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새벽부터 빡빡하게 스케줄이 진행되었다. 송백재 브리핑, 반도체 담당 본사 임원진 미팅, 전략기획본부 정기 회의를 연이어 마치고 준섭은 차가운 물 한 잔을 가지고 오라 일렀다.
“얼음 가득 넣어서 부탁해요.”
비서가 얼음이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며칠 사이에, 벌써 소슬한 가을 날씨였다.
준섭은 각이 살아 있는 얼음을 혀 위에서 굴렸다. 내장을 꺼내어 뜨거운 태양 아래 노출시키고 있는 것처럼 깊숙한 곳에서부터 달아오르는 열기가, 목을 간지럽혔다. 회의를 하는 중에도 사이사이 물을 마시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하곤 했다.
준섭에게서 열망 어린 눈을 떼지 않던, 발개진 목덜미를 하고서도 준섭의 눈을 피하지 않던 여자가 떠오른다. 그 목은 한 손으로 움켜쥘 수도 있을 만큼 가늘었다. 붉어진 목을 한 손으로 누르고, 데워진 몸을 겹치면 어떤 느낌일까.
33층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연우경을 본 순간, 머릿속에서 찰칵하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기분이었다. 섬광 뒤에 따르는 암흑 속에 눈이 멀어 버린 척, 회의 따위 30분은 늦춰 버리고 싶었다.
‘내가 자른 거 아니에요.’
‘정말이라니까. PT에서 찾았는데, 연우경 씨를 내내 찾았어.’
그렇게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왜요. 화난 목소리로 물으면 능청스레 답을 했겠지.
‘내 이름 물었잖아.’
‘이미 알고 있는데요? 태준섭 상무님.’
‘상무는 뗍시다. 연우경 씨. 소개하죠. 내 이름은 태준섭이에요.’
젠장, 태이섭 이 새끼.
‘몹시 맘에 들 거라고 했잖아. 여기엔 말야. 그런 문구를 써도 돼. 무엇을 기대해도 좋다. 그 이상일 테니.’
송백재 주차장에서 빙글거리며 어설픈 거수경례를 하던 의미가 이거였나.
어디까지 알고서 연우경을 꽂아 넣었는지 모르지만…….
준섭이 픽하고 웃었다.
언제는 의미 따져 가며 주워 먹었냐고, 내가.
혁신전략기획본부실, 본부장 따위 무슨 의미인지 재지도 따지지도 않았지.
토사구팽, 사냥만 끝나면 곧 끓는 물에 넣어 삶아 먹힐 사냥개의 운명이라며 공공연히 떠들어 댄다는 걸 안다.
무슨 상관이람. 독이 든 사과를 넙죽넙죽 먹으며 독두꺼비가 되어 버린 지 오랜데…….
최초의 독사과를 먹은 게 몇 살이었더라.
준섭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20년이 훨씬 넘은 세월을 더듬었다.
학교에서 조금 일찍 돌아온 날이었다.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준섭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엄마아, 하고 크게 부르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방을 조심스레 뒤져 쿠키를 꺼냈다. 학교 급식 시간에 디저트로 나온 것이었다. 초코칩이 알알이 박힌 쿠키를 보며 군침이 돌았지만 엄마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 챙겨 왔다. 주방이나 거실에 엄마가 없는 걸 보니 분명 안쪽 침실에서 잠이 들어 있을 테다.
조심스레 침대로 가서 쿠키를 옆에 두고 엄마가 눈을 뜨면 서프라이즈! 귓속말을 해야지. 분명 엄마는 깜짝 놀라며 일어나서 꽉 끌어안아 줄 테니까.
준섭이 발소리도 나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 침실 문을 조용히 비틀어 열었다. 엄마 혼자가 아니었다. 침대 근처에서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침대에는 사진이 열을 지어 놓여 있었다. 엄마 앞에 버티고 선 사람이 사진을 하나 더 늘어놓았다.
“어떠냐.”
묻는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은 듯했다. 엄마가 고개를 떨어뜨리고서, 손을 들어 다른 쪽 팔을 문질렀다. 길게 숨을 내어 쉬고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뭐?”
남자가 화가 난 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준섭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막 방으로 들어가 엄마! 하고 부르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열린 현관문을 통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라 생각하며 준섭이 현관을 향해 갔지만 낯선 남자 두 명이었다. 두 명 다 처음 보는 한국 사람이었다. 말끔하게 양복을 입고서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 서너 개씩을 들고 있던 남자들이 준섭을 향해 인사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준섭이 다시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문틈으로 엄마의 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아빠가, 필요해요. 좋은 아빠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제발!”
준섭이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엄마아, 크게 부르며 다가가기 전 엄마가 먼저 달음질하듯 준섭에게로 왔다.
“준이, 언제 왔어? 응?”
얼굴을 부비고 꽉 끌어안는 엄마의 어깨너머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천천히 준섭에게로 다가왔다.
태시환을 그때 처음 보았다.
태시환은 인자한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준이, 잘생겼다.”
볼을 만지작거리며 준섭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태시환이 선언했다.
“내 딸, 서희를 꼭 닮아 잘생겼다.”
준섭은 옆에 선 파리한 안색의 엄마를 한 번 쳐다보고 그리고 다시 태 회장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거뭇한 눈자위를 눌렀다가 떼어 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어린 눈에도 서희와 태 회장은 호리호리한 몸이나 전체적으로 부드럽지만 예민함이 느껴지는 이목구비, 갸름한 얼굴선까지 꼭 닮았고, 저는 생김새가 완전히 달랐다. 회장이 억지로 웃음을 만들며 말했다.
“대답해야지.”
“……네.”
회장의 채근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준섭은 그저 답만 했다. 답이 시원찮았는지 회장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표면에 머무르던 인자함이 순식간에 걷히자 폭발적인 분노가 어른거렸다. 주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자, 회장이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지금은 구부러지고 줄어들어 준섭보다 키가 훨씬 작지만 그때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키가 후리후리한 성인 남자였다. 고개를 숙여 코앞에 얼굴을 디밀고서 회장이 말했다.
“버릇이 없구나. 감사 인사를 해야지.”
준섭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또.”
“하, 할아버지.”
회장이 손을 뻗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뒤쪽에 있던 사람을 향해 까닥 손짓을 했다. 양손 가득히 무언가를 들고서 젊은 남자 둘이 다가왔다.
“네 거다.”
준섭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이번에는 더듬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회장의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영리한 것도 서희를 닮았구나.”
회장이 설탕처럼 말했다. 설탕을 바른 독약이었다.
“다음에도 말을 잘 들으면 더 주마. 원하는 걸 생각해 놓으렴.”
서희가 치맛자락을 꾹 쥐고는 아버지, 자그맣게 불렀지만 회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고 집을 떠날 때까지 서희에게는 두 번 다시 눈길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준섭은 현관문이 닫히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다. 좁고 낡은, 팔뚝만 한 쥐가 천장 위에서 뛰어다녔던 그래서 한밤에 잠을 깨던 아파트의 초라한 현관문이 끼이익, 콰앙 하고 닫혔다. 그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준섭은 서희를 바라보았다.
“한번 열어 볼래? 와아, 이게 다 뭐야. 우리 준이 좋아하는 로봇도 있을까?”
서희가 쭈그리고 앉아 선물 상자를 봉투 속에서 하나씩 꺼내었다. 준섭도 옆에 앉아서 선물 상자를 풀기 시작했다.
변신 로봇,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최고급 미니 스포츠카, 친구 생일 파티에서 단 한 번 먹어 봤던 값비싼 초콜릿과 쿠키들…….
어린 신사를 만들기에 충분한 모직 더플코트, 재킷, 바지, 구두, 셔츠와 타이가 들어 있는 박스에는 프랑스 최고의 양복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서희가 구두를 꺼내고 옷을 펼쳐 사이즈를 확인하는 동안 준섭은 문득 고개를 돌려 침실 쪽을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침실 문틈으로 종잇조각과 찢어진 사진으로 어질러진 바닥이 보였다. 준섭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와 엄마가 이야기를 나눴던 곳이다.
“준아, 이것 좀 봐. 응?”
서희가 쪼그려 앉은 채로 돌아보다가 준섭의 시선이 머문 곳을 확인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급히 걸어가 방문을 꽉 닫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준섭은 닫힌 문 대신 서희의 낡은 조끼 주머니에 비뚜름히 꽂혀 있는 봉투에 시선을 두었다.
‘더 있구나. 찬찬히 잘 보렴. 그래도 아이에겐 필요한 사람인지.’
준섭의 머리를 쓰다듬기 전, 할아버지가 서희에게 주었던 봉투다. 준섭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봉투를 급히 구겨서 호주머니에 넣던 엄마의 표정을 되씹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닫힌 방문에서 흘러나왔던 대화를 퍼즐처럼 맞추었다.
‘아빠가, 필요해요. 좋은 아빠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제발!’
비명 같던 목소리였다.
“엄마, 아빠가…… 필요해?”
“응?”
서희가 눈을 크게 뜨고는 준섭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며 응? 다시 묻는 입술이 잘게 떨렸다.
“엄마의 아빠가 아까 할아버지야? 할아버지가 좋은 아빠야?”
서희가 아, 한숨처럼 내뱉고는 웃었다.
“응, 응. 엄마의 아빠. 좋은 아빠야. 엄마도 어른이지만 가끔은 아빠가 필요하지. 우리 준이 이렇게 좋은 선물도 주시고. 응?”
사진들은 아빠의 여자들을 담고 있었다. 끝없이 길게 늘어져 있던 사진의 열이 떠오른다. 한 장씩 늘어놓으며 이래도, 이혼하지 않을 테냐, 라고 물었겠지.
애초에 너를 사랑하는 놈이 아니라고 했지. TK만 노리고 너를 눈멀게 한 파렴치한 자식. 이 여자는 너와 만나기 전부터도. 새 여자도 있구나. 몇 명이냐, 대체.
칼날처럼 엄마의 마음을 찢으며, 말했을 테다.
그만해라. 이제 그만하고 돌아오라고.
서희는 어린 아들을, 아빠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아직은 너무 어려요. 아빠가 필요해요. 조금만 더.’
준섭은 컵에 남은 얼음을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찡한 냉기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잔상과 상념을 밀어낸다. 최초의 독사과를 받아먹던 천치 같은 아이를 지우고, 눈 밑이 검었던 엄마를 지우고…….
* * *
홍보실 한쪽 휴게 공간에 비치된 커피메이커 앞에 섰다. 우경은 투명한 정육면체 케이스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꺼내어 캡슐을 밀어 넣었다.
“초록색 캡슐. 그거 좀 독해요.”
우경이 돌아다보니 남자 직원이 개인 텀블러를 들고서 싱긋 웃었다.
“좀 진한 커피가 필요해서요.”
“그럼 제대로 고르셨어요. 저는 그 색깔 먹으면 심장이 약간 불편하더라고요.”
남자는 연한 크림빛 캡슐을 골랐다. 통성명을 했던가 싶다. 사원증에 걸린 이름은 최용원이다. 우경이 제 커피잔을 머신에서 빼어 내고 목례를 하고서 자리로 돌아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유 실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연 팀장, 지금 잠깐 회의할까요?”
유 실장이 우경을 향해서 빠르게 말했다.
출장에 동행하게 되었다는 보고에 유 실장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그렇군요.” 하고만 답했다. 제 전화번호를 어젯밤에 태준섭 본부장에게 알려 드렸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9시 30분쯤인가.”
우 실장이 우경이 정리한 자료들을 넘기며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본부장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좀 놀랐는데, 연 팀장 번호 입력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네, 어제 저녁 약속 후에 잠깐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그렇군요.”
유 실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앞으로 홍보일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물어보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적당한 답을 머릿속으로 고르고 있었는데, 유 실장은 반도체 현장 관련한 PR로 화제를 바꾸었다.
“반도체 공장 오늘 몇 시 방문이시죠?”
“10시 30분에 출발하시는 걸로 압니다.”
“연 팀장도 그러면 좀 서둘러 출발해요. 연 팀장 차 가지고 왔어요?”
“네, 내비게이션도 확인했고 조금 일찍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유 실장이 자료를 하나씩 짚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다시피, 반도체는 TK가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사업이죠. 하지만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반도체는 TK에게 여전히 중요한 사업입니다. 송백재가 반도체에 유독 애정이 깊은 건 아무래도 그런 이유겠지요. 제가 연 팀장이 어제 메일로 넣었던 자료를 검토했어요. 기본적인 파악은 잘 되어 있습니다.”
유 실장은 우경이 정리한 자료들을 보며 몇 가지 조언을 더 해 주고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를 열어 보니 프린트된 자료 열 장 정도가 들어 있었다.
“대외비예요. 지금 보고 외근 나가기 전에 돌려주세요.”
“네.”
“연설 가이드는 연 팀장이 보낸 파일에 제가 추가 사항을 넣어 메일로 보냈어요.”
“네, 확인했습니다.”
유 실장이 조금 미심쩍다는 투로 물었다.
“본부장님께서 연설 자료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그건 아직…….”
“그렇군요. 오늘 수행하면서 본부장님과 그에 관련해서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을 테니…….”
“네, 그렇게 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경이 조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사 배포 자료는 저번처럼 초안을 주세요. 그럼 제가 검토하죠.”
“네, 알겠습니다.”
“잘 되겠죠. 잘 다녀와요.”
유 실장이 긴장하는 우경의 심정을 알겠다는 듯 응원을 더했다.
유 실장이 건넨 자료에는 TK 반도체 장기 전략에 대한 부분과 산재 보상 같은 반도체 생산 현장의 예민한 이슈들, 준섭이 회동을 해야 하는 반도체 연구소 임원들의 세평과 성향 같은 사적인 정보가 있었다. 우경은 태블릿을 펼치고, 준섭에게 브리핑할 자료를 열어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문구로 필요한 정보를 기입했다.
우경이 자료의 마지막 장을 검토하고 있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태준섭의 번호는 아니다. 지난밤 건네준 명함에 태준섭의 개인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네.”
우경이 전화를 받자 상대는 반가운 듯이 말했다.
- 연우경 씨 되시지요?
“네, 그런데요?”
- 저 어제 인사한 강우식 대리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스포츠형 머리에 몸집이 좋은 남자였다. 어제 C호텔에서 두어 번 우경을 찾아 준섭의 말을 전했었다.
“무슨 일로 전화 주셨나요?”
- 본부장님이 말씀 전하라 하셔서요.
출장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번복하는 걸까, 아무래도 홍보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결론을 전하려는 걸까 짧은 시간 동안 몇 가지 걱정들이 우경의 머릿속을 스쳤다.
- 제가 지하 주차장 2층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본부장님은 10시 30분에 모시기로 했으니 그 전까지만 나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우경이 잠시 뜻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 지하 주차장 나오셔서 바로 보일 텐데, 못 찾으시면 전화 주세요. 출입구에 오래 대놓고 있기가 그래서요. 본부장님이 그런 거 좀 싫어하시기도 하고……. 주로 전화 주시면 문 앞으로 가거든요. 1층에서도 잘 안 타십니다.
“잠시만요, 강 대리님.”
우경이 우식의 길어지는 설명을 막으며 물었다.
“제가 그 차를 타라는 말씀인가요?”
- 네, 출장 수행하시기로 했다고.
우식이 뭔가 잘못 전달받았나 슬며시 걱정하는 목소리로 확인했다.
- 아닙니까?
“아니에요. 맞습니다. 시간 늦지 않게 내려가겠습니다.”
우경은 전화를 끊고서 잠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모니터에는 태준섭과 반도체 관련 기사들 창이 여러 개 엇갈린 채 겹쳐져 있었다.
호텔 로비에서도, 우동집의 룸 안에서도 지나치게 긴장하고 버거웠는데 출장지까지 같은 차를 타고 가야 한다니…….
뭉클거리며 퍼지는 난감함을 애써 누르며 우경은 한글창을 클릭하여 연설문 초안 가이드를 열었다. 유 실장이 수정하고 보충한 사항을 반영하여 빠르게 덧붙였다. 프린트 버튼을 누르면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지만, 최대한 긍정적인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출장지까지 가는 시간 동안 차 안에서 연설 내용과 기타 PR에 대한 사항을 보여 드리고 컨펌을 받을 수 있다. 우경은 긴장으로 뻣뻣해지는 제 목을 슬며시 눌렀다.
‘목까지 빨개.’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말들이 심장을 꾹 쥐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손등으로 눌렀다가 떼어 냈다. 거리낌 없이 우경을 관찰하던 준섭의 시선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뒤이어 면발을 삼키던 남자의 입술, 재킷을 입느라 더 벌어져 보이던 가슴이나 손바닥에 닿았던 온도까지 머리 위로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심장이 잘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이 저려 가운데 부분을 아래위로 쓸어내리자, 맞은편에 앉아 일하던 최용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색깔, 좀 독하네요.”
우경이 머릿속을 이미 꽉 채워 버린 태준섭의 얼굴을 밀어내며 용원을 향해 웃어 보였다.
* * *
10시 15분이다. 우경이 시계를 확인하며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즈음 소운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대표님.”
- 잘 되고 있지?
“네, 네. 반도체 현장 출장 가시는데 수행하려고요.”
- 아, 그래? 반도체 현장이면……, 산재 이슈가 있지 않아?
“내부적으로 정리가 좀 된 걸로 들었어요.”
유 실장이 아침에 건넨 자료에는 현장 근로자와 협의 예정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 잘됐네. 그럼 기사도 나갈 거고?
“네. 연설도 있고 해서 배포용 기사도 준비해야 해요. 사진은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 못 했어요.”
- 일단 찍어야지, 너 사진 잘 찍잖아.
우경은 홍보와 광고에 관련된 분야라면 뭐든지 조금이라도 배우고 익히려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사진은 대학 4년 동안 시간을 쪼개어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한 덕분이다.
“제가 사진 찍는 것까지는 분위기를 잘 몰라서……. 상황 봐서 해 보려고 해요.”
- 그래, 그래. 파이팅이다.
우경이 핸드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서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
강 대리는 먼저 오라고 했지만, 주인 없는 차에서 기다리기보다 문 근처에서 태준섭이 나올 때까지 대기할 생각이었다. 잠깐 핸드폰을 열어 이메일을 확인해 보는데 차에 있던 강 대리가 우경을 발견하고는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강 대리님.”
고개를 가볍게 숙이는 강 대리에게 우경이 반갑게 인사했다.
“차가 요 앞에 있는데, 타고서 기다리세요. 10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아무래도 그건 좀……. 처음이기도 하고. 본부장님 차라니 부담스럽기도 해요.”
우경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답했다. 실제로 부담감에 소화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차를 타기도 전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저, 그러면……. 연…….”
우식이 이름을 부르다 말고 멈추었다. 무어라 불러야 좋을지 망설이는 내색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짤막하게 깎은 머리나 큰 덩치가 주는 이미지와 다르게 순한 사람이었다.
“저 여기서 연 팀장이라고 불러요. TK에서 팀장은 아니고 제 회사에서 직급이 그래요. 파견 근무 중이거든요.”
그제야 걱정거리가 하나 덜어졌다는 표정으로 우식이 웃었다.
“네, 파견……. 네. 연 팀장님.”
파견이라는 단어에 의문이 생길 법도 한데 우식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우식의 양복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밖으로 약하게 비어져 나오는 소리는 여자 목소리였다.
“네, 알겠습니다.”
우식이 전화를 끊고는 우경에게 말했다.
“본부장님 내려오신다고 비서실에서 전화왔네요.”
급히 차 쪽으로 가는 뒷모습을 보고는 우경은 닫혀 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뒤돌아서 확인했다. 곧 태준섭이 나오겠지, 하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조여들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그나마 강 대리가 무던하지만 나름대로 친화력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다행이라고 위안했다.
준섭은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이섭의 경례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앉아 있던 여자를 차례로 생각했다. 당신한테 완전히 빠졌어요. 하는 눈을 하고서 독을 먹일 셈이겠지.
저 목을 쥐어 버릴까, 강렬한 분노는 잠시였다. 달콤한 독쯤이야 한 번 더 먹어 주지. 체하지 않을 만큼만.
태시환 회장이 수없이 많은 독사과를 먹이고도 아직 옭아매지 못한 태준섭을 고작 연우경 따위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면 태이섭, 너도 한참 감이 떨어졌구나.
실은 갑작스런 조우에 반쯤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여자에게 C호텔로 오라고 했지만 식사 내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후회했다. 잘라내면 그만일걸, 성가신 일을 자처했다. 의도적으로 바람을 맞혔는데 우식이 울상으로 전했다. 내내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고. 저녁도 안 먹은 거 같다고. 그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주제넘은 충고까지.
그런 어설픈 충고에 넘어갈 만큼 몸이 달아 있었다. 급하게 약속을 마무리하고 내려왔더니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여자는 목을 기울이고 잠이 들어 있었다. 준섭이 옆자리에 앉아도 깨지 않았다. 세워 둔 파일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 미끄러지려는 머리를 손끝으로 막았다.
“태준섭…….”
여자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응?”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귀를 바짝 대고 다시 물었다.
“응?”
“태, 준섭…… 빨리 오라고.”
토라진 듯 웅얼거리는 소리가 귀여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연우경, 눈을 맞추고 말해 보라고. 칭얼거리는 입술을 보여 봐. 기꺼이 원하는 걸 다 줄 테니.
강 대리가 차를 엘리베이터 입구에 바싹 붙여 대고 차에서 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리문 너머 우경과 준섭의 시선이 마주쳤다. 태준섭은 달리 수행하는 직원이 없이 혼자였다. 시선을 거두지 않고서 태준섭이 큰 걸음으로 다가오자, 우경이 방향을 바꾸어 강 대리 옆에 나란히 섰다. 준섭이 우경을 스쳐 지날 때, 우경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했지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강 대리가 열어 준 차 뒷문으로 태준섭이 몸을 밀어 넣고 그 문을 닫는 것까지 보고서 우경이 고개를 들었다. 우경이 조수석 자리에 앉자, 강 대리가 시동을 켰다.
“연 팀장.”
“네?”
우경이 뒤를 돌아보자, 태준섭은 뭘 그리 놀랄 것이 있냐는 표정이었다.
“유 실장님이 메일로 연 팀장이라고 지칭하시던데,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좋아요, 연 팀장.”
준섭이 느긋하게 우경을 다시 불렀다. 우경은 목을 뒤로 돌린 채 준섭을 응시했다.
“그러고서 불편하지 않습니까?”
“네?”
우경 입장에서야 태준섭이 당연히 불편했다. 하지만 질문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태준섭의 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우경을 담고서 웃었다. 눈만 저렇게 웃을 수 있구나 싶을 만큼, 차가운 눈매가 가늘어지고 조금 더 길어지고 그리고 눈꼬리까지 휘어졌다.
“가는 동안 브리핑할 거 준비 안 했습니까?”
“아…….”
현장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이용해서 브리핑을 하고 조율을 하자는 뜻이었다. 준섭이 눈짓으로만 뒷좌석 옆자리를 가리켰다. 우경은 조수석에서 내려 차를 반 바퀴 빙 둘러 반대쪽 뒤편 문을 열었다.
숨을 한 번 들이켜고는 준섭의 옆자리로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는 우경에게서 준섭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노골적인 시선은 아니었지만, 가슴 뒤편에서 탁탁 불씨가 하나씩 타올랐다.
“출발해요.”
“네.”
강 대리가 매끈하게 커브를 틀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차창 밖으로 파란 가을 하늘이 보였다. 우경의 시선 끝을 확인했는지 태준섭이 매너 좋게 말을 꺼냈다.
“가을이네요.”
우경이 멈칫 시선을 거두어 태준섭을 바라보았다.
“하늘 색이 가을이라서…….”
“네.”
우경이 조금 숨을 내어 쉬고는 대화를 이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하늘을 목 아프게 잘 올려다봤어요. 한참 커서까지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면 하늘을 만져 볼 수 있는 줄 알았어요. 바보같이.”
“아닌가?”
준섭이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비행기 창문이 꽉 막혀서 그렇지 손 내밀면 만질 수 있어요. 하늘.”
하, 우경은 저도 모르게 한숨 같은 웃음이 나왔다. 어이없어라. 농담이라고 하는 걸까. 운전석 강 대리도 상사의 떨어지는 유머 지수에 어이가 없는지 괜스레 기침으로 웃음을 가렸다. 우경이 강 대리를 보고서 다시 하아, 하고 웃음 비슷한 걸 흘렸다. 준섭이 우경과 준섭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두툼한 팔걸이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좀 낫네요.”
“네?”
“옆에서 바싹 얼어 있으면 가는 내내 불편하니까.”
“죄송합니다. 조금 긴장했습니다.”
“그러다 나한테 멀미라도 하면 최악이고.”
“멀미 안 해요.”
우경이 진지하게 부인했다. 준섭의 눈이 희미하게 다시 웃었다.
“다행이네. 그럼 브리핑 시작하죠.”
우경은 어깨에 메고 있던 서류 가방을 열어 태블릿과 종이 파일을 꺼냈다. 준섭에게 미리 프린트해 두었던 브리핑 자료를 철해 둔 파일을 펼쳐 건넸다. 자료는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일반적인 정리와 TK 미래 전략에서 축을 차지하는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동향 등을 담고 있었다.
준섭이 꼼꼼하게 자료를 훑어보는 동안 우경은 침묵 속에서 초초하게 다음 말을 준비하고 머릿속으로 예행연습을 거듭했다. 준섭의 손끝만 바라보고 있자니 다른 종류의 긴장감으로 심장이 울렁거렸다. 드디어 마지막 장을 넘기고 준섭이 우경을 바라보았다.
뻔한 자료 정리 다 읽었습니다. 그래서요? 라는 인색한 물음 대신 우경의 브리핑을 기다리는 편을 택한 것 같았다. 얼굴에는 실망감도 짜증도 없었다. 처음부터 우경에게 기대치가 바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대에게 중언부언 자료 정리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하는 건 최악이다. 우경은 앞머리를 싹둑 자르고서 본론을 먼저 꺼냈다.
“오늘 방문하시는 안성 반도체 생산 현장은 198*년, 3라인 가동을 위해 준공을 시작한 곳입니다.”
우경이 잠시 말을 멈추고 준섭을 쳐다보았다. 준섭은 그런 것 따위 알고 있으니 생략하고 넘어가라는 핀잔을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태준섭에 대해, 태이섭 상무는 예민한 사람이라 평가했고, 유 실장은 까다롭고 냉정한 면이 있는 분이라 에둘러 말했지만 수집한 세평은 좀 더 악독했다.
타인의 평가 속에 존재하는 태준섭과 우경이 만들었던 태준섭의 이미지가 판이하게 달랐고, 실제의 태준섭은 적어도 그런 평가들보다는 훨씬 관대하고 무엇보다 참을성이 많았다.
그건 어젯밤, 다른 면으로도 확인한 바지만…….
우경은 멋대로 뻗어 나가는 생각을 붙잡고, 달아오르려는 얼굴도 진정시키고 오직 안성 생산 현장 방문에 관련된 일에만 집중하려 했다.
“물론 본부장님께서 저보다 훨씬 더 TK의 반도체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지만, 굳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3라인 증설 당시 내부 분위기를 환기시켜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준섭이 역시나 기대감 없이,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전 세계는 최악의 불황이 깊어지는 중이었고 4년 전 시작한 반도체 사업은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3라인 증설은 오로지 태시환 회장님의 결단이었습니다. 회장님의 무모한 패기를 막는 것이 회사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고 맞섰던 임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자랑스러운 무용담이지.”
약간은 시니컬한 답을 들으며 우경이 그런 답을 예상했다는 듯 강조했다.
“오늘의 방문 의미의 초점을 거기에 두고 싶습니다.”
“과거의 무용담은 이미 많이 우려먹어 구멍 뚫린 사골입니다. 나올 것이 없어요.”
“그래서입니다.”
우경이 뻔하다는 실망감을 드러내는 준섭을 향해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생산 현장에 있는 근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골처럼 우려내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없는, 새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요.”
준섭이 더 해 보라는 듯 손을 조금 들어올렸다.
“본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준섭이 고개를 저으며 우경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우경이 입술을 맞물렸다가 떼어 냈다.
“그럼 본부장님께서, 안성 생산 현장은 여전히 전설이 진행 중인, TK의 뜨거운 중심이라는 점을 강조하시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우경은 가방에서 얇은 파일을 꺼내어 준섭에게 다시 건넸다. 연설문 초안을 철해 둔 파일이었다. 우경도 태블릿 화면을 바꾸어 같은 연설문 원고 워드 파일을 열었다.
“검토하시고 알려 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우경은 비스듬히 틀었던 몸을 바로잡으며 정면을 향해 앉았다.
준섭이 연설문을 검토하는 동안 일부러 준섭을 보지 않고 태블릿 화면을 넘기거나 앞창 너머 풍경을 한 번씩 보았지만, 준섭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낮은 숨소리나, 종이를 넘기는 소리, 양복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는 소리까지 보이는 듯 다 들렸다. 흘끗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시선이 준섭에게 닿았다.
남성적인 입체감이 느껴지는 이마와 우뚝하게 솟은 콧날이, 집중하여 들여다보느라 약하게 주름을 만든 미간이 보였다. 길쭉한 손가락에 쥐여진 만년필로 준섭은 뭔가를 쓰고 있었다.
우경이 펼쳐서 건넨 연설문 초안 위에 적히는 글씨는 비스듬히 세워진 파일 커버와 위치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종이 위를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슴 위로 글씨가 새겨지는 듯 가려웠다. 탁 소리를 내며 펜을 내려놓더니 준섭이 만년필 펜 뚜껑을 덮었다. 파일의 커버도 덮고서 우경에게 건넸다.
“읽어 봐요.”
연설문에 대한 평가를 먼저 듣고 싶었지만, 준섭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우경이 긴장하며 파일을 펼쳤다.
밑줄이 그어져 삭제된 부분이 제일 먼저 보였다. 우경의 말을 준섭 자신의 입에 맞도록 어미와 단어를 대체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현황 추가할 것, 같은 코멘트도 있었다. ‘임원단 협의 내용 추가’, ‘연구진 미팅 결과?’같은 코멘트까지 질문할 사항이 많았지만 일단 끝까지 읽은 후 정리해서 처리할 생각이었다.
꼼꼼히 검토하며 느리게 움직이던 시선이 끝부분에서 멈췄다. 마지막 마무리는 우경이 완성하지 않고 비워 뒀다. 들어가면 좋을 키워드 정도만 넣어 두었는데, 그 자리에 준섭이 짧은 클로징 문단을 써두었다.
우경은 믿을 수가 없어 푸른 잉크로 적힌 글씨를 한 번 더 읽었다.
‘30년 전, 모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반도체 시장은 굴지의 선진 기업들이 손을 드는 불황이었고, 투자를 철회하던 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50대의 태시환 명예회장님, 저의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TK가 세계 정상에 오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을 꾸게 한 사람도, 이루게 한 사람도 바로 생산 현장의 여러분들이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현란한 IT 세상을 꿈꿉니다. 아니, 잠에서 깨기 전 이미 꿈보다 빠른 미래가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TK의 IT기술이 가능하게 하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30년 전 무모하고 담대한 꿈을 이루게 했던 바로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이 작은 반도체에서 과거를, 꿈을, 그리고 미래를 봅니다.
꿈보다 빠른 미래,
여러분이 매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 이곳에서 말입니다.’
우경은 입을 꾹 다물고서 마지막 단락을 다시 읽었다.
‘꿈보다 빠른 미래’
은철에게 혹독한 비평을 받았던 카피, TK 본사 로비 바닥에 흐트러졌던 미완성의 스토리 보드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속울음을 울던 자신이 정지 화면처럼 보인다.
고단하고 불편한 과거 어느 날에 미래를 꿈꾸던 사람들, 편안한 꿈에 빠진 현재 사람들의 이미지 위로 흐르던 카피들.
‘과거의 그들은 기술의 혁신을 꿈꾸었고, 전자는 그들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아름다운 꿈만 꾸십시오. 꿈보다 빠른 미래. TK전자가 실현합니다.’
부끄러워 다시 펼쳐 보지 못했던 카피들, 그 카피를 품고서 세상의 모든 신에 기도를 하며 TK를, 태준섭을 설득하고자 했었다. 꿈을 말하던 카피는 아이러니하게도 우경의 오랜 꿈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결국 광고 회사에서 우경을 잘리게 만들었으니…….
무모함의 교훈이라고 위안하기엔 너무 끔찍한 상처가 남아 모든 미움과 수치심, 열패감의 화살을 모조리 다 그 카피에 쏟아붓고 완전히 밀봉하여 저 멀리 태평양 바다쯤에 수장시켰다. 잊고 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 몰랐다. 우경의 펜이 멈춘 자리를 흘끗 보더니 태준섭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만, 다시 줘 봐요.”
우경이 마른침을 삼키고 준섭에게 연설문 파일을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들지 못했다. 무어라 물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따져야 할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입을 열거나 시선을 맞추면 엉망으로 퍼부어 대거나,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준섭은 그런 우경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무언가를 빠뜨린 건지, 만년필을 열고서 연설문 위에 몇 자를 더 적었다.
다시 우경 앞으로 건네진 파일을 보고서 우경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준섭이 마지막 단락을 커다란 대괄호로 묶고 화살표를 찍찍 두 줄로 그어 내리고는 커다랗게 써 두었다.
[저작권료 청구할 것]
조롱하는 걸까. 순간적으로 정수리까지 뜨끈해졌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무능하다고, 무능한 인간이라고 낙인찍고서는…….
기업 캠페인 카피로는 무능의 극치이고, 떨이로도 안 팔려 소각해야 할 상품 같은 카피를 반도체 현장 연설문에는 쓸 수 있다는 건가요.
‘야! 너가 가서 우리 CS 무슨 개망신을 시켰는지 알아? 거기 상무가 무능함에 치를 떨었단다. 어? 어? 알아? 잘난 척하면서 탈락한 카피 들고 가서 까불더니. 왜, 그 상무한테는 몸으로 부딪히는 것도 안 통하디? 이래저래 무능한 인간이 뭐 믿고 까불어. CS가 우스워? 아님 TK가 우습니?’
침을 튀기며 욕을 퍼붓던 은철이 떠오르자 어쩔 수 없이 심장이 조여든다.
저작권료 청구라니, 얼기설기 봉합한 상처를 거칠게 벌리고 흉하게 드러난 벌건 속살을 장난질에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우경은 시선을 비스듬히 반대 방향으로 틀고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부글거리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조롱이든 농담이든 아무렇지도 않게 저작권료 운운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의 태양 아래에서는 오늘 주어진 일만, 그러다 보면 내일이 될 테고 내일의 태양 아래에서 다시 생각하기로.
우경이 감정을 지운 눈으로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현황 자료는 제가 정리해 드린 걸로 넣으면 될까요?”
준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원진 협의 내용이나 연구진 미팅 결과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는데, 어디에 요청하면 될까요?”
묻는 우경의 목소리가 더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준섭이 바로 답을 하지 않아 태블릿에 두었던 시선을 들었다. 준섭은 조금 찡그린 듯한 눈매로 우경을 쳐다볼 뿐이었다. 우경이 눈을 깜박였다. 신호나 된 듯이 준섭이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요청할 수 있겠어요. 임원진 협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렇다 쳐도 연구진 미팅은 아직 안 했는데.”
반도체 연구진들이 있는 연구소 방문도 오늘 일정에 포함되어 있으니, 그때 미팅을 해서 알려 준다는 말이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나 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본부장님께서 알려 주시면 제가 첨언하겠습니다.”
준섭이 핸드폰을 손에 쥐더니 말했다.
“메일 주소 보내요.”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고 우경은 저장된 준섭의 번호를 찾았다.
[태준섭 상무님]
연락처에서 번호를 띄우고 문자창에 메일 주소를 입력해서 전송했다.
지잉, 낮은 진동이 준섭의 손 위에서 울렸다.
잠시 후, 우경의 핸드폰도 낮은 진동음을 냈다. 메일이 왔다는 알림음이었다. 임원진 협의 사항이라는 제목의 준섭의 메일을 확인했다.
“본부장님, 잘 받았습니다. 작업해서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준섭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묻지 않았지만 물을지도 모르는 질문에 대한 답까지 미리했다.
“안성 도착하기 전까지 작업을 완료하겠습니다. 연구진과 미팅을 마치시고 메일 주시면, 또 보충해서 올리겠습니다.”
우경은 준섭이 보낸 첨부 파일을 핸드폰으로 열고서 화면을 확인하면서 태블릿으로 초안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왼뺨으로 준섭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우경은 고집스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시선이 아니다. 착각일 것이다.
우경은 연설문 초안에 협의 사항 내용을 추가한 후, 준섭이 펜으로 작성한 부분까지 태블릿으로 입력했다. ‘꿈보다 빠른 미래’를 쓸 때마다 손을 멈추고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마지막으로 검토를 마치고 수정한 연설문을 첨부하여 준섭의 메일로 보냈다. 뒤로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준섭이 알림음을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열었다.
“태블릿으로 보시겠습니까?”
우경이 준섭과 사이를 막고 있는 팔걸이 위로 태블릿을 올렸다. 준섭에게서 아무런 답이 없었지만 우경은 태블릿을 거두지 않고서 화면에 멍하니 시선을 붙박았다. 그런 중에도 꿈보다 빠른 미래, 라는 글자만 확대되어 어른거렸다. 가방 속에 집어넣은, 준섭의 글씨가 남아 있는 초안이 떠오른다. ‘저작권료 청구할 것’이라는 오만한 코멘트도.
집으로 가자마자 그 종이를 꺼내어 작은 개껌을 넣고는 꽉꽉 구겨 공처럼 만들어 던져야지.
백설아, 부르고 바닥에 구르는 종이를 백설이가 북북 찢는 걸 봐야지.
그래, 북북 찢어진 종이를 모아 다용도실 싱크에서 불태워야지.
우경이 유치한 상상으로 분노를 삼키고 있을 때, 준섭의 손이 느릿하게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팔걸이를 휙 위로 들어올렸다. 방금 전까지 우경의 시선을 붙잡아 두던 물체가 사라졌다. 우경이 고개를 드는 순간 태블릿이 우경의 무릎 위에 툭 떨어졌다.
“이리로.”
준섭이 팔걸이가 사라진 자리를 툭 쳤다. 우경이 왜냐고 묻기 전, 준섭이 말했다.
“수정할 부분 부를 테니 고치세요.”
“네.”
우경이 속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씩 움직여 충분할 만큼 가까이 자리를 옮겼다. 룸미러로 우경의 얼굴이 환히 비쳤다. 이유 없이 뺨이 붉어진다.
가운데 자리는 양쪽 자리보다 조금 높고 발이 닿는 자리도 높아 편안하지 않았다. 우경이 억지로 자세를 바로잡으며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깔고, 그 위에 태블릿을 올려 두었다. 연설문 문서창 위에 깜박이는 커서만 바라보았다.
준섭이 우경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휴대용 자판에 가볍게 올려 둔 손가락이 움찔했다.
“화면이 잘 안 보여서 말입니다.”
우경이 준섭을 향해 방향을 조금 바꾸려다 멈추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느낌이었다. 네, 의미 없는 답을 하려는데 준섭의 손이 우경의 손등을 스쳤다.
“아.”
우경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려 손등을 다른 손으로 덮어 쥐었다. 찰나같이 짧은 순간이었는데 남자의 손바닥에 새겨진 손금까지 읽은 느낌이었다. 우동집에서 겹쳐 올리던 손바닥의 느낌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미안합니다.”
순순히 사과를 하고는 준섭이 손을 마저 뻗어 태블릿을 조금 세워 올렸다.
“이제 좀 낫군요. 빛 반사가 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경이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여전히 주먹 쥔 손은 펴지 않은 상태였다.
“가을입니다. 오는 길에 하늘이 푸르더군요.”
연설문 첫 구절이었다. 준섭이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읽어 내렸다.
“이곳 안성으로 오는 동안 가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준섭이 꽉 쥔 주먹을 펴라는 듯, 태블릿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까닥거리는 검지를 보고 우경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과도하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준섭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멀어졌다가 다시 또렷하게 들렸다.
“……반도체는 3분기 TK전자의 영업 이익을 이끌어 냈습니다.”
준섭이 다시 손가락을 까닥 움직였다.
“반도체가 이끈으로 해서 영업 이익을 주어로 바꿉시다. 구체적 수치 보강하고요.”
“네.”
우경이 손을 뻗어 자료를 찾으려 하자 준섭이 필요 없다는 듯 숫자를 불렀다.
“영업 이익 18조 1523억. 18조 최초 돌파했습니다.”
준섭의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런 와중에서도요.”
경기 침체에서부터 그룹 내외적으로 시끄러웠던 스캔들까지를 모두 지칭하는 것이었다.
“계속할까요?”
준섭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우경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연설문에 수정할 부분은 많지 않았다. 준섭이 천천히 소리 내어 읽고 입에 맞지 않는 조사 정도를 고치며 수정은 끝났다. 마지막 단락을 읽을 때 우경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반대편으로 반쯤 돌리고 있었다. 우경이 옆자리로 비켜 가기 전 준섭이 말했다.
“배포할 기사 작성도 연 팀장이 하나요?”
“네, 유 실장님 가이드는 있습니다. 물론 본부장님 컨펌도 받겠습니다.”
“사진도 필요하겠군.”
“사진 역시 컨펌받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도 찍겠습니다.”
준섭이 오호, 하듯 양 눈썹을 올려보였다.
“카메라 있습니까?”
“네. 그런데 연설하시는 동안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사진은 핸드폰 촬영으로도 충분합니다. 현장 직원분들 보시기에 수선스러워 보이지도 않고, 핸드폰 카메라 화소가 워낙 좋아서요. 보조 렌즈도 장착할 수 있습니다.”
준섭이 피식 웃더니 확인하는 물음을 던졌다.
“그 핸드폰 말입니까?”
우경이 제 핸드폰을 내려다 보았다. 액정 모서리 한쪽으로 희미하게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다. 저번 로비에서 떨어뜨렸을 때 생긴 금이다.
‘액정에 금이 갔네요.’
태준섭인 줄 몰랐던, 그래서 우연히 만나 가슴 뛰었던 우경의 이상형인 남자가 돌아서서 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금이 간 액정 교체비는 망설여지는 금액이었다. 곧 신제품이 출시되니 그때까지 기다릴까, 하며 액정 수리를 미루고 있었다.
“렌즈는, 이상 없습니다.”
조금 불성실해 보이는 답을 하며 우경은 금이 간 액정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아침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 현장 가시면, 복장은 어떻게 하십니까?”
“재킷 벗고 작업복 입을까 합니다.”
“아…….”
우경이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작업복 색이 파스텔톤입니다. 옅은 그린색이요. 브이넥이라서 셔츠의 카라와 타이가 드러납니다.”
“그런데요?”
“타이가……. 죄송하지만 타이색이 너무 무겁습니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준섭이 우경의 지적에 턱을 슬쩍 만지고 타이 매듭에 손을 올렸다.
“나는 오늘 타이를 무슨 색 했는지도 기억 안 나는데.”
“네?”
우경이 조금 당황하며 준섭의 타이를 바라보았다.
“더럽게 졸렸거든. 비몽사몽 간에 아무거나 주워 입고 매고 송백재 갔으니까.”
준섭이 제 타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색으로 보여요? 검은색은 분명 아닌데.”
“거의 검은빛입니다. 검은색과 짙은 남색 중간쯤.”
“그런 색만 많아. 아무거나 집었으니 확률적으로 그놈이 그놈이겠네.”
우경이 망설이다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속을 벌려 안쪽 포켓에 구겨지지 않도록 잘 넣어 두었던 타이 하나를 꺼냈다. 케이스는 벗겼지만 비닐이 씌워진 새것이다. 연노랑빛 바탕에 자잘한 무늬가 들어간 타이를 흘끗 보고는 준섭이 물었다.
“뭡니까?”
“아버지 건데, 졸업생 제자한테 선물받고 안 쓰셨어요. 이런 색을 어디에 하고 다니냐고. 어제 늦게 들어가서 타이를 새로 살 시간이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챙겨 왔습니다.”
“무슨 타이까지.”
준섭이 좀 어이없다는 식으로 웃었다.
“그렇게 좋은 브랜드는 아니지만……. 사실 아빠는 학교에 하고 가기에 과한 거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많이 흉하지 않으면 바꾸시면 어떨까요.”
“나한테 어울릴 것 같습니까?”
우경이 타이를 손에 걸고서 준섭의 목 아래로 대어 보려다 말고 멈추었다. 여전히 눈을 맞추지 않고 얼굴을 보지 않고서, 검은빛 타이 매듭만 보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한번 해 보시고,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바꾸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준섭이 우경의 손에 들린 타이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무언가에 화가 난 사람처럼 목에 걸린 타이 매듭을 쭉 잡아당겨 내려 벗어던지고 노란색 타이를 목에 걸었다. 졸면서도 타이를 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빠른 속도로 목에 감고서 매듭을 조였다.
“어울립니까?”
우경은 이번에는 노란 매듭만 보는 채로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어울리냐고.”
“제 의견보다 본부장님께서 보시고 판단…….”
“난 내가 안 보이니까, 연우경 씨가 똑바로 보고 말해 봐.”
우경이 눈을 천천히 들었다. 뺨을 갈기고 싶은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우경이 이를 악물었다가 떼어 냈다.
“작업복에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강 대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가운데 자리에 엉덩이를 불편하게 걸치고 앉아 있던 우경의 상체가 앞으로 확 쏠렸다. 아, 소리를 지르기 전 준섭이 팔을 뻗어 우경의 몸을 막았다.
“죄송합니다. 신호가 갑자기 바뀌어서.”
강 대리가 큰 목소리로 사죄했다.
“연 팀장님, 괜찮으세요?”
“괜…….”
“괜찮아.”
준섭이 우경의 답을 가로챘다. 뻗은 팔을 거두지 않고 몸을 반쯤 우경을 향해 틀더니 손으로 우경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좋아, 어울린다니 작업복 사진 잘 찍어 봐요.”
우경의 눈만 쳐다보면서 강 대리에게 물었다.
“연구소까지 얼마 남았어?”
“15분 정도 남았습니다.”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더해 뒤로 밀면서 준섭이 말했다.
“그동안 등 붙이고, 좀 쉬어. 연 팀장.”
차를 타고서 처음으로 완전히 등을 붙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마주 보고 있는 준섭의 얼굴이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왜 화를 내죠? 화낼 사람이 누군데!
우경은 목구멍까지 솟는 말을 삼키고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 * *
고속도로 톨게이트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바닥에서 반짝반짝 LED 등이 빛났다. 도로도 하늘도 검은 밤이었다. 안성에서 일정은 예정보다 많이 길어졌다.
현장 분위기는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이었다. 처음 태준섭이 등장했을 때는 얼음장 같았던 온도가 연설이 진행되면서 점점 따뜻해지나 싶더니 종내에는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차내에서 했던 무난하고 느릿한 어조의 예행연습은 사기였다. 태준섭은 타고난 웅변가였다. 한마디 한마디 모두 더할 나위 없는 진심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훔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쉽다는 듯 태준섭은 자신만만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제 목소리가 닿는 귀를 가진 이들과 제 눈길이 닿는 모든 이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예년에 비해 두 배는 증가한 막대한 규모의 투자 계획도 그 자리에서 발표했다. 선두의 격차는 과감한 투자로 뒷받침될 것이다, 꿈은 여전히 이곳 바로 여기에서 진행 중이다.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뒤이어 태준섭은 계획에 없는 파격을 이어 갔다. 다가오는 근로자들과 돌아가며 악수를 하고 야근조와 공장 식당에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내내 은하 중학교 연남균 교장 선생님의 노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우경은 작업복을 입은 준섭을, 연설하고 악수하고 포옹하고 웃고, 공장 식당 밥을 맛있게 먹는 준섭을 조용히 사진으로 담았다.
“회사로 가지. 사무실에 잠시 들러야 해서.”
준섭이 서울로 들어서는 톨게이트를 지나며 강 대리에게 지시했다. 우경의 뜻을 묻지는 않았지만, 우경의 차도 회사 주차장에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오는 길은 고속도로 정체가 심해 가는 시간보다 훨씬 오래 걸렸지만 조수석에 앉았기 때문에 훨씬 마음이 편했다. 긴장이 풀어져 표시 나지 않게 졸기도 했다.
강 대리가 회사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우경과 나란히 내렸다. 준섭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강 대리는 차 안에서 대기를 하고 우경은 제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면 오늘 일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아직 태준섭이 썼던 저작권 청구에 대한 농담이 용서되지는 않았지만, 성공은 기뻤다. 우경이 눈을 맞추지 않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본부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먼저 퇴근해.”
우경이 고개를 들어 보니 준섭은 인사하는 우경을 깨끗하게 무시하고 강 대리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우경은 무거워서 어깨가 내려앉을 것 같은 가방을 추스르고는 슬쩍 뒤로 빠졌다.
“키는 주고.”
강 대리에게서 키를 받아 호주머니에 넣고는 준섭이 우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주춤 뒤로 빠지던 걸음이 저절로 멈춰졌다.
“사무실로 올라와요.”
“아…….”
저도 모르게 나온 어정쩡한 답을 고치며 우경이 허리를 곧게 폈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아마도 오늘 출장 건에 대한 컨펌을 받으라는 뜻 같다. 내일로 미뤄 주면 좋으련만 그건 우경만의 사정이었다. 하루 종일 긴장한 까닭에 욱신거리는 어깨와 다리를 달래며 우경이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만 태우고 올라가던 엘리베이터 문이 1층에서 열리고, 강 대리가 먼저 내렸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일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을 기세라, 우경도 목례를 길게 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고개를 들고는 가방을 다시 추슬러 올렸다. 빠질 듯이 뻐근한 통증이 느껴지는 목을 뒤로 젖히는데 갑자기 훅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이 사라졌다. 준섭의 손이 들어와 우경의 어깨 위로 가방끈을 치켜들고 있었다.
“본부장님?”
놀라서 쳐다보자 피식하고 준섭이 웃었다. 뭔가 못마땅한 웃음이었다.
“별로 안 무거운데.”
“네.”
건장한 남자가 느끼는 무게감은 다르겠죠. 라는 말을 삼키고 우경이 짧게 답했다. 툭 가방이 다시 어깨 위로 떨어졌다. 반동으로 몸이 약간 흔들렸다.
“들어 줄까요?”
“아니요.”
“무거워 보이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확연한 빈정거림이다.
33층에서 준섭이 먼저 내리고 우경이 뒤를 따랐다. 조용하고 어둑한 복도는 유달리 길게 느껴졌다. 돌아오는 길에 퇴근을 지시했던 터라 본부장실은 비서실까지 텅 비어 캄캄했다.
준섭은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려 전등을 하나 켜고 비서실을 지나, 다시 양쪽으로 열리는 커다란 문 한쪽을 열었다. 준섭의 사무실이다. 한 번도 와 본 적은 없다.
도심의 불빛이 널찍한 사무실을 푸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다. 책상 위 조명 하나만 밝히고 준섭이 걸어갔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구둣 소리가 울렸다. 우경은 지시를 받지 못해 따르는 걸음을 멈추고 문과 책상 중간쯤에 섰다.
준섭은 선 채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왜 거기 서 있냐는 듯, 우경을 향해 짧게 손짓을 했다. 우경이 다가오자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랍 속을 바라보며 준섭이 물었다.
“통신사는 YT 맞죠?”
“네?”
“무슨 색이 좋습니까, 화이트, 블랙, 바이올렛, 골드.”
우경이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떴다. 색을 고르기 전에 준섭이 잘라 말했다.
“바이올렛.”
“무슨, 아니 왜…….”
“바이올렛이 어울립니다.”
준섭이 손에 흰 직사각형 박스를 들고는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비스듬히 책상에 기대어 앉고는 우경을 향해 박스를 내밀었다.
“이건…….”
“TK전자 일하면서 액정 깨진 구식폰 들고 다니지 말아요.”
질책 같은 말에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신제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주 후엔 출시된다고 해서.”
“그 신제품입니다.”
우경이 조금 놀라며 박스에 박힌 모델명을 확인했다.
“어, 어떻게?”
준섭이 짤막하게 웃었다.
“예판받고 있고 시연 행사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TK전자에 당연히 실물이 있단 말 아니냐는 뜻이었다. 우경이 박스를 만지작거리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고작 그걸로 인사받을 정도는 아니고.”
준섭이 팔짱을 낀 채 우경을 쳐다보았다.
“연우경 씨, 나한테 받을 거 있잖습니까.”
준섭이 검지로 타이 매듭을 두드렸다.
“아, 타이.”
“저작권료도 받아야죠.”
우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벌리고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필요 없습니다. 타이만 주세요. 아버지 거라서.”
“왜 필요 없습니까?”
준섭이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물었다.
“충분히 돈 받았습니다.”
“그건 그거고. 그 카피에 대한 건 아니잖아.”
“버린 카피입니다. 그러니 제 거 아닙니다.”
핏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고는 준섭이 말했다.
“역시, 내내 눈 내리깔고서 무시한 건, 그것 때문이었군. 미리 허락을 받았어야 했나?”
우경이 속입술을 물었다. 울음도 같이 물고서 뱉으면 후회할 말과 흘리면 창피할 눈물을 겨우 참아 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실은 연설에서 그대로 말씀하실 줄 몰랐어요. 초안에 장난으로 쓰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 모멸감 느꼈고요.”
“무슨 소리야, 했잖아.”
“네, 그래서 조금 나아졌습니다. 오늘 핸드폰 때문에 사무실에 오지 않았다면 집으로 돌아가 강아지 발바닥이나 만지면서 좀 쉬고, 그러면서 다 괜찮다고 잊었을 겁니다.”
“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준섭이 우경을 쳐다보았다.
“강아지 발바닥은 됐고.”
준섭이 노란색 타이 매듭을 당겨 내렸다.
“계산은 계산이니, 말하라고. 뭘 얼마나 주면 되겠어.”
우경이 입을 다물고 준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준섭이 데스크에 기대어 앉아 있는 자세라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그 카피, 왜 쓰셨습니까.”
“좋아서.”
우경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떨리는 입술을 윗니로 긁고 깨물며 우경이 더듬더듬 항의했다.
“형편없다고, 버리셨잖아요.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아요. 한 번만, 한 번만 봐 달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그날도 말했어. 그런 식으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방식이 틀렸단 말이야. 내용이 아니었어.”
사무적이고 냉정한 답에 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뜨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가두어 둔 눈물이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타이만……, 주시면 됩니다. 본부장님.”
준섭이 매듭을 풀고 목에서 타이를 빼내었다. 우경이 손을 내밀어 타이를 잡았다. 순간 준섭이 타이 반대편을 갑자기 끌어당겼다. 우경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듯 붙어 왔다. 두 사람 머리 위로 작은 조명이 둥글게 퍼져 내렸다. 눈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죽어도 이 남자 앞에선 흘리기 싫어, 우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랫입술로 강하지 않은 악력이 느껴졌다.
“그날, 그렇게 깨물면 피나지 않냐고도 물었는데.”
준섭이 엄지로 윗니에 눌린 입술을 빼어 내고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툭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는 엄지는 입술에 붙이고서 손을 펴 얼굴을 가리듯 덮으며 눈물을 닦아 내고 있다. 커다란 손바닥과 섬세한 손가락 끝이 닿는 온도와 감촉 때문에 머리가 핑 돌 것만 같다.
우경은 저도 모르게 타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동아줄처럼 움켜쥐고 있는 타이를 준섭이 한 번 더 세게 끌어당기자 부딪힐 듯 가까워졌다. 우경은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입술에 숨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귓등까지 오소소 솜털이 일어서고. 저절로 숨이 멈춰진다. 우경의 어깨에서 제법 큰 소리를 내며 가방이 떨어졌다.
“원한다면, 이런 식의 청구도 환영이야.”
반짝 뜬 눈에 남자의 입술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비스듬한 웃음 때문에 심장 뒤편 등까지 불에 덴 듯이 화끈거렸다. 우경이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 들고 급히 돌아섰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정신없이 걸었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