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9)

09

수개미들과 집단 교미를 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요한나의 배는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 엷은 뱃가죽 아래로 느껴지던 울퉁불퉁한 작은 알집이 아니었다.

만삭의 임부처럼 커다랗게 부푼 배는 알이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표면이 툭툭 튀어나와 있었다.

요한나는 배를 내려다볼 때마다 치미는 욕지기와 파괴욕에 대항해야 했다.

징그러운 배가 자신의 것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돌을 치켜들고 배를 내리쳐야 한다는, 본능적인 혐오감이 들끓었다. 하지만 사냥감을 기다리던 그때의 감각이, 사냥꾼의 인내심이 뜨거운 충동을 가라앉혔다.

요한나는 시종 차가운 눈을 한 채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나고 또 반달이 지날 때까지, 흰개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꾼개미들도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니 토굴에 없는 모양이었다.

‘상관없어. 그놈이 있든 말든.’

어쩐지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일꾼개미들의 역겨운 죽을 먹고, 체력이 축나지 않도록 넝마 같은 천을 둘러싸 잠을 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알집이, 빠져나오지, 못해. 통로가, 너무 좁, 아!”

“아, 흑, 아, 아, 아아아악!”

아프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

누군가 칼로 배를 난도질하고 있는 듯했다.

깨끗한 흰자위에 벌건 실핏줄이 섰다.

‘개새끼들, 이렇게 아프단 소리는 안 했잖아!’

“공주, 안 돼!”

버둥거리는 팔다리를 붙든 개미들이 그녀를 바닥에 내리눌렀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요한나는 허공으로 허리만 띄웠다. 활짝 벌려진 다리 사이에서는 투명한 액체만 줄줄 흘러나왔다.

“알집, 위험, 공주, 위험. 얼른, 알집, 빼내야, 함.”

나이가 지긋한 수개미가 빠른 속도로 중얼거렸다. 갑각 표피로 덮인 차가운 손이 벌어질 듯 벌어지지 않는 구멍을 억지로 열어젖혔다.

동공이 확장되었다.

“……으, 아아아아아악!”

“안, 돼. 틀렸, 어. 알집이, 내려오지, 않음.”

“이러다간, 알집, 위험한가?”

검은 개미의 얼굴이 드물게 굳어졌다. 체액으로 흠뻑 젖은 수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알집, 스스로, 내려와야. 근데, 꿈쩍도, 하지, 않음.”

“알집, 살려야, 함.”

검은 개미가 손을 치켜들었다. 부릅뜬 요한나의 눈에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한 검은 개미의 손끝이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 공주는.”

“공주는, 다시, 데려오면, 돼.”

수군거리는 대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여기서 날 폐기 처분 하려는 거야!’

통증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도 본능적인 위기감이 올라왔다. 알을 낳아 주는 것만 생각했지, 이런 경우는 고려하지 못한 게 패착이다.

이렇게 된다면 괴물들의 새끼만 만들어 주고 목숨을 버리는 꼴이 아닌가.

요한나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하체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배 속 통로를 콱 막고 있는 알집은 움찔거리는 기미만 있을 뿐 요지부동이었다.

‘안 돼. 힘이…… 자꾸 빠져.’

“위험해,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큰일. 알집도, 공주도.”

검은 개미가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요한나는 사신의 낫 같은 손이 제게로 향하는 걸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만약 이대로 죽게 된다면, 적어도 저 괴물 놈에게 타격이라도 입히고 갈 생각이다.

‘순순히 죽어 줄 수는 없지.’

하나 안타깝게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두 눈에 절망이 깃든다.

‘안 돼. 이런 건 싫어.’

눈물이 솟구쳤다. 검은 개미가 손끝으로 배를 겨눈다. 그대로 힘을 준다면 알집을 다치지 않게 뱃가죽만 찢어 낼 수 있을 터였다.

찌익.

날카로운 손끝이 살갗에 닿자 한 줄기 피가 가늘게 흐른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마지막으로 바렌타를 보고 싶은데…….’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이 흐른다.

“비켜.”

눈앞을 가리던 눈물이 사라지고, 한층 또렷해진 시야에 아름다운 얼굴이 잡혔다.

“흰개미?”

멈칫한 검은 개미를 한 손으로 밀쳐 낸 흰개미가 경련하는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수개미 여러 명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던 근육질 다리의 움직임이 간단히 봉쇄되었다.

귀신처럼 하얗고 차가운 손이 구멍을 파고들었다. 요한나는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얼음으로 문지르는 듯했다. 온몸이 마비되는 기분이다.

흰개미는 수개미가 잡으려고 애를 쓰던 알집에 손가락을 박았다. 검은 개미가 다급히 말했다.

“알을, 다치게, 해선, 안 돼!”

흰개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힘을 주었다. 알집의 크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통로가 넓어지고 마침내 입구 밖으로 알집의 끄트머리가 빠져나왔다. 흰개미는 망설임 없이 알집을 끄집어냈다.

“아아아아악!”

요한나가 목을 뒤로 젖혔다. 내장이 뽑히는 감각에 버둥거리려다 순식간에 사라진 고통에 눈을 크게 떴다. 근 한 달간 빵빵했던 배 속이 텅 비었다.

그녀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끔찍했던 고통이 일시에 사라지고 지독한 탈력감이 그녀를 덮쳤다.

“흐으, 흐으…….”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죽음 같은 침묵에 빠진 그녀와 달리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일꾼개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알집을 찢었다. 투명한 막 같은 알집이 터지자 안쪽에서 조그마한 알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리 준비했던 마른 풀 위에 알을 조심스럽게 옮기고 신속하게 토굴 방을 빠져나갔다. 모체에서 나온 알은 쉽게 체온을 잃기 때문에, 토굴에서 가장 따뜻한 곳으로 옮기려는 거다.

산란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일꾼개미 셋이 그녀의 곁에 달라붙었다.

“공주, 공주.”

요한나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귀찮아…….’

부르는 소리가 귀찮다. 이대로 푹 자고 싶다. 몸이 더러운 것도, 다리가 벌어진 것도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떡, 하지? 죽, 먹어야. 아니면, 약, 해지는데.”

“이대로, 먹여? 어떡해?”

‘그냥 내버려 둬.’

파리가 귓가에서 왱왱대는 것 같았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잠을 못 자겠잖아.

귀를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요한나는 천천히 안락하고 허무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였다.

차가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 물컹하고 매끄러운 뭔가가 입술을 열고 파고들었다. 곧이어 청량한 액체가 쏟아져 들어왔다.

늘어져 있던 요한나의 혀가 꿈틀거리고, 입 안에 들어온 말캉한 혀를 쫓아 휘감았다. 잠깐 멈칫했던 혀가 이전보다 강렬하게 그녀의 혀를 쓸며 바닥에 눌렀다. 청량한 액체가 더 많이 흘러들어 온다.

‘맛있어.’

정신없이 입 안으로 들어온 액체를 탐하던 요한나가 느리게 눈을 떴다. 투명하게 붉은 눈이 시야에 가득하다.

* * *

사선을 넘을 뻔했던 첫 산란 이후 두 번의 산란을 더 겪었다. 첫 번째 알집의 알들은 무사히 부화하여 개미가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몇 남지 않은 일꾼개미와 수개미들이 총동원되어 알뜰살뜰하게 알들을 보살폈다. 알을 보살피는 건 공주의 일이 아니다. 공주는 말 그대로 알을 낳아 주기만 하면 되었다.

요한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의 ‘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은 태를 빌려준 것뿐이다. 괴물. 저것들은 괴물이니까.

알은 부화 방에서 관리되기 때문에 공주의 토굴 방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알을 확인할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 알에서 태어난 개미들을 보는 게 꺼림칙했다. 그러나 막상 갓 우화한 새끼 개미가 길을 잃고 토굴 방에 들어왔을 때, 놀라울 만큼 아무런 감흥도 떠오르지 않았다. 둥근 머리통, 창백한 피부.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눈동자는 이질적이기만 했다.

요한나는 크게 안도했다.

‘아, 역시 괴물일 뿐이야. 나랑은 상관없어.’

무릎을 모으고 토굴 방의 입구에서 허둥지둥하며 바르작거리는 새끼 개미를 구경했다.

“끼. 끼이—.”

높고 가느다랗게 우는 새끼 개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꼬물꼬물 짧은 팔다리를 놀려 기어 온다. 요한나는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오지 마.”

“끼이, 끼이.”

“나한테 오면 밟아 죽여 버릴 거야.”

새끼 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흰개미의 씨를 받아 태어난 놈일까? 묘하게 기분이 나빠 벌떡 일어났다. 정말 터뜨려 버릴 요량으로 성큼성큼 발을 뗐다.

살벌한 기세에 새끼 개미가 덜덜 떨며 황급히 작은 몸뚱이를 돌렸다.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던 도중 몸이 쑥 들려졌다.

요한나는 걸음을 멈추고 정면을 응시했다. 흰개미였다.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웬일이람. 싱거운 감상이 들었다.

흰개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한나는 흥, 코웃음을 치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그는 잠시 등을 보인 그녀를 바라보더니 토굴 방 밖으로 새끼 개미를 놓아주었다.

흰개미는 요한나의 산란을 도운 일등 공신이었다. 그는 요한나가 산란하면 알집의 막을 터뜨리고 그 알을 부화 방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 처음처럼 알집을 억지로 빼내는 일은 없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할 때마다 다리 사이의 통로를 넓히고 알이 수월히 빠져나오도록 손을 놀렸다. 그런 그의 손놀림은 빠르고 사무적이었다.

무뚝뚝한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나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흰개미든, 검은 개미든, 일족을 번영시키기만 하면 이 몸에는 더는 관심이 없는 족속들이다.

‘이제야, 여왕이 됐구나.’

검은 개미의 무심한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알을 낳기 전까지는 공주에 불과하나 알을 낳으면 비로소 여왕으로 거듭난다. 알집의 생성부터 산란까지의 과정은 공주를 여왕으로 변모시키는 가장 중요한 키였다.

알을 낳는 기계일 뿐이라는 생각과 달리 그녀는 존재하기만 해도 토굴에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개미들에게 일족의 여왕이란 그런 존재였다.

거기까지는 몰랐지만(설사 알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요한나는 뭔가 달라졌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거처도 보통의 토굴 방에서 더 넓은 암굴로 옮겨졌고, 개미들도 전보다 고분고분하다.

주변에서 부산스럽게 굴어 짜증이 나면, 일꾼개미들은 꼭 명령이라도 들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토굴 방을 빠져나간다. 그게 페로몬 때문이라는 것은 흰개미에게 들어서야 알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검은 개미는 일족의 군대를 원한다고 했다. 알집 하나로 군대를 만들기엔 부족할 테지만 두 개가 더 있으니 모조리 부화한다면 그걸로 충분하겠지.

알집의 10퍼센트는 장군 개미, 그리고 30퍼센트는 수개미, 나머지 60퍼센트는 일꾼개미로 부화한다. 알집 하나만 부화했을 뿐인데도 적막하던 토굴이 떠들썩하니, 이곳을 떠날 날도 그리 오래 남진 않았을 거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 * *

치릇치릇. 치릇치릇.

요한나는 거듭된 산란으로 힘이 빠진 다리의 근력을 키우고 있었다. 운동에 집중하는 그녀는 주변에 신경을 껐기에, 개미들은 이 시간에는 암굴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편이었다.

치릇치릇. 치릇치릇.

‘시끄러워.’

허공에서 움직이던 발을 짜증스럽게 내려놓았다.

좀 떨어진 곳에서 나신의 암컷 개미 하나가 미끈한 갑각 표피를 떨어 대며 흰개미에게 아양을 떨고 있었다.

“흰개미, 교…… 미. 흰, 개미. 알. 갖자. 알.”

다리를 벌리고 은밀한 부위를 흰개미의 성기 부위에 문질러 댔다. 흰개미가 무섭지도 않은지 끈적하게도 아랫도리를 돌렸다.

요한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꼴을 본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첫 알집에서 부화한 일꾼개미 중에는 암컷들도 있는데, 이들은 오로지 알을 보살피고, 먹이고, 깨끗하게 닦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그런 이들 중에도 돌연변이가 나오는 모양이다. 몇몇 암컷 개미들은 심심찮게 흰개미에게 달라붙어 교미해 달라고 졸랐다. 원하는 것은 알인 것 같다.

다른 수개미들에게도 달라붙긴 했지만 유독 장군 개미, 특히 흰개미를 따라붙었다. 강한 유전자를 얻고 싶은 본능인 듯했다.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

당장 꺼지라고 소리 지르려다 문득 든 의문에 멈칫했다. 암개미도 알을 낳을 수 있다면 어째서 그렇게도 공주를 원하는 거지?

‘공주와 달리 알을 많이 낳지 못하는 건가?’

암개미가 알을 낳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알을 낳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호기심이 생겨 흰개미와 암개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흰개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는 흰개미가 암개미에게 응한 적은 없지만 안 보는 곳에서 뭔 짓을 하고 다닐지 알 게 뭐란 말인가.

실제로 그가 암굴을 나가고 암개미가 뒤쫓아 나간 적은 있으니 다른 토굴 방에서 교미했을지도 모른다.

‘보기보다 그걸, 엄청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니까.’

그녀의 시선을 느낀 흰개미가 고개를 돌렸다. 생각에 골몰하던 요한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모른 척해 줬으면 좋겠는데 성큼성큼 다가온다.

‘아, 왜 또 와.’

암개미는 그를 따라가고 싶은 듯 한 발을 뗐지만, 요한나를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두려워하는 내색에 황당해졌다.

흰개미는 순식간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뭐, 어쩌라…….”

입술이 부딪쳤다. 흰개미가 요한나의 입술을 쭉 빨아들였다. 입이 열리자 매끄러운 혀가 쑥 들어왔다. 곧이어 청량한 액체가 안으로 쏟아졌다. 그를 밀어 내려던 요한나는 달콤한 맛에 손을 탄탄한 어깨에 올리고 액체를 받아 마셨다.

‘젠장. 산란을 겪고 나서는 도저히 이걸 거부할 수가 없어.’

약해진 몸이 영양분을 원하고 있는 거라는 건 알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접촉은 달갑지 않다.

그래도 일꾼개미의 질척한 죽보다는 확실히 흰개미의 것이 나았다.

흰개미가 여기 있든 없든 상관은 없으나 이것만큼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았지만.

쏟아지던 액체의 양이 줄어들었다. 신기하게도 몸에 활력이 솟았다.

그녀가 받아먹기 편하도록 혀를 누르고 있던 흰개미의 혀가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즉시 몸을 뗀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그를 보며 요한나는 입을 막았다.

‘일부러 혀를 문지른 것 같았는데?’

의심스럽게 쳐다보았지만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달라붙은 암개미를 달고 흰개미는 그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못내 아니꼽다.

‘밥 달라고 쳐다본 거 아니거든.’

요한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 * *

“역시 더 길어졌어. 매일 파내고 있는 건가?”

요한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흙과 주먹만 한 돌멩이를 발로 더듬었다.

원래 여왕은 암굴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모양이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호소가 통해서 암굴 근처의 토굴 정도는 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여왕은 움직이지 않는 게 정상인지 개미들이 이상하게 보기는 했다.

요한나는 토굴의 통로를 걷는 짧은 시간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토굴의 입구까지는 갈 수 없어도 통로를 차분히 걷다 보면 언젠가 복잡한 미로 같은 토굴을 빠져나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차올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막혀 있는 토굴의 통로를 확인한 그녀는 몸을 돌렸다.

이쪽을 향해 뛰어오던 암개미가 그녀를 보고는 기겁한 표정으로 멈추어 섰다. 요한나는 눈썹을 까딱였다.

‘뭐지?’

두 팔로 상체를 감싼 암개미는 우물쭈물하더니 옆으로 난 통로로 뛰어갔다.

“야. 쟤는 어딜 가는 거야?”

여기까지 뒤를 졸졸 따라온 일꾼개미를 힐끗했다.

“응? 뭐, 가?”

멍청한 표정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보다,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

“따라가 보자.”

“여왕!”

요한나는 암개미가 사라진 통로로 뛰어갔다. 일꾼개미가 울상을 지으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처음에는 어두워서 사위가 분간되지 않았던 토굴이었지만 지낸 시간만큼 변화가 생겨서 어지간한 움직임은 무리 없이 확인할 수가 있었다.

‘어쩌면 몸이 적응하고 있는 건지도.’

그 생각만 하면 여지없이 가슴이 선득해진다.

얼마나 뛰었을까.

‘저기 있군.’

좁아진 통로의 구석에서 암개미가 뒤를 보인 채 몸을 숙이고 있었다.

요한나는 저를 확인한 암개미가 도망갈까 봐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암개미는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품에 있던 뭔가를 통로의 가장 구석에 내려놓는다. 그 꼴이 보물을 숨기는 강도 같았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요한나는 암개미가 서성이던 곳까지 걸어갔다.

바위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언뜻 마구잡이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니 나름 규칙적으로 쌓아져 있다. 마치 정말 뭔가를 숨긴 것처럼.

‘여기도 도둑 같은 게 있는 건가? 훔칠 게 뭐가 있다고.’

요한나는 꺼림칙한 기분으로 돌무덤을 내려다보았다. 보물이라도 안고 있는 것처럼 도망치던 암개미를 떠올리자 호기심이 생긴다.

발을 들어 맨 위에 있는 돌을 툭 쳤다. 그러자 예상했던 것처럼 돌로 쌓여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안쪽을 들여다본 요한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

돌무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유백색 타원형의 매끄러운 알.

개미의 알은 처음 알집에서 나올 때는 손톱보다 작아도, 시간이 지나면 무섭게 크기를 불리기 시작한다. 청소를 위해 부화 방의 알을 옮기느라 동분서주하던 일꾼개미들을 떠올린 요한나의 눈썹이 휘어졌다.

‘이 정도 크기면 산란한 지 2주 정도 되었을 텐데. 어째서 알을 여기다 숨긴 거지?’

어쨌든 암개미들도 알을 낳을 수 있기는 한 모양이다. 알이 하나뿐인 걸 보아 하니 공주처럼 산란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이걸 부화 방으로 옮겨 줘야 되나?’

생각에 잠겼던 요한나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통로를 통해 빠져나온 것은 그녀보다 키가 작은 장군 개미였다. 난쟁이처럼 보이지만 등에 난 날개는 탁한 색을 띠고 있었다. 어린 장군 개미일수록 날개맥이 선명하다. 저렇게 흐린 건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일족이었던 개미라는 뜻이다.

“여왕.”

장군 개미가 히죽 웃었다. 요한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장군 개미들은 개미 중에서도 힘이 세고 강한 자다.

경계하는 그녀와 달리 단신의 장군 개미는 친밀함을 표시했다. 새어 나오는 페로몬이 끈적끈적하다.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진 요한나가 몸을 돌렸다. 다행히 장군 개미는 그녀를 따라올 생각은 아닌 듯했다.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쏠려 있었다.

“알, 이다.”

요한나는 무심코 뒤로 고개를 돌렸다. 장군 개미가 돌무덤 속에서 알을 꺼내 들고 있었다.

‘부화 방으로 옮기려는 건가.’

단순히 생각했던 요한나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매끈한 알이 쩍 벌어진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툭.

찌걱.

꿀―꺽

장군 개미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입맛을 다시며 혀로 입 주변을 할짝거린 그가 얼어붙은 요한나를 보고는 눈을 끔벅거렸다. 예의 그 히죽거리는 웃음이 떠올랐다.

요한나는 얼음물을 맞은 듯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너, 뭐, 뭐 한 거야? 그걸, 먹었어?”

“알? 먹었지.”

대수롭지 않게 답한 그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아, 걱정, 마. 여왕의, 알은, 소중하다. 다른 알과, 달라. 하지만 다른, 알은, 먹을 수, 있, 지. 맛, 있어.”

활짝 웃는 장군 개미를 보는 순간 가슴에서부터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우웩……!”

역시 이 토굴은 끔찍하다. 잔인하고 야만적이어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이곳에 있어도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비틀거리다 토굴 벽을 붙들었다. 창백한 얼굴로 되뇌었다.

‘얼른, 얼른 돌아가야 해. 한시라도 빨리…….’

* * *

스윽스윽. 칙, 치익.

나뭇가지가 모래 위를 지날 때마다 선이 하나씩 그어졌다. 마지막 선을 그은 요한나는 한참 동안 바닥에 그려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나도 안 닮았어.”

닮은 건 상냥한 미소 정도인가. 기분이 울적해졌다. 아버지와 다른 사냥꾼과 소통하기 위한 표식 따위는 자주 그렸지만, 미적인 목적의 그림은 어릴 때를 제외하고 한 번도 그려 본 적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을에서 그림이라도 배워 볼 것을. 그랬다면 바렌타의 얼굴을 보다 잘 기억해 둘 수 있을 텐데.

“……인간, 인가?”

‘뭐야.’

가까이 다가온 흰개미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수개미들과 교미한 뒤 몇 달 동안 필요한 말을 제외하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흰개미였다. 그렇다고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던 참인지라 흰개미의 질문이 내심 반갑게 느껴졌다.

‘이놈이 반갑다니. 진짜 미쳐 가나 봐…….’

요한나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큭큭 웃었다. 검은 개미는 필요할 때만 그녀를 찾아오고, 일꾼개미들은 그녀를 오로지 알을 낳는 ‘여왕’으로 숭배한다.

요한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외로웠지만, 이곳에서만큼 고립된 외로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특히 요 몇 년간은 바렌타의 곁에서 사람 사는 사회의 따스함을 겪었던 터라 뼈가 시릴 정도로 외로움이 사무쳤다.

그래서 요한나는 다른 때 같았으면 무시했을 그의 질문에 대꾸해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여길 나가면 바렌타에게 갈 거야. 꼭.”

말하다 보니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꼴이다. 약간 머쓱해져 그림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조용한 흰개미가 이상해서 힐끗하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묘하게 서늘하다.

“재미, 없어.”

“어?”

쿵!

심장 고동이 그의 살기에 반응하여 무겁게 울렸다. 이 감각을 알고 있다. 아무런 무기 없이 맹수를 앞둔 느낌.

당황해서 눈을 끔벅거리자 흰개미는 더는 그녀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얼이 빠졌던 요한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뭐야, 도대체?”

무심코 몸을 감쌌다. 허술한 옷으로 감싸지 못한 살갗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 * *

요한나는 눈을 떴다. 웅크린 채 잠든 탓에 어깨와 팔이 저렸지만 미동하지 않고 눈만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어두운 토굴을 밝히는 희뿌연 빛, 변하지 않는 칙칙한 암갈색의 토굴 벽. 매일매일 눈을 보면 보이는 광경.

문득 구역감이 치밀어 입을 틀어막았다. 눈을 감고 한참 있어야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았다.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킨 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꿈을 꾸었다. 바렌타와 함께 마을의 빵 가게에서 빵을 먹는 꿈이었다. 설탕과 시럽을 잔뜩 뿌린 빵은 혀가 얼얼하도록 달았다. 깜짝 놀라자 바렌타는 내일은 다른 것도 먹어 보자며 웃는다.

며칠째 바렌타와 마을의 꿈을 꾸고 있다. 우스운 건 실제로 겪어 보지 않은 상황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좋아하는 꿈 같은.

토굴의 삶이 목을 옥죄어 올수록 바깥세상은 신성해진다.

‘현실 도피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괴로워.’

인내심은 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마을은 얼마든지 골라 먹을 수 있는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있고, 종일 쳐다봐도 지루하지 않은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진 예배당이 있고, 평범한 주제로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따뜻한 바렌타가 있다. 돌아간다면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다정하게 대해 줄 거다.

요한나는 멍한 얼굴로 토굴 벽을 응시했다.

‘돌아간다면, 다들 따뜻하게 받아 줄 거야.’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후드득,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가능성 낮은 희망이라는 건 알고 있다. 배척받는 사냥꾼 따위, 바렌타 말고는 아무도 원하지 않으니까. 바렌타도 이미 자신 따위는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을 찾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더는 견딜 수가 없다.

요한나는 차가운 손등으로 눈물을 마구 문질러 없앴다.

“…….”

깨끗해진 시야에 어느새 다가온 흰개미가 가득 찼다. 그는 요한나의 벌건 눈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기에 젖었지만 묘하게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검은 개미를 불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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