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공주는, 불량품이야. 성격, 기질, 다 문제.”
탁. 고기를 다 발라낸 뼈다귀가 바닥에 떨어졌다.
기어 다니며 내부를 청소하던 일꾼 하나가 잽싸게 뼈다귀를 수거했다.
검은 개미는 식량 저장고에서 꺼낸 사슴 다리 하나를 입 안으로 가져가다가 흰개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날개를 백돌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이 토굴은 자갈이나 바위 따위로 마감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식토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래서 공기 중에서도 수분이 느껴져 다른 토굴에 비해 덜 건조한 편이다.
온기를 유지하기엔 용이해도 반투명한 얇은 재질의 날개에는 좋지 않은 환경이다.
관리하지 않으면 눅눅해지고 구겨질 수 있어 장군이라면 모두 주기적으로 제 날개를 관리했다.
그중에서도 흰개미는 유독 꼼꼼하고 섬세했다. 겨울에도 토굴 밖으로 기어 나가 비행을 즐기는 이상한 취향 때문인지 일족의 번영을 제외한 다른 건 무관심한 주제에 날개만은 아꼈다.
그 덕에 식량을 얻기 어려운 추위에도 싱싱한 고기를 얻을 수 있으니 장군들은 그의 취향에 한두 마디 얹기만 할 뿐 만류하지는 않았다.
저장 고기는 육질이 퍽퍽해서 맛이 없는 반면 갓 사냥한 고기는 핏물이 뚝뚝 흐르는 맛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검은 개미는 흰개미가 사냥해 온 사슴 고기를 인심 썼다는 듯 내밀었다.
“먹을, 테냐?”
흰개미는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따로 방이 없어 여기저기 몸 닿는 대로 자는 일꾼들과 달리 장군은 개인 방이 있는데, 흰개미는 그중에서 가장 큰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온기를 품은 백돌로 날개를 말리는 흰개미의 뒤로 꽃과 풀 따위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져 있었다.
흰개미의 처소에서 향긋하고 쌉싸름한 풀 냄새가 나는 이유였다. 검은 개미가 푸릇푸릇한 식물을 보고 딱딱한 미간을 구겼다.
“흥. 저딴 걸 먹고, 어떻게, 힘을, 내는지.”
“…….”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흰개미를 아니꼽게 보다가 얼굴을 굳힌다.
“봄이, 되면, 공주는 산란하겠지. 일꾼개미와 수개미를, 얻고 나면, 석굴, 개미를 친다.”
목소리가 한층 음산해진다.
“석굴, 개미의 공주를 새로운, 일족의, 공주로 삼는다.”
흰개미는 다른 백돌을 다른 날개에 가져다 댔다. 붉은 눈동자가 날개의 결을 훑고 있었다.
섬세한 외모와 날카로운 턱 선이 토굴의 다른 개미와 비슷한 데가 없었다. 창백한 피부는 같았으나 주로 관자놀이나 목덜미, 손등에 있는 푸르스름한 갑각 피부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돌연변이인 그를, 검은 개미는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다소의 시간이 지나고, 흰개미의 무거운 입술이 열렸다.
“개인적인, 감정은 방해된다.”
“뭐?”
“현 공주에, 대한, 네 감정은, 불필요해. 네 ‘공주’는 이미, 죽었어.”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 흰개미가 검은 개미를 응시했다. 홍옥처럼 투명하게 붉은 눈에서 피 한 방울이 똑 떨어지는 것 같았다.
고개를 흔들어 환상을 떨친 검은 개미의 턱이 단단히 불거졌다.
씩씩거리는 폼이 당장 흰개미에게 덤벼들 것 같았지만 그도 이미 최고령 장군이었다.
한때 일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를 가슴에 품고 사모했던 일개 어린 일꾼개미가 아닌 것이다. 잠시 침묵한 그가 가라앉은 쇳소리로 대꾸했다.
“내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
“아는가?”
검은 개미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인간, 사냥꾼은, 교활해.”
불길함이 넘실거리는 경고에 비로소 흰개미는 완전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검은 개미의 새카만 눈알에 번지는 음울함을 직시했다. 사냥꾼의 간계에 빠져 공주를 잃고 그 추격마저도 실패했던 과거가 있는 검은 개미였다.
흰개미는 그가 옛 감정에 사로잡혀 말하는 건 아닌지 유심히 살폈다. 눈의 초점이 뚜렷한 것을 보면 충분히 이성적인 듯했다.
“잡종, 역시, 교활한 사냥꾼. 일족에, 피해를 입힐 게, 분명하다.”
“…….”
“그럴 거라는, 예감이, 들어. 불길한 암컷이다.”
흰개미는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다. 검은 개미는 새로운 공주를 경계하며 달갑잖게 여기지만 그녀는 건강한 암컷일 뿐이었다.
역시 검은 개미는 사냥꾼에게 당했던 기억을 지금의 공주에게 투영하고 있었다. 비효율적이고 멍청한 짓이었다.
흰개미는 검은 개미를 자신의 굴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사실 그는 동족들을 상대하는 게 즐겁지 않았다. 특히 이 덩치 큰 동족은 말이다. 그래도 시끄럽게 떠들도록 내버려 두는 건 검은 개미가 일족에 필요한 개체이기 때문이다.
흰개미는 불현듯 무료함을 느꼈다.
그는 본능에 새겨진 대로 움직인다. 일족을 위해 행동하고, 원하고, 말한다. 달리 하고 싶은 게 없었다.
돌연변이라며 괄시해 놓고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게 드러나자 태도를 바꾼 여왕이 죽었을 때도, 그에게 교미를 조르던 공주들이 모조리 스러졌을 때도 슬프지 않았다.
단지 이대로 가다간 멸족이 틀림없기에 곤란하다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러던 중에 강한 공주가 될 개체를 운 좋게 찾았다.
인간의 피가 섞인 탓에 검은 개미와 그에게 동조한 몇몇 동족들이 불만과 우려를 표하긴 했지만, 그가 판단하기에 혼혈 공주는 일족을 위한 최선의 수였다.
인간과의 혼혈이란 점이 오히려 일족을 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같은 피를 이은 여왕이 동족과 교미하여 알을 보는 건 결국 일족을 약하게 만들 테니. 피가 섞이지 않은 새로운 공주는 그런 점에서 적격이었다.
검은 개미의 경고대로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닌 게 약간의 난점이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동족이 바글거리는 이 토굴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자신도 동족이 되는 수밖에 없을 테니. 그 정도의 생각을 할 머리는 있다고 흰개미는 판단했다.
인간은 상상도 하지 못할 무기를 만들어 내고 지능이 뛰어나서, 모이면 무서운 종족이다. 그래도 그 피육이 부드럽고 개개인의 의지는 연약하여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새로운 공주는 고작해야 인간의 피가 섞인 암컷 아닌가.
보통 무리의 여왕은 장군만큼이나 강한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이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혼혈 공주에게 그런 것까지 바랄 수는 없겠지…….’
검은 개미의 의견을 기억해 둘 필요는 있으리라.
흰개미는 그렇게 판단하고 생각을 마무리했다.
눈에 젖었던 날개가 완전히 마른다면 밖으로 나가 새롭게 부화하는 유충들을 위한 싱싱한 사냥감을 잡아 올 계획이었다.
전대 여왕이 낳은 마지막 알들이 부화하고 있었다. 그 수가 고작 삼십 남짓이라는 건 일족의 번영을 위하는 그로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사삭삭! 사사사삭!
“흰 개, 흰개미! 큰일!”
숨이 넘어가게 들어온 일꾼개미가 비명을 질러 댔다. 카랑카랑 요란하게 울려 대는 소리에 검은 개미가 못마땅하게 으르렁거렸다.
짐승의 소리에 찔끔 놀란 일꾼개미가 큰 눈을 파르르 떨며 흰개미를 바라보았다.
검은 개미 때문에 억지로 흥분이 가라앉혀졌으나 팔다리는 불안하게 덜덜 떨렸다.
흰개미는 백돌을 새하얀 모피 안에 집어넣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고, 공주. 큰일!”
일꾼개미가 더 설명하기도 전에 흰개미와 검은 개미는 움직였다.
흰개미의 방으로부터 공주의 방까지는 꽤 길고 복잡한 통로가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지만 후각이 발달한 그들에게 이런 어둠은 문제 되지 않았다.
흰개미는 금방 공주의 토굴 방에 도착했다. 은은한 빛을 품은 토굴 방 안으로 한 걸음을 들이는 순간 강렬하게 끼쳐 오는 비릿한 체액 냄새.
흰개미는 걸음을 멈추었다.
* * *
손맛이라는 게 있다. 여염집 아낙의 계량하지 않고도 기가 막힌 맛을 내는 솜씨, 낚시꾼이 던진 미끼를 물고기가 물었을 때 가느다란 낚싯줄을 타고 느껴지는 진동, 그리고 사냥꾼이 휘두른 날붙이가 사냥감의 급소를 정확히 찔러 들어가는 감각.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손맛에 요한나는 흥분에 찬 손가락을 가늘게 떨었다.
그륵, 그르륵.
갈라진 목젖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일꾼개미 하나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방금까지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헐떡이던 놈은 개미치고 큰 키의 수개미다.
충인의 피는 인간처럼 붉어도 그 냄새는 짐승과 더 비슷했다. 비릿한 혈향에 짐승 특유의 노린내가 섞여 있었다. 그 사이로 톡 쏘는 듯한 신맛이 났다.
외골격이 뚫린 일꾼의 개미산 샘이 터진 탓이었지만 요한나는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인간과 다른 체취에 역겨움만 느꼈다.
캬아아아아악!
척척하고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던 일꾼개미들이 그녀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며 물러섰다.
요한나는 손에 든 돌덩이를 꽉 쥐었다. 돌덩이의 뾰족한 부분이 손가락과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 통증이 더 강하게 느껴지도록 손에 힘을 가했다.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토굴에서 먹고 자고 하며 날카롭게 갈았던 돌덩이는 이 순간 그 유일한 가치를 최고조로 발휘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작 이거 하나 겨우 만들어 냈다고 자조했으나 지금은 잃어버리면 안 되는 보석처럼 볼품없는 돌덩이를 소중하게 쥐었다.
온몸에서 나는 개미 냄새가 역겨워서 속이 울렁거렸다.
이들이 자신에게 바란 게 이런 냄새라면, 질리도록 나고 있으니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개미의 페로몬에 절어진 암컷은 공주가 되는 걸까?
저들의 토사물로, 정액으로, 체액으로 범벅된 이 몸에서 과연 인간의 냄새가 나기는 날까?
그녀는 이미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더 세게 씹었다.
“그래. 얼마든지 해 봐……. 난 가능한 한 많이 너희들 목을 딸 테니까.”
잔뜩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요한나가 토굴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흰개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세차게 뛰었다.
스윽.
뒤이어 검은 개미가 들어와 암흑처럼 새카만 눈으로 토굴 방 내부를 훑어보았다. 붉은빛이 도는 황토색 바닥은 흥건한 체액과 물기에 젖어 거의 밤색으로 보였다.
그 위에 코너에 몰린 요한나가 언제든지 튀어 나갈 것처럼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뾰족한 돌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검은 개미의 시선이 붉게 물든 돌 끝에 닿았다.
저런 걸로 개미의 단단한 피부를 뚫고 상해를 입히려면 어지간한 힘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공주는 지금 굶주린 상태가 아니던가.
의아한 검은 개미는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헐벗은 상태인 그녀의 팔뚝을 응시했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팔 근육이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발휘할 수 있는 최대치의 근력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의미였다. 무리했다는 뜻이었고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도 돌 끝은 정확하게 다음 타깃을 향해 있었다.
달려들다간 먼저 간 놈의 꼴이 된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한 일꾼개미들은 눈치만 볼 뿐 달려들지 않았다.
검은 개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가슴이 푹 꺼진 일꾼개미 하나가 절명한 채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서는 잘린 목을 움켜쥔 키 큰 일꾼개미가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고통에 허우적대던 일꾼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가 곧 완전히 멈추었다.
공주가 동족을 죽였다.
검은 개미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비릿한 냄새가 감도는 공기 중에 파고든 공격적인 페로몬이 심장을 자극했다. 혈류의 흐름이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하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집단생활을 하는 개미는 극히 사회적인 생명체며 그렇기에 어떤 무리보다도 위험한 성격을 지녔다. 그들이 위험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전투 페로몬이다.
일꾼개미가 죽어 가며 뿜어냈을 전투 페로몬에 고양되는 스스로를 느끼며 검은 개미는 당혹스러운 심정이었다.
전투 페로몬은 집단의 지위에 따라 그 강도가 다르다. 최하층 계급인 일꾼개미의 페로몬은 같은 일꾼들에게 특화되어 있었다. 장군이라고 아예 영향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폭력적인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무심코 흰개미를 바라본 검은 개미는 흠칫했다. 흰개미의 불그스름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워낙 표정 없는 얼굴인지라 그 미묘한 변화가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흰개미의 붉디붉은 눈이 요한나에게 못 박혔다.
“전투, 페로몬.”
“전투…… 페로몬?”
“공주의, 페로몬.”
검은 개미가 화들짝 놀라 요한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돌의 뾰족한 부분으로 주춤거리는 일꾼개미들을 위협하며 보랏빛이 도는 까만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서늘함이 감도는 시선이 파랗게 날이 서 있는 칼날처럼 매서웠다.
만약 그녀의 손에 든 것이 한낱 돌덩이가 아니라 날붙이였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검은 개미는 어깨가 딱딱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사냥꾼의 딸.
검은 산맥을 제집처럼 나다니는 맹수들의 주적이자 또 다른 맹수. 사냥꾼의 피가 그녀에게 흐르고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사냥꾼에게 소중한 공주를 잃었던 경험이 있는 그는 곧장 경계심을 날카롭게 세웠다.
아무리 지금 공주가 필요한 입장이라지만 ‘저런 것’을 이곳에 둘 수는 없다.
너무나도 위험했다.
분풀이 삼아 그녀를 발밑에 깔아 유린했던 때가 까마득하다. 지금의 그녀는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연약한 사냥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어떻게든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흰개미의 생각은 달랐다.
“강해.”
“…….”
“저건, 강하다, 검은 개미.”
“잠깐, 흰개미.”
“강력한, 공주야.”
나른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귓전을 적신다. 여전히 차갑고 무심하지만 어쩐지 사뭇 흡족해하는 듯해 검은 개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흰개미는 워낙 타인에 무관심하고 삶이 단조로워 그의 행동 양식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일족의 번영을 위해 행동하고 판단하는 그의 패턴을 비춰 보았을 때 저 공주를 일족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거다.
“다른 때였으면, 네, 판단을 존중한다. 하지만, 저걸 봐라. 위험해!”
흰개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검은 개미는 답답했다.
모르는 건가? 공주의 적개심이 다른 누구도 아닌 동족을 향해 있는 것을.
흰개미는 공주의 효용성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 두고 있었다. 정신이나 의식 따위는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는 듯.
검은 개미는 자신이 흰개미처럼 머리를 잘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의 의견을 수용하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공주는 일족에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위험하다, 흰개미.”
“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 잡종 공주를 위험하다고 생각하냐는 시선이었다.
멈칫. 검은 개미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과민 반응 하고 있는 건가?’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득시글거리던 불길함이 싹 가셨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에 멍해진다.
‘흰개미의 말대로 공주에게 사냥꾼을 투영했던 것인가.’
젊었을 적 사냥꾼은 감히 충인의 공주를 훔쳐 낼 만큼 대범하고 간교했으며 또한 강했다.
하나 그 어떤 강인한 생명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는 법.
다른 개미들이 범인을 잡는 시도를 그만두었을 때도 긴 시간 홀로 추적을 감행했던 검은 개미가 발견한 건 늙어 버린 사냥꾼이었다. 어렵지 않게 처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사냥꾼은 검은 개미의 피육을 벴다. 쇠약해진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냥꾼이다. 검은 개미는 결코 사냥꾼을 경시하지 않았다.
검은 개미가 입을 다물자 잠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파슷, 스슷.
일꾼개미는 갑각 표피를 떨어 대며 요한나를 불안하게 흘끗거렸다.
요한나는 불필요하게 힘을 소모하는 몸에 긴장을 풀고 느슨하게 만들었지만 언제든 대응할 수 있는 자세로 일꾼들과 검은 개미, 흰개미를 차례로 응시했다.
체액이 줄줄 흘러내리는 다리와 하얗게 질린 입술, 하나 번뜩이는 검은 눈은 불안정했으며 극도로 위험해 보였다.
그녀는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정신을 차린 검은 개미가 말했다.
“페로몬 주입은, 하루도, 늦출 수, 없다.”
“…….”
“교미가 저 지경이라면, 죽이라도, 강제로, 먹이는 방법, 밖에.”
“…….”
“하지만, 쉽지 않겠군.”
이대로 계속 교미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일꾼개미 두 명을 처리하긴 했지만 그녀는 이미 한계였다. 한정 없이 일꾼을 해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독기에 가득 차 있었고 힘이 허락하는 한은 저를 유린한 자들을 처단하려 들 거다.
검은 개미는 그걸 묵과할 생각이 없었다.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군락에는 일꾼 하나하나가 귀중한 자원이다.
몸을 결박한 채 교미하거나 힘을 써서 죽을 급여하거나. 둘 다 일꾼개미들이 적잖이 고생할 터. 어쩔 거냐. 검은 개미가 흰개미를 응시했다.
흰개미는 초점이 살짝 나간 요한나의 까만 눈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잠시 고민하는 듯 침묵하던 그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좋아.”
살짝 쉬어 있지만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하지.”
검은 개미의 눈이 커졌다. 자질구레한 일들은 일꾼에게 맡길 뿐, 귀찮은 임무를 떠맡지 않는 흰개미였다. 믿을 수 없다는 눈에 흰개미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내가…… 공주를, 맡는다.”
* * *
이 방이 이렇게 좁았나?
네 명이나 되는 일꾼들이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며 부산을 떨던 때에도 널찍하단 생각을 했던 토굴 방이 숨도 못 쉬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요한나는 산송장처럼 누운 채 검게 죽은 눈으로 흰개미를 노려보았다.
눈빛에도 힘이 있다면 진작 불타 없어졌을 것처럼, 조용하지만 강렬하고 따가운 시선에도 흰개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더러워진 몸을 닦을 뿐이었다.
그 하얗고 차분한 얼굴을 보는 요한나는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일꾼개미가 모두 빠져나간 토굴 방엔 흰개미만이 남아 있었는데, 그와 있느니 차라리 일꾼개미 열 명과 있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개미들이 물러나고 혼자 남은 흰개미는 역겨운 냄새가 가득한 토굴 방에 뭘 뿌려 체액 냄새를 풀 향기로 지워 버렸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긴 천을 갖고 돌아왔다. 인간의 물건이 틀림없을 그 천을 물에 적시고 그녀의 몸을 닦았다.
처음 요한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뛸 만큼 놀랐다. 그의 손이 닿은 자리마다 작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으며 가슴 가득히 묵직한 진흙이 차오른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발작이 일어난 양손을 휘젓고 손톱으로 흰개미의 손등을 긁어 댔지만 일말의 타격도 입힐 수 없었다.
흰개미는 검은 개미만큼이나 단단하고 질긴 피부를 갖고 있었다. 푸른 갑각 표피는 없었지만, 온몸이 매끄러운 껍질로 덮인 듯 손톱은 박히지 못하고 미끄러졌으며 주먹으로 친 곳은 딴딴한 돌덩이를 치는 느낌이었다.
말도 하지 못하고 기를 쓰며 흰개미를 떼어 내려던 요한나는 얼마 안 있어 지쳐 버렸다.
일부러 힘이 빠질 때까지 내버려 두는 건가? 다시 그 미친 개미 떼를 들여보내려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의심이 들었을 때는 등줄기를 타고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았다.
그 즉시 무의미한 움직임을 멈추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대응할 힘을 비축해야 했다.
요한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흰개미의 움직임만 예의 주시했다.
별안간 흰개미가 그녀의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요한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가락을 움찔했다. 날카롭게 갈아 낸 돌덩이는 아까의 일로 뺏겨 버려서 손에 쥘 수 있는 건 없었지만 안 되면 주먹질이라도 할 참이었다. 이놈들의 관절이 약하단 건 알았으니까.
그러나 흰개미는 매우 섬세한 손길로 그녀의 겨드랑이와 팔꿈치 안쪽 오금을 부드럽게 닦아 내기만 했다.
그의 체온은 차가웠지만 움직임은 기민하고 절도가 있었다. 허드렛일이라면 허드렛일인데도 일꾼개미보다 유려했다.
서늘한 얼굴은 마치 얼음으로 만든 조각이라든가 인공 조형물을 보는 것처럼 생동감이 없었다.
공격 의사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요한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일을 벌여 놓고 외면하는 흰개미의 뒷모습이 뇌리에 너무나도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첫 번째로 검은 개미의 행위를 방관했고 두 번째로 다시 발목이 꺾였을 때를 방관했고 세 번째로 개미 떼가 그녀를 덮칠 때 방관했다.
그는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손을 올린 적은 없다. 하나 언제든지 누군가를 시켜 그녀를 망가뜨릴 수 있는 자였다.
이제까지 직접적으로 저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도움을 청하는 마음을 품다니? 요한나는 어리석었던 순간을 통렬히 비웃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하반신 아래는 오히려 고통이 덜했다. 통각이 반쯤 마비된 거다.
태연하고도 멀쩡한 흰개미의 낯짝을 보자 요한나는 가슴이 얼얼했다. 산 채로 속이 태워지는 듯했다. 그냥…… 그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고 이대로 누워 있는 처지가 원통했다.
아까의 일은 흐릿했다.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듯했다.
차라리 기절하면 나았을까. 그녀의 정신력과 체력은 지나치게 강인해서, 그녀는 지난한 시간과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제 몸에 체액을 뿌리는 일꾼개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젠가 가능하다면 이 손으로 네 목을 조르리라. 연거푸 반복하며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가능한 한 선명하게 기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 몸 위에 올라탄 개미의 수가 열을 넘어가고 더는 세는 것도 어지러워졌을 때는 머릿속이 여러 얼굴로 뒤죽박죽이었다.
어떤 때는 그 얼굴이 하나로 합쳐져 눈이 네 개, 코가 두 개가 되어 괴물의 형상을 띠었다. 분명하게 기억하는 건 그녀를 이 지옥에 몰아넣은 자들의 얼굴이었다.
요한나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강압과 굴욕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진창 같은 어둠 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그녀를 건져 올린 건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바렌타.
그 얼굴이 생각과 감정을 닫았던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정신이 깨어난 요한나는 덜컥 두려워졌다.
만약 바렌타가 알면 어떡하지?
안 그래도 산의 삿된 것들이랑 붙어먹었을 거라며 수군거리는 마을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것도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보다 더 그녀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바렌타의 반응이었다.
충인을 경멸하는 바렌타라면……. 상냥한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는 상상을 하자 숨이 턱 막혔다.
마을에는 모두가 알지만 또 모두가 쉬쉬하는 붉은 지붕에 사는 여자가 있다.
도시의 여자들이나 입고 다닐 것처럼 화려하지만 소매가 허름한 드레스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는 옛날 몰락한 기사 가문의 도망자라고 했다.
가문이 반란에 휘말렸다는 둥 빚쟁이에 쫓겼다는 둥 떠도는 소문은 많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그녀는 마을 사람이되 또한 이방인이었다.
요한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처럼 완전한 이방인도 아닌데, 이웃을 제 사람처럼 여기는 마을 사람들이 본체만체하는 게 퍽 이질적으로 보였다.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빵이나 채소 따위를 거리낌 없이 사는 것도 신기했다.
비밀을 알게 된 건 며칠 후의 일이었다.
낮에는 그녀를 외면하던 사람들이 밤에는 붉은 지붕을 찾았다. 우연히 밤에 근처를 들렀던 요한나는 요요한 밤을 흩뜨리는 흐느끼는 소리에 혼비백산했다.
이 얘기에 바렌타는 쓰게 웃으면서도 차갑게 말했다.
‘불쌍한 사람이지.’
자못 동정하는 어투였다. 그러나 요한나는 그가 붉은 지붕의 여자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를 향한 것처럼, 자신을 그렇게 보는 바렌타의 눈길을 생각하는 순간 바닥과 천장이 뒤집히고 가슴에서 기이한 열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이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겠지.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어 헐떡이며 몸을 떨던 일꾼개미의 가슴을 뚫었고, 뾰족한 샅을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와 배에 비벼 대던 일꾼개미의 목젖을 갈랐다.
조금만 더……. 요한나는 살아서 움직이는 충인을 보며 느꼈던 안타까움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녀에게 더 강한 힘이 허락됐다면 그곳에 있던 모두를 죽여 없애고 말았을 것이다.
‘가장 먼저 죽이는 건 이자가 되었겠지.’
요한나는 스산한 눈으로 흰개미를 응시했다.
그는 그녀가 무슨 살심을 품었든 상관없이 하얗고 차갑기만 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와 빗장뼈를 천으로 문댔다.
차가운 손가락이 풍만한 가슴을 스쳤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 냈다. 흰개미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곧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는지 한 손으로 그녀의 두 손목을 붙들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몸을 닦아 냈다.
이미 여러 번 이렇게 결박된 적 있는 요한나는 몇 차례 몸을 불편하게 뒤틀고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사지에 힘을 뺐다.
그녀의 위로 얼굴을 드리운 흰개미의 갸름한 뺨으로 백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광택이 없어 건조해 보이는 하얀 머리칼이 그의 창백한 얼굴과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독화는 요사스러운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끌지만 손을 대는 것조차도 위험하다. 흰개미의 머리카락은 그렇게 요사스러웠다.
요한나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앞으로 흰색이 싫어질 것 같았다.
* * *
요한나는 오래지 않아 자신을 담당하겠다는 흰개미의 말이 꽤 진심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추 하루가 꼬박 지난 것 같은데 그때까지도 흰개미는 그녀의 토굴 방에 머물렀다.
나가지 않는 그가 몹시도 불편했고, 그런 내색도 숨기지 않았지만 흰개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그녀의 의중을 깨닫지도 못한 눈치였다. 나가라고 한다면 고개를 갸웃하며 ‘왜?’라고 물어볼 것 같다.
요한나는 속만 부글부글 끓였다.
토굴은 태양이 들지 않아 아침과 밤의 구분이 모호했다. 그래서 그녀는 잠이 오고 안 오는 정도로 시간을 구분했다.
그녀의 기준으로 아침 시간에, 흰개미는 어김없이 죽을 건넸다. 토굴 방 밖에서 사삭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싶었더니 일꾼개미가 전해 주고 간 듯했다.
요한나는 꺼림칙한 눈으로 그릇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죽을 쳐다보지도 않자 흰개미는 그릇을 든 채 멀뚱히 서 있었다.
흰개미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내심 불안하여 그를 곁눈질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짐짓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든다.
요한나는 깜짝 놀라 손을 꽉 쥐었다. 흰개미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전에 검은 개미가 한 것처럼 소리 없는 휘파람을 분다.
검은 개미가 그렇게 함으로써 일어났던 일을 떠올린 요한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내 입구를 통과한 일꾼개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면면이 익숙해 요한나는 인상을 팍 썼다. 써늘한 시선에 움찔한 네 명의 일꾼개미들이 발을 달달 떨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요한나는 무슨 짓이냐는 시선을 흰개미에게 보냈다. 입술이 고집스럽게 꾹 맞물려 있었다. 아무리 용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흰개미는 검은 개미와는 또 달라서, 말을 하다 보면 낭떠러지를 향해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제가 다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흰개미는 딱 한 마디 했다.
“교미.”
요한나는 즉각 몸을 반쯤 일으켜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셋째 손가락의 마디를 살짝 튀어나오게 해서 주먹을 쥐자 일꾼개미들의 큰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왜소한 몸집에 퍽 안쓰러운 표정이었지만 요한나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검은 개미의 명령을 받은 일꾼개미들이 저를 겁탈하기 위해 몰려들 때 분명 저들도 손을 뻗었다.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 물러서기는 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면 다른 일꾼개미들처럼 달려들어 헉헉거렸을 것이다.
‘그렇게 됐더라면 가장 먼저 죽였겠지만.’
흰개미가 이 토굴 방에 눌러앉아 있지만 않았더라면 저 괘씸한 일꾼개미들을 가만히 뒀을지 모를 일이었다.
“희, 흰개미. 모, 못, 나는, 못…….”
일꾼개미들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흰개미에게 애원했다. 흰개미도 요한나의 얼굴을 보며 문제를 깨달은 듯 눈을 깜박거렸다.
요한나를 제압하고 일꾼개미들로 교미시키려는 계획이었겠지만 맹수가 털을 곤두세우듯 주먹을 곧추세우는 요한나와 벌벌 떠는 일꾼개미들은 접붙이기가 힘들어 보였다.
흰개미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일꾼개미들은 용서라도 받은 듯한 얼굴로 기뻐하며 헐레벌떡 토굴 방을 빠져나갔다. 다시 둘만 남았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요한나는 일꾼개미들이 빠져나간 것에 안도하며 자리에 살짝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한계를 벗어난 힘을 내느라 근육 경련이 일어난 팔은 수 시간 동안이나 저렸다. 그래도 흰개미가 막무가내로 굴지 않는 걸 보니 그렇게 한 보람이 있다.
요한나는 흰개미가 자신에게 질려 태도를 신중하게 바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새 바싹 다가온 그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 당겼을 때는 두 눈에 물음표를 띄웠다.
뒤로 넘어가는 요한나의 등 뒤로 길고 단단한 팔이 쑥 들어왔다. 덕분에 바닥에 등을 찧는 것을 면한 요한나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곧장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붙든 발목은 아무리 흔들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뭐……!”
공포에 질려 외마디 악에 받친 비명을 지르자 그녀의 발목을 하나씩 붙잡고 위로 올린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교미.”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탈색되었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흰개미는 발목을 강하게 쥐는 것으로 그녀의 반격을 간단히 무위로 돌렸다.
다리가 가위처럼 벌어지고 위로 올라갔다. 찢어진 옷 대신 새롭게 입은 옷은 마을에서는 옷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얇은 천 쪼가리로 당연히 속옷은 없었다. 치맛자락이 쭉 올라가며 다리 사이가 훤히 드러났다.
두렵고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이렇게까지 살아남아야 하나? 이런 괴물들에게 어디까지 당해야 해?
절망에 잠겨 들려는 때 구명조끼처럼 바렌타의 이름을 붙잡았다.
살아야 했다. 살아서 바렌타를 만날 것이다.
그날, 떡갈나무 아래서 너를 보기를 간절히 소망했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내내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말을 하고 싶다.
그가 자신을 차갑게 대한다면 소용없는 일이 되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을 테니.
아스라하게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은 요한나는 눈을 형형하게 뜨고 흰개미의 행동에 집중했다.
일꾼개미 수십 명이 달려왔을 때도 악착같이 견뎌 내며 물리쳤었다.
흰개미가 아무리 강하다지만 고작 하나. 무기가 없으니 기회를 봐서 눈을 터뜨린다. 그가 분노하든 어쩌든 뒷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그녀는 존재 가치가 명확한 공주가 아닌가.
죽이지는 않을 터.
필사적인 각오를 다진 것과 달리 흰개미가 너무 잠잠했다. 요한나는 뒤늦게 그가 제 다리 사이를 빤히 응시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갑자기 다리 사이의 머리통이 갸웃거렸다.
“이상해…….”
뭐가? 무심코 대꾸할 뻔한 요한나는 숨이 빳빳해졌다.
흰개미는 그녀의 발목을 높게 쳐들고 드러난 다리 사이에 고개를 들이민 채 그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가 일전의 일꾼개미들처럼 정신없이 굴 거라 생각했던지라, 상상도 하지 못한 상황에 눈앞이 붉게 변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수치심에 머릿속이 아찔했다.
“이상하게, 생겼군.”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전을 빵 때렸다. 서늘한 숨결이 허벅지 안쪽에 닿자 오한이 든 것처럼 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구멍은, 어디에 있는 거지?”
차가운 손가락이 그곳에 닿았다. 구멍을 덮고 있는 꽃잎 같은 살점을 만지작거렸다.
“말랑말랑, 하다. 이상하게, 부드, 러워. 뜨, 겁다? 따뜻해?”
“흐…….”
“아, 구멍, 여기에 있네.”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요한나는 눈물이 반쯤 차올랐다. 누가 저 흰개미를 떼어 준다면 무엇이든 줄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자, 잠깐만. 알았, 알았어. 먹을게. 먹으면 되잖아, 먹으면, 이 개새끼야!”
말하는 중간에 울분이 북받친 요한나는 끝에 가서는 악을 지르듯 소리쳤다. 다리 사이에서 흰개미의 하얀 머리통이 쑥 올라왔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하지 못한 그가 다시 다리 사이에 고개를 넣기 전에 요한나는 다급히 말했다.
“너희의 그, 죽, 먹는다고. 먹으면 안 이래도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저리 비켜!”
“아…….”
흰개미가 의미가 불분명한 소리를 토해 냈다. 약간 아쉬운 듯 빨간 눈으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힐끗한다. 소름이 돋은 요한나는 안간힘을 쓰며 다리를 모았다.
스읏, 스슷.
곱게 접은 날개를 떨며 흰개미가 손에서 힘을 뺐다. 자유로워진 다리를 아래로 내리고 치맛자락을 쥐어 필사적으로 덮어 내린 요한나가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흰개미는 다시 증오스러운 무심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럼 지금, 먹어.”
“지금? 어떻게…….”
흰개미가 그녀의 뒷덜미로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과 함께 차가운 손이 목 뒤로 감겨들었다. 요한나는 입술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 눈을 크게 떴다.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미쳤어? 뭐 하는 거야.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읍, 읍!”
입술에 가로막힌 답답한 소리만 연신 울렸다. 그게 성가셨는지 흰개미가 입술을 떼고 명령했다.
“입, 열어.”
“내…… 읏!”
내가 왜, 이 썩은 짐승 가죽도 발라 먹을 버러지 새끼야!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했던 욕을 퍼부으며 눈꼬리를 치켜떴다. 흰개미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것 아닌 손놀림에서 느껴지는 무시할 수 없는 압력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억지로 턱에 힘을 줘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턱이 바스러질 것 같은 공포감에 입이 크게 열렸다.
흰개미는 느긋하게 움직여 벌어진 입술에 혀를 집어넣었다.
그의 혀는 묘하게 서늘했다. 살갗의 체온보다는 나았지만 뜨거운 혀라고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온도였다.
인간의 것처럼 부들부들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고양이 혀처럼 까끌까끌해서 요한나는 따가운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불유쾌한 감각은 아무래도 좋았다.
신경이 바싹 곤두섰다. 이 미친놈은 그릇을 쓰는 것도 귀찮은지 접문을 통해 그걸 쏟아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토사물이 입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니 삐질 식은땀이 흐르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식탁 위에 조리된 고기만 먹는 마을의 부유한 사람들보다는 비위가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충인의 위 속에 있는 걸 태연히 섭취할 정도로 신경이 튼튼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썩기 직전의 누린내 나는 고기를 먹으라면 먹겠다.
어느샌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던 요한나는 문득 느껴지는 청량함에 이질감을 자각했다.
눈을 감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맞대고 있는 흰개미가 그대로 보였다. 그는 빨간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흰개미의 접문은 입맞춤의 형태였지만 전혀 키스 같지 않았다.
바렌타와 수줍게 입을 맞춘 적이 있었던 그녀는 그 차이를 조목조목 따질 수도 있었다.
흰개미는 입 맞추기 편하게 고개를 옆으로 꺾지도 않았다.
바렌타는 부드러운 손으로 그녀의 턱을 쥐고 코끝끼리 살짝 부딪치며 이리저리 얼굴의 방향을 바꾸며 키스를 깊게 했는데 흰개미는 허리와 목이 꼿꼿했고 그녀의 목 뒤를 붙잡은 손길도 반항하는 야생 동물을 제압하는 것처럼 투박했다.
또 바렌타와 키스할 때는 발밑에서부터 짜릿한 전류가 흘렀고 아랫배와 가슴에 뜨거운 열기가 감돌았다면 흰개미와의 접문은 대리석 조각상에 입을 문대는 것 같았다.
가슴은 설렘 대신 긴장과 불안으로 쿵쿵 뛰고 있었고 손끝은 하얗게 질렸다.
‘뭐야, 이게. 이건 키스가 아니잖아.’
흰개미와의 입맞춤이 조각상에 하는 것과 별다를 것 없다는 것을 깨닫자 어깨의 긴장이 풀어졌다.
흰개미의 촘촘한 눈썹이 우아하게 팔랑거렸다. 돌연변이답게 속눈썹마저 눈처럼 흰색이었다.
그의 서늘한 혀가 요한나의 혀끝을 살짝 쳤다. 따뜻한 혀가 부르르 떨자, 그 움직임이 신기했는지 아니면 따뜻한 체온에 흥미가 생겼는지 이리저리 혀를 굴리며 장난을 쳤다. 그러고는 요한나가 짜증을 내기 전에 제 혀로 그녀의 혀를 바닥을 향해 꾹 눌렀다.
아까부터 은은하게 감돌던 청량함이 그녀에게로 넘어왔다. 놀란 요한나가 혀를 꿈틀하자 흰개미가 혀의 널찍한 면으로 그녀의 혀를 전체적으로 눌러 버렸다.
반항 자체를 차단하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입 속의 혀마저도 어찌나 굳건한지 그녀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혀뿐이랴. 그에게 양 손목을 잡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무력감과 답답함에 눈물이 솟았다가 그에게서 전해져 오는 청량한 무언가에 쏙 들어갔다.
처음에는 타액인 줄 알았으나 그건 또 아니었다.
개미들의 죽은 걸쭉한 죽 같은 액성을 가지고 있었고, 사실 토사물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충인의 장기에서 나왔다는 게 그녀의 비위를 건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흰개미의 죽은 일꾼개미의 죽보다는 나무의 수액 같은 점도와 느낌이었다.
요한나는 약수와 더불어 나무에서 몇 날 며칠 채집한 수액을 마시는 걸 즐겼기에 유사한 맛과 향이 혼란스러웠다.
‘이게 죽이라고?’
개미들의 죽은 결국 그 자신이 섭취한 내용을 저장한 것.
흰개미는 뭘 먹고 다니는 걸까. 풀처럼 씁쓸하면서도 향긋했고 꽃이 품은 꿀처럼 달콤하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죽’보다는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한결 나았다.
흰개미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멍해져 있는 요한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더, 줘?”
“…….”
“배, 고파?”
다시 입을 맞추려 하는 흰개미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저지했다.
“됐어. 필요 없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걸 맛있게 느꼈다는 데 극심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녀는 어려운 말은 몰랐지만 바렌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은 기분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을 해 보자면 허기졌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흰개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
“빨개.”
요한나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설산처럼 창백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흰색이 정말로 싫었다.
* * *
요한나가 포기하고 다시 죽을 먹자 흰개미는 더는 교미를 권하지 않았고, 일꾼개미들도 다시 불러들였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보이는 그대로 순박하고 무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요한나는 경계심을 잔뜩 품고 노려보았다.
일꾼개미들, 일명 일개미, 이개미, 삼개미, 사개미는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도 다시 봐서 반갑다고 갑각 표피를 떨어 댔다.
요한나는 그들이 반갑지 않았지만 흰개미보다는 심적으로 편해서 상황 자체는 달갑게 여겼다.
일꾼개미들이 돌아왔다고 흰개미가 전처럼 마냥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
요한나는 황토색 그릇 안에서 출렁거리는 노르스름하고 희멀건 죽의 형태에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체념했다고는 하나 가끔은 이렇게 참을 수가 없다.
몰래 버리고 싶은데.
뺨에 와 닿는 따끔따끔한 시선에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속이 안 좋아서 섭식을 거부하면 일꾼개미들은 부리나케 흰개미에게 달려갔는데, 그게 몇 번 반복되니 힐끔힐끔 불안한 얼굴로 곁눈질하는 일꾼들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일꾼개미들이 조르르 일러바치면 흰개미는 어김없이 찾아와 입술을 문대고 그의 수액을 먹였다.
요한나는 그걸 수액이라고 표현했다. 솔직히 고기 맛이 나는 죽보다는 흰개미의 수액이 더 입맛에 맞기는 했다.
개미의 위장에서 반쯤 소화된 고기보다는 향긋하고 청량한 식물의 맛이 거부감이 덜하다. 하나 흰개미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웠으므로 요한나는 억지로 일꾼개미의 죽을 들이켰다.
이제껏 그녀가 판단한 흰개미는 감정이랄 게 없다. 자갈이나 나무토막 같은, 무생물처럼 생각되었다.
그를 표현할 더 적당할 말을 찾자면 명령어가 입력된 무생물 정도가 맞지 않을까.
그렇게 여기니 덜 무섭고 덜 꺼림칙해졌다. 오히려 가끔은 바보 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특히 이 겨울에 어디서 구했는지 초록빛이 생생한 긴 줄기 식물을 으적으적 씹어 댈 때 그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여겨지진 않았다. 그의 존재감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어느 정도는 외모의 영향이 크겠지.’
흠집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는 무기질의 광물처럼 보였고, 창백하게 하얀 낯빛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게 요사스럽다.
어릴 때부터 마을에 관심이 있었고, 아버지가 죽은 후로는 바렌타의 호의에 기대어 반쯤 마을에 살다시피 했던 요한나는 인간 세상에서 아름다움이란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갖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만 해도, 허물을 벗은 것처럼 달라진 외모 때문에 마을 사람들 틈에 더 쉽게 스며들 수 있었지 않은가. 물론 그때는 그게 정말 혼혈로서의 허물 벗기인 줄 몰랐지만.
외모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었다. 그래도 외모의 덕을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생긴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아름다운 것에 집착하고, 소유욕을 느끼고,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 흰개미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무감정한 흰개미의 아름다움은 요한나에게 오싹함을 안겼다. 인간 같지 않은 외모가 강력한 힘과 더불어 그를 괴물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 괴물에게서 벗어나려면 그녀 자신도 괴물이 되는 방법밖에 없을 거다.
요한나는 빈틈이 없는 흰개미 대신에 일꾼개미를 관찰하며 그들의 약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착실히 흘러 어느덧 토굴 벽과 바닥이 전과 다른 미묘한 온기를 띠기 시작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일꾼개미들의 움직임은 기름칠을 한 것처럼 한결 부드러워졌으며 공기는 포근해졌다. 지상의 변화가 지하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여신의 치맛자락처럼 온화하게 다가온 봄의 숨결 속에서 요한나는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만물의 변화도 그녀에게 일어난 변화처럼 극적이진 않았다.
“……이런 건 내가 아니야.”
눈이 시큰거렸다. 토굴은 거울은커녕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청동제 도구도 없었다.
며칠 전부터 피부 껍질이 벗겨지는 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기묘한 불안감은 일꾼개미들이 몸을 씻으라며 가져온 욕조의 물에 비춘 제 모습을 보는 순간 받은 충격에 비할 수 없었다.
달빛이 흐르는 것처럼 은은하게 빛이 나는 듯한 피부는 윤기가 흘러 매끄러웠다.
열일곱 살, 허물을 벗은 후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던 어깨와 팔뚝의 흉터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맹수에게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사납게 물렸던 곳이었는데 말이다.
검은 머리카락은 푸석한 곳 하나 없이 머리끝까지 반들반들했다. 눈썹은 촘촘하고 곧았고, 눈동자는 기름을 먹인 천으로 여러 번 닦은 돌처럼 광택이 났다. 지나치게 새카매서 언뜻 보랏빛을 띠는 눈동자의 명암이 무척이나 또렷했다.
보들보들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이목구비만 같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게 뭐야?”
등 뒤에서 나는 바스락 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등을 더듬던 손가락에 뭔가 닿았다. 얇고 건조한 비닐 같은 감촉.
그래. 가장 이상했던 게 이것이다.
‘며칠 전부터 간지러웠어. 간지러웠다고!’
긁고 싶을 때마다 흰개미가 손목을 잡아 제지했던 것을 떠올리자 이가 절로 갈렸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엎드려서 자야 했는데 이런 게 자라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야말로 자고 일어났더니 날개가 생겨났다는 상황이다.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이, 날갯죽지에 뿌리를 박고 있는 걸 확인했을 때의 심정이란.
요한나는 목욕통을 앞에 두고 굳어졌다. 충동적으로 목욕통 안의 물을 세게 내리쳤다.
촤악!
한참 출렁이던 물이 시간이 지나 잔잔해진다. 굳어 있던 요한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수면에 등을 비추어 보았다.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등 뒤로 뻗어 있는 잠자리 같은 날개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투명한 물에 어스름하게 반사되어서일까? 지나치게 연약해 보이는 날개를 쥐고 그대로 뜯어내려는 순간이었다.
탁, 손목이 붙잡혔다.
“뭐 해?”
느릿한 말투의 허스키한 목소리. 흠칫해서 고개를 들었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흰개미가 종이처럼 얇은 날개에서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나뭇가지가 툭툭 부러지는 것처럼 손가락이 쉽게 떨어졌다.
그러고는 만족했다는 양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요한나는 그의 ‘미소’에 또 한 차례 흠칫했다. 입꼬리만 삐죽 올라간 그걸 미소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오늘따라 이상스럽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공주. 첫, 외출.”
그 말에 요한나는 겨울이 끝났단 걸 깨달았다.
오늘은 토굴의 두꺼운 입구가 다시 열리는 날이다.
* * *
혼인 비행.
인간들이 십자가를 세운 교회와 하얀 예배당에서 결혼하는 것처럼 개미들의 공주도 혼인을 한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검은색 예식 정장을 입은 신랑의 손을 잡고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과 하프의 감미로운 음색을 배경 음악 삼아 결혼 선서를 하러 걸어가는 것처럼, 공주는 반투명한 날개를 펼치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미풍이 부는 하늘에 날아오른다.
차이점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달리 공주는 나신이라는 것이고, 하나뿐인 신랑 대신 공주와 마찬가지로 날개를 펼친 십수 마리의 수개미들을 남편으로 맞이한다는 거다.
인간의 신부가 하객들 앞에 하나뿐인 사랑과 영원을 맹세하는 결혼 선서를 읊는다면 개미의 공주는 가능한 한 멀리 비행하며 자손을 잉태할 수 있게 수많은 건강한 씨앗을 품는다.
‘이것이 일꾼개미들을 닦달해 알아낸 공주의 결혼.’
이걸 결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개미들이 그토록 바라 왔던 공주의 혼롓날이 닥쳤다.
우웅.
우우웅.
여기저기서 흥분된 비행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자작나무 군락 사이에 선 요한나의 안색은 파리했다.
그녀는 몹시 초조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고?’
하얗게 껍질을 드러낸 자작나무에 올라온 푸릇한 이파리가 봄의 싱그러움을 뽐낸다. 반면 요한나의 마음은 검은색으로 시들어 갔다.
혼인 비행에 대해 알게 된 날부터 이날을 기다려 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주가 토굴을 떠날 수 있는 날, 여왕이 되기 전 마지막 자유.
이날이 아니라면 탈출할 수 없을 거다. 그렇게 하루하루 손꼽으며 기다렸던 날이지만 중간중간 생긴 일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날아갔던 요한나로서는 갑자기 도래한 봄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맨몸으로 늑대 우리에 내던져진 것 같은 막막한 기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처럼 마음도 헐벗은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자작나무에 피어난 푸릇한 이파리 너머 날개를 우아하게 펼치며 날아다니는 존재들이 보였다. 다른 개미 군락에서 날아오른 공주들이었다.
토굴 개미들의 혼례는 같은 날에 치러진다. 일족의 피가 지나치게 짙어져 멸족에 가까워지는 걸 피하고자 씨앗을 흩트리는 것이다.
공주들의 뒤를 수십 마리의 수개미들이 따랐다. 저들은 다른 군락 공주의 몸에 씨앗을 뿌리는 동시에 저들의 공주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지키는 개미들이 있어도 탐나지 않을까? 검은 개미와 흰개미라면.’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공주가 노출된 상황이다.
멸족에 한발 가까워진 일족에게는 몹시 매력적일 텐데.
요한나는 흰개미를 흘끗했다. 그는 다른 일족의 공주들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 무심한 눈으로 구름 몇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을 훑어보고 있었다.
실망한 요한나의 눈꼬리가 슬쩍 내려앉았다.
흰개미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다면 일이 쉬워질 거다.
요한나는 토굴에서 함께 나온 장군 개미들이 다른 공주들을 뜨거운 눈으로 보는 것을 확인하며 침을 삼켰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비행을 시작하면 흰개미도 다른 공주와 교미하게 될 터.
요한나는 이미 반쯤 날아오른 검은 개미를 보며 마음을 쓸어내렸다. 교미를 앞두고 흥분에 젖었는지 날개가 진동하는 소리가 맹렬하다. 일단 저쪽은 안심해도 될 듯하다.
요한나는 이끌리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숲은 아름다웠다.
사각사각. 바람이 불 때마다 자작나무의 잎사귀가 부딪치며 속삭이고, 햇볕은 따뜻한 동아줄처럼 내려와 자작나무 군락 사이사이를 비추었다. 산뜻한 흙냄새와 푸릇한 생물의 냄새가 조화롭게 뒤섞여 싱그러운 봄의 도래를 알렸다.
햇살이 눈부시다. 그녀는 실눈을 뜬 상태로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심장은 긴장한 짐승처럼 거세게 뛰고, 숨은 들릴 듯 말 듯 죽이고 있지만 이렇게 나오니 그마저도 좋다.
광석에 의지하여 희끄무레한 빛이 어룽거리는 어둡고 답답한 토굴에서와 달리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렸다.
‘토굴 밖은 이런 모습이었구나.’
싱그럽다.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의 생활권과 꽤 거리가 있는 곳일 듯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거리는 크게 걱정되는 요소가 아니다. 개미들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며칠이든 몇 달이든 들여 오두막을 찾아갈 수 있다. 숲에서 살아남고 길을 찾는 건 평생을 해 온 일이었으니.
요한나는 떠다니는 구름을 홀린 듯 바라보다 시야를 가로지르는 늘씬한 몸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처럼 나신으로 반투명한 날개를 팔랑거리는 여자는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눈을 반짝였으며 새빨간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할짝거렸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그 얼굴을 무심코 바라보는데, 검은 개미가 떠올라 여자를 낚아챘다.
요한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한 발 물러서려는 스스로를 주먹을 쥐어 억눌렀다.
체구만큼이나 거대한 날개가 검은 개미를 지탱하며 웅웅거리고 있었다.
다른 군락의 공주를 붙들고 노련하게 비행하며 검은 개미가 요한나를 내려다보았다.
“하아아아……!”
검은 개미에게 붙들린 공주가 유달리 붉은 입술을 열고 한숨을 쉬었다.
몽롱한 눈으로 뱉는 숨결이 이상하게 달콤하다고 요한나가 생각했을 때, 검은 개미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만 보면 분노를 머금었던 검은 눈동자가 물에 담근 구슬처럼 반질반질해지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거칠고 뜨거운 숨이 흘렀다.
그 이상한 얼굴에 요한나가 흠칫하고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검은 개미가 킬킬거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햇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난 공주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요한나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공주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정말 짐승 같군.’
휘말리고 싶지 않은 심정이 행동으로 발현되어 몇 걸음 뒤로 물러나는 그녀에게 검은 개미가 평소보다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교미 페로몬, 이다.”
“…….”
“수개미들을, 흥분, 시키지.”
경직된 눈으로 검은 개미의 품에서 흐물거리는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신이었지만, 마을 처녀의 알몸을 볼 때만큼 부끄럽고 난처하지 않았다.
공주가 너무나도 거리낌이 없어 부끄러워하는 게 더 이상한 것 같기도 했고, 그녀도 역시 충인인지라 ‘인간’과는 달라서였다.
팔다리의 이음매는 관절과 몸통의 경계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피부는 푸른 핏줄이 보일 만큼 창백하고 투명했으며, 드러난 가슴은 풍만하나 젖꼭지가 없었다.
젖을 먹일 필요가 없는 개미들의 특성상 자연스럽게 퇴화한 것일 테지만 요한나는 저와 다른 가슴의 생김새에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종아리와 허벅지는 종족 특유의 질긴 근육을 자랑하며 늘씬하게 뻗었고, 초원을 달리는 사자의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다리 사이는 굴곡 없이 매끄럽기만 했다.
넋이 나가 그녀를 바라보던 요한나는 검은 개미가 당장 교미할 것처럼 공주의 두 다리를 벌린 채 올리자 눈을 크게 떴다.
공주의 다리 사이는…… 그저 매끈했고 그 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주변은 푸르스름한 갑각 표피로 둘러싸여 있어 부드럽다기보다는 딱딱할 듯했다.
곧장 거대한 성기가 구멍을 쑤욱 파고들었다.
제 가랑이가 절로 아파지는 기분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정작 공주는 다리를 더 넓게 벌리며 검은 개미의 추삽질을 환영하고 있었다.
“하읏, 하으읏! 하아악!”
츳, 츠즛.
짙은 교미 냄새에 주변 수개미들이 침을 흘리며 그들 주변으로 날아들었다.
공주가 혼례를 치르는 날, 개미들의 난교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저를 둘러싼 불온한 기운을 느낀 요한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주춤주춤, 누가 떠미는 것처럼 걸음이 밀려났다.
저기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감각에 속에서부터 울렁거리고 있었다.
공주와 수개미가 너 나 할 것 없이 뿜는 이 페로몬.
돌연 불안감을 느꼈다.
인간도 이걸 맡을 수 있는 걸까?
그들도 여기 있다면 이 기괴하고 난잡한 광기에 휘말리게 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나는 영향을 받아 버리는 거지?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검은 개미의 검은 눈이 만족스러워졌다.
“너의, 혼롓날.”
“크흐으응!”
검은 개미가 과시하듯 공주에게 처박으며 속삭였다.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날갯짓 소리를 뚫고 귀를 고통스럽게 괴롭혔다.
“누구랑, 먼저 할 테냐?”
“닥쳐…….”
“흰, 개미?”
무시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잠시, 요한나는 경악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뒤에 홀로 유유자적 서 있는 흰개미는 마치 페로몬의 파동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듯 여유로웠고, 심지어는 심드렁한 것 같기도 했다.
특유의 생기 없는 정적임이 그를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 아닌 조각처럼 보이게 했다.
요한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곧장 흰개미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는 침음을 삼켰다. 해가 이렇게 밝게 떠오르고 있는데도 차가워 보이는 하얀 머리, 달빛으로 빚은 듯 창백한 피부와 한 줌 핏물처럼 새빨간 눈과 입술이 각인되듯 눈에 들어왔다.
모피를 둘러 헐벗은 다른 수개미와 달리 몸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데도 그 단단하고 강인한 육신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서, 요한나는 무력감을 느껴 버렸다.
소름이 끼치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일꾼개미들은 아무리 많이 달려들어도 언젠가는 떨쳐 버리고 도망갈 자신이 있는데 저 흰개미만은, 부산스러운 일꾼개미보다도 조용함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압박감을 받고 만다.
요한나는 그가 부담스러웠다. 싫었다.
그런 그가 교미를 시도한다면? 어느 각도로 생각해 보아도 상황을 모면할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그녀의 위로 거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뻣뻣한 목을 젖혀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공주의 목에 이를 박아 넣고 잘근잘근 씹고 있던 검은 개미는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창백하고 길고 두꺼운 좆이 공주의 탄력적인 다리 사이를 세차게 드나들었다.
애무도, 부드러운 움직임도, 뭐 하나 없이 그저 거칠었다. 짐승의 교미란 말이 딱 어울렸다.
사로잡힌 나비처럼 신음하는 공주의 꼴이 꼭 제 미래 같아 손끝까지 차가워졌다. 저 멀리 선 흰개미의 존재감이 등을 따끔따끔하게 찔러 댔다.
“걱정, 마.”
검은 개미가 말했다.
“흰, 개미는 네, 감시, 역일 뿐이다. 하나 기억해라, 공주.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 테니.”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듯 의미심장한 말에 귀를 쫑긋했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검은 개미의 눈을 들여다보자 그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눈꼬리를 길게 찢으며 낮게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요한나는 금세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일꾼개미의 뒤를 쫓다 토굴에서 길을 잃어버린 날, 도망을 친 거라며 그녀를 몰아가서 다리를 부러뜨렸던 일을 또 한 번 반복하려는 거다.
이번에는 다른 다리마저도 부러뜨리려나?
요한나는 메마른 웃음을 띠었다.
검은 개미의 속셈은 알지만, 그래도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그녀가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도주를 시도했다가 붙잡히는 날에는, 꽤 끔찍한 대가가 있을 것이다.
도주에 성공할 확률보다는 붙잡힐 가능성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확률을 따져 가며 결행을 뒤로 미루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올지도 몰랐다.
인간은 결과가 빤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시도하고 마는 종족이다.
요한나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이 토굴에 영영 속하지 않기 위해서, 나날이 깎여 가는 인간성과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의 대가는 두려우나 그럼에도, 꼭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요한나는 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오자 흔들리는 정신이 잡혔다.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본능대로 눈빛이 예리하게 갈렸다.
그녀는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미에 참여하는 모든 공주와 수개미가 사방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멀리 날아간 개체는 점처럼 보였다. 교미 페로몬을 뿜는 개미들은 구멍을 찾아 제 씨물을 쏟아 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직 멀쩡한 건 요한나 그녀 자신과 흰개미뿐인 것 같았다.
‘아니지. 겉으로만 멀쩡한 걸 수도.’
요한나는 경계하는 눈으로 흰개미를 힐끗거리며 날개를 손으로 만졌다.
고개를 틀어 확인한 그녀의 ‘날개’는 처음 봤을 때의 경악과 징그러움을 접어 두고 봤을 때 곤충의 날개와 비슷했다.
직선과 곡선 형태의 시맥이 매우 많이 뻗어 나갔고, 반투명한 막 같은 것이 전반적인 날개를 형성했다. 날개는 무색이었으나 끝으로 갈수록 갑각 표피처럼 푸르스름한 색을 띠었다.
날개 자체만 떼어 놓고 보면 퍽 신비스럽고 시선을 끄는 면모가 있었다. 그게 인간의 몸에서 나왔다고 하면 말이 달라지지만.
토굴을 빠져나오며 몇 번이나 날개를 만져 보았고 이게 보기와 달리 상당히 튼튼하고 질기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검은 산맥에 익숙한 특징을 앞세워 복잡한 숲속에 숨어 들어가는 계획이 가장 현실성 있는 대책이라고 여겼던 그녀는 날개를 살펴보며 생각을 수정했다.
이런 게 있다면 당연히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써먹어야 했다.
‘이 괴물들에게서 벗어나려면.’
개미들이 교미를 위해 만들어 낸 날개로 그들에게서 도망간다는 것. 그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그 생각을 하니 토굴에서 빠져나오는 길도 마냥 막막하지는 않았더랬다. 날개에서 손을 떼며 입꼬리를 올렸다.
검은 개미가 말한 마지막 기회. 그것도 이 날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까.
‘그렇다면 날개를 이용해도 도망가지 못할 거라 여기는 거겠군.’
그 이유가 개미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페로몬 때문이라면.
요한나는 생각에 잠기며 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날개를 이용하겠다고 마음먹고 흰개미에게 어떻게 날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냥 움직여 보면 된다고 대답했다.
질문한 보람이 없는 형편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흰개미와 검은 개미 등, 장군의 자질이 있는 수개미들은 태어날 때부터 날개를 갖고 태어난다.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이냐고 묻지 않듯이 그들에게도 날개를 움직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 등 뒤에 팔이 달렸다고 생각해 보자.’
그걸 움직이는 거다.
마을에서도 몸 쓰는 일이라면 못 하는 게 없던 그녀였다.
바스슷.
날개가 잘게 경련하며 떠올랐다. 요한나는 금세 고무되었다. 그러나 날개를 이용해 난다는 건, 몸을 띄우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경사진 곳을 다급하게 내려가거나 나무를 기어 올라갈 때를 제외하고는 땅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 생활을 했던 그녀로서는 날개를 움직여 비행하는 감각에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발이 땅에서 조금 떠오르자 기이한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요한나는 살짝 멀어진 땅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익숙하지 않으니 어느 정도 다치고 깨지는 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존재로서 땅에서 멀어진다는 자체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들었다.
날개를 계속해서 파닥거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허공에서 비틀대다 땅에 착지했다.
‘이대론 안 돼.’
참고 대상을 찾을 겸 주변을 돌아보았다.
공주의 혼롓날에 참여하는 건 능숙한 장군들만이 아니었다. 갓 태어난 수개미들. 겨우내 젖은 날개를 말리고 비축 식량으로 체구를 키운 수개미들이 날개를 펼치고 비행할 준비를 했다.
요한나는 그들을 예의 주시했다. 그들이 하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개미들의 방식은 생각보다 과격했다.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그들을 시선으로 좇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절벽을 향해 달려간 그들이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심장이 철렁였다. 잠시 후, 웅웅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개미의 머리가 올라왔다. 상하좌우로 방향을 바꿔 가며 비행에 적응한 수개미들이 금세 능숙하게 움직이더니 홀로 비행하는 공주를 향해 솟구쳤다.
요한나는 얼빠진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
절벽을 보며 슬며시 눈썹을 찡그렸다.
“뭐, 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흰개미가 무심한 얼굴로 깎아지를 듯 날카로운 절벽을 가리켰다.
“달려.”
“…….”
“날개가 저절로, 움직일, 테니.”
“그대로 떨어져서 죽으면?”
흰개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불퉁하게 대꾸했던 요한나는 시선이 왠지 기분 나빠 눈을 부릅떴다.
아니나 다를까.
“무서워?”
그녀의 예쁜 입술이 비틀렸다. 무표정해서 더 짜증이 나는 하얀 얼굴을 한 대 패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높디높은 절벽이다. 떨어지면 아무리 그녀라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몇 번 펼쳐 보지도 못한 연약한 날개에 몸을 지탱한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또 다른 가능성이 펼쳐질 거다.
절벽에 떨어져 죽는 것과 성공해서 바렌타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견준다면.
“떨어지면, 잡아 줄, 게.”
“필요 없어.”
고민할 것 없이 후자다.
요한나는 뛰었다. 몇 달 전 신록이 푸르른 여름, 검은 산맥을 사슴처럼 노닐었던 그때처럼 다리를 놀렸다.
하나 기분은 사슴이라도 된 듯했지만, 현실은 그와 같지 않았다. 왼쪽 발목이 절뚝거리며 몸이 기우뚱거렸다.
사슴처럼 우아한 움직임은 더는 구현할 수 없었다. 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불편함과 씻을 수 없는 결함의 인식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토굴 내부에서는 절뚝거림을 이토록 생생하게 느끼지 못했으므로, 상실감이 지나쳐 이대로 쓰러지고 싶은 욕망까지 솟았다.
사냥꾼에게 다리를 잃는 건 정체성의 사형 선고였다. 그러나 요한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어룽진 눈물이 떨어질까 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포근한 바람이 눈을 파고들어 눈물을 감쌌다. 순간 요한나는 바람의 결이 보인다고 착각했다. 바람이 발밑에 고이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야. 볼품없이 절뚝대는데 속도는 전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고 있잖아.’
절벽이 바로 눈앞이었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나무들이 가득하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끼며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휘이이이이!
파스스슷!
펼쳐진 날개가 바람에 쓸려 종이가 휘날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세찬 바람이 턱과 뺨을 거세게 스치며 위로 솟구치자 덜컥 겁이 났다.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 그건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느낌과 닮아 있었다.
일순 눈앞이 아득해지며 정신이 혼미해졌으나 곧 눈에 힘을 주고 마음을 붙들었다.
손끝의 감각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활을 시위에 걸었던 때처럼,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등에 달린 팔을 휘두르는 것처럼 날개를 움직였다.
눈을 감고, 까맣게 변한 머릿속으로 자유롭게 하늘을 유영하던 타 군락 공주의 모습을 그렸다.
스륵. 눈을 뜨자, 앞에는 흰개미가 있었다. 요한나는 시선을 내렸다. 그의 팔이 그녀를 감싸듯이 두르고 있다.
실패인가? 결국 떨어진 건가?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서, 약간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한 흰개미가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아마 떨어질 때를 대비하고 있었던 듯했다.
한발 늦게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인식했다.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래가 까마득하다.
우웅, 웅…….
멀리서 들려오던 날갯짓 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울렸다. 요한나는 자연스럽게 흔들리고 있는 그녀의 날개를 보았다.
“아…….”
그녀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낯빛이 묘하게 변했다. 처음으로 산맥의 평야에 올라, 거칠 것 없이 달려 나갔던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가슴이 북받치는 듯, 커다란 북소리가 귓가에서 쿵쿵 연주됐다. 그녀 자신의 심장 박동이었다.
요한나는 주먹을 폈다. 흥건하게 고인 땀이 봄바람에 흩날려 시원함을 안겼다.
‘이런 기분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는 그녀를 흰개미가 물끄러미 지켜보다 나직하게 속삭였다.
“마음껏, 날아라. 공주.”
멈칫.
흰개미를 응시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에 가로로 반듯한 입술이 아주 조금,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검은 개미와 달리 흰개미는 인간의 감정이란 몰랐다. 마치 무리의 번영을 위해 계산되고 계획된 피조물처럼 모든 언행이 설계되어 있다.
그가 자신이 날기를 원한다면 그건 혼인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공주의 교미는 일족의 번성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의무.
요한나의 입꼬리가 내려진 채 경직되었다. 예기치 못한 비행의 신비로움에 한순간 고무되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개미들, 특히 흰개미에게서 벗어나는 것.
또렷하게 정신을 찾고 나서야 머리 위로, 주변으로 몰려든 개미들이 눈에 들어왔다. 날개를 웅웅 울리며 수개미들이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공주와의 교미를 위해.
오싹.
이쪽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소름이 끼쳤다.
굳은 목을 움직여 흰개미를 보았다. 흥분하며 날개를 떨어 대는 다른 수개미들과 달리 평온한 얼굴에 안도감이 드는 찰나, 곧장 그런 저를 질책했다.
흰개미를 보며 안도감이라니!
그것이 부질없다는 건 이미 수차례 겪어 보았다.
어리석고 어리석다. 요한나의 눈빛이 서리처럼 싸늘해졌다.
“얼마든지 날아도 된다고?”
확인하듯 묻자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래.”
“기억해 둬. 네가 먼저 그렇게 말한 거야.”
요한나는 달릴 때처럼 다리에 힘을 주었다가 곧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날개를 움직이는 감각은 팔을 휘두르는 것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 미묘한 감각 차이를, 그녀는 비행한 지 오래지 않아 빠르게 깨우쳐 버렸다.
본래 요한나는 첫 사냥을 나서고 하루 만에 돌팔매질로 토끼를 잡았고, 3일 만에 단도를 비수처럼 던져 매를 붙잡았으며, 일주일 만에 창과 활을 다루어 못 잡는 짐승이 없었다. 신체를 사용하는 일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 날개를 쓰는 것도 금세 익숙해졌다.
그녀의 몸이 가볍게 위로 튕겼다가 곧장 아래를 향해 쏘아졌다. 퍽 빠른 움직임에 그녀가 절벽 위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던 수개미들이 당황했다.
웅—우웅!
날갯짓 소리가 일순 증폭되었다.
지상의 나무 꼭대기로 순식간에 이동한 요한나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개미들이 속속 그녀를 따라 비행을 시작한 가운데 흰개미만이 아까의 그 자리에서 가만히 체공하고 있었다.
시선은 떨어지지 않아도 그녀의 행동을 막을 생각은 없는 눈치였다.
검은 개미의 말처럼 그가 교미에 참여할 일은 없는 듯하다.
내심 마음에 걸렸던 사실을 확인한 요한나의 눈에 보랏빛 안광이 번뜩였다.
‘그럼 할 만하지. 날 놓아준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흰개미.’
그녀는 주먹 쥔 손에 힘을 주고 나뭇가지가 닿을 듯 말 듯 한 높이에서의 비행을 유지했다. 발아래로 파릇파릇한 이파리들이 스쳤다.
츳, 파슷, 츠스스스스!
얼마 안 있어 수개미들이 따라붙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웅—!
탐색과 은신에 실패하여 사자 무리에게 쫓겼을 때처럼 사냥꾼의 피가 끓었다.
생과 사의 칼날 위를 걷는 듯 머리털이 쭈뼛 섰다. 안전을 위협당한 긴장감이 그녀의 감각을 예민하게 했다.
그녀는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움직임과 저 멀리 몸을 숨기는 다람쥐의 조심스러움을 인지했다. 시야가 넓어졌다.
마치 자연과 소통하는 것 같았다. 바람이 한 몸처럼 느껴졌다.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이었다. 왜 흰개미가 겨울에도 토굴 밖으로 기어 나갔는지 그 마음이 절절히 이해가 갔다.
“공주, 너무, 빨라!”
“놓, 치지, 마!”
흠칫.
딱딱한 쇠가 마찰하듯 이를 가는 소리가 귀를 사정없이 파고든다.
단단히 성이 난 수개미들이 날개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동시켰다. 그중엔 타 군락의 노련한 장군 개미들도 있었다.
그는 오늘이 첫 비행인 요한나가 아직 미숙한 공중전을 펼칠 줄 알았다.
끼에에에엑!
장군 개미를 필두로 신호를 받은 수개미들이 상하좌우 사방으로 퍼졌다.
한편, 바람을 타며 비행하는 요한나의 움직임은 점점 더 능란해졌다. 수개미들이 잡으려 들 때는 복잡하게 얽어져 있는 나뭇가지 사이를 늘씬하고 유연한 몸을 이용하여 넘나들다 서서히 옥죄어 오는 서늘한 공기를 느끼고 경종을 울렸다. 이 대치를 타개할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지금 컨디션으로는 체력으로 질 것 같지 않아. 다만 수적으로 불리하니 지구전은 피하는 게 좋겠군. 게다가 검은 개미나 흰개미를 잊으면 안 되지. 언제 쫓아올지 모르니까. 페로몬 때문에 몸을 숨기기가 어렵다면.’
곰곰이 생각에 잠긴 눈이 서늘해졌다.
‘천적을 이용하는 수밖에.’
사냥꾼은 사냥감이 다가오도록 기다리기도 하지만, 더 똑똑한 사냥꾼은 사냥감이 원하는 지점으로 오도록 판을 설계한다.
그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천적의 분비물. 퇴로에 군데군데 뿌려 놓으면 기겁한 사냥감이 냄새가 안 나는 쪽으로 도망치게 된다. 그런 후 숨어 있는 사냥꾼의 손아귀에 붙들리게 되는 것이다.
충인 역시 짐승이라면 짐승. 먹이 사슬의 정점을 차지하는 포식자라지만 온갖 기괴한 아종이 가득한 검은 산맥에서는 이들의 천적도 존재했다.
개미귀신은 개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충인들의 천적이나 그 수가 극히 희귀하여 그녀도 얘기만 들어 봤으므로 제외.
‘역시 가장 접근하기 쉬운 건 라이벌 개미 군락이겠지.’
일꾼개미들을 통해 토굴 개미들이 석굴 개미와 척을 졌다는 사실을 입수한 바가 있다. 재빨리 산기슭을 훑었다. 얘기를 들을 때는 거리가 멀지 않아 보였는데.
‘봄이 왔으니 석굴도 입구를 열었을 거야.’
개체 수가 많은 군락이니 산기슭의 규모도 남다를 터.
개미들이 터를 잡고 살 만한 공간을 찾는 요한나의 눈빛은 매섭고도 날카로웠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라도 빠르게 비행하며 사방을 훑을 수는 없었으므로, 다소 느려진 속도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수개미들에게 틈을 노출해 버렸다.
츠즛, 스스슷!
날개 떠는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순간, 요한나가 고개를 쳐들었다.
사악!
쉬이 발견할 수 없는 사각을 통해 접근했던 수개미가 그녀의 어깨를 낚아챘다. 그 바람에 속도가 급격히 늦춰지자 뒤따르던 수개미 세 명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아!”
급격히 늘어난 무게감에 날개가 휘청거렸다. 요한나는 목과 가슴을 휘감아 오는 차가운 손에 이를 악물었다.
“비, 켜!”
“공주, 내가, 잡았다, 나, 먼저!”
경쟁자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수개미들이 그녀의 탄력 있는 피부에 손톱을 박아 넣고 손목과 발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녀가 뭐라 하든 그 몸에 좆을 처넣고 씨앗을 퍼뜨리는 게 지상 최대의 과제라도 되는 것처럼 극렬하게 움직인다.
열망과 욕망과 정염이 깃든 징그러운 눈이 탐스러운 먹이를 보듯 그녀의 몸 곳곳에 도장을 찍었다.
사냥감으로 전락한 상황이 치욕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주먹을 말아 쥐자 손바닥의 뾰족한 것이 살갗을 뚫을 듯 찔러 댔다.
깨끗했던 흰자위에 핏발이 섰다. 맹수처럼 살기가 깃든 눈빛이 흥분한 수개미들의 얼굴에 비수처럼 꽂혀 들었다.
푹!
“……키에에에에에!”
막 그녀의 다리 사이로 길쭉한 성기를 쑤셔 넣으려던 수개미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낙하하는 그의 위로 핏방울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어?”
개미들은 얼이 빠졌다. 교미의 흥분과 광란에 취해 요한나에게 달라붙어 있던 그들의 머리 위로 한 줄기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요한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휘두르며 역겹더라도 죽을 먹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힘이 없어 빌빌거렸을 것 아닌가.
토굴에서 나오자마자 뾰족한 돌 조각과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쥐었던 요한나는 그것으로 충인의 목을 꿰뚫고 눈을 찔렀다.
무기가 변변찮으니 일격 필살로 급소를 노리는 수밖에.
“히아아아아악!”
“크아악!”
비명이 난무하는데도 연약한 피육에 나뭇가지를 쑤셔 넣는 요한나의 얼굴색은 일절 변함이 없었다.
사냥감을 사냥하는 것처럼 써늘했고 살기가 흐르는 두 눈은 맹수와 같이 매서웠다.
눈알이 터진 개미 하나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날개를 펄럭일 수 없을 정도인지라 곧 땅 아래로 추락했다.
순식간에 네 명을 해치운 요한나는 주춤거리는 수개미들을 뒤로하고 유유히 비행했다.
하얀 손이 피로 범벅이었다. 수개미들은 금세 멀어진 요한나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공주, 미쳤다!”
타 군락의 수개미들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사태에 당황하고 분노했다.
“미친 공주!”
그런데 무슨 일인지, 다리 사이의 성기는 한층 더 흉흉하게 곤두섰다. 강한 암컷을 향한 수컷의 정복욕이 바글바글 끓어오른다.
“이것들이 왜 이래?”
요한나는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미친 것처럼 부딪쳐 오는 개미들을 향해 착실히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개미들의 방심을 노렸던 처음과 달리 성공률이 높지 않았다.
성욕에 미쳐 달려들었던 때보다 더한 광기에 차오른 수개미들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그녀를 붙드는 데만 집중하고 있어 떼어 내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
푸욱!
“끄아아아아!”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더 날카롭게 벼려지는 사냥꾼의 본능은 달려드는 적들을 느리지만 착실히 해치웠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마다 수개미들의 시체가 흔적처럼 남았다. 광기 어린 쾌감과 즐거움이 충만해야 할 혼롓날에 피투성이 시체는 금세 눈에 띄었다.
“저게, 미쳤구나.”
검은 개미는 혀를 내둘렀다. 지능은 흰개미만 못하지만, 직감이 뛰어난 그다.
일찍이 요한나가 일족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거라고 예상했고 그 성질과 목적을 보아서는 이번 혼롓날에 얌전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으나, 저런 식으로 개미들을 죽일 것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일꾼들을 치워 냈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어도 상대는 날개를 가진 장군과 수개미가 아닌가.
“멍청한 것들.”
혀를 찬 검은 개미가 막 씨앗을 뿌려 넣은 타 군락 공주를 밀어 내고 요한나에게 가려고 했다. 찰나, 눈앞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흰개미?”
뭘 어쩌려는 거지?
잠시 머뭇거린 검은 개미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요한나는 미친 듯이 날개를 팔랑이며 도망을 쳤다.
캬아아아!
츠스스슷!
웅, 우웅!
수개미들이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방향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그녀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익숙하지 않은 비행에 지친 어깨가 뭉치며 속도가 느려졌다. 틈을 놓치지 않은 한 수개미가 그녀를 앞에서 끌어안았다.
“으윽!”
요한나는 그의 등을 돌 조각으로 찍었다. 수개미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악착같이 붙들고 허리를 쳐올렸다. 뾰족한 것이 그녀의 허벅지를 여기저기 찔러 댔다. 그녀를 붙드느라 손을 쓰지 못하는 탓에 성기가 영 엉뚱한 곳만 찔렀다.
이러다가 삽시간에 삽입당하고 말 거다.
요한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수개미의 숨통을 끊었다. 품에서 추욱 늘어지는 수개미를 허둥지둥 밀어 냈다. 느릿하게 기울어진 수개미가 곧 빠르게 낙하했다.
끼에에에에!
공주우!
수개미들이 당황과 공포가 뒤섞인 소음을 냈다.
적이 지친 상태였지만 살기가 가득 어린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비행을 유지했다. 수십 마리에서 대여섯으로 줄어든 수개미들이 그녀를 쏘아보면서도 주춤거렸다.
방금 죽인 개미의 계급이 꽤 높았나 보았다.
‘장군이라도 됐나 보지. 다행이야.’
겁에 질린 수개미들을 보며 요한나는 마음을 쓸어내렸다.
‘이대로 도망칠 수 있어.’
희망을 가진 그녀는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암벽으로 된 산기슭을 향해 날아갔다. 황토색의 거대한 절벽 기슭은 여기저기 굴이 파여 있었다.
석굴 개미가 있을 법한 크기였다. 그들이 있으면 좋고, 아니더라도 숨기에 좋아 보인다.
목표를 정한 요한나가 이를 악물고 속도를 더 낼 때, 그녀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날갯짓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은밀한 접근이었지만 요한나는 용케 반응했다. 그러나 그 빠른 반응도 소용이 없었다. 날개 뿌리가 잡혔다. 날개를 있는 힘껏 떨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익숙한 무력감에 요한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역시였다. 우아하게 날개를 움직이며 흰개미가 그녀의 날개 뿌리를 붙잡고 있었다.
“놔, 놔……!”
목이 졸리는 소리가 거칠게 튀었다. 흰개미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모로 까딱였다. 의문을 표하는 특유의 눈짓에 그녀는 말 못 할 답답함과 공포를 느꼈다.
“놔, 좀, 놔…….”
각인된 공포에 대한 반사적인 반응.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들었다.
흰개미의 고개가 더 기울어졌다.
그 순간, 눈을 번뜩인 요한나가 손을 휘둘렀다.
탁!
정확히 목젖을 향하는 손을 흰개미는 간단히 붙잡았다.
한 손은 날개 뿌리를,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상태로도 비행하는 자세가 퍽 여유로웠다.
요한나는 그에게 사로잡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온 신경이 등 뒤를 향했다. 갑자기 울컥한 그녀가 흐느꼈다.
“너희들끼리 잘 살면 되잖아. 왜 굳이 날 이용하려는 거야. 난 인간이야, 인간이라고……. 다 잊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대로 놔줘. 다른 공주들도 많잖아!”
토하듯이 소리치는 그녀는 울분에 차 있었고, 몹시도 서글퍼 보였다. 안쓰러워 보일 만큼.
하나 그런 그녀를 응시하는 흰개미의 눈은 말갛기만 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무표정해서 더욱 아름다웠고, 신비했다.
등에 닿는 서늘한 체온에 요한나는 흠칫했다. 흰개미가 등에 바싹 달라붙었다.
“공주.”
딱딱하게 굳은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약한 모습을 보인 건 싫었지만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왜 거부해?”
“…….”
“강한 씨를, 품어야지.”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요한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혀, 전혀 닿지 않는다.
그녀의 진심은, 그녀의 억울함은, 고통은, 이 괴물에게 전혀 닿지 않는 것이다.
“너 같은 공주는, 처음 봐. 좋아. 재밌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더 들어 볼 필요도 없다.
요한나는 공격을 감행했다. 무릎을 세워 뒷발로 그를 가격했지만 마치 돌기둥을 때린 것 같았다. 흰개미가 발버둥을 치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날개가 그의 단단한 가슴에 짓눌렸다. 문득 다리에 닿는 부드러운 털의 감촉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하얀 모피가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저게 떨어졌다면 그럼?’
흰개미의 서늘한 체온이 온몸을 감싸자 몸이 덜덜 떨렸다. 결코 급하지 않은 손놀림임에도 질긴 끈에 결박당하는 기분이었다.
흰개미는 여유로운 손길로, 그러나 군더더기 하나 없이 움직여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그런 반항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뿌리친다.
“……헉!”
요한나는 목을 뒤로 젖힌 채 입을 크게 벌렸다.
성기가 날카롭고 묵직하게 파고들었다.
까만 동공이 바람을 불어 넣은 풍선처럼 확장되었다. 차마 나오지 못한 비명이 활짝 열린 목구멍 안에서 먹혀들었다.
“아.”
흰개미가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쇳소리가 섞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전을 문질러 댄다. 뒤이은 신음이 소름이 돋은 그녀의 목덜미를 차가운 혀처럼 느릿느릿 쓸었다.
“뜨거워…….”
온몸이 긴장 상태로 돌입한 요한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숨이 연약하게 새어 나갔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검은 개미, 일꾼개미들과 같은 것을 넣은 게 맞는 걸까?
요한나는 작살에 꿰뚫린 붕어를 생각했다. 정확히 꿰뚫고 들어가면 붕어는 움찔하지도 못하고 축 늘어진다.
“하, 흐…….”
억지로 발을 들었다가 다리 사이의 압박감이 더 크게 느껴지자 그대로 굳어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흰개미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곧장 씨앗을 흩뿌리기 위해 허리 짓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언제쯤 움직이려나. 두려움에 눈물이 찔끔 맺힌다.
츠즛, 츳.
흰개미의 날개가 마찰음을 냈다. 흥분으로 떨리는 갑각 표피의 진동이 그의 가슴과 닿아 있는 등에 선연히 느껴졌다.
이렇게 몸이 달라붙은 상황인데도 덥지 않고 오히려 서늘하다니. 흰개미는 조각상과 다름없다.
제 일족에게 해가 되지만 않는다면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덜었던 것도 이번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흉기나 다름없는 것이 다리 사이에 들어와 있고, 그가 움직이면 찢어발겨질 거라는 상상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순간을 모면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어째서 흰개미가 직접 나섰지?’
가닥가닥 끊어지던 뇌리에 불이 반짝인다. 그래. 흰개미는 수개미들이 교미를 포기하자 문제 상황을 해결하고자 한다.
바싹 말라 버린 입술로 더듬거렸다.
“아, 알았어. 교미, 하면 되잖아. 그렇게, 할게. 그렇게 할 테니까 비, 비켜 봐.”
도주하는 최종 목표는 순간적으로 빛을 잃었다.
일단 이 괴물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 과제로 바뀌었다.
이제까지 요한나는 그간 흰개미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해 왔다.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면 움직이지 않는다. 고집을 꺾고 죽을 먹는다고 했을 때도 교미를 포기하고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던가.
‘이러면, 이러면 될 거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요한나는 연신 침을 삼켰다. 다리가 벌어진 채 억지로 고정된 감각이 못 견디게 불쾌했다.
흰개미의 손에 힘이 빠졌다.
‘역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순간, 힘이 느슨해졌던 흰개미의 차가운 손이 요한나의 굴곡진 골반을 움켜쥐었다.
“어?”
놀란 요한나의 귓가로 짤막한 말이 파고들었다.
“싫, 어.”
요한나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좋다. 싫다.
호불호를 표현하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제 의견을 피력하기는 해도 호불호를 나타낸 적은 없는 흰개미였다.
그런데 뭐라고 했지? 지금 교미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건가?
그녀의 의문에 답하듯 흰개미가 허리를 느릿느릿 흔들었다. 내벽의 살이 성기를 따라가는 듯한 감각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흐윽, 그, 그만. 우, 움직이지 마!”
“이거…… 기분, 좋아.”
호불호를 표현하는 두 번째 말.
낮고 절제된, 그러나 흥분에 들뜬 신음이 귓구멍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비키지 않을 생각이야.’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째서?
교미 페로몬이 뒤늦게 그를 자극하기라도 했을까?
무관심한 얼굴에 안도했는데, 겉으로만 그런 척했던 걸까?
왜, 갑자기 왜, 하필이면 왜.
불운을 곱씹는 얼굴 위로 절망이 회색 베일처럼 내려앉는다.
흰개미가 그녀의 안에 있다. 그 사실이 주는 정신적인 압박감에 더해 신체적인 부담까지. 그대로 짓눌릴 것 같다.
흰개미가 그녀의 엉덩이에 샅을 붙여 왔다. 근육질 딱딱한 몸에 낮은 체온. 꼭 벽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흰개미의 길고 두꺼운 것이 그녀의 안을 느린 속도로 출입했다. 마치 음미하기라도 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씨물을 뿌리는 게 목적이라면 더 빨리 움직일 텐데 흰개미는 이상하게 굴고 있었다.
요한나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손가락 사이로 온유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부드러운 바람과 달리 요한나의 마음의 온도는 하강 곡선을 그렸다.
흰개미는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천천히 비행했다. 어느새 주변을 서성이는 개미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흰개미가 요한나에게 붙은 것을 보고 모두 포기한 거다.
흰개미만 떨쳐 내면 도망가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멀어지는 석굴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다.
‘저기만, 저기까지만 가면.’
“아!”
뭉툭한 성기의 끝이 안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고개를 쳐들었다. 석굴이 시야에 걸렸다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그녀의 날씬한 배를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였다. 요한나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나무를 응시하며 그의 손목을 잡아 뜯듯 움켜쥐었다.
흰개미의 가슴에 뭉개지고 있다고는 하나 날개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손을 놓으면 이대로 떨어져 죽고 말 거다.
이성적인 생각과 별개로 입은 다른 말을 했다.
“흰, 개미. 놔줘.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어? ……듣고, 윽, 있어?”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요한나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눈앞이 깜깜했다.
날개를 펼쳐 탁 트인 창공을 자유롭게 활공할 때만 해도 두 눈에 반짝이던 보랏빛 기광이 수명을 다한 불꽃처럼 꺼져 갔다.
드넓은 하늘, 흰개미에게만 의지한 채 삽입당하는 아름다운 육신. 길게 뻗은 흰 다리가 하늘하늘 흔들린다.
“아, 흐으, 기분, 좋아.”
“…….”
“공주, 공주…….”
요한나는 그 부름에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