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19화 (19/23)

19장

태서우 부회장은 그날 밤 이후 본사로 출근하지 않았다. 부회장이든 이섭이든 준섭에게 따로 연락을 취하여 비난을 퍼붓는 일도 없었다. 회사 내 분위기는 술렁였는데, 준섭의 일상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준섭은 평소처럼 출근하여 스케줄을 소화하고 업무를 처리했다.

오전 시간이 끝날 무렵 송백재에서 호출이 왔다. 아마도 준섭이 새벽에 송백재를 들를 것이라 기대했겠지만, 준섭은 호출을 받고도 시간을 미루어 늦은 오후에 송백재에 들어섰다.

준섭은 잠시 마당에 멈춰 서서 새삼스레 송백재 건물을 눈에 담았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나무와 건물 지붕을 덮고 있다.

여기를 드나든 지가 몇 해더라.

송백재를 처음 보았던 그때도 지금도 송백재는 여전히 TK 권력의 핵심이자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이다. 측면에서 보면 사람 인(人) 자 형태인 팔작지붕과 단출한 홑처마, 세월의 흔적을 새긴 현판이 장식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권력과 경제의 중심 같은 그런 거창한 의미를 두고 보기엔 송백재는 지나치게 소박하고 간결한 건물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화려하지 않아 역설적으로 태 회장의 강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송백재가 겨울에 잠기면, 준섭은 늘 송백재에 들어서던 첫날이 떠오른다.

“대학 합격증을 받으면 가지고 오너라.”

두 해 전, 마지막으로 봤던 회장이 그렇게 말했다.

“어, 어디로 가면 됩니까?”

“송백재로 오면 된다.”

합격증을 품속에 넣고 서울로 향하는 길에 눈이 내렸다.

준섭은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승용차에 올랐다.

새하얀 눈에 뒤덮인 송백재의 첫인상을 지배한 것은 툭 트인 마당에 빽빽하게 심어진 소나무와 잣나무들이었다. 회장에게 준섭이 왔다는 말을 전하러 사람이 들어간 이후, 준섭은 홀로 송백재 마당에 서 있었다.

수백 년 전 태씨 문중의 사당이었던 건물을 그 이름까지 고스란히 재현했다는 송백재 건물에 붙은 현판을 보려면 고개를 약간 들어 올려야 했다.

하늘에선 다시 시작된 제법 굵은 눈이 느리게 떨어졌다. 아침부터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허기 때문인지 눈 때문인지, 준섭은 귓구멍을 두툼한 솜으로 틀어막은 듯 먹먹해졌다.

문득 세상의 소음이 잠시 멈춘 듯한 공간에 준섭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준섭은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공간을 세상과 차단하듯이 빙 둘러싸고 서 있는 온통 희고 푸른, 키가 큰 나무가 고요히 준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서재의 큼지막한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서서 준섭은 회장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회장은 태서우가 손실을 끼친 금액은 태서우의 개인 자산을 그룹에 돌리는 것으로 지시했고, 태서우는 유럽 지역 총괄 책임자로 해외 발령을 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검찰과 거래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태서우를 자신의 그룹에서, 자신의 권력의 방식으로 처분하겠다는 송백재의 의지였다.

태서우의 개인 자산이 그 정도 규모로 환원되려면 현금이나 자잘한 부동산은 물론 비자금까지 탈탈 털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쩌면 서우의 개인 소유 TK전자 주까지 처분하거나 담보로 삼아야 했을 것이다. 서우에겐, 검찰보다 무서운 권력이 송백재이니, 처음부터 거부할 수 있는 옵션은 없었다. 송백재의 유언장은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다. 서우든, 이섭이든, 준섭이든 송백재의 선택이 그룹의 수장이 된다. 언제나 치밀하고 냉담한 판단을 내리는 태시환임을 알기에, 서우는 늘 불안해했다.

그런 이유로 준섭이 본부장으로 이동한 이후, 서우가 부쩍 조심성 없이 주식 시장을 움직였다. 정관계와 은밀한 거래들, 의도적인 조작, 물타기, 내부 정보 이용까지 준섭의 귀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역으로 주식을 움직여 서우에게 결정적인 손실을 입히게 한 배경에는 준섭이 개입되어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서우는 쪼그라든 자산을 불리겠다고 그룹을 끌어들여 부당 거래를 하면서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회장의 조치는 유 실장과 태서우 본인의 입을 통해 준섭이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굳이 불러 확인시키는 이유를 알지만 부러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또한 마치 지난번 ‘글로벌 전략 회의가 마무리되면 쉬어라.’ 했던 말의 뜻과 거기에 숨겨 놓은 고약한 의도 같은 것도 모르는 척했다. 준섭을 떠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일본 출장은 준섭이 네가 가라.”

준섭이 기울였던 고개를 들었다. 일본 출장은 태서우의 스케줄이다. 내주에 일본에서 TK전자 협력사와 관례적인 비즈니스 미팅이 잡혀 있다. 연말에 잡힌 비즈니스 미팅은 일종의 사교 모임을 겸하여 며칠간 느긋하게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U전자 자제의 결혼식까지 스케줄에 포함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소규모로 진행되는 결혼식이지만, 혼인 상대가 일본의 최대 IT 투자 캐피털 오너의 가족이어서 피로연 초대장 자체가 화제였다.

회장의 결단은 전장 사업 협력 논의뿐 아니라, 인맥 관리에도 중요한 자리에 서우 대신 이섭이 아닌, 준섭을 보내겠다는 뜻이다. 준섭의 묻지 않은 질문에 회장이 짧게 답을 했다.

“서우는 내일 런던으로 출국한다.”

부회장 직함까지 떼고서 이름으로 지칭하면서 회장은 태서우의 입지를 완전히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후계 구도에서도 예외가 되지 않을 것이다. 태서우의 비자금까지 마른 지금, 태서우가 회장의 뜻에 반해 경영권을 잡게 될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해졌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준섭이 고개를 숙였다.

“연말인데, 휴가 대신 출장이구나.”

회장의 예상치 못한 말에 준섭이 눈썹을 슬며시 올렸다.

“휴가는 전략 회의 마치고 제대로 주마.”

“아……, 감사합니다.”

숙였던 고개를 들며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반질거리는 유리알 같은 눈 뒤편에 숨겨 둔 정보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늦은 밤, 약속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차 안에서 준섭은 방금 들어온 메일 한 통을 확인했다. 오후에 송백재를 나오면서 은밀하게 지시했던 사항에 대한 답이었다. 첨부 파일을 확인하는 준섭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손가락을 벌려 초대 명단의 특정 부분을 중심으로 화면을 확대했다. 어이없다는 듯 입이 벌어졌다가 이내 굳게 다물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준섭은 검은 겨울이 비치는 창만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 * *

“네, 항공편 컨펌 부탁드립니다. 네. 맞아요. 의전실은 아니고요, 네. VIP 라운지만요. 길게 머무르실 거 같진 않아요. 그래도 조금 쉬셔야 하니까. 네, 네.”

수화기를 내려놓는 양지은 대리의 얼굴이 상큼하다. 태서우 부회장의 경질로 그룹 임원진 전체가 술렁이고 그 임원진들 아래 소속된 평이사와 부장급까지 모두 심란해진 와중에 가장 해맑은 사람이 양 대리일지도 모른다. 12월 연말을 앞두고 태준섭 본부장의 뜻밖의 출장이 주는 해방감 때문일 것이다.

에스프레소 버튼을 누르면서 지은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연 팀장님.”

막 탕비실로 들어서는 우경을 향해 지은이 활짝 웃었다.

“연 팀장님도 아메리카노?”

“네.”

“좀 연하게 드시죠?”

“맞아요. 고맙습니다.”

지은이 제 잔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방금 추출된 커피를 우경에게 건넸다.

“쿠키는요?”

“아뇨, 괜찮아요.”

“저는 하나 먹을래요. 달달한 거 먹고 싶어요.”

지은이 투명한 원통 모양 플라스틱 통을 열고는 샤블레 쿠키 하나를 꺼내어 베어 물었다.

“이럴 때는 줄타기 안 하는, 아니, 줄타기 못 하는 아빠가 편하네요.”

우경이 커피를 마시다 말고 시선을 들어 지은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긴 했지만 지은이 직접 아버지인 양 사장님에 대해 명시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지은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웃었다.

“아빠 TK 오래 다니셨어요. 연 팀장님도 아시죠?”

“네, 어디서 들었던 거 같아요.”

“네, 네. 사장님들 오시면 알은척도 많이 하셨으니까. 근데요, 제가 아빠 닮아 좀 둔하대요. 생긴 건 엄마 닮았는데 속은 아빠라나. 울 아빠는 엄마 욕심만큼 잘나가지 못해서 늘 위태위태했고요, 인사이동 있는 겨울이면 집 분위기 살벌했거든요. 겨울 찬바람 불기 시작할 때면 제가 스트레스 확 치솟고 울렁증 도지는 병이 있는데 집안 분위기가 일조했나 봐요. 매해 겨울이면 승진하려나, 혹여 잘리려나, 그 걱정에 집 전체가 침울했어요.”

지은이 남은 쿠키를 한입에 쏙 넣고는 손가락을 비벼 가루를 털면서 말했다.

“이번에 부회장님 갑자기 런던으로 가시고 나서 그룹에서 잘나가는 TK물산이나 TK전자, 그중에서도 핵심사업부 사장님들부터 좌불안석인데 저는 너무 평화롭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본부장님 라인도 아니고……. 저는 그냥 월급받고 제 일 하고 복잡한 세상 편하게, 편하게 살래요. 딱 좋아요.”

우경이 지은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번 출장 대박이네요.”

“네?”

“원래 U전자는 태시환 회장님 때부터 연이 깊어서요. 송백재로 거기 회장님이 초대받아 오시고 하루 머물기도 하고 그러셨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U전자 아들이 결혼하는데요, 일본 부호 3위 S캐피털 공동 창업자 딸이래요. 소규모 예식으로 진행시킨대요. 그래서 그 결혼식 피로연에 일본 총리부터 전자 IT 업계 어마어마한 사람들만 초청받아 갈 거라고 했는데 거기까지 본부장님이 가시게 된 거라서.”

지은이 목소리를 확 낮추고 우경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말했다.

“그걸로도 회사에서 말 엄청 많아요. 태이섭 상무님 물먹었다고요. 부회장님이야 그렇다 쳐도 그럼 적어도 그 결혼식은 다음 후계자 태이섭 상무님이 가셔야 하거든요. 후계 구도 바뀌냐고 다들 신경 곤두서서…….”

“아…….”

우경이 무언가 더 물으려 할 때, 탕비실 문이 열렸다.

“연 팀장, 본부장님이 찾으세요.”

용원이 바쁜 듯이 얼굴만 쏙 내밀고는 말했다.

“네, 네.”

지은이 용원의 눈치를 살폈지만 둘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탕비실을 나서자, 제자리로 걸어가던 용원이 우경을 향해 돌아보았다.

“출장 하루 전까지 숙제를 엄청 내주시네요. 출장 동안에도 숙제가 많을 기세야.”

용원이 끄응, 소리를 내며 죽겠다는 듯 인상을 썼지만 말과는 다르게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회사에서 순식간에 역전된 준섭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주로 내 숙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 팀장 몫도 많아요. 정리할 게 많아서. 오시자마자 글로벌 전략 회의를 개최해야 하니까요. 중간에 화상 회의 잡으실 거 같더라고.”

“네, 열심히 할게요.”

우경이 용원을 향해 웃어 보이고 본부장실 문을 노크했다.

준섭은 모니터를 확인하면서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우경을 보더니 가까이 오라 손짓을 했다. 우경이 데스크 앞으로 가자, 준섭이 다시 손을 까닥했다. 툭 데스크 옆자리를 두드리는 손가락만 보면서 책상을 반 바퀴 둘러 옆으로 가서 섰다.

우경은 살피듯이 준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잠이나 제대로 자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강행군이었다. 회의실에 들어오는 준섭은 여전히 활력이 넘치고 강건한 힘이 느껴지지만, 점심 약속을 나가면서 스치는 준섭에게서 우경은 얼마간의 노곤함을 알아챌 수 있었다.

빤히 보는 우경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준섭이 수화기를 검지로 가리키며 미안, 이라고 작게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아, 아니요. 우경은 입만 아, 모양으로 벌리고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준섭이 피식 입가를 올렸다. 우경은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손등으로 뺨을 슬며시 눌렀다.

준섭이 통화를 마무리하려는 듯 인사와 당부를 더했다. 처음 봤을 때는 썰렁할 만큼 크다 싶은 본부장실이었는데 고여 드는 겨울 햇빛 때문인지 아늑하게 느껴진다. 공기 중에 옅게 스며 있는 남자의 온도와 향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어울리지 않는 안온함이……. 우경이 햇빛에 반사되어 희게 빛나는 준섭의 와이셔츠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하하, 크게 웃는 웃음소리가 물결처럼 퍼지며 귓전을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사람을 매혹시키는 웃음을 지으며 준섭이 통화를 끝냈다.

“잠시만, 미안해요.”

준섭이 우경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다시 수화기를 들더니 버튼을 누르고 짧게 지시했다.

“최용원 과장, 메일 보냈습니다. 확인하세요.”

수화기를 내리고서 준섭이 손을 짝 맞부딪쳤다. 우경은 계속 준섭의 손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고개를 들어 시선이 마주치자 준섭이 웃으며 물었다.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그냥, 음…….”

“숙제 너무 많이 내고 나만 놀러 가서 불만입니까?”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본부장님.”

“나는 좀 불만인데.”

“네?”

“두고 가니까.”

준섭이 의자 방향을 틀어 마주 보고는, 손을 뻗었다. 우경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너무 부드러웠다.

“아…….”

툭하고 감정이 터질 것만 같아서 우경은 시선을 급히 낮추었다. 고개를 슬며시 옆으로 돌려 다정한 손길을 피했다.

“지시하실 사항 있으시면…….”

답을 기다리는 동안 심장 근처부터 저릿하게 불편해졌다. 손까지 뻣뻣해지는 기분이라 우경은 맞잡은 손을 표시 나지 않게 주물렀다.

“지시할 사항이라…….”

느리게 끄는 어조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일단, 고개 좀 듭시다.”

“아…….”

우경이 고개를 들자, 준섭이 피식 웃었다.

“오늘 왜 그럽니까.”

“모르겠어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불안해하잖아.”

준섭이 손을 뻗어 우경의 손을 끌어왔다. 주춤거리며 우경이 준섭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내 손이 그렇게 잘생겼나?”

“네?”

“내내 손만 보는데?”

저도 모르게 또 시선이 떨어졌던 모양이었다. 준섭이 잡은 손에 힘을 더하며 시선을 맞추었다. 무언가 말하려 할 때, 갑자기 데스크 벨이 소리를 내며 울렸다. 여전히 한 손은 우경을 잡은 채로 준섭이 다른 팔을 뻗어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 본부장님, 전자 강지원 사장님의 미팅 요청입니다. 출장 관련으로 전달 사항이 있다고 하십니다. 20분 정도면 된다고 하시는데, 점심시간 전에 미팅 잡아도 될까요?

“점심시간 전이라면…….”

- 아, 5분 후에 미팅하시면……. 20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준섭이 시각을 확인하고 후, 짧게 숨을 뱉었다. 전화기 너머 양 대리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우경이 문득 잡힌 손을 빼어 내려 움직이자 준섭이 힘을 실어 휙 끌어당겼다. 엎어질 듯 몸이 기울어졌다. 우경은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준섭과 시선이 부딪히고, 멈췄던 숨을 몰아쉬었다. 준섭은 미간을 약간 찡그리고서 우경을 바라보았다.

- 그러면, 본부장님. 오후 스케줄을 조정해서 맞춰 볼까요?

준섭이 잠시 망설이더니, 답을 했다.

“10분 후로 합시다.”

-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통화가 종료되자, 준섭이 무릎이 닿도록 가까이 붙어서 있는 우경에게 물었다.

“뭐 할 겁니까.”

“네?”

“나 없는 동안.”

“아…….”

우경이 약간 웃으며 평이한 답을 내놓았다.

“숙제 많이 주셨다고 최 과장이 각오하라던데요. 열심히 일할게요. 오실 때 업무 진행 차질 없도록, 잘하겠습니다.”

“그뿐입니까?”

“일본 출장 관련 기사 자료도 준비해야죠.”

“연우경.”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준섭이 우경을 불렀다.

“그거 말고 말해 봐.”

우경이 시선을 맞추고 입을 달싹였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면 참을 수가 없게 될까 봐, 호들갑 떨게 될까 봐. 정말 슬퍼질까 봐…….

태준섭의 홍보 업무의 공식적인 계약 기간은 이번 연말까지이고, 관례상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연장되는 부분까지 고려하더라도 글로벌 전략 회의 시작 전까지다. 에이블이 TK와 계약 갱신을 한다고 해도, 적어도 TK로 출근해야 하는 우경의 파견 업무는 글로벌 전략 회의를 기점으로 자연스레 마무리된다. 준섭은 당연히 우경의 개인 계약을 연장하는 것으로 믿고 있지만, 우경은 그럴 생각이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매번 모질게 못을 박았다.

결국엔 준섭의 선택지는 우경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만 잠시 연장되는 사랑은, 그 후에 찾아올 관계의 끝을 더 버겁게 만들 테니까.

“쉬운 건데 답을 못 하네.”

준섭이 고개를 조금 더 들고는 우경의 팔을 쓰다듬어 내렸다.

“나는 네가 많이 보고 싶을 거 같은데. 너는 아냐?”

“보고 싶어…… 하겠죠.”

손톱 끝에 박힌 가시처럼, 파내려 할수록 더 깊이 박혀 버리는 쓰라림으로 계속 떠오르겠죠…….

“또.”

“허전하고.”

“그리고.”

“목소리…… 듣고 싶을 거 같아요.”

준섭이 손을 올려 우경의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우경이 울렁거리는 감정을 감추며 웃었다. 낮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 서두름이 없는 속도로 이어지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뭉근한 여운들, 거친 말을 할 때조차 그 여운은 짙고 달콤해 늘 넋을 놓게 만들었다. 듣고 싶겠지. 많이 그립겠지. 녹음이라도 해 둘까.

“목소리 좋아요. 아시죠?”

“몰랐는데.”

“되게 좋은데……. 말투도.”

“말투는 싸가지 없다는 소리만 들어서.”

“그것도 좋아요.”

준섭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웃음이요.”

“응?”

“이렇게 웃을 때 엄청.”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목을 누르는 것처럼 아파 와, 우경은 말을 멈추었다. 나에게만 보여 주는 것 같은 그런 웃음 볼 때는요, 나는 너무 특별한 사람이 된 거 같아서, 나만 아는 태준섭 같아서……. 자꾸만 어리석은 희망을 부풀렸어요.

“응?”

준섭이 귓등을 만지던 손을 조금 더 뻗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음……. 좀 두근거리고, 그리고 좀 더 가까워지는 것 같고.”

준섭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젠장할. 강지원 사장님, 맘에 안 들어.”

“무슨 일 있어요?”

준섭이 허리로 손을 내려 우경의 몸을 끌어당기며 뻔뻔하게 말했다.

“방해하잖아.”

허리께를 오르내리는 손길 때문에 우경은 조금씩 움찔거리면서 시선을 피했다.

“5분 남았어.”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내리깔고 있는 우경에게 준섭이 선언하듯이 말했다.

“뭘 해 줄까.”

입술만 잘근 깨물자 준섭이 다시 말했다.

“4분 30초.”

“그런 거……, 없어요.”

정말? 묻듯이 눈썹 끝이 올라갔다.

“좋아.”

준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경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예상했다는 듯이 준섭이 우경의 허리를 받치고는 간격을 좁혔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밀어내야 하는데 블라인드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이 눈을 찔러 우경은 눈을 감았다. 탄력감이 느껴지는 매끈한 입술이 누르듯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에 한 번 더 꾹, 도장처럼 눌렀다가 부비면서 떨어지고 다시 그러길 반복했다. 우경이 항복하듯 입을 벌리고 손을 뻗어 준섭의 목을 휘감았다. 보고 싶을 거예요. 많이. 매일. 언제나. 못 견디게. 몸살처럼.

* * *

핸드폰을 쥐고 있는 선애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소리가 되지 못하는 비명이 메아리처럼 반복되었다.

“확실한가요? 최하영이 그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는 받았다고 해도 오지 않을 수도……. 독일에서 논문 작업 중이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선애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네, 네. 세미나. 언제죠? 지금 진행 중인? 그럼 동경에 벌써 있다는 말인가요? 결혼식이 일요일…….”

선애가 손을 들어 악을 쓸 것 같은 입을 막았다. 열기로 터질 것 같은 눈으로 날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이미 어제 오전 준섭은 일본 출장을 떠났다. 교통사고를 내서라도 뒤집을 수가 없는, 이미 끝난 일이다. 조금만, 정신을 차렸다면 U전자 사장 아들의 결혼식을 조금 더 팠을 텐데……. 초대 대상은 워낙 기밀이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파고들면 최하영이 참석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는데……. 서우의 일로 선애는 지난 열흘간 혼이 빠져 있었다.

U전자 회장 며느리는 일본 부호의 딸이라고만 들었다. 캘리포니아 대학 산업 공학과, 동대학 MBA, 드러난 학력으로도 고리는 없었는데, 최 교수가 미국에 방문 교수로 가 있는 2년, 최하영과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지는 꿈에도 몰랐다.

서우가 유럽으로 팽당하여도, 그저 참았다. 회장이 이섭을 버리지 않으리란 믿음을 가지고서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 서우의 명백한 잘못이었고, 근신 중에 벌인 일이었고, 그리고 송백재와 맞서겠다는 불손한 의도가 드러났다. 성공했으면 모를까, 실패한 의도에 대해 처벌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송백재로 찾아가 무릎을 꿇으려는 선애의 손을 잡아 주고, 티슈를 건네며 하신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아버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이섭 애비도 그 뜻 잊지 않고, 아니, 아버님 다 너무, 모두 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울지 마라. 애미야. 니 잘못이 아니다. 내 너한테는 사과받을 일도 하나도 없고, 꾸짖을 일도 일체 없다. 이섭이, 수진이 잘 키우고 서우 뒷바라지 잘했다. 내 아들이 지질히도 못나 빠진 놈이라서 그렇다. 내가 아니면 누가 걔를 잡겠노? 이거를 또 묻으면, 묻을 수도 없고 그런다 해도 이섭이한테도 좋을 게 없다.’

이섭이, 라는 말에 희망을 품었다. 어쩌면 냉정한 회장이 이섭을 위해 결단을 내려 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해 버렸다. 그런데 아니, 아니었다. 선애는 이를 악물었다.

기어이, 서희의 아들을……. 그 자식을……!

내 아들, 이섭을 밀치고 서희의 아들을! 결국 서희의 아들이 TK를!

서우마저 이렇게 된 지경에…… 최하영까지. 아버님이 어떻게 우리 이섭이한테 이러실 수가.

선애가 숨을 몰아쉬며 목을 뒤로 젖혔다. 핸드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미끄러져 몇 번을 반복해야 했다.

사랑하는 아들. 핸드폰에 떠오르는 글자에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 엄마?

일부러 다정하게 불러 주는 엄마, 소리에 다시 눈물이 툭 터져 버렸다.

- 엄마, 왜 그래요? 울어요?

“이, 이섭아.”

- 왜, 어디에요? 어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니. 집.”

- 집으로 갈게요.

“아냐, 회사일 봐야 하는데. 나, 조금만 마음 가라앉히고 다시 전화할게. 알려 줄 말이 있는데……. 이섭아 내가, 내가, 이 엄마가…… 너무너무 미안해.”

- 지금 가요. 엄마. 엘리베이터 타니까, 전화 끊어져요. 응?

“응, 응.”

선애는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가슴에 꼭 껴안고 끝없이 울었다.

* * *

몇 번이고 고친 문장들이라기엔 너무 단순하고 간단했다. 한 번 더 읽어 보고 우경은 메일 전송 버튼을 눌렀다. 수신인 란에 박힌 태이섭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느낌이다.

소운에게서 TK와 계약 연장에 대해 통화를 한 건 오늘 오전이었다. 우경이 파견 근무를 더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소운에게는 미리 밝혔는데, 문제는 에이블과 TK의 계약 연장 건이었다. TK일을 계속한다면 에이블로서는 더없이 좋은 일이니 우경이 중간에서 계약 건을 부드럽게 마무리 짓는 것이 여러모로 모양새가 나았다. 어차피 태이섭 상무와 한 번은 만나야 하니까…….

랩톱에서 시선을 떼자 습관적으로 본부장실을 살피게 된다. 이틀째 비어 있는 본부장실의 닫힌 문을 볼 때마다, 준섭이 불쑥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준섭은 어제 오전에 동경행 비행기로 출장을 떠났다.

우경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서 어제 아침 출근길에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이었다. 이어폰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자마자 준섭은 바쁜 듯이 용건부터 말했다.

- 공항 가는 길인데.

“네, 잘 다녀오세요.”

- 필요한 거 없어?

“네?”

- 뭐, 그런 거. 일본에서만 파는 거라든가. 동경 특산품? 잘은 모르겠지만.

출장지에서 선물을 사 오겠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런 말을 하면서 준섭은 스스로 어색한지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우경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잠시 숨을 고르는데 좀 불퉁한 목소리로 준섭이 물었다.

- 왜 답을 안 해?

“음……. 그런 거 없을 거 같아요.”

- 그래?

“인터넷으로 하나 되는 세상인데요. 스마트 기기와 통신 네트워크가 만든 유통 혁명이요.”

준섭이 그제야 평소처럼 웃었다.

- 일본에 5G 네트워크 사업 잘 팔고 오라고?

준섭의 출장 일정에 포함된 중요한 사안이었다. TK 미래 전략의 핵심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원하시는 결과 있길 바랍니다. 잘 다녀오세요. 본부장님.”

- 그래요, 잘 다녀올게요. 잘 지내고 있어.

끊으려다 말고 준섭이 말을 덧붙였다. 속삭이는 듯,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 그리고, 동경에만 있을 법한 걸로 하나 찾아볼게.

우경은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까만 지하철 창에 비치는 제 얼굴은 조금 상기된 것 같기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길을 나선 사람처럼 공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준섭은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지만, 출장 전 용원이 경고한 대로 숙제는 많았다.

“본부장님 출장인데 야근이라니, 미안해요. 연 팀장. 빨리 하고 가도록 해요. 나도 와이프 눈치 보여서요.”

용원이 샌드위치를 욱여넣으며 말했다. 우경도 덩달아 샌드위치를 빠른 속도로 씹으면서 자료를 눈으로 훑었다.

조금이라도 집에 일찍 들어가기 위해 용원이 애를 쓴 덕분인지 우경도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사무실을 나섰다. 퇴근 시간이 지난 버스는 다행히 앉을 자리가 있었다. 우경은 무거운 몸을 내려놓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다보았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 몸을 맡긴 채 집으로 가는 동안 뇌 어딘가가 고장이 나 버린 건지, 태준섭 생각이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가는 중에도 줄곧 머리가 멍해진 기분이었다. 되도록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우경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뮤직 앱 실시간 순위에 오른 곡을 연속으로 재생시켰다.

실시간 순위 첫 번째 곡이 끝나기 전에 전화가 왔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태이섭이었다. 후우, 하고 고르는 숨이 찬 공기 속에 희게 퍼졌다.

“네. 상무님.”

- 연우경 씨, 메일은 확인했습니다.

“……네.”

- 만나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네, 언제 찾아뵐까요?”

- 지금 괜찮아요?

“네? 아, 저는 지금 퇴근해서…….”

- 어디에요? 집?

우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 알겠어요. 집에 들어가면 연락 주세요.

지하철역에서 아파트로 가는 동안, 맞바람이 불어왔다. 두툼하게 껴입었는데도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워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목도리 속으로 코를 파묻으며 이미 연속 재생되고 있는 실시간 순위 열일곱 번째 곡을 들을 때였다. 태이섭 상무님으로 부터 걸려 온 전화라는 메시지가 이어폰으로 들렸다.

“네, 상무님.”

이어폰 버튼을 누르고 말을 했는데 이섭에게서 답이 없었다. 우경이 호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했다.

통화 중 표시가 되어 있는데…….

“여보세요? 상무님?”

- 우경 씨가 맞네요. 아파트 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섭의 말이 작게 들렸다. 무슨 말인지 몰라 우경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섭이 이쪽으로 온다는 말인가 싶어 확인하려는 차에 빠앙, 가볍게 경적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인도 옆으로 차 한 대가 바싹 붙어 섰다. 운전석에서 이섭이 창을 내리고서 우경에게 손짓했다.

“타이밍 좋은데요. 타세요.”

우경이 당황스러워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이섭이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문 열어 줘요?”

“아닙니다.”

우경이 목례를 하며 차 안으로 들어왔다.

“힙합 좋아해요?”

느닷없는 이섭의 질문에 우경이 의미를 몰라 쳐다보자 이섭이 턱으로 귓가를 가리켰다.

“아…….”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은 뮤직 앱에서 실시간 차트에 오른 힙합 그룹의 곡이었다.

네가 좋은 이유가 수백만 가지나 된다는 달콤한 고백이 여전히 이어폰을 꽂고 있는 한쪽 귀로 들어왔다. 우경이 당황하며 이어폰을 빼고 핸드폰 볼륨 키를 눌러 소리를 낮추었다. 서둘러 앱도 종료시키고 싶었지만, 손도 얼어 있는 데다가 차가운 공기 때문에 뻣뻣해진 가죽 장갑은 쉽게 벗어지지 않았다. 잠시 실랑이를 하다가 한쪽을 겨우 벗고는 뮤직 앱을 정지시켰다. 그러는 동안 이섭은 정차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우경만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야근했어요?”

“야근까지는 아니고 마무리가 덜 된 작업이 있어서 조금 더 했습니다.”

“금요일인데, 게다가 본부장 출장 아닌가? 지나치게 충성이네요.”

이섭의 말 속에 숨길 생각도 없는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우경이 답 없이 잠시 쳐다보기만 하자, 이섭은 핸들을 틀면서 가속 페달을 밟았다. 시선은 전면에 두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냐는 우경의 물음을 읽은 듯이 답을 주었다.

“메일 보낸 건 말고도 할 말 있어요. 시선 있는 곳에서 할 이야기 아니라서, 좀 조용한 데로 갑시다. 어디 장소 추천해 봐요.”

갑작스러운 요구에 적당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 우경이 머뭇거렸다.

“이 근처에는 잘…….”

“없으면, 내가 아는 데로 가고요.”

우경이 긴장감으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섭이 그런 우경을 흘끗 보고 쓰게 웃었다.

“차로 15분쯤? 와인도 팔고 밥도 파는 레스토랑입니다. 가끔 가는 곳이에요. 룸에서 이야기 나누기가 좋아서.”

“네…….”

우경이 한쪽 장갑만 낀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작게 답했다.

* * *

이섭이 주문한 홍차에서는 향긋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블렌딩 홍차를 티 포트에서 잔으로 따르고, 정면을 바라보자 이섭이 어서 들라는 듯 손을 가볍게 내밀었다. 한 모금 목을 축이자 이섭이 말을 이었다. 계약 연장에 대한 건이었다.

“에이블은 TK 계약을 연장하되 연 팀장은 빠지겠다는 뜻인가요?”

“워낙 소규모 회사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일은 하게 되겠지만 추가 계약처럼 전담으로 파견을 나온다거나 하는 건 어려울 듯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에이블 그만두고 TK로 스카우트한다는 제안은 왜 거절해요? 홍보팀이나 홍보실로 가서 에이블에 일감 주고 컨트롤하면서 같이 작업하면 우경 씨한테는 베스트 조건 아닌가.”

“알고 있습니다. 과분한 제안이십니다.”

이섭이 잔을 내려놓으며 픽 웃었다.

“겸손 떨지 말아요. 기분 나쁘니까.”

“상무님, 저는…….”

“능력 알겠고, 그 능력으로 나 여러 번 물 먹였고, 스카우트 제안은 내가 아니라 유 실장이 했고, 실적이나 근무 평가가 그 제안의 근거가 되었고. 그러니 과분이니 어쩌니 그런 소리 말라고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냥 저는 에이블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태준섭 때문에?”

우경이 고개를 들어 이섭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

이섭이 단박에 떨어진 답이 어이없다는 듯 직설적으로 받아쳤다.

“왜요? 사내 연애 비밀로 하기가 힘들어서? 스캔들에 휩쓸려서 혼자 피 볼까 봐?”

“비슷합니다.”

미치겠네. 이섭이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비웃었다.

“기억해요? 내 경고?”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섭이 고개를 까닥했다.

“하긴 내가 여러 번 했지, 경고.”

손가락이라도 튕길 듯이 중지와 엄지를 맞물리고는 이섭이 말했다.

“좋아요. 기억을 되살려 봅시다. 처음에 태준섭, 예민한 자식이니 잘해 보라 했고. 두 번째는 그 새끼 잡놈이니 조심하라 했고, 세 번째는 진창에서 뒹굴게 될 거라 했죠.”

이섭이 정리해 주는 경고의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답답해진 우경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궁금했죠? 왜 진창인지.”

“그 외에도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말씀드리지는 못했지만.”

“아하, 내가 왜 연우경을 찍어서 태준섭에게 보냈을까, 하는 거? 아. 더 정확하게는 왜 굳이……. 뻔히 두 사람 불장난할 줄 알면서, 왜 보냈냐는 질문 말인가요?”

너무 쉽게 읽히는 마음이라는 듯 이섭이 거침없이 말했다. 굳이 모욕을 주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지만 우경의 얼굴은 충분히 달아올랐다.

우경의 얼굴을 보는 이섭의 눈이 가늘어졌다. 속에서 뭉클뭉클 점성 높은 액체처럼 감정이 끓어올랐다. 맹렬한 기세로 몸을 잠식시켜 나가는 것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선애를 만난 후에 이섭은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틀어박혀 내내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했다.

태준섭을, 아니, 연우경을 그리고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섭은 어려서부터 눈치도 빠르고 계산도 빠른 편이었다. 촉도 좋았다. 어쩌면 오늘 선애가 울면서 전화를 하기 전부터, 이섭은 태시환 회장의 의도를 짐작하여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인정하기 두려워 미루었을 뿐이다.

야금야금 커지던 불안감은 회장이 태서우를 내치면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이섭은 자신의 위치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선애는 여전히 태시환 회장을 믿는 눈치였지만, 태서우의 영향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섭의 위치는 현재 그룹 컨트롤타워를 장악한 준섭에 뒤쳐졌다.

집으로 들어서면서 이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에 미소를 만들었다. 고용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어머니가 편찮으신 것 같아 들렀다고 설명했다. 의사를 부를까, 뭘 해야 하나 묻는 이들에게 필요하면 부를 테니 잠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말로 주위를 차단했다.

묻지 않아도 이섭은 선애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층계를 내려가 지하층의 작은 응접실을 곧장 가로질러 닫혀 있는 오디오룸 문을 노크했다. 음악 감상이나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해 둔 공간이지만, 선애는 심정이 복잡할 때면 홀로 그곳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리고, 종종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엄마. 이섭이. 나 왔어요. 문 열고 들어가요.”

얼굴을 매만지며 문가로 걸어오던 선애는 이섭을 보자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왜 그래요. 응?”

울음과 섞여 들리는 선애의 설명이 반도 넘어가기 전에 이섭은 태시환 회장의 징그럽게 깜찍한 트릭을 알아챘다.

일본 출장에서 준섭이 참석할 결혼식이 내내 찜찜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처음엔 그룹의 위상으로 볼 때 이섭이 대신 참석해야 할 결혼식을 준섭이 간다는 입방아 때문이라 생각했다. 동경 출장은 전자 관련이라 준섭이 가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굳이 이섭이 결혼식만을 위해 중복해서 동경 출장을 갈 이유까지는 없지 않은가, 하는 정도로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역시나 찝찝하고 축축한, 참을 수 없이 불쾌한 촉은 틀리지 않았다.

결혼할 신부가 최하영의 친구라는 것, 최하영이 동경에서 개최된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그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런 숨겨진, 라스트팡이.

이섭은 이를 악물었다.

초대 명단은 신부 측까지 공개된 적이 없으니 회장은 모르는 척 준섭을 결혼식에 보냈다. 그 후에는 뻔한, 허울 좋은 변명이다. 결혼식에서 준섭과 하영이 자연스레 만남을 가졌고 두 사람이 서로 마음에 들어 한다, 최하영이 일본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을 하면 이섭과 선을 보려 준비하고 있었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인연은 준섭이었던가 보다, 라고 못 박을 심산이었을 테다.

이섭이 불만을 삼지 못하도록 선애가 원망하지 못하도록 회장이 수를 썼다. 서우를 내치는 시기마저 조절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뜯어 먹히는 기분이었다.

이섭은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가 떼어 내며 선애를 가볍게 포옹했다.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요. 엄마.

이섭은 선애와 대화를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며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여자를 가엾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질문, 모조리 탈탈 털어 깔끔하게 대답해 줄게요. 그러니까 여자가 있어요. 이름은 최지분이라고 합시다. 왜냐면 그 여자가 상속받게 될 TK 지분이 있거든요. 작다면 작고 많다면 많은 지분인데 요는, 최지분과 TK 자손이 결혼을 해서 그 지분을 흡수하는 게 오래된 계획……, 아니, 좀 부드럽게 말합시다.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선대의 약속 같은 거라고.”

여자의 얼굴이 파리하게 굳어 가기 시작했다. 아직 다 말 안 했어. 그런 표정은 넣어 두라고. 이섭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시선을 피하며 잔을 들었다.

“그분이, 그래서……?”

“당연히 결혼할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죠. 모두 다 그렇게 의심 없이 믿었는데, 나만 의심했어요. 태준섭이 최지분의 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나는 보험 같은 게 필요했죠. 치사하고 야비한.”

이섭이 양손을 약간 벌려 보였다.

“나, 그런 놈이에요. 원래 얕은수 잘 써요. 태준섭이 걸려들 때도 있고 되감아 칠 때도 있고, 엎치락뒤치락 그랬죠. 이번엔 그 자식이 전기본으로 가면서, 연우경 씨도 잘 알듯이 CS를 쳐내고, 최악이었어요. 그래서 태준섭이 적어도 지분은 차지하지 못하게 내가 얕은수를 썼죠. 아, 지분 양 집안이 고고해요. 아버지가 고명딸을 여자관계 지저분한 남자한테는 안 보낸다고 선언했고, 우습지만 문서상으로도 그 부분이 확보되었고요.”

우경이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섭은 브리프 케이스를 열어 꽤 부피감이 있는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로 올리고 우경에게로 툭 성의 없이 밀었다. 테이블 위 중간쯤에서 멈춰 있는 봉투의 입구가 벌어지며 내용물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봐요.”

여자는 사진을 집어 들면서 손을 작게 떨었다.

“첫날, 우경 씨가 태준섭을 로비에서 기다린 날부터 다 있어요. 태준섭이 CS애드로 가서 판을 뒤집고, 경쟁 PT까지 가게 되고, 여직원이 찾아왔었다는 상황을 내가 보고받은 후에.”

이섭이 검지를 들어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머리를 좀 썼어요. 보고 중에 언뜻 비치는 태준섭이 영 이상하더라고. 그 새끼가 찾아온 여직원이 되게 맘에 들었구나 촉이 왔는데 CCTV 확보하고 확신했죠. 둘이 첫눈에 빠진 거, 맞죠?”

여자는 이섭의 말을 들으면서 흐트러진 사진들을 그러모아 한 장씩 차분하게 넘기고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어 평소보다 더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섭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물었다. 여자는 사진만, 이섭은 그런 여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지막 장까지 천천히 넘겨 본 사진을 가지런히 정리하면서 여자가 물었다. 예상보다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일부러 저를 붙여 놓고 본부장님 저랑 연애하게 하고, 사진 찍으셨어요?”

“맞아요.”

하아, 여자의 입술에서 분노 섞인 웃음이 터졌다. 그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떨리는 입술로, 하지만 떨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힘을 주어 한 자씩 꼭꼭 누르는 듯이 말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요. 일부러 나를, 넣었구나. 사진 정도 찍힐 거라고 생각도 했고. 최지분? 그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언젠가 태준섭 본부장님과 거래를 할 때 카드로 쓰지 않을까. 제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송백재에 알린다는 협박 정도로 생각했는데, 역시 스케일이 달라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이 사진 뿌리실 건가요?”

“연우경 씨가 잘 알겠네요. 어떤 식으로 뿌려질지. 방식이야 인터넷 매체 바이럴 홍보나 다를 바 없으니.”

우경이 이섭을 똑바로 응시했다. 경멸과 분노, 절망감이 뒤섞인 눈이었다.

“진창.”

이섭이 말하자, 무언가를 삼켜 내는 듯 여자의 목선이 팽팽해졌다가 가라앉았다.

“진창에 빠질 거라고 경고했잖아.”

“그러셨죠. 그런데 왜, 오늘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여태 자료만 모으면서 시기만 재다가……. 혹시 두 사람 선이라도 보나요?”

이섭이 하아, 소리를 내며 기막히다는 듯 웃었다.

“연우경 씨, 머리 좋아. 센스가 좋은 건가? 하긴, 일 맡기기 전에 기존 작업들 검토는 했어요. 검토했을 때도 센스 좋다고 생각은 했어. 그러니 홍보일 발탁도 순 억지는 아니었지.”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오로지 한 가지 사실만 집중해서 알아내고 싶다는 듯 되물었다.

“선, 보나요?”

“아직은. 만나긴 할 겁니다. 일본 U전자 회장 아들 결혼식 피로연에서 우연히 만나는 걸로 계획되어 있으니까.”

찻잔과 소서가 잘게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여자가 잔을 쥐고 들어 올리려다 결국 잔에서 떨리는 손을 떼었다. 손을 떨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듯 주먹을 쥐어 배 앞으로 끌어다 붙였다. 그러고는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웃지는 않는데 비웃음이 느껴졌다.

“상무님도 그 정보, 오늘 아셨군요. 아니라면 출장 어떻게든 못 가게 했을 텐데……. 그렇죠?”

“맞아요.”

“본부장님도, 아직 모르시겠네요.”

“그건 모르죠, 알고도 모르는 척 갔을 수도.”

여자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모르고 가셨어요.”

무모한 확신에 가득 찬 음성이었다. 이섭은 눈을 찌푸렸다. 어리석음에 가슴이 답답해졌는지, 심장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이것 봐요, 연우경 씨. 그것보다는 본인이 구를 진창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이섭이 직설적으로 빈정거리자 여자의 입술에 희미하게 미소가 잡혔다.

“사진 뿌리신다면서요. 더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어떨 거 같아요? 본부장이 최지분과 결혼을 못 하니 오히려 더 낫겠다, 그런 순진한 생각합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으세요?”

“태준섭은 흙 털고 일어날 거라고 했는데요.”

분노로 슬며시 벌어지는 여자의 입술 사이에서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양손을 겹쳐 꾹 쥐고는 가까스로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는 모습이 되레 이섭의 잔인한 본성을 들쑤셨다.

“TK 홍보팀 능력치를 고려해서 적당히 수습할 수준으로 뿌릴 겁니다. 태준섭은 그 집안과 공식적으로 선은 못 보겠지만 큰 타격은 없겠죠. 오히려 마음이 급해진 송백재가 서둘러 다른 집안과 혼사를 시킬 가능성이 높아요. 송백재, 우리 할아버지 말입니다.”

이섭은 말을 멈추고서 얇은 입매를 올리며 웃었다.

“태준섭을 징그럽게 미워하고 동시에 징그럽게 좋아해요. 집착과 애증이 아주…….”

이섭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경 씨, 홍보일 하려면 힘들 겁니다. 꼬리표가 따라다닐 테니까. 다른 일 해요. 이런 소문에 둔한 그런 직종으로. 내가 알아봐 줄 수 있어요.”

기막혀, 작게 중얼거리며 우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제 앞으로 가지런히 정리한 사진을 손끝으로 밀어 흐트러뜨리면서 말했다.

“눈물 나게 고맙네요. 그 제안.”

“거절입니까?”

“네.”

검지로 한 장씩 사진을 밀어 넘기며 우경이 싸늘하게 답했다.

“난 홍보일 계속할 거고 그런 정도 진창이야, 아니, 진창이라뇨. 오히려 빛나는 액세서리가 될 거에요. 대단하잖아요? 태준섭인데.”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확연히 달라진 얼굴로 우경이 이섭을 바라보았다. 낯선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게의 축을 움직였다.

툭툭 잘게 뛰어오르는 심장 박동이 오늘 내내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이섭의 귀를 웡웡 울렸다. 쪼개지는 시야 때문에 이섭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찡그리며 바라보니 우경의 손가락 끝에 사진 한 장이 들려 있다.

“한 장만 가질게요. 다 너무 좋은데…… 눈물 나게 좋은데 그래도 이 사진이 최고네요. 이날.”

우경이 사진을 돌려놓으며 말했다.

“이날, 들었거든요. 플랫폼에 서 있는 여행자들처럼 우린 그런 관계라고, 투정 부렸더니 얘기해 주더라고요. 엄마 이야기,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이야기. 그러면서 쓰레기에도 교훈은 새겨지니, 나를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을 거라 말했어요.”

우경이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웃었다.

“사진이 아니었으면 저 혼자 꿈꾼 줄 알았을 텐데. 고맙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우경을 보는 이섭은 얼마쯤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우지끈 소리를 내며 심장 한쪽이, 뇌 반쪽이, 아니 팔다리 한 개씩쯤은 으스러지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섭은 우경의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자식은 너, 버릴 거라고. 동경에서 최지분 보는 순간 너 같은 거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버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서도 뻔뻔하게 모르는 척, 너랑!”

우경이 팔이 잡힌 채로 흔들렸다. 어지러워요. 토할 것 같아. 이섭의 실낱같은 이성이 상황을 일깨웠다. 흔들기를 멈추고, 악력의 여운으로 손을 떨었다. 우경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새로울 게 없어요.”

“뭐?”

“결혼 상대가 생기면, 미련 없이 그쪽을 선택할 거라는 거, 나도 처음부터 알았어요. 차이라면 태이섭 상무님은 그 상대가 누군지도 알았던 거고.”

네가 꾸민 일이잖아. 악어의 눈물 같은 위선을 보이지 말라는 경고였다.

“우스워 보이시겠지만, 허세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우경이 손을 들어 아직도 힘없이 붙어 있는 이섭의 손을 떨어냈다. 닿은 손의 온도가 너무 차가워 이섭이 눈을 찡그렸다. 파랗게 질린 우경의 얼굴이 그제야 제대로 들어왔다. 통렬한 후회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제 목적을 위해 타인의 감정을 저열하게 이용했다. 영문도 모르는 채 휘말려 엉망이 될 우경의 상처 따위 고려하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놈은 자신이었다.

“미안…….”

이섭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문질렀다.

“미안, 해요.”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말인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멍하게 서 있는 동안 문이 열리고 또 닫혔다.

홀로 남아 이섭은 비틀거리며 우경이 앉았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트러진 사진을 천천히 검지로 넘겨 보았다. 여자를 바라보는 태준섭의 표정이 하나씩 가슴에 박혀 든다. 제대로 빠진 얼굴. 서로에게 닿는 손끝, 입술, 상대방에게 자신을 완전히 던져 버리는 순간의 연인들.

씹. 욕이 튀어나왔다. 양아치, 개자식, 쓰레기. 그건 모두 태이섭 본인에게 해당하는 비난이었다.

* * *

“이섭아.”

이섭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는지, 선애가 현관 근처까지 나와 있었다. 되도록 조용히 올라가서 잠들고 싶었는데 그러기는 틀렸구나 하는 것이 취기가 오른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우경이 가고 난 뒤 이섭은 식당 룸에서 홀로 앉아 와인을 시켜 한 병을 다 비웠다. 안주 겸 식사 겸 뭘 시키긴 했는데 씹어 삼킨 종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평소 주량보다 훨씬 적게 마셨는데도 대리 기사가 한참을 흔들어 깨워서야 겨우 일어날 정도로 취해 버렸다.

꼭지까지 취한 상태로 이섭은 선애에게 실실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응.”

“저 기다리셨어요?”

“으응. 책도 좀 읽다가…….”

“기다리는 줄 알았음 일찍 들어올걸. 전화하시지.”

“뭘, 특별한 건 없었는데.”

이섭이 또 실실거리며 웃었다. 최하영 이야기를 해 놓고서 노심초사 하루 종일 홀로 조바심을 삭이며 이섭을 기다렸으면서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선애의 마음이 다 들여다보였다. 선애가 이섭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많이 마셨네.”

“와인 약간요.”

“누구랑?”

“혼자서요.”

“여태 혼자?”

“아……. 누구…… 만났다가 먼저 보내고, 혼자 한 잔만 마시려다가 와인이 넘 맛있더라고요.”

“같이 마시지, 왜 먼저 보내.”

이섭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섭아, 있지…….”

이섭의 얼굴을 살피는 선애의 눈길에 말하지 못하는 근심과 안타까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엄마.”

“응.”

“왜 그렇게 불쌍하게 봐요? 내가, 내가 그렇게 많이 불쌍해 보이나?”

“아니, 그냥 좀 속상해서.”

“왜 속상해? 나 여자 없을까 봐?”

이섭이 손을 저으며 웃었다.

“괜찮아요. 이 넓은 세상에 나 좋다는 여자 하나 없을까. 많아요, 많아. 많아서 처치 곤란.”

“왜 그래, 실연이라도 당한 거처럼. 아버님한테 서운한 거지, 난 최 교수네나 하영이한테는 불만 없어.”

“맞아, 최하영. 이름이 그거였지. 맨날 헷갈려. 최하영, 사진으론 B사감 같이 생겼어.”

“하영이가?”

“낫 마이 타입!”

이섭이 손으로 크게 가위자를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돌아서서 계단을 오르는데 초점이 흔들려 잠시 휘청거렸다. 얘. 놀라서 팔을 잡는 선애에게 손을 들고 괜찮다, 괜찮다 말하며 차분하게 걸어 제 방으로 올라갔다.

이섭이 눈을 떴을 때는 침대에 외투까지 입은 채로 엎드려 누워 꽤 오래 잠을 잔 후였다. 답답한 겉옷을 대충 벗어던지고, 난간을 잡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와인 창고로 들어가서 집히는 대로 와인 한 병을 집어 들었다. 방으로 다시 올라가 와인을 병째 들고서 입에 대고 마셨다.

‘34년 수절하는 겁쟁이 주제에.’

준섭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사랑 같은 거……. 여자와 사랑 같은 거.

모두 다 쓸모없는 에너지 낭비라고 믿었다. 굳이 최지분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차피 아니 될 일에 순정 같은 거 바치고 싶지 않았다. 살다가, 적당히 때가 되면 선을 보고 적당히 결혼하고 적당히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그런 비겁한 마음이었다.

이섭은 제 인생이 늘 위험을 최소화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송백재의 비호, 선애의 압도적인 지지. 그 속에서 이섭은 우아한 황태자 노릇만 하면 되었다. 어른들의 뜻을 따르고 일정 이상의 성실성과 능력을 보여 주며 대외적 품위를 지켜 주면 모든 이가 만족했다. 그에 비하면, 언제나 멸시해 마지않던 태준섭은 영문도 모르고 던져진 절벽 아래에서 상처투성이로 기어오르는 새끼 사자처럼 위험에 고스란히 전부를 노출시키며 살아온 인생이다.

그런 놈이 뻔히 아는 함정에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보란 듯이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 정도 위험쯤, 코웃음 치며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요. 일부러 나를, 넣었구나. 사진 정도 찍힐 거라고 생각도 했고…….’

우경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우경이 아는 걸 준섭이 모를 리가. 접선하듯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집으로만 불러들여 만나던 우경과 손을 잡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우경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오뎅집으로, 호텔로, 카페로…….

준섭의 사진을 보며 이섭이 고개를 저었다.

이섭으로선 믿을 수 없는 결론이었다. 태준섭은 최지분의 가능성을 깨끗하게 포기해 버렸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섭은 사진을 허공에 띄워 들고서 준섭과 눈을 맞추었다.

“씹새야.”

입가로 흐르는 와인을 손등으로 닦으며 욕을 지껄였다.

“너 사진 찍히는 거 알면서 이 지랄이야? 나 보라고? 약 오르라고? 최지분따위 상관없어? 좆도 없는 게. 그 지분이 아무것도 아니야? 송백재 뒤집어지는 것도 우습지? 넌 다 우습지? 다 같잖지, 응?”

손안에서 준섭의 사진이 우그러들었다. 이섭은 벌떡 일어나 사진들을 봉투 안에 넣고는 마당으로 나왔다.

겨울바람이 와이셔츠 자락을 날리고, 옷섶을 파고들었다.

몇 시더라……,

이섭은 어질거리는 눈을 들어 검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달리 반짝이는 별 하나가 보인다. 새벽을 비춘다는 금성일까. 녹지 않은 눈이 간간히 얼어붙은 뒷마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자 프흣 웃음이 흘렀다.

이섭은 사진을 담은 봉투를 바닥에 던지고, 평소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던 뒷마당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취기 어린 눈으로 샛별을 더듬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엉덩이가 딱딱해졌다 싶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석에 놓여 있던 알루미늄 통을 질질 끌고 와 쓸어 담아 놓은 마른 낙엽 위에 사진들을 쏟아부었다. 거꾸로 뒤집은 봉투 속에서 USB도 같이 떨어졌다. 이섭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샛별이, 안녕. 내 꼴은 너만 봐라. 쪽팔려.

실없이 금성에게 인사를 건네고 이섭이 쿡쿡 웃기 시작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인 나뭇가지를 통 속에서 던져 넣자, 사진이 타면서 매캐한 연기가 솟았다. 좀 떨어져 앉아 타오르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불길이 화르륵 높아졌다가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제 끝.

일어서려 바닥을 더듬는 이섭의 허탈한 손길에 사진을 담아 왔던 봉투가 툭 걸렸다. 이것도 태워 버려야겠다며 집어 드는데 봉투 속에 미처 딸려 나가지 않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비스듬한 각도에서 잡힌 준섭은 옆얼굴과 등이 반쯤만 보이고 우경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 클로즈업된 사진이었다. 제일 예쁘게 나온 사진이어서 처음부터 눈길을 잡아끌었다. 이섭이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사그라드는 불길 속에 사진을 던져 넣으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휙 손을 멀리 뒤로 빼내었다.

세차게 털어 내자 사진에 옮겨 붙은 불씨가 점점이 주황빛으로 흩날리며 사라졌다. 이섭은 가장자리가 까뭇하게 탄 사진을 들고서 돌아섰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하늘이 돌아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찬바람에 기침이 연방 터졌다. 팔로 입을 가리면서 한 번씩 터지는 기침 때문에 허리를 숙이면서, 더할 수 없이 더러운 기분으로 이섭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게임은 태준섭의 완벽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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