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날이 훅 쌀쌀해졌다. 이번 겨울의 길목은 몹시 춥고 쓸쓸했다. 까마귀 떼가 무리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가장 먼저 날씨를 예감하는 짐승부터 무거운 공기와 함께 닥쳐오는 겨울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다.
이번 겨울은 퍽 고단하리라.
예년 같았다면 오두막 뒤쪽 창고에 나무를 잔뜩 해 놨을 테지만 요한나의 창고는 거의 텅텅 빈 채였다. 작년부터 틈틈이 채워 놓은 마른 장작만 조금 있을 따름이다.
일주일간 회복에만 집중한 결과 발목이 생각보다 빨리 붙었다. 뛰거나 짐승을 상대할 정도로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부목을 뗄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강인한 체력에 감사했다. 붕대 정도야 두껍고 폭이 넉넉한 사냥꾼의 신발을 신으면 충분히 감출 수 있다.
입을 것, 먹을 것, 단도 등 필요한 것들을 흙먼지색의 커다란 가방에 집어넣었다. 뒤에 메면 등이 거의 가려지는 크기의 가방은 먼 곳까지 원정 사냥 갈 때 쓰곤 했다. 아주 튼튼해서 마을에 내려가서도 쓸모가 있을 거다.
가방을 등에 멘 요한나는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망가진 가구가 있던 자리들이 텅 비어 살풍경했다. 깨진 창문도 여전했다.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고치러 오는 게 좋겠어.
장갑을 낀 손으로 오두막의 문을 어루만졌다. 이곳을 버리고 떠나려니 마음이 묘하게 울적했다. 그래도 설레는 게 더 크다.
곧 인생이 바뀔 거다. 검은 산맥의 사냥꾼에서 평범한 마을의 한 사람으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불안하게 뛰었다.
‘걱정 마. 외진 곳에서 자기들끼리만 친하게 지내서 낯선 것뿐이야. 곧 너를 좋아하게 될걸. 나처럼.’
바렌타의 부드러운 음성을 되새기고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손바닥보다 큰 옹이가 다섯 개나 군데군데 박힌 떡갈나무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산길을 내려가며 눈으로 떡갈나무부터 찾은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바렌타가 손바닥만 하게 보인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요한나는 빠르게 다리를 놀리며 오랜만에 보는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일주일이라면 짧은 기간인데 그는 한층 더 성숙해지고 멋있어진 것 같다.
따뜻해 보이는 붉은색 코트를 걸치고 안에는 갈색의 소박한 튜닉을 입었는데, 자칫 투박해 보일 수 있는 것이 그의 단정한 인상에 잘 어울렸다.
아래 입은 검은색 호즈는 다리에 딱 달라붙지 않고 넉넉했다. 그 위에 검은색 허리띠를 차고 발목 위 종아리까지 감싸는 암갈색 부츠를 신은 것까지 흠잡을 데 하나 없이 깔끔하다.
이맘때쯤 마을은 겨울이 오기 전 검은 산맥에서 사냥을 즐기기 위해 부유한 청년들이 방문하는데 상의는 매우 화려하고 하의는 근육의 움직임까지 보일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요한나로서는 실용성도 없어 보이고 예쁘지도 않은 차림을 왜 하는지 의아하기만 했는데 마을 청년들은 그렇지 않은지 그들이 방문하는 철만 되면 그들처럼 입는 청년들이 생기곤 했다.
바렌타는 그런 유행에 휩쓸리지 않았다. 요한나는 바렌타의 차림이 그를 더 멋스럽게 해 준다고 생각했다.
바렌타가 품에서 작은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테두리를 금으로 마감한 시계는 그의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받는 물건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곧 아버지 롯타의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라 떠들었다. 바렌타는 마을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다.
요한나는 그가 시계를 꺼내는 것을 보고 걸음을 더 빨리했다. 금방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거리가 꽤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뛰고 싶었지만 벌써부터 다리가 욱신거렸다. 뛰다가 절뚝이는 걸 보인다면 걱정을 사고 말 거다.
입을 벌려 그의 이름을 소리치려는 찰나.
목덜미가 오싹했다.
구름이 물러나며 해가 나타나자 머리 위에서부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요한나는 천천히 고개를 젖혀 위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 우거진 거대한 나뭇가지를 창백한 발이 밟고 있었다.
그것은 몹시 길쭉하고 거대하지만, 자연물에 동화된 듯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얀 머리칼이 나뭇잎보다 부드럽게 살랑거린다.
요한나는 뻣뻣한 목을 움직여 주변을 훑어보았다. 왼쪽 검은 덤불 위에 검은 그림자가 솟아나 있었다.
본능적인 두려움과 욕지기가 솟아 입술을 깨물었다.
“혼혈, 어딜 가는 거지?”
살기 어린 눈으로 검은 개미가 속삭였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째서 또?
이들은 정확히 그녀를 찾아왔다.
암컷이니 공주니 지껄여 댔던 게 떠오른다. 이제껏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효용 가치가 없다 생각해서 드디어 죽이려고?
‘내가 여기서 죽는 건 괜찮아.’
하지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바렌타.’
그가 다시 시계를 확인하고 있다. 입술에서 피 맛이 난다.
소리가 멀리 퍼지는 산의 특성상 전투가 일어난다면 바렌타가 이쪽의 상황을 눈치챌 거다.
아무것도 모르고 다가올 바렌타가 이 괴물들에게 발견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했다.
입이 벌어져 있음을 인식한 건 차후였다.
요한나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겁먹은 표정이 떠올랐다.
충인들이 자신을 해하는 게 아니라, 바렌타가 그들에 의해 못 볼 꼴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
‘바렌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만 같다.
‘적어도, 한마디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살려 달라거나 구해 달라는 말이 아니야. 바렌타에게 기다리지 말아 달라는 정도만이라도. 아니, 나중에 마을에서 만나자는 말만이라도…… 혹시라도 내가 살 수 있다면 반드시 찾아갈 테니까.’
덜덜 떨던 요한나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아니, 그뿐만은 아니야.
‘이렇게 사라지는 건 싫어!’
오로지 그녀 스스로를 위한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 속으로는 악다구니를 써 대도 입술은 아교를 붙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욕망도 바렌타의 안녕보다 우선하지 못했다.
결국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림자를 속절없이 보기만 했다.
그 순간 뇌리에 강렬히 틀어박힌 붉은색. 여전히 무심한 눈동자는 꼭 죽음을 몰고 오는 듯했다.
곧 무너지는 벽에 깔리는 것처럼 극심한 고통이 밀어닥쳤다.
‘이렇게 죽는 건가…….’
* * *
눈을 떴을 때, 요한나는 눈을 떴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고 말았다.
‘죽지 않았어?’
콧속을 뭉툭한 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눅눅한 흙냄새와 어둑한 시야엔 두 번째로 놀랐다. 놀랐다기보다는 어안이 벙벙했다.
‘여기가 어디야?’
죽어서 다른 세상으로 온 걸까.
그녀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지만 마을에는 천국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말이 맞았던 걸까. 그럼 이곳은 지옥일까.
몸을 살짝 움직이자 격렬한 통증이 올라왔다. 허리를 꺾은 요한나는 바들바들 떨었다.
‘지옥 따위가 아니야.’
주먹으로 쾅쾅 쑤시는 듯한 뒷덜미의 격렬한 통증. 죽은 것도, 사후 세계에 오지도 않았다.
오래전 홀로 첫 사냥에 나가 절벽임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비탈길을 굴렀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요한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도록 가만히 있었다.
얼마간 지나자 까만 어둠이라고 생각했던 눈앞이 흙으로 된 벽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벽?
눈을 굴렸다가 생각을 수정했다. 이곳은 굴이다.
‘언젠가 땅속에서 사는 사냥감을 추격할 때 이런 토굴을 지나간 적이 있어.’
좁고 어둡고 기묘하게 따뜻하면서 바짝 마른 흙에서 나는 건조한 냄새가 났다.
이곳은 습도 조절이 되어 있는지 공기가 따뜻했고 약간의 축축함도 느껴졌다.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장갑을 벗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비벼 보자 물기를 머금은 흙이 바스러졌다.
대체 이곳은 어디지? 왜 나를 죽이지 않고 이곳으로 데려온 거야?
그녀는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두 충인들을 의식하며 주변에 기감을 퍼뜨렸다.
아주 고요했다.
불길할 만큼.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야 요한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예상대로 그녀가 있는 곳은 토굴이었다. 그것도 꽤 컸다. 일어나서 돌아다녀도 될 것처럼 천장도 높았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얼핏 자연 상태의 동굴과도 비슷했으나 충인들의 소굴이 분명하다.
토굴의 벽 군데군데 박힌 납작하고 둥그스름한 돌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이 나는 돌은 놀랍게도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는데, 틀림없이 인위적인 손길이 닿은 것이다. 긴장한 어깨에 슬며시 힘이 들어갔다.
요한나는 입구로 보이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곳 어딘가에 그 충인들이 있겠지. 그들에게 당한 일을 떠올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아프게 짓씹었다.
원한은 끝난 줄 알았다.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고도, 인정하긴 싫지만 조금은 생각했었다.
살면서 그렇게 무기력함을 느껴 본 적이 없어 뇌리에 단단히 각인된 순간이었다. 쉽게 극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기어이 목숨을 거두러 왔나 했는데.’
그런데 이리 살려서 소굴로 데려오다니, 그것도 손발을 묶어 놓지도 않고 말이다.
‘우습게 보는 건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요한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뭐 하나 뚜렷하게 답이 나오는 게 없었다. 어쨌든 손발이 묶이지 않은 건 다행인 일이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놈들이 다시 올 때까지 이곳에서 얌전히 기다릴 수는 없었다. 바렌타를 만나러 가야 한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결심한 요한나는 다리와 손을 살짝 돌려 보았다. 뒷머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문제는 없었다. 안도하며 숨을 크게 내쉬는 찰나, 찌르는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요한나의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입구의 정반대 쪽, 어둠을 옷처럼 두른 충인이 기둥처럼 서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온몸이 긴장 상태로 돌입하며 팔다리가 경직되기 시작했다. 각인된 공포가 발끝에서부터 그녀를 날카로운 벌레처럼 좀먹었다.
“너 따위가.”
예의 그 사포로 긁는 듯한 쇳소리가 났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목소리였다. 요한나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감히, 라는 말이 생략된 듯 검은 충인의 시선은 몹시 싸늘했다.
‘날 곱게 죽이지 않으려는 건가?’
죽을 때까지 괴롭히려고 이곳으로 데려온 거라면 말이 된다.
상황을 보아 하니 아버지가 저자의 연인을 납치하여 강간하고 살해한 듯하니, 그녀의 입장에선 억울해도 충인은 당위성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자신은 아버지의 죄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이 살아남는 데만 집중하면 되었다. 요한나의 눈도 얼음처럼 차가워져 보랏빛 광채가 감돌았다.
“왜 죽였어. 왜.”
주먹 쥔 손이 움찔 떨렸다. 듣기 거북한 쇳소리에 울음기가 섞인 듯했다.
왜 죽였냐고?
‘누구를?’
당신의 연인을? 아마 나의 친모였을 그 충인을?
요한나는 생전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자신이 태어난 것을 보아 하니 알을 낳을 때까지 그 충인은 살아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강제로 교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충인을 죽였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했다.
알을 낳아서다. 귀찮고 혐오스러워서.
그녀의 아버지는 충인의 교미에는 흥분하지만 충인의 존재 자체는 경멸했다.
가끔 땅 아래 알을 낳는 충인의 둥지를 발견할 때면 망설임 없이 알을 터뜨리고 불을 지르곤 했다.
요한나는 그가 불필요한 살생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충인을 혐오하는 게 아니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거다.
지금 생각하면 가끔 자신을 꺼림칙한 눈으로 보던 것도 이해가 갔다.
죽이지 않고 거둬 키운 것이 의외라고 해야 할까.
어떤 마을 여인도 사냥꾼인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나마 제 피를 이은 존재를 세상에 남겨 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 업보 때문에 처참한 최후를 맞긴 했으나.
요한나는 머리 한구석이 시렸다. 목구멍 안쪽으로 신물이 올라오는 듯했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흰자 대신 검은자위로 가득한 눈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겁이 나지 않는 게 아니다. 땅을 짚은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흙모래가 손톱 안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원하는, 거.”
검은 개미가 중얼거렸다. 마치 되새기는 것 같았다.
요한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손안에 모래를 쥐었다. 여차하면 저 커다란 눈 안으로 모래를 집어 던지고 도망가면 그만…….
“공주.”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 숨을 멈추었다. 검은 개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뒤를 향했다.
요한나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뒤통수가 간지러워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입구에서 걸어 나온 흰개미가 그녀를 굽어보았다.
아, 이놈들은 악몽이다.
검은 개미와 흰개미 사이에 있는 스스로가 빵 두 쪽에 끼워진 앙상한 양상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명줄이라도 붙잡은 것처럼 손안의 모래를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공주를 원한다.”
“무슨 소리야?”
“네 질문에 대한 답이야.”
저번부터 느꼈지만 흰개미는 대화하기에 좋은 상대가 아니었다.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심한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잘생기게 조형되어 소름이 끼쳤다.
바렌타처럼 따뜻하고 단정한 생김새가 아니다. 날카로운 칼처럼 차갑고 무정한 인상.
검은 개미에게선 그나마 원망이라든가, 분노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면 흰개미는 아무것도 없었다.
죽여선 안 된다고 검은 개미와 대립했을 때도 의무를 말하는 수도승처럼 차분하고 무감정했다.
돌연 서늘한 의문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애초에 그는 왜 자신을 죽이는 걸 반대했지?
암컷. 암컷이기 때문이라 했다. 알을 낳을 수 있는…….
그 순간 요한나는 그가 자신의 쓰임새를 찾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거죽이 들썩일 만큼 오싹했다.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공주가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야?”
흰개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답이라는 듯했다.
꿀꺽.
“……그 공주라는 게 뭔데?”
인간 세상에서 공주는 수도에 거하는 왕의 귀한 따님. 제일 고귀한 존재다.
마을에서도 귀한 딸에게 종종 그렇게 부르고는 한다.
하지만 충인의 사회에서도 그럴 것인가?
어쩐지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요한나는 요사스러울 정도로 붉은 흰개미의 입술을 노려보았다.
“귀한.”
가로로 긴 입술이 유려하게 움직인다.
“암컷.”
“…….”
“알을, 낳는, 개체다.”
일순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너는 빚을 갚아야 한다. 일족에게, 우리에게.”
흰개미는 해석할 필요 없이 명확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단어만 뱉는 것보다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 어려운지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하지만 그것도 요한나의 머릿속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빚?”
공허한 목소리에 흰개미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과거 사냥꾼이 일족의 공주를 훔쳐 갔지.”
돌아보지 않고도 그가 가리킨 곳에 검은 개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빚을, 갚아라.”
요한나는 무심코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을 끼고 있지 않은 손등에 힘줄이 퍼렇게 올라와 있었다. 바들거리는 손가락 사이로 흙 알갱이가 후둑 떨어졌다.
소녀답지 않게 강했던 힘, 아버지보다 유연하지 못했던 팔다리의 관절.
열일곱 살에 찾아온 극심한 작열감 이후 돋아났던 손등의 딱딱한 비늘. 마치 충인처럼 매끄러운 갑각 표피…….
그녀는 충인 혼혈이었다.
혈관 속에 도사린 충인의 피가 그녀에게 의무를 다하라 외쳐 댔다.
일족의 알을 낳아라.
* * *
‘이놈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제 좀 알겠어.’
처음 충인들을 대면했을 때의 패닉 상태에 비교하면 지금의 그녀는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곳의 모든 개미가 흰개미와 검은 개미처럼 경악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특히 그녀의 시중을 드는 일꾼개미들은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검은 개미와 같은 증오심을 보이지 않았다.
요한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충인들에게 알을 낳는 공주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겠지.’
그런 공주를 납치하고 죽인 사냥꾼의 딸인데도 아무런 반감이 없다. 그건 일꾼개미들이 그녀의 친모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거나 설사 공주인 걸 알았어도 중요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후자에 가까울 거야.’
충인은 개체가 공격당했을 때 흉포한 공격성을 띠며 집요하게 굴지만, 그것엔 유효 기간이란 게 있었다.
페로몬의 존재 때문이다. 이는 토굴 밖에 있을 때는 결코 몰랐던 사실이었다.
동족이 내뿜는 공격 페로몬의 유효 기간이 끝나면 그들의 집단적인 광기도 가라앉는다.
그들이 선대의 일로 자신을 핍박하지 않을 거라는 건 다행이지만, 이 사실을 깨닫고 요한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냥꾼으로서 어디든 머리만 대도 잘 수 있을 정도로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그녀를 괴롭힌 건 페로몬의 위험성.
‘나를 다시 찾아온 게 우연이 아니란 거야. 페로몬 때문이었어.’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한동안은 쓸데없는 후회에 시달렸다.
일주일 동안 오두막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차라리 조금 덜 회복이 되었더라도 하루빨리 마을에 내려갔어야 했다…….
그러나 페로몬은 설사 그녀가 제때 마을에 숨었더라도 개미들의 눈을 피하지 못했을 거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시사했다.
그렇다면 운 좋게 이 토굴에서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놈들이 페로몬의 잔향을 맡고 꽁무니를 쫓아올 테니까.
아주 끈끈하고 복잡한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된 듯하다.
엄습하는 공포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딱딱하지만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바닥과 나무줄기를 잘게 뽑아내어 만든 부드러운 이불이 목과 가슴을 압박하는 것 같았다.
은은한 빛이 흐르고, 개미들의 작은 발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적막한 토굴이 아가리를 쩍 벌린 맹수처럼 느껴진다. 정신적 스트레스의 방증이다.
일꾼개미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끝없는 불면의 밤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었을 거다.
‘왜 날 가만히 놔두는 거야?’
‘말? 이해, 나, 못 해.’
일꾼개미는 흰개미, 검은 개미와 전혀 다른 존재였다. 간혹 마을 청년들만큼 큰 개체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녀보다 약간 크거나 비슷했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개미들에게도 계급이 있고, 장군과 일꾼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았다.
흰개미와 검은 개미는 장군으로 그들 중에서도 영향력이 꽤 강한 모양이다.
정보를 떠보려고 그들을 언급할 때마다 일꾼들은 벌벌 떨면서도 경외감에 가득 찬 눈을 했기 때문이다.
검은 개미처럼 흰자 대신 검은자위로 가득한 그들의 눈은 인간과 확연히 달라 징그럽기 짝이 없었지만 검은 개미의 잔인한 눈빛보다는 나았기에 요한나는 그들과 지내는 게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고립무원 상태인 그녀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전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언제 알을 낳게 하려는지 알고 있어?’
‘알’이라는 단어를 뱉을 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화를 내도 이 일꾼개미는 이해하지 못할 거다.
‘알? 아! 온기!’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유난히 검은자위가 커다란 일꾼개미였다.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체구는 작아도 저런 인간 같지 않은 이빨 모양은 충인 그 자체라 위협적이었다.
애써 시선을 거기 주지 않고 되물었다.
‘온기?’
‘흙, 온기.’
일꾼은 그녀를 이해시키기 위해 직접 토굴의 벽을 만지며 두드렸다.
‘지금, 춥다. 알, 어려움.’
번뜩 깨달음이 스쳤다.
아, 그렇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도 산은 겨울의 길목에 들어서고 있었으니 지금은 더 추울 터.
헐벗고 있을 산을 떠올리고는 다급히 토굴의 벽을 더듬었다.
‘이 정도면 따뜻한 편인 것 같은데.’
개미들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 거다. 그러니까, 알을 낳기에 적합하지 않은 온도라고 말이다.
‘그럼 언제가 좋은 때지?’
‘따뜻한 바람.’
‘…….’
‘지금, 추워. 입구, 막음. 힘들었어.’
일꾼이 우울한 얼굴로 팔을 두드렸다. 갑각류 생물 특유의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운 관절은 장군보다 일꾼 계급에 더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특성이었다.
주먹으로 팔뚝을 퍽퍽 친다. 주먹에 돋아난 푸른색 갑각 표피도, 체구는 작은 주제에 근육으로 울퉁불퉁한 팔뚝도 모두 요한나의 시선을 끌었다.
저런 것들이 겉보기만 보고 일꾼들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막상 전투가 벌어진다면 꽤 강한 힘을 발휘할 거다.
토굴은 일이 많은 듯했고,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일꾼들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직 이 방조차 벗어나지 못한 그녀로서는 바깥의 일을 추측할 수 없었다.
토굴의 어두컴컴한 입구를 흘끗했다. 문득 그곳에서 걸어 들어오던 흰개미를 떠올리고 홱 고개를 돌렸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나갔다가 흰개미나 검은 개미를 만난다면 낭패다.
‘그럼 당분간은 내가 알을 낳을 일은 없겠구나.’
잘 듣지 못했는지 일꾼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일꾼개미의 천진한 얼굴을 요한나는 다소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최악의 걱정은 덜었다.
그때까지 시간은 번 것이다. 침착해야 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깊이 뿌리 내린 ‘탈출’을 지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미들의 페로몬은 그녀에게 있어 몹시 공격적인 무기다.
만약 도망에 성공했다 한들 이들이 자신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면?
‘괜한 경계심만 돋게 하는 꼴이지.’
침입자가 들쑤시고 간 늑대 무리는 한동안 근처를 배회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예민해진다.
그렇게 되면 사냥은 극도로 어려워지며, 그들이 스스로 경계를 풀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신중하게 굴기로 했다.
인내심이 부족한 사냥꾼은 사냥감에게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 * *
검은 산맥을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노련한 사냥꾼인 요한나는 당연하게도 인내심이 뛰어났다.
사냥을 위해 일주일을 먹지도 않고 버틴 적도 있었으니, 마실 거 먹을 거 다 내어 주는 지하 생활은 그녀의 기준으로 썩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가 개미들은 인간보다 체온에 민감해서 토굴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늘을 보지 못해 답답하고 지상보다 공기가 텁텁하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토굴은 최고는 아니더라도 괜찮은 거처였다.
이방인이 들어왔으니 기존 주민들의 텃세가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없었다. 아니,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적의 섞인 호기심을 보이는 개미도 있었으니까.
‘마을에서는 검은 산맥의 불길한 사냥꾼이라고 배척받았는데 이곳에서도.’
입구에서 기웃거리던 개미들은 그녀가 잡종이라고 떠들어 댔다.
요한나는 콧방귀를 뀌며 신경에 거슬리게 깔짝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껐다. 검은 개미의 입김이 닿은 개미들일 게 뻔했다.
물론 무시하는 걸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잠을 자던 중 기이한 느낌에 눈을 뜬 요한나는 발에 닿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서늘하고 매끄러운, 불쾌한 감각이었다.
시선을 고정했다.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굴곡. 약간 시큼하면서도 톡 쏘는 냄새가 코를 쑤셨다. 일꾼개미들의 체취였다.
‘이놈들이 여기까지 접근할 동안 잠이나 자고 있었다니.’
이를 뿌드득 갈았다.
토굴이 얼마나 깊게 파여 있는 건지 하루 이틀 지날수록 칼날처럼 날카로웠던 감각이 진흙이 묻는 양 무뎌지고 있었다.
‘내 시중을 드는 일꾼개미들이 아니야.’
발을 털어 내고 토굴에 바짝 등을 대고 앉자 땅에 바싹 엎드린 개미들이 네발 달린 짐승처럼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음험한 광채. 울컥 역겨움이 치민다.
개미들이 얇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가, 그랬다. 너, 공주 대신.’
‘그러니까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 다오.’
‘총 네 마리.’
요한나는 검은 개미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제 놈이 했던 혐오스러운 짓을 이젠 다른 개미들을 시켜 반복하려는 건가.
지하를 기어 다니며 사는 놈들이라고 해도 성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충인은 온전한 곤충이 아니고, 인간처럼 지능이 있었으며, 인간들에겐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욕도 존재했다.
이 토굴은 얼마 전 공격당했다. 살아남은 것은 대부분 전투 능력이 미천한 일꾼개미들. 대부분 수컷이다.
생식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암컷다운 암컷은 여왕이 유일한데, 지금은 그 여왕과 여왕 후보라고 할 수 있는 공주들이 모두 죽어 없다.
‘남은 건 비실비실한 암컷 일꾼뿐.’
그런 상황에서 공주로 예정된 존재가 나타났다? 요한나가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어. 이런 식으로 도둑처럼 다가올 줄은 몰랐지만.’
실로 음침하고 음흉했다. 하지만 요한나는 시종 침착했다. 예상했다는 건 이미 다소의 준비는 해 둔 상태라는 뜻이다.
항상 자기 전 근처에 숨겨 두는 아이 주먹만 한 돌을 손바닥에 쥐고 주먹을 말았다.
저를 둘러싼 개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움찔.
일꾼개미들이 머뭇거렸다. 보랏빛이 도는 요한나의 눈동자에 기이한 광채가 어린다.
그 시선은 개미들의 것보다 한층 짙고 사나웠다. 위기감을 느낀 일꾼개미들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는 순간, 단단하게 부푼 주먹이 어두운 공기를 갈랐다.
푸욱!
촤악!
뻑!
딱딱한 피부가 파이고 뼈가 부러졌다. 숨어들었을 때의 의기양양함은 어디 가고 혼비백산한 일꾼개미들이 절뚝거리며 도망을 쳤다. 요한나는 다시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흥. 어렵지 않네.’
어떻게 보면 마을보다 수월했다. 마을의 규칙과 규범은 요한나를 옭아맸다.
아무리 그녀를 괴롭히더라도 함부로 주먹을 들이밀 수 없었다. 외부인에게 더 엄격한 것이 마을의 규칙이었으니.
교묘한 화술, 주변 사람들을 이용한 교활한 괴롭힘이 없는 개미들의 텃세는 마을 사람들의 것에 비교하면 간지럽지도 않았다.
그녀가 유일하게 경계하는 대상인 장군 계급 개미도 첫날 이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지하 생활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지내다가 입구가 뚫리는 날 도망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미리 걱정할 필요 없겠어.’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 내내 긴장 상태였던 요한나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괜찮다. 그 생각이 바뀐 건 그들이 내주는 걸 주는 대로 먹은 지 딱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