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9)

04

산에 사는 짐승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생존, 즉 식량 보급이다.

반쯤 짐승으로 취급되는 검은 산맥의 사냥꾼 요한나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특히 겨울나기에 이런 식량의 비축과 유지는 더더욱 중요해진다.

‘다람쥐와 청설모, 설치류 따위의 작은 짐승들은 겨울이 오기 전 깊게 판 굴에 먹이를 저장해 놓지. 대왕 비단뱀 같은 거대한 파충류는 동면에 들어가기 전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배를 채워. 충인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야.’

혹독한 겨울을 살아 내야 하는 건 산짐승들의 공통 과제인 만큼 비축한 식량이 있을 터.

‘입구를 막아 두었다고 했지. 사냥을 자주 나가지는 않겠군. 장군 개미들이 밖을 오가는 것 같은데……. 이놈들이 어디서 식량을 조달해 오는 걸까.’

요한나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오늘따라 정신이 산만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어째서 이렇게 평화로운 거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드는데, 근거가 없었다.

원인 모를 불안감.

‘불길하군.’

봄이 오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다. 그렇게 판단했는데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꾸만 뭘 놓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곳의 생태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야. 그래야 기회가 있을 때 멍청하게 굴지 않을 수 있어. 식량을 어떻게 조달하는지만 알면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토굴은 거대한 미로 같은 형태였다. 그녀가 있는 방은 토굴에 이어진 수많은 방 중 하나일 뿐이다.

일꾼개미로부터 얻은 단편적인 정보를 조합하면 토굴 개미들은 약 300명. 그 많은 수가 겨울 동안 굶주리지 않으려면 비축한 식량도 어지간하지 않을 거다.

‘여기 어딘가에 거대한 식량 창고가 있을지도 모르지.’

요한나는 흙으로 빚은 넓적한 그릇을 입 쪽으로 기울여 묽은 죽을 마셨다. 입가에 묻은 걸 혀로 핥아 먹자 포만감이 느껴졌다.

문득 그녀는 그릇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릇은 고무나무의 유액을 발라 마감했는지 텁텁한 흙 맛이 느껴졌다.

외진 곳이라고는 하나 유리와 토기로 제대로 구워 낸 그릇을 사용하는 마을과 비교하면 공예 수준이 매우 미흡했다.

심미적인 장신구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토굴에서 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극도의 효율을 추구한다.

볼품없는 그릇에 비해 담긴 죽은 범상치 않았다.

‘처음엔 체감하지 못했지.’

죽을 먹은 지 3주가 좀 넘어서부터 피부는 투명하고 매끄러워졌고 팔다리엔 힘이 넘쳤다.

볕을 보지 못하는 지하에서 지내는데도 무기력증과 우울증, 기관지 등의 장기 약화 같은 신체적 이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지금 보니 이 죽의 영향인 듯하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처럼 목판과 석판으로 공부를 한 건 아니었지만 태양을 보지 못한 인간이 약해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꼭 사육당하는 것 같네.’

문득 마을의 돼지치기가 정성 들여 기르는 포동포동한 살구색 돼지가 떠올랐다.

그 돼지는 돼지치기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모은 잔반을 끓인 꿀꿀이죽을 먹었다. 돼지치기가 직접 공수해 온 진흙에서 몸을 뒹굴며 한가로운 오수를 즐길 때만 해도 자신이 1년 후에 조각난 상태로 돼지치기의 밥상 위에 오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족스럽게 배부른 상태를 인식하자 묘하게 불쾌해졌다.

돼지치기의 돼지 꼴이 될 일은 없어야 할 터.

‘그래. 아무리 봄에 생식한다고 하더라도 겨울 동안 날 가만히 내버려 두다니, 뭔가 이상하잖아. 심지어 검은 개미도 잠잠하고.’

만약 정말 아무 꿍꿍이 없이 때가 되면 알을 낳게 하려고 자신을 내버려 두고 있는 거라면 개미들은 상당히 안이한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주, 공주. 그릇, 그릇.”

요한나는 그릇을 돌려주길 기다리는 일꾼에게 식기를 건네다 멈칫했다.

“이건 무엇으로 만든 거라고 했지?”

전에는 갖지 않았던 궁금증에 일꾼개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산양 고기. 고기죽.”

개미가 투덜거리듯 대꾸했다. 그릇을 빨리 돌려주지 않는 것이 불쾌한 듯.

요한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이렇게 꺼림칙할까?

산양은 사냥꾼이 겨울나기를 위해 추워지기 전에 잡아 비축하는 사냥감 중 하나다.

겨울에도 검은 산맥의 돌산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걸 발견하면 활에 시위를 걸어 신선한 고기를 얻곤 했으니 아주 익숙한 동물이다. 분명 죽에서는 산양의 냄새가 났다.

‘거짓말은 아니야.’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엔 나도 같이 사냥하면 안 될까?”

“사냥?”

고개를 갸웃하는 충인의 목 관절이 이음매가 선명한 인형처럼 삐걱거렸다. 꿈틀거리는 주먹을 애써 누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라면 요리하는 곳도 괜찮고.”

“……요리?”

“그래. 이 죽을 먹으니 힘이 나는 것 같아. 산양 고기는 나도 좀 알지. 구워 먹으면 기력이 돋긴 하지만 이 죽 같은 효능은 없거든. 일족의 비법이 아니라면 알려 주지 않겠어?”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기에 거절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일꾼이 고개를 젓는 게 아닌가.

그녀는 한쪽 눈을 치켜올렸다.

“안 된다고?”

“비법. 안 돼.”

그 태도가 제법 단호했다.

‘너희가 비법 같은 게 어디 있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비법이 아니라면 알려 달라는 말은 괜히 했나. 좀 흔들면 말하려나?

하나 안 된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젓는 꼴을 보니 갑자기 마음을 바꿀 것 같지는 않았다.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고마워, 잘 먹었어.”

그릇을 건네주자 곧장 반색한다. 창백한 얼굴에 웃음기가 돈다.

그릇 하나로 저렇게 좋아할 수가 있나. 아니, 정말 그릇 때문에 좋아하는 건가?

문득 든 이질감에 요한나가 묘한 눈으로 일꾼을 보며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였다.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 게 미안한지 일꾼개미가 유념할 만한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흰개미.”

“……그놈이 뭐.”

“돌아왔다.”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요 며칠 마음이 유독 평온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검은 개미와 흰개미가 토굴에 없어서였다.

“안 다쳤대?”

“다쳐?”

“다른 군락을 정찰하러 간 거라며.”

갑자기 일꾼개미가 딱딱한 가슴을 부풀렸다. 한껏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두 번 젓는다.

“다치지 않는다. 흰개미, 검은 개미. 무적.”

“운이 좋기도 하지. 팔 한 짝 정도는 없어도 될 텐데.”

빈정거리자 일꾼개미가 일순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가장 짜증 나는 두 놈이 모두 돌아왔단 거야. 지금도 주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너무 안이해져 있어. 당분간은 몸을 사려야겠군.’

그릇을 받은 일꾼개미가 꾸물꾸물 물러가고, 요한나는 나무줄기로 짠 이불 위에 앉았다.

일주일 전, 바닥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자마자 교체된 이불은 촉감이 좋고 꽤 부드럽다. 생각 없이 이불을 쓰다듬는 사이 눈이 슬금슬금 감겼다.

광석 때문에 지하면서도 은은한 빛이 머무는 토굴은 밤낮을 구분할 수 없어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찾아온다.

요한나는 고개를 툭툭 떨구며 꾸벅꾸벅 졸았다.

사삭사삭.

빗자루로 땅을 쓰는 소리 같은 것이 그녀에게로 가까워졌다.

일꾼개미들이다.

토굴의 부스러진 흙 따위를 부지런히 치우다가 요한나가 잠든 것을 보고 다가온 거다.

네 명의 일꾼개미들은 두 명씩 그녀의 양옆에 자리를 잡았다.

접촉하는 감각에 게슴츠레 눈을 뜬 요한나는 어느새 길게 자란 손톱과 발톱을 갉아 대는 일꾼개미들의 모습에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사각사각사각.

일꾼개미들이 그들의 날카로운 손톱으로 손톱 정리를 해 주었다.

손톱과 발톱 정리가 끝났다. 일꾼개미 중의 둘째, 이개미가 허리춤에 달고 있는 기름병을 꺼낸다.

살짝 노란빛이 감도는 달맞이꽃 기름을 손에 붓고 그 손으로 그녀의 피부를 만지작댔다.

흙먼지가 가득한 토굴에 익숙하지 않아 거칠어진 피부에 윤기가 돌고 촉촉해졌다.

‘땅 위에서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이 괴물들에게서 받고 있네.’

반쯤 졸다 말고 쓴웃음을 흘렸다.

* * *

검은 개미와 흰개미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잔뜩 긴장한 요한나는 매일같이 일꾼개미들을 통해 장군들의 동태를 캤다.

어떤 개미들은 인간에 필적한 지능을 갖고 있다지만 일꾼개미는 머리 회전이 다소 둔하고 어리숙해서 요한나가 꼬치꼬치 묻는 말에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성실히 답했다.

“흰개미가 다시 나갔다고?”

“응. 산책, 산책!”

“산책이 어디야.”

요한나는 마음이 탁 풀어져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정말 어지간히 긴장했었군.’

저번처럼 정찰 임무는 아니고 짧은 외출인 모양이지만 흰개미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개미들은 변온 동물이라 겨울에 체온 조절이 필수였다. 그래서 추워지면서부터 겨울을 날 준비를 한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 토굴의 입구를 틀어막으며 바깥출입을 삼가는데, 흰개미는 개미 중에서는 유일하게 밖을 자유자재로 나갈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요한나에겐 그 말이 이들 무리 중 가장 강한 개체가 흰개미라는 것처럼 들렸다. 추운 날씨도 약점이 되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몹시도 불편한 진실이었다.

요한나는 종일을 잠에 취해 보냈다. 반은 바닥에 누워서 잤고, 반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단순히 흰개미의 존재로 인한 긴장이 풀려 그간 부족했던 잠이 몰려온 탓이었으나 이를 알지 못하는 일꾼개미들은 소중한 공주에게 문제가 생겼을까 싶어 노심초사 난리가 났다.

“힘, 보충!”

“동의.”

“죽? 문제? 더, 걸쭉함, 필요.”

“오늘, 무리. 힘, 없음.”

“그럼, 오늘, 나? 아까, 고기, 먹음.”

“……고기? 혼자?”

“…….”

“뭐, 먹음?”

“토끼.”

“혼자?”

“…….”

저것들 뭐 하는 거야?

혹시 무슨 비밀이라도 나눌까 싶어 잠에서 깼음에도 눈을 감고 있던 요한나는 어이가 없었다.

일꾼개미들은 계속해서 속닥거렸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관절이 까딱이며 움직이는 소리가 부산했다. 대화의 속도도 평소보다도 빠르다.

“어쨌든, 오늘, 나. 죽, 만듦.”

“당연.”

“너, 혼자, 먹음.”

“고기.”

“배신.”

‘죽이라는 건 내가 매일 먹는 그걸 말하는 건가?’

개미들이 티격태격하며 토굴 방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요한나는 눈을 번쩍 떴다.

잠을 자느라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며 일어났다. 토굴 방의 출구에 선 채 잠시 머뭇거렸다. 곧 마음을 다잡고 발을 뗐다.

“…….”

흙냄새가 나는 벽에 바싹 붙은 채 청각에 집중했다.

사삭사삭사삭…….

인간보다 가벼운 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 때, 소리가 멀어지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토굴 방은 일정한 간격으로 광석이 박혀 있어 사위를 분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토굴 길은 광석의 수가 토굴 방보다 현저히 적어 보다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바짝 긴장한 채 신중하게 발을 뗐다.

통로는 다소 서늘한 편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 시린 공기를 통해 지상의 추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삭사삭.

‘어디로 들어가는 거지?’

네 마리의 일꾼개미들이 들어간 토굴 방을 확인하고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어둠에 몸을 숨긴 채 토굴 방의 동태를 살폈다.

‘여기로 끌려온 이후 이렇게까지 멀리 온 건 처음이네.’

문득 탈출에 대한 갈망이 들불처럼 치솟았다.

이대로 도망간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야. 섣불리 행동해선 될 일도 그르친다.’

요한나는 그 욕망을 매우 고통스럽게 억눌렀다.

그녀는 사냥을 하기 전의 감이 꽤 정확한 편이었다.

될 것 같으면 성공했고, 어딘가 불안하다 싶으면 예외 없이 어디 한 군데 상처를 입었다.

지금 시도한다면 실패한다.

애초에 욕망만 앞설 뿐, 산재한 장애물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뾰족한 방법도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막혀 있는 토굴의 입구는 어찌할 것이며, 흰개미와 검은 개미가 이 몸에 뿌린 페로몬은 어떻게 해결할 건가.

간신히 이성을 찾은 요한나는 토굴에 등을 딱 댄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몸의 떨림이 가라앉은 후에야 탈출구를 향한 욕망을 꺾을 수 있었다.

한층 뾰족해진 감각으로 은밀하고 신속하게 발을 놀렸다. 거미줄을 타고 매끄럽게 이동하는 거미처럼 토굴 벽을 따라 일꾼들이 들어간 방까지 도달했다.

‘대체 이 안에서 무슨 요리를 한다는 거야?’

외양은 다른 토굴 방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요리를 하려면 주방이 필요하지 않나? 마을처럼 제대로 된 공간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추어야 할 텐데.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토굴 방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역시, 방 안엔 먼저 들어간 네 명의 일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지내고 있는 토굴보다 약간 작았지만 비슷한 구조였다.

토굴 방은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비슷비슷한 듯했다. 적 개미의 공격을 받아 상당히 많은 개체가 죽었다더니, 방이 남아도는 모양이다.

그럼 굳이 여기까지 왜?

답은 하나뿐이다.

‘내 눈을 피해 여기까지 왔다는 거지. 다시 말하면 내게 보이면 안 되는 게 있다는 거야.’

한데 그래도 이상하다.

‘요리를 하러 가는 줄 알았더니?’

직감적으로 이곳에 무슨 비밀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즉시 숨을 죽이고 기척을 없앴다.

어리숙한 일꾼개미들은 그녀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것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요한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안력을 돋우었다. 통로였다면 식별하기 더 어려웠을 텐데 다행히도 광석이 있어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네 명의 개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리고 있는 듯했다.

아니, 속닥거리는 게 아니라…… 잘 보이지 않았다. 토끼 고기를 먹었다는 일개미는 하필이면 등을 보이고 있었다.

답답증이 치밀었지만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몇 분을 지켜보기만 했을까. 일개미의 등줄기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요한나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 * *

우웨웨에에엑.

정신없이 자리를 벗어난 요한나는 막다른 곳에 다다라 허리를 꺾었다. 강하게 틀어막은 입술 사이에서 메슥거리는 신물이 솟아올랐다.

억지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주체하지 못하고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지를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내장이 뒤집혔다.

아주 오래전, 아버지가 사냥꾼으로서의 수업이랍시고 말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추운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얼어 죽은 충인의 몸을 난도질하느라 피가 튄 얼굴로 사냥꾼은 입꼬리를 움찔움찔 떨었다.

‘멍청한 딸아, 사람에겐 음식을 소화시키는 장기가 하나밖에 없다. 그 많은 음식을 하나의 장기가 담당하는 것이지. 그런데 이 충인은 장기가 두 개다. 왜 두 개냐고? 그야 용도가 다르니까 장기도 두 개나 필요한 것이지. 하나는 자기 자신의 먹이를 저장하고, 남은 하나는 동족을 위한 영양분을 담아 둔다. 이 충인은 생김새는 혐오스럽고 성정도 위험하지만, 사는 방식은 꽤 지혜로워. 왜냐하면…….’

요한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그 얘기를 지금까지 기억하지 못했던 거지?

‘개미 군락에서 유충들을 키워 내는 건 일꾼들의 몫이다. 형편없는 이빨로 질긴 고기를 뜯어 먹을 수 없는 추잡한 유충들이 뭘 먹겠느냐? 바로 일꾼들의 영양죽이다. 먹이를 위에서 소화하고 묽게 만들어 토해 낸 그것이 그 벌레 새끼들의 소중한 이유식이 되는 거지. 참 역겹고 재미있는 놈들이야.’

그것 하나만은 정확하다.

역겹다는 것.

“젠장.”

토굴 방으로 돌아가던 중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봤던 장면이 머릿속으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게 그딴 걸 먹였다고.’

여전히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은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훌쩍 사냥을 나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때, 상할 기미가 보이는 저장 고기를 먹고 배탈이 난 적은 있었다.

사냥 실력을 키운 후로는 먹을 게 부족하여 애를 먹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마을의 가난한 집보다 잘 먹고 잘 살았던 그녀였다.

‘먹을 게 없는 것도 아니고 그…… 따위 거를.’

손바닥에 입을 파묻은 채 한참을 굳어 있다 억지로 허리를 폈다.

얼른 토굴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미 너무 멀리 나왔다.

침착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속이 계속 울렁거려 곤욕스러웠다.

얼마간 벽을 따라 걷다가 멈춰 섰다. 어둡기만 한 통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모르겠어.’

아무리 가도 익숙한 토굴 방이 나오지 않았다. 체감상 개미들을 따라 나온 시간보다 시간이 더 흘렀다. 그렇다는 것은 길을 잃었단 뜻이다.

‘하, 이럴까 봐 토굴 벽을 따라 움직였는데.’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니 이런 사달이 난 게 아닌가.

퍽!

주먹으로 벽을 세게 내리쳤다.

‘그놈들이 그런 짓을 해서……. 제 놈들은 토끼 고기를 먹고 나한테는 그런 걸 줘?’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순간 그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머리를 스쳤다.

공주…….

알을 낳을 소중할 개체를 아무렇게나 방치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개미들은 강한 장군과 튼튼한 일꾼을 원한다.

그러려면.

‘강인한 모체가 필요하겠지.’

이제 알겠다. 그녀를 돌보던 일꾼개미들은 단지 그녀를 먹이고 재우는 게 끝이 아니었다.

그들의 진정한 역할은 그녀의 몸을 공주에 걸맞게 만드는 거다.

토사물 따위를 이유식 삼아서.

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먹었던 것들을 모조리 게워 내고 싶었다.

억지로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았다.

‘……일단 얼른 돌아가기나 하자.’

그럼 그 역겨운 ‘죽’을 다시 들이밀겠지.

먹지 않고 그 얼굴에 던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릇을 돌려주면 그렇게 좋아하더니, 그릇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다 먹는 게 중요했던 건가.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던 걸 보면 내가 그걸 싫어할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었나 보지. 그놈들의 머리로 떠올린 생각은 아닐 테고, 누가 조언해 준 걸까. 흰개미? 검은 개미?’

왠지 검은 개미 쪽은 아닐 것 같았다. 그놈은 그녀를 원망하니까, 오히려 싫어하는 걸 강제해서 괴롭히는 방법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흰개미일까…….

‘아무렴 어때. 증오스러운 개미 놈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그때였다.

사삭사삭.

기이한 소음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벽에 몸을 딱 붙였다. 오래지 않아 그녀가 걸어가던 쪽에서 어둠이 납작하게 꿈틀거렸다.

“빨리빨리.”

속삭이는 소리가 귀에 정확히 꽂혀 왔다. 일꾼개미들은 보통 네발로 움직인다. 이 소리는 그들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였다.

사삭거리는 소리가 좀 더 가까워졌다.

곧이어 소곤거리는 목소리도 어둠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흰개미, 귀환.”

“검은 개미, 분노. 공주, 흰개미, 검은 개미의, 문제.”

“공주, 일족, 번영, 필요. 검은 개미, 분노, 누름.”

“다행. 평화, 안정.”

이 일꾼개미들은 아예 단어로밖에 얘기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저놈들에게 필요하다는 말이지?’

뜻을 대략 이해하자 긴장이 다소 풀렸다. 멋대로 방을 나왔다고 무작정 공격할 것 같진 않았다.

일꾼개미들이 막 그녀가 붙어 있는 지점을 지나갔다. 가까워지니 구별이 된다. 그녀가 아는 일꾼들보다 아담한 체형이다.

개중 그녀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일꾼개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요한나는 그들이 알은척을 하면 토굴 방으로 안내해 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일꾼개미는 코를 몇 번 벌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다시 걸음을 재개했다.

사삭사삭.

‘어째서?’

멀어지는 일꾼개미들을 보며 멍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냄새를, 맡았어?’

순간 소름 돋는 직감이 발목에서부터 기어올라 왔다.

방금의 일꾼개미는 눈이 아닌 후각으로 그녀의 존재를 인식했다.

지하에서만 지내는 일꾼개미들은 대체로 시력이 좋지 않아서 청각과 후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를 후각으로 가늠한 뒤 그냥 갔다는 건,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요한나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자신에게 추격에 용이한 페로몬을 묻혔다는 것 정도는 처음부터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저들이 자신을 동족으로 인식할 만큼의, 조치가 되어 있다는 뜻일까?

이를테면 동족 페로몬 같은…….

‘하지만 어떻게?’

토굴 방에 들어간 첫날 이후 흰개미와 검은 개미는 만나지도 못했는데.

아무리 페로몬이 끈질겨도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고 물에 씻으면 씻겨 나갈 터.

‘그게 그렇게 오래 남아 있을 리가 있나? 페로몬을 계속 주입받는 게 아니라면.’

불현듯 일꾼들이 성실하게 건네던 그릇이 떠올랐다.

‘그 죽.’

요한나는 생각을 멈추었다.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몇 번 삼켰다.

‘그 죽이 몸을 변화시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페로몬이 나오도록 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매끄럽고 탄력이 생긴 피부에 강인한 체력, 그리고 페로몬까지.

변화한 이 몸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상냥하게 웃는 바렌타와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 마을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까드득.

악착같이 이를 악문 요한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그때였다.

저벅저벅.

긴장한 요한나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곧 토굴의 어둠을 뚫고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의 성인 남성보다 머리 하나, 아니 두 개는 높은 듯한 큰 키에 쩍 벌어진 어깨. 위압적인 허벅지의 근육과 한 대만 때려도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을 두꺼운 손. 어둠에 녹아들 듯 몸에 두른 새카만 천까지.

남자는 꿈에 나올까 무섭게 음산한 모습이었다.

‘검은 개미!’

요한나는 숨을 멈추었다. 일꾼들과 달리 두 발로 똑바로 걷는 검은 개미는 못마땅한 일이라도 있는지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한나는 그의 분노에 자신이 관련되어 있지 않기를 바랐다. 긴장에 휩싸여 손가락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토굴의 모든 어둠을 끌어와 이곳에 두르고 싶었다.

제발, 어두워서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일꾼개미들처럼 동족으로 인식하고 그냥 지나갔으면.

그러는 사이 거리가 훅 가까워졌다.

막 그녀의 앞을 지나가던 검은 개미가 킁, 코를 실룩거렸다. 요한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이 냄새…….”

사포로 비빈 것처럼 거칠게 쉰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흩어져 그녀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정확히 요한나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검은 개미가 입을 틀어막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잉크를 머금은 것처럼 새카만 눈을 보며 요한나는 신음했다. 검은 개미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아아, 공주가 거기 있구나.”

검은 개미는 거리를 가늠하듯 정면의 통로를 보고 다시 그녀를 보았다. 인간의 것과 다를 거 없는 콧잔등이 연신 실룩거렸다.

요한나는 그가 자신의 냄새를 흡입하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도망, 가려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검은 개미가 가로로 긴 입매를 휘었다. 히죽, 하고 웃는 듯한 그런 입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쇳소리가 급격히 스산해졌다.

비 내리는 겨울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괴물의 손이 목을 움켜쥐는 듯했다.

요한나는 바들바들 경련하는 손을 힘껏 말아 쥐었다. 그마저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증오가 올올이 박힌 싸늘한 안광이 그녀를 직시했다.

“간교한 사냥꾼의, 딸답게.”

* * *

“끄으윽……!”

머리채를 붙들린 요한나는 짐짝처럼 바닥에 질질 끌려가며 검은 개미의 두꺼운 손목을 붙잡아 손을 떼어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검은 개미는 여느 때처럼 고목나무와 같이 단단해서 그녀가 아무리 손에 힘을 주어도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몇 번 그의 괴력을 겪어 본 요한나는 빠르게 포기하고 즉시 행동을 수정했다.

주먹 쥔 오른손으로 검은 개미의 살짝 튀어나온 무릎을 가격했다.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한 근육보다는 삐걱거리는 관절을 노린 거다. 타격이 유효했던지 괴물 같은 몸이 휘청거렸다. 금세 균형을 잡았지만 빈틈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대신 대가는 있었다. 거센 악력이 머리카락을 잡아 흔들었다.

머리털이 뽑혀 나가는 통증은 흡사 혼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옷 같지도 않은 얇은 천 하나만 몸에 두른 탓에 무릎이 온통 갈렸던지라 다리에 힘을 주지도 못했다.

검은 개미는 머리채를 움켜쥔 힘만으로 그녀를 눈높이까지 끌어 올렸다.

두피가 뜯겨 나갈 것 같아 요한나는 이를 악물었다. 머리 가죽이 들린 만큼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간 눈으로 검은 개미를 힘껏 노려보았다.

그가 예의 그 히죽거리는 웃음을 띠고 머리채를 잡은 손을 장난감을 다루듯이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얼마든지, 해.”

“크윽!”

“내 화만 돋을, 뿐이거든.”

검은 개미가 다시 이동했다. 이전보다 난폭한 움직임에 요한나의 허벅지와 엉덩이가 토굴의 울퉁불퉁한 바닥을 빗자루처럼 쓸었다. 살갗이 벗겨지는 통증에도 요한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얼마든지 해 보라고? 그렇게 말한다면 기대에 부응해 줘야지.

그녀는 싸늘한 웃음을 머금고 바닥을 더듬었다. 작은 돌덩이가 잡혀 얼른 손에 쥐고 주먹을 말았다.

휘익!

무릎 관절을 부숴 버릴 기세로 휘둘렀다.

퍽!

손이 무릎을 후려쳤다.

“큿!”

처음으로 검은 개미의 입에서 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화난 손에 힘이 더해져 이제는 머리 자체가 분리될 것 같았지만 요한나는 목에 힘을 주어 참고는 재차 손을 휘둘렀다. 무릎을 박살 낼 때까지 빠른 속도로 칠 생각이었다.

주먹이 무릎에 닿으려는 찰나, 그녀의 몸이 뒤로 던져졌다.

쿠당탕!

생존 본능을 발휘하여 몸을 둥글게 말아 토굴 바닥을 구른 요한나는 재빨리 일어나려다 검은 개미의 발에 허리가 차여 뒤로 나뒹굴었다.

퍽!

검은 개미를 세워 둔 채 누워 있는 건 최악이었다. 오뚝이처럼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려는 그녀의 배를 커다란 발이 꾹 내리눌렀다.

“커억!”

내장이 터질 듯해 요한나의 입에서 괴로운 기침이 터져 나왔다.

“헉, 흐윽.”

숨을 몰아쉬며 위를 올려다보자 신발을 신지 않았음에도 발바닥이 어지간한 인간들의 신발보다 두껍고 거친 검은 개미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요한나는 지지 않고 그를 형형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뒤늦게 원래 있던 토굴 방으로 돌아왔음을 인식했다.

검은 개미의 무릎을 힐끗했다. 멀쩡하다.

‘분명 손맛이 있었는데…….’

큰 타격은 주지 못한 모양이다. 요한나의 얼굴에 패배감이 스몄다.

검은 개미의 뒤로 식겁한 일꾼개미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댔다. 그중 한 명이 그릇을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괜히 속이 요동친다.

그때 검은 개미가 발에 힘을 주었다.

“윽……!”

토할 것 같은 속이 더더욱 울렁거렸다. 미칠 노릇이다.

그녀의 괴로운 표정에 일꾼개미들이 하얗게 질렸다.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삼개미가 서둘러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래. 누구라도 데리고 오라고.’

“건방진.”

검은 개미가 뱀처럼 식식댔다.

“건방진 잡종!”

온전히 시선을 그에게 고정했다.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얼굴을 보는 게 지독하게 두렵고 긴장이 됐는데 말이다.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자 공포보다는 분노가 앞선다.

원한인지 증오인지 모를 감정으로 진득한 시선도 우습기만 하다.

‘네가 내 아비로 인해 날 원망한다면 난 날 유린한 네게 또 다른 원망을 품은 거야.’

증오의 크기를 따지자면 자신의 것이 더 커야 마땅했다.

요한나는 더는 검은 개미가 두렵지 않았다.

퉤!

검은 개미가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진득한 타액을 흘끗하고는 그녀를 바라본다.

표정 없이 정적인 얼굴은 오싹했다.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그러나 그에 굴할 것 같으면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지도 못했을 터였다.

“퉤…… 컥!”

검은 개미가 그녀의 배를 터뜨릴 것처럼 밟아 댔다. 조금이나마 충격을 면하겠다고 몸을 뒤틀다가 허리를 가격당했다. 입매가 괴롭게 일그러졌다.

배 정중앙을 맞는 것보다는 나았으나 옆구리의 통증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고통을 다스리려는 그녀의 발목이 허공에 떴다.

요한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검은 개미가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쥐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음산하게 웃는다. 앞으로의 일을 알려 주는 듯한 불길한 미소.

정신이 쑥 빠져나갔다.

“으, 으아아아!”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는 순간, 손이 가차 없이 돌아갔다.

빠각.

소름 끼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새카만 동공이 확장되었다.

“……아아아악!”

짧고 굵은 비명이 토굴을 쩌렁쩌렁 울렸다.

검은 개미가 후련한 표정으로 발목을 놓았다. 발목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덜렁거렸다.

요한나는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이상하게 어긋난 왼쪽 발목을 떨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잡종. 넌 어차피, 다리가 필요, 없잖아?”

나갈 수 없을 테니까.

검은 개미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요한나는 눈이 뒤집혔다.

벌써 두 번째다. 두 번이나 꺾인 발목은 전과 달리 말끔히 낫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냥꾼으로서의 정체성은 끝이다. 맹수에게서 도망칠 수 없게 될 테니까. 사슴처럼 겅중겅중 빠르게 산을 오르내릴 수도 없게 될 거다.

검은 산맥에서 다친다는 건 생명력이 깎인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엔 나았을지 몰라도 알게 모르게 피해가 안쪽에 누적되는 법이니.

그걸 장난감의 팔다리라도 꺾는 것처럼 쉽게 표현하는 검은 개미에 대한 적개심과 살심이 끝없이 솟구쳤다.

그러나 정작 검은 개미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한발 늦게 요한나는 검은 개미의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시선도 입구를 향했다.

닭똥처럼 커다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일꾼개미의 앞에 그가 서 있었다.

‘흰개미.’

이쪽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그렇듯이 시릴 정도로 무정했다.

“이번에도, 한마디, 해 보지 그래?”

검은 개미가 도발적인 시선을 던졌다.

뭘 할 때마다 흰개미의 방해를 받았던 것이 아니꼬웠던 게 틀림없었다.

요한나는 속으로 검은 개미의 아둔함을 비웃었다.

흰개미가 검은 개미의 행동을 제한할 때는 오로지 그녀의 목숨을 해하려 할 때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알을 낳을 수 있는 암컷이니까.

흰개미는 지독하게 이성적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종족의 번영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걸 달리 뭐라고 표현하겠는가.

그 증거로 흰개미는 검은 개미가 그녀를 해하는 두 순간에 철저히 방관했다.

첫 번째는 검은 개미가 그녀의 발목을 분지르고 강제로 교미했을 때이며 두 번째는 지금이었다.

흰개미는 검은 개미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그냥 요한나의 상태를 흘끗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요한나는 처음에 그 동작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나 곧 깨달았다.

흰개미는 검은 개미의 말에 동의를 표한 거다. 공주에겐 다리가 필요 없다는 말에.

분노로 눈앞이 노래졌다.

이 두 충인 앞에서 그녀는 한낱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

놀이 목적이든, 액받이 목적이든, 목적이 분명한 쓰임새 있는 인형 말이다.

“저 정도는.”

“…….”

“먹으면, 나아.”

여상히 말하는 흰개미는 완벽하게 빚은 하얀 가면을 덮어쓴 것처럼 무심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심지어 이 토굴이 무너져도 눈썹 하나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그 태연함에 요한나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우스운 사실은 그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다.

검은 개미도 얼굴을 구겼다.

“흥.”

흰개미가 자신을 찾아온 삼개미를 응시했다. 삼개미가 잔뜩 조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조심조심 요한나에게 다가왔다.

‘미친 자식들.’

요한나는 발목에서 올라오는 욱신거리는 통증과 열감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됐다. 우선은 탈구된 게 분명한 발목을 빨리 정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눈을 바로 뜨고 만지기도 두려운 발목을 붙들어 틀어진 뼈를 맞추었다.

“크으윽!”

악문 이가 시큰거렸다. 고통을 가까스로 삼키고 나자 까맣게 변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벌벌 떠는 삼개미의 얼굴이 인식되었다.

“아아, 아아. 공주. 아아.”

눈물에 잔뜩 젖은 눈을 하고 삼개미가 죽 그릇을 들이밀었다. 고통과 역겨움. 요한나는 하얗게 질린 채로 고개를 돌렸다.

“필요 없어.”

죽 그릇은 쳐다도 보지 않고 한 말에 삼개미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에 대고 이를 갈았다.

“평평한 나무판자를 가져와 줘. 또 뼈가 잘 붙는 약도.”

“약?”

“그래. 너희도 다칠 때가 있을 거 아니야.”

삼개미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움찔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검은 개미가 깔깔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거야말로, 필요, 없는 것이지.”

그가 요한나를 보며 히죽거렸다.

“다리는 낫지 않아도, 돼. 약, 도 필요가 없다. 왜? 도망갈 게, 아니라면.”

검은 개미는 요한나의 속을 꿰뚫고 있다는 듯 기분 나쁘게 웃었다.

‘아둔한 개미 새끼 주제에.’

싸늘하게 노려보며 흰개미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필요해. 이런 변변찮은 곳에서 다친다면 체력이 떨어져 곧 죽게 돼. 멍청해서 그것도 모르는 거야?”

검은 개미가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들의, 교활한 주둥이를 내게 놀리려고, 하는군.”

“난 사실을 얘기하는 거다. 도망을 가? 사방에 너희 같은 것들로 둘러싸인 여기서 내가 무슨 수로?”

요한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말주변이 없어 마을에서도 발랄한 처녀들을 보면 은근히 주눅이 들었지만 더듬거리는 충인이 상대다 보니 없던 자신감도 솟는 것 같다.

가공할 괴력이 두렵지, 충인의 멍청한 머리 따위야 속여 넘기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선 내가 말한 게 필요하다는 뜻을 지속해서 드러내며 흰개미의 동태를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다. 무심한 낯은 일견 귀찮아하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약을 줘. 나를 병들게 할 게 아니라면.”

단호한 말투로 요구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검은 개미가 흰개미를 돌아보았다. 요한나의 시선도 그에게로 옮겨졌다.

장내의 시선이 그를 주목했다.

곧 흰개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약은, 없어.”

검은 개미가 킬킬거렸고 요한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리의 통증이 줄어들고 있었다. 요한나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그것이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게 아니라 신경이 일정 부분 마비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다.

모든 상처는 빠른 처치가 관건이었다. 먼젓번에도 상처를 오랜 시간 방치한 탓에 다시는 걷지 못할 뻔하지 않았나.

그 일로 예후가 좋지 않은데 또 이런 식으로 다쳐 버렸으니 큰일이다. 그녀는 마음이 퍽 조급했다.

흰개미가 일꾼개미에게서 그릇을 가져가 그녀의 턱 아래 들이밀었다.

“죽, 약 대신.”

“……이건 필요 없다 했잖아.”

죽에서 올라오는 고기 냄새가 비강을 찔렀다. 식었지만 식욕이 돋게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났다.

이전이라면 입맛을 다시며 한 번에 들이켰겠지만 이게 뭔지 알고 있는 지금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왜?”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거절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약이 필요하다, 했지? 죽의 효과가 약보다 좋다. 그러니.”

“…….”

“먹어.”

물론 한 달이나 죽으로 연명한 요한나는 이것의 효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효과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역겨웠지만 이걸 취함으로써 생길 변화도 두려워, 절대로 먹을 생각 없었다.

흰개미가 딱딱하게 명령했다.

“먹어.”

좀 더 가까워진 그릇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참지 못하고, 결국 요한나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철퍽!

그릇에서 흘러넘친 죽이 역겨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땡그르르…….

그릇이 바닥에서 뱅글뱅글 돌다 쓸쓸히 멈추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검은 개미는 팔짱을 꼈고 일꾼들은 더듬이를 세우듯 머리털을 쭈뼛거렸다. 그리고 흰개미는.

그는 그냥 조용히 말했다.

“다시, 갖고 와.”

화난 기색은 하나도 없이, 더러워졌으니 치운다, 내지는 엎어졌으니 채운다, 할 일을 하듯 구는 태도에 요한나는 긴장을 푸는 한편 어깨를 떨었다.

흰개미라는 개체는 최악이다. 그녀가 눈앞에서 어떤 발악을 하든 저 빌어먹을 무표정으로 제압하고 토굴에 집어넣을 것 같았다.

‘그러고는 알을 낳게 하겠지. 내가 더는 건강해지지 않게 될 때까지.’

그 뒤로는 새로운 암컷을 납치해 공주로 삼을 것이다. 일련의 과정에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그는 정말 그렇게 행동할 게 분명해서, 요한나는 분노할 의욕도 사라졌다.

“안 먹을 거야. 저딴 거, 절대.”

“지금까지, 잘, 먹더니 왜?”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떨어진 죽을 보더니 알겠다는 듯한 얼굴을 한다.

“아, 알아 버렸군.”

일꾼개미들의 입막음을 한 게 누구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역시 너였구나.’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얼굴을 하는 흰개미가 죽도록 미웠다.

“역시, 인간은, 귀찮아.”

그녀가 무슨 눈빛을 하든 무슨 표정을 하든 흰개미는 조금도 난처해하지 않았다. 그가 일꾼개미에게 시선을 주었다.

엎어진 죽이 아까운지 침을 꼴딱꼴딱 삼키던 일꾼들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이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든지 제공하겠다는 태도다.

역겨운 기분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검은 개미나 흰개미나 똑같다.

똑같이 증오스러웠다.

* * *

결국 다리가 어긋난 채로 붙어 버렸다.

부목을 하지 못한 발목이 최대한 바르게 붙도록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이 살짝 틀어지는 걸 막지 못한 탓이다.

절뚝이는 걸음걸이를 확인하고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몸에 힘이 없으니 감정이 더 서럽게 북받쳐 올랐다.

그날 이후 4일째,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토사물, 아니, 죽을 거부하면 비축 식량이라도 주면 될 텐데 이 치사한 벌레 놈들은 죽만 먹을 수 있다는 듯 한사코 죽 그릇만 내밀었다.

그 덕에 ‘공주’인 자신이 죽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일꾼개미들은 그녀가 거부할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구르더니 이틀이 지나서는 검은 눈동자에서 눈물을 쭉쭉 뽑았다.

3일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세 명이 달라붙어 강제로 먹이려 했다.

기력이 없었던지라 갑작스러운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한 모금을 허용했는데, 의기양양해진 개미들이 기세를 몰아 모조리 입에 들이부으려 할 때 정면에 있던 일꾼개미를 머리로 들이받아 저지했다.

일꾼개미들은 그 이후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요한나가 노련하게 움직여 그들의 관절을 꺾자 꺼이꺼이 울며 강제로 급여하기를 포기했다.

바보, 멍청이, 공주! 바보, 멍청이, 공주!

빽 소리를 지르는 건 싹 무시했다.

“대체, 왜? 왜, 안 먹어?”

울먹거리며 묻는 말에 힘없이 대꾸했다.

“이대로 굶어 죽지 뭐.”

그러면서 씨익 웃자 일꾼개미들의 안색이 허옇게 떴다. 진심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조금만 더 버티는 거야.’

요한나는 이렇게 죽을 거부하다 보면 결국 일꾼개미들이 비축 식량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소중한 공주를 굶겨 죽이기야 하겠는가?

‘아직 알도 낳지 않았으니 더하겠지.’

쓸모를 다하지 않은 인형을 내버리는 아까운 짓을 누가 한단 말인가.

그녀가 자학에 가까운 생각을 하는 동안 눈빛을 교환한 일꾼개미 중 두 명이 슬그머니 토굴 방을 빠져나갔다.

“공주.”

토굴 벽을 향해 누워 있던 요한나는 눈을 번쩍 떴다. 자동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나름 신속하다고 생각했지만 건강했던 때와 비교하면 퍽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핀 흰개미가 눈을 내리깔았다. 기세가 자못 심상찮았다. 요한나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힐끗 좌우로 눈을 굴렸다.

토굴 방의 입구엔 무표정한 흰개미, 그리고 눈썹을 실룩거리는 검은 개미가 서로 거리를 둔 채 서 있었다.

검은 개미처럼 옆으로 널찍하지는 않지만 흰개미 역시 마을 사내들과 비교하면 머리가 두 개는 크고 체구가 단단했다. 그런 건장한 체격의 장군이 두 명이나 있으니 입구가 꽉 차 어지간히 답답해 보였다.

요한나에겐 입구가 막힌 것처럼 보일 지경이라, 마치 묵직한 바위가 굴러오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왜?”

“…….”

“왜, 안 먹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투로 흰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몰이해의 대상을 보는 듯한 붉은 눈동자는 투명해서 안이 그대로 비쳐 보일 것 같았다.

요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그런 걸…… 그따위 것을 먹을 것 같아? 난 분명히 말했어. 먹지 않는다고.”

“왜?”

흰개미가 즉시 물었다. 요한나는 말문이 막혔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흰개미는 너무나 차갑고 투명하여 외려 무구하게까지 느껴지는 시선으로 맞부딪쳐 왔다.

“……역겨워.”

“하지만, 먹지, 않으면 넌 죽는다.”

죽음을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잠시 멍해졌던 요한나는 이를 악물었다.

“맛도 없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아.’ 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원하는 것, 말해. 참고, 하지.”

‘그걸 먹어 토사물로 만들려는 거겠지.’

일꾼개미들에게 아무리 사슴 고기, 아니, 작은 토끼 고기라도 좋다고 말해 봐도 돌아오는 건 늘 고기 냄새가 나는 영양죽이었다.

대부분의 요구를 잘 들어주었던 일꾼개미들은 죽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었다. 흰개미가 명령했을 테니 더 맹목적이겠지. 직접 지시한 흰개미가 신선한 고기를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요한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영양죽을 먹지 않고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검은 개미가 음산하게 말했다.

“잡종, 알고 있다.”

흰개미가 그를 바라보았다. 요한나도 경계하는 시선을 보냈다.

“공주.”

흰개미가 정정하듯 말하자 검은 개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요한나가 보기엔 짜증을 내는 것 같았다.

“잡종, 공주. 흥.”

이번에는 흰개미도 조용했다. 공주라고만 부르면 상관없는 모양이다.

요한나는 정확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흰개미가 무척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죽에, 페로몬, 존재, 아는 게, 분명해.”

흠칫.

검은 개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한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속내를 정확히 찔려 낭패한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건가.

‘강제로 먹이는 수밖에 없겠지.’

멀쩡할 때도 저항하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기력이 없는 몸으로는 한 손으로도 제압당할 것이다.

‘억지로 먹인다면 혀를 깨물어 주지.’

내심 필사의 각오를 하고 있었다.

“싫으면, 먹지, 마.”

그러나 검은 개미는 순순히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다. 요한나가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입술을 찢어 활짝 웃는다. 날카로운 이빨이 한눈에 드러나는, 말 그대로 활짝 웃음꽃이 피어났다. 비록 악취로 썩어 가는 시취꽃 같았지만.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되니.”

검은 개미가 휘파람을 불 때처럼 입술을 모았다. 동그랗게 변한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새어 나왔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순간 토굴 방 밖으로 기척이 느껴졌다.

사삭사삭.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낀 요한나가 흰개미 쪽을 보았다. 소용없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 반응으로 알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목숨의 위협은 없을 거라는 거.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사삭사삭.

토굴 방 밖의 기척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한나는 입을 벌렸다. 통로를 빼곡하게 채운 건 일꾼개미들이었다.

이제 일꾼개미 하나하나는 별로 새로울 게 없다. 문제는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거다.

‘뭘 하려는 거지?’

요한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 검은 개미가 흣, 흐읏 하고 이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족의, 페로몬은 공주를, 공주로, 만든다. 교미야말로 일족의 공주가, 되는, 필수 조건, 이지.”

“……!”

빠르게 물러나는 요한나의 시야에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일꾼개미들이 가득 찼다.

창백하고 푸르스름한 피부에,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정확히 직시했다.

시선에 갇힌 느낌에 전신이 오싹했다.

요한나는 검은 개미에게 발목을 꺾였을 때보다 더한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저도 모르게 다시 흰개미를 보았다. 곧 눈에 절망이 어렸다.

흰개미가 한 발 뒤로 물러선 것이다. 그가 물러선 자리에 일꾼개미가 밀려들어 왔다.

의도가 뚜렷했다. 검은 개미의 행동을 묵인하려는 거다.

‘저자에게 뭘 기대한 거야?’

흰개미의 방관은 뼈에 사무치도록 익숙하지 않나!

요한나는 도움을 청하듯 그를 찾은 자신의 행동을 비웃었다.

개미들이 손을 뻗었다. 재빨리 쳐 내고 발로 찼지만 고작 한둘만 나가떨어졌을 뿐, 그보다 많은 개미들이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이익!”

온갖 애를 쓰며 아등바등했다. 그러나 차가운 손이 몸에 닿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징그러울 정도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슴을 움켜쥐고 다리를 매만졌다. 누군가 발목을 붙잡아 당겼다.

“앗!”

균형을 잃은 요한나는 그 순간 그녀의 뒤를 점한 일꾼개미의 품에 떨어졌다. 일꾼개미들은 더는 거칠 것 없이 움직였다.

다리를 더 끌어당겨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다시 가슴을 움켜쥐고 얇은 천 아래로 손을 넣어 쏙 들어간 허리를 쓰다듬었다.

긴 혀를 내밀어 손목을 맛보고, 가슴을 빨며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차갑고, 매끈한, 이질적인 감각.

요한나는 발작했다.

“꺼져, 꺼져…… 꺼져어!”

정신없이 손을 쳐 냈지만 곧 역부족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뿌옇게 변한 시야로 바글바글한 일꾼개미 무리 뒤로 웃으면서 빠져나가는 검은 개미가 보였다.

이어 흰개미 역시 몸을 돌렸다.

요한나는 멀어지는 그 등을 바라보았다.

곧 왜소한 체구의 일꾼개미가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 다가왔다.

꿈틀대는 손 사이로, 요한나는 결국 비명을 질렀다. 도와 달라는 간절한 바람이 고기 속 핏물처럼 밴 비명이 토굴 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츠즛, 츳. 흥분에 찬 개미들의 표피가 저들끼리 마찰하는 소리 사이로 절망의 울음소리가 샜다.

바렌타, 바렌타!

간혹 동아줄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하나 지하 깊이 위치한 토굴에 동족이 아닌 인간을 도울 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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