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16화 (16/23)

16장

M성당 교인들이 만든 봉사 단체에서 주관하는 바자회는 W호텔 크리스털 볼룸에서 3일간 진행되었다. 봉사 단체라는 소박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재벌 그룹이나 장차관, 기업의 대표 부인들이 주축이 되는 모임이라 부러 찾아와 인사를 건네는 이들도 많았다. 선애는 그럴 만한 위치는 아니지만, 이틀 동안 바자회에 들렀다.

마지막 날인데도 제법 큰 규모의 지하 홀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바자회는 인근 상인들과 인터넷 소호몰, 그리고 성당 사람들의 기부 물품으로 운영되었는데, 첫날 기부 물품이 동이 나다시피 해서 자연스레 선애가 기부 물품을 더하고 부족한 일손을 거들게 되었다.

“잘 어울리세요. 잠시만 이렇게 벨트 해 보세요.”

몸매가 날씬한 40대 여자에게서 들고 있던 아이 운동화 박스를 받고, 선애가 직접 볼륨감이 있는 벨트를 권해 주었다. 기장이 긴 니트 카디건 분위기가 벨트 하나로 완전히 달라 보였다.

“거의 새거예요. 벨트에 구김 하나 없어요. 너무 잘 어울려요. 여기에 캐시미어 머플러 하나만 하면 간단한 모임에도 차려입은 느낌이라 괜찮아요.”

만족스런 표정으로 물건값을 계산하는 여자에게 웃으며 인사까지 마치고 선애는 잠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힘드시죠?”

최일문 교수 부인 은정이 미안한 내색으로 선애를 살폈다.

“아니에요. 저는 거들기만 하는데요.”

“이제 거의 마무리할 시간이니까 우리 잠깐 교대하고 차 마셔요.”

은정이 옆 사람과 몇 마디를 나누고 선애에게 손짓을 했다.

홀 뒤편에 마련된 간이 휴게실에 앉아서 은정은 종아리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CS에서 기사도 내주시고, 케이블 방송도 타게 했더니 홍보 효과가 대단해요. 올해엔 TK 사모님 덕분에 성황이었다고 다들 너무 감사해하세요.”

선애가 무슨 말씀을, 하며 손을 저었다.

“친정 오빠네랑 식사하다가 바자회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런 테마로 기사 내도 좋겠다고 오빠가 먼저 말하고, 제가 알려 드린 것뿐인데요 뭘. 그보다 이런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고. 정말 대단하세요.”

“저도 보조 역할이라……, 이번에 단체장님부터 얼마나 고마워하시는지 몰라요. 바자회 마치고 한번 모여서 결산이랑 집행 발표도 하고 같이 식사하거든요. 그때 꼭 초대하시라고 하셨어요. 이참에 가입하셔도 좋고요.”

선애가 커피를 마시며 곱게 웃었다.

“매년 들러 보긴 했는데 일해 보니 느낌도 다르고, 이런 활동 참 좋으네요.”

“딸 하나 있는데 훌쩍 유학 가 버리고, 외로워서 열심히 다니다 보니 지금은 종교 생활도 그렇고 봉사 단체도 제 생활에 일부가 된 것 같아요.”

은정이 하영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꺼내자 선애가 슬며시 운을 뗐다.

“따님 잘 지내죠? 타지에서 어려운 공부하느라 힘들겠어요.”

“철학이라는 학문이 만만치가 않나 봐요. 외로워야 공부가 된다는 말을 해서, 내가 자주 가는 게 귀찮아서 그러나 서운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이제 학위 마무리 단계니까.”

은정이 조심스레 선애를 관찰하며 대화를 이었다. 아무래도 말을 골라서 해야 하는 자리였고, 은정으로선 선애가 불편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선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정은 굳이 TK 며느리로 딸을 보내야 하는 건가 반대하고 있고, 최일문 교수가 유언을 따르자며 혼사를 밀어붙이는 쪽이었다.

“박사 학위는 봄에 받을 것 같다고 하네요.”

“세상에, 거기서 박사 학위 받기가 그렇게 오래 걸린다 들었는데. 대견하고 대단해요.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인재들이 그런 학문을 많이 공부해야 우리나라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이제 따님도 한국에 돌아와서 배운 거 학생들에게 많이 가르치고 해야죠.”

“네에, 그럼요. 와야죠.”

은정이 애매하게 답을 했다. 선애가 은정의 근심을 미리 짚어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결혼해서 일 못 했는데, 그건 직업이 기자여서 그랬어요. 더군다나 친정 언론사이다 보니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설화에 오를 테니까요. 제가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저도 그때 생각을 잘못했어요. 하영 양처럼 박사까지 공부하고 교단에 서고 한다면 누구보다 우리 아버님도 남편도 기꺼워했을 텐데요.”

은정의 눈이 반짝했다.

“아, 그러세요? 저는 회장님이 굉장히 보수적이셔서…….”

선애가 아니에요. 크게 웃으며 부인했다.

“저 결혼해서 시집살이를 한 적이 없잖아요. 계속 분가해서 살고, 오라 가라 일체 강요 없으세요. 제가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잘한다 칭찬하시고 가서 쉬어라, 그러시는데요.”

은정이 시계를 확인하자, 선애가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이제 들어가 봐야 하죠? 우리 긴 이야기는 다음 주에 브런치하면서 해요. 편한 시간 알려 주세요.”

“네, 저야 너무 좋죠. 제가 맛있는 브런치 대접할게요.”

선애가 은정을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 * *

“이러시면, 안 되는데…….”

양지은 대리가 안절부절못하며 본부장실 문을 막아섰다. 하지만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온 임원 세 명을, 정확히는 해고 절차가 진행 중인 임원 세 명을 막을 수 없었다. 본부장실 안에서도 밖의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회의 전에 준비를 위해 본부장실에 있던 우경과 용원도 지은을 도우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

준섭이 수화기를 들었다.

- 네, 네. 본부장님.

“통화 같이 들으시게 소리 키우세요.”

지은이 스피커폰으로 바꾸고는 다시 답했다.

“네, 스피커로 바꿨습니다.”

- 세 분 차례로 들어오라 하시고, 미팅은 30분 미뤄 주세요. 순서는 직위 순이 아니라 연장자 순으로 합시다.

“네. 본부장님.”

양지은이 일어서자 전화기에 쏠려 있던 시선이 일제히 향했다.

“들으셨지요?”

임원들을 향해 묻는 양지은 대리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그럼 박상훈 전무님부터 들어가세요.”

부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는 박 전무는 이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일전에 청와대 요청 건을 비롯하여 전기본을 통해 정해진 업무에 의도적인 혼선을 넣거나 미진하게 처리하여 태준섭을 곤란하게 만들곤 했던 것도 태서우와의 공고한 라인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본부장실에 있는 우경과 용원을 바라보는 박 전무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회의에서 또 언급할지 모르는 내용이니 미리 정리합시다. 최 과장, 연 팀장은 저쪽 소파에 앉아서 기록하시고. 박상훈 전무님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태준섭이 자리에 앉으면서 지시했다.

박 전무가 벗겨진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준섭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부회장님 승인도 안 났는데, 해고 통보라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해고 통보는 아니고, 절차 진행 중이라 알려 드린 것으로 압니다.”

“그거나 그거나. 아니, 전기본에서 이런 식으로 인사까지 휘두를 권력은 없다 이 말입니다. 송백재에서 지시하신 것도 아니라고, 부회장님께서 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신데.”

“송백재 지시라니요?”

준섭이 싸늘한 어조로 되물었다.

“공식적으로 TK 경영에서 물러나신 송백재 태시환 회장님께서 지금 임원 인사를 조종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싶으십니까? 그럼 전기본은 눈 가리고 아웅? 뭐 그런 다소 귀여운 별칭으로 불리겠네요. 얼마 전에 대놓고 TK와 송백재를 비판했던 기사 내용처럼 말입니다.”

박 전무가 뱉은 말을 급히 수습하려 했으나 얼더듬는 무의미한 단어 외엔 제대로 들리는 말이 없었다.

“음성 녹음 파일, 진술서, 직무평가서.”

준섭이 책상 위에 하나씩 늘어놓으면서 말했다.

“다 보셨습니까?”

“그건, 음해성 제보이고.”

“직무 평가도 그렇습니까?”

“그, 그것도 다만 이번 분기 들어서 회사가 전반적으로……. 그런 데다가 갑자기 도입한 상급자 평가 점수 비중이 불리하게 계산되어 그런 것이지 절대로 이 수치만으로 제가 TK에 기여한 바를 평가할 수는 없지요.”

흐음, 준섭이 턱을 문질렀다.

“직무 평가는 평가 방식이 문제이고, 직원에 대한 폭언과 욕설 폭행은 음해성 제보이다?”

박 전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섰다.

“본부장님, 이건 대승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젭니다. 이렇게 좁게 좁게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회사 전체를 보고 저 멀리 미래를 보면서…….”

준섭이 시각을 확인했다.

“말을 끊어 죄송한데, 10분 중 3분도 채 남지 않아서 말입니다. 가까이 오십시오.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준섭이 툭툭 검지로 두드리는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박 전무가 고개를 디밀었다.

“이, 이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건 영상은 아니고 숫자라서 조금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규모가 있다 보니.”

박 전무가 엉덩방아를 찧을 듯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본, 본부장님. 대체 누가.”

“누구든, 제가 제시하는 기회를 잡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고작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준섭이 쥐고 있는 자료는 사회적으로 비난이 될 수 있는 개인적인 치부와 형사 처벌이 가능한 횡령이었다.

“이건, 이건……. 제가 아니고.”

“제가 박 전무님께 제시하는 기회입니다. 사유를 선택하십시오.”

“부, 부회장님이, 부회장님께 상의, 하고.”

“무엇을요? 사유를?”

“그러니까…….”

박 이사가 양복 자락으로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았다.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준섭이 눈짓을 하자 용원이 자리에서 일어서 본부장실 문을 열었다.

박 전무가 가장 강경했고, 나머지 두 사람은 협상에 가까운 태도를 취했다. 그 역시 태준섭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전략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약점을 쥐고 있다는 식의 불명확한 협박은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고, 상대의 약점을 제공하며 줄을 갈아탈 수 있다는 호기로움은 여지없이 잘라냈다.

“저는 준법감시실과 감사팀의 보고만 받는 입장입니다. 이 자리가 구심점이 되는 장소를 닦고 쓸고 손질하라는 자리이지, 어디 권력을 쥐여 주는 자리입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 준섭은 부드럽게 웃었다. 거절은 냉정하고, 쓴 약도 단 사탕도 먹히지 않는데 준섭의 미소는 마치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할 만큼 달콤했다.

태준섭은 자리가 주는 권력에 기대어 누군가를 지배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몸으로 부딪혀 단련시킨 내면의 힘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타고난 매력으로 한 사람씩 굴복시키는 사람이었다.

세 사람이 차례로 본부실을 나간 후, 준섭이 남아 있는 우경과 용원을 향해 지시했다.

“해임 임원들 개별 미팅 자료는 정리해서 올리세요. 당장 쓰임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니 킵하는 걸로 합시다. 회의 준비는 거의 마무리했던 거 같은데…….”

“네, 지적하신 부분 보충하고 바로 출력해서 올리겠습니다.”

용원이 빠르게 답했다. 회의 시간까지 여유가 많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준섭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건조했다.

우경이 본부장실을 나가며 슬며시 뒤돌아보았다. 준섭이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조금 전 모습과는 달리 지친 기색이었다. 닫히는 문틈으로 우경의 기다랗게 늘어진 시선이 느껴졌는지 준섭이 가느스름하게 눈을 떴다.

흠칫 놀라는 우경을 향해 준섭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거수경례라도 하듯이 눈썹 위에 붙였다가 떼었다. 우경은 완전히 닫힌 문만 잠시 쳐다보았다. 문 너머 입술 끝만 올리고 웃는 준섭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 * *

“제가 은근 무난한 성격이거든요?”

양지은 대리가 점심을 먹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본인의 무난함을 강조했다. 최용원 과장이 들었으면 무난이 아니라 무눈치라고 농담처럼 핀잔을 줬을지도 모르겠지만, 우경이 떠올린 양지은 대리의 첫인상도 예민하기보다는 또랑또랑 대답하고 잘 웃는 친근한 이미지였다. 무난이든 무눈치든 그런 성격인 양 대리도 태서우 부회장 라인이었던 임원들 세 명이 회사를 그만두게 된 후, 며칠 동안 살벌한 분위기에 어지간히 지쳐 보였다.

“그런데 진짜 전기본 비서일 피곤해요.”

지은이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에 넣고는 에쵸, 기침을 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선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며 택시로 10분 거리인 호텔로 와서 좋아한다는 갈릭할라피뇨 파스타를 시켰는데, 맵게 해 달라는 지은의 요구를 셰프가 지나칠 만큼 충실히 반영한 듯싶었다.

“아, 매워. 할라피뇨향이 확 올라오네요.”

우경은 입을 벌리고 손부채질을 하는 지은에게 물잔을 밀어 주었다.

“파스타가 맛있는데 좀 맵긴 하네요.”

“그래도 스트레스가 화악 풀려요!”

지은이 마늘과 할라피뇨가 다져진 소스를 박박 긁어 앞접시에 덜어 둔 면에 올렸다. 우경은 보기만 해도 혀가 아리는 기분이었다.

“전기본 비서직이 이렇게 가시방석인 줄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아무래도 임원분들이 많이 오시고 회사 중심이다 보니 그러시죠?”

“그것도 그렇고요.”

지은이 주위를 한 번 쓱 살펴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전임 비서가 왜 자리 박차고 나갔는지 알겠어요. 본부장님 진짜 까다로우시고, 아시죠?”

지은이 예쁜 이마를 찡그리며 동의를 구하자 우경이 웃으며 답했다.

“네. 편안하진 않으시죠.”

“이해는 해요. 다들 본부장님 뭐 하는지 너무 곤두세우잖아요. 저야 ‘은근 무난한’ 성격이니까 그런 거 대충 넘기지만, 매번 보고하려면 죽을 맛이었겠어요. 시어머니가 몇이에요, 부회장님부터 태이섭 상무님 라인까지 다들 궁금해하시니까……. 이번에 임원 세 분 잘리셨잖아요.”

양 대리가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어 보더니 후욱 한숨을 쉬었다.

“그때 그분들 본부실 오고, 이제 일주일, 열흘 넘었나? 그동안 저 1킬로는 더 찐 거 같아요. 스트레스받아서 막 먹었거든요. 무슨 일을 또 꾸미냐는 식으로 저를 자꾸 찔러보셔서.”

우경과 눈이 마주치자 지은이 헤헤, 하면서 애교스럽게 웃었다.

“그렇다고 막 기밀 흘리고 그런 거 없어요. 기밀도 없지만.”

지은의 말을 듣자 자신이 꽂았으니 제 사람처럼 행동하라던 이섭의 요구가 떠올랐다. 당연하겠지만 전기본 회의에 참석하는 임원들과 전기본 비서까지 대부분이 준섭에게 좀처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공식적인 회의에서조차 그러해서, 멀찍이 떨어져서 기록을 하는 우경도 숨이 턱턱 막히는 분위기였다. 유들거리는 웃음에 감춰진 적개심이나 그런 포장조차 없이 드러내는 무시나 적의 같은 것들이 늘 길고 짧은 화살이 되어 준섭에게 날아들었다. 준섭은 놀랄 만큼 무덤덤해 보였다. 그런 분위기도 오랫동안 적응하면 익숙해지는 걸까.

“어때요? 연 팀장님은 같이 외부 행사도 가시고 그러면 이야기도 하시나요? 본부장님 진짜 필요한 말 외에는 입도 안 여시는 거 같아서…….”

“대체로 그러신 편이죠.”

양 대리가 어련하겠어, 하는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부르르 한 번 떨고는 말했다.

“회사에서 본부장님 멋있다고 태이섭 상무님이랑 비교하면서 누가 더 멋있네 비교짤도 돌고 이런저런 말도 있는 거 아시죠? 여자 직원들도 그러고 남자 직원들도요.”

“저는 잘…….”

우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그런데요, 그것도 다 본부장님 되고 나서 말이지. 어휴. 안면을 어떻게나 잘 바꾸는지. 누군지 말은 못 하지만 여럿이에요. 본부장님이 회장님 손자인거 모르고 몇 년째 들이대던 사람도 있고요, 그러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고요, 울고불고 술 마시고 전화하고 그랬다던가. 그래 놓고서 거절당하면 무섭게 씹어 대고. 입으로 옮기기도 민망한 단어로 욕하고요. 어후, 진짜 일 한번 같이 안 해 봤는데 얼마나 말은 많이 들었는지, 소문과 구설, 험담이 떨어질 날이 없었거든요?”

지은이 할라피뇨 소스를 한 번 더 떠먹고는 물도 마시고 열을 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본부장님 되고 나니까 다들 입이 쑥 들어갔어요. 저 본부실 간다고 쟤가 왜 가냐고 낙하산이라고 막 씹고 지금도 씹고, 돌려 까고……. 아니, 울 아빠 그런 거 못 해서 변방으로 밀린 지가 언젠데.”

지은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우경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리소토를 덜어 먹었다. 양 대리의 아버지가 TK 임원 출신으로 방계 계열사에 사장으로 있다는 건 용원에게 들어 알고 있으나 양 대리가 직접 말한 적은 없다. 지은이 급히 말을 돌렸다.

“연 팀장님은 요즘 살 많이 빠졌어요. 본부실 오고 힘드시죠? 난 쪘는데.”

“그런가요?”

지난 일요일 밤에 준섭이 등 뒤에서 포개어 안고는 왜 더 작아졌지? 속삭이던 말이 생각났다. 부피라도 재어 보듯이 팔과 다리로 꽉 끌어안자 뜨거움에 흐물거리던 몸이 버터처럼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원래 너 이렇게 작았어?”

몇 번의 절정 후에 기운은 바닥을 치는데, 극한까지 상승했던 감각은 좀체 누그러들지 않았다. 우경은 벗어나려 꼼지락거리며 아무렇게나 답했다.

“몰라요.”

“내가 이렇게 작은 몸에 빠졌나.”

“모르죠, 좀 녹았을지도.”

크기라도 재어 보듯이 가슴을 만지는 손을 떼어 내지도 못하고 톡 쏘듯 말했는데 준섭이 크게 웃었다. 등으로 준섭의 웃음이 고스란히 흡수되자 몸속 깊은 곳이 다시 울렸다.

“왜 녹아?”

준섭이 우경의 몸을 돌려 등이 침대에 닿도록 똑바로 눕혔다. 양손을 우경의 어깨 옆으로 짚고서 잠시 내려다보다가 귓불을 빨아들이고 목덜미를 길게 핥아 내렸다.

“내가 핥아 대서?”

핥으며 내려오는 동안 수분을 잃고 까슬해진 혀가 가슴 위를 맴돌았다.

“응?”

답 대신 몸을 옆으로 틀어 버리자 입을 벌려 크게 깨물었다. 먹어 치우듯이 입을 놀리더니 씨익 웃었다.

“너 생크림보다 맛있어.”

뜨거움으로 깊숙한 저편부터 녹이면서 준섭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 팀장님.”

지은의 부름에 생각에 잠겨 있던 우경이 시선을 들었다. 요즘 계속 이런 식이다. 하루 종일 준섭을 볼 때에나 보지 않을 때에나 준섭을, 준섭과의 행위를 생각한다.

매주 일요일 밤, 그리고 거의 일방적인 전달 방식으로 정해지는 주중 약속.

데이트가 아닌 약속, 연애가 아닌 섹스.

이제 TK와 계약 기간이 한 달가량 남았다. 몇 번의 밤을 더 보낼 수 있을까……. 그런 후에는 몇 번의 밤을 보내고 또 보내야, 태준섭과 같이한 밤들을 잊을 수 있을까.

잊을 수가…….

막막함에 가슴이 답답했다가 다시 아릿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음을 쪼개고 나누고 튼튼한 벽으로 쌓고 막아, 그 사람에게는 한 칸만 내어 줄 것을. 부질없는 후회가 목 끝을 메이게 한다.

“연 팀장님은 진짜 여기서 더 빠지면 안 돼요. 첨 봤을 때 넘넘 예뻤어요. 팀장님 몸매는 의외의 볼륨감이 생명. 요즘은 약간 말라 보여요.”

지은의 시선이 어쩐지 부끄러워 우경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물을 마셨다.

“아…….”

우경이 나지막하게 소리를 냈다. 시야에 잡힌 사람을 보고, 정확히는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는 물잔을 든 채로 잠시 얼어붙었다.

이섭이 굳은 듯 멈춰 서서 건너편 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우경을 쳐다보았다. 태지윤과 호텔 이태리 식당룸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지윤을 불편해하지만 지윤이 보유하고 있는 TK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늘 신경 쓰고 있는 선애가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지윤과 자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지윤이 좋아하는, 그리스에서 공수한 올리브와 캐비어, 프랑스산 트러플 버터를 전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물론 그랑 크뤼 와인 두 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윤이 이섭 옆에 다가와서 물었다.

“누구니? 회사 직원?”

“네. 회사 직원들이에요.”

“저기 한 명은 낯이 익은 얼굴인데…….”

지윤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지은이 생각났는지 알은체를 했다.

“쟤 양찬구 사장 딸 아니야? 우리 갤러리에 몇 번 왔어. 엄마랑 같이.”

“맞을 거예요.”

양찬구 사장은 처세도 둔하고 일 처리도 둔한 면이 있었는데, 부인은 정반대였다. 어머니 선애에게 극진하게 굴더니 태지윤 갤러리까지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TK 다닌다던데 지금 어디 있어?”

“본부장 비서예요.”

“아, 준이 비서?”

“고모님, 그거 태준섭 발작 버튼이에요. 왜 자꾸 그 이름으로 불러요?”

이섭이 지윤에게 못마땅한 내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지은이나 우경에게 들리지 않았겠지만, 강준이라는 이름이 불편하긴 이섭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왜? 준이가 더 예쁘잖아.”

이섭이 핏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예쁘다는 형용사가 태준섭이랑 어울려요?”

“걔, 예뻐. 눈이 울렁울렁 얼마나 예쁜데.”

이섭이 미간을 찡그렸다. 선애가 태지윤을 불편해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가도 이럴 때면 또 격하게 공감이 되곤 했다. 태준섭이 눈이 뭐라고, 울렁울렁? 냉혈한, 양아치, 비열함이 줄줄 흐르는 그 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 더군다나 연우경을 우연히 맞닥뜨린 지금은.

이섭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상무님.”

지은이 먼저 뒤이어 우경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섭이 심상하게 답인사를 하고 우경을 향해 물었다.

“식사 중이에요?”

“네.”

“난 먹고 가는 길.”

“관장님이랑 같이 드셨나 봐요?”

지은이 지윤을 향해 싹싹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뵈어요. 관장님. 저 기억 못 하시겠지만……. 전에 엄마랑 갤러리에 그림 보러 갔었어요.”

“알아요. 양찬구 사장님 딸. 그런데 이름은 모르겠다.”

지윤이 활짝 웃자, 지은이 손뼉이라도 치듯이 양손을 맞잡았다.

“관장님, 저 기억하세요? 양지은입니다.”

“내가 사람 얼굴만 잘 외워.”

지윤이 소리 내어 웃고는 우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구?”

“처음 뵙겠습니다. 연우경입니다.”

“연우경 씨도 전기본 비서예요?”

우경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이섭과 눈이 마주쳤다.

“전기본 파견직이에요.”

이섭이 대신 답하면서 가슴 중앙을 두어 번 문질렀다. 스테이크가 체했는지 꽉 막힌 기분이었다. 가슴 위에 올려진 이섭의 주먹을 바라보는 우경과 우경의 눈만 바라보는 이섭의 시선이 평행선처럼 엇갈렸다. 이섭이 오기처럼 물었다.

“잘 지냈어요? 연우경 씨.”

“네, 상무님.”

“얼굴이 상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살이 빠져 포근한 느낌이 사라진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며 우경이 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전기본에서 몸과 마음이 너무 혹사당하나 죄책감 느낄 뻔했잖아요.”

이섭의 중의적인 비꼼을 알아챘는지 우경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그제야 우경이 이섭과 제대로 눈을 맞추었다. 우경의 갈색 눈동자에 분노와 멸시 같은 감정들이 찰나처럼 스쳤다. 입술을 맞물렸다가 단정하게 떼어 내면서 우경은 곧 예의 바른 눈빛과 미소를 만들었다. 이섭의 심장이 쿡 찔리는 것처럼 뜨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는 다 좋습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올린 이섭의 입 끝이 파르르 떨렸다.

“언제라도, 힘들면 말해요.”

이섭이 지은과 눈인사를 교환하고 빠르게 걸어갔다. 호기심을 담은 지윤의 눈길이 우경을 짤막하게 훑었다.

* * *

푸른색 벨벳 케이스가 화장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다. 은정이 케이스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다가 뚜껑을 열었다. 가느다란 핑크골드 체인에 베즐 세팅된 자그마한 원석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된 팔찌였다. 원석이라고 해도 크게 값이 나가는 종류나 사이즈가 아니었다. 터키석, 핑크 오팔, 옐로 다이아몬드의 컬러감이 주는 느낌이 소녀처럼 사랑스러웠다. 똑같은 모양의 팔찌 두 개는 지난주에 선애에게서 받은 선물이다.

TK 태서우 부회장의 부인 선애는 이런 식의 관계만 아니라면 좀 더 마음을 열고 가까이 지내고 싶은 사람이었다. 브런치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 최근 화제가 되었던 공연이나 음악가 이야기부터 사회 문제까지 편안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에 선애가 주얼리 케이스를 꺼냈다.

제대로 설명도 듣기 전에 난색을 표하는 은정에게 선애가 직접 케이스를 열어 보였다.

“장난감이라고 흉보시면 어쩌나, 걱정했을 정도예요.”

가느다란 팔찌를 은정 앞으로 밀어 놓으며 선애가 웃었다.

“딸들 걷기 시작하고, 유치원 보내면 이런 알록달록한 팔찌도 사 주고 왕관도 씌워 주고, 어딜 가든 공주 옷만 입겠다고 해서 난감해하고 그랬잖아요, 우리.”

은정이 하영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찡한 기분으로 팔찌를 들여다보았다.

“중요한 가족 행사 갈 때도 주렁주렁 장난감 목걸이랑 팔찌 하고 공주 옷을 입고 가겠다 떼를 써서 한참을 씨름하며 갈아입히고 팔찌 풀게 하고…….”

“네, 하영이도 그랬어요. 언제 그랬나 싶게, 세월이 지났네요.”

“그러게요. 그러던 애들 진짜 드레스 입히고 결혼시키고……. 인생이 그렇게 한 장씩 지나가네요.”

선애가 쓸쓸한 표정으로 은정을 바라보았다.

“생일이 같다고 하셨죠? 우리 딸 결혼하기 전에 딸이 한 번씩 같은 팔찌, 같은 반지 세트로 하자고 졸라서 했었어요. 내 나이에 무슨 어린애들 하는 걸, 하면서 민망해했는데, 또 한 번씩 둘이 외출할 때 하고 다니면 그렇게 좋더라고요. 요즘은 혼자서도 해요. 아무래도 데리고 살 때처럼 자주 못 보니까……. 보면서 딸아이 생각도 하고.”

그러고 보니 가운데에 배치된 원석이 터키석이었다. 은정이 캐보션 커팅이 된 원석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일부러 터키석 넣으셨나 봐요.”

“네, 12월 탄생석이 터키석이라고 하던데요. 행운을 가져다준다니 의미도 좋고.”

여전히 머뭇거리는 은정의 손에 선애가 주얼리 박스를 건넸다.

“독일 가시게 되면, 따님이랑 두 분이서 데이트할 때 커플로 해 주세요.”

이 겨울이 지나면 딸을 TK 집안으로 보내야 하나, 은정의 마음 한편이 시큰해졌다. 은정은, 부드럽게 바라다보는 선애의 눈을 보며 나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불안감을 밀어냈다.

은정이 핸드폰 화면을 켜고, ‘사랑하는 하영이’이라고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하영아.”

- 응, 엄마.

“통화 괜찮아?”

- 지금 연구실. 조금 있음 강의 들어가니까, 10분?

“잘 지내지?”

- 그렇죠, 뭐.

“논문 마무리하느라 바쁘겠다.”

- 재밌기도 하고. 좀 끙끙거리기도 하고.”

“그럴수록 춥게 입고 다니지 마. 지쳐 있을 때 감기 쉽게 걸려.”

- 네네, 거긴 날씨가 어때요?

은정이 바꿔 둔 겨울 베딩을 보고는 말했다.

“양털 깔았어.”

- 아우, 엄마는 추위 너무 타더라.

“안 그래도 반으로 접어 내 쪽으로만 깔았어.”

하영이 재밌다는 듯 깔깔 웃었다. 하영의 엄마 은정은 독일에 오면 매번 이렇게 추워서 어떻게 살아, 하는 걱정을 입에 달고 있었다. 이젠 서울도 독일 못지않게 추워지긴 했다지만, 독일에서 연말을 몇 번 보냈던 은정에게 독일은 늘 추운 겨울 이미지이다. 양털 깔개를 반으로 접었다니 우스꽝스러운 베드가 상상되었다. 그 베드 위에 나란히 누워 잠드는 아빠도 엄마도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근데, 엄마 양털 그게 접히나? 두껍지 않아?”

- 불룩해서 불편해. 반으로 잘라 버릴까 봐.

은정이 하영의 씩씩한 웃음을 따라 크게 웃었다.

“아, 맞다. 엄마…….”

하영이 마우스 위에 올린 검지를 부드럽게 움직이며 말을 꺼냈다. 엄마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지난 한 달간 수차례 따로 전화를 했다. 다정한 안부, 걱정, 격려 끝에 마침표는 늘 결혼이었다. TK의 며느리. 어이없이 단순하게 결정되어진 미래가 싫어 독일까지 도망 왔는데도 여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나 12월 중순에 일본에 가기로 했어요.”

- 응?

“동경에서 학술회의가 있는데, 참석하려고요.”

- 그래? 그럼 서울로 오니?

“네, 이번 연말 연초는 서울에 있을게요. 한 달쯤.”

- 아…….

은정이 하지 못하는 말들, 물음들을 알고 있다.

“선보려고요.”

하영이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수십 번도 더 봤던 사진이 화면에 띄워져 있다.

- 그래, 아빠 좋아하시겠다.

“엄마는?”

- 응, 응. 나는 네가 좋으면……. 시모 자리 하나 좋다고 어려운 집 시집살이가 편하겠냐마는, TK 사모는 좋으셔. 차분하고 말도 부드럽게 하고.

“태서우 부회장 부인 말씀이세요?”

- 그렇지, 부회장 부인 말고 또 누가 있어.

“남자는 더 있던데?”

하영이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사진을 확대했다.

몇 번쯤 사진으로 보았던 남자였다. 깍아 지른 듯한 남성적인 이목구비에, 찡그린 미간. 몸에 배어 있는 오만함과 강인함. 그것뿐이라면 이번 것도 시시해서 10초 안에 넘겨 버렸을 사진이었다. 하영의 호기심을 자극한 건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쇼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연출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동정심도 아니었다. 아픔을 겪고, 그 아픔과 오랫동안 살아왔던 사람이나 보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이름이 태준섭이었지. TK 산재 피해자의 사진을 보며 그런 눈을 할 수 있는 남자의 마음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 무슨 말이야?

“TK면 되는 거잖아요. 태이섭이 아니라.”

- 설마, 태준섭 본부장?

“어때?”

- 글쎄. 한 번 봤어. 아빠 출판 기념회 때.

하영이 시각을 확인했다. 강의실로 급히 이동하면서도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출판 기념회?”

- 회장님이랑 같이 왔어.

“그래요? 어떤데?”

- 인물이야 잘생겼지. 그리고, 회장님이 아끼시더라. 소문과 다르게……. 그래도 선은 당연히 태이섭 상무랑 봐야지.

하영이 빙그레 웃었다.

“엄마, 나 이제 강의. 또 전화할게요. 바이.”

은정이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치였지만, 정말 시간이 없었다. 핸드폰 버튼을 누르고서 하영은 사진 속 남자를 한 번 더 떠올렸다.

* * *

본부장실에 들어간 용원이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닫힌 문을 쳐다보고 우경은 언론사 대상 정기 배포 자료를 유 실장에게 메일로 전달했다. 용원만 혼자서 하는 야근이 늘어나고, 본부장실에서 둘만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임원 세 명의 해임 직전부터 그랬고, 이후로도 계속 그런 패턴이었다.

전기본 회의의 분위기는 겉으로는 다를 바 없었으나, 우경은 사람들의 시선과 어조, 겉웃음이 만드는 분위기에서 갈등과 긴장감이 증폭했음을 알 수 있었다. 태준섭이 나누는 정보에 레벨이 있다면, 용원에게는 허용되는 범위가 우경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파견직이어서, 태이섭이 꽂은 사람이어서, 그럴 만한 능력도 포지션도 아니어서. 혹은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않을 만큼 당연한 처사여서.

최대한 차갑게 식힌 머리로 판단을 내리고 스스로에게 엉망으로 굴지 말라고 설득을 하지만, 밀려 나가는 착찹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몇 번 식사를 같이하고 섹스를 하는 여자일 뿐인데, 무얼 더 나눠 달라 기대하는 걸까.

우경이 질투 섞인 시선을 감추려 눈을 감았을 때,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피곤한 기색으로 나온 용원이 우경에게 다가왔다.

“연 팀장. 미안해요. 혹시 시간 되면, 내가 바빠서 그러는데 전기본 회의록에서 물산 관련 언급된 거 다 뽑아 줄 수 있겠어요? 우리 오기 전부터 전체 다……. 뽑아만 주면, 정리는 내가…….”

“아니요. 제가 해 볼게요. 혹시 빠뜨린 거 있는지 크로스 체크만 해 주세요.”

“고마워요.”

“형식은요?”

“엑셀로 정리해야 해요.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해요.”

탕비실로 향하는 용원을 따라 우경도 일어섰다. 더블샷 에스프레소를 내리며 용원이 목을 뒤로 젖혔다.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회의록 정리는 날짜, 회의명, 참석자, 발언자, 내용, 키워드. 이렇게 정리해야 하는데. 키워드는 같이 뽑아야 해요.”

“네, 할 수 있는 부분까지 해서 드릴게요. 키워드 체크해 주세요.”

용원이 끄덕이며 눈을 깜박였다.

“피곤해 보이세요.”

“조금요.”

“매일 야근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신경이 곤두서서 가라앉질 않네요.”

용원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다 라인이고 줄이라고 하지만. 그게 마음이 가니까 줄도 서고 한 거 아닐까요. 아. 연 팀장도 커피?”

“아니요, 저는 차 마실게요.”

우경이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블랙티 포장을 찢는 동안 용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본부장님은, 끈도 비빌 언덕도 없어요. 지금의 위치는 능력과 노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방증이죠.”

우경이 뜨거운 물에 담근 티백을 한 번 들었다가 놓자, 머그잔에 아지랑이처럼 불그스름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송백재가 유일한 끈인데……. 그 끈이 황금 줄인지 썩은 줄인지…….”

용원이 늦은 오후에 마시기엔 너무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시며 눈을 찡그렸다.

“까짓것. 과장 나부랭이가 잘리겠어요. 가늘고 길게 만년 부장으로 가면 되지. 정년까지 부장으로 버티면 우리 딸 대학 등록금도 나오니까. 승진해서 이사하면 뭐 하고 상무 달면 뭐 하나. 와이프랑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전기본으로 배치되었을 때만 해도 좋은 경력 정도로만 생각했던 용원이 최근 들어 본부장 라인으로 분류되면서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태서우 부회장 라인이었던 세 명의 임원진이 해임된 이후, 태준섭과 가까웠던 이사 다섯 명이 전보 조치되었다. 해외 지사, 지방, 다른 계열사. 이유는 각기 달랐지만 태준섭에 대한 경고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욕을 채운다, 향후 승계에 유리한 구도를 만들기 위해 계열사 비즈니스 영역을 난도질한다, 태서우와 태이섭을 송백재 눈에 나게 하기 위해 이간질을 하고 음모를 꾸민다는 이야기까지 전기본과 태준섭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이나 의심, 허위 정보는 사내뿐 아니라 외부로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흘리고 부추기는 것이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줄도 내 맘대로 서지는 것도 아니고. 편하게 살려고요.”

우경이 용원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과장님은 본부장님 많이 좋아하시잖아요.”

“티 났어요?”

“네.”

“연 팀장은 아니고?”

우경이 미소가 굳은 채로 용원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티를 들고 있는 손이 떨리는지 머그잔 안에서 불그스름한 액체가 흔들렸다. 우경의 표정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는지 용원이 변명을 덧붙였다.

“하긴, 들리는 소리들은 험하고……. 같이 시간을 많이 안 보냈으니, 본부장님에 대해 잘 모르겠네요.”

“……네.”

용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흘끗 탕비실 문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는 낮고 빠르게 말했다.

“그게 참……. 난 10대 때 고아된 것만으로도 마음이 쓰이던데 다들 본부장님한테서 그런 건 안 보이나 봐요. 하긴, 워낙 강성인 데다 완벽하니까. 사람이 좀 비어 보이고 해야 짠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영 그런 맛이 없죠?”

우경이 잔을 들어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가끔씩 나도 쎄할 때가 있긴 해요. 과장 나부랭이도 줄 서려고 잠 못 자고 눈치 보는 이곳에서 맨몸으로 버티려니 사람이 점점 더 살벌해지는 것 같아……. 우리 본부장님 제발 장가라도 잘 가야지.”

용원이 좀 식은 커피를 약 먹듯이 삼켰다.

“퇴근 시간 다 되어 일거리 던지고 미안해요. 내일까지 하면 되니까, 오늘은 일 있으면 일찍 퇴근하셔도 되고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우경이 고개를 약간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는 일 아니었냐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럼에도 참아지지 않는 뜨거운 덩어리는 속입술을 질끈 깨물어 삼켰다.

시선을 들어 벽을 보니 탕비실 달력은 덩그러니 마지막 장만 남기고 있다. 이 해가, 이 달이 끝날 때까지는 아직 낮과 밤들이 남아 있다. 그동안은 태준섭을 가질 수 있다. 우경이 굳은 입매를 억지로 올렸다. 꿈 같은 남자와 이런 연애, 그것이 혼자만의 연애라 해도, 기간이 정해졌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미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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