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9)

07

‘한 번쯤은 더, 날 수 있을 것 같아.’

날개를 슬쩍 움직여 보며 한숨을 쉬었다.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이 묵직한 한숨에 올올이 박혀 있었다. 문득 얼굴이 굳어진다. 내심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날개는 유용한 도구야. 당연히 있는 게 좋아.’

그녀는 탈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토굴로 다시 들어올 때만 해도 이제 끝이란 생각에 모든 걸 놔 버렸지만 날개를 보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한 번 시도해 보았으니 다음엔 성공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아쉬움을 키웠다.

‘흰개미만 없으면 돼. 그게 지난 패인의 결정적인 원인이야.’

이 토굴은 또 한 번의 습격으로 상황이 매우 위태로웠다. 쓸 만한 개미가 없는 상황에서 흰개미가 나서야 하는 경우가 있을 테니, 그때가 기회다. 기회가 생겼을 때 날개는 유용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날의 해방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아찔한 공포, 공포에 맞닿은 흥분과 가슴을 달구어 발끝까지 퍼져 나가는 자극적인 해방감, 자유, 쾌감. 비행하는 순간의 중독적인 감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가슴이 뜨끔했다.

‘……그래도 도구로써 유용한 게 더 커.’

그녀는 문득 한숨을 쉬었다. 날개가, 비행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요한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렌타는 이걸 보고 뭐라고 할까.’

그녀는 혼혈인지라 충인의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손등의 갑각 표피는 장갑으로 충분히 숨길 수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마을에서 지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다.

하나 날개는 아니었다. 이건 너무 눈에 띈다. 만약 바렌타가 이 꼴을 본다면.

‘나를 괴물처럼 볼까?’

저명한 학자든, 박식한 귀족이든,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은 인간이지만 바렌타만은 신경이 쓰였다. 다정한 그라면 자신을 인정해 줄 거라는 믿음은 있으나 약간의 불안감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도피하고 싶은 문제를 가슴의 상자에 집어넣고 뚜껑을 덮었다. 여기서 탈출한 후에야 다시 꺼내서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애써 생각을 접고 연약한 날개를 살폈다.

‘한 번, 어쩌면 두 번. 그 이상은 힘이 없어 얇은 종이보다도 못한 상태가 될 거야.’

사용 횟수가 제한된 보물을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횟수가 제한되어 있더라도 보물은 보물이다.

‘없는 것보단 나아.’

요한나는 입술을 꾹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희망에 말라붙었던 피가 빠르게 돌고 가슴이 봄바람을 닮은 공기로 부풀었다.

마음의 상태가 외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안색이 편안해지고 뺨은 은은하게 붉어졌으며 경직되었던 몸의 선이 온유하게 변했다.

사색에 몰두하고 있던 요한나는 갑작스러운 냉기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곧장 흰개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공주.”

이 개자식이 언제 들어왔지?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 했어?”

나무나 바위 같은 게 저기 있다, 정도로 흰개미를 대하던 요한나는 이상한 것을 보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흰개미가 그녀와 눈을 맞춰 왔다. 아무 감정도 생각도 없어 보이던 투명한 붉은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탁했다.

요한나는 무심코 그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것을 발견한 어린아이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와 비슷했다.

그에게서 무심함 외의 감정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지라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조각상이 눈을 깜박이면 이런 느낌이려나. 찝찝하고 한편으로는 떨떠름했다.

“그게 왜 궁금해?”

“…….”

“아, 내가 또 이상한 짓을 할까 봐 걱정돼?”

빈정거리는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걱정 마. 도망갈 생각은 안 했으니까.”

거짓말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가슴이 곰의 걸음처럼 쿵쾅거렸다.

개미는 청력도 좋은 걸까? 시력이 안 좋으니 대신 듣는 능력이 뛰어날지도.

진정하려고 애쓰는데 흰개미가 언뜻 몽롱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궁금해.”

“오늘따라 말이 많네.”

불쾌해하는 어투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공주, 이상해. 이상해서, 자꾸, 눈이 가.”

“…….”

“궁금해. 행동, 이상해. 왜, 그러는 거지?”

왜 그러는 거냐고? 그 말이 조롱처럼 느껴져 열이 확 올랐다. 시큰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요한나의 외면에 흰개미는 눈을 깜박거렸다.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눈을 마주치려고 해도 요한나가 그를 보는 일은 없었다. 날카로워진 턱 선과 하얀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미간 주름이 좀 더 깊어졌다.

* * *

석굴 개미의 침입 이후 토굴 개미들은 거처를 옮겼다. 이전보다 부드러운 흙과 산뜻한 공기의 새 토굴이 토굴 개미들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요한나는 새집으로 이사해서 들뜬 그들의 기분에 전혀 편승할 수 없었다. 도망갈 틈도 보지 못하게 붙어 있는 흰개미 때문만은 아니다.

요즘 그녀는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하루는 희망에 들떠서, 하루는 불안감이 차올라서,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고 두 눈은 빈틈을 찾느라 쉴 새가 없었다.

실제로 행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늘 긴장하고 있으려니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잠까지 오지 않아 내내 흰자위에서 실핏줄이 가시지 않다가 간만에 깊은 숙면을 취한 참이었다.

잠에서 깬 요한나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살짝 드러난 틈으로 약간의 빛이 새어 들었다. 몸이 축 늘어졌다. 잠은 실컷 잔 것 같은데 어딘지 기분이 묘하게 불편했다.

‘일어나자.’

더 자고 싶은 마음을 떨치고 게으름뱅이처럼 느릿느릿 눈을 뜨던 그녀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흰개미를 보고 눈을 번쩍 뜰 뻔했다.

잠이 확 깼다. 가까스로 실눈을 뜨고는 곁눈질했다.

흰개미가 하얀 얼굴을 그녀를 향해 기울이고 있었다. 무명실처럼 하얗고 윤기 없는 머리카락이 사락 흘러내렸다.

그에게선 개미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쿰쿰한 냄새 대신 코가 시원해지는 싸한 향이 풍겼다. 흰개미가 즐겨 먹는 카멜리아 나무 이파리의 향이 그의 숨결에서도 흘러나왔다.

‘가만히 앉아서 뭘 하는 거지?’

긴장한 요한나는 뒤늦게 그의 손이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찬 바람이 가득 들어찬 것처럼 폐부가 서늘해졌다.

숨을 멈춘 채 차가운 손으로 아랫배를 더듬은 흰개미가 혼잣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족해, 씨앗.”

무슨 소리인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흰개미가 떠날 때까지 그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흰개미는 그녀가 깼다는 걸 알았겠지만 알은체는 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더니 그녀가 결국 일어나지 않자 토굴 방을 떠났다.

일정한 박자의 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요한나는 몸을 일으켰다.

흰개미가 있을 때는 숨소리를 죽이고 있던 일꾼개미들이 참았던 숨을 길게 쉬었다. 요한나는 그들이 한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추궁했다.

“저게 무슨 말이야?”

“응?”

“씨앗이 부족하다는 거 말이야. 무슨 뜻이냐고.”

곰곰이 생각하던 일꾼개미가 ‘아아.’ 하며 입을 열었다.

“배 속에, 품은, 씨앗. 수개미의, 씨앗. 그게, 부족하다는 것.”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꾼개미는 눈치 없이 희희낙락하며 떠들어 댔다.

“공주의, 혼롓날, 최대한, 많은, 수개미의, 씨앗, 받아야, 강한, 수개미, 낳음.”

“공주의 씨앗, 부족? 그럼 수개미들과, 교미, 필요.”

다른 일꾼개미가 끼어들었다. 요한나는 차가워진 손끝으로 이마를 어루만졌다. 살갗에 닿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날부터 잠깐 오던 잠조차 오지 않았다. 불면증이 깊어졌다.

* * *

쿵!

거대한 덩치의 곰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검고 거친 털이 특징점인 검은 산맥의 맹수 중 하나인 가로줄무늬흑곰이었다.

혀를 빼물며 누운 흑곰은 심장이 깔끔히 뚫려 즉사한 모양새였다. 엎어 놓는다면 사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깔끔한 사냥 실력에 검은 개미가 감탄하는 눈을 했다.

흰개미가 흑곰을 등에 짊어 메고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 사냥은 이걸로, 되겠어.”

흰개미가 잡은 짐승이 가장 덩치가 크긴 하나 다른 수개미들 역시 각자의 등에 사냥감을 짊어지고 있었다.

크기가 가장 작은 토끼에서부터 꿩, 늑대, 사슴,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을 가리지 않았다.

초식 동물이 육식 동물에 비해 육질이 부드럽기는 하나 개미는 영양분을 우선시해서, 덩치가 큰 게 가장 좋은 사냥감이었다.

봄철, 개미 군락은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 팔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따뜻한 계절은 겨울 동안 축냈던 식량을 비축하는 기간이었다. 그에 더해, 무리의 몸집을 키우는 기간이기도 했다. 토굴 개미는 그 일이 가장 시급한 상황이었다.

두 차례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세력이 위태롭게 축소되었다. 약해진 일족을 풍족하게 먹이고, 건강한 공주가 번식을 시작해야 했다.

그런 탓에 장군 계급은 공주의 번식에 관심이 지대했다.

“그보다, 공주의, 씨앗이, 부족하다, 들었다.”

토굴로 돌아가는 길, 검은 개미가 말을 꺼냈다.

흰개미를 쳐다보자 그는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해.”

검은 개미가 인상을 썼다. 혼롓날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기는 했다.

사나운 기질이 폭발하여 미쳐 날뛰던 공주가 씨앗을 받기는커녕 씨앗을 줄 교미 수컷들을 죽여 버리지 않았는가.

흰개미가 나서긴 했지만, 최대한 다양한 수개미들의 씨앗을 받아야 하는 만큼 충분하지 않았을 거다.

혼례가 치러진 지 이제 한 달, 원래 같았으면 벌써 알을 품었을 터인데 일꾼개미에게 듣기로는 아직 소식이 없다고 한다.

검은 개미는 초조했다. 처음엔 분명 요한나를 공주로 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지금 일족의 희망은 그 잡종에게 있지 않은가.

“혼롓날을, 다시, 잡아야겠군.”

“…….”

“이번에는, 날뛰지, 못하도록, 단단히, 준비해야, 해.”

다른 수개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개미의 의견은 일족의 현실을 고려하면 더할 나위 없이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습관적으로 흰개미의 의견을 물으려던 검은 개미는 제게 닿는 빤한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흰개미. 왜, 그렇게, 보지?”

“혼롓날을, 또?”

무심코 대꾸하려던 검은 개미는 흰개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했지만, 어쩐지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 한 번 깜박이자 익히 알던 무심한 얼굴이다. 검은 개미는 착각으로 치부해 버렸다.

“다양한, 수컷의 씨앗이, 필요하니까.”

“…….”

“다만, 저번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 한 차례 더, 습격이 있다면, 공주의 목숨이 위험할 거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검은 개미는 그의 말이 잠깐 신경에 거슬렸다. 그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다. 찝찝한 기분으로 대꾸했다.

“그러니, 다음, 혼롓날은, 일족의, 수개미들만, 참여.”

“…….”

“토굴 방에서, 저번, 처럼.”

이미 혼롓날을 치렀으니 토굴 방에서 다른 수개미들의 씨앗을 충분히 넣어 준다면 건강한 알을 낳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서둘러, 날을 잡아야겠군.”

다른 수개미들은 이견이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빠른 날을 잡자는 의견이 더해졌다.

흰개미만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검은 개미는 묵묵히 앞질러 가는 흰개미의 뒷모습을 잠깐 응시했다. 왜인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

* * *

“조만간, 혼례를, 치른다.”

검은 개미의 말에 눈앞이 까맣게 변하는 착각이 일었다. 한편으로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었다.

흰개미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갔을 때, 이럴 것을 예상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요한나는 비명을 지르거나 혼절하거나 비참함과 경멸을 담아 충인들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았다. 그렇게 해 봤자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다.

토굴에서 보낸 한 계절은 그녀에게 혈기 왕성한 의욕과 급진적인 마음을 앗아 갔다.

그녀는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할 준비가 되었다.

* * *

흰개미는 일과 중 하나처럼 요한나의 토굴 방을 방문했다. 요한나의 죽 거부 사태 이후 그는 꾸준히 그녀가 섭식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들르곤 했다.

일꾼개미들은 그가 올 때면 익숙하게 뒤로 물러나 숨을 죽였고,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요한나가 그를 보려고 하지 않았기에 대화는 온전히 흰개미와 일꾼개미들의 몫이었다.

여느 때처럼 일꾼개미에게 요한나의 영양 상태를 확인하려던 흰개미는 차분히 서 있는 요한나를 보고 멈칫했다.

그녀는 다른 때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시선이긴 했으나 또렷하게 흰개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흰개미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입구에 우뚝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물어볼 게 있어.”

흰개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구 밖에서 일꾼개미들이 기웃거리는 기척이 느껴질 뿐, 토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요한나를 바라보았다.

광석 아래에 선 요한나의 투명하도록 하얀 피부에 은은한 빛이 내려앉았다. 그것이 더없이 잘 어울렸다.

화를 내거나 경멸하거나 울거나 살기를 뿜는 요한나가 아닌 그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낯설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흰개미는 눈을 느릿하게 끔벅였다.

“뭐지?”

“너희가 나한테 바라는 건 공주로서의 의무를 다해 주는 거지. 내가 공주의 피를 이었으니까 말이야.”

“…….”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내가 몇 년 동안 그놈의 의무를 다해 주면 돼?”

흰개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공주는, 죽을 때까지, 공주다.”

그 말에 요한나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러자 감추고 있던 비통함과 비참함, 분노와 슬픔 따위의 격한 감정들이 눈과 피부와 주름 사이에서 진득하게 배어 나왔다. 흰개미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씹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난 이 자리에서 당장 죽어 버리겠어.”

“…….”

“왜, 믿기지 않아?”

요한나는 곧장 몸을 돌려 토굴 벽에 머리를 찧었다.

탁!

재빨리 움직인 흰개미의 손이 그녀의 이마를 감쌌다. 흰개미의 손등이 토굴 벽에 부딪혔다. 이 정도로 힘겨울 체력이 아닐진대 흰개미의 입에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요한나는 커다랗게 뜨인 그 붉은 눈동자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깨끗하고 차분했다.

좀 전의 급격한 분노 표출과 전혀 다른 모습이 몹시도 이질적이었다. 뻣뻣하게 경직된 흰개미에게 요한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나를 평생 알 낳는 도구로 쓸 생각은 하지 마. 어느 정도 세력이 커진다면, 다른 공주를 세워. 일꾼개미에게 듣기로는 건강한 암컷이 태어나면 차기 공주로 키운다며. 그렇게 해. 최대한 빨리.”

“…….”

“그리고 새로운 공주가 만들어졌을 때, 그때 날 놔줘. 너는 검은 개미 그 자식보다는 말이 통하잖아.”

“…….”

“약속한다면 그 빌어먹을 의무를 다해 줄게.”

흰개미를 뚫어 버릴 것처럼 강렬한 눈으로 응시했다. 대답을 종용하는 까만 눈에 보랏빛 광채가 반짝였다.

막 이곳으로 끌려왔을 때의 분노로 가득한 생기발랄함과는 성격이 다르나 목적을 향한 의지만큼은 광석이 빛을 잃을 정도로 찬란했다.

흰개미는 일순 광석의 빛에도 불구하고 어둑한 토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착각이 들었다.

놔주다니. 공주가 공주의 의무를 끝내는 건 그 삶을 끝낼 때뿐, 다른 길은 없다. 말도 안 되는 요구다.

그러나.

어서 대답해. 요한나가 눈으로 속삭였다. 흰개미는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상태로 입꼬리를 올렸다. 파들파들 떨리지만 승리의 기색이 묻어 나오는 미소는 자포자기나 처연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흰개미는 순간, 검은 개미가 말했던 ‘사냥꾼의 자식’이란 그녀의 본래 정체성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는 검은 개미의 원수였을 따름으로, 관심이 없었다. 다음에 만난 그녀는 일족을 위해 필요한 공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간의 피가 섞였다든지, 성격이 만만치 않다든지 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일족을 위해 건강한 후계를 낳아 주는 것만으로도 족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흰개미는 그녀가 원래 어떻게 살았을지, 토굴이 아닌 다른 곳에선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해졌다.

* * *

공주의 혼례는 말만 혼례일 뿐 실은 집단 난교에 가깝다. 어째서 이 일이 혼례로 불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먼 옛날 인간을 공주로 맞이한 개미의 왕이 그렇게 불렀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공주의 혼례는 개미들에게 있어 일종의 축제와도 같이 여겨지고 있었다.

개미 군락에서 여자는 오로지 공주, 그리고 여왕뿐이다. 다른 암개미들은 성별만 여성일 뿐, 여성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단지 일족의 알을 관리하고 보살피는 유모밖에 되지 못했다.

공주 하나와 다수의 수개미. 애초에 신의니, 사랑이니 하는 인간들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안 되는 문제였다.

요한나는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신랑’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차악을 선택하리라 결심했으나 막상 상황이 닥치니 손이 떨렸다.

주먹을 꽉 쥐고 흔들리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공주의 2차 혼례는 토굴에서 가장 큰 방에서 치러지고 있었다.

검은 개미는 수개미들의 맨 앞에 있었다. 그는 헐벗은 수개미들과 달리 검은 옷 그대로였다.

‘저 낡은 옷에 무슨 특별한 쓸모라도 있는 걸까.’

지난번 혼인 비행에서도 옷을 입고 교미했던 검은 개미를 기억하고 그를 예의 주시했다.

사실 검은 개미의 숨겨진 속사정 따위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곧 닥쳐올 일에서 조금이라도 신경을 돌리고 싶었다.

“내가 먼저.”

검은 개미가 요한나에게 다가왔다. 요한나는 품이 넓어 펄럭거리는 옷자락을 노려보았다. 하필이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검은 개미.

신물이 치밀어 오른다. 뇌리에 틀어박힌 트라우마와 본능적인 거부감에 혀 아래 신침이 고였다.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요한나는 끝끝내 입을 열어 거부의 말을 뱉지 않았다.

흰개미가 약속한 시간은 1년. 그 기간이 끝나면 이곳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야말로 최악 대신 차악인 선택이었지만 요한나는 기껍게 여기려고 애썼다.

흰개미가 제시한 기간이 생각보다 짧지 않은가.

1년이 지난 후,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장 두 눈을 파내고 목을 조르고 싶은 검은 개미에게도 몸을 내어 줄 수 있었다.

‘팔다리 하나가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야.’

해야 할 일을 하듯 자박자박 걸어온 검은 개미가 그녀의 앞에 섰다.

앉아 있는 요한나의 시선으로는 그의 무릎께밖에 보이지 않았다. 푸른색 갑각 표피가 징그럽게 올라온 발등에 시선을 못 박았다.

죽이고 싶다는 살심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말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검은 개미가 몸을 숙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참 동안 그대로였다.

‘뭐 하는 거지?’

그때 검은 개미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손목이 잡힌 검은 개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고개를 좀 더 들자 흰개미가 서 있었다. 그는 새빨갛게 형형한 눈으로 검은 개미를 보았다. 검은 개미가 손목을 잡아빼려다가 쉽지 않자 인상을 썼다.

“뭐냐, 흰개미.”

짜증이 어린 음성에도 흰개미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검은 개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다른 손을 요한나에게 뻗었다.

흰개미가 그 손마저도 잡아챘다. 그에게 붙들린 양 손목을 내려다본 검은 개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펴자 흰개미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미묘하게 흰개미가 높았다.

“왜.”

검은 개미가 툭 뱉었다. 세 번째로 이유를 묻는 거였다. 흰개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 크르릉, 배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짐승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름 돋게 진득한 살기였다.

한바탕의 축제를 기다리고 있던 수개미들이 웅성거렸다.

“뭐, 하자는, 거지?”

검은 개미의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알은, 예정대로, 낳는다.”

“어떻게?”

“내가, 한다.”

“…….”

“공주, 알 낳기는 내 담당이야. 넌, 손 떼.”

일순 좌중이 조용해졌다. 검은 개미는 고요한 눈으로 흰개미를 보았다. 홍옥처럼 빨간 눈동자도 동요 없이 고요했다.

“미쳤군.”

침묵을 지키던 검은 개미가 툭 뱉었다.

“나가라, 검은 개미.”

흰개미가 담담하게 명령했다. 검은 개미는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모두가 있는 곳에서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둘은 장군 계급의 수가 줄어 위태로워진 토굴 개미 군락의 큰 기둥이다. 다투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가까스로 화를 참은 검은 개미가 차가운 눈으로 흰개미를 보고는 홱 몸을 돌렸다.

둘 사이에 협의가 됐음을 알아챈 수개미들도 머뭇거리면서 토굴 방을 떠났다.

눈치 없는 몇몇 수개미들이 토굴 방을 서성이다가 흰개미의 서늘한 시선을 받고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무슨 속셈이야?”

텅 빈 토굴 방에 목소리가 울렸다. 울림 탓에 메마른 음성이 한층 공허하게 들린다.

요한나는 흰개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떨리던 손은 진정이 되어 있었다.

약간의 짜증, 경계심과 불만족스러움이 어린 그녀의 시선은 흰개미가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복잡한 색이었다. 단 하나, 그녀가 이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모두를 내보낸 흰개미는 정작 그녀 앞에선 눈만 느리게 깜박거렸다. 섬세하게 뻗친 하얀색 속눈썹이 눈이 내린 설산 나무의 우아한 나뭇가지 같았다.

조각상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아낀다. 길어지는 침묵. 요한나의 의아한 시선이 짙어지자 한참의 침묵 후 입을 연다.

“그냥.”

“…….”

“싫어, 서.”

요한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싫은 건데?”

흰개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보는 듯 마는 듯 몸을 반쯤 튼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시선이 입구로 가 있어 그녀의 위치에서는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요한나는 그런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혼인 비행 때 내던졌던 모피를 다시 갖고 오기라도 한 걸까? 하얀 모피로 온몸을 칭칭 감싼 그는 어두운 토굴에서 퍽 이질적인 모습이다.

창백한 피부에 검은색 일색인 옷을 입는 일반적인 토굴 개미에 비해서 지나치게 눈에 띈다. 일전에 침입했던 석굴 개미가 그를 돌연변이라며 경멸하고 혐오했던 마음을 요한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흰개미는 이질적이다. 생김새나 색이나 생각이나 말하는 것 모두. 그래서 그를 대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게 된다.

어느 정도 그의 생각 패턴을 파악했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혼란스러워진다.

‘혹시 교미를 하고 싶었던 건가?’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차가운 돌로 빚은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은 욕정에 젖어 보이진 않았지만.

‘혼인 비행 때도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지.’

이틀이나 껴안은 채 놔주질 않았으니.

돌연 흰개미가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흠칫. 그가 한 발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겁먹지 마.’

검은 개미가 흰개미로 바뀌었을 뿐이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나 곧 다른 수개미들과도 교미하게 되겠지.

요동치는 마음을 붙드는 양 주먹을 꽉 쥐고 흰개미를 가만히 보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의아한 눈으로 그 손을 흘끗했다. 어쩌라고?

“안 가?”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죽 먹을, 시간이다.”

잔뜩 긴장했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을 대비하여 자꾸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미쳐 날뛰는 마음을 작디작은 상자에 욱여넣고 욱여넣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 모른다.

그녀는 1년 후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런 상황에 흰개미의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은 안심되기는커녕 괜히 초조하고 짜증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요한나는 다리를 벌렸다. 그녀는 나신이었다. 어차피 다 벗게 될 건데 뭐 하러 옷을 입냐 싶어서, 토굴 방으로 이동할 때까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었다.

흰개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빨리 해.”

그녀는 귀찮은 것을 해치우는 사람처럼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안 하면 문제가 생기는 거잖아?”

“…….”

“넌 내게 1년 후라고 약속했어. 나는 1년 후 나갈 거야. 딴소리하지 마.”

요한나는 다리를 벌린 채로 앉아 있었다. 흰개미는 요한나의 발치에 서서 그녀를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가 살짝 확장되었다가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그의 시선이 하얗게 뻗은 다리 사이에 닿고,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뚫어질 것처럼 빤한 시선에 요한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내 되뇌었던 말을 속으로 속삭였다.

“…….”

“…….”

적막한 가운데 나직한 숨소리만 흘렀다. 기이한 긴장감이 뱀처럼 도사린다.

흰개미가 쳐다보는 시선이 길어지자 요한나는 속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악문 이 탓에 불룩 솟은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산속에서 사냥꾼과 단둘이서 살아온 그녀는 마을의 순결한 처녀들과 달리 알몸을 보인다고 죽을 것처럼 치욕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빤히 관찰하는 시선 앞에서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수치심을 모르지도 않았다.

“진짜 뭐 하는……!”

화를 벌컥 내려는 순간 흰개미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소리 없이 무릎을 꿇고 그녀의 탄력 있는 종아리를 붙잡아 위로 올렸다.

“악!”

순식간에 뒤로 넘어간 요한나는 붉은 기 섞인 울퉁불퉁한 황토색 천장을 보며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홱 고개를 드니 흰개미가 한 손으로는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모피를 풀어 헤치고 있었다. 금세 털옷이 흘러내리며 조각상처럼 차가운 근육질 몸이 드러났다.

두꺼운 모피에 감춰져 있을 땐 늘씬하게만 보였던 몸은 가까이서 마주하니 두툼한 근육질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언뜻 호리호리한 실루엣인데 팔뚝 하나, 허벅지 하나 얄팍한 데가 없었다.

쩍 갈라진 가슴 근육을 보자 석굴 개미들을 장난감처럼 학살했던 흰개미의 가공할 만한 힘이 떠오른다. 요한나의 몸이 희미한 공포로 경직되었다.

두꺼운 팔뚝의 근육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성기를 움켜쥐었다. 보통의 일꾼개미보다 두 배는 큰 크기에 일순 신음을 흘릴 뻔했다. 입술 안쪽의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흰개미의 것은 드러날 때부터 반쯤 서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주는 통증이 떠올라 요한나는 그만 도망치고 싶어졌다.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무식하게 처박을 줄 알았던 흰개미는 움직임이 없었다.

통증이 없자 꽉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흰개미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녀의 은밀한 부분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에도 이러지 않았나?’

강렬한 기시감에 수치심이 솟구쳐 무심코 그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되뇌었던 게 무색했다.

흰개미가 살이 변형되도록 종아리를 꽉 잡더니 그녀를 흘끗했다. 요한나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다리 사이로 옮겨졌다.

“계속, 생각이 났어.”

“…….”

“머릿속이 꽉…….”

뭐가 생각이 났다는 거야.

‘설마.’

그제야 열기를 품고 있는 흰개미의 눈을 알아챘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흰개미가 성기의 끝을 그녀의 다리 사이에 겨누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구멍에 귀두가 닿자마자 탄성을 흘렸다.

충인의 것은 인간의 성기와 다르게 끝이 약간 뾰족하고 온도가 미묘하게 낮았다.

이질적인 감각에 요한나는 몸을 굳혔다. 사냥꾼으로서 그녀의 육체는 잘 단련되어 있었지만 단 하나, 다리 사이의 구멍만큼은 여리디여렸다.

흰개미가 성기의 기둥을 붙잡고 구멍 안으로 진입시키려고 했다.

“으윽…….”

몸이 벌어지는 고통에 요한나는 결국 신음을 흘렸다. 잘 들어가지 않는지 흰개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좁아.”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이런 고통을 주는 흰개미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왜지?”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진짜 왜인지 모르는 건가?’

생각에 잠긴 얼굴. 그가 혼인 비행에서의 교미를 떠올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혼인 비행에서는 이렇지 않았다. 공주들의 교미 페로몬이 그녀의 몸을 자극해서 윤활액이 흐르도록 만들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으니 들어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또 한 번, 흰개미가 허리 짓을 했다. 조금씩 조금씩 성기가 파고들었다. 물기가 하나도 없어 생살이 쓸리고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가해지는 고통만큼 입술을 깨물자 피가 쭉쭉 흘러들어 왔다. 요한나는 눈에 불을 켰다.

멍청한, 멍청한 자식! 흰개미가 결심한 듯 그녀의 골반을 꽉 붙잡았다. 그대로 처넣으려는 기색에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끝날 때까지 나무토막처럼 움직이지 않으려 했으나 이대로 있다가는 아래가 찢어질 판이었다. 공포가 확 차올라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대로 하면 안 돼!”

힘을 주려다가 멈춘 흰개미가 그녀를 보았다.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안 돼?”

“그럼 되겠어?”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흰개미는 그녀의 얼굴과 교접 부위를 번갈아 보더니 성기를 뺐다.

귀두만 겨우 들어갔던 것 같은데 이렇게 아프다니, 어떻게 되어 버린 게 분명했다. 요한나는 뭐라도 박은 것처럼 울퉁불퉁한 성기를 세상 끔찍한 흉기를 보듯이 노려보았다.

흰개미가 하얀 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래를 훑더니 눈을 깜박거렸다.

“건조, 해.”

“…….”

“전에는, 미끈미끈, 했는데.”

“몸을 준비시켜야지. 너랑 다르게 여자들은 거기를 잘 풀어 줘야 한다고.”

어째서 이놈에게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거지?

순간적으로 자괴감이 든 요한나의 얼굴이 비극적으로 변했지만 이건 제 몸을 위한 일이라며 자위했다.

“달라…….”

흰개미가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그 얼굴이 식물 줄기를 으적대며 씹어 먹을 때처럼 멍청해 보여 요한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도 남녀의 정사엔 무지했지만 들었던 말들이 있었던 만큼 흰개미보다는 잘 알았다.

애무하면 된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가 힘겨웠다.

‘이놈이 몸을 만진다고 흥분할 리도 없고.’

알려 달라는 듯 빤히 쳐다보는 흰개미를 보았다. 다시 한번 자괴감이 몰려온다. ‘내 몸을 위해서다.’ 중얼거리며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비켜 봐.”

흰개미가 얌전히 무릎걸음으로 물러났다. 요한나는 다리를 모아 몸을 옆으로 돌렸다. 흰개미를 곁눈질로 살피고는 등을 보였다.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건조하게 마른 음핵을 문지르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 끝을 매만졌다. 텁텁한 토굴 벽이 보여 그냥 눈을 감았다.

까만 종이처럼 변한 머릿속에 바렌타의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젖꼭지를 매만지는 손이 그의 손이라고 생각했다. 키스하며 자연스럽게 몸을 어루만졌던 바렌타의 손길을 생각하니 가슴이 살짝 뛰었다.

농밀한 키스와 스킨십을 나눌 때 곧 그와 몸을 겹칠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마련한 집에서 네가 지냈으면 좋겠어. 거기서 계속 함께 있고 싶어.’

정사를 암시하던 말을 들었을 땐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마음이 안락해지는 톱밥 냄새, 다정한 햇살의 향기. 그는 적막한 오두막에서 사냥꾼과의 세상밖에 모르던 요한나에게 작은 태양 같았다. 진짜 태양처럼 뜨겁고 눈이 부시진 않지만 살갗이 온기를 머금을 만큼 따뜻하고 마음을 환히 밝히는 빛을 가지고 있다.

그와의 삶을 기대하는 하루하루는 먹고 자고 사냥하기를 반복했던 무미건조한 삶에서 다채로운 선물이었다.

“아…….”

다리 사이에서 애액이 흐르기 시작했지만 요한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바렌타의 기억과 손길에 완전히 파묻혀서, 조금만 더 이 꿈을 꾸고 싶었다.

갑자기 그녀의 어깨가 홱 돌아갔다. 깜짝 놀란 요한나가 눈을 번쩍 떴다.

흰개미였다. 그의 미간에 빗금 같은 주름이 좍좍 그어져 있었다. 요한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바렌타가 햇살처럼 반짝이고 있었던 터라 눈앞의 흰개미와의 대비가 확 다가왔다.

흰개미는 백지처럼 하얬다. 반짝이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는 민무늬 가면 같았다.

거부감이 확 몰려오는 찰나, 흰개미가 가슴과 음부에 가 있는 그녀의 손을 흘끗하고 재빨리 치워 냈다. 그러고는 그 자신의 차가운 손가락으로 방금까지 그녀가 스스로 애무하던 곳을 만졌다.

음부의 애액을 훔치고 비비자 점성이 있는 액체가 손가락에 펴 발라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요한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시선에 갑자기 민망함이 확 올라왔다.

성적인 일에 무지한 흰개미가 이 행동의 의미를 제대로 알 리도 없건만. 눈에 힘을 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흰개미를 상대로 수치스러울 게 뭐가 있는가.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됐어. 이제 넣으면 되니까…….”

돌연 흰개미가 손가락을 구부리고 튀어나온 관절로 음핵을 긁어내렸다. 요한나의 무릎이 흠칫 튀어 올랐다.

그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요한나가 당황하자 흰개미가 입술을 살짝 핥았다. 입에 묻은 꿀이라도 핥는 듯이 끈적했다. 붉은 눈이 뿜어내는 온도가 올라가는 듯했다.

“이러면, 돼?”

흰개미가 튀어나온 관절로 음핵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요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흰개미는 머리가 좋아서 학습 능력이 뛰어났다. 등을 돌렸는데도 그녀가 뭘 어떻게 했는지를 다 아는 듯 구는 행동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냥 넣으라고 말했지만, 사실 자신이 몇 번 만진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흰개미의 것이 어지간하면 상관없겠으나 하필이면 무식하게 큰 탓에 애액이 조금 나왔다고 원활한 삽입을 기대하긴 힘들다.

“응…….”

흰개미는 짤막하게 대꾸한 후 입을 다문 요한나를 흘끗하며 손을 움직였다.

손놀림이 영 어색했다. 흰개미는 마치 여자의 성기를 애무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요한나는 어린 날의 기억을 회상했다.

‘아버지가 훔쳐보던 충인들도 그저 박고 흔들기만 했었지.’

얼마 전의 혼인 비행에서도 수개미들과 공주는 생식기를 붙인 채 씨앗을 풀어 내는 데 집중했다. 가슴이나 음부를 매만지는 충인은 한 명도 없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흰개미를 보았다. 흰개미는 잔뜩 집중한 눈을 그녀의 음부에 고정하고 손을 놀렸다. 손가락이 음핵을 끈질기게 매만지자 생리적으로 야릇한 쾌감이 몰려왔다.

요한나는 입술을 꾹 붙였다. 필요한 일이라서 하는 것이지, 불필요한 반응까지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마음은 흰개미의 검지가 구멍을 파고들었을 때 일순 흐트러졌다.

“흑!”

놀란 요한나가 눈을 홉떴다. 흰개미와 눈이 마주쳤다. 팽팽했던 그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서늘한 손가락이 천천히 안을 파고들었다.

손가락 하나를 다 집어넣은 후에는 속도를 높여 왕복 운동을 시작한다. 찔꺽찔꺽. 조용한 가운데 애액에 잠긴 손가락이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귓가에 찰싹 달라붙는 이상한 소리다. 이물감도 이물감이지만 그 소리가 너무나도 듣기 불편했다.

“그만 됐어.”

“아직…… 좁아.”

흰개미가 느릿하게 말하자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흰개미는 예의 그 재수 없을 정도로 하얀 무표정을 하고 손가락을 더했다. 순식간에 세 개의 손가락이 구멍에 틀어박혔다. 압박감의 세기가 달라졌다.

그녀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흰개미의 것은 손가락 세 개보다도 훨씬 컸다. 안을 더 늘릴 필요가 있기는 했다.

“여기도?”

흰개미가 그녀를 주시하면서 다른 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요한나가 가슴 끝을 지분거리던 것을 잊지 않은 거다. 그새 살갗의 체온이 올라갔는지 흰개미의 서늘한 손이 닿자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손가락의 찬기 때문에 가슴이 더 민감하게 느껴졌다. 요한나의 입술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겼다.

그녀의 반응을 유심히 본 흰개미가 손가락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처음 넣었을 때와 달리 수월하게 들락날락하는 손가락에서 투명한 애액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한층 크게 났다. 흰개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요한나는 무심코 귀를 긁어 댔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려는데 흰개미가 세 손가락을 안에 박은 채 엄지로 음핵을 문질렀다.

“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낸 요한나는 혀끝을 깨물었다. 민감한 부위를 모두 애무하는 움직임에 기가 막혔다. 학습 능력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흰개미가 손가락을 돌렸다. 질 벽이 늘어나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읏, 아파.”

다소 거칠고 투박한 손놀림에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흰개미가 그녀의 눈치를 보더니 손가락을 느릿하게 돌린다.

훨씬 낫다. 더는 아프지 않았고, 이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 해도 돼.”

몸에 열이 오른 만큼 부러 딱딱하게 말한 그녀는 무심코 흰개미의 성기를 흘끗하다 깜짝 놀랐다.

반쯤 서 있던 성기가 크게 발기해 있었다. 발기하지 않았을 때도 컸던 것이 발기까지 하니 몹시도 위압적이었다. 급격히 자신이 없어졌다.

그 순간, 손가락이 질 벽을 큰 원을 그리며 느릿하게 쓸었다. 안쪽에서부터 윗부분이 자극당하자 몸 안에서부터 열이 훅 끼쳤다. 소름이 끼치면서 엉덩이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다소 초조하게 말했다.

“그만, 하라니까. 그런 거 하지 말고.”

흰개미가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또 이상하게 움직일까 봐 발로 그의 것을 툭 찼다.

흰개미의 굴곡진 복근에 하얀 핏줄이 곤두섰다. 그가 어두워진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못 건드렸나?’

덜컥 긴장한 그녀가 굳어 있자 흰개미가 그녀의 안에서 손가락을 쑥 빼냈다. 꽉 찼던 안이 텅 비는 감각에 요한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흰개미가 다시 성기를 구멍에 맞추었다.

쑤욱.

커다란 것이 녹진하게 풀린 구멍을 밀어 내고 들어왔다. 안을 푸는 데 꽤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도 압박감이 극심했다.

요한나는 손을 구부리고 바닥을 박박 긁었다. 손톱 사이에 흙 알갱이가 파고들었다. 흰개미의 울퉁불퉁한 근육에도 힘이 팽팽히 들어갔다.

흰개미는 시간을 들여서 느리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마침내 그가 다 들어왔을 때 요한나는 입을 벌리고 턱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의 탄탄한 허벅지를 콱 붙잡고 허리를 멈춘 흰개미의 붉은 입술이 홀린 듯이 열렸다.

“아…….”

나른한 탄성이 묵직하게 흘러나왔다. 흰개미가 요한나에게 무게를 실었다.

“흐흑!”

압박감에 적응 중인 그녀가 헛숨을 들이켰다. 풀때기만 먹는 주제에 몸이 단단하고 밀도가 꽉 차 있어 몹시 무거웠다. 그의 허리를 탁탁 쳤다. 흰개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힘, 들어. 좀…… 비켜 봐.”

기어가는 소리로 요청하자 그제야 흰개미가 몸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여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움직여도, 돼?”

흰개미가 물었다. 요한나는 멈칫하고 그를 보았다. 그가 의견을 물어본다는 것이 낯설어서였다.

“그럼 안 하려고?”

어색함을 떨치며 차갑게 반문하자 흰개미가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투명한 홍옥에 그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투영되었다.

갑자기 그와 이러고 있는 게 괴상하게 느껴졌다.

‘의미 없는, 새삼스러운 감상.’

기분이 저조해진 그녀는 무표정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의무를 다해야지.”

흰개미는 그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요한나가 눈살을 찌푸리자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으…….”

압박감만큼 손톱이 등을 파고든다. 손에 묻었던 흙이 흰개미의 하얀 피부를 더럽혔다. 손가락으로 눌러도 들어가지 않는 딴딴한 근육을 필사적으로 붙들며 요한나는 몰려오는 감각을 꾸역꾸역 참아 냈다.

“아, 흐으, 아…….”

반면 흰개미는 신음을 전혀 참지 않았다. 평소의 서늘함과 무정함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열기가 신음에 석류알처럼 알알이 박혀 있었다. 쇳소리 섞인 허스키한 음성이 귓바퀴에서 핑그르르 도는 듯했다.

마치 그와 ‘교미’하는 게 아니라 ‘정사’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 그 착각은 굉장히 불쾌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만…… 입, 좀, 다물어.”

“흐읏……! 왜?”

흰개미가 찌푸린 얼굴을 들었다. 고개가 갸웃거린다. 요한나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말하기가 뭐했다.

“그냥, 시끄러워.”

흰개미의 입에서 그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맹수가 낮게 우는 소리와 비슷해서 몸이 떨렸다. 그와 맞닿아 있는 감각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대로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긴장과 공포로 확장된 그녀의 동공 앞에 흰개미가 불쑥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이마에 닿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공주와 교미…… 기분, 좋아.”

“하, 너희 같은 괴물도 쾌감을 느껴?”

“그게, 무슨, 뜻이지?”

흰개미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공주는, 우리를, 괴물이라고, 불러?”

대꾸할 가치도 없다. 눈빛에 비웃음이 가득하다. 감정에 비정상일 정도로 무딘 흰개미는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답답해 죽을 것 같네.’

결국 요한나는 말로 못 박았다.

“괴물이 아니면 뭐야?”

“괴물…….”

그의 미간이 좀 더 찌푸려졌다.

“우리도 인간처럼, 교미하고, 번식해.”

“…….”

“공주 역시, 우리와, 같지.”

이번에는 요한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퍽 무구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뭐가, 다르지?”

‘같다고? 너희와 내가 뭐가 같아.’

흰개미가 정말 자신을 그들의 일족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는 사실에 솜털이 쭈뼛 섰다.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 내려다 멈칫했다. 문득 예전 제 모습이 떠올랐다.

따뜻한 연기가 피어오르던 굴뚝, 창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 달콤한 양념에 버무린 고기 요리와 폭신하게 부푼 흰 빵이 올라가 있는 식탁, 하루의 일과를 나누며 식사하던 가족들. 마을에 처음 내려갔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처음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 속해 있고 싶었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을 갖고 가까이 다가가는 그녀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구에게 아낌없이 보내 주던 웃음은 그녀를 보자마자 자취를 감추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들. 홀로 남은 그녀는 어렸지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섞일 수 없다’는 것을.

그 후로도 사냥꾼을 따라 주기적으로 마을을 방문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고민했다.

저들과 내가 다른 점이 뭐지? 생긴 것도 같고, 말하는 것도 같고, 먹는 것도 같은데, 어째서 나는 차가운 오두막에 혼자 있어야 하는 거지?

오래도록 답을 찾지 못했다. 신열을 앓고 난 뒤 생긴 손등의 푸른 비늘을 봤을 땐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랬구나.’ 수긍이 갔다.

이래서 그랬나 보다. 굳은 돌처럼 마음 한구석에 박혀 있던 오래된 의문이 답을 찾은 날이었다.

흰개미의 질문이 가슴에 박힌다.

으득. 이를 악물었다.

‘나는 인간이야.’

되뇌었지만 미진한 느낌이 있다. 대답하려고 입을 벌려도 막힌 말문은 트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차이점을 얘기하려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다.

‘육체적인 특징을 꼽는 것은 싫어.’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 같기도 했거니와 순혈 인간에 비해 자신은, 충인과의 육체적인 차이점에 있어서 당당할 수 없었다.

흰개미는 허리 짓을 멈추면서까지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요한나는 건조해지는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입술을 축축하게 적신 후에야 대답했다.

“인간은…… 너희처럼 본능대로 행동하지 않아.”

“이해가, 안 돼.”

흰개미가 즉시 반문했다.

“본능대로, 행동한다는 건, 무슨, 의미지?”

그녀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이어 말한다.

“욕망을 참지, 않는 것인가?”

정확했다. 요한나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는 많은 생각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답답한 말투와 가면 같은 얼굴에 종종 잊어버리긴 하지만 흰개미는 확실히 똑똑한 데가 있다.

“하지만 네, 아버지는, 공주를 납치했지.”

요한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흰개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욕망을 참지, 못했어.”

“…….”

“그게, 차이점이 될 수 있나?”

말문이 막혔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다.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망나니 같은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건,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있고, 마을의 사람들도 모두 좋은 건 아니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숱한 인간에 비하면 충인은 오히려 순수한 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해 버리면 모든 게 백지로 돌아갈 것 같았다.

‘너흰 괴물이야.’

생각은 확고했다. 그녀는 바렌타를 떠올렸다. 그녀의 내면에서 바렌타는 곧 마을이었다. 그에게선 마을 사람들이 구성하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들은 선하다.

반면 개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악하다. 그들은 자신을 범했고, 자유를 강탈했고, 하기 싫은 일을 강요했다.

그런데 그 둘이 다를 게 없다니. 그 경계가 흐려지는 건 안 될 일이다. 요한나의 눈빛이 무섭게 차가워졌다.

흰개미에게 이 생각을 관철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단단히 사로잡혔다. 하나 거짓말로 꾸며 낼 생각은 없다. 그 순간 뇌리에 무언가가 스쳤다.

‘그래. 이거야말로 인간과 개미의 가장 큰 차이점이지.’

벗은 몸을 바싹 붙인 채 둘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요한나가 말했다.

“인간은, 포장하면서 살아.”

흰개미가 눈매를 꿈틀했다.

“포장?”

“먹고 싶은 거, 자고 싶은 거, 남을 해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걸 참아. 남들 눈에 그게 나쁘니까. 그래야 잘 지낼 수 있으니까. 절제할 수 있는 것. 인간들만 할 수 있는 거야. 너흰 그런 게 없잖아.”

“고작, 그것으로?”

실망한 눈을 향해 냉랭히 뱉었다.

“난 너희들의 혼례에 벌거벗고 너와 교미했지.”

혀끝을 깨물고, 떨리는 눈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마을에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있었을 때 나는 단지 입술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심장이 터질 뻔했어. 그와는 절대 너처럼 발가벗고 사람들 앞에서 교미할 수 없을 거야.”

“…….”

“너희들의 방식이 나쁘다고 볼 순 없겠지. 너희 관점에서는 그것이 일족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일 테니까. 하지만 인간인 나는, 그렇게는 못 살아.”

머리가 맑아지며 마음이 후련해졌다. 정답을 말한 것 같았다.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설득당하다니. 기분이 묘했지만, 썩 나쁜 느낌은 아니다. 정면을 직시했다.

흰개미가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사랑?”

흰개미가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남자?”

“…….”

“그게…… 뭐야?”

‘뭐야. 맥 빠지게.’

이상한 데 꽂힌 흰개미는 눈빛으로 그녀의 대답을 독촉했다.

“궁금한 게 고작 그거야?”

“……연인.”

“그런 단어도 알아?”

의외라는 시선으로 보자 흰개미는 묘한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되받아쳤다. 뺨은 매끈하고 이마의 주름도 반듯하게 펴진 상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목소리가 딱딱했다.

“검은 개미는 작은 공주를, 연인이라, 불렀지. 단순한, 교미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야. 마음을 바친, 사랑하는…… 사이.”

마음을 바치는, 사랑하는 사이.

바렌타가 떠올라 속에서부터 뜨거운 게 울컥 치밀어 올랐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래.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야.”

“…….”

“이해했으면 날 놔줘. 1년, 그 말 지켜. 그동안은 너희에게 협조할 테니까. ……그 후에는 날 그 사람에게 보내 줘.”

수줍게 맞잡았던 두 손. 공기마저 수축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긴장되었던 첫 키스. 그녀가 살면서 겪은 모든 환희와 빛나는 날 속엔 바렌타가 있었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공주도 사랑을, 해?”

그동안의 모든 힘겨움과 서러움이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요한나는 울면서 그를 보았다. 깜박거리는 눈이 멍해 보였다.

“공주는 일족, 수개미들의 공주. 누구의 것일 수, 없어.”

“검은 개미도 연인을 가졌잖아.”

“검은 개미야말로, 돌연…… 변이지.”

흰개미의 쇳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색은 붉어도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눈동자에 일순 불꽃이 튄 듯했다.

요한나는 반발심이 치밀었다.

“난 인간이야. 너희의 방식대로는 못 따라.”

“인간, 이라고?”

흰개미가 그녀를 보았다. 불꽃이 꺼진 눈은 무생물같이 차가워서 소름이 돋았다.

“……그래.”

“정확히, 말해야지. 공주…….”

흰개미가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귀밑에서부터 턱까지를 쓸어내렸다. 딱딱하게 굳은 목까지 내려와 맥박이 뛰는 경동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살의는 없었다. 그러나 요한나는 그 손가락이 얼마든지 날카로운 무기로 변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긴장은 무뎌지지 않고 무게를 더했다. 어깨가 굳는 게 느껴졌다.

“인간의 피가, 흐르는, 것뿐. 공주는 우리와, 같아.”

느릿느릿한 말투에 신경이 곤두섰다. 기가 빨리는 기분에 진저리를 쳤다.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난 인간이야.”

흰개미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는 그들이 취하는 자세가 대단히 민망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생식기를 접붙인 채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았던가.

아래가 말랐고, 본능적인 행위에 어쩔 수 없이 올라갔던 체온도 차갑게 식었다.

‘내 말을 이해하지도 못할 놈에게 이런 얘기를 왜 꺼낸 거지? 할 일만 할 것을.’

짜증스러운 후회가 치밀었지만 뭐라고 말을 하기는커녕 침도 삼킬 수 없었다. 말 없는 흰개미의 시선이 점점 부담스러워질 무렵.

“……왜 그렇게.”

“…….”

“집착해?”

요한나의 눈이 흔들렸다.

“인간인 게, 공주에게 중요해?”

흰개미는 궁금하다는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잠시 망설이다 입을 벌렸다. 쩍, 말라붙은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목구멍이 버석거렸다. 통증을 느끼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인간이 아닌 나는, 의미가 없어.”

“…….”

“아무도 받아 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사람들과 살고 싶어.”

눈을 내리깔았다. 무엇 때문인지 마음이 쓸쓸했다.

“마을 사람들 틈에서, 살고 싶어.”

오랫동안 품었던 마음. 묵은 소망. 어렸을 적, 그녀가 어딜 돌아다니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사냥꾼의 곁을 떠나 도착한 곳은 마을의 광장이었다. 그곳에 가면 그녀는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구석에 자리 잡아 마을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꺄르르, 웃는 얼굴과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친밀한 접촉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왠지 자신의 마음도 따뜻해져 왔다.

오두막으로 돌아와 딱딱한 침상에 누워서는 상상했다. 그들 사이에 끼어 노는 자신의 모습을. 웃으며 반겨 주는 아이들의 얼굴을. 잘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상상만으로도.

“나는 인간이야, 흰개미.”

요한나는 눈을 감았다. 흰개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하는 부정의 말을 듣기 싫었다. 너는 우리와 같다. 그 말이 폐부에 박혔음이 분명했다. 아직도 고통스러웠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그렇군.”

요한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흰개미가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생경함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너는, 내가 아는 공주가, 아니야.”

“…….”

요한나의 눈이 일순 커졌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가 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퍽 당황스러웠다.

반복해서 뱉은 것은, 아무도 들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강박적으로 말하는 거다. 나는 인간이야, 인간이야, 인간이야.

흰개미는 대답했다. 그렇다고. 요한나는 얼굴을 굳혔다.

“인정하는 거야?”

흰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 공주는, 너는, 나와…… 완전히, 같지는 않구나.”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요한나는 잠깐 혼란에 빠졌다.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 알았으면 됐어? 뭐라고 해도 이상할 것 같았다.

대꾸하기를 포기하고 입을 다물자 잠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니, 침묵은 그녀에게만 불편한 존재인 듯했다. 흰개미는 호기심이 담긴 얼굴로 그녀를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뭐, 할 말 있어?”

참지 못하고 툭 뱉자 흰개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공…… 아니. 그럼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녀는 머뭇거렸지만 짤막하게 대꾸했다.

“요한나.”

“요, 한나.”

허스키 목소리가 부르는 제 이름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신기한 거라도 알게 된 듯 흰개미는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요한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몇 달 만에 불린 이름이 계속해서 그녀의 귀로 스며들었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투명하게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요한나.

중얼거리며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서늘한 체온에 요한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맞붙어 있었던 탓인지 전처럼 소름이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착각인가 싶게 짧았던 찰나, 반짝 떠올랐다 사그라진 그의 웃음이 뇌리에 남는다. 괴물의 미소는 퍽 아름다웠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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