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공항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자마자 준섭은 달리기 시작했다. 안내 표지판을 보면서 멈추지 않고 곧장 출국장 입구까지 뛰어갔다. 괜찮다고, 서울에 가서 다시 만나면 된다고, 이렇게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이해시키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연말이어서 붐비는 공항은 여행객들이 만드는 소음 때문에 귀가 울릴 정도였다. 준섭은 몇 번이나 사람들과 부딪힐 뻔했지만 마치 드리블을 하는 운동선수처럼 민첩하게 방향을 틀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출국장 입구에서 사람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줄을 훑어보며 준섭은 낭패감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숨을 몰아쉬면서 우경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다시 나왔다. 속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연우경, 핸드폰 가져갔다며! 받아, 받아, 받아, 받으라고!
나를 이렇게 깡그리 무시하지 말라고. 모르는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등 돌리고 가지 말라고!
준섭이 화끈거리는 눈 위를 손을 들어 가리고는 숨을 골랐다.
옷이라도 뭘 입고 있는지 알면 조금이라도 찾기 쉬울 텐데.
이미 출국장을 통과했는지 여부라도 알게 된다면…….
다시 호텔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망설이며 준섭은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을 천천히 살피며 걸어갔다.
제발……. 여기 있어. 아직은 여기에.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최하영과는 아니라고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한 줄을 살피며 지나가고 다른 줄 쪽으로 건너가 반대 방향으로 훑어 올라가다가 준섭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는 제대로 안 보였는데……. 문득 시선에 걸리는 여자가 있었다.
반대편 줄에 서 있는 사람을 다시 보려 준섭은 고개를 기울였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캡모자와 청바지, 두툼한 오버 사이즈 봄버 점퍼를 입은, 학생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준섭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아닌지 여자는 마스크를 쓴 얼굴을 비스듬히 반대편으로 틀고는 기침을 뱉어 냈다.
준섭은 고개를 돌려 출국장 게이트에 가까운 방향으로 다시 움직였다. 앞만 보며 몇 걸음 걸어가다가 핸드폰을 들어 귀에 붙였다.
“네, 그런데요. 네. 감사합니…….”
준섭이 말을 마치지 않고 휙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준섭의 전화는 통화 중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준섭이 방심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가짜 통화 행세였다. 그러면서 오로지 신경을 한 사람에게만, 캡모자를 쓰고 있던 여자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거기 서!”
준섭이 달리며 소리쳤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준섭에게 향했다.
“멈추라고!”
준섭이 소리를 높였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빠르게 달리고 있는 캡모자를 쓴 여자의 뒷모습으로 옮겨 갔다. 준섭이 어깨를 잡기 직전 뛰어가던 여자가 멈추고 돌아다보았다.
“연우경.”
얼굴을 가린 마스크로 향하는 준섭의 손이 떨렸다.
“하아…….”
준섭의 손을 걷어 내듯 막고서 스스로 마스크를 벗으며 우경이 숨을 길게 내뱉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전화 왜 안 받아.”
“아…….”
우경이 호주머니에서 태연하게 핸드폰을 꺼내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배터리 또 닳을까 봐 아끼고 있었거든요. 미안해요. 호텔 돌아오실 시간 즈음 전화하려고 했어요. 기다리려 했는데,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 시간이……. 공항이 너무 붐비잖아요, 시간 빠듯할까 봐 본부장님 기다릴 수는 없겠더라고요.”
하, 준섭이 기가 막혀 입이 벌어졌다.
“연우경 씨, 사람 입 막는 재주가 있네. 시뮬레이션 돌렸어? 출국장 빠져나가기 전에 나한테 잡히면 이렇게 말하겠다고?”
“본부장님.”
우경이 준섭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서울에서 만나 이야기하려 했어요.”
“뭘.”
“우리의 관계.”
준섭이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 하는데 우경의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지잉하는 진동이 울렸다.
[서동재]
발신인을 확인하는 우경의 얼굴에 기운 없는 웃음이 스쳤다.
“누구야.”
준섭이 묻는 말에 우경은 답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전화를 받지도 않고 그저 시선을 핸드폰에만 두고 있었다.
진동은 멈췄지만, 대신 메시지가 들어왔다.
[연락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동재]
짤막한 메시지 위에는 어제 보내어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가 있었다.
[연우경 씨, 서동재입니다. 잊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미국 연수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왔어요. 일주일 정도 되었는데 그동안 시차도 그렇고, 병원 일도 처리할 것이 있어서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경 씨가 그날 바람맞혀서 미안하다고, 다음에 연락 주면 밥 사 준다고 했던 약속은 계속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 제가 사도 좋습니다.
내일 일요일은 어떠세요? 점심 저녁 다 좋고, 다음 주 평일은 7시 이후로 괜찮습니다. 짧은 글인데 뭐라고 하면 덜 어색해 보일지 쓰느라 애먹었네요. 메시지 확인하면 전화 주세요.]
준섭에게 숨길 생각도 없이 우경이 어느 놈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보란 듯 펼쳐 놓고 찬찬히 읽었다. 당장이라도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버리고 싶은 비이성적인 충동에 준섭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뭐야.”
우경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준섭을 바라보았다. 준섭과 달리 차분한 시선이었다. 체념 같기도 하고 정리 같기도 한, 흐트러진 무언가를 깊숙이 밀어 넣은 얼굴로 우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약간 허탈하네요. 이런 걸 두고 인생에는 정해진 인연과 길이 따로 있다고 하나 봐요.”
“무슨 소리야.”
“처음에 TK기업 광고 카피 건으로 본사 찾아갔을 때, 본부장님을 제가 처음 본 날이요.”
준섭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 눈을 가늘게 떴다.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우경의 목소리는 더 작게 들렸다.
“그날 선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골라 주는 대로 평소와 다르게 여성스럽게 입기도 했어요. 회사일 터지고 정신없이 TK로 오느라 선볼 남자를 바람맞혔고요. 그 후론 이 사람이 미국으로 연수 간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뭐, 그게 지금 인생의 정해진 인연과 무슨 상관이야!”
준섭이 소리를 높이자 우경이 말리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사람과 인연을 말하는 거 아니에요. 당신과 나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내겐 당신과 첫날, 그 만남은 어쩌면 비현실적으로 휘어 버린 시간 속에 있었던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연히 만났고 스쳐 지났는데, 그것뿐이었는데 다시 이어졌고, 3개월이라는 계약 기간에 묶여서 시간을 보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시간들이었어요. 내 것 같지 않은 시간들.”
우경이 허공에 손을 올렸다. 손으로 작은 물방울 같은 원을 그리고는 그 위로 길게 선을 그으며 말했다.
“이제 휘어지던 그 시간들이 맞물려 제대로 된 트랙으로 이어진 기분이에요. 빙 둘러 왔지만 원래 가야 했던 길로 올라서면 또 계속 갈 수 있겠죠. 굽어진 시간들을 감쪽같이 숨기고.”
“거창하게 말하지 마. 3개월 나랑 잘 놀았으니 이제 선을 다시 보겠다 이 소리잖아, 지금!”
준섭이 저도 모르게 우경의 팔을 붙잡았다. 두툼한 점퍼 아래 가느다란 팔이 바르작거렸다.
“본부장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에요.”
“아니!”
“맞아요.”
“난, 시인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야. 내 시간은 언제나 그대로 흘러가고, 너를 만났고, 3개월은 나를…….”
“아니요!”
우경이 준섭의 말을 막았다. 비명에 가까운 부정이었다.
“곧든 휘어졌든 끊어 내 버릴 시간이에요. 도려내세요.”
“연우경.”
“미안해요. 3개월도 저에겐 충분히 길었습니다. 더 지속하기엔 본부장님은 너무 버거운 사람이에요. 힘들어요. 부담스럽고요. 그리고…… 고마워요. 잘해 주셨어요. 그동안 꿈처럼 행복했어요.”
“그, 그러지…… 마.”
준섭이 다물어도 계속 떨리는 입술 위로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주먹에 부딪히는 숨이 뜨겁고 습하다. 언젠가, 이랬었지 하는 기억이 났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인사하던 날.
산소 호흡기를 떼고서 서희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준아, 우리 준이……. 내 아들, 되어 줘서…… 행복, 했어. 해 뜨는, 낮에도…… 달, 뜨는 밤, 에도. 엄마, 생각…… 하지 마. 달도, 없는 밤……, 에만 보, 보이는, 별, 될 거야. 그런 밤, 별이 되어…… 지켜.”
“엄마, 그런 말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나는 매일매일 낮에도 밤에도 엄마만……. 엄마만 생각…….”
서희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경련처럼 뒤틀리는 몸을 붙잡으며 간호사가 비상벨을 울렸다. 엄마, 엄마! 소리를 지르는 준섭에게 말했다.
“그러면 안 돼요. 환자가 너무 힘들어해요.”
소리가 터지는 입을 주먹으로 막고서 준섭은 서희를 바라보았다.
“주님의 곁으로 가시게……. 편히 가시도록…….”
수녀님이 준섭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본부장님. 앞으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시는 길 응원하고 잘되시는 거 지켜볼게요.”
“나 위하는 척하지 마! 헛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준섭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와중에 맞춰서 연락해 주니, 인연이 여기로구나, 이제 나 관두고 그 의사 나부랭이, 시시한 새끼 만나겠다 그 소리잖아.”
“시시한 사람 아니에요.”
우경이 물러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우리 엄마 이 사람이랑 선보게 하려고 할머니 시골 과수원까지 들먹이며 애썼어요. 나한테는 만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고.”
“뭐?”
“난 본부장님에 비하면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에요. 우리 집, 사는 동네 보셨겠지만 그냥 그게 전부예요. 그런데 나는 우리 엄마 아빠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따뜻하게, 백설이 같은 강아지도 있는 단란한 가정 꾸리며 소소하게 살고 싶어요. 나는 그런 식으로 사는 방법밖에 몰라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예요.”
준섭이 턱이 뻐근하도록 이를 꽉 맞물었다. 준섭은 처음부터 자격이 안 되는, 그리하여 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연우경의 희망이고 꿈꾸는 미래였다.
“이 남자, 제가 일방적으로 바람맞히고 약속 깨고, 그랬는데도 이해해 줄 만큼 마음도 넓고. 네, 본부장님 보시기엔 하찮겠지만 강남 아파트 상가에서 병원 하는, 좋은 집안 남자예요. 나한테 이 사람도 과분해요. 이게 제 입장이고 현실이에요.”
좋은 집안, 좋은 남자.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평범하고 인품 좋은 집안에서 잘 자란 남자와 결혼을 하고, 서울 어딘가에서 편안하고 따뜻하게 가정을 꾸릴 우경이 떠올랐다. 백설이 같은 강아지를 키우고, 우경을 닮은 아이들을 키우며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매일매일 편안하고 따뜻하게 마음 졸이는 일 없이…….
준섭이 고개를 저었다. 말하는 제 목소리가 너무 떨리고 울려서 잘 들리지 않았다.
“돌려 말하지 마. 그래서 내가 가야 할 길, 네가 가야 할 길, 강남 병원, 따뜻한 가정……. 그 모든 이유로 헤어지자고,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야?”
“서동재 이 남자와 뭘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본부장님, 행로를 바꾸지 마세요. 우리는 플랫폼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그렇게 교차점에서 만나고 자연스레 멀어질 뿐이에요.”
“네 맘대로 정의하지 마. 나는!”
“아니요!”
우경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모자로 가린 얼굴을 손으로 마저 가려 버리며 깊이 숙이고는 어깨를 떨었다.
“힘들어요.”
우경이 마르고 휑한 눈으로 준섭을 보았다.
“제 티켓은 본부장님과 달라요. 출발 시간도 좌석도 달라요. 이제 나는 출국해야 해요.”
“우경아…….”
준섭의 부름에 우경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손을 떼어 내자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짓이기고 있었다.
“우경, 우경아…….”
우경이 준섭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이런 모습 사진 찍히기 싫어요.”
“없어.”
“어떻게 알아요.”
“상관없어.”
“난, 있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내 인생을 망치지 말아 줘요.”
우경의 어깨에 닿으려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우경이 빠르게 출국장 입구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망치지……. 말아 줘요.
준섭은 발이 묶인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 * *
준섭이 굳은 얼굴로 김포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랐다. 가방을 받으며 반가운 내색을 하던 강 대리가 룸미러로 흘끗거리며 준섭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뒤로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준섭에게 말 한 마디 걸지 못하고 우식은 송백재로 차를 몰았다.
골목에 들어가기 전 과속 방지 턱을 지났을 때 준섭이 눈을 떴다.
“어디야.”
“저……,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준섭이 눈을 찡그리며 창밖을 바라다보았다.
“차 돌려.”
“네?”
“차 돌리라고.”
“오늘 공항 도착하시면 송백재로 바로 가신다고…….”
“안 가.”
준섭이 눈을 감으며 다시 머리를 뒤로 기대었다.
* * *
언제나처럼 비어 있는 집, 차가운 방, 습관적으로 누르는 오디오.
라흐마니노프. 간절한 기도의 종소리……. 심장을 눌렀다가 떼어 내는.
무거운 발을 끌면서 걸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멈춰 서서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소년 그림을 보았다.
그림을 받았던 날 우경이 문자를 보냈다. 잔뜩 취해서…….
‘연우경 씨가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온다면…… 아마 뺨을 후려칠 테니까.’
오만하게 말했었지.
송백재에서 갖는 일요일 저녁 식사에 처음으로, 명분 없이 참석하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해서 홀로 들어간 일식당에서 솥밥을 시켜 놓고서, 준섭은 수저 한 번 들지 않고서 옆에 둔 술잔만 거푸 비웠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블라우스를 입고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우경이, 선명했다가 흐렸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준섭은 눈을 부비고 고개를 흔들었다.
‘알아? 네 눈. 나를 볼 때 어떻게 변하는지?’
‘CS만 아니었으면.’
‘TK 로비만 아니었다고 해도 모르는 척 그날.’
호텔 방에서 들었던 우경의 날카로운 비난이 생생하게 다시 귀에 꽂혔다.
‘처음부터 한 번 자고 싶은 여자, 그것뿐이었잖아요!’
그랬나, 처음부터 그래서 그렇게 데려오고…….
그날 솥밥을 먹고서 우경을 데리고 집에 들어서서…….
이쯤이던가.
준섭이 그림 속 소년과 눈을 맞췄다. 미래가 없는 소년이 비어 있는 눈동자로 준섭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꼭 버려진 아이 같아…….’
우경이 소년의 머리라도 쓰다듬을 듯이 손을 뻗었다.
‘내가 널 과소평가했지. 이 상황에서 한가하게 그림 감상을 할 줄이야.’
제가 했던 말이 화살이 되어 가슴팍을 찔러 들었다.
‘후회할 겁니다.’
‘왜요?’
‘내가 좀 뻔뻔합니다.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준섭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제 그만하자……. 그만.
침실로 향하는 길에 한 번 더 멈춰 서서 준섭은 공항에서 우경이 말했던 구부러진 시간의 모양을 흉내 내었다. 허공에 물방울 모양 원을 그리고 그 위로 선을 쭉 그으며 자조했다.
너는, 곧게 뻗어 나가고.
나는 구부러진 이곳에 갇혀.
후회하겠지. 매일.
괜찮다.
후회 같은 건 전문이야.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맴도는 것도.
그러니 한 번쯤 더.
괜찮다.
그러다 보면, 익숙해질 테니.
* * *
“홍보실에서 다음 주부터 한 명 임시로 오신다면서요?”
양지은 비서가 용원에게 말을 걸었다. 며칠 사이 몰리는 일 때문에 켜켜이 쌓인 피로감이 최 과장의 다크서클에 진하게 배어 있었다.
“네에.”
답하는 목소리에 감기 기운도 묻어났다.
“아니, 그런데 연우경 팀장님이요. 어떻게 그렇게 말도 없이 안 나오죠? 독감 나으면 나올 줄 알았지, 이렇게 갑자기…….”
“말도 없이가 아니라, 파견직이니까 회사 간 계약이 그렇게 되었대요. 마무리하고 인사할 타이밍에 독감이라 못 나온 거고, 그사이에 연장될 줄 알았는데 뭐가 꼬였나 봐. 양 대리도 알잖아요. 전부터 전기본에 기밀도 많은데 왜 파견직을 두냐고 정기적으로 컴플레인하던 임원분들도 계셨으니까요. 본부장님 출장 간 사이에 뭔가 내부 방침이 정해졌나 보죠.”
“그래도 그렇지. 저는 당연히 연장되거나, 임원분들 말씀대로 기밀이 문제라면 정직원으로 채용할 줄 알았어요. 이렇게 하루아침에 넘 어이없어서.”
“나는 어떻겠어요. 진짜 눈앞이 캄캄. 일은 쏟아지고 본부장님은 신경 곤두서 있고.”
최 과장이 제 머리를 뜯는 시늉을 했다. 양지은 대리가 닫힌 본부장실 문을 살피고는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그런데, 본부장님은 왜 그러세요? 얼굴 완전, 1주일은 앓은 사람 같아요. 저런 모습 첨 봐요. 원래 울 아버지 식으로 표현하면 ‘소도 때려잡겠다’ 싶게 에너지가 넘쳤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병약예민미라니까요.”
“네? 아파 보이시진 않는데?”
“말이 그렇다고요, 병약미, 예민미.”
지은이 못 알아들었으면 관두라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요즘 일부러 홍삼정과 같은 걸로 간식 넣어 드리는데 손도 안 대시고. 칼끝같이 신경은 예민해져서요.”
양 대리가 양손 검지를 쭉 뻗어 뿔처럼 만들고는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완전 살얼음판이에요. 연 팀장님이라도 있음 숨통이라도 트일 텐데. 어후……. 연 팀장님이 본부장님 비위 짱 잘 맞췄잖아요. 생글거리면서 할 말은 다 하고. 연 팀장님 계약 연장 안 돼서 더 열 받으셨나? 본부실 직원인데 본부장님 결정보다 윗선 결정이라면서요.”
최 과장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런 자잘한 걸로 신경 쓰셨음 이미 본부장님 신경줄은 남아 있지도 않겠네. 글로벌 전략 회의 같은 큰 행사 앞두고 있으니까 그러시겠죠. 송백재에서도 계속 챙기시는 눈치고.”
“아니, 아니에요.”
양 대리가 손을 저었다.
“다른 거 있나 봐요. 소문인가 했는데 맞나 싶기도.”
“네?”
지은이 아예 최 과장 귀에 대고 손으로 소리를 막으며 속삭였다.
“그게요, 특급 비밀인데요.”
“뭐.”
“그게……. 이번 출장에서 U전자 회장 아드님 결혼식이요. 거기 초대받아 가셨잖아요. 근데 거기서 선본 게 잘 안 됐나 봐요.”
“으응? 선? 결혼식에서?”
최 과장이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눈을 끔벅였다.
“피로연장에서 우연처럼요. 당일 지나고 참석자 쭉 공개되면서 돌았던 이야기예요. 중요한 여자분이.”
지은이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말했다.
“그……. 아세요? 최운 집안?”
최 과장이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은을 보았다.
“에효.”
양지은 대리가 답답한 듯 숨을 내쉬고는 그냥 모르는 걸로 하라는 식으로 손을 저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지은에게 최 과장이 말했다.
“뭐, 왜 말을 하다가 그냥 가요?”
“본부장님 간식 드리러 가려고요. 이번에는 왕창 달게 유자차 드릴래요. 활력 돌아오시라고.”
탕비실로 가며 지은은 아무래도 최 과장이 본부장님 최측근 라인으로 편입된 건 최 과장 조상님의 은덕이라고 생각했다. 눈치로 줄 탈 위인은 절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 * *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내일 사무실로 갈게요.]
우경의 문자에 에이블 대표 소운이 답했다.
[됐어. 내친김에 이번 주 쭉 쉬어. 빨리 나아!]
핸드폰을 내려놓고서 우경은 다시 상념에 잠겼다. 앓는 동안 크리스마스가 지났고 며칠 있으면 한 해도 끝이다.
우경은 동경에서 돌아온 이후로 본부실로 출근하지 않았다. 계약은 아직 사흘 더 남아 있었다. 유인목 실장에게 일요일 저녁에 전화를 걸어 독감 때문에 회사를 출근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사정 설명을 했다. 유 실장에게는 개인 계약은 더 연장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도 거듭 밝혔다.
우경의 의견이 존중되어서는 아니겠지만, 원하는 대로 우경의 개인 계약은 종료하고 에이블만 TK 홍보 관련 계약을 연장했다.
독감은 핑계였지만, 일요일 저녁부터 지난 며칠간 우경은 독감을 앓는 것 이상으로 아팠다. 열이 펄펄 오르고 아무것도 삼킬 수 없을 만큼 목이 부었다. 부어오른 편도뿐 아니라, 물조차 삼킬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밤에 탈진하여 응급실 신세를 지기도 했다.
쥐고 있던 모든 걸 일시에 놓은 사람처럼 우경은 맥없이 앓고 또 앓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낮과 밤은 꼬박꼬박 바뀌어 날짜는 어김없이 지나고 있었다.
평소 병치레를 하지 않는 건강 체질이라, 엄마의 걱정은 태산만큼 높아졌다. 응급실에서 피를 잔뜩 뽑아 모조리 검사를 했는데도 영 미덥지 않아 하며 매일 동네 병원으로 끌고 가 기어이 침대에 눕히고 영양제를 맞혔다.
“네가 너무 무리하더라. 하루걸러 야근에 급한 주말 출장에. 아이고, 동경에서 눈도 홀딱 맞고 돌아다녔다며. 그러니 이 사달이 났지. 잘됐어. 이참에 푹 쉬고 엄마랑도 놀자.”
아이도 아닌데 우경을 데려다주고 또 데리러 오면서 엄마가 거의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오늘은 엄마 소원대로 엄마와 점심을 사 먹고 커피 전문점에 가서 창을 향해 놓여 있는 기다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시간이 참 잘도 가지.”
엄마가 전면 창 너머로 도로가 가로수를 가리켰다.
“플라타너스 나무잖아. 잎이 무성하던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해가 끝났어.”
엄마의 말을 들으며 창밖을 보던 우경의 눈에서 갑자기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는 창밖만 보느라 알아채지 못하신 눈치였다.
커피 전문점 전면 창 앞으로, 젖은 머리칼을 하고서 우경에게 뛰어오던 준섭이 떠올랐다.
‘세이프’
숨을 몰아쉬면서도 활짝 웃던 얼굴이,
‘연우경, 너 꼬시려고.’
단순한 직구 같은 선언이…….
그 기억들이 숱한 노력과 다짐을 깡그리 부수며 다시 우경을 슬픔에 빠뜨렸다.
우경은 머그잔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길바닥에 죽은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눈과 같이 얼어붙어 있었다.
끝나 버린 사랑의 시체 같은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 * *
유인목 실장이 일어서서, 책상 앞에 둔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우경이 다가가자, 뒤에 있는 미니 냉장고를 열며 물었다.
“주스?”
“네, 감사합니다. 실장님.”
싱싱한 과즙이 터지는 오렌지 그림이 그려진 주스 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실장이 물었다.
“독감은 다 나았어요? 얼굴이 반쪽이 되었어요.”
“이제 괜찮습니다.”
유 실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글로벌 전략 회의 말이에요. 이제 곧 시작이죠.”
준섭과 연관된 단어만 나오면 아무리 두터운 가면을 쓰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 우경은 억지로 태연한 미소를 만들어 순식간에 투명하게 녹아내리는 가면을 다시 덮어쓰려 애를 썼다. 유 실장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제 앞에 있는 보리 음료를 마셨다.
“전략 회의 관련해서 홍보 작업을 집중적으로 할 계획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워낙 중요한 행사이기도 하고 전자의 방향성을 공표하는 자리이기도 해요. 또 하나 더해졌죠. 태서우 부회장님 관련 이슈를 잘 봉합하고 태준섭 본부장님 체제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이미지를 주어야 합니다. 일단, 회의 개최 전 홍보 기사가 급해요. 보강된 가이드 보낼 테니 에이블 측에서 구체적인 내용 수정해서 보내 주세요.”
우경이 저도 모르게 맞잡은 손을 힘주어 쥐었다. 준섭의 이름만으로도 몸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에이블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 있도록 하겠습니다.”
용건을 마쳤는데도 유 실장은 잠시 그대로였다.
“그런데……. 음……. 아니에요.”
무언가 물어볼 듯이 하던 유 실장이 자리를 마무리하며 일어섰다.
“점심 식사 같이하면 좋을 텐데 갑자기 약속이 잡혔어요. 미안해서 어떡하죠, 점심시간 다 돼서 불러 놓고서.”
“아닙니다. 실장님께서 안 된다고 하셔서 양 대리와 같이하기로 했습니다.”
“아, 전기본 양지은 비서?”
“네.”
“양 비서가 연 팀장 갑자기 안 나온다고 울상이었어요.”
팀장니이이임. 하는 하소연이 담긴 부름으로 시작하던 지은과 통화를 떠올리며 우경이 미소 지었다.
“오늘 홍보실에서 한 명 본부실로 갔고요.”
“아……. 네.”
우경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시선을 피했다.
“양 대리 어디서 보기로 했어요? 본부실로 가요?”
“아, 아니요. 로비에서 연락하기로 했어요.”
“그래요, 그럼 같이 내려갑시다.”
유 실장과 같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우경이 로비 데스크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연락할게요. 점심 잘 먹어요.”
유 실장이 정문 쪽으로 간 후에, 우경이 양 대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는 로비 앞이에요. 이제 홍보실에서 내려왔어요. 점심시간이 좀 지났죠. 미안해요.]
지은에게서 기다렸다는 듯 바로 톡이 왔다.
[아뇨, 안 그래도 본부장님이 방금 나가셔서요, 저도 이제 엘리베이터 타러 가는 중이에요.]
우경이 메시지를 읽고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준섭은 지하 주차장을 주로 이용하지만, 바쁜 점심시간에는 지상으로 차를 대기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마주치기 싫어, 화장실이라도 들어가려 급히 이동하다가 우경은 걸음을 멈췄다.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제일 앞에 서 있던 준섭과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볼 수도 있다고 예상했던 우경은 숨이 막혔는데, 준섭은 잠시 확인하듯 눈을 찡그린 것 외에는 없었다. 심상한 표정으로 눈인사를 건네고 뒤따르는 전자 임원진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속도를 멈추지 않고서 우경을 스쳐 지나갔다.
우경의 초라한 시선은 그 끝에 풀이라도 발라 놓은 듯 준섭의 등에 붙어 있었다. 회전문을 통과하는 뒷모습을 길게 바라보다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 실장을 발견했다. 번쩍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마침 걸려 온 양 대리의 전화를 받으며 우경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혹시 준섭을 쳐다보는 허기진 시선을 알아챘을까.
이미 단정하게 마음을 정리한 남자와는 다르게 너절하게 흐트러져 버린, 불쌍하고 비참한 마음이 그 시선에 드러났을까.
아니, 그 남자는 이런 나를 다 알아챘을까.
우경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 * *
밤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다. 늦은 퇴근이 새롭지는 않지만 유달리 몸이 곤죽이 된 느낌이다.
태준섭의 아침와 오전, 오후와 저녁 그리고 밤, 매일매일이 특별히 달라진 바가 없다. 거대하여 벽같이 느껴지는 바위를 향해 늘 몸을 부딪치며 조금씩 조금씩 밀어내고 때론 버티고, 가끔씩은 밀리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 왔다. 물론 최근 1주일은 글로벌 전략 회의 때문에 업무량이 절대적으로 많고 긴장감은 평소보다 높았다.
그러는 중 가장 다행인 점은 최하영의 적절한 방식의 거절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보게 되어 반갑게 인사하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워낙 보는 눈이 많고 참석자 모두 중요한 분들이라 둘이 시간을 오래 보내기는 불가능했고, 태준섭은 매너가 좋았던 것 외엔 특별한 점은 없었다. 태준섭을 한 번 더 만나 봐도 좋겠지만, 그 전에 이섭 역시 가능하다면 선 외의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한다.
자칫하면 사촌 간에 저울질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부드러운 전달 방식 때문인지 별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공식적으로 태준섭과는 우연한 만남이기에 가능한 요구였다.
최하영은 알려진 예정과 달리 교수님과 준비해야 할 출판 작업 일정을 핑계로 서울에서 이틀만 머무르고 독일로 떠났다. 내심 불안해했는데 송백재는 그런 결과에도 흡족한 눈치였다.
출장에서 돌아온 월요일부터 우경의 책상은 비어 있었다. 공식적인 결근 이유는 독감.
‘이런 식으로 나를, 단번에 완전히 끊어 내는구나.’
준섭은 끊어진 자리가 새삼스레 아렸다. 우경의 빈자리를 스칠 때마다 되도록 보지 않으려 정면만 바라보며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무의식적으로 늘 숨을 참게 되어 본부장실 문을 열 때면 한숨처럼 막혔던 숨이 터지곤 했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며 준섭은 우경의 자리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컴퓨터 모니터가 켜져 있었다. 혹시, 설마……. 심장이 너무 뛰어 다리까지 쥐가 일어난 듯이 저려 왔다. 모니터 모서리를 잡으며 침착한 얼굴을 애써 만들고 있는데 본부실 문이 열렸다. 누군가 준섭을 향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본부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강민경입니다.”
“아…….”
준섭이 불쾌한 듯 빤히 쳐다보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혹시…….”
“아닙니다. 유 실장님한테 들었어요. 이제 기억났네요. 미안합니다.”
준섭은 목례를 하고서 본부장실로 곧장 들어갔다.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스스로를 책망하고 답답해하고 그러다가 두통이 일 정도로 신경이 곤두섰다. 회의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위해 나가던 중, 거짓말처럼 로비에서 연우경을 보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색하게 굳어지는 우경의 얼굴이나 낭패스러운 표정이 환영도 착각도 아닌 현실임을 알려 주었다.
한 번쯤은 우연히 만날 거라고 예상했었다. 에이블 연우경 팀장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있으니 곧 회사에 올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예상으로 어리석은 위로를 하고 있었던가 보다. 그 한 번이 현실이 된 순간, 연우경을 완전히 잃었다는 사실이 각인되었다.
현관문 앞에 서서 준섭은 차가운 철문에 손을 대고 아래로 쭉 미끄러뜨려 내렸다. 한 번, 두 번, 무의미한 동작을 계속하다가 전자키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머리 위로 노랗고 동그란 빛이 퍼져 내려온다.
우경을 데리고 들어올 때면 언제나 마음이 급했다. 신발을 벗기 전 약간씩 머뭇거리는 우경을 보면 입이 바싹 말랐다. 그래서 늘 현관에서 붙들고 키스를 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매번 깊이 입을 맞추고 마른 입술을 적셨다.
준섭이 서두를수록 우경은 움츠러들었다. 망설이는 마음과 물러서는 모든 움직임이 준섭의 불같은 갈증과 그 아래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을 날뛰게 만들었다. 관계의 범위나 깊이를 컨트롤한다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준섭은 처음부터 연우경에 한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준섭이 노란 불빛 아래에서 하아, 소리를 뱉으며 웃었다.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구두를 벗고 취하지 않았음에도 약간 비틀거리면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드레스룸에서 코트를 벗다가 준섭은 클로젯 안쪽에 걸려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무채색 가운데에 걸려 있는 옅은 푸른빛과 상아색, 오렌지빛은 사막에 핀 원예용 꽃처럼 어색했다. 준섭이 꽃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동경 호텔의 마크가 찍힌 봉투가 하나 붙어 있었다.
[체크아웃 이후에 클리닝이 완료되어 두고 가신 의류입니다. 혼선이 있어서 좀 더 빨리 연락드리지 못한 점을 깊이 사과드립니다. 아울러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분실물이 있을 경우, 배달 서비스를 원하셨기에 의류를 소포로 보내 드립니다.]
우경의 옷이었다.
그 일요일, 공항에서 우경을 만난 후 준섭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공항 구석에 구겨지듯 앉아, 출장에 동행한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호텔 방에서 짐을 챙기고 호텔 체크아웃을 부탁했다. 서둘러 진행하느라 클리닝 서비스를 맡긴 옷까지 확인이 안 되었고, 준섭 역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야 서울에 도착한 옷을 집 안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가 클로젯에 걸어 둔 모양이다.
그 옷을 입고서, 너무 눈부셔 쳐다보기도 싫었던 호텔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흠뻑 젖은 채로 서 있던 우경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다른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홀로 우두커니 서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추위에 몸을 떨고 어깨를 움츠리며, 우경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우경의 코트를 향해 다가가는 준섭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닿으면 솜사탕처럼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코트가, 아니, 애써 얼음처럼 굳힌 준섭의 마음이……. 아니, 어쩌면 준섭의 손이, 팔다리가, 가슴이, 이대로 허물어져 녹아내릴 것 같았다.
준섭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달리기를 한 것도 아닌데 숨이 차올랐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슈트를 벗어 바닥에 던지고 목을 조르는 타이 매듭을 끌러 내렸다. 고개를 돌려 우경의 옷을, 외면했다.
도망치듯 드레스룸에서 나와 침실로 가는 동안 깊은 물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 덩그러니 놓인 침대 위에 불도 끄지 못하고 무너지듯 누웠다. 우경이 이 집으로 올 때면 누웠던 자리에 차마 손을 뻗지 못해 눈으로만 더듬었다.
악몽이 준섭에게 준 깨우침이 있다면 기억은 흐르는 시간의 매듭과 같은 것이라는 점이었다.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는 시간은 누구도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기억은 그 시간에 매듭을 지어 주인을 단단히 옭아맬 수 있다. 그래서 기억의 매듭 속에서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다.
고통의 기억은 죄수의 발목을 채운 쇠고랑과 같아, 기억이라는 게 차라리 말라 버렸으면 태워져 날아갔으면, 소원해도 소용없다. 피부가 벗겨지고 진물이 흐르는 발목을 절뚝이며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엔 익숙해져 견뎌 낼 뿐이다.
그래서 준섭은 아무것도 소원하지 않는다. 늘 그렇듯 기억의 매듭에서 준섭이 구출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다만 시린 눈을 뜨고 기억을 응시할 뿐이다. 조금도 흘러가지 않는 시간을 묵묵히 견뎌 내는 수밖에 없다.
기왕이면 오늘은, 웃는 기억을……. 우경이 웃는 기억을…….
따스함을…….
아니.
준섭을 만나기 전 우경을,
상처받지 않은, 온기를 빼앗겨 추위에 떨고 있는 우경이 아닌,
‘이름 뭐예요?’
거리낌 없이 묻던 우경을.
상상으로만 들여다본 우경의 단란한 가정, 작고 따뜻한 거실, 엄마 아빠와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면서, 크게 소리 내어 웃는 우경을.
행복하길. 그 모습 그대로.
나와 보냈던 시간의 매듭 따위 너에겐 존재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