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9)

02

간지러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손을 움직여 얼굴을 훔쳤다. 손가락에 쓸린 산 벌레가 휙 날아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촘촘한 다리를 움직여 바위 아래로 숨어들었다.

요한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가만히 있었다.

몸이 부서지는 것 같다. 부서져 버린 것 같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새들이 평화롭게 지저귀는 소리가 요한나의 적막을 건드렸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떼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다리가 훤히 벌려져 있었다. 면직물로 만든 검은 바지는 얼마나 뒹굴었는지 흙투성이였고 그 위에 낙엽 몇 개가 얹어졌다.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다리를 본 그녀의 얼굴이 설핏 일그러졌다.

가장 심한 부상은 꺾인 발목이었으나 드러난 상처는 다리 사이가 훨씬 심각해 보였다.

피가 허벅지에 걸쳐진 바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기절하고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마른 핏자국은 손끝으로 긁어내자 파슥 하며 떨어져 나갔다.

요한나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마을 사람들은 산골에 위치한 탓에 수도에서 도는 화젯거리보다 한층 날것의 투박한 대화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들의 한담엔 충인에게 강제로 교미당한 불운한 인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 먼 이북의 야만인 오랑캐는 그래도 사람이니까 낫지. 충인에게 당한다면 어디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겠나.

이북에서 왔다는 노예 상인에게 딸을 팔았다는 도박쟁이의 흉을 보면서 나온 말이었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겠나…….’

보편적으로는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한나는 회색 늑대에게 허벅지 살을 뜯기면서도 악착같이 늑대의 목덜미에 단도를 쑤셔 넣으며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래.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그것만 해도 완전히 최악은 아니었다.

‘죽었다면 이게 최악이니 덜 최악이니 따질 수도 없었을 테지만.’

시니컬하게 빈정거리고 바지를 추켜올렸다. 손가락이 가늘게 경련한다. 주먹을 꾹 쥐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 사이에서 뭔가가 흘러내렸다. 한발 늦게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얼어붙었다.

“하아, 제길…….”

떨리는 한숨을 쉬고 억지로 신경을 분산시켰다.

두 손으로 땅을 기어가며 적당한 굵기의 튼튼한 나뭇가지를 찾았다.

바닥에 쓸리면서 바위에 부딪힌 발목의 고통으로 정신이 번쩍 들 때면 이를 아득아득 갈며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든 충인들을 욕했다.

살아생전 느껴 보지 못한 분노와 증오가 그녀를 지탱했다.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릴 거야.

저주를 쏟아 내며 발목의 둔통과 쓰라린 다리 사이와 뻐근한 팔다리를 참아 냈다.

튼튼한 나뭇가지를 옆에 끼고 민달팽이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짧은 나뭇가지로 만든 부목의 다듬지 않은 끄트머리가 땅을 디딜 때마다 종아리를 쿡쿡 쑤셔 댔다.

몇 걸음도 떼지 않았는데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더니 떡갈나무 군락을 겨우 빠져나왔을 때쯤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오두막의 익숙한 울타리가 보일 때 숲은 이미 붉은 황혼에 물들고 있었다.

쓸쓸한 앞뜰에 내려앉은 주홍빛 노을은 고즈넉하여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운치가 있었다. 무엇이든 품어 줄 듯한 광활한 자연. 눈물이 주룩 흘렀다.

침대라기엔 이불만 뭉쳐 놓은 그곳에 몸을 뉘었다. 저녁놀은 빠르게 흘러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자 감색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이 보였다.

야속하게도 산에는 밤이 빠르게 찾아든다.

요한나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유등에 불을 붙였다. 충인의 난동으로 인해 기름이 엎어져 쓸 수 있는 양이 많지 않았다. 얼마만큼 불을 밝힐 수 있을지 가늠하는 요한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 이대로 엎어져 잠들고 싶었지만 이미 오래 방치한 발목의 부상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불구가 될지도 몰랐다. 사실 지금도 많이 늦었다.

어긋난 발목을 질질 끌고 다니기까지 했으니 상태가 더 안 좋을 터.

요한나는 지친 몸을 끌고 약통을 찾았다. 서랍장 깊은 곳에 있었던지라 충인의 난동에도 무사한 상자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자는 약초꾼에게서 산 약초와 마을에 의원이 방문했을 때 비싼 돈을 들여 구했던 고약 따위로 빽빽했다.

바닥에 쓸리면서 났던 찰과상을 제외하고 고약은 쓸 필요가 없었다. 요한나는 찰과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상자를 뒤져 마취 효과가 있는 약초를 꺼내 씹었다.

마른 풀의 씁쓸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발을 내려다보았다. 약간 비뚤었다. 염려한 대로 비틀린 채 굳어진 것이다.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댔다. 이를 악물고 단번에 반대쪽으로 틀었다.

“흡!”

붙으려는 뼈가 다시 틀어지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발목의 뼈를 맞춘 뒤 평평한 나무 판을 대고 붕대로 둘둘 감았다.

이제 왼발이 남았다. 방금의 고통이 떠올라 손가락이 후들거렸다.

짧은 순간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사냥꾼이라는 직업, 다리를 절면 포기해야 할 것들, 마지막으로 절름발이로 바렌타의 앞에 서는 모습까지. 흔들리던 마음이 바로 섰다.

요한나는 남은 마취 약초를 모두 입에 넣어 씹었다. 아릿한 풀 향을 느끼며 망설임 없이 왼발의 뼈를 맞추었다.

뼈가 어긋난 채 굳어졌던 오른쪽과 달리 왼쪽은 깔끔하게 부러져서 덜렁거렸다.

마찬가지로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는데 덜덜 떨리는 턱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양 발목을 처치하고 나자 체력이 좋은 그녀도 완전히 진이 빠졌다.

상자를 닫으려는 찰나, 뿌리 부분이 시커멓게 된 마른 약초 한 뿌리가 보였다.

‘이건 복통에 쓰이는 약초일세.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복용하게나. 결혼한 처자가 아니니 내미는 것이야. 애를 떼는 용도로도 쓰이거든.’

약초꾼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검은 충인의 쇳소리도 떠올랐다. 처음엔 작았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메아리치며 커졌다.

마침내 수개미를 낳으라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쾅쾅 울릴 때 그녀는 발작적으로 약초를 씹어 삼켰다.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삼킨 약초가 목구멍을 거칠게 쓸며 내려갔다. 그 아릿한 통증에 요한나는 오히려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할 일까지 마치고 나자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침상까지 가지도 못하고 더러운 바닥에 드러누웠다.

* * *

“요한나, 요한나?”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귓전을 쑤셨다. 인상을 쓰던 요한나가 눈을 번쩍 떴다.

‘바렌타?’

즉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온몸에서 밀려오는 격통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앙다문 입에서 가는 신음이 샜다.

‘이럴 때가 아닌데.’

고개를 드니 대충 한쪽으로 망가진 집기를 모아 둔 거실이 보였다.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둔 깨진 창문은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고 바람이 숭숭 들어와 오두막 내부는 몹시 추웠다.

돼지우리보다 못한 꼴이었다.

아픈 몸으로 춥고 딱딱한 바닥에서 수 시간 동안 있었으니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게 당연했다.

“요한나! 없는 거야?”

깨진 창문을 통해 바렌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았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하고 며칠째 내려가지 않았으니 걱정되어서 올라온 것이리라.

‘하필 지금…….’

부목을 댄 발목을 내려다본 요한나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퉁퉁 부어오른 발목이 약간만 움직여도 욱신거렸다.

이런 꼴로 바렌타의 앞에 나설 수는 없었다.

‘큰일이다. 대문에서 조금만 더 와도 깨진 창문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대충 둘러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걸음 소리가 난다. 앞뜰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기척이었다.

“바렌타! 나 여기 있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가 다리가 뭉개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를 악물고 참은 요한나는 눈에 눈물을 아롱아롱 달고 욕설을 짓씹었다.

“요한나? 안에 있어?”

“어어.”

나무 기둥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직접 만든 나무 행거였는데, 충인들이 부러뜨린 탓에 지금은 중심 기둥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요한나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절뚝대면서 문으로 다가갔다.

똑똑.

요한나는 그가 다짜고짜 문을 열지 않고 노크로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는 것과 그가 이 집에 온 것이 처음이란 두 가지 사실을 깨닫고 뜨거운 것이 목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차갑고 무거운 피부가 육신을 짓누르던 감각이 스치자 요한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미처 참지 못한 비명이 가늘게 흘러 나갔다.

“요한나? 괜찮은 거야?”

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바렌타의 따뜻한 음성이,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안전하고 따뜻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현실감을 돌려주었다.

인간의 마을. 바렌타가 있는 곳.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형형해진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며 요한나는 꾸역꾸역 울음을 삼켰다. 잔뜩 억눌린 목소리는 목이 졸린 것처럼 들렸다.

“몸이 안 좋아서.”

“많이 안 좋아?”

걱정스러운 목소리. 요한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당장 이 문을 열어젖히고 그를 끌어안고 싶다. 퉁퉁 부은 발목에서 올라오는 둔통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듯해서 발가락 하나 꿈쩍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코만 훌쩍였다.

“감기인 거야?”

“어? 으응.”

“계속 걱정했어. 잠깐 있다 온다더니 계속 안 보여서 혹시 짐승이라도 만났나 하고…….”

바렌타가 머뭇거렸다. 요한나는 그를 안으로 들여 따뜻한 스튜를 대접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엉망이 된 내부와 망가진 다리와 부족한 식재료를 떠올리고 낙담했다. 그런 탓에 바렌타가 한 말을 놓칠 뻔했다.

“생각은 좀 해 봤어?”

“뭐를?”

“나랑 같이 사는 거.”

조금 쑥스러운 듯이 들려오는 말. 요한나는 다소 멍해진 눈으로 문을 응시했다.

안경을 쓴 바렌타가 뒷덜미를 긁적이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하하. 이런 건 얼굴 보면서 말하고 싶은데. 바로 앞에 두고 못 보고 있었네. 문 좀 열어 줄래?”

“아, 안 돼!”

“응?”

아차 싶어 뒤늦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기침병이 좀 심하게 왔는데, 옮는 거야. 걱정하지 마. 한 일주일 쉬면 나을 것 같아.”

일주일이면 될까?

거의 달걀만큼 커진 발목을 보며 의구심을 품었다.

“혼자 있고 싶은 거지?”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나의 바렌타.

만지고 싶어. 끌어안고 싶어. 입 맞추고 싶어.

욕망을 억누르며 나무 기둥을 꽉 붙잡았다. 조용히 대꾸했다.

“응…….”

“알았어. 요한나.”

“응.”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난 항상 네 편이야.”

당장 문을 열고 그에게 자신이 겪은 일들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은 욕망으로 온몸이 떨렸다. 하나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그럼 나는 가 볼게. 생각이 정리되면 마을로 내려와야 해. 꼭.”

“응. 고마워, 바렌타.”

“우리 사이에 고맙긴.”

그 말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리는지 너는 알까.

“혹시 무슨 일 있을까 봐 이것저것 챙겨 왔어. 스튜도 부드럽게 만들었으니까 식사 잘 챙기고.”

“…….”

“그럼 갈게.”

바렌타가 한 발 멀어졌다. 요한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바렌타가 더 멀어지는 기색에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바렌타!”

“응. 말해.”

“나, 빨리 마을에 내려갈게.”

욱신거리는 발목도 이 순간만큼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너랑 살 거야.”

얼굴을 보면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인지 놀랍도록 솔직한 말이 나왔다.

“뭐, 뭐?”

너도 당황할 때가 있구나.

웃음이 나다가도 쑥스러워졌다. 하지만 이 북받치는 마음은 지금이 아니면 제대로 고백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지? 나 네가 좋아.”

“…….”

“그러니까 내가 갈 때까지 다른 사람이랑 친해지면 안 돼. 예를 들어 세니아라든가.”

보이지 않는데도 바렌타가 웃고 있는 게 느껴졌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두툼한 손으로 뒷덜미를 쓰다듬으며 괜히 내려가지도 않은 안경을 추어올리고 있겠지.

즐겁게 상상하는 동안, 조금 쑥스러워하는 듯 낮아진 목소리가 대꾸했다.

“얼른 나을 생각이나 해.”

그러고는 침묵이었다. 요한나는 왠지 긴장이 되어서 가만히 있었다.

쑥스럽기도 하고, 바렌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이 마을에서 손에 꼽히게 잘생긴 바렌타다. 하나 웃음기가 없는 진지한 얼굴이 웃는 얼굴만큼 근사하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다.

사람들과 있을 때와 단둘이 있을 때가 또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문을 열 수 없음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얼굴, 보고 싶은데.”

바렌타의 말에 요한나는 심장이 크게 뛰었다.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구나.

“바렌타, 조금 있다 뒤뜰로 와 줄래?”

의아해하는 바렌타가 알겠다고 답하는 것을 듣고 요한나는 목발처럼 기둥을 움직여 뒤뜰을 볼 수 있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깨진 창문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다 이음매가 어긋나 흔들리는 창을 아예 떼어 냈다.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이쪽은 대강 치워 놔서 그렇게 엉망으로 보이진 않지만.

한쪽으로 몰아 둔 쓰레기 더미를 천으로 덮고 다시 창가로 다가왔다.

자박. 발소리와 함께 바렌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요한나는 주변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적당한 것이 눈에 띄었다.

바렌타는 다소 신기해하는 듯 뒤뜰을 둘러보며 걸어왔다. 요한나는 흙으로 메워 둔 무덤을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침내 창가로 다가온 바렌타가 당황한 듯 눈을 끔벅거렸다. 요한나는 부드러운 갈색 눈이 배경처럼 깔린 붉은 낙엽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붕대로 칭칭 감은 발목이 보이지 않게끔 창가로 바싹 다가갔다.

“왜 그래?”

요한나가 묻자 바렌타는 손으로 턱을 툭툭 쳤다.

뭐가 이상한가? 요한나는 머리에 쓰는 두건으로 둘러맨 입가를 더듬거렸다. 상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두른 거였다.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의아해하는 그녀의 눈을 보고 바렌타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키스하려고 했거든.”

요한나는 나가려던 글자가 목젖에 걸린 것처럼 기침했다.

“병이 옮을 수 있어서…….”

“안 되겠지?”

“천 위라면.”

“응?”

“천 위라면 할 수 있어.”

바렌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외진 숲속 오두막에서 사람과의 교류 없이 자란 요한나는 다 큰 처녀가 먼저 스킨십을 조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든가, 정숙한 척을 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 따위는 몰랐다. 그녀는 숙녀 지침서에도 버젓하게 나와 있는 ‘상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키스해 줄래?”

“너는 가끔 참.”

바렌타는 야릇하게 웃었다. 의미심장한 웃음이었지만 사냥꾼을 놀리는 여우처럼 짓궂은 매력이 넘쳐 요한나는 순간 넋을 잃었다. 바렌타가 그런 그녀의 뒷덜미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참을 수 없이 귀여워져.”

얇은 천 위로 입술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렌타는 입술만으로 그녀의 입을 살짝 빨고 멀어졌다.

여전히 뒷덜미를 붙잡고 속삭였다.

“얼른 나아야 해. 나 더 기다리게 하지 마.”

“응.”

“일주일 후에 올라올게.”

“괜찮아, 마을에서 봐. 여기까지 올라오기 힘들잖아.”

“아니, 하나도 안 힘들어.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너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마을에서 할 일도 많잖아.”

보통의 여자들보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낮고 부드럽게 속삭이자 바렌타는 뜨거운 숨을 천천히 쉬었다.

요한나는 그의 이글거리는 눈을 응시했다. 시선을 받는 것뿐인데 왠지 부끄러워지는 눈빛이다. 바렌타가 아쉬운 듯 눈을 깜박였다.

“얼른 가야겠다. 귀에 대고 말하니까 더 있으면 못 참을 것 같아.”

일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요한나의 멍한 눈을 들여다본 그가 싱긋 웃었다.

“일주일 후에, 큰 옹이가 다섯 개 있는 떡갈나무에서 봐.”

그 나무는 오두막 바로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바렌타의 눈빛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요한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렌타가 잘했다는 듯이 웃었다.

* * *

산 아래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었다. 대륙법으로는 도시 밀레니언에 속해 있긴 하지만 산이 가로막고 있고 인구수도 적어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화폐 유통도 원활하지 않아 물물교환이 활발한데 다행히 땅이 비옥하고 산짐승이 많아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 한편 의외로 외부인의 출입이 잦은 편인데, 검은 산맥을 횡단하려는 여행자들에겐 중간 준비 지역으로서 꼭 들러야 하는 곳으로 알려진 탓이다.

같은 의미에서 상단이나 타국으로 넘어가려는 귀족의 행렬이 방문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어쨌든 인구가 5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산골 마을치고 그럭저럭 풍족한 마을의 한가운데, 마을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 세워져 있다.

마을의 유일한 종교 시설로서, 첨탑을 지키는 늙은 수도사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신에게서 전달받은 교리와 그가 지닌 현명함으로 크고 작은 걱정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마음을 보듬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서 수도사의 단정한 백발만 보고서도 성호를 긋고 기도하곤 했다.

또 다른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주인, 롯타 질레이는 첨탑을 마주 보며 서 있는 오렌지색 지붕의 단층 저택에 살고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화려한 이 집은 대대로 촌장을 역임한 질레이 가문이 사는 곳이다.

마을을 오랜 시간 동안 평화롭게 다스린 덕으로 30여 년 전 성주로부터 하사받은 성을 현 촌장인 롯타 질레이는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가 세컨드 네임을 하사받을 때 받은 금색 깃발을 가문의 보물 삼아 아침마다 기름 먹인 천으로 닦는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처럼 위엄이 있어 보이길 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귀족의 위엄은 여염집과 다른 여유에서 나왔다. 남들이 일할 시간에 일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보통의 사람들과 명백히 구분되는 점이었으므로.

그러나 그는 귀족이 아닌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의 일개 촌장이었고 가끔 심부름꾼을 부리긴 하나 귀족들처럼 대여섯 명의 시중들 하인들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루 종일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처지. 점심을 먹은 후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여유로 만족하기로 했는데 이것만큼은 어지간하지 않으면 꼭 지켰다.

보통 혼자 티타임의 여유를 즐기나 오늘만큼은 상대가 있었다.

롯타 질레이는 자신이 평생 나고 자란 이 마을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지적 수준을 갖춘 상대는 몇 없다고 여겼다. 오늘의 방문객은 그 몇 없는 상대 중 하나였다.

“잡화점은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얼마 전에 고양이를 데려왔는데 쥐가 많이 줄었대요.”

“쥐덫을 놓은 게 효과가 컸지.”

“아버님 말씀이 옳아요.”

최근에 마을을 방문한 도시의 상단으로부터 구한 최고급 대리석 찻잔 받침에 영롱한 옥으로 만든 찻잔을 내려놓는 움직임이 나비처럼 우아하다.

그녀의 손끝에 시선을 빼앗긴 롯타는 흐뭇하게 웃었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점찍어 놓았던 유서 깊은 대장간 집안의 여식은 커서는 훌륭한 숙녀가 되어, 그가 허락한 ‘아버님’이란 호칭을 한층 빛내 주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또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래요. 그 정도야 얼마든지 도와주실 수 있으시다고요.”

말하는 것 또한 어쩜 이리 어여쁜지.

둥그스름한 눈썹을 부드럽게 휘며, 마을의 하나뿐인 학교에서 일하는 선생답게 지적이고 따뜻한 눈빛을 빛내며 하는 말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지 모른다.

외모보다는 인품이나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롯타로서는, 수도의 귀족들도 찾아오는 명문 대장간의 외동딸이자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친우의 귀여움받는 딸인 이슬라만큼 아들의 배우자로서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얼굴이 다소 처지긴 해도 이런 산골에서 지나치게 아름다운 건 불운만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최근 들어서 그 생각은 금강석처럼 강해졌는데, 아들 곁에 딱 들러붙은 사냥꾼 계집 때문이었다.

‘이슬라만큼 바렌타의 짝으로 적당한 애가 없어, 암. 하물며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출신 불명의 계집 따위야, 비교할 대상조차 되지 못하지.’

문제는 제 손으로 그 애를 떼어 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로 꼽는 것이 바로 도시의 가난한 귀족의 처녀를 데려와 자식을 본 것인데, 비록 어미가 충인에게 공격당해 병이 들어 일찍 죽었긴 해도 그의 장자는 훌륭하게 자라났다.

롯타는 그것이 자신의 씨와 어미의 품질 좋은 터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의 장자는 모든 일을 믿음직스럽고 확실하게 처리했으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다.

아버지의 말 역시 고분고분 따르며 후처를 통해 낳은 배다른 동생 역시 살뜰히 살폈다.

머리도 좋아 그가 손을 대지 못하는 골치 아픈 문제도 턱턱 해결하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하지만 롯타는 알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아들의 딱 하나 골치 아픈 점. 바로 고집이 무척 세서, 한번 정한 건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는다는 거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바렌타가 사냥꾼 계집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리를 듣고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아비는 그 사냥꾼 계집을 영 못 믿겠구나. 큰일이 생기기 전에 거리를 두는 게 어떻겠냐.’

지나가듯 운을 떼자 바렌타는 나무를 깎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시에서 구해 온 안경은 아들에게 맞춘 듯이 어울렸지만 유리알 너머 눈알은 시리듯 차가웠다.

제 자식임에도 롯타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착각이었다는 듯이 바렌타가 싱긋 웃었다.

‘요한나는 좋은 여자예요. 제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잘 살펴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그 말이 이 일에 신경 꺼 달라는 말로 들렸다면 착각일까?

얼굴에 수심이 깊이 어린 롯타는 걱정스러운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아버님, 괜찮으세요?”

“으음, 괜찮다. 골치 아픈 일이 생각나서.”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단정한 얼굴로 짓는 상냥한 미소에 가슴이 울컥했다.

“그러마.”

“그런데 바렌타는 어디 있나요? 상점에 좀도둑이 자주 드는 건으로 할 얘기가 있는데요.”

롯타는 가슴이 뜨끔해서 부러 그 말에 집중하는 척했다.

“좀도둑 말이냐?”

“처음엔 가비 아주머니의 상점만 말썽이더니 최근에는 저희 대장간의 물건도 없어져서요.”

“그거 큰일이구나.”

바렌타가 성인이 된 이후 마을의 굵직굵직한 일들은 그가 처리하곤 했으므로, 롯타는 자세한 일은 알지 못했다. 걱정하는 얼굴에 이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전에 도시에서 외부인들이 방문했잖아요? 그때는 그들의 소행이라 생각했는데 떠난 지 2주일이 넘어도 계속 문제가 생기네요. 그들 외에는 외부인이 들어오지 않아서 말이죠. 마을 사람들 짓일 리도 없고요.”

조리 있게 말하는 이슬라를 보면서도 롯타는 검은 산맥을 오르겠다며 홀연히 사라진 바렌타를 생각하고 있었다.

말로는 도토리를 주워 오겠다고 했지만 진짜 목적은 그 계집을 만나는 것이리라.

‘바보 같은 것!’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속으로 욕을 퍼붓고 나자 이슬라의 품위 있는 얼굴이 더 안타깝게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둘이었고, 이슬라는 분명히 아들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품고 있다.

사실 이 마을 처녀 중 그렇지 않은 이가 드무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바렌타다.

‘이슬라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역시 그 계집이 걸림돌이야.’

이슬라가 아쉽고 바렌타에게 화가 나는 만큼 사냥꾼 계집에 대한 증오가 치솟은 롯타는 걱정하는 이슬라에게 차갑게 말했다.

“외부인이라면 하나 더 있지 않으냐.”

“네?”

“사냥꾼 말이다.”

그 말을 이해한 이슬라가 깜짝 놀라더니 이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전대 사냥꾼이 죽고 새롭게 그 일을 물려받은 검은 산맥의 사냥꾼은 어느 날, 몹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처음엔 도시에서 온 외부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놀라며 경계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런 시선 속에서도 사냥꾼은 3년간 마을을 자주 왕래하며 값비싼 짐승의 가죽, 고기, 산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각종 귀한 목재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에게 호의를 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녀는 서서히 마을에 융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촌장인 롯타가 그녀를 외부인이라 딱 잘라 말하며 의심하다니.

이슬라가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바렌타가 곤란할 거예요.”

그 모습이 자못 쓸쓸하고 안타까워 롯타는 가슴을 쳤다.

그녀는 아들을 좋아하고 있으니 당연히 사냥꾼 계집이 못마땅할 텐데도 바렌타의 심기가 불편해진 문제부터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마음이 넓고 상냥한 여자가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산에서 짐승과 붙어먹었을지도 모르는 그 요사스러운 계집이 아니라.’

롯타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산골에서는 보기 드문 미색에 감탄하는 건 잠시였다.

경계심이 몹시도 날카롭게 돋아났다. 필시 문제를 일으키고 말 상이로다.

기어코 바렌타를 홀리다니. 생각할수록 사냥꾼 계집이 못마땅했다. 입을 다물고 차만 홀짝이는 이슬라를 힐끗한 그가 속으로 탄식했다.

‘누가 그 요사스러운 것 좀 안 잡아가나?’

* * *

검은 산맥은 T자형의 구조를 이루며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으로,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검은, 어두운, 깊은 등의 단어가 들어가는 공통점이 있었다.

검은 산맥의 생태를 연구하고자 하는 학자들은 많았으나 일부 구역을 알아내는 데 그쳤을 뿐, 검은 산맥은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었다.

단지 미발굴된 광산과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특이한 생물들이 가득한 천혜의 생태 보고로 알려졌을 뿐이다.

현재 검은 산맥을 가장 심층적이고 정확하게 밝혀낸 책은 제국 수도 베누스의 왕립 아카데미 마법지리학과에서 편찬한 『검은 산맥의 비밀』이다. 그 두께가 손바닥의 끝과 끝에 이르러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서 맞으면 망자와 함께 걷게 된다며 죽음의 책으로 불리는 위명을 자랑하고 있다.

어쨌든 『검은 산맥의 비밀』에 따르면 검은 산맥에서 자생하는 식물종은 (현재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약 218만 6천여 종에 이르며 동물은 약 152만여 종이다.

이 중 인간의 특성을 지녀 반인으로 분류되는 종은 약 1,000여 종뿐인데 반인반마 켄타우로스와 난쟁이, 드워프 등의 익히 알려진 소수 종족을 제외하고 가장 위협적으로 알려진 종족이 바로 충인이다.

『검은 산맥의 비밀』에서는 상당한 페이지를 이 충인에 할애했는데 그건 충인으로 묶이긴 하나 세부적인 종족만 해도 약 100종에 이를 만큼 다양하게 분화된 생물이기 때문이다.

왕립 아카데미의 한 지도 교수는 충인 중에서도 ‘개미’ 학명으로는 안티하드로므스칸(Antihardromeskan)을 가장 신비스러운 종족으로 꼽았다.

기껏해야 200개체에서 300개체 정도로 한 집단을 이루는 다른 소수 종족과 달리 한 군락에 작게는 500에서 많게는 5,000에 이르는 개체 수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수에 비해 조직력이 소수 종족에 비해 월등히 높아 하나를 생포해도 연구물로서의 가치가 없는 탓이다.

또한 한 개체가 공격당하면 대륙의 끝까지 쫓아갈 정도로 집요한 복수심을 보여 쉽게 생포를 시도하기도 힘들었다.

건드리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특성이 있으므로 한때는 충인에 대한 연구 자체가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진리 탐구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몇몇 학자들에 의해 충인 ‘개미’에 대한 연구는 비밀리에 이어져 왔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린 결론은 종족마다 다른 특질이 있으나 대체로는 여왕과 공주, 장군과 일꾼의 계급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언뜻 얌전해 보이나 실은 매우 호전적이라 다른 군락을 침략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유전적 교란을 막기 위해 다른 군락의 알을 낳을 수 있는 여왕과 개미를 납치하는 것도 매우 빈번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충인 중에서도 그 겉모습이 제일 인간과 비슷한 충인이지만 실상은 대단히 야만적이고 포악스럽다고 조사된다.

* * *

검은 산맥의 서북쪽은 춥고 건조한 바람이 불며, 잎이 다 떨어진 흰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솟아나 있다. 바닥에는 생명을 다해 떨어진 자작나무 이파리가 수북하게 쌓여 썩어 갔다.

그런 자작나무 군락의 중심부,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려 있다.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토굴에는 개체 수천을 이루는 토굴 개미의 중소 군락이 있다.

성실한 토굴 개미의 소중한 토굴은 며칠째 아수라장이었다. 며칠 전 습격을 받은 탓이었다.

여왕이 기거하며 알을 낳는 가장 큰 토굴은 원래 일개미들이 들락날락하며 알과 고치를 옮겨 대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지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음울한 죽음의 기운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끼에에에에…….”

일꾼개미가 슬피 울며 바닥에 축 늘어진 공주의 몸을 들어 올렸다.

토굴은 늘 청결해야 했으므로 시체를 방치하는 건 최악이다.

그래도 일꾼개미의 행동은 굼떴다. 미래의 여왕이 될 공주들을 제 손으로 처분하는 것은 장기를 끊는 고통과 다를 바 없었다.

창백한 얼굴의 일꾼들이 투명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죽은 공주들의 몸을 굴 밖으로 옮길 때, 장군들은 여왕의 시체 주변에 둘러서 있었다.

표정들은 하나같이 침통했다. 어떤 이는 딱딱하게 굳어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고, 어떤 이는 화가 눈알에까지 치솟아 피눈물을 줄기줄기 흘려 댈 듯했다.

그들의 중심에 있는 이만이 표정 하나 없이 무심했다.

이 토굴 개미들에게 창백한 피부는 특별하지 않지만 검은 머리칼 대신 색을 지운 듯한 하얀 머리칼, 피로 점을 찍은 것처럼 선명한 적안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다른 그림을 그린 양 이질적이었다.

“큰일이다.”

커다란 체격의 장군 개미들. 그중에서도 유독 우락부락한 근육질 체구를 가진 검은 개미가 경직된 입꼬리를 비틀었다.

얼굴 가득 떠오른 분기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눈을 감은 여왕을 훑을수록 정도를 더해 갔다.

“여왕과 공주가 죽었다. 이대로는 전멸 역시 시간문제야.”

흰자 대신 커다란 검은자가 안와를 차지한 그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음산하고 쇳소리가 가득했다.

듣기 거북한 목소리였지만 말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복수를. 석굴 개미에게 복수를, 원한다.”

돌처럼 딱딱한 몸을 가지고 있는 장군 개미가 말했다. 검은 개미의 눈이 번뜩였다.

단정한 생김새가 단아하게 아름다운 여왕은 성한 곳이 없었다. 굴속에서만 지내서 흠 없이 하얗고 아름답던 피부는 여기저기 낫에 갈린 듯한 흠집이 나 있었고, 발은 급박했던 상황을 알려 주듯 흙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심한 것은 배와 옆구리의 상처였다. 흉하게 파인 상처는 벌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상처 주변은 너덜너덜했다. 여러 번 상처를 쑤시고 후볐다는 증거였다.

군락의 여왕이 당한 모욕적인 죽음에 장군들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알을 낳는 여왕은 일족의 희망이자 미래.

개체 하나에 군락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일족의 종속에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혹시 모를 종족의 위기에 대비한 존재가 바로 여왕의 후계인 공주들이었다.

여왕이 힘을 잃거나 죽게 되면 그 뒤를 이어 여왕의 자리를 받아 알을 낳으며 군락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는 존재들.

그런 스페어를 둠으로써 개미 일족은 명맥을 안전하게 유지해 왔다.

여왕과 공주가 동시에 죽어 나자빠지는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

석굴 개미의 습격으로 여왕과 공주, 그리고 그들을 지키던 열다섯의 장군들과 수백의 일꾼들이 죽었다.

여왕과 공주를 잃은 데다가 군락의 개체 중 삼분지 일을 잃은 토굴 개미는 일족의 멸족을 눈앞에 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장내 분위기는 사나웠다.

“복수, 복수를!”

“여왕을 납치한다. 우리의 여왕 대신, 석굴 개미의 여왕을.”

파슷, 스슷, 파스슷.

일족들의 죽음에 흥분한 장군 개미들이 날개를 떠는 소리가 텅 빈 토굴에 음산하게 울렸다.

“아니.”

차가운 유리잔처럼 투명한 목소리가 흥분을 일시에 가라앉혔다.

장군들의 시선이 중앙을 향해 꽂혔다. 여왕을 내려다보는 무심한 시선에 복수를 천명했던 검은 개미의 눈에 기광이 흘렀다.

“흰개미. 그 말의 의미는?”

쉭쉭.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 으르렁댔다.

“석굴 개미의 여왕을 탈취하는 건 불가능해.”

흰개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미추의 구분이 인간보다 희박한 개미들은 그의 깎아 만든 듯한 외모에 감흥을 받지 않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토굴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발할 정도로 요요한 백색과 흥분한 기미 하나 없이 차분한 태도에 경외감과 함께 꺼림칙함을 느꼈다.

이 일족의 돌연변이가 얼마나 강하고, 일족을 위하는지 알고 있기에 검은 개미는 화를 내는 대신 신중히 의견을 구했다.

“무슨 뜻이냐?”

“석굴 개미는, 강하다.”

의미는 명확했다. 이대로 석굴 개미의 여왕을 납치하러 간다면 필패할 것.

“그들에겐 붉은 얼굴이 있어.”

토굴 개미에게 검은 개미와 흰개미가 있다면 석굴 개미에겐 붉은 얼굴이 있다. 여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명실상부 석굴 개미 군락의 최강자.

의미심장한 뉘앙스에 호전적인 장군들의 반응이 극적으로 나뉘었다.

어떤 장군들은 좀 더 침통해지고 신중해졌지만 다른 장군들은 즉각 적개심을 드러냈다. 검은 개미는 후자였다.

“아니! 우리가 더, 강하다!”

쾅!

“겁쟁이!”

발을 구른 검은 개미가 흰개미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신장이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가 쏟아 내는 분노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출 만큼 강렬했으나 흰개미의 선홍빛 눈은 얼어붙을 만큼 써늘했다.

검은 개미가 이를 악물고 노려보자 흰개미가 미동 없이 말했다.

“반드시 죽을, 텐데.”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검은 개미가 토굴이 쩌렁쩌렁 울리게 포효했다.

침략자들에게 밟힌 토굴을 정돈하느라 바쁜 일꾼들이 곧장 바닥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흰개미에게 달려들 것 같았던 검은 개미는 한 차례 분노를 뿜어낸 뒤 씨근덕대기만 했다.

그는 생각했다.

‘흰개미는 이성적이다.’

폭력적인 성향에 쉬이 휩쓸리는 토굴 개미들이다. 흰개미의 이성적인 판단은 일족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했다.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

열은 받아도.

검은 개미는 못마땅한 눈으로 흰개미의 허여멀건 얼굴을 응시했다.

이 토굴에서 그는 특이한 위치다.

현재 장군들은 모두 여왕의 자식들로 형제라고 볼 수 있었다.

혼인 비행을 통해 수혈한 외부의 정자로 낳은 자식들은 근친으로 인한 유전적 결함의 위험성을 상당히 낮추는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한배에서 나온 탓에 생김새가 비슷한 구석이 있는데, 흰개미는 다른 데서 낳아 온 것처럼 생김새부터 외양을 이루는 색까지 형제들과 닮은 곳이 없었다.

돌연변이였다. 산에서 약한 개체들과 함께 가장 먼저 도태되는 건 그런 돌연변이였다.

여왕은 흰개미를 무시했고, 알을 돌보는 일꾼들은 부화를 했음에도 까맣게 변하지 않고 여전히 하얀 그의 색깔과 붉은 눈이 낯설어 피했다.

다른 개체와 다섯 번 먹이 교환할 때 흰개미와는 한 번을 겨우 하는 정도였고, 짝지어서 토굴을 나갈 때도 그와 짝을 이루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군락에서 공공연한 배척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여왕은 방관했다. 그렇게 흰개미는 고립되어 갔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은 몇 차례의 습격 후였다.

공격 페로몬을 내뿜으며 흥분한 아군 토굴 개미가 목숨을 도외시한 채 침략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대로 있다간 개체 수의 반을 잃게 될 위기 상황이었고, 승리하더라도 패배하더라도 군락은 회생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그때 사냥을 나갔던 흰개미가 돌아왔다.

일꾼에 불과했던 흰개미가 맹수처럼 날뛰었다.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적의 모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공중으로 떠오르면 강력한 산성 운무에 딱딱한 피부가 녹았다.

토굴은 운무가 흩뿌려지기에 딱 좋아서 숨을 쉴수록 피부가 녹아 갔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적 개미들이 비명을 지르며 토굴 밖으로 뛰쳐나가는 뒷모습을, 토굴 개미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그는 누구나 대체 가능한 일꾼에서 개미들의 강력한 장군이 되었다.

그전까지 누구도 그가 날개를 가지고 있음을 알지 못했고 그렇게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흰개미를 일족의 돌연변이로 배척하는 충인은 아무도 없었다.

흰개미가 있어야 해.

다들 그와 먹이 교환하고 싶어 했으며 공주들은 그의 알을 낳고자 했다. 극적으로 변한 대우에도 흰개미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토굴 개미 중 누구도 그가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심지어 분노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충동적인 경향이 있는 토굴 개미들은 지나치게 절제된 그에게서 익숙한 불편함을 느꼈으나 그가 일족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걸로 되었다 여겼다.

지금도 그렇다. 여왕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한 흰개미가 불편하나 어찌 됐건 그의 조언은 귀하니 조금 참는 수밖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방법은 있나?”

“새로운 공주가 필요하다.”

검은 개미는 어리둥절했다.

“새로운 공주? 석굴 개미의 여왕 말고?”

“석굴 개미의 여왕은 어려워. 당장 확보할 수 있는 공주가 필요해. 복수는 나중이다.”

석굴 개미의 여왕은 그 군대의 세력이 크고 또한 강하니 보다 쉬운 군락의 공주를 데려오자는 말이다.

여왕보다는 스페어에 불과한 공주를 데려오는 게 좋다.

공주가 알을 낳으면 여왕이 되고, 일단 여왕이 생기면 한시름 놓을 수 있으니.

그렇게 소모된 군락의 힘을 보충한 이후에야 복수가 가망이 있다.

개미들은 흰개미의 생각을 공유했다.

타당한 말이었다. 납득하는 다른 개미들에 비해 검은 개미는 못마땅하다는 듯 날카로운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네 방법엔 빈틈이 있어.”

흥, 코웃음을 친 검은 개미가 말했다.

“강한 공주가 필요해. 남은 암컷들은 비실비실하고. 허접한 공주 따위, 다를 게 없다. 곧 비실비실한 수개미만 태어날 거야. 그럼 군락의 힘이 약해진다. 전멸과 다를 게 없어.”

개미들이 동의의 뜻으로 날개를 떨었다. 당장이라도 석굴 개미의 공주를 납치해 올 것처럼 흥분한 기색이다.

약탈은 충인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흰개미만이 무덤덤하게 서 있었다.

신중한 얼굴의 장군 개미가 그를 흘끗하더니 손을 들었다.

“문제가 있다. 강한 공주는 어디서 데려오지?”

“석굴 개미는 힘들겠지.”

“다른 토굴 개미 군락이 있다. 거기 공주도 나쁘지 않지.”

“하늘 개미는 굴의 위치를 몰라.”

“털 개미는 너무 작아.”

“동굴 개미는 어떤가! 북쪽, 상수리나무의 동굴에 있다. 어때?”

“동굴 개미는 얼마 전 멸족해 다른 군락에 흡수당했다.”

머리를 굴렸지만 딱히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이런 머리 쓰는 일은 쥐약인 검은 개미는 짜증이 난 표정으로 가슴을 문질러 댔다. 그 사소한 행동을 눈여겨본 흰개미가 물었다.

“왜 그러지?”

“전에 발로 차인 곳이다.”

여상하게 대꾸한 검은 개미가 킬킬거렸다.

“혼혈 계집.”

“아픈가?”

“아니!”

자존심이 상한 검은 개미가 홱 표정을 바꾸어 으르렁댔다.

“간지럽지도, 않다.”

가슴을 내밀며 하는 말에 흰개미는 웃지도 않았다.

다만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있다가 검은 산맥의 개미들을 모조리 끄집어내고 있는 장군들을 흘끗했다.

“강한 공주, 있어.”

흰개미의 말이 울리자 시끄럽던 장군들이 뚝 소리를 멈추고 그를 보았다.

검은 개미도 의아하게 보다가 미심쩍은 눈을 했다.

설마? 미심쩍은 시선에 흰개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생명력과 힘, 모두가 뛰어나다.”

“너 정말 그 계집을 말하는 거냐!”

검은 개미가 펄쩍 뛰었다.

“잡종이야!”

흰개미의 무심한 눈이 그를 스쳤다.

“일족엔 강한 일꾼이 필요하다, 검은 개미.”

강력한 여왕에게서 강한 일꾼이 나오는 건 일족의 진리.

대체 어떤 일족의 공주를 데려오려고 하는 거지?

다투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다른 장군 개미들의 시선이 바쁘게 오갔다.

검은 개미는 날카로운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그러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반박은 하지 못했다.

“서둘러.”

흰개미가 드물게 뚜렷한 말소리로 경고했다.

“겨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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