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9)

13

공주의 토굴 방에 다시 배속된 일꾼개미들은 한가했다. 한때 혼혈 개미 공주의 시중을 들었던 그들은 도망친 여왕이 다시 돌아오자 생기를 되찾았다. 여왕의 암굴이 아니라 한낱 토굴 방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단지 여왕이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에.

거처의 변화에 따라 일꾼개미의 수도 변했다. 원래는 넷이었다가 하나가 죽고 열이 넘었다가 다시 셋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모셨던 세 명의 일꾼개미는 요한나에게 거의 불린 적이 없었으나 간혹 호명될 때는 일개미, 이개미, 삼개미로 불렸다.

사실 그네들끼리는 페로몬이라는 수단이 있어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었다. 호칭을 가졌다고 해 봐야 검은 개미, 흰개미 정도이고 그마저도 누군가 대체할 수 없는 강력한 장군 개미가 아니고서야 얻을 수 없었다. 대체할 이가 수없이 많은 일꾼개미는 죽을 때까지 그저 일꾼개미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인간 세상에서 살다 온 요한나가 편의상 대충 부른 그 이름은 그들이 가진 최초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제 이름을 소중하게 여겼다.

“일개미, 움, 직여.”

가만히 서서 뭐 하냐는 이개미의 타박에 일개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뭘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할 일이 많았다. 토굴에 적응하지 못하는 공주의 시중을 들기 위해 제 생기를 깎아 죽을 만들었고, 산란하면서부터는 그 알을 보살피고 부화하는 데 온종일을 보냈다. 공주가 도망가면서부터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석굴 개미에게서 약탈해 온 새로운 공주는 전대 여왕을 모신 그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토굴이 식지 않도록 여기저기 나다니며 팔다리를 떨어 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석굴 개미 공주의 산란이 신통치 않고 도망갔던 여왕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순수하게 기뻤다.

제대로 된 일이 생겼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일개미라고 불러 준 그 공주를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많은 공주를 봤으나 그녀 같은 공주는 처음이다. 검은 개미는 잡종이라고 비하하는 혼혈 공주는 특별하다. 토굴 벽에 박힌 백돌처럼, 어둠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태양처럼.

혼혈 공주가 사라진 내내 그녀를 그리워하고 걱정했었다는 걸, 생각이 옅은 일개미는 다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깡마른 얼굴을 보자 생전 그래 본 적이 없었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탈의 여왕에게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우락부락한 몸에 달라붙었던 그때의 필사적인 마음이 다시금 찾아들었다.

일꾼개미로서 일족의 공주에게 몸 바쳐 헌신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전대의 여왕과 공주들이 석굴 개미에게 물려 죽었을 때는 눈물 한 방울 찔끔하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이 혼혈 공주가 그런 최후를 맞는다면 온몸이 짜부라들 듯 아플 것 같았다.

같은 색 눈을 하고 있음에도 태양을 두 눈에 박아 넣은 것처럼 반짝이는 눈빛을 보았을 때부터, 그녀를 진정한 자신의 공주로 받아들인 걸지도 몰랐다.

한데 공주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생겼던 기쁨은 길지 않았다. 돌아온 공주는 어딘가 이상했다. 원래도 괜히 눈총을 주고 별것 아닌 일로 괴롭히는 둥 짜증스러운 성격에 살갑지 않은 그녀였지만 그래도 몸을 움직이고 토굴의 통로 이곳저곳을 주기적으로 돌아보는 활동적인 성향이었는데 돌아와서는 팔다리가 사라진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쫓기며 고생이 많았나 보다 생각하며 정성껏 돌보았을 테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일개미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몽땅 차지하고 있는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일개미, 움직임. 식물. 식량.”

이개미가 다시 멍한 얼굴로 움직이지 않는 일개미의 허리를 툭툭 쳤다. 흰개미가 먹는 식물을 가지고 오자는 소리였다.

일개미는 대꾸 없이 울적한 얼굴로 토굴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부드러운 이파리를 수북하게 깔고 누운 공주가 있었다. 그녀는 더는 여왕이 아니었다.

토굴은 현재 여왕 없이 일시적 2공주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두 공주 모두 여왕이 되기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다. 석굴 개미 공주는 산란하는 능력이 미비하다. 알을 낳는 능력이 최우선시되는 여왕에게는 최악의 결점이었다.

혼혈 공주는 애매했다. 어쩌면 석굴 개미 공주보다 심각할지도 몰랐다. 산란능력은 그대로이나 그녀는 정신이 이상해져 있었다. 말도 한마디 하지 않고, 먹을 것도 찾지 않으며, 내내 잠만 잔다. 사실 자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자고 있겠거니 짐작하는 것뿐이다.

누가 돌보지 않으면 일주일도 되지 않아 굶어 죽게 될 터다. 그런 그녀가 죽지 않는 것은 누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붙어 있는 덕이었다. 그가 바로 자신들이 할 일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자였다.

다른 일꾼개미, 하다못해 수개미였다면 불쾌한 심정을 페로몬으로 드러내 볼 수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상대가 쳐다보기도 두려운 흰개미라 속만 끓인다.

위대한 장군 개미가 하루 종일 공주에게 달라붙어 일꾼개미나 하는 짓을 하고 있으니 일개미는 자신이 할 일을 빼앗겼다는 불만과 더불어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검은 개미도 가만히 있는데 한낱 일꾼개미인 자신이 흰개미에게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흰개미는 장군 개미지 일꾼개미가 아니다. 그가 그녀를 다루는 방식은 일개미로 하여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일개미는 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흩어진 공주의 불룩한 배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저거, 위험, 위험?”

위험하지 않냐는 뜻으로 토굴 방 안쪽을 새카만 손끝으로 가리켜 댔다.

“뭐, 가?”

이개미와 삼개미는 이상스럽게 구는 일개미에 대한 불만을 얼굴 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심드렁한 반응에 일개미는 울컥했다. 둔해도 이렇게 둔할 수가 없다.

“공주, 곧, 산란할, 것.”

이개미와 삼개미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모르겠어? 일개미가 뭉툭한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교미, 위험.”

“교미?”

두 개미가 고개를 갸웃하고 안쪽을 곁눈질했다.

“저게, 교미, 중?”

애매한 얼굴을 보며 일개미는 가슴이 뜨끔했다.

저게 교미하는 건가? 아닌 건가?

그건 그도 헷갈리기 때문이었다. 교미라기엔 생식기가 맞붙어 있지 않은 데다가 그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하지만 교미가 아니라면 벌거벗은 공주의 몸을 샅샅이 핥아 대는 흰개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애무 행위에 대해 모르는 일꾼개미들은 그저 잠자코 지켜보자는 뜻으로 서로를 보다 토굴 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특히 세 일꾼개미 중에서도 공주에게 헌신적이었던 걱정 많은 일개미는 눈을 부릅뜨고 공주와 흰개미를 응시했다.

초록색 풀 위에 누운 공주의 하얀 피부가 돌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받아 희뿌옇게 빛났다. 인간으로 자라 온 혼혈 공주는 아마 햇볕에 타고 흠집 잡힌 까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기점에 탈피하여 되찾았을 본연의 하얀 피부는 토굴로 끌려와 공주화를 이루며 한층 매끄럽고 깨끗하게 서늘해졌다.

아름답게 굴곡진 몸뚱이가 꿈틀거렸다. 의식이 없을 터라 자각 없는 몸짓일 텐데 괜히 눈길을 끌었다.

무결했던 공주의 몸은 흠이 생겨 있었다. 어깨의 상처는 딱지가 생기지 않아 붉은 상흔을 그대로 드러냈다. 어쩌다가 저런 상처가 생긴 건지 아는 개미는 아무도 없었다.

흰개미라면 알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알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건, 공주의 바깥 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흰개미가 상처보다 빨간 혀를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핥았다. 상처에 발랐던 암녹색의 지혈초가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일개미는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상처는 착실히 나아 가고 있었지만, 흰개미가 매번 저러니만큼 매번 지혈초가 부족했다. 아무래도 달콤한 식량 줄기를 따 오며 지혈초도 가져와야 할 성싶었다.

흰개미는 일개미의 걱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주의 어깨를 핥아 대는 데 여념이 없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일개미의 푸르죽죽한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미묘한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상처를 핥는 행위 자체는 약이 없는 자연 상태에서 흔한 일이었다. 일개미도 저를 돌봐 주었던 일꾼개미로부터 그런 보살핌을 받은 적이 있다.

공주에게 끔찍한 흰개미가 그녀의 상처를 살피는 건 그다지 놀랄 것 없으나 어쩐지 상처를 날름거리는 붉은 혀 놀림은 단순한 ‘보호’의 의미를 넘어선 것 같아 관자놀이의 갑각 표피가 곤두서는 기분이다.

“으윽…….”

자는 와중에도 통증을 느끼는 건지 공주가 어깨를 반대쪽으로 틀었다. 둥그스름한 어깨 양옆에 손을 내려놓은 채 그녀를 덮치듯 달라붙었던 흰개미가 고개를 들었다. 혀를 내밀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핥아 올렸다.

무표정하지만 어딘지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그가 다시 어깨를 핥았다.

아직 다 낫지 않은 상처에서 흐르는 핏물과 진물을 모두 빨아 내고 한쪽에 마련된 바구니에서 지혈초를 한 움큼 가져가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씹고 질척해진 암녹색 덩어리를 어깨의 상처에 올렸다.

그런 후 벌거벗은 공주의 몸 곳곳에 혀를 미끄러뜨렸다. 돌아오고부터 외부의 모든 것에 관심을 끊은 공주는 청결을 유지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몇 안 되는 천에다 물을 적셔 공주를 닦아 주었던 흰개미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천도 필요 없이 혀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일견 어린 새끼의 뒤처리를 해 주는 짐승 같았다.

하나 일개미는 이 시간이 올 때마다 심장이 쿵덕쿵덕 뛰어 댔다. 교미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교미 같았다.

공주의 팔을 든 흰개미가 움푹 들어간 겨드랑이에 입술을 묻고 혀를 놀렸다. 손등에 달라붙은 이파리를 씹어 먹고 손가락을 쪽쪽 빨아 더러운 먼지를 제거했다. 그러고는 몇 번의 산란을 겪어 한층 풍만해진 가슴을 양손으로 잡고 입을 크게 벌려 삼켰다. 부드러운 가슴살을 혀로 꾹꾹 눌러 대다가 가슴을 들어 살 때문에 땀이 찬 가슴 아랫부분을 샅샅이 핥았다.

그러다가 공주가 꿈틀거리면 모든 행위를 멈추고 그녀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공주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럼 흰개미의 혀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축 늘어진 다리를 벌리자 일개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흰개미가 공주를 잘 보살피는지 봐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눈을 떼고 싶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보게 된다. 모순이 단순한 일개미를 혼란스럽게 했다.

꿀꺽.

개미답지 않게 체온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후읍, 후읍. 호흡을 천천히 하는 일개미의 뺨은 어느새 불그스름해졌지만 정작 자신은 알지 못했다.

흰개미의 ‘핥는 혀’는 교미는 단순히 번식의 행위일 뿐이라며 무감하게 생각한 일꾼개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번식이라는 한 단어로 정의하기엔 지나치게 야릇하여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봐선 안 될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장군 개미도, 수개미도 아닌 한낱 일꾼개미가 공주를 안을 기회는 영영 없을 거다. 그런데도 흰개미와 공주를 보고 있으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다리 사이의 생식기가 근질거려 왔다.

흰개미는 한참 동안 공주의 다리 사이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혀를 길게 뺐다. 뾰족한 혀끝이 공주의 생식기 주변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는 일꾼개미를 등지고 있었기에 일개미는 그가 뭘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괜히 목이 타고 심장이 뛰었다. 머릿속이 뜨끈하다.

일개미는 공주를 흘끗했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흰개미가 교미하려 들면 말려야겠다는 당초의 결심이 그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사라져 갔다. 확대되어 보이는 거라곤 하얀 허벅지 사이에서 움직이는 흰개미의 머리칼뿐이었다.

“으…….”

흰개미의 머리가 공주의 다리 사이에 더 깊이 들어갔다.

혀로 안쪽을 청소하고 있을까?

일개미는 미천한 머리로 그 광경을 떠올렸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기에 상상은 비루했으나 다리 사이의 생식기가 기립하기엔 충분했다.

흰개미가 공주를 핥아 대는 광경은 괜히 목이 마를 만큼 관능적이었고, 또한 오싹했다. 어찌나 집요하게 핥는지 저러다가 공주를 잡아먹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간이 더 지나도 흰개미는 공주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꿈쩍하지도 않았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공주의 얼굴을 확인하거나 뭘 하는지 흔들리는 머리통이 움직임의 다였다.

반응은 공주에게서 나타났다. 으, 하. 짧은 숨소리를 흘리던 그녀의 신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간격이 짧아졌다. 연거푸 뜨거운 숨을 흘린 공주의 피부엔 흰개미가 핥은 보람도 없이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일개미는 그에 대해선 아무런 소감이 없었다. 흰개미는 귀찮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얼마든지 공주의 몸을 핥아 댈 테니까 말이다.

“아!”

공주의 허리가 휘자 불룩한 배가 하늘로 솟구쳤다. 흰개미는 작게 경련하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다리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주와 마찬가지로 나신이다. 배에 닿도록 꼿꼿하게 선 거대한 생식기를 보고 일개미는 아찔한 신음을 흘렸다. 저런 흉기로 교미를 시도해선 알집이 다치게 될 것이다.

전이었다면 걱정하지 않았을 거다. 검은 개미와 달리 아무런 욕구 없는 흰개미는 일족의 번영만을 우선시하므로 공주의 산란을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하나 이미 몇 번이고 배부른 공주를 쑤시던 그를 목격한 바 있다.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마주 보기도 겁나는 그를 말릴 생각을 하니 몇 없는 털이 모조리 곤두설 정도로 두려웠지만 그래도 산란기의 공주와 교미하게 두지는 않을 거다.

공주를 향한 충정을 되씹으며 내심 단단히 각오한 일개미가 결연한 눈을 빛낼 때, 흰개미는 끝까지 기립한 성기를 한 손으로 훑어 올리다 그 끝을 물기에 젖은 공주의 생식기에 갖다 댔다. 지금이야말로 나서야 하는 순간이다.

“흰개미!”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려던 일개미는 흰개미가 성기를 떼자 엉거주춤하게 멈칫했다.

흰개미가 공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일개미도 곧 이상을 눈치챘다.

“아, 윽, 으윽!”

공주가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흰개미가 핥았을 때 내던 그 신경이 오싹한 신음이 아니었다. 고통이 알알이 밴 신음이 뚝뚝 끊긴 채 흘러나왔다.

창백한 얼굴이 찡그려진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녀가 문득 눈을 번쩍 떴다. 확장된 동공에 고통이 가득했다. 새어 나오는 신음이 귓전을 벅벅 긁었다.

“아, 아파. 배…… 아파!”

일개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산란의 징조다.

그녀는 다리를 한껏 벌린 채 몇 번 허리를 튕기며 몸을 뒤틀었다. 이윽고 아랫배가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푹 꺼졌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신음은 끊이질 않았다. 알집이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통로에 손을 집어넣어 빼낼 수밖에 없다.

발을 동동 굴리던 일개미가 공주에게 바싹 붙으려 했다. 그 직전, 흰개미가 푹 꺼진 공주의 아랫배를 꾹 눌렀다.

“아악!”

등골이 오싹한 짧은 비명과 함께 다리 사이에서 아이 손바닥만 한 타원형의 흰 알집이 미끈하게 빠져나왔다. 투명하고 끈적한 점액질에 젖은 알집은 안이 훤히 비쳤다. 알집 안에 빼곡한 알은 건강해 보였으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다른 수개미와 장군 개미의 씨물을 받지 않고 오로지 흰개미의 씨물만 받아 낸 탓이다.

멀거니 뜬 공주의 눈에서 맑은 눈물 한 줄기가 주룩 흘렀다. 흰개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혀를 내밀어 그녀의 눈물을 길게 핥아 올렸다. 그러고는 곧 죽을 사람처럼 헐떡거리는 그녀의 입에 입술을 포개고 땀이 촉촉하게 밴 몸을 어루만졌다.

예전에 비해 상태가 이상하고 시들어 있긴 하지만 산란 한 번으로 위험하지는 않을 텐데 이상하다.

텅 빈 유리 같은 공주의 얼굴이 아무래도 신경 쓰여 일개미는 미리 준비해 둔 천에 알집을 싸면서도 그녀를 힐끗거렸다. 꼭 그대로 숨이 넘어가 벌어진 입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다. 흰개미는 빠져나갈 영혼도 붙잡아 올 기세로 요한나를 쭉쭉 빨아 댔다.

일개미는 무서운 것이라도 본 양 휙 고개를 돌렸다. 이개미, 삼개미와 함께 공주가 낳은 알집을 돌보면서도 답답한 가슴을 가눌 수 없었다.

애써 알집에 집중했다. 크기는 작았지만 우화하면 훌륭한 일족의 일꾼이 될 터였다. 수는 많아도 부실한 석굴 개미 공주의 알집보다 백 배는 낫다.

알집에 붙은 점액을 정성스레 닦던 일개미의 청각을 미세한 소리가 자극했다. 보지 말자고 결심했으면서도 호기심에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 근육이 빠져 마른 팔다리로 흰개미를 밀어 내는 공주가 보였다.

“꺼져…….”

잔뜩 잠겨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색색거렸다. 흰개미는 공주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녀에게서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꺼질 듯 숨을 내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본 일개미의 손이 움찔 멈추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고통이 밀려든다. 일개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흰개미의 고통이 느껴진다.

정신이 팔린 손으로 느리게 알집의 껍질을 찢자 탱글탱글한 알이 쏟아져 나왔다. 이개미와 삼개미가 품에 알을 조심히 안고 일개미에게 눈짓했다. 따뜻하고 안락한 토굴 방으로 알을 옮겨야 할 때였다.

그들이 먼저 빠져나가고 일개미는 미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도 흰개미는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개미는 고심하며 품에 안은 뽀얗고 매끄러운 알을 내려다보았다. 알은 일족의 희망이다. 여왕이든, 공주든, 장군 개미든, 수개미든, 일꾼개미든 할 것 없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다.

자신이 할 일을 빼앗은 흰개미가 못마땅할 때도 있었지만 동경의 대상이 공주에게 내침받는 건 마음에 걸렸다.

공주도 그렇고, 흰개미까지 왜 이러는 거야. 어떻게 하면 예전처럼 만들 수 있을까?

일개미는 작은 뇌를 열심히 굴리다 품에 안은 알에 신경이 미쳤다. 무지해서 순수한 눈이 반짝였다.

‘이거다!’

토굴 바닥에 부산스러운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흰개미가 고개를 들어 얼쩡거리는 일개미를 보았다. 일개미는 기다렸다는 듯 무심한 얼굴 앞에 알을 들이밀었다. 활짝 웃는 얼굴은 흰개미가 이쪽으로 관심을 돌릴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흰개미의 보호하에 일꾼개미로 성장한 일개미는 흰개미가 일족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용맹한 장군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렸을 땐 그 특이한 외양과 돌연변이라는 이유로 일족에게 외면당한 흰개미지만 탈피 후 힘을 발휘하면서부터는 달라졌다. 그래도 그는 배척받은 적 없다는 듯이 일족에 봉사했다.

개인의 욕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가 위하는 건 오로지 일족의 번영이었다. 마치 그것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맹목적이었다.

그는 장군 개미 중에서도 알을 소중히 여겼다. 쇠약한 알이라고 버리는 일이 없었다. 수개미가 되지 못한다면 일꾼개미로라도 써먹었다. 무정해서 두려운 것과 별개로 같은 일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이 알은 그의 씨물로 태어난 알이 아닌가. 공동 양육 하는 이 토굴에서 태어난 개미가 누구의 씨냐는 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나 공주에게 각별한 흰개미에게만큼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터였다. 과거의 검은 개미가 그랬듯이 말이다.

과연, 그의 예상이 맞아 들어 흰개미는 알을 집어 들었다. 따뜻한 알을 핥아 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일개미는 안도하며 흰개미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알을 던지기 전까지.

깜짝 놀란 일개미는 허공을 나는 알을 가까스로 품에 안았다.

“흰개미!”

상대가 무시무시한 장군 개미라는 것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살살! 조심!”

알이 깨지면 어떡하려고!

빽빽 소리를 지르는 일개미는 심드렁한 흰개미를 보고 당황했다.

알은 일족의 희망이다. 알이 없으면 일족은 존속하지 못한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흰개미일 텐데, 마치 필요 없는 것을 내버리듯 알을 내던진 그를 일개미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개미의 반응이 어떻든, 흰개미는 그의 씨물로 태어난 알에는 관심이 없었다. 공주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의 옆에 몸을 붙이듯 누워 아직 땀이 마르지 않은 살결을 핥고 머리칼을 비볐다.

식어 가는 알을 품에 안은 채, 일개미는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든 듯한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포갠 흰개미와 혼혈 공주를 보는데, 어디서 기인하는지 모를 서늘한 불길함이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갑각 표피를 얼어붙게 했다.

공주는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흰개미는, 그런 공주에게 미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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