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9)

12

“요한나?”

“……어?”

“괜찮은 거야?”

요한나는 눈을 끔벅거렸다. 손가락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숟가락을 바렌타가 쑥 빼서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약간 남은 수프가 말라붙은 그릇에서 유등의 노르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빛이 찬란한 밤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동그랗게 뜬 보름달을 멍하니 보는데, 바렌타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건조한 살갗이 맞물렸다가 건조하게 떨어진다.

“달이 밝아. 밤 산책 하기에 딱 좋은 날인데 어때?”

“……미안. 몸이 좀 안 좋아.”

“음, 그런 것 같네.”

바렌타를 보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적어도 바렌타 앞에서는.

억지로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 왔어?”

“좀 전에 왔어.”

“오늘은 바빠서 못 올 줄 알았어.”

“바빠도 와야지.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나 아니면 누가 확인해?”

바렌타가 장난스럽게 피식 웃었다. 버릇처럼 그를 따라 웃음소리를 냈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문득 바렌타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내 손을 들어 뺨을 만지작거렸다. 침중한 시선이 낯설어 당황스럽다. 속눈썹이 나비가 날갯짓하듯 움직였다.

“바렌타?”

그가 조용히 속삭인다.

“뺨이 차가운데. 아직 밤에는 날이 추워. 벽난로는 장식으로 있는 게 아니라고.”

“아, 깜빡 잊었어.”

“잊을 게 따로 있지. 아직 몸도 안 좋은 녀석이.”

그러고는 몸을 돌려 벽난로로 걸어갔다. 옆에 쌓아 둔 장작 몇 개를 난로 안으로 집어넣고 사그라진 불씨를 키웠다. 요한나는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뺨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따뜻하다. 바렌타의 손은 여전히, 제대로 따뜻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비집고 나올 것 같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요한나.”

장작 하나를 더 집어넣고 바렌타가 말했다.

“응.”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시선이 그의 뒷모습에 못 박힌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전에 천둥처럼 울렸다.

뭐지?

왜 저런 걸 묻는 거지?

뭘 알고 있나?

설마 내 ‘배’를 알아챈 걸까?

나보다 빨리?

설마, 설마 그럴 리가.

머릿속이 정신없이 헝클어지려는 그때.

“뭘 먹고 있기는 한 거야?”

“…….”

“사다 둔 음식 재료들이 거의 안 줄었던데.”

아, 그걸 말하는 건가.

싸늘한 안도감이 가슴을 스친다. 무심코 배에 올려 둔 손을 꽉 그러쥐었다.

진심으로 이 안에 있는 걸 없애 버리고 싶다.

“힘든 일이 있었다는 건 알지만,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 줘.”

바렌타가 몸을 돌렸다. 불씨를 올리는 벽난로 앞에 선 그는 후광을 두른 위대한 자같이 반짝거렸다. 요한나는 홀린 듯이 그를 응시했다.

“고민이 있으면 말해. 난 네가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애써 덤덤히 말하던 바렌타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요한나의 엉덩이가 움찔했다.

“아니, 솔직히 말할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요즘 널 보면 자꾸 초조해져.”

멍하니 따라 말했다.

“초조해진다고?”

바렌타가 짙은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럼 아닐 거라고 생각해? 너, 그렇게 살이 빠졌으면서…….”

시원하게 뻗은 이마를 찡그린다.

“네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말해 주지 않으니 난 몰라. 하지만 누구한테라도 털어놓으면 속이 훨씬 가벼워질 거야. 상처를 후벼 팔 생각은 없지만…….”

“…….”

요한나는 똑바로 부딪쳐 오는 시선에 그만 눈을 감아 버릴 뻔했다. 토굴의 어두움이 이 두 눈을 잠식한 걸까. 바렌타가 너무 환해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예전의 넌 지금보다 훨씬 솔직했어. 내 눈도…… 똑바로 바라봤잖아.”

“…….”

“네가 걱정돼, 난.”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의 건조한 입술이 들썩였다.

“왜?”

“응?”

“왜 날 그렇게 걱정해?”

“…….”

바들거리는 입술을 안으로 오므렸다가 빠르게 뱉었다.

“네가 마을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가진 건 알아. 하지만 난…… 난 정식으로 이곳의 일원이 된 게 아니잖아. 아직도 난 검은 산맥의 사냥꾼이야.”

“예전 얘기잖아, 요한나.”

“지금도 같아!”

“…….”

“사냥꾼다운 일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아도, 바렌타가 내게 책임감을 가질 이유가 없어. 약속했던 그날도,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내 잘못이고.”

“네가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

요한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랐다. 온화했던 인상이 사라지고 굳어진 바렌타의 갈색 눈동자는 차갑게 굳어 있었다.

“사고였어, 요한나. 그렇게 될까 봐, 불안해서 널 어떻게든 내 곁에 두고 싶었는데 늦어 버린 건 네 탓이 아니라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내가 네게 책임감을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 그럴 필요는 없어. 네가 예전보다 더 바빠진 건 알고 있어. 나랑 같이 있으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어. 난 네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짐이 된다고 생각하면 끔찍해.”

잘도 지껄이는구나.

요한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바렌타 외엔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주제에. 끔찍한 괴물 소굴에서도 그의 존재에만 매달린 주제에. 그가 없었으면 1년은커녕 그 반도 버티지 못했을 거면서. 존재만으로도 안도이며 감사인 바렌타에게,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거짓말로 둘러댄다.

‘날 지겹게 여기지 말아 줘.’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혐오스럽다.

“차라리 마을에 오지 않았더라면…….”

“요한나!”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바렌타가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바싹 세운 손톱에 핏물과 함께 살갗이 엉겨 붙어 있었다. 뒤늦게 목이 따끔거린다.

“그런 말 하지 마. 네 말이 맞아. 단순히 몇 년 알고 지낸 사이에서 가질 만한 책임감은 아니야.”

“그럼 왜…….”

떨리는 목소리에 바렌타가 무겁게 되물었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

“널 좋아하니까.”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올곧은 눈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예전처럼, 아직도 널 좋아하니까.”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강력한 힘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충동질한다. 그 바람이 몸속까지 세차게 불어와서, 끝끝내 모른 척하려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네겐 이슬라가 있잖아.”

“……뭐?”

바렌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열정적인 갈색의 눈동자가 찌푸린 눈꺼풀에 가려진다. 난감해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양 머릿속이 착 가라앉았다. 한결 냉정해진 마음이 속삭인다.

인간은 포장을 할 수 있는 존재. 이성적으로 굴 수 있는 존재다.

과연 바렌타가 누가 봐도 완벽한 아내가 될 이슬라보다 음침한 자신을 택할까.

한참의 침묵 후 그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아버지가 강권하셨을 때 제대로 거절하지 못했지. 미안해. 네가 알고 있을 줄 몰랐어. 최근에 네 태도가 이상해진 건 그것 때문이야?”

“…….”

“그런 거였구나.”

중얼거린 바렌타가 무심코 손을 빼려는 그녀의 손등을 꽉 붙잡았다.

“그때는 너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어. 자포자기했던 상황이라……. 하지만 만났잖아. 다시 만나게 됐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 있겠어?”

“잘할 거야, 바렌타는. 나 아닌 다른 여자와도.”

자신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씁쓸한 표정에 바렌타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럴 생각 없어. 이슬라에겐 내가 제대로 얘기할게. 넌 신경 쓰지 마.”

“…….”

“좋아해, 요한나.”

정말로 너는, 날 선택해 줄까.

“마을에 내려왔던 널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어.”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도, 날 선택해 줄까.

요한나의 눈이 일순 흐릿해졌다.

초조했다. 불안했다. 간신히 얻어 낸 인간의 삶은 제 것이 아닌 다른 세상의 것처럼 묘연했다. 속이 받아들이지 않는 음식. 그럼에도 밤마다 갈구하는 ‘달콤한 맛’.

가끔 벽난로의 빛이나 햇볕이 너무 밝아 눈이 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와 반평생을 함께 지냈던 아버지는 기괴한 성벽을 가져 충인인 어머니를 간살했다. 난 그 역겨운 행위의 결과물이다.

‘내게는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충인의 피가 섞여 있어.’

다 털어놓지는 못하더라도, 은연중에 생각나는 아버지의 죄는 고백하고 싶었다. 수도사에게 하는 고해 성사 따위 필요 없다. 오로지 단 한 사람, 나의 태양, 나의 공기, 나의 숨 쉴 곳. 가장 소중한 너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다면…….

‘바렌타라면 날 이해해 줄 수 있을 거야.’

이번에도 사고일 뿐이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말해 줄 것 같았다.

“뭐 할 말 있어?”

하지만 입은 아교를 붙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바렌타의 다정한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흰개미처럼 투명하고 매끄럽진 않아도, 그에게선 태양의 냄새가 났다. 햇볕 아래서 언제까지고 당당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그를, 누가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뺨에 설탕처럼 얹어진 약간의 주근깨도 못 견디게 만지고 싶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그의 곁에 머물면서 얼굴을 만질 수 있단 사실이 행복해서 때때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나는 이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을 결코 참지 못할 거야.’

뿌리가 썩어 가는데 버틸 나무는 없고, 발이 문드러지는데 뛸 수 있는 짐승도 없다.

“아니야, 바렌타.”

“…….”

“날 생각해서 해 준 말은 고마워. 고민해 볼게.”

“……그래.”

바렌타가 입꼬리를 올렸다. 초승달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엷은 미소였다. 요한나는 무심코 멀어지는 그의 손을 붙들었다.

“바렌타!”

“응.”

“그, 저기, 정말 고마워. 내가 용기가 나면, 다 정리가 되면, 그때는, 꼭 모두 얘기할게.”

용기?

정리?

과연 그런 때가 올까?

마음 한구석에서 비웃는 소리를 무시하며 그녀는 되돌아온 그의 미소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몸이 좋아지면 다음엔 꼭 산책하자. 산책하기 좋은 길을 알거든. 검은 산맥과 달리 이 마을은 내가 꽉 잡고 있으니까.”

“미안해. 오늘 나가지 못해서.”

“그게 뭐가 미안할 일이야. 상관없어. 보름달은 매달 뜨는 거고, 넌 이제 계속 내 곁에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해 줘서 내가 얼마나 안도하고, 또 불안해지는지 넌 모르겠지.

요한나는 말없이 웃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창문 밖으로 환한 보름달과 점점이 박힌 별을 바라보았다.

“달은 이렇게 봐도 예쁘네.”

“응…….”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와 달리 요한나는 달구경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고 있어.’

오며 가며 몇 번 얼굴을 마주쳤을까? 마을 청년 몇 명이 이쪽을 흘끗거리는 게 보였다. 어스름한 시야에 예민해져 착각하는 건 아닐까.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무색하게 이쪽을 손가락질하는 모양은 너무나도 선명히 보였다.

빤히 쳐다보자 뒤늦게 눈치챈 청년들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지?’

그냥 구경하는 게 아니다.

‘어째서 이쪽을 관찰하고 있는 거지?’

불길해.

“커튼.”

“응?”

“커튼을 사야겠어, 바렌타.”

요한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여기 창문은 너무 커.”

다 보고 있는 것 같아.

혐오스러운 이 내 모습을.

* * *

그녀가 걷는다.

산양처럼 투박한 발걸음은 힘이 어려 있다.

발길은 푸줏간 앞에서 멈추었다.

몸집이 큰 무뚝뚝한 주인 여자에게서 우유를 산다.

아무 말도 없이 돈을 내민다.

푸줏간을 등진 걸음은 다른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느리다. 그러다가 점점 빨라진다.

머무는 곳은 감자 몇 알 겨우 심을 수 있는 밭이 딸린, 툭 치면 쓰러질 듯한 집이다.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솥이나, 컵이나, 의자, 침대, 낡은 러그……. 최근에는 커튼까지 생겼다.

‘치워 버리고 싶다.’

탁.

문이 닫히자 흰개미의 미끈한 눈썹 끝이 미묘하게 내려갔다. 커튼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좀처럼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어 성가시다. 굳이 보겠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대장간의 붉은 지붕 위에 앉아 있던 흰개미는 몸을 일으켰다. 키가 큰 사내가 우뚝 서 있는데도 마을 사람들은 바쁘게 자기 할 일을 하느라 그를 인식하지 못했다. 비단 분주한 일상 때문만이 아니라 고요한 그의 존재감이 사람들의 신경에 걸리지 않는 탓이었다.

흰개미는 마을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인간의 마을은 한 집 한 집이 개미의 토굴과 같다.

열 명, 스무 명이나 되는 인간들이 한집에 우글우글 모여 살며 가축을 기르고 우유를 짜고 밀과 과일을 키워 자식을 낳고 지낸다. 그런 집이 이곳에는 열 채가 넘는다. 개미 사회로 따지면 소규모 토굴이 열 개가 넘는 셈이다.

가축을 쫓아다니느라, 식사 준비하느라, 감자를 캐느라 북적대는 인간의 토굴에서 시선을 뗀 붉은 눈이 비교적 고요한 그녀의 토굴에 닿았다.

혼자인 그녀는 수면에 떨어진 가냘픈 이파리 한 장 같다. 아무리 이파리가 수면을 배회해도 영원히 섞이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흰개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그다지 세상사에 호기심이 없는 편이나 그녀에 관해서만큼은 궁금증이 적잖이 피어올랐다. 아마도 이해할 수 없어서이기 때문일 거다.

왜 이런 곳에 그토록 돌아오길 원했을까.

‘아직까진 모르겠어.’

흰개미는 무표정했다. 이곳을 찾은 그날부터 내내 그랬다.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난 인간이야. 그렇게 말했었다. 너희와는 달라. 그야 다르겠지. 인간은 겁이 많고 연약하다. 무기를 들지 않으면 검은 산맥의 살쾡이 하나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미욱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인간’은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굳이 특징을 꼽자면 거짓말을 잘한다는 점일까.

“그게, 포장, 을 의미하는 건가?”

머릿속은 명쾌하지 못하고 미지근하다. 그녀가 떠난 후 계속 이 상태다. 흰개미는 날개를 펼치며 다른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둔한 인간들은 그의 기척을 잡을 수 없겠지만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눈에 띄는 경우는 종종 있어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인간의 마을은 개미들에게 불가침의 영역이다. 굳이 인간을 습격할 필요가 없거니와 맞붙게 된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마을 경계의 울타리엔 날카로운 유리 가루가 촘촘히 묻어 있다. 끄트머리가 뾰족해서 마치 인간들의 무기 같은 울타리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개미에게 천적인 뭔가를 뿌려 놨다.

인간들은 머리가 좋다. 개미들이 하나를 생각한다면 그들은 두 개, 세 개를 생각한다. 그게 진정으로 인간들이 성가신 점이다.

보통이라면 아무리 장군 계급일지라도 인간의 마을에 단신으로 숨어 들어갈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만 흰개미는 조금도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두 번이 아닌 데다가 벌써 며칠이 넘게 인간 마을을 배회하고 있는 탓이다.

배가 고프면 적당히 검은 산맥에 올라 해결하고, 심심하면 요한나를 시선으로 좇는다. 지루하지만 쉬운 나날이다. 그런데도 흰개미는 뭔가 목구멍에 걸린 듯 가슴이 답답했다.

검은 산맥을 향해 날아오르며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이성적, 인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녀. 요한나는 공주의 혼롓날을 끔찍하게 여겼다. 교미할 때는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기분은 좋아 보였지만.’

검은 산맥의 들판에 내려앉았다. 인기척을 느끼고 달려들던 마수는 입을 쩍 벌리다 말고 펑, 머리가 터졌다.

손에 흐르는 마물의 체액을 핥았다. 쓰다. 그녀의 체액은 달콤했는데.

나는 지금 인간처럼 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여전히 괴물처럼?

흰개미는 그가 좋아하는 식물의 줄기를 잡아 뜯으며 계속해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다. 그녀가 개미들의 ‘본능적 행위’를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구는 것.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가장 큰 구별점일까.

“인간적, 이라면, 나는?”

우적우적 줄기를 씹어 먹었다. 본능적으로 굴었다면 마을의 인간들을 때려 죽이고 그녀를 되찾아 왔을 텐데 그러고 있지 않다. 충분히 인간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가.

흰개미의 입꼬리가 미소를 짓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녀는 뭐라고 대꾸할까?

“언제쯤 데려갈 수, 있지.”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고 있다. 인간의 영양식을 제대로 섭취하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제법 자신의 영양식에 익숙해져 있으니 다른 게 입에 맞지 않는 것일 거다.

“아직은, 아닌가?”

석굴 개미 수백을 터뜨려 죽이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토굴에 없었다. 검은 개미는 그녀가 도망쳤다고 말했다. 하마터면 그렇게 말하는 그를 죽일 뻔했다.

‘거슬려, 검은 개미.’

죽일 이유가 없어 내버려 뒀지만, 왜인지 전과 달리 볼 때마다 짜증이 난다.

인상을 찡그린 그는 곧 검은 개미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그보다는 사라진 공주를 되찾아 오는 게 우선이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희미해진 페로몬을 쫓아 인간의 마을에 닿았다. 처음에는 당장 그녀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돌아간다면 일꾼개미를 더 많이 붙여 놔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밝은 햇살 아래를 걷고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팔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어쩐지 데려갈 생각이 사라져서.

토굴의 광석이 내는 희미한 빛보다, 타오르는 태양 빛이 그녀에겐 더 잘 어울렸다.

그런 그녀를 보는 건 기이한 감흥을 안겼다. 그러나 그 마음은 오래지 않아 씻은 듯 사라졌다.

“그 인간, 사내…….”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외로운 그녀의 토굴을 드나드는 유일한 사내. 그럴 때마다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은 흰개미에게 낯설기 짝이 없었다.

한 번, 그 미소를 그에게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있었을 때 나는 단지 입술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심장이 터질 뻔했어. 그와는 절대 너처럼 발가벗고 사람들 앞에서 교미할 수 없을 거야.’

어느새 줄기를 씹던 것도 멈추었다.

따끔.

일순 가슴이 저릿했다.

“흠.”

고개를 갸웃한 흰개미는 남은 줄기를 말끔히 먹어 치웠다.

오늘은 토굴에 들러야 한다. 검은 개미가 보낸 일꾼개미들이 마을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그에겐 일족을 번성시키는 개미로서의 의무가 있다.

‘요한나는 일단 마을에 있으니까, 잠깐 두고 다녀올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모든 게 다 귀찮아졌다.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그녀를 오래 두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일족이 성가시게 느껴진다. 진액이 묻은 손을 털며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았지만 돌아가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머리가 시키는 이성과 가슴이 시키는 감성의 괴리가 흰개미는 혼란스럽다.

그는 마을이 있는 쪽을 한 번 보고, 반대편으로 날아올랐다. 검은 산맥이 그림자를 꿈틀거리며 그의 기척을 삼켰다.

검은 개미의 어둠으로 빚은 듯한 새카만 눈동자는 평소보다도 어두웠다. 미간에는 주름이 어려 있었고 커다란 콧잔등은 잔뜩 찌푸려졌다. 금방이라도 성질을 바락 부릴 것처럼 부푼 몸집은 위압감을 조성하여 일꾼개미들은 물론이거니와 장군 개미들도 그를 슬슬 피해 다녔다. 그렇게 된 지 꽤 되었다.

간신히 뺏어 온 석굴 개미의 공주가 영 비실비실한 게 문제였다. 페로몬 교체의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던 탓이다. 이렇게 됐으니 보나 마나 산란할 알집도 연약할 터였다.

공주가 아니라 여왕을 납치해 와야 했다고 장군들이 한탄했다. 하지만 공주는 여럿이고 여왕은 하나다. 공주는 여왕 후보일 뿐이었다. 여왕을 뺏는다는 건 공주를 납치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네가, 나와, 같이 갔어야, 했다.”

오랜만에 토굴을 찾은 흰개미는 불만스럽게 으르렁거리는 검은 개미를 무심하게 훑어보았다.

“석굴 개미들을, 치러 갈 때, 너도, 있었어야, 했어.”

석굴 개미 공주의 페로몬 교체 실패로 흰개미를 향한 검은 개미의 불만은 끊임이 없었다. 흰개미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무시하자 검은 개미의 눈썹이 사정없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꼬리를 미묘하게 늘인다.

“잡종, 에게, 가?”

그제야 흰개미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잡종이, 멍청하기까지 하군. 금방 들켜서는.”

검은 개미가 쯧, 혀를 찼다. 오만한 시선이 흰개미에게 닿았다.

“네 행동은, 내, 생각과, 아주, 달라. 의심스러워, 의심, 스러워.”

“…….”

“그녀는, 더는, 공주가, 아니야. 넌, 그녀를, 만나선, 안, 돼.”

“…….”

“어째서, 죽이지, 않아?”

흰개미는 검은 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왜 죽여야, 하지?”

반질반질한 홍안에 검은 개미가 유쾌한 듯 입을 벌렸다.

“이제, 필요, 없으니까!”

“…….”

“원래의, 너라면, 진즉, 죽여, 없애야, 했어. 그래서, 난, 네가, 의심스럽다.”

흰개미가 미소 짓자 검은 개미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왜 웃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너의 공주도, 필요가 없다.”

요즘 심기가 불편했던 원인을 따끔하게 꼬집자 검은 개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흰개미는 태연하게 그의 속을 후벼 팠다.

“지금의 공주는, 공주가, 아니야. 그것은 여전히 석굴 개미의 공주다.”

검은 개미가 이를 드러냈다.

“그럼, 데려와. 석굴, 개미의, 여―왕을!”

“무리다.”

단호한 대답에 검은 개미가 으르렁거렸다.

“거짓, 말. 넌, 할, 수, 있어.”

“토굴 개미에겐, 토굴, 개미의, 여왕이 있다. 요한나가, 있어.”

흰개미의 말에 검은 개미는 불만을 가득 담은 얼굴이 되었다.

“그 잡종을 다시, 데리고, 오려는, 거냐?”

“…….”

“데리고, 와서, 뭘, 어쩌려, 고?”

“요한나는 돌아와서, 나와, 교미해야 해. 내, 씨물을 받고, 알을…….”

“알?”

검은 개미의 목소리가 토굴에 이질적으로 울렸다. 문득 그것이 거슬렸다. 마치 그게 가능하겠냐는 듯이, 우스워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흰개미는 곰곰이 생각했다. 요한나가 공주로서, 여왕으로서 귀환한다면 일족을 위해 알을 낳아 줘야 한다. 그러려면 또 다수의 수개미와 교미해야 할 거다. 군대가 생긴 지금은 처음에 실패했던 공주의 혼롓날도 치를 수가 있다. 다른 군락의 씨물을 받아서 많은 알을…….

흰개미는 생각을 멈추었다. 어쩐지 폭발할 것 같았다.

“그 계집은, 또, 알을, 낳느니, 차라리 우리를 죽이고, 자기도, 죽어, 버릴, 걸.”

“아니야.”

흰개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요한나는, 강해.”

개미들은 자살이란 말을 모른다. 그 단어를 아는 건 인간과 접촉했던 몇몇 수개미들과 장군 개미들일 뿐이다. 그들도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모를 거다. 일족의 의무에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평생 제 역할을 다하는 그들에게 자살은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바보 같은, 흰, 개미. 그래서, 그것에게 집착, 해?”

“그런 적, 없어.”

“그것은, 연약하고, 교활한, 인간, 사냥꾼일, 뿐…….”

바보 같은 흰개미. 쇳소리가 불쾌하게 울리는 토굴을 떠나 흰개미는 인간의 마을로 날아갔다.

뺨을 스치는 상쾌한 봄바람을 느끼며 그는 공주의 혼롓날, 요한나가 비행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웃는 것을 보았다.

돌연 궁금해졌다.

요한나는 지금 혼자 있을까?

웃고 있을까?

* * *

그는 굴뚝에 사뿐 내려앉았다. 마침 희미한 목소리가 잿빛 연기 속에 섞여 흘러나왔다.

“바렌타! 아무리 맛이 없어도 토할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건 아니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치즈가 이렇게 물컹한 건 좀 그렇지 않아?”

“오두막에 있을 땐 만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 빵엔 뭘 발라 먹었는데?”

“발라 먹긴 뭘 발라 먹어. 그냥 고기를 얹어 먹었어.”

“역시 사냥꾼의 딸…….”

“사냥꾼이거든?”

“전직 사냥꾼이잖아.”

“지금이라도 나가서 사냥해 올까?”

“미안 미안. 제발 쉬어 줘라.”

흰개미는 굴뚝 옆에 가만히 앉아 귀를 쫑긋했다. 대화에 섞인 요한나의 목소리만이 선명히 들렸다. 뚱한 목소리도, 거품처럼 터지는 웃음소리도 모두 처음 듣는 것뿐이다. 그게 신기하고, 또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서…….

파삭!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붕을 이루고 있던 벽돌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쯤 그녀를 토굴로 데려갈 수 있을까?

매일 고민한다.

이 웃음소리는 듣기가 좋다.

하지만 짜증이 나기도 해.

왜지?

그녀의 웃음을 보는 건 꽤 좋아.

하지만 역시 짜증이 나.

듣고, 보고, 만지고 싶어.

지금 당장.

흰개미는 무표정하게 손에 든 지붕의 잔해를 털어 버렸다.

매우 귀찮고 비합리적인 생각의 극단이 머릿속을 오가고 있다. 단순하고 단조로웠던 머릿속의 혼란스러움이 낯설다. 뭔가 얹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손으로 가슴을 쾅 쳤다.

그때 집 안에서 솟아나는 목소리가 벌처럼 날아왔다.

“이젠 제법 농담도 할 줄 알게 됐네.”

“……그래?”

“응. 요즘 계속 얼굴이 좋지 않아서 걱정했다고.”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인걸. 건강 빼면 시체야.”

“알지. 그래서 좋아.”

“뭐라고?”

“그래서 좋다고, 요한나. 항상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하는 것도 좋아.”

“너, 너는 그 말이 너무 쉽잖아. 알고 보면 바람둥이인 거 아니야?”

“네가 첫사랑인 사람한테 서운하게 무슨 소리야? 몰랐다는 얼굴은 또 뭐야. 괜히 나도 부끄럽잖아.”

“그럼 부끄러운 말을 하지 마.”

“좋아. 대신 너도 얘기해 주면 그만둘게.”

“그걸 꼭 말로 해야 해?”

“말로 듣고 싶으니까.”

갑작스러운 침묵에 흰개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도 이를 악물어 지끈거리는 턱을 손으로 주물렀다.

“말 안 해.”

“그래도 돼. 말 안 해도 아니까.”

“눈 감은 채로 말하지 마. 졸리면 잠깐 자고 가. 깨워 줄 테니까.”

“딴소리하기는…….”

정말 처음 듣는 목소리뿐이다.

흰개미는 무릎에 턱을 괴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좋아.”

아니, 달라. 인간 사내의 목소리는 이것보다는 좀 더…….

“네가, 좋아, 요, 한나.”

가슴이 콱 막힌 것 같다. 흰개미는 손으로 심장께를 쥐었다.

“네가, 좋아. 요한나.”

그래.

네가 좋아, 요한나.

“나, 요한나가, 좋아.”

흰개미는 한참 지붕에 앉아 있다가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가 되어서야 바닥에 내려섰다. 창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커튼 사이 살짝 벌어진 틈에 투명한 홍안이 나타났다.

커튼 안쪽에서는 요한나가 식탁에 엎드려 잠든 인간 사내의 뺨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

살짝 입을 벌렸다.

“저게, 이유, 인가.”

촛불에 그림자가 일렁이는 요한나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의 말랑말랑한 입술이 몇 번이나 닿는 인간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흰개미는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고요한 얼굴로, 가만히.

* * *

봄철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바쁘다. 그들의 요구와 보고를 하나하나 들어 주는 책임자는 더더욱 바쁘다. 대장간이며 농장이며 밀밭 따위를 정신없이 오가며 일하는 바렌타의 구릿빛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튜닉 주머니를 훑던 바렌타의 손에 삐죽 튀어나온 천 자락이 걸렸다. 손수건이었다. 빳빳한 천은 새것이었다.

“내가 언제 손수건을 여기다 넣어 놨지?”

고개를 갸웃하며 손수건을 펼친 바렌타는 구석 자리에 새겨진 필기체 ‘E’를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이 나면 요한나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느라 집에 머무는 시간은 밤에 잘 때뿐이다. 그 전에 이슬라가 들러서 갖다 놓았나 보았다. 다른 데 두면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가 자주 입는 옷까지 찾아 주머니에 넣는 꼼꼼함을 가진 건 그녀 말고는 없다.

웃던 것도 잠시, 금세 난감한 얼굴이 된 바렌타가 턱을 긁적였다. 3일 전에 깎은 턱은 벌써 수염이 잡초처럼 자라 까끌까끌했다.

“이제 이런 거 하지 말라니까.”

총인구가 300을 넘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또래 아이들은 모두 친구처럼 자랐다. 지위가 지위인지라 이 마을에 그가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슬라는 제일 똑 부러진다.

거처 문제만 해도 그렇다. 별택을 빌려주기 전에는 ‘너희 집 책을 많이 빌려 봤으니 보답으로 난 네 도시락을 만들어 줄게.’라든지 별택을 빌려준 후에는 ‘네가 바쁘니까 집 청소를 해 줄게.’라든지 하는 말로 어떻게든 보답하려고 들었다.

‘좀 편하게 받아들여도 될 텐데 말이야.’

친구니까 그럴 필요는 없다는데도 고집을 꺾지 않는 그녀에게 그도 두 손을 들었다. 빚을 지기 싫다는 성격을 어떻게 꺾을 수 있을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역시 똑 부러져.”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이슬라가 손수 만들어 사용하는 예의 그 향기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았다.

소꿉친구였던 이슬라와 약혼하고, 또 얼마 전에 파혼했다. 파장이 일어날까 아직 정식으로 아버지에게 고하지는 않았지만 이슬라와는 얘기가 된 상태다.

‘이제 아버지도 날 믿고 계시니, 더는 결혼으로 믿음을 살 필요는 없는 것 같아.’

‘파혼하자는 말이지? 좋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라니까, 참.’

‘다른 말이 더 있어?’

‘그건 아닌데.’

‘그럼 끝까지 들을 필요 없네, 뭐. 됐어. 네 말대로 아저씨도 이제 결혼으로 널 옭아맬 수 없으실 테니까. 내 말이 맞지? 약혼하면 아저씨가 안심하실 거라고.’

‘네 말이 틀린 적이 있냐.’

‘알고 있다니 다행이야. 바렌타, 그럼 한마디만 더 할게.’

‘뭔데?’

‘파혼했다는 건 당분간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

‘왜?’

‘알잖아. 아직 요한나에게 쏠리는 관심이 곱지 않다는 거. 우리가 파혼했다는 게 알려지면 그녀가 더 힘들어질 거야.’

차분했던 이슬라의 얼굴을 떠올린 바렌타는 ‘흐음’ 생각에 잠겼다.

‘설마 상처받은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이슬라는 마음이 잘 맞는 오랜 친구다. 그녀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하지만, 좀…… 걸린단 말이지.’

튜닉 주머니에 손수건을 대충 쑤셔 넣었다. 역시 괜한 생각이다. 제게 다른 마음이 있었으면 그렇게 산뜻하게 파혼하자고 안 했을 것이다. 어쨌든 아직은 요한나에게도 그녀와 파혼했다고 하지 않은 상황이다. 딱히 이슬라의 말을 따랐다기보다는.

‘요한나의 얼굴을 보면 생각이 싹 날아가 버려서.’

아, 보고 싶다.

쑥스러움에 땀이 배어 나온 머리를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머리칼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어찌 됐건 파혼에 대해서는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슬라는 다른 친구들이 요한나를 꺼릴 때 유일하게 중립을 유지하던 아이였다.

‘바르도가 있더라면 요한나의 좋은 친구가 되어 줬을 텐데.’

아무리 고집을 피워도 다른 지역으로 장가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동생인 바르도가 이슬라와 결혼했다면 좋았을 터였다.

쩝, 입맛을 다신 바렌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꽃향기를 맡고 있으려니 뜬금없이 요한나가 생각이 난다. 이슬라와 달리 그녀에겐 꽃향기가 나지 않는다.

예전의 요한나에게선 기름 냄새와 땀 냄새가 났다.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체취였으나 이상하게도 그게 마음을 끌었다. 사냥꾼의 체취 때문인지 작은 짐승 같아 보이기도 했고, 반질거리는 새카만 눈동자가 조약돌처럼 느껴져서 자꾸만 생각이 났다. 예전 얘기다.

요즘의 그녀에겐 청량한 냄새가 난다. 마치 깨끗한 호수 바닥에서 하늘거리며 살아가는 수초 같은 냄새다.

‘왜 갑자기 체취가 변했을까?’

기적처럼 다시 돌아온 그녀는 어쩐지 예전의 그녀와 사뭇 달라서,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생각에 빠진 그를 향해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다가왔다.

“바렌타.”

이름이 불린 바렌타가 고개를 들자 세니아의 남편 한네스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바렌타의 앞까지 오고는 언덕을 넘어오느라 턱까지 찬 숨을 고른다.

“한참 찾았다고. 대장간에 갔더니 밀밭에 가 있다고 하질 않나, 밀밭에 갔더니 농장에 갔다고 하질 않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밤에 집으로 찾아오면 됐잖아?”

“밤에 나가면 세니아가 이렇게 쳐다본단 말이다.”

한네스가 험상궂은 눈꼬리에 손가락을 걸어 위로 치켜올렸다. 바렌타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술 마시느라 집에 늦게 가서 그런 거지.”

“어허, 오해할 말 말아. 요즘은 입에도 안 댔어.”

바렌타가 짓궂게 웃었다.

“한 방울도 말이냐?”

“난 술은 두 병 이상부터 친다.”

“하여간 치안대장이 이렇게 뺀질대서야. 최근에는 성실해진 것 같더니.”

“그야 충인들이 자주 나타나니까. 하아, 안 그래도 그 일로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바렌타는 곤혹스러움과 난처함이 떠도는 한네스의 얼굴을 보고 입가의 미소를 거두었다.

“치안대 일과 관련된 거야?”

그의 진지해진 표정에 한네스도 얼굴을 굳혔다. 이 마을은 근처의 마을에 비해서도 규모가 작은 편이었지만 지금 주축의 위치가 된 것은 바렌타의 수완 덕이다.

‘원래도 책임감 있던 녀석이 최근 몇 년 사이 더 무서워져서는.’

마을을 위해선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바렌타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에 관해서는 무조건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가 이슬라를 내버려 두고 사냥꾼 계집을 끼고 있는 이 상황도 그저 지켜보고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응, 맞아. 심각하지 않을까 하는데.”

두 남자는 서로를 또렷이 직시했다.

“내 사견으로는, 전에 없을 만큼 최악의 상황인 것 같다.”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 신중한 성격으로 치안대장에도 임명된 한네스다. 그의 망설임 없는 경고에 바렌타의 낯빛이 일변했다.

* * *

하악하악.

목구멍에서 뜨거운 숨이 들끓었다. 요한나는 자신이 깔고 앉아 있는 사내의 우락부락한 등을 내려다보았다. 계절에 따라 얇아진 옷감은 어깨의 거친 움직임을 그대로 드러냈다.

남자가 사납게 몸을 꿈틀거렸다. 요한나는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남자의 손목을 더 강하게 틀었다. 바닥에 깔린 채 등 뒤로 손을 제압당한 남자의 낯빛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마물과 붙어먹은 년이, 감히 무슨 짓이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지?”

고기를 사러 나왔을 뿐이었다. 자신이야 빵이든 고기든 채소든 별 감흥이 없어졌지만, 살을 찌우는 데는 고기가 최고 아닌가. 바렌타가 자신을 힐끗거리는 게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것 같아 든든한 식사를 준비하려고 했던 참인데, 물건을 사러 돌아가는 길에 습격당할 줄이야.

‘이상하네. 치안대가 있을 텐데 대낮부터 이런 놈들이 활개를 치다니.’

요한나는 등 뒤를 흘끗했다. 남자의 일행 두 명이 골목길을 막고 있었다. 요한나를 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장 격인 남자가 힘도 한 번 못 쓰고 제압당했으니 위축될 만했다.

“너희, 전부터 우리 집을 쳐다보던 놈들이지?”

“으윽!”

요한나는 남자의 손이 등에 닿게끔 손목을 꺾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수작 부리지 마. 이대로 치안대에 넘길 테니까.”

“큭큭.”

요한나가 눈썹을 휘었다. 남자는 한쪽 뺨이 바닥에 뭉개진 채 퉁방울 같은 눈을 요한나에게 고정했다.

“치안대를 기다려?”

“그래.”

“누구를 위해서?”

“……?”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치안대가 온다면 날 구하기 위해 오겠지. 마물의 첩자일지도 모르는 검은 산맥의 사냥꾼보다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알아차렸어도, 그 이유는 모르겠나 보지?”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어서 그런 거잖아.”

“잘 알고 있네. 2년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가 마물의 사체와 함께 나타난 널 뭘 믿고?”

남자의 눈에 독기가 스며들었다. 요한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눈을 잘 알고 있다. 검은 산맥의 맹수들에 대항해서 창대를 꼬나쥐는 인간들의 눈, 그 눈이다. 적을 바라보는 시선.

뒤늦게 남자가 자신을 습격한 데 이유가 따로 있음을 깨달았다.

좁아진 목구멍 사이로 목소리가 불편하게 새어 나왔다.

“내가 마물로 보여?”

“흥, 검은 산맥은 어떤 해괴한 괴물이 살고 있는지 모르는 곳이야. 인간의 뇌를 좋을 대로 주물러서 꼭두각시처럼 굴리는 괴물이 있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넌 발견됐을 당시 ‘그런’ 상태였잖아. 네가 마물의 씨라도 배고 있을지 누가 알아!”

요한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물의 첩자나 꼭두각시 같은 말도 안 되는 말은 코웃음으로 넘겨 버릴 수 있으나 마지막 말은 예외였다.

배가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그녀가 굳어진 틈을 타 벗어나려고 하는 남자의 손을 무의식적으로 세게 쥐었다.

“으아아악!”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에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남자의 손목엔 벌써 새빨간 띠가 남아 있었다.

공주화가 되며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했다는 건 느꼈지만 흰개미에게는 아무리 해도 통하지 않아 큰 실감은 하지 못했는데 고통스러워하는 남자를 보자 알 수밖에 없었다. 기쁘기는커녕 손끝이 차가워진다.

“이봐. 상태를 한번…….”

“거기! 물러서지 못하겠나!”

요한나는 휙 고개를 뒤로 돌렸다. 마을의 입구에서 종종 보던 텁석부리 장한이 골목길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골목길을 지키고 있던 남자들은 그가 나타나자 잽싸게 양옆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치안대군.’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화가 나 있는 걸 보니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듯하다.

‘난감하네.’

그래도 잘못이 없으니 별일은 없겠지. 요한나는 차분히 결박한 손을 풀고 남자의 위에서 내려왔다.

“자네, 괜찮은가?”

치안대원이 끙끙 앓는 남자의 신음에 얼굴을 굳혔다. 이래서는 오해만 사겠다 싶어 요한나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설명해 드릴게요.”

“내 대원을 그렇게 뭉개고 있으면서 무슨 설명을 하겠단 거지?”

보통 대원이 아닌 치안대장이었나 보다.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이 남자가 치안대라고?”

“그래. 이 친구는 치안대원이다. 내 명령으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지.”

치안대장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검은 산맥의 사냥꾼, 요한나.”

“하지만 어째서…….”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자신을 향한 남자의 적의와 경계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요한나.”

일단 대화를 시도하려던 요한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바렌타가 굳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 * *

평소와 달리 오두막은 숨 막히는 정적으로 가득했다. 요한나는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은 채 맞은편의 바렌타를 바라보았다. 그는 담배 대신에 담뱃잎을 입에 물고 있었다.

“이게 아니라 진짜 담배를 피웠다면 나았을까.”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요한나는 덜컥 겁이 났다. 바렌타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에게서 담배 냄새를 맡아 본 적도,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담배를 찾다니.

“나 지금 무슨 오해를 사고 있는 거야?”

“…….”

“날 지켜보고 있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넌 알고 있었어?”

“…….”

“바렌타.”

기분 탓인지 그의 낯빛도 어두운 것 같았다. 아니, 아닌가. 최근의 그는 항상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담뱃잎을 씹던 바렌타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에 요한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치안대 말로는 개미가 우리 마을에 침입한 것 같대.”

“…….”

“그들 생각으론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고.”

“…….”

“치안대장이, 그러니까 한네스는, 그게 너인 것 같대.”

“…….”

“말도 안 되지?”

“…….”

“요한나.”

“……응.”

“그 장갑, 벗어 줄 수 있을까.”

요한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중얼거렸다.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징그러운 흉터가…….”

“요한나.”

말허리를 자른 억눌린 목소리에 그녀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진흙을 꾹꾹 밟아 대는 것처럼 그의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날 바보 취급 하지 마, 요한나.”

“…….”

“일부러 기만하려는 게 아니라면, 제발.”

요한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그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가, 악문 턱이, 도드라지는 광대가, 그의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릿속이 텅 비었다. 제발. 사랑하는 사람이 뱉은 두 글자가 그녀를 무장 해제시켰다.

“장갑을…….”

요한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죽 장갑은 잘 벗겨지지 않지만, 혹시 실수로라도 안쪽이 드러나지 않도록 손목을 고무줄로 감아 놓기까지 했다. 한 몸처럼 붙어 있는 장갑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번졌다.

바렌타가 이쪽을 보고 있다. 요한나는 왼손의 장갑 끄트머리를 잡았다. 더, 더 느리게 하고 싶은데. 때를 늦추고 싶은데, 그녀가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무줄을 풀고 장갑을 벗으려는 순간, 요한나는 손을 떼고 도리질 쳤다.

“나중에, 바렌타. 정말. 흉터가 사라지면, 그때 보여 줄……!”

벌떡 일어난 바렌타가 장갑을 벗겼다.

장갑이, 벗겨졌다.

소리 없는 비명 속에서 요한나는 재빨리 손을 뺐다. 그러나 곧장 바렌타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떨쳐 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바렌타를 거부하는 일은 그녀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손을 돌리게 했다.

피투성이였던 손등은 깨끗했다. 그러나 그것을 내려다보는 바렌타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녀가 그토록 꺼리던 흉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비늘이 손등을 덮고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언뜻 파충류 따위의 비늘 같은 것이. 검은 산맥을 자주 접하는 자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다.

갑각 표피.

자신도 오랜만에 보는 그 ‘흔적’에 요한나는 숨이 턱 막혔다. 바렌타의 침묵에 목이 졸렸다.

“나는, 인간이야.”

누가 목을 움켜쥔 듯, 거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흰개미에게 힘주어 말했던 그때처럼 요한나는 말했다. 호소했다.

“나는 인간이야.”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바렌타, 나는……!”

제발. 너만 나를 긍정해 준다면.

눈이 마주쳤다. 요한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내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바렌타가 일그러진 눈을 휙 돌렸다. 그의 눈에 담겨 있던 그녀의 모습도 사라졌다.

‘너만 나를 긍정해 준다면, 다른 건 다 필요 없는데.’

소망이 헛되이 스러져 갔다. 바렌타가 입술을 달싹였다. 욕설인 것 같았다.

그 순간 잠시간 증발한 듯했던 공기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동시에 요한나의 입 속에 소리가 밀물처럼 와글와글 차올랐다.

“다, 다 얘기할게. 원래는 이런 거 없었어. 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열일곱 살이 됐을 때 크게 아파서…….”

“됐어, 그만해.”

“앓고 나서 일어나 보니까 모든 게 달라져 있었어. 바렌타, 기억하지? 내가 그날 산맥에서 내려왔을 때 네가 나를…….”

“그만하라고!”

“어?”

바렌타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기세에 원목 의자가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요한나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녀의 시선이 소리 없이 의자에 닿았다. 그가 만들어 주었던 의자다. 이곳에 있는 모든 가구는 그가 손수 만들어 준 것이다. 바렌타는 그 모든 걸 뒤로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여기, 가만히 있어. 요한나.”

“바렌타?”

“잠깐, 생각 정리 좀 하고 올 테니까.”

“바렌타.”

“따라오지 마!”

요한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멈추었다. 그에게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폭력적인 외침에 피가 식었다. 얼어붙은 그녀를 향한 바렌타의 눈이 일그러졌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비틀거리면서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요한나는 멀어지는 바렌타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열린 문 사이로 봄바람답지 않게 뼈를 엘 듯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발바닥은 땅에 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요한나는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발밑이 어두웠다. 발밑만이 아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햇빛이 들어왔던 오두막은 새카맣게 어두웠다. 어느새 벽난로의 불씨도 꺼져 있었다.

불을 피워야 하는데, 생각했지만 요한나는 망연히 자리를 지켰다.

‘인간이 아니었어.’

바렌타의 눈에 비친 자신은, 인간이 아니었다.

‘아아, 경멸당해 버렸다.’

글자가 머릿속에 쾅쾅 울렸다.

경멸한다. 그가.

충인을 증오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다정함에 취해, 한 번 정도는 기대해 보기도 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용서해 주지 않을까?

내가 충인의 피를 이은 건 내 탓이 아니니까.

현명한 바렌타라면, 자상한 바렌타라면, 내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 주고…… 괜찮다고 해 주지 않을까?

창백했던 낯이 마침내 일그러졌다.

‘바보 같은 꿈이었어!’

그녀는 유령처럼 일어났다. 아까는 접착제라도 붙인 듯 꿈쩍하지 않았던 발이 하늘을 부유하듯 움직였다.

뭘 하고 싶은지조차 모른 채, 누굴 찾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며 요한나는 최초의 소망을 떠올렸다.

토굴에 갇혀 있었던 그때, 당초 소망했던 것은 바렌타에게 인사를 남기는 것뿐이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게 너무 달콤해서, 마을의 일원처럼 있는 지금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일이라서 한쪽 눈을 감고 있었다.

인사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너무 늦지 않았다면.

주먹 쥔 손이 긴장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바렌타를 만나자. 그래서 가능하다면, 널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하자.’

속일 생각은……. 아니, 그렇게 해서라도 네 곁에 있고 싶었다고.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냥, 그냥…… 친절하게 대해 줘서 고마웠다고. 그래. 그 정도만 말하자. 그리고 떠나자. 검은 산맥으로.

바렌타가 처음 만났을 때만큼, 그때만큼의 친절한 미소를 보여 준다면, 마지막으로 그걸 볼 수 있다면, 그 기억을 평생 안고 홀로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발이 땅에 닿지 않은 것처럼 고요하게 다가오는 그녀를 발견한 치안대원들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어이, 어딜 가는 거야? 안에 처박혀 있으란 말 못 들었어?”

요한나는 달려드는 사내들을 피해 다리를 놀렸다. 종아리의 근육이 산양처럼 도드라졌다.

“잡아. 도망친다!”

다섯 명의 사내들은 정면과 측면에 각각 자리 잡았다. 사내들이 두려워 뒤로 물러서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몰이사냥이군.’

험악하게 표정을 구기며 한 발짝씩 압박하는 사내들을 보는 요한나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것이야말로 괴물 취급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바렌타의 지시를 받은 사내들을 그녀는 빛이 죽어 까맣기만 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절대 여기서 나가게 하면 안 돼.”

“이봐, 바렌타의 말을 들었을 거 아니야? 얌전히 들어가 있어.”

“바렌타는 어디 있는데?”

자그마한 읊조림에 사내가 얼굴을 구겼다.

“너 같은 게 그걸 알아서 뭘 하려고? 네 처우는 바렌타가 다른 사람과 의논해서 정할 거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다.”

우락부락한 몸집의 사내가 몸을 더욱 부풀리며 다가왔다. 평범한 여인네라면 그 기세에 지레 놀라 뒷걸음쳤을 테지만 요한나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를 올려다보며 눈을 번뜩였다.

새카만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간 예기에 움찔 놀란 사내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요한나가 움직였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미끄러지듯 달려들어 정면의 사내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미간 사이를 강하게 때리자 사내는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기절했다. 사내들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괴물 자식!”

그대로 일어난 요한나는 기겁한 사내들이 달려드는 것보다 더 민첩하게 움직였다. 틈을 파고들어 급소를 노리는 그녀의 움직임은 맹금처럼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아무리 청년 중 덩치가 크고 날쌔다 하더라도 본업은 농사꾼인 치안대가 태어났을 때부터 사냥꾼이었던 그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괴, 괴물…….”

순식간에 다섯 명의 사내를 기절시킨 요한나는 멀리서 달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는 오렌지색 지붕을 바라보았다. 불어오는 써늘한 바람에 어느새 등을 드리울 정도로 자란 머리카락이 너울처럼 흩날렸다.

오렌지색 지붕. 2년 전에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롯타 질레이의 눈을 피해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 바렌타의 집이다. 노랗게 빛나는 저택의 등불이 요한나의 눈동자에 태양처럼 고였다. 쓰러진 사내들은 이미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주문처럼 중얼거린다.

“바렌타가 벌써 날 버렸을 리 없어.”

오렌지색 지붕을 향해 달려 나갔다. 달릴 때마다 조금 헐거운 신발이 벗겨질 듯 말 듯 했다. 귀찮아져 신발을 벗어 던지고 굳은살 가득한 맨발로 어둠이 소리를 먹어 치운 먹먹한 밤거리를 지나쳤다.

“날 괴물로 여겼다면 치안대에게 무기라도 들게 했을 거야. 진짜 괴물은 사람 몇 명 가지고는 뭘 어쩌지 못한다는 걸 바렌타는 알고 있으니까.”

근거 없는 희망이 훅 불면 꺼질 안개처럼 샘솟았다. 그래도 그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마저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까.

질레이 가문의 저택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요한나는 간절한 얼굴로 높이 솟은 돌담에 달라붙었다. 귀족가가 아닌 질레이 가문은 따로 호위병을 두지는 않았지만, 담장이 높아 아무나 들락거릴 수 없는 형태였다.

돌담은 표면이 거칠다. 미끄럽지는 않으나 틈이 없어 손끝을 제대로 박아 넣을 수가 없었다.

장갑이 벽에서 자꾸만 미끄러지자 초조해진 요한나는 발가락이 90도로 꺾일 정도로 힘주어 돌담에 붙이고 힘겹게 담을 올랐다.

간신히 돌담 끝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너는 차기 후계자다. 아니, 이젠 실질적인 우리 마을의 촌장이야.”

까랑까랑한 목소리. 요한나는 돌담 위로 살짝 머리를 내밀었다. 간신히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인다.

우뚝 서 있는 그녀는 짙은 색 곱슬머리에 매부리코를 한 부리부리한 인상이다. 키가 크고 깡말라 몹시도 완고해 보였다. 마을의 단 하나뿐인 도서관의 주인이자 바렌타의 고모 나타샤.

요한나는 자신을 볼 때마다 더러운 벌레라도 본 듯 싫은 기색으로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를 기억했다.

“네 동생의 집으로 요양 간 롯타를 생각하면 이러고 있을 수 없다. 네 대에는 준귀족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타샤.”

“네가 그 여자 때문에 혼을 빼 놓은 것 같으니 하는 말이야!”

양과 염소, 튼튼한 젖소와 말을 번식시키고 옆 마을에 팔며 규모를 키운 축사의 젊은 주인인 팔레가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곰보 같은 피부를 문지르며 동조했다.

“나타샤 아주머니의 말이 맞아, 바렌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당장 명령을 내려. 마물과 붙어먹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계집을 쫓아내야 한다고.”

“쫓아내기는! 그러다가 자기 동료를 끌고 오면 어떻게 하려고? 충인이 들이닥치면 이런 작은 마을은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할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모르게 죽여 버려야 해.”

“맞아. 그렇게 해야 해.”

“그 방법밖에 없어.”

머리가 어지럽다. 자신을 향한 악의가 형체를 얻어 돌담 안쪽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몸이 떨리는 한편 의문이었다.

‘어째서 날 이렇게 싫어해?’

인간은 지능이 높고 뛰어나다. 그냥 동물과는 다르다.

‘그런데 어째서, 그 높은 지능을 내게는 활용하지 않을까?’

그녀는 아직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단지 마을과 동떨어진 사냥꾼으로 살아왔을 뿐이고, 충인의 피가 섞인 혼혈일 뿐이다.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더라도 존재 자체로 미움받는 거라면. 아, 이렇게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적의가 또 있을까.

심각한 얼굴로 토론하는 마을 사람들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2년 전에는 좋아하지 않더라도 싫어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뜰에 모여 있는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바란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바렌타.’

눈물이 솟구쳤다. 피로한 음성에 가슴이 철렁하는 한편 사무치게 애틋한 마음이 들끓었다.

“네가 고민하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처지가 불쌍한 여자애를 거두어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건만 정말 그 불길한 사냥꾼 따위를 좋아하기라도 했던 거야?”

쿵, 쿵.

가슴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뛴다. 바렌타는 몇 번이고 말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2년 전에도 그 달콤한 말을 귓가에 흘려 넣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말은 그녀를 꿀에 갇힌 벌처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가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오로지 그녀의 앞에서만이었다.

‘네 마음을 듣고 싶어.’

요한나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에게 변명할 기회만 있으면 된다고 했으면서, 가당찮은 욕심을 부리는 스스로를 비웃었지만, 어쩔 수 없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마음을 고백했으면 하고 바랐다. 자신을 싫어하고 증오하고 죽었으면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 준다면, 정말이지 더는 바랄 것이 없다.

바렌타의 침묵이 길어졌다. 요한나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돌담의 끄트머리를 붙잡으며 귀를 기울였다.

‘나를 좋아한다고 해 줘. 내가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버텼던 원동력인 네가, 그렇게 말해 줘. 내가 인간인지 괴물인지, 이제는 나조차 헷갈리려고 해. 하지만 네가 날 좋아한다고 말해 준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인간일 수 있어.

돌담 위로 요한나의 머리가 더 높이 솟아올랐다. 자칫 잘못하다간 들킬 수 있을 만큼 아슬아슬한 자세였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환하게 밝힌 등불로 둘러싸인 뜰 안쪽에, 두 손으로 얼굴을 짚은 바렌타가 보였기 때문에.

와글와글한 주민들 사이에서 그는 홀로 고독해 보였다. 안쓰러워서 심장이 저릿하다.

그때 하얗고 가녀린 손이 그의 어깨를 감싼다.

“고민이 깊은 걸 잘 알아, 바렌타. 그러니 하나만 생각해. 네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요한나의 눈이 커졌다. 격앙된 사람들 틈에서 유일하게 침착한 그녀는, 이슬라다. 그녀가 바렌타의 어깨에 올린 손을 토닥인다. 그를 위로하듯 부드럽고 안온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요한나에게 선명히 부딪쳐 왔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

“…….”

“더 소중한 게 요한나인지, 아니면 나, 네가 평생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주민들인지.”

한참 침묵에 잠겼던 바렌타가 씁쓸한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가 없잖아.”

서글픈 기색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요한나에게 닿았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러지 마.’

그가 얼굴을 묻었던 손을 내리고 이슬라의 손을 붙잡는다. 맞닿은 손이 눈을 찌른다.

‘아마도 마지막일 이 순간에까지.’

혼란이 가시고 또렷해지는 다정하지만 굳건한 갈색의 눈동자가 가슴을 후벼 팠다.

‘잔인해지지는 말아 줘.’

“당연히 네가, 내 동료들이 더 소중해.”

머릿속에 쩡―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신음을 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렌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이 번뜩였다.

‘내가 그에게 뭐라고? 감히, 뭐라고.’

놀라서 커진 갈색 눈동자를 보는데 허허로움이 파도처럼 마음으로 밀려왔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와 함께했던, 그녀의 인생에서 더없이 찬란하고 소중했던 몇 년의 시간이 태양에 타오르는 새벽의 이슬처럼 증발한다. 그 자리에 남은 건 한낱 먼지처럼 비굴한 비감뿐.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벌레들이나 알 낳는 기계로 필요한 이 몸에, 누구에게도 소중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몸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가 마을 사람들보다, 이슬라보다 날 우선시하겠어?’

그 순간 어찌 된 일인지 흰개미가 떠올랐지만 나타날 때보다도 빠르게 사라졌다. 일족의 번영을 위해 저를 알 까는 고깃덩이 취급을 한 괴물은 분노를 유발하기만 할 뿐이었다.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머릿속은 곧 텅 비었다. 슬픔에 가득 차 다른 생각을 떠올릴 여유가 없다. 지독한 허무함이 그녀에게서 생기를 앗아 갔다.

“저 더러운 것이 여기까지 어떻게!”

치안대장의 분개한 목소리도 아무런 자극이 되지 못했다.

“한네스!”

바렌타가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다음 순간, 고각궁의 짧은 화살이 그녀의 어깨를 완전히 관통했다.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어깨에 치달았다. 어린 짐승처럼 작게 신음을 내지른 요한나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쿵!

흙바닥에 그대로 나뒹굴었다. 욱신거리는 손발의 통증과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센 어깨의 고통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지체할 수는 없었다. 돌담 안쪽이 소란스러웠다.

“당장 잡아야 해!”

비틀거리며 일어난 요한나는 상처 입은 짐승들이 그러하듯 사람들을 피해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평소보다 왜소해진 그녀가 등을 돌려 도망치자 그 뒤를 횃불을 든 장정들이 뒤쫓았다.

“요한나!”

이름이 불린 기분이 들었지만, 착각이라 치부하며 요한나는 발을 빠르게 놀렸다.

현실이 아닌 허공을 걷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굳은살이 박인 발바닥은 날카로운 돌 따위를 밟아 피를 내고 있음에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몽롱한 상황 속에서 뇌리를 지배하는 것은 잡혀선 안 된다는 강박이었다.

이 상황에서 더 끔찍해질 상황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바렌타와 이슬라 앞에서 작살에 꿰인 짐승처럼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비참한 꼴의 괴물로만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 *

해가 어스름하게 떠오르는 새벽녘, 콧등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힘없이 떨어졌다. 푸른빛 공기 중에서 서늘하게 높아진 습도의 냄새를 맡았다. 새벽이슬은 버려지고 쫓기는 그녀의 마음을 아스라이 채웠다.

어둠이 물러가고 밝아진 사위와 달리, 속은 허허로움과 체념으로 가득했다.

‘검은 산맥에서 혼자 살아가자고?’

정신없이 바렌타를 찾으며 떠올렸던 생각을 되새긴 그녀는 픽 비웃음을 흘렸다.

적막한 숲의 공기는 어릴 때처럼 안락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편안함은 고독함이 되고 기분 좋게 적절한 기온은 싸늘함이 되어 몸을 식게 했다.

‘나는 분명 혼자 살아갈 수 있었을 거야.’

예전이라면 이보다 더한 험지를 굴러도 튼튼했을 발은 어느새 부드럽고 물러져 돌덩이를 밟은 것만으로도 피를 보였다.

‘바렌타를 몰랐더라면, 그랬을 거야.’

사람들 틈에서 사는 삶의 동경을 몰랐더라면. 그 삶의 따뜻함과 다채로움을 몰랐더라면.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맛을 보았다. 만져 보았다.

혼자 살아왔던 그 시절이 아득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오두막이 너절해 보이고, 거부감 없이 먹었던 밀가루 빵이 그저 딱딱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이미 변해 버렸다.

타인의 온기 없는 삶의 고독함을 알아 버린 지금,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때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짜부라질 듯하고 한 치 앞길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향하는 양 막막했다.

어째서 바렌타에게 집착했는지, 마을을 그리워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바렌타의 곁에서 이미 깨달아 버렸던 거다.

* * *

타박타박, 비척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나무 그늘 아래를 빠져나온 발에 어스름한 빛이 드리워졌다.

빽빽한 소나무 군락을 지나온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도망치기만을 앞세운 발은 핏물로 족적을 남겼고, 뾰족한 나뭇가지에 쓸린 팔다리는 생채기로 얼룩덜룩하며 머리카락에는 나뭇잎이 엉켜 지저분했다.

욱신거리는 몸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요한나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깎아지른 듯 험준한 절벽에선 검은 산맥의 울창한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요한나는 절벽의 끝자락에 선 채 새벽하늘 아래 봄의 신록을 온몸으로 내뿜는 검은 산맥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 해진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치릇.

뒤편에서 미세한 소리가 났다. 보통 사람이라면 짐승의 소리겠거니 치부했을 그 소리는 그녀에게 퍽 익숙한 것이었다. 요한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무의 그늘이 끝나는 곳을 밟고, 흰개미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아무런 웃음도, 분노도, 살기도, 생명체라면 응당 보여야 할 존재감을 죽인 그는 언뜻 보면 시체나 조각상 따위가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람에 나부끼는 흰 머리칼과 부드러운 짐승의 모피와 그에 대비되는 엷은 홍옥의 눈동자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일단 시선이 멎으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 그럼 적당히 망가진 느낌이 들어야 할 텐데 눈 하나 정도는 영향받지도 않는다는 듯 여상한 얼굴이 요한나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두 눈을 다 찔러 버렸어야 했어. 그랬다면 지금 날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 아니야. 눈 병신이 되었다면 이렇게 보기 싫지도 않을 텐데…….’

그녀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파괴적인 감정이 넘쳐흐른다.

“요한나.”

눈이 마주친 흰개미가 한 발짝 다가오자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다가오지 마.”

그는 곧이곧대로 명령을 듣는 병정처럼 멈춰 섰다. 그러고는 깎아지르는 험준한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왜, 거기 그러고, 있지?”

인간의 감정이라곤 엿보이지 않는 그 발간 눈동자가 소름이 끼쳤다. 물음은 그저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개미들의 눈동자는 홍채와 동공의 경계가 없다. 하나 검은 잉크를 넓게 찍은 것처럼 새카맣기만 한 검은 개미의 눈동자보다도 더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안이 들여다보일 것처럼 투명하면서도 이따금 무지하고 무심해서 더 잔인하게 빛나는 무기질의 홍안이었다.

“가자.”

“어디로?”

인간의 것 같지 않은 흰개미의 모습과 무심한 어조에 멍하니 대꾸했던 요한나는 다음 말에 픽 웃어 버렸다.

“토굴로.”

“싫어.”

“…….”

“가지 않아.”

더는 분노도 일지 않았다. 가슴은 통째로 잘라 들어내 버린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무와 공허에 점철된 그녀의 낯은 파리하고 창백했다. 조용히 새어 나오는 숨결은 그믐밤의 달빛처럼 아스라하기만 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흰개미가 한쪽 눈썹을 미미하게 꿈틀했다.

“그럼, 어디로, 갈, 거지?”

“…….”

“어차피, 인간들에겐, 돌아가지 못, 하잖아?”

요한나는 흰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놈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리던 흰개미는 끝내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하는 수 없이 다시 물었다.

“더 지내고, 싶어?”

“…….”

“그렇다면, 데려다줄게.”

“하하…….”

느닷없는 웃음에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 하하. 하하하.”

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새벽하늘에 스러지는 이슬처럼 허허로운 웃음이었다.

뚝, 웃음을 그친 그녀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내 생각보다 교활하구나, 흰개미. 네가 이렇게 되길 꾸몄으면서 이제 와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라니.”

천천히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흰개미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

“단지 널, 보고, 있었을 뿐…….”

“그것부터가 문제야!”

싸늘한 일갈이 새벽하늘을 날카롭게 갈랐다.

그녀는 흰개미와의 이 정도 거리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절벽 위는 협소했고 운신의 폭이 좁았다. 몇 걸음 더 움직이기도 전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흰개미는 그녀의 발이 위치한 공간을 가늠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요한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빠르게 지껄였다.

“사람들이 봤다던 개미들은 널 찾으러 온 놈들이지? 검은 개미가 날 찾기 위해 개미를 보냈을 리 없어. 네가 문제야. 네가 날 찾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 버린 거야.”

꽃망울이 터지듯 까만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져 샘솟았다. 화사한 꽃향기 대신 우울함과 비참함이 묻은 눈물은 움푹 들어간 뺨을 순식간에 흠뻑 적셨다. 흰개미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희미한 새벽 어스름에 둘러싸인 그녀의 창백한 뺨이 은은히 빛난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이 곧 사라지고 말 듯한 별처럼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움직이지, 마. 위험해.”

“뭘 걱정하는 거야?”

요한나는 뚝뚝 흐르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읊조렸다. 푸른 신록 아래 두 다리를 뻗고 당당히 선 모습이 강인했던 그녀였으나 어스름한 빛을 받은 채 소리 없이 우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기이한 불길함에 흰개미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새로운 공주가 있으니 더는 내가 필요하지 않잖아.”

요한나는 담담히 말했다. 원망도, 슬픔도 없었다. 드물게도 흰개미의 홍안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의 말대로 더는 요한나가 여왕이 되어 줄 필요는 없다.

토굴 개미들은 이미 재기할 힘을 얻었고, 그에게 한바탕 깨진 석굴 개미는 몸을 사리는 실정이다. 얼마든지 새로운 공주와 여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흰개미는 요한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절벽 끝자락에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한 요한나의 발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저도 모르게 움칠, 앞으로 발이 튀어 나갔다가 요한나의 차가운 눈과 마주치고 몸을 굳혔다. 그가 좁아진 목구멍에서 쉰 목소리를 꺼냈다.

“움직이지, 마.”

“…….”

“요한나는 아직, 필요해.”

“…….”

“새로운, 공주는, 약하다.”

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잘못된 대답이었을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떠오른 그녀의 희미한 미소에 혼란해졌다.

“그랬구나. 검은 개미가 통탄했겠는걸. 하하. 내가 다시 필요해졌단 말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

흰개미는 웬일인지 바짝 말라 오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요한나와의 거리는 변함이 없는데 어쩐지 밤하늘보다 까만 눈동자가 계속해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그녀의 모습이 망막에 아로새겨졌다.

“이거 하나는 다행인가? 더는 너희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거.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잖아.”

그녀는 흰개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흰개미는 드물게 얼굴을 찌그러트리고 한 걸음을 신중하게 뗐다. 이번에는 요한나가 움직이지 말라고 하더라도 듣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째서 요한나가 저렇게 위험한 짓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일꾼개미 따위는 손도 대지 못할 만큼 강했다. 그런 그녀가 섣부른 짓을 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흩날리는 옷자락이 신경을 갉작이고 있어 참을 수가 없었다. 영리한 원숭이도 자만하다가 나무에서 왕왕 떨어지곤 하지 않은가.

그녀를 절벽에서 떨어뜨려 놔야겠다고 생각하는 참에, 요한나가 제자리에 서서 몸을 굳혔다. 위험한 장난을 그만두려는 모양이다, 하고 흰개미는 안도했다.

하나 다음 순간, 요한나가 뒤로 한 걸음 크게 물렸다. 그곳은 발이 닿을 곳이 없는 허공이었다.

츠아아아아아.

절벽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흰 옷자락이 팔락팔락, 세찬 소리를 냈다. 몸이 완전히 떨어지려는 찰나 요한나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흰개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스스로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자였다. 그러나 간혹 그런 기행을 저지르는 이를 목격한 적은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였으니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살 마음이 없는 것은 그 순간 죽은 것과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무심함과 방관 속에 흘려보냈던 덧없는 생명이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흰개미는 전처럼 손 놓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날개를 크게 떨치고 속도를 내 요한나를 붙잡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의 손에 잡혔을 옷자락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그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잃어버린 한쪽 눈. 소실되어 회복되지 못한 방향 감각이 미세한 오차를 만들어 냈다.

흰개미는 제 손을 벗어나 떨어지는 요한나를 보았다. 그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극심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흰개미는 아래로 몸을 던졌다. 빠르게 쏘아지는 화살처럼 낙하하는 그의 손이 그녀를 향해 길게 뻗어졌다. 그녀가 손을 뻗으면 잡기가 수월하겠지만 그녀는 결코 손을 뻗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양 눈을 감기까지 했다. 고요한 그 얼굴에 생을 향한 의지는 터럭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늘 무심했던 흰개미의 눈동자가 타오르듯 붉어졌다. 날개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어깻죽지가 아파 왔다. 날개 끝이 갈라진다.

통증을 무시하고 한계까지 속도를 낸 흰개미의 손이 마침내 무섭게 펄럭거리는 옷자락을 잡아챘다.

찬 바람에 식은 육신이 흰개미의 품에 안겼다. 달처럼 하얗고 석굴처럼 단단한 팔이 그녀의 몸을 넝쿨처럼 옭아맸다. 강한 힘이 옥죄는데도 그녀의 감은 눈은 뜨이지 않았다.

코끝으로 그녀의 귀밑 맥박을 문지르고 인중을 입술로 더듬었다. 몸짓이 자못 필사적이다.

희미하지만 달콤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러자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흰개미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 * *

그녀는 금방 눈을 떴다. 고도가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숨이 부족했던 탓에 잠깐 기절했던 것뿐이었다.

익숙한 체취, 촉감에 여전히 흰개미의 품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지러운 머리와 울렁거리는 가슴.

‘토할 것 같아.’

그녀가 깨어났음을 알아챈 흰개미가 시선을 주었다. 홍채와 동공이 구별되지 않는, 햇볕을 받아 더 투명하게 빛나는 홍안에 요한나는 발작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녀를 옭아맨 흰개미의 팔다리는 마치 족쇄 같아서 공연히 힘만 빠질 뿐이었다.

“왜?”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위험하게 그러냐는 뜻인 걸까? 한쪽 눈을 빼앗았음에도 흰개미는 달라진 게 없었다.

무정하지만 순수하게 호기심을 품은 눈빛. 교감하지 못하는 눈동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버린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을 떠올리게 했다.

절망한 요한나는 짐승처럼 울었다. 분노했다. 절벽 위에서 텅 비었던 가슴이 빼앗긴 죽음 대신에 온갖 잡다하고 격한 감정으로 가득 차올랐다.

“흰개미.”

“응, 요한나.”

“제발 죽어 버려…….”

흰개미는 묵묵히 창공을 날았다. 자신을 저주하는 그녀를 잃을세라 꼭 끌어안고 그들의 안락한 토굴로 향했다.

그를 인간의 감정 따위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괴물이라고 숱하게 폄하했지만, 지금만큼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순간도 없었다. 죽으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흡족한 얼굴을 하다니.

“내 거.”

흰개미는 악을 쓰다 지쳐 헐떡이는 요한나의 열이 올라 따스한 이마에 턱을 비비며 속삭였다.

“요한나. 내 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