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9)

11

‘믿어지지가 않아.’

얼떨떨하다. 현실이 아닌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기이한 부유감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요한나는 억지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안심하기는 일러. 검은 개미의 속셈을 모르잖아. 이렇게 도망치게 해 놓고서 뒤에서 죽이려 들지도 모르지.’

휘이이이잉—

바람이 불자 날개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넝마처럼 펄럭거렸다. 하마터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나뒹굴 뻔했다. 요한나는 이를 갈며 커다란 떡갈나무의 가지를 붙잡았다. 검은 산맥은 대체로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겨울이 아닌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요한나는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검은 개미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는지 누군가 쫓아올 기미는 없다.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변모한 육체는 페로몬이 흘러나오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딜 가든 불안감에 떨 것이다.

‘검은 개미는 호수를 찾으라고 했지?’

그걸로 될까? 고민하던 요한나는 얼굴에 부딪혀 오는 바람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바람결에 꽃향기가 흐른다. 그녀는 상념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딱 이맘때쯤이 공주의 혼롓날이었던 것 같은데.’

토굴의 입구를 기어올랐을 때 살갗에 닿았던 건 봄의 풍요로운 향기. 잔혹한 검은 산맥도 깨어나는 계절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토굴 개미들에게 끌려간 지 1년 하고도 반년 정도 되었을까? 새로운 공주도 혼롓날을 맞이할 거다.

‘흰개미도 거기 참여하려나.’

일족을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이 공주의 임무. 싸늘했던 그때의 흰개미를 떠올리자 문득 그게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시간만 흘렀다. 답답하고 아득한 게,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 멍해졌던 그녀는 다시 세찬 바람을 맞고 정신을 차렸다. 머릿속 한구석이 계속 몽롱했다. 토굴에서 한참을 날아왔는데 아직도 그 답답한 공기에 반쯤 묻혀 있는 듯했다.

고개를 흔들어 기묘한 감상을 떨친 그녀는 바람을 피해 나뭇가지 사이로 비행했다. 더는 날개를 쓸 수 없을 때까지 알차게 사용할 예정이었다. 떡갈나무 군락을 지나자 광활한 푸른 들판이 펼쳐졌다.

치르, 치르릇.

날개에서 기이한 소리가 났다. 약해진 날개는 제대로 바람을 타지 못했다. 어어, 하는 순간 휙 미끄러진 요한나는 초록색 동산 위에 간신히 내려앉았다.

“젠장. 더 나는 건 무리겠네.”

날개의 상태를 확인하니 엉망진창이다. 더는 비행하기를 포기하고 숨을 골랐다. 토굴에서 나온 뒤 쉬지 않고 날아온 탓에 기진맥진했다.

검은 산맥은 숙련된 여행자들도 길을 찾기 어려운 험지였지만, 그녀가 거하던 곳은 손가락처럼 생긴 산등성이가 굽이치고 있어 비교적 알아보기 쉬웠다.

“여긴 어디쯤이지?”

얼추 방향은 맞는 것 같은데 자주 오가던 길이 아니다 보니 위치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느낌상 바렌타의 마을이 멀지는 않은 듯했다.

‘바로 마을로 들어가는 건…….’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고대했던 순간인데 막상 마을이 가까워져 오자 선득한 두려움이 닥쳤다.

괴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 상냥한 바렌타도 충인이라면 치를 떨지 않았는가. 문득 축 처진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인간이 아닌 흔적.

충인의 흔적.

그녀가 지금까지 뭘 했는지 드러내는 흔적.

만약 바렌타가 본다면.

머릿속이 새카맣게 변했다.

어느 순간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퍼뜩.

정신을 차린 요한나는 멍해졌다.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찢어진 날개가 들려 있었다. 날갯죽지가 욱신거린다. 날개는 뿌리만 남겨진 채였다. 눈빛에 의아함이 서린다.

‘왜 이 지경이 됐지?’

날개를 뜯는 순간의 기억이 통째로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까만 눈동자가 요동쳤다. 황급히 손을 털어 잔여물을 떨쳐 냈다. 억지로 상황을 ‘정상적으로’ 정리했다.

‘괜찮아. 어차피 더는 이용 가치가 없으니까. 잘했어.’

그러고도 잠시 굳어 있던 요한나는 이내 결심한 얼굴이 되어 날개 뿌리를 단단히 쥐었다. 그대로 힘을 주었다.

투둑.

흡사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내자 이번에는 손등의 갑각 표피가 들어왔다. 이건 뽑아 봤자 이틀이면 다시 자라나서 뽑을 필요가 없다.

그래도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손등의 갑각 표피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뜯어내는 동안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지막 하나까지 뜯어내자 손등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징그럽게 변한 손등보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고통보다, 괴물의 증거라고는 보이지 않는 살갗이 기뻐 요한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웃다가 울었다.

불현듯 깨달음이 밀어닥친다.

‘마을로 돌아갈 수 없어.’

이런 꼴로 어떻게 상냥한 바렌타에게 간단 말인가. 자신에게 친절했던 그를 속이기는 싫었다. 하지만 경멸당하는 것도 견딜 수 없다. 걱정하고 있겠지만, 갑자기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게 더 아름답게 기억될 테다. 괴물의 알을 잔뜩 낳은 너덜너덜한 몸보다는.

그럼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오두막…….’

태어났을 때부터 살았던 곳. 바렌타를 만나고는 외롭고 고독했던 장소로 남았으나 그래도 이때까지 그녀를 지켜 주었던 아늑한 공간이었다.

‘오두막으로 가자.’

잔뜩 흔들리던 마음이 간신히 진정되었다. 심신이 엉망진창인 지금은 복잡한 생각을 하기보다는 단순한 목적 하나를 설정해 두는 게 좋다.

요한나는 머릿속의 생각을 모두 지웠다. 흰개미, 검은 개미, 토굴, 바렌타에 대한 것들을 수면 아래 묻어 두고 몸을 일으켰다.

언덕을 내려가려는 순간, 코끝이 찡하게 아팠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에 감돈다.

‘뭐지, 이 냄새는?’

등골을 타고 섬뜩함이 내달렸다. 요한나는 머리가 명령하기에 앞서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바닥을 구르고 일어나자 거대한 초록색 칼날이 그녀가 있던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사아악!

털이 수북하게 난 칼은 인간의 팔다리쯤은 서걱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다. 요한나를 놓친 칼날이 허공을 마구잡이로 훑었다. 요한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앉아 있었던 초록색 동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칼날은 동산에서 뻗어 나와 있었다.

이윽고 동산이 들썩거리더니 뒤쪽에서 기다란 목이 올라왔다. 목 위의 세모꼴 머리에는 커다란 연두색 눈알이 달려 있었다. 그것이 입을 벌려 바람 소리 같은 괴성을 질렀다.

휘요오오옷!

주변과 비슷한 보호색으로 몸을 휘감고 먹잇감이 근처까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마귀를 닮은 이형의 마물이었다.

요한나는 즉각 몸을 낮추고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하나 온통 풀뿐이다.

기가 막히다. 어떻게 마물의 등을 밟고 앉을 생각을 했을까. 감이 녹슬어도 단단히 녹슬었다. 속으로 혀를 차는데 머리 위로 칼날이 재차 떨어졌다. 또다시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칼날, 즉 사마귀의 다리는 마치 자석처럼 그녀를 쫓아왔다.

‘어째서?’

이형의 마물은 시력이 좋지 못하다. 그런데도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쫓아오다니. 요한나는 금세 이유를 깨달았다.

‘냄새로 날 추적하고 있어.’

검은 산맥에서 사냥꾼으로 살며 사냥한 건 사냥감과 맹수만이 아니었다. 마물을 상대한 적은 몇 번이고 있다. 저 모습을 한 마물은 없었지만, 행동 양식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요한나는 당장 발밑의 풀을 뜯어 마구 짓이겨 몸에 덧발랐다. 뜯어낸 풀 아래 흙도 한 움큼 파서 얼굴과 머리에 문질렀다.

‘지금 저건 인간의 체취를 쫓는 걸까, 개미의 페로몬을 쫓는 걸까.’

궁금했지만 마물은 생각할 틈을 길게 주지 않았다. 대충 한 처치는 냄새를 완벽히 지우지 못해서, 칼날은 느려도 착실히 그녀를 따라왔다.

‘사방이 트인 들판에서는 승산이 없어.’

요한나는 재빨리 떡갈나무 군락으로 뛰어들었다. 영역을 벗어나면 사냥을 포기하는 마물도 있는데 이 마물은 그렇지도 않은지 군락으로 거대한 덩치를 들이밀었다.

미리 나뭇가지로 뛰어오른 요한나는 숨을 죽이고 아래를 지켜보았다. 마물이 긴 목을 나무 사이로 집어넣고 그녀를 찾는 듯 휘적거렸다. 좌우로 움직이던 목이 일순 멈칫하더니, 눈알이 위를 향했다.

휘릭!

반질반질한 눈알에 나뭇가지를 밟고 선 요한나의 모습이 정확하게 비친 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돌멩이를 넣고 쥔 주먹을 내리쳤다.

푸왁!

“휘요오…… 끅!”

눈알이 터지며 머리가 단숨에 함몰되었다. 축 늘어지는 목을 밟고 선 요한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개미들처럼 피부가 딱딱하지는 않네.”

하마터면 마물의 밥이 될 뻔했다. 괴물들의 소굴에서 간신히 탈출했는데 그런 허무한 결말을 맞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겠어.’

주변을 경계하는 요한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깊고 어두운 토굴에 갇혀 있는 동안 어느 순간 무뎌졌던 사냥꾼의 눈이었다.

그대로 들판의 영역에 들어가려다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휙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부서진 마물의 사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킁, 콧잔등을 실룩였다. 매캐한 냄새는 여전히 코끝을 감돌고 있었다. 살기와 함께 느꼈던 탄내는 마물의 체취다. 짙고 역한.

몸을 완전히 돌려 마물의 사체로 다가갔다. 녹색의 피부에 코를 파묻고 냄새를 맡자 탄내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팔을 들어 겨드랑이 냄새를 맡았다. 딱히 이상한 냄새가 나지는 않지만, 이건 코가 익숙해졌기 때문일 뿐 개미들의 페로몬 냄새가 풀풀 나고 있을 것이다.

‘검은 개미가 호수를 찾으라 그랬지.’

애석하게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물길은 발견할 수 없었다. 냄새를 지우는 게 아니라 다른 냄새로 덮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토굴에서 지내는 동안 개미의 체액을 위로도 아래로도 가득 받아 왔다. 내장까지도 페로몬에 절여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요한나의 눈이 귀신같이 변했다.

푸욱!

날카로운 손끝이 마물의 부드러운 피부를 찢었다. 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치덕거리는 살이 손바닥에 가득 잡혔다. 안쪽의 살은 반투명한 연두색을 띠고 있었다.

물컹한 살을 가득 쥐고 입으로 가져다 댔다. 비릿한 내음이 목구멍까지 가득 차자 속이 왈칵 뒤집혔다.

“우욱…….”

토기를 가라앉히고 마물의 살을 꾸역꾸역 삼켰다.

“웁, 우웁. 흐…….”

구역감이 올라와서 토를 하고 또 삼켰다.

먹다가 지치면 살을 왕창 꺼내서 온몸에 펴 발랐다. 그리고 다시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얼마나 그랬을까. 먹을 것이 아닌 것을 배 속에 들여놓은 대가로 복통이 해일같이 일었다.

“헉, 헉.”

주룩, 미끄러진 요한나는 바닥의 흙을 움켜쥔 채 헐떡였다. 시야가 노랗게 흐릿해진다.

그때 이질적인 소리가 울렸다.

자박.

‘또 마물이 왔나?’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다 배 속이 찌르는 듯이 아파 배를 붙잡고 신음했다. 그 소리가 그쪽까지 들렸는지,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거기 누구요?”

일그러졌던 요한나의 눈이 팽팽하게 뜨였다. 이윽고 매끈한 눈가에 투명하고 커다란 눈물이 고인다.

아아, 사람.

사람이다.

무려 1년 반 만에 만나는 사람이다.

* * *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회색의 연기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그건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던 그녀는 저녁 시간이 되면 집집마다 뿜어내는 굴뚝의 연기를 보는 것을 참 좋아했다.

사방에 구경거리가 넘쳤다.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버터 냄새가 그윽하게 풍기는 빵집. 창 너머 진열된 노릇한 빵.

비릿하고 뜨거운 쇠 냄새가 나는 대장간과 닭과 토끼, 돼지를 주렁주렁 달아 놓은 누린내 나는 푸줏간. 어린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예쁜 원석이 달린 장신구가 널린 좌판.

마을 곳곳에선 색이 피어났다. 온통 무채색뿐이었던 숲 깊은 곳 그녀만의 오두막과 달리 색과 향과 맛이 있었다.

이 꿈을 꾼 적이 있다. 꿈과 똑같은 현실이다.

‘아니,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발밑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을까 두려워 시선을 옮길 수 없다.

요한나는 그저 정면만 바라보았다. 색과 향과 맛이 있는 마을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요한나.”

이 다정한 목소리도.

“많이 기다렸지. 요한나?”

어깨에 전해지는 온기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외눈 안경을 낀 부드러운 얼굴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울컥, 목이 멘 요한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바렌타.”

“몸도 안 좋은데 여기 서 있게 해서 미안해. 거기가 비어 있다지만 집주인이 창고로 쓰고 있대서, 허락을 받는 데 시간이 걸렸어. 하여간, 전에는 된다고 했으면서 또 말을 바꿀 게 뭐야. 얼른 가서 쉬자. 너 아직은 누워 있어야 해.”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리넨 셔츠와 토끼털 튜닉에 감싸여 있어도 숨길 수 없이 탄탄한 가슴에 몸을 기대며 요한나는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꿈인가.

두 걸음, 현실인가.

닿아 있는 이의 체온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암갈색 흙길이 눈에 들어온다. 깊은 안도감에 눈앞이 핑 돌았다.

‘다행이다. 꿈이 아니야.’

마물의 영역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부터 좋았다. 그러나 그가 검은 산맥 서부 마을의 길잡이라는 것은, 또 그의 일행이 정기적인 친교를 위해 바렌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스스로 집어넣은 마물의 피육은 독과 다름이 없었다. 사경을 헤매는 그녀를 길잡이가 오트밀을 끓인 멀건 죽과 물을 먹이며 연명시켰다. 온전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꿈에 그리던 바렌타의 마을이었다.

이 모습으로 바렌타 앞에 설 수 있을까, 돌아가지 않는 게 맞는 결정 아닐까, 바렌타를 보기 무섭다, 기타 등등 치열하게 했던 고뇌는 예상 밖의 상황에 쓸모가 없어졌다. 지금에 와서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을까.

토굴을 빠져나온 후로는, 이제 불운은 다했다는 듯이 좋은 일만 이어지고 있었다.

신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하더니. 그걸 말해 준 것도 이 사람이었지.

이게 정말 현실?

문득 불안증이 밀려와 발작적으로 입을 열었다.

“바렌타?”

수없이 불러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는데.

“응. 왜? 다리 아파?”

이제는 제대로 눈을 맞추어 준다.

요한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나 여기 제대로 있는 거 맞지.”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하던 바렌타는 불안하게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일순 안타까운 기색이 스쳤다. 눈빛을 갈무리한 그가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도닥거렸다.

“그럼. 여기에, 내 옆에 있잖아. 요한나,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다즈에게서 환자를 돌봐 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너라는 건 꿈에도 몰랐어.”

상냥한 웃음이 사그라졌다. 어두워진 얼굴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의문. 덜컥 두려워진 요한나는 연거푸 침을 삼켰다. 왜 그러냐고, 뭐가 궁금한 거냐고 물어볼 수 있겠지만 그녀는 모른 척했다.

잠시 후, 바렌타는 다시 상냥한 웃음을 띠었다.

“……가자. 조금만 더 가면 돼.”

요한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의 앞에서 사라진 그날로부터 1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마을은 변하지 않은 듯 변했다.

우선 바렌타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온다. 그건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그 수가 더 많고, 태도도 달랐다. 아버지인 롯타 질레이에 이어 그가 본격적으로 마을의 행정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렌타는 완전히 어른이 됐네.’

현재를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보수적인 아버지와 달리 다년간의 마을 교류로 혁신적인 사상을 가진 바렌타다.

“아버지가 전권을 위임하신 후로 가장 먼저 마을 간 연락망을 만들었어. 검은 산맥을 중심으로 띄엄띄엄 형성된 마을들은 지금까지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잖아? 지금도 그래 보여?”

“아니.”

“그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눈치챘을 거야. 보시다시피 타지 사람이 많아. 다른 마을 사람들이지.”

요한나는 저를 이곳까지 인도해 준 길잡이, 다즈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을 떠올렸다. 통증으로 온몸이 아픈 와중에도 그가 말해 주는 바렌타는 눈물이 날 만큼 근사해서 가슴이 아프게 뛰었다.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격렬하게.

“여긴 많이 바뀌었구나.”

“그렇지?”

바렌타는 지나가는 이방인과 친근하게 인사하고는 요한나에게 속삭였다.

“앞으로는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야. 기존의 방식을 고수해서는 불필요한 피해를 늘릴 뿐이니.”

“불필요한 피해?”

“2년 전의 일을 기억해? 검은 산맥에서 메뚜기 떼가 날아와 마을의 농작물을 엉망으로 만들었잖아. 알고 보니 다즈의 마을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어. 다즈에게서 미리 연락을 받았으면 그에 대해 충분히 대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모두가 힘든 해가 되었지. 지금은 연락망이 탄탄해서 소식을 빠르게 전할 수 있어. 검은 산맥의 마물에 대처하는 것도 빨라졌고.”

정확하게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대단해, 바렌타.”

다정한 갈색 눈이 요한나를 내려다보았다. 기억보다 믿음직스러운 그 눈을 홀린 듯이 보았다.

어깨에 얹어진 남자의 손이 슬며시 신경 쓰였다. 바렌타는 딱딱하게 굳어진 그녀의 어깨를 바투 잡고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얹었다. 얼굴에 화끈 열이 올랐다. 쩔쩔매는 그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즈가 널 구해 와서 정말 다행이야. 그동안, 많이 걱정했었어.”

꿈속에서도 바라 마지않던 말, 그의 목소리.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한편으로 가슴 한쪽이 쿵쿵, 불편하게 뛰어 댔다. 여전한 불안증이 검은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 * *

“몹쓸 일을 당했다며?”

“누구에게?”

“누구겠어. ‘그런 곳’에서 발견됐으니 마물이었겠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쑥덕거린다.

“나 쟤 알아. 예전에는 음침하기만 하더니 이제는 제법 색기를 풍기잖아.”

“우웩. 뭐야, 너. 설마 마물이 건드린 여자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설마. 더럽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도 예쁘기는 무지 예쁘지 않아? 솔직히 마을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 같은데.”

“어라, 뭐야. 관심은 네가 있나 본데?”

“얼굴은 말이야, 얼굴은.”

“세니아,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말하기도 싫어서 그래. 쳐다보지도 마. 불운이 옮을라.”

“진짜 싫어하네?”

“바렌타를 빼앗겨서 그런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바렌타가 저 애를 돌봐 주는 건 그저 불쌍해서야. 알잖아. 바렌타가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지.”

“헤에, 그럼 태도를 확실하게 해. 노려보는 걸 누가 보면 저년을 질투하는 줄 알겠어. 네 남편은 한네스잖아. 그렇게 아리송하게 굴면 누가 찌를지도 모른다고.”

“누가 질투를 한다는 거야! 마음대로 말해 봐. 난 겁나는 거 하나도 없으니까.”

“하긴 문제는 네가 아니지. 바렌타에게는…….”

뺨을 뚫을 듯이 뾰족했던 시선이 짙어진다. 요한나는 꺼림칙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좌판의 상인에게 황급히 돈을 지불하고 장바구니를 추어올렸다.

발을 빠르게 놀리자 수군거리는 소리가 멀어져 간다.

‘세니아는 결혼했구나.’

친하지는 않았다. 그저 스스럼없이 바렌타에게 팔짱을 끼는 모습이, 바렌타를 향해 활짝 웃는 모습이 가슴에 아로새겨졌을 뿐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보다 세니아가 결혼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사실 바렌타에게 다른 누군가가 생겼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질레이 가문의 주인이자 누구보다도 멋있고 다정한 사람이니까. 예전에도 그를 눈독 들이던 마을 처녀들이 많았다. 더 멋있어진 지금에야 말할 것도 없겠지.

바렌타는 그간 회상하고 기억했던 마음속의 ‘바렌타’보다 더 근사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즈가 자신을 발견했을 당시의 상황을 모조리 전해 들었을 텐데도 그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그 점이 요한나는 못내 감동적이었다. 역시 그는 그 괴물들과 다르다. 이런 배려심은 그들에게선 전혀 기대하지 못하는 것이니까. 자신을 이해해 주는 인간. 바렌타, 바렌타.

‘바렌타는 아마 내가 마물에게 납치당해서 고초를 겪은 거라고 여기고 있겠지.’

틀린 추측은 아니다. 그 ‘마물’이 바렌타가 생각하는 평범한 괴물이 아니라 충인인 개미라는 것뿐…….

요한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그렇게 치를 떠냐고? 아, 말한 적이 없구나. 충인이 습격한 날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뱃가죽이 찢어진 채로.’

얼마 전 들었던 말이다. 요한나는 그제야 충인을 향한 바렌타의 경멸과 적개심을 이해했다. 그런 그에게 1년 6개월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바렌타가 친절하게 대해 줄수록 그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커져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그의 성품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을 것을 아는데도.

‘난 최악의 인간이야. 버림받을까 봐 소중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다니.’

다시금 머릿속이 암흑으로 빠질 듯해 억지로 생각을 비웠다.

‘흥분하지 마.’

토굴에서 빠져나온 후, 흥분 과잉 상태가 되면 통제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들었을 때도 그럴 뻔했다. 바렌타가 자신이 당한 일을 다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작이 온 거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금세 이성을 찾았지만, 바렌타에게 못 볼 꼴을 보일 뻔했다는 위기감이 정신을 바짝 움켜쥐게 했다.

마을 한복판에서 발작을 일으킬 뻔한 뒤로는 내내 집 안에만 박혀 있었다. 바렌타가 마련해 준 집이었다.

집주인이 창고로 사용했다는 작은 나무 집은 걸을 때마다 바닥의 판자가 삐걱거리고 먼지가 많았지만, 하루를 꼬박 쓸고 닦고 한 결과 그럭저럭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바렌타에겐 늘 받기만 하네.’

2년 전에 살았던 곳 역시 그가 마련해 주었다. 질레이 가문의 별택으로, 그가 거하는 곳과 가까웠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는데.’

그곳은 바렌타의 아버지인 롯타가 다른 사람에게 세를 내주었다고 했다.

‘이렇게 배려해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야.’

그래도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 집이 아닌 게 조금 아쉽다.

‘가만. 그런데 그 별택은 바렌타가 결혼할 때 신혼집으로 사용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집에 세를 내주다니, 질레이 가문의 경제 상황은 사실 그렇게 좋지 않은 게 아닐까.

‘잘 모르겠어. 바렌타는 걱정할 만한 얘기는 잘 하지 않으니까…….’

이것저것 추진하는 일이 많으니만큼 사람들의 도움도 많이 필요하겠지. 인간 사회에서 살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는 건 마을과 검은 산맥을 오가며 절절히 깨달은 바였다.

‘아무리 마을에서 지낸다고 해도 바렌타에게 너무 의지해서는 안 돼.’

바쁜 와중에도 거의 매일같이 자신을 보러 와 주는 바렌타였다. 요한나는 미소를 지었다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오늘은 스스로 장을 보기도 했잖아.

‘언제까지 바렌타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으니까. 그래 봤자 그가 비상용으로 남겨 준 돈을 쓴 것뿐이지만.’

요한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마을로 돌아오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다.

2년 전이라고 환영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스스로 살아갈 정도는 되었는데.

2대째 사냥꾼으로 살아오며 많지는 않아도 빵과 기름을 살 정도의 돈은 있었고, 사냥꾼의 실력을 그녀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인 데다가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늘어난 마을은 더는 전과 달리 사냥꾼의 고기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이곳을 떠난 사이, 어느 순간 그녀가 설 자리는 훅 줄어 있었다.

‘이대로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막연히 두려운 감정이 들었다.

‘이 다리로 전처럼? 덫을 좀 더 손본다면 먹고살 만은 하겠지만…….’

하지만 시리고 막막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

게다가 숲은 더는 머물 곳과 먹을 것과 놀거리를 제공해 주는 거대한 요람이 아니다.

숲의 공포를 알아 버린 이상 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숲에서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미래.

‘싫어.’

요한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욕심이 난다.

‘마을에, 바렌타의 곁에 머물고 싶어.’

이제야말로.

페로몬을 지웠다고는 하나 지금쯤 오두막은 개미들이 점령했을지도 몰랐다. 검은 개미는 따라붙지 않는다고 했으니 괜한 걱정인 것 같아도.

‘흰개미.’

흰개미는 정말로 자신을 포기했을까?

그를 생각하자 심장이 쿵쾅대며 조여든다.

‘싫어. 생각하지 마.’

그쪽 세계의 일은, 이제 그만 잊어버려.

* * *

바렌타와의 하루하루는 너무 따뜻해서 화상을 입을 것 같다.

“이 집은 너무 시내 쪽인가? 남쪽 지대는 검은 산맥과 가까워서 인적이 드무니까, 거기가 더 나았을지도 몰라.”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니, 사람들이 많은 곳을 선택한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어서.”

요한나와 바렌타는 벽난로 앞에 마련한 안락의자에 각각 앉아 있었다. 따뜻하게 데운 뱅쇼를 내린 컵은 찬 손에 온기를 전달했다. 낮보다 차가운 밤이지만, 공기는 안온하여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다.

요한나는 눈을 끔벅였다. 바렌타는 무릎을 꼰 채 컵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똑바른 시선이 부끄럽다. 용기가 솟기도 했다.

요한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 사람들이 너한테 뭐라고 해?”

“어?”

“나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이 나오고 있는 건 알아. 그게 널 곤란하게 하는 거야?”

바렌타가 탁, 컵을 내려놓았다. 면구하여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던 요한나가 다시 고개를 들자 굳은 안색의 바렌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게 아니야.”

“바렌타?”

“네가…….”

“나?”

“네가 상처받을 거 아니야.”

요한나의 눈이 커졌다. 바렌타는 눈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내 외눈 안경을 벗어 협탁에 내려놓았다.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꾹꾹 누른다.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단 건 최근에야 알았어. 아버지가 은퇴하신 후에는 사적인 일로 내게 참견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

“…….”

“미안해, 요한나.”

“바렌타가 왜?”

당황스러웠다. 바렌타가 사과할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이곳에 들어앉히지만 않았어도 될 일이었다. 그럼 지저분한 추문에 그가 얽힐 일도 없었을 거다. 사과를 해야 할 건 이쪽인데 어째서 바렌타가 죄스러운 얼굴을 하는 걸까.

“진작 널 마을로 데려왔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네가 험한 일을 겪지도 않았을 거야.”

요한나는 아직 온기가 남은 컵을 꽉 그러쥐었다. 책임감이 강한 바렌타. 사랑스러운 바렌타.

‘어떡해…….’

마을의 정식 일원이 아닌 자신에게도 그런 책임감을 발휘해 주는 것이 눈물 나게 기쁘다.

“그렇게 말하지 마.”

“…….”

“나, 바렌타에 대한 기억이 없었더라면 진작 어떻게 돼 버렸을 거야. 네 존재 덕분에 살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야.”

“그래?”

“응…….”

바렌타가 벽난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벽난로의 불길 탓일까? 그의 옆얼굴이 주홍빛을 띠었다. 갑자기 쑥스러워진 요한나는 고개를 숙였다. 컵을 들고 있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해져서 얇아진 목장갑이 시야에 비치자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저, 바렌타. 장갑을 구할 수 있을까? 되도록 검은색 가죽으로.”

“장갑?”

바렌타의 시선이 손에 닿았다. 요한나는 당장 손을 치우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직도 흉터를 신경 쓰는 거야?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싸매고 있으면 상처에 더 안 좋지 않아?”

“…….”

“원래도 흉터가 있다고 그랬지?”

꿀꺽, 침을 삼키고 태연하게 지껄였다.

“응. 내가 보기에도 징그러워서.”

“난 괜찮은데.”

바렌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안경을 쓰지 않아 시원하게 빠진 눈매를 그대로 드러내며 웃었다.

“아무리 심해도 흉터일 뿐인걸. 게다가 네 손이기도 하고.”

다정한 웃음이다.

멍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바렌타가 헛기침했다.

“아니, 다른 의미는 아니야. 그냥 너는 손목이 예쁘니까, 손에 흉터가 있더라도 골격 자체는……. 아, 내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횡설수설하는 그를 보자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흉터일 뿐이라면 좋았을걸.’

“그래도 징그러워서, 네게는 보여 주기 싫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데 어쩐지 바렌타를 보기가 부끄러워 시선을 떨구었다. 바렌타도 무슨 생각인지 아무 말도 없었다.

“요한나.”

요한나는 고개를 들었다. 바렌타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혹시, 할 말이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뭔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삼켜진 침묵이 신경 쓰였지만, 그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만큼 그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캐묻기 싫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에 바렌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잘 시간이네.”

“아아, 어.”

요한나는 엉거주춤 털 실내화를 찾아 신었다. 바렌타는 이곳에 머물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 사이도 아닌 상대의 집에서 자고 갈 만큼 분별이 없는 사람이 아니니까.

‘난 그래도 상관없는데.’

파렴치한 생각은 속으로만 했다. 이미 그가 이곳을 들락날락한다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소문을 만들어 내는데, 밤까지 지낸다는 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바렌타도 소문이 신경 쓰이겠지.’

당연히 그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도 오늘따라 왠지 서운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현관의 모자걸이에 걸어 둔 모자를 쓴 바렌타가 말없이 따라오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요한나.”

“응?”

쪽.

요한나는 이마를 잡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렌타가 빙그레 웃었다.

“잘 자.”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만큼 크다.

“……바렌타도.”

사르르 녹는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 * *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간절해지는 마음이 이런 걸까?

원한다. 간절해진다. 절박해진다. 이곳의 생활이, 바렌타가, 따뜻하고 산뜻한 공기가.

그런 한편 내내 마음속에는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처럼 걸리는 게 있었다. 정체도 모르는 불안감은 간절함만큼 크기를 불리며 그녀가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게끔 했다.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괜찮다. 아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건 불안감의 한 조각일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빵집 주인의 빤한 시선을 받으며 폭신한 흰 빵을 바구니에 몇 개씩 넣던 순간이었다.

한 손에 양산을 들고 다른 손에는 빵 바구니를 든 여자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바렌타가 떠올랐다. 요한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도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그녀가 막 고른 빵을 가리켰다.

“이 빵을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제일 좋아하는 빵이에요. 담백하고, 자극적이지 않아서.”

맛을 따져서 고른 게 아닌데. 바렌타가 좋아하는 것이라 자주 사 놓았던 것뿐이다.

빵의 맛 같은 건, 부드럽다 달다 정도밖에 느끼지 못하는 요한나는 뭐라고 답할 말이 궁했다. 아니, 그녀는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마을에 돌아온 후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은 다즈와 바렌타 정도다. 멀리서 조롱하듯 소리친 건 논외로 한다면.

당황스러운 나머지 딱딱하게 굳은 요한나에게 여자는 시종 정중하게 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차 한잔할 수 있을까요?”

“누구신데…….”

“바렌타의 친구라고 하면 될까요? 그에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한 번쯤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여자는 요한나가 든 빵을 힐끗하고는 눈을 우아하게 접었다.

“마침 저한테 빵에 발라 먹기 좋은 버터가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세련되게 거절할 수 있는 말을 배워 뒀더라면 좋았을 텐데.

피유우우우우…….

물이 끓는 주전자에서 수증기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얼떨결에 집까지 데리고 오고 말았어.’

얼떨떨한 기분으로 곁눈질했다. 바렌타가 즉석에서 만들어 갖다 준 원목 식탁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이프로 빵을 자르고 버터까지 뜨고 있다. 낯선 곳일 텐데도 어색해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래도 이 마을에서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은 드물었지만 1년 6개월 만에 돌아온 지금은 아예 말을 거는 사람도 없다. 스스럼없이 다가온 정체 모를 여자는 의심하고 경계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 차갑게 굴지 못하겠단 말이지.’

신비로운 사람이다.

“차는 홍차면 될까요?”

“뜨거운 물도 좋아요.”

요한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찻잎을 넣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이 집에는 컵이 두 개뿐이다. 자신의 것 하나, 바렌타의 것 하나. 다른 식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이 올 일이 없었으니 바렌타를 제외하고는 이 여자가 처음으로 사용하는 셈이 된다.

“우러나오면 드세요.”

“고마워요.”

찻잔을 받아 든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상냥하게 웃는 게 익숙한 여자 같았다. 요한나는 찻잔으로 하관을 가리며 여자를 살폈다.

‘역시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어.’

걸리는 거라고는 바렌타뿐이다. 그와 친한 사람들은 많다. 아가씨들도 마찬가지다. 마을 처녀들은 바렌타를 아주 좋아한다. 적어도 요한나가 아는 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니아도 그래서 내게 더 못되게 굴었겠지.’

세니아는 새침하고 예쁜 아가씨였다. 밀빛 같은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색감의 원피스를 입고 마을 광장에서 춤추는 걸 좋아하는 사교적인 성격이라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자신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세련됨을 풀풀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조차 눈앞의 여자와 비교하면 말괄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한나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찻잔을 드는 손놀림 하나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말로만 듣던 귀족인가?’

“빵 좀 드세요. 친구가 직접 만들어 준 버터인데 아주 고소해요.”

“네…….”

요한나가 대꾸만 하자 여자는 직접 얇게 저민 빵에 버터를 바르고 내밀었다. 그렇게까지 하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한 입 먹고 치우자.’

결심하고는 빵을 입에 물고 우물우물했다. 여자의 말처럼 버터는 부드럽고 고소했지만, 그뿐이었다. 혀가 아닌 머릿속으로 ‘맛’을 떠올리고 있다.

“입에 맞지 않나 봐요.”

눈치까지 빠르다니.

“아, 아니에요. 아주 맛있어요.”

거짓말이란 걸 알아챘는지 여자의 미소가 흐릿해졌다. 약간 머쓱해진 요한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저, 바렌타의 친구라고 하셨는데.”

“아, 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말씀 안 드렸네요. 저만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불공평하네요.”

“아니, 딱히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후후, 요한나 씨는 조금 서툴지만, 그래도 마음이 따뜻하신 것 같아요.”

마음이 따뜻하다고.

처음 들어 보는 말에 얼굴이 멍해졌다.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나?’

“제 직업이 뭐였는지는 바렌타에게 들으셨죠?”

조심스럽게 묻자 여자는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말하냐는 양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당연하죠. 저는 이슬라라고 불러요.”

“아, 네. 바, 반갑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요한나예요.”

여자가 예쁘게 웃었다.

“네, 요한나 씨. 만나서 반가워요.”

성이 없으니 귀족은 아닌 건가.

찻잔을 들어 적당히 우러나온 홍차를 홀짝이다가 멈칫했다.

‘이슬라?’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근데 이슬라는 괜찮은 거야? 바렌타가 저러고 다녀도?’

“아…….”

“왜 그러세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집요하게 생각을 파고들었다.

더 전에.

지금보다 더 전에, 들어 본 적이 있다. 이슬라라는 이름.

그 순간 머릿속이 번뜩였다.

‘그래. 이슬라. 마을의 명인 대장장이의 하나뿐인 딸.’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던 건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였다. 2년 전을 되짚어 봐도, 마주한 일이 없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몸이 튼튼하지 못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했다.

새삼스럽게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얀 얼굴이 조금 창백해 보인다고만 생각했었지.

‘몸이 약해서 그런 거구나.’

대장장이 피냑스가 자랑하는 딸이라고, 듣기는 많이 들었다. 그것보다는 마을의 촌장이자 바렌타의 아버지인 롯타 질레이가 제자처럼 아끼는 아가씨라는 소문에 더 관심이 갔지만.

다시 돌아온 지금도 이슬라의 이름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굉장히 똑똑해서 바렌타와 함께 도서관에 박혀 마을을 발전시키는 데 그 재능을 사용하고 있는 인재라고.

그게 이 사람?

직접 얼굴을 마주한 그녀는 다소 엉뚱한 것 같지만 정숙한 아가씨였다. 눈에서 엿보이는 현기는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지 못하게 했다. 하나 햇볕을 받지 못한 듯 하얗고 보송보송한 피부는 그녀가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요한나의 빤한 시선에도 이슬라는 당황하지 않고 생긋 웃어 주었다. 뒤늦게 너무 쳐다봤음을 깨닫고 시선을 옆으로 틀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댄다.

“바렌타와는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코흘리개 시절에는 서로 성향이 달라서 그다지 친하지 않았지만 좀 커서 대화가 통하게 되니까, 다른 누구보다 마음이 잘 맞더라고요.”

‘난 이곳에 돌아와서 한 번도 듣지 못했어.’

찻잔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바렌타에게. 이 여자에 대한 얘기는 어느 것 하나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렌타의 옆에 붙어 있는 자신을 향한 묘하고도 진득한 시선들이 떠오른다.

“혹시…….”

“…….”

“바렌타의 약혼자?”

눈을 크게 뜬 이슬라가 곧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더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볼에 오른 홍조를 보자 숨이 턱 막혔다.

“질레이 님의 결정이었어요. 롯타 질레이 님이요. 바렌타에게 뒤를 이으려면 약혼이라도 하라고 해서.”

“…….”

“뭐,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요.”

요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슬라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연약해 보이지만 돌덩이보다도 단단한 속내를 품고 있는 여자다.

“수도의 귀족 나리들은 약혼이 곧 결혼으로 이어진다지만 시골은 마음이 변해 파혼하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까.”

그렇구나.

자연스러운 깨달음이 스며들었다.

‘이 사람은 바렌타를 좋아해.’

찻잔을 쥔 그녀의 곧게 뻗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대장장이의 자식이라지만 망치는 한 번도 잡아 보지 못한 듯 흉터 하나 보이지 않는 고운 손이다.

좀 더 시선을 끌어오자 거무튀튀한 장갑에 감싸인 제 손이 보인다. 흑백의 대비가 강렬하게 눈을 파고들었다. 투박한 검은색 장갑이 이다지도 볼품없게 보일 수 있다니.

‘큰일이야. 속이 울렁거려.’

차분한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 왔다.

“바렌타가 요즘 즐거워 보여서 저도 궁금했거든요. 어떤 분이신지.”

일부러 날 기다렸던 걸까? 그 빵집에서?

머릿속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생각으로 꽉 찼다. 바렌타가 입술을 맞추었던 이마가 타는 듯이 뜨겁다.

“직접 보니 생각보다도 더 멋진 분이시네요. 그거, 다 근육인가요?”

“아, 당연히…… 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고개를 들자 이슬라가 식탁에 몸을 바싹 붙이고 있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만져 봐도 되나요?”

그렇게 눈을 반짝이면서 물어본다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니 이슬라가 대뜸 손을 뻗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손을 댈 줄 몰라서 요한나의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팔뚝을 꾹꾹 눌러 댔다.

“어머나. 정말 딱딱하네요.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겠죠?”

굳은 성대를 억지로 움직였다.

“근육에 신경 쓴 적은 없어요.”

“정말요?”

“근육이 있어야 큰 힘을 쓸 수 있으니 운동은 꾸준히 했지만요.”

“그렇구나. 사냥꾼이란 직업은 정말 매력적이에요.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은 다 가 볼 수 있잖아요. 튼튼하고, 맹수가 나타나도 무찔러 싸울 수 있고요.”

놀린다기엔 목소리에 경탄의 기색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요한나는 혼란스러웠다. 이곳 사람들은 검은 산맥의 사냥꾼을 두려워하기만 했는데.

현명한 사람은 보는 세계도 다른 걸까?

그런 생각을 떠올려 놓고, 찾아온 자괴감에 슬퍼졌다.

“오늘 재밌었어요.”

이슬라가 입구에 세워 두었던 양산을 펼치고 요한나와 눈을 마주쳤다.

“다음에는 잼을 가지고 올게요.”

“…….”

“실례가 안 된다면요.”

만약 여기서 안 된다고 한다면.

요한나는 피식 웃었다.

‘그럴 수 없겠지.’

“……얼마든지요. 내키시는 대로.”

그럼 또 봐요, 마지막까지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한 이슬라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요한나는 끝까지 지켜보았다.

흰개미, 내가 그랬지.

인간은 포장하면서 산다고.

거짓말이야말로 인간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무기일 거야.

* * *

이슬라의 ‘다음’은 상당히 빨랐다. 바로 다음 날에 요한나를 찾아온 그녀는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하늘 아래에서 한층 더 창백해 보였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주일이잖아요.”

“그래서요?”

“예배드리자고요.”

더 영문을 모르겠다. 어리둥절한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이슬라는 당당하게 말했다.

“집 안에만 있는 것도 좋지 않아요.”

인간 사회를 알게 된 후에는 계속 동경했었다. 사람을, 마을을. 그러나 그 동경은 마냥 밝은색으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애’에 치우친 애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과 어울리고 싶었지만, 저를 싫어하고 배척하는 이들까지 좋아했던 것은 아니니까.

마을은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있어 그녀에겐 검은 산맥보다도 복잡한 곳이었다. 마을 주민 중에는 뿌리 없는 사냥꾼이라는 것만 주목해 덮어놓고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의 외모에 호감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진짜 선한 사람도 있었다.

이 아가씨는 어느 쪽일까.

“안녕하세요, 오늘도 멋진 수염이시네요. 수도사님!”

하얀 수염을 깔끔하게 기른 노인은 이슬라의 인사를 즐겁게 받아 주었다.

“허허, 이슬라. 오늘따라 활기차구나.”

“하늘이 깨끗한걸요. 오늘은 날이 아주 좋을 거예요.”

인상 좋은 백발의 수도사를 본 요한나는 깜짝 놀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녀가 이 마을에 있었을 당시 마을의 기둥은 롯타 질레이와 예배당의 주인인 엘빈 수도사였다. 마을에서 수도사의 인기는 제국의 교황과도 못지않아서, 그의 눈 밖에 나면 마을에 있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신과 천사를 믿는 신성한 사람이 자신을 보게 된다면……. 상상할 때마다 소름이 끼쳐 바렌타의 곁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었다.

엘빈 수도사의 탁한 잿빛 눈동자가 이슬라를 지나 요한나에게 닿았다. 그녀는 무심코 숨을 죽였다. 바렌타와 달리 아담한 이슬라는 요한나를 전혀 가려 주지 못했고 오히려 그녀의 존재를 한층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바렌타의 손님이시구먼. 험한 일을 당했다죠?”

생각과 달리 상냥한 목소리였다.

“신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주시리니.”

수도사는 가슴과 이마에 성호를 긋고 요한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마을의 지도자가 제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굳어진 요한나에게 안심할 수 있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 주고는, 몸을 돌려 예배당으로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마음이 답답할 때면 수도사님을 찾아 고해 성사 하고 가요. 요한나 씨도 고민이 있다면 저분을 찾아가도록 해요.”

“…….”

“저분은 신의 대리인이라, 한번 들은 인간의 고민은 관대하게 삼켜 주시거든요. 대신 내 고민은 깨끗하게 없어지죠. 저도 종종 찾아뵙는답니다.”

이슬라가 바닥이 엿보이지 않는 깊은 눈을 하고 속삭였다. 혹시 그녀가 뭘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요한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째서 절 여기로 데리고 온 거예요?”

“아이참, 요한나 씨도. 말했잖아요, 주일이니까. 주일에 예배당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예배?”

“맞아요, 예배.”

정답이었다며 이슬라가 쾌활하게 웃었다.

“마을에 정착하려면 주일마다 예배당에 나오는 게 좋아요. 세례도 받으면 더 좋고요. 그러면 지금보다 마을에서 지내기 더 편할 거예요. 이 사회의 일원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나요?”

요한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던 말을 뱉었다.

“저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요?”

이슬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배당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망설인 요한나도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걸음을 옮겼다. 예배당이 더 가까워졌을 때 이슬라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런 거예요.”

요한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직도 집 밖을 나서면 자신을 향한 온갖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그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음험한 사냥꾼이었다가, 검은 산맥의 마물에게 다리를 벌리는 음란한 창녀였다가, 바렌타를 유혹하는 뻔뻔한 요녀가 된다. 우유 하나 사러 밖으로 나갈 때마다 마음은 너덜너덜해진다.

‘그게 다 무지 때문이라고?’

마을 사람들의 유대가 끈끈하다는 건 알고 있다. 이렇게 대놓고 그들의 편을 들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요한나 씨를 돕고 싶어요.”

요한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이슬라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요한나 씨는 피해자일 뿐이잖아요. 제가 본 당신은 제 억지에도 화내지 않고 쩔쩔매는 사람이었고요. 그런 사람이 악할 것 같지는 않아요.”

“…….”

“다른 사람들도 요한나 씨의 좋은 점을 알면 태도가 바뀔 거예요. 물론 한번 박힌 인식을 뒤집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죠. 그러니까 우리, 오늘 예배 열심히 드려 봐요.”

반짝이는 눈.

현명한 눈.

선한, 눈.

의도가 무엇이든, 이슬라가 다른 마을 처녀들이랑은 조금 다르다는 걸 요한나는 깨닫고 말았다.

머리가 띵했다.

이런 사람이, 이상적인 아가씨인 걸까?

얼굴이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얼굴만 예쁜 사람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인다. 기품 있고 관용적인 면모. 그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쿠키 먹을래요? 다짜고짜 끌고 나와서 배고플 거 아니에요.”

이슬라가 건네는 쿠키를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그녀는 요한나가 먹는 걸 확인하지도 않고 아몬드가 박힌 쿠키를 입으로 집어넣었다. 아삭, 씹히는 소리가 식욕을 자극했다.

최근 뭘 먹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이 없었건만 요한나는 급작스러운 허기를 느꼈다. 이슬라를 따라 한 입 깨물었다. 반짝이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치아 사이에서 부스러지는 식감은 좋았지만, 이슬라가 짓는 표정만큼 맛있지 않았다.

‘달다는 생각은 들어. 머리로만. 혀로는 느껴지지 않아.’

그녀의 애매함을 모르는 이슬라가 눈을 빛냈다.

“맛있죠? 이게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제일 많아요. 어제 요한나 씨가 버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집에 무화과 잼도 들여놨어요. 다음에는 저희 집에도 놀러 오세요. 쿠키도 이것보다 더 많아요. 빵은 잘 못 만들어도 쿠키는 맛있게 구울 수 있거든요.”

요한나는 입에 있는 쿠키의 잔해물을 혀로 쓸어 냈다. 직접 만든 거구나.

“대장간에서 농기구 말고 쿠키도 굽나 보네요.”

이슬라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대장간이요?”

“대장간 2층에 사는 거 아닌가요?”

“아, 예전에는요.”

“예전이라면?”

“지금은 거기 살고 있지 않아요. 실은 반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뭐라고 반응해야 하지. 요한나의 아버지는 검은 개미에게 죽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를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떠밀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의 죽음을 마냥 슬퍼했었나?

아니.

분노했다.

“요한나 씨?”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슬라의 표정이 다소 꺼림칙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또 이상한 짓을 했나?’

“많이 힘드셨겠네요.”

슬픔에 공감하는 척 지껄이자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으로 이슬라가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요. 사실 그때는 많이 힘들었는데, 롯타 님과 바렌타가 도와줘서 잘 극복했죠. 저는 대장간 운영에는 능력이 없어서 원래 살던 곳에는 미겔이 살고 있어요. 아, 미겔은 아버지의 수제자예요. 저는 대신 질레이 가문의 별택에서 지내고 있고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별택이라면, 오렌지색 지붕의?”

목소리가 떨린다.

“네, 맞아요. 질레이 가문에 신세를 지고 있어요.”

아니길 바랐건만.

그곳은 2년 전에 자신이 머물던 곳이었다. 바렌타가 신경을 많이 써 줘서, 가끔이지만 함께 낮잠을 청하기도 했었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볕이 따뜻했던 집이었다.

내 것을 뺏긴 기분이다. 원래 내 집도 아닌데.

“마을을 발전시키는 게, 질레이 가문에 은혜를 갚는 길이에요.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사실 꽤 바쁜 몸이에요. 너무 무리하면 가끔 쓰러지기도 하지만요.”

“그렇게 바쁘면 저와 지금 이러고 있어도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침묵이 이어졌다. 놀란 눈빛에 요한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혓바닥이 까슬까슬했다.

“후후, 요한나 씨는 예외예요. 이건 제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뒤늦게 이슬라가 싱긋 웃었다. 차마 그 웃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어서, 요한나는 그저 모습을 드러내는 예배당의 내부로 시선을 옮겼다. 삿된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양 엄숙한 공기가 그녀를 노려본다.

* * *

“기도를 드리는 거예요. 신께, 오늘 우리의 안전과 식량과 행복을 지켜 주셔서 감사하다고.”

신이 내 행복을 지켜 주었다, 라…….

“처음엔 낯설 수 있지만, 적응하면 괜찮을 거예요.”

새벽 기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았다. 요한나의 예민한 기감은 이쪽을 흘끔거리는 시선을 모두 잡아냈다.

요한나가 신경 쓰는 기색에 이슬라의 시선이 돌아갔다. 이쪽을 쳐다보는 마을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묵례한다. 정면을 바라본 채 이슬라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저 사람들도 단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니까.”

그녀는 차분하게 고개를 들어 엘빈 수도사의 뒤로 보이는 대리석 신상을 응시했다.

“예배당에 받아들여지면 사람들도 요한나 씨를 다르게 볼 거예요.”

요한나도 대리석 신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왔다. 기침 소리 하나도 크게 들리는 불안할 정도로 정숙한 내부, 신에게 마음과 정성을 바치며 자신과 가정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사람들 같은 것들이.

인간의 사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낯설고 벅차다. 바렌타의 옆에 있는 순간만큼은 그 부담을 잊을 수 있었는데, 잠시나마 평온을 느꼈던 순간이 꿈결처럼 느껴진다.

옛날처럼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저를 구경하는 아이들 틈에 떨어진 기분이다.

벌써 눈을 감은 이슬라의 옆얼굴을 곁눈으로 지켜보았다.

왜 이렇게 잘해 주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이슬라를 따라 손을 맞잡고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인간은 고민하는 동물이다.

완전히 나쁘지도, 완전히 선하지도 못한다.

‘그게 좋아 보였어. 동경했어.’

……여긴 내가 있을 곳인가? 있어도 되는 곳인가?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모르는 신에게 할 말 따위,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태평한 건 너희들이나 해.’

기도하는 척을 하며 요한나는 실눈을 뜨고 예배당의 널찍한 창문을 훔쳐보았다.

예배당 바깥에서는 오늘의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윽…….”

쨍그랑!

손에서 빠져나간 물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치워야 하는데…….

손을 뻗다가 엄습하는 고통에 배를 감싸 안았다.

‘왜 이러지?’

이틀 전부터 이따금 배가 아프다. 간헐적이고 잠깐 참으면 언제 아팠냐는 듯 감쪽같이 멀쩡해져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으나 이번의 통증은 당황스러울 만큼 길다.

평소처럼 배를 감싸고 허리를 굽혔다. 문득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정신없이 배를 더듬었다.

약간 따뜻한 살갗이 만져졌다. 근육이 잡히는 평평한 윗배와 달리 아랫배는 울퉁불퉁한 모양이다.

‘튀어나와 있어.’

흠칫. 요한나는 뱃살처럼 불룩한 아랫배를 붙잡은 채 하얗게 질렸다.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수개미들과 교미하지 않은 지 한참 되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흰개미가 있었지.

이제 때가 되었으니 약속한 것처럼, 놓아 달라고 요구했던 그날부터 줄기차게 이어졌던 흰개미와의 교미. 지나친 스트레스로 잠깐 잊고 있었다.

‘설마 그것 때문인가?’

무심코 아랫배를 강하게 쥐었다. 머릿속이 찌릿할 만큼 격렬한 통증이 일었다.

“크윽…….”

바닥에 나뒹군 요한나는 두 손을 바닥에 대고 헉, 헉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까지 몸을 괴롭혔던 고통은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고 안도가 되지는 않았다.

침을 흘린 입가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 내고 손가락 통째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제기랄, 여기선 안 돼.’

바렌타가 알게 되면 어떡하지?

오싹.

등골이 서늘해졌다. 차갑게 질린 손끝을 옷자락 위로 슥슥 문지르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담지 못한 검은색 눈동자가 바닥을 정처 없이 헤맸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키다 이내 새하얘졌다. 방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

컵의 깨진 조각이 눈에 들어오자 탁했던 눈에 빛이 들어온다.

“아, 컵이 깨졌네. 새로 사 와야겠다.”

오늘 바렌타가 온다면 컵 하나를 같이 써야 하려나. 중얼거리며 빗자루를 가져와 유리 파편을 치워 냈다.

“그러고 보니 저녁 준비하고 있었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의자에 앉았다. 원목 식탁 위에는 닭고기와 우유를 넣은 수프와 샐러드뿐이었다. 단출한 메뉴 구성이었지만 그녀는 불만이 없었다. 먹어 봤자 혀는 ‘맛’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머릿속에 각인된 예전의 맛을 떠올리는 것도 이제 한계다.

괴물들의 오물은 맛있게도 삼켜 댔으면서.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요한나는 흠칫했다. 억지로 수프를 삼켰다.

“욱…….”

억지로 입을 다물고 손바닥으로 막았다. 목구멍 근처에서 헤매는 음식물을 억지로 억눌렀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수프의 감촉이 생생해서 소름이 끼쳤다.

까득.

이를 갈고는 그릇을 들어 그대로 걸쭉한 액체를 목 안으로 들이부었다. 격렬한 거부감이 솟아도 꾸역꾸역 삼켰다.

탕!

그릇을 팽개치듯 식탁에 놓고 주먹을 꼭 쥐었다. 입 안에서 괴롭게 맴도는 신물을 참아 냈다.

“나는 괜찮아. 아직은, 아직은 평소처럼 먹을 수 있어.”

응, 괜찮아.

“괘, 괜찮아. 바렌타가 오면…….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자고 가지도 않으니까.”

다행이다.

진심으로 활짝 웃었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손을 들어 제 뺨을 쳤다.

짜악! 망설임 없이 타격한 뺨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히 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뺨을 감쌌다. 수프가 조금 남은 그릇을 바라보는 눈이 핏물이 든 것처럼 붉어졌다.

“바렌타는 약혼자가 있으니까. 괜찮아. 다른 데서 잔다면 자기 별택에서 자게 되겠지. 이슬라……. 이슬라와 한 침대를 써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괜찮아. 여기 오는 건 단지 날 신경, 그래, 잠깐 돌봐 줬던 애니까 그래서 신경을 써 주는 것뿐이야. 괜찮아. 다행인 거야. 날 안을 일도 없고, 이 징그러운 배를 만질 일도…… 없으니까. 괜찮아.”

다행, 다행이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는 눈이 멍해진다. 손은 그저 숟가락만 들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한 손은 야위어 있었지만, 더는 입으로 음식물을 가져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

요한나는 발밑으로 기어 오는 황혼의 빛을 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토굴을 탈출했던 그 순간에 죽어 버렸다면.’

적어도 장밋빛 미래를 꿈꿀 수 있었으니 행복하게 뒤졌을 텐데.

토굴 속에서 악착같이 가장했던 강인함이 따스한 햇볕 속에서 녹아 문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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