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18화 (18/23)

18장

준섭의 보고를 들은 후, 회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노인 특유의 쇠약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었지만, 서재 책상 위에 올려진 가족사진을 훑는 눈에는 80년 넘은 세월 동안 쌓아 올린 고집이 서려 있었다. 숨소리마저 죽은 듯한 공간에서 오후 햇살만이 느리게 흘러 발치에 고여 들었다.

이윽고 준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총리나 비서실장 쪽으로 연락 넣고 있습니다.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회장이 준섭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일주일이다.”

“네?”

“네가 처리해 보겠다고 뛰어다닌 지 일주일이라는 말이다.”

준섭이 날짜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서우가 빼돌린 성과급은 바로 맞춰 놓느라 애썼다.”

준섭이 저도 모르게 눈썹 머리를 찡그리며 회장을 쳐다보았다. 은밀하게 진행한 일인데, 회장의 눈과 귀가 이미 고스란히 진행을 보고하고 있었다.

“부회장이 그룹에 비상장주를 사들이게 해서 손해 입힌 금액이 310억이가? 펀드에서 개인 유용했던 규모가 478억.”

“네.”

“더 있겠지.”

“현재로선……. 네.”

“서우는 큰소리 팽팽 하던데.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 정당한 거래다. 재판에 가면 반드시 승소한다. 그게 맞나?”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서우가 근신 중에 이런 일을 다시 벌인 까닭은 태시환 회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TK그룹을 장악하기 위함에 있다. 수년 전부터 TK는 최일문이 보유한 TK어패럴 주를 감안하여 그룹 지배 구조를 개편하고 합병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자까지 지배하는 방식으로 큰 얼개가 진행 중이었다. 그룹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불안감이 태서우의 신중하지 못한 성정에 불을 지폈고, 결국 과욕을 부리다 제동이 걸렸다.

준섭이 태서우가 태시환 회장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움직였다는 점을 집어내 보고하지 않았지만, 보여지는 그림이 회장이 눈치채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서우가 나를 진짜 뒷방으로 보내려고 급했구나. 가만 있어도 곧 흙 속으로 갈 건데.”

“왜 그런 말씀을…….”

회장이 얇은 입술을 벌리며 웃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니가 가져온 이야기가 그 말이다.”

준섭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준섭이 니가, 서우 팔다리를 자르고 이제 목을 자른다고 하던데?”

“회장님.”

“내보고 칼 쥐여 주면서 내 아들 목을 치라 이 말이가?”

“그렇지 않습니다.”

회장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책상 위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그러는 동작마저도 고상하게 나이가 든 피아니스트의 손을 연상시킬 만큼 회장에겐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현혹되어 회장의 집요하고 잔인한 본성을 알아채지 못한다.

“준섭아.”

“네.”

“무릎이 아프다.”

준섭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책상 옆으로 돌아가 무릎을 대고 바닥에 앉았다.

근육이 쪼그라들어, 수분이 마른 딱딱한 나뭇가지 같은 허벅지를 쓸어내리고 뼈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무릎을 매만졌다. 주위를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누르자 회장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종아리를 주무르며 내려가는 손길에 회장이 잠에 취한 늙은 고양이처럼 실눈을 떴다.

“그렇지 않다고 했나?”

준섭이 뜻을 몰라 가만히 있자 회장이 준섭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서우 목을 치라는 말 말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손에 칼은 쥐여 놓고 맘에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회장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라면, 그 칼로 준섭이 니 목을 칠까.”

회장의 발끝이 햇빛에 잠겨 있다. 그곳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준섭은 답 없이 종아리를 다시 주무르기 시작했다. 회장의 손이 준섭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만해라. 힘들다.”

“괜찮습니다.”

“전자 글로벌 전략 회의가 1월 10일로 잡혔나?”

“네.”

“그때까지 마무리 잘하고, 좀 쉬어라.”

준섭이 고개를 들었다. 그룹 수습은 어느 정도 되었고, 서우의 위협이 되는 준섭을 밀어내겠다는 뜻이다. 사냥을 마쳤으니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말인가. 회장의 눈에서는 읽어 낼 속마음이 없다. 원래 그런 눈이었다. 찌르는 햇빛 때문에 눈알이 시렸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늦었다. 회사 가 봐라.”

“네.”

준섭이 일어서면서 습관적으로 회장의 손을 잡아 주무르고 왼팔과 어깨까지 가볍게 지압했다.

“가 보겠습니다.”

“그래.”

회장의 눈동자가 끈질기게 준섭의 뒷모습을 좇았다. 서재 문이 닫힌 후에도 한동안 허공 한 지점에 고정시킨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회장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몸을 갉아 대는 익숙한 통증이 어깨로부터 팔로 뻗어 나간다. 얼음 조각을 올려놓은 듯 시린 무릎 위로 야윈 손을 올렸다. 시린 건 주름지고 말라비틀어진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준섭을 다시 호출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제 손가락으로 무릎을 눌러 본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답하던 준섭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실망도 원망도 없다. 그러길 바랐다는 듯이 굴어 자극하지도 않는다. 회장이 무릎을 만지던 제 손을 떼었다. 건조한 손바닥을 눈앞에 펼치고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 *

“글로벌 전략 회의 전, 조직 개편 방향이 마무리되었으면 합니다. AI 연구 센터가 IT 연구소 산하에 배치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의견이 많습니다. CE 부문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인데, 향후 10년 안에 CE 분야의 기본과 혁신 모두 AI을 배제하고는 논할 수 없다는 의견에는 큰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압니다.”

퇴근 시간을 훨씬 넘겨 저녁 식사 후 소집된 소회의였다. 무선 사업부와 네트워크 사업부 사장 둘, 전무 한 명만 참석한 자리에서 준섭은 5G 전략 방향 및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점검한 후, AI 관련 조직 개편 주제로 넘어갔다.

준섭이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AI가 미래 핵심 전략으로, 목표인 동시에 전사적인 밑그림의 축이 되어야 합니다. 5G 네트워크 사업에서도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비추어 볼 때…….”

송백재를 다녀온 후, 준섭은 연달아 회의 세 개를 잡았다. 급히 서두르는 이유를 용원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우경은 소회의에 배석하였고, 용원은 준섭이 지시한 다른 업무 때문에 늦은 오후부터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TK전자 수원 사업장으로 내려갔다. 양지은 대리는 8시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가 여태 퇴근하지 않았냐는 준섭의 말에 상처받은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무음으로 해 둔 준섭의 핸드폰이 깜박거렸다. 연속적으로 전화가 들어오는 것 같은데, 준섭은 핸드폰을 흘끗 보고는 회의를 진행했다. 비서실 쪽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우경이 준섭과 눈을 맞췄다. 준섭이 조금 성가시다는 내색을 하며 나가 보라 손짓했다.

“네, 전략기획본부실…….”

- 본부장님 거기 계시죠? 나 유 실장입니다.

우경의 말을 끊고서 유 실장이 급하게 준섭을 찾았다.

“지금 회의 중이세요.”

- 누구 있어요? 거기 지금 누구, 최용원 과장 있어요?

“아니요. 최 과장은 오후에 수원 사업장으로 외근 갔습니다.”

- 그럼 회의에는 누가 참석했죠?

“저…….”

아무리 유인목 실장이라지만 전기본 회의 참석자를 허락 없이 다 말해도 되는지 우경이 멈칫거리자, 유 실장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 전자 사장님들이죠?

“네.”

- 연 팀장. 내가 지금 가는 중인데 늦을 거 같아. 혹시 모르니까 보안팀 전화해서 본부실 쪽으로 오라고 해요.

“네?”

- 아, 아니에요. 관둡시다. 말 나는 건……. 내가 요청할지 말지 좀 생각해 볼게요. 빨리 본부장님 연결해요.

우경이 전화를 돌리고 소회의실로 들어갔다. 울리는 벨 소리에 준섭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었다. 우경이 가까이 다가가서 상체를 숙이고 말했다.

“유 실장님이 급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준섭이 양해를 구하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네. 실장님.”

준섭이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옆에 서 있는 우경에게 수화기 너머 유 실장 음성이 드문드문 들렸다.

선택하라고…….

손해보전, 사재……. 구속.

“지금 여기로 오신다는 겁니까?”

준섭의 말에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알겠습니다.”

준섭이 수화기를 내리기 전, 본부실 문이 부서질 듯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고 본부장실 문을 열었다가 닫는 소리가 이어졌다.

“태준섭 본부장! 어디야? 여기 있어?”

흥분한 서우의 목소리였다. 소회의실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부회장님.”

문가에 서서, 서우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뒤따라 들어온 기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연방 고개만 숙였다. 준섭을 향해 다가오는 서우의 걸음이 불안정했다. 서우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사가 따라붙었지만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준섭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서우를 향해 물었다.

“저에게 하실 말쓰음? 어디서 고개 빳빳이 들고……,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서우가 숨을 내쉴 때마다 알코올 냄새가 훅하게 끼쳤다. 준섭이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회의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내일 다시 미팅 요청드리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준섭을 향해 임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그들을 노려보는 서우를 의식하고는 흐흠, 곤란한 듯 헛기침을 했다.

“앉으십시오. 부회장님.”

준섭이 서우에게 자리를 권하자, 서로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연 팀장도 나가 보세요.”

침착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고, 우경과 눈이 마주치자 준섭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부회장의 기사와 같이 회의실 밖으로 나와 우경은 차마 자리에 앉지 못하고 근처를 서성였다. 소회의실 밖으로 서우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우경이 초조함 때문에 깍지 낀 양손을 입가로 올리고 저도 모르게 잘근거리며 씹어 댔다. 진동 소리에 고개를 들었지만 부회장을 모시고 온 기사의 핸드폰이었다.

“네.”

기사가 전화를 받으며 본부실 밖으로 나갔다. 우경은 제 핸드폰을 들고는 연락처를 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데 딱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유 실장님은 오는 중이라 했고 보안팀에게는 연락을 보류하라고 했으니, 그럼 누구…….

“아…….”

강우식 대리.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우경은 서둘러 강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연 팀장님.

“강 대리님, 지금 혹시 어디세요? 회사 계시나요?”

- 회사 근처예요. 무슨 일이세요? 본부장님이 찾으십니까?

“그게……, 여기 일이 좀 있어요. 본부실로 오실 수 있나요?”

- 네, 네.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우식이 착실하게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하는 동안에도 소회의실에서는 서우의 격앙된 음성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네가 감히, 쓰레기 같은 녀석이, 노친네 눈을 가리고…….

준섭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우경은 회의실 문 앞으로 다가가 기대어 섰다.

“이런 식으로 나를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면 오산이지. 멍청한 놈이.”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들은 바가 없고 무슨 말씀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수족을 자르고 이제 나를 치겠다는 네 수작을 모르는 인간이 어디 있다고, 어? 글로벌 전략 회의 때마다 유럽, 유럽 떠들더니 그때부터 내 자리 만드느라 그랬어?”

“부회장님.”

준섭이 주먹을 쥐어 이마를 문질렀다. 저녁도 거르고 스트레이트로 다섯 시간째 회의 중이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준섭이 수화기를 들자 서우가 벌떡 일어서서 전화기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어디에 뭘! 뭘 알아봐!”

서우는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로 주먹을 쥐고 휘둘렀다.

“아, 이때다 하고서 또 송백재에 쪼르르 이르려고? 할아버지 도와주세요, 그런 소릴 할 참이야? 이런 쥐새끼 같은…….”

서우가 분을 풀지 못하고 회의실 랩톱을 집어 던지고 손에 잡히는 대로 서류를 발기발기 찢어 밟기 시작했다.

“그만하시죠.”

준섭이 서우의 팔을 잡자, 서우가 찢어지는 목소리를 냈다.

“이거 놔아! 안 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우경이 회의실 문고리를 비틀었다.

“이거 놓으라고오!”

찢어지는 소리를 지르며 서우가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준섭이 꿈쩍도 하지 않자 허공에 발길질을 해 대다가 준섭이 몸에서 손을 떼자마자 제풀에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서우가 바닥에 손바닥을 짚고서 준섭을 노려보았다. 몹시 분하다는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서우의 눈이 뒤집혀있었다.

“할아버지? 하핫, 너 같은 게 어떻게 TK를.”

서우가 검지로 준섭을 찌를 듯이 가리켰다.

“야, 너……. 그 겨울 일을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회장님이랑 딜했지? 골칫덩어리 니 아버지 해결해 주면 너 받아 주는 걸로. 내가, 다 알아. 내가 니 얼굴 볼 때마다 소름 돋아서. 강준, 강지욱이 아들! 어? 야아. 니가 무슨 태, 태, 태준섭이야. 너 강준, 쓰레기 양아치 강지욱이 아들이잖아! 니가 죽인 강지욱 아들, 강준!”

니가 죽인 강지욱……. 우경이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노친네야 서희 죽고 눈 돌아가서 뵈는 게 없었다고 치고 너는 돈에 눈이 돌았잖아. 니 애비처럼, 돈에 환장해서. 우리가 너무 점잖은 사람들이라, 저 불쌍한 것. 오죽하면 애비까지 기어이 저런 식으로 죽이면서 송백재에 들러붙었나……, 싶어서 응? 그래서 눈 감고 봐줬어. 너, 인간 취급해 주면서 가족 대우해 주면서. 그런데 그 대가가 등에 칼 꽂는 거네? 음흉한 놈. 인간도 아닌 새끼를, 지 애비 죽인 새끼를 받아 준 것부터가! 우리 집안 수치지.”

준섭의 시선이 악다구니를 쓰는 서우를 넘어 우경을 향했다. 멀지 않은 거리인데, 우경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가세요.”

우경을 향한 준섭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우경이 문가에 우두커니 선 채로 움직이지 못하자, 준섭이 다시 말했다.

“괜찮습니다. 나가 보세요.”

우경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회의실을 나오는데 눈앞이 핑글 돌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는데도 검고 붉게 얼룩진 필터를 끼운 듯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움직이다가 툭 무언가에 부딪혀 고개를 들어 보니 태이섭이었다.

“어, 언제…….”

“방금이요. 기사가 알려 줘서.”

이섭이 우경의 팔을 잡고 안색을 살피려는 듯 얼굴을 기울였다.

“회의실에…… 가 보세요. 저는 어떻게 할 수가…….”

이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서우의 기사와 막 들어선 우식이 이섭의 뒤를 따랐다. 우경은 이마를 짚으며 벽에 기대어 섰다. 막무가내로 뻗대는 서우를 이섭이 조곤조곤 설득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우경은 꼼짝하지 못하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회의실은 이제 조용해졌는데, 서우의 흥분된 고성과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 준섭에 대한 독설이 드문드문 재생되어, 우경의 몸을 휘감아 돌았다.

잠시 후, 이섭이 여전히 나가기를 거부하는 서우를 붙잡고 회의실을 나오고 우식과 기사가 이섭을 도왔다. 우경을 지나치며 짧게 눈이 마주쳤지만 이섭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도착한 유 실장을 맞닥뜨리고는 서우가 욕설을 내뱉었다.

“야아, 여기 재수 없는 인간이 또 하나 더 있네.”

이섭이 서우의 팔을 끌어 밖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소리를 높였다.

“유 실장, 여우처럼 굴지 마. 송백재가 천년만년 송백재일 줄 알아?”

유 실장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뿐이었다. 아직 얼떨떨한 상태인 우경을 한 번 쳐다보고 열린 문을 통해 회의실을 보더니 상황을 알겠다는 듯 아무것도 묻지 않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닫힌 문 너머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우경은 멍하니 벽에 붙은 시계만 보고 있었다. 초침과 분침이 움직이는 모양을 10여분 쯤 지켜봤을 때 유 실장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실장님.”

“연 팀장 여태 이러고 서 있었어요?”

“아.”

우경은 그제야 자신이 벽에 붙박이처럼 기대어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 실장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한바탕 난리였죠?”

“네.”

“고생했어요.”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유 실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퇴근하라고 전하시던데.”

“네…….”

우경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답을 하며 회의실 문을 흘끗 바라보았다.

“들어가 보세요.”

유 실장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던졌다.

“많이 시달렸나 봐요. 저런 얼굴은 또 오랜만이네요. 성인 되고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빤히 쳐다보는 우경을 향해 유 실장이 설핏 웃어 보이고 본부실을 나갔다.

유 실장이 나간 후에도, 우경은 회의실 닫힌 문만 길게 쳐다보았다. 문 앞까지 다가가 문고리를 잡으려다 말고 뒤로 물러섰다.

회의실 문 맞은편에 우두커니 서서, 우경은 좀체 움직이지 못했다. 서우의 끔찍한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을 듣는 모습을 우경이 보았는데 준섭의 기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오늘은 우경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을지도 몰랐다.

우경은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회의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고 안에 있는 준섭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경은 회의실 의자에 기대어 앉은 준섭의 모습을 상상했다. 눈을 감고 이마에 팔을 올리고서 잠시 잠이 들었을지도, 잠이 든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에 잠겼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서우, 이섭, 송백재…….

강지욱, 아버지…….

악을 쓰는 서우는 이마에 핏대가 솟고 금방이라도 몸 한군데가 터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격렬한 감정으로 부풀었는데, 그런 말을 듣는 준섭에게서는 아무런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우경은 ‘나가 보세요.’ 하고 말하던 준섭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떠올렸다. 조금 창백해진 듯한, 얼굴이었다. 추워 보이기도 했다. 자꾸만 그 장면을 반복해서 생각하자 준섭의 얼굴이 점점 더 슬프게 느껴졌다. 아마도, 우경의 감정이 이입이 되어 그럴지도 모른다.

눈앞에 닫힌 문을 열고 싶은데, 차마 열 수가 없다. 준섭이 또 덤덤한 얼굴로 ‘왜 여태 안 갔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가 보세요. 괜찮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우경은 결국 준섭에게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하고 밀려나 버릴 테니까. 준섭이 깊이 넣어 둔 창백하고 흰, 차가운 슬픔 같은 건 영원히 나누지 못할 테니까.

하염없이 준섭을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현실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과거의 시간들이 빠르게 순서가 뒤엉키며 지나갔다.

기다림으로 시작했던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준섭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TK 사옥으로 찾아와 로비에서 서성이던 첫날도, 인도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태준섭의 모습을 잡기 위해 공항에서 기다리던 날도, 그리고 TK로 첫 출근을 하고 33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변하는 층수만 바라보며 기다린 날도…….

‘나 보러 왔어요?’

‘본부장님을 알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나를 제대로 알게 되면 말이죠. 연우경이 실망할 텐데…….’

‘아니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날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선 겨우 얻어 낸 30분을 위해 우경은 다시 호텔 로비에서 세 시간도 넘게 저녁도 먹지 못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우경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떨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제발, 제발, 제발……. 한 번만.

간절함을 반복하며 견뎌 낸 시간들이었다. 우경은 손을 맞잡아 기도하듯이 깍지를 꼈다.

제발…….

지난번 기다림과 다르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감정이 북받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미련 없이 떠나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러지 않을 수 있다고, 떠나지 않아도 될 만한 근거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그래서 내내 우경에 대한 준섭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 순도와 크기를 재어 보려 애썼다. 그토록 냉담하고 정확한 남자가 스스로 선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쩌면 어쩌면……. 하는 기대가 하루에도 몇 번씩 우경을 들썩이게 했다.

우경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물 같은 건 흘리기 싫었다.

서우의 말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가 없지만 준섭의 상황은 진실에 가깝게 알게 되었다. 긴 세월을 이런 식으로 버텨 온 사람이라면 다른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태준섭은 오로지 간절한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깎아 내고 버리고 베어 내면서, 기다렸을 테니까.

천장 불빛이 망막에 아지랑이 같은 얼룩을 만들었다. 어지러워 우경은 눈을 감았다.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에 우경이 감은 눈을 떴다. 회의실을 나서던 준섭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퇴근하라고 했는데…….”

“들었습니다.”

“나, 기다렸습니까?”

우경이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왜 여기, 문 앞에서.”

“저기에선, 가라고……. 하면…….”

우경은 목이 꽉 메어 말을 멈추었다.

“응?”

피로감이 진득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서 준섭이 우경의 말을 기다렸다.

“저기 앉아서 기다리면…… 그냥 지나갈까 봐.”

우경이 목이 메어 까슬한 목소리로 원망했다.

“괜찮습니다. 가 보세요. 그럴까 봐!”

준섭이 말없이 팔을 벌렸다. 우경이 여전히 서 있자 고개를 까닥했다. 여태 애타게 기다렸던 사람인데, 다가가는 걸음은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구두 끝이 겹칠 만큼 가까이 다가가서 우경이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우경이 먼저 다가가 안은 적이 없었다. 늘 준섭이 먼저 팔을 뻗어 우경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지막 한 걸음을 떼어, 우경은 준섭에게로 들어갔다. 벌린 품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뺨을 기대었다. 등을 두르는 팔이 튼튼하고 안온하다.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위로를 받고 있다. 준섭의 손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가 뒤통수를 쓸어내리고 등을 두드렸다. 몰랐는데 우경은 울고 있었다.

* * *

느리게 내쉬는 숨이 서로의 살갗에 스며들었다. 준섭은 눈으로만 우경을 쓰다듬었다. 섬세한 윤곽선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는 동안 우경의 여리고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고, 핥고, 깨물고, 삼킬 듯이 빨아들이고 싶다는 충동이 온몸을 쿡쿡 들쑤셨다. 준섭은 함부로 뻗어 나가려는 손에 경고를 한다. 닿고 싶은 욕망은 멈출 수가 없어, 결국 욕심대로 굴어 버리게 되니까.

길고 좁은 창으로 가끔씩 들이치는 햇빛처럼, 한 줄기씩 넘쳐흐르는 온천수처럼, 우경은 차가운 방을 잠시만 데우고, 얼어붙은 발을 스치며 흘러갔다. 짧은 따뜻함은 긴 추위로 남아, 준섭은 언제부턴가 제 몸을 끌어안고서야 잠이 들었다.

악몽에서 깨는 밤이면, 그래서 다시 한 번 단단히 스스로를 감싸 안아 잠을 청하는 밤이면 얇은 줄 하나에 매달려 공중을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거센 눈바람에 몸이 흔들리는데 할 수 있는 거라곤 어깨를 웅크리고 잡은 줄을 필사적으로 붙잡는 것뿐…….

그리하여 우경과의 정사는 늘 격렬해지곤 했다. 이 지점을 넘어서면, 한 번 더 넘어서면 차가운 구속이 깨어질 것만 같아, 열락과 환각으로 만들어진 날개를 달고 제대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아…….

어리석은 짓이다. 언제나 떠올랐던 만큼 거꾸로 처박혔다. 추락하는 크레바스는 깊고 차가워 늘 겪었던 악몽의 밤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그러니, 탐하는 것을 그만해야 한다. 오늘처럼 가슴속 바람구멍이 커져 버린 날은.

회의실에서 서우의 폭언은 견딜 수 있었다. 지나갈 파도니까. 고작 파도로는 적시기만 할 뿐 파괴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몸을 단단하게 긴장시키고 발끝에 힘을 주고, 눈을 감지 않고서 버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우경을 본 순간 준섭의 무언가가 툭,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해 금이 잔뜩 가 버린 오래된 성벽처럼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와르르 허물어지면서도 경악으로 커다래지는 우경의 눈을 보았다. 들은 소리를 믿을 수 없어 굳어지는 뺨도. 두려움에 떨리는 입술도.

끔찍하겠지. 내가.

너 같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겠지.

준섭은 엄마를 잃은 겨울로, 아버지를 죽인 겨울로, 그때의 무력하고 두려움 많은 아이로 돌아가 다시 차가운 겨울로 내던져졌다.

“나가 보세요, 괜찮습니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마지막 힘을 쥐어짜야 했다. 돌아서는 우경을 보며, 뒤이어 닫히는 문을 보며 준섭은 눈을 감았다. 눈앞이 허물어지는 성벽처럼 조각조각 바스러졌다.

죗값이겠지. 그런 체념이 목울대를 짓눌렀다.

서우의 모습이 흐릿하게 뭉개졌다. 악을 쓰는 소리도 먼 곳에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고막을 흔들다가 정보화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오직 마지막으로 지욱을 보았던 날만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준아.”

물러서는 준섭을 향해 뻗어 오는 손, 준섭의 손과 꼭 닮은 손이 떨렸다. 저를 올가미 삼아 엄마를 사냥한 아버지.

“싫어. 가까이 오지 말아요.”

꼭 닮은 얼굴도 거울처럼 같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준섭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뱉어 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나 때문에, 다……. 전부 다……. 엄마가 불행했던 것도, 죽은 것도 나 때문이고!”

“그게 무슨 소리냐. 누가 그래? 태시환 회장이 그래? 서우가 그래? 누가, 누가 그래? 감히 너한테!”

준섭이 이를 악물었다.

“착각 말아요. 나 그 집 사람들 얼굴 구경도 못 했으니까. 할아버지도, 아니, 회장님도 뉴욕에서 열다섯 살이 마지막이었어. 날, 그 집 사람 취급해 주는 줄 알아? 아직도 그런 기대를 해요? 엄마가 죽었는데 할아버지한테 내가 무슨 상관이겠어!”

“그럼, 그런 소릴 왜 해!”

“몰라서 물어요? 나를 올가미 삼아 엄마를 잡았고, 이번엔 나를 잡고서 TK? 꿈도 꾸지 말아요. 뜻대로는 안 돼. 내가 그렇게 못 하게 할 거야. 내가 제대로 망가져 버릴 테니까.”

“뭐라고? 망가져? 그게 무슨 뜻이야!”

지욱이 준섭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소리를 높였다.

“강준! 어떻게 부모 앞에서 그런 말을 지껄여! 몹쓸 자식.”

준섭이 타이르는 지욱을 향해 비웃음을 보였다.

“왜, 말뿐일 것 같아요? 내가 당신의 역작을 망가뜨리지 못할 거 같아? 사라져 버리지 못할 거 같아요? 내가? 지금 당장 눈앞에서 죽어 줄 수도 있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뺨이 돌아갔다. 고개를 들자 때린 사람이 더 황망한 얼굴이었다. 장난으로 꿀밤조차 때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유쾌하고 건강한, 늘 준섭을 보는 눈에는 별이라도 품은 것처럼 반짝이는 빛을 보이던 아빠였다.

“주, 준아. 미안하다. 내가, 내가…….”

지욱이 다가와 붉어진 뺨으로 손을 뻗었다. 준섭이 단호하게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목이 막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있는데, 뱃속에서 웃음이 시작되었다. 웃음이 몸을 흔들며 터져 나왔다.

“준아.”

지욱이 다시 다가왔다.

“준이 너 너무 보고 싶었…….”

언제나 준섭을 볼 때면 지욱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내 아들, 우리 준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기억을 지우고 싶은 최근의 만남까지…….

지욱의 눈에 또 별이 떠오른다. 눈물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까. 준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엔 TK 회장님한테서 뭘 뜯어낼 작정입니까?”

“준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이제 그만. 그만하라고!”

“그건, 내가 설명할게.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너랑 같이……. 이제 같이 살고 싶은데……. 너무 보고 싶은데. 그래서, 그래서…….”

준섭이 지욱이 다가온 만큼 물러섰다. 고개를 저으며 비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하나만 알아 둬요. 한 번만 더 나를 찾아오는 날엔, TK 고리 따위 눈앞에서 영원히 잃게 될 거니까.”

뺨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준섭이 눈을 떴다. 마주 보고 누워 우경이 준섭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뺨을 쓰다듬었다.

“잠들었나 했어요.”

“아니.”

준섭이 우경의 손을 잡아 손가락 끝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검지를 입술로 물었다 떼어 내며 말했다.

“집에 가야지…….”

“아직, 조금 더.”

준섭이 희미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우경이 움직여 몸을 꽉 붙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준섭은 품에 들어온 우경을 팔다리로 감싸 안고는 정수리에 턱을 대었다. 꼭 맞는 블록처럼 준섭의 공간을 채우고서야 우경은 눈을 감았다. 우경의 보드라운 머리칼이 준섭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미지근한 숨이 한 번씩 스며들고,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규칙적으로 서로에게 옮아왔다.

회의실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우경을 본 순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차마 다가가지 못해 준섭은 자리에 서서 팔을 벌렸다. 우경이 조금씩 다가와 거리가 좁혀지자, 손끝부터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품에 들어와 뺨을 기대었을 때, 눈바람 속에 오랫동안 버려진 고성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던 몸이, 툭툭 금이 가며 벌어졌다.

틈 사이사이로, 사이, 사이로……, 그리하여 가슴 깊숙이 텅 빈 구멍 속으로 우경이 들어왔다. 제 몫이 아닌 햇빛이, 더운 물이, 저릴 만큼 따스한 온기가……. 준섭에게 스며들었다.

아귀의 입처럼 뚫린 구멍,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추위.

무엇을 빼앗기는지도 모르면서 우경은 울고 있었다.

* * *

그사이 겨울비가 내렸는지, 도로가 젖어 있다. 부옇게 흐려지는 차창을 내리자 습기를 머금은 겨울밤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우경의 집으로 가는 동안, 구름이 뭉클뭉클 밤하늘을 느리게 흘러 다녔다.

아파트 동 앞에 도착했지만 우경은 차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시보드의 시계 숫자만 바라보면서 말했다.

“일기 예보 봤는데, 새벽에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어요.”

“응.”

준섭이 운전대를 잡았던 손을 뻗어 우경의 어깨를 감쌌다. 서로를 향해 상체가 다정하게 기울어졌다. 준섭의 가슴 위로 비스듬히 몸을 겹치고서 우경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눈은 예쁜데 눈 내린 출근길은 싫어요. 본부장님은 기사가 운전하니 상관없겠지만…….”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우경은 계속 다른 말만 했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많을 거래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려나. 그래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좋으니까, 눈이 많이 내리면 좋겠어요.”

“눈 같은 거, 나는 싫어해.”

덤덤하지만 감정이 실려 있는 말투였다. 준섭이 고개를 반쯤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우경의 귓등을 쓰다듬고 입술을 만지다가 다시 목덜미에 기대게 하면서 말했다. 준섭의 것 같지 않게 부드럽고 여린 살에 볼을 대고서 우경은 눈을 감았다. 뒤이어 들리는 드문드문 내어 쉬는 숨이나 끊어지는 문장 역시 준섭의 것 같지가 않았다.

“겨울이 싫고, 12월도 싫고, 크리스마스도 질색이야. 엄마가 돌아가신 날도 겨울……. 그래, 아버지도…… 눈 오는 겨울날에……. 말대로 내가 죽였을지도. 설산에 방한 장비 없이 들어간 그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모르는 척 살기로 했으니까.”

고개를 들어 준섭의 눈을 보고 싶었지만 준섭이 우경의 얼굴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이어 뺨을 쓰다듬어 내리던 손바닥이 눈을 덮었다. 우경은 준섭의 어깨와 목, 얼굴이 이루는 오목한 틈 사이에 꼭 맞는 조각처럼 들어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나를 스스로 망가뜨려 버릴 거라고, 사라져 줄 거라고, 죽어 버리면 TK 끈 따위 없어져 버릴 거라고…….”

준섭의 몸에 틈 없이 붙은 귀를 통해, 말소리는 메아리처럼 모호하게 울려 들어왔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밤마다, 매일 매일 매일, 엄마가 보고 싶고, 내가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자책을 하면서.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준섭의 뜨거운 숨이 천천히 우경에게로 내려왔다.

“그래서 나는 나를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었어.”

준섭이 눈을 가렸던 손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우경의 젖은 눈두덩을 눌렀다가 떼어 냈다.

“울지 마. 나는 살아 있으니까. 설산에서 죽어 버린 건 아버지였지.”

우경의 눈물이 묻은 손바닥을 제 입술에 문지르면서, 준섭은 눈이 붉어졌다.

“나 보란 듯이 뒤통수치면서. 평생 그 설산의 악몽에 내 발을 묶으면서.”

우경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준섭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뭘 또 얼마나 회장한테서 뜯어 가려고 하냐고 진저리치는 나한테 아버지가 그랬어. 이번에는 아니라고, 그냥 나와 같이 살고 싶었다고. 믿지 않았지. 아니, 들리지도 않았어. 마지막까지 쥐고 있었다는 사진 속의 나는 어려 보였어. 웃고 있더라. 그 사진을 찍어 주던 젊은 아버지가 기억이 났어. ‘준아, 준아’ 부르면서 크게 웃으면서, 젊은 아버지는 커다란 나무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 최근에 사들였다는 캐나다 시골집과 농장……. 어쩌면 아버지가 정말 나와 거기서 살고 싶었던 걸까. 나를 데리고 오려고 악착같이 뜯어내고 있었던 걸까. 기막히게, 상대는 송백재인데. ……바보같이, 그런다고 내가 용서하지도 않을 텐데.”

겨울 눈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준섭이 확인하듯 덧붙였다.

“어리석고, 안이하고, 이기적이지. 나를 데리고 가고 싶었다면 나만 데리고 왔어야지. 아무리 초라하고 가난해도 아버지가 번 돈으로 마련한 집이었다면, 그래. 용서했을지도…….”

준섭이 뺨에 붙은 우경의 손을 떼어 내며 쓰게 웃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어떻게 한들 결국, 나는 송백재를 택했을지도 몰라. 아버지가 죽은 그해 겨울에 나는 태준섭으로 사는 인생을 선택했고, 아버지가 그토록 탐내던 TK로 편입되었어.”

긴말을 마칠 즈음 붉어졌던 준섭의 눈은 다시 검게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송백재를 택했다는 준섭이 낯설어 보였다. 십수 년의 세월을 설산의 악몽에 묶여 지내면서, 송백재를 선택한 본인의 결정을 증명해 내듯이 살아온 남자를, 우경은 서름하게 바라보았다.

고통과 상실을 버텨 내게 한 건 남자의 끈질긴 야망이었을까. 야망이든 집념이든 그 저울의 반대편에, 무엇이 올라간다 해도 무게의 축을 달라지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장이 얼음으로 문질러지는 것처럼 아리다. 그런 시간을 살아왔던 남자가 안타깝고, 그런 남자를 속절없이 사랑하게 된 백치 같은 자신이 가엾었다.

한없이 가까워져, 더할 수 없이 가까워져 마치 떨어져 나갔던 조각처럼 붙어 있었던 지금, 준섭이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우경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질문했다. 입술만큼이나 버석거리는 목소리였다.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해요?”

준섭의 입가에 쓴 웃음이 스쳤다.

“궁금해할 테니까.”

궁금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가장 깊숙한 내부를 열어 보인 이 순간의 고백이 아이러니하게도 연우경을 태준섭의 인생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밀어 내고 있다. 그렇게 버텨 왔던 태준섭의 인생에서 연우경이라는 가벼운 인연은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물살에 흘러가 버리는 종이배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경은 살피듯이 바라보는 준섭을 향해 태연한 척 말했다.

“네, 약간…… 궁금했어요.”

우경이 어색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제 올라갈게요.”

“잠시만.”

준섭이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쳐다보는 우경과 눈을 맞추지 않고서 우경의 왼손을 쥐었다. 코트를 걷고, 니트를 걷어 올리고 드러난 팔목에 스트랩을 채워 주었다. 손목시계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제품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있는 페이스 위에, 품질과 가격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이 주얼리 브랜드명이 적혀 있었다. 그 페이스 가장자리를 둘러 루비가 박혀 있고, 다시 그 주위를 겹겹이 둘러싸는 꽃잎 모양으로 만든 금빛 장식에 터키석과 루비가 세공되어 있었다. 뜻밖의 선물이었다.

“이건……, 뭐예요?”

“시계.”

준섭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조그만 바늘 두 개가 없다면 아무도 시계인지 모르겠어요.”

“페이스가 작긴 한데 시간이야 맞겠지.”

“이런 걸 왜 나한테 줘요?”

“주얼리 좋아한다며.”

지난번 단톡방 이야기였다. 그걸 맘에 담고 있었나…….

“고른다고 골랐는데, 맘에 안 들어?”

화려한 주얼리 매장에서 이것저것 들여다보며 고르고 있는 준섭의 모습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우경은 준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고르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면, 부러움에 가슴이 시렸을 것 같은데, 그 선물을 받는 당사자가 된 지금, 왜 가슴이 에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별로면, 다른 것도 사 줄게.”

“아니요. 좋아요. 눈부시게 예뻐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약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너무 화려해서요. 어디에 하고 다녀야 하나, 고민되네요. 아무래도 시계로는 못 쓸 거 같아요.”

“더 어울리네.”

“네?”

“쓸모없는 남자가 주는, 아름답고 쓸모없는 거니까.”

우경이 흐린 불빛 아래에서도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입술을 비집고서 한숨 같은 웃음이 나왔다.

“왜.”

남자의 내면은 갈라진 균열을 함부로 수선해 놓은 말라붙은 시멘트 벽 같을 텐데, 차분하게 묻는 남자의 얼굴은 미술가의 영혼을 담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쓸모없는 남자라는 준섭의 말은 자조적인 선언처럼 느껴졌다. 우경에게 쓸모없는 남자일 뿐이라는, 부드러운 경고였다. 그래서 정작 아름답고 쓸모없는 건 우경의 어설픈 사랑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경은 제 팔목을 감싸고 있는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반짝이는 아름다움은 깊이 숨겼다가 주름진 할머니가 되어 검푸른 바다에 던져야 하는 것일까.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경이 굳은 입술 끝을 올리며 생긋 웃었다.

“맞아요. 잘 어울리네요. 무섭게 비싼 남자가 주는 무섭게 비싼 선물이죠.”

우경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준섭이 소리 내어 웃었다. 우경은 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하자 목 끝까지 빠듯하게 슬픔이 차올랐다. 우경은 태연하게 인사했다.

“잘 자요.”

“응.”

우경은 손을 들어, 맘껏 눈물로 젖어 들지도 못하는 차갑고 검은 눈을 매만지고, 뺨을 스치며 내려가 준섭의 외투를 벌리고서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툭, 툭. 뛰는 준섭의 심장을 느끼며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편히, 잘 자요.”

준섭이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도 한 번 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입맞춤을 하며 속삭였다.

“좋은 꿈 꿔요.”

준섭이 떨어지려는 우경을 붙잡았다. 우경의 입술을 핥다가 응답하듯 벌어지는 입술로 준섭이 들어왔다.

발을 묶은 설산의 악몽 같은 거, 오늘 밤만은 희미해지길.

초라한 입맞춤으로 아름다운 이 사람을 고작, 오늘 밤 하루 정도는 지켜 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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