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9)

08

개인 토굴 방으로 돌아온 흰개미는 어둠에 묻혀 있는 검은 개미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은은한 막처럼 드리워져 있던 하얀빛이 싹 가셨다.

어딘지 넋이 나갔던 얼굴이 자신을 발견하고 무표정해지기까지,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변화를 낱낱이 확인한 검은 개미의 눈썹이 꿈틀했다.

“항의라도, 하려고, 기다렸나?”

흰개미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검은 개미의 분노는 예상한 바였다. 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혼롓날로 적절한 날을 잡고 건장한 수개미들을 모두 불러 모았는데 그의 뜬금없는 행동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 버리지 않았는가.

흰개미는 늘 그랬듯이 검은 개미가 제 화를 참지 못하고 패악을 부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내가 작은, 공주를, 사랑할 때.”

차분한 쇳소리가 낮게 깔리며 토굴 방의 적막감을 깨뜨렸다.

“넌,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

흰개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고 묻는 그 얼굴을 보며 검은 개미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네가…… 같은 꼴을, 하고 있구나.”

“…….”

“흰개미, 소유를, 알아 버린 거냐.”

흰개미가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얀 눈썹을 치켜떴다.

“모르겠나?”

검은 개미가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기분이 저조해진 흰개미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만 좋은, 바보 같은, 흰개미…….”

“…….”

“이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흰개미.”

검은 개미가 어둠에서 빠져나왔다. 마치 그림자가 또 다른 그림자를 낳는 것 같았다.

온몸에 어둠을 휘감은 그가 흰개미의 앞까지 다가왔다. 엇비슷한 눈높이라 시선이 곧바로 맞닿았다.

“네가 내게, 한 말을, 기억해 봐.”

흰개미의 고개가 아래로 까딱였다. 무심한 표정은 기억을 되새길 노력도 하지 않는 듯했다. 검은 개미의 눈빛은 얼어붙은 호수의 밑바닥처럼 어두웠다.

“네, 개인적인 감정은, 일족에, 방해돼.”

흰개미의 눈이 가늣해졌다.

‘개인적인, 감정, 방해된다.’

‘뭐?’

‘공주에, 대한, 네 감정은, 불필요해. 네 ‘공주’는 이미, 죽었어.’

검은 개미는 별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는 얼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하얀 얼굴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감정 한 조각 알아내지 못했다.

네 감정이 방해된다고 말한 게 무색한 얼굴이다. 혀를 찬 검은 개미는 의심을 거두고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

“일족을 향한, 네 노력은, 진심. 그래서 믿어. 공주에 대해선 너 나름의,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

“우리는, 널, 믿고 있어.”

무심한 하얀 얼굴에 검은 개미는 진지하게 말했다.

“실망, 시키지 마라. 흰, 개미.”

* * *

요한나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색색의 꽃과 먹을 수 있는 식물 줄기를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들고 온 흰개미를 바라보았다.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요즘 너무 자주 찾아오는 거 아니야?”

흰개미가 눈을 깜박였다.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알, 낳아야 하잖아?”

말문이 막힌다. 한숨을 쉬었다.

1년. 1년만 참자. 수없이 되뇐 말을 다시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런 그녀의 입으로 시원한 촉감의 식물 줄기가 내밀어졌다. 흰개미가 검지만 한 식물 줄기로 그녀의 입술을 쿡쿡 찔렀다.

“……먹기 싫어.”

요즘 흰개미는 일꾼개미 대신에 음식을 가지고 온다. 자유롭게 밖을 나다니며 사냥할 수 있는 그가 가져온 먹을거리는 일꾼개미들이 가져온 것보다 싱싱했지만, 주는 대로 먹기엔 가끔씩 자존심이 상할 때가 있었다.

실제로 지금은 그다지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흰개미가 조금 더 고개를 기울였다. 붉은색 입술이 달싹였다.

“잘, 먹어야.”

“…….”

“건강한 알을, 낳지.”

또다시 말문이 막힌 요한나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놈의 알, 알, 알! 자신이 약속했지만 이렇게 알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때마다 속이 탔다.

입을 조금 벌리자 식물 줄기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시간을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체감상 오늘 하루 흰개미가 토굴 방에 들어온 횟수는 열다섯 번. 세 시간 전에는 고기를 가져왔었다. 그래도 요즈음은 일꾼개미의 죽을 먹으라고 강요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건 다행이지만…….’

흰개미를 흘끗하고 달큼한 맛이 나는 식물 줄기를 씹었다. 그녀의 앞에 걸터앉은 흰개미도 식물 줄기를 하나 입에 집어넣었다.

얼굴은 마을에 방문한 귀족들보다도 멀끔하게 생겼으면서 딱딱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손질이 덜 된 식물 줄기를 씹어 먹는 건 봐도 봐도 이질적이다.

모피로 몸을 감싼 그는 언뜻 봐서는 인간과 구분할 수 없었다. 그것도 무척 잘생긴 인간 남자.

‘저 얼굴로 마을에 내려가면 누구라도 유혹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런 토굴에 갇혀 알을 낳을 신세가 되어 달라는 부탁에 유혹당할 사람은 없겠지.

‘아니, 있을지도 모르잖아.’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한 지금도, ‘어째서 나야?’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고는 했다.

식물 줄기를 씹다 말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게 쑥 빠지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곧장 입술이 부딪쳐 왔다.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맞물렸다. 서늘한 혀가 들어와 굳은 그녀의 혀를 건드렸다. 뒤늦게 정신이 들어 그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밀었다. 바닥에 뿌리를 박은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곧이어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타액과 같은 그것을 꿀꺽 삼켰다. 흰개미가 차가운 혀로 그녀의 입 속을 휘저었다. 정신없이 그가 흘려 주는 액체를 삼키다 그의 어깨를 때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읏, 싫…… 어!”

입술이 떨어진 후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혀끝에 감도는 달콤한 맛이 공기를 만나 진해졌다.

요한나는 거칠게 숨을 쉬며 흰개미를 노려보았다. 흰개미는 무구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맛, 없는 거 아니었, 어? 손, 멈췄길래.”

이가 갈린다.

“아니야! 잠깐 뭐 좀 생각했던 거라고.”

“음.”

흰개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할짝거렸다. 붉은 입술은 젖은 탓에 더 빨개 보였다. 표정은 어린아이 같으면서 야한 행동을 하는 데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 괴리감이 그를 더 괴물 같아 보이게 했다.

그가 징그럽게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흰개미가 그녀를 뒤로 밀었다. 강한 힘에 밀리며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뒤통수가 바닥에 떨어지려는 순간 하얗고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를 받쳤다. 요한나는 바로 눈을 떴다. 코앞까지 다가온 사람 같지 않은 얼굴에 입술을 깨물었다.

“저리 가.”

“알, 낳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것 같다. 요한나는 눈을 의심스럽게 떴다. 다시 보니 여전히 하얗다.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보이는 건 눈 때문인가.’

무심한 표정에 진저리를 쳤다. 가끔 어벙한 모습을 보이고 바보 같을 때가 있지만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그가 괴물이라는 걸 깨닫고 만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알을 낳아 주기 위해 괴물과 관계하는 처지였다.

이 사실이 마을에 알려진다면, 붉은 지붕의 여자보다 더한 갈보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아니, 아예 마을 출입이 불가능해질 터다.

‘바렌타, 보고 싶어.’

머리가 어지럽다. 답답해진 속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흰개미의 차가운 키스가 죽은 것처럼 눈을 감은 그녀에게 떨어져 내렸다.

옷 같지도 않은 얇은 천이 스르륵 위로 올라갔다. 차가운 손가락이 가슴에 닿자 그녀는 몸을 떨었다. 이 서늘함은 닿을 때마다 적응이 되질 않았다.

축축한 혀가 젖꼭지를 휘감았다. 육체의 반응은 솔직했다. 허리를 움찔 떤 그녀가 곧장 날카롭게 뇌까렸다.

“쓸데없는 거 하지 마.”

“쓸데없는?”

가슴에 달라붙은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적응되지 않는 모습 중의 하나였다. 흰개미가 그녀의 가슴에 붙어 있는 모습은.

일그러진 눈을 응시하며 흰개미가 혀를 내밀었다. 붉은 혀가 젖꼭지를 할짝거렸다. 딱딱해진 젖꼭지가 혀 아래에 짓눌리는 게 보였다.

요한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 냈다. 흰개미는 밀리지 않은 채, 그의 하얀색 머리카락만 이마 뒤로 넘어갔다.

“하지 마.”

“하지만, 이거, 안 하면, 요한나, 아파.”

흰개미가 모피를 벗어 냈다. 툭, 튀어나온 두툼한 페니스가 요한나의 허벅지를 찔렀다.

꿀꺽. 침을 삼킨 요한나는 할 말이 없자 신경질이 났다. 정말 쓸데없이 그것만 커서는.

흰개미가 비비적대는 게 싫었으나 몸이 흥분하지 않으면 다치는 건 그녀였다. 억울함을 삼키고 보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흰개미가 다시 얼굴을 내렸다. 차가운 손가락이 왼쪽 젖꼭지를 간질이며, 입으로는 오른쪽 젖꼭지를 쪽 빨았다.

날카로운 이는 안쪽으로 감추고 축축한 혀로만 가슴을 건드린다. 요한나가 혓바닥이 까끌까끌해서 아프다고 한 이후에 흰개미는 타액을 잔뜩 머금고 혀를 놀리는데, 그렇게 하니 아픔보다는 간지러움이 커졌다.

요한나는 바닥에 내려놓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반응하는 몸이 수치스러워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야…….’

까맣게 변한 머릿속으로 바렌타를 떠올렸다. 차가운 손가락이 젖꼭지를 매만지다가 비튼다. 요한나는 그게 바렌타의 손길이라고 상상했다.

흰개미의 접촉 위에 바렌타의 환영을 덧씌운 지는 꽤 되었다. 그러자 이 순간을 견디기가 쉬워졌다. 오히려 너무 수월해져서…….

“흑!”

퍼뜩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을 뜨자 흰개미가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음핵을 건드린 손가락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흰개미의 빨간 눈동자와 마주한 요한나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돼, 됐어. 젖었으니까 해, 얼른.”

손에서 풍겨 오는 눅눅한 흙냄새가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짜증스럽게 말하자 흰개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몸을 아래로 내렸다.

다리가 들리자 요한나는 기겁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간 흰개미가 구멍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흰개미의 기행이었다. 아래를 적시기 위해 애무를 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거기를 왜 자꾸 빤히 쳐다보냔 말이다.

발뒤꿈치로 그의 등을 팍팍 내리쳤다.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요지부동이었다.

“흰개미!”

소리치자 흰개미는 느리게 혀를 내밀었다. 타액으로 미끈해진 혀가 젖어 들기 시작하는 부드러운 살점을 간질였다.

“아!”

또 한 번 소리를 내 버렸다. 얼굴을 붉히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발로 어깨를 퍽퍽 치자 흰개미가 귀찮다는 듯이 발목을 붙잡았다.

“아직 덜, 젖었어.”

실제로 완전히 젖지 않은 채 삽입했을 때는 고통이 극심하지만 어쩐지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흰개미가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요한나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흰개미를 노려보았다. 할 일만 하면 되지 자신을 이렇게 수치스럽게 하는 그가 미웠다.

흰개미는 손가락으로 음핵을 톡톡 건드렸다. 마치 장난감을 굴리는 것 같은 손길에 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입을 더 강하게 막았다.

흰개미가 고개를 슬쩍 들어 요한나를 보더니, 그 상태로 혀를 내밀었다. 그의 새빨간 혀는 마녀의 사과처럼 시선을 뗄 수 없게 했다.

흰개미가 혀를 내밀어 그곳을 할짝거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심한 얼굴이지만 새빨간 눈에선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으음…….”

흰개미가 목을 울렸다.

“젖어 가고, 있어.”

“그런 건 말 안 해도 돼.”

쏘아붙이자 그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얀 머리카락이 허벅지에 닿았다. 간지러워서 허벅지를 움찔하자 그곳에 머리를 비비며 혀를 더 꺼내 내민다. 혀의 넓적한 면으로 구멍을 덮은 꽃잎에서부터 툭 튀어나온 민감한 살점까지 한 번에 쓸어 올렸다.

“읏!”

막힌 신음이 들려왔다. 흰개미의 혀 놀림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아직도,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건가?

요한나는 어디서 기인하는지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배 속에서 쾌감이 찰랑거렸다. 눈을 감고 바렌타를 떠올렸다. 할짝거리는 혀를 바렌타의 것이라 상상하니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그 순간, 허벅지가 따끔했다. 눈을 뜨자 흰개미가 허벅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무슨 생각, 해?”

“앗! 따가워. 왜 이래?”

흰개미가 혀를 내밀어 상처가 난 허벅지를 핥았다. 고양이 혀처럼 까슬거려 상처가 더 아팠다.

“반응이…….”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차가운 손이 구멍을 파고들었다. 이질적인 체온에 요한나의 몸이 떨렸다.

“더, 젖어 와.”

“돼, 됐지? 젖었으면 얼른, 넣어. 좀, 그만…….”

더는 참을 수 없다. 요한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뭘 하는지 흰개미는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왠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해서, 더더욱 손을 뗄 수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구멍을 파고든 손가락이 움직였다. 내벽을 꾹 누르며 공간을 넓히고 안으로 한 뼘 들어온 곳에서 위쪽을 자극한다. 요한나가 느끼는 지점이었다.

학습 능력이 뛰어난 흰개미는 몇 번의 정사로 어딜 건드리면 그녀의 몸이 부드러워지는지 이미 다 파악한 상태였다. 반응하는 몸이 원망스럽다.

‘일인 거잖아. 일이야. 참아. 어차피 곧 삽입할 거야.’

그러나 한참 지나서도 흰개미가 손장난만 치자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수치스러움과 분노로 꽉 찬 머릿속으로 흰개미의 중저음 목소리가 파고든다.

“무슨 생각, 했어?”

똑같은 질문. 요한나는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아까의 당황함이 가신 얼굴은 흥분으로 붉지만 그래도 비교적 침착했다.

흰개미의 빨간 눈이 그녀의 불그스름한 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알 것 없잖아.”

“…….”

“그것보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너, 알을 낳을 생각이 있기는 한 거야?”

빈정거림에도 변화가 없는 흰개미의 무심한 얼굴을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어떤 말을 해도 당황하거나 화내지 않는 그는 벽처럼 느껴져 짜증이 난다.

그녀에게 실질적인 위해를 가했던 검은 개미보다 그가 더 짜증이 나는 건 이런 면모 때문이었다. 대놓고 분노를 터뜨리는 검은 개미는 속이라도 파악할 수 있지만 흰개미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녀의 음부에 페니스를 가져다 댔다. 서늘한 감촉이 느껴지자 요한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괴물.

개미들을 제외한 인간 남자의 페니스를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온도가 낮지는 않을 것이란 것은 안다. 바렌타와 키스할 땐 바지 너머로도 그 열기가 느껴졌으니까…….

다정한 얼굴로 뜨거운 열을 뿜던 그를 생각하니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예고 없이 아래가 벌어지며 거대한 페니스가 파고들었다.

“아악!”

내장이 위로 쏠리는 감각에 숨이 턱 막혔다. 비명을 지른 요한나가 다급히 흰개미를 보자, 그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뭐야, 갑자기 그렇게 삽입하지 말라고.”

속내를 후벼 파는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불편해서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흰개미가 크고 하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더듬었다. 한기가 끼쳐 온다.

“요한나는, 복잡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방금 기분이 굉장히, 나빴어.”

“으읏…….”

“여길 열면, 생각을, 알 수, 있을까?”

무심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뻣뻣하게 굳은 채 그를 보자 흰개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단단한 손끝이 금방이라도 관자놀이를 파고들고 두개골을 깨뜨릴 것 같았다.

극심한 공포감에 요한나는 희게 질려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고통에 앓는 신음만 흘러나왔다.

잠시 후, 흰개미가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그라졌다. 다만 여운처럼 남은 감각이 여전히 요한나를 옭아맸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흰개미를 응시했다. 시선을 떼면 다시 저 하얗고 투명한 손으로 저를 위협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야. 동물의 머리엔 말캉말캉한 것, 밖에는, 없으니.”

“…….”

“요한나, 왜? 여기, 차가워졌어…….”

흰개미가 그녀의 배와 음부를 더듬거렸다. 핥고 만지고 빨아 댄 탓에 어쩔 수 없이 올랐던 쾌감의 열기가 온데간데없이 식어 있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자 화가 울컥 치밀었다. 흰개미에게 겁을 먹었다는 수치심이 방금까지 뇌리를 꽉 채웠던 공포를 내리눌렀다.

분노가 일자 손발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의 일이 무뎌질 뻔한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이곳은 괴물의 소굴. 지금은 알을 낳는 기계로 소중하게 대해 주고 있지만 그게 영원하지는 않을 거다. 하마터면 방심할 뻔했다.

‘이놈들이 자꾸 모자라게 구니까.’

새카만 동공에 처음처럼 경계심이 들어찼다.

“요한나…….”

흰개미가 허리를 움직였다.

푹, 푹!

몸이 굳어서 애액마저 마른 탓에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이대로 계속 움직인다면 필시 안에 상처가 날 테지만 살살 해 달라느니 애무를 더 하라느니 하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입술을 꽉 깨물고 고통을 참았다.

그런데 고작 두 번 정도 허리를 움직인 흰개미가 허리 짓을 멈춘다. 그러고는 요한나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얕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유석처럼 서늘한 손이 맞닿은 교접 부위 위쪽의 튀어나온 음핵을 문지르고 침을 잔뜩 머금은 혀가 젖꼭지를 사악사악 핥아 댔다.

서서히 요한나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일이다. 절대 소리를 내지 않겠어.’

계속 결심하며 입술을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문득 고개를 든 흰개미가 혀를 내밀어 요한나의 입술을 핥았다. 이가 박힌 입술을 부드럽게 쓸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아!”

결국 요한나는 입술을 씹는 것을 그만두었다. 흰개미의 혀가 요한나의 입 안 곳곳을 탐색했다. 타액은 물론이고 입술에서 흘러나왔던 피까지 그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혀가 그의 움직임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여 댔다.

‘이 자식과 하는 키스, 기분 나빠.’

처음 입을 맞추었을 때는 조각상, 또는 야생 동물과 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얼추 바렌타의 움직임과 비슷한 것 같다. 혀끝이 천장의 오돌토돌한 부분을 쓸자 목구멍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학습 능력이 빨라도 너무 빨라서 기괴할 정도다. 요한나의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뱀 같은 혀가 빠져나갔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피가 묻은 입술을 보란 듯이 혀로 핥는다. 씩씩거리며 노려보는 요한나와 시선을 겹치며 허리를 흔들었다.

“요한나, 요한나.”

이건 일이야. 절대 소리를 내지 않을 거야.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을 거야…….

“요한나.”

끊임없이 불러 대는 목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그만 부르라는 소리가 혓바닥 아래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찌르는 듯한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감았다.

흰개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혀와 손으로 그녀의 몸 곳곳을 애무하며 허리를 흔들었다. 전처럼 무작정 거칠고 빠르지 않은, 리드미컬한 움직임이었다. 자꾸만 자극되는 성감에 요한나의 미간에 주름이 그어졌다.

“하아…….”

흰개미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요한나는 혀끝을 깨물었다. 허리가 자꾸만 튕겨 오르려고 한다. 차라리 처음처럼 아프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

흰개미에게 괜한 걸 가르친 걸까? 후회를 곱씹으며 은근하게 올라오는 쾌감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요한나의 몸.”

“…….”

“요한나와 다르게, 솔직해. 알기, 쉬워.”

그녀의 눈썹이 꿈틀했다.

“여길, 이렇게, 만져 주니까 안이, 더, 오물오물.”

짓눌린 음핵에서 간지러운 감각이 번져 나갔다. 구부러지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허벅지가 떨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요한나, 보지가, 내 자지, 잡아먹는, 것 같아.”

눈이 번쩍 뜨였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뭘 하든 무시하려고 했으나.

“방금 뭐라고 했어?”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알겠다는 듯, 입을 벌리더니 손가락으로 접붙인 그녀의 음부를 가리켰다.

“보, 지.”

허리를 뒤로 빼자 중지와 엄지로 감싸야 겨우 닿을 것처럼 두꺼운 성기 뿌리가 드러났다.

“자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내달린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성기라고 해.”

“어째서?”

“전에는 평범하게 말했잖아.”

“얼마 전에 마을에서, 인간들의, 교미를 봤거든. 여기는.”

그녀의 성기를 가리켰다.

“보지.”

“…….”

“여기는, 자지라고, 하더군.”

흰개미가 손바닥으로 음부와 제 페니스를 동시에 어루만지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요한나는 아연했다. 어쩐지 성교에 관해서 지나치게 학습이 빠르다 했더니 인간들의 정사를 보고 왔던 걸까?

‘하지만 마을이라니, 간간이 토굴을 빠져나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검은 산맥 아래의 마을들은 산맥의 짐승들에 대한 방비가 튼튼하다. 그런데도 마을에 들어가 가장 은밀해야 할 정사까지 보고 왔다는 건 마을의 인간들이 흰개미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닥과 맞닿은 어깻죽지가 새삼스럽게 서늘해졌다.

‘갔다 온 곳이 바렌타의 마을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무심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바렌타가 잘 지내는지 물어보기라도 하려고? 어리석은 짓을.’

가슴이 철렁하는 한편 심장이 뛴다.

그렇게도 가고 싶은 마을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다니.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바렌타가 바로 앞에 와 있는 듯했다.

헛된 망상이라는 걸 알지만 너무나도 간절해서 쉽게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흰개미에게 약점을 들키는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생각할 분별력은 남아 있다.

혀끝을 아프게 씹어 댔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금방이라도 마을 사람들, 정확히는 바렌타에 관한 질문을 할 것 같아서.

생각에 잠긴 그녀를 흰개미가 빤히 바라보았다. 돌연 음핵을 아프게 잡아당긴다.

“아앗!”

불시의 통증에 깜짝 놀란 요한나가 눈을 들었다. 흰개미가 곧장 허리를 움직였다.

끈질긴 애무로 부드러워진 질을 단단한 페니스가 끝까지 파고들었다.

“아읏!”

흰개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자지에, 집중해.”

“평범하게, 말하라니까, 흑!”

질색하자 못마땅한지 고개를 젓는다.

‘이게 갑자기 멍청한 척을 해?’

그의 머리통이라도 후려치려고 주먹을 쥐자 흰개미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 고개를 숙여 젖꼭지를 강하게 흡입했다. 통증과 같은 쾌감에 아랫배가 찌릿했다.

“하으, 으응!”

결국 느끼는 신음을 뱉어 버린 요한나의 얼굴이 울 것처럼 변했다. 흰개미는 그녀의 마음 따위 전혀 모르겠다는 듯 까슬까슬한 혀로 가슴을 난잡하게 핥아 올렸다.

* * *

후욱, 후욱.

양손에 든 바위를 들어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팔뚝에 선명한 근육이 도드라진다.

‘체력이 떨어졌어.’

예전에는 이 정도 무게야 가뿐했었는데 지금은 쉰 번만 해도 팔이 뻐근해지니.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몇 달일지 모를 시간을 토굴에 박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토굴을 빠져나갔을 때가 공주의 혼롓날이었으니 족히 반년은 지나지 않았을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이 답답한 토굴 방에서나마 단련하기 시작했지만, 낮이든 밤이든 산을 나다니던 때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운동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일꾼개미를 시켜 가져오게 한 쥐기 적당한 모양의 바위를 내려다보았다. 바위를 들어 올릴 때마다 팔뚝의 울퉁불퉁한 근육이 꿈틀거린다.

확실히 몸은 정직하다. 단련하면 근육이 붙고, 쉬게 되면 근육이 빠져 살이 물렁물렁해진다.

‘그러니까 흰개미가 그런 말을 한 거겠지.’

쾌감에 반응하는 건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요한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바위를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그나마 이런 성격이라 다행인가.’

이곳에 잡혀 온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정숙한 아가씨들이었다면 진작 목을 맸겠지.

‘그랬다면 마을이 난리가 났을 테고.’

자신은 검은 산맥의 사냥꾼이다. 마을에 들락날락하며 사람들과 얼굴을 익혔다지만 마을의 일원처럼 생각될 수는 없다. 마을에서 처녀가 납치됐다면 자경단이 꾸려졌을 거다.

‘그래도 바렌타만큼은 나를 찾고 있지 않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럴 거다. 바렌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에게서 나는 포근한 톱밥 냄새, 햇볕에 말린 이불에서 나는 태양의 향기를 떠올리자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요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흰개미와 약속한 시간은 착실히 지나고 있었다.

이제 알을 낳기만 하면, 빌어먹을 괴물의 수를 늘려 주기만 한다면 마을로, 바렌타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마을의 아가씨들과 달라. 검은 산맥의 음습한 사냥꾼의 딸, 아니 사냥꾼이다. 이런 일을 당했다고 죽지 않아. 그러니까 괴물의 알이 생겨도, 절대 죽지 않을 거야…….’

쿵!

힘 빠진 손에서 바위가 떨어졌다. 요한나의 눈동자가 스륵 움직였다. 누더기 같은 천에 가려진 배는 언뜻 평소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툭 튀어나온 미묘한 굴곡을 제외하면.

슬그머니 배에 손을 올렸다. 치골과 배꼽 사이, 아랫배 부분을 꾹 누르자 안쪽에 있는 울퉁불퉁한 것이 느껴졌다.

무표정한 얼굴이 마침내 혐오감으로 일그러졌다. 흰개미에게 느껴서 신음을 흘릴 때보다도 더 역겨운 감정이 치밀었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았지만 너덜너덜한 입술을 씹으며 억눌렀다.

난 이런 걸로는 죽지 않아.

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갈 거야.

죽지 않을 거야.

생각을 거듭할수록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간 손이 아랫배를 세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감당할 수 있을까?’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손안에 말려 들어간 옷자락이 잔뜩 구겨진다.

‘괴물의 알 따위를 낳으면, 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만약 바렌타가 알게 된다면…….

아랫배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입술이 고통스럽게 뒤틀릴 때.

확!

강한 힘이 손목을 낚아챘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손목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천장을 가릴 것처럼 장신에 거대한 체구를 가진 검은 개미가 새카만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 죽일, 셈인가?”

탁!

그의 손을 뿌리쳤다. 검은 개미는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잠깐 손목을 잡혔을 뿐인데 굵은 띠처럼 살이 불그스름해졌다.

“괴물 같으니.”

한껏 빈정거려도 검은 개미는 달라지지 않았다. 귀가 간지럽지도 않다는 표정에 요한나는 저도 모르게 텅 빈 토굴의 입구를 흘끗했다.

흰개미는 식용 식물을 채취하러 나간 참이었다. 검은 개미는 불편하다. 흰개미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직접 손을 대는 건 없는데 검은 개미는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손을 올릴 수 있는 놈이라 경계가 된다.

“여긴 왜 온 거야? 나에 대해선 흰개미에게 일임한 거 아니었어?”

검은 개미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흰개미를, 믿나?”

“믿기는 뭘 믿어. 징그럽게 너희들을 다 상대할 바엔 하나만 보는 게 나으니까.”

“흥……. 알집을 확인하기 위해, 왔다.”

지능 문제인지, 검은 개미의 언어는 흰개미가 하는 말에 비해 알아듣기가 힘들다. 들은 말을 해석하고 있을 때 검은 개미가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었다.

검푸른색 갑각 표피를 두른 손등을 보자 저도 모르게 몸을 물렸다. 검은 개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가만히.”

혀를 아프도록 깨물었다. 익숙해진 통증은 도망가려는 충동만 억눌러 줄 뿐이었다.

검은 개미의 차가운 손이 옷자락을 들추고 배를 어루만진다. 심장부터 얼어붙는 기분에 혀를 잘근잘근 씹었다.

‘젠장. 겁먹지 마. 겁먹지 말라고!’

주먹을 아프도록 쥐고 검은 개미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겁간하고 발목을 분지른 놈이 제 몸을 만지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냐마는, 그를 두려워한다는 내색을 비치는 것만은 절대로 사절이다.

요한나의 타는 듯한 시선을 느낀 검은 개미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손을 펴고 배에 손바닥을 대 울퉁불퉁한 알집이 도드라질 때까지 꾹 눌렀다.

“작군.”

껄끄러운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스며 오는 불길함에 요한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짓이라도 할 듯했던 검은 개미는 미련 없이 배에서 손을 뗐다. 그제야 엉덩이 걸음으로 거리를 벌린 요한나가 물었다.

“이봐, 작다는 게 무슨 말이야?”

검은 개미가 굽혔던 다리를 폈다.

‘칫, 재수 없게 내려다보기는.’

“너, 혼롓날 이후로는 흰개미와만, 교미했나?”

“그런 걸 왜 물어?”

“대답부터, 먼저.”

“……그래.”

검은 개미의 표정이 희한해졌다. 한심해하는 것도 같고 의아해하는 것도 같았다.

“흥, 본인에게, 다, 맡기라더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알집은, 작아. 많이. 산란해, 봐야 열 마리. 부족하다. 매우.”

“뭐?”

“공주는, 가능한 한, 많은 수개미의 씨를, 받아야 하지. 그래야, 알집이 커지고, 많은, 강한, 개미를 산란할 수 있으니.”

“잠깐만, 그러니까 되도록 많은 수개미와 교미해야 알을 많이 낳을 수 있다는 거야?”

검은 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나는 머리가 띵했다.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검은 개미가 한 말이 흰개미가 한 말과 달라서였다.

“하지만 흰개미는 1년 동안 알을 낳아 주면 날 놓아준다고 했어.”

“크흐, 흰, 개미가, 그래?”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입꼬리를 비죽이 올린 검은 개미가 말했다.

“누구, 맘대로?”

“누구 마음대로라니. 흰개미는 너희의 대장 아니야? 흰개미가 약속했어. 날 놓아준다고…….”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검은 개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에 솜털이 삐죽 솟았지만, 요한나는 도리어 눈에 살기를 띠었다.

죽여 버리고 싶다.

흰개미와 끔찍한 교미를 한 것도, 배에 이상한 게 생기는 걸 감내한 것도, 그 약속 하나 때문이다. 참고 견디면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으로 지내고 있었다.

이제 와 그게 아니라는 말을 받아들이기에는 머릿속의 여유가 턱없이 적었다.

“흐, 흰, 개미를, 이해할, 수, 없구나……. 공주, 이 상태로, 토굴, 나가지 못한다. 수개미가, 부족하면 일족이, 위험해지니.”

“……1년이 지나도 여길 나갈 수 없다고?”

“…….”

“흰개미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릿속에 새카만 안개가 터진 것 같았다. 뇌관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순간, 요한나는 가까스로 입술을 강하게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가 목구멍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감정적인 자는 사냥꾼이 될 수 없다. 본능으로 사냥하는 맹수들의 머리 위에서 놀지 못한다면, 사냥꾼 스스로가 먹잇감이 될 테니까.

‘내가 나약해지긴 했나 봐.’

속으로 푸스스 웃었다. 고작 검은 개미의 말 몇 마디로 발작을 일으킬 뻔했다니, 흰개미와의 교미에서 쾌감을 느꼈을 때보다도 한심한 꼴이었다.

흙냄새가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심호흡했다. 호흡 한 번을 할 때마다 먼지가 콧속으로 훅훅 빨려 들었다.

그녀의 기이한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검은 개미가 입을 열었다.

“방법은, 있다.”

“…….”

“많은 교미가, 큰, 알집을 만들지.”

요한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흰개미가 완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야.’

흰개미와 검은 개미의 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개미들은 수개미들이 필요하다.

많은 수의 개미들이, 적 군락과 대치하여 버틸 수 있는 개미들의 군대가 필요하다. 그들이 원하는 걸 내준다면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을을 오가며 보았던 건 붉은 지붕 아래의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돈을 주고 사 오는 마을 밖 여자들은 늙으면 아래가 빠졌더랬다. 수많은 사내를 상대한 탓이었다.

‘하하, 나도 꼼짝없이 그런 꼴이 되려나.’

이곳의 수개미들과 모두 교미할 바에는 흰개미 하나만 상대하는 게 부담이 적고 감당하기도 쉬운 게 당연하다.

하지만 검은 개미는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이놈들이 만족할 만한 수개미를 낳을 때까지 흰개미와 얼마나 많이 교미해야 할까?

1년은 당연히 부족하다.

그럼 2년?

2년도 부족하다면, 3년?

4년?

5년?

‘안 돼. 끔찍해. 내가 견디지 못할 거야.’

“이봐.”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입을 열었다. 지루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검은 개미는, 고개를 든 그녀의 눈빛을 보고 커다란 눈동자를 실룩거렸다.

형형한 안광이 번뜩였다. 포기를 모르는 자의 눈빛이었다.

‘왜 흰개미가 잡종에게 흥미를 느끼는지 알 것도 같군.’

요한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네 말대로 하면 1년 안에 이 빌어먹을 곳을 나갈 수 있는 거지?”

“일족이 원하는 건, 수개미. 우리의, 군대. 그것만, 이룬다면, 넌, 필요, 없어.”

“후, 필요 없다니, 그 말이 이렇게 기분 좋게 들릴 줄은 몰랐네…….”

약간 흔들리던 요한나의 까만색 눈이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그 눈으로 검은 개미를 노려보듯 직시했다.

“약속 지켜.”

“……좋아.”

“전처럼 날짜를 정하면 되는 거야?”

“그럴, 필요, 없음. 당장.”

“당장……?”

어떻게, 라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검은 개미의 견갑골 부위가 움찔거리더니 수그러져 있던 날개가 반쯤 펼쳐졌다.

요한나는 코를 찡긋했다. 기이한 냄새가 난다. 당장이라도 검은 개미에게 달라붙어야 할 듯한 냄새였다.

뭐지, 이 느낌은?

이리로 와. 이리로 와.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충격받은 요한나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곧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페로몬의 언어까지 알아듣는군.’

점점 인간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슬그머니 올라오는 불안에 요한나는 다시 심호흡했다. 그러다가 묘한 땅울림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스슥, 스삭, 스슥, 스삭.

스스스삭. 스스스삭.

시간이 지날수록 귀를 스산하게 하는 소리가 커진다. 개미들의 발이 토굴 바닥을 긁는 소리였다.

곧이어 시커먼 피부의 수개미 한 마리가 입구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뒤로 또 한 마리, 두 마리. 몇 초 지나지 않아 입구가 수개미들로 득실거렸다.

압도적인 수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쪽에 고정된 번들번들한 검은색 눈을 보자 머릿속이 아찔하다. 억지로 정신을 다잡았다.

“당장, 교미해라.”

“……당장이라고 해도.”

“교미, 페로몬을, 흘려.”

“어떻게 하는지 몰라.”

검은 개미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흘끗했다. 그러고는 다시 날개를 흔들었다.

츠슷, 츠슷.

이번에는 요한나도 맡아 본 적이 있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발정해라. 교미해라. 암컷을 범해라.

머릿속을 채우는 소리에 요한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흥분한 수개미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공주, 공주, 우리의, 공주…….”

차가운 손이 몸에 닿았다.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당장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참아.

참아, 제발.

바렌타. 바렌타. 바렌타.

흑, 바렌타.

……구해 줘.

‘나약한 생각 하지 마. 언제부터 타인이 내 일을 해결해 줬다고…….’

쓴웃음이 공기 중에 날려 흩어진다. 요한나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갑각 표피가 그녀를 덮쳤다.

흔들흔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흔들흔들.

굵직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그녀의 몸 안을 수도 없이 헤집을 때까지, 검은 개미는 입구에 서서 무료한 표정이나 짓고 있었다. 문득 검은 개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박거린다.

“소리를, 내지, 않는군.”

요한나의 속눈썹이 흔들리며 눈꺼풀이 열렸다. 끈적한 체액이 쩌억 소리를 내며 눈꺼풀에 달라붙었다.

“누구…… 좋으라고…….”

검은 개미가 키득거렸다. 요한나는 감흥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원수의 딸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모습을 선물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머리가 텅 비었다. 몸은 솜으로 채워 넣은 양 축 늘어졌다.

‘아, 엉망진창이다.’

피부가 기분 나쁘게 끈적거렸다. 찐득거리는 액체에 머리까지 푹 담가졌다가 빠져나온 기분이다.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 교미 페로몬이 수개미들의 흥분액을 쥐어짜 내고 있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인식할 때마다 뇌관이 타는 것처럼 아프다.

미칠 것 같은 기분에서 요한나는 의식적으로 신경을 분산시켰다. 생각의 흐름을 막고 머릿속을 그저 까만색으로 칠했다. 진흙으로 몸을 덮어 인간의 냄새를 지우고, 몇 날 며칠이고 사냥감을 기다리던 그때처럼 속을 차갑게 유지했다.

‘됐어. 이제 이걸로 1년 후에는 이곳을 나갈 수 있어. 더 참을 수 있어.’

얼마든지, 더.

그때 잔뜩 굳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뭐, 하는, 거지?”

요한나와 검은 개미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 와중에도 발정이 난 수개미는 요한나의 다리 사이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흰개미다.

그의 투명하게 붉은 눈이 일순간 새빨간 색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잠시 후.

투두둑.

“……어?”

요한나는 가슴에 떨어진 푸른색 갑각 표피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비늘 모양이 아니라 여기저기 금이 가고 뾰족한 조각이다.

기우뚱.

단말마의 비명도 내지 못하고 머리가 터진 개미의 몸뚱이가 휘청하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쿵!

“끼에에엑!”

요한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매캐한 냄새가 났다. 모골이 쭈뼛하고 어디론가 머리라도 숨기고 싶어지는 압도적인 전투 페로몬이 순식간에 폐부를 가득 채우고 팔다리를 굳게 했다.

겁을 먹은 수개미들이 사방으로 도망쳤다. 덩그러니 남겨진 요한나에게 흰개미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뭐 하는, 거지?”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떨리는 눈으로 가까워진 그를 올려다보았다.

‘움직이는 걸 보지도 못했어.’

초인적인 힘과 압도적인 속도. 어째서 검은 개미가 마음에 안 드는 티를 팍팍 내는데도 흰개미를 무시하지 못하는지 알겠다.

흰개미의 강함은 볼 때마다 지나치게 경악스러웠다.

그가 대답하라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요한나는 얼얼한 입술을 혀로 쓸었다.

“보시다시피.”

“…….”

“교미하고 있잖아. 너와 했던 것처럼.”

홍안이 짐승처럼 수축했다.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뺨이 뻣뻣해졌다.

끼에에, 끼에에에.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폭력적인 공기에 수개미들이 괴로운 신음을 내질렀다. 동족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흰개미는 요한나를 쏘아보기만 했다. 보석처럼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던 홍안이 얼룩덜룩했다.

불가해함과 분노, 짜증, 히스테릭한 감정을 읽은 요한나는 뒤늦게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거짓말을 했잖아.”

“거짓말?”

흰개미가 또 한 차례 고개를 갸웃했다. 수개미의 체액으로 얼룩진 손을 한 주제에 되묻는 말투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요한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1년 안에 내보내 준다고 약속했잖아. 하지만 알집이 작아서 그럴 수 없다고 했어.”

그 말에 흰개미가 검은 개미를 돌아보았다.

“네가?”

목소리는 평온했다. 한편으로는 배 깊은 곳에서부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에도 검은 개미는 웃었다. 꼭 입술을 찢는 것처럼 보이는 기괴한 웃음이었다. 벌어진 입 안쪽으로 인간의 것 같지 않은, 많고 뾰족한 이빨이 드러났다.

“너야, 말로.”

“…….”

“뭐, 하는, 거, 지, 흰, 개미?”

“…….”

“잊었나? 일족을, 위해.”

“…….”

“큰 알집이, 필요한 것을.”

흰개미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혼란스러워 보였다. 돌연 흰개미가 요한나를 응시했다. 노려보는 시선이 어쩐지 이쪽을 원망하고 있는 듯했다.

공포에 질린 팔다리를 풀며 억지로 상체를 들어 올린 요한나가 눈썹을 까딱 치켜세웠다.

그녀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이거면 된 건가?

피곤해.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요한나……. 공주? 요한나?”

요한나의 손이 움찔했다. 공주라고 부른 건, 이름을 알려 준 뒤로 처음이었다. 요한나는 다시 입술을 핥았다. 피가 배어 나왔다.

“아무렇게나 불러.”

냉담하게 말하고는 지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거짓말을 한 이상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

“…….”

“나는 내 할 일을 한 거야.”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네가, 할 일?”

“몰라서 묻는 거야? 빌어먹을 알을 낳는 거 말이야. 그런데 너랑 하는 교미로는 부족하니까.”

흰개미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요한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고민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생각하기도 피곤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씻을 물이 있으면 좋겠는데. 일꾼개미들은 언제쯤 돌아오는 거지?’

끈적거리는 몸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생각하는데 피부가 찌릿했다. 흰개미에게서 새어 나오는 전투 페로몬이 숨 쉬기 어려울 만큼 짙어진다.

“흰, 개미.”

검은 개미가 그르렁 목을 울렸다. 흰개미가 끌어 올리는 페로몬에 대항하느라 피부의 갑각 표피가 몸집을 불리는 닭털처럼 곤두섰다.

서느런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요한나는, 공주.”

“…….”

“내가 착각, 했었, 다.”

흰개미는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휙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스치며 지나가자 검은 개미는 딱딱하게 굳었고, 요한나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졸려. 씻기 전에 자는 건 싫은데…….’

일꾼개미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쾅!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와르르 무너진 토굴 벽이 입구로 쏟아져 내렸다. 황토색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온다.

입을 가리고 기침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먼지 나게 왜 저래?”

검은 개미가 기이한 눈으로 응시하는 것도 모르고 요한나는 사방으로 퍼지는 모래 먼지를 피해 구석으로 엉덩이를 끌고 갔다.

결국 일꾼개미들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바닥에 누웠지만 헛수고였다.

끼에에…… 끼에에에에…….

겁에 질린 개미들의 울음소리로 한참을 잠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