 그대로 사라졌다.

“…….”

갑자기 숲의 적막감이 확 닥쳐와서, 요한나는 저녁 식사가 담긴 봉지의 입구를 꽉 틀어쥐었다.

파삭!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럴 리 없는데 순간적으로 흰개미가 돌아왔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나뭇잎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라나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좀 전부터요.”

라나는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애매한 얼굴로 대꾸하더니 문득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어 대서 요한나는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으로 의문을 대신했다. 라나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그는 단순한 노예가 아니군요.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어.”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묘한 눈을 한다.

“무신경하네요, 요한나 씨는.”

“…….”

“이래서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한 건가.”

한숨을 쉰 라나가 아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길들인 방법이 그런 거라니 나로선 따라 하기가 쉽지 않네요.”

“…….”

“포기하지는 않겠지만요.”

안 그래도 기분이 나빴던 요한나는 뾰족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런 표정 하지 마요. 열받게 하려는 건 아니니까! 요한나 씨가 없으면 여행길이 위험한데 설마 그러겠어요? 그저 부러워서 그래요, 부러워서.”

“…….”

“아, 그거 고기 손질한 거죠? 줘요. 구워 두고 있을게요. 레놀드는 어디 갔어요?”

요한나가 말없이 고개만 젓자 라나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모닥불을 피워 놓은 곳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고민도 없어 보이는 산뜻한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무덤덤했던 요한나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불안정한 손가락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하아. 잇새에서 샌 한숨이 꺼질 것처럼 깊었다.

“무신경하다, 라.”

단어는 속이 텅 빈 것처럼 들렸다.

“당신이 뭘 안다고.”

제 목소리만 귓가에 울려 입을 꾹 다물었다.

무신경하다니, 설마!

눈알이 터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흰개미가 고작 이런 걸로 괴로워하겠는가. 그에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당황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아프다고 하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 거였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설사 흰개미의 마음이 ‘그런 쪽’이더라도.

요한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아니, 아니.

흰개미가 그러니까…….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요한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명백한 회피였다.

* * *

약속한 장소까지 동행하는 내내 피터의 언행은 요한나를 적잖이 실망시켰다. 검은 산맥의 야만적인 원주민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처음엔 조금 대우해 주는 듯했던 그녀에게도 심심찮게 반말을 지껄이며 심부름을 시켰다. 음흉한 시선은 덤이었다.

노예라고 공인된 흰개미에 대한 처우는 말도 못했다. 다리가 아프면 업어 달라고 요구했고, 식사 시중과 잠자리 시중 등 필요한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에 동원했다.

심지어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손찌검하려 들기까지 했는데, 그 때문에 요한나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상한 건 그럴 때까지 흰개미가 피터의 머리통을 터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흰개미가 참지 못해 라나 일행을 모조리 죽여 버릴까 싶어 내심 노심초사했던 요한나로서는 마음을 놓을 일이었지만, 흰개미의 무표정함 속에 숨겨진 속내를 짐작할 수 없으니 불안증은 날이 갈수록 깊이를 더했다.

자기들 눈에도 심해 보였던지, 라나가 눈치를 보며 언동을 조심했으나 여전히 요한나의 마음에는 와 닿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피터는 신경질을 부리다 못해 눈먼 도끼에 머리통이 깨지기 좋은 성격이었다.

그러다가 그 일이 터졌다.

“아악!”

이동 중에 피터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늪지대를 지날 때였다. 그 자리에서 멈춘 일행의 시선이 피터에게 쏠렸다. 그는 발목을 짚고 껑충대다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레놀드가 끙끙대며 아프다며 죽는소리를 내는 그의 발목을 높이 들어 살폈다. 피터의 손을 치운 곳에는 빨간 구멍이 두 개 나 있었다. 뱀의 이빨 자국이다.

“깊이 물렸군.”

이런 경험이 드물지 않은지 레놀드는 당황하지 않고 가방에서 붕대와 가루약을 꺼내 빠르게 처치했다.

“다행히 독이 있는 놈은 아니야.”

“독이 있는지 없는지 네놈이 어떻게 알아?”

“색이 변하지 않았잖아. 큰 문제는 없어.”

“다시 잘 봐 봐. 아파 죽겠다고!”

피터의 억지를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 듯 레놀드는 당황하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 반응에 기분이 상했는지 피터가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죽으면 네가 받을 보수도 없어.”

“죽지 않아서 다행이군, 도련님.”

모르긴 몰라도 시니컬한 말투가 피터의 분노를 부추긴 게 틀림없었다. 붕대를 감은 피터는 요한나의 뒤로 다가온 흰개미를 보더니 눈을 휙 뒤집었다. 다쳐서 기우뚱하는 발 대신 단단히 꼬나쥔 주먹이 흰개미의 턱을 강타했다.

퍽!

단순히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라나와 레놀드와 달리 요한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간 때리는 시늉은 했어도 직접적으로 흰개미를 때린 적은 없었는데.

흰개미는 어디 맞았냐 싶게 조금의 미동도 없었지만, 요한나는 금방이라도 피터의 작고 지저분한 머리통이 피육으로 분해될 것 같아 눈도 깜빡할 수 없었다.

때린 피터도 생각보다 큰 소리에 놀랐는지, 주먹을 내민 채로 굳어졌다. 그러더니 흰개미가 고개를 느리게 갸웃하자 되레 큰소리를 쳤다.

“네놈 잘못이야. 위험한 게 있으면 앞서가는 놈이 경고를 해 줘야지. 네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잖아. 만약 독사였으면 어떡할 뻔했어? 내가 죽으면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 너를 시신조차 남지 못하게 할 거다.”

전혀 위협적이지 못한 말을 지껄이며 피터는 ‘성질 같았으면 한 대 더 때렸다’고 지껄여 댔다. 그는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타격했음에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흰개미에게 못내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 기색을 가까스로 숨기며 목소리를 높이는 꼴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못 배운 놈이라 그런지 건방지네!”

흰개미가 화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요한나는 피터가 전에 없이 몹시도 못마땅해졌다.

저녁 내내, 그녀는 흰개미를 살폈다. 그는 내내 표정이 없었고,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그게 또 신경이 쓰였다.

차라리 피터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지.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놀라 억지로 생각을 지웠다.

그날 밤, 요한나는 흰개미의 옆에 누워 물었다.

“무슨 생각이야?”

“뭐가?”

눈을 감고 있어 잠이 든 줄 알았는데 답은 금방 돌아왔다. 흠칫한 요한나는 잠깐 침묵하다 이어 말했다. 검은 산맥의 보랏빛 하늘에 떠오른 별 무리가 희미한 빛을 뿌려 댔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굴 필요 없어.”

문득 뱉은 말에 요한나는 소스라쳤다.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어째서 피터 같은 건방진 인간의 억지를 얌전히 수용하고 있는지가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이렇게 말해서야 그가 얌전한 게 오히려 불만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사고를 치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인데 말이다.

흰개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누운 채로 서로를 바라보는 형상이 되었다. 희미한 별빛에 의지하여 시선을 교환했다.

서늘해서 무거운 밤공기,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흰개미의 눈,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이 기묘하게 섞여 마치 시간 속에 갇힌 듯했다.

꿈쩍도 하지 못하는 요한나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흰개미가 속삭였다.

“기분이, 안, 좋나?”

요한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쁠 이유가 없기에 대꾸했다.

“아니.”

그러나 대답하고 곧장 좋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는 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면, 피터가 흰개미를 함부로 할 때, 흰개미가 그걸 고분고분 수용할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 꼴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나.’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마을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도 싫은 티를 내지 못한 자신.

면전에서 불편한 티를 내고, 심지어는 욕설을 지껄여도 묵묵히 감내했다. 하나 자신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바렌타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흰개미는 그럴 이유가 없다.

흰개미가 덤덤하게 말했다.

“네가, 그랬, 잖아, 요한나.”

“…….”

“인간들에게, 잘해, 주라고.”

“…….”

“난, 네, 말을, 더, 듣고, 싶었을, 뿐이다.”

요한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라진 말소리 대신 파박파박, 불똥 튀는 소리가 심신을 기묘하게 어루만졌다.

“네가, 즐겁다면, 나도, 좋아.”

“……내가 즐거워 보여?”

“응.”

“…….”

“요한나는, 인간을, 좋아, 하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요한나는 욱하고 반박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흰개미가 이런 것도 생각할 줄 알았나? 오로지 일족, 번식, 교미 이런 것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문득 우스워진 요한나는 푸스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자신의 기분을 헤아리는 흰개미가 새삼스러웠다.

전에 없이 마음이 차분하다. 묘한 기분. 요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괴물을 상대로 하는 생각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가슴에 번진 묘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흰개미의 거의 들리지 않는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며, 요한나는 생각했다.

‘라나 일행과는 빨리 헤어지는 게 좋겠어.’

그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온데간데없었다. 인간이라서, 바렌타와 닮아서, 마을에 있었을 때의 그 소속감을 잠시라도 맛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흰개미와 함께 있지만 나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들 틈에서는 확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이 원하는 건 ‘인간’ 그 자체가 아니다. 동경했던 건 인간이 가진 아름다움. 하나 인간의 민낯은 아름답지도,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깨달은 사실에 마음이 퍽 가벼워졌다.

‘인간성이라는 건 뭐지?’

확실한 건 라나 일행에게선 발견할 수 없다는 거다.

요한나는 귀찮은 그들과 헤어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라나 일행과 헤어지게 될 때, 요한나는 한 점 아쉬움도 없이 후련했다.

‘인간이 이렇게 골치 아플 수도 있다니, 처음 알았어. 차라리 흰개미와 있는 게 훨씬 마음 편하겠군.’

이러다간 평생 인간과 어울리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라나는 지금까지 살갑게 군 데 비해 그녀와 흰개미를 본체만체하며 평지와 다름없는 검은 산맥의 안전지대를 걸어 나갔다. 요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는 거지?’

피터가 떠나는 걸 보니 후련해서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레놀드가 몇 걸음 떼다 잠시, 하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귓가에 대고 몇 마디를 소곤거렸다.

“라나가 왜 저렇게 기분 나쁜지 알아?”

“모르는데.”

“그쪽 노예가 끝까지 상대를 안 해 준 모양이야.”

그는 노예가 아니야.

무심코 그렇게 말할 뻔했다.

이윽고 허리를 펴고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또 봐, 요한나.”

요한나는 그의 숨결이 남은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흰개미의 어깨가 부딪쳤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그녀를 따라 라나 일행이 떠나는 곳으로 멀리 시선을 던진 흰개미가 무심하게 물었다.

“인간은, 하고, 싶은, 것을, 참는다고, 했나?”

갑작스러운 말에 요한나는 눈을 찡그렸다가 곧 떠올렸다. 인간은 포장하는 존재다. 흰개미에게 잘난 척하면서 했던 말이 아닌가.

“뭐……. 그, 그랬지.”

지금 그가 ‘인간’에 대해 묻는다면 똑같이 답할 수 있을까?

어색한 대꾸에 흰개미가 희미하게 눈썹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 남은 홍안이 레놀드의 뒷모습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죽이고, 싶은, 데도, 참아?”

“응?”

흰개미는 무심함에 가까운 낯으로 중얼거렸다. 고요한 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전히, 죽이고, 싶다.”

“…….”

“참아야, 해?”

요한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인간에 대한 미련이 떨어진 지금, 전처럼 확고하게 답할 수 없었다. 망설이다가, 힘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연히.”

“그래?”

아쉬움을 삼키는 흰개미에게서 시선을 떼고 요한나는 이젠 거의 보이지 않는 라나 일행의 뒷모습을 멀거니 응시했다.

간만에 만난 인간의 무리가 사라지는 모습이 어쩐지 상징적으로 느껴져 쓸쓸했다.

라나 일행이 떠나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과 달리 갈 곳이 명확하다는 점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젠 딱히 마을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안 들어.’

날개가 달리고 갑각 표피라는 명백한 아인종의 흔적을 달고 그런 것을 바라기에는 겪은 일이 너무나도 많다.

더는 마음 졸이며 살고 싶지 않았다. 피곤했다. 그런 건 요 몇 년간의 일로 충분하다. 그런 마음인데도 아득하고 막막한 기분이 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멍해진 그녀의 귀로 흰개미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드디어, 둘, 이군.”

“뭐라고 했어?”

흰개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주쳐 오는 곧은 눈빛. 요한나는 전에 없이 당황하여 무심코 침을 삼켰다.

“드디어, 둘, 이라고.”

“…….”

“함께, 잖아.”

“…….”

“저들처럼, 우리는.”

“어?”

“난, 너와, 계속, 함께, 일 거다.”

“…….”

“영원히, 내 숨이, 허락, 하는, 한.”

괴물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곧바로 비웃으려 했는데 돌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요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흰개미가 알 리 없건만, 속을 간파당한 것 같았다.

목을 가다듬은 요한나는 낮은 소리로 흥, 비웃음을 흘렸다.

“영원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하는 거야?”

까칠하게 대꾸한 요한나는 축축했던 눈가가 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흰개미가 생각을 바꾸어 토굴로 돌아가면, 약간 아쉬울지도 모르겠다고. 전이라면 상상 못 할 가정까지 하는 스스로가 우스워 요한나는 울다가 웃었다.

함께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

그 ‘함께’의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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