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달칵달칵, 볼펜 심을 올렸다가 내리는 소리가 너덧 번 반복되었다. 최용원 과장의 시선을 느끼며 우경은 볼펜 꼭지에 올려진 엄지를 내렸다. 왜 그래요, 혹은 괜찮아요. 같은 말 대신에 용원은 커피 한 잔을 우경의 책상에 두었다. 조간신문 옆에 놓인 커피잔을 보며 우경이 조금 웃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사진은 진짜 좋은데. 연 팀장 사진도 했어요? 잘 찍네요.”
용원이 가리키는 일간지 사진 속 준섭을 잠시 바라보았다. 생산 현장에 도착한 직후였다. 작업복은 입기 전이어서 짙은 색 슈트 아래 아버지의 노란빛 넥타이를 맨 준섭이 서 있다. 사진은 준섭의 비스듬한 얼굴과 그를 향해 다가온 피해자의 뒷모습, 그리고 준섭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피켓 속 털모자를 쓴 피해자의 사진을 담고 있다.
“학교 다닐 때 조금 배웠어요.”
용원이 제 손에 들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기사 좋은데 뭘.”
그렇게 말하면서 눈은 닫혀 있는 본부장실을 향했다. 유 실장이 호출되어서 들어간 지 10분이 지났다. 그 문을 보는 우경의 마음이 복잡했다.
“탕비실에서 쿠키도 가져올 걸 그랬나? 가져다줘요?”
용원이 하는 말에 우경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쿠키라는 말에 문득 생각나서 가방을 열었다. 늦잠을 자 버려서 급히 나가는 우경에게 엄마가 밥 대신 쥐여 준 약식을 꺼냈다.
“하나 드셔 보실래요?”
“오.”
용원이 반기는 내색이었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집에서 만든 거라 파는 것보다 덜 달고 밤이랑 대추도 많이 들어갔어요.”
“고마워요.”
손바닥 반만 한 크기로 소포장한 약식 하나를 집어 들고는 용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양 대리님, 하나 드셔 보실래요? 맛은 별로 없을지도 몰라요.”
“홈메이드 약식, 나도 주세요오.”
생글거리며 손을 내미는 양 비서에게 다가가 약식 하나를 건네는데 본부장실 문이 열렸다. 우경은 유 실장 표정을 재빠르게 살폈다. 유 실장이 평소처럼 속을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고는 눈인사만 건넸다. 일정상으로는 곧 본부 소회의실에서 일부 전자 임원진과 미팅이 잡혀 있다.
우경이 본부실을 나가는 유 실장을 쫓았다.
“실장님.”
“연 팀장.”
“제가 첨부한 사진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된 거죠.”
조간 메인 기사에 실린 사진 한 장이 문제였다. 기사는 자료대로 반도체 사업 전반에 대한 전략과 향후 투자 계획, 그리하여 세계 최고의 자리를 여전히 초격차로 유지하겠다는 의지와 확신을 주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전기본으로 시작되는 혁신이 TK를 좀 더 유연한 조직으로 탈바꿈하고 있으며 투명성과 공정성이 강화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까지 다루고 있었다.
다만, 태준섭과 피해자의 사진은 오전 프레스 센터에서 있을 공식적인 합의 발표를 빛바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스포트라이트가 태서우 부회장 대신 태준섭 머리 위로 떨어졌다.
유 실장이 닫힌 본부실 문을 확인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사진을 굳이 찾아서 메인으로 올린 건 기자 소관이니까. 본인 이름 달고 나가는 기사잖아요.”
그런 식의 말은 벌어진 상황에 대해 애매한 위로나 봉합 정도 외엔 다른 의미가 없었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우경이 고개를 숙였다. 유 실장이 그런 식의 마무리를 원한다면 우경도 사과로 마무리하는 게 옳았다.
“그 사진 실리길 원했던 거 아닌가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어조였다. 고개를 들고 보니 유 실장의 매끈한 얼굴에 웃음 같은 표정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우경이 빤히 바라만 보자 말을 덧붙였다.
“나는 상관없다는 판단이었고요. 더 명확히는 기자가 감이 있다면 이 사진을 뽑겠구나 했습니다.”
“그러면, 왜…….”
유 실장이 이번에는 정말로 피식 웃었다.
“연 팀장한테 미뤘어요.”
“네?”
“본부장님에게 말입니다.”
“무슨…….”
“이 사진은 연 팀장이 본부장님 컨펌 후에 단독으로 추가 첨부했다고 했습니다.”
조금 의외의 답이었다. 여태 봐 왔던 유 실장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루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 네.”
“그렇게 말씀드려도 제가 확인 없이 배포했으리라 믿지는 않으시겠지요.”
우경이 입을 다물고 수수께끼 같은 말 속에 무슨 의미를 숨겼나 고민하는 사이, 유 실장이 한 번 더 웃었다.
“본부장님 화내는 모습 봤어요?”
우경이 미간을 슬며시 찡그렸다. 태준섭이 화를 냈던가. 화가 났다고 생각은 했지만 화풀이하는 모습을 본 적은……. 그러다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이로 긁었다. 침대에서는 아마도……. 첫날 블라우스 단추를 다시 끄르고 침실로 데려갔을 때, 그리고 어제.
‘해 볼래? 말 잘 듣는 거.’
준섭의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저도 모르게 가슴 뒤편이 뜨끈해졌다.
“나는 본부장님 화내면 감당을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미뤘어요. 연 팀장한테.”
“미루시다니요. 사실인데요.”
“대신, 태이섭 상무님은 내가 커버할게요.”
“아닙니다. 제가 보고하겠습니다.”
유 실장이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려 보였다.
“사진 첨부할 때, 예상했던 결과 중 하나였고 그렇게 된다면 제가 보고하려 했습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복도 저편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임원들이 본부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유 실장이 우경에게 눈짓을 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사들과 유 실장이 인사를 나누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우경은 먼저 본부실로 들어갔다.
우경은 자리에 앉아 닫힌 본부장실을 바라보며 준섭의 질책에 대한 답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려 애썼다. 무슨 말을 어떻게 정리해도 몹시 화를 낸다면 말문이 막혀 버릴지도 몰랐다.
임원들이 모두 회의실로 들어간 후, 우경과 용원도 회의실 뒤편에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전기본 회의실 미팅은 두 사람이 참석해서 회의 기록을 남기고 필요한 자료를 보강하는 업무를 하게 되어 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태준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장 중앙의 자리로 가서 앉기 직전, 준섭의 시선이 정확하게 우경에게 닿았다.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키는데, 그 소리마저 준섭의 시선에 잡힐 것만 같았다.
와닿는 시선은 선명하지만, 화 많이 났나요. 속으로도 중얼거리기 어려운 막막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검은색 슈트를 입은 태준섭은 완벽히 대외적인 모습이다. 어젯밤 머리를 적시고 우경을 향해 달려왔던 남자에게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이나 표정 따위는 저 남자의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투구를 쓴 전사처럼 태준섭 본부장은 방어 체제를 완벽히 갖추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연우경처럼 직급이 낮은, 게다가 파견 계약직인 부하 직원의 실수에 화내는 시간조차 아까울 사람.
이유 없이 서운한 마음이 들어 눈이 시큰했다. 준섭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왜, 라고 묻는 것만 같아 우경은 고개를 숙였다.
“회의 시작합니다. 강지원 사장님부터 발언해 주십시오. 전략 1팀과 유기적 논의가 되고 있는지 짚어 주세요. 글로벌 전략 회의 추진 위주로 말입니다.”
준섭의 말이 팽팽히 당겨진 시위에서 날아가는 화살처럼 공간을 갈랐다. 우경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릎 위에 둔 랩톱으로 조용히 회의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회의는 한 시간 안에 끝났다. 45분이 지나자 준섭이 손을 들어 발언의 길이를 조절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논의된 안건을 빠르게 정리하는 단계로 들어갔다. 회의록 기록보다 더 정확한 요약이었다. 우경은 잠시 랩톱 화면에서 눈을 떼고 준섭의 얼굴을 그리고 회의실 임원들을 둘러보았다. 고작 50분 회의에서 참여한 임원들 모두 지친 기색이다. 받아 적기만 하는 우경이나 용원 역시 그러했지만, 회의를 주관하고 이끌어 가며 가장 에너지를 많이 쏟아 낸 준섭만 홀로 생생했다.
주위를 향해 준섭이 계산된 웃음을 지었다.
“너무 과제를 많이 드렸나요? 빌어먹을 놈, 하시는 건 아닌지.”
일제히 터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아니라는 답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어려움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따로 연락 주십시오.”
준섭이 데스크 위에 엎어 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밤 12시까지 상관없습니다. 사안에 따라선 새벽도 괜찮고요.”
준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순한 동작일 뿐인데 준섭에게서만 마치 야생의 동물의 움직임처럼 근육의 탄력성이 느껴졌다. 묘하게도 그런 사소한 행동과 말버릇, 의외의 타이밍에서 던지는 웃음 같은 것들이 타인을 완벽하게 압도했다. 타고난 동물적 감각과 운동 에너지가 높은 사람이에요. 용원이 했던 표현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임원들이 나가면서 한 번씩 우경과 용원을 쳐다보았다. 태시환 회장 비서실 출신인 용원과는 알은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낯선 얼굴인 우경에 대해서는 호기심 어린 눈길이었다.
“같이 일하는 연우경 씨입니다.”
최용원 과장이 소개말을 하고 우경이 미소를 지으면서 목례를 했다. 문득 앞으로 내민 손을 보고 우경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발언을 했던 전자 강지원 사장이었다. 우경의 손을 꾹 쥐면서 사장이 물었다.
“내가 모르는 얼굴이네요. 언제 입사했죠?”
“계약직입니다.”
“아하, 계약직.”
흥미롭다는 반응을 숨기지 않으며 강 사장의 시선이 우경을 훑어 내렸다. 여전히 악수한 손은 풀지 않은 채였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아마도 최 부사장. 귀엣말처럼 둘이 말하지만 들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어쩐지 모를 수가 없는 미모인데, 처음 본다 싶었습니다.”
우경이 웃으며 잡힌 손을 빼내려 꼼지락거렸다.
“계약 기간은? 본부실 채용 계약직인가? 무슨 기준으로 뽑혔지?”
반반한 얼굴로 밀고 들어왔냐는 은근한 멸시가 깔린 물음이었다. 강 사장에게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악수는 어떻게 떼어 내야 하는지 잡힌 손만 보면서 잠시 망설이는데 대신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송백재 발탁 계약직이죠.”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의실 앞쪽에서 두어 명의 임원에게 붙잡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태준섭이 강 사장 옆으로 서며 말했다. 말하는 동안, 준섭의 눈은 우경의 손만, 정확히는 우경의 손을 잡은 강 사장의 손만 쳐다보고 있었다. 강 사장이 머쓱해하며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송백재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감 때문인지 태준섭의 싸늘한 눈길 때문인지 강 사장이 얼더듬으며 변명했다.
“아, 나는 전기본 계약직이라고 해서……. 전기본 직원은 더 신경 써서 넣어야 하는데 무슨 기준인가……, 챙기는 차원으로.”
“기준은 저도 모르고요. 일 시켜 보니 능력은 알겠습니다.”
준섭의 턱을 까닥 움직였다. 우경이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가고 뒤이어 용원이 나왔다. 열린 회의실 문 너머 강 사장과 최 전무가 준섭에게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경은 본부실 밖으로 나가 화장실로 향했다. 물비누를 펌핑하여 듬뿍 덜어 내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손을 한참 동안 씻었다.
냉수에 오래 노출된 까닭에 차가워진 손을 두어 번 쥐었다가 펴며 우경은 본부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불쾌한 악수로 느꼈던 찝찝한 기분은 사라졌는데, 책상 한 쪽에 접어 둔 신문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무거워진다. 머리를 작게 흔들어 복잡한 심정을 떨어내고 랩톱에 임의로 작성한 회의록을 펼쳤다. 마무리를 해서 보고할 생각이었다.
첫 번째 페이지를 반쯤 고쳤을 때, 본부장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양지은 비서를 비롯해 세 사람이 동시에 일어서자 준섭이 앉으라 손으로 표시를 했다. 준섭은 곧장 용원의 책상으로 가서 상체를 숙이고는 암호처럼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랩톱 화면을 같이 들여다보았다. 준섭이 검지를 뻗어 화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응, 그래요. 회의에서도 그런 느낌이었어. 이쪽으로 조금 더 디벨롭해 봅시다. 수고.”
몸을 펴면서 준섭이 용원의 책상 위에 있던 약식을 집어 들었다.
“이거 약식인가?”
“네.”
한 번 툭 손바닥 위로 던져 잡는 준섭에게 용원이 빠르게 말했다.
“드실래요? 요만큼 떼어 먹은 거긴 한데.”
준섭이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배고팠어.”
준섭의 말에 양지은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본부장님, 샌드위치 준비할까요?”
“아니요.”
“그럼 쿠키나, 뭐라도 간식거리를…….”
“이거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준섭이 약식을 양복 포켓에 넣고는, 우경을 향해 걸어왔다.
우경은 모르는 척 고개를 조금 숙이고 랩톱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내내 어깨너머로 준섭을 계속 바라보던 우경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는 듯 준섭이 세워진 랩톱 모서리를 톡, 검지로 두드렸다. 우경이 고개를 들자 준섭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화를 낸다기보다 관찰한다는 느낌이 더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기사 건으로 화를 내어야 하는데 다행히 사람들 앞에서는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회의록 작성 언제까지 됩니까. 마치고 나랑 이야기 좀 합시다.”
“30분만 주시면…….”
준섭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30분이나?”
“아……. 최대한 빨리하겠습니다.”
답하는 우경의 귓등이 붉어졌다. 좀 전 회의실에서 강 사장에게 연우경을 뽑은 기준은 동의할 수 없지만 시켜 보니 능력은 있다고 평해 줬는데, 곧바로 무능력을 질책받는 기분이었다. 밖에서 꾸중 들을 일을 해 놓고서 귀가 시간을 늦추는 아이처럼 보인 건가, 부끄러워졌다.
랩톱 화면만 보며 손가락을 놀리는데 태준섭이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에 이마가 따끔거렸다. 우경이 고개를 들자 제 귀를 쓱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며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빨개졌어.
우경이 속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20분이 지나기 전에 완성을 하고, 이어 출력을 마친 회의록을 들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본부장실 문을 노크하며 우경은 발끝에 힘을 주었다.
“네.”
답하는 평범한 소리에도 심장이 둥둥 울렸다. 미친 건가 봐, 내가. 우경이 이를 꾹 다물었다가 떼어 냈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몸을 밀어 넣는 우경을 준섭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우경이 문 앞에서 한 번 목례를 하고 바닥만 보면서 데스크 앞으로 갔다. 고개를 조금 숙여 준섭의 손만 바라보면서 회의록을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그제야 준섭이 팔을 뻗어 책상 한켠에 밀어 두었던 조간신문을 끌어왔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신문을 펼치는 동안 우경은 표시가 나지 않게 숨을 몰아쉬었다.
태준섭의 사진이 크게 실린 기사가 나온 면을 펼쳐 놓고서 준섭은 말이 없었다. 우경이 사진만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내가 이걸로 새벽부터 쌍욕을 얼마나 들어먹었는지.”
우경이 허리를 펴고 준섭을 바라보았다. 화를 내고 있는데 어조나 얼굴은 평소 태준섭 본부장과 다름이 없었다. 준섭은 비스듬히 의자를 돌려놓고 몸을 뒤로 기댄 채로 우경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연우경 씨 표정이…….”
준섭의 입술이 비스듬히 벌어졌다.
“원인 제공자치고 되게 온정적인 눈빛입니다.”
“네?”
“그 얼굴, 꼭 두들겨 맞고 들어온 아군을 보는 억울함인데, 왜요. 누가 욕했냐고 묻고 싶습니까?”
“죄송합니다.”
준섭이 탁 손끝으로 신문을 쳐서 밀어냈다.
“사람을 아주 얍삽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연우경 씨 변명 좀 들어 봅시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왜죠.”
차가운 반문에 우경이 준섭과 눈을 맞추었다. 준섭이 말은 거칠게 했지만 함부로 분풀이를 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태준섭은 조금 비딱하게 우경을 올려다보며 설명을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 사진을 첨부했을 때는 관례적으로 참고 자료를 더 송부하고, 대개 추가한 자료까지는 기사에 쓰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전면으로 사용하는 일은 예상치 못했고 다음부터 추가 자료 첨부는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하, 준섭이 짧게 웃었다.
“재밌네요. 이런 변명은 신선한데? 그러니까 이 상황을 다 예상하고 사진을 첨부했고 내 질책에 뭐라고 답할지 변명거리도 마련해 두었다. 그런데 하지 않겠다, 이 말입니까?”
준섭이 가까이 와 보라 손짓을 했다. 우경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내가 어떻게 판단을 해 줄까. 너, 역시 나한테 기어들어온 엑스맨인가.”
우경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닙니다, 하고 말해 봐.”
태준섭의 명령에 오히려 입이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말해 봐, 아.닙.니.다.”
준섭이 한 자 한 자 짚으며 다시 요구했다. 우경은 붙었던 입술을 달싹였다.
“말 못 하는 거 보니 맞나 본데, 그래도 말해. 아니라고.”
왜요, 라는 물음 대신 우경은 입을 더 힘주어 다물었다. 고집을 읽었는지 준섭이 답을 먼저 주었다.
“내가 아니라고 대충 뭉개고 넘어가고 싶으니까.”
“맞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준섭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옆으로 틀고서 하하, 웃더니 손으로 툭 책상을 두드렸다.
“이리 와 봐.”
충분히 가까운 거리 같은데 준섭이 조금 더 와 보라 손짓을 했다. 우경은 발을 떼는 둥 마는 둥 약간 움직였다. 고작 그 정도? 라고 묻듯이 준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연우경 씨, 본인이 되게 인색한 거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말 못 들어 봤습니다.”
준섭이 푸훗 소리를 내더니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특별한가 봅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
우경은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좁혀진 거리 때문에 태준섭의 체향 섞인 향수 냄새가 너무 짙게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몸 곳곳이 긴장되었다. 마치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준섭의 시선이 예민한 부위에 머물렀다. 숨을 쉬느라 가슴이 오르내리자 단단해진 끝이 직물에 쓸렸다. 우경은 아랫입술을 슬쩍 물었다가 놓았다.
“내가 미쳤지.”
준섭이 이를 꽉 맞물렸다 떼어 내며 말했다.
“물 먹여도, 엿을 먹여도, 코 베어 간다고 해도 너 못 자르겠다.”
우경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이미 더 곤란해졌다는데, 태준섭의 이미지나 위치에 어떤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다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고, 아이돌 쇼 같은 홍보 그만하라고 욕을 먹을 텐데.
억울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우경은 고개만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런 무의미한 사과를 하면서도 ‘너 못 자르겠다’는 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언제까지냐고, 언제까지 붙여 놓을 거냐 묻고 싶은 혓바닥을 꾹 눌러야 했다.
“그런데, 대체 뭘 넣고 다닙니까. 조그만 주머니가 다람쥐 볼처럼 불룩해.”
준섭이 손을 뻗어 우경의 정장 재킷 주머니를 가리켰다.
“아, 아. 이거…….”
우경이 장식용에 가까운 작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얼결에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감싸 쥐고 있기만 했다. 말랑한 약식이 손아귀 안에서 모양이 흐트러졌다.
“나, 줄 겁니까?”
“……네.”
준섭이 손을 내밀었다. 우경이 조금 더 다가가 준섭의 손바닥 위로 약식을 두었다. 아주 짧은 순간 손끝이 준섭의 손바닥을 스쳤다. 그것만으로도 귀 끝까지 빳빳해졌다. 눈을 맞추지 못하고 넥타이 매듭쯤만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가 집에서 만드셔서, 맛은 좀 없어요. 식사 대용이라 달지도 않고……. 아침 안 먹었다고 가방에 넣어 주셔서요. 건강에는 좋대요. 그러니까 드셔도…… 나쁘진 않을 텐데…….”
준섭이 모양이 찌그러진 약식을 손바닥에 올려 두고 우경을 쳐다보았다.
“귀엽지나 말든가.”
“본부장님.”
“이렇게 말 안 듣고 인색 떨 거면서, 왜 귀엽게 굴어. 사람 미치게.”
우경의 귓등이 다시 붉어졌다. 준섭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손가락을 앞으로 까닥였다. 우경이 상체를 기울이자 손을 뻗어 귓불을 잡았다. 눈이 커다래지는 우경을 보며 준섭이 조금 웃었다. 잠시만.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며 작은 점을 손끝으로 긁고 귓불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발갛게 된 뺨을 손바닥으로 쓱 쓸어내리고는 말했다.
“수요일, 봅시다.”
우경이 눈만 깜박거리자 양손으로 볼을 감싸 쥐고는 다시 말했다.
“수요일.”
양 볼이 안쪽으로 밀려 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우경은 입에 힘을 주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준섭이 프흣, 하고 웃었다.
본부장실을 나와서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심장이 잘게 뛰었다. 우경은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열기를 감추려 고개를 아래로 기울였다. 손등으로 양 뺨을 누르니 준섭의 손바닥이 닿았던 느낌이 오히려 더 생생해졌다.
우경은 뺨에서 손을 떼고 새로운 문서 창을 열었다. 불규칙적으로 튀어 오르는 심장을 일단 가라앉혀야 했다. 이런 식으로 굴면 금방 양 비서나 최 과장에게 들켜 버린다.
억지로 마른침을 삼키고 송백재 보고용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보고 문서 작성이 끝나면 청년 아카데미 졸업식 연설문 초안을 완성해야 한다. 유 실장님한테 자료 요청을 넣었는데 아직 답이 없었다. 하긴, 어제부터 오늘까지 기사 건으로 시달렸으니 그럴 만도.
후우. 우경이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태이섭 상무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데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쉽게 서지 않았다. 태이섭 상무를 만나기 전에 준섭에게 미리 알려야 하는지도 망설여졌다.
모니터만 바라보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본부장실 문이 열렸다. 양지은 비서가 일어서서 태블릿 화면을 준섭에게 내밀었다. 점심 약속 스케줄을 확인하며 준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경의 책상 옆을 지나기 전, 우경이 먼저 준섭을 불렀다.
“본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준섭의 눈썹이 슬며시 들렸다가 내려갔다. 우경 앞에 서서 예의 본부장다운 어조로 물었다.
“급한 일입니까? 시간이 빠듯한데 5분쯤 괜찮습니다. 아니면, 다녀와서 들어도 됩니까?”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기사 건으로 태이섭 상무님께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했는데 답이 없었다. 준섭은 입을 다물고서 우경을 내려다보았다. 뺨 근육이 미세하게 실룩였다.
“본부장님 홍보 관련은 필요에 따라 보고드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준섭이 손을 올려 턱을 괴고는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우경이 죄송하다는 뜻으로 시선을 낮추었다.
“할 수 없네.”
준섭이 입술을 문지르던 손을 내려 타이 매듭을 매만졌다.
“다녀오세요.”
혹시나 화를 낼까 봐 손까지 떨릴 지경이었는데, 준섭이 선선히 답을 했다.
“다녀와서 나한테도 보고하시고.”
눈이 마주치자 준섭이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그러겠습니다.”
우경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 *
이섭은 폭이 좁은 칼라에 라인이 날렵한 싱글 슈트 차림이었다. 흰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짙은 청색 슈트에 과감하게 매치한 적갈색 타이는 보수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화려했다. 새삼스레 TK의 모델은 태이섭이라던 홍보 회사 사람들의 말이 과장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섭을 감싸고 있는 특유의 화려함은 패션이 아니라 어쩌면 몸속 일부분처럼 붙어 있는 자부심과 귀티 나는 얼굴 때문일지도.
“앉으세요.”
이섭이 일어서며 소파 자리로 손을 뻗었다. 미소는 덤이었다.
이 상황에서 저런 태도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철저함이라니, TK 황태자답다. 바싹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면 입가에 조소가 스쳤을 테다. 우경은 거의 처음으로 이섭을 앞에 두고서 좋든 나쁘든 사적인 감정을 실어 판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섭의 가장된 여유로움이 만들어 내는 이지적인 미소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우경과는 직각 방향으로 앉아 이섭이 말했다.
“이야기하세요. 연우경 씨.”
“먼저 조간 기사로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섭은 양손을 깍지 낀 채 우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시선에 목이 말랐다. 어디서부터 엉키기 시작했는지 모를 실타래를 보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었다. 어젯밤 이섭이 전화로 내질렀던 말들이 아직 가라앉지 못한 부유물처럼 머릿속을 지저분하게 떠다니고 있다. 우경은 준비된 보고 내용을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 오후에 신문사에 배포할 기사 자료를 본부장님께 컨펌받았습니다. 그 후에 메일을 송부하면서 덧붙인 참고 자료와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관례적인 일이고 대부분 기사는 참고 용도로 추가한 파일을 쓰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내용이나 사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부장이 지시한 바가 아니다, 그 말입니까?”
“네, 추가된 사진에 대해서는 신문을 확인하기 전까지 모르셨습니다.”
이섭이 킥 하고 웃었다. 순식간에 이지적인 황태자는 사라지고 불량한 반항기가 도는 얼굴로 우경을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태준섭이 그렇게 허술해요?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의 눈과 손으로 확인을 해야 하는 강박증 환자가? 태준섭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아요. 권한도 주지 않습니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을 가진 비난이었다.
“평소에는 그러십니다. 이번엔 상황이 좀 꼬였습니다. 컨펌을 받고 메일을 보내기 전에 본부장님이 송백재로 가셨고 이후로는 두 시간 넘게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자에게 보냈던 메일을 포워드했는데 그 메일은 오늘 아침에 확인하셨습니다. 모두 제가 서툴러서 벌어진 일입니다.”
하.
이섭이 웃음을 끊었다. 입술 끝이 신경질적으로 말려 올라갔다. 얇은 입매가 치켜 올라가자 턱선이 더 가파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본부장은 이런 변명에 무슨 답을 주던가요.”
“꾸중 들었습니다. 얍삽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그것뿐입니까.”
이섭이 우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눈매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동자가 우경을 시험하고 있었다. 공모가 아니라는 걸 이 정도 설명으로 믿으란 말이냐는 불신이 깔린 시험이다. 우경은 눈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상무님 사람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연우경 씨 대답은?”
이섭이 깍지 낀 손가락을 세워 양 손바닥을 붙게 하고는 물었다.
“대답 안 했습니다.”
“연우경 씨가 나를 찾아온 건 알아요?”
“네, 말씀드리고 왔습니다.”
기막히네. 이섭이 턱을 옆으로 틀고는 웃음을 흘렸다.
“점심합니다.”
이섭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올려다보는 우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저는…….”
우경이 일어서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약속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보고는 하고, 점심은 먹지 말래요? 태준섭이?”
“아닙니다.”
“어제, 친구는 잘 만났어요?”
“네.”
이섭이 고개를 얕게 저었다.
“내 말을 무시하네요.”
“상무님, 주어진 기간 동안 실수 없도록 최선을 다해 일을……. 제가 해야 할 일을 잘하겠습니다.”
“최선이라…….”
이섭이 머리를 조금 뒤로 젖히고는 시선을 비어 있는 공간 어디쯤에 두었다.
“연우경 씨 일이 뭐였더라…….”
이제 생각났다는 듯이 우경을 다시 보면서 이섭이 말했다.
“그렇지, 태준섭 홍보였죠. 이미지 관리.”
이섭이 한 걸음 우경에게로 다가왔다. 우경은 앞으로 모은 양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그러니까 이번 기사도 홈런이네.”
“상무님. 그건……, 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거짓말도 할 줄 알고. 뻔뻔하기도 하고. 내 말 깡그리 무시할 만큼 배짱도 좋고. 어이가 없네. 대체 이 얼굴 어디에서 그런 면을 찾아야 하죠?”
우경은 답 없이 시선만 떨어뜨렸다.
“내 사람이라고 말해요. 태준섭한테.”
“저는 지금 본부실 소속입니다.”
“말하고 잘려요.”
“상무님, 두 달 남았습니다.”
이섭이 우경을 안타깝다는 듯 쳐다보았다.
“두 달. 연우경 씨 그 두 달이 지나면 예전으로 못 돌아가요.”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그래요. 어제 말했잖아요. 내 말 무시했지만.”
잡놈이라고 했었지. 밤새 귓속을 맴돌던 말이었다. 우경이 시선을 들고 이섭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다면 잡놈이라는 태준섭에게 굳이 우경을 선택해서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을, 했습니다. 줄곧 생각했고 어제는 더 깊이 생각했어요. 백설이 발바닥도 생각을 덜어 주지 못하더라고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의문 하나만 남았어요.”
우경이 단련된 표정으로 이섭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TK 사람도 아니고 상무님 사람도 아니고 전혀 모르는 작은 홍보 회사 팀장인 저에게, 왜 그런 제안을 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설명 충분히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이섭의 턱선이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우경은 솟아오르는 질문 하나를 꾹 눌러 삼켰다. 왜 나를 태준섭이라는 남자 옆에 붙여야 했냐고. 그래 놓고서 이제 와 왜……!
우경은 감정을 감추고, 몸에 배어 있는 미소를 지었다.
“믿어 주신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섭이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왔다. 그런 미소 따위에 속지 않는다는 듯 더 불쾌한 표정이었다.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속삭였다.
“믿어 주신 만큼 열심히……, 좋아요. 태준섭한테 잘리라고요. TK그룹 홍보팀, 마케팅, 비서실 어디라도 꽂아 줄 테니까.”
“저는.”
우경이 바싹 다가온 이섭의 턱만 바라보며 말했다.
“계약 기간을 채우고 TK와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에이블에 혹여 피해가 된다면 지금이라도 사표를 내겠습니다.”
이섭이 우경의 콧등이라도 두드릴 듯 손을 올리더니 흘러내린 앞머리를 걷어 올렸다. 이마도 스치지 않고 오직 머리카락만 닿았던 손이 떨어졌다. 우경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시선이 부딪혔다.
“연애해요? 본부장이랑?”
“아니요.”
“그럼 뭘 해요? 두 사람.”
우경이 순간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두 달인가요?”
무슨 뜻인지 의미를 살피느라 우경은 답하지 않았다. 상관없다는 듯 이섭이 바로 말을 이었다.
“나랑 해요, 그게 뭐든. 두 달 동안.”
“아무것…….”
우경은 목이 꽉 막혀서 말을 멈추었다. 억지로 숨을 삼키고 말을 했다. 침착하고 싶지만, 발끝부터 목소리까지 떨렸다.
“본부장님과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섭의 입매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가늘어진 눈에서 뜨거운 분노가 느껴졌다.
“좋아요. 그 말 지키세요. 같이 진창에서 구르고 싶지 않으면.”
경련하듯 바들거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며 우경이 태연한 척 물었다.
“무슨 뜻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본부장이랑 같이 진창에 처박히면, 본부장은 흙 털고 일어나 뻔뻔하게 활보하겠지만, 연우경 씨는 아니라고요.”
우경이 조금 웃었다.
“뭐든 상무님이랑 하자고 하셨는데, 그럼 그때도 저만 진창에 빠지나요?”
모욕당한 사람은 우경인데 이섭의 뺨이 붉어졌다. 마치 사랑을 고백하다가 무안을 당한 순진한 남자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일은.”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우경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돌아서기 직전, 이섭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두 달, 어떻든 진창에 빠져야 한다면 저는 태준섭 본부장님과 같이 하겠습니다.”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우경이 돌아섰다.
* * *
준섭은 데스크 앞에 서 있었다. 다가온 우경을 향해 폴더를 내밀었다. 준섭의 코멘트가 적힌 청년 아카데미 졸업식 연설문이었다.
“수정해서 올리겠습니다.”
“네.”
저녁 약속 시간 때문인지 준섭이 큰 걸음으로 본부장실 뒤편에 있는 옷걸이로 향했다. 우경이 뒤를 쫓아가서 재킷을 내리려 하자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준섭이 재킷에 팔을 넣으며 물었다.
“태이섭 상무 만났습니까?”
“네.”
준섭이 좀 찡그리면서 재킷을 마저 입고 단추를 잠그려다 말고 또 조금 눈매를 찡그렸다. 우경이 표정을 살피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하라고 하셔서…….”
“그래요. 내가 가라고 했죠.”
재킷 단추를 채우지 않고서 준섭이 트렌치를 껴입었다.
“추가적으로 첨부한 사진에 대해 말씀드렸고 저의 미숙한 일처리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준섭이 쓰읏 하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다시 찡그렸다. 우경이 빤히 쳐다보자 트렌치 깃을 바로잡으며 물었다. 찡그린 얼굴과 다르게 평상시와 같은 어조였다.
“태이섭 상무는 뭐라고 합니까.”
“처음엔 안 믿으셨는데 설명 잘 드렸습니다. 관례적인 일이었고 본부장님께서 송백재로 가신 후에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아 메일을 포워드시켰지만, 오늘 아침에 확인하셨다고.”
“나한테는 하지 않던 변명을 잘 써먹었네요?”
우경이 답하지 않고 시선만 약간 낮추었다. 준섭의 타이와 아직 단추를 채우지 않아 벌어져 있는 양복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준섭이 한 걸음 다가섰다.
“전부입니까?”
우경이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태이섭 상무가 한 말 전부 다 해 봐요.”
“본부장님은 본인이 직접 세세하게 확인하는 습관이 있으시다고.”
“맞습니다. 지금처럼 말이죠.”
충분하지 않다, 더 말하라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답이었다.
“점심 같이하자고 하셨는데.”
준섭의 입가가 순식간에 비틀렸다.
“거절했더니, 본부장님 지시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요?”
“그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 하지 그랬습니까.”
우경이 고개를 틀어 시선을 돌려 버리자, 준섭이 검지를 턱 아래로 가져다 대었다. 저를 바라보도록 제자리로 돌려놓고는 시선이 마주치고서야 손을 떼었다. 가벼운 터치였지만 경고를 담은 접촉이었다. 오후 내내 참고 있던 불안감과 버거운 감정들이 갑자기 한구석이 툭 터진 주머니 속 잡동사니처럼 쏟아져 내렸다. 우경이 준섭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일과 상관없는 말씀도 하셨어요.”
“무슨 말.”
“본부장님과 연애하냐고.”
미친. 소리 나지 않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준섭이 시니컬하게 물었다.
“재밌네. 우경 씨 답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준섭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느냐는 반응 같아 우경의 심장이 쿡 쑤셔진다.
연애가 아니면 우린 뭘 하는 걸까요, 라고 물어본다면 이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다. 냉소로 무시할 수도, 아이처럼 굴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해 줄지도 모르겠다. 이미 모든 상상 가능한 반응을 오후 내내 하나씩 끄집어내 보았다. 반응은 달라도 결론은 하나였다. 그래서 우경은 묻지 않기로 했다.
“태이섭 상무님께서.”
우경은 이유 없이 아파 오는 목을 진정시키느라 말을 멈추었다.
준섭은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우경의 말을 기다렸다. 표정에는 미미한 변화밖에 없었지만 그 자식이 또 뭐, 라는 성가심과 짜증을 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감정에 상처받는 제 마음이 어이가 없어 우경은 씁쓸해진다.
“태이섭 상무가 또 뭐라고 합니까?”
“본부장님한테 잘리라고 하시더군요.”
“그럴 일 없다고 전해 줘야겠네.”
준섭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보기 좋은 그 웃음에 설레면서 동시에 그 자신만만함을 시험하고 싶어진다. 위선이라고 해도 좋고 위악이라고 해도 좋다. 태준섭을 만난 그날부터 우경은 온통 모순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 같았으니까.
“제가 태이섭 상무님 사람이라고 말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 잘릴 거라고.”
준섭은 눈썹 한끝만 올리고서 우경을 쳐다보았다. 눈빛은 사나워졌는데 겉으로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자세히 관찰해 봐도 들먹이는 호흡이 조금 깊어진 정도였다.
“그런 말 안 한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제가 태이섭 상무 사람이라고 해도 저 안 자를 거잖아요.”
“새삼스럽게.”
준섭이 오만하게 되받아쳤다.
“내 걸로 만들면 되지. 안 그래?”
우경이 태이섭의 사람이든 아니든 진심으로 상관없다는 투였다.
‘난 비위도 좋고 식성도 좋아서 떨어지는 걸 넙죽넙죽 잘 주워 먹어. 체하지 않을 만큼 영리하기도 하지.’
우동집에서 준섭이 한 말을 떠올리니 준섭의 말대로 새삼스럽다. 태준섭은 말짱하게 털고 일어설 테지만 우경 홀로 진창에서 뒹굴게 될 거라는 태이섭의 경고가, 그래서 더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태이섭 상무님이 경고하셨어요.”
준섭을 쳐다보느라 우경의 목이 약간 뒤로 젖혀졌다. 말이 차가운 구슬처럼 긴장한 목구멍을 늘이며 굴러 나왔다.
“저더러, 진창에 빠질 거라고 하시더군요. 본부장님은 그 진창에서 흙 털고 가뿐하게 일어나겠지만 난 아닐 거라고.”
준섭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스쳤다.
“그래서, 뭘 원합니까?”
우경은 눈도 없는 겨울밤에 잠겨 있는 숲처럼 차고 검은 눈동자를 보았다. 어차피 털어 버릴 진창 같은 인연이라면, 그것밖에 안 되는 얇고 하잘것없는 만남이라면 얄팍한 몸으로도 베어 낼 수 있는 종이 날처럼 굴고 싶었다. 저 남자의 몸이든 마음이든 어느 한구석, 단지 두텁고 깊은 보호막의 겉면뿐이라 할지라도.
“아까……, 왜 찡그렸어요?”
무슨 이야기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준섭이 쳐다보았다.
“재킷 입으면서. 트렌치 덧입으면서.”
우경이 한 걸음 움직여 바싹 붙어 섰다. 열린 양복 깃 안으로 손바닥을 미끄러뜨리자 눈이 다시 찡그려졌다. 어젯밤 맘껏 깨물었던 부위를 찾아 더듬어갔다. 부드럽게 매만지는데도 준섭은 찡그린 채로 이를 맞물었다.
“생각했어요?”
“뭘.”
“나는 생각했어요. 태이섭 상무님이, 태준섭이랑 하는 게 무엇이든 나랑 하자고 제안하셨거든요.”
태준섭의 검은 눈에서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우경은 의도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쓰라리는 감각에 준섭이 이를 물어 신음을 삼켰다.
“본부장님 생각했어요. 쓰라렸거든요.”
하, 준섭이 열기를 담은 숨을 내쉬었다.
“저 개자식이 이렇게 만들었지, 하는 생각?”
“네. 그래서 태이섭 상무님께 망설이지 않고 더듬지도 않고 답해 드렸어요. 어차피 진창에서 구를 거면 태준섭과 구르겠다고. 계약 두 달 남았으니까요.”
“두 달?”
준섭이 의미를 새기려는 듯 되물었다. 모양 좋은 입술이 비뚤게 올라갔다. 우경이 준섭의 가슴을 스치며 손을 빼어 냈다. 잊었다는 듯 덧붙였다.
“아. 오늘 잘리면 남은 날이 오늘뿐이네요.”
“오늘 안 자르면, 두 달?”
“네.”
“하루든, 두 달이든 너 나랑 진창에서 구르겠다고.”
“네.”
“그렇게 좋아?”
비웃는 눈이 날카로운 종이 날처럼 빠르게 가슴을 베어 냈다. 준섭도 고작 우경의 겉면 어딘가에 실금처럼 가느다란 상처를 남기는 중이다. 그것뿐이다. 아무리 선명히 각인했다 하더라도 어느새 희미한 잔상만으로 남는 꿈처럼, 두 달 후면 모조리 지워져 버릴 감각들이다. 이 남자와 거짓말 같은 우연이, 인연이, 어쩌면 악연이 다만 꿈일지도 모르겠다.
우경은 준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경의 완벽한 이상형의 남자가 생생한 온도로 전해진다. 꿈에서 깨어나면 다 지워질 뜨거움이다.
“내가, 그렇게 좋아?”
우경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고 슬며시 깨물었다가 떼어 냈다.
“네. 좋아요. 이상형이라고 했잖아요.”
“미치겠네.”
준섭이 허리를 끌어당기자 몸이 자석처럼 들러붙었다. 가슴 끝이 아리고 깊은 곳은 뭉클뭉클 뜨거워졌다. 가볍게 무는 행위로 시작한 키스가 입술 속 점막을 벗겨 낼 듯이 격렬해졌다. 우경이 막무가내로 덤비는 준섭을 피해 머리를 뒤로 빼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잡히지 않는 혀 때문에 안달이 난 준섭이 니트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미친 짓이다. 밖에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양 비서도, 최 과장도 있는데.
우경의 방어가 느슨한 틈을 타 준섭이 혀를 잡아채어 물었다. 아, 소리를 내기도 전에 강하게 빨아들였다. 세찬 흡입은 심장까지 뽑을 기세였다. 애를 썼지만 벗어나지 못하고서 헐떡거리며 숨만 내쉬는 게 고작이었다. 우경이 바르작거리던 몸을 축 늘어뜨리고서야 키스는 끝이 났다.
처지는 몸을 추켜올리며 준섭이 눈을 맞췄다.
“태이섭 그 새끼한테 했던 말. 다시 말해 봐.”
무슨 뜻인지 몰라 우경은 숨을 작게 몰아쉬며 눈을 깜박였다.
“내 앞에서도 해 보라고. 망설이지 말고, 더듬지 말고.”
“나는.”
혀가 얼얼하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마구 파헤쳐진 것 같은 입술 속살도 마찬가지였다. 우경은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 노력했다.
“난, 진창을 굴러도 태준섭하고.”
준섭의 큰 손바닥이 우경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디서 이런…… 게.”
한숨처럼 준섭이 말했다.
“내가 네 강아지되겠다, 응?”
준섭이 손가락으로 눈가를 쓸고 나서야 눈물이 고여 있다는 걸 알았다. 혀가 짓눌렸기 때문에 나온 신체 반응에 불과한 눈물이겠지. 우경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네 선택, 열렬하게 보답해 줄게.”
준섭이 귓가를 만지고 귓불을 주무르며 말했다. 우경은 고개를 젖혀 입을 벌린 채로 눈을 감았다.
두 달.
두 달…….
* * *
은행장과의 저녁 약속은 예상보다 더 길어졌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자리를 옮겼을 때, 외부적으로는 만남이 알려지지 않아야 할 정치인과 기관장이 먼저 와 있었다. 일식집 깊숙하게 위치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이들 셋이면 주식 시장 판도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파워가 형성된다. 주식 시장을 뒤흔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적어도, TK전자는 본인이 챙기고 이섭이 맡고 있는 물산을 지렛대 삼아 TK를 장악하는 지배 구조로 개편하려는 태서우의 장밋빛 계획은 차질이 생길 테다.
술은 한 잔만 마셨는데, 어지럽다. 준섭은 차 뒷좌석에 머리를 기대었다. 옆에 둔 신문은 제 얼굴을 담고 있다. 그 사진을 프레임에 담으며, 제 허락 없이 첨부를 하며 여자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가 궁금하다. 태서우나 태이섭이야 준섭에게 놀아났다고 분개했을 테지만 저 사진 한 장으로 준섭의 이미지, 나아가 TK의 이미지에 드라마가 더해졌다.
송백재 영감은 아직 감이 죽지 않았다. 유 실장이 들고 간 조간신문 기사를 보자마자 파안대소를 했다고 한다.
“누구 작품이고?”
답을 미루는 유 실장에게 회장은 상관없다는 듯 숟가락질만 했다.
“준섭이든 유 실장이든 그 계약직 직원이든 이기는 펀치를 쓸 줄 안다. 권투도 승부는 한 방이다. 일요일 새벽부터 TK 기사 내고 조롱했을 인간들 지금쯤 코가 눌렸겠다.”
유 실장이 미소로 동의를 표하자 다시 물었다.
“코피 흘렸을라나?”
“그 정도까지는.”
“이만 가 봐라. 준섭이가 유 실장한테 한 소리 하겠구나.”
유 실장을 질책할 것이라 한 말은, 회장은 태서우와 다르게 준섭이 그 사진을 싣게 해서, 태서우 부회장이 받을 스포트라이트를 제 쪽으로 돌려놓는 수를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난 일요일, 준섭은 송백재 서재에서 저녁 시간 전까지 꿇어앉았다.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아 합의라는 형식도 마뜩잖아하는데, 합의금에 위로금까지 준섭이 제시한 숫자는 태시환에게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회장은 소리를 높이다 종이를 구기고 펜을 던졌다. 찻잔과 서류철이 나뒹굴었다. 준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회장이 서재를 나가기 전, 준섭 앞으로 걸어와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서희, 생각나서 그러나?”
준섭이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야윈 뺨, 거뭇한 눈자위, 핏기 없는 마른 입술, 털모자로 가려진 머리.
현기증처럼 눈앞이 핑돌았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주먹을 짚으며 버텼다.
“고집은 서희 고대로 닮았다. 니 맘대로 해 봐라.”
문가로 향하는 회장의 슬리퍼 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후, 준섭은 천천히 움직였다. 무릎을 꿇는 일 같은 건 익숙할 만도 한데 일어서려다 한 차례 넘어졌다. 도저히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어 손을 바닥에 대고 기어서 이동했다. 서재 책상에 등을 기대고서야 감각이 없는 다리를 억지로 펼 수 있었다. 회장의 분노 덕분에 이것저것 찢어지고 부서진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흐트러진 서재를 치우려 들어왔던 고용인이 바닥에 주저앉은 준섭을 보고 히익 소리를 내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가신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준섭이 피로한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님, 혹시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고개를 젓자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가고 나서야 물 한 잔만 부탁할 것을 하고서 후회했다. 갈증과 동시에 요의도 느꼈다. 움직일 수 없으니 나갈 수가 없어 꼼짝없이 참는 수밖에.
뻣뻣한 등에 닿는 책상이 차갑고 엉덩이를 대고 있는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다리 혈관에 피가 돌기 시작하자 투둑투둑 피부가 터지는 것처럼 가렵고 아팠다. 준섭은 손을 들어 바싹 마른 제 입술을 한 번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주차장에서 여자의 목을 끌어안고 했던 입맞춤의 감각을 더듬었다. 입술에서 온기가 번진다고 착각했다.
준섭은 제 모습이 박힌 신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운전석에 앉은 우식을 불렀다.
“우식아.”
“네, 본부장님.”
“잠깐 어디 들러야겠는데.”
“네.”
“**동, 하늘채 아파트…….”
우식이 속력을 올리며 달리기 시작하자, 준섭은 말을 바꾸었다.
“아니. 그냥 가자.”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고 검은 창에 비치는 피로한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손을 올려 비열한 욕망이라 칭하던 입술을 더듬었다. 진창에 굴러도 좋다면서, 두 달이라 못 박던 이율배반적인 여자의 단호함에 목덜미가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