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9)

15

발바닥으로 냉기가 올라왔다. 건조해서 푸석하던 토굴의 모래가 한데 뭉쳐 자륵자륵 밟혔다. 축축한 습기를 한껏 머금은 토굴의 공기는 피부에 무겁게 달라붙었다. 살이 진득하게 들러붙는 감촉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멍청한 말을 한두 마디씩 주워섬기며 시시덕거리던 일개미들도 오늘은 축 처진 낯짝으로 토굴 방을 불안하게 어슬렁거렸다.

“정신 사납게 뭐 해.”

요한나는 그나마 쾌적한 풀잎 더미에 누워 있었다. 일개미가 토굴 방 바깥 통로를 힐끗거리며 입술을 쪼글쪼글 모았다. 못생긴 면상이 더 못나 보였다.

“물, 들이, 차면, 큰, 일.”

“그놈이 갔잖아. 알아서 잘 하겠지.”

“하지만, 비, 너무, 많이, 와서…….”

네가 그렇게 다리를 떨어 대면 뭐가 좀 나아져? 한마디 해 주려다 맥이 빠져 말았다. 그녀도 평소와 달리 불안정한 공기를 느끼고 있었다.

우기가 예년과 달리 길어지고 있다. 그칠 줄 모르는 장마는 굴을 파고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천적만큼이나 위험한 적이었다.

토굴 개미 또한 다르지 않았다. 입구 주변에 흙을 높이 쌓아 올려 지대를 높인 형태인 토굴은, 비가 오면 흙이 무너져 입구가 막히는 위험이 있었다.

다른 때보다 확연히 많은 강수량에 입구가 무너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힘센 장군 개미들이 모조리 몰려갔고, 흰개미는 검은 개미가 직접 찾아와 데려갔다.

여기다 꿀이라도 발랐는지 엉덩이를 붙이고 꿈쩍 않는 그놈이 사라지니 숨통이 트이기는 했지만, 무겁고 축축한 공기 때문에 그다지 기쁘지 않다.

“우리도,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일꾼개미 중 제일 어리고 멍청한 삼개미가 벌떡 일어났다. 삼개미는 일족을 위한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들어 일개미와 이개미에 비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잡일을 거드느라 바빴다.

무너진 흙은 장군 개미들이 보수한다고 해도 장마 기간에 할 일은 많다. 토굴 주변에 고랑을 깊이 만들고 무너지는 흙더미 위에 자갈을 촘촘히 깔아 최대한 물이 흡수되는 걸 막아야 했다. 게다가 습한 공기에 알과 유충이 썩으면 큰일이라 끊임없이 물기를 닦아 줘야 할 손도 필요했다.

정신없이 바쁜 동료들을 생각하는지 삼개미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흰, 개미가…….”

이개미가 꺼리는 얼굴로 삼개미의 어깨를 잡았다. 흰개미를 추종하는 그는 여기 있으라는 그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공주, 습, 하면, 몸, 닦아, 줄까?”

일개미는 요한나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신경 썼다.

‘쯧. 어수선하기 짝이 없네.’

토굴이 무너지든 말든 나와는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로 시큰둥하던 요한나였지만 오줌이 급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삼개미가 자꾸 신경을 갉작이자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삼개미 때문만은 아니다. 토굴의 습하고 답답한 공기가 신경을 길게 잡아당겼다. 먼 곳으로 사냥을 나갔던 적엔 진흙투성이 상태로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런 긴장감도 무뎌졌는지, 습한 공기가 못 견디게 불편하다.

불쾌해서 잠도 오지 않고, 그렇다고 움직이면 피부가 진득거려서 싫다. 차라리 운동이라도 할까. 아니, 이런 공기 속에서 헉헉거리면 숨이 막힐 거다.

“차라리 비를 맞는 게 낫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듣지 못한 일개미가 짜부라진 귀를 쫑긋했다.

“뭐, 라고?”

“야, 나가자.”

“어?”

“삼개미, 정신 사납게 그러고 있을 필요 없어. 나가서 고랑이라도 파. 그 김에 빗물로 몸도 씻고. 난 그렇다 치고 너흰 대체 뭘 어떻게 씻는 거야? 몸에서 구정물 냄새가 나.”

요한나가 벌떡 일어나자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일개미도 얼떨결에 몸을 일으켰다. 요한나보다 눈높이가 반 뼘 정도 낮은지라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 그녀를 본다. 의아한 시선에 요한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밖에서 돕자고. 고랑 파고 자갈 깔면 되는 거지? 몸도 자연스럽게 씻길 테고, 딱이네.”

“공주도, 가, 려고?”

“응. 밖에서 비 맞는 게 여기 이러고 있는 것보다 낫겠어.”

“안 돼!”

일개미가 팔을 펼치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흰, 개미가, 말, 했다. 공주, 여기에.”

“뭐라는 거야. 그러는 그놈도 저 밖에 있잖아. 어떻게 보면 그놈한테 가는 건데 뭐 어때.”

“…….”

“넌 내가 흰개미한테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그, 그래도…….”

조금 납득했는지 흔들리던 일개미의 시선이 그녀의 뒤를 흘끗했다. 요한나는 평소보다 축 처진 날개를 손가락으로 튕기고 한심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이 장대비에 날개를 펼친다고. 어렵게 얻은 거 찢어트릴 일 있어?”

“…….”

안 그래도 나가고 싶었던 참에 요한나까지 거들자 숫제 날아갈 것처럼 몸을 들썩이는 삼개미의 말 없는 독촉이 일개미를 찔러 댔다. 그래도 일개미는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공주가, 그럴, 필요는, 없어.”

“다 수장되게 생겼는데 그걸 따질 때야? 그리고 이제 나는 뭘 해도 상관없잖아. 너희 새로운 여왕만 무사하면 됐지.”

“아니, 야!”

버럭 소리 지른 일개미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요한나를 보고 다시 쭈뼛거렸다.

“공주, 소중, 해. 많, 이. 여왕만큼.”

맞을까 봐 겁을 먹으면서도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뱉는 모습에 진정성이 풀풀 날렸다.

소중하다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인데.

얼굴이 벌게진 요한나는 까만 눈을 데룩데룩 굴리는 일개미를 보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상대가 인간이 아닌 충인임에야. 새삼스럽게 처지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자신을 생각하는 일개미의 진심은, 놀랍게도 나쁘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라 충인을 상대로도 이런 걸 느낄 수 있구나. 정말 정이 들어 버렸나 보다. 이걸 절망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망 안 가.”

“하지만…….”

“진짜로. 일단 이 빗속에서 그놈에게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내가 도망가면 너희들 목이 달아날 거 아니야.”

“어, 어?”

일개미가 눈을 깜박였다.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일 제대로 안 했다고 흰개미 그놈이 너희를 갈구거나, 심하면 이렇게 될 텐데.”

요한나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아니면 머리가 터지거나.”

“…….”

“그럼 꿈자리가 사나워질 거야. 그렇겐 하고 싶지 않아.”

이젠 일개미뿐만 아니라 이개미와 삼개미까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멍청한 얼굴들의 향연에 요한나는 결국 울컥 짜증을 냈다.

“못 알아들어? 네놈들을 흰개미에게 죽게 만들고 싶진 않단 뜻이야!”

“…….”

“그러니까 도망 안 가. 알았어?”

“공주…….”

요한나는 흠칫했다. 갑각 표피가 올라온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일개미가 목을 떨었다. 감동한 티가 역력한 그 얼굴에서 머쓱하게 시선을 뗀 요한나가 괜히 손부채질했다.

“어서 가자. 답답해 죽겠다.”

솨아아아아아.

하늘이 뚫린 것처럼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약해졌다. 입구 주변은 여전히 일꾼개미들로 바글바글했다. 그들은 두 손을 들어 물러진 흙을 파고, 또는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 자갈을 한가득 품에 안고 돌아왔다.

요한나는 그 근처에서 쏟아지는 비를 얼굴로 맞으며 시원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래도 될까, 중얼대던 일개미의 걱정과 달리 토굴 밖으로 나오는 건 수월했다. 흰개미도 보이지 않았고, 다른 일꾼개미들은 그들을 보아도 눈치 주지 않았다.

‘다들 바빠 보이네.’

입구로 가까이 올라올수록 개미들이 많아졌는데, 북새통 같은 모양새에도 신기하게 누구 하나 부딪치거나 넘어지지도 않고 빨빨대며 바쁘게 움직여 댔다. 장군 개미들이 무너진 흙을 들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니 나머진 망가진 입구를 보수하는 일꾼개미들의 몫이었다.

흰개미는 입구 밖에서 한 번 보았다. 이 빗속에서는 장군 개미들도 날개를 펴지 못했지만, 그래도 보통의 개미들보다 강인해서 자갈들을 쓸어 오는 일을 맡았다.

요한나가 본 건 자갈이 아니라 집채만 한 바위를 번쩍 들어 올리는 흰개미였다. 바위를 입구 근처에 두고 그 위를 나뭇잎 따위로 엮어 빗물을 미끄러지게 할 생각인가 보았다. 하여간 괴물 같은 힘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곧 그쪽에 신경을 끊었다.

끈적끈적한 불쾌감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 퍽 만족스러웠다. 이참에 구석구석까지 씻어야겠다. 도대체 물로 제대로 씻은 게 언제쯤인지. 흰개미의 혀로 씻김당하거나 기껏해야 물 묻은 천으로 몸을 닦아 대는 게 고작이었던지라, 인식하고 나니 몹시도 찝찝해 요한나는 빗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열렬히 비벼 댔다. 비누가 있으면 좋겠지만 물이 있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씻는 데 집중하는 그녀의 눈에 일꾼개미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녀 곁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일개미는 요한나가 빗물에 젖은 팔다리를 문지르는 데만 열중하자 안심했는지 다른 개미들을 돕고 있었다.

이개미와 삼개미는 끙끙대며 자갈을 한가득 날라 댔다.

나가는 걸 걱정할 때는 언제고 막상 나오니 개미의 본능이 샘솟는지 참 열심히도 움직인다. 요한나는 머리카락의 묵은 기름을 꼼꼼히 씻어 내면서 개미들이 일하는 걸 구경했다.

잿빛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비가 쏟아졌다.

하늘에 구멍이 뚫릴 수가 있을까? 저 위에는 천사가 산다는데, 저 시커먼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을까?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시답잖은 의문까지 들었다.

빗줄기가 처음에 비해 약해졌다고 해도 계속 맞고 있으면 몸이 축날 텐데, 개미들은 어느 누구도 먼저 쉬려고 하지 않았다.

동족이 힘들어하면 대신 자갈을 들어 주고, 더 열심히 고랑을 판다. 그 모습이 수확철,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논밭을 뛰어다니던 마을 사람들과 비슷해 보여 신기했다.

충인이든 인간이든 사는 건 비슷한가.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흠칫한 요한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돼. 비슷할 게 따로 있지.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건 어디든 같을 뿐이야. 괴물이든, 인간이든…….’

왠지 찝찝한 기분에 요한나는 얼른 머릿속 생각을 털어 버렸다.

헉헉대며 자갈을 나르는 삼개미가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나도 좀 도와줄까. 딱히 개미 놈들을 도울 마음은 없지만 운동하는 셈 친다면.’

갈등하던 요한나는 문득 개미들이 들락날락하는 자작나무 숲의 어둠을 주시했다. 워낙 빽빽하게 자라난 탓에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도 그 속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어두웠다. 누가 숨어도 쉽게 찾지 못할 어두움…….

요한나는 홀린 듯 숲을 응시했다. 먹구름 아래 더 짙어진 숲의 어둠이 몹시도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스윽. 요한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머릿속이 환해졌다. 굼떴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드물게 길게 이어진 장마. 위험해진 토굴을 보수하느라 여념이 없는 개미들. 산란에 힘쓰고 있을 여왕 개미와 그녀의 곁에 붙어 있는 검은 개미.

‘……다시 없을 상황이잖아.’

모든 조건이 합쳐진 지금.

요한나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숲을 향해 슬금슬금 이동했다. 자갈 때문에 숲을 오가는 일꾼개미들이 많아 아무도 그녀를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때 무릎을 꿇고 고랑을 파고 있던 일개미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요한나를 발견하고는 몸을 벌떡 일으킨다. 요한나는 미묘하게 굳어서 다가오는 일개미를 응시했다.

표정이 보일 만한 거리까지 다가온 일개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공주, 멀리, 있지, 마.”

빗소리 탓에 소리가 약했다. 요한나가 고개를 흔들어 보이자 일개미가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훅 좁혔다. 이제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다.

“이제, 돌아, 가는, 게, 좋겠, 어.”

“…….”

“나머지는, 다른, 개미들이, 해도, 되니까.”

“…….”

“……공주?”

말이 없는 요한나를 보고 일개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해졌다고는 하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빗줄기가 머리를 적시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체온과 만나 뿌연 안개같이 변한 수증기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 일개미가 그녀를 붙들려는 참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공주라니. 맥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빗소리에 아스라하게 파묻혔다.

“마을에서 공주는 정말 귀한 여자아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단 말이지. 하지만 너희들의 공주는, 이를테면 알을 낳는 도구잖아. 그게 어떻게 같을 수가 있어.”

말이 이어졌지만, 일개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정말 멍청해 보여. 요한나는 후후 웃었다. 망설였던 탓에 미묘했던 표정이 비바람에 쓸려 가고, 그녀는 자못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는 요한나로 족하거든.”

뒷걸음치는 그녀를 일개미가 허둥지둥 따라붙었다. 설마, 하는 기색이 떠오른 얼굴이 필사적이다.

“공주,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고…….”

좌우로 눈을 굴린 요한나가 일개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서도 선명한 까만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려는 순간.

빡!

인간으로 따지자면 명치 부근에서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울렸다. 갑옷처럼 감싼 갑각 표피가 부서져 나갔다. 요한나는 천천히 주먹을 뗐다. 드러난 부분은 움푹 패어 있었고, 둘러싼 갑각 표피는 실금이 잘게 가 있었다.

“……허…….”

입을 벌린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한 일개미가 입을 뻐끔거렸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샜다. 고통이 가득한 얼굴로 필사적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요한나는 이를 악물었다.

“정말 거짓말할 생각은 아니었어.”

“…….”

“이렇게 만들고 할 말은 아니지만, 차라리 이게 더 나을 거야. 추궁을 피하려면.”

“고, 공주……. 아, 안…….”

어느새 일개미는 자작나무로 둘러싸인 숲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토굴의 입구 쪽에서는 나무에 가려져 그의 몸이 잘 보이지 않을 터였다. 뒤늦게 요한나의 의중을 이해한 일개미가 눈물을 후드득 떨구었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요한나가 비치었다. 한 걸음을 막 뗐던 그녀가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물가물한 눈으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일개미가 기대하는 얼굴을 했다.

“미안.”

그러고는 자작나무 사이 짙은 어둠으로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곧이어 일개미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가득 차오른 눈물이 앞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안 돼.

가지 마.

가지 마, 공주.

가지 마, 요한나.

우릴 버리고 가지 마…….

아득한 어둠이 덮쳐 왔다. 툭, 고꾸라진 일개미의 정수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사아아아아.

빗방울이 그 위를 묵묵히 덮었다.

* * *

‘시간은 여유롭지 않을 거야.’

요한나는 빗속을 뚫고 정신없이 달렸다. 흰개미는 금방 그녀의 부재를 눈치챌 것이다.

아무런 계획 없이, 어떻게 보면 충동적인 도주이나 요한나의 표정은 제법 침착했다.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제 할 일 하는 일꾼개미들을 보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머릿속에 쫘르륵 생각이 떠올랐다. 마치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돌아온 후로는 전처럼 아득바득 탈출을 갈망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애초에 멀리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가능한 일도 아니다. 체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멀리 가 봐야 얼마나 간단 말인가.

요한나가 주목한 건 습기를 머금은 흙이었다. 비가 많이 왔으니 매몰된 구역이 있을 것이다. 토굴의 입구가 무너진 것을 보았을 때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르게 변한 땅은 파기도 좋으니, 이 한 몸 숨기기에 적절하다.

숨통이 막힌다는 게 유일한 흠이지만 얼굴 위로 큰 낙엽을 겹겹이 쌓는다면 공기가 확보되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흰개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치릇, 치르릇!

‘설마 벌써?’

요한나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저 뒤에서 날개를 펼친 채 날아오는 흰개미가 보였다. 빠르게 진동하는 날개 주변으로 빗방울이 튕겨 나갔다. 몸 전체에서 새어 나오는 뿌연 아우라가 위협적이었다.

그때였다. 나뭇가지를 피해 일직선으로 달려오던 흰개미가 돌연 기우뚱했다. 젖은 날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흰개미도 땅으로 내려왔다.

‘그럼 그렇지.’

뛰면서 그의 동태를 확인한 요한나는 안도했지만, 얼굴을 펼 수는 없었다. 흰개미가 쫓아온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적어도 적절한 곳을 찾아 숨을 시간까지는 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입술을 깨물었다. 발놀림이 다급해졌다.

“요한나!”

콰르르릉!

때마침 내리친 벼락에 흰개미의 외침이 섞여 들었다. 하늘이 으르렁대는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해졌다.

‘제기랄. 역시 저놈은 시간이 지나도 날 놔주지 않았을 거야.’

도망치기를 잘했다. 이번만큼 좋은 기회는 앞으로도 잘 생기지 않겠지. 확신한 요한나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했다. 청각에 물 흐르는 소리가 잡혔다. 요한나는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음박질을 쳤다.

오래지 않아 눈앞에 계곡이 나타났다. 늘어난 강물 탓에 빠르게 흘러내리는 유속이 휩쓸리면 뼈도 못 추릴 듯 무시무시했다. 뛰어들면 어떨까, 했던 고민을 즉시 접은 요한나는 계곡을 따라 정신없이 달렸다.

검은 산맥의 계곡은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만물의 법칙을 혼란케 했다. 요한나는 몇 갈래로 나뉜 계곡 줄기 하나를 따라갔는데, 특이하게도 융기된 지형으로 이어졌다.

바위를 밟으며 협곡을 오르며 요한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생각보다 지대가 높다. 하지만 멈춰 있을 시간은 없었다. 뒤에서 빗소리와는 다른 소리가 들려오자 이를 악물고 터질 것 같은 다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끝까지 올라선 요한나는 드러난 광경에 짧게 숨을 들이켰다.

촤아아아!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장엄하게 귀를 울렸다. 요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보기에도 무서운 폭포수가 떨어지는 부분에 하얀 포말이 번졌다. 사방에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호수였다.

날씨 탓일까? 사람 여러 명을 삼켰대도 이상하지 않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요한나는 안력을 집중하여 넘실거리는 호수를 관찰했다. 수위가 높은 것이 아슬아슬하나 분지형이라 유속 자체는 별거 아니다.

‘그래. 여기라면…….’

드르르륵!

뒤를 돌아보았다.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흰개미의 뒤로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게 보였다. 내리찍는 걸음마다 땅이 푹푹 패었다. 해쓱해진 요한나는 다시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망설일 시간은 없다. 약간 흔들리던 눈동자가 똑바로 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풍덩!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몸을 잡아끌었다. 비가 오는 탓인지 물이 무거워 팔다리를 움직이는 게 버거웠다. 하지만 요한나는 생선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수백 마리의 물고기를 낚았던 경험이 있었다.

호수가 익숙한 그녀는 자맥질하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호수에 뛰어든 건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푸하아!

물 위로 얼굴을 내민 요한나는 자신이 뛰어내린 곳을 올려다보았다. 흰개미가 서 있었다. 멀뚱히 이쪽을 바라보는 그를 보고 요한나는 미소를 맺었다.

날개를 가진 충인은 수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산행하다 충인을 만나면 일단 호수를 찾아 뛰어들라는 충고가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다. 요한나는 그 상식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다행히 효과가 있다.

요한나는 흰개미를 주시한 채 팔다리를 천천히 놀려 물가로 향했다. 흰개미가 고개를 까딱이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뿌옇게 어린 물안개가 시야를 방해하는 와중에도 흰개미의 홍안이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집요한 새끼. 요한나는 이를 갈았다. 호수가 있다고 저놈이 포기하지는 않을 테고, 협곡을 돌아서 내려온다든지 다른 방법을 쓸 게 분명했다. 그래도 시간을 버는 데는 성공했다는 데 위안하며 물가로 가려는 때였다. 요한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흰개미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호수로 떨어져 내리는 그를 보자 요한나는 가슴이 선득해졌다.

풍덩!

‘설마. 충인은 수영을 못 할 텐데…….’

하지만 뛰어내리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할 줄 알아. 수영할 줄 아는 거야!’

경악한 마음이 급해졌다. 정신없이 도망치려는 순간.

찰박찰박!

하얀 팔이 수면을 뚫고 쑥 올라왔다가 곧이어 떨어진다. 다시 올라왔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물에 잠겨 들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고 그 괴이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벌렁대는 가슴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기를 잠시, 입꼬리가 찢어질 듯 휘어졌다. 푸하하하하. 박장대소가 터졌다.

“멍청이 아니야?”

수영도 못 하는 주제에 뛰어들기는 왜 뛰어들어.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해서 잘하는 줄 알았잖은가.

허우적대는 꼴을 보니 희열이 느껴지는 한편,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영영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공격한답시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발목이라도 잡히면 끝장일 것이다. 아쉬움을 삼키고 유유히 물가를 향해 나아갔다.

어푸어푸, 꼬르륵 잠기는 머리를 수면 밖으로 억지로 올리며 흰개미는 멀어지는 요한나를 바라보았다. 은어가 헤엄치듯 유려하게 물살을 헤치고는 물기슭의 바위를 붙들고 몸을 빼냈다. 찰박이며 떨어지는 호숫물을 귀찮다는 듯 털어 낸다.

때마침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혀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한나는 고개를 들고 해를 확인하고는 푹 젖어 무거운 머리카락을 시원스럽게 넘겼다. 물방울이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흩어졌다.

흰개미는 몸이 가라앉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장면 하나하나가 눈을 파고들듯 각인되었다.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늘씬한 굴곡을 드러내는 육신의 생명력. 내리쬐는 태양 빛을 그대로 담은 듯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토굴 속에서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더니 바깥에서도 마찬가지다.

토굴이 전부인 줄만 알았던 괴물에게는 그녀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눈부셨다.

멀어지는 등을 향한 보석빛 홍안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내 거.’

놓칠 수 없다.

* * *

제길.

젖은 나뭇가지를 팽개친 요한나는 덜덜 떨며 두 손으로 몸을 감싸 안았다. 호숫가를 벗어나 적당히 깊은 동굴을 찾은 것까지는 좋았다. 곰이 동면하는 용도로 쓴 동굴은 종유석이 많지 않은 데다가 바닥의 물기도 적어 제법 아늑했다. 잠자던 박쥐가 인기척에 놀라 푸드덕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위협도 없었다.

그러나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 체온이 문제였다. 동굴은 그럭저럭 적당한 온도를 유지했지만 인간에게는 다소 서늘했고, 젖은 몸에는 당연히 추웠다.

부싯돌도 없는 상황에 기껏 사용할 만한 부싯깃은 긴 우기로 축축해서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뭇가지를 붙들고 한참을 비벼 대다 포기한 요한나의 입술이 퍼렇게 질렸다.

혹시라도 맹수가 나타나면 바로 대처하기 위해 입구에 덤불을 세우고 그 뒤에 앉았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시름에 잠긴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꼼짝없이 이대로 밤을 보내야 할 판이다.

‘옷은 내일에야 겨우 마를 것 같은데.’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 알몸이야 부끄러울 것 없다지만, 검은 산맥에서 몸을 지킬 것은커녕 옷가지 하나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 못내 불안했다. 창 한 자루 없이 전쟁터에 나간 병사의 마음이랄까.

요한나는 칫, 잇새로 혀를 차고는 체온이 빠져나가지 않게 몸을 둥글게 말았다. 비가 그친 후에도 여전히 습하고 서늘한 공기를 피해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겨울이었다면 얼어 죽었겠지. 다행히 죽진 않을 거야. 몸은 축날 테지만…….’

피로감이 장맛비에 흘러내린 토사물처럼 온몸을 무겁게 덮쳐 왔다.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한 요한나는 벽에 몸을 기대 잠에 빠져들었다.

바스락.

그녀가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쭉한 그림자가 입구에 어둡게 드리워졌다.

* * *

얼굴을 간질이는 따뜻한 공기에 요한나는 잠에서 깼다. 무릎에 뭉개진 뺨이 약간 욱신거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모닥불이 있었다. 풀과 나무가 잔뜩 깔린 그 위에 붉고 노란 불이 잔잔하게 타올랐다. 장작이 완전히 마르지 않았는지 탁한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갔지만, 체온을 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요한나는 잠깐 꿈인가 싶었다.

천사가 왔다 갔을까?

오래전 어느 날, 바렌타가 읽어 주었던 동화책의 감동적인 한 장면이 떠올랐지만.

‘그럴 리가 있나.’

요한나의 얼굴이 식어 내렸다. 천국이나 천사나. 그런 신성한 무언가를 믿기엔 이제껏 굴러온 불행의 진창이 너무 질척했다. 요한나는 낮게 깐 목소리로 뱉었다.

“나와.”

피빗피빗. 모닥불에서 불티 튀는 소리만 났다.

“아니면 계속 그렇게 있든가.”

애써 태연한 척을 해도 이 가는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말했음에도 여전히 조용했다. 뭐지? 근처에 있는 게 아닌가? 멀리 간 건가? 그럼 돌아오기 전에 떠나야겠다, 마음먹은 요한나가 일어서려고 했다.

그 직전에, 입구에 모아 두었던 덤불이 움직였다.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헤치고 입구로 들어선 흰개미가 자연스럽게 모닥불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바닥에 손을 짚은 채 굳어진 요한나와 눈을 맞추었다.

“이제, 나와도, 돼?”

빌어먹을…….

무구하게 반짝이는 홍안에 요한나는 깊이 탄식했다.

“아니. 나오지 마. 꺼져.”

흰개미가 눈을 끔벅끔벅 떴다. 그러더니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는다. 결국 제가 하고픈 대로 할 거면서.

‘그럴 거면 나와도 되냐고 묻기는 왜 물어.’

요한나는 동굴 벽에 등을 딱 붙인 채 흰개미를 경계했다. 육식 동물을 앞둔 초식 동물처럼 굴고 있다는 자각이 희미하게 들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빠져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부득부득 쫓아오다니.’

요한나는 지긋지긋하다는 눈빛으로 흰개미를 훑어보았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다만 물에 젖은 모피는 어디로 버려두고 왔는지 하얀 상체가 드러나 있었고 하의는 얇은 천으로 둘둘 둘러매고…….

“야.”

“응?”

“그거 내 옷 아니야?”

흰개미가 시선을 내려 아래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산뜻한 얼굴에 뒷골이 당겨왔다.

“내놔!”

몸을 일으키자 흰개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뭘 보고 있는 거야? 어리둥절했던 요한나는 그의 시선이 덜렁거리는 가슴에 못 박혀 있다는 걸 깨닫고 눈을 치떴다.

강탈하듯 그의 하체에서 옷을 가져가 재빠르게 입었다. 몸이 가려지자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한다. 뚱한 얼굴에 침을 뱉고 싶어도 후일이 두렵다.

요한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거리를 두었다. 이대로 동굴 밖으로 달아나고픈 마음으로 가득했다. 최대한 먼 곳에 앉아 흰개미를 관찰했다.

그는 이제 그녀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가늘게 뜬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방만하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축 늘어진 거대한 흉물이 보였다.

인상을 쓰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했으나 김빠지게도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다.

‘말이 안 통하는 놈인 데다 뭘 할지 예측이 가능해야지, 원.’

“날 토굴로 데려갈 거야?”

흰개미가 고개를 돌렸다.

“가고, 싶어?”

“아니.”

“그러면, 뭐.”

“무슨 뜻이야?”

“요한나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아.”

요한나는 울컥했다. 그런 거짓말을 누가 믿을 줄 알고. 젠장. 제기랄. 온갖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그래 봤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만.

“그럼 내가 이대로 여기서 사라진다면? 그러니까, 다른 데로 간다면.”

“사라져?”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다고?”

“응. 나도, 같이.”

요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 따라온다는 말이 아닌가.

“어딜 가더라도?”

“어딜, 가더라도.”

“내가 관둘 때까지 기다리려는 거야?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고?”

“포기?”

흰개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상관, 없어. 난, 요한나와, 있고, 싶을, 뿐, 이야.”

“왜?”

“좋아, 하니, 까.”

“미친.”

요한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흰개미는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린아이처럼 맑고 순진한 홍안에 요한나는 치가 떨렸다.

‘징그러운 괴물 자식…….’

결국 그날 요한나는 흰개미의 일거수일투족을 경계하느라 새벽이 다 갈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 * *

다음 날도 요한나는 동굴을 떠나지 않았다. 어딜 가도 흰개미가 쫓아올 태세인 데다가, 그가 말한 대로 토굴로 몰아갈 낌새도 아니어서 당분간은 동굴에서 두고 보기로 마음먹었다.

“배, 고파?”

“…….”

“추워?”

“…….”

“밥, 줄까?”

“필요 없어. 닥쳐. 꺼져.”

요한나는 날 선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량 식물을 씹어 먹는 흰개미를 얄미워 죽겠다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맛을 느끼면서 먹는 것 같지도 않아 배가 고픈데도 식욕이 일지 않았다.

‘그래도 뭘 먹기는 해야겠는데.’

허기가 지는 데다 모닥불이 있음에도 내려간 체온이 복구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지방이 많은 짐승을 먹는 게 좋다. 당장 바다 사냥을 나갔을 때의 고래 고기가 떠올랐다. 하나 지금은 요원했다. 어찌 됐든 풀 따위보다는 산짐승이라도 잡아먹는 게 좋을 터였다.

요한나는 동굴 밖으로 물기를 촉촉하게 머금은 숲을 바라보다가 힘이 더 빠지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찹찹찹!

날카로운 돌칼로 참나무의 가지 끝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여러 개를 만든 후에 적당한 곳을 찾았다.

‘풀이 여기저기 눕혀져 있네. 이쯤이 좋겠어.’

땅을 깊숙이 파고 안에 끄트머리를 깎은 나뭇가지를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얇은 나뭇가지 여러 개를 구멍에 촘촘히 얹어 두고 그 위로는 오는 길에 대충 뽑은 잡초를 올렸다. 이 정도 덫으로 멧돼지는 안 될 테고 고작해야 산토끼 정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변변한 도구가 없는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굴로 돌아오는 길에 평평한 바위와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새 덫도 여러 개 만들어 두고 나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흰개미 때문에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발을 뻗고 앉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배가 고파서 못 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요한나는 벽에 머리를 대자마자 까무룩 잠에 빠졌다.

일어났을 땐 한밤중이었다. 요한나는 이쪽을 쳐다보는 흰개미를 힐끗하고는 동굴 밖으로 나갔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몸이 축축 처졌다. 목이 간지럽고 으슬으슬한 것이 자칫 잘못하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제대로 된 거처도 아닌 이런 곳에서 병이 나는 것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다.

‘기력을 보충해야 해.’

다행히 만들어 둔 덫에는 토끼가 잡혀 있었다. 고작 한 마리뿐인 게 아쉽긴 하지만 혼자 먹기에는 나쁘지 않다. 만들어 둔 새 덫을 돌며 꿩 한 마리도 추가로 잡은 요한나는 동굴로 들어오기 전에 가죽을 벗기고 뼈와 살을 해체했다.

동굴 벽에 대고 깨뜨린 돌칼은 칼처럼 예리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제 역할을 해냈다.

피 냄새를 맡은 맹수들이 습격할 수가 있어 내장과 기타 부산물은 동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버리고 뒤처리까지 하고 돌아왔을 땐 기진맥진해서 그대로 쓰러져 누워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피곤한 나머지 입맛도 없었지만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먹어야 했다.

요한나는 모닥불에 호숫가에서 구해 온 불판용 돌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소 문드러진 고깃덩이를 그 위에 얹었다.

그 앞에 주저앉은 요한나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뺨이 따끔거려서 고개를 들었다. 흰개미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묘하게 느껴졌다. 몸이 피곤하니 저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머리를 굴리는 것도 귀찮았다.

“뭘 봐?”

까칠한 말에 흰개미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불.”

“뭐?”

“내 거.”

예상하지 못한 말에 요한나는 멍해졌다. 잠시 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머릿속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네 불이니까 쓰지 말라는 거야? 이 쪼잔한…….”

말이 절로 격해졌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검은 산맥은 험난하여 횡단이 난해한지라 서로 돕는 것이 관행이었다. 여행자든, 방랑객이든, 사냥꾼이든, 불 하나로 쪼잔하게 구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흰개미가, 그것도 흰개미가 고작 모닥불에 소유권을 주장하다니 뒤통수가 당겼다. 다른 누가 그럴지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흰개미가 말이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피곤한 요한나는 그게 불합리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물어 죽일 것처럼 날 선 그녀의 눈초리가 더 매서워지기 전에 흰개미가 입을 열었다.

“마음껏, 써도, 돼.”

짐짓 관대하게.

“요한나, 니까.”

그러면서 미소 짓는 얼굴을 본 요한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삽시간에 분노가 가시고 대신 무지하게 찝찝해졌다.

‘지금이라도 불을 새로 피울까?’

하나 부싯돌 없이 불 피우는 건 품이 많이 들었다. 배가 고픈데 불을 피우느라 또 힘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나는 껄끄러운 마음을 꾹 눌러 참고 대신 익어 가는 고기만 눈이 빠져라 노려보았다.

* * *

하아, 하아. 힘겹게 빠져나가는 숨이 뜨겁다. 요한나는 동굴 벽에 힘없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 몸이 으슬으슬해서 걱정했는데 어김없이 병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될까 봐 고기도 양껏 먹었던 거였는데.

질기기만 하고 더럽게 맛이 없어 고무를 씹듯 겨우겨우 삼켰던 전날의 저녁 식사를 떠올리자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 식사조차 축난 몸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는지 기어이 탈이 나다니.

‘저놈만 아니었어도 호수에 뛰어들진 않았을 텐데.’

눈을 감고 졸고 있는 흰개미를 눈빛으로 난도질했다. 곧 그마저도 힘에 부쳐 눈을 감았다.

몸에 힘도 없고 아프기까지 하니 서러움이 물밀듯 밀어닥쳤다.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지.

혼자 오두막에서 살 때는 허전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부족함 없이 잘 살았는데.

주룩 미끄러진 요한나는 차가운 동굴 바닥에서 끙끙 앓다가 기절하듯 정신을 놓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요한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자는 동안 눈물이 났는지 눈가가 짓물러 있었다. 목구멍이 사막처럼 건조했다. 갈증과 허기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요한나.”

“…….”

“요한나.”

어깨가 흔들렸다. 흰개미의 목소리가 뜨거운 귓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빙글, 몸이 돌려졌다.

흰개미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목구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비현실적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앞에서 흰개미가 낮게 속삭였다.

“입, 맞출, 까?”

요한나는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갈라진 목구멍이 따가운 통증을 유발했다. 흰개미의 달콤한 그것. 시원하고 청량하기만 한 게 아니라 다른 어떤 음식보다 효과가 빠른 액체가 떠오르자 허기가 극심해졌다. 답답한 토굴에서 골골대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다친 몸이 금방 나았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잖은가.

“아니면, 물, 이라도?”

요한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흰개미가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몸을 돌리려는 그를 보는 순간 손이 먼저 나갔다. 새하얀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열기로 건조한 입술에 차가운 입술이 포개졌다.

입을 맞추자마자 자괴감이 든 요한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반면 잠깐 멈칫한 흰개미는 곧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입술이 열리고, 시원하고 단 액체가 혀를 적시기 시작했다.

요한나는 불쑥 솟았던 후회가 빠르게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다른 생각 할 것 없어. 내 몸을 위해서일 뿐이야.’

이놈들도 자신을 제멋대로 이용했는데 자신이라고 이용하지 못할 건 뭐란 말인가. 그리 위안하며 입을 더 벌렸다. 혀가 부딪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으며 입 안을 촉촉하게 적시는 액체를 한껏 빨아들였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식으로 흰개미를 끌어안은 건 처음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몸에 닿는 흰개미의 맨가슴이 다른 때와 달리 조금 뜨거운 것도 같았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입을 맞추자,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원래의 컨디션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흰개미는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해 왔고, 산딸기 같은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

‘어차피 먹어 봤자 별다른 맛도 없는데.’

요한나는 시큰둥하게 산딸기를 입에 집어넣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범한 음식에는 둔해진 혀에 희미한 단맛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여전히 밍밍한 맛이기는 해도 마을에 있을 때보다는 ‘제대로’ 느껴진다.

그때 이후부터인가? 요한나는 산딸기를 오물거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물푸레 요정인지 뭔지 흉측한 것을 먹고 변한 몸은, 충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탈피를 한 셈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인간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 익숙하지 않았다. 신이한 일로 가득한 검은 산맥의 신비에 한 발 걸친 몸을 생각하니 잠깐 우울했지만 빠르게 떨쳤다.

눈앞에서 흰개미가 나신으로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긴 했어도 냄새가 나는 모피는 방치한 지 오래여서 아직도 알몸 상태다. 문제는 움직일 때마다 다리 사이 거대한 것이 흉악한 모양새로 덜렁거린다는 점이었다. 어찌나 존재감이 큰지 눈길이 절로 갔다.

“요한나, 더, 갖다, 줄까?”

“……옷이나 입어!”

버럭 소리친 요한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옷, 없는, 데.”

뒤늦게 흰개미의 말이 느릿느릿 이어졌다. 아오, 진짜. 창피한 줄 몰라, 창피한 줄. 요한나는 속으로 구시렁대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 * *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건 어둠, 어둠, 어둠뿐이었다. 마물이나 맹수 따위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슬프고 두려운 느낌에 몸서리가 쳐졌다.

무엇이라도 좋아. 마물이라도, 맹수라도, 심지어 날 모욕했던 마을 사람들이라도 좋아. 누구라도 있어 줘. 이 어둠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퍼뜩 잠에서 깬 요한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울퉁불퉁한 동굴의 벽면이 보였다. 어둑한 벽면에 노란빛이 일렁였다. 등 뒤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따뜻한 기운을 쫓아 몸을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보석 같은 붉은 눈이 시선을 마주쳐 왔다. 자연스러운 눈 마주침에 요한나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누군가 지척에 있다는 기묘한 감각. 차갑게 질려 있는 몸에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요한나.”

묘한 안도감에 팔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고작 이름이 불린 것뿐인데.

그제야 온전히 정신이 든 요한나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피가 돌지 않는 듯 저린 손도 두어 번 쥐락펴락했다. 무슨 꿈을 꿨더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척이나 불쾌하고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요한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맞은편 벽면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흰개미를 바라보았다. 하체에는 예의 그 냄새나는 모피가 걸쳐져 있었다. 큭, 부지불식간에 웃음이 터졌다가 놀라 입술을 꾹 다물었다.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자 미간에 주름이 갔다.

‘흰개미를 보고 안심하다니. 돌아도 단단히 돌았어. 어두워서 저 자식이 인간으로 보이기라도 한 거야?’

요한나는 자신을 비웃었다. 자괴감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 무서운 건 흰개미가 곁에 있음을 익숙하게 여기는 스스로였다.

혼자였던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이런 기생충 같은 게 붙어 있으면 어떡하지?

‘……이런 거라도 같이 있는 게 익숙해진다면.’

동굴을 울리는 깊은 한숨 소리에 흰개미의 시선이 요한나에게 못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 * *

며칠 후, 요한나는 사냥을 위해 근처를 돌아보고 있었다. 흰개미는 한 발 뒤에서 그녀가 어딜 가든 졸졸 따라다녔다.

사실 흰개미가 있기에 사냥하지 않아도 됐지만, 동굴에서 둘만 있다가는 숨이 막힐 것 같아 억지로 뛰쳐나왔다. 동굴에서 쉬면서 만들어 둔 사냥 도구들을 시험해 볼 겸, 좀 멀리까지 나갈 셈이었다.

‘여긴 좀 조심해야겠는데. 카자르의 영역이잖아.’

카자르는 갯과의 자칼과 비슷한 생김새의 마물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그다지 위협적인 마물은 아니지만 점찍은 사냥감을 피 말려 죽이는 집요함이 귀찮은 놈들이었다. 혹시나 마찰을 빚어 타깃이 되면 피곤해질 터다.

“요한나, 안, 가?”

“귀찮은 놈들이 있어. 엮이면 골치 아프니 돌아가자.”

방향을 바꿔 움직이려는 그때, 요한나의 귀가 쫑긋했다.

“어디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아?”

흰개미는 아름다운 눈을 천천히 깜박이기만 할 뿐이었다. 아닌가.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요한나는 몇 걸음을 뗐다.

그 찰나였다.

“으아아악!”

휙 몸을 돌렸다. 카자르가 좋아하는 붉은도토리나무 군락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고민하다가 그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스러운 현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요한나는 나무 뒤에 숨어 상황을 관찰했다.

예상했던 대로 세 명의 인간이 카자르 무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이다. 그 뒤를 자칼 모양을 하고 있으나 털이 그것보다 길고 이족 보행을 하는 카자르 무리가 쫓았다.

‘저러다 포위되겠네.’

예상대로 곧이어 카자르가 인간들을 둘러쌌다. 요한나는 빠르게 세 사람을 훑었다. 두툼한 배낭과 머리를 감싸는 모자, 제법 더워진 날씨에도 손목과 발목까지 감싸는 긴 옷.

‘차림은 괜찮은데.’

개중 가장 어려 보이는 남자가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 휘적거렸다. 어설픈 품새로 보아 사냥꾼은 아니다.

‘단순한 방랑객인가 보군.’

검은 산맥은 대륙의 정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그런 탓에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방랑객이나 여행자가 끊임없이 등반하는 편인데, 저들도 그런 부류인 듯했다.

“뭐, 하려, 고?”

요한나는 옆을 흘끗했다. 흰개미는 눈앞의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한 눈이었다.

“도와줘야지.”

흰개미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라고 묻는 눈이다.

“검은 산맥에 살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건 당연하니까.”

인도적인 얘기를 했지만 사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계속 흰개미와 둘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때맞춰 나타난 인간이 반갑지 않을 리가!

‘언제까지 너랑만 있을 줄 알고?’

안도감에 내심 쾌재를 부른 요한나는 인간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떡하지? 라나, 이쪽 길은 안전하다고 했잖아.”

“안전해! 안전해야 하고! 카자르는 인간에게는 관심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서로 등을 맞댄 인간들이 속살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왜긴. 카자르의 보물을 건드리기라도 했나 보지.’

요한나는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보물이라고 해 봤자 나무 아래에 도토리 열매를 수북하게 쌓아 둔 게 다겠지만 말이다. 잘 모르는 이들이라면 쉽게 발로 차고 지나갈 수도 있다.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으나 어쩐다.

잠깐 고민했던 요한나는 인간에게 집중하느라 등을 보이는 카자르 무리의 뒤쪽으로 뛰어내렸다.

타닥!

인기척을 느낀 카자르가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의 시선도 따라왔다. 무심코 그들을 본 요한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렌타?’

방랑객 중 하나. 가장 키가 큰 남자는 바렌타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쳐다보자, 머릿속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크엉!”

하마터면 카자르의 이빨에 어깨를 물릴 뻔했다. 간신히 몸을 뺀 요한나는 정신을 차리고 달려드는 카자르를 상대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등 뒤에 온 신경이 쏠렸다.

바렌타를 닮은 인간이라니.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 * *

“저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어요.”

“예에……. 카자르는 독특한 마물이라서요. 입고 있는 걸 다 내주면 잡아먹지는 않아요.”

“과연 사냥꾼이시라 잘 아시네요!”

카자르의 사냥감이 된 건 셋 중 제일 어린 남자로, 요한나의 명령에 따라 그 자리에서 모든 옷가지를 벗어 카자르에게 던졌다. 그는 지금 가방에서 새로 꺼낸 바지만 입고 있다.

요한나는 대꾸해 주면서도 힐끔힐끔 옆을 곁눈질했다.

‘닮았어.’

거긴 셋 중에 제일 키가 큰 사내가 있었다. 목덜미 아래로 내려오는 다소 긴 갈색 머리카락에 건강하게 태운 피부, 앞을 똑바로 향한 진갈색의 눈동자. 피로한지 약간 찌푸린 눈매까지, 순간순간 바렌타가 겹친다.

별안간 눈이 마주쳤다. 요한나의 눈이 일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던 남자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요한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다음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바렌타 덕에 사람들과 어울려도 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사람을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아냐. 가까이서 보니까 달라. 바렌타는 저런 식으로 웃지 않으니까.’

남자는 안경을 끼지 않았고, 이목구비가 더 뚜렷한 데다가 턱 아래에 선명한 흰 흉터 때문에 좀 더 험상궂어 보인다. 억지로 바렌타와 별개의 사람이라고 되뇌며 가슴을 도닥였다.

어느새 동굴에 도착해 있었다.

손님을 모신 식사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세 먹음직스러운 고기 냄새가 피어올랐다. 비상용으로 저장해 둔 고기까지 모두 꺼내자 커다란 돌판이 음식으로 가득 찼다. 서글서글한 얼굴의 여자가 부산을 떨었다.

“먹을 것까지 나눠 주시고, 감사해서 어쩌죠. 혹시 뭐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하세요. 이래 봬도 쓸 만한 게 좀 있거든요. 돈이 떨어지면 팔아서 경비를 마련하는 정도지만, 제법 볼 만한 것도 있어요. 여성분이시니, 귀걸이나 목걸이는 어때요?”

“아니, 괜찮아요.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셋 중 리더 격으로 보이는 긴 곱슬머리의 여자는 이름이 라나로, 위로 쭉 찢어진 눈꼬리와 얇은 입술 때문에 다소 까칠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어투가 정중하고 예의가 발랐다. 그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일행인 다른 두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바렌타가 계속 떠오르는 것은 이 때문일까?

‘쳇, 또 바렌타를 생각하고 있잖아. 닮은 점을 찾는 건 그만두자.’

쓴웃음을 짓다가 레놀드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봤을 때 착각했던 그 남자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뜨끔한 요한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돌판에서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를 응시했다.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라나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뒤늦게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요한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던 라나가 흠, 헛기침했다.

“왜 그래요?”

“뭣 좀 물어봐도 돼요?”

“네,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요.”

“저기, 저분이요.”

그녀의 시선이 호기심을 가득 안고 요한나의 뒤를 향했다. 그쪽엔 흰개미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제일 안쪽에 앉아 있어 모닥불의 빛이 잘 닿지 않아 그림자가 얼굴의 반을 덮고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뾰족한 턱을 본 요한나는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아, 흰개미! 인간에겐 이상하게 보일 텐데.’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못 알아보지 않을까?’

도시를 왔다 갔다 하는 인간들이 검은 산맥 깊숙이 사는 충인을 알아볼 리도 없거니와 겉으로 보기에 흰개미는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니까.

‘게다가 어둡기도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면 인간과 비슷한 아인종이라고 대충 둘러대면 되지 뭐.’

안이한 생각도 잠시, 그녀는 이어진 레놀드의 말에 흠칫했다.

“충인인가?”

순식간에 긴장감이 차올랐다. 요한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차분하지만 어딘지 날카로운 태도의 레놀드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을 눈치챈 남자가 뒤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는 태도였다.

“놀랄 것 없어요. 이래 봬도 나 역시 사냥꾼이라 알아본 것뿐이니까.”

“사냥꾼이요?”

“한때는.”

레놀드가 각진 어깨를 으쓱였다.

“도시로 내려가기 전에는 검은 산맥에서도 몇 달 지냈어요. 살 곳이 아니라서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요한나는 옷에 가려졌지만 터질 것처럼 두꺼운 그의 팔뚝과 허벅지를 훑었다. 평범한 방랑객은 아닐 거라고 의심하긴 했어도 사냥꾼일 줄은. 동류라면 동류인데 이상하게도 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 충인?”

언제 호기심을 가졌냐는 양 경계하는 얼굴이 된 라나가 레놀드의 곁에 바싹 붙었다. 충인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는 모습이다. 요한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충인이 뭔데?”

침을 뚝뚝 흘리며 고기에 집중하던 피터까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레놀드를 응시했다.

“검은 산맥을 위험 지대로 만든 종족 중 하나지.”

레놀드의 찌르는 시선이 요한나에게 박혔다.

“굉장히 포악한 종족인데, 어떻게 같이 있는 거죠?”

말은 동의를 구하는 형태인데 눈빛엔 의심이 스친다. 요한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견갑골이 신경 쓰인다. 현재 그녀의 날개는 옷 안쪽에 잘 갈무리한 상태였다. 갑각 표피가 있는 손등도 장갑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섣부른 의심은 할 수 없을 테지만 이 상황을 둘러댈 적당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시선이 꽂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는데, 머릿속이 하얬다.

그녀는 이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을 후회했다. 카자르에게서 도망치는 걸 도와주기만 할 것을, 어쩌자고 이렇게 가깝게 다가갔을까.

“왜 대답을 못 해요? 설마.”

요한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멀쩡히 웃으며 대화했던 이들이 경멸하며 무기를 빼 드는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라나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길들인 건가요?”

“예?”

멈추었던 숨이 훅 빠져나갔다.

“라나.”

황당한 듯 레놀드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충인이 어떤 종족인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모를 것 같아? 충인! 소수 종족 학자들이 마르고 닳도록 얘기하는 주제잖아. 하지만 보라고. 저렇게 얌전한데! 게다가 너무, 아름다운걸.”

어느새 경계심이 풀린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라나가 요한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맞죠?”

요한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나는 물론이고 레놀드의 눈까지 커지는 것을 보자 목이 바싹 마른다.

“말도 안 돼.”

레놀드가 중얼거렸다. 제가 말해 놓고도 믿기지 않는지 라나는 입을 벌리고 요한나와 흰개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성이 있는 아인종을 노예로 부리는 건 흔하지만, 충인 노예는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목줄이나 다른 제어 장치도 하지 않은 걸 보면 꽤 오래전에 길들였나 봐요. 아, 그래서 충인을 노예로 삼을 수 있었던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성충은 불가능하니까.”

요한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아무 설명 안 해도 알아서 스토리를 만들어 주니 다행이었다.

“충인 노예라니, 희소성이 엄청나네요.”

눈을 가늘게 뜨는 라나는 입을 벌리고 감탄했던 모습이 싹 사라져 있었다. 요한나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입매를 누그러뜨리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아, 죄송해요. 말이 좀 그랬죠? 사정이 있어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본가의 가업은 상단이라서요. 자란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이해득실을 절로 따지게 되네요. 아이참, 안 그러려고 하는데 말이에요.”

부끄럽다는 듯 손으로 뺨을 감싼 라나가 불쑥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낮아지는 목소리.

“그래서 말인데, 어디서 저런 걸 구하셨어요? 올 때부터 지켜봤는데 저런 미모라면 충인이 아니더라도 상등품으로 취급될 수 있을 거예요. 아인종이라는 특성까지 붙으면 경매의 원 탑이 될 수 있고요. 길들인 비법을 알려 주시면 꼭 사례할게요.”

“비, 비법? 그런 건 없어요.”

열성적인 태도에 요한나가 질린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라나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아니면 저 노예를 파는 건 어때요? 이래 보여도 본가에 재산이 상당히 있으니 값은 넉넉하게 쳐드릴게요.”

요한나는 입을 떡 벌렸다.

판다고?

팔아?

누구를?

흰개미를?

너무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감히, 흰개미를?

그런 의미에서의 경악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라나가 아차 했다.

“너무 끈질겼나요? 죄송해요. 괜찮은 걸 보면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라.”

시원한 웃음을 보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해맑아 보이지만 별종이다. 별종.

“그건 안 되겠어요.”

요한나는 꼬리가 긴 한숨을 쉬었다. 속에서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흰개미를 팔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흰개미가 그녀의 노예가 아니라 오히려 감시자 비슷한 것이란 걸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거 정말 아쉽네요.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 * *

다음 날, 라나 일행은 떠날 채비를 했다. 요한나도 함께였다. 라나의 요청으로 약간의 은전과 옷 여러 벌을 대가로 안전한 곳까지 길 안내를 해 주기로 한 탓이다.

“정말 이걸로 괜찮았어요? 새 옷도 아니고 입던 옷인데. 돈이 더 낫지 않나요?”

“있어 봤자 여기선 쓸 일도 없어요.”

라나가 얼떨떨해하건 말건 요한나는 한사코 옷을 요구했다. 날갯죽지의 날개를 가리기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아슬아슬했고, 흰개미의 헐벗은 몸을 계속 보는 것도 사절이었다.

몸집이 왜소한 피터 대신 레놀드의 옷을 받아 차림을 갖춘 흰개미를 보자 요한나는 제 선택에 흡족해했다.

“와, 이렇게 입으니 겉으로 보면 우리와 다를 게 없네요. 오히려 너무 잘생겨서 도시에선 시선 좀 끌겠는걸요.”

우람한 근육이 보이지 않는 건 아쉽지만, 하며 요한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인 라나는 흰개미를 향해 묘한 눈길을 보냈다.

지금까지 보아 온 마을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타입인 라나가 요한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충인인데 징그럽지도 않은 건가?’

이런 사람도 있구나. 마을 주민들과 다른 반응에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흰개미는 그녀가 앞에서 뭐라고 떠들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하네.’

라나 일행 앞에서 허튼짓할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아직 얌전하다. 마음이 놓였다.

바렌타와 아버지를 제외하고 인간 무리와 한 공간을 공유해 본 적은 없었으므로 어려운 점이 있지 않을까. 그랬던 초반의 걱정과 달리 동행은 순조로웠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있기는 했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개울가에서 잡아 올린 손바닥만 한 은어가 오늘의 저녁 메뉴였다.

“이봐, 장작을 좀 더 갖고 와.”

바람으로 불이 시원치 않자 피터가 흰개미에게 턱 끝으로 명령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앞장서서 울창한 수풀을 몸으로 쳐 냈던 흰개미였다. 일행 중 가장 고되었을 테지만 피터는 남들이 쉬고 있는데도 흰개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려 먹는다.

낙엽을 모닥불에 집어넣으며 요한나는 둘을 주시했다. 힘이 들어간 전완근이 팽팽하다. 언제라도 흰개미를 막을 수 있는 자세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흰개미는 군말 없이 장작으로 쓸 나뭇가지를 구해 왔다. 새벽 내내 모닥불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양이 많았다.

“잘했어. 어, 앉지는 말고.”

요한나의 옆에 앉으려던 흰개미가 고개를 돌렸다. 피터가 인상을 썼다.

“물도 떠 와야지. 갖고 왔던 건 다 마셨잖아. 말하지 않아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하겠어? 인간이 아니라 그런가 시원치가 않아.”

카자르에게 쫓겼던 일도 그렇고, 검은 산맥에 정이 떨어진 피터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요한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흰개미를 흘끗했다.

피터로서는 그를 노예로 알고 있으니 이것저것 시켜 대는 것이겠지만 흰개미가 어떤 존재인가. 사소한 잡일은 손도 대지 않고 일꾼개미들의 떠받듦만 받았던 토굴의 장군이었다. 흰개미가 언제 피터의 머리를 터뜨릴지 몰라 요한나는 쉬지도 못하고 몸을 긴장시켰다.

“안 가?”

가만히 서 있던 흰개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요한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흰개미가 사라진 숲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았던 숨이 길게 샌다.

지금 이 상황에서 긴장하고 있던 건 요한나뿐이었다.

“어디 불편해요?”

라나의 태연한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슬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노예란 게 이런 거야?’

다들 쉬는데, 혼자만 일을 하는 상황이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 대상이 흰개미라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흰개미는 물고기가 노릇하게 구워질 무렵에 다시 돌아왔다. 물통엔 맑은 개울물이 가득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요한나에게 가려던 그를 피터가 다시 붙잡았다.

“이봐 노예. 이쪽에 앉아.”

흰개미가 요한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피터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놈을 더 써도 되죠?”

대수롭지 않은 요청이라고 생각하는지 말투가 짐짓 당당했다.

‘카자르 무리에게 쫓기던 어리숙한 얼굴은 꿈에서 보았나?’

요한나는 애매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뺨에 흰개미의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와 닿았다. 요한나는 바짝 긴장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흰개미는 이번에도 순순히 피터의 말을 따랐다. 피터는 양쪽으로 다리를 벌리고 턱짓했다.

“거기 그 부분을 주물러라. 내내 걸었더니 다리의 부기가 빠질 생각을 안 해.”

피터는 요한나의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어린애처럼 투덜거렸다. 이상하다.

피터는 생각보다 나이가 더 어린 걸까?

‘아니면 머리가 모자란가?’

곧이어 깨달았다.

노예란 건, 저런 의미구나. 막연하게만 느껴진 ‘노예’라는 개념을 처음 피부로 깨달은 요한나였다.

그녀와 달리 라나와 레놀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다. 피터의 머리가 갑자기 이상해진 게 아니라, 이게 당연하다는 의미다.

갑자기 속이 거북해졌다.

흰개미는 피터의 뻗은 다리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정적인 분위기에 퍼뜩, 요한나는 다시 긴장했다.

‘지금은 위험한데. 거리가 너무 가까워. 흰개미가 피터의 다리를 토막 낸다 해도 제때 막을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요한나가 피터에게 경고의 말을 던지려고 할 때, 흰개미가 느리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피터의 종아리를 꽉꽉 주무른다. 조마조마했던 요한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순간, 흰개미가 그녀를 쳐다본 것 같았다.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린 흰개미의 시선은 피터의 종아리에만 못 박혔다.

‘착각인가?’

그때였다.

“악, 아파! 이 새끼야! 힘 조절 못 해?”

비명을 지른 피터가 손을 번쩍 쳐들었다. 요한나는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던졌다. 그것이 피터의 허공에 뜬 손목을 정확히 때렸다. 물고기를 꿰고 남은 꼬챙이였다.

“아얏!”

피터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요한나는 정신이 들었다. 다른 이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흰개미까지도.

정적이 감돌았다.

옷을 껴입은 가슴골 사이로 땀이 주룩 흘렀다.

‘내가 왜 그랬지?’

한 대 맞아 봤자 흰개미에겐 간지러울 뿐일 텐데. 그래도 때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도시인들에게 노예는 짐승과 다름없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기분이 나쁘잖아.

“몸에 손을 대는 건, 좀.”

겨우 한마디를 했다. 그래. 흰개미가 화가 나면 아무도 못 말리니까. 사고 치기 전에 수습해 준 거야. 어색하게 굳어졌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아, 그건 그렇죠. 죄송해요. 남의 노예에.”

피터는 떨떠름해 보였다.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못내 기분이 나쁜 눈치다.

뭐 저런 어린애가 이런 곳까지 들어왔지? 요한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피터가 흰개미에게 물러가라고 하자 그걸로 됐다 싶었다.

분위기는 조금 어색했다.

“잘 구워졌네요. 맛있게 먹어요.”

장내를 정리하는 라나의 말에 각자 은어를 두어 개 꿴 꼬챙이를 집어 들어 보들보들한 생선 살을 씹기 시작했다.

요한나는 침묵이 불편해서 생선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식사가 끝났을 때는 껄끄러웠던 분위기도 다소 유해져 있었다. 각자 볼일을 보러, 씻으러, 생선 찌꺼기 뒤처리를 위해 흩어지고 불가에는 라나와 요한나만이 남았다.

요한나는 담뱃불을 붙이는 그녀를 곁눈질로 훑었다. 수다스럽고 활발한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단둘이 있는 건 영 편하지 않았다.

“그럼 저도 이만…….”

일어서려는 그녀에게 라나가 담뱃잎으로 만 궐련을 건넸다.

“한 대 피울래요?”

“아니, 피울 줄 몰라요.”

“그래요? 이게 사냥꾼들의 기호품인 줄 알았는데. 레놀드는 골초라서요.”

“사냥꾼마다 특징이 다르니까요.”

라나는 알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앉는 게 편하지 않아요?”

그녀가 엉거주춤 일어선 요한나의 불편한 자세를 눈짓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싶어 자리에 앉았다.

라나는 담배만 피울 뿐 말이 없었다. 밤하늘을 뿌옇게 유영하는 담배 연기를 보고 있다가 요한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명령이 자연스럽던데, 도시 사람들은 다 그런 건가요?”

굳이 아까 있었던 일을 꺼낸 것은,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못마땅하기도 하고.

“사람마다 달라요. 저흰 이게 보통인 거고요.”

대답한 라나가 느닷없이 작게 웃었다.

“아끼는가 봐요.”

“뭘요?”

“그 충인 노예요.”

요한나는 인상을 팍 썼다.

‘그렇게 보였나?’

흰개미가 참지 못하고 폭발할까 봐 불안하기는 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이 손으로 끝을 내 버리고 싶은 흰개미지만 생판 모르는 남이 그가 누군지도 모른 채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게 아니꼬웠다.

게다가 피터는 그녀가 싫어하는 인간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마을 주민들의 면면에 기분이 저조해진 요한나는 한발 늦게 대꾸했다.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라나는 그러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해해 주세요. 피터는 가문에서 응석받이로 컸어요. 철부지라는 평판에 욱해서 절 따라왔는데, 꽤 힘들었을 거예요. 시중드는 사람 없이 어딜 가 본 적이 없거든요.”

시중드는 사람이 없는 삶은 대체 어떤 삶인 거지?

요한나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충 마을에서 바렌타만큼 높은 위치의 사람인가 보다고 간신히 이해했다.

“당신들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요?”

“철부지 피터는 사촌 동생이에요. 그리고 레놀드는…….”

라나는 말꼬리를 길게 끌더니, 약간 긴장한 요한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우리 가문에 고용되었던 경비 무사예요. 어렸을 때부터 안 해 본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만큼 칼도 잘 쓰고요. 이 위험한 검은 산맥에 피터와 나만 올라올 수는 없잖아요?”

셋도 부족한 것 같은데. 요한나의 오묘한 시선에 라나가 부산스럽게 깔깔거렸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나는 마법사예요. 급수는 낮아요. 그래도 검은 산맥의 안전지대를 통과하는 데는 무리가 없죠.”

“카자르 무리에겐 정신없이 쫓기던데요.”

“아, 그건!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대로 허무하게 죽는 건가 했다니까요.”

“마법사는 처음 봐요.”

“뭐, 다들 도시에 모여 있으니까. 게다가 마법사가 이런 험지까지 올 일은 없죠. 레놀드도 사실 오기 싫어했는데, 돈을 두둑하게 주고 고용했어요.”

“두둑하게?”

“네, 두둑하게. 금액만 듣고도 거기가 벌떡 일어설 만큼.”

까르르 웃는 그녀를 요한나는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반응에 라나가 멋쩍게 궐련을 빨았다.

“뭐어, 어쨌든 못 하는 게 없으니까 같이 있을 때만큼은 이것저것 부탁해 봐요. 검은 산맥 정도는 아니어도 제법 괜찮은 사냥터들도 알고, 살상력이 높은 화살도 재료만 있음 곧잘 만드니까.”

“…….”

“물론 다른 쪽의 ‘능력’도 나쁘지 않답니다. 밤에는 끝내줘요.”

그러면서 입꼬리를 올린다.

‘왜 저렇게 웃는 거지?’

도시인들은 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건지. 의아했지만 쳐다보는 시선을 무시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필요할 때 생각해 볼게요.”

라나는 예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보였다.

* * *

요한나는 한밤중에 목이 말라서 잠에서 깼다. 물을 따라 마시다가 라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놀드도 없었다.

‘떠났나? 말도 없이 떠날 것처럼은 안 보였는데.’

잠시 후 코를 고는 피터를 발견한 그녀는 고민에 휩싸였다.

‘불침번도 안 서고 한꺼번에 자리를 비워?’

이런 밤중에 나다니는 건 위험했다. 특히나 검은 산맥에서는.

‘생각보다 멍청한 사람들이네.’

요한나는 근처를 돌아보기로 했다. 주변에 없으면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흰개미의 곁을 지나갈 때는 극도로 발걸음을 조심하며 무릎까지 길게 자란 수풀 속으로 걸음을 디뎠다.

두 사람은 차를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간 거지?”

여기서 좀만 더 가면 그다음부터는 붉은 늑대의 영역이었다. 늑대의 영역 표시 흔적을 발견한 요한나는 혀를 쯧 찼다.

‘다음 날 시체로 발견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는데.’

레놀드가 한때 사냥꾼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사냥꾼이었던 자가 이렇게 경솔한 짓을 한다고? 검은 산맥에서만 생산되는 뭔가를 채집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약초꾼이 아닌지라 밤에 채집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더 찾는 건 의미가 없어. 돌아가자.’

포기하고 뒤를 돌았을 때였다. 멀리서부터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헐떡이는 듯도 하고 앓는 듯도 한 소리였다.

요한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듬성듬성해진 나무 사이에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아, 흑, 아, 좋아, 레놀, 드! 아, 아, 아앙!”

요한나는 나무의 그늘 속에 파묻힌 채 굳어졌다.

굵은 나무 기둥을 붙잡고 등을 보이는 라나의 뒤에 레놀드가 딱 붙어 있었다.

그가 그녀의 골반을 단단히 잡고는 퍽,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허리 짓을 했다.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라나는 꺾이는 게 아닐까 걱정될 만큼 무릎을 후들후들 떨었다.

‘두 사람, 저런 사이였어?’

그동안은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지라 요한나는 당황스러웠다. 인간의 교미, 아니 정사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밤중에 퍼져 나가는 물기가 마찰하는 소리와 은은한 달빛 아래 엉겨 붙은 연인의 실루엣은 지나치게 감각적이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낮의 두 사람과 밤의 두 사람은 몹시도 달랐다. 특히 바렌타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온화했던 레놀드의 인상이 딴판이었다. 바지춤만 풀고 추삽질을 하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흥분으로 구겨진 이마와 습한 콧김이 정사의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

그가 한 손을 뻗어 라나의 옷을 헤치고 튀어나온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그녀가 찌르는 듯한 교성을 지르자 급하게 입 속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는다. 흐윽, 흑. 흐느끼는 라나의 귀에 거칠게 속삭였다.

“조용히 해.”

“조, 좋아, 좋아, 레놀드, 조금, 조금 더 세게 긁어 줘!”

“제기랄, 욕심 많기는. 얼마나 더 쑤셔 줘야 만족할 거야?”

귓전이 후끈후끈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게 보지 않고도 느껴질 정도였다. 오래전에 훔쳐보았던 마을 연인의 정사는 저런 식으로 적나라하진 않았다. 그 외에 알고 있는 정사의 감각이라고는 개미들과의 대화 없는 끈적한 교미뿐이었던지라, 요한나는 두 사람에게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라나의 가슴을 터뜨릴 것처럼 움켜쥔 레놀드가 고환이 철썩 부딪칠 정도로 강하게 박아 넣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으흐읏! 길게 신음한 라나가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멀리서 봐도 몸이 사정없이 경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놀드가 그녀에게서 미련 없이 몸을 뗐다. 라나의 육감적인 볼기 사이로 축축하게 젖은 성기가 쑥 빠져나왔다. 성인의 한 뼘보다도 긴 그것이 달빛을 받아 음란하게 번들거렸다.

숨을 가다듬으며 벌려진 옷깃을 갈무리한 라나가 레놀드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기분 좋았어, 레놀드.”

“얼른 채비해.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그들이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하자 요한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떠날 타이밍을 놓쳤다.

‘이런 걸 엿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변명해 보지만, 머릿속에 선명하게 맺힌 영상은 부끄러울 정도로 생생했다.

얼마나 집중했으면. 스스로를 향해 혀를 끌끌 찼다. 요한나는 바지를 추켜 입는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자리를 벗어났다.

요한나는 오래지 않아 잠자리로 돌아왔지만 두 사람의 걸음이 생각보다 빨랐다. 낭패였다.

귓가에 와 닿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원래의 자리가 아닌 곳에 누웠다. 익숙한 풀 향기가 콧속에 훅 끼쳤다. 흰개미의 옆이란 걸 깨닫고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자리를 옮기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과연, 그녀가 눕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속삭임이 두런두런 흘러들었다.

“얼마 못 자겠군. 내일은 꽤 피곤할 것 같은데.”

“글쎄, 오히려 체력이 더 좋아질지도 몰라. 쌓인 걸 풀었으니까.”

거의 들리지 않게끔 속닥거리며 두 사람이 돌아왔다.

‘자리가 바뀐 걸 눈치채진 않겠지?’

긴장감에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어 댔다. 다행히 둘은 별다른 말 없이 제 자리에 가 눕는 눈치였다.

요한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며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입 속으로 짧은 한숨을 쉬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을 봐서인가, 몸이 후끈거렸다. 벌떡, 몸을 일으킨 요한나는 축축한 아래를 느끼고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하, 제기랄.’

긴장된 순간이 지나자 심란한 생각이 파고들었다.

‘바렌타도 다른 누군가와 그런 짓을 하고 있겠지.’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또 미래를 약속한 여자를 만들었을까. 이슬라가 아니라면 누가……. 아니, 이슬라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에 둔통이 일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은 아니었다. 한때는 절벽에서 스스로 떨어졌을 정도로 절망했던 일인데 지금은 떠올려도 이렇게 멀쩡하다니. 요한나는 묘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바렌타를 떠올렸더니 민망했던 몸의 열기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아,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을 쉬는 그때였다.

휙!

손목이 잡혀 끌려갔다. 놀란 요한나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곧이어 입술에 온기가 닿았다.

어둠 속에서 흰개미의 속눈썹이 움직이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전에 입술이 겹쳤다.

라나 일행을 만난 뒤에는 없었던 접촉에 요한나는 의아했다.

‘이 밤중에 갑자기?’

당연히 여느 때와 같은 섭식 행위인 줄 알았다. 하나 흰개미의 혀는 평소와 달리 달콤하게 젖어 들지 않았다. 대신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며 안으로 침입했다. 치열과 볼 안쪽을 기어가듯이 쓰는 움직임.

요한나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혀는 앞쪽에서만 깔짝대는 데 그치지 않았다. 혀끝이 목구멍을 쑤시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토할 것 같으면서도, 아랫배가 저렸다.

퍽!

그의 가슴을 강하게 밀었다. 흰개미는 전혀 밀리지 않고, 도리어 더 가까이 몸을 붙이고서 입술만 뗐다.

“왜 이래?”

라나 일행이 들을까 봐 목소리를 낮춰 화를 내자 어둠에 휩싸인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고, 있는, 건가?”

“뭘?”

“교미, 페로몬.”

속삭이며 흰개미가 그녀의 턱에 바싹 입을 맞대어 문질렀다. 요한나는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나오고, 있어…….”

흰개미의 한숨이 나른하게 목을 간질였다. 배 안쪽 어딘가에서 샘솟는 열기에 요한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라나와 레놀드의 정사 같은 걸 봐서 그런가. 평소라면 꺼림칙하기만 했을 흰개미의 서늘한 손이 닿는 곳마다 오싹오싹했다.

“흣, 달콤, 해, 요한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소리를 삼키자 목이 살짝 진동했다.

평소와 달리 강하게 거부하지 않는 그녀의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챈 흰개미가 냅다 옷을 끌어 올렸다. 라나에게서 대가로 받은 두껍고 긴 여행용 튜닉 아래로 미려한 손가락이 거미처럼 파고든다.

홀쭉한 뱃가죽을 음미하듯 쓸고 올라온 손이 명치뼈 부근에서 손끝을 둥글렸다. 이윽고 검지와 엄지가 펼쳐지며 양쪽 가슴 아래를 한꺼번에 주물렀다. 숨도 못 쉬고 손놀림에 집중하던 요한나의 허벅지 안쪽이 꽉 조여들었다.

“이런 데서 아, 하지, 마…….”

제가 듣기에도 싱거운 저항이었다. 흰개미가 그녀를 흘끗했다. 요한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눈을 크게 떴다. 흰개미가 튜닉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은 것이다.

“아!”

밀도 높은 밤공기를 타고 소리가 진동했다. 흠칫한 요한나는 혀끝을 깨물고 말을 삼켰다.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라나 일행의 숨소리는 여전히 규칙적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깐이었다. 흰개미가 가슴을 핥자 목덜미가 다시 긴장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옷자락이 가슴에서 기괴할 만큼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품이 큰 튜닉이라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흰개미와 밀착되어 턱이 가슴 아래에 닿는 것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지라 요한나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파래지기를 반복했다.

옷에 가려져 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촉감이 더 생생하게 살아났다.

까끌까끌한 혀가 젖꼭지를 넓게 덮었다가 혀끝으로 콕콕 찔러 댔다. 살갗이 벗겨질 것 같았다.

하아, 신음을 흘리자 흰개미가 젖꼭지를 입 안쪽으로 쏙 빨아들였다. 타액을 가득 머금어 축축한 입 안이 자극받은 젖꼭지를 위로하듯 휘감았다. 그대로 젖꼭지를 뽑을 것처럼 강하게 흡입했다.

“흡!”

요한나는 가까스로 신음을 삼켰다. 대신 침낭을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등이 그녀가 느끼는 쾌감의 농도를 가늠케 했다.

왈칵, 애액이 빠져나갔다. 조금 젖어 있던 아래가 빠른 속도로 젖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튜닉 아래서 흰개미의 머리가 쑥 빠져나왔다. 다리 사이가 미친 듯이 근지러웠다. 벌름대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요한나는 뜨거워진 눈으로 흰개미가 대충 다리를 감싸고 있는 침낭을 파헤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속옷과 바지가 한 번에 벗겨지자 밤공기의 서늘함이 훅 끼쳐 왔다.

흰개미가 그 위로 몸을 드리우자 요한나는 얼음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삽입은 싫어!”

흰개미가 양쪽 허벅지를 움켜쥔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흉흉하게 달아오른 성기가 보였다.

요한나는 그가 그대로 쑤셔 넣을까 봐 다리를 모으려고 애썼다. 흰개미는 무릎으로 그녀의 무릎을 더 벌렸다.

‘이 개자식…….’

사람들을 다 깨워서라도 막아야 하나?

짧은 순간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러나 흰개미가 허리를 들이미는 대신 고개를 숙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위가 어둑해 마치 다리 사이 작은 동산이 생긴 것만 같았다.

몸을 둥글게 말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박은 흰개미가 혀를 내밀어 이미 젖어 있는 그곳을 할짝, 맛보듯 핥아 올렸다. 전기가 오르는 양 허리가 번쩍 튀었다.

요한나는 머릿속이 얼얼했다. 답답한 토굴이 아닌 선선한 바깥이어서 그런 걸까? 토굴 속에서의 감각과 전혀 달랐다. 잠깐 혀가 닿았을 뿐인데 허리가 덜덜 떨렸다.

흰개미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으음’ 하고 맛을 음미하는 것 같아 그녀는 얼굴에 열이 올랐다.

호기심이 솟았는지, 회가 동했는지 흰개미는 요한나의 허벅지 살을 더 벌리고 그대로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구멍의 위치가 좀 더 높아지자 흰개미가 바로 앞에서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또 변태 같은 짓을.’

요한나는 이를 갈며 어느새 혀 아래 가득 고인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흰개미가 살며시 입을 벌렸다.

하아.

미지근한 숨이다. 달아오른 속살에는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감각에 요한나의 엉덩이가 허공에서 뒤틀렸다. 도망가려는 줄 알았는지 흰개미가 그녀의 야들야들한 허벅지에 팔을 감고 단단히 고정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그곳에 파묻었다.

입술이 대음순을 문지르며 벌어지고 뻗어 나온 혀가 성기의 갈라진 부분을 위아래로 핥았다. 요한나는 다시 한번 침낭을 쥐어뜯었다.

흰개미의 혀가 살아 있는 동물처럼 구멍 근처에서 난장을 쳐 댔다. 그에게서 새는 교미 페로몬이 다른 때보다도 신경을 들쑤시고 자극했다.

빠끔히 열린 구멍에서 물 같은 애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엉덩이를 타고 흐르는 애액을 혓바닥의 널찍한 부분으로 싹싹 핥은 흰개미가 혀를 둥글게 말더니 그대로 구멍의 입구를 깔짝였다. 흡사 삽으로 즙을 파 대듯 혀로 쑤시며 애액을 삼킨다.

손가락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코가 파묻혀 있는 갈라진 성기 위, 살점에 숨겨진 자그마한 애액을 꾹 눌러 리듬감 있게 문질렀다.

“으음, 응…….”

요한나는 입술을 깨무는 것을 그만두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러니까 인간들이 그렇게 성기를 접붙여 대는 것이구나.

흰개미와만 교미한 것이 아닌데도, 이런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쾌감은 처음 느껴 본다. 꼭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듯했다.

흰개미와의 아슬아슬한 동행 상태도, 그가 여전히 불편하다는 사실도 머릿속에서 잊혔다. 그저 그의 혀와 손가락이 주는 쾌감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혀를 길게 내밀어 구멍을 덮듯이 쓸어 올린 흰개미가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괴롭히던 음핵에 관심을 두었다. 입술은 음핵으로, 손가락은 구멍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입술이 오물거렸다. 아래 짓눌린 음핵이 너무나도 가려웠다.

“흐으, 흣!”

요한나는 간지러운 감각에 턱을 치켜들었다. 흰개미가 손가락을 세워 구멍 근처를 살살 긁어냈다. 애액이 손톱에 긁혀 나가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곳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세워진다.

가빠지는 호흡, 숨결, 수염 없이 미끈한 턱이 비벼지는 감각과 뾰족한 혀가 두툼한 살을 쿡쿡 찔러 대는 감각, 심지어는 젖은 살에 문대는 입술의 주름까지도 선연하게 느껴졌다.

‘가려워, 가려워……!’

손가락이 깔짝거리는 구멍을 박박 긁고 싶었다. 아니, 긁고 싶은 게 아니다. 마구 누르고 압박하고 싶었다. 욕망만큼 허벅지 안쪽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때 그녀의 마음에 답하듯 굵직한 손가락이 안쪽을 파고들었다.

흐윽, 신음이 손바닥에 막혀 사라졌다. 헐떡이는 호흡이 손바닥과 손가락에 닿아 흩어졌다. 손바닥 안쪽은 이미 습기로 가득했다.

흰개미가 입술을 오물오물 열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음핵을 사이에 두고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음핵에 직접적인 자극이 없어도, 그 아슬아슬함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요한나는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음부가 그의 입에 가까워진다. 입술에 소음순이 짓눌렸다.

탁 트인 숲이 욕망을 부채질하고 해방한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강렬한 쾌감, 본능적인 욕망. 요한나가 쏟아 내는 격렬한 욕구를 흰개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힘이 들어가 아래가 움푹해진 그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붙잡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살에 파묻히는 바람에 음핵이 그 사이로 쏙 들어갔다. 그대로 빨아들이자 요한나의 눈이 커다랗게 트였다. 진공 상태가 될 정도로 강하게 흡입되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쾌감이 치달았다.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하악!”

제 소리에 제가 놀라 요한나는 다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한 치의 틈도 없게 만들었다. 새어 나오는 신음은 없었지만, 목 안쪽에서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흰개미가 다시 한번 음핵을 강하게 흡입함과 동시에 요한나의 허리가 활처럼 휘고 치골이 하늘로 치솟았다. 허벅지가 벌벌 떨렸다. 소리 없이 물이 마구 튀었다.

잠시 후, 요한나는 가슴을 씨근덕거렸다. 열기에 눅진해진 눈으로 흰개미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았다. 아름다운 흰 얼굴이 흠뻑 젖어 있었다. 제가 싸지른 액체를 덮어쓴 얼굴을 보자 쾌감에 잊혔던 수치심이 고개를 들었다.

흰개미가 손으로 얼굴을 훔치더니 킁킁 냄새를 맡고 맛을 보았다.

“맛, 있어. 좋, 아.”

“…….”

“요한나는, 좋아?”

요한나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수치스러운데도 흰개미를 타박하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직도 머리가 혼몽하고 풍이라도 걸린 듯 사지가 경련한다. 가슴이 달군 돌이라도 품은 양 뜨거웠다.

드르렁…….

요한나는 황급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나와 레놀드는 곤히 자고 있었고, 피터의 코 고는 소리는 여전히 요란했다.

순간적으로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던 요한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긴장이 풀린 팔다리가 침낭에 얌전히 놓였다. 몸이 무겁다.

간지러운 열기가 아랫배에서 시작하여 몸 곳곳에 열감을 퍼뜨린 듯했다. 기이한 충만감에 노곤해지면서도 못내 아쉬워 입술이 말랐다.

‘부족해.’

달뜬 눈을 본 흰개미가 그녀의 위로 기어 올라왔다. 곧추서다 못해 터질 것처럼 꺼떡거리는 괴물의 성기. 인간의 것보다 핏줄이 선명하게 올라온 그것을 요한나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흰개미가 성기의 끝을 그녀의 젖은 음부에 가져다 댔다. 찌걱. 부드러운 살끼리 맞대는 감각이 짜릿하다.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요한나는 가까스로 발을 들어 그의 배를 막았다.

“싫다고 했잖아.”

오줌 같은 것까지 싸 놓고 이러는 게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였다.

그것만은 안 된다.

꺾이지 않은 강한 어조에 흰개미는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신발을 벗기고 양말까지 벗겨 던지고는 혀를 내밀어 발목을 핥는다. 땀과 먼지투성이인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혀로 씻어 내던 놈이라 그런지 내내 신발에 감싸였던 발을 핥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자신이 다 질리는 기분이었으나, 말캉하고 까칠한 혀가 복사뼈 위를 핥자 간질간질한 기분이 재차 엄습했다. 흰개미가 입을 벌려 이빨로 복숭아뼈를 감싼 살갗을 물었다.

그 부분을 타고 허벅지까지 소름이 내달렸다. 흰개미는 그녀의 발목을 문지르며 그대로 옆으로 벌렸다. 음부가 다시 노출되었다.

흠칫.

저항하려는 그녀에게 흰개미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어둠 속에서 흡사 귀신처럼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흰색.

요한나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일순 넋을 놓았다가 한발 늦게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홍안을 인식했다. 빛이라곤 밤하늘의 달밖에 없어서일까. 그의 맑은 홍안이 다른 때보다도 어둡다.

“싸지는, 않, 아.”

특유의 단조로운 말투가 약간 떨려 나왔다.

“그러니, 안심해.”

흣,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신음처럼 들렸다. 흰개미의 불안정한 호흡이 귓전을 무자비하게 긁어내 요한나는 어깨를 떨었다. 라나와 레놀드가 정사를 치르며 뱉었던 가쁜 호흡보다도 더 귓가가 간지럽다.

입구에 걸쳐 있던 큼지막한 귀두가 녹진하게 풀어진 살을 짓누르며 들어왔다.

“으읏…….”

요한나는 무심코 침낭을 쥐어뜯다가 깨달았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살이 밀려 나가는 느낌이 선연했지만, 통증은 없었다. 오히려 흰개미의 핏줄 돋은 성기가 안쪽의 살을 쓸며 깊게 진입할수록 그곳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요한나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손으로 입을 막았다. 흰개미가 완전히 파고들자 허리가 긴장으로 굳었다.

흰개미가 안쪽에서 성기를 좌우로 흔들었다. 두툼한 선단이 안쪽을 쿡쿡 찔러 댔다. 요한나는 흰개미를 노려보았다가 재빨리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드르렁, 푸우, 드르렁, 푸우.

피터의 코골이는 여전히 요란했다.

“요한나, 안, 뜨거워…….”

흰개미가 꼬리가 긴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

“부드럽고, 하아, 자지, 녹을, 것, 같아. 계속, 이대로, 있고, 싶어, 아아.”

성기라고 말하랬잖아. 그런 의미를 담아 쏘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흰개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에 불길함을 느낀 그녀가 흠칫하자.

“기분, 좋아?”

축축한 손이 아랫배를 짚더니 꾸물꾸물 내려가 충혈된 음핵을 마구 문질렀다. 허리가 튀었다.

“안쪽이, 막, 움찔, 움찔…….”

눈앞이 하얘졌다. 그곳에 힘이 들어가 빠듯하게 안을 채운 흰개미의 것을 강하게 조였다. 흰개미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곧이어 말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장골이 볼기를 칠 정도로 깊이 삽입하고 물러난다. 살이 부딪치는 질펀한 소리가 적막한 밤의 숲을 어지럽혔다.

그 소리가 다른 사람을 깨울까 긴장한 요한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랫배는 간질거려 환장하겠는데, 이 꼴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움찔거리기만 했다.

흰개미가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요한나의 엉덩이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들어 올렸다.

푹!

뿌리까지 구멍에 파고들었다.

“헉.”

신음한 요한나가 이번에는 침낭이 아닌 흰개미의 팔뚝을 붙잡았다. 손톱이 피부를 파고드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놀렸다.

찌걱…….

이전과 비할 수 없는 압박감에 숨이 막힌다. 한 손으로는 흰개미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입을 막은 채 그의 삽입을 받아들였다.

푹, 푹.

그러기를 몇 차례, 어느 순간부터 흰개미가 박을 때마다 눈앞에서 별이 번쩍거렸다.

흐읏, 흣. 흰개미의 신음이 귀를 어지럽혔다. 그가 허리를 빼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요한나의 탄력적인 다리가 허공에서 난잡하게 흔들렸다.

요한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마구 신음을 터뜨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머리 한구석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흰개미가 안에다 강하게 박고 그대로 빼지 않은 채 성기를 흔들었다.

꾹, 귀두가 안쪽 깊은 곳에 마구 비벼지자 아까부터 쌓이고 쌓였던 신음이 발작적으로 터질 뻔했다.

이러다간 비명을 지를 것 같아서 급한 마음에 손가락을 씹었다. 아릿한 통증이 폭발하는 열기를 진정시켜 주었다.

흰개미가 그녀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고 대신 그의 손가락을 넣어 주었다. 요한나는 제 손을 씹을 때보다도 강하게 그의 손가락을 짓씹었다. 꽤 아플 텐데도 흰개미는 눈알이 터졌을 때처럼 여상했다.

미간에 잡힌 주름은 통증이 아닌 흥분 때문이었다. 도리어 그녀가 주저 없이 손을 씹자 큰 자극을 받은 듯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요한나가 눈을 홉떴다.

“야, 너……!”

흰개미가 다급히 성기를 쑥 빼내었다. 젖은 귀두가 모습을 드러내며 곧바로 끝에서 백탁액이 분수처럼 튀었다.

투둑, 툭.

허공에 비상했다가 제 몸에 떨어지는 체액을 요한나는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상한 말이지만,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흰개미의 더러운 체액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다. 꿈이 아니라면 그럴 리가…….

잠시 후, 성기를 닦아 낸 흰개미가 다시 삽입했다. 이번에는 쉽게 사출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차례 더 오줌 같은 애액을 뿜어낼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고서야 밖에다 사정하고는 풀어 헤쳐진 차림을 정리했다.

요한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고 흰개미가 제 옷까지 정돈해 주는 것을 보았다. 라나에게서 받은 인간의 옷은 등 뒤의 날개까지 가려 주어, 지금의 흰개미는 겉보기에는 제법 멀쩡한 인간 남자 같았다.

그게 이상하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데, 이상해.’

요한나는 흰개미의 부드러운 손놀림을 의식하다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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