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이번 일요일 송백재 저녁 식사에는 외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태지윤이 참석했다. 태지윤의 아들과 딸, 배우자와 아기들까지 모두 모였다.
“윤석이랑 윤아, 너거는 엄마가 안 오면 발걸음도 안 하나.”
태 회장이 태지윤의 아이들을 향해 츠츳 혀를 차며 못마땅한 내색을 했다.
“아버지, 윤석이야 한국에 1년 중 절반도 머무르지 않는 애고 윤아는 일요일 이 시간에 쟤네 시어른 뵈러 가야죠.”
태지윤이 퉁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윤아는 엄마와 달리 애교가 많다. 연년생 아이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든지, 일요일이면 송백재가 너무 그리운데 시댁 가서 벌서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종알종알 떠들어 댔다. 윤석이 태 회장을 향해 죄송하다 인사하고는 옆자리에 앉은 준섭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축하해. 잘하고 있다면서.”
윤석은 공부라고는 안 해서 회장의 눈 밖에 난 지 오래였다. 유학을 간 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죽어라 하던 게임으로 성공했다. 게임 개발자로 시작해서 작은 벤처를 키워 미국 대기업으로 합병을 시킨 후, 한국 지사를 관리하면서 본사의 개발팀장을 겸직하는 제법 자리 잡은 인재가 되었다. 지윤은 귀엣말을 하는 윤석을 보면서 준섭과 잠시 시선을 맞추었다.
윤석, 윤아네가 오면 좋다. 아이들이 많아져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때문이다. 회장도 누그러진 웃음을 자주 웃고 심각한 이야기는 대체로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틈이 생기면 준섭은 딴짓을 할 수도 있다. 잠시 빠져나와 정원 구석에 서 있는데 이섭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같은 장소로 왔다.
새하얀 눈 같은 순진한 도련님.
준섭이 저도 모르게 시니컬해졌던 모양이다. 이섭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사나운 눈빛으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양아치같이 사람 쳐다보는 거 아직도 못 고쳤네? 상무 달고도 못 고치면 포기해야지.”
“한두 개 포기했나. 그쯤이야.”
준섭이 탄산수를 병째 입에 대고 마셨다. 빈 병을 내려 두고 입을 닦으며 보니 이섭의 우아하고 긴 손가락 사이에 와인잔의 날씬한 목이 잡혀 있다. 이섭이 비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자들은 이런 걸 좋아해? 섹시해 보이나. 이런 무식함이?”
“왜, 여자들이 좋아하는 거 가르쳐 줘?”
이섭이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충분히 넘치게 처치 곤란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만.”
준섭이 코웃음을 쳤다.
“34년 수절하는 겁쟁이 주제에.”
이섭이 준섭을 빤히 쳐다봤다.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고서. 와인잔을 잡은 손마디가 하얗다. 이섭이 꼭지가 돌 때 나오는 습관이다. 평소와 다르게 도저히 못 넘기겠는지 막말로 되받아쳤다.
“난, 막 안 먹거든. 너 같은 양아치처럼.”
가벼운 농담으로 넘길 일에 이섭이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우습다. 이 자식, 진짜 빠졌나. 연우경한테?
“그냥 한번 질러 봤는데 정말인가 보네.”
준섭이 빈정거리자 이섭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슬며시 벌어진다. 벌어진 틈 사이 가지런한 하얀 이가 꽉 맞물려 있다. 준섭은 이섭을 좀 더 자극하였다.
“처치 곤란은 맞겠지, 고고한 학처럼 TK 날개만 펄럭이면 오는 여자도 많잖아? 100에 99. 1%는 원래 어렵지. 너 원래 1% 추구하잖아. 수능 성적은 1%가 안 되었지만.”
“씹새.”
준섭이 욕설을 내뱉은 이섭 앞에 바싹 붙어 섰다.
“왜, 신경 쓰이는 여자 있어? 네 타입인데 안 넘어와? 고민돼?”
이섭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순진하기는.
준섭이 이섭의 손에 잡힌 와인잔을 빼어 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이섭은 항의도 못 하고 입만 벌렸다 다물었다. 그 꼴이 우스워 저절로 웃음이 났다. 눈꼬리가 접히며 웃는 준섭의 모습에 이섭이 반쯤 얼이 나간 표정이다. 준섭이 와인잔을 들지 않은 손을 올려 이섭의 뒷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갑자기 좁혀진 거리 때문에 움칫하는 이섭의 뒷머리를 잡고서 얼굴을 귀에 바싹 대고는 속삭였다.
“중요한 건, 순발력이거든.”
“미친 새끼.”
이섭이 욕설을 씹으며 준섭의 어깨를 밀었다. 눈처럼 흰 얼굴이 붉어져 있다.
“순발력은 좀 떨어지는데, 귀엽긴 하다. 그걸로 어필해 봐.”
준섭이 와인잔을 이섭의 손에 곱게 끼워 넣었다. 안쪽을 향해 걸어가다가 잊었다는 듯 돌아봤다.
“아, 고마워. 몹시 맘에 들어.”
“뭐?”
준섭이 거수경례를 해 보였다.
* * *
송백재로부터 전화였다. 연결하는 비서가 주눅이 잔뜩 들어 있다. 지난번 일요일 저녁 식사까지 분위기는 좋았다. 무엇 때문일까 고민하지 않는다. 예상하지 못했던 호출에 뒤늦은 추측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네, 회장님.”
태연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고막을 찌르는 음성에 저절로 허리를 곧게 세우게 된다.
신 혁신 동력에 대한 요구, 효과적 방안, 비서실장, 부총리, 일자리…….
성마른 목소리 속에 단어들을 조합한다. 그제야 호출의 원인을 깨닫는다.
기한은 일주일이었다.
일주일이라니, 구멍가게도 아니고. 다 부질없는 변명이다.
이슈가 터지면 방안은 열흘 이내로 완성되고 언론을 덮어야 한다. 지금 이 시절은 누구든 인내심이 없다. 정확하게 일주일 전, 전략기획본부 회의에서 그 안건을 처리할 사람으로 분명히 물산 박 전무를 지목했다. 보고서가 미흡했다는 말이다. 박 전무가 태서우 라인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뱃속에서 뜨끈한 분노가 치민다.
“네, 네. 아닙니다. 네. 알겠습니다. 즉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미간에 희미하게 주름이 잡혔다. 익숙한 긴장감이다. 느리게 목을 조르는 느낌과 비슷하다. 결국 목이 졸리고 호흡이 멈추고 말 텐데 조여드는 손길은 너무 느릿하고 여유로워, 차라리 제가 먼저 숨쉬기를 멈추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좀 더 어렸을 때, 몸집이 더 작았을 때는 이런 긴장감이 인정 욕구의 발현이라 생각했다.
견디다 보면 그래서 잘 해내면 언젠가 쓰다듬어 주겠지.
초콜렛 한 조각, 부드러운 쿠키 하나를 바라는 마음과도 같았다.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확인했어야 했습니다.”
그 마음이 어리석은 기대임을 깨달은 후부터 느릿하게 조여드는 압박감은 다만 목에 걸린 밧줄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 있을 만큼만 조였다가, 포기하기 직전에 늦췄다가 그러면서 끊임없이 원하는 방향으로 휘두르며 끌고 다니는 밧줄이다. 준섭은 숨이 막힐 것 같아 넥타이 매듭을 내렸다. 소용없는 일이다.
“네, 죄송합니다. 처리를……. 네, 늦었습니다.”
책상 위에 엎어 둔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차질 없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네.”
준섭이 유선 전화기의 수신구를 귀와 어깨 사이에 밀어 넣고서 머리를 조아리며 성급한 요구에 답을 했다. 그러면서도 손을 뻗어 핸드폰을 뒤집었다. 패턴을 그리고, 화면이 떠오를 때까지 기대감에 잠시 숨을 멈춘다.
[오늘 올 수 있어? 전화.]
태지윤으로부터 메시지이다.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다섯 시간 같던 5분의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리며 손을 올려 이마를 괴었다.
박 전무를 어떤 식으로 조여야 하나. 지금 당장 문책을 한다면 그들에게 송백재와 불화를 전달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박 전무는 능력이나 도덕성, 책임감 따위보다 줄을 타는 사람에 대한 맹목적 충성도로 그 자리를 일군 사람이다. 조직에서 본인의 필요 가치가 떨어지는 일이 가장 두려운 전형적인 조직의 퍼즐 같은 타입. 그런 타입을 다루는 법을 안다. 갈아 끼울 수 있는 퍼즐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 인식시키면 된다.
어떻게 할까.
이마를 괴고서 고민하는 사이에 부르르 핸드폰이 진동한다. 괴었던 양손 중 오른손만 내려 핸드폰을 뒤집었다.
[통화되니?]
역시 태지윤이다. 답을 하지 않고 메시지 목록을 뒤져 이름 하나를 클릭했다.
[기사 자료 초안은 유 실장님께 전달해 드렸습니다. 실장님이 수정한 후에, 본부장님께 대면 보고드릴 예정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통화 두 번, 모두 1분 이내. 문자처럼 할 말만 또박또박하고는 차렷 자세를 한 성실한 학생처럼 지시를 기다리기만 했다. 끊어 주면 고마워하는 내색이 핸드폰 너머로 전해졌다. 호출할 거리는 교묘하게 빠져나가며 유인목 실장에게 미루었다.
[받을 거 있지 않습니까.]
유치한 문자가 여자와의 문자 내용 제일 하단에 있다. 10시 37분에 보내고 늦은 오후 시간이니, 이 정도면 완벽하게 씹힌 거지.
돌려주지 못한 넥타이가 열흘째 서랍 속에 있다. 태준섭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준섭이 한 손으로 이마를 괸 채, 답이 없는 문자창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내 검지를 들어 툭툭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 모양을 터치하자 드르륵하는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신호 세 번 만에 상대가 답을 했다.
- 네, 본부장님.
“생각해 봤는데.”
나오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다.
- 네.
“옆에 두고 제대로 쓸까 합니다. 비서실로 출근시키세요.”
상대가 잠시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답이 없었다.
“유 실장님.”
- 네, 본부장님. 그러니까 연우경 팀장을 본부 비서실로 배치하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럼, 또 누가 있습니까.”
- 연우경 팀장은 비서 업무는 한 적이 없습니다. 기본적인 트레이닝은 시키겠습니다. 이틀이나 사흘 정도만이라도.
“필요 없어요. 내가 시킵니다.”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급히 집어 든 준섭이 짜증이나 실망감 비슷한 감정을 누르며 버튼을 눌렀다.
“네.”
- 통화 되게 어렵다? 혁신 뭐, 거기 본부장이라며? 그래서 그래?
지윤이 가벼운 빈정거림을 담아 비난했다. 지난 일요일 저녁 얼굴을 봤지만 이야기를 나눌 틈은 없었다. 그날 송백재에서 회장의 느닷없는 선언을 듣고 며칠 지나지 않아 지윤은 유럽으로 출장을 떠났다. 이번 출장도 꽤 길어 프랑스, 이탈리아를 거쳐 뉴욕에서 다시 서울로 지난 주말에서야 돌아왔다. 전시 기획 협의와 전시회 참관이 명분이었지만 TK 가족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지윤이 젊은 애인과 밀월을 즐기기 위함이 이번 출장의 본 목적이라 믿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꿀이 떨어지는 여행이었다. 또한 태지윤은 꿀보다 더 진한 황금길을 밟으며 돌아왔다.
“지금 하려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준이 너 내가 지금 너한테 얼마짜리 복권을 가져다준 건지 알면 이렇게 못 한다?
준섭이 피식 웃었다.
“얼맙니까?”
- 와서 설명 들어.
“오늘은 좀 어렵습니다.”
- 줄 거 있어. 와.
태지윤이 딱 끊어 말했다.
“작품은, 제가 직접 받기가…….”
- 얜, 내가 노망났어? 블룸스 금융 이 실장 통해 실어 보냈지. 집으로 두 점 갔고 블룸스로 한 점.
“그럼…….”
- 암튼 오라고.
“저녁 약속 있습니다. 9시까지 맞춰 보겠습니다.”
- 그래라.
그제야 지윤이 전화를 끊었다. 굳이 오기를 고집하는 거나 복권을 운운하는 걸 보니 이번 건은 자신이 넘치는 모양이다. TK의 누구도 모르는 지윤과 준섭만의 거래 규모가 해가 지날수록 커지고 있다.
처음에는 준섭의 정보망과 배짱이 도움이 되었고, 이후로는 지윤의 타고난 감각과 스스로 구축한 예술계 인맥이 더 큰 역할을 했다. 인맥을 확장시키는 데에 유럽과 미국의 애인들이 시기적절하게 활용되었다. 물론, 자금력 동원에 있어 준섭이 은밀히 보유하여 키운 블룸스 금융이 없었다면 태지윤의 인맥이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윤이 최근 3년간 블룸스와 준섭의 자금에 본인 갤러리 자금을 동원하여 예술품을 사들이고 팔아 치워 얻은 수익률이 400%가 넘는다. 아직 현금화되지 않은 큰 덩어리를 제외한 수익률이다.
복권이라……. 얼마짜리 로또인지 확인하고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해야겠지. 부모 자식 간에도 없는 공짜가 남보다 더 냉랭한 이모 조카 사이에 있을 리가.
잠시 스케줄표를 보던 준섭이 비서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양 대리, 오늘 저녁 약속 장소 변경 가능한지 확인해 줘요. 청담동 쪽으로.”
- 네, 본부장님.
“그리고…….”
준섭은 연우경이 내일부터 비서실로 출근한다는 이야기를 설명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유인목 실장이 설명하는 편이 매끄러웠다.
“홍보실에서 연락 올 겁니다.”
- 네.
“지금 강우식 대리 올라오라고 해요.”
역시나 왜 늘 강우식을 찾는지에 대한 불만인지 양지은 대리가 한 박자 쉬고 답한다.
- ……네.
수화기를 내리고 정수리 뒤로 깍지를 껴 목을 젖혔다. 털썩 소리가 나도록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빙글 의자를 돌려 몸을 창으로 향하고 눈을 감았다. 태 회장의 분풀이성 질책이 재생되어 귓구멍을 찌를 듯이 파고들었다.
후우…….
무겁게 한숨을 흘리며 박 전무를 위시한 태서우의 충복들 얼굴을, 그들이 벌이고 있을 자잘하고 유치한 짓거리들을 어지러이 생각했다. 준섭에게 흠집을 만들고 그 흠집을 오목 거울로 비추어 송백재의 눈에 거슬리도록 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도 태지윤과 다르게 태서우는 서희와 같은 어머니, 동복 남매인데 제거하는 시도에 있어 거리낌이 없다. 자연스레 생각은 서우의 아들 이섭에게 미치고, 이섭과 나란히 서 있던 여자에게로 이어졌다. 작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섭과 얼굴을 닿을 듯 맞붙이고서 하하 웃던 모습이 머리에 박혀 있다. 불쾌감에 저절로 이마가 찡그려진다. 뱅뱅 도는 웃는 얼굴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팔을 들어 이마 위에 올리고는 눈을 꾹 감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양 대리가 우식에게 제대로 연락을 취한 모양이다. 보기와 다르게 양 대리가 좀 아둔한 면이 있어 지난번에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며 지시를 빠뜨린 적이 있었다. 이후로 우식은 핸드폰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고 했다.
두 번 울리기 전에 받습니다. 5분 간격으로 확인하니까 그런 일 다시는 없을 겁니다. 우식은 벌게진 얼굴로 제 잘못이 아닌데 사죄했다.
발소리가 데스크 근처에서 멈췄다. 준섭은 팔로 가린 눈을 뜨지 않고 몸을 창으로 향한 채 말했다.
“정 대표한테 심부름 좀 다녀와. 아, 초콜릿 가진 거 있으면 좀 주고. 욕을 하도 처먹었더니 머리가 띵하네.”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미니 초콜릿바를 꺼내는 소리도, 답을 하는 소리도 없어 준섭이 눈을 떴다. 창에 비치는 사람은 덩치 큰 남자가 아니었다.
창으로 흐릿하게 비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려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도심 빌딩 사이 거뭇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비치는 사람은 덩치 좋은 강우식이 아니라 가느다란 허리를 가진 여자다.
“무슨 일이죠?”
준섭이 창을 보며 물었다.
“본부장님, 절 비서실로 출근하라 지시하셨습니까?”
어이없어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렇습니다만.”
창으로 비치는 모습만 보고 있자니 우경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가능하다면 저는, 홍보실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싶습니다.”
“왜죠?”
“처음에 본부장님께서도 비서실보다는 홍보실이 낫다고 판단하셨고, 현재 홍보실에서 일하는 게 여러 가지로 효율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유 실장님과 같이해야 하는 부분도 많…….”
준섭이 의자의 방향을 휙 틀어 우경을 마주 보았다. 우경이 멈칫하며 뒤로 몸을 빼었다.
“연우경 씨.”
준섭이 우경과 눈을 맞추고는 느릿하게 말했다.
“내가, 효율적이지 않으니 비서실로 출근하라 했습니다.”
“진행에 문제가 있으시다면 최대한…….”
준섭이 주먹으로 툭 책상을 두드려 말을 끊었다. 우경이 준섭을 바라보았다.
“우경 씨는 나한테 따질 일이 있을 때만 나타나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본부장님.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요구할 일이 있을 때도 들이닥치긴 했죠. 지금처럼.”
“본부장님, 저는…….”
준섭이 우경의 말을 잘랐다.
“이번에도 유 실장이 난색을 표하던가요? 비서실 출근 여부는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그래서 직접 해결하러 왔나요?”
준섭의 데스크 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우경이 변명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준섭이 우경과 눈을 맞추고는 전화 버튼을 눌렀다.
“네.”
스피커폰으로 양지은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 본부장님. 저녁을 30분 이르게 움직이시는 건 어떠신지요?
“장소는 변경했습니까?”
- 청담동으로 변경 가능하다는 답 받았습니다. 지금 레스토랑 예약 컨펌 중입니다.
“강 대리는 호출했습니까?”
- 네.
준섭이 전화를 끊고는 우경에게 말했다.
“이 따위 행동, 지나치게 건방지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연우경 씨. 내가 우습지? 송백재 빽이라 그럽니까. 아님 태이섭입니까.”
우경이 고개를 젓다가 이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제가 왜…….”
준섭의 얼굴에 후회하는 빛이 서렸다. 뱉지 않았어아야 할 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 재킷을 신경질적으로 걸쳤다. 팔에 걸려 들어가지 않는 재킷을 털어 내는데 갑자기 쉽게 팔이 들어갔다. 돌아보자 재킷 한쪽을 들고서 얼굴이 붉어져서는 우경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준섭이 우경을 외면하며 재킷 단추를 잠궜다.
“나 지금 나갑니다.”
바닥에 붙은 듯 발을 떼지 못하는 우경을 남겨 두고 큰 걸음으로 준섭이 방을 빠져나갔다. 급히 일어서는 양 비서를 지나치면서 지시했다.
“장소, 시간 강 대리에게 전해요.”
우경은 준섭의 뒷모습을 열린 문 사이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여기.”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는 우경을 향해 여진이 몸을 반쯤 일으키고는 손을 크게 저었다.
“야아. 오랜만이야. 회사 옮기고 처음이지 우리?”
“네.”
“회사 그만두면서 자주 만나자 하고선 너 거절 두 번, 펑크 두 번이야. 나 좀 상처받았어. 연 끊으려나 했다고.”
여진은 CS애드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경이 마음을 붙였던 동료였다. 우경이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 이후, 안부 문자라도 한 사람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다들 바쁘고 또 거북했겠지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휑하게 비는 느낌이었다.
그만둔 날 굳이 짐을 들고서 회사 아래까지 배웅해 주고, 트렁크에 짐을 싣고는 손을 탁탁 털며 잘 지내라고……. 쾌활하게 말하고는 결국 눈이 빨갛게 되었던 여진의 마지막 모습이, 휑하게 뚫려 쉬이익 바람이 새는 마음에 문풍지처럼 붙어 있었다.
“아니에요. 작은 회사라 일이 생기면 누구한테 부탁할 수도 없고, 상황이…….”
“알아, 알아. 해 본 소리야. 오늘 얼굴 보니까 너무 좋아서. 나 너 연락받고 진짜 좋았어. 안 그래도 전화 한번 할까 하다가 의기소침해 있었거든.”
“죄송해요. 저 정말 멘탈 나갈 만큼 정신이 없었어요. 회사 옮기고 일이 갑자기 많아졌거든요.”
CS애드에서 TK기업 광고를 맡고, 미팅에서 문제가 생기고, 그래서 태준섭을 찾아가고……. 그날 H호텔 이곳에서 서동재랑 선을 보기로 했는데 펑크를 냈고.
‘연우경 씨, 그렇게 비를 맞고서 안 춥습니까.’
살갗을 벗기는 듯한 부끄러움이 후려쳤던 순간이 마치 까마득한 옛일처럼, 그러다가 검푸른 눈동자가 어른거리면 마치 어제 벌어진 일처럼 온몸이 바싹 긴장하였다.
“우리 먹던 거 먹자. 좋지?”
H호텔 라운지는 서울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야경 때문에 제법 비싼 값을 치르면서도 여진과 가끔씩 들렀다.
여진이 싱가폴 슬링 두 잔과 클럽 샌드위치와 시저 샐러드를 시키는 모습을 보며 우경은 약간 멍한 상태였다. 호텔로 오기 전 화를 내며 방을 나가 버린 준섭의 뒷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불쑥불쑥 떠올랐다.
“요즘 어디 일하는데?”
우경이 애매하게 웃었다.
“비밀 유지 조항이야?”
“그런 셈이요.”
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바쁘구나?”
“아, 약간.”
“다행이야. 바쁜 게 좋지. 우경 씨, 능력 있어.”
여진한테 그런 말을 듣자 어설프게 굳은 상처가 입을 벌렸다. 우경이 급히 말을 돌렸다.
“오늘 조금 늦었죠.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 아니. 예약이 안 돼서 좀 좋은 자리 잡으려고 일찍 나왔어. 테라스 자리는 아쉽게도 없더라. 여기도 완전 창가는 아니지만 괜찮지?”
창 너머 탁 트인 시야 끝에 노을이 지는 하늘이 잡혔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서울 풍경이 일몰의 시간에 물들기 시작했다. 마법처럼, 색채가 달라질 것이다.
기다란 컵에 담아 온 싱가폴 슬링의 노랗고 붉은빛이 노을처럼 느리게 일렁였다. 창으로 향하는 우경의 시선을 붙잡으며 여진이 말했다.
“이 말 해 주고 싶어서 근질거렸는데, 혹시나 기분 상해 할까 봐 전화론 말 못 했어. 나 우경 씨한테 잘린 건가 했으니까.”
“왜 그러세요오. 제가 왜.”
우경이 웃으며 칵테일을 한 모금 삼켰다.
“이은철 박살 난 거 모르지?”
“네?”
클럽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며 여진이 기다리라는 듯 손을 들었다. 꿀꺽 삼키고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빠르게 말했다.
“TK 경쟁 PT 물먹고, 분위기 너무 안 좋았는데 이은철 그놈이 그러고도 계속 없는 사람 가열차게 씹었단 말야. 근데 TK 다음 신제품 광고는 예전처럼 줄 거 같거든? 아, 스토리가 긴데 알겠지만 몰아주기 이런 거 안 된다고 하니까 30/70, 혹은 20/80 이런 식으로 가자 CS 회장님이랑 TK 부회장님이 합의했다는 말도 있고 했어.”
CS와 TK 광고 건에 대해서는, 태서우가 CS 사위이니 대외적 이미지를 챙기고 실리도 잃지 않을 정도로 마무리되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네, 들었어요.”
“응, 그래서 경쟁 PT 결과 이후에 다음 건은 잘해 보겠다고 이은철 비롯해서 COO랑 부사장님까지 TK에 주르륵 갔어. 적당히 자아비판하고 다음 콘셉 논의하고 그러려고 했는데, 그 태준섭 있잖아.”
우경이 스토로로 칵테일을 마시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사진 보니 외모 끝장이더만. 아무튼 태준섭 상무가 회의실 들어왔대. 예정에 없었는데 잠깐 10분 정도 시간 내서 들렀다고 하면서 자리에 이러고 앉아서 이은철 AE가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대.”
“이은철 팀장님은 무슨 말을…….”
여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 말로는 사죄를 했다는데 문제를 일으킨 직원은 사직했고,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할 거고. 남 탓만 늘어놨겠지, 뭐.”
여진이 칵테일잔을 놓으며 눈을 반짝였다. 잔과 테이블이 부딪히는 소리가 진짜는 지금부터야, 하는 듯한 효과음처럼 느껴졌다.
“태준섭 상무가 손을 들어 이은철 말을 멈추게 하고는 시계 보면서 그랬대. 2분 지났네요. 더 들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만 물읍시다. 경쟁 PT에 왜 그 직원이 가져왔던 카피를 쓰지 않았습니까, 설마 PT에서 제안한 그 카피가 더 낫다고 판단했습니까.”
꺄아악 소리 지를 만한 멘트 아니니. 여진이 프렌치 프라이에 붉은 케첩을 톡 찍어 입속으로 넣으며 말했다. 우경이 무언가 말하려 하니 더 들어 봐야 된다는 듯 손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그 태준섭 상무가 말이야…….
“책임질 사람 대신 아랫사람 보내는 정도로만 무능한 줄 알았더니, 이건 뭐. 담당 AE라는 사람이 고객사의 의도도 모르고, 광고도 모르고, 책임 전가하는 뻔뻔함까지. 이런 무능하고 파렴치한 인성 외엔 CS에는 사람이 없습니까.”
우경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진을 바라보았다. 여진은 추르릅 소리가 나도록 마지막 방울까지 싱가폴 슬링을 스트로로 빨아올리고는, 웨이터를 불러 세웠다.
“싱가폴 슬링은 맛있는데 달다. 우리 블루 마티니 한 잔씩 더 하자.”
이미 여진의 혀가 살짝 풀려 있었지만 우경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섭이 했다는 말이 공처럼 마구 튀어 올라 머리를 두드리고 심장을 들이받았다.
여진이 시저 샐러드에 나온 크루통을 와작와작 소리 내어 씹어 먹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왜 다들 말 안 해 줬지, 태준섭 상무 살 떨리게 섹시하게 생겼다고? 이은철 그 새키는 쓸데없는 정보만 흘려. 태준섭 상무 얼마 전에 인도 출장 공항 파파라치 사진 말야, 그거 돌고 아주 CS애드가 들끓었어. 다들 TK 근처라도 가겠다고. 근데 이후로는 미팅 몇 차례 했는데 그림자도 못 봤대.”
우경은 샌드위치의 사이드 메뉴로 나온 프렌치 프라이를 하나 집어 들었지만, 입에 도무지 들어가지 않았다. 사선으로 잘린 길쭉한 감자 끝을 세워 앞접시에 묻은 시저 샐러드 소스 위로 찍찍 가로줄을 그었다.
“표정 되게 심란하다. 우경 씨는 아직 이은철 이야기 들으면 기분 나쁘지?”
“좀……. 아니, 아니요.”
“이은철 그 미팅 이후로 TK에서 배제되었고, 윗선에서만 쉬쉬하면서 우경 씨 이름 좀 오르내리긴 했나 봐. 사직 이유가 건강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 부분은 절차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은 났지만 말야. 이은철이 사장 조카잖아. 꼴같잖게 설치더니 사장 갈린다는 말이 있어. 이유야 여럿이겠지만 TK 건이 컸겠지. 그런 뒤에 태준섭 상무가 한 말, 회사에 쫘악 대놓고 돌았어. 이은철은 사직서 냈다고 하더라.”
“그거, 그 말이요, 혹시 언제쯤이에요?”
“응? 사장? 닷새 전쯤?”
“아뇨, 태준섭 상무님이 미팅한 날.”
“그거야 아마, 경쟁 PT하고 이틀 후인가, 한참 됐어. 사장 눈치 보느라고 쉬쉬해서 우리만 이제 알았지.”
그러니까, 우경이 준섭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기도 전, 아니, 준섭의 인도 출장 건을 맡기도 전…….
‘그 카피, 왜 쓰셨습니까.’
‘좋아서.’
‘형편없다고, 버리셨잖아요.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아요. 한 번만, 한 번만 봐 달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그날도 말했어. 그런 식으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방식이 틀렸단 말이야. 내용이 아니었어.’
그날 밤, 준섭의 표정과 가라앉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하루 종일 출장이었다. 안성에 도착해서 쉬었던 우경과 다르게 준섭은 회의와 연설뿐 아니라 내내 많은 사람들한테 시달렸다. 고단한 일과의 끝에 우경을 불러 설명을 하고 이해를 바랐는데, 우경은 그런 그를 뼛속까지 비웃었다.
우경은 갑자기 목이 타서 서빙된 마티니를 들이켰다. 뜨거운 차를 삼킨 듯 식도가 달아올랐다.
“우경 씨, 이거 좀 독한데? 넘 급하지 않아?”
여진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투퉁 두드리고 멀어졌다. 우경은 배싯 웃었다.
“나, 여진 MP님 좋아했어요. 많이.”
“과거형이다? 너 진짜 새침한 거 알아? 정 잘 안 주고. 겁먹은 강아지처럼 움츠려서는.”
여진이 샌드위치를 앞접시로 올려 주며 눈을 흘겼다.
“아뇨, 지금 좋아해요. 지인짜…….”
“아이고, 남자한테 그렇게 고백하며 웃어. 움츠린 강아지 같다가 반전 돋게 예뻐.”
우경이 또 웃었다. 창밖으로 보랏빛 서울에 총총 불이 켜져 있다.
예뻐라. 반짝반짝 은빛 별 같아…….
식도가, 그리고 마음이 달아올랐다. 반짝반짝 작은 별 노래라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회청색 철문 위로 손을 짚는다. 벌어진 다섯 손가락 한 뼘쯤 위, 검은 숫자 네 개가 새겨져 있는 금속판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머리 위 통로를 밝히던 자동 조명이 소리 없이 꺼졌다. 준섭은 붙인 손을 떼지 않고서 아래로 쭉 끌어내려 키패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희끄무레한 빛을 내는 넘버가 켜졌다. 번호를 누르기 전 부서진 선박의 파편처럼 떠돌던 기억 한 조각이 쿡 정수리를 찔러온다.
“왜 이렇게 아래로 끌어당기면 손가락이 붙을까요?”
“응?”
“엄마, 이것 좀 봐요. 이렇게 창에 손을 붙이고 힘을 빼고서 쭉 아래로 당기면 나도 모르게 손가락끼리 붙어 버려요.”
“그런가?”
가느다란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손이 조막만 한 아이의 손 옆으로 붙었다. 주르륵 같이 얼음을 지치듯 손을 미끄러뜨렸다.
“신기하네, 정말 붙는구나.”
서희가 눈을 반짝이며 한 번 더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런데 이렇게 힘을 주면요, 안 붙어요. 아무 생각없이, 아무 생각 안 하고 내리면 붙거든요.”
해가 지고 달이 뜨고 하늘이 푸르고 돌멩이가 구르고 튀어 오르는 공의 높이가 달라지고……. 보이는 모든 것이 다 궁금했던 어린아이였다. 서희는 마찰력이나 힘의 방향 같은 물리학적 지식을 설명하지 않았다.
“손가락은 형제라서 그래. 한 뿌리에서 나왔거든. 떨어졌다고 생각해도 아무 생각 없이 미끄러지다 보면 결국엔 붙게 되어 버려.”
손자국이 길게 난 창 위에 붙였던 흰 손등이 떠오른다. 파란 정맥이 비치던 얇고 약한 손.
기억 속으로, 그 기억의 잔상으로 몸을 묻고 싶어진다.
“우리 준이도 형제 만들어 줘야 하는데…….”
이마를 창에 기대고 멀리 어디쯤을 바라보며 서희는 제 손을 자꾸만 미끄러뜨렸다.
준섭은 노란 현관 불빛 아래에서 구두를 벗고 넥타이를 푸르며 텅 빈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관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리자 거실에서 마스터룸까지 회랑처럼 긴 공간에 일렬로 붙은 할로겐 조명이 밝혀졌다. 리모컨을 집어 들어 버튼을 누르고 오디오를 작동시켰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이 공간을 채운 후에야 준섭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웅 쿵,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낮은 화음이 묵직한 종소리처럼 울린다. 종소리의 파동에 묶인 심장이 같은 박자로 출렁인다.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듣고 있자면 종소리에 압도되고, 경건함에 무릎을 꺾게 된다. 기도 한 자락에 운명을 걸고 생사의 갈림길 위, 가늘고 길게 뻗은 길을 위태로이 걸어가는 눈먼 이가 된 기분이다.
준섭은 타이를 불량하게 목에 매달고서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재킷을 한쪽 팔에 건 채로 걸음을 멈췄다.
흑백의 스탠실 작품이다. 머리가 헝클어진 작은 소년이 거친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 나란히 걸려 있는 그림에는 단발머리 소녀가 발레리나처럼 발꿈치를 들고서 양손을 앞으로 뻗어 올렸다.
한 발 떨어져 두 그림을 쳐다보자니 그제야 태지윤이 자신만만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소녀의 손이 소년의 손에서 뻗어 나간 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붉은 풍선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치파괴주의자, 거리의 낙서가, 명화를 조롱하고 박물관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얼굴 없는 미술가.*
“그래피티. 이젠 새롭지 않은 팝 아트. 그래도 넌 좋아할 것 같았어. 이름을 얻기 시작하자마자 미술계에 분풀이하듯이 동네 사람들에게 50불을 받고 팔아 재낀 그림들이라고 들었는데, 다들 위작일 거라 했어. 막상 보니까 위작이어도 어때 싶더라. 네 집에 걸어 두면 그만 아냐? 너 어릴 때, 검은 피카소도 진품인지 뭔지도 모르면서 손때 묻혀 가면서 봤잖아. 가서 봐. 너 같아서 샀으니까.”
줄기세포의 혁명으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태지윤이 와인잔을 빙글 돌렸다. 높이 들어 불빛에 비추고는 말했다.
“로또야. 구입하고 사흘 뒤, 소더비에서 15억에 낙찰된 제 그림을 분쇄했어. 쇼인지 아닌지 상관없어. 그림은 한 달 사이 30%도 넘게 올랐고. 네 돈으로 산 그림 두 점은 진품으로 판명되었어. 하나는 누군가가 담벼락을 흰 페인트로 덮어 버려 없어진 소년, 다른 하나는 이번에 분쇄해 버린 소녀의 다른 버전. 실은 두 개가 연작 같아. 미래가 없는 소년이 날린 풍선이 소녀와 만나며 미래가 되는 것 같거든?”
흑백의 작품 두 개에서 유일한 컬러를 가진 붉은 풍선은 소년이 포기한 미래인가.
풍선을 쳐다보며 준섭은 소년처럼 쭈그려 앉았다. 부스럭거리며 쇼핑백을 벌리고 나무 박스를 꺼내어 열었다.
“선물이야. 같은 와인으로 하나 더 샀어. 풀 세트. 그림 감상하며 따 마셔. 잔도 들었거든?”
산지 갤러리 지하 창고 겸 비밀 응접실에서 지윤이 말했다. 창고를 짙게 채울 만큼 깊은 향이었다.
검은 벨벳 속에 박힌 와인병을 들어내고 오프너를 꽂아 코르크 마개를 빼어 냈다. 옆에 있던 와인잔을 반 넘게 채우고 입으로 흘려 넣었다. 디켄팅이 되지 않은 와인은 순간적으로 미각이 마비될 만큼 강했다.
손때 묻혀 가며 봤다는 검은 피카소의 작품은 서희가 사들인 것이었다. 준섭이 태어나기도 전, 뉴욕에 자리를 잡으며 가져온 돈의 상당 부분을 털어 홀린 듯이 그림 한 점을 샀다고 했다. 화가는 아직은 그 무엇도 아니었던 치기 넘치는 10대 흑인 소년일 뿐이었다. 이후 팝 아트의 거장을 비롯한 예술계는 그의 피부빛에 주목했고 15년이 지나지 않아 소년은 그래피티를 예술로 승화시킨 미국적 상징이 되었다.
서희는 생활이 어려워도 그림은 팔지 않았다. 누구도, 준섭의 아버지조차 진품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서희가 마지막으로 산타클로스가 되어서 준 선물, 준섭에게 남긴 은밀한 유산이었다. 유일하게 챙겨 올 수 있었던 서희의 유품이기도 했다.
화가가 요절한 후 10년, 작품 가격은 수천에서 만 배까지 상승했다. 소더비 최고 기록을 경신한 경매가는 검은 피카소라는 별칭을 얻기에 완벽했다. 준섭의 시드 머니는 한 점의 검은 피카소 그림이었다. 서희가 남긴 유품, 가장 행복한 시절의 추억을 실재감이 없는 숫자로 바꾸었다.
준섭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붉은 와인을 마저 입속으로 흘려 넣었다.
쭈그려 앉은 소년 너머 잔해처럼 떠도는 기억들이 덮친다.
더러운 아파트 벽에 꼭 어울리던 낙서 같은 그림, 노랗고 파란 원색의 대조와 함부로 휘갈긴 알파벳과 찌그러진 로봇 같은 얼굴. 햇빛이 비추면 로봇이 치익치익 팔을 휘두르며 말을 걸 것 같던 그 순간, 긴 팔로 번쩍 들어 올려져 넓은 어깨 위로 앉혀지던 순간, 건장한 남자의 웃음소리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이중창처럼 울리고, 준아 밥 먹자, 오래된 음유 시인의 노래처럼 부드러운 리듬감이 있던 부름과 매콤한 김치찌개 냄새.
깨어지고 흩어져 이젠 작은 조각이 되어 버린 기억의 일부.
가슴을 쥐어뜯어도 여전히 떼어 내지 못한 기억들.
준섭은 그대로 벌렁 바닥에 드러누웠다.
쿠웅 쿵, 라흐마니노프의 종소리가 귀를 때리고 심장을 흔들었다.
노랗고 파란 칠이 된 찌그러진 로봇이 삐걱거리며 춤을 추는 꿈이었다. 준섭과 같이 자랐던 그림 속 로봇이었다. 망설임 없이 팔아 치워 버린 로봇을 향해 다가갔다. 안녕, 어린아이처럼 손을 뻗어 로봇의 눈을 만져 보고 입을 덧그렸다.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지이잉 하고 진동했다. 할로겐 조명이 눈이 부셔 반쯤만 뜨고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초코ㄹ릿 어떠 ㄴ 거]
준섭은 눈을 부비며 다시 읽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배긴 등을 비틀며 몸을 일으켰다.
[아아ㅡ 죗ㄴㅡㅇ합니다 친구한태 보내다는 게.]
하.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진다.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음성 안내가 나올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한 번 더, 버튼을 눌렀다. 받을 때까지 할 작정이었다. 두 번째 시도, 열 번째 신호음이 뚝 끊겼다. 통화는 연결되었는데 그러고도 침묵.
준섭은 핸드폰을 귀에 바싹 붙였다. 예민해진 청각이 여자의 숨소리를 잡아냈다. 곤란하겠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떼려나. 입술을 또 긁고 있을까.
결국 연우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본부장님. 음…….
준섭이 답을 하지 않자, 음, 음……. 하더니 사과했다.
- 죄송합니다.
“느닷없이 사과는.”
- 이 시간에 문자도 그렇고, 오후에도……, 제가 원래 이렇게 엉망인 사람은 아닙니다.
“밖이에요?”
- 네? 아, 네. 밖.
“바람 많이 불던데, 안 춥습니까?”
- 아, 음……. 바람이 부는데, 네. 근데 좀 덥기도 하고. 하아……. 바람이 시원해요. 저 말짱해요. 컨디션은 좋아요.
코가 맹맹한데 추워서가 아니라 취해서였다.
준섭은 핸드폰을 스피커로 바꾸고는 바닥에 두었다. 와인병을 들어 빈 잔을 채우며 물었다.
“어딥니까.”
- 여기가……. 그러니까 음……. 동네 편의점 앞인데요.
“초콜릿 샀습니까.”
- 네.
준섭이 이마에 손을 짚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나 주려고?”
-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본부장님이 불편하시지 않도록, 비서실에서……. 아니, 저…… 이만 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연우경 씨.”
- 네.
준섭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와인잔을 입에 대었다. 어느 정도 디켄팅이 되어 열린 와인은 코로 들어오는 향도 그렇고, 혀끝에 닿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첫맛은 묵직하고 끝맛은 달큰한 꽃향이 감돈다.
“초콜릿 말고, 나한테 할 말 있습니까.”
- ……오후에 하신 말씀이요.
“나 우습게 보냐는 말?”
- 네.
준섭은 와인을 삼키며 조금 웃었다.
“좀 짜증 나 있는 상태였으니까, 연우경 씨 타이밍이 별로였습니다.”
- ……지금은요?
“할 말 들어줄 수 있을 만큼 너그럽고 여유로운 상태.”
- 아, 약속 중이신가 했어요. 음악……. 좀 울리기도 하고.
“집입니다.”
- 네.
“불공평한가요?”
- 네?
“연우경 씨는 바람 부는 밖에 세워 두고, 나는 집에서 음악 들으며 향기 좋은 와인이나 마시고 있고.”
핸드폰 너머 여자의 웃음소리가 짧게 스쳤다. 라흐마니노프인가요. 좋아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추워요?”
- 아니요. 더워요.
여자가 하아, 숨을 내쉬었다.
준섭은 순간적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연우경, 어이없네…….
열이 올라 벌어진 입술과 취기에 젖은 눈동자가 마치 본 적이라도 있는 듯 자연스레 상상된다.
얼굴도, 목덜미도 따뜻하게 달아올라 있겠지. 유달리 약하고 흰 피부였다. 차 속 햇빛에도 발그스름해지던 뺨이 떠오른다. 손으로 잡으면 손자국이, 입으로 빨아들이면 붉은 상처가 새겨지고, 이를 세워 긁으면 빨간 핏방울이 맺힐 것이다.
“연우경 씨, 초콜릿 까먹고 정신 차려서 집에 들어가요.”
준섭이 와인을 들이켜며 말했다.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몸이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쿠웅, 몽환적인 피아노 독주가 잦아들고, 격정이 파도처럼 덮친다. 라흐마니노프의 음률에 따라 심장이 꾹 눌렸다가 펴졌다. 준섭은 와인잔을 매만졌다.
발정 난 개새끼처럼 여자를 찾아 뛰쳐나갈 것만 같은 충동 자체가 어처구니없었다.
“내일 봅시다.”
이성을 붙잡고 욕망을 누르며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누르려 할 때,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 본부장님…….
준섭은 답하지 않았다. 수신구를 통해 길고 작은 한숨만 들렸다. 아아. 같은 약간의 소리가 섞인. 준섭은 와인잔을 움켜쥐었다.
- 오늘, 저 전 회사 동료 만났어요. 이은철 팀장 이야기…… 들었어요.
“응?”
- 미팅에서 카피 말씀하신 거…….
“아아.”
그제야 연우경이 취해서 편의점에 들어가고 초콜릿을 샀는지 이해가 되었다. 준섭이 풋하고 웃었다.
“그 무능하고 뻔뻔한 놈 이름이 이은철이었습니까.”
- 죄송합니다.
준섭이 등 뒤로 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몸을 팔에 의지해 뒤로 기대고 눈을 반쯤 감고서, 미래를 놓쳐 버린 불안하고 가엾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초점이 흐릿해지자, 소년이 놓친 풍선을 향해 까치발을 하고서 팔을 뻗은 소녀가 외로운 소년에게로 한 걸음 붙어 섰다.
따뜻하게 달아오른 여자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흠뻑 취하고 싶다.
이섭의 바보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붉은 귓등도.
취하라고 준 향기 짙은 술이다. 중독되지 않을 만큼만 마실 자신이 있다.
어차피 가지기로 한 여자인데, 무얼 망설이는 걸까.
-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다른 오해하지 않고.
“뭘, 말입니까.”
- 하아…….
여자가 숨을 길게 내어쉰다. 그러니까…….
- 제가 좀, 이상해져서…….
여자가 울음처럼 웃었다.
- 이런 사람 아닌데, 한 번도 이런 적 없는데, 자꾸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연……우경 씨.”
욕망에 할퀴어진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나왔다. 버티고 있는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지금 내 생각하는 중입니까.”
- ……본부장님.
“그렇습니까.”
- 죄송합니다.
“비긴 걸로 합시다.”
준섭이 뻐근한 몸을 세우고, 와인을 들이켰다.
“연우경 씨가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온다면.”
준섭이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취하라고 준 술이지만 정신을 잃고 싶진 않으니까. 오늘은 그만.
“그러면…… 아마 뺨을 후려칠 테니까.”
준섭은 핸드폰을 바닥에 버려둔 채 마스터룸으로 이어진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옷을 훌훌 벗었다.
* * *
잠이 깼다. 하나의 점이 되어 버리겠다는 듯 몸을 둥글게 말고서 잠이 들어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밤의 불빛에 백설이의 새하얀 털이 뿌옇게 빛났다. 베개 맡에 앉아, 동그랗고 까만 눈으로 우경을 보고 있다. 깜박깜박 눈을 감았다 뜨는 동안 백설이는 느리게 움직여 우경의 옆으로 붙었다. 작고 폭신한 발이 침대 시트에 닿는 소리, 실크처럼 부드러운 털이 스치는 소리가 바닥에 붙은 귀로 울려들었다.
우경은 둥그런 점에서 자라난 나뭇가지처럼 팔을 조금 뻗어 냈다. 손가락을 까슬하고 따뜻한 백설이의 혀에 맡기고서 괜찮아, 하고 말했다. 괜찮아, 라고 백설이가 말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창 너머로부터 밤의 소리가 차곡차곡 스몄다. 낮의 소음이 작게 작게 몸집을 줄여 두터운 이불을 덮어쓴 것만 같다.
도로 위를 구르는 차량들, 아파트 정원에 심은 나무에서 붉고 노란 잎들이 제 몸을 부비는 소리, 그 아래 마른 잎을 밟으며 돌아다니는 길고양이들이 우는 소리……. 실재의 소리와 기억의 소리들이 뒤섞여 얕고 둥글게 퍼졌다.
‘내가 우습지? 송백재 빽이라 그렇습니까, 아니면 태이섭입니까.’
태준섭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밤의 소리와 같은 여운이 있어 오래도록 마음을 잔잔히 흔들었다. 그런 목소리여서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 눈이 마주쳤을 때, 남자의 얼굴에 스치던 낭패스런 표정은 매끈한 조각품에 숨겨진 균열 같았다. 준섭은 옷으로 감추었던 붉은 흉터를 들킨 아이처럼 화를 내고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
H호텔 반짝이는 야경을 뒤로 두고서 여진이 말했다.
“태준섭 그 사람 말이야. 엄마 성을 따라서 ‘태’가 아니라더라. 호적상 부모는 따로 있대. 그래서 회사에서도 이번에 상무 승진하고 전기본 맡기 전엔 몰랐다고 하고.”
“네?”
“신정호 COO 입에서 나왔다는데, 호적상 아버지가 태 회장의 먼 일가, 태시환 회장의 고향 시골에서 10년도 전에 사망한 누군가로 되어 있대. 회사 인사 기록에는 또 다른 태씨 이름이 가짜로 적혀 있고, 로열패밀리의 특권 없이 회사일을 배우게 하려 그랬다는데……. 좀 갸우뚱하지 않아?”
우경은 무슨 뜻인지 의미를 파악하려 취기 어린 눈을 가늘게 떴다. 여진이 마티니에 꽂힌 올리브를 입속으로 삼키며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태준섭은 태서희의 아들이지만 아들이 아닌 셈이래. 아예 태서희의 피를 받은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고. 하도 개처럼 부리고 개처럼 기어서 임원진들 사이에서 별명이 회장의 개였다는데.”
여진이 뱉은 말을 삼키려는 듯 손을 젓고 얼굴을 쓸었다.
“아……. 나 취해서, 별명까진 이건 좀 너무 나갔다. 클라이언트인데. 못 들은 걸로 해 줘.”
우경이 어벙벙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절대 태서희 친아들일 리가 없다고 하더라. 외모도 하나도 닮은 데가 없대. 모르겠어. 태서희의 아들이든 아니든, 분명한 건 태시환 회장의 재산과 지분에 대해 법적인 유류분을 청구할 수 없는 지위라는 거지.”
우경은 백설이의 보드라운 털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백설의 조그만 얼굴이 스르륵 바닥으로 붙고,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감겼다. 턱 아래에 깔린 발바닥을 찾아서 만지자 끄응, 소리를 내며 숨겨 버렸다.
“알았어. 안 할게. 자, 코오 자.”
우경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우경을 뒤흔들었다. 몸을 다시 둥글게 말았다.
‘연우경 씨가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온다면, 그러면…… 아마 뺨을 후려칠 테니까.’
남자는 우경을 유혹하지 않았다. 단선적인 욕망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의 욕망은 사막처럼 뜨거워, 목이 타고 입술이 말랐다. 창날 같은 욕망으로 우경을 겨누고서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팽팽하게 힘의 균형을 유지하던 넥타이처럼…….
그는 적나라한 욕망을 감추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언젠가 그 창날에 우경이 스스로 몸을 꿰어, 물고기처럼 펄떡거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경은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몸을 더 작게 말면서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눌렀다.
우경의 스물여덟 해 인생은 규칙을 지켜 쌓아 올린 벽돌 같았다. 붉고 아름다운 벽돌집을 지어 올린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추위가 스미지 않아, 따뜻하고 안전한 집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태준섭은, 그의 욕망은 바르게 정돈된 스물여덟 해와 우경을 둘러싼 사소하고 소중한 모든 것들을 단숨에 깨부수어 버릴 것이다. 우경은 기꺼이 그 욕망에 굴복하고 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