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9)

06

공주의 혼롓날.

광란의 교미는 만 이틀에 걸쳐 이어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늘을 유영하며 벌였던 짝짓기가 끝났을 때 바닥엔 시체가 드문드문 깔려 있었다.

공주의 몸에 모든 정기를 쏟아 내 피부가 쪼글쪼글해진 수개미들의 시체 위로 민들레 꽃씨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죽은 개미의 몸은 검은 산맥의 양분이 될 것이다.

공주의 혼롓날에 살아남은 수개미들은 강한 개체였다. 갓 우화하여 날개를 펼칠 수 있었던 수개미들은 대부분 죽었고, 살아남은 수개미들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장군 계급에 이를 수 있을 터다.

수개미 중 가장 많이 살아남은 젊고 건강한 장군들은 서둘러 지쳐 늘어진 그들의 공주를 안아 유유히 거처로 향했다.

혼롓날이 시작되었을 때 군락의 울타리를 거두고 소속에 상관없이 짝짓기를 하던 모습은 간데없이, 물러나는 개미들은 전에 없는 살기를 흉흉하게 내뿜었다.

지친 공주를 철통같이 보호하는 장군들은 누군가 다가서는 즉시 물어뜯을 기세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그건 토굴의 개미들도 마찬가지였다.

요한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회색 늑대의 추격을 받느라 일주일 내내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던 때를 제외하고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때보다도 기력이 없었다.

마음에 민들레 홀씨 하나 자랄 땅이 없기 때문이다. 비틀거리는 그녀는 결국 튼실한 나무를 붙들고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바닥으로 떨군 고개가 전과 달리 꼿꼿하지 못하고 나약했다.

고무나무의 유액으로 빚은 것처럼 하얗고 투명했던 피부는 붉은 울혈로 얼룩덜룩했다. 강한 힘에 짓눌린 골반 부근에는 벌써 노랗고 퍼런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군락으로 돌아가는 공주들의 몸엔 다양한 수개미들이 남긴 광란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지만 요한나의 흔적은 유독 깊고 일정한 패턴을 그렸다. 다리를 움직이려다 실패하고, 결국 주저앉았다.

흰개미가 그녀의 옆에 반 무릎을 꿇었다.

“조심.”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달싹거렸다. 흰개미가 얌전히 귀를 기울였으나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다.

흰개미는 특유의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모두 약해진, 상황이다. 누가, 노릴지, 몰라. 위험하니, 얼른.”

검은 개미가 그런 흰개미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눈짓하자 수개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주변을 둘러싸고 사방을 경계했다.

요한나는 그가 뭐라고 하든, 주변에서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은 채 멍하게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흰개미가 그녀의 팔에 손을 댔다. 즉시 반응이 있었다. 어깨를 움츠리더니 흰개미의 손을 밀어 냈다. 힘이 다 빠져 동작은 느렸고 손놀림은 미력했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리 가.”

흰개미는 자신을 거부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한 얼굴이었다.

요한나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질색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오만상을 찌푸렸는데, 지금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표정이 없어 매끈했던 흰개미의 미간에 이질적인 주름 하나가 그어졌다.

“공주.”

흰개미가 그녀를 불렀다. 충동적인 부름이었던 듯,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딱히 할 말이 없는 눈치였다. 도리어 왜 그녀를 부른 건지 모르겠다는 양 침묵을 지킨다.

수개미들을 지휘하며 그들의 상태를 살핀 검은 개미가 지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질반질했던 푸른 갑각 표피가 몇 개씩 빠지고 흠집이 나 있었다. 그는 그나마 나은 상태다.

처음 토굴을 나섰을 땐 스무 명이었던 수개미들이 지금은 그 반의 반절도 되지 않았다. 평균적인 공주의 혼롓날 사망 인원수를 뛰어넘는 결과였다.

기력이 달려 죽은 것도 있지만 요한나가 직접 해치운 탓이 컸다.

살아남은 이들도 기세만 사나울 뿐 그 힘은 평소 멀쩡한 컨디션의 절반도 끌어내지 못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검은 개미는 못마땅한 눈으로 바닥에 웅크린 요한나를 보았다.

공주의 혼롓날은 개미들에게 있어 일족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큰 행사. 그래서 그만큼의 위험도 따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굴을 나온 공주가 외부의 적에 노출되는 상황이기도 하거니와 혼례가 끝난 개미들이 녹초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개미 군락들은 공주를 지킬 호위병을 한둘쯤 마련해 두는데 토굴 개미들은 그것이 흰개미였다.

교미에 휩쓸리지 않고 공주만을 지켜야 하는 호위병은 다른 군락에서 공주를 납치하거나 해하는 일이 없도록 공주의 보호를 맡는다.

일족 중 강한 수개미로 손꼽히는 데다가 교미 페로몬에 가장 무덤덤한 흰개미는 그런 호위병 역할에 적격이었다.

그가 공주의 혼례에 직접 참여한 것은, 그래서 검은 개미를 놀랍게 했다.

다행히 지친 수개미들에 비해 멀쩡해 보이긴 하나 그도 이틀 내내 쉬지 않고 비행했으니 적잖이 지쳤을 터였다. 지금 강한 천적이 덮쳐 온다면 퍽 곤란한 상황이 될 거다.

“흰개미. 이럴 때가, 아니다. 늑장, 부리면 안 돼.”

검은 개미는 이쪽을 보지도 않는 흰개미를 보며 미끈한 미간을 좁혔다.

하얀 모피를 벗은 적이 없었던 흰개미의 나신이다. 그것도 어색한데 무리의 위기 상황 앞에서 태평한 모습을 보니 어디 아픈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가 병을 앓았던 적은 한 번도 없으나 고기를 먹지 않고 맛없는 풀때기나 처먹는 놈이니 무슨 문제가 생겨도 진즉 생기지 않았겠는가.

“일어나.”

요한나는 아예 바닥에 앉아 버렸다. 제 말을 싹 무시하는 행동에 검은 개미가 벌컥 성을 내려는데, 흰개미가 그녀의 무릎 오금에 팔을 넣고 들어 올렸다.

요한나의 몸이 둥실, 가볍게 떠올랐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친 얼굴에 희미한 짜증이 스쳤다.

그녀는 뭔가 말하려는 듯 흰개미를 보다가 입술을 꾹 눌렀다.

흰개미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듯 잠시 멈추었지만, 그녀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떨구자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공주, 이상해.”

의아하게 중얼거리는 그를 검은 개미는 희한하게 바라보았다.

검은 개미는 사고의 범위와 추리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으나 감정에 관해서는 동족 중 가장 민감했다.

공주를 사랑했으며, 그녀를 잃어 분노를 배웠고 사냥꾼에 대한 증오를 키웠다.

그는 요한나의 무반응을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찝찝해 보이는 흰개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수의 절망 따위 그에겐 하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으므로.

흰개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넓은 어깨와 반듯하고 단단한 외골격, 좌우 대칭이 완벽한 몸으로 요한나를 안정적으로 받치고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축 늘어진 날개가 탄탄한 엉덩이에 부딪히며 바스락거렸다.

그는 지친 수개미들이 따라잡기 벅찰 정도로 수월히 걸음을 옮겼다.

같은 이틀을 보냈는데도 지친 기색 없이 생생한 모습은 혹시 모를 적의 위험을 경계하며 불안해하던 수개미들에게 큰 의지가 되었다.

정작 다른 군락에서 1순위로 노릴 게 분명한 요한나는 주변에 무관심하여 무기력하게 늘어져만 있었다.

바스락.

겨우내 쌓이고 썩어 간 낙엽의 잔재들이 묵직한 걸음에 휘말려 숨을 죽였다.

그들의 위로 이파리가 잔뜩 달린 자작나무 그림자가 뾰족한 성처럼 날카롭게 드리워졌다.

* * *

“다행히 습격은, 없군.”

검은 개미의 매서웠던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틀림없이 약해진 때를 노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토굴에 도착할 때까지의 길은 평탄했다.

날개를 한 번에 찢어발길 수 있는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진 들짐승들은 물론이거니와 타 군락의 길 잃은 개미도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싱그러운 초목의 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지친 개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토굴이 가까워지자 수개미들은 좀 더 힘을 내고 잰걸음을 옮겼다.

요한나를 안고 있는 흰개미는 한 사람의 무게를 더하고 있음에도 변함없이 차분하고도 가볍게 걸었다.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그 혼자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개미들은 흰개미가 그들 군락의 장군이라는 게 뿌듯했다. 자랑스러웠다.

그들은 믿음직스럽다는 얼굴로 흰개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근육질 팔뚝 옆으로 하얀 팔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런 건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인간이 아닌 그들의 기준으로, 혼례를 치른 공주가 지친 것은 당연했다. 겨울이 오면 토굴의 입구를 막는 것처럼 본능에 새겨진 일이다.

마음이 아프다거나 슬프다거나 절망스럽다거나, 흰개미만큼은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요한나의 마음을 한 조각도 유추할 수 없었다.

죽은 것처럼 늘어진 요한나를 대동하고 일행은 마침내 토굴에 닿았다. 무사히 토굴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않았던 검은 개미의 얼굴마저도 완전히 풀어졌다. 그러나 다소 마음이 편안해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안락한 은신처가 아닌, 초토화된 토굴이었다.

불유쾌한 냄새가 입구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마치 썩은 고기의 즙을 내 뿌린 것처럼 시큼하고 코가 아렸다.

“개미산?”

중얼거리는 검은 개미 앞으로 흰개미가 한발 앞섰다. 곧 그의 신형이 불길한 어둠이 감도는 토굴로 사라진다.

그 차분한 뒷모습을 보자 불안했던 마음이 다소 안정되어, 남은 개미들도 그 뒤를 서둘러 쫓았다.

요한나의 까만 조약돌 같은 눈이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감도는 토굴을 거울처럼 담았다.

침입자들은 우락부락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거대한 체구에 관자놀이와 목덜미, 드러난 팔뚝과 손목 곳곳에 뱀의 비늘 같은 붉은 갑각 표피를 세우고 있었다.

그들에게선 유황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코를 콕콕 쑤시고 기침이 나게 하는 냄새였다.

걸친 옷은 검은 옷감을 잘라 둘둘 만 형태로, 검은 개미의 차림과 비슷했지만 검은 개미의 옷이 품이 넓었다면 침입자들은 대충 몸통만 가린 것 같았다.

그들은 기괴한 소리를 질러 댔는데, 흥겨운 리듬이 마치 웃는 것 같았다. 왜소한 몸집의 일꾼들은 침입자들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키야아아아아!”

“크아아악!”

토굴 안을 종횡무진 누비는 그들의 그악스러운 턱 놀림에 토굴 개미들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 갔다. 열 명 남짓한 장군 개미들이 그들에 맞서고 있으나 불리한 모양새였다. 토굴의 밀지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여의치 못해 여기까지 밀렸다는 의미다.

안 그래도 멸족을 향해 가는 토굴 개미들에게 이번의 습격은 절망 그 자체. 습격이 없었던 게 아니다. 통상적으로 개미들의 습격은 공주를 노리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번의 공격은 그 반대였다.

마음을 놓고 있던 일꾼개미들은 혼이 빠져서 울며 도움을 요청했다.

“크아아아악!”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죽어 간다. 요한나의 손이 자동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아는 것에 대한 단순한 반사 반응이었다.

감각이 차단된 것처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맡아지는 것 모두가 그녀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

요한나는 시끌벅적한 환경에도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멍한 눈으로 토굴의 어느 한 곳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턱 선이 건조했다.

‘슬프지 않아.’

희미한 안도감이 들었다.

‘공주. 우리의 공주. 소중한, 공주.’

흰개미와의 ‘혼례’가 끝나고 개미들은 지친 얼굴로 환히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들의 설레는 얼굴에, 기쁨으로 일렁이는 커다란 검은 눈에 낭떠러지에 서 있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그들이 내뿜은 친애의 감정이 생생하게 밀려들었다. 이렇게까지 타인의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덜컥 두려웠다.

이들은 왜 이렇게 나를 환영하지? 그건 그녀를 동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흰개미와의 이틀간의 교미가 문제였다. 뭔가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는 걸 알았다.

요한나는 웃고 있는 개미들을 보며 돌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인간일까?’

아니, 인간이긴 한 걸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도 오한이 들었다.

괴물이 되어 가고 있다.

무력한 절망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꺼리고 멀리했던 게 당연하다.

그들은 현명했던 거다. 그녀의 몸에 섞인 괴물의 피 냄새를 맡았던 거다.

요한나의 의식은 원죄를 저지른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그가 토굴 공주의 몸에 억지로 죄의 씨앗을 뿌리고 자신을 잉태했을 때부터 예정된 결말이었다.

사냥꾼은 사냥꾼만의 일일 뿐, 나와는 관계가 없다 여겼건만 자신이 없어졌다.

그녀의 안에서 가장 크게 자랐던 나무가 부러졌다. 자신감이 뭉그러진 열매처럼 형체를 잃었다.

따뜻한 정이 넘치는 마을을 동경했기에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알게 모르게 움츠러들어도 기본적으로 혼자 힘으로 살아온 사람 특유의 줏대와 내면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힘이면 힘, 속도면 속도, 짐승이든 인간이든 충분히 마주할 수 있었다.

충인은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마주한 부서지지 않는 벽이었다. 요한나는 손등의 푸르스름한 갑각 표피를 음울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구불구불하고 어둡고 갑갑한 토굴 안에서 아버지의 죄를 등에 짊어지고 그녀의 모친을 대신하여 썩어 가리라.

난생처음 생긴 우울감의 날카로운 칼끝에 요한나는 방패 없는 신병처럼 무력하게 심장을 내주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누워만 있고 싶었다.

……지쳤다.

요한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귓전을 파고드는 누군가의 비명과 고함이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듯 멀어진다. 다 죽어 사라지든 말든,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요한나가 침묵에 잠긴 사이, 토굴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혼롓날을 마치고 간신히 돌아온 거처에서 학살당하고 있는 동족들을 보는 순간, 검은 개미의 분노는 토굴을 진동시켰다. 눈에서 새카만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석굴, 개미!”

심상찮은 존재감에 불그스름한 얼굴의 석굴 개미들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개미와 흰개미를 발견하고는 흠칫한다.

그 뒤, 흰개미의 품에 안겨 있는 요한나를 보고 눈을 빛냈다. 입술이 실룩거린다.

“공주, 를 뺏어! 일꾼을, 늘리자!”

개중 제일 덩치가 큰 석굴 개미가 붉게 물든 손을 치켜세웠다. 토굴 개미의 피가 팔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훅 끼쳐 오는 피비린내에 분노한 검은 개미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캬아아아아!”

노성이 토굴 벽에 부딪혀 우렁우렁 울렸다. 그러자 시들시들하던 토굴 개미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장군급이 내뿜는 전투 페로몬이 동족의 사기를 강제로 일깨우고 목숨을 도외시하며 싸우기를 종용했다. 그에 반응한 토굴 개미의 눈빛에 살기가 흘러넘쳤다.

“크아아아아!”

비틀거리며 일어난 토굴 개미들이 석굴 개미의 몸 곳곳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었다.

두꺼운 피부가 뚫리고 피가 샘솟았다. 목을 물린 석굴 개미 한 마리가 거대한 몸을 땅에 뉘었다.

쿵!

개체의 크기가 큰 만큼 그 수가 많지 않아 한 마리가 쓰러지면 무리의 타격이 컸다.

“키야아아아!”

석굴 개미의 장군이 검은 개미에게 대응하기 위해 일족을 격려하는 전투 페로몬을 뿜어냈다. 그러나 검은 개미의 분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다, 죽여, 버린다!”

검은 개미는 앞뒤 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그의 주먹질에 석굴 개미 하나가 피떡이 되었다.

후두두둑.

머리가 뭉개져 바스러진 수박처럼 떨어졌다.

그 위용에 석굴 개미들이 얼음처럼 굳었지만 용맹한 종족답게 호락호락 물러나지는 않았다.

“두려워 마라! 저놈, 지쳤어!”

석굴 개미 장군이 소리를 질러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온 힘을 끌어모아 공격한 상황이다. 본보기는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석굴 개미의 장군은 이미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우리 목적은 공주를 빼앗으려는 것뿐만이 아니다. 토굴 개미의 군락 자체를 없앤다!’

석굴 개미 장군의 눈빛에 검은 개미는 탄식을 흘렸다.

안일했다. 이렇게 밀고 들어올 줄이야!

낭패였으나 여기서 물러난다면 남은 수개미들과 일꾼까지 모두 죽어 버릴 터.

검은 개미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석굴 개미들에 맞섰다. 기세는 좋았으나 지친 상태로 석굴 개미 셋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금세 수세에 몰린 검은 개미의 창백한 피부에 하나씩 상처가 늘어났다. 석굴 개미 장군은 득의양양했다.

“오늘! 토굴, 개미는, 끝, 이다!”

“어째서?”

그 말은 이상하게 선명하게 들렸다. 공기가 날카로워진다. 얼마나 피를 흘렸던지 피 운무가 일었던 토굴 내부의 피비린내가 새삼스럽게 코끝을 쑤셨다.

착각인가? 석굴 개미는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다가 굳어 있는 동족들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어째서, 끝이라, 말하는 거지?”

느릿한 말투였다. 속도가 느려 비교적 선명한 발음으로 뱉는 말이 모두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석굴 개미의 눈길이 소리를 따라 이동했다. 그의 시선 끝에 선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석굴 개미 장군은 그의 품에 있는 공주를 보았다. 공주를 맡고 있으니 그가 토굴 개미 중 가장 강하리라.

흰개미에게서 풍기는 기이한 분위기와 정체 모를 위압감에 일순 압도당했던 석굴 개미 장군은 경계하는 얼굴로 그를 천천히 살폈다. 눈빛에 이채가 어린다.

“아, 너, 알고 있다. 토굴 개미의, 돌연변이.”

하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훑어보는 경멸 어린 시선에도 흰개미는 무감정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석굴 개미 장군은 전보다 혐오스럽다는 어투로 뇌까렸다.

“제법, 세다지? 하지만, 그래 봤자, 허접한 돌연, 변이일, 뿐!”

마지막 말에 악센트를 두는 순간 그에게서 성난 기운이 솟구쳤다.

같이 흩뿌려진 전투 페로몬에 남은 석굴 개미의 절반이 반응했다.

‘검은 개미와 흰개미만 처리하면 이곳은 끝이다.’

그렇게 판단한 석굴 개미 장군은 남은 동족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토굴 개미들이 이를 악물고 공격했지만 이미 석굴 개미들의 관심은 다른 데 쏠려 있었다. 목적지는 흰개미와 검은 개미다.

점차 지친 기색을 띠는 검은 개미를 보는 토굴 개미들의 얼굴에 안타까운 초조함이 어렸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두 장군이 쓰러진다면 공주를 지킬 수 있는 이가 없다. 공주를 빼앗긴 개미 군락에 남는 것은 멸족뿐.

토굴 개미들이 다급하게 석굴 개미들의 뒤를 공격했다. 몇을 처리했으나 전세를 뒤집는 일은 요원했다. 개미들의 토굴에 짙은 암운이 드리워질 때.

“……!”

가공할 위력이 담긴 사자후가 토굴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석굴 개미들의 움직임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거대한 덩치들로 바글바글했던 공간이 기우뚱 기울어지는 듯했다.

석굴 개미 장군의 부릅뜬 눈에 동족들이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것이 보였다. 흰개미가 있던 자리다.

이윽고 흰개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손이 핏물에 담긴 것처럼 진득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방금 그런 소리를 터뜨렸다는 게 순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석굴 개미 장군은 저도 모르게 검은 개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그가 낸 소리를 착각한 게 아닐까 해서였다.

검은 개미는 석굴 개미의 복부를 날카로운 손톱으로 찢고 있었다.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솜씨였지만 특별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석굴 개미 장군은 다시 흰개미를 보았다. 그리고 목격했다. 그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나뭇가지처럼 픽픽 쏟아지는 동족들을.

그의 살육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저 손쉬운 먹잇감을 사냥하듯 태평했다. 그런 여유로운 손짓에 동족들이 피를 뿜으며 죽어 나자빠졌다. 석굴 개미 장군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흰개미는 자리에서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 저를 감싼 석굴 개미들을 모두 처리했다. 여전히 왼손만이 붉을 뿐이다.

뺨에 피 한 방울 튀지 않고 완벽히 보호된 공주를 보는 순간 석굴 개미 장군은 한 단어를 떠올렸다.

개미귀신.

저것이 천적인 개미귀신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는 절망했지만 절규할 시간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육신에서 멀어진 머리는 더는 감정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 자신만만하게 빛났던 갑각 표피의 붉은 윤기가 빛을 잃었다.

* * *

‘저런 건 못 이겨.’

언젠가 사냥꾼을 따라갔던 사냥에서 거대한 사자를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이다.

붉은 가죽 사자도 잡은 적이 있는 만큼 검은 산맥에서 사냥꾼의 실력은 다른 이들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사자를 보았을 때 사냥꾼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요한나는 그 확신의 연유가 궁금했다. 황금빛 갈기를 휘날리는 초원의 사자가 특별해 보이긴 했지만, 사냥에 관해서만은 오만한 사냥꾼이 시도하지도 않고 포기하다니.

‘전에 잡았던 사자와 비슷한 크기인 것 같은데 못 잡을 건 없지 않나요.’

‘멍청한 소리. 저런 건 못 잡아. 보면 알지. 사냥꾼은 기사란 족속들과는 달라. 기합을 넣어서 이길 수 있는 대상과 아닌 대상을 한눈에 파악하지 않는다면 그 찰나로 인해 모가지가 떨어질 거다.’

초원의 왕이 지나가길 숨죽인 채 기다렸다. 요한나는 유유히 움직이는 그 짐승의 우아한 걸음을 보며 언젠가 그런 대상을 만나게 될까, 막연한 의문을 품었다. 그 이후 어렵고 힘겨운 사냥은 있었어도 불가능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이번을 제외하고.

흰개미의 품에서 그가 벌이는 전투, 아니 학살을 연극이라도 보듯 감상하는 그녀의 마음에 아직 젊고 건강했던 사냥꾼과 나눴던 과거의 대화가 스쳤다.

‘……저런 건 못 이겨.’

그때 사냥꾼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속으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때 사냥꾼의 마음도 이러했을까? 이렇게 끔찍하게 슬프고,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었을까?

누군가 깊디깊은 구덩이 속으로 머리채를 붙잡아 처박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차갑고 우악스러운 손길에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작고 어두운 상자에 오도 가도 못하게 갇혀 있다. 요한나는 텁텁한 공기의 토굴을 바라보다 힘에 부쳐 눈을 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영영 뜨고 싶지 않았다.

* * *

멍하니 눈을 떴다. 충분히 숙면을 취한 몸은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아 우울한 기분이 한결 가셔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의욕적이지는 못했다.

현실이 현실 같지 않은 기이한 부유감이 눈을 감기 전부터 지금까지 발뒤꿈치에 매달려 있었다.

삐걱거리는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바글바글하게 몰려든 까만 눈 세 쌍에 흠칫했다.

“공주.”

“일어났다. 하루, 하루 만에.”

“걱정, 함.”

“배, 고파?”

“혼례, 힘듦, 지칠 것.”

“영양, 보충, 수분, 보충!”

호들갑을 떠는 왜소한 개미 세 마리를 멀뚱히 응시했다. 그들은 토굴에서 지내는 내내 그녀의 시중을 들던 일꾼개미들이었다.

석굴 개미의 침입 당시 익숙한 얼굴이 죽는 걸 보았는데, 역시 네 명 중 한 명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사개미가 없군.’

슬픈 건 아니었지만 낯익은 얼굴 하나가 사라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한번 지우면 없어져 버릴 물때처럼 희미했다.

마음에 투명한 막이 한 겹 생긴 것처럼 무덤덤했다. 무심코 심장이 있는 가슴 쪽을 만지작거렸다. 일꾼개미들이 그 손짓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공주, 아파?”

걱정스러운 얼굴이 희한하다. 알을 낳을 도구일 뿐인데 왜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굴지.

요한나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자 서로를 바라본 일꾼개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석굴, 개미, 때문? 겁, 먹음? 아. 아. 걱정, 마.”

일꾼개미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지킴. 공주, 소중. 목숨, 바침.”

일꾼개미가 앙상한 손으로 가슴을 쳤다.

퉁, 퉁.

딱딱한 외골격이 울린다. 그녀가 일꾼개미들을 살해하는 모습에 겁먹고 바들바들 떨었던 주제에 지켜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모습은 우스웠다. 하나 요한나는 처음과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뭘 원하는 거지. 죽을 먹으라는 건가. 교미하라는 건가. 뭘 원하기에 이렇게 말이 많은 거야.

요한나의 냉랭한 시선에 일꾼개미의 더듬이처럼 생긴 까만 머리칼이 축 늘어졌다.

“공주, 공주.”

“또 화, 났어? 아직, 화?”

요한나의 입술 끝이 미약하게 올라갔다. 또라니. 자신이 언제 화를 냈다는 건가. 살기 위해 발악한 것뿐이었다.

일꾼개미들의 조마조마한 시선을 받자 급격히 기분이 저조해졌다.

그녀는 그들의 동족을 죽였다. 검은 개미가 수작을 부린 그때를 제외하고 혼롓날에도 족히 다섯이 넘는 토굴 개미를 해쳤으니 이 손으로 죽인 개체가 적지는 않았다.

아무리 공주라고 하지만 동족을 죽인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을 텐데.

“화는 너희들이 났겠지.”

잔뜩 잠겨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이 꽉 막힌 불쾌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일꾼개미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왜?”

“내가 너희 동족을 해쳤으니까.”

“아.”

“아.”

“아.”

일꾼개미들이 동시에 입을 벌렸다. 고개를 주억거리긴 했으나 이해한 얼굴은 아니다.

“알을 충분히 빼내고 복수하려는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해. 하지만 걱정하는 척은 하지 마. 안 통하니까. 그런다고 너희를 좋아할 리도 없어.”

요한나는 제 말에 비소했다. 절대로, 없을 것이다. 잠시 혼란스럽긴 했으나 그녀는 인간이었다.

아직도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았던 그때의 흥분이 발바닥 아래 남아 있는 듯해 조금 꺼림칙하긴 했다. 그래도 그게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는 건 아니다.

‘나는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해. 그럼 된 거야.’

오두막에서 사냥꾼과 둘이, 그리고 그녀 혼자 살아왔던 시간 속에서 익혔던 대로 난제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았다.

누가 그녀를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몸엔 사냥꾼의 피가 흘렀다. 인간의 붉은 피다. 충인의 피가 섞였더라도 인간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건 저기 먼 수도의 고명한 학자들도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신이 아닌 그들이 무슨 수로?

설사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지라도 인정할 수 없었다.

인간도 충인도 아니라면, 자신은 인간이기를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그럼 인간인 거다.

다소 억지스러운 사고의 흐름이었지만 생각을 이어 가며 머릿속이 점차 맑아졌다.

탁했던 검은 눈동자에 총기가 돌아오고 눈 안쪽 깊은 곳에 불씨가 살아났다. 반짝이는 눈은 전과 다른 깊이를 드러냈다.

심경의 변화가 외부를 통해 드러나자, 그녀는 어두운 토굴 속에서 광채를 발하는 것 같았다.

광석의 은은한 흰빛에 비할 수 없는 찬란함에 일꾼개미들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따끔거리는 시선을 느낀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자, 정신을 차린 일꾼개미 하나가 주저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공주.”

“…….”

“공주는, 우리가, 싫어?”

요한나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귀를 의심했다. 그런데 일꾼개미가 그에 그치지 않고 한마디를 더 하는 게 아닌가.

“이곳을, 싫어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기가 막혀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에 주눅이 든 일꾼개미들은 손가락을 얽은 채 마구 비벼 댔다. 손등과 손가락 사이의 갑각 표피가 쓸려 자륵자륵 귀에 거슬리는 금속성의 소리를 냈다.

짜증이 난 요한나가 그만하라는 소리를 하려는 찰나.

“우리는, 공주가, 좋아.”

그녀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하나가 그리 말하니 다른 일꾼개미도 용기가 났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 소중해.”

참지 못하고 냉소했다.

“그렇겠지. 알을 낳아 줄 도구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무, 물론, 번식, 중요. 하, 하지만, 공주, 그냥, 소중…….”

“그냥, 소중.”

반복해서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들고 있는 죽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그릇이 무려 세 개나 되었다. 저걸 다시없을 귀한 진미처럼 애지중지했던 것을 보면 저건 저들의 관점에서는 꽤 귀한 식량이리라.

죽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꽤 고소했다. 혀 아래 침이 고였다.

죽의 맛과 냄새를 기억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졌다.

진짜 인간이 먹어도 저걸 맛있게 여길까?

돌연 의심이 들었다. 요한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인간이야.’

그녀는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일꾼개미들을 차갑게 외면했다.

“그러든 말든.”

“…….”

“나랑은 관계없어.”

눈을 크게 뜬 일꾼개미들이 낙담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죽 그릇을 조심스럽게 발치에 내려놓는다.

“공주, 배고프면, 먹어.”

가슴이 철렁했다. 어째서 계속 걱정하는 척을 하는 거야.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딴 거 안 먹어.”

“하, 하지만 흰개미가…….”

흰개미의 언급에 두 눈을 매섭게 떴다. 찔끔 놀란 일꾼개미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말대로 굶주린 몸은 허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죽 그릇에서 몸을 돌렸다. 흰개미를 생각하면 저걸 먹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드나, 저들이 보는 가운데 들이켜고 싶진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자기들을 완전히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착각하는 게 싫어.’

어째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지. 이 상황이 거북살스러워 속이 울렁거린다.

그녀의 짧은 인생에 호의를 가지고 손을 내밀어 준 존재는 한 손에 꼽았다. 호의란 건 설탕 부스러기처럼 귀하고 다디단 거였다.

호의를 받아 본 적도 드문데 거절한 적은 더더욱 없다. 요한나는 개미들이 계속 착한 척을 할까 걱정스러웠다.

‘검은 개미처럼 교활하게 계략을 꾸미는 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일꾼개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외면에 토굴 방을 정리하는 시늉을 하던 일꾼개미들이 쉼 없이 곁눈질했다.

덩그러니 놓인 죽 그릇과 미동 없는 요한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츠릇츠릇.

갑각 표피가 불안하게 진동한다.

불편한 마음으로 꾸역꾸역 벽을 바라보고 있던 요한나는 어느 순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의 강인한 육신은 호시탐탐 잠식을 노리는 우울감에 맞서기 위해 달콤한 잠을 불러들였다. 회복을 향한 수면 욕구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고 끌어 내렸다.

그 순간.

“흰개미!”

비명 같은 외침에 눈이 번쩍 뜨였다. 홱 고개를 돌리자 일꾼개미 셋이 각각 땅에, 입구 양옆에 붙은 채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개중 하나가 요한나를 돌아보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공주!”

저 멍청한 게.

요한나는 이를 갈았다. 흰개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빤한 시선을 느낀 그녀는 혀를 차며 다시 일꾼개미를 욕했다.

어느새 그녀는 땅에 누워 있었는데, 그대로 눈만 감으면 자는 척을 할 수도 있었던 것을, 눈치 없는 이개미 때문에 글렀다.

흰개미가 소리 없는 한 걸음을 옮겼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뒤로 물러나다가 바스락, 낙엽이 부스러지는 듯한 소리에 멈칫했다.

흰개미가 보고 있다는 것도 잊고 뒤를 돌아보았다. 등에서부터 뻗어 나온 날개가 바닥을 향해 늘어져 있었다.

요한나의 눈빛이 멍해졌다.

어째서 아까는 몰랐던 걸까? 혼례가 끝나면 필요 없어진 날개가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라는 말을 미리 들었던 터라 당연히 이미 떨어지고 없어진 줄 알았다.

날개가 붙어 있는 걸 안 순간 구겨진 종이가 펴지듯 미묘한 감정이 흘러넘쳤다.

나는 인간이야. 그리 되뇌어도 날개라는, 명백한 인외의 흔적에 혐오감이 아닌 반가움을 느낀다. 모순이다. 요한나는 애써 그 아이러니한 양가감정에서 눈을 돌렸다.

복잡한 감정을 갖고 날개를 멍하니 바라보다 곧 날개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끝이 갈라지고 너덜너덜해진 날개는 흙바닥을 잔뜩 구른 낙엽처럼 너저분했고, 건조했으며 메말랐다. 사방으로 곧게 뻗은 시맥은 물기가 마른 잉크처럼 그 색이 선명하지 못했다.

막 비행했을 당시의 얇지만 생생했던 날개를 기억하는 요한나는 안타까움에 손을 들어 날개를 매만졌다. 건조한 날개막이 부스럭거렸다.

“그거, 뜯어, 줄까?”

흠칫.

흰개미를 흘끗했다. 하얀 얼굴이 금방이라도 성큼성큼 다가와 날개를 뜯어 버릴 것 같았다. 서둘러 입을 열었다가 너무 다급해 보이는 듯해 한발 쉬고 목소리를 억눌렀다.

“……필요 없어.”

흰개미가 제멋대로 행동하면 어떡하지?

어린 짐승을 지키는 맹수처럼 어깨가 바짝 솟았다.

다행히 날개의 유무 따위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지 흰개미는 무심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럼에도 요한나는 그의 움직임을 경계하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이틀간의 교미를 끝내자 제 역할을 했다는 듯 축 처진 날개. 가슴에서부터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마음 깊은 곳의 피로까지는 풀지 못하여 분노나 증오 따위의 격렬한 감정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온몸의 혈관을 타고 퍼지는 독처럼 서글픔과 비탄이 느리게 가슴과 목과 얼굴에 스몄다.

“공주, 슬픔. 나도, 슬퍼.”

일꾼개미 중 제일 잦게 죽을 대령했던 일개미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흰개미는 저를 향해 등을 보이는 요한나를 응시했다.

혼롓날 이후 내내 잠들어 있던 그녀는 따로 옷을 챙겨 입지 않았기 때문에 나신이었다.

척추를 따라 단단히 자리 잡은 기립근은 건강해 보였지만 토굴에서 지내는 동안 근육이 빠지며 완만해진 선은 부드러운 굴곡을 드러냈다.

근육과 함께 살이 내린 탓에 뼈가 드러난 어깨의 견갑골이 뾰족한 선을 그리며 솟아 있었고, 그 옆에 뿌리를 내린 날개가 등허리를 가린 채 내려왔다.

반투명한 날개는 마치 휘장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는데, 언뜻 드러난 실루엣은 여인의 여린 선을 드러내어 평소 그녀의 날카롭고 탐색하는 시선을 느낄 수 없게 했다.

탈출을 향한 열망과 바득바득 치켜세우는 의지로 인해 늘 갓 태어난 짐승처럼 생기가 가득했던 그녀였다. 둥글게 말린 등은 삽시간에 늙어 버린 맹수를 연상케 했다.

“공주가, 이상해.”

흰개미의 집요한 눈이 그녀의 등에 못 박혔다. 요한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여전히 뒤돈 상태로 웅크리고 있었다.

흰개미의 미간에 또다시 주름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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