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요한나는 사냥꾼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슨 재미로 사는지 알 수가 없는 몹시도 재미없는 남자였는데, 사냥 실력만큼은 일품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혼자 벌어먹어도 먹고살 수 있을 만한 사냥 실력과 길고 튼튼한 다리, 가늘지만 근육이 쉽게 생겨 매끄러운 허리와 풍만하고 탄력 있는 가슴을 물려받았다.
다만 어떤 좁은 길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아버지의 유연성은 도통 닮지 않아서, 그녀의 관절은 인형의 팔다리를 붙인 것처럼 매끄럽지 못했다.
간혹 산을 내려갈 때마다 보는 또래 아이들의 부드럽고 유연하게 파닥거리는 팔다리는 근본적인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왜 내 팔다리는 이렇게 어색한 건지 묻자 그는 ‘유연하지 못한 대신 힘이 세지. 사냥꾼에게 그보다 중요한 건 없어.’ 하고 대꾸했다.
맞는 말이야.
사실 약간 어색해 보일 뿐 짐승을 잡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또 하나 그녀를 궁금하게 한 것은 어머니의 존재였다. 마을의 어린아이들은 저마다 낡은 옷을 입었지만 품만큼은 부드러워 보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귀가했다.
저와 똑 닮은 얼굴의 여자에게 오늘은 뭘 했는지 재잘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존재를 물었다.
이번의 답은 무척 간단했다.
“죽었어.”
요한나는 이번에도 큰 의문을 갖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던 그녀가 보기에도 아버지는 마을의 장정들과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매일 술을 마시며 아낙들의 치맛자락을 들추며 희롱하는 사내들과 달리 아버지는 사냥꾼으로서의 직업적 흥미밖에는 없는 듯했다. 술도 하지 않았고 여자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남들이 보기엔 약간 특이할 만하다 싶은 취미가 있었는데, 인간이 아닌 짐승들의 교미를 관음하는 것이었다.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끼들의 짧은 교미 장면은 물론이거니와 일주일은 훌쩍 넘어가는 뱀들의 교미 장면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서로 성기를 맞대고 꼼지락대는 짐승을 발견하면 아버지는 사냥도 멈추고 하염없이 그것만 들여다본다. 그중에서도 요한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가 충인의 교미를 관음하던 순간이었다.
인간은 짐승과 같은 다른 생물종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런 그들이 짐승보다도 멀리하는 것이 바로 충인이다.
충인. 인간종에 속하기는 하나 호모 사피엔스와는 같지 않은 것. 인간처럼 머리, 가슴, 배, 엉덩이, 다리, 팔이 있지만 결코 부드럽지 않은 몸.
피부 껍질은 다리가 여럿 달린 절지동물처럼 딱딱하고 매끄러웠고, 어떤 개체들은 날 수도 있었다. 이빨은 날카롭고, 피부가 벌레처럼 녹빛을 띠기도 했다.
산에서 나고 자란 그녀도 당연히 그들의 존재를 목격했다. 대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마을에 숨어들었다가 급하게 쫓겨나거나 먼 거리를 비행하던 중에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쉬어 가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유리알을 박아 넣은 것처럼 무기질적인 눈에, 딱딱해 보이는 피부, 근육질 팔뚝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 큰 충인들은 마을에서 보았던 성인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날개를 이용해 하늘을 나는 모습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어린 요한나는 그들을 보며 마을에서 훔쳐 들은 천사의 존재를 떠올렸다.
이 세상에는 천사라는 게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사자로, 날개를 가지고 있단다.
요한나는 궁금했다. 날개가 있는 건 똑같은데 어째서 사람들은 천사는 찬양하고 충인은 경멸하는 걸까?
동화책에 실린 천사의 삽화를 보았으면 바로 이해했을 테지만 요한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책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인 사냥꾼은 책 따위에 돈을 쓰느니 그걸로 사냥할 무기를 살 사람이었다.
그날은 사냥꾼이 새로운 화살을 시험하러 간다고 사냥을 나선 날이었다. 요한나는 도시락을 싸서 그가 주로 사냥하는 곳을 찾아갔다.
목적지가 가까워지기 전 코가 예민한 짐승들이 냄새를 맡고 경계할까 봐 산의 낙엽 더미 위에 뒹굴었다. 그녀의 기척 탓에 사냥감을 놓친 사냥꾼에게서 뺨을 얻어맞은 이후 생긴 습관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사냥에 전념할 거라고 여겼던 사냥꾼은 찔레꽃 군락에 웅크린 채 미동이 없었다. 봄을 닮은 찔레꽃 향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찔레꽃은 향기가 은은한 데다가 여린 순은 껍질을 벗겨서 먹을 수 있기에 요한나가 아주 좋아하는 식물이었지만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 주의해야 했다. 그런데 사냥꾼은 찔레나무의 순을 따 먹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깊숙이 몸을 웅크리고 있으니 대체 뭐 하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가 아파서 엎드려 있는 걸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흉악한 살기가 흐르는 얼굴은 집중하느라 험상궂은 주름이 가득했다. 확실한 건 아파서 저러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요한나는 사냥꾼처럼 숨을 죽였다. 그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사냥꾼의 눈길을 좇았다.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쓰으, 스읏, 스으으.
찔꺽, 찔꺽, 탁, 탁!
바람 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한 숲에서 키가 큰 두 인영이 서로를 끌어안고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가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부딪친 몸에서 둔탁하게 탁, 탁 소리가 났다.
척척하게 젖어 번들거리는 검붉은 성기가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성기가 사라질 때면 아래 깔린 몸에서 날카로운 소음이 터졌다.
푸른빛이 도는 피부는 창백했다. 다만 뺨만큼은 기이하게 불그스름했다. 푸른 피부에 떠오른 어스름한 붉은빛이 기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스으, 스으.
표정 없는 얼굴이 흐느끼는 숨소리를 연거푸 뱉는다. 그건 언뜻 혀를 앞니 뒤에 대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 같았다.
‘충인이다.’
그들이 뭘 하는지 깨닫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속이 메스껍다.
사냥꾼은 그 어떤 재밌는 구경을 하는 듯 교미하는 충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요한나는 그의 손이 다리 사이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건 충인이 교미하는 장면보다 더 역겨웠다.
먹을 것을 구해 주고 집이 고장 나면 수리해 주는 고마운 아버지에게 품기에는 마땅하지 않은 감정이었지만 인간도 아닌 충인의 교미를 보며 무심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흥분한 채 수음하는 모습은 어떻게 생각해도 존경스럽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사냥꾼이 마을의 남자들과 본질적인 어떤 것이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성벽을 가지고 있는 그가 어떻게 멀쩡히 여자를 만나 자신을 가졌을까? 미스터리한 일이다.
요한나는 인간의 교미에 대해선 모르지만 짐승들의 교미만큼은 숱하게 보았으므로, 생명이 잉태되는 과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냥꾼이 거무스름한 성기를 부드럽고 따뜻한 인간의 다리 사이에 파묻는 장면을 떠올리려다 구역감을 느끼고 즉시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좀, 이상해.’
그날 생긴 의문은 가슴에 묻어 두었다. 왠지 사냥꾼에게 묻기에는 꺼림칙했다.
열다섯 살이 된 요한나는 여전히 산 깊은 곳 오두막에 살았다.
그간 낡은 오두막은 낙석에 의해 세 번 지붕이 무너졌고 성난 늑대들의 침입으로 문짝이 다섯 번 뜯겼다.
사냥꾼은 지붕을 능숙하게 수리했고 횃불을 이용하여 늑대를 쫓아냈다. 그 과정에서 팔뚝과 허벅지를 물어뜯겼다. 그 일로 그는 다소 쇠약해졌지만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요한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뛰어난 사냥꾼이 되었다. 사냥꾼은 소싯적에 애용했던 큰 활을 그녀가 사용하게끔 허락했다.
그러면서 지나가듯 한마디를 뱉었다.
“이제 제법 처녀 냄새가 나는구나.”
그녀는 키가 훌쩍 자랐고 가슴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사냥을 하는 데 방해가 되자 두툼한 천으로 여러 번 감았다. 여름이 되면 땀이 차서 불편했으므로 요한나는 가슴이 커진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가 차면 찰수록 그녀의 시선은 산 아래 인간 마을을 향했다.
마을의 인간들과 사냥꾼은 필요한 물건을 교환할 뿐 그 외의 교류는 없었다. 마을의 인간들은 검은 산맥에 터를 잡고 사는 사냥꾼을 꺼리며 곁을 내주지 않았다.
유독 추운 겨울에 유리한 귀한 짐승 가죽을 공급할 수 있는 유용한 존재이기에 마을 출입을 허용하는 것일 뿐, 그들은 부녀가 마을을 활보할 때마다 역병을 보는 양 경계 어린 시선을 보냈다.
쫓기듯 마을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요한나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마을에 갔다 온 날은 마음이 울적하고 얼굴에 시무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날도 마을 사람들의 천대에 마음이 심란했다. 장작을 패도 기분이 풀리지 않자 작정하고 사냥에 나섰다.
‘뭘 잡으면 좋을까?’
요즈음 마을 사람들이 충인의 잦은 침범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기에 할 수 있으면 충인을 사냥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충인을 한 번도 죽여 본 적이 없었고, 근래에는 보기도 어려우니 패스.
‘회색 늑대가 좋겠어. 오늘에야말로.’
시시때때로 오두막을 침범해 오는 교활한 회색 늑대의 근거지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회색 늑대는 이 산의 포식자 중 하나다. 오래전 동료를 사냥꾼에게 잃은 뒤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사냥꾼이 쫓아오면 도망가고 물러날 때는 집을 찾아오거나 사냥감을 낚아채 훔쳤다. 제일 성가시니 이참에 뿌리를 뽑아야겠다.
‘지난번에 함정을 판 게 효과가 좋았으니까 이번에는 나 혼자로도 충분할 거야.’
며칠 전 찾아낸 근거지를 기습한다면 오랜 우환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요한나는 그녀의 튼튼한 활과 날이 잘 드는 칼을 찾아 허리춤에 차는 것으로 사냥할 채비를 했다.
사냥은 하루가 꼬박 걸렸다.
밤새 덫을 놓고 함정을 파는 고된 작업이 이어졌지만, 덕분에 근거지의 늑대들을 궤멸에 이르게 했으니 이번 사냥은 더할 나위 없는 대성공이다.
털이 북슬북슬하니 따뜻할 것이 분명한 탐스러운 늑대를 끌어안고 요한나는 상처투성이로 미소 지었다.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어쩌면 고맙다는 말을 할지도 몰랐다. 올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요한나는 수북하게 쌓인 늑대 사체를 보고 고민에 빠졌다. 이 많은 가죽을 혼자 벗기기는 힘들 터. 솜씨 좋은 사냥꾼의 손이 필요하다.
그녀는 나는 듯이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도착하고 나서야 팔다리가 피범벅이라는 걸 알아챘다. 늑대 발톱에 긁혔던 곳이었다. 얼른 늑대 가죽을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쳤다는 것도 잊었다.
‘에이, 귀찮게.’
상처에서는 관심을 끄고 오두막으로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해가 중천에 떠올랐지만 산 깊은 곳 오두막은 해님이 구석구석 살피기도 어려웠다. 그늘에 잠긴 오두막은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뼈가 아릴 정도로 추웠다.
“…….”
산속에서의 적막감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왁자지껄 떠드는 인간의 소리는 없어도 새소리는 명랑하게 울려 퍼지곤 했는데 소슬한 추위가 찾아드는 새소리조차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배움이 짧은 요한나는 그것을 쓸쓸함이라고 표현한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
대답은 없었다. 새소리도 없었다.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우뚝 선 오두막을 보자 요한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숱하게 굴렀던 그녀의 직감이 위험을 경고했다.
불길한 적막감.
그늘에 잠긴 오두막은 죽음에 갇힌 것 같았고, 침묵은 무생물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언제 활짝 웃었냐는 양 무표정해진 요한나는 사냥감의 눈을 피하는 맹수처럼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끼이.
낡은 오두막의 문을 열자 피비린내가 훅 끼쳐 왔다. 요한나는 망연자실하게 피 칠갑이 되어 있는 낡은 판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무판자는 피가 말라붙어 암적색이었다. 불길한 색이다.
그녀는 곧 사냥꾼을 찾아냈다.
모닥불 바로 앞에, 아버지는 갈가리 찢겨 있었다.
끔찍한 형상을 보면서도 죽음을 떠올리지 못했다. 덩그러니 홀로 놓인 몸통. 조각조각 난 채 여기저기 흩어진 팔다리의 모양은 누군가의 질 나쁜 장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은 피 냄새가 그녀를 일깨웠다.
아버지가 죽었다.
석상처럼 굳은 듯이 서 있던 요한나는 우선 주변을 수습했다.
아버지의 몸통에 팔다리를 붙였다. 관절마다 꺾여 있고 조각이 나 있어 시신을 그럴싸하게 만드는 건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았다.
무릎을 꿇고 요한나는 잘린 팔의 단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죽은 지 꽤 오래되어 나무토막처럼 차갑고 딱딱했지만, 짐승의 사체를 많이 만져 본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도 죽으면 짐승과 다를 바 없구나.
눈물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살갑지 않은 사이였어도 그렇지, 여태껏 살아남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 죽었는데 어째서 눈물이 나지 않는 걸까. 역시 사람들이 말한 대로 사냥꾼이 사악하고 천한 존재라서?
흐리멍덩한 슬픔보다 분노는 명확했다.
요한나는 사냥꾼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누가 그를 이 꼴로 만들었는지 알아야 했다.
요한나의 눈이 위험하게 가늘어졌다.
아버지의 잘린 팔은 매끄럽지 못했다. 넓적한 나뭇잎을 천천히 찢었을 때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흉기 따위에 절단된 게 아니다. 그대로 찢겼다.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온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눈이 있는 자리가 텅 비었고 코는 뜯겨 있었다.
‘역시 절단면이 거칠어.’
도려진 게 아니라 뜯긴 거다. 이를테면 이빨 같은 것에.
요한나는 시신에 남은 흔적을 다시 살폈다. 그리고 ‘이빨’로 찢긴 듯한 흔적을 더 발견했다.
흔적의 모양은 눈에 익어 있었다. 아몬드형의 눈매가 예리하게 좁혀졌다.
“……개미.”
요한나는 아버지의 팔을 조심스럽게 다시 맞추고 오두막 안을 훑어보았다. 수 시간 전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습격은 급작스러웠다. 아버지는 장작을 패는 도끼로 대항했지만, 곧 무기를 뺏겼다.
요한나는 구석에 처박힌 도끼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개미’는 도망가려는 아버지를 붙잡아 사지를 잡아 뜯었다. 살아 있는 채로.
시신의 흔적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난다. 악의의 냄새다.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누군가는 그를 몹시도 싫어한 게 분명했다.
어느새 요한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뜨거운 분노와 눅눅한 슬픔 한편에 의문이 든다.
왜?
충인의 일종인 개미가 범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물음표였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몇 개 없다.
저들만의 은신처에 무리 지어 산다.
번식을 하는 우두머리가 있으며 나머지는 우두머리를 위해 헌신한다.
‘그것뿐이야. 다른 호전적인 충인족에 비해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나?’
건드리지 않으면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종족.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를 이렇게 끔찍하게 죽인 것일까? 설마 또 충인들의 교미를 엿보다 변을 당했나?
피비린내 나는 오두막에 우뚝 서서 생각에 잠긴 요한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침 해가 구름에 가려 햇빛이 줄어들자 예쁘장한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음영이 뚜렷한 얼굴이 천천히 움직여 처참하게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향했다. 복잡한 심경이 앳된 얼굴을 스쳤다.
잠시 후.
요한나는 뒤뜰에 있었다. 자꾸만 머릿속이 복잡해져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땅을 깊이 파는 데 집중했다. 짐승이 파헤치지 못할 정도로 깊이 판 구덩이에 아버지의 조각난 시신을 넣고 나무를 깎아 비석 대신 세웠다.
어설프게나마 묘를 세운 뒤 더러워진 오두막을 청소했다.
일련의 과정을 진행하며 요한나는 의혹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관절이 평소보다 뻣뻣한 게 퍽 거슬린다.
어쩌면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아 그랬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 문제를 파고들 필요가 없다고.
어떤 문제는 덮어 두는 게 들추는 것보다 더 좋다.
* * *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자, 요한나는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작 한 사람이 없는 것뿐인데도 오두막은 무척 적막했다.
옆으로 누운 그루터기에 걸터앉으니 문득 왁자지껄한 마을의 풍경이 떠오르면서 갑작스러운 추위를 느꼈다.
외롭다는 게 요한나는 우스웠다. 새삼스러운 탓이다.
기억하는 순간부터 늘 이곳에서 아버지와만 지냈다.
만날 수 있는 타인은 마을 사람들뿐. 그나마도 마을에 데려가지 않으려는 아버지에게 떼를 써야만 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처음 본 마을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스스럼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어깨를 얼싸안는 인간들. 그들은 그녀의 삶이 비어 있다고 느끼게 해 주었다.
요한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아낀다고 생각했지만, 마을의 부모들이 자기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살뜰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첫 토끼 사냥에 성공하자 사냥꾼은 자기 임무를 다했다는 듯 굴었다.
그때 요한나는 열 살이었다.
사냥꾼으로서 이름을 날린 데 대한 자신감인가.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태도에 요한나는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아버지의 기대대로 열다섯 살의 요한나는 이미 훌륭한 사냥꾼이었다. 그러나 요리는 미숙했고 지붕 수리 역시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이제 그것들을 해 주던 아버지가 없으니 요한나는 혼자 사는 법을 익혀야 했다.
혼자 된 외로움을 참는 방법 역시.
* * *
아버지가 죽은 후 홀로 남은 오두막에서 요한나는 사냥하고 밥을 지어 먹고 장작을 팼다.
지루할 정도로 똑같은 날을 보내던 열일곱 살의 어느 날, 시린 겨울이 찾아왔다.
그녀는 호된 열병을 앓았다.
일주일을 내리 앓고 거짓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묘하게 상쾌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했다.
저벅저벅.
오두막의 문을 열자 내리쬐는 햇볕에 눈살을 찌푸렸다. 보송보송한 햇볕이 뽀얀 살결에 내려앉았다. 요한나는 핏줄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팔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성장통이었던 걸까.
그녀는 변해 있었다.
* * *
오랜만에 내려간 인간 마을. 여기저기서 닿는 시선에 뺨이 따끔거렸다. 요한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걸음을 빨리했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거지?’
시선은 익숙했다. 호의가 아닌 배척하는 시선이지만.
산속에 집을 짓고 사는 음침한 사냥꾼 부녀. 이제는 홀로 남은 사냥꾼 소녀를 사람들은 불쌍하게 여기기보다는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시선에 익숙한 그녀도 오늘은 태연하게 굴기 힘들었다. 묘한 분위기가 공기 중에 떠돌고 있음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주변을 신경 쓰며 걷느라 사각에서 튀어나오는 행인과 어깨가 부딪쳤다.
“아!”
“이런. 미안해요, 아가씨.”
날아올 욕을 기다리던 요한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가씨?”
낡은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의아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흘러도 따스한 눈빛이다. 요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사람은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녀가 감히 몸을 부딪쳤는데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제야 요한나는 제게 닿는 시선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받아 보는 호의적인 시선이었다.
‘아, 내가 사냥꾼인 줄 모르는 거야.’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음침한 사냥꾼 소녀와 동일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묘한 기분.
언제 자신이 사냥꾼이라는 것을 알아챌까. 금방이라도 ‘너구나!’ 하고 얼굴을 바꿀 것 같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빠르게 걸었다.
고개를 숙이고 찾아간 과일 가게에서 그녀는 또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처음 보는 아가씨인데…….”
의심스러운 시선에 드디어 들켰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아! 어제 중앙에서 상단이 왔다더니, 거기 일행인가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과일 가게 주인은 신이 나서 떠벌렸다. 요한나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가씨가 예뻐서 더 주는 거야. 이 토끼는 오는 중에 사냥한 건가? 질이 좋은데 더 있으면 갖고 와요. 신선한 걸로 챙겨 줄게.”
과일 가게를 나서는 얼굴이 얼떨떨했다.
토끼 세 마리만으로 사과 두 바구니를 얻었다.
평소 받았던 양보다 두 배는 많다.
예뻐서 더 준다는 말에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늘 마지못해 거래한다는 표정을 지었던 주인의 환한 얼굴도.
기분이 이상하다.
불안하게 수런거리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울렁거리는 것이 얼른 마을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그 사냥꾼 소녀라는 걸 알게 하면 안 된다.
사야 할 물건도 다 사지 못하고 허둥지둥 산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을 외곽의 벌목지에 다다른 발이 멈칫거렸다.
벌목지에는 한 청년이 상체를 벗어젖히고 나무를 패고 있었다. 벗은 상체에서 굵은 땀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갖은 운동으로 다져진 울퉁불퉁한 팔뚝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내리칠 때마다 힘차게 핏줄을 올려 보냈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의 머리카락, 이런 외진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외눈 안경이 부유해 보인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늘은 나무꾼 아저씨를 도와주나 봐.’
요한나는 저 청년을 알고 있다.
바렌타.
마을 촌장의 아들로서 다음 대 촌장으로 내정된 청년.
요한나에겐 시원하게 웃는 소년의 얼굴로서 각인된 사람이다.
외로운 소녀가 활기차게 뛰어노는 마을의 악동들을 동경한다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바렌타는 그런 소년 소녀들 사이에서 골목대장 역할을 했던 개구쟁이 소년이었다.
추진력 있는 성격에 모두를 납득시키는 리더십과 카리스마, 거기에 더해 소외된 아이들도 포용하는 다정한 성품은 뭇 소녀 소년들을 감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어찌나 충분했던지 사람의 품을 동경하는 외로운 소녀까지 홀려 버렸다.
아버지를 졸라 마을에 내려오고 싶었던 게 무엇 때문이었던가.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차올랐다.
오랜만에 본 바렌타는 여전히 멋있었고 눈이 부셨다. 사냥감들의 목은 서슴없이 딸 수 있는 요한나의 비정하기 이를 데 없던 심장이 요동쳤다.
그녀는 모두가 배척하는 사냥꾼 소녀에게 달콤한 사탕을 내밀었던 소년의 친절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변해 버린 자신을 보아도 바렌타는 소녀를 떠올려 줄까?
마을 사람들의 변화가 기쁘지만은 않다. 요한나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바렌타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건 싫다. 하지만 소녀 사냥꾼에게 하듯이 의례적인 미소를 보여 주는 것도 싫다.
자신이 뭘 원하는 걸까.
‘나도 모르겠어.’
확실한 건 지금은 그를 보고 싶지 않다는 거다. 볼 자신이 없었다.
홱 몸을 돌리는 순간, 건너편에서 뛰어오던 소년과 부딪쳤다. 찰나 요한나의 뛰어난 동체 시력은 소년이 바렌타의 남동생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그녀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과를 잡는 대신 뒤로 나뒹굴 뻔한 소년의 허리를 붙들었다. 가녀려 보이던 팔에 팽팽한 근육이 올라붙었다.
요한나의 품에 안긴 소년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소년이라고는 하나 체구가 건장한 그와 부딪쳐도 요한나는 약간 비틀거리는 것으로 그쳤다.
“어, 감사합니다……?”
멍하게 중얼거린 소년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요한나의 가슴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태양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소년이다. 어렸을 적 바렌타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에 요한나는 저도 모르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소년이 바닥에 바로 서게 도와주는데, 뒤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르도! 괜찮아?”
요한나는 등을 보인 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예민한 기감이 바로 목전에 바렌타가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놀랐는지 거칠어진 숨까지 생생했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뛰어야지. 아직도 그렇게 천방지축이어서야! 죄송합니다, 동생이 철이 없어서.”
바르도에게 화를 낸 바렌타는 요한나에게도 말을 건넸다. 정중한 태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 박동이 두근두근 널을 뛴다.
“괘, 괜찮아요.”
뒤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멈칫.
무시하지 못하고 발을 멈춰 세웠다. 그에게 등을 보이고 선 채 가만히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곧이어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가까워지고 있다.
“짐 떨어졌어요.”
‘아, 과일.’
내심 신음을 흘렸다.
“고맙습니다.”
요한나는 슬쩍 팔만 뻗어 바구니를 뺏듯이 받아 들었다. 행동이 거칠어서인지 그가 놀라는 기색이었다.
요한나는 속으로 험한 말 몇 마디를 지껄였다. 바렌타는 상냥한 남자였다.
마을 아이들이 노는 걸 음침하게 지켜보는 그녀에게도 몇 번이나 손을 내밀었으니. 하지만 그녀는 바렌타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손 앞에서 번번이 도망치기만 했다.
지금이라고 다를 리가 없다. 요한나는 바구니를 건네는 커다란 손이 다시 거둬지는 것을 곁눈으로 핥듯이 훔쳐보았다. 짙은 아쉬움이 가슴을 올무처럼 휘감았다.
그를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망이 끓는 기름처럼 부푼다. 하나 켜켜이 쌓인 불안과 두려움이 제동을 걸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잠깐만요.”
후다닥 걸음을 떼려는데 손이 잡혔다. 요한나의 다리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함부로 붙잡아서.”
손은 금방 떨어졌지만 요한나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자유로워진 손이 미친 듯이 신경 쓰였다. 당장 손을 확인하고 싶었다.
바렌타가 붙잡았다고 뭐가 남아 있을 리가 없는데 냄새라도 킁킁 맡고 싶었다.
얼른 자리를 떠나고자 들썩이는 그녀의 뒤로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인가 하고.”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오는가 했다.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를 괄시하고 찝찝해했던 시장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들은 오늘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했다. 모습이 다소 변한 것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산속에서 뭘 하고 사는지 모르는 꺼림칙한 사냥꾼.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걸, 요한나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렌타는 어떨까?
요한나는 턱을 움찔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알아차리는 걸 바라는 건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무미건조하게 해야 할 일만 했던 그녀에게 이런 혼란은 낯설기만 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다 결국 산으로 뛰어가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에 요한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눈앞에 그림자가 진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몇 걸음 옮기는 것으로 쉽게 그녀의 앞을 선점한 바렌타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 이 누나, 진짜 예뻐.”
바르도의 목소리는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요한나는 바렌타의 다정한 갈색 눈에 홀려 버렸다.
그의 시선은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토끼의 반질반질한 까만 눈보다 반짝거렸고 겨울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피운 화롯불처럼 온화하고 따뜻했다.
이렇게 부드러운 시선을 요한나는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든 어떻게 살아왔든 신경 쓰지 않고 끌어안아 보듬어 줄 것 같았다.
부모의 손을 잡고 귀가하던 아이들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던 그 순간으로 요한나는 순식간에 회귀했다. 손을 뻗어 움켜잡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 음…….”
그녀의 열렬한 시선이 난감했는지 바렌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뒷덜미를 긁적였다. 난감한 기색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멍했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언뜻 창백해 보일 정도로 투명한 피부에 뺨에만 홍조가 은은하게 올라온다.
‘바보같이.’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요한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주먹을 입에 대고 웃음을 참는 듯했던 바렌타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반쯤 가려진 갈색의 눈동자는 웃음기를 담아 한층 더 반짝거렸다. 요한나는 다시 멍해졌다.
어떻게 이렇게 반짝거릴까.
“맞지?”
“……어?”
뭐가? 멍청하게 되묻자 바렌타가 잠깐 붙들었다 놓았던 그녀의 손을 흘끗했다.
그의 시선을 삼킬 듯 탐내던 요한나의 시선도 즉시 그를 따라 손으로 이동했다.
별거 없었다.
“장갑 멋있네, 요한나.”
요한나의 손가락이 움찔 튀었다. 거무튀튀한 가죽 장갑을 다시 살폈다.
창고에 처박혀 있던 아버지의 낡은 장갑이었다. 먼지가 가득 내려앉았던 걸 털어 손에 끼웠을 때 장갑의 미추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멋있을 리 없었다.
역시 바렌타는 상냥하다. 달콤하고, 기분 좋은 감각.
이래서 그녀는 사람의 마을이 좋았다.
혼자 있을 때는, 아니, 아버지와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이곳에선 온몸으로 만끽할 수가 있다.
‘바렌타가 날 알고 있어.’
그가 자신을 알아봐 줬다는 데 짜릿한 기쁨을 느꼈다. 그는 전과 비슷했다. 그녀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고 여전히 따뜻하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변함없는 태도에 그녀는 안도하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아쉽다고? 뭐가?’
그녀는 짐승들의 교미를 제외한 남녀의 정에 무지했다.
이상하게 간지러운 가슴께를 긁적이며 요한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바렌타의 신발 앞코. 사냥꾼의 것처럼 튼튼하지만 멋스럽기도 한 베이지색 가죽 신발이 성큼 가까워진다.
“추워?”
바렌타의 미소가 한결 친밀하게 느껴졌다. 요한나는 고개를 저었다.
“장갑 겨울용인 거 같은데.”
“어, 아니, 이건, 작업할 때 편하기도 하고 휴, 흉터도 생겨서.”
머릿속이 하얘져서 허둥지둥 말했다.
“장작, 을 패다가 다쳐서, 막, 못 볼 정도는 아니지만.”
“요한나.”
“어, 어?”
“너무 긴장하지 마. 상처가 있다고 널 욕할 사람은 없어.”
요한나는 살짝 입을 벌렸다. 파리가 들어가도 모를 것 같았다. 완숙한 처녀의 몸에 맞지 않게 멍청한 모습에 바렌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가끔씩 산에서 내려오는, 혼자인 게 익숙한 사냥꾼 소녀에게 연민을 품고 있었다.
그 감정을 명명하진 못하지만, 감정의 온도는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는 요한나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 다치지도, 아프지도 않은데 이상했다.
바렌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깐 머뭇거렸다. 요한나는 땀으로 촉촉해진 그의 옅은 분홍빛 입술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때, 멀뚱히 그녀를 훔쳐보던 바르도가 갑자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형! 맞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버지가 손님 왔다고 빨리 오래. 까먹고 있었어! 딴 데 새지 말고 후딱 갔다 오랬는데!”
비명을 지른 바르도는 아비에게 엉덩이를 맞을까 봐 두려운 눈이었다.
마을의 촌장은 약간 야비한 인상에 온정 없이 차가운 눈이 퍽 위압적인 사람이었다. 자식에게도 가차 없는가 보았다.
“형, 얼른!”
“알았어, 가자, 가.”
바렌타는 호들갑을 떠는 바르도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요한나는 하염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쉬움을 삼키다 말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바렌타가 특유의 녹은 밀랍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다음에 보자.”
대답할까, 말까.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바렌타는 다시 정면을 보고 걸어간다.
멀어지는 뒷모습에 뒤늦게 대꾸했다.
“……응.”
나도 마을의 다른 아이들처럼 말재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짧은 음절의 대꾸가 안타까워 요한나는 눈살을 찡그려 버렸다.
한 번만 더 돌아봐 줘.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바렌타가 휙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걱정했었어! 그동안 마을에 안 내려와서.”
요한나의 미간이 팽팽해지고 좁아진 이마엔 균열 같은 주름이 잡혔다.
정지 장면처럼 굳은 그녀를 향해 바렌타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바르도와 함께 듬성듬성한 주택가 저편으로 넘어간다.
요한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죽 장갑이 저들끼리 엉겨 붙으며 자잘한 주름을 만들어 냈다. 요한나는 장갑이 틈 없이 들러붙기까지 계속 힘을 주었다. 힘을 뺐다가는 다리까지 힘이 풀려 버릴 것 같았다.
열일곱 살의, 달콤하기 짝이 없던 어느 날.
사냥꾼 처녀는 사랑은 사냥 기술과 달리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걸 배웠다.
* * *
스무 살의 요한나는 마을 여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한껏 물이 오른 과실 같았다.
바렌타는 촌장의 훌륭한 아들이자 촉망받는 차기 촌장 후보였다. 조그마한 마을일지라도 촌장의 권한은 막대해서, 후계자인 그가 비호하니 요한나는 전보다 사람들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엔 뱀이 허물을 벗듯 삽시간에 변해 버린 껍데기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거다.
그녀에게 본능적인 호의를 베풀던 사람들은 그녀가 말수 적고 어둡던 그 사냥꾼 소녀였다는 데 놀랐다.
변한 외모와 더불어 그녀를 꺼림칙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요한나는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슬픔에 잠기려 치면 바렌타가 품을 빌려주었다. 슬프기는커녕 행복에 잠겨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열일곱 살부터 스무 살까지 3년. 이전보다 마을에 얼굴을 자주 비치는 그녀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적지만 꾸준히 늘어났다.
하나 대다수는 여전히 그녀를 잠재적 범죄자로 여겼다.
어떤 이들은 바렌타가 그녀를 보호하는 데 더 큰 반감을 가지기도 했다.
후자의 사람들은 바렌타가 그녀의 곁을 비우기만 하면 온갖 폭언과 욕설을 쏟아붓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사람과의 대화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요한나는 거친 언어의 향연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곤 했다.
하나 그것도 몇 번 반복되니 멀뚱멀뚱 하늘을 보며 흘려보내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아무리 싫어한대도 그건 적의지 살기가 아니었으며, 검은 산맥을 제집처럼 오가며 회색 늑대의 음험한 살기 속에서 살았던 요한나에게 그들의 미움은 간지럽지도 않았다.
무던한 반응에 욕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요한나는 좀 더 행복해졌다.
그녀는 행복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했던 사람들 틈에 자신이 서 있는 거다.
마을에 드나드는 것도 어릴 때처럼 긴장이 되지 않았다.
마을을 수호하는 대충인 맹수 방어용 방벽의 뾰족한 송곳을 보아도 더는 가슴이 서늘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마을을 위협하는 외부인보다 내부인에 가까워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그녀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건 역시 바렌타의 존재였다.
요한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에 손을 댔다. 차가운 가죽 장갑의 메마른 감촉에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뗐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민망한 한편 가슴이 간지러웠다. 가슴께를 벅벅 긁으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입 맞춰도 돼?’
고개를 끄덕이자 즉시 입을 맞춰 주었지.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의 감촉과 톱밥 냄새가 섞인 남자다운 체취. 요한나는 금세 도취되었다.
입을 뗀 뒤 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의 갈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짙었다.
부드러운 얼굴에 떠오르는 욕망은 낯설었다. 두렵기보다 기뻤다. 바렌타는 나를 좋아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내가 그를 생각하는 것처럼.’
만약 이대로 시간이 좀 더 지난다면 그와 교미하게 될까?
문득 요한나는 이질감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떠오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걸 뭐라고 표현했지? 그래. 사랑을 나눈다. 바렌타와 사랑을 나누게 되리라. 요한나의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 * *
3년 동안 알게 된 바렌타는 그녀가 5년 동안 멀리서 지켜보며 동경했던 활기차고 따뜻한 소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는 소외된 소년 소녀들이 마을에 융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긴 했지만 가난해서 도둑질한 소년을 기꺼이 용서할 정도로 한정 없이 선량하진 않았다.
마을의 안보를 위협하는 맹수와 충인을 혐오하며 힘에 부치는 일은 손을 대지 않았고, 집단으로 구타당하는 소년을 볼 때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부드러운 얼굴로 마을의 어른에게 봤던 일을 ‘보고’했을 뿐.
그것을 보며 막연히 생각한 것처럼 바렌타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래도 좋았다.
바렌타의 본질은 그녀가 알고 있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따뜻하고 상냥한 미소를 조금도 변질시키지 못했다.
나날이 키워 나갔던 연모의 정은 입을 맞추는 순간 달콤한 꿀처럼 녹아내렸다.
사랑이란 말도 전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익숙한 산길을 오르는 요한나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요즘 그녀는 본업인 사냥 일을 등한시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마을로, 바렌타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힘이 세고, 마을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언젠가는 사냥꾼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지.’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바렌타의 아내가 되어 마을에 정착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바렌타에게 줄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완전히 손을 뗄 수 없겠지. 전문 사냥꾼이 없는 마을에서 가죽은 귀한 물건이니까.’
오두막의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 붉은 사자 가죽을 생각하며 기대의 미소를 지었다.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며 기침하는 그를 보는 순간 그녀는 그녀가 바렌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누가 예지라도 한 듯이 선명했다.
붉은 사자 가죽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멀리 산행을 나가 운 좋게 성공한 사냥의 전리품이었다.
그날 뱃가죽이 찢어져 죽을 줄 알았던 아버지는 한 달을 내리 앓더니 골골대며 살아났는데 그 꼴을 하고도 붉은 사자 가죽을 보며 기뻐했다.
어디든 비싸게 팔자며 창고에 보관했지만, 아버지는 사자 가죽을 시장에 내놓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붉은 사자 가죽을 받은 바렌타가 아버지처럼 흡족해하는 상상을 했다.
이런 선물을 주는 네 마음에 감동했다며 그녀를 뜨겁게 안아 주는 거다.
야릇한 상상을 가로막은 건 오두막으로 이어지는 화강암 포석을 반쯤 밟았을 때였다.
“…….”
주변이 진공 상태처럼 조용했다. 바람도 불지 않아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고요한 시간이 흐르고 있는 숲을 살펴보는 요한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이런 불길함을 겪어 본 적이 있었다.
5년 전의 참상이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그녀는 포식자를 만난 짐승이 으레 그러하듯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코끝에 노랗게 변한 계수나무 잎사귀의 달큼한 냄새가 스친다.
땅에 떨어진 나뭇잎이 썩어 가는 야릇한 향기 사이로 은밀하게 파고든 불온함이 그녀를 절로 신중하게 만들었다.
산에서 맨몸뚱이의 인간은 결코 강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무장한 인간은, 사냥꾼은 먹이 사슬의 상위 포식자가 된다. 그런 사냥꾼도 긴장해야 하는 포식자라면.
‘좋지 않은데.’
만약 아직 누군가 남아 있다면 그녀의 인기척이야 진작 들통이 났겠지만 그럼에도 숨을 죽이고 기척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멀리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 대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요한나의 마음도 탁, 풀어졌다.
검은 산맥은 나무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스라소니가 많이 사는데, 귀여운 외모와 달리 행동이 은밀하고 기민했다.
요한나는 스라소니처럼 소리 없이 움직여 오두막 울타리 안쪽으로 이동했다.
오두막의 앞뜰은 장식에 관심 없는 그녀를 닮아 단출했다. 가을 산의 낙엽이 떨어져 자못 쓸쓸하기까지 한 오두막의 정경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나 균열은 분명했다.
유리 조각이 바닥에 난자했다. 창문이 엉망진창으로 깨져 있었다. 요한나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1년 전 바렌타에게서 받아 온 네모 모양 유리로 만들었던 창이었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니 균열은 극심했다. 이틀 전 봤을 때와 딴판으로 엉망진창인 내부가 그녀를 맞아들였다.
마치 오두막을 통째로 뒤집어엎었다가 달달 흔들어 놓은 모양새였다.
간소하나 그런대로 쓸 만했던 집기들이 부서지고 깨져 있다.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검고 미끈한 물이 떨어져 있고 근처에 물통처럼 생긴 통이 아가리를 벌린 채 뒹굴고 있었다. 유등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검은 기름이었다.
기름은 뜻밖에 침입자의 행방을 가르쳐 주었다. 요한나는 발자국 모양으로 띄엄띄엄 이어지는 기름을 보고 어두워진 눈을 빛냈다.
오두막을 엉망으로 망가뜨린 악의에서 유추하긴 했지만, 침입자는 지성체인 듯하다. 발자국은 한 뼘을 족히 넘었다. 이런 발을 가질 수 있는 건 성인 남성밖에 없었다.
‘맨발이라는 건 이상한데.’
낙엽이 많이 쌓여 땅이 부드럽다고는 해도 자잘하고 뾰족한 돌멩이가 많아 맨발로 산을 타는 것은 그다지 권장되는 일이 아니었다. 요한나는 사냥감을 쫓을 때처럼 범인을 머릿속으로 조각조각 분해했다.
마을에서 이틀 동안 지내고 왔으니 이 괘씸한 방문자는 그사이에 침입했으리라.
‘기름의 굳기를 보니 오래되지 않았어. 기껏해야 반나절.’
침입자는 제 분을 풀 만큼 푼 뒤 떠났다.
검은 족적은 뒷문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대로 오두막을 엉망으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을까. 딱히 없어진 건 없는 것 같은데. 마을 사람의 짓일까?
그녀를 못마땅해하는 몇몇 얼굴들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런 짓까지 할 대범한 사람은 없다.
뒤뜰로 간 요한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오두막 내부를 봤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이 뒤통수를 때렸다.
본래 뒤뜰은 5년 전에 근처의 우거진 나무를 베고 마련한 공간으로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눈이 오면 눈을 쓸어 내고 잡초가 자라면 주기적으로 뽑아내 그 자리에 보기 좋은 꽃을 심는 등 정성껏 보살폈다.
물론 마을의 꽃집에서 파는 먼 곳에서 왔다는 봉오리가 크고 화려한 꽃이 아니라 산행을 하며 발견한 이름 모를 들꽃을 가지고 오는 게 다였지만 뿌리가 다칠까 조심하며 세심하게 캐내느라 시간을 쏟아붓는 것은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노력하여 가꾼 뒤뜰이 흙발에 엉망진창으로 밟혀 있었다. 햇볕을 머금고 잘 자란 꽃들은 꽃대가 꺾여 머리를 불쌍히 기울였고, 하나씩 모아 장식해 둔 강가의 예쁜 조약돌은 여기저기로 날아가 전혀 질서정연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무덤. 봉긋했던 봉분은 마치 짐승이 파헤친 것처럼 처참한 꼴이었다. 없는 솜씨로나마 열심히 깎은 비석은 허리가 뎅강 부러져 엎어져 있었다.
파헤쳐진 무덤으로 다가간 요한나의 얼굴이 마침내 일그러졌다.
살점은 썩어 문드러져 흙으로 돌아가고, 하얗게 드러난 백골이 무덤 주변에 널려 있었다.
창백해진 요한나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툭, 뭔가를 친 감각에 고개를 숙였다. 흙더미에 반쯤 파묻혀 더러워진 뼈가 신발 아래에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흠칫 물러나자 손목에서 어깨 길이 정도 되는 뼈가 드러났다. 길이와 모양을 보니 넙다리뼈인 듯했다.
다른 뼈를 밟을까 봐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한때는 건장한 몸을 구성했던 뼈는 별개의 독립된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이것들이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지를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떤 것은 부러져 있기까지 했다.
매장된 관에서 둥그스름했던 갈비뼈가 날카롭게 부러져 자잘한 조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범인은 괘씸한 방문자에서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자가 되었다.
머릿속으로 놈의 움직임을 그렸다. 키가 그녀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남자가 오두막에서 길길이 날뛰다 무덤을 파헤치고 관 뚜껑을 연 뒤 얌전히 잠들어 있는 백골의 가슴을 밟아 뭉갰다.
무질서하게 부러진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타원형을 그리고 있는 아버지의 부러진 늑골을 보며 요한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머리 뚜껑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물론 살가운 부녀 사이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단지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자신이 밥벌이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보호해 준 형식적 양육자에 불과했다. 하나 그는 요한나가 열다섯 살에 혼자가 되기까지 그녀에게 가장 가까웠던 단 하나의 인간이었다.
마을의 가족들을 구경하며 보통의 부녀와 다르다는 걸 알고, 무정한 아버지에게 실망도 했으나 능욕당한 시신을 보고 자신이 모욕받은 느낌이 들 정도로는 가까웠다.
요한나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조금이라도 범인의 흔적을 찾고자 엉망이 된 무덤과 기괴하게 흩어진 백골을 살폈다. 그러던 중 등골이 서늘해졌다. 기이한 기시감이 차가운 손이 되어 그녀의 등허리를 만지작거린다.
‘단순히 날 싫어해서 이랬다기엔 아귀가 맞지 않아. 너무 과해.’
싫어하는 것보다 더한, 예컨대 증오 같은, 그래, 현장에서는 그녀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진득한 원한 같은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느낌을, 그녀는 예전에 한 번 받았었다.
5년 전 죽음의 냄새로 가득했던 오두막이 떠오른다. 늘씬한 목덜미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번개 같은 확신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범인은 같은 자다.
‘원한으로 인한 짓.’
불현듯 요한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을씨년스러워진 뒤뜰과 엉망으로 더러워진 오두막을 꼼꼼하게 살폈다.
아버지의 뼈를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현장을 둘러본 뒤에야 직감에 명확한 확신을 내렸다.
‘그때와 흔적이 비슷해.’
시신에 남은 갉아 먹은 흔적. 날카로운 이빨의 흔적을 제외한 나머지 흔적들이 흡사했다.
유리로 된 물건들이 산산이 부서져 있다든가, 성질을 못 이겨 발로 걷어찬 자국 같은 것들이 눈에 익었다. 한 번 걷어찬 것만으로도 푹 꺼진 옷장을 발견했을 때 요한나의 얼굴은 긴장으로 경직되었다.
‘충인의 짓이다.’
추리는 거기서 멈추었다. 여전히 충인과 아버지의 상관관계를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충인에게 원한을 살 일은, 적어도 요한나가 알기에는 없었다.
누런색 식탁보에 흩어진 뼈를 모으며 그녀는 생각에 골몰했다. 문득 아버지가 죽기 전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온 아버지의 낯이 유난히 창백했던 것을 떠올렸다.
‘얼굴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알 것 없어.’
날카로운 대꾸에 놀라기도 하고 마음이 상해서 더는 물어보지 않았었다. 아버지도 며칠 이상했을 뿐 한 달이 지나자 평소와 다름없었고 말이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 충인과 싸움이라도 벌였던 것일까…….
하지만 무슨 일로.
‘나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그들 종족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가 덤불에 숨은 채 열기 어린 눈으로 훔쳐보던 교미 장면이 가장 강렬했다.
푸르스름하니 창백한 피부에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팔다리의 움직임, 서로의 성기를 비벼 댈 때마다 피부에 일어난 딱딱한 갑각 표피가 부딪치는 소리가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게 생각났다.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원인 모를 불쾌감과 혐오감에 기분이 급격히 저조해졌다.
어쨌든 아버지는 충인과 갈등을 빚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몹시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늑대도 멧돼지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야. 그래도 그들은 덫을 놓고 기다리면 잡을 수 있거든. 하지만 충인은 달라. 인간만큼 똑똑해. 쉽게 죽일 수 없으니 우리 입장에선 골치 아픈 존재지. 어째서 신께선 그런 혐오스러운 생명체를 빚으신 걸까.’
바렌타가 탄식하던 소리가 생각나자 마음이 무거웠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집을 옮겨야 할까.’
곧바로 마을이 떠올랐다.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하면 바렌타는 놀라서 그녀를 산으로 올려 보내려고 하지 않을 거다.
안 그래도 사냥꾼 일을 접고, 혹은 접지 않더라도 마을에서 지내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받은 후였다.
마음이 온통 흔들릴 만큼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20년을 살아온 곳을 떠난다는 것이 불안해 생각할 시간을 갖겠다고 했던 참이었다.
그런 때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바렌타의 입버릇에 따르면 ‘신이 내가 행하길 안배하시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가.
오두막에서 유일하게 정성껏 가꿨던 뒤뜰의 망가진 모양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에 단단한 결심이 섰다.
범인이 다시 찾아올지 모르니 좀 떨어진 곳에 아버지의 무덤을 다시 만들고 짐을 꾸려 마을에 내려가 새 터전을 일구자.
짐이라고 해 봐야 사냥꾼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도구와 옷가지 정도뿐이니 아버지의 뼈를 맞추는 일을 제외하고는 금방 이곳을 정리할 수 있을 터다.
바렌타의 곁에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간다. 불길한 사태에 가라앉은 마음에 훈풍이 돌았다. 흥분감이 오두막에 들어서며 느꼈던 오싹함을 희석했다.
* * *
깊고 넓게 판 구덩이에 조심스럽게 관을 내려놓았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장갑에 땀이 축축하게 묻어 나온다.
그제 오후부터 시작된 작업이 이틀을 꼬박 잡아먹었다. 구덩이를 파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체력이 좋았고 또한 요령을 알아 삽으로 파기 좋은 땅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뼈를 맞추는 일이다. 짐승의 뼈라면 모를까, 인간의 뼈는 낯설었다. 산에서는 이따금 조난을 당하거나 짐승에게 잡아먹힌 인간을 볼 수가 있다.
부패가 상당히 진행되어 뼈가 드러난 시신도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을 되살렸다.
‘어딘지 엉성한데…….’
하루 넘게 끙끙거리며 대강 모양 맞게 뼈를 배치한 결과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자리에 뼈를 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관이 약간이라도 흔들리면 뼛조각이 안에서 굴러다녔다.
고민하다가 산의 깨끗한 흙을 찾아 관의 비어 있는 공간에 치덕치덕 발라 뼈를 고정했다.
뼈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일은 없어졌으나 좀 더 지저분하고 없어 보였다.
또 고민하다가 하얀 조약돌을 군데군데 놓았다. 뒤뜰을 장식했던 것이었지만 이젠 쓸모가 없어졌으니.
조약돌 몇 개로 꾸며진 관을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흙에 파묻힌 백골과 조약돌이 신명 나게 조화로웠다.
“…….”
사냥꾼으로서 인간보다는 짐승과 어울려 살았던 요한나는 인간의 예법에 무지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썩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바렌타를 찾는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수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충인을 경계하고 경멸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그가 안다면 걱정을 할 거다.
요한나는 바렌타를 기쁘게 하고 싶지 짐을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저분한 관은 그녀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처참하게 죽은 시신을 수습해 무덤을 만들 때도 느끼지 못했던 죄책감이었다.
결국 손에서 굴리던 조약돌 몇 개를 더 올려 보았지만, 아무래도 손을 댈수록 이상했다.
애써 관을 외면하고 뚜껑을 닫기까지의 과정이 머릿속을 스치자 무표정한 얼굴에 옅은 회한이 떠올랐다.
이렇게 아버지를 묻고 나면 뒤뜰에 무덤을 만들었던 때보다는 자주 찾아오지 못할 터였다.
‘쓸쓸해.’
그것도 잠시, 바렌타를 생각하니 태양 앞에 물러가는 새벽 어스름처럼 처지는 기분도 금세 기운을 잃었다.
다소 편안한 얼굴이 된 요한나는 한 번의 발돋움으로 단숨에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머리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의아하게 고개를 든 그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지?’
날카로운 눈빛에 경계심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그보다 대체 언제부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가깝게 올 때까지 자신이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스윽!
요한나는 재빨리 홀스터에서 단검을 꺼내고 자세를 낮추었다. 바렌타가 옆 마을에서 사다 준 엽총용 배낭을 그녀는 단검을 꽂는 용도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신속한 움직임에도 남자는 움직임이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요한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남자를 살폈다.
그는 키가 굉장히 컸다. 그런데 복장이 특이했다. 옷이랄 것 없이 거무튀튀한 무명천을 몸에 둘둘 말고 있었다. 허리띠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기이한 광택이 감돌았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정체를 추측할 만한 장신구가 하나도 없었다.
목 아래부터 발목까지 축 늘어진 검은 천 때문에 음산한 분위기였다. 남자의 표정도 한몫했다.
음울한 얼굴.
약간 푸른빛이 도는 창백한 피부에 입꼬리는 아래로 내려갔고, 눈동자는 죽은 물고기처럼 탁했다. 마치 산송장처럼.
하나 이쪽을 정확히 향해 있는 까만색 동공은 착각할 수도 없게 만든다.
혼란스럽게 남자를 살피던 요한나의 눈이 남자의 발에 멈추었다.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길이가 20센티는 족히 될 듯한 맨발.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땅에 단단히 뿌리 내린 나무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거대한 발이 아니었다.
발등. 발등에 돋아나 있는 그것.
‘비늘?’
요한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물고기나 파충류의 비늘은 투명한 편이다. 저렇게 푸르스름한 광택이 돌지 않았다. 저런 걸 어디에서 봤냐면.
거기까지 생각한 요한나의 얼굴이 무섭게 경직되었다.
처참하게 죽은 아버지의 시신과 파헤쳐진 무덤, 부러진 백골이 머리를 스쳤다.
남자의 입술은 색이 옅었다. 혈색이라곤 하나도 없어 피부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네게서 죽은 놈의 냄새가 나.”
소름이 돋는 거친 목소리.
“네게서 그놈의 냄새가 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흠칫.
기괴한 말투에 요한나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춥지도 않은데 오한이 찾아들었다.
‘충인이 어째서 여기에?’
남자는 그녀가 보았던 충인과 다르게 옷을 갖춰 입어 언뜻 봐선 인간처럼 보이나 인간이 아니었다.
맹수에 가까운 아인종이다.
그의 눈알이 번들거렸다. 말하는 중간중간 그륵거리는 듣기 불편한 숨소리가 났다.
인간과 성대의 구조가 다른 듯 사포에 긁힌 것처럼 거북한 음성이다.
“너, 누구?”
남자가 고개를 까딱였다. 관절에 마디가 있는 충인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눈에 거슬렸다. 제 팔이 다 뻣뻣해지는 듯한 불쾌한 감각.
삐걱대는 팔다리는 멀리서 볼 땐 분명히 우스웠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니 맹수의 단단한 엄니만큼이나 흉악하고 위협적이었다.
근육으로만 구성되어 군살은 하나도 없었고 껍질로 덮인 피부는 기이하게 매끄러우며 또한 단단했다.
단 한 번 발로 찬 것만으로도 푹 꺼진 옷장이 떠오르자 요한나는 솜털이 곤두섰다.
그녀는 단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이놈이 범인이야.’
망가진 오두막과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지만 무턱대고 달려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눈앞의 충인이 원수더라도, 목숨을 도외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더라도 바라지 않았을 터였다. 요한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기회를 틈타 공격하고, 여의치 않으면 도망가는 거다.
머릿속으로 행동반경을 그리는데 충인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의문을 표현하는 것처럼.
“이게 뭔지 알고 있어?”
요한나는 의아했다. 그녀를 향한 말이라기엔 어딘지 어색했다. 남자가 위를 흘끗한다.
뭘 보는 거지? 잔뜩 경계심을 돋운 채로 하늘을 올려다본 요한나의 눈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지나친 놀라움에 숨이 일순 멈춘다.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거대한 계수나무의 나뭇가지 위, 괴물이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온통 하얀색인 몸체에 언뜻 귀신을 떠올렸다. 잠깐의 경악이 지나고 침착하게 살펴보았다. 귀신이나 괴물 따위가 아니다. 특이하게 생긴 충인이다.
새하얀 충인은 나뭇가지에 올라서 있는데도 평지에 있는 양 안정적이었다.
덩치는 검은 충인과 비슷하나 검은 충인이 온통 검은 데 비해 그는 피부도, 옷차림도 새하얬다.
요한나는 예리한 눈썰미로 그가 두르고 있는 옷이 하얀 여우의 모피라는 것을 알았다.
하얀 여우는 검은 산맥 아래의 마을뿐만이 아니라 저 멀리 왕이 사는 수도에서도 부르는 게 값인 귀물이다.
개체 수도 적은 데다 매우 잽싸고 은밀하여 요한나도 바렌타의 아버지를 보러 온 그의 수도 귀족 친척의 옷을 먼발치에서 훔쳐본 게 다였다.
그 귀족도 고작 목도리로 둘렀을 뿐이었는데 나뭇가지 위 충인은 작지도 않은 몸에 온통 두르고 있으니 그야말로 천금을 지니고 다니는 거다.
그러나 비싼 모피로 옷을 지어 입은 것보다 그녀를 놀라게 한 건 그의 눈에 띄는 외모였다.
땅 아래 사는 충인이 창백한 것이야 당연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무서울 정도로 하얀 얼굴이다.
푸르스름한 갑각 표피도 없었고 흰자가 안 보일 정도로 검은자가 크지도 않았다. 그의 동공 크기는 요한나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 색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짙은 홍색이었다. 마치 가장 여린 살에서 낸 피로 눈동자를 찍은 것 같은 모습.
오싹.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색을 지운 것처럼 기이한 백발은 설산에서 흩날리는 눈처럼 차가워 보였다.
여러모로 익히 알고 있는 충인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돌연변이군.’
얼굴은 좌우 대칭 균형이 완벽했으며 콧날이 날카로웠고 입술은 얇고 옆으로 길었다.
인간의 시선으로 생각하는 게 익숙해진 요한나는 이 충인의 얼굴이 대단히 잘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인간 같지 않은 외모에 황홀해지기에는 그를 감싼 분위기가 몹시도 서늘했다.
아무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눈이 자신을 무심히 응시하자 요한나는 식은땀이 났다.
검고 큰 눈동자에 증오를 담은 검은 충인을 보았을 때보다도 꺼림칙했다.
‘저렇게 대놓고 있는데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상황이 결코 좋지 않다. 눈앞의 두 충인의 기량이 그녀를 압도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처녀치고 힘이 세고 사냥꾼으로서 단련된 육체의 민첩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그녀의 뇌를 주름이 지게 움켜쥐었다.
도망가는 게 최선이다.
‘어떻게? 어느 시점에?’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가 늑대 무리에 둘러싸였을 때보다도 감각을 예민하게 집중하고 있을 때, 두 충인은 짤막하게 의사를 나누었다.
“딸.”
“딸?”
“저건 사냥꾼의 딸이다.”
그 말에 검은 충인이 팩,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부릅뜬 검은 눈동자가 요요하게 그녀를 직시했다. 살기가 도는 눈빛에 요한나는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연좌라는 게 있다. 빚을 진 부모의 자식은 장성하여 돈을 벌 수 있게 된 다음부터 부모의 빚을 이어 갚아야 했다. 이 상황이 뜻하는 건 명확했다.
‘순순히 보내 주진 않겠어.’
발을 살짝 떼는 순간 나뭇가지 위 하얀 충인이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자 거미줄에 묶인 것같이 몸이 얼어붙었다.
사냥에 능숙한 사냥꾼도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그 노린내와 살기에 몸이 굳는다.
요한나는 침착하게 사지의 긴장을 풀려고 노력하는 한편 포기하지 않고 도주 경로를 살폈다.
그때 바로 옆, 거의 직각에 가까운 비탈길이 눈에 들어왔다. 산에서 가장 빈번한 죽음 중의 하나가 실족사다. 위험천만한 길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검은 충인은 이젠 숫제 눈에서 원한과 증오를 줄기줄기 뻗치고 있었다. 요한나의 반듯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크아아아악!”
남자가 괴성을 지르자 몸이 꼿꼿하게 굳는다.
“네 아비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쉭쉭거리는 뱀이 귓가를 타 넘는 듯했다.
“나의 공주를 약탈해 갔다.”
뭐?
귀를 의심하는 그때, 검은 충인과 눈이 마주쳤다. 괴괴한 눈빛을 한 그가 히죽 웃었다.
“이번엔 내 차례다, 사냥꾼.”
‘죽는다!’
요한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바닥의 검은 이끼처럼 축축한 소름이 목덜미를 덮었다.
더는 생각할 틈도 없이 절벽처럼 깎아지르는 비탈길 아래로 몸을 날렸다.
평범한 인간이 시도했더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요한나는 사냥꾼으로서의 냉철한 판단하에 침착하게 움직였다.
표범처럼 늘씬하고 탄탄한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비탈길을 뛰어 내려갔다.
그녀는 사냥을 업으로 삼는 사냥꾼의 입장에서는 축복받은 육체를 지녔다.
어지간하면 지치지 않았고 눈은 하늘을 나는 새의 눈을 색까지도 구별할 수 있었다. 종아리에 올라붙은 근육이 상체를 단단히 지탱했다. 요한나는 대단히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모난 바위, 거대한 나무, 톱질에 잘려 짤막하게 남은 등걸, 낙엽 아래 몸을 숨긴 독사, 가시가 뾰족하게 난 찔레꽃 덤불, 사방으로 뻗은 자잘한 나뭇가지 등. 어떤 것도 그녀의 발길을 늦출 수 없었다.
생존 본능이 발휘된 인간은 초인적인 힘을 내는 법이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생명의 위기를 운 좋게 넘기는 것은 아니다.
요한나는 정력적이었고 포악한 포식자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만큼의 강한 의지도 있었으나 운이 없었다.
그녀의 불운은 상대가 날개를 쓸 수 있는 충인이라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그가 속한 군락에서도 최상위 개체로 분류되는 장군급이라는 점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충인이 그녀의 목을 붙잡아 쳐들었다.
그 순간 요한나는 제게 사냥당했던 짐승의 심정을 절절히 느꼈다.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위기를 모면할 틈은 분명히 있다 여겼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걸까?
잠시 막막한 좌절감이 머릿속을 찾아들었다. 그러나 한가로운 감상에 빠져들 시간도 없었다. 숨통이 강하게 틀어막혔다.
생리적인 압박감에 요한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발이 땅에서 떠올랐다. 기도가 급격하게 뒤틀리고 쪼그라든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끄윽…….”
머릿속에 붉은 경고등이 사정없이 울렸다.
이러다간 죽는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죽음의 기운. 팔다리의 힘이 빠질 무렵, 바렌타의 상냥한 웃음이 떠올랐다.
번쩍. 눈이 뜨였다.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검은 충인의 손목을 비틀었다.
그녀는 확실히 힘이 셌다. 어쩌면 마을 남자들보다 셀지도 몰랐다.
하지만.
힘을 주는 요한나의 매끄러운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충인의 손목은 화강암처럼 단단했다. 가죽 장갑이 자꾸만 미끄러지자 요한나는 이로 장갑 끝을 물어 빼 버렸다.
고열로 내내 앓고 난 이후로 결코 다른 사람이 있는 앞에서 장갑을 벗지 않았으나 지금은 상관없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맹수였고, 적이었으니.
땀에 젖은 하얀 손이 드러났다.
그 순간, 검은 충인이 날뛰어도 무덤덤하게 지켜보던 하얀 충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편 요한나는 아무리 해도 요지부동인 검은 충인을 보고 절망감을 느꼈다.
흰자에 실핏줄이 서고 눈동자가 자꾸만 뒤집히려고 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충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놀랍도록 서늘했다.
바렌타의 따뜻한 체온과는 전혀 다르다.
이 순간 요한나는 바렌타가 이들에게 보내는 혐오감을 완전히 이해했다.
치미는 욕지기를 참고 손에 힘을 주었지만, 충인은 여전히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더없이 여유롭게.
설상가상으로 힘이 빠져 간다. 요한나는 죽은 족제비가 장대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모습을 생각했다. 그녀가 꼭 그와 같은 모습이었다.
충인은 그녀가 장갑을 벗었을 때부터 힘을 주지도, 빼지도 않고 가만히 그녀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덕에 그녀가 아직도 죽지 않고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거다.
‘왜 당장 죽이지 않는 거지?’
“그 손은…….”
요한나는 고개를 들어 충인을 노려보았다. 힘은 다 빠졌지만 눈빛에 어린 기운은 매서웠다.
잠깐 당황했던 충인은 그 표정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차가운 입술이 꼬리를 올린다.
“제법.”
쇳소리를 내는 목소리가 키들거렸다.
“앙칼지군.”
이어진 말에 요한나의 안색이 새카맣게 변했다.
“네 간악한 아비를 원망해라.”
요한나는 충인의 조롱 섞인 인내심이 다 닳았다는 걸 깨달았다.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이 핑그르르 돌고 머릿속이 까맣게 변했다.
“죽어.”
사악하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난 지금 죽음에 한 발짝 걸쳤을까?
아아, 마지막으로 바렌타의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요한나는 무의식에 빠져들었다. 다른 말로 죽음이었다.
남은 한 점 빛도 꺼지려는 찰나.
갑자기 숨통이 열렸다.
“컥, 크억, 하, 하아!”
요한나는 땅에서 몇 번을 구르고 엎드린 채 거칠게 숨을 토했다. 사정없이 밀려오는 공기는 달콤한 한편 고통스러워서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콧속으로 썩어 가는 낙엽의 짙은 냄새가 훅훅 빨려 들어왔다. 후각이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어.
살았다는 환희가 가시고 차가운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방금은 위협일 뿐이었나?
아니다. 방금의 살기는 날것 그대로의 진짜였다.
“죽이는 건, 안 돼.”
“비켜라, 흰개미.”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하얀 충인과 검은 충인이 싸우고 있었다. 여전히 눈 내린 설산처럼 하얗지만 무심한 얼굴로 하얀 충인이 검은 충인을 상대한다.
‘무슨 상황이지?’
검은 충인이 하얀 충인의 코앞에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저건 내 몫이야. 정당한 복수란 말이다.”
“할 말은 하나다. 죽이는 건 안 돼.”
검은 충인이 요한나를 딱딱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지만 하얀 충인은 똑같은 말만 지껄였다.
참지 못한 검은 충인이 요한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요한나는 뻣뻣한 목을 쳐들고 그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이 다시 요한나를 낚아채려는 때, 시리도록 하얀 손이 검은 충인의 목을 붙들었다. 단단히 잡자마자 뒤로 휘돌려 메친다.
키야아아악!
네 발로 엎드려 착지한 검은 충인의 눈이 분노로 거칠게 타올랐다.
“흰개미!”
화가 난 검은 충인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요한나의 앞을 가로막은 하얀 충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검은 충인의 행동은 충분히 알겠는데 하얀 충인은 왜 그녀의 목숨을 살려 주는 건지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저들 충인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마을처럼 살인은 안 된다는 규범이 있는 것일까?
신빙성이 지나치게 떨어졌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두 충인은 거칠게 제 의견을 내세웠다.
인간의 것을 훔쳐 배운 듯 짤막하고 끊기는 대화는 어린아이들의 것보다도 어설펐지만 요한나는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도리어 긴장과 두려움으로 어깨가 축축해졌다.
타협이 되지 않았는지 화가 난 검은 충인이 울부짖었다. 맹수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까이에서 목격하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암컷이다. 죽여선 안 돼.”
“저게 암컷?”
검은 충인이 입을 벌린 채 웃었다.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요한나도 마찬가지였다.
미친 짐승 새끼들.
손에 힘을 주었다. 저들이 싸우느라 정신이 없을 때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엉덩이와 다리를 뒤로 밀며 슬금슬금 이동했다. 그 뒤로 갈수록 기가 막히는 대화 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검은 개미 너도 표피를, 보았잖아?”
“그래서 뭐?”
“우리의 알을 낳을 수 있어. 암컷은 죽이지 않는다. 잊어버린 거냐?”
하얀 충인은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한다는 듯 감정이 없었다. 그래서 더 기괴했다. 어떤 면에서는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는 검은 충인보다도 꺼려진다.
요한나의 위기 본능이 하얀 충인을 향해 계속해서 경종을 울려 댔다.
‘갑자기 조용해졌어.’
자욱하게 깔린 불안감이 꿈틀거린다.
바닥에 닿은 손이 낙엽을 한 움큼 쥐었다.
동시에 검은 충인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까스로 협의점을 찾았는지 표정이 아까보다는 누그러졌으나 여전히 포악한 얼굴이다.
두 충인의 합의는 요한나에겐 재앙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가 뒤로 마구 물러서자 검은 충인이 다가왔다.
열 걸음 만에 그녀가 있는 곳까지 다가온 충인의 얇은 입술이 양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그러더니 그 거북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공주가 널 낳고 죽었나?”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인간의 혼혈이라니. 골치 아프게, 됐어.”
그는 경계하는 요한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흰개미의 말이 맞다.”
“…….”
“결정했다. 내 공주 대신 너.”
불길한 예감이 든다.
검은 충인은 형형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안와를 꽉 채우는 검은색 눈알에 자신이 비치자 요한나는 혐오감에 몸서리를 쳤다.
“나의 공주 대신에 낳아라.”
“…….”
“네게서 수개미가 생긴다면 그 또한 하늘의 뜻. 알아서 토굴로 찾아올 테니.”
뻗어지는 손에 써늘하고 강렬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검은 충인의 의도를 본능적으로 직감한 요한나가 다리를 휘둘렀다.
퍽!
강력한 발길질이 검은 충인의 가슴을 직격했다.
검은 충인이 불시의 공격에 신음을 흘렸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요한나를 노려본다.
‘무서워.’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끝이다. 용기를 끌어모았다.
검은 충인이 타격받은 모습에 자신감도 생겼다. 공포가 한결 가시자, 보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다리를 재차 차올렸다.
그러나 두 번째 시도는 불발이었다.
탁! 검은 충인이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이익!
이를 악물고 발목을 빼내었다.
검은 충인은 아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손에 힘을 주자 요한나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강하구나. 그래도 반은 동족이라고.”
검은 충인이 고통에 파르르 떠는 그녀를 비웃었다.
그가 뱉은 단어들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자 일순 고통이 가셨다.
‘뭐라고?’
“내가 왜 네 동족이야!”
악을 지르는 그때.
빠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눈이 마주치자 검은 충인은 그녀의 발목을 움켜쥔 채 입꼬리를 웃는 것처럼 실룩거렸다. 지독한 불안감에 요한나가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을 하려는…… 아아악!”
빠각!
순간 눈앞에 별이 튀었다. 눈을 꽉 감았다가 뜨자, 무시무시한 고통이 발목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
검은 충인은 그녀의 비명에 기분이 좋은 듯 끝이 가느다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의 손이 발목에서부터 위로 올라왔다. 발이 흔들릴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요한나는 헐떡였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검은 충인이 그녀의 바지를 벗길 때는 발목이 아무리 아파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멀쩡한 왼발로 충인의 가슴을 쳤다. 단단한 것이 철판이라도 두드리는 듯했다.
성가시다는 양 그녀의 발목을 움켜쥔 충인이 그것도 그대로 꺾었다.
아악!
요한나는 더는 다리를 바둥거릴 수 없었다.
검은 충인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허리 짓을 했다. 격렬하게 움직일 때마다 발목이 끔찍하게 아팠다.
그러나 그것보다 고통스러운 건 산산이 조각나서 바스러지는 그녀의 ‘인격’이었다.
하얗게 변했다가 까맣게 점멸하기를 반복하는 머릿속으로 바렌타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다음 달, 아니 다음 주라도, 바렌타와 사랑을 나누었을 터였다.
어떤 기분일지, 마을 사람들이 낄낄대면서도 부끄러워하고, 또한 황홀해하는 그 행위가 과연 어떤 건지 몹시 궁금했다.
바렌타와 그렇게 된다면 그때에서야 그녀는 완전히 마을에 섞여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대했던 시간이 흩어져 간다.
그녀가 바랐던 인격도 지지대가 사라진 꽃대처럼 힘없이 흔들리다 꺾이고 시들어 갔다.
츳, 츠즛.
검은 충인이 흥분하는 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아버지가 관음하던 충인의 교미 같다.
“아, 아아악! 싫어어어!”
비명을 지르며 바둥대는 그녀의 목을 바닥에 누르고 검은 충인이 허리를 들썩였다.
햇빛 부스러기가 얼굴로 흘러내렸다. 흐리멍덩한 눈을 뜨자 하늘을 가리고 있는 붉고 노란 잎사귀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러움이 치밀어 오른다. 그녀의 얼굴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무엇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나았어.’
조금씩 부스러지는 요한나의 눈 안에서 너덜너덜해진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그 눈이 스륵 움직였다. 햇빛이 투과하는 잎사귀를 흔드는 거대한 나무의 나뭇가지에 하얀 충인이 앉아 있었다.
죽이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혼자 태평하게.
‘왜 끼어들어서는.’
검은 충인의 무거운 몸에 깔린 채 흔들리며 그 무심한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