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17화 (17/23)

17장

준섭이 주먹 쥔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른 오전부터 달갑지 않은 전화로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네, 알겠습니다.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빌어먹을, 욕설을 혀끝으로 꾹 누르며 평온한 목소리를 만들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시각을 확인하는 눈이 흐릿하여 미간을 찡그렸다. 어서 통화를 마무리 해야하는데, 준섭은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상대는 예의 속에 심란한 마음을 감추고 있다. 갈등, 망설임, 걱정, 불안, 성가심…….

피가 바싹 마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태준섭이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하겠지. 과연 소문대로 외숙부를 단칼에 날려 버릴 만한 배짱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울 테고, 송백재가 아들을 어느 정도까지 보호하는 입장을 취할 수 있는지도 궁금할 테다. 그러면서 태준섭을 옥죌 수 있는 여러 고리들을 부지런히 수집하고 있겠지.

“물론, 그렇습니다. 송백재도 정부 방침을 이해하고 성심성의껏 돕겠다는 결심에 변함이 없으십니다. 내일 저녁에 뵙겠습니다.”

준섭이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 두었다. 상대는 성질을 못 이겨 핸드폰을 집어던졌으려나. 아랫사람들에게 번지수가 맞지 않는 짜증과 신경질을 쏟아부었을지도 모르겠다.

태서우의 개인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한 방식은 고전적이고 대담했다. 임원 급여 부풀리기, 계열사 펀드 투자금 유용하기 외에도 개인 보유 비상장 주식을 고가로 계열사에게 매입하도록 지시한 정황이 잡혔고, 그 비자금이 어떤 라인을 통해 누구에게로 전달되었는지 하는 뇌물 공여 역시 그림이 맞춰졌다.

뿐만 아니라 물산의 의도적인 손실 키우기와 주가 조작까지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합병 비율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려는 포석이겠지만 법으로 걸자면 걸릴 건이 한두 개가 아니다. 준섭이 부각되면서 불안감이 커진 서우가 경솔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몹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어느 정도까지 커버가 될 수 있는 범위인지 준섭으로서도 정확히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송백재에는 오늘 P 국회의원과 K 고검장이 함께하는 식사 후에 정리하여 보고할 생각이다.

준섭은 머리가 어찔하여 눈을 감고 등을 기대었다. 곧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답하고서 준섭은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단정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아마도 기대어 앉은 준섭을 발견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중이겠지.

감은 눈으로 우경을 천천히 그려 본다. 오늘은 하늘빛 트윈 니트와 아이보리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한데로 모아 묶어져 있고, 입술엔 핑크빛 립글로스, 스칠 때 나던 향은 과일맛과 바닐라맛이 났다. 지금처럼…….

준섭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손을 까닥 움직였다.

“이리 오세요.”

상상으로 완성했던 우경이 상상보다 조금 더 빠르게 준섭을 향해 걸어왔다. 근심스런 표정이다.

“어디, 안 좋으세요?”

“괜찮습니다.”

데스크 위로 파일을 놓으며 우경은 준섭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목요일 3시 S대학교에서 합동 취업 설명회가 있습니다. 오프닝 연설문입니다.”

준섭이 데스크 위로 팔을 뻗어 파일을 펼쳤다. 글자를 읽어 내리다 말고 눈썹 머리를 문질렀다.

“피곤하시면 나중에 검토하고 알려 주세요.”

“그래야겠네요.”

“혹시 열 있으세요? 눈이…….”

우경이 준섭의 이마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열이 나는 건 아닌데, 이런 위로라면 열병을 좀 앓아도 좋지 싶다. 포근한 느낌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요.”

우경이 손을 떼어 내자, 갑자기 솜이불을 빼앗긴 사람처럼 목덜미로 한기가 스쳤다. 준섭이 팔을 뻗어 우경의 허리를 휘감았다. 휙 끌어당기자 우경이 아, 소리를 지르다가 입을 다물었다. 우경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준섭이 숨을 들이켰다.

“왜 이러세요.”

어깨를 밀어내는 손이 냉정하다.

“추워서.”

우경이 밀어내기를 멈추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열 있어요?”

뺨 위에 다시 포근한 손이 닿았다.

“그런 거 같아.”

“감기예요? 혹시 목이 부었어요?”

우경이 편도를 짚어 보려는 듯 준섭의 목덜미로 손바닥을 내렸다. 손길이 간지러워 준섭은 목을 움츠리며 쿡쿡 웃었다. 준섭이 얼굴을 움직이고 웃을 때마다 우경이 바싹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서 준섭이 우경과 눈을 맞추었다. 가슴 위로 손을 올리자 우경이 움칫 몸을 떨었다. 뒤로 내빼는 몸은 다른 팔로 막자 고개를 저었다.

“한 번만.”

곤란한 듯 벌어졌다 다무는 입술이 예뻐 이젠 입술이 먹고 싶어진다. 무릎 위에 앉혀 놓고 길게 입을 맞추고, 폭신한 가슴을 맘껏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순간 벌써 아랫배가 단단해졌다.

“한 번도 안 되나.”

우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여기 앉을래?”

준섭이 제 허벅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본부장님.”

우경이 눈매를 찌푸렸다. 사무실에서는 엄숙한 얼굴로 사무적인 이야기만 하길 원하는 연우경이 질색하는 짓인 걸 알고 있다. 당연한 반응인데도 늘 기분이 상한다.

“냉정하네. 아픈 사람한테 ”

“약 드세요.”

여전히 가슴 위에 떨어질 듯 붙여 놓은 손을 떼어 내려는 듯 우경이 손을 올렸다. 단호하기도 하지. 준섭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서 손을 얌전히 떼어 냈지만 우경은 준섭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한 손은 손등을 잡고 다른 손으로 이마를 다시 짚으며 물었다.

“열감은 없어요. 두통인가요?”

“아니. 두통까지는 아니고,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무거워.”

이마를 조심스레 만져 주며 우경이 생긋 웃었다.

“저는 그럴 때, 백설이 발바닥 만지는데.”

우경이 무릎을 조금 굽히고 몸을 낮추더니 준섭의 손을 제 귓불로 이끌었다. 준섭이 웃음을 터트렸다.

“여긴 만져도 됩니까? 연우경 씨?”

놀리듯이 묻자 우경이 볼을 붉혔다.

“……네.”

눈을 맞췄다가 슬며시 아래로 내리까는 모습에 욕망이 한 단계 더 상승했다. 몇 번 주무르다가 귓불 뒤에 있는 점을 긁어내리자 우경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참을 수가 없어 입술을 맞대었다. 야박하게 다물어 버리는 입술에 혀를 대고 톡톡 두드렸다.

우경이 몸을 펴고 준섭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귓불을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되레 왼팔로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고 약간의 저항을 제지하고는 기어이 허벅지 위로 앉혀 두었다. 우경이 벌떡 일어서려고 하지만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른손은 여전히 귓불을 잡고 있었다. 우경이 입술을 깨물며 준섭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준섭은 상관없다는 듯 아랫입술을 물어 쭉 끌어당겼다. 혓바닥으로 아랫니와 속입술 사이를 들쑤시자 우경이 어깨를 밀어냈다.

“잠시만. 이대로…….”

말랑거리는 귓불을 꾹꾹 누르며 입술이 열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쑥 파고들었다. 하아, 우경의 뜨거운 숨이 젖은 입술에 닿자 단전에서 시작된 감각으로 귓등까지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젠장. 저도 모르게 욕설을 씹으며 준섭은 귓불을 만지던 손을 내려 가슴을 더듬었다. 우경이 손등을 잡았지만, 그 정도로 저지될 상태가 아니었다. 니트 위로 잡히는 가슴이 손안에서 이지러졌다. 싫다는 말을 하려는 혀를 깊이 빨아들이며 섞여 드는 타액을 마셨다. 잡고 있으면서도 만지고 싶고 삼키고 있으면서도 더 먹고 싶어졌다.

“밤, 오늘 밤에. 9시.”

우경이 답을 하지 않자 내장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다. 니트 위에서 브래지어 캡을 내리자 딱딱하게 솟은 부위가 선명하다.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우경이 숨을 삼켰다. 잇새로 파열음을 일으키면서 들어가는 숨소리가 신음만큼 색정적이다. 준섭이 다시 물었다.

“9시.”

우경이 인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 누르고 들어가 있어. 최대한 시간 맞출게.”

오래전 언젠가부터……, 몸속 어딘가 구멍이 난 사람처럼 바람이 일었다. 찬바람이 휘휘 부는 그곳에는 언제나 눈바람이 불었다. 엄마가 떠난 12월의 겨울이, 아버지가 얼어붙었던 강원도의 설산이 잠겨 있는 구멍이다. 12월이 끔찍하다. 크리스마스는 준섭에게 상실의 계절이다. 세상이 들뜨는 연말이면 그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메워지지 않는 구멍인데, 사라지지 않는 한기인데 알면서도 어리석게 온기를 탐하고 포근함을 삼키고 결국, 싫어하는 짓을 하고. 냉담한 얼굴이 싫어 더 짓궂게 괴롭히고 만다.

우경이 발갛게 부풀은 입술을 하고서 준섭을 바라보았다. 다른 곳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준섭은 제 입술을 깨물었다. 우경이 준섭의 입술 위로 제 것을 부드럽게 포갰다. 가슴으로 가해지는 감각 때문에 움찔거리면서도 한 번, 두 번, 깨문 입술을 차분하게 핥아 주고 새처럼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해요.”

“응.”

준섭은 손을 떼고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떼어 낼 줄 알았는데 우경이 귓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골치 아픈 생각이에요?”

“응.”

태서우가 싸지른 것들을 수습하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건드려야 할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것들에 태준섭을 얼마나 교묘하게 엮어 넣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먼저 칼을 뽑지 않으면, 언제 뒷목으로 칼이 들어올지 모를 일이다.

피곤하고 지겹다. 다섯 손가락은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와 같아 늘 자연스레 붙게 된다던 서희는, 서우를 애틋해했다. 배다른 언니인 지윤도 그리워했다. 한 번씩 물어보고 싶었다.

엄마,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세요.

어디까지 참아야 할까요.

어리석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경이 준섭의 머리를 손끝만으로 쓰다듬었다. 천치 같은 아이처럼 고민이 녹아내린다. 준섭은 습한 숨을 내뿜으며 눈을 감았다. 우경이 귓등을 다시 쓰다듬었다.

“나가 봐야 해요. 다음 스케줄 진행하셔야죠.”

“응.”

준섭이 고개를 들자 우경이 미련 없이 일어섰다. 떨어진 자리가 시려 준섭은 이를 맞물었다. 우경이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초콜릿 사 올까요?”

“응?”

“스트레스받으면 초콜릿 드신다면서요.”

“응.”

“맛있는 걸로 사 올게요. 편의점 아니고.”

“……응.”

고개를 끄덕였다. 우경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돌아섰다. 몇 걸음 걷다가 우경이 돌아다보며 말했다.

“아, 연설문 오늘까지는 보셔야 해요.”

“그럴게요.”

우경이 나간 후, 준섭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팔꿈치를 책상에 붙여 기울어진 머리에 손을 괴고서 잠시 그대로 멍하니 시선을 붙박았다. 휘휘 다시 겨울바람이 불었다.

* * *

일본 장인에게서 특별히 부탁해서 받았다는 매실 절임은 새콤달콤한 맛과 짭짤한 맛 두 가지였다. 한 알이 자두만큼 큰 최상품이기도 하지만, 그 맛이 절묘해서 울렁거리는 입덧이 사라진다고 했다.

“우리 윤아도 그것만 대서 먹었어.”

수진의 입덧에 좋다는 우메보시와 생강 절임은 지윤의 핑계였다. 본론은 따로 있었다. 최일문 교수 부인이 갤러리에 들러 준섭에 관해 물어봤다는 이야기였다. 선애는 뜻밖의 말에, 홍차 잔을 내리고서 지윤의 입만 바라보았다.

“최일문 교수 사모, 사람이 괜찮더라고. 이섭이 장가가면 장모가 잘 챙겨 주겠어. 인품도 좋고 야무지고. 갤러리 와서 실없는 소리도 없고 허세도 안 떠는데, 안목이 좋더라. 신예 작가 작품 두 개 골라서 갔어.”

“네, 형님. 그런데 최 교수 부인이 준섭이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해요? 뭘 물어보던가요?”

“특별한 건 없었는데? 궁금해하길래 내가 서희 이야기 좀 했어. 서희 죽고 회장님이 데리고 왔는데 준이 애비가 너무 욕심이 많아서 애 숨겨 두고 그러느라 호적은 좀 꼬였다고 둘러댔어. 호적이야 다시 살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묻길래 당연하다고 했지.”

“네?”

“아버지가 의지만 가지면 그런 거 아냐?”

“아, 네.”

선애가 감정을 감추려 시선을 찻잔 위로 떨어뜨렸다.

“준섭이 능력은 이미 알고 있고, 성품은 뭐……. 이섭이 처까지 스트레스 줄 사람은 아니니 맘 놓고 우리 집안 와도 됩니다, 라는 취지로 잘 말했어.”

지윤이 쿠키를 바사삭 베어 물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물어보는 거 아니겠어? 이섭이랑 결혼하면 그래도 가까운 친척이고 사촌이니까. 내 아들이야 한국에 절반은 없는 사람이고 준섭이는 TK에서 일하니까 알아 둬야겠다 싶지 않았을까?”

미끼를 던져 놓고는 모르는 척하기는. 선애가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러네요. 혼수 준비 때문에 궁금했을 수도 있고요.”

“혼수라니. 솔직히 걔가 들고 오는 지분이 얼만데. 그 어패럴 지분을 지렛대 삼아야 이섭이가 그룹을 장악할 수 있다며? 아, 아직은 준비 단계인가? 물론 그 전에 서우가 회장님 전자 지분을 받아야지. 얘, 그래도 니 남편더러 주식 시장 너무 건드리지 말라 그래. 우물가에서 뭐지? 숭늉이야, 김칫국이야? 아우, 나이 먹으니 이제 속담도 헷갈린다?”

지윤이 약 올리듯 빙글 웃고는 티 포트를 기울였다. 선애가 그 정도로는 까딱도 하지 않는다는 결연한 자세를 취하며, 나긋하게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혼사하니 생각나서 여쭤 봐요. 이섭이야 사정상 혼사가 늦어졌다고 해도, 준섭이도 나이가……. 제가 준섭이 외숙몬데 제대로 노릇을 못 하는 것 같아 맘이 쓰였어요. 이제 번듯하게 우리 집안이라 세상에 알리기도 했고, 선 자리 몇 군데 추려 놨어요. 올해가 가기 전에 자리 마련할까 해요. 형님 의견은 어떠세요?”

“준이 장가?”

지윤이 얼굴을 찡그렸다.

“송백재 노친네, 서희 대신 준이 끔찍하게 끼는 거 알지? 난 아버지가 평생 준이 꽉 쥐고서, 애 반병신 만들어 세상에도 안 내놓을 줄 알았다? 회사일 부려 먹으면서도 손자인 거 숨기고 애 피를 말렸잖아. 왜 그랬겠어? 자기 손자라 그러면 준섭이 날개 달까 봐, 서희처럼 훨훨 날아갈까 봐……. 징글징글한 집착이야.”

지윤이 몸을 부르르 떨자 꽉 붙은 원피스 차림이라 빵빵하게 채워 넣은 가슴이 출렁거렸다. 선애가 보이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노친네 집착이 그렇게 대를 이어 끈적하니? 어릴 때나 서희 계집애 부러워서 미쳐 버릴 거 같았지, 지금 같아서는 아우, 난 그런 애정 반에 반만 줄 기미만 보여도 버선발로 도망이다.”

지윤의 상스러운 표현이 거슬려 선애가 흘끗 주위를 살폈다. 좀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회사와 멀지 않은 호텔이었다. 다행히 주위 테이블이 한산하여 들을 만한 귀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요즘은 무슨 마음인지 준이 장가 보내야 한다고 바람을 넣네? 전에 일요일 식사 시간에도 준이한테 너 장가도 가야 하는데, 그러더라고. 안 봐도 뻔해.”

“네? 무슨 말씀이신지.”

지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서희 한풀이하듯이 완벽한 여자로 골라 보내려고 얼마나 극성이겠어.”

지윤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야 알다시피, 눈이 바닥이라서 울 애들도 대충 보냈잖아? 올케가 고르면 어련하겠니, 송백재 눈에 차는 여자로 데려오겠지 뭐.”

선애가 크게 함박 미소를 지었다.

“형님, 그럼 준섭이는 제가 알아서 잘 추진해 볼게요.”

“올케가 바쁘겠네. 이섭이 혼사 챙기랴 준섭이 챙기랴.”

“준섭이가 먼저죠.”

선애가 냅킨으로 입가를 눌렀다.

“생일이 한참 빠르잖아요. 먼저 가야죠.”

“동갑인데 생일은.”

최일문 딸이 만에 하나 준섭이 짝으로 될까 봐 미리 선수 치려는 네 속이 다 보인다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지윤이 선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윤이 무슨 의도로 최일문 딸과 준섭의 혼사 가능성을 흘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언질이 없었다고 해도 선애 역시 찜찜해하고 있던 터였다. 어떻든 준섭이 선 자리부터 빨리 잡아야 했다. 지윤과 나란히 라운지를 나서면서도 마음이 바빠 조금씩 걸음이 빨라졌는데, 지윤은 정문 쪽이 아닌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디, 가세요?”

선애의 부름에 지윤이 멈춰 서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케, 내가 수진이 축하 케이크 맡겨 놨다고 했잖아. 고새 잊었나 봐?”

처음부터 약속 장소도 수진이가 좋아하는 샤를로트 오 프레즈가 유명한 베이커리가 있는 호텔로 정하였는데, 다른 데 신경이 온통 빼앗겨서 잊어버렸다. 선애가 당황하며 사과했다.

“아, 맞아요. 그러셨죠. 죄송해요.”

“왜 그래?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

베이커리로 가는 동안에도 선애는 대체 왜, 최일문 부인이 지윤에게까지 찾아가서 준섭에 대해 물었는지 줄곧 그 생각뿐이었다.

선애와 지윤을 향해 인사하는 직원에게 답을 하면서도 선애는 반쯤 정신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지윤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못하다가 지윤이 입에서 나오는 이섭의 이름을 듣고서야 상대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맞죠? 저번에 태이섭 상무랑 같이 여기 이태리 식당에서 인사했는데. 전기본 비서실에서 일한다고 했죠?”

“안녕하세요? 관장님.”

지윤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은 스물일곱, 여덟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풍성한 갈색 머리칼 때문인지, 베이지색 코트나 흰 피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화려한 듯 은은한 분위기가 눈길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지윤이 여자를 향해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본부장님 심부름 왔습니다.”

“준섭이가 초콜릿 시켰어요? 스트레스 엄청 받았나 봐?”

지윤이 여자가 골라 놓은 초콜릿 박스를 보며 물었다.

“……네.”

“걔 캐러멜 들어간 거 좋아해요. 화이트는 손도 안 대요.”

지윤의 말을 듣고 판매 직원이 싹싹하게 물었다.

“종류 바꾸실 수도 있는데, 그럼 화이트 빼고 캐러멜이 채워진 걸로 더 넣을까요?”

“네, 감사합니다.”

여자가 초콜릿을 바꾸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선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볍게 목례를 건네자, 지윤이 소개했다.

“태이섭 상무 어머니.”

여자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기본 파견직이래. 이섭이 설명이 그렇더라고. 양찬구 사장 딸이 지금 거기 비서잖아? 같이 점심 먹으러 왔다가 우연히 이섭이랑 나 만나서 인사했어. 이름은 까먹었다. 뭐였죠?”

“연우경입니다.”

“그래요. 만나서 반가워요.”

선애의 시선이 찬찬히 우경을 담았다. 초콜릿 봉투를 받는 손 모습이나 직원에게 보이는 미소나 베이커리를 먼저 나가면서 인사하는 모양까지 사무적이다 싶을 만큼 깍듯한데 또 정감이 갔다. 경계심 없이 눈을 맞추고 웃는 웃음 때문인가…….

“예쁘지?”

선애가 여자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지윤이 불쑥 말을 던졌다.

“요즘 젊은 애들은 다 예쁘네요. 날씬하고.”

“아냐, 쟤가 분위기가 좋은 거야. 클래식하게 예뻐.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 느낌도 좋고, 목소리도 동글동글 안정적이고. 갤러리에서 일 시키면 딱이겠다 싶어서 유심히 봤거든.”

선애가 지윤을 보며 웃었다.

“형님은 가끔씩 되게 놀라워요.”

“왜?”

“관찰력이 좋으시다고 해야 하나.”

“그림 보고 사람 보고. 그 일이 내 직업인데 뭐.”

“하긴…….”

선애가 제법 큰 케이크 상자를 받아 들며 인사를 했다.

“수진이 입덧 좀 가라앉으면 찾아뵈라고 인사 시킬게요. 고맙습니다. 형님.”

“인사는 무슨. 잘 먹고 잘 자라 그래.”

지윤이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나 전화할 데가 있어. 먼저 가, 올케.”

“또 봬요.”

선애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 * *

부회장실에 올라갔던 준섭이 S대에 가려면 빠듯한 시각에 돌아왔다. 주차장으로 같이 내려가 조수석에 앉는 우경을 흘끗 바라보고는 준섭이 제 옆자리를 툭 두드렸다.

“눈이 좀 피곤합니다. 옆에서 원고를 읽어 주세요.”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 마치 잠이 든 듯 눈을 감고 있는 준섭의 옆에서 우경은 연설문을 천천히 읽었다. 정말 잠이라도 든 건가 고개를 길게 빼어 보는데 갑자기 준섭이 눈을 떴다.

“끝입니까?”

“아, 아니요.”

우경은 고개를 저으며 황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멈췄던 부분이 어디더라, 찾고 있는데 준섭이 말했다.

“일자리 창출은 기업의 과제입니다.”

우경이 빤히 쳐다보자 검지로 문장을 짚었다. 다 외웠으면서 왜 읽으라는 건가. 무안함에 고개를 숙이자, 준섭이 우경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우경이 당황하며 운전하는 강 대리를 살폈지만 준섭은 모르는 척 잡은 손을 제 허벅지 옆으로 두었다.

“인재 발굴은 기업의 사명이자 미래입니다.”

준섭이 꼼지락거리는 손에 깍지를 끼며, 느리게 뒷부분을 읊었다. 눈을 감고서 머리를 기댄 채로 암송하다가 소리가 멈추면 우경이 다음 단어를 읽었다. 한두 어절은 합창을 하듯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눈을 감은 준섭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설명회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참석하였다. 경영대 대강당 좌석을 다 채우고도 자리가 모자라 계단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학생들 앞으로 준섭이 걸어 나갔다. 연단에 채 서기도 전에 박수가 터졌다. 대형 스크린으로 준섭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쑥스러운 듯 준섭이 피식 웃었다. 스크린에 잡히는 제 얼굴을 보다가, 살포시 찡그려지는 눈매까지 모조리 잡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부끄럽네요.”

마이크로 준섭의 목소리가 대강당에 울려 퍼졌다. 준섭이 그 역시 어색한 듯 입가에 손을 대었다가 떼어 냈다. 일제히 아아, 하는 한숨 같은 소음이 울렸다.

“저보다 더 훌륭하신 분께서 오셔야 하는데, 학생들 만나는 자리이니 좀 젊은 사람이 가라고 해서 제가 왔습니다. 모교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졸업하고 캠퍼스는 처음이네요.”

와아아, 강당이 함성으로 울리면서 다시 박수가 터졌다.

“저는 20대가 제일 좋을 때라는 말, 믿지 않습니다.”

당연히 원고에는 없는 멘트였다.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준섭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좋을 수가 있습니까. 쉽고 만만한 건 하나도 없는데, 너는 성인이라고 필요할 때만 책임을 지우는데……. 보장된 미래는 없고, 뭘 하고 살아야 행복할지조차도 모르겠는데…….”

준섭이 강당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재벌이 이런 말하니 우습겠네요. 준비한 연설문 읽겠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우경은 강당 첫 줄에 앉아 그런 말을 하는 준섭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준섭의 시선이 단상을 넘어 허공을 가로지르고 정확하게 우경에게로 꽂혔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우경에게만 보이고, 이제 제대로 할 테니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얕게 끄덕이고는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을 마치고 차에 오르며 준섭이 다시 옆자리를 두드렸다. 확인할 원고도 없건만 우경은 뒷좌석 옆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학교 건물, 오가는 학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준섭에게 우경이 물었다.

“캠퍼스, 둘러보실래요?”

준섭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강 대리. 한 바퀴만 돌까?”

넓은 캠퍼스를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준섭이 물었다.

“연 팀장은 대학 때 어떻게 지냈습니까.”

“늘 시간이 없었어요. 팀플이 많은 과라서……. 다들 열심히 하니까 학점 관리도 해야 하고 자격증도 따고. 영어 회화도 하고. 1학년 여름 방학 때 우연히 홍보 회사 아르바이트를 했다가 그 뒤로 학기 중에도 계속했어요. 돈을 벌어서 좋긴 했는데 시험 때는 너무 잠을 못 자니까 좀 힘들기도 하고…….”

“비슷하네요.”

준섭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던 것 같습니다. 수행 비서까지는 그렇고, 송백재 일도 했는데 가장 안 좋은 아르바이트였습니다. 보수가 없었거든요. 아, 물론 4학년 겨울, 입사 시험 수석으로 통과하고 일시불로 받았습니다. 아르바이트비에 4년 등록금, 생활비를 한꺼번에 계산해서 주셨는데 이 돈을 위해 내가 그렇게 살았나, 얼마나 허탈하던지. 돈다발 하나를 들고 나가서 하룻밤에 거의 다 쓰고 들어왔습니다.”

준섭이 우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다음 날 송백재 호출이 있었습니다. 회장님이 뭘 하셨을 거 같아요?”

눈만 크게 떠 준섭을 바라보는 우경을 보고는 준섭이 스스로 답을 했다.

“정확하게 쓴 금액만큼 더 주시더군요.”

준섭이 좌석 위에 놓인 우경의 손톱 끝을 검지로 스치며 말을 이었다.

“한 달을, 그렇게 해 봤습니다. 훨씬 더 많이 쓴 날도 있고, 몇 만 원 안 쓴 날도 있고. 정확하게 다음 날에 정산을 받았습니다. 개처럼 벌어 봤으니, 정승처럼 쓰는 법도 깨우쳐 보라는 뜻이었나 싶습니다. 그만하시라 말했더니 아직 멀었다 하셨습니다. 여전히 짐승처럼 사는구나, 라고도.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는데 내가 했던 반항은 고작 사람 붙이지 말라고, 내가 보고하겠다고 소리를 지른 게 전부였습니다.”

준섭이 어금니를 맞물었다가 떼어 내며, 그 잇새로 갈아 버리고 싶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사람처럼 쓰는구나, 답을 듣는 데 1년이 걸렸습니다.”

준섭이 손을 겹쳐 올려 네 손가락의 끝으로 우경의 손톱을 문지르고는 눈을 감았다.

“강 대리, 서둘러 가야겠다. 너무 노닥거렸어.”

* * *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우경 곁으로 백설이가 다가왔다.

“일찍 잘까? 오늘도 여기서 잘 거야? 엄마한테 안 가?”

우경은 손을 뻗어 백설의 보드라운 등을 쓰다듬고 목 뒤를 주물러 주다가 달랑 들어 다리 위에 눕혔다. 그런 채로 다시 딴생각에 빠진 우경을 알아챘는지 백설이 손을 핥기 시작했다.

“간지러워,”

우경이 손을 움직이며 또 멍하니 침대 시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준섭이 대화 중에 언뜻언뜻 비치는 과거 이야기나 용원을 비롯한 사람들을 통해서 준섭의 이야기를 전해 듣다 보면 처음 봤던 날, 밤에 젖은 숲 같던 어둑한 준섭의 눈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미래를 알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던 20대의 준섭이, 부모를 잃고 막막했던 10대의 준섭이 어떤 감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는지 우경으로선 상상하기 어렵다. 미래를 알 수 없지만 미래를 꿈꾸며 살라던 준섭의 말이 떠올랐다.

꿈이라고 지칭된 준섭의 지향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꿈이라는 부드럽고 감상적인 단어보다 야망이라는 직선적이고 본능적인 단어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현재 진행 중인 야망에 우경은 슬며시 걸쳐진 장애물일지도, 아니, 무슨 장애물씩이나. 우경이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자조했다. 지나는 길에 떨어진 돌멩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빛깔이 특이해서 한 번 쥐고서 만지작거리다 멀리 던져 버릴…….

끼으응.

고양이처럼 작게 소리를 내면서 백설이 우경을 쳐다보았다. 꼭 얼굴이라도 쓰다듬어 줄 듯이 앞발 하나를 허공으로 내밀었다.

“언니 괜찮아.”

우경이 백설이의 발을 잡고 작게 흔들었다. 똘망거리는 눈을 보며 입을 초옥 맞추는데, 톡이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연속으로 울렸다. 대학 동창 단톡방이었다.

두 달 뒤로 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윤서가 주얼리 세팅을 위해 오늘 오후에 숍을 갔었다며 이런저런 디자인 사진을 올리고, 뒤이어 감탄 섞인 평가들이 오가고 있었다. 청담동에서 개인이 하는 숍이라 가격도 저렴하고 디자인은 고급스럽다며 강력 추천을 날리는 윤서 덕에 두셋은 커플링을 맞추러 가겠다고, 혹은 생일 선물로 목걸이를 받아 내겠다며 흥분 어린 답을 했다.

방금 약속했다며 남자친구랑 다음 주에 숍에 가기로 했다는 말도 나오고, 윤서 친구라고 말하면 특별히 가격도 잘 해 줄 거라는 정보에 이어 하트가 붕붕 가슴에서 나오는 이모티콘이 정신없이 오갔다.

주얼리 디자인들은 하나하나 모두 세련되고 우아하고 예쁘긴 한데, 우경은 딱히 보석 디자인에 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적당히 할 말이 없어 감탄 이모티콘만 연방 날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들 결혼 예물에 관심을 가질 나이인가 싶었다. 우경이 하나씩 손을 꼽아 보았다. 가까이 지내는 대학 동창들 예닐곱 명 중 다음 달에 결혼을 앞둔 친구 하나, 언제 결혼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오래된 연인이 있는 친구 하나,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친구, 새 직장에서 썸남이 생겼다던 친구, 그리고 세 번째 선을 보는 친구…….

지난번 만났을 때도 각자의 연애사를 거침없이 토로하다가, 자연스레 우경의 연애에 대해 관심과 근심, 미안함을 섞은 그런 인사말과 위로 같은 것들이 화제에 올랐다.

“우경아, 넌 광고 회사도 다니고 홍보 회사도 다니고 그럼 진짜 사람들 많이 만날 텐데, 없어? 기자도 만나고 막 유명한 블로거나 인스타그래머도 만나고 그러잖아. 만나는 남자 있으면서 말 안 하는 거면 너어.”

“아니야. 얘 아직 없어. 진짜 첫 MT 때 너 보고 다들 딱 찍어서 젤 먼저 연애하겠다, 그랬는데.”

“연애도 해야 잘하지. 중고등학교 때 안 했음 대학 때도 안 하고 보통 그러더라?”

“야야야, 연우경. 너 대체 뭐가 문제야. 웬만하면 모쏠 탈출하자.”

모두들 우경에게 한 번씩 물어보고 습관처럼 소개팅을 권했다. 응, 응, 응, 생각해 볼게. 아니, 아니. 응, 생각해 보고 응, 고마워. 그래, 페북 주소 줘. 볼게. 답하다 보니 미확정 소개팅만 쌓여 갔다.

[우경, 톡 하나 보냈어 확인해.]

윤서의 메시지를 보고 알림을 다시 확인하니 단톡방 아닌 개인 톡으로 페이스북 주소 하나가 왔다.

회사 책상에서 찍은 사진이 프로필이다. 창으로 보이는 배경은 여의도 어디쯤인가. 금융맨을 강조하는 듯한 모니터 화면과 기사 스크랩, 시장 동향 분석글이 이어졌다.

[어때? 나이는 서른둘. 보스턴 대학 졸업했대. 우리 회사 동료 친구인데 눈 장난 아니게 높다고 해서 내가 딱 기다려 보라고 했지.]

우경은 남자의 사진을 한 번 더 찬찬히 보았다.

깔끔하고 예민한 인상이었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와이셔츠만 입은 어깨가 왜소해 보였다. 턱을 괴고 있는 손도 너무 가늘고 작았다.

[별로?]

우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충분히 멋있는 사람인데. 돌멩이라고 생각한 주제에 태준섭으로 높아진 눈은 하늘이다. 마음이 파도에 쓸리는 것처럼 허전하고 비어 있는 조각배처럼 불안했다.

[잘생기고 멋진데, 나랑은.]

우경이 부끄러워하는 이모티콘 하나를 붙여 보냈다.

[아, 맞다. 너 금융은 별로라 했던가?]

그런 기억은 없지만, 우경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모티콘을 바로 보냈다.

[오케이, 알았쪄엉. 다시 찾아보마. 나 결혼 전에 다들 커플로 만나기로 했다고! 너만 빠지면 싫어. 진짜루.]

윤서에게 고마워, 고마워, 너뿐이야. 우리 우정 영원하리, 까지 이모티콘 연속 네 개를 보내자 ‘ㅋㅋ’ 하는 답이 왔다. 굿나잇. 이불을 덮고 눕는 이모티콘을 주고받고서 우경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으로 한껏 움츠러들어 올리고 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핸드폰을 저 멀리 두고 누워서 팔로 눈을 가렸다. 불이라도 꺼야 하는데 귀찮아서 일어나기도 싫어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본부장님 장가라도 잘 가야지.’

용원의 씁쓸한 말투가 떠올랐다.

“송백재가 황금 줄인지 썩은 줄인지…….”

용원이 했던 말을 중얼거리고 우경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버지는 웨딩드레스를 입을 여자를 임신시키고, 결혼식 당일 탈주시켰지. 어머니는 뱃속 아이를 선택했고, 아버지를 선택했고, 자신의 인생을 포함한 그 외의 모든 것들을 버렸어. 나는 아버지의 유전자로, 어머니의 인생을 좀먹으며 자라나서 지금 이 자리에, 뻔뻔하고도 멀쩡하게.’

오뎅집에서 준섭이 덤덤한 표정으로 던지던 말이, 돌덩이가 되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그런 준섭에 대한 회장의 마음은 증오일까, 애정일까…….

우경은 침대에서 일어나 쌓여 있는 알림을 확인하지 않고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 두었다. 그리고 천장에 붙은 전등의 스위치를 내리고는 어둑한 공간에 우두커니 섰다. 우경이 알 수 없는 태준섭의 가족 간 해묵은 감정이다. 알 필요가 없는 일.

우경은 여태 태준섭처럼 완벽하게 상황을 통제하고 스스로를 관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치밀한 준비와 타고난 순발력에 거침없는 행동력을 갖추고서, 본인이 가진 위치와 매력을 손질이 잘된 무기처럼 편안하게 사용하는 사람. 그 대상이 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테다.

우경은 다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대상이 여자일 경우에도……. 침대에서조차.

이번에는, 페이스에 휘말리지 말아야지 매번 마음을 먹어도 소용없었다. 태준섭이 순순히 우경의 말을 들어주는 건, 사무실에서만이다. 낮에 했던 거절에 대한 보상처럼, 어쩌면 참았던 짜증을 풀듯이 몸을 부딪쳐 왔다. 매번 한계를 넘어섰다. 이제 그만, 그만. 목을 긁으며 소리가 나올 때면 귀가 웡웡 울렸다.

“눈 떠.”

감았는지도 모르는 눈을 뜨면 녹을 듯한 입맞춤 한 번, 그리고 순정을 바치는 듯한 입맞춤에 어울리지 않는 노골적인 행위가 이어졌다. 한계까지 벌려 놓고도 마치 더 벌려 놓지 못해 화가 난 사람처럼 움직이면서도 눈물을 핥아 주는 혓바닥은 더없이 다정했다. 절정에 다다르면 늘 검푸른 숲이 생각났다. 겨울밤을 안고 있는 빽빽한 나무들, 그 속의 은밀한 호수.

숲인 줄만 알았던 검은 눈에 호수 같은 물기가 어려 있다. 달빛도 비켜 가는 검고 고요한 호수 같은 눈으로 준섭이 우경을 담을 때면 까닭을 알 수 없는 외로움과 두려움 같은 감정들이 전이되었다.

“미치겠어.”

축 처진 몸을 끌어 올리고 붉은 혈흔을 남길 때마다 정사의 여운에 잠긴 몸은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먹어 버릴까.”

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에 입을 붙이고 웃는 웃음이 물결처럼 몸을 적셨다.

“좋아. 모조리 먹어 줄게.”

준섭 아래에서 정말로 몸이 얼마쯤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먹힌 건 마음일 텐데.

우경은 침대에 누워 몸을 둥글게 말고는 백설이를 안았다.

“백설 양, 언니는 잠이나 자야겠어.”

우경이 작은 스탠드 불까지 끄고는 눈을 감았다. 톡이나 문자 알림 소리가 간간히 이어지는데, 소리를 죽이기도 귀찮아 이불을 뒤집어써 버렸다. 마음이 꼭 쏟아지기 직전까지 채운 물병처럼 불안하게 출렁였다. 가만히 누워 숨조차 가만가만 쉬는데도 물병이 출렁거려 흐르기 시작했다. 쓰라린 눈으로 그 물이 차올라, 왈칵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우경은 눈을 힘주어 감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톡톡 울리던 알림음이 잦아들었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누가 전화를 거는지 진동 소리가 요란했다. 무시하고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데 백설이가 캉캉 짖기 시작했다. 쉿, 하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우경의 어깨를 긁어 대며 백설이가 더 크게 짖었다.

“우경아, 백설이 왜 그래?”

거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에요.”

핸드폰 소리로 짖는 일은 없는데, 우경이 백설이를 안고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끊어졌던 진동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윤서거나 아님 대학 친구 중 다른 한 명일 테다. 카톡에 답을 했어야 하는데……. 혹시나 홀로 남자친구가 없는 우경이 심정이 상했나 싶어 마음을 썼나 보다. 엎어 둔 핸드폰을 들어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지도 않고 우경은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자고 있었습니까?

우경이 핸드폰을 떼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심장이 툭 떨어졌다. 일 없이 문자도 전화도 주지 않는 사람인데, 왜…….

“아, 아아. 아니요.”

- 거짓말.

“자려고 누워 있었어요.”

- 착한 어린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빨리 자요?

“할 일도 없고.”

준섭이 소리 내어 웃었다.

- 할 일, 미친 듯이 빨리 마무리하고 왔는데. 메시지는 또 씹히고.

“네? 몰랐어요.”

- 볼 수 있을까.

우경이 시각을 확인했다 10시 15분.

“볼 수 있어요.”

- 내려와요. 벌써 도착했으니까.

우경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양 손바닥을 얼굴에 붙여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마음이 급해 원피스 잠옷을 아무렇게나 훌렁 벗어 버리고, 레깅스에 길이가 넉넉한 스ㅤㅇㅞㅅ셔츠를 껴입고는 머리를 질끈 묶었다. 파카는 손에 들고서 방문을 열었는데, 거실에 엄마와 아빠가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우경은 백설이에게 속삭였다.

“산책 갈까?”

백설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 밤에 무슨 소리냐, 하는 표정 같지만 우경은 반복해서 말했다.

“언니랑 백설이 산책 갈까?”

캉, 하고 백설이 짖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백설이가 토끼처럼 빠르게 뛰어나갔다. 산책 가방 앞에 서서는 캉캉 또 짖고 꼬리가 보이지 않도록 흔들었다. 엄마가 소파에서 여전히 TV 드라마에서 눈을 못 떼고는 물었다.

“백설이 산책 가쟤? 이 밤에?”

“그러게. 갑자기 그러네. 친구랑 통화하다가 산책 간다는 말을 해서 착각했나 봐.”

우경도 엄마를 쳐다보지 않고 현관 앞에 서서 말했다.

“다녀와.”

“아파트 주위로만 좀 걷다가 올게. 아이템 기사 쓸 거 있어서 생각도 좀 해야 해서.”

“따뜻하게 입어라. 바람 차다.”

스니커즈를 맨발에 꿰어 신는데, 아빠가 현관까지 나와서 말했다. 훤하게 드러난 목덜미 때문인지, 드러난 발목 때문인지 표정이 근심스러웠다.

“밖에 너무 오래 있지 말고.”

현관문을 열어 주며 아빠가 덧붙였다.

“길 건너 새로 연 커피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돌아다니더라. 작은 강아지나 고양이는 데려와도 된다고 그랬어. 커피집 이름이 ‘슬리피 캣(Sleepy Cat)’이던가 그래.”

우경이 아빠를 빤히 쳐다보았다.

“따뜻한 차 마시면서 생각도 하고 그래. 추우면 어떻게 뭘 써야 할지 아무 생각도 안 나.”

여전히 빤히 바라다보는 우경을 향해 아빠가 싱긋이 웃었다.

“갔다 올게요.”

“응.”

우경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아빠는 잠시 문을 열고 서 있었다. 우경이 엘리베이터 층수를 보다가 아빠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요. 아빠.”

“응. 그래.”

대답은 했지만 우경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아빠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파트 동 건물에서 나와 우경은 핸드폰을 다시 살폈다. 준섭이 도착했다고는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답이 없었다. 일단 편의점 쪽으로 가 봐야 하나 싶어 걸음을 옮기는데 좀 떨어진 주차 공간에서 준섭이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려 우경에게 손짓했다.

“어?”

우경이 다가가며 운전석을 확인하자 준섭이 되물었다.

“왜?”

“운전하고 오셨어요?”

“그런데?”

“아.”

준섭이 고개를 낮추고는 우경과 눈을 맞췄다.

“실망인가? 우식이 기다렸어?”

우경이 어이가 없이 하아, 하고 웃어 버렸다. 준섭이 앞자리 문을 열고서 고개를 까닥했다.

“타세요.”

우경이 몸을 밀어 넣는데, 그제야 가방 속 백설이를 발견했는지 준섭이 눈을 크게 떴다.

“얘가, 그 백설이야?”

백설이는 이미 양 앞발을 가방 밖으로 내고 준섭을 향해 구애하고 있었다. 준섭이 차 앞쪽으로 돌아 운전석으로 가는 중에도 백설이는 목을 빼고는 준섭만 끈질기게 쳐다보았다.

“백설아, 오빠 잘생겼지? 낮에 회사에서 보면 더 잘생겼다?”

우경도 준섭만 바라보면서 백설이에게 소곤거렸다. 준섭이 운전석에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공주님과 같이 오셨나?”

“산책 나간다 하고 나왔는데, 백설이 보여 주고 싶기도 했어요.”

“예쁘네.”

준섭이 손을 뻗자 백설이가 혀로 손가락을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안아 봐도 돼?”

“후회하실지도.”

“응?”

우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백설이 흰 털이 모직 코트에 붙는 건 물론이겠고, 백설이가 저런 흥분 상태라면 온통 준섭의 얼굴에 침을 발라 버릴 텐데, 깔끔 떠는 준섭이 기겁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백설이는 분위기를 알아챘는지 몸을 이미 가방 밖으로 반 넘게 내밀었다.

“무르기엔 이미 늦었네요.”

우경이 가방 속에서 백설이를 꺼내자, 조그만 발 네 개가 허공에서 바둥바둥거렸다. 끼으응 끼으응, 소리를 내며 한시라도 빨리 저 잘생긴 오빠 무릎 위로 나를 내려놓으라 온몸으로 말하는 중이었다. 준섭이 쮸쮸, 백설이를 부르자 백설이가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저돌적인 자세로 물어뜯듯이 달려들었다. 준섭이 움칫하자 앞발을 가슴에 기대고는 턱부터 맹렬하게 핥아 대기 시작했다.

“아, 이런.”

준섭이 당황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동족을 알아보는 영리한 녀석이네. 맞아. 나도 별명이 개야.”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하면서 준섭이 백설이를 쓰다듬었다.

흥분한 백설이 점프까지 하면서 입술도 핥고 싶은가 본데, 우경이 목소리를 바닥에 깔고 경고했다.

“백설이. 가만! 앉아!”

백설이 슬쩍 우경의 눈치를 보며 몸을 낮췄는데, 손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기세로 손등을 할짝였다. 준섭이 백설의 턱을 쓰다듬고 발바닥을 만지작거렸다.

“드디어 만져 보네. 백설이 발바닥.”

“찹쌀떡 같죠?”

“응.”

“기분 좋아지죠? 냄새도 좋은데.”

준섭이 팔을 들어 우경의 어깨를 감쌌다. 반대편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난 이쪽이 더 좋아.”

쳐다보는 우경의 입술에 촉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주위를 살피는 우경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얼굴을 들었다.

“냄새도 이쪽이 더 좋고.”

준섭이 엔진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우경이 여전히 준섭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백설을 안아 가방에 다시 들어가게 했다.

‘슬리피 캣’ 카페는 이름처럼 졸리는 듯한 눈을 가진 고양이가 소리 없이 사부작사부작 돌아다녔다. 제 집처럼 느긋하게 카페 카운터나 빈 테이블 위를 사뿐히 뛰어올랐다가, 의자 위에 앉아 손톱으로 의자 커버를 긁어 대기도 했다.

구석 테이블에 준섭과 우경 두 사람이 나란히 앉고 맞은편 의자 위에 백설이를 앉혀 두었다. 몇 번 낑낑거리다가 이내 얌전해진 백설이가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보고, 한 번씩 고양이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관찰했다.

노란 불빛과 울림이 부드러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낮은 음악 소리가 채워진 작은 공간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깍지를 끼워 잡고 있어서, 우경은 오른손으로 준섭은 왼손으로 차를 마셨다.

“안 돼요.”

우경이 준섭의 손에서 오트밀 쿠키를 뺏었다. 준섭이 똘망 똘망 저만 바라보는 백설이에게 자꾸만 오트밀 쿠키를 떼어 주려고 해서, 결국 우경이 남은 걸 홀랑 다 먹어 버렸다.

“백설이 이런 거 먹으면 알레르기 일어나요.”

“까다롭네.”

“어릴 때부터 자주 그래서 조심해요.”

“그럼 뭘 줘야 해?”

“정해진 식단이 있어요. 삶은 야채랑 전용 사료 같은 거. 오메가 오일도 먹고요.”

준섭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는 우경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오늘 뭐 먹었는데.”

“쟤보다 저렴한 걸로.”

우경이 웃으며 농담이에요, 하고 덧붙였다.

“오랜만에 야근 없이 집에 일찍 들어와서 아빠랑 같이 김치찌개.”

“또?”

“스트레스엔 매운 음식이 좋대요.”

“누가.”

“양지은 대리가요. 점심에 맨날 할라피뇨 들어간 파스타 먹으러 가자고 그러고 떡볶이 먹으러 가자고 그래요.”

“내가 잘못했네. 스트레스 주고.”

“그런 건, 아니에요.”

우경이 준섭과 맞잡은 손을 살살 흔들었다.

“네가 자꾸 김치찌개 이야기를 해서, 먹고 싶어져. 먹어 본 지 너무 오래라…….”

우경이 으응? 하는 표정으로 준섭을 쳐다보았다.

“된장찌개까지는 고깃집으로 가게 되면 먹는데, 사람들 만나 김치찌개 먹을 일은 없어서……. 혼자 사 먹으러 간 적도 없고. 최근엔 혼자 먹은 기억도 까마득하니까. 중복으로 약속 잡아서 두 번씩 먹긴 해도.”

“아…….”

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렇지, 뭐 그런 삶이 다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엄마가 자주 해 주셨어. 내가 좋아했어서.”

준섭이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아버지가 더 좋아했지.”

“우리 집이랑 같네요.”

“그런가.”

“한번 가져다 드려요? 울 엄마, 김치찌개는 진짜 맛있게 하세요. 원래도 손맛이 좋은데 김치찌개는 예술이에요.”

준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매한 답이었다.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라는 모든 정확한 정보가 추가될 수 없는 언제 한번, 이라는 마음만으로 끝나는 그런 약속이었다. 약간의 침묵을 깨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전화 톡 계속 들어오는 것 같은데?”

“아…….”

준섭이 깍지를 풀자 무언가 놓쳐 버린 것처럼 허전했다. 우경이 파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화면을 살폈다. 메신저 앱에 표시된 붉은 숫자가 33이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대학 친구 단톡방일 거예요.”

우경이 톡 창을 열었다. 뒤늦게 예물 관련 톡을 확인한 친구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아직도 반지, 목걸이, 귀고리와 주얼리 숍에 대한 이야기가 산발적으로 오가고 있었다. 디자인을 골라 달라는 투표도 진행 중이었다. 우경이 웃으며 사진들을 확인했다.

“친구가 예물 디자인 봐 달라고요. 하나 골라 달래요.”

“그런데 그렇게 대화가 많아?”

“구경하는 것도 재밌고 주얼리 숍 지인 할인이 된다고 하니 하나씩 뭘 살까 물어보기도 하고. 큰맘 먹고 사는 비싼 거니까 잘 골라야 하잖아요. 의견이 서로 분분하죠. 그리고 원래 단톡창은 대화 시작되면 수백 개는 기본이에요.”

준섭이 좀 놀랍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응, 답하고는 테이블 아래로 다가온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츠츳, 준섭이 고양이를 어르는 소리에 백설이가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을 당장이라도 넘어올 기세로 앞발을 올렸다.

“안 돼. 백설이.”

우경이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서 반대편에 있는 백설이에게로 가서 다시 의자에 앉혀 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명하는 동안에도 톡 알림이 연속으로 울렸다. 준섭이 흘끗 화면을 보나 싶더니 우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사이에 다시 알림이 울렸다. 준섭이 핸드폰을 집어 우경에게 내밀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우경이 당혹감으로 얼굴을 붉혔다.

“아……. 이건…….”

톡은 단톡방이 아니라 윤서였다.

슈트를 입은 남자의 상반신 사진, 테니스를 하는 풀샷 사진에 이어 직업, 나이 같은 정보가, 그 뒤에 상냥한 멘트가 연속적으로 뒤따랐다.

[맘에 들지?]

[이번엔 금융 아니고, 공대 출신 MBA]

[딱 네가 좋아하는 타입. 키 크고 몸 좋고 매너 좋고. 아버지가 외교관.]

[울 오빠 친구야. 너 아직도 남친 없냐고 확인하더니, 물어봤나 봐.]

[왜 여태 소개 안 시켜 줬냐 그랬더니, 미국에서 일하다가 저번 달에 TK전자로 스카웃되었대.]

TK라니 등으로 진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준섭을 살피니 이미 팝업창으로 뜨는 메시지를 읽은 눈치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준섭은 답 없이 턱을 괴고는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오해하지 마세요.”

“뭘.”

우경이 한숨을 짧게 뱉어 내고 준섭 옆으로 갔다.

“안 해요.”

“뭐를, 소개팅을?”

“네.”

“TK라서?”

“본부장님.”

“친구들한테 조건 말하며 소개시킬 남자 고르는 중이야?”

태준섭이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빈정거렸다.

“조건 하나 더 추가해야겠네. 금융은 싫고, 몸매는 좋은 남자인데 TK는 아닌 놈으로.”

그런 오해는 하지 말라고 말하려다 우경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윤서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입력했다.

[어떡하지, 내가 TK 홍보 관련 일을 하는 중이어서 약간 부담스러워. 오빠한테도 죄송하다고 전해 줘. 신경 써 줬는데 미안해.]

메시지를 전송하고 울고 있는 고양이 이모티콘도 이어 보냈다. 준섭이 메시지를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핸드폰을 파카 호주머니에 넣고서 그제야 준섭에게 시선을 주었다.

“거절했어요.”

준섭이 눈매를 찡그렸다. 벌어지는 입술이 사납게 느껴진다.

“나가자.”

준섭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좁은 카페를 큰 걸음으로 가로지르고 문을 열고 서서 우경을 기다렸다. 우경은 숨을 훅 내쉬고는 준섭 앞으로 갔다.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요.”

준섭이 답 없이 카페 문을 닫았다. 우경을 쳐다보는 준섭의 눈이 너무 차가워 갑자기 서러워졌다. 이렇게 만든 게 누구 때문인데. 우경은 백설이를 넣은 가방을 추스르며 먼저 등을 보였다. 준섭이 붙잡았지만 매정하게 쳐내고는 앞만 보고 걸어갔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준섭이 다시 우경의 팔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쳐내도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돌려세우고 거만하게 물었다.

“네가 왜, 남자 소개를 받아?”

우경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해. 연우경.”

“나만…… 없어서요. 친구들이, 그래서…….”

“남자가 없어? 네가?”

준섭이 마치 확인을 해 주겠다는 듯이 손을 들어 뺨을 만졌다.

“본부장님은…….”

우경이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울컥 솟아오르던 덩어리가 아직 목에 걸려 있었다.

“본부장님 같은, 그런 남자 아니고.”

말을 제대로 하고 싶은데 눈앞은 흐리고 혀는 헛돌고 마음은 갈비뼈를 밀어낼 정도로 뻐근하게 부풀었다.

“알아먹게 말해.”

“나랑 섹스만 하잖아요.”

준섭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 섹스, 꽤나 좋아했던 걸로 아는데.”

말은 딱딱한데, 뺨을 만지는 손길은 부드럽다.

“맞아요.”

“그래서, 섹스만 좋아?”

우경이 손을 들어 툭 가슴을 밀어내듯 때렸다.

“아, 몸도 좋아했지. 외모가 연우경 이상형.”

“그만해요.”

툭툭, 주먹을 쥐어 가슴을 좀 더 힘주어 때렸다. 흔들리는 척도 하지 않던 준섭에게 손목이 잡히나 싶었는데, 어느새 끌려가 차 앞에 섰다. 준섭이 우경을 조수석으로 밀어 넣고서 운전석에 올랐다.

실랑이를 한 덕분인지, 억울해서 그런지 숨이 차올라 입술이 벌어졌다. 준섭이 그 입술을 지그시 검지로 누르며 말했다.

“오늘 밤도 섹스를 기대했겠네.”

우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나왔어. 이렇게…… 보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강아지까지 데리고.”

준섭의 시선이 화장기 없는 맨얼굴과 아무렇게나 껴입은 스ㅤㅇㅞㅅ셔츠를 훑었다. 우경의 턱을 가볍게 쥐어 올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응?”

“맞아요.”

“뭐가.”

“보고 싶…….”

시선만으로 목이 졸리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돌리려 하자 준섭이 손에 힘을 더하며 움직이지 못하게 턱을 고정시켰다.

“내 눈 보면서. 또박또박.”

우경이 시선을 맞추자 만족스럽다는 듯 준섭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제대로 다시 말해 봐.”

“……보고 싶었어요.”

준섭의 눈 빛깔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무릎에 올려 둔 백설이 가방을 들어 운전석 뒷자리로 넘기며 준섭이 뻔뻔하게 말했다.

“백설이, 눈 감아.”

입술을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듯이 빨았다가 놓으면서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놈 만나지 마.”

답하려 했는데 혀가 잡혀서 이상한 소리만 나왔다. 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려고 하다가 더 깊이 삼켜졌다. 매끈한 얼굴과 다르게 거칠어진 숨을 쉬며 준섭이 말했다.

“다른 놈이, 보면, 네 표정, 이런 눈…….”

헐렁한 스ㅤㅇㅞㅅ셔츠 아래로 들어간 손에 맨살이 닿자 눈이 가늘어진다. 숨이 뜨거워지고, 눈동자에도 열감이 어린다. 애가 타는 듯이 더듬어 올라 가슴을 쥐고, 문지르고 비틀며 입을 다시 맞췄다. 으윽 하는 소리가 번져 나갔다.

이를 악물며, 우경의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헝클이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그러면서도 한 번씩 참아 내는 호흡을 하며 준섭이 말했다.

“그 새끼, 죽여 버리고 싶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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