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엘리베이터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터엉,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습게도 여기까지 와 놓고선.
남자는 한 발 간격으로 마주 보고 서 있기만 했다. 남자의 등 뒤로 청회색 현관문이 보였다. 굳게 닫힌 문이 되돌아갈 수 없는 완강한 경계선처럼 느껴진다.
저 문을 넘어가는데 의지가 필요한 겁니까. 냉소적인 물음 대신 남자는 우경의 시선을 따라 문을 흘끗 바라보고는, 뒤돌아서 키패드에 손을 올렸다. 희푸른빛 숫자 위로 길고 단단한 검지가 빠르게 움직이나 싶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어깨로 문을 받치고서 준섭이 우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 내민 손인지 들어오라는 예의를 갖춘 제스처인지 판단하기 전에 우경은 그 손을 외면하고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일식집에서부터 반복해서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탐나는 것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라, 비열하게 취하고 가차 없이 버려.’
준섭을 호텔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던 날, 우경에게 선언하듯이 던진 말이었다. 알고서도 기어이 이곳까지 따라왔다.
노란빛 등 세 개가 나란히 켜진 현관에 서 있으니 어느새 마주 보고 선 남자가 손을 뻗어 왔다. 검지로 턱을 꾹 누르듯 짚자 오히려 고개가 들렸다. 검지는 턱 아래와 목으로 선을 그어 내리듯 움직여 목 중간부터 채워진 첫 번째 단추를 톡톡 두드렸다. 숨이 저절로 가쁘게 쉬어진다. 그런 우경을 바라보면서 남자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대체 몇 개야.”
토독 토독 단추를 따라 손가락이 아래로 움직였다. 가슴 중앙을 스칠 때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고, 그 순간 현관 조명등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트렌치 재킷 아래로 팔이 들어와 허리를 감쌌다. 블라우스 위로 남자의 탄탄한 근육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남자가 힘을 더하자 꺾어지듯 몸이 남자에게로 바싹 달라붙었다. 체향 섞인 묵직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남자는 우경의 재킷을 벗겨 바닥에 함부로 떨어뜨리고 허리를 꽉 끌어안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우경은 구두조차 채 벗지 못했다.
“저, 잠깐……. 구두…….”
“상관없어.”
스위치를 올리는 소리가 달칵 나나 싶더니 동굴 같던 내부 공간이 은은한 조도로 밝아졌다. 간접 조명은 액자가 걸린 벽면 위쪽으로만 켜져 있어 그림이 입체적으로 도드라져 보였다. 우경은 뭔가에 홀린 듯 걸음을 멈추고서 그림 속 소년에 온통 시선을 빼앗겼다.
“맘에 들어?”
우경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뒤에서 몸을 겹친 상태로 준섭이 물었다.
“네.”
“그래? 어디가?”
“소년이 꼭 버려진 아이 같아…….”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서 흙바닥에 쭈그려 앉은 소년은 우경과 눈을 맞추는 느낌이었다. 우경이 저도 모르게 소년의 머리라도 쓰다듬을 듯 손을 뻗었다.
“난 몹시 맘에 안 드는데.”
준섭이 뒤에서 팔을 둘러 우경을 꽉 끌어안았다. 동시에 그림을 담는 눈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
우경이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 뒤틀자 남자의 하체가 맞물리듯 붙어 왔다. 선명한 중심이 느껴지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고개를 흔들었지만 눈을 가린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손이 가슴 위로 올라와 서슴없이 움켜쥐었다. 읏, 우경은 숨을 멈추었다.
그건 다만 시작이라는 표시였는지 준섭은 순식간에 블라우스 자락을 빼어 내고 이너웨어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단 한 번 겉옷 위로 만져졌을 뿐인데 가슴 끝이 단단하게 뭉쳐져 있었다. 브래지어 위로 움켜쥐는 손길은 조금 더 거칠어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정점을 알아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이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널 과소평가했지. 이 상황에서 한가하게 그림 감상을 할 줄이야.”
남자의 체취와 열기가 너무 강해서 어지러웠다.
“아……. 아니…….”
우경은 도리질 치면서 눈을 가린 손을 붙잡았다. 힘을 주어 눈을 짓누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남자의 손은 아무리 붙잡아도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손을 떼어 내느라 들린 팔이 만족스럽다는 듯 조금 더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다른 손으로 이너웨어와 브래지어를 한꺼번에 확 밀어 올렸다. 목덜미까지 와르르 소름이 돋았다. 긴장감으로 호흡까지 멈췄는데 거칠게 움켜쥘 것 같던 준섭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우경은 후욱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가려진 시야가 열렸다. 눈이 부셔 찡그리는 순간 양 가슴이 잡혔다. 상체를 남자에게 완전히 기대고 있지만, 힐 위에 있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슴에 일정한 간격으로 압력이 가해질 때마다 우경은 숨을 몰아쉬었다. 양 엄지가 정점을 문지를 때 우경은 아아, 작게 터지는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이제 감상해. 불쌍한 소년을.”
무릎에 힘이 풀려 미끄러지는 하체 사이에 한쪽 허벅지를 밀어 넣으며 준섭이 느긋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여기 바닥에서 해 줄 수도 있는데. 귓가에 불어넣는 말에 우경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남자의 표정이 보고 싶었다. 우경이 목을 길게 빼어 남자를 돌아보았다. 자료를 확인할 때나, 사무실에서 악수를 건넬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우경이 손을 들어 가슴 위에 올려진 남자의 양손을 덮었다. 남자의 손끝이 다시 정점을 자극했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고 벌어진 입에서 더운 숨이 나왔다.
“잠, 잠시만요.”
우경이 힘을 주어 남자 손을 떼어 내려 하자 순순히 가슴에서 한 손이 떨어졌다. 이어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슬랙스 단추를 푸는 손을 다시 붙잡고 우경은 겨우 몸을 돌렸다. 아랫배에 남성이 바싹 붙어 있었다.
우경은 턱을 들어 남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힐을 신고 있어도 키 차이가 있어 여전히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우경이 떨림을 감추며 또박또박 말했다.
“고개 기울여 주세요.”
“왜.”
남자가 사무적으로 물었다. 우경은 답 대신 손을 올려 양복 재킷을 벌렸다. 와이셔츠 위로 가슴을 천천히 쓸어올리자 다물렸던 남자의 입술이 벌어졌다. 남자가 했던 것처럼 엄지로 솟아오른 부분을 문지르며 찡그려지는 남자의 눈썹을 바라보았다. 바지 위로도 확연히 드러나도록 부풀어 오른 욕망이 아랫배를 찔러 왔다. 우경은 슬쩍 몸을 떼어 냈다. 자석처럼 붙어 오는 몸과 거리를 만들며 넥타이를 붙잡았다.
“키스하고 싶어요.”
“의외로 뻔뻔하네.”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서 준섭이 비난했다. 우경이 눈으로 준섭의 입술을 끈질기게 더듬었다.
“군장이 어울리는 반듯하고 정의로운 그리스 전사 같다고 생각했는데, 입술만 달랐어요.”
“어떻게?”
“비열한 욕망.”
“같잖은 시인이었군.”
남자가 맹수처럼 달려들어 입술을 덮쳤다. 느닷없는 자극에 눈이 번쩍 떠졌다. 벌어진 입속으로 뭉툭한 살덩이가 곧장 들어와 우경의 혀를 눌렀다. 매끈하지 않은 감촉이 서너 번 혓바닥 위로 비벼지는 동안 우경은 무력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목이 뒤로 젖혀지나 싶더니 남자의 혀가 더 깊숙이 들어왔다.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결코 제 것은 아닌 살덩이가 목구멍에 박히는 기분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눈앞이 붉어졌다. 삽입 같은 키스였다. 결코 너에게 친절한 섹스를 해 주지 않을 거라는 경고일지도 몰랐다. 호흡이 가빠지면 잠시 숨 쉴 틈을 주고 다시 여린 속살을 훑으며 혀가 침입하길 반복했다. 키스만으로도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어느 순간 슬랙스 지퍼가 벌어지고 레이스 속옷을 찢을 기세로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말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젓고 싶었는데 그 역시 가능하지 않았다. 은밀한 부위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아! 남자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졌다. 우경에게 깨물려 터진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남자의 미간이 잔뜩 우그러졌다.
“기막혀서.”
준섭이 혓바닥으로 입술을 쓱 핥으며 손가락을 더 깊이 쿡 찔러 왔다. 등줄기까지 전기가 통하는 것만 같아 저절로 몸이 오그라들었다. 준섭이 눈을 찡그렸다.
“끊어 먹겠어. 대체 왜 이러는데.”
우경은 겨우 손을 들어 남자의 양복 깃을 움켜쥐었다.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을 벌리면 괴상한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거친 키스로 부풀어 오른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준섭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양복 깃이 뜯어져라 쥐고 있는 손마디가 새하얗게 질렸다. 우경은 입술을 깨물며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얼굴 들어.”
고개를 젓자 속살을 벌리며 새로운 곳을 자극했다. 펄쩍 뛰듯이 우경이 얼굴을 들었다. 준섭이 눈을 똑바로 맞추고 물었다.
“너 처음이야?”
“아니.”
이를 악물며 답하자, 남자의 눈에 비웃음이 서렸다. 갑자기 자극이 멈추나 싶더니 몸이 휙 공중으로 들렸다. 아이처럼 덜렁 안고서 남자가 큰 걸음을 옮겼다.
“놓, 놓으세요.”
“신발 신고 침실은 안 돼.”
“벗을게요.”
“가서.”
한 팔로만 가볍게 엉덩이를 받쳐 들고서 준섭이 마스터룸으로 이어지는 중문을 열었다. 워킹 클로젯과 마스터룸, 욕실이 이어지는 공간에 ‘ㄱ’자로 키가 높은 화장대 겸 작은 개수대가 있었다.
준섭이 카운터 위로 우경을 앉히자 지퍼가 벌어져 아슬아슬 엉덩이 아래로 걸려 있던 슬랙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운터는 준섭을 위해 특별 제작된 것인지 꽤 높아서 우경의 발이 바닥에서 한참 떨어졌다. 어색하게 달랑거리는 발을 보는 준섭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가까이에 마주 선 준섭이 우경의 팔을 길게 쓸어내리고,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를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준섭의 손이 닿는 곳마다 그리고 닿지 않는 곳까지 솜털이 오소소 일어났다. 무릎 아래를 매만지던 준섭이 무릎을 꿇듯이 앉아 종아리를 쓰다듬고 뒷꿈치에 걸려 있는 가죽 스트링을 내려 구두를 벗기고 스타킹도 벗겨 냈다. 스트링 때문에 움푹 팬 발목 뒷부분을 쓱 문지르자 으응 하는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쓰다듬어 내려온 반대 방향으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종아리와 허벅지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훑어 올라오자, 우경은 숨을 멈추었다. 중심에 닿지 않은 채 손을 떼고 준섭이 말끔한 얼굴로 우경을 내려다보았다. 상대는 타이까지 그대로인데, 우경은 브래지어까지 헤집어져 있다. 얇은 블라우스 아래로 붉은 살덩이가 꼿꼿하게 솟아올랐다.
쏴아, 세면대 탭에서 물이 떨어졌다. 비스듬히 돌아보니 거울에 여자의 옆모습과 거품을 일어 손을 씻는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맞부딪쳤다. 남자의 시선이 부푼 가슴으로 내려갔다. 우경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 끝이 까슬한 아사면에 스치면서 아릿한 통각이 느껴졌다. 남자가 우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눈이 마주치자 손에 물을 뚝뚝 흘리는 채로 갑자기 가슴을 감싸 쥐었다. 으읏, 우경은 목을 길게 늘이며 몸을 떨었다. 물에 젖은 얇은 블라우스는 금세 몸에 달라붙었다.
“너, 그날 얼마나 미치게 했는지 모르지.”
준섭이 솟아오른 정점을 입술에 삼키며 말했다. 따뜻한 입속에서 아사면 위로 부풀어 오른 살덩이가 굴려졌다.
“아, 흣…….”
우경이 손을 들어 제 손등을 깨물었다.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닌데.”
이로 꽉 깨물며 다른 손으로는 비틀어 올리며 준섭이 말했다. 마치 깨문 손등을 내리지 않으면 계속 깨물겠다는 듯이 빨아들이고 깨물기를 반복했다.
손등을 내리자 으흑,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준섭도 입술을 뗐다. 입술과 손이 떨어진 자리가 서늘해 몸을 떠는데 준섭이 손을 잡아 올려 빨갛게 잇자국이 남은 손등을 혀로 핥았다. 까슬하고 단단하고 뜨거운 혓바닥이 움직이자 배꼽까지 찌릿했다. 물과 타액으로 들러붙은 블라우스 위로 한 번 더 입술이 닿았다. 강하게 흡입하는 동안 우경은 카운터를 힘껏 움켜쥐며 버텼다.
고양이 울음 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낸 후에야 준섭이 고개를 들고 양복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재킷과, 타이, 시계와 커프스, 주름 없는 와이셔츠, 바지…….
우경은 떨어지는 옷가지만 쳐다보고 준섭은 흐트러진 우경의 머리칼과 멍한 눈, 부풀어 오른 입술, 뾰족하게 솟아오른 가슴 끝을 바라보았다. 한 번 더 이대로 깨물어 버린다면 우경은 또 흐느낄 테다. 브리프만 걸치고서 준섭이 우경에게 바싹 다가섰다. 고개를 든 여자의 뺨이 붉어졌다. 훑어 내리는 시선에 열기가 서려 있다.
“감상은 그만하고.”
준섭이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이대로도 예쁘지만, 다 벗긴 모습이 보고 싶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단추는 너무 작고 마음은 급해 손이 자꾸 헛돌았다.
“젠장.”
욕설이 튀어나왔다. 참지 못하고 검지를 걸어 아래로 뜯어 버리려 하자 우경이 블라우스 앞섶을 꽉 잡았다.
“싫어요. 엄마가 선물로 줬어요.”
어이가 없지만 내장까지 붙은 인내심을 끌어올려 다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앞섶이 거의 다 벌어지고 동그란 가슴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마지막 두 개는 불가능이었다. 양쪽으로 잡아 확 벌리자 투둑 단추가 튕겨 나갔다.
우경이 싫어, 라고 말하기 전에 거추장스러운 옷과 브래지어를 바닥으로 내팽개치고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부드럽고 폭신한 몸을 한 팔로 받쳐 들고서 마스터룸 문을 열었다. 메인 조명을 켜자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밝아요.”
“응.”
준섭은 아무렇게나 답하면서 우경을 침대에 눕히고서 가슴을 깨물었다. 우경이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그럴수록 가슴은 더 깊이 입속으로 들어왔다. 이로 긁고 비틀다가 손자국이 남도록 꾹 쥐었다.
아아. 몇 번이나 부끄러운 소리를 내는 동안, 어느새 팬티가 벗겨져 있었다. 아까와 다르게 느리게 손이 움직였다. 다리를 모으려 애썼지만 준섭은 오히려 허벅지로 다리를 더 벌리게 만들었다. 다른 팔로 빠져 나가려는 상체를 가볍게 누르며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아. 피하지도 못하고 멈추게 하지도 못해 우경은 울음 같은 소리를 냈다.
“아흑, 그, 그만이요.”
“아직 안 돼.”
준섭이 옆구리를 쓸어 주고 배꼽을 어루만졌다. 으응, 우경이 소리를 내자 마음에 든다는 듯이 그 입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어 부푼 입술을 혀로 핥고 소름이 인 목덜미 위로 자잘하게 입을 맞췄다.
펜을 쥐고 있던 준섭의 손이 떠오른다. 일식집에서 잔을 들고 있던 손바닥은 크고, 손가락은 긴……. 기억 속 섬세한 손보다 남자다운 관절이 있고 탄탄하고 굵던 손가락. 그 손가락 어딘가가 집요하게 아래를 자극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꺾은 관절이 솟아오른 구슬을 꾹 누르고 다시 들어갔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질척이는 소리가 움직일 때마다 울렸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온통, 몸이 붉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부부터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 이젠, 이, 이상해요. 그만…….”
아랫배가 부글부글 데워졌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가슴 끝을 입술로 비비자 왈칵 더운 물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만하세요. 그만이요.”
숫제 흐느끼며 말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불안정했다. 우경은 어지러워 손으로 눈을 가렸다.
처음부터 이 남자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다. 멈추기는 커녕 새로운 자극점을 찾아내어 괴롭히는 일에 몰두했다. 허리가 자꾸만 들려 올라갔다. 여린 살을 헤집고 딱딱한 돌기를 꾹 누르는 순간 몸이 거세게 튕겨 올랐다.
머리 위로 무언가 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정수리를 감쌌다. 안온한 기분이 들어 눈을 뜨는 순간 아래에서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아악.”
절로 신음이 터졌다. 남자가 자기를 보라는 듯 정수리를 감싼 손에 힘을 더했다. 너무 버거워 입도 벌어지지 않았다.
“눈 떠 봐.”
찡그리며 뜬 눈에 남자의 얼굴이 잡혔다. 목소리는 평온했는데 미간에 골이 패여 있었다.
“죽겠어. 조금만 긴장을 풀어 봐.”
“어, 어떻게.”
쥐어짜는 목소리를 내자 남자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부드러워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우경은 눈을 크게 떴다.
“숨을, 쉬어.”
우경이 남자를 따라 숨을 들이켰다.
“그렇지.”
맞물린 부위로 손을 내려 자극을 가하자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불편한 이물감이 조금 견딜 만하다 생각했을 때 다시 진입이 이루어졌다. 으으. 이가 맞물렸다. 남자가 입을 맞추고 혀로 맞물린 입을 벌렸다. 하아, 숨을 내어 쉬자 한 번 더 몸이 깊어졌다. 남자의 눈에 따뜻한 열기가 돌았다.
“잘했어.”
의미를 알 수 없는 칭찬을 하면서 목덜미에 깊이 입을 맞췄다. 움직일 거야. 귓바퀴를 핥으며 하는 말에 우경은 목을 움츠렸다. 뒤이은 동작에 허리를 비틀었다.
“괜찮아, 이제……. 이제 아픈 거 없어.”
거짓말이라고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순 거짓말은 아니었다. 통각이 처음이고 다음은 열감이 다음은 온통 몸을 해체해 버리는 자극이었다. 시트를 말아 쥐다가 결국엔 남자의 목을 감고서 울어 버렸다.
“그만해요. 아흣, 으응. 그만…….”
눈물을 혀로 핥으면서도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몸속에 부풀어 오르던 풍선이 펑하고 터져 버린 것만 같은데, 어느새 다시 부풀어 올랐다. 눈물이 줄줄 흘러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는 감각에 힘없이 떨어졌던 손을 올려 남자의 어깨를 꽉 쥐었을 때 세상이 잠시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축 처지는 몸을 안아 주며 등을 도닥이는 손길에 멎었던 눈물이 다시 솟았다.
떨림이 잦아들자, 빠르게 현실이 자각되었다. 우경은 남자의 팔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왜.”
“가 보려고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감추며 바닥에 떨어진 속옷 조각을 주워 올렸다. 뒷모습에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착각일 것이다. 깨끗하게 무시하고 망설임 없이 마스터룸 문을 열고 나갔다.
잔해처럼 널부러진 옷들을 보니 수치심에 몸 어딘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카운터 앞에 떨어진 브래지어와 속옷을 입고 구겨진 블라우스를 껴입었다. 가슴은 울긋불긋 엉망으로 손자국이 남았는데 드러나는 목은 매끈했다. 목덜미에 뿌리던 자잘한 키스나 곡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손길이 떠오른다.
울렁거리는 감각에 눈을 감았다가 뜰 때면 남자는 단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맞추고 머리칼을 쓰다듬거나 뺨에 입을 맞췄다. 귓가에 한 번씩 속삭이던 소리가 이제야 기억이 난다. 허리, 그렇지. 응, 괜찮아. 아직 아니야. 삽입하는 순간에도 이마를 쓸어 올리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잘했어. 오로지 우경 혼자만 붉어진 섹스였다.
태준섭은 거친 섹스에도 이성을 잃지 않을 사람이다.
나 같은 여자와 이런 섹스 따위……. 얼마나 우스울까.
무언가 발에 걸려 내려다보니 우경의 구두였다. 몸을 숙여 나뒹구는 구두의 스트링에 손가락을 걸어 가지런히 두었다. 발목 뒤편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떠오르자 마음 한 조각이 툭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다. 슬랙스를 집어 드는데 거울에 남자가 비쳤다. 싸늘한 얼굴이었다. 이 밤, 그 눈이 뜨거워진 적은 있었던가. 우경이 비스듬히 시선을 피했다.
“가 보겠습니다.”
“그러세요.”
나신의 남자가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투로 내뱉으며 다가왔다. 앞을 가로막은 남자를 비켜서 걸음을 옮기는데 뜨끔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더니 손에서 옷가지를 채어 바닥에 던졌다.
왜, 라는 말도 나오지 않아 입을 벙긋하는데 바싹 다가서서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우경이 여밈을 모아 쥐자 가볍게 그 손을 떼어 냈다.
“본부장님.”
준섭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미친 짓이지. 이걸 두 번이나.”
벌어진 블라우스 틈으로 혀를 넣어 길게 훑어 올리자 찌릿한 감각이 등줄기까지 퍼졌다.
혀는 목덜미를 훑고 귓불에서 머물렀다. 그 사이 미친 짓이라던 말과 달리 손은 나머지 단추를 풀고 있었다. 귓불을 깊게 빨아들일 때 우경은 눈을 감았다. 조금 비틀거렸던 것 같기도 했다. 밀리듯이 뒷걸음질 치며 침실로 들어왔다.
“거긴 하, 하지 말…….”
준섭이 입속에서 말랑말랑해진 귓불을 슬며시 깨물자 우경이 으으으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알아? 여기 점이 있는데.”
귓불 뒤편으로 귀고리를 걸 수 있는 피어싱 자국보다 조금 더 큰 조그맣고 까만 점이 있다. 손가락으로 쥐고 주무르다 혀끝으로 문질렀다. 우경이 주춤 물러섰다. 후크를 풀어 브래지어를 걷어 내자 또 고개를 저었다. 발긋한 자국이 남아 있는 가슴은 공기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예민하게 일어섰다. 손끝으로만 스쳤는데 우경은 고양이처럼 소리를 냈다. 고개를 숙여 입술에 머금자 우경이 머릿속에 열 손가락을 깊이 찔러 넣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벌써 맺히기 시작했다.
준섭은 손을 뻗어 까만 점이 있는 귓불을 꾹 쥐었다. 침대로 밀어 눕히며 쇄골 아래를 깊이 빨아들였다.
아아, 억눌린 신음이 났다. 아마도 붉은 자국이 오래 남을 것이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머리끝이 저릴 만큼 좋았다.
흰 가슴 위에도 한 번 더.
하악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아랫배를 찌르는 것만 같다.
말끔한 얼굴로 가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던 여자에게 충분할 만큼 흔적을 새겨 두고 싶은 충동 때문에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후우, 후…….
의식적으로 숨을 몰아쉬고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머리를 식히려 애썼다. 충동대로 굴다간 이 여자는 오늘 밤을 버텨 내질 못할 것이다.
“왜…….”
다리를 넓게 벌리자 우경이 물었다. 미치게 만드는 그 눈을 하고서.
“시시하게 끝내 버린 것 같아서.”
무릎을 세우게 하고, 그 사이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는 발갛게 부풀어 오른 가슴 끝을 사탕처럼 굴렸다.
“너무 봐줬지, 내가.”
제대로 다루기도 전에 여체가 뒤틀리며 울음이 새어 나왔다. 축 처지는 양 무릎을 다시 세우고, 한 손으로 허리를 받쳤다. 발긋해진 가슴이 오르내리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을 배꼽까지 미끄러뜨렸다. 혓바닥으로 적셔 두었던 배꼽에 손가락을 넣자 움찔하며 엉덩이를 들어 올린다. 이젠 예쁘게 근육이 잡힌 날씬한 다리에 시선이 뺏긴다. 준섭은 소름이 일어나는 흰 허벅지를 거꾸로 쓸어 올렸다. 여자의 곡선을 더듬는 눈길과 손이 지나치게 탐욕스러워 스스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여자의 허리는 이렇게 가늘었나 싶도록 잘록한데 그런 만큼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은 아찔할 만큼 풍만했다. 천천히 어루만지자 여자가 눈을 스르륵 감았다. 눈동자가 보고 싶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달라붙는 감촉에 눈앞이 아찔해진다. 시달려서 붉어진, 여전히 젖어 있는 젖꼭지를 엄지로 문지르자 눈과 입이 같이 벌어진다. 소리를 듣고 싶은데, 들려주지 않을 작정인지 입술을 깨문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움찔거리는 몸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애써 참아 내는 얼굴이 귀여운데 지금은 좀 밉기도 하다.
준섭은 여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확 끌어당겨 꿇어앉은 제 허벅지 위로 양다리를 벌리며 올려 놓으니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넓게 벌려 드러난 부분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자 몸이 떨렸다. 이번에는 붙인 채로 빙글 돌리자 시트에 묻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장난처럼 빙글 돌리고 꾹 눌렀다가 떼어 내길 반복했다. 으응, 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스스로 하체를 들썩인다.
가장 예민한 부위를 비비자 조금 더 길게, 그리고 높게 신음을 울리면서, 다른 팔에 눌려 빠져나갈 수 없는 몸을 뒤틀었다.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체념처럼 눈을 감고 입술을 또 깨물었다. 그러시던가. 집요하게 굴자 깨물었던 입술을 그제야 떼어 냈다.
“시, 싫어. 그만.”
“그래?”
손을 떼어 내고 흠뻑 젖은 손바닥을 혓바닥으로 핥자, 울 듯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왜 그런……. 더러워.”
빨갛게 익은 얼굴로 뱉는 말이 너무 귀여워 판단력이라는 게 사라진다. 나이만 먹은 이 순진한 여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직접 핥을 수도 있는데.”
우경이 입을 꾹 다물더니 손으로 아래를 가리고 상체를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싫어?”
“싫어!”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건방진 반말이 톡 쏘는 탄산 같은 자극을 준다.
“울지나 마.”
준섭이 우경의 손을 잡아 떼어 내며 그 자리에 제 것을 맞대었다. 우경이 눈을 크게 떴다.
“아직이야.”
준섭이 속삭이듯 말했다. 엉덩이를 끌어당기며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으으. 소리를 삼키려 애쓰지만 버거워 보인다. 이대로 상체를 일으켜 주저앉혀 버릴까 하다가 준섭은 손을 뻗어 여자의 찡그려진 눈썹을 만졌다.
“또 울리겠다.”
“안 울 거예요. 이번엔…….”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세게 쥐면 어디라도 부러질 것 같은 여자의 눈에 어른거리는 열망과 턱없는 승부욕이 준섭의 마지막 남은 신사다운 매너를 벗겨 버렸다.
“좋아, 한번 해 봐.”
반쯤 맞물린 채로 왼 다리를 휙 들어 어깨에 걸쳐 올리자 우경이 눈을 크게 떴다. 열망과 고통으로 흐려지는 눈 속에 오로지 저만 담게 하고 싶다. 유치한 소유욕인데 이성과 이어지는 통로를 차단해 버릴 만큼 강렬한 욕구였다. 준섭이 몸 전체를 기울이며 완전히 진입했다.
여자를 배려하느라 여지를 두었던 저번과 다르게 뿌리까지 맞물리자 쾌감이 전신을 장악했다. 붙은 부위부터 몸이 지글지글 타올랐다. 여자는 한계까지 받아들이고서도 눈물은 기어이 흘리지 않았다.
후우. 지나친 압박에 준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경이 눈을 맞추고 천천히 호흡하기 시작했다. 준섭이 미간을 좁힌 채로 조금 웃었다. 턱에서 땀방울이 흘러 우경의 속눈썹 위로 떨어졌다. 눈을 깜박이자 땀방울이 눈가를 스쳐 느리게 내려갔다. 한 방울이 다시 떨어졌다. 신호처럼 준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흐트러져 명확하지 않은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미안. 입천장에 부딪히며 나오지 않는 말을 중얼거렸다. 땀에 젖은 얼굴을 여자의 작은 얼굴에 맞대고 마른 입술로 여자의 타액을 마시면서 멈추지 못했다.
힘없이 흔들리면서도 흘리지 않은 눈물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몇 번이나 귓등까지 모조리 자근자근 씹히는 듯한 감각이 몸을 후려쳤다. 준섭은 여유를 부리던 처음과 다르게 통제가 되지 않았다. 마실수록 갈증이 일고, 뜨거워진 몸은 한낮의 사막처럼 식지 않았다.
아아. 우경이 시트를 말아 쥐었던 주먹을 올려 어깨를 밀었다.
“그만 그만. 이제 그만…….”
“때려.”
원망 섞인 눈을 보며 준섭이 찡그리듯 웃었다.
“침을 뱉어도 못 멈춰.”
한 번 더 깊이 파고들자 우경의 목이 길게 젖혀졌다.
생각과 다르게 엉망으로 굴었다. 축 처진 몸을 끌어올리자 여자는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다디단 숨이 살갗으로 스며들었다.
“나, 이젠…… 못 해요.”
그렇게 단숨을 뿜으며 그런 말을.
“고개, 들어.”
허리를 움직이자 어깨를 반사적으로 깨물고는 여자가 진저리를 쳤다.
“얼굴.”
한 번 더 다그치자 어깨에서 입을 떼고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준섭은 눈물이 말라붙은 속눈썹을 혀로 길게 쓸었다.
“그만……, 이요.”
준섭은 다시 뒤로 꺾이는 몸을 감싸 안으며 침대에 등을 붙이도록 눕혔다. 맞물린 각도가 달라지자, 결합된 지점에서 새로운 자극이 온몸을 잠식하듯 덮쳤다. 아흑. 눈을 감고서 고개를 또 젓는다.
이러다 또 울겠군.
준섭은 혀를 깨물었다. 혀를 깨물어 몸을 억지로 빼어 내고, 포근한 여체를 완전히 떼어 냈다. 붙었던 자리가 서늘했다. 여자가 가물거리던 눈을 감기 전에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넘기며 말했다.
“데려다줄게. 기다려.”
이대로는 옷을 입을 수도 없고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샤워실로 들어가 머리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대체 무슨 짓인가, 스스로를 자조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침실 문을 열었을 때, 여자는 흔적도 없었다. 깨끗하게 비어 있는 침대를 보며 준섭은 갑자기 몰려드는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준섭에게 상실감은 언제나 추위로 찾아왔다.
악몽을 꿀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이불을 둘둘 말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한기에 몸을 떨며 눈을 떴다.
짐승 발자국 하나 없는 설산이었다. 그런 꿈에서 준섭은 늘 맨발이다. 발목까지 푹푹 파이는 눈을 밟으며 걷노라면 모래주머니라도 묶어 놓은 듯 다리가 무거웠다. 무거운 다리를 보완하려 팔을 부자연스럽게 휘두르며 준섭은 애를 쓰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싶은데 멈출 수가 없다.
목표 지점은 언제나 나무 한 그루.
사진으로만 봤던 나무는 꿈에서 조금씩 크기와 모양이 달라졌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목표 지점인데, 다리는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는다. 꿈에서 준섭은 소리를 지른다. 얇은 교복 바지는 눈바람을 전혀 막아 주지 못한다. 재킷도 다를 바 없다. 해가 비쳐 들자 설산은 비현실적으로 빛이 났다. 반사되는 햇살이 눈을 찔렀다. 눈을 자꾸 부비며 준섭은 다시 소리를 지른다.
아버……, 아버지…….
아버지!
맨발은 벌써부터 감각이 없다. 그대로 눈과 같이 얼어붙어 형체가 일그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라고 부르다가 아빠. 아빠. 아이처럼 부르면서 준섭은 자리에 주저앉는다. 눈물이 얼어붙어 뺨이 시리다. 시린 뺨을 함부로 쓸어 올리면서 준섭은 이를 악문다.
죽지…… 마.
죽지, 마.
흐느끼며 깨어나고는 깨어나선 그저 추웠던 꿈이었다고, 고개를 털어 버린다. 준섭은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도 꿈에서 깰 수 있어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가위에 눌린 건 아니었다. 시계를 보니 고작 30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베개를 고쳐 베었다가 몸을 모로 세웠다. 팔을 뻗어 여자가 웅크리고 누웠던 자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온기가 남아 있다는 착각을 하며 준섭은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여자가 누웠던 자리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 * *
태준섭이 우경을 호출한 건 5시 45분이었다. 우경은 문을 노크하며 오늘 아침부터 보았던 태준섭의 모습을 기억하려 했다. 필름을 거꾸로 돌린 듯이 장면을 하나씩 짚었다.
우경이 출근했을 때 태준섭은 이미 출근한 이후였다. 두 차례 양 대리에게 전화로 몇 가지 사항을 지시했다. 우경은 수화기 너머 새어 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더블샷으로 부탁합니다. 얼음 채워 주세요.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 본부장실을 나가는 준섭을 스치듯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3시, 소회의실에서 용원과 나란히 앉아 중앙에 앉은 준섭이 보고서에 대해 하는 코멘트를 들었다. 종이를 팔락팔락 넘기는 소리까지, 그 사이사이 내쉬는 숨소리까지 곤두세우며 들었던 것 같다.
남자는 오후에도 아침처럼 산뜻한 얼굴이었다. 용원이 말한 것처럼 업무에 대해서 민첩하고 명확했으며 상대를 제압하고 조종하는 에너지를 가진 상사였다. 그리고, 태준섭은 고민을 할 때면 턱을 한 손으로 괴고 아랫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입술을 문지르는 준섭에게 우경의 시선이 달라붙었던 것 같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경은 고개를 숙였다. 미묘하게 변하던 눈빛이 가슴팍에 박혀 들었다.
우경은 호흡을 고르고 손을 겨우 뻗어 물을 마셨다. 찬물을 마시고 눈을 들어 준섭을, 소회의실을 다시 둘러보았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열고 또 열어야 할 수많은 문 중 하나를 열었을 뿐이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인생의 단계는 달라졌다. 키가 자라듯 조금 달라진 눈높이와 시야를 가지게 된 것뿐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태준섭 집의 문을 열기 전, 이미 상상했던 다음 날이다. 하루만 뻔뻔해지면, 다음 날은 더 편해질 테고 3개월 계약 중 이제 2개월 하고 조금 더 남았다. 그쯤이야. 그쯤이야, 그쯤이야.
짝, 박수를 치는 소리에 머릿속 잡념이 흐트러졌다. 긴장으로 목을 꼿꼿하게 세우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한계예요. 내가 골이 터질 지경입니다. 최용원 과장, 내 백업해 주세요. 회의 내용, 내가 넘기는 자료 정리만 잘해 주고 요구에 따라 리서치해 주면 됩니다. 방향성은 내가 잡습니다. 그리고 사인했듯이 모두 기밀입니다.”
최용원이 어련하겠냐는 투로 답했다.
“그런 면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입사 이래 계속, 해 왔던 일 모두 그렇습니다.”
“알지. 그런데……, 너무 시달리다 보니.”
준섭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했다.
“상스럽게 말하면, 입에 재갈이라도 물리면 좋겠어.”
우경만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눈이 똑바로 마주치자, 이내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최용원은 그런 말쯤이야 익숙한 듯 알겠습니다, 하며 입에 지퍼를 채우는 제스처를 취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싶다는 남자의 방은 노크에도 답이 없었다.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한 번 더 노크를 했다. 다시 숫자를 세어야 하나 망설이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태준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에 핸드폰을 붙이고서 들어오라 손짓했다.
문만 열어 주고서 준섭은 등을 보이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경은 조심스레 문을 닫으며 통화를 마무리하는 소릴 들었다.
네, 네. 그렇습니다. 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주 중 뵙겠습니다. 네.
준섭이 핸드폰을 데스크 위에 내린 후에 우경은 앞으로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응.”
서류를 보던 중에 전화가 왔었는지, 준섭은 펼쳐진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고서 한쪽으로 밀쳐 두었다. 그런 후에야 우경을 올려다보았다.
준섭의 시선이 우경의 눈을, 이어서 이마를 훑고 콧날을 스쳤다. 긴장감으로 우경의 손이 저절로 움찔거리고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목을 지나 귓등과 귓불에서 끈질기게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걷어 내듯 우경이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밥 먹읍시다.”
준섭이 재킷 단추를 채우며 일어섰다.
“네?”
“방금 저녁 약속 취소했습니다.”
우경이 빤히 바라보자, 준섭이 거만하게 덧붙였다.
“두 개나 취소했으니 오늘은 풀코스 먹어도 됩니다.”
자신만만한 웃음을 보며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곤란합니다.”
우경의 단호한 거절이 의외였던지 준섭이 잠시 굳은 듯 서 있었다.
“저녁 선약 있습니까?”
“네.”
“난 야식도 좋습니다.”
어이없을 만큼 단순한 직구다. 하아, 우경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럼, 야식은 됩니까?”
“아니요.”
준섭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핸드폰을 들어 일정표를 열었다.
“내일은 어떻습니까.”
“내일도 어렵습니다.”
“모레는?”
“선약 있습니다.”
준섭이 핸드폰 일정표를 확인하던 눈을 들어 우경은 바라보았다.
“주말 모두 안 되고, 그다음 주도 내내 어렵겠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까?”
답할 필요조차 없는 물음 같아 우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뭐가 문젭니까.”
준섭이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우경은 발끝에 힘을 주어 뒷걸음질 치려는 마음을 눌렀다. 고개를 조금 치켜들고 눈을 맞추며 답했다.
“모두 다 문제 같습니다.”
“흥미롭네.”
한 걸음 더 다가오는 준섭은 순식간에 아침부터 오후까지의 얼굴을 벗어던졌다. 슈트를 벗어던지고 드러난 근육처럼 가장된 신사다움을 벗겨 내면 먹이를 쫓는 본능만 남은 야생 짐승 같은 날것이다. 바싹 다가선 남자에게서 어젯밤 취하도록 마셨던 체취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준섭이 손을 들어 검지만으로 우경의 턱 아래를 받쳤다.
“어젠 발발 떨던 게.”
엄지로 턱 앞부분을 꾹 누르며 비웃었다.
“오늘은 지나치게 당당하네.”
분노가, 점화된 불꽃처럼 탁 튀어 올랐다. 눈에서 그 불꽃을 보았는지, 준섭이 느긋하게 덧붙였다.
“턱 말입니다.”
바로 이 턱을 말하고 있었다는 듯 톡톡 턱을 두드리며 손이 떨어졌다.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다 보니 조금 위로 들려 있던 턱이 자리를 잡듯 아래로 내려갔다.
“본부장님.”
“말해 봐.”
“저녁 식사는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맛있었어요.”
우동집에서 ‘맛있어 보입니까.’라고 물었던 준섭의 중의적인 말버릇을 흉내 냈다. 준섭의 정돈된 이목구비가 일시에 일그러졌다. 비뚜름하게 올라가는 입가를 보며 우경이 숨을 멈췄다.
“그래서 내뺐어?”
“본부장님.”
“맛있게 잘 먹어서 인사도 없이 내뺐나?”
우경은 입술을 긁어내렸다.
지난밤, 까무룩하게 시야가 흐려졌던 기억은 있는데 잠이 들어 버린 줄은 몰랐다. 눈을 뜨니 목까지 이불을 덮고서 홀로 웅크려 누워 있었다. 침실 문을 열고 나가자 샤워실에서 물줄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경은 소리를 죽여 가며 옷을 입고 팔목에 걸려 있던 머리끈을 빼어 내어 단단히 머리를 묶어 올렸다. 다행히 눈화장을 하지 않아 눈물 자국이 험하게 남지 않았다. 스타킹은 바지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구두를 들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꼭 구름을 밟는 것처럼 감각이 둔하기도 하고, 몸속 어딘가가 고장 난 것처럼 저릿저릿하기도 했다.
우경은 소년을 그린 그림을 스쳐 지나가며 소년의 눈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태준섭이라니……. 완벽한 착각이었다. 다정한 입맞춤도 집요한 소유욕도 다 잠시 꾸었던 꿈, 혹은 혼자만의 착각이다. 소년의 공허한 눈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어둑한 눈이 겹쳐졌던 것도 착각이다.
현관 근처에 떨어진 트렌치 재킷은 단추를 다 채워 올리면 상체를 완전히 다 가리는 디자인이어서 다행이었다. 어차피 밤이라 구겨지고 젖은 블라우스는 표시도 안 나겠지만, 트렌치 재킷 단추를 끝까지 꼭꼭 채웠다. 옆에 떨어져 있던 가방을 어깨에 메고 우경은 맨발에 구두를 신었다.
청회색빛 현관문이 작은 신호음을 내며 열렸다. 벽도, 하나의 선도 별것 아닌 벽이고 그저 선이었을 뿐이다. 우경은 마치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오늘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것처럼, 씩씩하게 밖으로 나갔다.
본부장실 안에서 마주 보고 선 채로 어젯밤이 떠오르자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뜨거워진다.
“식사는……, 감사했습니다.”
하, 우경의 말에 남자의 입술을 비집고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세하게 근육의 움직임이 바뀌며 입술에 힘이 들어가자 얼굴 분위기 전체가 뒤틀어진다. 매끄러운 매너와 철저하게 업무 처리를 하는 명민한 상사의 가면은 없다. 모욕적이고 상스러운 말을 쏟아 낸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남자의 입술을 비열한 욕망이라고 비난했던가.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자니 그 입술의 온도를 기억하는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가장 예민하게 일어섰다. 아리는 통증에 우경은 입술을 윗니로 긁었다.
“이렇게 시건방을 떨 줄 알았으면, 말입니다.”
얼굴과는 다르게 너무 덤덤한 어조였다.
“그 입술도 씹어 놓는 건데.”
준섭이 손을 들어 제 입술을 검지로 쓱 쓸어내렸다. 희미하게 남은 상처가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그림 앞에서 우경이 깨물었던 상처였다.
* * *
사무실 창 너머 도심의 야경이 반짝인다. 금요일 밤이어서 그런지 도로는 차량들의 붉은 후미등이 만든 기다란 줄이 늘어져 있다. 지난 일주일간 우경은 잔뜩 긴장한 채로 본부실 근무를 했다. 반면, 준섭은 평소와 같이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깍듯한 존대, 매끄러운 매너뿐 아니라 상사로서 이상적인 방식의 업무 지시와 추진까지 완벽했다. 강건하지만 근육이든 지방이든 과하다 싶거나 없었으면 좋았을 부분이 없던 몸처럼, 사람과 시간 앞에서 태준섭의 모든 습관들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오랜 시간 체화시킨 삶의 방식대로 연우경은 날것의 짧은 분노 한 번으로 마무리 지어질 것이다.
준섭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면 우경의 긴장감은 순식간에 고조되었지만, 그것이 머쓱할 만큼 건조한 업무 지시만 받았다. 필요에 따라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섞기도 하는 지시였다. 입술을 씹어 놓았어야 했다는 원색적인 비난이 마치 꿈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밤이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떨어진 단추 두 개만 아니었다면…… 쇄골 아래에 남은 붉은 자국이 아니라면 그렇게 착각했을지도.
창 너머로 도심 도로를 바라보며 우경이 조금 느슨한 상태로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열리는 문소리에 통화를 하러 나간 용원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 태준섭이었다. 금요일 밤 늦은 시각 본부실로 돌아온 준섭을 보고 우경은 조금 당황하며 일어섰다.
“본부장님.”
“앉아요. 잠시 처리할 일이 있어 들렀습니다.”
심상한 목소리였다. 여느 때처럼 우경을 스쳐 본부장실로 들어가리라 생각했는데 준섭은 우경의 앞에 멈춰 섰다.
“연 팀장은 뭐 합니까.”
“글로벌 전략 회의 관련 유럽 시장…….”
“아.”
준섭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들었다. 본인이 지시한 바였다. 미팅 전에 정리해서 전기본 소속 해당 임원진에게 추가 요구 사항을 포함하여 배포하기로 되어 있다. 모니터를 확인하려는지 바싹 다가선 준섭에게서 알코올 냄새가 났다. 전혀 알아챌 수 없었는데……. 우경이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얼굴도 눈도 말짱해 보이는데 제법 많이 마신 듯했다.
“문제 있습니까?
“네?”
“관찰하고 있잖습니까.”
“술…….”
우경은 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다. 클라이언트나 상사에게 선을 넘는 질문이었다.
준섭이 모니터 상단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툭 두드렸다.
“퇴근하세요. 최 과장도 가라고 하고.”
말하고서도 준섭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경도 우두커니 그대로 서 있었다. 모니터 위에 걸쳐진 손만 바라보다가 우경이 먼저 입을 떼었다.
“급히 처리하실 일이 있으세요? 이 시간에…….”
“있어요.”
“제가 도울 일은…….”
“없어요.”
준섭의 검지가 까닥 한 번 움직이며 모니터 모서리를 두드렸다. 그 소리에 우경의 심장이 툭 하고 크게 뛰었다.
“청년 아카데미 1기 졸업식 연설문 초안 작업도 거의 완료했습니다. 몇 가지만 확인하고 월요일까지 올리겠습니다.”
“그러세요.”
준섭은 답하고 또 그대로였다.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우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C경제 주간지에서 서면 인터뷰 요청이 왔는데 기존 가이드라인대로 작성을…….”
“그만 말해도 되는데.”
준섭이 아무 말 대잔치를 마무리 짓듯이 모니터 가장자리를 검지로 쭉 쓸었다. 단순한 움직임일 뿐인데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준섭이 어쩌면 붉어졌을지 모르는 우경의 귓불을 응시했다. 우경은 이제 모니터의 직각 모서리를 힘주어 문지르는 준섭의 엄지를 쳐다보았다. 감추어진 어떤 부분이 잘게 떨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저녁 약속에서 술을 좀 마셨습니다.”
“꿀물이라도. 탕비실에 꿀이…….”
준섭이 픽 웃었다.
“연우경 씨, 주말 약속 취소했습니까?”
“아니요.”
“그럼 여기서 키스라도 할래요?”
“본부장님.”
“그러니까, 말 그만 섞고 퇴근이나 하세요. 재빠르게.”
준섭이 모니터 모서리를 꾹 눌렀다가 떼었다. 돌아서는 뒷모습이 곧 본부장실로 사라지고 쿵 닫히는 문소리만 공간에 둥글게 퍼졌다.
그럼 여기서 키스라도 할래요.
그러니까 말 그만 섞고 퇴근이나 하세요.
재빠르게.
빈정거리는 말투는 아니었는데 비웃음을 당한 아이처럼 부끄러워지고 가슴 언저리가 선득해졌다. 우경은 닫힌 문을 보면서 그 앞으로 다가섰다. 노크를 하려던 주먹이 어설프게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후우, 숨을 길게 쉬고 이번에는 문고리를 쥐었다가 금속이 주는 매끈한 차가움에 움칫 물러섰다. 손에 힘을 더해 다시 문고리를 잡고 비틀자, 달칵 돌아가는 소리가 둥 북소리처럼 울리는 것만 같았다.
문을 조금 미는 순간, 최용원이 본부실로 들어섰다. 본부장실 문 앞에 서 있는 우경을 보고 어? 하는 표정이었다. 우경이 홍보인 같은 미소를 지었다.
“본부장님 다시 들어오셨는데, 퇴근하라시네요.”
“아. 그래요? 인사드리고.”
용원이 성큼성큼 걸어와 본부장실 문을 열었다. 열리는 문 바로 앞에 태준섭이 서 있었다. 우경만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번쩍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