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7화 (7/23)

7장

주말이 덧없이 흘러갔다.

준섭은 주말 동안 골프 약속 한 번, 식사 약속과 술 약속 세 번이 있었고, 송백재 가족 모임은 일요일 저녁이었다. 송백재의 다이닝룸은 수천 번을 드나들고, 가족과의 저녁 식사는 수백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번 주는 중국요리 풀코스였다.

전직 호텔 수석 주방장이 다이닝룸으로 와서 인사를 하고 에피타이저를 서빙했다. 제 앞으로 서빙된 음식은 절대 남기지 않는다. 꼭꼭 씹어 먹는다. 그어진 선을 넘지 않는다. 선 너머의 시선도 말소리도 경멸도 냉대도 파도와 같은 것이다. 넘실거리지만 발끝에 힘을 주고 버티면, 적시기만 할 뿐 파괴하지는 못한다.

이섭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눈 같은 웃음이다. 준섭은 눈을 싫어한다. 질색이다. 이섭은 눈처럼 희고, 눈처럼 차고, 눈처럼 위선적인데 웃음은 눈의 결정처럼 반짝일 때가 있다. 서우는 그런 이섭을 보며 껄껄거린다. 서우는 여전히 회장에게 빌빌대는데 이섭은 그 웃음으로 회장을 사로잡는다. 회장이 눈을 초승달같이 만들고는 이섭에게 무어라 말을 한다. 선애가 손을 모으며 고상하게 웃었다. 아버님, 하면서 회장에게도 나긋나긋 버드나뭇가지같이 말을 건넨다. 이섭을 향한 보호막, 절대적 희생과 인내심이 만든 보석 같은 모정이다. 보지 않고도 보인다. 긴 세월 송백재 다이닝룸을 견디다 보니 마음의 눈이 떠진 건가. 이마가 따끔해서 고개를 들어 보니 수진이다.

“언제나 잘 먹네요. 그래서 그렇게 잘 뛰나. 회사 구석구석을.”

준섭이 싱긋 웃었다.

“맛있어서 잘 먹어. 뛰는 건 원래 잘 뛰고.”

송백재를 나와 집으로 들어가면 모조리 게워 낼 음식들이다. 목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짐승처럼 쭈그리고 앉아 짐승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면서 게워 내야 움직일 수가 있다. 열아홉 겨울, 눈이 무척이나 많이 내렸던 날, 추위에 내장이 얼어붙었던 저녁이 처음이었다. 송백재에서 식사를 한 그날부터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준섭은 먹었던 음식을 모조리 게워 내고 세 번 양치질을 하고 얼굴과 몸을 씻고, 트랙슈트를 입는다. 모자를 눌러쓰고 뛰기 시작한다.

강변을 따라 뛰는 동안 러닝크루 무리가 지나쳤다.

“같이 뛰어요.”

한 명이 소리를 지르자 여럿이 합창을 했다.

모자를 눌러쓴 준섭은 고개를 저었다. 무리들의 화려한 형광빛 운동복이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리며 멀어졌다. 두 번 더 다른 러닝크루를 만났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그룹이 메아리처럼 구호를 외치고 방향을 바꾸어 준섭을 비켜 갔다. 준섭은 홀로 묵묵히 달린다.

이어폰을 꽂지 않은 귀로 온갖 세상의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물러났다. 달리다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파도가 된다. 덮치지만 머무르지 않고, 휩쓸리지만 않으면 그대로 남겨 둔 채 물러갈 뿐이다.

몸이 뜨거워지고 땀이 흐르고 땀이 흐르는 눈을 닦으며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은 거대한 심장이 된다. 오로지 산소를 갈급하는 본능만이 남은 육체가 더없이 정직하다. 뇌가 날아가 버리는 듯한 기분이 좋아 준섭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뇌가 없는 준섭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과거를 떠올리지 않고 반복하여 가정하지 않는다.

최초의 독사과를 먹던 날, 준섭은 알았다. 아빠가 필요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본인을 지칭하는 것임을. 그날 바로 알았는지 그다음 날인지 어쩌면 한 달 후쯤인지 모르겠지만 준섭은 알 수 있었다. 서희에게 말했어야 했다.

‘엄마를 배신한 아빠 따위 필요 없어요.’

아빠의 큰 웃음소리가 좋고, 아빠와 같이 타는 자전거가 좋고 내 아들, 부르며 달려오는 커다란 몸이 좋았다. 둘이 엉겨 붙어 웃고 있을 때면 엄마도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믿었다. 준섭은 다만 미끼였고 덫이었고 서희를 옥죄는 목줄이었다. TK의 태서희,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유산을 강지욱은 결코 놓을 생각이 없었다.

태시환의 독사과는 횟수를 반복하며 점점 더 달콤해졌다. 값비싼 옷과 구두, 책과 전자기기들, 학교로 오는 기사 딸린 고급 차량, 학교 음악 선생님까지 한 번만 켜 봐도 되겠냐고 부탁했던 첼로와 일류 개인 교사들. 오로지 준섭에게만 해당되는 사치였다. 서희와 지욱은 여전히 가난보다 좀 나은 정도의 빠듯한 생활이었다.

몇 번이고 되돌려 생각했다. 엄마에게 그날부터 다 알고 있었다고. 아빠를 버리라고 말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렇다면 엄마는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었을까.

그런 상황에서 서희의 백혈병 재발은 당연한 수순 같았다. 준섭이 주니어 스쿨로 진학하고 1년쯤 지난 무렵이었다. 태시환은 그러고도 한참을 딸의 발병을 몰랐다. 눈이 뒤집혀 서희를 납치하다시피 데려가 병원에 넣었을 때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악화된 상태였다. 서희는 오로지 태시환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철저하게 보호되었다. 강지욱은 매일 병원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준섭에게 주어지던 독사과도 하루아침에 끊어졌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여 서희를 본 건 3주 만이었다.

서희보다 한참은 더 큰 준섭에게 서희가 물었다.

“준아, 엄마 이혼할까 봐. 우리 준이 아빠 없어도 괜찮을까.”

계절을 바꾸면서도 진전이 없는 지루한 이혼 소송을 하는 동안 서희의 병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태 회장은 이혼에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고, 강지욱은 TK와 태시환을 흠집 낼 수 있는 사소한 루머부터 치명적인 폭로까지 차곡차곡 장전하고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도 아니고, TK를 상대로 턱도 없는 일이었지만 이혼 소송의 결과를 늦추는 데는 충분한 역할을 했다.

눈으로 세상이 뒤덮였던 겨울날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손으로 찢어 낸 솜사탕처럼 커다랗고 포근했다.

“눈이 많이 와요. 화이트 크리스마스예요.”

병원 창 너머 화려한 장식으로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준섭이 말했다.

“침대 좀 세워 줄래. 나도 보고 싶어.”

준섭은 서희의 침대를 세우려다 말고 서희를 안아 올렸다. 중학생이었지만 발육이 빨라 이미 웬만한 성인 남자의 몸을 가진 준섭에게 서희는 너무 가벼워 꼭 인형을 드는 것만 같았다. 서희의 생명이 빠져나간 흔적 같아 가슴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준섭이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창 가까이에 가면 찬 기운이 서희의 몸으로 스밀까 두려워 준섭은 침대 옆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좀 보여요?”

“응, 보여.”

“더 높이 올려 드려요?”

“아니, 창 쪽으로. 응?”

준섭이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엄마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괜찮아.”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 줄을 신경 쓰며 준섭은 휠체어에 서희를 앉혔다. 머리에 쓴 털모자를 한 번 더 고쳐 씌워 주고 카디건을 환의 위에 덧입히고 무릎에도 담요를 덮고 천천히 휠체어를 움직였다.

창가에서, 창 너머로 눈에 잠기는 뉴욕을 바라보면서 서희가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목울대를 누르는 울음덩어리 때문에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서희가 더 가까이 와 보라 손짓했다. 몸을 기울이자 손을 들어 젖은 얼굴을 어린애 다루듯이 감싸 쥐었다.

우리 아기.

내 아기.

서희가 작게 웃었다.

“울지 않으면 산타클로스가 올 거야.”

준섭은 소리 내어 울었다. 무릎이 꺾여 바닥을 찧었다.

“엄마, 내가…… 내가 잘못했어.”

“무슨 말이야.”

“내가, 내가…….”

그때 아빠가 필요 없다고 했어야 했어. 아니, 내가 없었다면,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사라져 줬더라면. 그랬다면 좀 더 빨리 엄마가 할아버지한테로……,

그랬으면 엄마가 살 수 있었을 텐데.

나 때문에, 모두 다 나 때문에…….

좋은 아빠가 필요한 사람은 엄마였는데.

준섭은 그저 서희의 몸에 얼굴을 묻고 울기만 했다.

울음으로 흔들리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희가 울면 안 돼. 내 아기. 중얼거렸다.

“준아, 얼굴 좀 보여 줘.”

환자복 주머니에서 부드러운 면 손수건을 꺼내어 눈을 닦고 코를 닦아 주며 서희가 다시 말했다.

“울지 마.”

“산타는, 없어요. 신도…… 없어. 하늘도 없어! 다 없어! 내가 얼마나 기도했는데. 내가 얼마나…….”

엄마를 빼앗아 가지 말라고. 엄마를 살려 달라고. 뭐든 하겠다고. 내가 무엇이든 하겠다고…….

“준아.”

서희가 흐리게 웃었다.

“엄마가, 다 해 줄게. 우리 준이 수호신도 되고, 하늘도 되고…….”

“엄마…….”

고개를 젓는 준섭을 향해 서희가 짐짓 크게 웃었다.

“몰랐어? 엄마가 산타야. 준이 선물도 줄 거야.”

서희는 준섭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아빠한테도, 할아버지한테도.”

준섭은 땀으로 흠뻑 젖은 운동복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준섭은 눈을 감았다. 근육은 서서히 이완되었지만 극도의 흥분을 경험한 심장이 아직 별개의 생명체처럼 간질간질거린다. 입을 벌리자 혓바닥 위로 더운 물이 쏟아진다. 아무리 뜨거운 물 아래 있어도 눈을 맞는 듯 춥다. 콜록 기침이 터졌다. 입을 가리며 물줄기가 흐르는 감각에 몸을 떨며 준섭은 여자를 상상했다.

반복되는 기억에 머리를 날려 버리고 싶은 밤, 지긋지긋한 추위에 내장이 얼어붙는 밤.

이런 밤, 안고 싶은 여자다.

* * *

준섭은 본부장실에 앉아 모니터에 띄운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그룹이 후원하는 환경 미술 대회.

이섭이 아이들 사이에서 눈의 결정처럼 반짝이며 웃고 있다. 그 웃음을 프레임에 잡았을 여자의 표정은 어땠을까.

하나뿐인 지구, 함께 살아갈 환경, 지속 가능한 발전…….

이섭의 웃음소리가 만드는 환청 때문에 글자들이 춤을 춘다.

출장을 마치고 다음 월요일, 홍보실 유 실장이 말했던 CSR이었다. 연우경이 홍보실로 오기 전에 기획했던 일이라고도 설명을 더했다. 그룹 이미지 차원에서 본부장님이 대회에 참석하여 간단하게 연설을 하고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라고 답했더니 연우경이 며칠간 에이블과 홍보실을 오가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올려다보자니 유 실장이 시선을 맞춘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준섭의 표정 너머 마음을 읽고 싶어 하는 눈이었다.

“그러시지요.”

준섭은 짧게 답했다.

환경 미술 대회는 태시환 회장이 경제인 모임에 준섭을 수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자연스레 이섭에게로 넘어갔다. 준비된 연설도, 사진도 이섭이 대신했다.

출장 이후, 여자의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꼬박 일주일째다. 짧게 두 번, 보고하러 들어왔는데 눈을 맞추지는 않았다. 내주에 있을 연설문 초안은 이메일로 도착했고, 수정 사항도 메일로 보냈다.

털을 바싹 세운 토끼처럼, 여자는 준섭을 경계했다. 손이라도 뻗는다면 주먹을 쥐고 소리라도 지를 것만 같았다.

숫제 난봉꾼 취급인가.

준섭은 모니터 화면을 내렸다.

양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려 열 손가락을 잠시 머리칼에 묻었다.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뜨고 서류철을 펼쳤다.

* * *

이른 오전이었다. 이섭이 회의에 들어가 있는 동안 선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리턴콜을 했는데 선애는 애매한 말만 몇 마디 하고는 통화를 마치려 했다.

“어디에요? 집 아닌 거 같은데.”

- 절에 잠깐 왔어. 스님 좀 뵈려고.

선애는 외할아버지 제사를 모신 이후, 가끔씩 절에 다녀오곤 했다. 선애가 용건 없이 오전 시간에 전화를 하는 일은 잘 없었다. 이섭이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저랑 점심하실래요?”

- 아냐, 바쁜데. 내일 집에 올 거잖아. 그때 봐.

“오늘 점심도 같이 먹죠. 엄마.”

엄마라는 말에 선애가 웃었다.

- 응, 응. 그럼, 서정 갈까?

선애가 가는 절과는 가깝고, 회사에서 거리가 좀 되는 곳이다. 규모가 아담하고 조용한 분위기이기도 하고 사찰 음식을 기본으로 하는 한정식이라 자극적이지 않은 채식을 즐기는 선애의 입에 맞아 좋아하는 한식당이다. 하지만, 이섭과 약속을 잡으며 굳이 서정을 지정한 뜻은 회사 근처로 오기 싫다는 의미이다. 태서우 부회장을 비롯한 여러 임원진들까지 아무에게도 눈에 띄고 싶지도 인사를 나누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후 미팅이 몇 시더라. 이섭이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며, 계산을 마치기 전에 흔쾌히 답했다.

“좋아요. 빨리 갈게요.”

- 아냐, 절에서 좀 늦을지도 몰라. 천천히 와. 오래 붙잡지 않을게.

차에서 내려 걷는 걸음이 바빴다. 좁은 골목 뒤편으로 자리 잡은 오래된 한옥으로 들어서며 이섭은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 지금 서정 도착했어요.”

- 응, 그래 안쪽으로 들어와. 나 와 있어.

그럴 줄 알았다. 늦을지도 모르니 천천히 와, 라는 덧붙임은 괜한 소리였다.

선애는 서너 명이 쓸 수 있는 작은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이섭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환한 웃음과는 다르게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혹시…….”

불면증이 더 심해진 건가 물으려다가 이섭은 말을 돌렸다.

“혹시 많이 기다리셨어요? 서둘러 오려고는 했는데.”

“아니야, 괜히 바쁘게 왔구나.”

선애가 알이 작은 뿔테 안경을 벗으며 말햇다. 흘끗 보니 앞에 펼쳐져 있는 건 CS그룹 경쟁사 신문이다.

“뭘 그렇게 열심히 읽으셨어요?”

“아, 이거…….”

선애가 신문을 접어 한쪽으로 밀어 두며 설명했다.

“인터넷으로 봤는데 미래 산업 테마 기획이 좋더라. 요즘 들어 전반적으로 분위기도 젊어진 것 같고. 종이로 보고 싶어서 사 오라고 했어.”

이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은 선애의 좌절된 젊은 날의 꿈이다. 어쩌면,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불가능할 것도 없지.

“뭐 드실래요?”

이섭이 메뉴판을 끌어와 펼치려는데 선애가 말했다.

“내가 미리 시켜 두었어. 간단히 빨리 먹을 수 있게.”

“좋죠.”

이섭이 싱긋 웃었다.

이섭이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빙이 시작되었다. 음식은 디저트만 제외하고 식전 죽부터 찌개까지 순서 없이 한꺼번에 차려졌다. 빨리 먹고 갈 수 있도록, 그리고 말을 나누는 동안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선애가 미리 요청했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걸까.

이섭은 삼색전, 죽순 버섯 잡채나 청포묵 무침을 일부러 느리게 하나씩 집어먹었다.

“절엔 무슨 일로 가셨어요? 외할아버지 제사도 한참 남지 않았어요?”

“아니, 제사 때문은 아니고. 전에 스님이 약사대불전에 불사 말씀하셨던 거 생각나서.”

“약사대불이요?”

“응, 환자들 있는 집에서 쾌유발원한다고.”

“외할머니 기도 올리시게요?”

선애가 조금 머뭇거리더니 말을 꺼냈다.

“오빠가 아프대.”

“네? 얼마 전에 뵈었을 때는.”

CS미디어 그룹 회장이자, 이섭의 큰외숙부는 일전에 CS애드 기업 광고 건으로 잡음이 생긴 후 이섭이 직접 찾아 뵈었다. 선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고, ……작은오빠.”

이섭이 젓가락을 내리고 선애를 쳐다보았다.

“혹시, 미국에 계시는?”

“응, 맞아. 선중 오빠.”

선애도 노란 호박죽을 한술 뜨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검사 결과 나온 지는 한참인 거 같은데, 나는 어제야 들었어.”

“많이 안 좋으세요?”

“일단은 수술할 거라고 하네. 열어 봐야 안대. 얼마나 제거할 수 있는지.”

선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언가 말을 더 하려다가 멈추고 물수건을 집어 손을 한 번 더 닦았다. 긴 한숨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걱정이시겠어요. 제가 좀 알아볼까요. 미국 병원이라도.”

“아냐, 네가 무슨. 괜히 말했다. 못 들은 걸로 해.”

선애가 김이 오르는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떠올렸다.

“맛있다. 여기 된장이 맛있어서 찌개 깊은 맛이 달라. 얼른 먹어.”

“외할머니는…….”

“모르셔. 안 그래도 하루 반짝하면 사흘은 누워 계시는데, 가 보지도 못할 미국 얘기를 어떻게 하니. 외할머니 병도 다 오빠 그렇게 되고 마음 아려서 얻은 건데.”

“그럼 외숙부님은?”

“큰오빠가 병원 쪽엔 이야기를 넣었나 봐. 더 좋은 의사도 알아본다고 하고, 그래도 큰오빠가 회사를 비우고 갈 처지는 아니고.”

선애가 조금 한숨을 쉬고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올케언니는 작은애 혼사가 있어 바쁘고, 올케언니가 가서 또 뭘 하겠어. 얼굴 몇 번이나 본 사이라고…….”

“결국 아무도 못 가네. 엄마가 다녀오세요.”

이섭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밥을 크게 떠먹었다.

하아, 선애가 입을 벌리고 자조했다.

“내가 어떻게 가.”

“표 끊어 드려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네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뭐라고 말하면서 아버님 허락을…….”

선애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른거리는 해묵은 분노를 감추며 말을 끊었다.

“그만두자. 선중 오빠 이야기를 아버님이랑 상의하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럴 거 뭐 있어요. 몇십 년 전 이야기인데. 엄마는 너어무 예민하더라.”

이섭이 의도적으로 심술을 담아 말했다. 새초롬해진 표정으로 쳐다보는 선애를 모르는 척하고 두부까지 퍼서 찌개를 떠먹고 마른 가지나물을 집어 올리는데 선애가 못 참겠다는 듯이 내뱉었다.

“뭐가 예민해?”

“그렇잖아요. 그 부부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지금 서른넷입니다. 나랑 나이가 같고, 그러니까 그 일은 34년도 더 된 일이에요.”

“말 잘했다, 그래. 내가 이 집안 들어온 지도 34년이야. 34년 동안 난 태서희 코빼기도 본 적 없어. 그런데 왜 대체, 매일 같이 산 거 같니? 살아서 15년, 죽어서 19년, 태서희가 단 하루도 이 집안 송백재에서 없었던 적이 없어. 죽어서 더 질겨졌어. 19년째 지독하고 끈질긴 망령이지. 징글징글해.”

“어머니.”

이섭이 젓가락을 놓으며 선애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니 할아버지는 뭐가 그리 애달파서 그러신다니? 태서희 인생이 가엾어서? 천만에. 걘, 죽고 못 사는 남자랑 도망쳐서 살아 있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했고, 죽어서도 하고 싶은 거 다 해. 난 살아서도 죽어서도…….”

“어머니.”

후우……. 돌아서서 분명히 후회를 할 선애의 말을 끊고는 이섭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천천히 바로 폈다.

“그래, 내 이야긴 그만두자. 하지만, 오빠는…….”

선애는 울분이 가라앉지 않아 입술을 실룩였다.

“선중 오빠. 이렇게 살 사람 아니야.”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거 뭐 있어요. 지금도 편찮으시지만 않으면…….”

“미국 시골구석에 처박혀서 홀로 늙어 가며 교수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선중 오빠가 TK든 CS든 맡았어야 했고, 아니, 선중 오빠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한국에만 있었어도……. 그래, 교수를 해도 모교에서 하고 있었으면 지금쯤 못해도 부총리고, 장관이야.”

바르르 떨며 소리를 높이는 선애를 이섭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기왕 쓰는 거 더 써. 왜 장관이고 부총리예요. 대통령이지. 생각만 해도 좋네요. 잘못했네. 막내 고모가.”

선애가 샐쭉하게 고개를 틀고는 차를 따라 마셨다. 이섭이 좀 달래는 투로 말했다.

“가엾다 그래요. 영부인 자리를 차고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잖아요. 고생만 하다가.”

“결혼식 날이었어……. 그 수모를 우리 집안에, 그 착한 선중 오빠한테 주고, 한국에서 얼굴 들고 못 살게 만들어 놓고……. 그래도 오빠는 어떻게든 찾아와 보겠다고 미국까지 갔는데…….”

선애가 손수건을 꺼내어 눈자위를 눌렀다.

집안끼리 정해진 결혼이었다. TK와 CS의 결합은 정략결혼의 정점과도 같았다. 너무나 완벽해서, 선애조차 선중에게 그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태서희가 결혼식장에서 사라진 일로 선중의 내상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유달리 선중과 우애가 깊었던 선애도 한참 후에 알았다.

일간지 수습기자 생활은 끔찍하게 바빴고, 그런 중에 지원했던 언론미디어 석박사 통합 과정 합격 통지서를 들고서 선애는 미래에 대한 설계에 취해 있었다. 선애가 설계하는 미래에 한 남자도 있었다. 당시 선애는 선중을 섬세하게 살필 만큼 물리적인 시간도 심적인 여유도 없었다.

태서희의 배신으로 두 집안의 체면은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너덜너덜해졌다. 이런저런 수습 과정은 극도로 예민해진 양측의 오해와 불신을 부풀렸다. 악화된 감정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일촉즉발 최악의 사태만 걱정하느라 피해 당사자인 선중은 뒷전이었다. 뜻밖의 해결책은 선애였다.

말도 안 된다며 그럴 수 없다고 거부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선중을 탐낸 태시환 회장 때문에 태서우가 입장을 접었던 것이라며 최초 집안 혼사의 주인공은 서우와 선애였다고 못 박았다. 가족 상견례 자리에서 끈질기게 달라붙던 서우의 시선이 떠올랐다. 이미 여자관계는 이런저런 떠도는 소리가 적지 않을 만큼 조심성이 없는 남자였다. 그 시선이 징그러워 선애는 내내 딴청을 피웠다.

화장실로 빠져나가 손을 세차게 씻고 있을 때, 복숭앗빛 원피스를 입은 서희가 다가왔다.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서희가 흰 뺨에 보조개를 패며 미소 지었다. 비스듬히 돌아보자, 물기 남은 차가운 손을 감싸 쥐며 ‘미안해요’하고서 작게 말했다. 조금 슬프게 그리고 안타깝게 웃는데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예뻤다. 그래서 그저 고마웠다. 따뜻하고 배려심 깊고 아름다운 서희를 보니 왜 태 회장의 집착과 사랑을 독차지했는지 수긍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선애는 그 사과의 의미를 몰랐다. 악어의 눈물 같은 위선이었다. 진창으로 밀어 버리기 전 찰나의 죄책감 같은 것.

태서우는 예전에도 지금도 태시환의 눈에는 한참 모자란 이였다. 모자라다 모자라다 채찍질하다 보니 열등감이 빚어낸 비뚤어진 자기방어로 과한 자만감과 바닥을 치는 소심함이 널을 뛰었다. 결국 지금까지 아비의 비정한 과욕으로 인해, 타고난 그릇만큼도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선애는 약혼식을 치른 날, 합격 통지서를 태우며 울었다. 스크랩해 두었던, 제가 쓴 기사들을 하나씩 던져 넣을 때마다 불길은 화르륵 솟았다가 잦아들곤 했다. 처음 썼던 기사는 마지막까지 쥐고 있어 구깃구깃했다. 동그란 구슬처럼 뺨을 구르던 눈물이 뚝뚝 떨어져 구겨진 신문 조각을 적셨다. 기척 없이 다가와 머리 위로 가만히 손을 올리고서 몇 번이나 쓰다듬어 주던, 나란히 앉아 한참을 울도록 어깨를 내어 주었던 선중을 기억한다.

“미안하다.”

선중이 사과했다.

“신문 따위 다시는 보지 않을 거야. 아냐, 두고 봐. 나도 도망쳐 버릴 테니까!”

선애는 선중의 상처를 헤집는 소릴 하면서 억지만 부렸다.

결혼이 진행되는 동안 불편하니 좀 나가 있겠다던 선중은,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도 지원도 끊고 미국 남부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스스로를 완전히 고립시켜 버렸다. CS와 TK를 포함한 한국의 재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원래의 자리가 희미한 흔적으로 남을 때까지 모든 압력과 회유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게 뭐라고, 그 여자가 뭐라고. 선중 오빠 본인 인생을 그렇게…….”

선애는 입술을 문지르며 이어지는 험담을 씹어 삼켰다.

태서희는 결혼식 당일 사라졌다. 감쪽같이 안심시켜 놓고서 미용실에서 식장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없어져 버렸다. 영화처럼 드레스를 입고, 아니, 미용실 화장실에 드레스만 남겨 놓고 달아난 신부였다.

선중 오빠를 식장에 덩그러니 세워 놓고서…….

서희의 선택은 강지욱,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둔 전직 배구 선수였다. 전성기 때에도 잘난 인물 외엔 이렇다 할 경기력도 보여 주지 못했던 2군 선수, 불성실하고 난잡한 생활이 실상 건달과도 다를 바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감히 선중과 나란히 비교하는 것조차 아이러니한 인간. 선애는 문득 떠오르는 얼굴에 이를 악물었다.

“그 애가…….”

선애가 분노를 숨기지 않는 눈으로 이섭을 쳐다보았다.

“네?”

“강씨, 그 애가.”

“아……. 네.”

강지욱의 아들 태준섭을 지칭함이다.

“그 애가 감히 CS를 건드려?”

“그런 건 아니에요.”

이섭이 매끈거리는 오이묵을 능숙하게 집어 올렸다. 젓가락질에 집중하는 척 선애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기업 광고를 기어이 경쟁 PT까지 시키고선 날렸다면서! 감히 그 애가, 나를 능멸하는…….”

“확대 해석이십니다.”

이섭이 미끄덩거리는 오이묵을 삼키고는 젓가락을 내렸다.

“거기에 왜 어머니를 넣어 해석하세요. 고작 광고 하나예요.”

여전히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인 선애를 보며 이섭이 조금 웃었다.

“그러지 마세요. 어울리지 않아요.”

이섭이 누그러진 음성으로 설명했다.

“요즘 상황이 그랬으니까요. 불쾌한 면이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에요. VIP라인까지 보고 들어갔었고, 나오는 반응 보니 실보다 득이 커요.”

“너, 내 앞에서 그 애를 두둔하니?”

선애의 반응에 이섭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두둔은 무슨. 그 자식 살 떨리게 싫어요.”

“난 송백재 아버님 속을 알 수가 없어. 너 바짝 긴장해야 해.”

“설마, 제가 그 자식한테 밀릴까 봐서요?”

선애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테이블에 바짝 붙도록 상체를 기울이며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이섭아. 너 느긋하면 안 돼. 걘, 너처럼 바른 환경에서 제대로 자란 애가 아니야. 그 애, 눈 좀 봐. 사람 여럿 잡아먹고도 잠잠한 우물 같은, 그 눈을 볼 때마다 나는 소름이 돋아.”

이섭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지만 선애의 분노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아직 젊은 애가 뭘 얼마나 겪었는지 눈이 어휴……. 강지욱한테……, 세상에 나한테는 건달 같은 인간이지만, 걘 제 친아빠잖아.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짐승보다 못한 놈 아니니. 끔찍하고 끔찍해.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사람 목숨값, 아니, 친아버지 목숨이랑. 어떻게 그러고서 TK 들어오고 송백재에 붙어 있니…….”

결국 그 말까지 뱉고서, 무섭게 굳어진 이섭의 얼굴을 보고서는 선애는 하지 않을 말이었다며 사과했다.

태준섭과 친부에 얽힌 비담은 이섭도 들어서만 아는 이야기다.

서희가 사망한 이후, 그의 외동아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친부가 어딘가 친척집에 숨겨 두었다는 소문만 돌았다. 서희를 이용해서 긁어내지 못한 TK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아들을 통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 계획이지 않겠냐는 추측도 신빙성을 더했다.

뜻밖에 태준섭의 친부는 준섭이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사망했다. 강원도 겨울 산에서 시신은 일주일이나 지나 발견되었다. 실족사라고 결론지어졌지만, 자살이었다. 이후로도 아들에 대한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TK의 골칫거리가 될 서희의 남편이 사망한 이후, 자연스레 아이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다.

대학 합격 발표가 있던 주였다. 주말 저녁, 송백재에서 가족 파티가 열렸다. 이섭의 Y대 합격 축하를 위한 파티였다. 이섭이 특히 좋아하는 가이세키 코스를 위해 일본에서 디쉬부터 음식 재료가 공수되고 쉐프가 직접 송백재로 출장을 왔다. 보석함처럼 아름다운 접시에 담긴 아뮤즈 부쉬가 서빙되었을 때였다. 회장의 비서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회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라 해라.”

더 이상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굴 오라시는 건지 다들 고개를 돌리다 한 번씩 시선이 어지러이 마주쳤다. 곧이어 다이닝룸 문이 열리고 이섭 또래의 아이 하나가 들어섰다. 아이의 짧게 자른 머리와 낡은 파카가 젖어 있었다.

다이닝룸 뒤편 넓게 트인 창 너머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기품 있는 자태로 서 있는 송백재 뜰이 동양 산수화 한 폭처럼 은은하게 눈에 잠겨 더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이섭은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또래 사내는 이섭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아이의 눈에 특별한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이섭보다 키는 조금 더 컸지만 몸집이 좋아 훨씬 더 커보이는 아이를 보며 이섭은 이유 없이 불쾌해졌다. 기다란 테이블 중앙, 회장의 자리 옆에 잠시 동안 아이는 서름하게 서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번갈아 가며 매질처럼 아이를 훑었다.

“인사하는 법 모르나.”

회장이 무뚝뚝하게 퉁박을 주자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

회장이 세차게 혀를 찼다.

“외투 벗고.”

부스럭거리며 아이가 파카를 벗자 녹은 눈이 물이 되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카 아래로는 싸구려 재질의 시골 학교 교복 차림이었다.

“안녕, 하십니까.”

“이름을 말해야지.”

“준…….”

“어머나 세상에! 너 준이니? 강준?”

지윤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지윤을 향했다.

“너 서희 아들이지? 대체 너 어디 있었니? 응? 얼마 만이야. 키 좀 봐. 세상에 그러고 보니 니네 아빠 판박이네. 어머나. 아까부터 어디서 봤다 봤다 했었지. 내가 얘 서희랑 미국 살 때 몇 번 봤다고 했죠? 잘생겼다고 했잖아. 어머나 준아. 몇 년 만이야. 이게.”

“준이 아니다.”

“네?”

회장이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름 말해 봐라.”

아이가 회장을 한 번 쳐다보았다. 어서, 하는 독촉을 받고서 아이가 말했다.

“태, 준, 섭입니다.”

“아버지? 어떻게 된 일이에요?”

지윤이 물었지만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서희 아들 맞습니까?”

태서우가 묻자 회장이 답했다.

“지금은 아이다. 태용우 아들이다.”

“누구요? 태용우라면 선산 사당 지키는 그 사람 말입니까?”

“맞다.”

선애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 그분 암이라고 그래서 사당 관리일도 쉬신다고.”

“그래. 자손 없이 죽게 돼서 내가 양자 삼으라 했다.”

회장이 마치 다음 가족 모임의 메뉴는 중식으로 정했다와 같은 통보를 하듯이 말하고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준섭아, 가져왔나?”

“네, 회장님.”

고개를 깍듯하게 숙이고 아이는 교복 안주머니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 속 두 번 접힌 종이를 펼치고 아이에게 암호 같은 말을 건넸다.

“약속 다 잘 지켰으니, 하나만 더 지켜라.”

“네, 회장님.”

회장이 제일 끝 쪽 자리 보조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로 가서 앉아라.”

이섭을 스쳐 지나며 아이는 다시 찬찬히 이섭을 살폈다. 이섭이 먼저 시선을 낮추었다. 흠뻑 젖은 아이의 양말이 보였다. 회장이 아이가 준 종이를 흔들었다.

“S대 경제학과 합격증이다. 준섭이가 머리가 좋다.”

이섭이 Y대 경영학과 1학년 2학기에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유학을 가 버린 이유였다.

귓속에 눈을 꽝꽝 뭉쳐 넣은 듯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지윤의 질문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회장의 답은 기억한다.

“용우 아들은 내가 거두기로 했다. 누구든 그 입 조심해라.”

태준섭은 우리 가족이지만, 영원히 가족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날 저녁 준섭에게 암호처럼 언급했던 회장의 약속. 그중 하나는 친부를 끊는 일이었다. 준섭이 친부를 죽인 것과 다름없다는 선애의 믿음이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다.

선애와 이섭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섭이 테이블 위 호출 버튼을 눌렀다. 기다렸는지 바로 디저트가 서빙되었다.

“시원하네요. 드세요.”

호박 식혜를 마시고, 호두 정과를 쓰게 삼키며 이섭은 억지로 굳은 얼굴을 풀었다.

* * *

‘너 밀리면 안 돼. 정신 바짝 차려. 무서운 애잖아.’

선애의 거듭된 당부가 귀에서 쟁쟁 울렸다. 이섭은 얼마 먹지도 않은 점심이 명치끝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결국 회사 건물 근처에서 차를 멈추게 했다.

“좀 걸어야겠어요.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걷는 동안, 양복 자락이 조금씩 날릴 정도로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불었다. 점심시간이 약간 지나긴 했지만 회사 근처로 갈수록 TK 사원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간간히 보였다.

이섭은 한 블록 아래에서 길을 건너고 건물 뒤편 이면 도로로 방향을 잡았다. 평소 다니는 정문이 아닌 뒤편의 작은 문을 통해 회사 건물로 들어섰다.

여전히 속은 갑갑했다. 소화제라도 먹어야 하나, 생각하며 몇 걸음 옮기다 말고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통로 근처에 크림색 카디건에 베이지색 슬랙스를 입은 여자가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여자와 간격이 몇 미터쯤인가, 이섭은 천장에 붙은 작은 조명등을 올려다보았다. 무대 위 배우를 보는 것처럼 여자의 모습이 너무 도드라져 보인다. 애매한 공간이라 평소에도 비어 있는 곳이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람이 나타나서, 그래서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니 CCTV 화면에서 잡혔던 장소도 이 근처인가 싶다.

녹화된 장면 속의 여자와 준섭이 저 자리쯤 있었지.

이섭은 여자를 향해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로 가기 전, 인사나 나눌 생각이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여자가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착각이 들 만큼 선명한 웃음이었다.

이섭은 눈을 찡그렸다. 젠장, 조명이 너무…….

이섭이 찡그리며 가슴 언저리를 문질렀다. 눈이 부신 건 조명 때문이고, 심장이 저릿한 건 소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제야 이섭을 발견했는지 여자가 목례를 건넸다. 이섭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여자의 얼굴엔 눈을 찡그릴 만큼 빛나던 웃음은 사라지고 사무적이고 정돈된 미소만 남아 있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저번 미술 대회, 오늘 기사 났더라고요.”

급하게 스케줄을 바꾸고 참석한 후에야 우경이 기획한 것임을 알았다.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슬며시 긴장되었고, 내내 그 상태였다. 정작 연우경은 차에서 내릴 때 여럿과 함께 인사를 했을 뿐, 대회와 식전 행사 진행 상황을 체크하느라 바쁜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짧은 개회사를 하는 동안 멀찍이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우경을 찾아낸 건, 순전히 시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기사 확인하셨군요. 비서실로 보내긴 했는데 아직 확인 못 하셨을 거라 생각했어요.”

우경이 반가운 내색을 하며 물었다.

“어떠셨어요? 혹시 맘에 안 드시는 부분이…….”

“아니요, 좋아요.”

이섭이 보기 좋은 웃음을 띠면서 물었다.

“연우경 씨, 지금은 무슨 일 하세요?”

“본부장님 스케줄 보면서 리서치하고, 내주에 중소기업 협력사 대상으로 연설 있어서 마무리하는 중입니다.”

“태준섭 본부장이랑은 일 할 만해요?”

“열심히…….”

그렇게 말하고는 우경이 조금 머뭇거렸다. 태준섭만 떠올리면 부끄러워하는 여자가 이젠 익숙할 지경이지만, 분명 지난번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준섭이 이 자식, 벌써 수작을 부렸나.

계획대로 순조로이 진행 중인데 묘하게 기분이 더럽다. 태준섭에 대한 보고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이섭은 화제를 돌렸다.

“뭘 보고 그렇게 웃어요?”

“아, 사진이요.”

“친구가 개그짤이라도 보내 줬나요?”

“아뇨, 이거. 엄마가……. 강아지 미용했다고.”

“오, 강아지? 무슨 종 키워요?”

“강아지 좋아하세요?”

“어릴 땐 많이 좋아했죠.”

우경이 내민 화면에는 새하얀 털을 길게 기른 풀코트 마르티스가 조그만 두상에 비해 제법 크다 싶은 붉은 공단 리본을 매달고서 우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예쁘다. 공주님이네.”

“네, 이름도 백설이에요.”

“백설 공주, 이름 기막히네.”

이섭이 화면을 넘기자 이번에는 기대와 다르게 강아지 발만 찍힌 사진이었다.

“아니, 이게 뭐죠? 예쁜 얼굴은 어디 가고 발바닥?”

“네, 백설이 발바닥. 제가 넘 좋아해요.”

“취향 특이하네. 왜 발을 좋아해요?”

“음……. 만지면 좋아요. 생각이 많아져서 생각으로 체한 거 같을 때 백설이 발바닥 만지고 있으면 다 잊어버리거든요.”

“신기한 효능이네.”

이섭이 피식 웃고는 화면 위에 손을 올렸다. 연핑크빛 살에 검은 점 다섯 개가 조르륵 반원을 그리고 쭈그러진 원이 그 아래를 받치고 있는 듯한 모양의 조그만 발바닥에 검지를 맞추었다.

“내 생각도 좀 가져가면 좋겠어, 백설 양 발바닥님.”

우경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진짜 소리까지 들리는 웃음이었다. 심장이 쿡 쑤셨다. 이 자리 조명 때문인가, 그래서 준섭이 자식도 그랬나.

“사진으론 효과가 없어요, 촉감이랑 냄새가 있어야 해요.”

우경의 말이 울렁거리며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섭이 가슴 중앙을 문질렀다. 우경이 빤히 쳐다보자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였다.

“오전에 커피를 마셨는데 계속 불편하네요…….”

“아아, 혹시 캡슐 초록색인지 확인해 보세요. 그거 너무 독해요.”

“그래요, 비서한테 확인해 볼게요.”

이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고는 급히 돌아섰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직원들이 흩어지며 길을 만들고 고개를 숙여 이섭에게 인사를 했다. 한참을 기다려야 1층에 도착할 것 같아, 엘리베이터 위 액정 숫자를 보며 후욱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심장은 불편하다.

문이 열리자마자 이섭이 제일 먼저 탔는데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던 건지, 크림색 카디건을 입은 그 여자도 사람들에 섞여 들어왔다. 이섭은 목례하는 여자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19층에서 여자가 먼저 내리며 인사를 했던 것 같은데 보지 않으려 했다. 점심 먹은 게 단단히 체했다.

준섭은 느릿한 걸음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스치며, 우경이 하하 웃던 모습을 떠올렸다. 시선 마주치는 것조차 인색하기 짝이 없던 여자가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더 황당한 건 태이섭.

기억 회로를 거꾸로 돌려 장면을 재생시키던 준섭이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비스듬히 뒤처져 따라오던 우식이 준섭을 흘끗 쳐다보았다.

“웃겨서 말야.”

“네?”

“태이섭 상무.”

“네에.”

우식은 모음을 길게 빼어 내면서 의미가 불분명한 답을 했다. 준섭이 우식에게 물었다.

“네 눈엔 어떻게 보여?”

“뭘 말씀하시는지…….”

우식이 곤란한지 뒷목덜미를 쓱 긁었다. 고치라고 해도 고치지 못하는 습관이다.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우물쭈물 덧붙였다.

“본부장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제가 보기에도 연 팀장이…… 홍보 회사 다녀서 그런지 사교성도 좋고……, 말을 되게 상대방 기분 좋아지게 잘하잖아요. ……미인이시기도 하고.”

“글쎄, 난 모르겠던데.”

이섭도 우경에게 반한 것 같다는 소리를 빙빙 둘러 하느라 우식은 연우경 칭찬만 늘어지게 했다. 우식은 준섭의 큰 보폭을 따라오며 뭔가 말에 실수를 했다면 만회를 하겠다는 의지를 더했다.

“그건 제가 보기엔 연 팀장이 본부장님을 훨씬 더…….”

우뚝 멈춰 선 준섭을 향해 우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훨씬 더, 뭐.”

“그, 그러니까요. 훨씬은 아니고.”

“뭐.”

“조금 더……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준섭이 이만 가 보라 손짓을 하고 돌아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몇몇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하나의 충동에 집착했다. 귓등이 붉어진 태이섭, 그런 이섭 앞에서 다정히 머리를 맞대고 하하 웃던 우경이 어른거렸다. 여태껏 여자관계가 백지처럼 클린한 자식이었다. 때론 최하영, 아니, 최하영이 업고 올 주식에 대한 열망이 그토록 큰 것인가 싶다가도 타고나길 여자에 대한 관심이 적은 편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 녀석이 완전히 얼이 빠져 우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를 나한테 밀어 넣을 만큼, 최하영이 불안한가.

이섭의 불안은 최하영과 준섭의 결혼 확률이 성큼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띵, 33층에 도착했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가며 그날 밤 자신을 뒤따르던 여자의 숨소리를 떠올렸다. 기억만으로도 몸속 어딘가 숨겨진 스위치가 올라가는 기분이다. 건성으로 비서의 인사를 받고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데스크 앞에서 준섭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물린 입에서 비어져 나오던 숨결이, 이에 긁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아랫입술이, 간격을 두고도 남김없이 전해지던 떨림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신체의 감각이 가파르게 예민해져 이가 저절로 맞물렸다.

이섭의 붉어진 귓등과 완전히 해제되어 얼간이 같던 표정이 떠오른다. 송백재에서 경례를 붙이던 뻔뻔한 모습도.

유치한 베팅이다. 곱게 자란 태이섭은 결코 얻어 갈 것이 없는 베팅.

좋아, 태이섭. 네 소원이라면 내가 기꺼이 증명해 줄게.

준섭이 주먹 쥔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천천히 몸을 펴고 서랍을 열어 구겨진 노란색 타이를 꺼냈다. 책상에 펼쳐 놓고 손가락 세 개로 느리게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여자가 꾹 쥐어 주름이 잡힌 부분을 반복적으로 문질렀다.

태이섭, 네가 걸어온 베팅은 안타깝게도 승자 독식이야.

순진한 도련님이지. 그걸 여태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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