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9화 (9/23)

9장

“우경아, 밥 먹어.”

방문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경이 퍼프를 뺨에 두드리며 시계를 확인하니 7시 5분이다.

“우경아아.”

“응, 나가.”

우경이 트렌치와 가방을 팔에 걸고는 방문을 열었다. 식탁 근처에 가기도 전에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북엇국이네?”

북엇국 옆으로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흰 쌀밥을 퍼서 놓으며 엄마가 말했다.

“어젠 아버지도 술, 너도 술. 나도 술.”

“정말?”

우경이 식탁에 앉으면서 아버지 쪽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신문을 펼쳐 읽고 있던 아빠가 부스럭거리며 신문을 접었다.

“아빠는 웬일로요?”

“고등학교 동창들 만났어.”

“아하.”

우경이 뽀얀 북엇국 국물을 크게 떠올렸다. 벌써 일어나 아침까지 다 먹은 백설이가 다시 식탁 옆에 와서 앞발을 모으고는 또랑또랑 우경을 올려다봤다.

“백설이도 누구랑 한잔하셨세요오? 북어 먹고 싶어요?”

우경이가 북엇국에서 말랑한 북어 한 토막을 건져 올렸다. 요리조리 가시가 없는지 살피고 후후후 불어 백설이 입에 쏘옥 넣어 주었다.

“넌 나는 누구랑 마셨는지 왜 안 물어봐?”

“엄만, 하루걸러 드시잖아요. 윗집 정아 엄마랑 마셨겠지 뭐. 아님 커다란 화면에서 나오는 공유랑 같이?”

흘기는 엄마의 눈을 피하며 우경이 크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넌 누구 만났는데?”

“CS에서 친했던 사람. 옮기고 처음 만났는데 칵테일 마시면서 그렇게 취해 버렸다니까. 급하게 마셨나 봐.”

“왜?”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랬나……, 술이 넘 맛있었어. H호텔 라운지가 야경도 넘 예쁘고 칵테일이 맛있거든.”

“어이그. 술은 천천히 안주랑 같이 먹어야 해. 넌 꼭 술 마실 때 뭘 안 먹더라.”

우경의 밥 위에 비름나물을 올려 주며 엄마가 잔소리를 더했다.

“위장에 좋대. 많이 먹어. 너 CS 있을 때 너무 일을 많이 했어.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아, 맞다.”

엄마가 깜박 잊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급하게 말했다.

“H호텔 하니까 생각났네. 그 안과 의사.”

“응?”

“세상에, 선 약속 잡기 전에 너를 봤었대. 감쪽같이 몰랐지 뭐야.”

“네?”

“너 CS 다닐 때 H호텔 라운지에 가끔 갔었지? 거기서 봤다나 봐. 운동을 그 호텔로 다닌다나?”

엄마의 설명을 종합해 보니, 선 이야기가 나오기 전 주쯤 카운터에서 우경의 뒤에 서 있었다고. 추첨 행사를 위해 명함을 모으는 유리 보울에 우경이 명함을 넣는 걸 봤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순순히 선 보겠다고 한 거래. 너 맘에 들었나 봐. 하긴 울 딸 진짜 예쁘잖아. 그쵸, 여보오.”

아빠는 그럼, 그럼 우리 우경이가 예쁘지, 하며 허허 웃었다. 엄마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맞장구를 치실 분이니.

“원래 선 보라고 하면 질색팔색한다더라. 그러고 보면 진짜 인연 아니니. 그 엄마가 마사지 원장한테 전화 와서 한 번 더 부탁하더래. 자기도 이제 알았는데 그렇더라고. 서울 돌아오면 꼭 두 사람 다시 보게 하자고.”

엄마는 인연을 힘주어 발음하며 강남의 안과 의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우경은 서동재와 통화가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네, 네에, 우경이 건성으로 답하면서 비름나물 접시를 아빠 쪽으로 밀어 놓았다.

“아빠, 몸에 좋대요. 많이 드세요.”

“그래, 고맙다.”

접어 놓은 신문을 눈으로 훑던 아빠가 비름나물을 크게 집어 들었다. 더 이상 안과 의사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우경이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빠, 내가 새로 사 드린 넥타이하셨네요?”

“그르게, 잘 어울리신다. 맘에 들죠? 여보.”

“어, 맘에 들어.”

아빠가 남색 타이를 손으로 쓰윽 쓰다듬으며 우경을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선물받으신 타이인데. 작업할 때 쓰고는 잃어버렸어요.”

“아냐, 그건 색이 아무래도 너무 튀고 안 어울렸어.”

문득, 아빠가 안 어울렸다는 타이를 매고 있던 태준섭이 떠올랐다.

준섭은 각이 잡힌 검은색 재킷 대신 와이셔츠 위에 작업복을 덧입고서 현장 직원들과 악수를 하고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둘러 두드려 주기도 했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는데, 그 웃음을 본 모든 사람들이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따라 웃었다. 그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매순간 주위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아…….”

저도 모르게 뱉은 소리에 우경이 슬며시 얼굴이 붉어졌다. 응? 묻는 엄마의 시선을 외면하고 북엇국을 빠르게 떠먹고, 상체를 아래로 구부려 여전히 착하게 앉아서 우경만 바라보는 백설에게 북어를 한 번 더 주었다.

그런 뒤에도 아빠에게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빠가 보던 신문이 제 손에 들려 있었다. 신문을 가방에 넣고, 최대한 빨리 양치를 하고 립글로스를 덧바르고는 집을 나섰다.

* * *

“웬일이고. 본부장이 이 시간에 다 오고.”

새벽 6시 34분, 태시환 회장이 다슬기 된장국에 밥을 한술 뜨고는 그제야 처음으로 알은척을 했다. 차갑고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시선은 여전히 국그릇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다이닝룸에 대기하고 있던 준섭이 몸에 밴 속도로 익숙하게 그룹 전반 업무 진행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전자의 반도체 투자 관련해서 기사는 내주 안으로 내보내려 합니다. 현장 분위기를 넣어 홍보성 기사 형태로 내보낼지, 투자 계획과 전략 위주로 다룰 것인지 유 실장과 논의 중입니다.”

유인목 실장이 회장과 시선을 맞추고 말을 이어서 했다.

“현장 분위기와 연설이 워낙 좋았어서 저는 연설 분위기를 살리는 쪽으로 생각 중입니다. 추후에 회장님께 보고 올리겠습니다.”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섭의 브리핑이 이어지는 동안 회장은 천천히 식사를 했다.

“……물산의 최근 주가 하락은 전반적인 주식 시장의 약세의 영향도 있습니다만, 지속적인 하락세를 막기 위한 주가의 하방경직성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현재 상사, 바이오, 건설 모두 이렇다 할 변환의 기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방 준섭과 회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초초한 내색이던 김세한 전무가 끼어들었다.

“물산 주식은 걱정하실 일이 없습니다. 오버행(주식 시장에서 언제든 매물로 쏟아질 수 있는 잠재적인 과잉 물량 주식) 우려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 뿐 실제 물산의 지표는 건실하고, 영업 이익 역시 오르는 추세입니다. 기관들의 보호 예수 기간이 풀려서 오버행은 당연히 예상 가능했고 오히려 예상치보다 주가가 높습니다. 영업 이익 역시 바이오 투자와 건설에서 환수 시기가…….”

김세한 전무가 다급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태이섭을 커버하겠다는 의지가 가상했다. 태서우는 TK전자 부회장으로, 태이섭은 TK물산의 상무로 되어 있다. 지배 구조를 고려해도 그러하고, 무엇보다 부자가 TK그룹을 다 접수하는 형태여서 더없이 만족스러웠겠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태준섭이 전기본 본부장이 된 이후 서우와 이섭, 부자의 분산은 특히나 태이섭의 물산 소속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섭은 당연히 전자를 준섭에게 넘길 수는 없을테니까.

“오버행은 블록딜(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한 매도자가 사전에 매도 물량을 인수할 매수자를 구해 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장이 끝난 이후 지분을 넘기는 거래)이 진행 중이어서 상당 부분 해소되었습니다. 현금 흐름이 문제입니다.”

준섭이 잘라 말하자, 회장이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럼 물산 현금 흐름을 뚫을 방안이 뭐고?”

준섭이 김세한 전무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었다가 회장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TK전자 전사적인 전략 방향도 세 분야로 나누어 정리 중입니다. 그 역시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준섭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자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기본 미팅 시간이쟤?”

“네, 회장님.”

“뭐 하러 새벽에 왔노. 유 실장이 있는데.”

준섭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레 회장 뒤로 다가서서 어깨를 주물렀다.

“어제, 죄송합니다.”

“실수하지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건에 대해서도 오늘 조간 회의에서 마무리 짓고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자주 못 찾아 뵈어서 면목 없습니다.”

“바쁜 사람이 일일이 송백재까지 왔다 갔다 쉽겠나. 나는 유 실장이나 봐야지.”

아이처럼 부루퉁한 소리를 내는 회장의 팔을 쓸어내리며 준섭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유 실장이 충분히 잘해 주시고 있다는 것 압니다. 제가 못 들르면 유 실장 통해서라도 꼭 제대로 보고드리고, 말씀 전해 듣겠습니다. 유 실장과 좀 더 긴밀하게 보고 라인을 유지하겠습니다.”

유 실장이 준섭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죠? 하는 물음을 읽고서 답을 했다.

“회장님. 더 노력하겠습니다.”

회장의 그제야 분이 풀린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 * *

전기본 회의에 3분 지각이었다. 준섭이 앉으면서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시작하시지요. 우선 전자 관련 현황 파악과 방향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전자의 글로벌 전략에 대해 계열사 간의 시너지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디스플레이, 전기, TDS에서 투자 중복이나 개발 중복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디스플레이 권 사장의 발언에 이어 전기의 김 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전자의 전략 방향성에 대한 전자의 전사적인 조정이 필요합니다.”

“물산, 패션 분야에서 IT기술과 융합 연구와 투자에 대한 것도 전자와 연계성이 부족하다는 판단입니다.”

준섭이 보고서를 빠르게 훑고는 답했다.

“전자의 전사적 전략 방향성 정립을 위해 글로벌 전략 회의 범주를 보완, 확장하자는 내용이 수차례 언급되었습니다. CE, IT, DS 세 분야에 대해 글로벌 시장과 투자 방향, 융합과 협의, 시너지가 필요한 부분 관련 정리해서 올려 주십시오. 형식은 상관없습니다. 개인적 미팅 신청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글로벌 전략 회의를 기점으로 문제점을 해결하고 전략적 방향성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준섭이 마치 대수롭지 않은 지적이라는 듯 보고서를 테이블 위로 내리며 덧붙였다.

“아, 물산 관련 전략 2팀 보고서 다시 주십시오. 물산의 현 상황 타개 방안이 미흡합니다. 같은 걸 두 번 보려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역부족인 듯하니 경영지원팀 같이 작업해 주세요. 물산 관련 보고서 자료는 필요하면 저한테 요청하십시오. 가능하면 이번 주 안으로 의견 주십시오.”

전략 2팀의 박 전무가 퍼렇게 질렸다.

“하나 더, 인사지원팀. 고용 창출에 대한 방안 내일까지 주세요. 지난주가 마감이었는데, TK가 제일 엉망이었습니다. 청와대 정책실장이 펄펄 뛰었다지요.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 말이지요…….”

후, 휘파람을 불듯이 준섭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자리 만들어서 정책실장과 태서우 부회장님이 독대하신다니, 부회장님께 보고하시고 방안은 부회장님과 전기본 양쪽으로 알려 주세요.”

어제 송백재로부터의 진노의 원인인 보고서였다. 준섭을 겨냥한 것이지만 수가 너무 얕아 유치했다.

이런 걸, 제 꾀에 제가 넘어갔다고 해야 하나.

제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단번에 물을 전부 들이켜고, 생수병 뚜껑을 비틀어 다시 컵을 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들을 향해 준섭이 피식 웃었다.

“물을 자꾸 먹이는데, 그렇게 먹고도 여전히 목이 마르네요.”

준섭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찬물이라도 맞은 듯이 굳었다.

“준법실장님. 보고 사항 잘 받았습니다. 제가 급박하게 요구하진 않았다 싶은데……, 내용이 좀 빠졌더라고요.”

회사 전반의 준법 이슈와 임직원 위주의 감사 활동을 위주로 하는 준법실장이 펜을 쥔 손을 가늘게 떨었다. 준섭이 웃음을 만들며 말했다.

“채널은 다양하지 않습니까. 인사팀에 올라온 건의 사항 보시고 감사실 자료 한 번 더 체크하세요. 오늘 보완하시고 내일 오전 사장단 협의회에 올리세요. 저한테는 사후 보고하시면 됩니다.”

준법실장 외에 보고 라인은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또한 박 전무의 주사와 반복적인 성차별적 발언 역시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찾아오시고요.”

“네, 네. 본부장님.”

실장이 엉덩이까지 들썩하며 인사했다.

* * *

‘조금 갑작스럽겠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마무리 짓듯이 유인목 실장이 말했다. 옆에 나란히 앉아서 듣던 최용원은 당황하는 내색도 없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실장의 말은 전기본 본부장의 서포트를 위해 인력 충원이 필요하고 전기본과 송백재 간의 원활한 보고 라인 역할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두 분은 당분간은 본부와 홍보실 양쪽에 속한다고 보면 됩니다. 점심시간 이후에 본부장실에 두 사람이 인사를 가고, 정식 근무는 내일부터 하기로 본부장님과 이야기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유인목 실장이 우경을 불렀다.

“연 팀장은 잠깐 남아요. 최 과장은 업무 인계 오늘 중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최용원이 나간 후 우경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유 실장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달라지진 않았지만 바싹 긴장이 되었다. 그런 우경의 변화를 알아챘는지 유 실장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연 팀장 입장에서는 여기 가라 저기 가라 불쾌할 수도 있겠어요.”

“아닙니다. 실장님. 처음부터 비서실이나 홍보실에서 근무하기로 했으니 괜찮습니다. 다만 제가 일을 잘할 수 있을지 조금 긴장되긴 합니다.”

“본부장님 소관이지만, 무리가 되는 업무는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용원 과장이 회장님 비서실과 기획팀을 거쳐 홍보실로 왔으니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그리고 궁금한 사항이 있거나 지원이 필요하면 저한테 언제든 말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우경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 실장과 눈이 마주쳤는데,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할 말을 남긴 표정이었다. 우경이 가만히 서서 쳐다보자니 유실장은 표정을 지우며 심상하게 말했다.

“가 보세요.”

“혹시, 저한테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건 아닌가요? 유의해야 할 점이라든가.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유 실장이 뜻밖이라는 듯 허허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태준섭, 본부장님은…….”

이름을 부르고 한 박자 쉬고서 본부장이라는 직함을 붙였는데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 실장이 우경 앞에서 준섭의 이름을 정확히 부른 적이 없다. 쉼표 속에 미약하게 사적인 느낌이 배어 있었다.

“본인 외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우경이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속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곁에 있으려면 본부장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완벽해지는 수밖에요.”

유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장실을 나가는 순간까지 우경은 실장이 준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적인 감정이 어떤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아끼는 마음인지 경계하는 마음인지. 부드러운 매너의 가면 아래에서 짧게 스치던 못마땅함이 준섭을 향한 걱정인지 비난인지. 혹은 우경을 향한 것인지도 애매모호했다.

* * *

본부장실 앞에 서 있자니 저절로 숨이 멈춰졌다. 흘끗 보니 옆에 선 최용원도 긴장하고 있다. 비서가 노크를 하자 “네.” 하는 답이 문 밖으로 들렸다. 우경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취한 채로 통화를 하고 처음 얼굴을 본다. 편의점에서 초콜릿을 사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낮에 태준섭으로부터 왔던 메시지를 읽으며 아파트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명확한데 어떻게 문자 버튼을 눌렀는지, 무슨 말을 어디까지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도 뺨을 후려칠 테니까.’

준섭이 했던 마지막 말만 조각도로 가슴을 패어 낸 듯 남아 있었다.

본부장실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태준섭이 일어서 악수를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용원 과장님.”

용원이 고개를 숙이며 손을 잡았다. 준섭은 우경에게도 마찬가지로 손을 내밀었다. 우경은 어정쩡하게 손을 오그린 채로 뻗었다. 준섭이 조금 더 팔을 뻗어 우경의 오그라든 손을 덮어 쥐었다.

“연우경 팀장.”

준섭이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추고, 말했다.

“잘해 봅시다.”

우경이 먼저 시선을 피하여 바닥으로 내린 후에도 준섭은 잠시 동안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하아, 숨을 내어 쉬는 동시에 손이 떨어졌다.

“전사적인 전략 방향 구축이 큰 그림이고, 회사 간 사업 조정, 전자 세 가지 분야별 전략, 시너지를 위한 방안, 그룹의 미래 전략을 위한 MA까지.”

앞뒤 말을 싹둑 자르고서 준섭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용원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가능한 자료 이메일로 보낼 겁니다. 지금까지 전기본 공식 미팅 회의록 전부 포함입니다. 사안에 따라선 하드 카피만 있기도 하고. 대충 훑어보세요. 현황 파악 보고는 내일 점심시간 이후 괜찮습니까?”

“네, 본부장님.”

“구체적인 스케줄은 비서한테 확인하시고.”

선 채로 지시하고는 준섭이 우경을 쳐다보았다.

“같이 파악하세요. 홍보 자료 수시로 나갈 겁니다. 대내적이든 대외적이든. 공공기관용, 기사 배포용, 송백재까지 포함입니다. 초안부터 작성하는 건 아니고, 검토 포함입니다. 단어 잘 고르셔야 할 겁니다. 요즘은 다들 너무 예민해서 말입니다.”

할 말이나 질문이 있냐는 듯 준섭이 오른 손바닥을 비스듬히 내보였다. 우경은 멍하니 준섭의 손만 바라보다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준섭과, 뒤이어 최용원과 짧게 눈이 마주쳤다.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그래요, 이만 가 보세요.”

데스크 위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향해 준섭이 몸을 틀며 말했다.

두 사람은 본부실을 나가면서 비서실 양지은 대리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출근하시기 전에 나올 필요는 없어요. 저도 정기 조간 회의 있을 때만 일찍 출근하는데 그 외엔 일찍 나와 있는 걸 은근히 성가셔 할 때가 많으세요. 안 그래도 김상아 대리 후임으로 누가 오나 했는데 두 분이나 오셔서 저는 너무 좋네요.”

양 대리는 본부장실로 배속받은 지 한 달이 되지 않았지만 6개월은 지난 것 같다며 은근한 피로감을 호소했다. 우경은 카피를 들고 왔던 그날, 준섭을 기다리며 수차례 통화를 했던 비서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부장실에 다녀온 후 내내 우경은 좀 얼떨떨한 상태였다. 용원이 퇴근 전까지 읽은 자료로 간단히 말만 맞춰 보자고 했지만 도무지 퇴근 전까지 얼마나 읽어 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늦은 오후였지만 커피가 간절하였다. 간식과 차를 비치하여 둔 작은 회의실 겸 휴식 공간에 들어서자 커피 머신 앞에 용원을 포함하여 홍보실 직원 셋이 모여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들썩이는 분위기였다.

“오오. 본부장님 발탁이라니. 그런데 이제 잠은 다 잤어.”

“정말, 최 과장 와이프한테 단단히 일러야겠어. 당분간 남편은 본부장에게 뺏겼다고. 신혼인데 어쩌냐.”

“신혼이긴 애가 백일인데.”

“대참사네. 최 과장, 나 출산 휴가 마치고 회사 나왔는데 아기 백일 맞이하면서 세상 하직하고 싶었어.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아주 끔찍해. 최 과장 아기한테 매일 부탁해야겠다. 아빠 출세길 열리느라 엄마 고생한다고. 제발 순하게 자고 먹자고.”

부러움과 질투 섞인 응원과 웃음 섞인 농담들이 오갔다. 용원이 우경을 보자 손짓을 했다. 사람들은 우경에게도 한두 마디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둘만 남은 공간에서 용원이 물었다.

“커피?”

“네.”

“크림색으로 해요. 초록 독했죠?”

“네, 고맙습니다.”

용원은 캡슐을 넣으면서도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우경이 용원에게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홍보실보다 본부장실 배속이 더 좋은가요?”

용원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답했다.

“현재 콘트롤 타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태준섭이잖아요. 같이 일하면 도파민 투여받는 기분이라서.”

“아. 네.”

머그잔을 우경에게 건네며 덧붙였다.

“입사 동기예요. 나랑 친했는데…….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아…….”

“연수 때, 바로 알아봤어요. 반드시 친해져야지 작정을 했죠. 작정보다는 홀렸다고 해야 하나. 사람을 막 뒤흔드는 데가 있어요. 머리는 비상하고 결단력은 더 빠르고. 타고난 운동 에너지가 높아요. 무슨 검투사 같은 느낌. 본능적으로 치고 들어가 온몸으로 부딪히는 법을 아는 거예요. 연수 때부터도 무지하게 튀었어요.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반대로 저처럼 홀려 버린 사람들도 있고. 그런데 지독한 비난이나 백안시하는 시선은 자체 필터링이 되나 봐요. 태준섭은 까딱도 안 했어요.”

그럴 만도, 하는 표정으로 우경이 머그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로열패밀리인 거 회장 비서실에서 같이 구를 때도 몰랐어요. 내가 몰랐으니 거의 다 모른 거 맞아요. 본인도 몰랐나 싶을 만큼 천연덕스러워서. 하…….”

우경이 용원을 올려다보았다.

“몰랐을 때도 확신했죠. 태준섭은 동기 중에서 가장 빨리 승진하겠구나. 나는 절대 그 격차를 줄이지 못하겠구나. 그러니 비슷하게라도 따라가서 잘 보여야지. 그러다 보면 내 승진도 빨라지겠구나. 탁월한 전략적 포지셔닝이었죠. 저, 동기 중에 승진 두 번째로 빠르고 핵심 자리로만 이동했어요.”

용원이 피식 웃었다.

“실은, 나 S대 입학부터 졸업까지 수석 놓친 적 없어요. 말이 쉬워 전략적 포지셔닝이지 열패감으로 잠을 못 잤죠. 근데 또 다음 날이면 태준섭한테 반하더라고요. 보통 사람은 아, 이거 이상하네 싶으면, 여러 가지로 재고 따지면서 고민하잖아요. 태준섭은 누군가 고민할 시점에 이미 핵을 찾아 도려내고 있어요. 그 미친 듯한 에너지도 그렇고, 배포도 그렇고 뭔가 정상적인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장기 한두 개는 더 많거나 없거나 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약간 과잉인가 싶다가 텅 빈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암튼 난 더없이 좋아요. 직속으로 지원 업무를 하게 되면 스펙터클할 테니까.”

용원은 우경에게 본부장실 배속이 되니 어떠하냐 묻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본부장 서포트로 송백재에서 발탁했다고 하니 용원 입장에서는 뜻밖의 외부 낙하산이었던 셈이다.

“저는 홍보만 알지 여러 면으로 미숙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과장님.”

우경이 인사하자 용원이 부탁이라니, 무슨. 손을 저으며 웃었다.

커피 덕분인지 집중도가 높아져서 우경이 자료를 파악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5시 반부터는 소회의실에서 용원과 같이 파악한 자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용원이 설명하고 우경이 듣는 편이었다. 용원의 설명을 들으며 1차적으로 취합하여 만들어 둔 요약 자료에 우경이 덧입혀 보충을 했다.

“와. 손이 진짜 빠르네요. 정리가 완벽해요.”

용원이 우경의 랩톱 화면을 보고는 엄지를 들어 보였다.

“리서치랑 서머리는 물리도록 했어요.”

용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면을 넘기며 물었다.

“우리 저녁은 어떻게 할까요? 잠깐 내려가서 간단하게 식사할까요?”

오후에 지나며 들었던 대화 중 백일된 아기 이야기가 맴돌았다. 오늘이라도 일찍 들어가는 편이 좋을 텐데 싶어 우경이 답을 망설였다.

“혹시, 마무리까지 얼마나 더 걸릴까요?”

“어차피 완벽하게 다 파악하라고 준 양은 아닌 거 같고 훑어보고 미팅 때 할 말 정도 정리 해 와라 수준 같은데, 이런 속도면 앞으로 한두 시간 정도? 연 팀장은 뭐 좋아해요?”

“그럼……. 음.”

우경이 시각을 확인하러 핸드폰을 들었다. 문자 메시지가 두 통 와 있다. 태준섭 본부장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우경은 용원의 눈치를 살피며 문자를 확인했다.

[저녁 식사합시다.]

10분 후 이어진 메시지.

[뭐 좋아합니까.]

하아, 우경이 저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메시지 알림이 깜박였다. 두 번째 메시지를 보낸 후 정확하게 10분 후였다.

[내가 고르겠습니다.]

연속된 메시지를 한 번 더 쭉 읽고서 우경이 이마를 쓸어 올렸다. 진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우경은 문자를 빠르게 입력하여 보냈다.

[죄송합니다. 야근할 것 같습니다.]

용원이 랩톱을 끄고 프린트한 자료를 가지런히 챙겨 옆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바로 아래에 불고기 덮밥이랑 도시락 파는 집 있는데 괜찮아요. 옆에 꼬막 비빔밥도 있는데.”

“네. 저는 다 좋습…….”

우경이 답을 다 하기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뜨는 이름을 용원이 보았나 움칫 놀라며 우경이 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야근이 문젭니까. 아님 다른 이윱니까.

우경이 네, 라든가 여보세요 같은 인사를 하기 전에 남자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경이 용원의 눈치를 보며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저……. 일이 좀 남아서요. 저녁 간단히 먹고 조금 더 하면…….”

- 좋아요. 7시 30분. 지하 주차장 2층. 강 대리만 보낼 테니 타고 와요.

“네? 저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 다른 이유 없고 야근이 문제라고 답하지 않았습니까?

“최 과장과 저녁 식사 후 자료 정리 작업을 더 해야 합니다.”

- 아, 자료 정리?

본인이 내준 일감이다. 들리지는 않는데 웃음이 느껴졌다. 비웃는 걸까, 잠시의 침묵 뒤에 준섭이 말했다.

- 그건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러니, 연우경이 안 될 이유가 없네.

이런 일방적인 방식이라니.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우경이 이마를 짚고 말을 잇지 못하자 준섭이 확인하듯 물었다.

- 야근이 핑계였나?

“아니요.”

이번에는 하, 하는 짧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 좋습니다.

대체 뭐가, 좋다는. 우경은 입을 꾹 다물고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 나는 약속 마치고 그쪽으로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준섭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우경의 확답을 기다리며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약속을 밀어붙이면서도 초조한 기분이었다. 우경은 아직 답을 주지 않는다. 준섭이 핸드폰을 잠시 떼었다가 다시 귀에 붙였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선 정 대표에게 기다리라 수신호를 하며 청각을 곤두세웠다. 희미한 숨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끊었습니까.”

- 아니요.

“답.”

- ……알겠습니다.

준섭이 먼저 종료 버튼을 눌렀다.

“위에 올라가서 자료랑 서류 아예 다 챙겨 왔어. 식사하고 천천히 보자고 하려 했더니.”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매끈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조금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 대표, 미안한데 통화 짧게 하나만 더 할게.”

블룸스 금융 대표 정우진은 그러라는 듯 으쓱 어깨를 올려 보였다. 가방을 열어 챙겨 온 서류 봉투를 준섭의 앞에 두고는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었다. 우진과 다르게 준섭의 테이블 앞에는 탄산수 한 병만 놓여 있다.

“최용원 과장. 그래, 응. 좋지. 든든하네요.”

준섭이 약간의 웃음을 섞으며 통화를 이었다.

“지금까지 한 거 보내 봐. 엉뚱하게 헤집고 있을까 봐 그래. 응, 그래요. 아니, 확인 바로 하고 알려 줄게요.”

준섭이 통화를 마치고 스파클링 워터를 들이켰다. 정 대표가 빈 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배 안 고파? 오늘따라 고기 진짜 잘 구워졌어. 상무 승진하고 처음인데, 물이나 마시고 있네.”

“맹물 아니잖아. 탄산수.”

으흥, 탄산수. 정우진 대표가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도 마음 불편하게. 좀 서운하기도 하고.”

정우진과 태준섭 두 사람이 같은 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뉴욕에 있을 때부터 친구였으니 알게 된 건 25년이 넘었다. 그 중 몇 년 간은 우진이 주니어 스쿨을 올라갈 무렵 한국으로 들어가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다시 만나 돈독한 사이가 된 건 준섭이 한국으로 끌려오다시피 해서 지방 학교에 처박혔을 때였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준섭이 연락을 해 왔다. 우진이 이메일을 늦게 확인하고 남긴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번호는 뉴욕의 병원이었고, 간호사인지 병원 청소부인지 누군가가 수화기 너머 무뚝뚝한 목소리로 강준이라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우진은 이메일로 제 전화번호를 남겨 놓고도 불안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라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이 되었다.

“우진아.”

이름을 부르고 준이 울음을 삼켰다.

“엄마가 돌아가셨어. 나는, 장례식도 못 가. 아버지 피해서 나,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데……. 어디로 가는 건지…….”

“누가, 누가 너 데리고 가는데?”

“외할아버지 회사 사람들.”

우진이 후우우, 길게 숨만 내쉬었다. 그 회사가 어딘지, 왜 그러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기억 속에 준섭은 언제나 유럽산 최고급 옷을 입고 커다란 차에 기사와 경호원이 붙는 특별한 취급을 받았지만 준섭의 집이 있는 동네나 부모의 차림새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단순하고 평범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도 늘 기품 어린 웃음을 짓던 준섭의 엄마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우진아. 나는 지금……. 한국에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준. 내 번호 잘 들어. 이메일로도 남겨 놓을게. 도착하면 바로 전화해. 괜찮아. 한국은 좁아. 반나절이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부산에 있는 과학영재학교에 진학한 우진은 경북 시골에 있는 준섭의 기숙사로 가끔 찾아왔다. 둘 다 기숙사 생활이긴 했지만 준섭과 우진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집으로부터 여유로운 서포트를 받으며 최고급 시설의 학교를 다니던 우진의 눈에 준섭은 간식 한 번 사 먹을 돈 없이 내팽개쳐진 고아나 다름없었다.

우진은 준섭을 데리고 나가 밥도 사 주고 입고 왔던 스웨터나 백팩을 두고 가기도 했다. 때로는 새로 산 스니커즈를 벗어 두고 준섭의 것을 바꿔 신고 갔다. 깜박했다고 말했지만 준섭에게 주고 간 것이었다. 옷도 신발도 준섭에게는 꽉 맞고 우진에게는 조금 큰 사이즈였다.

우진이 보스턴에 있는 대학으로, 준섭이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이후에도 방학마다 들어와 준섭을 찾았다. 만날 때마다 준섭이 마치 비밀 연애를 하는 것처럼 접선하기에 묘하게 기분이 상했는데 우진은 회장 눈을 피해 준섭이 심을 수 있는 유일한 제 인맥이었다.

“암튼 예전이나 지금이나 준이 넌 너무 비싸게 굴어.”

우진의 말대로 준섭이 전기본을 맡고 난 후 둘은 도통 만날 틈이 없었다. 우진이 심드렁하게 불평하고는 스테이크를 우물우물 씹었다.

정우진이 대표로 있는 블룸스는 지난 5년간 비약적인 성과를 거둔 소규모 자산운용사이다. 알려진 거라곤 월스트리트 출신의 역량 있는 젊은 대표, L그룹의 방계로 인맥이 닿는다는 정도이다. 태준섭은 완벽하게 가려진 실질적인 오너였다. 블룸스의 대표 정우진이 미국에서 사귄 준섭의 친구라는 것도 역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시간도 바꾸고, 레스토랑에서 음식은 입에도 안 대고 말이야. 오늘 무슨 중요한 약속 잡았나 봐.”

“응, 좀……. 미안하게 됐어.”

“미안은 무슨.”

준섭의 핸드폰 상단에 메일이 왔다는 알람이 떴다. 준섭이 다시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

최용원 과장으로부터 온 메일이다. 첨부된 파일을 확인하며 준섭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떠올랐다. 꼼꼼하네.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누르며 파일을 작성하는 우경의 모습을 상상했다.

집중하느라 다물린 입술, 깨끗한 귓바퀴와 보슬보슬한 잔머리,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

“최 과장, 응. 봤어. 이 정도로만 하시죠. 더 들어가도 이중으로 일하거나 엉뚱한 거 파고 있을 확률이 높아. 내일 이야기하고 또 제대로 일합시다. 그래, 응. 퇴근해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리자 정우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럽게 바쁘신 상무님이 직접 행차하시고. 수천 병 와인을 쌓아 둔 레스토랑에서 맹물 아닌 탄산수만 대접받고. 나만 먹네.”

우진이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집어 먹으면서 준섭에게 물었다.

“중요한 약속이구나?”

“그런가.”

준섭은 물잔만 감싸 쥐었다가 놓았다. 우진이 스테이크 조각을 씹으며 물었다.

“운용보고서는 잘 보고 있지?”

“그럼, 글자 깨알같이 작게 해도 다 읽어. 수 쓰지 마.”

“기 막혀서.”

정우진이 주먹을 불끈 쥐는 시늉을 했다. 준섭이 그 주먹을 톡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운용 자금 규모가 너무 커지는 것 같던데. 눈에 띄지 마.”

“퍽이나. 그래 봤자 택도 없어. 프론티어 같은 애들에 비하면 휘유우. 우린 그냥 잔챙이지. 프론티어 정도나 되어야 입살에 오르고 재벌들 눈에 띄어.”

“프론티어야 다른 걸로 유명하고.”

“응?”

“대표가 섹시한 미남자야. 그에 비하면…….”

준섭이 시선으로 우진을 쓱 훑어 내리고는 단언했다.

“블룸스는 잔챙이지.”

우진이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이렇게 팩트 폭격을 할 수 있냐 부르짖었다.

“네가 오너인 줄 알면 블룸스도 프론티어 맞먹을 거다 그래.”

준섭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우진을 쳐다보았다. 농담으로라도 싫다는 말이다. 오케이, 알았다는 시늉을 하며 우진이 손을 들어 보였다.

“아까 하던 말, 그림 말이야. 계속해 봐.”

“올 12월, 거래 라인 통해서 홍콩 소더비에 낸다고.”

“관장님 에너지도 좋지.”

“감도 좋으시잖아.”

준섭은 송백재에서 불량스런 모습으로 일관하는 태지윤을 떠올렸다. 송백재 사람들은 태지윤에 대해서 이것저것 쓰레기 같은 작품부터 꽤 값어치가 나가는 종류까지 장사꾼처럼 거래하며 품위와 사회 문화적 책임감 따위는 없는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는 정도로 폄하했다. 하지만 태지윤이 이 정도로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줄 알았다면 결코 태시환 회장이 써먹지 않았을 리가 없다. 오히려 태시환을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은 태지윤일지도 모른다.

“매입한 지 3년 되었나?”

“응.”

“갈아탈 건은 있고?”

“관장님이 몇 개 정보 얻은 거 보내신다더라.”

“그래, 보고 나서 결정하자.”

“장모님께도 여쭤 볼까 하는데.”

정 대표의 동갑내기 부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큐레이터이고, 처가는 대한민국 미술계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인맥과 파워를 가진 집안이다.

“적당히.”

“응. 물건에 대해서는 이중 체크는 해야 하니까.”

“늘 그렇듯이.”

“이번 매입한 그림은 탐내시더라. 보안은 유지했고 고객사 거라고만 했어. 두 번 묻지도 않으셨어.”

“그런 면으로는 워낙 매너가 철저하시니까 걱정은 안 해.”

정 대표의 처가에 대해서도 준섭이 이중으로 장치한 건들도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 대표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준섭의 그런 면까지 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정우진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우진이 랩톱을 펼쳤다. 마크한 숫자 위주로 설명을 더하며 빠르게 그래프와 숫자가 들어찬 엑셀 시트를 넘겼다. 투자 상황과 수익률, 향후 투자 대상에 대한 보고였다. 준섭은 철이 된 프린트물을 넘기면서 꼼꼼히 읽고 하나씩 사인을 했다. 이어 랩톱 엑셀 시트 스크롤을 내리다가 흘끗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몇 시까지 끝낼까.”

“응?”

“계속 시계 보는데?”

“빠를수록 좋아. 최대 10분 이내로.”

“그런데요, 태준섭 상무님.”

준섭이 우진을 쳐다보자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혹시 약속이 여잡니까, 상무님?”

준섭이 시선을 내리고 서류를 넘겼다.

“어? 그래? 정말?”

“계속 진행하시죠, 정 대표. 바이오셀이 여전히 저평가되었다는 건가, 그에 비하면 보이스랩은…….”

“오오오오!”

괴상한 감탄사를 내면서 우진이 역시 괴상한 표정으로 준섭을 쳐다보더니 듣는 사람도 없는데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됐고, 투자는 타이밍이거든. 죽여주는 와인 하나 가져가라. 물론 비싸. 넌 지역이나 이름 말해도 모르는 수준이니까 당연히 빈티지도 모를 거고 입 아파서 설명 안 해. 아무튼 전 세계 딱 5백 상자만 내보내는 와인이야. 희소성 죽이지. 바닐라 섞인 베리향이 정말 은은해. 달지는 않은데 여자들이 진짜 좋아하거든. 독특한 스파이스가 꽃향에 묻어 있어서 뭔가 정열적이고 자극적이고, 이름이 말야, 이건 이름이 중요한데.”

준섭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술 안 먹일 거야.”

“왜.”

“거슬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서류를 넘기는 준섭에게 우진이 바짝 얼굴을 대고 물었다.

“주사 있는 여자야? 막 울고 욕하고 그래?”

“아니.”

준섭이 사인을 하며 건성으로 답했다.

“그럼?”

“지나치게 귀여워져.”

으흥, 우진이 김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뭡니까, 이런 위선적인 결단은.”

“블룸스 대표님 결단이나 말해 봐. 어느 놈을 인수할 건데?”

준섭이 농담을 걷어 낸 얼굴로 쳐다보았다.

* * *

- 미리 주문해도 되겠습니까.

우경은 강우식 대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는 길이었다. 전화로 준섭이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 메뉴가…….

“특별히 가리지 않습니다. 좋으신 대로 주문하셔도…….”

- 그러죠. 그럼.

툭 끊어진 핸드폰을 가방에 도로 넣고서 우경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착한 곳은 용산의 작은 일식집이었다. 미리 일러두었는지 우경이 머뭇거리자 직원이 이름을 확인 하고 앞장 서 걸어갔다. 안내 받은 자리는 스시를 제공하는 카운터를 지나 안쪽에 자리 잡은 정방형 룸이었다. 벽을 분할한 기다란 나무 틀이나 네모 반듯한 테이블이 품질 좋은 편백나무였는지, 은은하게 히노키향이 배어났다. 준섭이 안쪽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는 내내 상상했던 모습인데, 심장이 덜컥할 만큼 긴장이 된다.

“많이 기다리셨나요.”

“약간.”

“시간 맞춰 나왔는데…….”

우경이 재킷을 벗어 옆 의자에 걸쳐 두고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니 조금은 긴장이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준섭이 미리 준비된 티 포트를 들어 우경 앞에 잔을 채웠다. 우경이 바싹 마른 입술을 적시려 찻잔을 들었을 때, 노크 소리에 이어 머리가 희끗한 주방장이 룸으로 들어왔다.

“자연송이 솥밥입니다.”

주방장은 일본어 억양이 강한 발음으로 메뉴를 설명하고 트레이에 올려진 돌솥 뚜껑을 열어 비스듬히 기울여 보였다. 송이의 향긋한 향 때문에 저절로 오오, 감탄사가 나왔다. 주방장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주걱으로 골고루 뒤섞고 개인 그릇에 옮겨 담았다. 일본식 된장국과 튀김, 밑반찬과 같이 테이블에 서빙한 후, 주방장은 룸을 나갔다.

“드세요.”

준섭이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솥밥은 후각으로 한 번, 미각으로 한 번 더 즐겁게 하는 식감이었다. 긴장감 때문에 룸에 들어올 때까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달큰하고 짭조름한 양념장에 비벼진 향긋하고 탱글한 밥에 숟가락이 절로 움직였다.

“여러 가지 옵션이 있었죠.”

준섭의 말에 우경이 고개를 들었다.

“청담 레스토랑으로 갈까, 중구의 호텔로 갈까. 거기에 비하면 여긴 너무 소박해 보이는 음식점인가?”

“아니요. 좋아요.”

일식집은 장식을 절제한 인테리어에 규모는 작은 곳이지만 소박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직접 인사를 와서 솥밥을 서빙하던 주방장이 쓰고 있던 희고 높은 토크 역시 인상적이었다.

“본부장님께서 즐겨 찾으시는 곳인가 봐요.”

“맞아요. 여긴 맛도 좋지만 위치가 좋아서. 내 집 앞입니다.”

“아…… 네.”

맞은편에 있는 주상 복합 아파트를 떠올리며 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와서도 정식 코스와 일품 요리를 놓고 고민을 좀 했습니다. 아무래도 정식 먹으며 노닥거리기엔 시간이 좀 아까워서.”

태준섭의 살인적인 스케줄은 익히 알고 있다. 오늘 저녁 식사 역시 무리해서 빼낸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면전에서 시간이 아깝다고 말하는 무례함은 예상하지 못했다. 우경은 굳어지는 얼굴을 펴며 억지로 웃었다.

“솥밥 맛있어요. 시간 낭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먹을 수 있을 만큼요.”

“다행이네.”

우경이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꾹꾹 씹어 삼켰다.

한 번, 두 번…….

메는 목을 차로 축이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릇은 금방 바닥이 보였다. 먹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시선은 대체로 밥그릇에만 두었다. 하지만 준섭은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경의 시선이 비어 있는 찻잔에 닿자, 준섭이 팔을 뻗어 우경의 찻잔을 채웠다.

준섭과 눈을 마주친 채로 우경이 물었다.

“그런데, 저녁을 왜 갑자기 먹자고 하신 건가요.”

“갑자기는 아닐 텐데.”

준섭이 기울였던 몸을 펴고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쥐어 올렸다. 손가락도 길고 손바닥도 넓어, 우경에게는 적당했던 크기의 잔이 너무 작아 보였다.

“그 옷.”

“네?”

준섭이 턱을 까닥 들어 보이고는 물었다.

“그 블라우스, 처음 봤던 날 그 옷입니까.”

우경이 시선을 내려 제 상의를 확인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목을 반쯤 가리는 하이넥 카라와 핀턱 주름 사이로 은은한 레이스가 덧대어져 있고, 싸개 단추가 촘촘히 열을 지어 있어 우경이 가진 옷 중 가장 여성스러운 블라우스였다. 엄마가 지난봄에 준 생일 선물이었는데 백화점에서 큰맘 먹고 6개월 할부로 샀다고 제발 자주자주 입어 달라며 집착하는 옷이기도 했다.

그날이 서동재와 선을 보기로 한 날이어 엄마가 직접 옷을 골랐으니 아마도 이 블라우스가 맞을 테다.

“네, 아마도.”

준섭이 차를 한 모금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필 오늘, 이런 타이밍에. 여기가 아니었다면.”

준섭의 말에 우경이 눈을 크게 떴다.

“그날, 그렇게 말했는데.”

“아…….”

우경이 차를 마시며 시선을 피했다.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준섭은 우경의 그런 불편함 따위야 개의치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날, 어떤 곳이면 좋았겠습니까? 라고 내가 물었죠.”

우경이 이를 꾹 다물었다 떼어 냈다.

“본부장님. 그날은 제가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피식 준섭이 비뚜르게 웃었다.

“아쉽네. 그 얼굴, 그 표정이 다른 남자와 착각해서였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완전히 반한 얼굴.”

“본부장님.”

“알아? 네 눈. 나를 볼 때 어떻게 변하는지?”

“본부장님.”

“CS만 아니었으면.”

“본부장님!”

“TK 로비만 아니었다고 해도 모르는 척 그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우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르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재킷을 껴입는 동안 준섭은 허리를 곧게 편 자세 그대로였지만, 우경을 시선만으로 끈질기게 옭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우경이 보내는 경멸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준섭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우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을 향해 돌아섰던 우경이 다시 방향을 틀었다. 준섭에게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음마다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다리가 뻣뻣한 나무같이 감각이 무뎠다. 가방 손잡이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뭘……. 어떻게, 하고 싶으셨는데요.”

입술이 떨려 발음이 뭉개졌다. 준섭이 가소롭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모양만으로 웃었다.

“솥밥 먹으러 가자 했을 겁니다.”

하아……. 우경의 입에서 떨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멈춰야 해. 여기서 이만, 돌아서야 해.

머릿속 어딘가에서 경고음 같은 메시지가 울렸다.

“그 눈.”

준섭이 이제 시선을 우경의 눈동자에 붙박았다. 붉어진 우경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그 눈, 보여 주고 싶네.”

우경이 가방을 들어 올리는 순간 팔목이 꽉 붙잡혔다. 툭, 소리를 내며 가방이 발밑으로 나뒹굴었다. 단정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준섭은 우경의 눈만 쳐다보았다.

“궁금하지 않아? 솥밥 먹은 후에는 뭘 어떻게 하고 싶었을지.”

우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바라보던 준섭이 우경의 팔목을 잡은 손을 풀었다. 툭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여전히 앉은 채로 준섭이 우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우경은 준섭의 검고 푸른, 어둠에 잠식된 깊은 숲 같은 눈을 바라보았다.

“뺨을 후려치세요. 연우경 씨.”

이를 악물었는데, 언제 차올랐는지도 모르는 눈물이 툭 뺨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우경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준섭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체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우경의 가방을 들었다. 우경의 손을 얼굴에서 잡아 떼어 내고는 몸을 기울였다.

“눈.”

우경이 젖은 눈을 뜨자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환장하겠네.”

큰 손이 우경의 동그란 뒤통수를 쓱 쓰다듬었다. 머리에 닿는 손길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착각이겠지. 육체적 갈망일 뿐.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어쩌면 처음 봤던 날, 그가 차를 멈추고 창문을 내렸던 순간 알았다. 이 남자에게 다가가는 순간 우경은 망가지고 부서지고 엉망진창이 될 거라고. 그래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정해진 결말을 두고서 위험한 유혹이 시작되었다.

그래, 몸만 원하면 어때, 처음 끌렸던 건 남자의 몸이었는데.

우경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숲 같은 저 눈에 열기가 지펴지면 어떨까, 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울렁였다.

“솥밥은 다 먹었는데요.”

응? 묻듯이 남자가 눈썹을 올렸다 떨어뜨렸다. 우경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면 이제, 나랑 잘래요?”

남자의 얼굴에 웃음 비슷한 표정이 스쳤다.

“후회할 겁니다.”

갈등도 망설임도 없이 다만 정보를 전달하는 중이었다.

“왜요?”

“내가 좀 뻔뻔합니다.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이런 말을 듣고도 상대가 끊어 내고 돌아서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남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주제 파악이 완벽하다고 칭찬해 줘야 하나. 이 나쁜 자식을. 우경은 숨을 들이켜 깊숙이 삼켰다.

“제가 할 말 같은데요.”

“그런가? 몰랐네.”

여전히 여유를 부리는 남자를 향해 우경이 말했다.

“한번, 가져 보고 싶었어요. 사진으로 봤을 때부터.”

남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를 드러내기 전 야수의 것과 같은 본능이었다. 우경은 기꺼이 목덜미를 내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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