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그러니까 연우경 팀장이 이번 글로벌 전략 회의 관련 홍보 기사를 전담하게 됐다는 말씀이시죠?”
이섭이 유 실장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오늘 오전에 잠깐 만나서 연 팀장 의사는 확인했습니다. 아무래도 에이블이 TK 홍보 관련 일을 계속하고 있고, 연 팀장을 대체할 만큼 글로벌 전략 회의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요.”
“굳이 보고까지. 당연한 일인데요. 유 실장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섭이 매끄럽게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유 실장이 알겠습니다, 답하면서도 미지근하게 여운을 남겼다.
“왜요, 더 하실 말씀 있습니까?”
“아니요. 두 분 다 약속하신 듯이 똑같이 말씀하셔서.”
“누구? 태준섭 본부장 말입니까?”
“네.”
“뭐라고 했는데요?”
“똑같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 일이니 굳이 보고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 이섭이 고개를 틀며 웃었다.
“그렇게 말해요?”
“네.”
“연우경 팀장 언제부터 출근 안 했죠? 본부장 출장 다녀온 후로 출근했습니까?”
“아닙니다. 계약 기간은 일주일 더 남아 있었는데 독감이어서 출근 못 했습니다. 전기본에 인력 공백이 부득이하게 생겨서 약간 혼란스러웠는데 지금은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섭이 빈정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하긴, 본부장 뭐든 깔끔하게 정리 잘하잖아요. 일이든 사람이든. 본부장은 출장 다녀와서 잘 지내요? 통 못 봤네요. 송백재에서 일요일마다 갖는 식사 자리도 한 번은 본부장이, 한 번은 내가 못 가서 말이죠.”
유 실장이 이섭의 비딱한 물음에 답을 하기 전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알아내고 싶은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이섭이 약간 신경질적인 말투로 채근했다.
“유 실장님, 어울리지 않게 왜 간을 봐요, 하실 말씀하세요. 뭡니까.”
유 실장이 마치 이섭의 요구를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연우경 팀장이 송백재로 갔었다고 합니다. 본부장님 출장 중일 때.”
“네?”
그런 보고는 받은 적이 없다. 이섭이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유 실장을 바라보았다.
“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조용히 지시하신 사항이라…….”
“언제, 언제 말입니까.”
“주말이었습니다. 토요일 오전.”
이섭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기억을 더듬었다. 우경을 만나 사진을 보여 준 날이 분명 금요일 저녁이었다. 토요일 오전이면 그다음 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뭐가, 어디서……. 무슨 고리로.
“제가 아는 바로는 그날 아침에 사모님께서 송백재에 급히 오셔서 회장님을 뵙고 가셨다고 합니다.”
“네? 어머니가요?”
“네.”
설마 어머니가 뭔가 눈치를 채고……?
이섭이 그날 기억을 떠올리려 미간을 찌푸렸다. 유 실장은 용건을 마쳤다는 듯 목례를 건넸다.
“잠시만요. 유 실장님.”
“네, 상무님.”
“그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하십니까.”
이섭의 질문에 유 실장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거리감이 느껴진다 싶을 만큼 차분하고 명확한 평소 모습과 다르게 답을 찾지 못해 곤혹스러워했다.
“글쎄, 아마도……. 아, 맞습니다. 본부장님이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셔서.”
이섭이 뭐요? 하는 물음 대신 눈을 크게 떠 보이자 잔잔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요즘 잘 못 지내시는 것 같아서요.”
“태준섭이?”
“네.”
유 실장이 정말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 * *
한 시간 동안 책상 서랍을 비롯한 책장과 방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실은 1분 만에 밝혀진 결론을 뒤집고 싶어서 고집을 부리는 중이었다. 이섭이 후우 숨을 내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취했다 하더라도 기억을 못 할 만큼은 아니었고, 취했다고 해서 몸에 밴 습관이 무너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분명히 습관적으로 보관하는 장소에 사진을 두었다. 서랍 속 책을 펼쳐 그 사이에…….
한 시간 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다시 서랍 속 책을 꺼내어 이번엔 천천히 넘겼다. 중간 부분에서 이섭이 손을 멈췄다. 까뭇하게 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심스레 살피니 자그마한 검은 조각도 보였다.
이섭은 선애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티 테이블에서 일어서는 선애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려 노력했다.
“엄마.”
선애는 이섭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섭이 피식 웃었다.
“되게 창피하네.”
“이섭아.”
“하나만 확인해요.”
이섭이 선애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사진, 혹시 누군지 알았어요?”
“그래, 알았어.”
“어떻게?”
“네 고모랑 호텔 베이커리에서 만났어. 고모가 일전에 너랑 같이 밥 먹고 나오다가 그 직원 만난 적 있다며? 베이커리에서 나한테 소개시켜 줬어.”
“아……. 그랬구나.”
이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진 가지고 송백재 가셨어요?”
선애가 티 테이블을 짚으며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테이블을 짚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그러셨어요.”
“모르겠어.”
“준섭이 얄미워서?”
이섭을 바라다보는 선애가 턱을 실룩였다.
“준섭이가 내 거 뺏을까 봐? 다 가질까 봐?”
“그래, 내가…… 그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이섭아, 난, 그 애가 싫어. 태서희도 싫고 그 아들도 싫어! 왜 걔가 네 걸 다 빼앗아 가. 왜, 왜! 내 아들을 왜 걔가! 이러는 내가 넌 싫겠지만……. 너 보기에 부끄럽지만. 난…….”
이섭이 다가가 티 테이블 위에 있는 선애의 손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그게 뭐가 부끄러워요. 나도 태준섭 싫어. 엄마.”
선애가 손을 빼어 내며 고개를 돌렸다.
“일단 이건 확실하게 말할게요. 나 태준섭 편 안 들어. 당연한 소리지만, 난 그 자식이 싫다고. 그러니 이건 순도 100프로 진실이에요. 그 직원 준섭이 여자친구고, 내가 둘 일부러 연결시켰어요.”
선애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섭을 보더니 설마, 하고서 작게 말했다.
“네, 맞아요. 태준섭 다른 여자랑 스캔들 나게 만들려고. 회장님이 준섭이를 최하영과 결혼시키려 하면 그거 터트리려고 했어요.”
“이섭아. 너 그런데 왜.”
이섭이 빈손을 펼쳐 보였다.
“그냥, 다 시시하더라고요. 그런 짓까지 하는 내가 우습고, 부끄럽고.”
선애의 시선이 이섭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책에 머물렀다. 그 책 속에 끼워 둔 사진 한 장의 의미를 묻고 싶은 시선이었다.
“예쁘게 나와서 한 장은 남겼다가 태준섭 주려고 그랬어. 약 올리면서. 다른 거 더 있다고 막 약 올리면서.”
선애가 얼굴을 들어 이섭과 눈을 맞췄다.
“그게 전부예요.”
“그래.”
이섭의 감정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을 살포시 찡그리던 선애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 *
- 본부장님, 태이섭 상무님께서 오셨습니다. 잠시 하실 말씀이 있다고…….
이른 오전 시간에 느닷없는 방문이었다. 준섭이 양지은 비서의 전화를 채 끊기도 전에 본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가도 됩니까.”
이섭이 형식적인 질문을 하며 본부장실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하고 준섭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태이섭 상무님.”
준섭과 다르게 이섭은 공식적인 직함이나 존댓말을 걷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연우경이랑 헤어졌어?”
준섭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보던 서류철을 넘기며 이섭의 물음을 완전히 무시했다.
“왜, 답하기 싫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나랑은 상관없지. 네 문제지.”
“잘 아시네요. 태이섭 상무님.”
준섭이 책상 위 서류에 시선을 둔 채로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완벽하게 무시당한 이섭이 준섭 앞에 놓인 서류철을 확 잡아챘다.
“피로연 전날 저녁 통화까지 그렇게 자신하더니 왜, 최하영 보니까 맘이 바뀌었나? 그래서 연우경 바로 끊어 냈어? 이야, 굉장히 야비하고 냉정하네?”
준섭이 이를 악물었다.
“나가.”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해 봐. 그래야, 내가! 감동 먹고, 감동에 취해서 진실을 알려 줄 거 아냐.”
이섭의 말에 준섭의 눈빛이 바뀌었다. 먹이와 거리를 재어 보는 맹수처럼 까만 눈동자 뒤편에서 불이 탁 켜지는 것 같다. 처음 보는 바도 아닌데 그럴 때면 여전히 목덜미가 선득하다. 재수 없는 새끼.
이섭이 고개를 저었다. 검지와 중지만 세워 불량스럽게 제 머리를 두드렸다.
“내가 미쳤지, 왜 이런 짓을…….”
혼잣말처럼 떠들고는 이섭이 뒤돌아섰다.
“태이섭 상무!”
준섭이 자리에서 일어서 이섭을 붙잡았다. 이섭이 약 올리듯 다시 물었다.
“니가 끊어 낸 거 아니면, 그럼 연우경이 헤어지자고 했어?”
준섭이 멱살이라도 잡을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태이섭 네가 말했잖아. 최하영 이야기! 내 기분, 내 마음, 내 생각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 멋대로 말했잖아. 그래서 우경이가 오해하도록, 네가 한 짓이잖아!”
이섭이 피식 웃었다.
“태준섭, 너 나 못 이겨?”
준섭이 뜻을 알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번번이 니가 나 이겨 먹잖아. 내가 맨날 별수를 다 써 봤자 너 못 이겼잖아. 그런데 이번엔 내가 이겼다고? 네 여자친구를 내가, 어? 내 말 한마디로 그렇게 돌아서게 만들었다고?”
“아니! 내 탓이지. 내 잘못이고.”
이섭이 어이없네. 중얼거리면서 툭툭 준섭의 팔을 두드렸다.
“회개는 다음에 하고.”
준섭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혹시…….”
고개를 저으며 준섭이 다시 물었다.
“송백재야?”
준섭의 검은 불같은 눈을 보며 이섭이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리고는 말했다.
“확인은 니가 해.”
이섭이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돌아서서 손을 올렸다. 어설픈 거수경례 포즈보다 더 어색한 인사였다.
“알아?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 눈 내리는 12월 31일. 해피 뉴우 이어!”
* * *
본부장실로 호출을 받은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입을 다물고 있을 작정이었다.
“여태 모르셨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지금부터 알아보세요. 저한테 가져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연우경 파일. 페이지 수, 토시 하나 다르지 않게 송백재에 대령한 대로 여기.”
준섭이 데스크를 주먹으로 톡톡 느리게 두드렸다.
“가져다주시면 됩니다.”
“저……, 본부장님.”
“30분 드릴게요.”
“본부장님.”
“지금은 한 명에게만 요청했습니다. 30분 후엔, 다섯 명에게 요청할 생각입니다. 사실, 파일 같은 거 필요 없긴 해요. 뻔하잖아요? 그 포맷 수없이 봤으니까. 다만,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준섭의 올라간 입술 끝이 날카롭게 비틀렸다. 검은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빛나 홍채 주위가 푸른 불빛에 감싸인 것만 같았다. 태준섭이 돌았다고 할 때 이런 얼굴로 사람을 물어뜯을 듯이 덤비는구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딱 멎는 것 같았다.
“김 실장님이 저를 도와주실 기회.”
태준섭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악수라도 할 듯이.
* * *
“정 대표.”
- 어, 본부장님. 무슨 일?
블룸스 금융 정우진의 물음에 약한 긴장감이 배어났다. 정기 미팅은 사흘 전이었고, 특별한 사안은 없는데 느닷없는 시간에 하는 전화였다.
“만들어 둔 자료 말이야.”
- 무슨?
“일주일 내로 모조리 현금화해서 TK주를 사들인다고 가정해서 만들었던 자료.”
- 아.
우진이 당황스러운 듯 짧게 소리를 냈다.
“내 개인 자산, 우호 지분은 블룸스 펀드까지 다 반영해서 숫자만 넣어서 보내 줘.”
- 시나리오 두 개 다?
“응. 전자만 먹을 경우, 물산을 지렛대로 전자를 비롯한 그룹을 장악하는 경우 둘 다. 승계 관련 내부 진행 사항 저번에 업데이트했지? 아, 헤지펀드 C사는 딜 가능해. 우호 지분으로 잡아.”
- 만났어?
“어제. 8, 90%는 합의.”
- 와우. C사 추가 매수 가능 퍼센티지는 저번에 예측한 거랑 비슷해?
“ 거의.”
- S금융은?
“반반. 언제 등 돌릴지 모르지. 위너 쪽에 서고 싶은 마음만 있으니.”
- 알았어.
“응.”
준섭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우진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 이유 물어도 돼?
“왜.”
- 전쟁 준비해야 해?
“아니.”
- 그럼 왜.
“현재 상황 파악 정도.”
- 아……. 그래, 수치만 넣으면 되니까 두 시간 안으로 보낼게.
“고마워.”
준섭이 핸드폰 버튼을 눌러 통화를 종료했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본부장님, 김 실장님 오셨습니다.”
준섭이 시계를 확인했다. 김 실장이 본부장실을 나간 후 경과한 시간은 27분.
“네, 들어오세요.”
준섭은 한쪽 옆구리에 파일을 끼고 들어서는 남자를 향해 일어서서 매혹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네, 실장님. 네. 아……. 잠시만요.”
양지은 대리가 유인목 실장의 미팅 요청을 처리하기 위해 준섭의 스케줄을 화면에 띄웠다.
“1월 2일 시무식 후에 조간 회의 있고요. 음, 점심 식사 전쯤 잠깐 괜찮으실 것 같아요. 오늘? 오늘은……. 급한 일정 있으시다고 스케줄 다 캔슬하셔서요. 저녁 식사까지요. 컨디션이 안 좋으신 거 같긴 해요. 어디 나가신 건 아니고. 네. 그래서 1월 2일, 3일로 미팅들이 다 미뤄져서요. 아. 김 실장님? 같이 보기로 하셨나요? 어떡하죠. 네, 방금 가셨어요.”
지은이 이맛살을 찡그리며 홍보실 출신인 최용원 과장과 강민경 대리의 눈치를 보았다. 오늘따라 왜, 유인목 실장이 꼬치꼬치 캐묻는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제가, 본부장님께 지금 여쭤볼까요. 오늘 실장님 미팅하실 수 있냐고…….”
묻는 말꼬리가 길게 늘어진다. 단호한 어조로 오늘 다른 모든 일정을 취소하라던 준섭의 지시가 떠올랐다. 아, 무서워.
찌푸리던 지은의 이마가 갑자기 환하게 펴졌다.
“네, 네. 그럼 1월 2일로 잡아 놓을게요. 네에, 실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지은이 다시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본부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우식 대리 때문이다. 지은이 본부장실에 전화를 넣거나 문밖에서 강우식 대리가 왔다는 말을 전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투로 강 대리는 거침없이 본부장실 앞으로 가더니 노크를 했다.
“저 왔습니다. 본부장님.”
지은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암만 봐도 본부장님이 아니라, 형님 하고 불러야 어울리는 포스다. 들고 온 쇼핑백 봉투엔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싸구려 초콜릿바나 격 떨어지는 도시락 같은 걸 사 들고 왔는지도.
지은이 흘끗 맞은편 홍보실 출신 직원 두 사람을 보았지만 최용원 과장이나 강민경 대리나 일하느라 정신이 없는지 시선 한 번 안 준다. 아, 외로워라. 지은은 새삼스레 연우경 팀장이 그리워졌다.
* * *
“눈이다. 눈! 동화책에 나오는 눈처럼 포실포실 솜덩이 같은 눈이에요!”
현아가 노래라도 부르듯이 소리를 높였다. 17층 에이블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면 겨울나무에 내려앉은 눈이 현아의 말대로 동화책 그림처럼 보인다. 현아는 사귄 지 59일이 되었다는 남자친구에게 보낼 사진을 연방 찍더니 메신저 앱을 열고 부지런히 대화를 입력했다. 눈 내리는 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현아가 동화 속 소녀처럼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우경은 아직 김이 오르는 머그잔을 들고서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눈은 차가운데, 눈 내리는 풍경은 사물을 온순하게 만든다. 동경의 눈 내리던 밤거리를 숨이 차오르게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며 펑펑 쏟아지던 눈을 맞던 제 모습은 어땠을까. 그 밤, 내리던 눈은 서러울 만큼 시리고 차가웠는데…….
방향을 잃어 어지러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도심의 전광판들이 물에 잠긴 듯 일그러지며 빛이 났다. 눈을 깜박이며 초점을 맞추려 애를 쓰고 속눈썹 위로 떨어지는 눈을 털어 내어도 동경의 거리는 자꾸만 핑그르르 느리게 원을 그리며 번져 갔다.
이제 겨울이면, 눈이 내릴 때면 평생을 그 밤을 떠올리겠지, 하는 생각만으로도 발끝이 얼어붙는다.
힘없이 내려다보는 서울의 거리가 뿌옇게 번진다. 눈물이 차올랐나 보다. 우경은 고개를 약간 들어 올리고 저만치서 남자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현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만 자리로 돌아가려 하는데 재킷 호주머니 속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유인목 실장님]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우경은 뻑뻑한 목을 가다듬었다.
“네, 연우경입니다.”
기분을 들키지 않을 만큼 밝고 단정한 음성을 만들었다.
- 연 팀장, 통화 괜찮아요?
“네, 그럼요. 실장님.”
- 저번에 말했던 전략 회의 관련해서 전화했어요. 연 팀장이 일하는 걸로 컨펌되었고, 회의 기간 중 진행될 홍보 가이드라인이 잡혔어요. 매체별 언론사별 일정도 거의 나왔는데, 사전에 외부 미팅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 아니면 또 내일은 휴일이라……. 통화로는 다 어렵고 직접 전달할 콘택 리스트나 내부 자료도 있고, 급하게 요청해서 미안하지만 오늘 여기로 들러 줄래요?
“알겠습니다. 언제 방문할까요?”
- 오늘 시간은 다 괜찮아요?
“네.”
유 실장이 잠시 망설이는 눈치더니 분명하지 않게 답을 했다.
- 내가 지금 급하게 미팅 참석해야 하거든요. 외부로도 다녀올 것 같아요. 오후 3시 이후로 잡고, 늦을지 모르니 정확한 시간은 다시 연락해도 될까요. 눈도 오는데 오라 가라, 시간도 애매하게 지시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오늘은 다른 외부 일정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제가 3시 이후 회사 근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들어오시면 연락 주세요.”
- 고마워요.
통화를 마치고 우경은 창틀에 두었던 머그잔을 들어 올려, 식은 커피를 마저 다 마셨다.
로비에서 마주쳤던 태준섭의 정돈된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후벼 파지는 것만 같다.
이제 그만. 그만. 그만…….
일을, 해야겠다. 우경은 너덜거리는 마음을 기워 붙이며 책상에 앉았다.
* * *
정 대표에게서 우식이 받아 온 자료를 펼치는 준섭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숫자를 꼼꼼히 확인하고서, 블룸스 정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전달받았어?
“응. 보고 있어.”
- 타임라인이 일주일이라 보수적으로 잡았어. 범위는 주가 변동 예상치 반영했고. 전쟁할 거면 내가 닿을 수 있는 사모 펀드 쪽으로 연결하면 우호 지분이야…….
준섭이 정 대표의 말을 자르며 부인했다.
“아니, 전쟁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인맥이라면 송백재를 어떻게 따라가. 괜히 뛰어든 사람 다치게만 하지.”
- 문제는 차명이야. 이런 일 아니고 정상적인 승계를 가정해도 늘 태시환 회장님 차명 보유주가 누구에게 갈 건지가 판을 바꿨거든.
“차명은 나도 전혀 몰라. 규모는 짐작만 할 뿐이야.”
- 게임이 안 될 정도인가.
“현재로선, ‘외손자의 반란’ 같은 유치한 타이틀 롤은 분명하겠어. 그런데 그런 떠들썩한 진흙탕 게임에서 내가 굳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어.”
- 무슨 소리, TK 경영권인데.
준섭이 피식 웃었다.
“뼈 빠지게 일하라는 경영권. 귀찮아.”
- ……준아.
“왜.”
퉁명스럽게 답하자 정 대표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 그래, 뭘 해도 넌 이미 성공이야. 째고 놀아도 돼.
“제대로.”
준섭이 자료를 덮으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제대로 놀아야지. 최상의 기분 상태로 스릴 넘치게.”
- 좋아. 굿굿!
준섭이 우진의 어색한 응원을 들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수화기를 들어 버튼을 누르고는 양지은 대리에게 지시했다.
“30분 정도 눈 좀 붙일까 합니다.”
-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준섭은 책상 위에 펼쳐 둔 정 대표의 서류를 가지런하게 정리하여 연우경 파일 위에 쌓아 올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안에서 잠그고, 곧장 본부장실 뒤쪽으로 걸어갔다.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그림 세 점 앞에 멈춰 서서, 그중 가장 오른편에 있는 그림을 떼어 냈다.
세 개의 그림 모두 뒤편으로 비밀 금고가 들어 있는 공간이 있다. 누군가가 금고 장소를 알아채고 비밀번호와 키까지 복제했다 하더라도 알맹이를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금고 두 개는 페이크 서류만, 하나는 페이크와 진짜가 섞인 것. 그중에서도 준섭만 알 수 있는 진짜 자료를 골라냈다.
손이 아주 약간 떨려 준섭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금고 속에서 태시환을 위한 맞춤형 서류만 브리프 케이스에 담았다. 묵직해진 브리프 케이스의 서류들 중에서 제일 앞쪽 두 개만 따로 손에 쥐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감쪽같이 돌려놓았다. 자리로 돌아오면서 사무실 조명을 모두 끄고 블라인드도 내렸다.
준섭은 의자에 등을 길게 기대었다. 10분쯤 정말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준섭은 본부장실 허공의 한 지점만 고요하게 응시했다. 꽤 긴 시간 동안 아무도 들이지 않고, 전화를 걸거나 받지도 않았다. 서희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근 20년의 세월이 서서히 밀려오다가 뒤죽박죽 헝클어지며 물러갔다.
빈 모래사장 같은 기억의 공간에 홀로 서서 준섭은 곧 맞닥뜨릴 장면을 상상한다. 두렵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준섭은 문득 서희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떠올렸다. 이마를 만져 주고 볼을 쓰다듬고 셔츠의 작은 단추를 채워 주던 손가락.
이런 준섭을 보면, 서희는 무슨 말을 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준섭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한 번 쓸었다.
“미안해요. 엄마.”
서희의 얼굴이 물에 담근 물감 덩어리처럼 가장자리가 뭉개어진다. 준섭은 아린 눈을 감았다. 가슴에 응어리로 남은 서희가 뜨겁게 달군 돌처럼 아프다.
‘달도 없는 검은 밤, 별이 되어 지켜 줄게.’
서희의 말이 목젖에 단단히 맺힌 감정의 찌꺼기들을 어루만지는 것만 같다.
준섭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을 때, 뻐근한 어깨에 따스한 공기 같은, 깃털보다 가벼운 무언가가 스쳐 지났다.
지금이 그런 밤이잖아, 괜찮아. 엄마가 있어, 라고 말하며 어깨를 어루만지는 걸까.
준섭이 눈을 뜨고 시각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을 차례로 열어 한 번씩 살펴보았다. 별로 정리할 건 없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뒷정리를 해 놓고 싶었다. 별 기대 없이 책상 제일 아래 서랍을 열고는 준섭이 멈칫했다. 손을 깊숙이 넣어 서류 봉투를 끄집어냈다.
봉투 속에 넣어 두고는 잊고 있었다. 돌려 줘야지 했을 때는 거부당했고, 돌려 줄 수 있을 때에는 여자만 보면 정신이 온통 빠져서 늘 잊어버렸다.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완전히 기억 뒤편으로 밀쳐 두었던 노란색 타이를 꺼냈다. 우경이 아버지의 넥타이다.
준섭은 매고 있던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 타이를 풀고 노란색 타이를 목에 걸었다. 거울을 보면서 매듭의 모양이나 위치까지 신경 써서 넥타이를 매고 코트를 덧입었다.
* * *
미리 일러두었던 고용인에게서, 태준섭이 송백재로 들어오는 중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유 실장은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한 후, 준섭에게 문자를 보냈다.
[연 팀장과 전략 회의 홍보 건으로 세부 사안 미팅하려고 합니다. 커버리지에 대해 본부장님 컨펌이 필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오후 3시 이후 미팅하기로 했는데 편하실 때 전화 주시면, 컨펌받은 후에 연 팀장과 홍보 관련 세부 사안을 확정하겠습니다.]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유 실장이 전면에 있는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클릭하지 않아, 검은 스크린 세이버 상태의 모니터에 제 얼굴이 비쳤다. 남자의 얼굴에는 설명하기 힘든 여러 감정이 조금씩 섞여 들었다.
늘, 그 아이에게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전, 그 아이의 아비가 질러 대는 사고를 수습하다 보면 젊은 혈기에 주먹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비는 집요하고 끈질기고 사람의 속을 뒤집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파렴치한이었다. 강지욱의 여자들을 처리하는 것도 비서실 몫이었다.
태시환 회장은 그에 관해서라면 늘 이성을 잃었다. 그럴 때마다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을 만큼 두려웠다. 두려움과 지겨움과 고통 속에서도 TK 회장 비서실이라는 탄탄대로를 차마 포기할 수가 없어 꾸역꾸역 몸을 갈고 정신을 갈아야 했다.
강지욱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부터 아, 이 쓰레기가 또……, 하는 욕부터 나왔다.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로 한계에 몰리기 일쑤였다. 강지욱이 죽었을 때 차라리 시원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지욱은 치가 떨릴 만큼 쓰레기가 맞았지만 아이는, 달랐다. 다만 당시에는 너무 지쳐 있는 상태였기에 마음의 여유 같은 게 없었다.
조금 더 진심을 담아 따뜻하게 대해 줄 것을, 하고 후회했을 때 아이는 이미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후였다. 유 실장 자신이 보이던 사회적인 웃음이나 예의 같은 거 외엔 아무것도 나누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강준이라 불리던 그 아이와 태준섭 본부장이 동일인인 것조차 희미해졌다. 마음을 걸어 잠근 태준섭은, 유 실장과 과거의 관계에 대해 사적인 감정 따위는 일체 가지지 않는 합리적이고 능력 넘치는 TK의 후계자였으니 일면 편하기도 했다.
“후우…….”
유 실장이 깊게 숨을 내어 쉬고 한자어만 단정하게 적힌 흰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태준섭은 모른다 하더라도, 송백재는 곧 유 실장의 개입을 보고받을 것이다. 태준섭의 줄을 잡겠다는 의도는 없다. 태준섭이 태시환에게서 등을 돌리며 TK를 장악하는 시나리오는 불가능하다. 유 실장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여기서 근무한 지 몇 년이더라. 대학 졸업하고 바로……. 그러니까 23년인가. 내년이면 상무 승진이 내정되어 있다. 아쉽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유 실장은 미리 써 두었던 사직서를 서랍 속에 넣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태준섭으로부터 답 메시지가 들어와 있다.
[알겠습니다. 일정이 있어서, 늦어도 3시 30분까지는 전화드리죠.]
송백재 어딘가에 멈춰 서서 문자를 전송하는 태준섭을 상상해 보았다. 어떤 표정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서, 대체 어디까지 개입한 건가, 불쾌한 심정으로 문자 버튼을 눌렀겠지.
깊은 곳 어딘가에 뭉쳐져 있던 해묵은 죄책감이 조금씩 녹아 내렸다.
[연우경 팀장, 미팅 3시 30분으로 합시다.]
유 실장이 우경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 * *
눈에 덮인 송백재 정원을 걸어가며 준섭은 굵어지는 눈발 속에서도 고고하게 몸을 세운 키 큰 소나무와 잣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눈 오는 겨울에 시작해서, 눈 오는 겨울날에 마무리를 짓는다는 점이 나쁘지 않았다.
회장은 서재에서 준섭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하기 5분 전에 송백재로 가는 중이라고 전화를 했으니 무슨 일인지 5분간 고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서재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향해 회장이 말했다.
“앉아라.”
“괜찮습니다. 잠시만 말씀드리면 됩니다.”
준섭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5분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회장이 심상한 얼굴로 답하는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준섭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회장의 책상 앞에 가져온 것들을 하나씩 펼쳤다.
우경의 파일을 본 회장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용건이 고작 이거라고?”
“아닙니다.”
“연우경이가 고새를 못 참고 니한테 일러바쳤나 보네. 알량하게도 한 입으로 두말을 했구나. 거기 앉아서는 잘도 예쁘게 지껄이던데. 제대로 정리하겠다고.”
“회장님, 회장님답지 않게 왜 그런 말씀을……. 요즘 흐려지셨나 봅니다.”
“뭐라고?”
발끈하는 회장을 향해 준섭이 여유롭게 웃었다.
“회장님이 직접 움직이신 일입니다. 연우경을 독대해서 직접, 협박하시고 숨통을 조였을 텐데요.”
준섭이 찬찬한 손길로 파일의 페이지를 넘겨 우경의 가족란을 펼쳤다.
“가족을, 지인을, 무엇보다 저를 박살 내 버리겠다고 하셨겠군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놈이어서 빌붙어 있는 신세라고도 하셨나요? 강약 조절하시며 녹슬지 않은 솜씨로 협박하셨을 텐데 이제 서른 살도 안 된 파견직 여자 직원, 한입거리였겠죠. 다리가 떨려 기어 나가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었겠네요.”
준섭의 눈이 여름밤의 나무처럼 검고도 새파랗게 일렁였다.
“우경이가 울던가요? 떨던가요?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빌었나요? 네, 통쾌하셨습니까!”
“나는!”
회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셈법을 알려 줬을 뿐이다.”
“무슨 셈법이요?”
“내가 제일로 소중하게 여기는 너를, 내 손으로 망가뜨리게 만들면 그 애도 비슷한 고통을 느껴야 맞는 셈법이다.”
준섭이 아, 하고는 턱을 옆으로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그렇군요. 셈법. 그럼 이 셈법도 맞는지 봐주십시오.”
준섭이 금고에서 꺼낸 서류 봉투를 거꾸로 뒤집어 떨어지는 종이를 회장 앞으로 내밀었다. 손으로 적어 둔 제목이나, 하이라이트를 한 커다란 글씨만 읽고서도 회장이 경련처럼 몸을 떨었다.
“이, 이런 천하에 몹쓸! 니가 감히 나를, 태시환이를 협박해!”
회장이 데스크 부저를 눌렀는지 서재 문이 열리고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우르르 쏟아지듯 들어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는 준섭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들어온 지 5분 지났습니다. 팩스 예약을 걸고 왔습니다. 앞으로 25분 후 캔슬하지 않으면 검찰청 이진희 검사 앞으로 정확하게 같은 서류가 들어갑니다. 그 외 세 군데 더. 그건 비밀로 해 두죠.”
검찰청 이진희라면 TK의 회유가 전혀 먹히지 않는 강성 검사였다. 회장이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나가십시오. 할아버지와 손자 간 사적인 대화입니다.”
준섭이 장정들을 향해 말했다. 회장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이들이,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인형처럼 떨고 있는 회장을 쳐다보았다.
“저……, 회장님.”
팀장이 간신히 회장을 불렀지만 회장은 야윈 손을 들어 겨우 나가라 손짓할 뿐이었다.
경호원들이 서재를 나간 후, 준섭이 금고에서 가져온 두 번째 봉투 속 서류를 내밀었다.
“브리프 케이스로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귀찮아서 두 개만 가져왔어요.”
“니가, 이러고도……, 그 자리, 내 회사에서…….”
회장이 기침을 쿨럭거렸다. 꽉 멘 음성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니가, 그러고, TK에서 빌붙어…….”
준섭이 눈을 찡그리며 얼굴을 태시환 쪽으로 기울였다.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안 들립니다. 할아버지.”
20년 만에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TK를 배제하고 태시환을 대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니가, 감히!”
회장이 제 몸집보다 큰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몸이 마구 흔들렸다.
“가진 거 하나 없는 놈에게 본부장 자리를 줬더니 시건방만 늘어서. 니가 나를 능멸하고 그 여자애랑 돌아댕겨? 최하영을 두고서! 뻔히 사진 찍힐 거 알면서.”
“그러셨어야죠. 할아버지.”
준섭이 눈을 맞추며 차분한 음성으로 일갈했다.
“저를, 태준섭, 태시환 회장님 핏줄, TK 본부장인 저를! 불러 말씀하셨어야죠. 꾸짖으시든, 분노하시든. 네, 협박을 하시든, 나한테 하셨어야죠! 남의 집 귀한 자식 불러다가 그러시지 말고요!”
준섭의 말에 회장이 꽉 쉬어 버린 목소리로 악을 썼다.
“잘났구나! 내 앞에서 눈 치켜뜨고. 니가 뭐라도 된 거 같나? 니가? 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이. 나한테 목줄 잡힌 강아지 같은 놈이,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 꼴이 같잖아서.”
회장이 야비한 조소를 머금고 소리를 질렀다.
“니는 내 핏줄도, 서희 아들도 아이다. 모르나? 고새 까먹었나? 강지욱이도 그렇게 주제를 모르고 설치드만, 꼭 닮았다.”
준섭이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고 되받아쳤다.
“네, 할아버지 손자가 아니라고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준섭이 정 대표에게서 받은 자료 중 준섭의 자산 규모가 적힌 한 장을 꺼내어 태시환의 눈 앞으로 내밀었다. 숫자를 읽던 회장이 눈을 치떴다.
“회장님이 주신 본부장 내려놓습니다. TK에 몸 바쳐서 하는 일, 그만하겠다고요. 그 돈으로 TK주를 공개 매입할까도 싶었는데, 다 귀찮습니다.”
준섭이 양 손바닥을 옆으로 펼쳐 보였다.
“TK는 내가 버립니다. 할아버지와 이 집안 모두 함께 말입니다.”
회장이 뭐, 뭐.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 하나만 더 알려 드리죠.”
준섭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제가 떠난 후 TK에 남은 내 사람들, 그리고 우경이 가족, 친구, 주변까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세요. 그땐 이 모든 자료와 자산을 동원해서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울 겁니다. 그건 약속드릴 수 있어요.”
“어떻게, 이, 이런……. 돈을, 니가.”
회장은 오늘 독대 중 가장 황망한 표정이었다. 철퇴로 얻어맞아 깨진 머리로 영혼이 다 쏟아져 내린 꼴을 하고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하긴, 세상의 기준이 돈인 사람이니.
준섭이 쓰게 웃었다.
“제가, 돈 때문에 개새끼처럼 송백재에 붙어 있는 줄 아셨습니까.”
“이, 이, 이 돈을 무슨 수로!”
“털어 보세요. 불법 아니고, 내부 정보 아니고. 정당한 자산 증식입니다. 시드 머니는 내 어머니가 남긴 유물, 검은 피카소의 그림.”
회장이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태서희, 내 어머니.”
준섭이 이를 악물었다. 핸드폰을 꺼내어 회장의 코앞에 치켜들고서 저장된 오디오 파일을 재생시켰다.
“준아……, 내 아들.”
눈을 둥그렇게 뜬 회장이 들려오는 소리에 씩씩거리던 숨을 멈췄다.
“엄마가, 부탁이 있어. 있잖아, 준아. 할아버지……, 미워하지 마. 할아버지는 마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아파. 엄마가 그렇게 만들었어. 할아버지가 엄마를 너무 사랑해 줬는데, 엄마가 할아버지를 버렸어. 할머니도 엄마 때문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할아버지가, 너무 슬프셨나 봐. 죄송하고 또 죄송하고, 그 사랑을 배신해서 너무 죄송하고.”
녹음 속 서희가 울먹이기 시작하자, 회장의 유리알 같은 눈에도 자르르 물기가 돌았다.
“그래도 엄마는 나중엔 다 잘될 줄 알았어. 그래서 다 괜찮을 거라고 믿고 견뎠는데……. 준이 좀 크면 할아버지한테로 가서,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살면서, 손 잡아 드리고 말동무해 드리고 그러려고 했는데……. 이제 다 틀렸어.”
서희의 목소리가 울음으로 떨렸다. 회장이 으으윽,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서희, 서희야. 손에 막혀 애타는 부름은 불명확했다.
서희가 울음으로 잠시 멈췄던 말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니까 준아, 하나만 부탁해. 우리 준이, 착한 준이, 이런 부탁해서 미안해. 준아, 할아버지 버리지 마. 할아버지가 뭐라고 해도 할아버지 옆에 있어.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 대신, 준이가…….”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못 하면서도 겨우겨우,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로 서희가 말했다.
“미안해, 준아. 할아버지가 너 조금은 미워하실 거야. 속지 마. 네가 미워서가 아니야. 내 잘못 때문에 그러시는 거야. 그래도 미움 아래, 깊은 사랑이 있어. 나는 알아, 내 아버지를……. 준아, 미안해. 엄마 이런 말해서 미안해. 그런데 아버지 생각하면 내가, 내가……. 후회뿐이야.”
태시환이 고개를 흔들었다. 주름진 얼굴이 통한의 눈물로 젖어 갔다.
“할아버지 좋아하긴 어려울 거야. 그래도, 준아. 내 아버지야. 내 얼굴 겹쳐 보면서 그냥 가엾다, 가엾다, 그렇게만 해 줘. 돌아가실 때까지 버리지 마. 내 아빠를 너는, 버리지 말아 줘.”
준섭이 고개를 위로 젖혔다. 붉어진 눈으로 회장을 바라보면서 악물었던 입술을 떼어 내고 말했다.
“유언이에요.”
회장이 쪼글쪼글 구겨진 백짓장 같은 얼굴을 하고서 입을 벌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해 붕어처럼 벙긋거리던 입술을 다물고 준섭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유언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죄했습니다.”
태시환은 15분 남짓한 시간 동안 10년은 늙어 버린 노인이 되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손을 들어 함부로 문질렀다.
“기어이, 니가, 서희처럼 너도, 나를…….”
나를 버릴 테냐. 회장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준섭이 시선을 돌렸다. 목에 핏대가 서도록 이를 꾹 다물었다.
“끝까지 곁에 못 있어서……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준섭이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준, 준섭, 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뻗어 오는 손이 초라하게 떨렸다. 준섭이 몸을 뒤로 빼면서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큰 걸음으로 서재를 나가는 준섭을 바라보던 노인의 무릎이 푹 꺾였다. 노인은 차가운 바닥에 말라비틀어진 무릎을 대고 주저앉았다. 늙은 허리가 꺾여 머리가 기울여졌다.
‘죄송하고 또 죄송하고, 그 사랑을 배신해서 너무 죄송하고.’
‘내 아빠를 너는, 버리지 말아 줘.’
서희의 목소리가 심장을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회장은 빈손으로 매끈한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이마를 바닥에 짓찧으며 짐승처럼 울었다.
* * *
룸미러로 비치는 얼굴을 흘끗 확인하고는 우식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아무 말도 없는데 표정만으로도 바싹 긴장이 되었다. 올해의 마지막 날 오후, 눈 오는 도심 도로는 당연하게도 심한 정체였다.
“하필, 눈이…….”
창밖을 바라보던 준섭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날씨가 많이 춥지는 않아서 얼어붙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우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계를 확인하고는 준섭이 미간을 찡그렸다.
“회의 있으십니까. 몇 시까지 들어가면…….”
“3시 30분, 아니, 25분. 20분이면 더 좋아.”
“그, 그건…….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20분까지는 무리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고 우식은 25분 안에는 도착해 보이겠다는 다짐과 결심에 가까운 대답을 했다.
회사 앞 대로는 신호 체계가 원활하지 않아 평소에도 자주 정체가 일어나는 구간이었다. 신호를 받으려 길게 늘어선 차들 사이에 멈춰 서서, 좌측 전방에 보이는 회사 건물과 손목시계를 번갈아 보던 준섭이 도어록을 풀었다.
“본부장님, 내리시려……?”
우식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준섭이 차 문을 열었다.
“먼저 가야겠어.”
우식은 반쯤 입을 벌리고는 도로에 서 있는 차들 사이를 가르며 뛰어가는 준섭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구두를 신고 저렇게 눈 오는 도로를 뛸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속도였다.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뛰어가는 준섭이 행여 넘어질까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준섭은 횡단보도 신호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길을 건너갔다. 후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우식도 천천히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으로 덮인 인도를 밟으며 준섭은 한 번씩 숨을 몰아쉬었다. 전방에 TK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태준섭이라는 이름으로 산 16년을 지배한 주체는 태시환, 그리고 태시환과 분리할 수 없는 TK였다. 매번 준섭의 한계를 시험했고, 인내를 비웃었고, 깊숙이 숨긴 고통을 파헤쳤다. 거대하여 까마득한 상대였다. 준섭은 그 앞에선 늘, 여린뼈를 가진 자그마한 짐승이 된 것만 같았다.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 목줄이 숨통을 죄고 있었다. 분명 사슬을 끊었는데 목젖이 여전히 짓눌린 듯 아프다. 준섭은 손을 들어 제 목을 만졌다.
아무것도 없어, 방금 깨부수고 왔잖아. 목줄 따위는…….
태시환의 구겨진 백짓장 같은 얼굴이 어른거렸다.
갑자기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난 장기수처럼 둘러싼 모든 상황이, 현재와 미래가 갑자기 뒤집힌 것만 같다. 준섭은 검지와 엄지를 크게 벌려 목젖을 감싸고는 숨을 크게 쉬었다. 손을 벌린 채 천천히 내리면서 와이셔츠 깃 사이로 넥타이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목에 매여 있는 건, 노란 병아리 같은 넥타이다.
준섭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전방에 버티고 선 TK 건물은 높고 거대했지만, 도심의 빌딩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곳에서 만나야 할 누군가만이 절실했다. 준섭은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눈을 털지 못해 반쯤은 녹고 반쯤은 뒤집어쓰고서 앞만 보며 걸어갔다.
3시 30분에 유 실장과 미팅하기로 했으니 우경은 25분쯤엔 건물에 들어설 것이다. 문 앞에서 우경을 붙잡아야지. 그리고 말을 해야지. 모든 걸 다 해결했다고, 미안하다고…….
이섭이 다녀간 이후, 내내 송백재 서재로 불려간 우경을 상상했다.
많이 울었을까. 입술만 깨물고 있었을까. 가족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애원했을까,
무서웠겠지. 나를 원망했겠지. 그러면서도 결코 무너지진 않았겠지.
그 밤, 동경으로 나를 찾아왔던 네가 하던 태연한 거짓말의 이면을 나는 왜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가시덤불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쓰라렸다.
우경에게 전화를 할 수도, 홍보실로 직접 올라가 미팅 중인 우경을 만날 수도 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만날 수도. 하지만 준섭에게는 오로지 지금 당장, 우경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된 적이 없었다.
허리가 부러지도록 쌓아 올린 짐을 갑자기 내려놓은 노새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쌓이는 눈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고 착각할 정도로 발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괜스레 웃음이 났다. 웃음이 흰 입김이 되어 공기 중에 퍼졌다.
기다려, 연우경. 지금 가고 있어.
준섭의 입은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벌린 입으로 차가운 눈이 들어오고, 더운 눈물이 뺨 위로 떨어지는 눈을 녹여 물로 만들었다.
회사 건물로 들어서자 준섭을 알아보는 직원들이 흠칫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본부장이 왜 저 꼴로 다니는지 하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호기심이나 궁금증 같은 건 준섭에겐 전달되지 못한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니까.
회전문을 통과하면서 준섭은 로비 데스크 근처에서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 서 있는 우경을 발견했다. 준섭이 저도 모르게 회전문에 손을 짚어 돌아가던 문이 멈추었다. 회전문 다른 칸에 있던 사람들이 흘끗 쳐다보다가 이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준섭이 손을 떼고는 조바심으로 근질거리는 이를 꽉 깨물었다. 자동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회전문의 속도가 더디기만 하다. 준섭은 회전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지르며 우경을 향해 직진했다.
“최 과장님, 네……. 인사드린다 하고선 저번에 양지은 대리하고만 점심했네요. 그때 선약 있으시다고 해서. 맞아요. 오늘 홍보실에서 유 실장님과 미팅하기로 했어요. 글로벌 전략 회의 관련 언론 홍보를 제가 맡기로 해서요. 과장님도 한번 뵙고…….”
잔잔한 미소를 띠고 통화를 이어 가던 우경이 말을 멈추고는 앞을 막아서는 남자를 보았다. 눈이 커다랗게 벌어지고 입도 같이 벌어졌다.
“아…….”
급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우경의 굳은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졌다. 코트 자락을 타고 주르륵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핸드폰을 준섭이 손을 뻗어 받아 냈다.
액정 화면에 떠 있는 최용원 과장의 이름을 보고서 준섭이 서슴없이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최용원 과장님?”
- 아, 혹시 본부장님?
“네, 나중에 통화합시다. 지금 좀 바빠서.”
전화를 끊고서 준섭이 핸드폰을 우경에게 내밀었다. 우경이 얼떨떨한 상태로 핸드폰 반대편 끝을 잡았지만 준섭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우경이 시선을 들어 준섭을 바라보았다.
“왜…….”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차라리 저번처럼 모르는 척하고 가 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어리석은 기대를 하게 만들고, 갈피를 잃은 마음을 춤추게 하고.
우경이 여전히 준섭의 손에 잡혀 있는 핸드폰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려다가 꼼짝도 하지 않자, 손을 툭 아래로 떨어뜨렸다.
“왜 이래요.”
태연한 척 묻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그런 전투력으로.”
준섭이 핸드폰을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그제야 눈을 크게 뜨고 준섭을 똑바로 쳐다보는 우경을 향해 준섭이 웃었다. 긴 눈시울이 부드럽게 휘어지는 웃음이었다.
“나랑 어떻게 헤어지려고.”
농담을 건네는 준섭이 어이가 없어 우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준섭이 우경의 발개진 눈가와 떨리는 턱을 쓰다듬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 누군지 알아요?”
슬며시 찡그려지는 우경의 눈매를 보면서 준섭이 다시 웃었다. 설명하는 대신, 준섭은 허공에 물방울 모양 그림을 그리고는 쓱 손날로 밀어 지워 버렸다.
“구부려지고 맞물렸다는 그 시간, 여기에서 지금 다시 시작합시다.”
“무슨 말이에요?”
우경이 앞을 가로막은 준섭을 옆으로 비켰지만, 준섭은 다시 앞을 막아섰다.
“첫날, 그 시간…….”
준섭이 손을 뻗어 그날 우경이 서 있었던 위치를 가리켰다.
“여기 들어서다가 여자가 떨어뜨린 붉은색 펜을 주웠어. 푹 쓰러질 것만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아, 젠장. 그런 기분이었어. 미안하지만 더 곤란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거든. 네 잘못 아니니 잘 버텨라 격려하고 싶었는데 꼭 주저앉아 엉엉 울 것 같던 여자가 엉뚱하게도 대시를 하더라고.”
“이해를 할 수가……. 지금 그런 말을 왜.”
“그때가, 네가 이해할 수 없고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거짓말 같은 모든 것들의 시작이야. 그러니 물어보라고, 내 이름.”
우경이 깨물어 붉어진 입술을 열고 하아, 숨을 내쉬었다.
“응?”
다정한 독촉에 우경은 웃음이 터질 것 같기도 울음이 터질 것 같기도 해서 몇 번이나 입술을 벌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러는 동안 준섭은 우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언제나처럼……. 이윽고 우경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고는 물었다.
“이름, 뭐예요?”
“강준.”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태준섭이기도 하고. 여기 TK그룹 전략기획본부 소속인데 곧 잘릴 거고.”
“왜, 왜 그런 말을……? 설마…….”
우경이 울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본부장님……. 송백재…….”
“이제 본부장 아닙니다.”
준섭이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모르는 척하려 해도 이미 수십 쌍의 눈들이 두 사람을 향해 있다.
“설명해 줄 테니, 일단 여기는 좀 나갑시다.”
“저……. 유 실장님 미팅 있어서 왔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아, 유 실장.”
유 실장.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는 냉담한 사람이 이런 개입을 자처하다니. 송백재에서 문자를 받고서 확신했다. 깜찍한 프로젝트는 기획도 대본도 실행도 모두 유 실장이 계획한 것이었다. 어린 강준에게 인사를 건네던 20대의 유 실장이 떠올랐다. 그렇게 무섭더니, 그렇게 독하더니…….
문득, 사무실에서 ‘해피 뉴우 이어’를 외치던 이섭도 떠올랐다. 대학 합격증을 쥐고 서울로 왔던 날, 송백재 저녁 파티에서 처음 본 이섭은 동화 속 그림에서나 봤던 창백한 왕자 같았다. 그날, 질투와 경멸을 동시에 담고서 준섭을 쳐다보던 이섭은 십수 년을 한결같이 재수 없게 굴었고, 준섭도 마찬가지었다. 종종 서로 물어뜯을 듯 붙기도 했다. 그러던 녀석이…….
“기막혀서.”
준섭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고는 상체를 구부릴 정도로 점점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무릎에 손을 짚고서 활짝 웃는 얼굴로 준섭이 우경을 보았다. 우경이 아직도 젖은 눈이 붙어 있는 머리칼에 손을 올렸다.
“다 젖었어요. 춥지 않아요?”
“아니, 안 추워.”
우경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고 준섭이 걸어갔다.
“유 실장 미팅 없어. 안 해도 돼.”
“네?”
우경이 빠른 걸음으로 보폭을 맞추며 물었다.
“어디 가요?”
회전문을 나란히 통과하고 나서 준섭이 말했다.
“지금부터 생각 중.”
하늘에서는 아직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경이 핸드백 속에 넣었던 접이식 우산을 펴고 준섭의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핑크빛 작은 우산을 올려다보고 준섭이 크기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우경의 어깨를 폭 감쌌다.
“아, 이건…….”
“우산이 너무 작으니까.”
준섭이 우경을 완전히 끌어안고서 건물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우경에게 장난처럼 말했다.
“일단 택시를 탑시다. 그리고 천천히.”
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준섭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다정하고 따뜻한 눈동자가 준섭만을 담고서, 미미한 근심과 격렬한 기쁨으로 흔들렸다. 준섭이 못 참겠다는 듯 우경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냈다. 우경이 당황스러워하며 얼굴을 어깨로 파묻었다.
꽉 붙어 서서 천천히 움직이는 두 사람 옆으로 서행하던 차가 멈춰 섰다. 문을 열고서 강 대리가 뛰어나왔다.
“본부장님.”
“아, 강 대리.”
“이렇게 젖어서, 어디를……. 세상에. 일단 타십시오. 네?”
뒷문을 열고 선 우식을 향해 준섭이 손을 저었지만 막무가내였다.
“따라갈 겁니다. 쭉. 계속.”
“됐어.”
“우산 너무 작고요, 핑크, 아, 이건 진짜 아닙니다. 본부장님.”
우식이 자세가 무너진 조직의 형님이라도 보는 듯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꼭 발이라도 구를 기세였다. 차단기 앞을 막아선 차를 내버려 두고 언제까지라도 고집을 부릴 태세였다.
준섭이 결국 우식의 기세에 밀려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하늘채 아파트.”
“네? 아, 네네.”
우식이 히터를 올리면서 작게 궁시렁거렸다.
“그럼,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되지, 뭘…….”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우경은 준섭이 이끄는 대로 어깨에 뺨을 기대었다. 준섭이 한 팔로는 우경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어 젖은 머리의 물기를 대충 닦아 냈다. 올려다보는 우경을 향해 물었다.
“꼴이 너무 이상한가?”
“아뇨.”
우경이 몸을 바로 세우고 준섭을 쳐다보았다.
“잘 어울려?”
준섭이 아직 알아채지 못한 우경을 향해 몸을 비스듬히 틀고는, 노란 넥타이 매듭에 손을 올렸다.
“아……. 그 타이.”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나는 내가 안 보이니까, 연우경 씨가 보고 똑바로 말해 보라고?”
우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반도체 공장 시찰을 가던 차 안에서 타이를 바꿔 매고는 화를 내던 준섭이 떠올랐다.
“잘 어울려요.”
외면했던 그날과 다르게 우경이 눈을 맞추고서 답했다.
“다행이네. 잘 보여야 하는데.”
물끄러미 바라보는 우경이 묻지 못한 물음을 알고 있다는 듯 준섭이 콧등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TK에서 왜 잘리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네.”
“네.”
“취직하기도 어려운데 TK에 죽어라 붙어 있으라고?”
준섭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더니 덧붙였다.
“실은, TK를 내가 잘랐어.”
“본부장님?”
“충분히 몸 갈아 가며 일했어.”
“그럼 송백재…….”
“송백재 뭐.”
말끄러미 바라보는 우경을 향해 준섭이 한 쪽 눈을 찡그렸다.
“너는, 왜 그랬어.”
“무슨…….”
“나 잘랐잖아. 공항에서.”
우경이 운전하는 강 대리를 의식하며 룸미러를 흘끗 보았다.
“어떻게 나한테 그래.”
“저, 저는.”
강 대리는 마치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다. 우경이 슬며시 거리를 두며 준섭에게서 떨어지자, 준섭이 손등을 덮어 쥐었다. 손가락 사이사이 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겹친 채로 깍지를 끼고서 말했다.
“플랫폼에서 만난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서는, 그 여행 즐거우셨나.”
우경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준섭이 고개를 기울여 우경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고는 물었다.
“얼굴이……. 독감이었다며.”
“좀 아프긴 했어요.”
“미련하기는.”
우경이 새초롬하게 쳐다보자, 준섭이 피식 웃었다.
“첫날 기다리고 있을 때부터 알았지. 보기와 다르게 미련한 거.”
내뱉는 말과 다르게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한 애달픈 눈을 하고서 준섭이 우경의 손을 제 다리 위로 끌어왔다. 주먹을 꽉 쥐고서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내내 깍지를 풀지 않았다.
“이리로 와.”
우경은 준섭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콧속을 파고드는 향이 좋아 자꾸만 더 깊이 숨을 쉬었다. 모조리 다 덜어 내고 그의 것으로만 채우고 싶어졌다.
* * *
하늘채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눈이 그쳐 햇빛이 창으로 들어왔다. 우경이 부신 눈을 가늘게 만들며 말했다.
“도착했네요.”
“응.”
“저…… 들어갈게요.”
준섭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문을 잡고 서서 뒤따라 내리는 우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 문을 닫은 후에야 우경은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세요.”
“말 그대로, 좀 쉬려고.”
“송백재…….”
“말씀드렸어. TK, 내가 버린다고. 그 말도 했지. 연우경, 그리고 회사에 남은 내 사람들 건드리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울 거라고도.”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말했어야지.”
준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알았어야 했어. 미안해.”
“아니, 아니에요.”
준섭이 고개를 젓는 우경에게 손을 가볍게 올리고 머리칼을 매만졌다.
“잘못했어. 처음부터 너한테 잘못한 거 많아. 후회하고 또 후회했어.”
“그런 거 없는데.”
“호텔에서 네가 한 말, 곱씹어 생각했어. 처음 보고 한 번 그런 상대, 그것조차 귀찮아서 안 하려고 했던 상대.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던 적도 있어. ……미안해. 하지만 아니야. 아니었어.”
우경이 빨개지는 눈가를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깨무는 입술도 손으로 가리고서 준섭에게서 비켜섰다.
“나는.”
준섭이 우경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우경아, 나는……. 처음부터 너한테 너무 빠질까 봐 두려웠던 거 같아.”
손으로 막고 있는 입에서 울음이 넘어왔다. 손등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과 받아 줘.”
우경이 고개만 끄덕였다. 팔을 벌려 우경을 가볍게 끌어안고서 준섭이 정수리에 턱을 문질렀다.
“나도 받아 주고.”
“……본부장님.”
“이제 본부장 아닌데.”
“아…….”
준섭이 장난처럼 요구했다.
“내 이름 가르쳐 줬잖아.”
“그래도, TK는.”
“TK는 지긋지긋하다. 우리, 여행 가자.”
우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나 부자라고.”
이번엔 우경이 좀 더 크게 웃었다.
“아니, 생각하는 것 이상, 훨씬 더 많이.”
준섭이 단호하게 말했다.
“TK 강남 사옥을 통째로 사고도 남을 만큼.”
너무 현실감 없는 비유여서 우경은 웃음을 거두고 준섭을 바라보았다.
“강남 아파트 상가 빌딩은 천 억쯤 하나? 그런 거 열 개가 나으려나.”
준섭이 우경의 벌어진 코트 깃을 여미며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놈은 아니야.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았어야지.”
“그럼, 정말 TK를, 송백재를 떠나겠다는 건가요.”
“응.”
준섭이 양손을 펼쳐 보였다.
“내가 좋은 어른들 아래, 따뜻한 가정에서 크지는 못했지만……. 그래, 의사도 아니지만 강남 아파트 상가 빌딩에 병원만 다 넣을 수도 있어. 그런 거 좋아한다면. 그렇게 해.”
젠장, 준섭이 의도한 대로 말하지 못한 듯 욕설을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고. 나는……, 노력할 테니까. 그러니까 백설이 같은 강아지 키우면서 나랑 살자. 연우경.”
우경이 주르륵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다 해 줄게. 원하는 거 다 해 줄게.”
“나는, 본부장님만 있으면 되는데.”
“이런, 본부장만 안 되겠다.”
우경이 울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준섭 씨만……. 있으면.”
준섭이 우경의 손을 꾹 쥐었다.
“가자.”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우경이 물었다.
“어디?”
“집에 올라가서 인사드리려고.”
“아…….”
“여행 같이 다녀오고 싶다고 허락도 받고, 결혼 승낙도 받아야지.”
으응. 소리를 죽이며 우경이 다시 울었다. 눈물을 닦아 주는 손가락이 너무 부드럽고 따뜻하다. 쌓인 눈에 두 사람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햇빛에 반짝이는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에필로그 1
계획 없이 시작된 여행이었다. 옷가지 하나 챙기지 않고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났다. 트렁크 손잡이를 쥐어야 할 손은 늘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기름한 손가락을, 관절 하나하나를, 그리고 손가락 끝에 얕게 새겨진 지문의 둥그런 흔적까지 만지고 쓰다듬으며 서로를 낱낱이 새기고 싶어 했다. 둘 다 사용하던 핸드폰은 꺼 두었다.
기차역으로 출발하기 전, 강 대리가 준섭에게 핸드폰 두 개와 카드 한 장을 건네주었다.
“정 대표님이 주셨습니다. 혹시나 본부장님이 갑자기 어디 여행이라도 간다고 하면 드리라고…….”
준섭이 짤막하게 소리 내어 웃더니 전화를 걸었다.
“응, 그래. 맞아. 두 개 필요해. 도피는 아니고, 여행. 모르겠어. 당분간 정 대표 카드 쓸게. 알았어. 이자 쳐서 갚을게.”
강우식 대리와는 기차역에서 헤어졌다. 표를 구할 수 있는 곳이 두 사람의 행선지였다.
“부산이요.”
기차앱 예매창을 계속 새로 고침하던 우경이 부산행 기차표 두 장이 뜨자마자 예매에 성공했다. 놀라워하는 준섭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남포동 우동 먹으러 가야죠.”
“아.”
준섭이 기억난다는 듯 웃었다.
부산에는 한밤에 도착했다. 국제 시장에 위치한 원조 남포동 우동집에서 냄새만 맡아도 속이 풀릴 만큼 진하고 뜨거운 국물을 훌훌 마시고, 탱탱한 면발을 후루룩 소리를 내며 삼켰다. 열심히 우동을 먹는 준섭을 우경은 또 빤히 쳐다보았다. 준섭이 고개를 들고서 피식 웃었다.
“그만 봐.”
우경이 고갤 숙이면서 우동발을 삼키자 준섭이 미리 냅킨을 빼어 들고 있었다. 입가를 닦아 주며 다시 웃었다.
송송 썬 파가 잔뜩 들어가 있는 양념장에 어묵 꼬치까지 콕콕 찍어 배부르게 먹고 나서 두 사람은 느긋하게 시장을 돌아다녔다.
바람이 쌀쌀하긴 했지만, 서울에 비하면 부산의 기온은 따스하게 느껴졌다. 배는 고프지 않은데, 야시장에 늘어선 길거리 음식 앞에서 우경은 자주 발걸음을 멈췄다.
“사 줄까?”
준섭이 그럴 때마다 물어보았다. 생과일주스를 마시고 기름에 지진 호떡은 하나만 사서 우경이 한입 베어 물고, 준섭이 다음으로 베어 물었다.
“뜨거워요.”
입을 하아 벌리는 준섭 앞으로 우경이 손부채질을 했다.
둘은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며 알록달록 늘어놓은 상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뭘 좀 사야겠어요.”
“응?”
“잠옷도 없고…….”
“여기서?”
준섭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우경은 엄마를 따라 시장에 온 아이처럼 가게들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요, 여기.”
가게 앞 행어에 걸어 둔 옷과 가격표를 보고는 우경이 안으로 들어섰다. 30년 전통의 영주상회라는 간판의 가게는 안쪽으로 긴 형태라서 좁은 입구에 비해 훨씬 더 큰 공간이었다. 우경이 입구 근처에 걸어 둔 파자마를 들어 보였다.
“어때요?”
준섭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지갑 먼저 꺼냈다. 두 사람을 본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잠옷 찾아요?”
“네.”
“그거는 면이 별로고, 여기 국내 공장에서 생산해서 납품하는 거 있거든. 이걸로 가지고 가.”
아주머니가 고리가 달린 긴 막대로 벽 위쪽으로 걸어 둔 파자마 세트를 꺼냈다. 우경이 고른 것보다 두 배가 넘는 가격이 붙어 있었다.
“여기 남자 것도 세트로 있거든?”
굵은 체크무늬 파자마를 보면서 우경이 애매하게 웃었다.
“세트로 사. 싸게 줄게. 가까이서 보니까 남자친구가 아주 인물도 훤칠하다. 둘이 이거 입으면 아주 그냥 딱 예쁘겠네.”
아주머니가 계산기를 빠르게 두드려 숫자를 보였다. 우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현금으로 하면 여기서 3천 원 더 빼 주고.”
“그런데……. 조금 더 둘러보고.”
머뭇거리는 우경에게 아주머니가 손을 아래위로 내저었다.
“아이고, 고마 여기서 사라. 다 똑같애. 함 만져 봐. 여기 와서 총각도 만져 보라니까. 아주 보들보들 촉감이 싸구려랑 질이 완전 달라. 이거 백화점 가면 10만 원짜리야.”
준섭이 다가와서 파자마를 잡는 순간, 아주머니의 화려한 판촉이 시작되었다. 고리 달린 막대가 서너 번 더 올라갔다 내려오고 선반 깊숙한 곳에서 박스 몇 개가 내려졌다. 중간중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계산기 버튼이 착착 눌러지고, 계산기 숫자를 보면서 준섭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속옷에 잠옷, 양말과 티셔츠까지 열 개도 넘는 종류가 선택되었다.
“근데, 총각도 부티 나게 잘생겼는데 여자친구 진짜 예쁘다. 어디서 저래 예쁘고 참한 여자친구를 만났노? 총각이 아주 능력자네.”
판촉을 위한 뻔한 멘트인데 준섭이 입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조금 더 가격 흥정을 해야 하지 않나 우경이 망설였지만, 주인 아주머니에게 설득당한 준섭은 이미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고 있었다.
“박스 필요 없쟤? 들고 댕기기 귀찮으니까 다 빼 줄게.”
검은 비닐 두 개에 담긴 옷가지를 받아 들며 준섭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쇼핑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아주머니가 갑자기 생각난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참, 잠깐 기다려 봐라. 내가 이걸 왜 생각을 못 했지? 이거 구경만 해 봐바. 진짜 좋은 거거든.”
아주머니가 작은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납작한 박스 하나를 더 꺼냈다.
“이거 어떻노? 내가 하나 빼 둔 건데 이제 생각났다. 이거는 일본 수출하는 건데.”
“아…….”
박스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서 우경이 얼굴을 붉혔다. 레이스가 달린 핑크색 슬립 세트였다. 아주머니가 우경을 흘끗 보고는 은근한 어조로 목소리를 깔면서 준섭에게 말했다.
“여자친구가 피부가 하얘서 입으면 너어무 예쁠 거야.”
“네, 예쁘네요.”
준섭이 웃으며 지갑에서 지폐를 더 집어 들자, 이번에는 역시 살짝 빼어 두었다는 레이스 속옷이 더해졌다. 사이즈도 필요 없다는 듯 아주머니는 우경의 몸을 한 번 훑어보고는 딱 맞을 거다, 라고 확신했다.
“요건, 박스째로 가져가라.”
오호호, 아주머니가 광대까지 올라가는 웃음을 띠고서 지폐를 세더니 준섭에게 한 장을 돌려줬다.
“가다가 떡볶이 사 먹어. 요기 좀 올라가다 보면 줄 많이 선 집 있거든. 거기가 맛있어.”
“고맙습니다.”
준섭이 허리까지 굽혀 인사하며 돈을 받자 아주머니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 * *
“해피 뉴 이어.”
우경이 준섭에게, 준섭이 우경에게 서로를 마주 보며 속삭였다. 에어비앤비에서 구한 숙소에서 밤을 보내고, 태종대 앞바다에서 맞이한 새해 첫날 일출이었다. 어둑한 새벽녘, 바다 너머 붉은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감탄과 환성이 커졌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두 사람은 꼭 껴안고서 서로에게 새해 인사를 건넸다. 평생을 반복할 첫 번째 인사였다.
부산에서는 사흘을 더 있었다. 계획 없이 움직이기도 하고 카페에 들어가서 다음번 방문 장소를 같이 골라 보기도 했다. 이동은 주로 택시나 지하철을 이용하다가 사흘째 되는 날 자동차 매장으로 갔다.
SUV로 유명한 브랜드 매장에서 준섭은 지금 바로 구입할 수 있는 차를 요구했다. 곤란하다는 답을 하던 딜러가 준섭과 따로 몇 마디 나누더니 다른 제안을 했다. 준섭이 어딘가 전화를 걸어 금액을 이야기하고 “알았어, 그럴게. 응응.” 웃으며 답하더니 딜러에게 확인해 보라고 손짓했다.
잠시 후 준섭은 매장 내에 진열되어 있던 시승차의 키를 건네받았다.
딜러가 얼굴을 활짝 펴고 웃으며 말했다.
“계좌 입금 확인했습니다. 전시용으로만 주로 사용한 거라 킬로수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청색 SUV 운전대를 잡으며 준섭이 몇 가지 기능을 체크했다. 우경이 조수석에 앉아 준섭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요?”
“SUV도 샀으니, 강원도 오라는데.”
준섭이 시동을 걸면서 답했다. 강원도, 라는 말에 우경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던 것 같다. 강원도 설산에서 동사했다는 준섭의 아버지가 자연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준섭은 아직도 악몽을 꾸는 밤이면 늘 강원도의 설산에서 헤매고 있을 텐데…….
우경의 표정을 보더니 준섭이 물었다.
“방금 통화하다가 나온 말이니까, 싫으면 다른 데 가도 돼. 가고 싶은 곳 있어?”
“있어요.”
“어디?”
“으음……. 가앙원도오.”
한 자씩 길게 빼어 말하자, 준섭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연우경 씨, 가끔씩 되게 귀여운 거 알아?”
“아뇨, 그런 말 처음 들어요.”
“그래야지.”
“네?”
우경이 고개를 기울이며 준섭을 바라보자 머리를 쓱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한테만 하라고.”
“아…….”
우경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아, 하고선 동그랗게 만든 입을 톡톡 두드렸다.
“강원도에 친구 별장이 있어. 매번 이야기만 하고서 가긴 처음이네.”
우경이 쳐다보자 준섭이 설명을 더했다.
“정 대표.”
“핸드폰 주신 분이요?”
“응.”
“오래된 친구야. 25년쯤?”
“와.”
“주말에 들르겠대.”
준섭이 우경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괜찮아?”
“그럼요.”
“가족이 같이 올 거야. 아이가 이제 세 살이던가.”
“네.”
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온기가 남은 옆자리를 더듬거리다가 준섭이 감은 눈을 떴다. 비어 있는 우경의 자리를 보며 급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방 밖으로 나가는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이런 낯선 행복이 어느 날 눈을 떠 보면 다만 긴 꿈이 아닐까, 한 번씩 두려웠다.
거실 베란다로 이어지는 창가에 서 있는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준섭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뭐 해?”
우경이 준섭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이리 와 보라 손짓했다.
“눈사람 가족 보고 있어요.”
창틀 바깥쪽으로 옹기종기 작은 눈사람 세 개가 놓여 있다. 우진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이다.
우진은 지난 주말 가족을 데리고 찾아와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돌아갔다. 와인 열 병, 스테이크 고기와 해산물, 야채, 과일을 잔뜩 싣고 온 덕분에 바비큐를 실컷 해 먹고도 엄청난 양이 남아 냉장고를 채웠다.
그날 밤에 와인에 취해 정 대표가 우경을 붙잡고 유머 감각 떨어지는 농담도 했다.
“우경, 우경, 이름도 너무 좋아. 우, 우. 딱 좋아. 원래 가운데에 우 자가 들어간 사람이 우리 준이랑 잘 맞아요. 나, 정우진이잖아요.”
기막혀서, 그만해. 어깨를 툭툭 두드려도 말릴 수가 없었다. 우경의 잔을 다시 채우며 얼굴이 달아오르게 하는 헛소리도 지껄였다.
“술 취하면 되게 귀여워진다고. 이 자식이 그랬어요. 그래서 술 안 먹인다고.”
입을 틀어막을 수도 없고……. 귀가 빨개진 준섭은 고기를 더 구워 오겠다는 핑계로 일어섰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고. 지인짜, 너무 좋아요. 우경 씨. 우리 준이 잘 부탁해요. 쟤 성격이 좀 드러운데 그래도 잘 데리고…….”
우진이 주정처럼 중얼거렸다.
우진이 엉성하게 만들어 놓고 간 눈사람을 보며 우경이 말했다.
“사흘 밤이나 지났는데 아직 그대로예요. 베이비 당근으로 붙인 코가 다 녹아 버렸나 했는데 잘 붙어 있네요.”
우경이 잔잔하게 웃으며 눈사람의 주황색 코를 가리켰다.
“안 추워?”
등 뒤로 다가가 앞으로 팔을 둘러 안으며 묻자,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우경은 슬립에 가운만 걸친 차림이라 목덜미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준섭이 드러난 살결에 코를 묻으며 숨을 들이켰다. 매끈거리는 슬립 위로 손바닥을 움직이자, 조금씩 우경의 호흡이 커졌다. 참지 못하고 솟아오른 부위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으응.”
우경이 몸을 빼어 내려 바르작거렸다. 집요하게 굴자, 우경은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턱에 입을 맞췄다.
“커피. 커피 마시고 싶어요.”
쉽사리 멈추지 않는 준섭에게 우경은 한 번 더 초옥,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도 우경에게 져 주고, 준섭은 우경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아메리카노 드실 거죠? 커피 내리고 있었어요.”
주방에 들어서자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피향이 진하게 퍼졌다. 노란색 머그에 가득 따라 준섭에게 내밀고, 한 잔은 양손으로 들고 마시면서 우경이 준섭과 눈을 맞췄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내색이었다.
“오늘…….”
“응?”
“며칠인지 아세요?”
“알아.”
“일주일 훨씬 넘었어요.”
“응.”
우경이 잔을 들고서 조금 머뭇거렸다.
“글로벌 전략 회의 시작인데…….”
준섭이 미간을 찌푸리자 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런데, 엄마가 걱정하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우경이 좀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가 이제야 준섭 씨가 누군지 아신 거 같아요. 소운 언니, 에이블 대표 말이에요……. 소운 언니가, 엄마는 당연히 아시는 줄 알고 말했는데 엄마 너무 충격받으셔서.”
우경의 집에 인사를 갔을 때, 눈만 동그랗게 뜨고서 얼떨떨해하던 우경의 어머니가 떠올라서 준섭도 피식 웃었다.
“그땐, 별로 묻지도 않으시고, 여행 잘 다녀오라 하셨잖아.”
“아, 울 엄마가 피지컬에 약하셔서…….”
우경이 잔을 감싸 쥐고는 웃었다.
“준섭 씨가 집에 들어섰을 때는 최애 배우 외모를 넘어서는 현실남이라니, 하는 충격으로 정신을 못 차리셨대요. TK 다닌다고 했고, 휴가라고 했으니 대기업 다니는 피지컬 능력남이구나, 그러신 거죠, 뭐. 아빠는……. 워낙, 덤덤하신 편이에요. 제가 누굴 데리고 와도 그러냐 하셨을 거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께 뭐라고 말씀드렸어?”
“집에 돌아가면 설명하겠다고.”
준섭이 우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아직 따뜻한 커피를 들고서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겨 나란히 앉았다. 어깨에 우경을 기대게 하고는 준섭이 우경의 뺨을 손끝으로만 한 번씩 쓰다듬었다. 고민을 해 봤자 결론은 하나였다.
커피를 거의 다 마실 즈음, 준섭이 물었다.
“집에 가고 싶어?”
“설명도 좀 드려야 하고, 회사일도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어요. 괜찮다고는 하는데 소운 언니 힘들 텐데……. 그리고 백설이 보고 싶기도 하고요.”
지난번 인사를 갔을 때, 백설이는 준섭을 향해 멈추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와서는 점프를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잠시 동안에도 준섭의 무릎 위로 올라가 턱을 핥고 입술을 핥으려 해서 우경의 엄마가 애를 먹었다.
“그래, 서울 가자.”
정말? 이라고 묻는 대신 우경이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물회도 먹었고, 겨울 바다도 봤고, 낙산사도 갔고, 스키만 못 탔구나. 강원도에 와서 하고 싶다는 것 중에.”
“또 와요. 와서 스키 타요.”
“그래.”
“서울 같이 갈 거죠?”
“데려다줘야지.”
“그럼…….”
“하루 정도 호텔에서 쉬고, 다시 여기로 오려고.”
우경의 걱정스런 눈빛을 읽었는지 준섭이 찡그려지는 우경의 이마를 엄지로 쓱 문질렀다.
“혼자…… 있으려고요?”
“마당에 개도 있고.”
우경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 와요. 며칠만 서울에 있을게요.”
“너 그러다 회사 잘리겠다.”
“그러게요. 잘리면 나 취직시켜 주세요.”
우경이 준섭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 *
서울로 출발하기 전, 조수석에 타려던 우경이 문을 열고서 머뭇거렸다.
“응?”
“저기…… 차.”
승용차 한 대가 빠르게 들어서고 있었다. 준섭의 SUV 앞을 막아서듯이 차를 멈추고는 누군가가 급하게 내렸다.
“아.”
준섭이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차에서 내려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야아. 베스트 타이밍이다. 나 조금만 늦었음 또 너 놓쳤니?”
“어떻게 오셨어요.”
성가시다는 내색을 감추지 않는 준섭을 향해 지윤이 눈을 한 번 치켜뜨고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수색했다. 왜? 너 얼굴 박아서 전단지 뿌릴까도 했어. 그러기 전에 정 대표랑 담판 지었고. 인터넷으로 다 뿌리기 직전에 여기 주소 불더라.”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우경은 그제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챘다. 일전에 호텔에서 이섭이 소개시켜 줬던 고모, 그러니까 준섭의 이모였다. 자신에게 닿는 시선을 느끼고는 우경이 푹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우리 구면이죠?”
지윤이 경쾌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름이 뭐랬더라, 연…….”
“연우경입니다.”
“맞아, 우경이. 보기와 다르게 용감해. 깜짝 놀랐어. 나는 준섭이 여친인지는 몰랐거든. 이섭이랑 뭐 있나 그랬지.”
“아……. 아닙니다.”
우경이 당황하며 부정하자, 지윤이 손을 까닥 한 번 아래위로 움직이며 오해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알아, 그냥 그랬다고. 착각이었어. 그날, 이섭이 엄마랑 베이커리에서 우연히 봤을 때도 준섭이 초콜릿 산다고 왔었잖아? 그치?”
“……네.”
“두 사람 어디, 가려던 중이에요?”
지윤이 우경을 향해 물었다.
“네.”
“잠시만 나 준섭이 얘랑 얘기 좀 할게요. 시간 괜찮죠?”
“그럼요. 관장님.”
지윤이 돌아서려다 말고 정색을 했다.
“얜, 무슨 관장님이야. 이모지. 나 준섭이 이모야. 이모님, 그렇게 불러. 응?”
우경이 아래로 낮추었던 시선을 들자 지윤이 생긋 웃고는 준섭을 향해 손짓했다.
“나 커피 한 잔만 줘. 잠도 못 자고 새벽부터 설쳤더니 피곤해.”
* * *
서울로 오는 내내, 우경이 한 번씩 눈치를 살폈지만 준섭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우경을 집 앞에서 내려 주며 준섭이 편안한 미소를 만들었다.
“연락할게. 전화받아.”
“……네.”
“부모님께는 잘 말씀드려 줘. 다음에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리러 간다고.”
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내리고 문을 닫기 전에 한 번 더 준섭과 눈을 맞췄다.
“들어가.”
준섭이 어서 가 보라 손짓했다.
“네.”
우경이 돌아서서 아파트 동 입구로 향하다 말고 도로 뛰어왔다. 운전석 창문을 탁탁 두드리자 준섭이 창을 내렸다.
“응?”
우경이 창 안쪽으로 갑자기 팔을 뻗어 준섭의 목을 끌어안았다. 당황하는 준섭이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귓등에 빠르게 입을 맞추고는 떨어졌다.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무슨 말이야.”
“뭐든.”
준섭이 손을 내밀어 우경의 귓등을 쓸고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갈게.”
“네.”
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올라갔다. 우경은 그 자리에 서서 준섭이 떠나길 기다렸지만, 준섭이 먼저 올라가라 손짓했다. 몇 번이나 돌아다보면서 결국, 우경이 먼저 등을 돌렸다.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가슴 한 귀퉁이가 툭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힘주어 한 걸음씩 옮기며 우경은 혹여 준섭이 다시 TK와 송백재로 돌아간다고 해도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 * *
준섭은 우경을 내려 주고, 곧장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지윤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영감 다 죽어 가.”
“무슨 말씀이세요?”
“태시환 회장님, 네 할아버지 상 치르게 생겼다고.”
준섭은 믿을 수가 없다는 투로 웃었다.
“정정하시던데요.”
“네가 그렇게 뒤통수 갈기고 갔는데, 계속 정정하시겠니?”
“제가 뭘.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주식도 안 건드렸고 기밀도 그대로.”
“준아!”
지윤이 정색을 하며 소리를 높였다.
“너, 회장님이랑 TK 버린다고 안 그랬어? 그게 아무것도 아니야?”
“애초부터 제가 뭐. 소속이나 되어 있었습니까.”
지윤이 찻잔을 달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릴 때부터 투정 한 번 없다고 기특하다 했더니, 이 나이에 생떼를 부리는구나. 네가.”
“관장님.”
“너도 내가 관장이야?”
준섭이 지윤과 가만히 눈을 맞췄다.
“내가, 울 아버지 배신하고서, 너 죽자고 도왔어. 그래, 능력 출중한 네 덕분에 나도 승승장구였어. 그런데 나 너 이러라고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이런 식으로 다 던져 버리라고 그런 거 아니었다고. 너무 기막힌 꼴 당하지만 말라고.”
하, 지윤이 자조하듯 크게 소리를 냈다.
“이제 와 다 무슨 소용이야, 처음이 뭐였든.”
지윤이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는 차갑게 일갈했다.
“맘대로 해. 임종 지키기 싫으면 그래도 좋아. 나는 지금 가 봐야겠어. 맘에 안 드는 자식이지만 그래도 임종은 해야 하지 않겠어.”
임종. 그 단어를 접을 수가 없었다.
준섭은 결국 늦은 밤, TK 재단 병원으로 들어섰다. 무슨 말을 마지막으로 해야 할지 아직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뒤죽박죽 뇌가 헝클어진 기분이었다.
‘내 딸 서희를 닮아 잘생겼다.’
당당하게 말하던, 수십 년 전 태시환이 떠올랐다.
평생 구경도 못 했던 값비싼 선물들은 늘, 준섭에게 꼭 맞는 사이즈였다.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부터 컴퓨터, 전자기기, 책과 악기. 모든 것들이 다 준섭의 마음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듯 정확히 원하는 것들이었다.
준섭이 무언가를 해낼 때면 한 번씩 웃던 눈이 떠올랐다.
그렇지, 역시 대단하구나.
그런 말을 해 주었던가. 기억은 희미한데 표정은 선명하다.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을 담아 준섭을 바라보던 태시환의 얼굴은 평범한 할아버지의 것과도 같았다.
늘 주물러 드리던 어깨와 무릎은 매일매일 조금씩 더 쪼그라져 이젠 앙상하다 싶을 만큼 말라비틀어졌다.
고만해라. 팔 아프다.
아래로 내려다보던 회장의 눈에 비치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니 생각은 어떻노.
회사의 중요 사안마다 지그시 바라보며 묻던 얼굴에선 신뢰와 의심이 공존했다.
회장의 병실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열리는 문으로 나가면서, 혁신전략기획본부를 만들고서 그 수장으로 준섭을 지명하던 밤이 떠올랐다.
‘내일부로 상무 승진하고 혁신전략기획본부로 발령 조치했다.’
‘함 해 봐라.’
‘회장님.’
‘띨띨하게 굴면 다음 날로 내릴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그런 말을 하면서 준섭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던 것 같다.
병실 앞에서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준섭을 보고는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준섭은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가 떼어 냈다. 병실에 일가가 모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준섭은 심호흡을 하고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열었다.
예상과 달리, 낮은 조도로 불이 밝혀져 있는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넓은 공간은 적막하여 가습기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잡힐 정도였다. 발소리를 죽이며 준섭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반쯤 가려진 안쪽 병실 공간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있는 태시환이 보였다.
태시환의 발끝으로 다가가 준섭은 가만히 서 있었다. 잠이 든 것처럼 보이는 태시환의 상태는 어떤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웠다. 환자복 사이로 드러나는 야윈 몸이 꼭 겨울나무 같았다. 조금 더 가까이 얼굴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소리에 잠이 깼는지 시환이 눈을 떴다.
“왔나.”
시환이 몸을 일으키려는지 링거가 꽂힌 팔을 움직였다. 준섭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등을 감쌌다.
“천천히. 회장님. 천천히.”
준섭에게 의지하며 시환이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준섭이 팔을 뻗어 안 듯이 시환을 받치고 침대 리모컨 버튼을 눌러 상단을 비스듬히 세워 올렸다. 조심스레 시환의 몸을 기대게 하고는 물러섰다.
“어째 왔노. 더 있다 올 줄 알았는데.”
준섭을 바라보는 회장의 눈빛은 여전히 총기가 넘쳤다. 임종은 지윤의 거짓이었다. 준섭이 씁쓸하게 웃었다.
“쓰러지셨다고 해서.”
“왜, 내가 죽는다고 하드나?”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상대로 정정하십니다.”
준섭이 고개를 숙였다.
“가 보겠습니다.”
회장이 쿨룩 기침을 뱉어 냈다. 몇 차례 고통스레 기침을 하더니 준섭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여기 서랍에 봉투 하나 가져와 봐라.”
준섭이 회장이 지시한 대로 서랍을 열어 서류 봉투를 꺼냈다. 회장에게 건네려니 회장이 열어 보라 손짓을 했다.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떤 폭탄이 들어 있는지도. 준섭은 회장의 읽을 수 없는 얼굴을 한 번 바라다보고 봉투를 벌렸다.
“확인해 봐라.”
서류를 꺼내어 읽어 내리는 준섭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굳어 갔다.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며 준섭이 회장에게 물었다.
“뭡니까. 회장님.”
“보는 대로다.”
“대체. 이게 뭐냔 말입니까.”
“거 적힌 날짜를 봐라.”
1년도 전의 날짜가 박힌 공증 서류였다.
“증여 시기는 내가 계속 바꿨다. 해마다 새로 만들었지. 이번 달 10일, 내일인데 이번에는 안 바꿨다.”
“회장님. 이걸 왜.”
“니 말대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이고.”
“어쩌란 말입니까. 이걸.”
“TK 전자는 니가 맡아라. 이섭이는 물산이다. 분리해라. 서우한테 갈 거 이섭이한테 넘겼다.”
“회장님. 저는,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래. 니는 TK 버린다 했나. 싫으면 갖다 팔아라.”
회장의 차명주, 차명 계좌. 말로만 들었던 규모의 자산이었다. 봉투에 들어 있던 서류는 준섭에게 대부분의 차명 재산을 증여한다는 서류였다.
“왜.”
준섭이 숨을 몰아쉬었다.
“왜, 이러십니까.”
“머리를 나도 썼다. 내가 죽고 나면 뭘 어찌 준다고 유언을 하고 나눠 놔도 전쟁이 일어날 거라. 어떻게 해도 니가 아무것도 없는 놈이라 골치가 아프더라. 그래서 나는 니가 최하영이랑 결혼을 하면 되겠다, 그리 맘먹고 있었다. 결혼 결정되면, 서류 정리해서 넘기고 증여세 내고……. 내가 죽은 뒤에도 준섭이 니가 서우나 이섭이한테 밀려서 전쟁하느라 회사가 엉망으로 쪼개지지는 않겠다 그리 계산을 했다.”
회장이 주름진 얼굴로 웃었다.
“그런데 니가 그렇게 가진 게 많은지 몰랐다. 서희도 니도, 그래 내 자식들이 맞다. 어째 그리도 독하고 깜찍하게 그 자산을……. 그러니 이걸 더하면 TK전자 흔들릴 일이 없지 않나.”
준섭이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거세게 문질렀다.
“싫, 싫습니다. 제가 왜.”
“나는 TK에 내 평생을 걸었다. 목숨도 걸었다. 제일 잘할 수 있는 놈한테 맡기고 싶다. 준섭이 니가 죽어도 싫으면, 니가 선택해서 다른 사람한테 넘겨라.”
“저는…….”
준섭이 뜨거워지는 눈을 손바닥으로 눌렀다가 떼어 냈다.
“안다. 내가 지긋지긋하고, TK도 그렇겠지.”
준섭이 답을 하지 못하고 뜨거워진 숨만 내쉬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솟구치는 감정들을 억누르는 일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도 끔찍하나. 내가…….”
하아……. 준섭이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내가 잘못했다. 나는 옹졸한 인간이라, 그게 최선이었다.”
“회장님,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로……. 저를 다시, 다시 묶으려 하지 마십시오. 저는. 저는!”
준섭이 양손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가렸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뭘로 니를 묶겠노. 이리 건장한 니를 늙어 빠진 내가.”
준섭이 고개를 저었다.
“우경이. 걔랑 있다가 왔나.”
답 없이 바라보는 준섭을 향해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누구든 상관없다.”
“회장님은, 끝까지…….”
“그래, 나는 나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회장이 앙상하게 마른 손을 들어 이리 오라 손짓했다. 다가서는 준섭에게 뻗는 손이 한 번씩 경련처럼 떨렸다. 준섭이 회장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준섭의 머리칼에 손을 올리며 회장이 아이처럼 웃었다.
“그래도 그 이기심 덕분에 니를 내 옆에 내내 묶어 뒀으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준섭의 콧날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준섭이 니가 올해 나이가 몇이고? 시간 보내지 말고 얼른 결혼해라. 내 꼴 보기 싫으면 결혼식도 안 가마.”
올려다보는 준섭에게 회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송백재도 비우고 나는 선산 가서 살아도 된다. 자유롭게 니 맘대로 살아라.”
“회장님.”
준섭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얼굴을 회장의 다리에 묻었다. 20년의 시간이 둑 터진 강물처럼 준섭을 휩쓸고 지났다.
에필로그 2
볕이 좋은 날이었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송백재의 정원은 햇빛을 반사하는 금잔디로 반질반질 윤이 났다. 저녁 식사라기엔 이른 시간, 일가들이 하나둘 송백재로 모여들었다. 아름답게 정돈된 정원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한 번씩 걸음을 멈추었다. 정원을 보고는 다들 한 가지 생각이었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하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피식 웃거나 고개를 두어 번 젓고는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이섭이 가장 마지막으로 송백재에 들어섰다. 정원에 딱 멈춰 서서는 이섭이 휘이, 휘파람을 불듯이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고 후우 숨을 길게 쉬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대놓고 말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다이닝룸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섭이 준섭을 향해 까닥 손짓을 했다. 복도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험한 표정을 지으며 준섭을 쳐다보았다.
“왜.”
“설마, 오늘도 혼자 왔어?”
“왜.”
“진짜. 어휴.”
이섭이 짜증을 감추지 않으며 열이 오른 숨을 후우, 불어 올렸다.
“우경이 몸살 기운 있어. 가인이가 종일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아서…….”
“가인이 에너지야 하루 이틀 일 아니고. 넌 정원 안 보이냐? 저거?”
이섭이 손가락으로 송백재 정원 방향을 가리켰다.
잣나무와 소나무들이 엄숙하게 둘러싼 정원 한가운데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머리가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인형들은 펭귄, 북극곰, 공룡, 비버였다. 그중 핑크색 비버는 세 마리나 크기를 달리하여 조르륵 놓여 있었다.
“송백재가 뽀롱뽀롱 놀이동산이지 아주……. 걔 이름이 뭐야. 핑크색 꽃 꽂은 애. 걔가 가인이 최애잖아.”
준섭이 못 들은 척 손에 들고 온 생수를 병째 들이켰다.
“야, 할아버지가 가인이 한 번 보겠다고 저기 저, 응? 펭귄에 공룡에 끔찍하게 알록달록 머리 큰 애들을 송백재에 늘어놨는데. 어?”
“다음에.”
준섭이 슬쩍 자리를 피했다. 이섭이 따라가자, 벨트 버클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화장실 가는데?”
“아, 진짜.”
이섭이 휙 돌아서서 발소리를 내며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아무리 송백재랑 합의를 했다고 해도 준섭은 송백재에 우경이나 가인이 얼굴 한 번 보여 주는 것도 인색하게 굴었다.
“진짜 뒤끝 길지.”
이섭이 중얼중얼 욕설을 씹으며 다이닝룸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아아! 이떱이 삼툐오오온!”
저렇게 뛰다간 넘어지지 싶은 속도로 가인이 작은 발을 굴려 가며 이섭에게 달려왔다. 이섭의 다리에 부딪혀 넘어지기 직전에 이섭은 가인을 달랑 들어 올렸다.
“저런, 죄송해요.”
숨을 할딱거리며 쫓아온 우경이 사과를 했다.
“어떻게 왔어요? 몸살이라던데.”
“아……. 다들 뵙고 싶어서 왔어요. 그이는 골프 약속 갔다가 바로 송백재로 온 거고요.”
그사이에도 가인은 가만 있지 못하고 침 묻은 손가락으로 이섭의 눈을 만지고 코를 납작하게 눌렀다.
“가만 좀 있어. 가인 공주. 그런데 너 오늘은 완전 공주네? 예쁜 옷 입었구나.”
가인의 드레스를 보며 묻자, 우경이 대신 답했다.
“외숙모님이 사 주셨어요.”
“엄마가?”
“네. 지난주에 같이 쇼핑했어요.”
우경과 이야기하느라 제 쪽을 바라보지 않는 이섭이 서운한지 가인이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어리광을 부렸다.
“이떱이 삼툐오온.”
“나 삼촌 아니랬지. 니 아빠랑 내가 사촌이야. 그러니까 오촌. 응?”
가인이 머루알처럼 까맣고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오툐오온? 이떱이 오툐오온?”
“아, 됐어. 삼촌 해, 삼촌.”
가인이 눈을 맞추며 까르륵 웃었다.
창백할 만큼 흰 얼굴에 핑크빛 뺨, 붉은 입술을 가진 가인은 사진으로만 본 막내 고모를 꼭 빼닮았다고 한다. 고모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빠의 건강 체질을 고대로 닮아 지나치게 에너지가 넘친다는 점이었다.
흰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허리엔 핑크색 커다란 리본을 한 가인의 가냘픈 외모에 속아선 안 된다. 열 시간을 계속 놀아도 지치지 않는 에너지의 소유자였다. 그래도 이렇게 눈을 똑바로 맞추고 웃을 때면 천사가 따로 없다. 이섭은 예쁘게 곱슬거리는 까만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가인이, 저기 봤어? 뽀롱뽀롱 동산이야.”
“루피, 루피.”
가인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나가자고 보챘다.
“제가, 데리고 나갈게요.”
우경이 손을 벌렸지만 이섭은 가인을 한 번 더 추켜올리며 안았다.
“내가 나갈게요. 준섭이 화장실 간다는데, 아마 회장님 모시러 방에 갔을 거예요. 나오면 정원으로 보내요.”
이섭이 가인의 뺨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갈까? 뽀롱뽀롱!”
가인이 양발을 팡팡 굴렀다.
“가자, 삼ㅤㅌㅛㄴ!”
“그래. 가자.”
이섭이 답하면서 다이닝룸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우경을 선애가 불렀다.
“우경아.”
“네?”
“주스 마실래?”
“감사합니다.”
선애가 건네는 주스를 받으며 우경이 인사했다.
“아빠도 주스 드실 거죠?”
수진이 오렌지 주스를 컵에 따르며 큰 목소리로 묻고는, 제 남편에게 주스 두 잔을 건넸다. 가서 드려. 거실에 있는 서우에게 가 보라 손짓했다.
“훈아, 너도 주스 마실래?”
수진이 아들에게도 큰 목소리로 물어봤지만, 아들은 이미 윤아의 아들들과 머리를 맞대고 게임 삼매경이었다.
자연스럽게 지윤과 선애를 중심으로 여자들만 모여 앉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원을 바라보니, 준섭이 태시환 회장을 모시고 정원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왕하아부지이!”
창 너머로 보는 것만으로도 가인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인이 팔을 크게 벌리고 시환을 향해 뛰어갔다. 행여 넘어질까, 준섭이 가인을 향해 큰 걸음으로 다가갔다. 가인은 멈추지 않고서 달려가 무릎을 굽히고 팔을 벌린 시환에게 안겼다. 준섭이 그 뒤에서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서 가인의 허리춤에 풀어진 리본을 묶어 주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준이, 다정하기도 하지.”
지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준섭이 오빠, 결혼하고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거 같아. 전엔 좀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고 빈틈이 없어 보였는데.”
수진이 지윤의 말을 거들었다.
“하긴, 니 남편도 다정하지?”
지윤이 불쑥 우경 옆에 앉아 있는 이섭의 처에게 물었다.
“그럼요, 다정해요. 울 오빠가 언니한테 얼마나 잘해 주는데.”
수진이 먼저 답을 했다.
“그치? 이섭이가 까칠한 데가 있긴 한데 그래도 되게 잔정이 많다? 그치? 완전 꿀 떨어지지? 얘기 좀 해 봐. 응?”
“형님, 그만해요. 애 곤란해하잖아요.”
선애가 지윤을 말리자 이섭의 처가 무안한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정원에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준섭이 한 팔로 가인을 달랑 안고서 우경에게 오더니 서슴없이 손을 들어 우경의 이마를 짚었다.
“아프다며. 왜 왔어. 집에서 쉬지 않고.”
“아우우.”
지윤이 야유를 보내자 수진과 윤아도 따라서 우우, 소리를 냈다. 당황한 준섭이 뺨을 붉게 물들이며 웃었다.
송백재 정원에 저녁 햇살이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