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서 그런지, 선애는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이섭의 방으로 바로 올라갔지만, 이섭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주방으로 내려가 미지근하게 온도를 맞춘 물을 천천히 마시고 나서, 정씨에게 물었다.
“이섭이가 방에 없던데 뭐라도 먹고 나갔어요? 내가 좀 늦게 일어났네.”
“안 그래도 상무님이 사모님께 전해 달라고 했어요. 오늘 골프 약속 전에 호텔 들러서 사우나하고 가려고 좀 일찍 나간다 그랬습니다. 7시 못 되어서요. 아침 차렸는데, 미역국은 다 비웠습니다.”
“골프? 오늘 날씨 골프 치기에 춥지 않을까? 어제보다는 좀 나으려나 모르겠네…….”
선애가 핸드폰을 열어 기온을 확인하자, 정씨가 싹싹하게 답했다.
“그래도 올 겨울은 지난해에 비해 덜 추워서요. 어제보다 기온이 올랐다고 뉴스에서 들었어요.”
“그래요. 하긴, 작년에 비해선 덜 춥네.”
“사모님, 아침은 지금 준비할까요?”
“나, 소화가 잘 안되네. 미역국만 한 그릇 줘요.”
“네, 방으로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식탁에.”
선애가 들고 있던 조간신문을 펼치며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신문을 테이블에 놓고서, 눈으로 기사를 훑으며 선애는 깔깔한 입속으로 국을 조금씩 떠먹었다. 반도 못 먹었는데 도저히 속에서 받아들이지를 않아,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당이라도 한 바퀴 돌고 들어오면 갑갑함이 풀어질 듯했다.
두툼한 카디건에 목도리를 두르고 마당에 내려서던 선애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분명 들이켜는 숨에 찝찔한 화학 약품 탄내가 들어왔다. 어디서 뭘 태웠나……. 선애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 정씨를 불렀다.
“마당에서 냄새 나는데, 어디 뭐가 탔는지 한번 확인해 봐요. 외부 전열 기구나 전선 확인하고요.”
정씨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급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선애가 다시 식탁에 앉아 신문을 한 면을 다 읽었을 때, 정씨가 들어오더니 뜻밖의 말을 전했다.
“사모님, 혹시나 해서 전열 기구랑 전기선을 다 살폈는데 합선이나 타는 건 없습니다. 뒤져 봤더니 뒷마당 쪽에 낙엽 모으는 통이요. 거기였어요.”
“누가 낙엽 태웠어요? 냄새가……. 낙엽이 아닌데.”
“그게, 다른 것도 같이 탔나 봐요. 최 과장이 어젯밤 낙엽 모아서 버렸다고 했으니, 아마 그 이후에……. 다들 모른다고 하니, 혹시 상무님께서 뭘 소각한 게 아닐까 싶네요.”
“이섭이가 뭘 태웠다고? 왜 그랬지? 나가서 그거 좀 봐야겠다.”
선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정씨가 곤란한 듯 말했다.
“안 그래도 찾았는데, 이미 치웠네요. 좀 전에 마당 정리하면서 쓰레기 비워서 배출했다고 그래요. 말로는 타다 남은 조각 봤을 때는 종이랑 사진 같았다고…….”
“사진?”
“사진을 보았던 건 아니고 그냥 탄 모양이 사진 같았다고 해요. 귀퉁이 약간 남은 거랑 크기가……. 냄새도 종이 말고 좀 다른 냄새도 났고 하니까. 확실하진 않습니다.”
선애가 미간을 찡그렸다. 사진, 사진을 왜 새벽에……. 정씨와 눈이 마주치자 선애가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아, 그건가 보네. 이섭이 성격 아시잖아요. 깔끔 떠는 거. 내가 얼마 전에 이런저런 행사 때 찍은 오래된 사진 같은 것들 버리기도 애매하고 해서 그 방에 뒀었는데, 잠 일찍 깨서 굴러다니던 거 정리했나 봐요.”
“아, 네……. 상무님 깔끔한 건 저희가 더 잘 알죠, 늘 방도 손대는 거 싫어하시고.”
“그래요.”
선애가 웃음으로 마무리를 하고는 돌아섰다. 이섭의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제 잔뜩 취해 들어와서는 ‘괜찮아요. 이 넓은 세상에 나 좋다는 여자 하나 없을까. 많아요, 많아. 많아서 처치 곤란.’ 실없는 소릴 하며 이섭이 웃었다. 그 모양새가 꼭 어디서 실연이라도 당한 녀석 같았다. 최하영과 틀어진 일 때문에 상심이 컸나 했는데 사진이라니……. 술 취한 밤에 대체 급하게 태워 없앨 사진이 뭐였을까 싶다.
* * *
선애는 이섭을 잘 알고 있다. 딸보다 더 살갑게 구는 아들은 어릴 때부터 선애와 상성이 잘 맞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감정이나 상태를 금방 알아챌 수가 있었다.
이섭의 책상 서랍 깊숙한 곳 책 사이에 끼워 둔, 가장자리가 타다 만 사진을 발견한 순간, 선애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준섭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평범해 보이는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선애는 준섭의 비밀 연애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반쯤만 나온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준섭에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선애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환하게 웃는 사진 속의 여자를 떠올리려 애썼다.
분명 본 얼굴. 아……. 파견직. 전기본 파견직.
지윤을 만나 수진을 위한 케이크를 받던 날에 호텔 베이커리에서 우연히 보았다. 준섭에게 줄 초콜릿을 사고 있던 직원이었다.
이걸 왜, 이섭이……. 그럼 태웠다는 사진들은 다 준섭이와 여자애, 얘들 사진……?
이런 스캔들이라면 최하영과 준섭의 결혼 진행에 분명히 타격을 입힐 수 있는데, 왜 이걸 굳이 새벽에 태웠을까…….
혹시……. 선애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사진을 쥐고 이섭의 침대 위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이섭이가 저 직원을 잘 알더라고. 이섭이 원래 여자들한테 은근히 선을 긋잖아? 답지 않게 사적인 느낌이 들게 말해서 더 유심히 봤지. 얼굴이 상했다면서 전기본 힘들지 않냐고, 얼굴 상한 거 보니 죄책감 느낀다던가? 파견직이라던데 이섭이가 전기본에 넣었나 봐? 올케야 턱도 없겠지만, 난 원래 눈이 낮아서 그런가 저 정도면 우리 아들이 좋다 그럼 쌍수 들고 환영할 거 같아.’
지윤을 만났던 날, 지윤이 그 직원에 대해 덧붙인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도 찜찜했는데 이섭이 최하영을 두고서 회사 직원과 사적인 관계를 가질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만 전기본 비서실을 통한 정보 수집 차원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겼다.
선애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얘가 얘가……. 이섭이와 준섭이 사이에서 저울질을 했어?
이섭의 침대 옆 바닥에는 마시다 만 와인병이 놓여 있었다. 잔도 없이 홀로 이 침대에 앉아, 와인 병을 들이켜는 이섭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새벽에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뒷마당에 홀로 앉아 어떤 마음으로 사진을 태워 버렸을지……. 어떤 마음으로 여자애가 웃고 있는 사진을 차마 다 태워 버리지 못했을지.
까마득히 먼 지난날, 그러나 너무 생생한 아픔으로 남아 있는 그날, 마당에서 제가 작성했던 기사들을 태우고, 남자와의 편지를 태우던 선애 자신이 이섭과 겹쳐지자 머리가 쇠망치에라도 두들겨 맞은 듯 일시에 모든 사고가 정지하는 기분이었다.
서희의 아들이, 이렇게 이런 식으로 또…….
주말 아침, 제대로 차려입지도 않고 급히 송백재로 뛰어든 선애를 바라보는 고용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선애는 송백재 서재로 들어서면서도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폭죽을 삼킨 것처럼 속에서 무언가가 펑펑 깨지고 터지고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애미 왔나.”
초조하게 사진 모서리를 손끝으로 문지르고 있던 선애가 고개를 드니, 서재 안으로 태시환 회장이 들어섰다. 선애는 아버, 님. 채 다 부르지도 못하고 숨을 멈췄다가 다시 몰아쉬었다.
* * *
창이 뻑뻑한 마찰음을 내면서 열렸다. 겨울에는 창을 밀어 여는 데 조금 더 힘이 드는 기분이다. 차가운 바람이 일시에 방으로 밀려들어 왔다. 우경은 그대로 창가에 서서 깊이 숨을 들이켰다. 꽉 막혀 있던 속이 조금 시원해졌다.
주방에서 물을 따라 마시면서 엄마로부터 온 새로운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새벽녘에 들으신 부모님께서는 해남으로 내려가시는 중이다. 굳이 우경까지 갈 필요는 없다며 출발하고 한참 뒤에 전화로 상황을 알려 주셨을 뿐이다.
우경은 되도록 조금 더, 잠을 자고 싶었다. 깨는 순간 시작될 생생한 고민과 아픔이 꼬리를 무는 의심과 상상이, 두려웠다. 마음처럼 늦잠을 자진 못했지만, 생각에 잠기기 전에 몸을 재게 움직이기로 했다. 우경은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걸이로 움직여 백설이 밥을 챙겨 주고 산책을 나갔다. 백설이는 뛰고 우경은 그런 백설이를 따라 빠르게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했다.
산책을 마치고 오는 길에 평소 다니는 동물병원에 들러 백설이 목욕을 맡기고 우경도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그런 후에 별다른 이유 없이 꼼꼼하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공들여 말렸다. 위이잉 울리는 드라이어 소리가 없어지자, 급작스런 적막감이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불안감을 부추겼다. 익숙한 공간에서 홀로 남아 침잠하는 시간을 피하고 싶어,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고서 훌쩍 어딘가 여행을 떠나 볼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핸드폰 트래블앱을 열어 국내 여행지를 주르륵 넘겨 보고 있는데, 전화가 들어왔다. 연락처가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네.”
- 연우경 팀장이시죠?
예의 바르고 단정한, 그렇지만 몹시 사무적인 음성이었다.
- 송백재에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이후로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머리가 얼얼했다. 겨우 입을 벌려 무어라 답하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인터폰 화면으로 핸드폰을 들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 * *
지나치다 싶을 만큼 크고 넓은 공간이었다. 회사 집무실이라기엔 부드럽고 집 안의 서재라기엔 사무실 같은 분위기였다. 백자와 청자, 사진들과 책으로 채워진 책장의 딱딱한 분위기를 중화시키는 것은 반대편 벽에 붙은 고즈넉한 동양화와 관엽수 화분들이었다. 식물의 넓고 푸른 잎사귀와 그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공간에서 느껴지는 유일한 생동감이었다. 커다란 책상 외엔 따로 앉을 자리도 없는 곳에서, 우경은 가만히 서서 잎사귀의 싱싱한 잎맥을 세듯이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퍼뜩 돌려 보니, 사진으로만 봤던 태시환 회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사진보다 조금 더 여위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특유의 반듯한 자세와 꼿꼿한 느낌은 상대를 저절로 긴장시킬 만큼 선명했다. 우경이 몸을 굽혀 인사했지만, 회장의 답은 없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는 걸음걸이로 느리지만 정확하게 움직여 태시환 회장이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제서야 문가 근처에 서 있는 우경에게 시선을 주더니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다가선 우경을 보며 회장이 무언가 못마땅한 점이 있는지 눈매를 찡그리고는 책상에 붙어 있는 부저를 눌렀다. 마치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던 듯, 고용인이 바로 들어왔다.
“네, 회장님.”
“의자 하나 갖고 와 봐라.”
우경이 괜찮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의자가 서재로 들어왔다. 의자를 들고서 멈춰 서 있는 사람들에게 회장이 손을 들어 책상 정중앙 맞은편으로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그러고선 우경을 향해 말했다.
“앉아라.”
“감사합니다.”
우경이 자리에 앉는 동안 회장의 시선이 내내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 놓았는지 우경의 앞으로 파일 하나가 놓여 있었다.
“확인해 봐라.”
아무리 다잡아도 내장까지 떨렸다. 파일은 많이 넘겨 볼 필요도 없었다. 우경의 가족 관계, 부모님과 가까운 일가친척, 우경의 회사, 출신 학교, 살았던 곳들, 그간 해 왔던 일들이 정리된 파일이었다. 제일 마지막 페이지, 우경과 준섭이 같이 찍힌 사진까지 보고는 우경이 고개를 들었다.
“원래 저기에 응접세트가 있었다.”
회장의 손이 송치 러그만 덩그러니 깔려 있는 서재 중앙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여기에 들어오면 소파에 앉아서 가지를 않는 거라. 내가 힘에 부치면서 다 치우라고 했다. 다리 아프면 저절로 가고 싶어 하더라. 니는 특별 취급이다. 준섭이가 처음 가까이 한 여자니까.”
회장이 쿨룩 기침을 뱉어 냈다. 우경이 일어서 앞에 있던 티슈를 뽑아 내밀었다. 티슈로 입가를 누르고는 회장이 우경을 응시했다. 그 눈길은, 마치 우경의 정수리를 뚫고 그 뒤편에 있는 벽을 보려 하는 듯한 날카로운 것이었다. 우경을 뚫어져라 보면서 동시에 그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완전히 지워 버려 삭제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 * *
중국 W사의 보안 이슈가 대두되면서 새로운 기회로 열린 네크워크 사업은 TK전자의 현안이자 향후 미래 사업의 핵심 중 하나이다. 미미한 세계 점유율을 20%까지 상승시키겠다는 당초 목표에 일본 시장 역시 포함되어 있다. 실무적인 접촉이나 설명은 추후에 이루어지겠지만, 준섭의 일본 출장에는 일본 통신사 대표와 만남이 중요한 일정으로 잡혔다. 어제 일본 K통신사와 미팅에 이어 오늘은 D통신사 사장과 점심 약속이다.
준섭은 습관처럼 이른 아침에 눈을 떠 운동을 마치고 데스크에 앉아 점심 약속 장소를 확인하고는 이메일 회신과 같은 자잘한 업무를 처리했다. 네트워크 사업부에 요청했던 자료 파일을 열면서 준섭은 미간을 문질렀다. 출장에 오기 전, 태서우 부회장과의 일도 그렇거니와 몰아치듯 처리했던 업무 때문에 피로감이 가시질 않았다.
준섭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려, 한쪽으로 밀어 두었던 핸드폰 화면을 열었다. 목소리 한 번만 들으면 어깨에 매달린 피로감이 거품처럼 가벼워질 것만 같았다. 연우경. 화면에 띄워진 이름을 속으로 부르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첫 번째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풍선처럼 마음이 순식간에 둥 떠오른다.
열 번쯤 신호음이 울리는데, 우경은 좀체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신호음 횟수가 늘어날수록 마음이 조금씩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 바닥으로 뚝 하고 꽂힌다. 핸드폰을 내려놓는 손이 까닭 없이 초라해 보인다. 준섭은 자리에서 일어서 괜스레 어깨를 휘돌리며 걸어가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냈다.
차가운 생수를 들이켜자 한결 정신이 맑아졌다. 준섭은 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서 추가 요청한 RFIC(차세대 무선 통신 핵심 칩)와 5G 네트워크 장비에 대한 자료의 세세한 부분까지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집중했다. 기술적 내용은 추후에 해당 사업부 임원이 D통신사 임원진에게 발표할 계획이지만, 대표와 점심 식사에서도 준섭이 피력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점심 약속을 위해 주름 없이 다려진 와이셔츠를 입으며 준섭은 D통신사 대표와 나눌 대화를 상상했다. 예상되는 질문을 떠올리고 상대가 영어로 소통이 완벽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일본어로도 대답할 내용을 중얼거리면서 와이셔츠 단추를 마저 채우고, 양복을 입었다. 거울을 보면서 타이 매듭 위치를 바로잡고 머리를 매만진 후에 책상에 엎어 두었던 핸드폰 화면을 또 확인했다. 몇 가지 알림 표시와 메시지가 있지만 우경으로 부터 온 것은 없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준섭은 우경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메시지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써야하나……. 전화 받아, 연우경. 이어지던 신호음이 끊어지고 이쯤에서 안내음이 또 나오려나 싶어 포기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여보세요?”
통화 진행 중이라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준섭이 다시 물었다.
“안 들려요?”
- 아……. 들려요.
우경이 그제야 한 박자 늦게 답을 했다.
“뭐 하고 있어?”
- 음……. 그냥.
“밖이야?”
- 어디 잠시 나왔다가……, 집으로 가는 중인데.
“통화하기 불편해요?”
- 아니요. 괜찮아요.
주변 신경을 쓰는지 평소보다 작고 낮은 음성으로 우경이 말했다.
“나는 이제 점심 약속 나가려고.”
- 네……. 일본 어때요?
“비슷해. 온도도 비슷하고. 좀 덜 추울 줄 알았더니 마찬가지네.”
- 오늘 밤, 동경에 눈이 온대요. 많이 올 거라는데…….
눈이 싫다는 준섭이 했던 말을 기억해서인지 우경의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저녁엔 내내 커튼 닫고 룸에 처박혀 있을 거니까, 상관없어. 여름인지 겨울인지도 모르게 온도도 높이고.”
- 네, 네……. 따뜻하게.
“내가, 동경에만 있는 거 찾아봤는데.”
- 그래요?
“그래서 전화했어.”
- 네?
“내 목소리.”
- 아…….
어쭙잖은 농담인데, 그제야 우경이 약간 웃었다.
- 선물이에요?
“응.”
- 고마워요.
“응.”
- 목소리, 많이 듣고 싶었어요.
농담에 맞춰 주는 답일 텐데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못 견디게 연우경이 보고 싶어졌다.
“일요일 밤에 봅시다. 공항에서 송백재 들렀다가 집으로 갑니다.”
- 저……. 본부장님 일 다 마치면, 저녁때쯤 전화 주세요. 할 말 있어요.
“지금 해도 되는데?”
- 제가 길게 말하기가 조금……. 지금은.
“아, 그래요. 그럽시다.”
- 끊을게요.
준섭이 답하기도 전에 우경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아……. 준섭이 손에 쥔 핸드폰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통화 내내 낯설게 구는 느낌인데 딱히 집어낼 만한 다른 점은 없었다. 과한 근심이다. 준섭이 고개를 저었다. 밖이라고 했으니 통화가 불편했겠지.
핸드폰을 쥐고 있는 우경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아무리 몸을 꼿꼿하게 세워 봐도, 입술을 아무리 깨물어도, 몸 한군데가 뜯겨 나간 것처럼 우경은 자꾸 고꾸라질 것만 같다.
송백재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승용차가 송백재가 있는 골목을 벗어나자 세워 달라고 요청했다. 입을 틀어막으며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헛구역질만 몇 번 반복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뒤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혼자 갈 수 있다고 거절하고 곤란한 내색을 하던 남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이에 무작정 택시에 올랐다.
무음으로 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어 준섭에게 온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면서부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턱 끝에 매달린 눈물이 툭, 핸드폰 화면으로 떨어질 때 거짓말처럼 다시 전화가 왔다. 티슈로 눈을 꾹꾹 누르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닦고,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키고서 전화를 받았다.
눈물이 차오른 눈을 깜박일 때마다 송백재의 서재가, 햇빛이 들어오는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은발의 태시환 회장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회장이 가느스름한 눈매로 우경을 비스듬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 딸, 서희는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 서희가 밤에 숨소리만 달라져도 내가 잠이 깼다. 종종 한숨도 제대로 못 자고서 이마를 짚어 보고 코 아래 손가락을 대어 봤다. 아무리 열이 올라도, 아무리 아파도 아프다 소릴 안 하는 거라. 기진해서 정신을 잃을 때야 아픈지 알았다. 내가 걔를 바닥에 내려놓지를 못하고 동동거렸다. 발만 차가워져도 감기에 걸리고 감기에 걸리면 폐렴을 앓고.”
회장이 마른침을 삼키느라 말라비틀어진 목울대가 움직였다.
“입이 짧아서, 뭐라도 먹여 볼라고 대령하지 않은 게 없다. 몸에 좋다는 건, 세상을 다 뒤져 다 끌어다가 먹이고 입히고. 열 살을 못 넘길 거라고 한 아이를 살려 내고 열두 살까지만, 열다섯까지만 살아다오. 스물까지만 살아다오. 스물이 지나면, 그러면 괜찮다 해서 매일매일 온갖 치성으로 키웠다. 그 애가…….”
회장이 여위고 마른손을 꾹 쥐어 관절이 불거진 주먹을 하고선,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병이 재발했을 때, 쥐가 들끓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거기서 준섭이만 최고급 사립 학교, 최고급 양복을 입고 최고급 악기에 최고 과외 선생님을 대는 사치를 내가 시켰다. 니가 보는 준섭이는 껍데기다. 그 껍데기도 속도 내가 만들었다.”
“회장님, 저는…….”
회장이 츳,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이 끝나믄 실컷 떠들어라. 여기, 그리고 저기.”
회장이 가늘고 길면서도, 끝이 부드럽게 휘어 예술가적 느낌이 주는 손가락을 들어 우경의 옆자리와 자신의 왼쪽 옆을 가리켰다.
“거기가 준섭이 자리다. 서서 반 시간이고 한 시간이고 내 말을 듣는다. 그리고 여기 바닥에 꿇어앉아서 안마를 한다. 알겠나, 준섭이 목줄은 내가 쥐고 있다.”
회장이 제 빈손을 쥐어 들어 보였다. 마치 그 손에 태준섭을 옭아맨 목줄이 있다는 듯이.
우경이 저도 모르게 속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서희가 팔목을 그었다. 결혼할 테니 그놈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비렁뱅이 새끼를 도륙 내지 못했다. 천 번을, 만 번을 후회했다. 결국 그 꼴로 죽을 내 딸……. 그때 그놈을 내가 죽였어야 했다.”
회장이 잔인한 말과 다르게 희미하게 웃었다.
“그놈이 죽고 준섭이가 저를 받아 달라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성도 버리겠다, 이름도 버리겠다, 받아만 달라……. 통쾌했다. 죽어 버린 서희도 비렁뱅이 그놈도 다……. 결국엔 나만, 이 태시환만 남아…….”
회장이 다시 기침을 뱉어 냈다. 이마께에 핏줄이 솟도록 고통스레 기침을 하더니 정돈된 얼굴을 하고서 선언했다.
“준섭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그 애틋한, 불쌍한, 내 딸. 서희도 버렸는데……. 그런 강아지 한 마리 못 내치겠나.”
회장이 팔을 뻗어 파일을 끌어 제 앞으로 가져가더니, 준섭과 우경이 찍힌 사진을 들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눈이 파르라니 분노에 잠겼다.
“사진 찍히는 줄 몰랐나?”
회장이 우경과 준섭이 찍힌 사진을 보며 차갑게 묻고는, 우경의 답이 필요 없다는 듯 이어 말했다.
“니는 몰랐어도 준섭이는 안다. 알고도 조심성 없이 길거리를 돌아댕겼다 이 말이다. 기가 막히고 괘씸해서.”
“아닙니다. 본부장이 알고도 그럴 사람은 아닙니다.”
회장의 분노가 준섭에게 꽂히는 일이 두려워 우경은 용기를 쥐어짰다. 어차피 끝까지 갈 수 없는 관계였는데, 우경으로 인해 지금까지 그 세월을 견디며 쌓아 온 모든 것을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저런, 저런. 이리 어리석은 소리를 하나.”
회장의 얼굴에 기쁨과 통쾌함을 담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최일문 교수의 딸, 최하영이다. 그 아이가 일본 U전자 사장 아들의 피로연에서 만나게 될 준섭이 배필이다. TK 지분을 상속받을 하영이는 우리 집안 자손과 혼인하기로 약조되어 있는데, 내가 이섭이가 아닌 준섭이를 선택했다. 내 선택을 준섭이가 더없이 잘 알고 있다. 석 달 전이던가. 더 되었나……. 최일문 교수 출판 기념회에 내가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찾아갔다. 준섭이를 데려가 인사를 시키려고 무리를 했다. 그런 이후로 최 교수 내외도 준섭이 쪽으로 기울었다 이 말이다.”
우경이 충격으로 고개를 저었다.
세 달 전? 그럼 우경이 TK로 오기 전이다. 이미 최하영과 결혼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세차게 부정하는 우경의 마음을 읽은 듯 회장이 활짝 웃었다.
“최하영도, 최하영의 지분도 준섭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무릎이 닳도록 기어서라도 제 걸로 만들어야 하는 기회란 말이다. 적장자인 이섭이도 노심초사 내 심기를 살피며 최하영이하고 결혼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는데, 그래. 이런 사진까지 찍으면서!”
회장이 손가락으로 사진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우경은 까뭇하게 타다가 만 사진의 가장자리를 보며 물었다.
“사진……. 태이섭 상무님이십니까? 그렇다면 회장님은 왜 이 사진만, 타다만 이 사진만 가지고 계십니까.”
“이거는 이섭이 애미가 가져왔다. 자초지종 들어 보니 이섭이는 이 사실을 다 알고도 내가 상심할까 봐 고민 끝에 사진을 다 없앨라 했다더라. 그런데, 준섭이 이놈은 감히, 나를 간을 봐? 본부장 자리 앉혀 놓으니 시건방이 들어서, 지가 뭐라도 된 줄 단단히 착각을 하나 본데. 여자랑 만나는 건 상관없다. 한데, 뻔히 사진 찍힐 줄 알면서 이따위로 군다고?”
아직 회장 앞에 놓여 있는 우경과 준섭의 사진을 보는 눈이 순식간에 분노로 번득였다.
“이런 쓰레기 따위.”
회장이 느릿하고 정확한 동작으로 사진을 반으로 갈랐다. 다시 한 쪽만 들어 반으로 가르고 또 가르길, 반복했다. 부욱, 종이가 찢기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형체도 없이 잘게 찢어진 조각을 바닥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실내용 구두로 짓밟았다.
“이런 시기에, 쓰레기라니…….”
회장이 날카롭게 웃었다. 웃는 입과 다르게 극렬한 분노가 휘도는 눈이 섬뜩했다.
“이 봐라, 니가 보는 태준섭이는 껍데기다. 법적으로 내 핏줄도 아이다. 아무 권리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강아지다. 강아지 한 마리가 이미 씹다 버린 고깃덩어리 다시 줍겠다고 주인을 배신한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씹다 버린 고깃덩어리…….
우경이 깨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저도 모르게 살점을 물어뜯었는지 피비린내가 끼쳐 들었다.
“말씀대로 본부장이 회장님을 배신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회장이 우경의 말을 끊으며 책상을 두드렸다.
“암, 암. 아무렴, 그러진 못한다. 그러는 날엔 내가 줬던 걸 몽땅 뺏고,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처박히게 만들 거니까.”
“회장님.”
우경은 회장을 부르고는 숨을 들이켰다. 송백재에 오는 동안 예상 가능한 상황을 떠올리면서 준비했던 말들이 낱낱이 깨어져 흩어졌다. 목구멍이 먼지로 꽉 막힌 듯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처박히게 만든다는 회장의 말에 거꾸로 추락하는 준섭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눈앞의 태시환 회장은 준섭을 사지로 몰아가는 일에 일말의 망설임이나 가책도 없을 사람이다. 우경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과한 염려를 하고 계십니다.”
“과한 염려?”
“본부장은 회장님의 뜻을 저버릴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우경이 책상 아래로 모은 손을 맞잡았다. 양손을 부서져라 움켜쥐는 것 외엔, 스스로를 버티게 하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회장이 쓰게 웃었다.
“서희도 어리석은 아이는 아니었다. 제 선택에 고집이 셌을 뿐. 준섭이도 그 고집을 피울까 내가 머리가 미리 아플 뿐이다.”
회장이 우경을 매끄러운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제 앞에 앉아 있는 존재가 애써 덮어 두었던 과거를 환기시키자 고통은 놀랄 만큼 생생하게 몸을 파고들었다. 회장이 이지적인 입매에 어울리지 않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35년 전에도 하나 있었다. 이래 반반한 얼굴과 잘난 몸으로 내 새끼를 홀렸지. 내가 35년을 후회했다. 내 새끼한테 빌붙어 피 빨아먹는 버러지 같은 것들일 뿐인데, 사람이라고 대우해 줬다.”
가늘어진 회장의 눈은 해묵은 분노로 일렁이고 노쇠하여 갈라진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었다.
“나는, 무서운 게 없다. 망설일 일도 없다. 이미 35년을 후회한 일이다. 그때 그 버러지를 방치했던 나를 죽이고 또 죽이면서 35년을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살았는데, 이제 또 같은 걸 반복하겠나? 두려울 것도 못 할 것도, 나는 없다.”
회장이 치켜올린 눈썹을 천천히 내리고는 파일에서 우경의 가족과 회사 정보가 기록된 페이지를 펼쳤다.
“아버지가 시인 출신 교장 선생님에, 꽤 보기 좋은 단란한 가족이던데……. 니가 인덕도 좋다. 에이블 대표가 전 직장 선배였나? 직장에서 만난 인연을 피붙이처럼 챙겨 주는 사람은 드물다.”
“회, 회장님.”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목에 칼끝이 겨누어진다고 해도 이보다 더 두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 딸, 부르며 웃어 주는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우경아 파이팅! 힘차게 응원하는 소운의 목소리가 긴장감으로 터질 듯한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아니라고, 그러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야 하나. 의자에서 내려서서 무릎을 꿇어야 하나. 생각은 넘치는데 몸은 얼어붙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일과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본부장과 제 일입니다. 그러니, 부당한 처사를…….”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술만 달싹이는데 회장이 그런 우경을 비정하게 쳐다보았다.
“부당? 계산법이 틀렸다. 니가 가진 단란한 가족이 소중하다면 태준섭, 내가 만든 그 아이, 서희가 주고 간 그 아이, 내 손으로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만들지도 말아야지!”
회장이 주름진 우경을 향해 손을 펼쳐 보였다.
“내 손으로 또, 서희를, 서희 아들을 버리게 되면, 몹시 괴롭겠지. 늙어서 메마른 가슴이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찢어지겠지. 그래, 그렇게 되면 니 역시, 나처럼 똑같이 괴로워해야 공평하지 않겠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한번 지켜 봐라.”
태시환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해 봐서 안다. 그거처럼 괴로운 일이 없다. 죽을 때까지 고통이다.”
“회장님! 회장님, 제발.”
회장이 잇새로 츠츳 소리를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전부 다, 너에게 달린 일이다. 내를 그리 애타게 부를 일이 뭐가 있노.”
회장의 손가락이 투툭 파일을 두드렸다. 그 손가락 아래 있는 아빠의 이름, 학교……. 글자들이 파도처럼 커지다가 일그러졌다. 우경이 고개를 젓다가 눈앞이 캄캄해져 고꾸라지듯이 머리를 숙였다. 공포심이 까맣게 몸을 태우는 것만 같았다.
우경이 이를 악물고 몸을 다시 꼿꼿하게 세웠다. 떨리는 음성을 감추려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발음했다.
“회장님, 거듭 말씀드리지만, 본부장은 회장님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제 동경에서 그분을 만나면 본부장은 저를 깨끗하게 정리할 겁니다.”
회장이 키득거리는 웃음을 짓고는 우경에게 말했다.
“내 하나만 물어보자. 니는 준섭이가 피로연에 최하영이 초대받은 걸 알고 동경 출장을 갔다고 생각하나, 모르고 갔다고 생각하나.”
우경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자 회장이 답을 주었다.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다. 글로벌 전략 회의에 전기본 명운이, 전기본을 이끄는 준섭이의 입지가 달렸다. 그걸 앞두고 할랑하게 동경 출장 3박 4일? 그래, U전자 사장 아들의 혼사에 누가 초대받았는지 공개된 적은 없다. 근데 태시환을 등에 업고 있는 태준섭이 모를 정보가 있을 거 같나?”
회장이 손가락을 둥글게 맞물려 딱, 하고 튕겼다.
“이렇게 손끝만 튕겨도 세상 모든 정보는 준섭이 코앞으로 떨어진다. 내가 쥐여 준 권력이다. 준섭이는 다 알고도 모르는 척 갔다.”
“그럴, 그럴 리는……. 본부장이 그런 사람은.”
보고 싶을 거라며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동경에만 있을 특산품을 사 오겠다면서 전화를 했던 준섭은 그럼 뻔뻔하게 우경을 기만한 것일까, 아니면 우경은 처음부터 준섭에게 그런 존재밖에 안 되었던 걸까.
흔들리는 우경의 눈을 읽으며 회장이 검지를 세워 좌우로 까닥까닥 흔들었다. 그 검지로 우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보란 듯이 사진 찍힌 녀석이다.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동경 출장을 왜 갔겠나? 니를 기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태시환을 기만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니가 제대로 굴어야지.”
우경이 뜻밖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 저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회장이 탁탁탁 답답하다는 듯 책상을 두드렸다.
“준섭이는, 동경 피로연에서 최하영을 만나서 제 선에서 혼인 가능성을 끊어 내려고 갔다 이 말이다. 이섭이가 준비한 사진을 뿌려 주면 좋겠다, 속으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하영은 그런 식으로 끊어 내고, 내가 다른 혼처 들이밀면 뿌려진 사진을 역으로 이용해서 이리저리 피할 계획이겠지. 그놈이 치밀하고 머리가 좋아서 말이다.”
회장이 제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끔 여기, 내 머리꼭대기에 앉을라고 하는데. 제법 그놈이랑 겨루는 재미가 있다.”
회장이 우경을 향해 우아하게 양손을 벌려 보였다.
“자, 니가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노? 너 하나 치우는 건 손가락 하나 드는 것보다 간단한데, 내가 왜 니를 불러 대체 이 귀한 시간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나.”
“제가, 그러니까 제가…….”
우경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꽉 메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피로연에 참석하기 전에 본부장을 설득해서 회장님 뜻을 따르도록……. 아니, 적어도 본부장이 저를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들겠습니다.”
회장의 입가에 처음으로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이름이 연우경이라고 했지?”
“네.”
“처음엔 운경으로 들었다. 사내 녀석인 줄 착각했지. 똘똘하게 일 잘한다 기특하다 했는데,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르다. 말귀도 잘 알아듣고 주제 파악도 잘하고, 설 자리 앉을 자리 알고.”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린 우경의 앞으로, 회장이 파일을 펼친 채로 밀어 두었다. 소중한 사람을 다치게 할 것이라는 경고를 상기하라는 노골적인 의도였다.
“이번 일도 잘 해 봐라. 내가 벌 대신 큰 상을 주마. 35년 전 그놈처럼 잔머린 쓰지 마라.”
고개를 들어 우경이 회장의 시선을 곧게 맞받았다.
“심려하실 일 없습니다. 저는 35년 전 누구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우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 보겠습니다. 회장님.”
올려다보는 회장을 향해 우경은 단정하게 인사를 하고서 돌아섰다.
스스로에게 대견하다 칭찬할 만큼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택시 안에서 준섭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녹아내리는 눈사람처럼 우경은 제 몸의 단단한 무언가가 으스러져 주저앉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 많이 듣고 싶었어요.”
울음을 꾹 누르며 눌러둔 울음이 비어져 나올 것만 같은 가슴을 문지르며, 우경이 말했다.
참을 수가 없어 먼저 전화를 끊고는 우경은 잠시 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차창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기사님, 공항으로 가 주세요.”
눈이 오는 동경에서 커튼을 치고 룸에만 틀어박혀 있을 거라는 준섭과 전화 통화로 이별할 수는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우경은 홍보일로 인연을 맺었던 여행사 대표, 항공사 직원, 에이블의 소운에게까지 결례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급하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급해서요, 꼭 부탁드립니다. 네, 네. 상관없어요.”
비슷한 말을 반복하고 거짓말로 이유를 대면서 낮은 확률에 배팅을 했다. 백설이를 맡겨 둔 병원에 전화해서 하룻밤 맡아 달라는 부탁까지 끝낸 뒤 우경은 잠시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표를 구하지 못한다 해도 공항에서 무작정 대기라도 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 * *
공항 특유의 활기와 어수선함은 연말을 맞아 정점에 달했다. 쉴 새 없이 오가는 걸음들을 지켜보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양쪽으로 잡아당겨 가늘고 길게, 끊어질 듯 위태로이 늘어나 버린 시간 동안 포기와 희망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괴로워하다 보니 하나둘씩, 무언가가 지워져 갔다.
그릇이 작은 마음속에 지나치게 많은 감정을 담아 두었다. 회장을 향한 분노와 공포, 억울함, 막막한 슬픔과 상실감, 그리고 아직 뜨겁게 달아오르는 사랑까지 제각기 커져 버린 감정들이 서로에게 몸싸움을 걸듯이 부딪치고 흔들리고 깨지면서 모서리가 닳아 갔다. 얼마간은 가루가 되어 깊은 곳 어딘가로 스며들기도 했다.
침잠한 감정들 속에서 해야 할 일만 명료하게 떠올랐다.
‘동경으로 가서, 태준섭을 만나고 마무리를 지을 것.’
노란색 포스트잇에 딱딱한 글씨로 써서 모니터 옆에 붙여 놓을 법한 To-Do 리스트처럼, 간략하게 정리된 과제였다.
그러고 보니, 화려한 빛깔로 현혹시키는 커다란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포근하고 그리고 이내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꿈같은 것들이었다. 태준섭과의 모든 것들이, 들이치는 오로라 속에 잠긴 것만 같은 몽환적인 순간순간들이, 그저 꿈이었다.
거세된 꿈이 스러진 자리에 남은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단정하고 견고한 현실이었다. 수없이 예상해 봤던 시간이다.
상상 속 우경은 언제나 어리석었다. 사라진 꿈의 자리를 두리번거리며 울고 넘어지고 길을 잃었다. 이제는 예상도 꿈도 아닌 현실이다. 하염없이 길을 잃고 헤맬 수는 없었다.
일상을 꿈으로 바꿔 버리던 짤막한 웃음 한 번, 잠시 스치던 표정, 응? 하던 다정한 물음,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농담, 커다란 손, 회의실 공간을 건너오던 우경만 아는 눈맞춤…….
잘라 내야 하는 것들……. 현실이 아닌 것들.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던 마지막 순간에 동경행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 오르며 우경은 벌써 방전되어 버린 핸드폰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배터리가 남아 있을 때, 회사 홍보 건으로 급하게 1박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준섭과는 문자도 통화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