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새로운 봄이 도래했다. 한 차례 큰 타격을 입고 일족의 정비에 들어간 석굴 개미 덕에 전투 없이 조용히 지나간 1년이었다.
평화의 시기에는 일족의 몸집을 불리는 게 당연한 일이건만, 그런 것치고 토굴 개미들의 규모는 1년 전과 변함이 없었다. 일시적이라고 여겼던 2공주 체제가 아직 유지되고 있는데 공주가 하나 더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간 우화한 일족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이었다.
석굴 개미 공주는 여전히 산란능력이 미천했고, 혼혈 공주 역시 변변찮았다. 전자는 모를까 후자에 대해서는 걱정이 덜했다.
혼혈 공주는 도주의 죄를 물어 흰개미의 감시하에 있다. 그녀의 산란능력이 우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개미들은 그래서 다가올 봄을 손꼽아 기다렸다.
“공주의 혼롓날에, 우리도, 참여한다.”
그 기대에 부응하여 검은 개미는 이번 신록의 계절에 공주들의 혼례를 선언했다. 간만의 축제에 환호성이 울렸다.
* * *
토굴은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들뜬 기운이 번져 나갔다. 석굴 개미에게 궤멸당할 뻔한 이후 두 번의 혼롓날을 그냥 흘려보내고 처음으로 갖는 혼례 행사였다. 이는 일족의 규모를 키울 뿐만 아니라 인근의 개미들에게도 토굴 개미 일족의 번성을 알리는 계기가 될 터였다.
그런 분위기 속 어느 날.
검은 개미는 자신의 토굴 방을 제 것처럼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오는 흰개미를 맞이했다. 혼롓날을 앞두고 예민해진 석굴 개미 공주, 이제는 불그스름한 머리로 붉은 공주라 불리는 그녀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다.
혼혈 공주의 토굴 방에만 틀어박혀 잠잠했던 흰개미가 무슨 일로 저를 찾아왔을까.
“할, 말이, 있나?”
호기심 어린 눈에 대고 흰개미는 무감정하게 말했다.
“요한나는, 혼례에 참여하지, 않는다.”
“…….”
“혼례를 치르는, 건, 네 공주, 뿐이야.”
검은 개미는 커다란 검은 눈을 찌푸렸다.
“하,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
“불가.”
이제 검은 개미는 혼혈 공주를 증오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선 감정의 밀도가 옅어졌다. 이제 그녀는 그에게 일족이라는 소중한 대상을 이루는 한 조각일 뿐이었다.
검은 개미는 기계적인 눈으로 흰개미에게 혼혈 공주의 ‘유용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위대한, 여왕이, 필요해. 하지만, 아직, 여왕의 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 혼례를 치르면, 다음 산란기에서야, 말로, 진정한, 여왕을, 얻을, 수, 있을 거야.”
2공주 체제라지만 말이 좋지, 붉은 공주도 혼혈 공주도 여왕이 될 수 없다는 게 검은 개미의 생각이었다.
붉은 공주는 미령하고 혼혈 공주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게다가 토굴을 버리고 도주했으니, 일족을 책임지는 여왕의 위치에는 부적격했다.
다행히 그녀의 알만은 우수하다. 이번 혼롓날에 다양한 씨물을 받아 알을 낳으면 드디어 여왕이 될 공주의 싹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검은 개미는 아직까지 공주가 될 개체가 나타나지 않은 건 혼혈 공주가 일족의 수개미들과만 교미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군락의 준수한 씨물과 결합하면 우수한 공주가 탄생할 거다.
자신보다 머리가 좋은 흰개미라면 이런 이치를 더 잘 알 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즈음에는 더더욱 속을 알 수 없어지는 흰개미의 창백한 얼굴을 훑어보던 검은 개미는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흰개미. 일족을, 위하는, 것만, 생각해라.”
“…….”
“다른, 건, 중요, 하지, 않아. 우리가, 토굴의, 개미인 이상.”
일족을 위한다. 평범한 일꾼개미들을 물론이거니와 장군 개미들에게도 당연한 말이었다. 자신보다 공동체를 위하는 개미 일족에게 그것만큼 선명한 본능과 진리는 없었다.
그런데 그 말에 무슨 어긋남이라도 발견한 건지, 흰개미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그 이질적인 표정이 마음에 걸린 검은 개미가 말을 붙이려고 할 때, 흰개미는 가타부타 말없이 토굴 방을 빠져나갔다.
어둑어둑한 토굴 방에 홀로 남은 검은 개미는 찝찝한 표정으로 흰개미가 사라진 통로를 바라보았다.
* * *
그날은 공주의 혼롓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내일이 지나면 더는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므로, 혼롓날에 참여하는 수개미들은 그 전날에 동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가졌다.
장군 개미들은 한데 모여 음식과 술을 나누었다. 잡식이기는 하나 육류를 선호하는 성향이 많은 탓에 나무 접시 안에는 핏물이 흐르는 고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아직 그 살이 여물지 않아 부드러운 어린 사슴의 고기, 야들야들한 토끼의 뒷다리 고기, 먹기 좋게 불에 그을린 부드러운 누의 내장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그 사이에서 흰개미는 붉은 고기들에는 손도 대지 않고 밀레타 일족이 우려내는 달콤한 액체만 들이켜고 있었다.
밀레타 일족은 다양한 충인과 공생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적인 충인으로, 나무의 수액을 모아 음료로 빚어내는 데 탁월한 종족이었다.
특히 사탕단풍나무의 수액이 인기가 많다. 밀레타 일족은 인간들처럼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충인 사회에서 다른 충인들의 보호를 받고 수액을 내주고 있었다.
고기를 뜯느라 왁자지껄한 거뭇한 개미들 사이에서 흰개미는 주위와 어울리지 않게 희게 빛났다.
그는 뚱한 표정이었다. 검은 개미가 ‘일족을 위해서’ 운운하며 그를 이 자리로 끌어내지 않았다면 아직도 요한나와 함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있든 없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을 테지만…….
하루 종일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꾸벅꾸벅 졸아 대는 그녀에게 신경이 미치자 귓전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동족들의 소리가 귀찮은 소음으로 느껴졌다.
이마에 미미하게 그어진 주름을 누군가 살피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흰개미가 고개를 들자 토끼 뒷다리를 입에 넣고 질겅이는 검은 개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씨익 웃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빽빽하게 돋은 작고 뾰족한 이빨이 보였다. 흰개미는 수액을 들이켜며 그런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주변은 내일 있을 혼인 비행을 주제로 얘기가 한창이었다.
“나는, 이번, 비행이, 마지막, 이겠군.”
뒷머리를 덮은 머리카락이 잿빛으로 센 나이 많은 장군 개미가 웃으며 말했다. 수개미들의 씨물을 가득 흡수하는 공주의 혼롓날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수개미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강한 후대를 이어야 한다는 공통의 목적 아래 공주의 혼례에 참여한다는 건 크나큰 영광이지만, 만 하루 동안의 비행으로 기력이 쇠한 수개미는 바삭 말라붙은 모양새로 생을 마감한다.
그들의 시체는 땅에 녹아들어 검은 산맥의 일부가 되고, 그런 검은 산맥의 정기를 받으며 충인 사회는 돌아간다. 자연의 영속성이었다.
늙은 장군 개미는 예견된 자신의 최후를 언급하면서도 웃는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긴장이 아니라 기대감이다.
“공주는, 강해. 비록, 우리를, 버리고, 도망, 가기는, 했지만, 이번, 혼례를, 통해, 일족을, 위한, 전사와, 건강한, 공주를, 낳아, 주겠지. 붉은, 공주에게도, 기대가, 컸지만, 어쩔, 수, 없, 으니.”
늙은 장군 개미는 호기롭게 누의 내장을 입 안에 쑤셔 넣으며 히죽거렸다. 그는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못마땅해지는 흰개미의 얼굴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아쉬, 웠지. 석굴, 개미, 놈들만, 아니었, 어도, 진작, 공주에게, 씨물을, 잔뜩, 뿌, 렸을, 거야. 이번에야, 말로, 내 성기를, 그 몸에, 콱!”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입담도 걸은 늙은 장군 개미는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위로 추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 저질스러운 몸짓에 무슨 상상을 한 건지 막 장군이 된 젊은 수개미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탕!
개미들의 시선이 모였다.
빛바랜 나무 컵을 강하게 내리친 흰개미가 일어섰다. 내려다보는 흰개미의 눈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하고 일견 오만했지만, 그의 시선을 받은 늙은 장군 개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흰개미?”
왜 그러는 거냐며 젊은 장군 개미가 조심스럽게 묻자 흰개미는 대꾸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네, 말이, 맞아. 검은, 개미.”
호명된 검은 개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흰개미의 붉은 입술이 아찔한 호선을 그렸다. 인간들의 미추로 따지면 불길하도록 아름다운 미소였다.
“우리에겐, 여왕이, 필요, 하다.”
그리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을 돌렸다. 언뜻 여상해 보이는 낯 아래, 살을 엘 것처럼 차가운 겨울의 삭풍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따뜻한 봄철과는 어울리지 않는 폭력적인 기분이 새삼스러운 흰개미는 토굴의 입구에 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풍성한 구름 사이 찬란한 태양의 손길이 그의 뺨을 매만졌다. 섬세한 눈매가 가늘어진다.
‘밖에 나오면 요한나도 잘 수 있을까? 틀림없이, 좋아할 거야.’
입꼬리가 즐거운 듯이 올라간다. 흰개미는 날개를 펼쳤다. 잘 조각된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몸이 날아올랐다.
한편, 장군 개미들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흰개미의 빈자리를 힐끗했다.
“흰개미, 어딜, 간, 거지?”
“몰라. 쳇, 요즘, 그가, 뭘, 하는, 지, 알, 수가, 없어. 늘, 공주에게, 붙어, 있기만, 하고.”
턱이 뾰족한 장군 개미가 투덜거리더니 검은 개미를 불렀다. 흰개미가 빠져나간 출구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 흰, 개미는, 언제, 까지, 공주를, 감시? 그는, 중요한, 할, 일, 많음. 고작, 공주의, 감시, 따위에…….”
검은 개미는 구시렁대는 그의 불만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일족 중에는 흰개미를 경외시하는 놈들이 많았고, 심한 경우는 신격화하기까지 했다.
일반 일꾼개미도 아니고 장군의 위치에서 흰개미를 숭상하는 게 꼴사납지도 않은가.
검은 개미의 심술궂은 얼굴을 보지 못한 눈치 없는 장군 개미는 뭐라고 계속 투덜거렸다. 대충 둘을 떼어 놔야 한다느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흰개미가 할 필요는 없다느니, 흰개미의 눈을 뭉갠 공주는 공주가 아니라느니 등등 현재에 강한 불만을 표하는 말이었다.
“그럴, 리야, 없겠, 지만, 흰, 개미가 공주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꼭…….”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겠는지 그는 쪼글쪼글한 미간을 한껏 좁혔다.
“예전, 검은, 개미, 같, 아서.”
치릇. 누군가 날개를 떨었다. 그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든 장군 개미는 이글거리는 검은 개미의 사나운 눈초리에 움찔했다. 놀라서 일어섰던 날개가 견갑골에 찰싹 달라붙었다.
검은 개미. 흰개미와 더불어 일족 중에 가장 강하긴 하나 활화산처럼 다혈질인 그의 성질에 관해선 모르는 이가 없었다. 나이 먹은 지금은 좀 차분해진 편이지만, 날개가 갓 돋았던 옛날엔 그의 두꺼운 턱에 살점이 뜯기지 않았던 개미가 없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개미의 시선은 누그러지기는커녕 점점 더 기세를 더했다. 이거 큰일이다. 긴장한 뾰족한 턱의 근육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수 있게 부풀어 올랐다. 고조되는 긴장감에 식탁 가득한 고기의 노린내가 한층 짙어졌다.
불안정해진 공기를 흩트린 것은 다부진 팔다리에 키가 작달막한 장군 개미였다. 그가 나무 접시처럼 널찍한 손을 크게 휘둘러 보이지 않는 긴장감의 끈을 헤집었다.
“오늘, 같은 날에, 이런, 얘기는, 관둬! 오늘은, 마시고, 먹는, 날이야. 내일, 내가, 공주의, 몸에 박은, 채, 죽어, 버린다면, 나는, 이, 사슴, 고기를, 먹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원망할, 게, 틀림, 없으, 니!”
그러면서 다소 식은 사슴 고기를 덥석 물어 게걸스럽게 씹었다. 두꺼운 팔은 장군 개미 중에서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제일 넉살이 좋다. 그의 너스레에 불안했던 분위기가 미지근한 호숫물처럼 식어 내렸다.
곧이어 두꺼운 팔의 화제 돌리기에 편승한 몇몇 장군 개미들이 입 안 가득 음식을 욱여넣고 껄껄대자 장내는 곧 흥겨움을 되찾았다.
내일 공주의 품에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리라.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만찬을 즐기는 개미들은 더는 흰개미의 부재에 의문을 갖지 않고 음식을 비우는 데 주력했다.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웠던 흰개미가 돌아온 건 식탁 위 수북했던 고기 대신 뼈다귀만 남은 무렵이었다.
“키야아아아악!”
차르릇!
심령을 건드리는 목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진 개미들은 일제히 날개를 펼쳤다. 그들은 개별 개체이나, 페로몬에 반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그 점이 그들을 다른 어떤 충인 집단보다 끈끈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육신의 심지가 꼿꼿하게 서는 이 느낌.
강력한 여왕 페로몬.
“이 무례한 놈, 찢어 죽일 놈, 내 개미들이 널 찢어 죽일 것이야!”
째지는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귀가 아플 만큼 카랑카랑한 외침에 흰개미는 귀찮은 얼굴을 했다.
무슨 짓을 했는지 험한 욕을 줄기차게 토하던 여왕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수그러들었다. 흰개미에게 붙잡힌 팔뚝이 짧게 경련했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정적이 찾아들었지만 장군 개미들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잘게 새어 나오는 전투 페로몬에 팽팽한 긴장감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적 군락의 한복판에 떨어진 것처럼 흥분되면서도 아득한 이 감각, 매캐한 이 느낌.
“석굴 개미 여왕?”
누군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좌중을 경악이 휩쓸었다.
난공불락인 석굴 개미의 여왕이 어째서 흰개미에게 붙잡혀 있는 거지?
흰개미의 손에 형편없이 포박당한 여왕이 눈꼬리를 매섭게 치떴다. 잉걸불처럼 검붉은 머리카락과 다른 여왕에 비해서도 눈에 띄게 근육질인 몸은 틀림없이 석굴 개미의 특징이었다.
생식기를 제외하고 거의 걸친 게 없는 그녀의 농익은 육신은 그 강인함에 맞지 않게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격렬한 전투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은 흰개미에게도 있었다.
손등과 종아리, 모피로 감싸지 못한 목덜미가 피로 범벅이었다.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흐르는 양이 적지 않아 상당히 중한 상처였다.
원래도 하얗던 흰개미는 핏기가 없이 창백했지만, 표정과 자세만큼은 평소처럼 흐트러짐이 없어 줄줄 흐르는 피가 아니라면 부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탈피 이후 상처 입은 적이 손에 꼽는 흰개미의 위중한 상태는 전투가 격렬했음을 시사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의문을 떠올린 토굴 개미들의 시선이 흰개미에게 쏠렸다. 흰개미는 무심하게 툭 뱉었다.
“석굴 개미 여왕, 약탈, 성공했다.”
뿌드득.
석굴 개미 여왕이 이를 갈았다. 그 소리에 장군 개미들이 정신을 차렸다. 검은 개미마저도 말을 잃었다가, 수개미를 향해 눈짓했다.
“토굴, 밖, 확인.”
날개를 펼쳐 토굴 방을 빠져나간 수개미는 오래지 않아 달아오른 얼굴로 돌아와 흰개미를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는 검은 개미에게 보고했다.
“토굴, 밖, 석굴, 개미, 시체, 다수! 살아, 있는, 석굴, 개미, 없음!”
검은 개미의 표정이 변했다. 석굴 개미는 호전적인 특성이 두드러지는 집단이었다. 흰개미가 무슨 마법을 부렸든 군락의 중심인 여왕이 납치당했는데 가만히 두고 볼 놈들이 아니다.
여왕을 따라붙은 석굴 개미들이 시체로 발견됐다는 것은, 흰개미가 석굴에 침입하여 여왕을 약탈해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은 쉽지만, 여왕에 대한 개미들의 집착을 생각해 보면 일개 장군 개미가 할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니다.
석굴 개미 여왕을 토굴의 여왕으로 삼을 수 있다면 석굴 개미는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자멸할 것이었다. 바라 마지않은 일이나 이루려면 일족의 명운을 걸어야 했는데, 흰개미는 고작 상처 몇 개를 달고 성공시킨 것이다.
다섯 명의 석굴 개미 공주 중 하나를 빼 오는 것만도 힘들었건만.
검은 개미의 눈이 어둡게 타올랐다. 질투, 어쩔 수 없는 감탄, 분노가 어지럽게 섞여 들었다.
반면 다른 장군 개미들은 동경과 감탄이 어린 눈으로 흰개미를 응시했다.
“흰, 개미, 무적.”
뾰족한 턱이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개미와 함께 다른 어떤 개미 일족의 장군보다 강할 거라고 추측하긴 했으나 지금 이 순간 모두가 확신했다. 검은 개미도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이며 그를 이길 수 있는 충인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여왕에게 어울리는 왕이 있다면 그건 바로 흰개미다.
하얀 머리칼에 붉은 눈을 한, 돌연변이 흰개미뿐이다!
넘실거리는 경탄의 시선이 쏠렸다. 하나 정작 흰개미는 귀찮은 일이라도 해치운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여왕.”
“…….”
“이제, 산란은, 여왕, 에게서. 공주의, 혼롓날에, 석굴, 개미, 여왕, 참여.”
“누가 네놈들 마음대로 될 줄 아느냐! 나는 석굴의 지배자다. 이런 지저분한 토굴 따위!”
날붙이끼리 부딪치는 양 까랑까랑하게 소리치던 석굴 개미 여왕은 흰개미가 시선을 두자 입을 꾹 다물었다. 분노로 씨근덕거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짙은 색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석굴, 개미, 여왕은, 좋은, 알을, 낳을, 거야.”
흰개미가 말했다. 상황에 맞지 않게 평온한 말이었다.
장군 개미들이 검은 개미의 눈치를 보았다. 흰개미의 돌발 행동은 놀라웠다. 아무리 장군 개미라도 상의 없이 위험한 행동을 한다면 처벌받겠지만, 상대는 흰개미다.
그가 위험한 짓을 벌인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는가. 토굴을 위한 게 아니겠는가. 일족을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는 사실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실제로 뾰족한 턱은 거의 흰개미의 발아래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헉헉거렸다. 그러나 대놓고 흰개미를 찬양하지 못하는 것은 검은 개미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였다.
“왜?”
침묵하던 검은 개미가 묵직한 물음을 토했다.
“이렇게, 할, 줄, 알면서, 그동안은, 왜?”
“…….”
흰개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중요한가?”
“…….”
“강력한, 여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
“…….”
“너 역시, 내게, 요구했다. 석굴, 개미, 여왕.”
“그리고 넌, 거부, 했지. 불가능, 하다고, 했잖아.”
흰개미는 눈을 깜박였다.
“오늘은, 가능할, 것, 같았어.”
검은 개미의 얼굴이 와락 찌그러졌다. 복장이 터질 것 같다는 마음이 얼굴 가득 드러났다.
흰개미는 무표정하게 바르작거리는 석굴 개미 여왕을 툭툭 치며 단속하고, 검은 개미는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두꺼운 팔이 불편한 기류를 자연스럽게 소강시켰다.
“목숨줄 한번 긴 놈들 같으니. 여왕과 공주를 다 죽여 없앴는데도 꾸역꾸역 살아남았느냐. 우리의 공주를 앗아 간 것도 모자라…….”
결박된 팔다리의 통증을 참느라 붉어진 눈으로 석굴 개미 여왕이 이를 갈았다. 그 모습을 본 나이 많은 장군 개미들의 얼굴에 감회가 스쳤다.
석굴 개미의 습격에 죽어 나간 여왕과 공주의 처참한 최후는 아직도 그들의 가슴에 낙인처럼 찍혀 있다.
그때 맹세했다.
“석굴, 개미에게, 복수를.”
“석굴 개미 여왕을, 납치한다.”
죽은 여왕과 공주를 둘러싸고 뱉었던 말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그러자 숙적인 석굴 개미에게서 여왕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흰개미가 석굴 개미 여왕을 검은 개미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석굴 개미 여왕을 품에 안게 된 검은 개미는 반항하는 그녀의 팔다리를 붙잡고 흰개미를 바라보았다. 의아한 시선이었다.
새로운 여왕과 공주를 일족의 페로몬으로 세탁하는 영광스러운 작업은 약탈자에게 주어지는 보상. 거기다가 보통의 공주도 아니고 역대 가장 강한 암컷이라고 일컬어지는 석굴 개미 여왕이다.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에 흰개미는 피로감을 드리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그렇다면 어째서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여왕의 약탈을 감행한 거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검은 개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빤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흰개미는 몸을 돌렸다. 언행이 태연하여 보기보다 멀쩡한가 싶었는데 내딛는 걸음이 살짝 비틀거렸다. 그에게도 이번 일은 만만치 않았던 거다.
“아파? 아프지! 약, 약을, 갖다, 주마!”
뾰족한 턱이 그런 흰개미의 뒤를 따라붙었다. 다른 개미들이 얼른 쉬라고 한마디씩 덧붙였다. 반응하는 둥 마는 둥 하는 흰개미가 토굴 방을 막 빠져나가려고 할 때, 신중한 늙은 개미가 검은 개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내일, 있을, 공주의, 혼롓날은, 어쩌려고, 하지? 석굴, 개미, 여왕을, 토굴의, 여왕으로, 삼는다면, 다른, 여왕은, 있어선, 안, 돼. 붉은, 공주는, 모를까. 한때, 여왕, 이었던, 혼혈, 공주는.”
새로운 여왕이 탄생하면 기존의 여왕은 질서를 위해 토굴을 떠나는 게 일반적이었다. 여왕인 적 없는 공주는 상관없으나 ‘여왕’의 페로몬이 인식된 상태인 공주는 문제가 있다. 여왕이 둘이면 페로몬이 교란되어 전투가 벌어졌을 때 큰 혼란이 야기되니까.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였다.
“더는, 이곳에, 둘, 수, 없겠지. 일족의, 영역, 밖으로, 추방해야, 해. 아니면, 죽여, 처리, 하든가. 그 시기는, 언제가, 좋겠나?”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던 장군 개미는 흰개미의 의견을 묻고자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했다. 빤히 쳐다보는 유리알 같은 붉은 눈동자가 검붉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으나 왜인지 온몸에 소름이 돋은 장군 개미가 식은땀을 흘리며 그를 응시했다. 흰개미는 핏기가 없어 한층 더 붉고 날카롭게 보이는 입꼬리를 달싹거렸다.
“새로운, 여왕이, 있으니.”
“…….”
“공주는, 이제, 됐어.”
“…….”
“신경, 꺼.”
아무도 건드리지 마.
그의 눈길을 받은 개미들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혼혈 공주 때문에 석굴 개미 여왕을 약탈했구나.
하지만 어째서?
개미들은 무정한 흰개미가 뭔가에 집착한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그가 혼혈 공주를 향한 관심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금처럼 그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신경에 거슬렸던 걸까.
흰개미보다 오래 살았고, 그런 만큼 권위를 가진 늙은 장군 개미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흰, 개미…….”
“나는, 두 번, 말, 하지, 않아.”
흰개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격양되지도 않았고 목소리도 높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등골이 써늘하다.
하나뿐인 눈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좌중의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어디선가 거친 숨소리가 흘렀다.
흰개미의 눈길을 정면에서 받는 늙은 개미였다. 흰개미는 그저 빤히 바라보기만 했으나 늙은 개미는 숨 쉬기가 버거운지 명백히 괴로운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돌연 한 손에 잡힌 것처럼 크게 뜬 눈이 흰개미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손에 머리통이 터지는 상상이라도 했을까?
까만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대로 숨이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흰개미가 고개를 돌렸다.
털썩.
늙은 개미는 장군으로서의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주저앉았다. 얼어붙은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흰개미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유유히 토굴 방을 나갔다.
그 후 혼혈 공주가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 * *
밖에서 무슨 난리가 나든 말든, 요한나의 토굴 방은 바깥 토굴과 유리된 공간처럼 고요하고 적막했다.
요한나는 마른 풀잎 위에 엎드려 누워 있었다. 코로 쿰쿰한 냄새가 올라왔다. 묵은 풀잎에서 나는 냄새였다. 자리를 비켜야 풀잎도 바꿀 텐데 오래도록 누워 있으니 그럴 새도 없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요한나는 굳이 시간을 헤아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어디서 뭘 하고 있든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지고 만 것이다.
궁금해하기나 할까? 생기 없는 눈 저편에 희미한 의문이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체감상 아주 오래 이러고 있었던 것 같다. 살기 위해 사냥하기 바빴던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 시간이 되면 흰개미가 귀신같이 찾아와 위장을 채워 주니까.
처음 몇 달은 죽은 것처럼 늘어져만 있었다. 바렌타에게 버림받은 이후, 기능을 상실한 뇌는 어떠한 생각도 떠올리기를 거부했다.
그러기를 며칠, 몇 달, 그녀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상념이 머릿속 갈라진 틈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요한나는 엎드린 채 어깨를 움찔거렸다. 수월히 움직인다. 분명 화살에 맞았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처 부위는 흉터만 남고 멀쩡했다. 그 과정은 기억이 흐릿했다.
제대로 ‘생각’을 하게 된 후에도 일어나 움직이는 시간보다 게으름을 피우며 누워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러는 동안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모든 일의 시초인 빌어먹을 아버지가 1년의 대부분 사냥을 나가 오두막을 비운 탓에 혼자 있었던 그 시절. 무엇이 외로움이고 무엇이 고독감인지도 몰랐던, 무거운 물처럼 고여 있던 그 생활. 인간이고, 괴물이고 하는 것보다 오늘 하루 배부를 수 있게 짐승을 사냥하는 데만 신경 썼던 그때. 고독과 외로움은 발밑에 고인 그림자였다.
지금과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다음 끼니는 뭐로 때울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던 것이려나…….
‘맞아. 원래의 나는 그랬었지.’
시야가 편협하고 무지했지만 적어도 슬프고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난 정말 죽으려고 했던 건가.’
절벽에서 떨어지던 그 순간을 떠올리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잃었던 듯했다, 그때는.
요한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다시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마른 입술 사이에서 흥얼거리는 가락이 새어 나왔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검은 산맥의 사냥꾼.
그 어떤 위험한 맹수도, 성질 더러운 마물도 상대가 되지 못하네.
사냥하지 못하면 죽음뿐.
결코 쉽게 죽지 않는다네.
꺾이지 않는다네.
눈앞엔 고아한 산등성이와 골짜기.
사나운 짐승아, 목을 쳐들어라.
방심한 네 긴 목에 사냥꾼의 활이 꽂히리라.
사냥꾼들에게서 구전으로 전해진 노랫말이 마른 혀 때문에 뭉개졌다. 그래도 요한나는 언젠가, 빌어먹을 아버지와 노래를 부르며 사냥감을 해체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움직인 지 한참 되어 그대로 굳어서 화석이 될 것처럼 딱딱했던 입꼬리가 빙그레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노랫말을 곱씹을수록 삶을 향한 열망이 솟구쳤다. 사냥꾼으로서 괴물 따위에게 굴복해 생을 마감할 수는 없잖은가.
마을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고 사랑했던 이에게 버림받았을지언정 자신은 검은 산맥의 사냥꾼 요한나였다. 결코 이런 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원래의 나로 돌아가자.
이 세상에 혼자여도 이상하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의 자신으로.
* * *
축 처진 눈꼬리. 바닥에 고정된 시선. 간간이 새는 한숨은 시름이 깊었다. 요한나는 찌푸린 얼굴로 아까부터 한숨을 푹푹 쉬어 대는 일개미를 노려보았다.
“아까부터 재수 없게 무슨 짓이야?”
자신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고개를 떨군 채 또 한 차례 한숨을 쉬는 일개미의 한데 모은 무릎을 걷어찼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일개미가 팔짱을 낀 요한나를 보고 눈을 끔벅였다.
“공주?”
“죽상인 얼굴 할 거면 여기 있지 말고 꺼져. 안 그래도 심란한데 속 터지게 하지 말고.”
요한나의 신랄한 말에 일개미는 울상을 지었다. 며칠 전부터 자리보전하던 것을 그만두고 운동을 시작한 그녀는 예전보다 확실히 주변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전이었으면 일개미가 앞에서 용변을 본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을 터였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공주! 잘못! 늦었, 어!”
“무슨 소리야?”
바락 소리치는 일개미를 요한나는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세트처럼 함께 다니던 이개미와 삼개미가 보이지 않는다.
“네 짝꿍들은 어디 갔어?”
“일, 하러.”
“날 돌보는 게 너희들 일 아니었어?”
의아한 시선에 일개미는 입술을 꾹 씹었다. 원망 어린 눈길을 받은 요한나가 슬쩍 인상을 썼다. 이게 미쳤나. 슬그머니 올라가는 장딴지가 딴딴했다. 일개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토굴, 넓히려는, 일, 맡, 는, 것.”
“토굴을 왜 넓혀?”
“여왕이, 알을, 뱄, 으니까.”
일개미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시무룩한 얼굴로 훌쩍였다. 반면 요한나의 눈은 번쩍 뜨였다. 알을 뱄다고?
“석굴 개미 여왕이 페로몬 교체에 성공했어?”
일개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한나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일꾼개미로부터 석굴 개미 여왕 얘기를 들은 뒤로 내내 기대하던 소식이다.
타 군락의 암컷을 데려와 공주로 삼는 것은 빈번하게 이뤄지는 것과는 별개로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약탈도 어렵지만, 군락의 페로몬을 교체하는 것도 만만하지 않은 작업인 탓이다.
석굴 개미 공주가 여기서 변변찮은 알집을 낳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공주가 될 정도면 어느 군락에서도 강하고 튼튼한 암컷일 텐데, 산란능력의 결함이라니. 토굴 개미의 페로몬이 제대로 들지 않은 거다.
석굴 개미 공주와 달리 석굴 개미 여왕은 단번에 성공했다. 과연 여왕이라고 해야 하나.
‘곧 석굴 개미 여왕이 정식으로 토굴의 여왕이 되겠군.’
마음속 깊이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더는 알을 낳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번에야말로 검은 개미는 제게 관심을 끊을 것이다.
‘드디어 이곳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걸까.’
묘한 기분이다. 바렌타를 보기 위해,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그때는 당장 탈출하지 않으면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절박했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나 자유롭지 않은 느낌이 확실히 답답하긴 해서, 이 생활도 끝이라는 생각에 후련함이 밀려왔다.
“흑, 안, 돼. 석굴, 개미, 여왕이, 알을, 낳으면…….”
“좋은 소식인데 왜 질질 짜는 거야?”
요한나가 힐끗 내려다보며 말하자 웅크려 있던 일개미가 고개를 쳐들었다.
“공주, 가, 쫓겨, 나니까!”
큰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마치 어벙한 어린아이를 울린 듯한 기분에 당황스러워진 요한나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일족에게, 추방된, 개미는, 힘, 들어. 공주, 힘들, 거야. 주, 주, 주, 죽을 수도 있다고!”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토굴에서만 지내 왔던 일개미였다. 인간이 아닌 데다가 꼴도 보기 싫은 이 괴물 집단의 일원이기는 하나 자신을 걱정하는 그 모습이 그녀의 입에서 나쁜 소리를 틀어막았다.
함께 지낸 시간이 헛것은 아니어서, 몇 년 동안 자신의 수발을 들며 빨빨거린 일개미의 우는 얼굴이 썩 가련하게 느껴졌다.
“정이라도 들었나 보네.”
요한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훌쩍대는 일개미의 얼굴을 한 손으로 크게 쓸어내렸다.
“야, 일개미.”
일개미가 코를 들이마시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래 봬도 밖에서는 너희 같은 마물들을 사냥했던 사냥꾼이거든. 제발 날 쫓아내 달라고 사정하고 싶은 심정인데 자꾸 그렇게 초 칠래?”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눈을 끔벅이는 일개미의 축축하고 만질만질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이 흐름은 절대로 나쁘지 않단 말이야. 네가 방해하지만 않으면. 알겠어? 이 추세대로 흘러가기만 하면…….”
그 순간 입구로 흰개미가 들어왔다. 아, 저놈이 있었지. 요한나의 희망찬 얼굴이 팍 식어 심드렁해졌다.
이 어두운 토굴 속에서도 미미한 광채를 두른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요한나와 일개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일개미에게 눈짓했다.
“나가 봐.”
주춤거리며 눈물을 훔친 일개미가 쭈뼛쭈뼛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요한나는 입구 바깥에 한 발을 걸친 채 이쪽을 흘끗거리는 그를 보고 눈을 부라렸다.
“엿보지 말고 가.”
검은 눈을 희번덕이며 으름장을 놓자 히끅 놀라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딱, 입 속으로 혀를 찬 요한나는 흰개미는 쳐다보지도 않고 풀잎 더미에 등을 돌려 누웠다.
일개미가 바쁘게 새로 갈아 준 풀잎 더미에서는 향긋하면서도 씁쓰레한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꽃향기보다 익숙하고 편안한 냄새를 킁킁대다 뒤쪽에 신경이 미쳐 눈을 감았다.
몸을 움직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돌아오냐.
배어 나왔던 땀이 마르는 게 느껴졌다. 퍽 불쾌했다.
일개미의 말을 듣고 기뻤던 마음이 흰개미를 보는 순간 시궁창에 박혔다. 일족의 번영밖에 모르는 놈이니 알은 많을수록 좋다고 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는 도망가다가 저놈에게 발목이 잡혀 죽을 때까지 알을 낳는 꿈을 꾸었다. 일어났을 땐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도 어쩐 일인지 어느 순간부터 산란하는 일은 없어졌다. 알집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흰개미는 교미하다가도 씨물을 터뜨릴 즈음에 바깥에다가 배출했는데, 알집을 갖는 걸 지상 최후의 과제쯤으로 생각하는 저놈이 왜 저러나 싶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했지.’
일개미의 말을 곱씹다가 덜컥 두려워졌다. 이제 건강해졌다고 다시 알을 배게 하려나? 알집이 통로를 짓누르며 미끄덩하게 빠져나가는 감각이 떠오르자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때 종아리에 차가운 손길이 닿았다. 기겁한 요한나가 곧바로 눈을 떴다. 알집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뭐야!”
“밥, 시간.”
요한나는 종아리에 손을 올려 둔 채 짤막하게 말하는 그를 노려보았다. 슬슬 허기가 지기는 하는데 이 마음으로는 그와 입술을 비벼 대기 싫었다.
그것 말고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버린 골치 아픈 몸뚱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저놈 때문이지 않은가.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건 아니다. 마을에서 느꼈다시피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것뿐이다.
일개미가 고기를 꿍쳐 둔 것 같은데 그거라도 갖다 달라고 할까?
요한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말았다.
‘들어줄 리 없지.’
정신이 없을 때는 몰라도 두 눈 뜨고 얌전히 입술을 뭉갤 생각은 없었던 때, 정상적인 음식을 갖고 와 달라 항의했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흰개미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배가 터질 때까지 입술을 비벼 댔다.
그것뿐인가. 그 이상의 일을 기억해 낸 요한나는 얼굴을 구겼다. 흰개미를 보자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아 있다. 보석 같은 홍안과 불그스름한 입술이 아니라면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귀신 같은 꼴이다.
요한나는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머뭇거렸다. 차라리 예전처럼 강제로 먹일 것이지 요즘엔 저렇게 가만히 있다. 그렇다고 무시하면 심통이 난 것처럼 얼굴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으니, 대체 왜 저러는지 복장이 터진다. 이젠 하다 하다 이런 식으로 괴롭히려는 건가.
‘결국 여기 있는 동안 눈치 봐야 하는 건 나라는 거지.’
속으로 이를 갈며 요한나는 몸을 완전히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싫은 일을 해치우려는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고 냅다 그의 입에 입술을 뭉갰다.
곧 요한나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휘어졌다. 이쯤 되면 흰개미가 입을 벌리고 그것을 먹여야 할 텐데 잠잠한 게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뭐 하는 거야?’
그런 행위가 아니라면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다. 눈매를 사납게 찡그리는 것으로 신경질을 부린 요한나가 입술을 떼고 물러서려는 그때, 흰개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끌어당겼다. 떼어졌던 입술이 언제 거리를 벌렸냐는 양 찰싹 달라붙었다.
혀가 입술 사이를 툭툭 치자 요한나는 체념하고 순순히 입을 벌렸다. 대충 배만 채워지면 끝날 행위다. 수없이 반복된 일인데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스스로가 새삼스럽기도 했다.
흰개미의 까칠한 혀가 입술을 타 넘고 들어왔다. 요한나는 혀를 바닥에 늘어놓은 채 가만히 있었다. 이 행위에서 그녀가 해야 할 건 없었다.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 그러나 흰개미의 혀끝이 늘어진 그녀의 혀 위에 미끄러지자 시큰둥하던 그녀의 표정이 변모했다.
‘뭐야?’
요즘 따라 껄끄럽게 군다 했더니 이상한 방식으로 사람을 괴롭힌다.
울컥 짜증이 솟은 요한나가 흰개미의 가슴을 밀어 냈다. 그러나 흰개미는 뒤통수를 단단히 붙들고 입술을 강하게 붙였다. 고개까지 꺾는 움직임에 그녀는 경악했다.
‘이 자식이 왜 이래?’
흰개미가 은어처럼 팔딱대는 그녀의 혀를 감아올렸다. 부드러운 그녀의 혀에 비해 까칠한 흰개미의 혀는 찌릿한 통증을 유발했다. 그 통증을 성적인 자극으로 받아들인 건지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정말 싫다. 진저리를 치며 뒤로 빠지는 요한나를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흰개미가 그녀의 혀뿌리를 감아 그대로 빨아올렸다.
“읍, 흡!”
흰개미가 헐떡이며 그녀의 혀를 뽑아 버릴 것처럼 흡입했다. 타액이 그의 입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흐윽!
목구멍으로 신음을 올린 요한나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가슴을 밀어 대던 손의 움직임을 바꾸어 흰개미의 어깨를 붙잡아 힘을 주었다. 사과도 우그러뜨리던 악력이었으나 흰개미의 어깨는 돌처럼 단단해서 손가락으로 피부를 꾹 누르는 게 고작이었다.
흰개미는 반쯤 뜬 눈으로 요한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맞붙인 채 반대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그러자 입술이 틈 하나 없이 밀착되었다.
‘이러면 꼭, 입맞춤 같잖아.’
하얗게 질린 요한나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침내 참지 못한 요한나가 온몸을 써 버둥거리려고 할 때 드디어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감돌기 시작했다.
미친놈. 괴물 새끼.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도 혀를 적시는 달콤함에 요한나의 날 선 표정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어깨를 부러뜨릴 것처럼 힘이 들어갔던 손가락도 온순해졌다.
흰개미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어느 순간 요한나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흰개미는 다른 손으로 요한나의 허리를 받치고 그녀를 뒤로 젖혔다.
요한나에겐 어쩔 수 없는 섭식. 개미들에겐 생명을 나누는 행위는 평소보다 길고 길었다.
흰개미가 입을 뗐다. 요한나의 입술은 촉촉했고, 그의 붉음이 옮겨 가기라도 한 양 불그스름했다. 생기를 얻은 두 뺨에 보기 좋은 홍조가 올라왔다.
흰개미와의 섭식 행위는 삶의 의지를 잃었던 그녀가 여전히 별 탈 없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다.
요한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흰개미는 밤을 몰아낸 태양의 떠오름을 감상하듯 그녀를 응시했다.
“하아…….”
나른한 숨이 흘렀다. 기분 좋은 포만감을 누리던 요한나는 문득 흰개미의 시선을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여전히 조각처럼 무표정한 얼굴은 딱히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괜히 창피해졌다.
젠장. 속으로 욕설을 씹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잘 거니까 방해 마.”
그러고는 곧바로 눈을 감았다. 흰개미와의 대화나 교류 따위를 원천 봉쇄하는 언동이었다.
다행히 흰개미는 잠잠했다.
집요하게 괴롭힐 생각은 없나 보지. 내심 안도한 요한나는 그럼에도 꼼짝을 못 했다. 왠지 눈을 뜨면 흰개미와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노심초사하며 눈을 감고 있던 어느 순간, 요한나는 정말로 선잠에 들었다.
“으음…….”
작게 신음을 뱉은 요한나는 얼떨결에 눈을 떴다. 어쩐지 이상한 느낌에 시선을 내렸다가 기함했다.
“……!”
그녀의 다리는 넓게 벌려진 상태였다. 훤히 드러난 다리 사이를 흰개미가 구경하고 있었다.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쳐다보는 끝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음부가 자리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내달렸다.
몸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퍽! 맨발이 하얀 얼굴에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정적이 이어졌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른 요한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모든 감각이 발바닥에 쏠렸다. 발바닥에 짓눌린 높고 뾰족한 코. 그 감촉이 생생하여 요한나는 무심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문득 발바닥 하부에 미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발을 떼자 혀를 날름거린 흰개미가 그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러고는 반질거리는 홍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변태 새끼.”
요한나는 다시 그를 발로 차 버릴 요량으로 발을 들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흰개미가 곧장 그녀의 양 발목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붙잡힌 발목에서 파열음이 들릴 것 같았다. 전조도 없이 옛 기억에 사로잡힌 요한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공포에 질렸다.
그러나 흰개미는 손에 힘을 주는 대신에 잡은 발목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타액으로 축축한 혀가 툭 튀어나온 복사뼈를 핥았다. 제일 윗부분을 널찍한 부분으로 꾹 누르고 그 아래를 휘감듯이 빨아 댔다.
요한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그런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능선을 따라 달리며 한바탕 시원하게 소리라도 치면 나아질까.
심장이 짜부라지는 듯한 답답함은 흰개미를 보자 분노로 탈바꿈했다. 그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발목을 넘어 종아리를 맛보다 중얼거렸다.
“짜.”
요한나는 그렇게 말하는 머리통을 조각내는 상상을 하며 대꾸했다.
“땀이 났으니까.”
미간을 좁힌 주제에 흰개미는 혀를 길게 내밀어 늘어짐 없이 탄탄한 종아리 살을 핥아 올렸다. 당연히 그가 그만할 줄 알았던 요한나는 기겁하며 발을 버둥댔다. 흰개미의 손이 마치 살아 있는 족쇄처럼 그녀의 발을 옭아맸다.
“가만히, 있어. 간지, 러워?”
간지러워서 그러겠는가. 고개를 갸웃하는 흰개미는 어린아이처럼 무구해 보였다. 하는 짓을 보면 지능이 없는 건 아닌데 눈치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니다. 가끔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랬다.
요한나는 발목을 당기다가 용만 쓰게 되자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만 못 해?”
까칠한 혀가 종아리를 맛보는 것처럼 핥아 댔다. 입술까지 갖다 대며 쭙쭙거리던 흰개미가 눈을 위로 굴렸다. 하나밖에 없는 눈알이 이쪽을 향하자 가슴이 뜨끔한 그녀는 있는 대로 인상을 써 보였다.
“왜?”
“소름 끼치니까!”
“하지만, 요한나, 몸, 더러워. 씻어야지. 살, 쫄깃쫄깃, 한데, 짜.”
“짜다는 말 그만해.”
괴물의 입에서 듣는 말이라고는 하나 수치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물을 갖다 달라고!”
흰개미는 이번에는 다른 쪽 종아리에 입을 갖다 댔다. 제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좋다며 쪽쪽거리는 흰개미를 요한나는 흰 눈으로 노려보았다.
검은 개미도 자신에게서 관심을 끊었고, 이놈만 아니라면 이 토굴도 조금은 숨통이 트일 텐데. 아니지. 사실 검은 개미가 관심을 끊었다는 것도 이쪽의 생각일 뿐이다.
다른 장군 개미들과 교류가 활발한 이개미의 말처럼 흰개미를 감시자로 붙인 거라면, 검은 개미도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생각인 걸까?
우울하게 생각을 뻗치던 요한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면 일전에 날 도망치게 두지도 않았겠지.’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이놈의 독단이란 건데.
요한나는 이제는 무릎을 정신없이 핥아 대는 흰개미를 흘끗 살폈다. 느리지만 끊임없이 날름대는 혀를 보자니 자동 반사적으로 아랫배가 욱신거려 머리털이 다 쭈뼛 선다.
이런 식으로 괴롭혀서 말라 죽게 하려는 건가. 그럴 정신머리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흰개미의 기묘한 집착을 이해할 수 없다.
‘괴물을 이해할 필요는 없어. 인간의 생각을 안 하는 놈들이잖아.’
일족을 위해서는 아직도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 제일 그럴듯하다.
어떻게 하면 이놈의 관심을 끊어 버릴 수 있을까. 차라리 이전보다 더 정신줄을 놓고 미친 척을 할까. 폐기 처분 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들게 하는 거다.
요한나가 곰곰이 생각에 잠길 때 흰개미는 어느새 요한나의 안쪽 허벅지 살을 입술로 잘근잘근 물어 대고 있었다. 다리가 흰개미의 타액으로 축축했다. 그 감각이 불쾌한 요한나의 눈썹이 사정없이 꿈틀거렸다. 싫다고 해 봤자 힘만 뺄 뿐이라는 걸 수없이 반복된 경험으로 깨달아 가만히 내버려 두지만 그게 적응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흰개미의 발간 입술이 허벅지를 크게 물었다. 다른 곳보다는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 살이 습한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묘한 감각에 요한나의 이마 주름이 깊어졌다. 흰개미의 코앞에 음부가 위치한다는 사실도 못내 신경이 쓰였다.
이제 와서 부끄럽다는 건 아니지만 은밀한 곳을 훤히 내보인다는 건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을 자극당하는 일이었다. 차근차근 올라오며 빨아 대는 꼴을 보니 곧 음부에도 달라붙을 것 같다. 아무리 싫은 흰개미라도 민감한 부분이 자극당하면 반응이 오기 마련이다.
생각을 마친 요한나는 그의 신경을 돌리기 위해 머리를 한 바퀴 굴렸다. 불현듯 모피로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에 새겨진 붉은 실금 같은 흉이 눈에 들어왔다.
요한나는 손을 뻗어 빗장뼈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모피를 툭, 들추었다. 멈칫한 흰개미가 고개를 들자 요한나는 아직 색이 바래지 않은 목덜미의 흉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거의 다 나았네.”
손가락을 세워 상처가 가장 깊어 아직도 빨간빛을 머금은 부위를 눌렀다.
“아파?”
흰개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몸을 훑어 내리자 흰개미는 주저 없이 모피를 벗어 던졌다. 몸 곳곳에 남은 아물어 가는 흉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큰 상처였음을 방증하듯 실금처럼 길게 퍼져 있는 흉은 그를 세월이 흘러 부식된 조각상처럼 보이게 했다.
보기 불편한 건 아니다. 외려 세월이 흘러 가치가 더해진 명화처럼 독특한 매력이 생겨났다.
그것을 매력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으나, 눈도 애꾸에 피부도 얼룩덜룩한 상태인데도 썩 볼 만하다는 건 좀 신기했다.
“아쉽지 않아?”
“뭘?”
“그 꼴을 해서 쟁취한 여왕인데 지금 검은 개미와 있잖아.”
약탈한 대상에 대한 권리는 약탈자에게 있다고 일개미에게 들었다. 그런데 흰개미는 위험한 전투를 치르면서까지 데려온 석굴 개미 여왕이 검은 개미와 있는 걸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듯했다.
“일개미가 그러는데, 새로운 여왕이 널 보고 싶어 한다면서. 여왕은 검은 개미보다는 네 쪽이 취향에 맞는 거 아니야? 그럼 너도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장군 개미로서 여왕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거잖아.”
“…….”
조용한 모습이 초조해서 요한나는 말이 길어졌다.
“그 여왕은 붉은 공주와 달리 알집도 튼튼하다며. 그래도 석굴 개미들의 여왕이기까지 했으니 토굴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해야 하잖아. 페로몬 교체는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처음에는 널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데 이제는 그냥 널 만나고 싶은 것 같대.”
이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너, 암컷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꽤 많다며? 죽은 토굴 개미 공주들도 너와 교미하는 걸 가장 좋아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석굴 개미 여왕의 환심을 사는 게 좋지 않냐는 거지. 여왕과 척지기보다는 친하게 지내는 게 당연히 더 낫잖아.”
흰개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요한나는 이를 갈았다. 이렇게 길게 설명했는데도 저런 얼굴이라니. 도무지 보람이 없다.
“요한나, 석굴, 개미, 여왕이, 궁금, 해?”
딱히 궁금한 건 아닌데. 난 네가 그쪽에 관심이 있는지가 궁금한 거라고.
떨떠름했던 요한나지만 흰개미의 투명한 시선에 뒤늦게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흰개미가 으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여 요한나의 허벅지에 뺨을 올렸다.
목덜미를 덮는 긴 머리칼이 허벅지에 닿았다. 흰개미의 머리카락은 거미줄처럼 가늘고 하늘거려서 닿은 곳이 간지러웠다. 요한나는 다리를 흔들어 그를 치우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 참았다.
흰개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침묵했다.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를 본 요한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다행히 관심을 돌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눈을 반짝 뜬 그가 곧바로 입을 열어 허벅지 살을 한 움큼 빨자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상관, 없어.”
“으음…….”
“석굴, 개미, 여왕은, 검은 개미가, 알아서, 할 거야.”
우물거리는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요한나, 곁, 더, 재밌, 어.”
“…….”
“더, 좋아.”
물기에 젖어 매끈한 조약돌처럼 또렷한 홍안을 본 요한나는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어떻게 하면 이놈의 관심을 돌릴 수 있지?
별미라도 맛보듯 허벅지를 핥고 씹는 감각에서 억지로 신경을 돌리며 생각했지만 아득하기만 했다.
석굴 개미 여왕을 단신으로 약탈하는 위업을 이루었다며 개미 주제에 어려운 단어를 써 가면서 흰개미를 찬양하던 일개미가 떠올랐다.
‘위업은 무슨.’
흥, 억지로 코웃음을 친 요한나는 식후 디저트처럼 음부로 눈을 돌리는 흰개미의 눈길을 받고 신음했다.
기껏 혼자 쳐들어온 흰개미를 붙잡지도 못하고 되레 여왕을 뺏기기나 하고, 강한 척하더니 순 약골 자식들만 모인 집단 아니야. 석굴 개미를 향한 불합리한 분노가 치밀었다.
곧이어 걱정하던 순간이 찾아왔다. 습한 입이 음부를 덮어 오고 뾰족한 돌기가 촘촘히 솟아난 매끄러운 혀가 음순을 질척질척하게 헤집자 요한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증오하는 상대에게서 쾌감을 느낀다는 건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 * *
요한나는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킁킁거렸다. 하는 일도 없이 근처에서 기웃거리던 일개미가 그녀를 따라 킁킁거렸다. 그러자 토굴에 새로운 길을 내느라 내내 바빴던 이개미와 삼개미도 똑같이 따라 했다.
‘얘네 뭐 하는 거야?’
“바보 같아.”
요한나가 한심한 눈을 했다.
킁킁, 킁킁. 일개미가 계속 킁킁대며 요한나를 멀뚱히 응시했다.
“공주는?”
“비 냄새가 나서 그런 거야.”
“아, 비, 와. 많이, 와.”
이개미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일꾼, 들, 일, 열심히, 하는, 중. 토굴, 비, 안, 들어오게. 큰, 날개가, 나도, 일하라, 했다.”
“근데 왜 가서 일 안 하고 여기서 퍼질러져 있어?”
이개미가 눈을 순진하게 끔벅였다. 멍청해 보였다.
“도망, 왔다.”
“나도.”
“잘, 했어. 자꾸, 보면, 일, 시키니까. 안, 나가는, 게, 좋아.”
일개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기가 막힌 요한나였다.
“동족을 위해서는 무슨 희생이든 하는 거 아니었어?”
“이게, 다, 공주, 때문.”
“내가 뭘?”
“모든, 관심, 새로운, 여왕에게, 집중. 공주, 찬밥, 취급. 붉은, 공주는, 일꾼도, 한, 명, 뿐. 남은 일꾼, 모두, 새로운, 여왕에게, 감. 그래서, 일, 많이, 시켜.”
다시 말해 찬밥 신세가 된 요한나의 휘하에 있는 일꾼개미들의 위치도 하향되어, 온갖 잡일에 시달린다는 뜻이었다. 하나뿐인 공주였던 예전에야 그녀의 시중에만 집중하면 됐지만, 지금은 형편이 달라졌다.
일개미는 원망이 어린 눈으로 요한나를 보며 투덜거렸다.
“공주, 더, 빨리, 정신, 차렸어야. 그러면, 다시, 여왕, 가능했음. 방도, 더, 큰, 암굴. 여기, 좁, 음.”
이개미와 삼개미도 짧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요한나는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괜, 찮음. 공주, 아직, 젊어. 흰, 개미도, 있고. 다시, 여왕, 될 수, 있어. 검은, 개미, 잘, 설득, 하면, 돼!”
조용한 그녀가 상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삼개미가 위로의 말을 남겼다. 일개미와 이개미가 적극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열하게 끄덕였다.
요한나는 고개를 꺾으며 픽 웃었다. 음산한 공기가 피어올랐다.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일꾼개미들의 갑각 표피가 삐죽 섰다.
“이 눈치 없는 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남의 속도 모르고.”
“공주?”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는 일개미의 털이 없어 번들거리는 민머리에 요한나의 손날이 꽂혔다.
“키약!”
요한나가 다시 손날을 내리치고 포효했다.
“다 꺼져. 내가 지금 이 꼴로 너희들 투덜대는 거나 들어 줘야 해? 가서 비 안 새게 일이나 하고 와. 이 쓸모없는 것들아!”
“쓸모, 없다, 니.”
“공주, 너무, 해.”
얻어맞는 일개미를 보고 오들오들 떨던 이개미와 삼개미가 말했다. 요한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뒷골이 당겼다.
“너무한 건 너희들이지. 꺼져. 다 꺼져!”
요한나가 발광하자 이개미와 삼개미가 식겁하며 튀어 나갔다.
“넌 왜 안 나가?”
“캬악!”
끝까지 안 나가려고 버티는 일개미를 훌쩍 들어 밖으로 내던진 요한나는 텅 빈 토굴 방을 보고 긴 한숨을 쉬었다.
‘어디서 속 터지는 소리를 하고 있어. 여왕이 되기 위해 검은 개미에게 아양이라도 떨라는 거야 뭐야. 차라리 너희들처럼 밖에서 노역이라도 하는 게 낫지. 가축처럼 갇혀 있는 것보다는.’
모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팔 굽혀 펴기라도 하려다가 만 요한나는 무릎을 모아 앉았다.
토굴에 맴도는 끈적한 습기 탓일까. 요한나의 어깨는 답지 않게 축 처져 있었다. 별안간 축축한 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고개를 들자 식량 채집을 마치고 돌아왔는지 흠뻑 젖은 흰개미가 늘어뜨린 날개를 천으로 닦고 있었다. 한 손에 얇은 날개를 올리고 난해하게 뻗은 시맥을 따라 천을 미끄러뜨린다.
그녀는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흰개미의 날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꿀이라도 바른 듯 넋을 놓고 날개에 시선을 못 박는 그녀에게 흰개미의 의미심장한 눈길이 닿았다. 한발 늦게 그의 시선을 눈치챈 요한나가 흠칫하고 무릎에 기댔던 턱을 뗐다.
“원해?”
결코 크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 달착지근하게 달라붙었다. 그 순간 요한나는 상상했다. 날개를 펼치고 광활한 하늘의 주인인 양 자유롭게 움직이는 제 모습을.
청각을 자극하는 이파리 우는 소리와 뺨을 날카롭게 스치는 따뜻한 봄바람의 감촉.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건 끝없이 펼쳐진 평야의 지평선을 달리는 건 줄 알았으나 비행은 또 다른 황홀한 세계였다.
날개를 가진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향락에 그럴 때가 아님에도 마음 깊이 기뻐했다. 즐겼다. 그때만큼은 바렌타도 잊어버리고 행복했었다.
요한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흰개미가 망설임 없이 날개에 손을 가져가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기겁하여 빽 소리를 질렀다.
“네 거 말고!”
멈칫한 흰개미가 요한나를 응시했다. 황당함을 담아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를 보고 날개에서 손을 떼는 얼굴이 뚱했다.
요한나는 기가 막힌 한편 ‘가만, 날개가 없으면 저놈도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거니 나한테 유리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얼빠진 흰개미가 옮았나.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뭐, 떼고 싶으면 떼든가.”
뒤늦게 한마디 덧붙였지만 제가 보기에도 모양새가 볼품이 없었다. 과연 흰개미는 날개를 뜯을 생각이 사라졌다는 양 다시 천을 들어 젖은 날개의 물기를 닦아 냈다.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요한나는 계속해서 혀를 찼다.
* * *
누가 자꾸 몸을 흔든다. 귀찮게 왜 이래. 습기 탓에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던 요한나가 쫓겨나는 잠기운을 억지로 붙잡았다. 그러나 어깨를 흔드는 손길은 멈추지 않아서, 결국 잠이 완전히 깬 요한나의 눈꺼풀이 찌푸린 채 올라갔다. 뿌연 물막이 드리운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뭐야.”
“먹어.”
흰개미는 못마땅한 그녀의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긴 저놈이 언제 내 말을 제대로 들어 준 적이나 있나. 잠을 깨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겠지. 속으로 빈정거리며 흰개미가 내민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움찔하고 턱을 당겼다.
“뭘 먹으라고?”
“날개.”
“…….”
“먹어.”
……이걸 먹으라고?
요한나는 몹시도 찝찝한 얼굴로 눈만 내렸다. 흰개미의 손바닥 한가운데 자리한 그건 생전 처음 보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벌레, 는 아닌 것 같고.’
이상한 생물체. 언뜻 머리와 배와 팔다리가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나 어른 손바닥만 한 소인을 짜부라뜨린 형상은 머리로 추정되는 것과 몸으로 추정되는 것이 경계 없이 들러붙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검은 산맥이니 소인이 있어도 놀랍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기엔, 그 속이 반투명해 안쪽이 훤히 비친다. 듣도 보도 못한 생물이다.
“이게 뭔데.”
흰개미는 이해 못 할 종자긴 해도 실없는 놈은 아니었다. 이유가 있겠지 싶어 당장 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을 참고 묻자 그가 차분하게, 믿지 못할 말을 했다.
“물푸레 요정.”
“요정?”
“공주가, 될, 씨앗이, 먹는, 거다.”
“…….”
“먹으면, 날개가, 나.”
“…….”
“귀한, 거다.”
요한나는 얼빠진 얼굴로 당장 생각나는 걸 물었다.
“어디서 난 건데?”
거침없이 대꾸하던 흰개미가 멈칫하고는 눈알을 굴렸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요한나는 혼란 속에서 빠져나왔다. 꺼림칙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와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먹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져 갈 무렵 흰개미가 툭 뱉었다.
“훔쳤어.”
“……훔쳐?”
되묻자 비난을 한 것도 아닌데 항변한다.
“괜찮아. 어차피, 내가, 찾아서, 검은 개미에게, 준 거. 원래, 내, 것.”
훔쳤어도 상관없는데. 인간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도둑질이 나쁜 거라는 통념을 들이밀 생각은 없었다.
요한나는 저를 흘끗거리는 흰개미를 외면하고 저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머릿속의 치열한 공방으로 끙끙 앓는 그때.
물컹!
입가에 닿는 감촉에 기겁하고 눈을 번쩍 떴다.
흰개미가 덩어리를 들고 그녀의 입술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그것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콧물처럼 약간 끈적거리는 점성에 도롱뇽 알집처럼 물컹물컹하고 축축했다. 결코 유쾌한 기분은 아니라 식욕이 절로 뚝 떨어졌다.
하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한번 맛보았던 비행의 쾌감이 거부감을 이겼다.
날개가 생긴다는데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입을 벌리자마자 축축한 덩어리가 쑥 들어왔다. 널찍한 혓바닥에 물컹한 감촉이 퍼졌다. 더 있다가는 삼키지 못할 것 같다는 위기감에 요한나는 서둘러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씹어 먹을 자신까지는 없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목에 걸리는 느낌 없이 쑥 내려갔다. 아무 맛도 없었지만 좁은 목구멍을 꾸역꾸역 열어젖히며 내려가는 느낌은 길고도 선연하여 토할 것 같았다. 요한나의 미끈한 눈썹이 아치형으로 휘어지고 광대는 뻣뻣하게 굳었으며 이마는 주름을 깊게 잡은 채 고정되었다.
흰개미는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는 그녀를 이유를 알 수 없게 일렁이는 눈으로 응시했다. 문득 그가 불시에 입을 맞추었다.
‘이게 시도 때도 없이!’
속을 진정하는 데 주력하던 요한나는 울컥 화를 내려다가, 혀끝에서 먼저 느껴지는 달콤함에 잠자코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청량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구역감을 일부 잊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위장 부근이 울렁거려 그녀는 무심코 혀를 앞으로 뻗었다. 이 같은 행위에서 그녀는 늘 수동적이었기 때문에, 혀를 움직인 건 처음이었다.
요한나의 부드러운 혀는 그녀의 입술을 열어젖힌 흰개미의 혀끝을 건드렸다. 갑자기 흰개미의 눈매가 또렷해졌다.
요한나는 예고 없이 깊어지는 결합에 흠칫했다. 그녀의 혀를 감싸 바싹 끌어당긴 흰개미가 고개를 기울였다.
코끝이 맞닿았다가 미끄러지고 더 깊이 결합하기 위해 입술이 야릇하게 뭉개졌다. 그에게서 훅 끼쳐 오는 달콤 쌉싸름한 숲의 향기. 울렁이던 속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 * *
그것을 삼킨 요한나는 언제 잠들었는지 알 수 없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온몸이 푹신한 침낭에 감싸인 듯 안락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오두막의 딱딱한 나무 바닥에서 뒹굴었던 그녀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부드러움. 인간 세상의 요람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바렌타가 마련해 준 솜이불 덮은 침대도 이렇게 편안하지는 않았다.
“흐아아아악!”
잠결에 소스라치는 비명을 들었다. 어슴푸레하게 뜬 눈에 기겁하는 일꾼개미들이 보였다. 뭔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그들의 모습이 흐릿했다. 그녀는 어른거리는 실루엣을 보려고 애를 쓰다 몰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꿈도 꾸지 않는, 죽음 같은 잠은 포근한 밤처럼 따뜻하고 평온했다. 때때로 뿌드득, 뿌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는 것을 제외하면 적잖이 만족스러웠다.
그런 그녀의 흡족함과 달리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미쳤, 군! 그건, 새로운, 여왕을, 위한, 것. 공주에게, 그 귀한 걸, 내던, 져? 미친, 흰개미, 미친, 거냐!”
“조용히 해, 검은 개미. 요한나가, 깨.”
“제기, 랄, 그게, 무슨, 상관! 저건, 일족의, 강력함을, 위해! 여왕에게, 필요한, 거란, 말이, 다! 그걸, 쓸모, 없는, 혼혈, 공주, 따위, 에게……. 제, 정신, 인가?”
시끄러워, 시끄러워.
대체 뭐 때문에 싸우는 거야?
알 게 뭐람.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 * *
요한나는 더없이 개운하고 쾌적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나른하면서도 팔다리에 활력이 넘쳤다.
하아. 만족감 밴 호안으로 한숨을 쉰 요한나는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 미색의 장막이 내려와 있었다. 손을 뻗어 치우자 지익, 미세한 소리를 내며 종이처럼 찢어졌다.
뒤늦게 얇디얇은 몇 겹의 막이 몸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촉감이 어딘지 익숙했다.
“고치?”
요한나는 오묘한 얼굴로 손가락에 감겨 늘어진 부드러운 막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문득 강렬한 허기짐을 느꼈다. 몸을 일으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누워 있던 모양 그대로 장막이 타원형의 길쭉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요한나는 침묵했다.
“이게 뭐야?”
꽤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목소리는 잠긴 데 없이 매끄러웠다. 도리어 생기가 가득 도는 게 제 목소리임에도 낯설다. 게다가 몸도 옷가지 하나 없는 알몸. 평소와 다름없이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어딘가 이상하다…….
기묘한 기분에 잠식된 요한나는 몸을 둘러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뒤로 돌린 채 굳어진 그녀의 앞에 인기척이 다가왔다. 요한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뒤로 가져갔다. 손가락이 닿자 바스락거린다.
“기뻐?”
흠칫해서 손을 뗀 요한나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흰개미가 요한나의 등 뒤, 날갯죽지에서부터 길게 뻗어 내린 날개를 확인하듯 만졌다. 문제가 없는지 ‘흠’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요한나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흰개미가 눈을 맞춰 왔다. 하나뿐인 동공이 수축하고 눈꼬리가 휘어진다.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얼굴로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날개, 선물.”
“…….”
“기뻐?”
“…….”
“궁금해.”
요한나는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상황 파악이 됐다. 갖고 싶었지만 기대하지 않았다. 다시는 비행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기에 간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충족이 되었다.
그녀는 흰개미의 기대를 무시하지 않고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으로 뻗은 손이 날개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공주의 몸으로 변하면서 돋았던 날개보다 질긴 질감이었다.
“웃어 봐.”
날개를 신기하게 힐끗거리던 시선을 흰개미에게 고정했다.
‘이 괴물 자식이 내가 광대인 줄 아나.’
흰개미가 원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요한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날개가 생겼다는 기쁨에 뇌 한쪽이 마비되어 웃어 주는 것 정도야 뭐 어떻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날개의 대가가 고작 그런 거라니, 그렇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요한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누가 웃으라 해서 웃어 본 적은 없지만 웃는 게 별건가. 대충 히죽거리면 되는걸. 그런데 기껏 원하는 대로 해 줬더니만 흰개미는 미간을 미미하게 좁힐 뿐 흡족한 얼굴이 전혀 아니었다.
뚱한 얼굴을 보고 요한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린 채 입술을 달싹였다.
“이거 아냐?”
“아니야.”
쓸데없이 단호하기는. 기분이 상한 요한나의 입꼬리가 쭉 내려갔다.
“그때는, 이렇게, 웃지, 않았, 잖아.”
“무슨 소리야. 어쨌든 웃어 줬으니 됐지?”
흰개미는 못마땅한지 입을 꾹 다물었다. 요한나는 더는 그에게 관심 두지 않았다.
물푸레 요정인지 뭔지, 진짜 요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귀물이었나 보다.
‘그럼 잠결에 들었던 게 꿈이 아니었던 건가? 검은 개미와 흰개미가 다투었던 것 같은데.’
흰개미가 다시 보였다.
‘이놈이 미쳤나? 이런 걸 왜 나한테 쓴 거지? 토굴 개미 놈들 입장에선 새로운 여왕에게 바치는 게 맞을 텐데.’
그 점이 신경 쓰였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흰개미가 무슨 생각으로 요정을 자신에게 먹였든지 간에 중요한 건 다시 날개가 생겼다는 것이다.
언제든 원할 때 날아갈 수 있다. 새로 생긴 날개는 전보다 시맥이 뚜렷하고 날개막은 튼튼한 게 쉬이 찢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을 보물처럼 조심조심 만지며 몰래 흰개미를 곁눈질했다.
‘네가 준 이 날개로 도망간다면 넌 어떤 얼굴을 할까.’
요한나는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상상만으로도 황홀하여 다리가 후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