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5화 (5/23)

5장

TK 홍보부는 일반 회사에 비교할 수 없이 큰 조직이었지만, 우경이 출근하게 된 홍보실은 홍보부에서 분리된 또 다른 작은 조직 같았다. 통화와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던 홍보실 책임자 유인목 실장은 짙은 눈매에 비해 부드러운 눈웃음을 가진 온화한 느낌의 호남형이었다. 회장 비서실 출신으로 TK 내에서도 상당히 빠르게 승진한 유능한 사람이다.

송백재 태시환 명예회장님의 비서 업무와 로열패밀리의 PR 관리 기능이 섞여 있는 듯한 조직인 홍보실은 유 실장 외에 직원 다섯과 실장의 비서 한 명이 전부였다.

유 실장은 반갑게 우경을 맞아 주었고 다른 직원들은 약간의 경계심과 호기심을 담은 태도로 우경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아마도 송백재에서 발탁한 재원이라는 이섭의 설명에서 오는 부담감 때문 같았다. 유 실장은 우경을 에이블에서 부르던 대로 연 팀장이라고 소개했다. 다들 호칭이 해결되어 걱정 하나를 덜었다는 표정 외에 다른 반응은 없었다. 미리 전달받은 바가 있는지 우경에 대해 어느 회사 소속인지 프리랜서인지조차 묻지 않았다. 이런 일에 지나칠 만큼 잘 훈련된 사람들이었다. 하긴, 홍보실은 송백재의 사적인 비서 업무와 로열패밀리 홍보 업무가 주된 일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왜 태준섭 상무 비서실이 아닌 홍보실로 출근하게 되었는지부터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우경은 유 실장이 설명하기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유 실장은 외부 미팅이 많아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우경을 따로 불렀다.

툭툭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유 실장이었다. 놀라는 우경을 보며 미안해요, 웃어 보이더니 “잠깐 시간 좀 내줄래요?”하고 물었다. 우경은 약간 긴장하면서 유 실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앉으세요.”

유 실장이 책상 근처에 둔 의자로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우경이 편안하게 앉기를 기다린 후, 유 실장은 뒤편에 있는 개인 냉장고를 열어 음료를 권했다.

“이온 음료, 콜라, 사이다, 주스, 보리차, 헛개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그럼 같은 걸로 해요. 난 목이 좀 말라서요.”

유 실장이 보리 음료 하나를 열어 우경 앞에 두었다. 우경 앞에 미리 준비해 둔 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유 실장은 정말 목이 말랐는지 제 앞에 둔 컵에 음료를 가득 따랐다. 우경도 갑자기 갈증이 일어 반 컵쯤 따라 마셨다. 보리 음료는 차갑고 달큰했다.

“연 팀장, 아까 뭐 하고 있었어요? 나 옆에 온 것도 모르던데.”

“반도체 관련 자료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반도체?”

“상무님 스케줄에 반도체 연구소와 공장 방문이 있어서요.”

유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태준섭 본부장님이, 아, 전략기획실 맡으시면서 회사에선 주로 본부장님이라는 직함을 씁니다. 태 상무님이 한 분 더 계시기도 하고 해서. 아무튼 본부장님이 연구소 경영진과 반도체 관련 간담회도 있고 현장 직원들 대상으로 연설도 있죠.”

“네.”

간담회와 연설, 어디까지 준비를 해야 하는 건지 몰라서 우경은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시차를 두고 반도체 사업에 대해 전략적인 방향이 확정되면 외부에 이번 방문을 포함하여 홍보 기사로도 나갈 겁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연 팀장과 이 부분을 조금 더 이야기 나누고 가이드 라인을 잡았어야 하죠.”

‘원래대로라면…….’

계획과 달라졌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유 실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우경은 약간의 이물감 같은 어색한 기운을 느꼈다. 우경이 묻지 않고 기다렸던 질문, 왜 태준섭 상무실이 아닌 홍보실인지, 왜 태준섭 상무와 관련된 가이드 라인 작업을 못 했는지에 대한 답을 넘겨짚을 수 있었다.

“본부장님께서 제가 일하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현재로선 그러네요.”

“현재라면,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요.”

유인목 실장이 보리 음료를 마저 컵에 따랐다. 당혹감에 목덜미까지 붉어진 우경의 상태에 대해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최악은 말이에요.”

유 실장이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 팀장 여기에서 3개월 놀아도 됩니다. 어쩌면 제일 좋은 경우 같기도 하고.”

“하지만.”

“다른 윗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연 팀장 소관이 아니에요.”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송백재나 태이섭 상무님 말씀을 하시는 거라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과분한 계약금을 받고서 놀아야 하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했습니까?”

“반대죠. 그러니 여기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고요.”

“그런데 왜.”

우경이 말을 멈추었다. 태준섭이 거부한 것이다. 저번 홍보도 맘에 들지 않았다고 화를 냈을지도, 돈 받았으니 홍보실에 조용히 처박혀서 3개월 잘 놀다가 가라고 말했을지도 몰랐다.

왜, 내가 CS의 그 무능한 카피라이터여서?

“뵙고 싶습니다.”

“본부장님을요?”

“네.”

“글쎄요. 적어도 오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유 실장님, 저는 놀고서 그 돈을 받을 만큼, 아직 그렇게까지 저를 무기력한 인간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유 실장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눈을 들어 벽시계를 확인했다.

“본부장님 지금 사내에 안 계십니다. 스케줄상으로는 5시에 미팅이 있고 이후엔 주로 저녁 약속이 있으니, 오늘은 물리적으로 어렵겠네요. 내일은 이른 오전에 미팅 마치고 바로 안성 반도체 공장으로 가실 테니……. 이번 주 계속 그러네요. 주말 지나고 화요일이나 수요일쯤 미팅 잡도록 해 볼게요.”

“반도체 관련 연설이나 기사에 개입하지 말라는 말씀이시네요.”

유 실장이 모호하게 감정을 감추며 웃었다.

“본부장님이 실은, 제 가이드도 안 받으십니다.”

유 실장의 말이 상황을 더욱 물러설 수 없게 만들었다.

“제가 일하는 걸로 되어 있는데 저는 못 하게 하시고, 유 실장님까지 손을 놓고 계시면 누가 본부장님을 케어하나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일전에 혁신전략기획본부가 신설된 후 나왔던 사진이나 기사들도 그렇고……, 상황을 아는데 제가 조용히 공돈 즐기며 놀고 있을 수는 없어요. 저도 이름을 걸고 하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 제 이름을 보호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니 공식적으로 제가 본부장님 PR 일을 그만둔 것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우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 일어서는 유 실장을 향해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했다.

“가이드를 주진 않으셨지만 제가 얻을 수 있는 자료의 수준에서 정리한 내용은 드리고 가겠습니다. 보시고 연설이나 간담회, 기사 배포에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연 팀장.”

유 실장이 손을 뻗어 돌아서려는 우경을 멈추게 했다.

“입장 알겠고 미안합니다. 그런데 나는 오케이할 수 없어요. 송백재만 아니라도 어떻게든 내 선에서 해 보겠습니다. 내 입장도 조금은 이해해 주세요.”

아, 송백재.

그들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대상은 송백재다. 연우경 따위야 쓰임이 어떻든 개인적 입장이나 커리어가 어떻게 망가지든 보호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TK의 홍보부와 송백재를 연결하는 유 실장은 에이블 같은 홍보 회사 입장에서는 가장 막강한 클라이언트였다.

우경에게 막무가내로 계약서를 들이밀던 태이섭이든, 매끄러운 입장만 밝히는 유 실장이든, 오만한 태준섭이든 그들의 눈에 연우경은 무존재나 다름없이 하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불쾌감이 치솟았다. 다만 그들은 우경을 지목한 송백재 때문에 매너 좋은 얼굴을 하고서 성가신 연우경을 이리저리 뜨거운 감자를 돌리듯이 던지고 있는 것이다.

“태이섭 상무님도 그러셨고, 유 실장님도 그러시고 저를 그만두게 하기는 곤란하신가 봐요. 저로서도 송백재는 상상만으로도 버겁습니다. 일단 맡은 걸로 되어 있는데 혹여 일전과 같은 기사나 사진으로 노여움을 산다면, 제가 속한 회사까지 영향이 미칠지 모릅니다. 그러니 저를 그만두게 하고 싶은 분께 정리해 주십사 부탁드리겠습니다.”

유 실장이 얼마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서 우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맞잡은 우경의 양손이 조금씩 떨렸다.

태준섭. 이렇게까지…….

유 실장의 시선이 떨리는 우경의 손에 잠시 머물렀다.

“내가 무능력하네요. 미안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경이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다리도 조금씩 떨렸지만 똑바로 걸을 수 있었다.

혼자 들떴던 지난 시간들이 부끄러웠다.

태준섭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아니, 태준섭이 자신을 보면 무어라 말해 줄까. 그 홍보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까.

그 사이에 연우경이라는 이름도 얼굴도 깡그리 잊었다 해도 좋았다. 앞으로 잘해 달라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 상상만으로도 CS에서 푹 패여 버린 자존심에 조금은 새살이 돋았다. 어리석은 상상과 순진한 기대가 비참하여 눈물이 고였다.

5시라 했지만, 홍보실에서 확인한 바로 태준섭 본부장은 아직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경은 태준섭 본부장실이 있는 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15분 넘게 기다리고 있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지나는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볼 뿐, 용건을 묻지도 우경을 막아서지도 않았다. 우경의 목에 걸린 ID카드 덕분이다. 대단한 ID카드를 걸고서 엘리베이터 층수를 목이 꺾어져라 올려다보았다.

빠르게 점멸하며 바뀌는 붉은 숫자가 촛불의 잔상처럼 망막에서 일그러졌다. TK와 태준섭 PR일을 맡은 이후 수면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일의 양도 많았고, 부담감은 어마어마했다. TK로 출근하라는 요구를 받은 후 지난밤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질거리는 눈을 감았다가 뜨자, 붉은 숫자는 30으로 바뀌었다.

혹시 이번에는…….

우경이 긴장감으로 양 손을 맞잡았다.

31, 32, 33.

신호음과 함께 숫자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 우경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중앙에 서서 제일 먼저 걸어 나오는 남자를 향해 인사했다. 평범한 목례로 답하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우경은 알아챌 수 있었다. 태준섭은 연우경을 기억하고 있구나. 그래서 거부했나. 이번에도 다섯 시즌은 지난 패션 같았나.

마주 선 채로 남자는 말이 없었다. 눈썹 끝이 올랐다가 떨어졌다. 혹시 나에게 용건이 있다면 말해 보라는 투였다.

“본부장님.”

우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보러 왔어요?”

“네.”

아, 남자가 숨과 함께 짧은 감탄사를 뱉어 냈다. 당황스럽다는 식이었지만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뒤에 선 직원을 향해 먼저 가 보시라 하고는 손목을 들어 시각을 확인했다.

“5분, 괜찮습니까?”

우경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답하기 전 시간을 정정했다.

“4분 20초네요. 정확히는.”

“1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래요, 말해 봐요.”

태준섭이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서 우경을 바라보았다.

“본부장님께서 저를 잘라 주세요.”

“응?”

준섭이 미간을 찡그리며 우경의 말을 되풀이했다.

“지금 연우경 씨를 나더러 잘라 달란 말을 하는 겁니까?”

“네. 다른 사람들 모두 그럴 수 없다 하시니 본부장님께서 직접 해 주십사 합니다.”

“아니 내가 왜.”

“포기하기 아까운 금액이지만, 저는 3개월 동안 공돈 받으며 놀 생각도 없고, 제가 건드려 보지도 못한 일로 책임을 떠안아 제 이름과 제 회사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모험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준섭은 우경의 말을 듣는 동안 미간을 찡그린 채였다. 굵은 눈썹 머리가 툭 불거져 보였다. 하, 준섭이 갑자기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핸드폰을 들어 버튼을 누르더니 간략하게 지시했다.

“나 5분 늦습니다.”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준섭이 우경에게 말했다.

“잘리게 만들었다고 따지러 온 줄 알았더니 잘라 달라 요구하러 왔네요.”

“네?”

“사태 파악이 조금은 된 거 같은데……, 아직은 정리가 안 됐고.”

준섭이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일단 답을 하죠. 못 자릅니다.”

“본부장님.”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송백재 빽을 자르나.”

“그런 말씀은…….”

우경이 저절로 실룩이는 입을 꾹 다물고서 준섭을 올려다보았다. 입술 대신 턱이 울렁였다.

“되게 억울한 표정이네.”

준섭이 시니컬하게 되물었다.

“왜, 거짓말 같아요?”

“네.”

“연우경 씨, 자격 미달이네.”

“네?”

준섭이 한 걸음 움직여 우경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좁혀진 거리에 우경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신체적 차이가 압도적이어서 그런지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준섭이 우경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잊을 수 없었던 체취가 호흡기를 밀고 들어왔다. 태준섭의 그 무엇도 닿지 않았는데, 마치 멱살이라도 잡힌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연우경 씨는 알량한 끼나 부려서 내 PR한다고 들쑤시기만 했지, 정작 나를 모르잖아. 안 그래?”

숨을 들이켠 채 답을 하지 못하는 우경을 두고서 준섭이 돌아섰다. 우경이 목소리를 겨우 쥐어짜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기회를 주십시오.”

대꾸해 줄 필요도 없다는 의미인지, 준섭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전략기획본부실로 큰 걸음을 옮겼다.

“제가, 본부장님을 알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지 않았습니까.”

준섭이 뒷모습을 보인 채로 멈추어 섰다.

“죄송합니다. 말씀대로 제대로 모르고서 했습니다. 알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십시오.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등에 대고 말하는 우경을 향해 준섭이 비스듬히 돌아다보았다.

“나를 제대로 알게 되면 말이죠.”

우경이 고개를 들고 준섭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준섭의 입가에 모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연우경 씨가 실망할 텐데.”

“아니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준섭이 프흣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진심으로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회의 마치고 C호텔에서 저녁 약속 있습니다. 이후 스케줄은 뒤로 늦추도록 조정해 볼까 하는데.”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반 시간도 못 내어 줄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C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손을 들어 까닥 흔들어 보이고서 준섭이 큰 걸음으로 움직였다.

* * *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정작 태준섭 상무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C호텔에서 저녁 약속이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우경은 6시가 좀 넘어서부터 C호텔 로비에서 대기 상태였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태준섭의 모습을 본 건 7시였다. 만나 준다고 했으니 느긋하게 마음먹자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초조해졌다.

우경이 준섭의 핸드폰 번호를 모를 뿐 아니라 준섭 역시 우경의 번호를 물어보지 않았다. 물론 유 실장을 통해서 우경의 번호를 물을 수는 있지만, 33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인 태도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로비를 잠시도 뜨지 않고 기다리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제 9시 10분 전이다. 핸드폰 배터리는 20%도 남지 않았다. 혹시나 핸드폰으로 전화를 줄 수도 있어 근처에 충전을 맡기러 가기도 난감했다. 그런 와중에 대책 없이 배가 고팠다. 홍보실의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점심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으로 때웠고, 이후에 먹은 거라곤 유 실장 방에서 마신 보리 음료가 전부였다.

속이 맹렬히 쓰라렸다. 우경은 위장을 지그시 눌러 보고 가방 속에 챙겨 온 자료들을 꺼내어 읽었다. 붉은 펜으로 밑줄을 긋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궁금증을 노트하며 배고픔도 불안감도 잊으려 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 목이 아파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드는데 머뭇거리며 제 쪽을 향해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혹시 연우경 씨 되십니까?”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남자였다.

“네, 그런데요.”

“안녕하세요.”

남자가 꾸벅 인사를 했다.

“저는 강우식 대리입니다. 태준섭 본부장님 모시고 있습니다.”

“아, 네.”

우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우식이 그러실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본부장님께서 저녁 식사가 길어지는 바람에 다음 약속 장소로 바로 가셨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라고, 추후에 연락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 여기서 눈 빠지게 기다렸는데요. 안 나오셨어요.”

거짓말로 따돌리지 말라는 원망 섞인 비난으로 들렸는지 남자가 당황하며 설명을 더했다.

“그게 아니라요, 다음 약속도 이 호텔이라 장소만 이동하셨습니다.”

“그럼 아직 여기 계시는 거죠?”

우경이 활짝 웃자, 입장이 곤란해진 남자는 뒷목덜미를 한 번 쓱 긁었다.

“기왕 기다린 거 조금만 더 기다릴게요.”

“힘드실 텐데 들어가시는 게 아무래도 좋으실 텐데…….”

우경이 남자를 향해 생글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강 대리님, 말씀 전하신 건 잘 들었고 저도 여기 볼일이 있어 자연스레 기다린 걸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실은 이거 다 봐야 하거든요.”

우경이 두툼한 자료 파일을 들어 보였다.

“그러시다면……. 근데, 저…….”

남자가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혼잣말을 하면서 우경을 채근하는 눈치였지만 우경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프린트된 종이만 넘겼다.

끄덕, 고개가 다시 처졌다. 우경은 머리를 털어 내고 눈을 깜박였다. 목을 좌우로 번갈아 늘여보고는 펜을 쥐고 자료를 넘겼다. 핸드폰 배터리는 한참 전에 방전되었다. 어떻게 17%에서 문자 하나 받으니 바로 꺼져 버릴 수 있냔 말이다.

꺼지기 직전 시각은 9시 34분이었다. 지금은 손목시계를 차고 있지 않아 몇 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호텔 식당은 11시면 닫으니 어떻든 오늘 안으로는 나오겠지 싶다.

우경이 앉아 있는 로비 소파에서 엘리베이터 방향을 보면 자연스레 로비 정중앙에 위치한 센터피스가 보인다. 반질거리는 윤택이 흐르는 검은빛 거대한 도자 화병 세 개에 키가 큰 붉은 장미와 장미가 꽂힌 가장자리 안쪽으로 장미보다 키가 큰 푸른 대나무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멀리서도 볼륨감이 느껴지는 도자 화병은 잘 가꾸어진 정원 한 귀퉁이를 퍼다 놓은 듯한 원형의 받침 위에 서 있다. 초록, 검정, 빨강. 강렬한 보색의 대비를 의도적으로 끌어낸 센터피스를 저녁 내내 쳐다보다 보니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도자 화병의 대나무 숫자를 하나씩 세어 보다가 우경은 다시 꾸벅 고개를 떨어뜨렸다. 화장실에 들른 후에 찬물에 손이라도 씻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 사이 태준섭이 나와서 가 버린다면 너무 억울하니까 손마디를 꾹꾹 누르는 것으로 졸음을 쫓으려 애썼다. 그러다가 눈이 너무 쓰라려 자료 파일을 끌어안고 머리를 잠시 기대었다.

태준섭, 빨리 나오라고.

우경은 바싹 마른 입술로 중얼거렸다.

꿀처럼 끈끈한 잠에서 흠칫 몸을 떨며 깨어났을 때, 우경은 반사적으로 엘리베이터 방향을 보았다. 멀리 솟아오른 푸른 대나무 가지와 대나무 아랫부분을 둘러싼 붉은 장미……, 그리곤 놀라움으로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우경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소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준섭이 일어섰다.

“어,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몰랐어요.”

우경이 급히 따라 일어섰다. 안고 있던 파일을 가방에 쑤셔 넣고 머리를 매만졌다. 준섭이 못마땅한 투로 물었다.

“가라는 전달 왜 씹습니까.”

“어차피 자료도 봐야 하고 해서.”

“핸드폰은 왜 껐어요?”

“끈 게 아니라 꺼졌습니다.”

준섭이 기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약속 중에 나오신 거라면, 저 더 기다릴 수 있어요. 혹시…… 오늘 시간이 늦어 피곤하시다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어이없네. 그럴 거 왜 버티고 기다립니까.”

“얼굴 뵙고 가려고요.”

준섭의 얼굴을 살피며 우경이 조심스레 답했다. 딱 떨어지는 슈트 차림은 여전히 각이 살아 있고 파르스름해진 턱 주변 외에는 아침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말끔한 외모였지만, 깊게 감았다가 뜨는 눈동자에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내일 반도체 생산 현장 출장이시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름대로 정리한 부분은 유 실장님 통해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부탁이 있다면, 다른 건 모르겠지만 배포 기사 내용은…….”

“됐고.”

준섭이 우경의 말을 끊어냈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네? 저녁 식사 하셨잖아요?”

“연우경 씨가 배고픈 얼굴입니다.”

“그래도. 본부장님은 드셨는데…….”

“두 번 먹었는데 뭐 세 번은 못 먹을까.”

그렇게 말하며 준섭이 우경 쪽으로 갑자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우경은 움칫 뒤로 물러섰다. 몸을 편 준섭의 손에 붉은 사인펜이 들려 있었다.

“덜렁거리는 편인가, 자주 떨어뜨리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펜도 두 번뿐인데요…….”

우경이 손을 내밀었지만 펜은 우경의 손바닥 대신 준섭의 양복 안주머니에 쏙 하고 들어갔다. 눈을 크게 뜨는 우경에게 준섭이 유치한 농담을 했다.

“주운 사람이 임자라는 말 있지 않습니까, 떨어뜨린 줄도 몰랐으니 주운 사람이 가집시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서 있는 우경을 두고서 준섭이 큰 보폭으로 움직였다. 우경이 급히 준섭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중식, 이탈리아, 프렌치, 한식, 일식. 골라 봐요.”

“지금 호텔 식당 주문은 마감 아닌가요.”

“그런데?”

태준섭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이었다. 빨리 고르라는 듯 턱을 조금 들어 보였다.

“식사는 괜찮습니다.”

“시간 달라면서요.”

“네, 30분 정도만이라도.”

“그럼 간단하게 먹으며 이야기합시다. 내가 필요해서 그래요.”

준섭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넘어다보니 10시 30분이 훌쩍 넘은 시간이다.

“그러면, 저…… 우동 국물이요. 속이 좀 아파서.”

“그래요, 그럼.”

“그런데 본부장님.”

우경이 발을 표시 나지 않게 잘게 움직이다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부끄러워 귀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응?”

우경은 엘리베이터 층수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할 말 있습니까?”

“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우경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잠시만, 손 좀…….”

응? 묻듯이 준섭이 눈썹 끝을 들어 올렸다.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마주치자 무안함에 눈자위까지 화끈거렸다.

“다녀와요. 기다릴 테니.”

우경이 뒤돌아서 후다닥 뛰어가기 전, 준섭이 가볍게 주먹을 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우경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준섭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대각으로 맞은편 기둥에 등을 반쯤 기대어 서 있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데도 긴 다리 때문인지 더 키가 커 보였다. 준섭은 핸드폰을 들고서 무언가 확인하느라 우경이 몇 발 더 다가가서야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닿은 시선에 얼굴이 달아올라 우경은 손을 뺨 위로 가져다 대었다.

“이제 갈까요.”

“……네.”

조그맣게 답하자 준섭이 이유 없이 다시 웃었다.

“우동이라면, 여기보다는 맛있는 곳이 있는데.”

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어디든 좋습니다.”

* * *

준섭이 우경을 데리고 간 곳은 차로 10분쯤 거리에 있는 자그마한 이자카야였다. 미리 전화를 해 두었는지, 안쪽에 있는 룸에 들어가자마자 뜨거운 우동 두 그릇이 서빙되었다. 준섭은 슈트 상의를 벗고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마주 앉았다.

“먹읍시다.”

준섭에 대해 알 기회를 달라고 그렇게 매달려 놓고서, 우경은 질문보다 숟가락을 먼저 들었다. 가쓰오부시향이 진한 뜨거운 국물을 한입 삼키자 살 것 같았다. 한 숟갈 더 먹고서, 우경은 고개를 들어 준섭을 쳐다보았다.

“천천히 들어요.”

정말 저녁 식사를 세 번 할 수 있다는 듯 준섭이 젓가락을 들어 우동발을 집어 올렸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굵고 탱탱한 우동발이 준섭의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우경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맛있어 보여요?”

국물이 묻어 윤기가 반짝이는 입술을 열고 준섭이 물었다.

“바꿀까?”

“아니요.”

같은 우동인데, 놀리는 듯한 말투다. 우경이 시선을 떨어뜨리고 우동 국물을 퍼올렸다. 후루룩, 앞에 앉은 남자가 힘차게 우동발을 빨아당기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남자의 얼굴은 볼이 살짝 안으로 말려 들어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남자의 둥글어진 입술 사이로 탄력 좋은 우동발이 리듬감 있게 쏙 빨려 올라갔다. 촉, 작은 소리가 들릴 만큼 우경은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급히 숙이고 국물을 퍼올렸다. 이마께로 곧장 떨어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국물을 홀짝거리며 검은 무쇠 그릇만 바라보았다.

“뜨거워요?”

남자의 물음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는데.”

우경이 손등으로 제 뺨을 눌렀다.

“목까지 빨개.”

준섭이 손을 뻗어 우경 앞에 놓인 잔에 미지근한 녹차를 따라 주었다. 잔을 들어 차를 비울 동안 시선은 한 번도 떼지 않았다.

“물로만 배를 채울 생각입니까?”

“잘……, 안 들어가네요.”

“많이 긴장했습니까?”

우경은 열이 오른 입술을 꾹 맞물렸다가 떼어 냈다.

“이러면 곤란한데…….”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말을 하며 준섭은 타이 매듭을 조금 끌어당겨 내렸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잖습니까.”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우경이 젓가락을 들어 우동발을 집어 들었다. 긴장한 탓인지 힘껏 빨아당겼지만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제발 그만 봐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남자의 눈이 우경을 곧바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시선에 몸이 익을 것만 같았다.

면을 추르릅거리며 먹는 소리는 경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 목이 뻣뻣해졌는데 결국 툭 올라와 입속을 꽉 채운 우동발에 사레가 걸렸다. 우경은 입을 가리고 고통스럽게 기침을 했다. 지금으로선 고작 우동발을 흉하게 뱉어 내지 않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저런…….”

남자가 채워 준 녹차를 마시고 다시 기침을 하고서 사레는 멈췄다. 냅킨이 어디 있더라 고개를 돌리는데 코앞까지 불쑥 기다란 손가락이 다가왔다. 남자가 검지로 우경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고 엄지로 입가에 묻은 물기를 문질렀다. 너무 자연스러워 뭐라 말할 기회조차 놓쳐 버렸다.

우경은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준섭의 눈과 비스듬히 벌어지는 입술만 바라보았다. 엄지가 아랫입술 중심을 꾹 누르는 순간 우경이 손가락을 사이에 두고서 입을 다물었다. 준섭의 눈동자에 웃음이 떠올랐다. 손가락을 빼어 내며 물었다.

“이제…… 괜찮습니까?”

“네.”

“많이 배고팠나 봐요.”

“네.”

“왜 굶으면서 기다려요?”

“그냥 가실까 봐.”

“난 약속은 지키는 편인데.”

“제가 없으면, 제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실 테니까.”

“미련하네.”

“죄송합니다.”

준섭이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히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약삭빠른 것보다 좋지.”

“본부장님은…….”

“응?”

“저녁 약속 있으셨는데, 못 드셨어요?”

두 번이나? 라는 말을 생략하고 우경이 물었다.

“첫 번째는 두 번째 약속이 있으니 일부러 적게 먹었고, 두 번째는 빨리 마무리 짓느라 말을 많이 했습니다. 먹을 틈이 없었죠.”

혹시, 저 때문이신가요? 멍청한 질문을 하려는 혓바닥을 겨우 진정시켰다. 눈앞의 남자는 연우경이 꿈꾸던 이상형 남자가 아니라, TK 태준섭 본부장이다.

“우동 좋아하시나 봐요.”

“먹는 거 안 가립니다.”

다시 볼이 패이게 우동을 삼키며 준섭이 답했다. 우경도 이번에는 우동발을 제대로 빨아올렸다.

둘 다 우동 그릇을 반 정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섭이 걸어 둔 재킷을 집어 들고는 불렀다.

“연우경 씨.”

재킷에 팔을 꿰어 넣느라 팽팽해진 와이셔츠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근육들은 슈트로 가려져 있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해 보였다.

“이제 나에 대해 좀 알게 됐습니까?”

우경은 답하지 못했다. 30분 넘게 시간을 줬지만 고작 물어본 건 우동을 좋아하시냐, 식사는 왜 하지 못했냐 같은 질문뿐이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에게 일하도록 기회를 주실 분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준섭이 재킷 단추를 잠그며 우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련한데 눈치가 빠르네.”

깍듯한 존대와 자연스런 반말을 섞어 쓰는 말투였지만 이번에는 엄연하게 달랐다. 무딘 칼날 같은 무례함이었다. 단추를 다 잠그고 허리를 곧게 펴고서 그리하여 키 차이가 한참인 우경을 자연스레 깔아 보며 준섭이 말했다.

“TK에서 내 입지는 좁아. 높고 좁은 평균대 같은 입지야. 대신 난 비위도 좋고 식성도 좋아서 떨어지는 걸 넙죽넙죽 잘 주워 먹어. 체하지 않을 만큼 영리하기도 하지. 그리고 말야.”

준섭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목울대가 느릿하게 솟았다가 떨어졌다.

“탐나는 것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라, 비열하게 취하고 가차 없이 버려.”

얼이 빠진 듯 서 있는 우경에게 준섭이 팔을 들어 가까이 와 보라 손짓했다.

“손.”

얼떨결에 내민 손바닥 위로 준섭의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닿는 온도가 뜨거워 우경은 준섭의 눈을 바라보았다. 열기를 읽을 수 없는 눈을 하고서 준섭이 말했다.

“내일 출장 수행하지.”

손이 떨어진 자리에 태준섭의 명함이 남아 있었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창 너머로 보이는 도심 거리에 멍하니 초점을 맞추었다. 버스가 달리는 반대 방향으로 거리가 흘러 지나고, 초점은 그 위를 맥없이 미끄러졌다. 버스가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일 때마다 우경은 손잡이에 올려 둔 손이 떨어질 것만 같아 자꾸만 힘을 더했다. 자료 파일을 넣은 가방은 어깨를 짓누르고, 모래알이 박힌 것처럼 눈이 따끔거렸다. 감기 몸살이라도 걸린 듯 몸이 욱신대기 시작했다.

남자의 검지가 스쳤던 눈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우경은 앞니를 세워 아랫입술을 긁었다. 한 번, 두 번……. 남자가 엄지로 꾹 눌렀던 자리가 부풀어 오를 때까지 세차게 긁어 댔다. 우경의 앞쪽 자리에 앉아 졸던 아주머니가 급히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 아주머니가 일어서자, 그 자리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았다. 우경은 가려운 입술을 다시 이로 긁었다.

숨은 그림처럼 사진 속 배경에 묻혀 있던 남자를 굳이 알아보고, 확대하고, 그 남자를 상대로 상상을 하고, 그러면서 조금 설레곤 했었다. 태준섭은 그런 우경을 환히 들여다봤다는 듯이 굴고는, 그러면서도 전혀 모른다는 듯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런 태연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우경은 남자의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그리고 닿지 않은 곳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재킷을 입느라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희미하게 드러나는 근육을 탐하며 내려가던 시선이 벨트 버클 아래에서 툭 멈추었다. 흥분한 남성이 감추어질 수 없을 만큼 확연했다. 하아, 저도 모르게 숨을 내어 쉬며 급히 시선을 들었을 때, 남자의 얼굴에는 미세한 균열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나에 대해 좀 알게 됐습니까.’

느리고 태연한 물음이었다. 조각상같이 견고한 얼굴 외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남자였다. 내가 너의 욕망을 이미 알고 있듯이, 이제 너도 내 욕망을 알게 되었냐는 뻔뻔한 물음을 중의적으로 내포하고서 태준섭이 우경을 내려다보았다. 우경은 부끄러움으로 타 죽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우경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서 그날 처음 만났던 로비에서의 대화를 떠올린다.

‘이름 뭐예요?’

이루 말할 수 없이 한심한 질문.

‘전투력은 이럴 때만 고조되나.’

짧은 비웃음.

그때였을까. 모든 마음이 들켜 버린 건…….

‘하필 오늘, 이런 타이밍에. 여기가 아니었다면.’

‘어떤 날, 어떤 곳이면 좋았겠습니까?’

우경은 뜨거워진 눈을 감았다. 손바닥에 올려진 TK 태준섭의 명함 모서리가 날카로웠다. 그는 예의 바르게 모욕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 남자 앞에서는 내내,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사장 위를 맨몸으로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어떤 날, 어떤 곳…….

어떤 날 어떤 곳이었더라도, 태준섭이 아니었다면.

* * *

우경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자 백설이가 캉캉 하고서 반갑게 짖었다. 엄마가 소파에서 통 튀어 오르는 공처럼 일어서서 다가왔다. 배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지 팔에 백설이를 안고 있다.

거실 티비에는 재방송되는 드라마가 한창이다. 키가 큰 남자가 긴 코트를 입고 걸어가고 있다. 배경으로 깔리는 남자 배우의 중저음의 나레이션은 우경도 기억한다. 엄마는 저 드라마를 몇 번을 반복해서 봐도 질리지 않는 걸까, 싶다.

“우경아, 너 전화도 꺼져 있고!”

엄마의 화난 목소리에 백설이가 끄응 소리를 내며 핑크색 혓바닥을 내밀어 엄마 손을 핥았다. 백설이는 실켓 모질의 하얗고 긴 털, 동그랗고 새카만 눈, 짧은 머즐에 예쁘고 까만 코를 가진 마르티스다. 이제 다섯 살, 풀코트 마르티스 특유의 우아함에 강아지다운 개구짐이 있어 너무너무 사랑스럽다.

“쏘리. 꺼져 버렸어. 갑자기 배터리가 나가는 바람에. 아빠는 주무시죠?”

“당연하지, 지금이 몇 신데.”

우경이 재바르게 사과하며 백설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백설이가 우경에게 건너오겠다고 허공에서 발을 바둥거렸다. 우경이 백설이의 말랑말랑한 발바닥을 만졌다. 쫀득한 촉감에 걱정이 스르륵 녹아 버린다.

이리 와, 가슴에 달랑 안고는 우경만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를 보며 웃어 주었다.

“울 백설이, 머리끈 바꿨네에. 요게 뭐에요오. 반짝반짝 왕관 머리끈이에요? 세상에 보석이 총총총 진짜 공주네, 백설 공주. 요러케 예쁜 건 어디서 난 거야. 엄마가 오늘도 백설이 빗기고 광내느라 고생했겠어어. 완전 우아우아 공주니임.”

우경이 엄마의 최애, 백설이를 칭찬하자 엄마도 금세 목소리가 누그러진다.

“엄마 너 엄청 걱정했어. 아버지한테는 통화되었다고 둘러대고는 혼자서 얼마나…….”

“미안. 외근 나가서 늦게까지 미팅 있었는데 마땅히 충전할 틈이 없었어. 담에는 보조배터리 들고 나갈게.”

우경은 제 턱을 열심히 핥고 있는 백설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엄마에게 건넸다.

“언니 옷 갈아입어야 해. 백설이는 엄마한테 가자.”

할 수 있는 잔소리를 다 커버해서 답했다고 생각했는데, 우경이 방으로 들어가자 엄마가 바로 붙어 따라 들어왔다.

“일이 많아? 힘들어?”

“할 만해.”

옷장 문을 열고 재킷을 옷걸이에 거는 동안 엄마는 아예 장 속에 들어갈 기세였다.

“우경아,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울었니?”

“울긴.”

“그런데 왜 부었어?”

“조금 피곤하고, 저녁도 늦게 먹었고.”

“그래? 뭐 먹었는데?”

“우동.”

우경이 파자마를 입으며 생긋 웃었다.

“맛있었어?”

엄마가 눈이 반짝한다. 우동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끓여 먹을 분이지.

“소공동 근처, 첨 가 보는 일식 주점이었는데 맛있더라고요. 담에 같이 가 볼까?”

“주점은 무슨.”

“왜애, 엄마 술 잘 마시잖아.”

“너 그러니까 갑자기 우동에 술 한잔 당긴다.”

“오뎅집 가고 싶어?”

“아니 아니, 늦었어. 너무.”

그러면서도 흘끗 시계를 확인하는 눈치가 우동에 미련이 짙다. 늦은 밤 가끔씩 엄마랑 근처 어묵과 우동을 파는 가게에 가서 어묵꼬치와 우동을 놓고서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곤 했는데, 오늘은 도저히 아니다.

“에이, 남포동 오뎅집 가고 싶은 얼굴이네 뭐. 그런데 나 어쩌지? 오늘은 일 좀 더 해야 하고, 내일 지방도 가야 하고.”

“아냐 아냐. 근데 이 시간에 또 무슨 일?”

“내일 아침에 회의할 자료가 덜 됐어요.”

엄마가 못마땅한지 입을 쭉 내밀었다.

“아이고, 소운이 회사로 옮기더니만 일이 더 많어.”

“그렇지 뭐. 사람이 늘 부족하니까.”

침대 위에 걸터앉았던 우경이 앞다리를 들며 낑낑거리는 백설이를 답싹 안고 일어섰다.

“백설이, 졸려요?”

우경이 슬쩍 문가로 향했다. 백설이를 엄마에게 안겨 주고서 엄마를 자연스레 내보낼 생각이었다.

“돈은 더 많이 벌어?”

“일 많이 할수록 많이 벌어요. 그러기로 계약하고 들어갔으니까.”

TK에서 받은 말도 안 되는 금액은 비밀이었다. 언제 토해 내야 할지도 모르는 돈이라 우경도 한 푼 건드려 보지도 못했다.

“아, 맞다. 내 정신. 서동진 말이야. 그 안과 의사.”

엄마가 문가에서 돌아서며 말했다. 서동재예요, 라고 우경은 정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없어진 사람이니까.

그날 태준섭을 로비에서 마주치고 비를 흠뻑 맞으며 기다렸던 날, 우경은 집 앞까지 가서야 서동재와 선을 보지 못한 일로 엄마가 폭풍 잔소리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혼란으로 뒤죽박죽인 머릿속에서 적당한 말을 애써 고르고 있는데 엄마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남자 쪽에서 급한 일이 생겨 약속을 못 지켜 너무 미안하다는 사과를 마사지숍 원장을 통해 엄마에게도 했다고. 매너는 최고로 좋은 남자였다. 선을 보지 못한 이유까지 제 탓으로 매끄럽게 마무리 지어 줬다.

“아, 안과……. 네.”

“그때, 선 못 봐서 너무 미안하다고 남자 엄마가 또 사과 인사 전해 달라 하더래.”

“저도 그날 어차피 회사 비상이어서 안 되었어요.”

“아무튼, 마사지숍 원장한테 너도 됐네 안 됐네 그 말은 할 건 없고.”

엄마가 단단히 당부를 하고는 다시 희망을 담아 말했다.

“그쪽 엄마가 너무 미안해하면서 네 번호 아니까 아들이 곧 다시 연락해서 본다 그랬는데 하필 그 의사가 대학교수님 따라서 미국 연수를 두어 달 간다나. 언제쯤 간다 간다 하고 확정이 안 되었는데 예상보다 3주 빨리 가게 되었대. 가기 전에 선본다 그랬는데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고.”

엄마의 체면을 완벽하게 살려 주는 배려라니, 서동재에게 고맙다고 서초구 쪽을 향해 인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쉬워라. 인연이 아닌가 봐. 울 백설이 얼렁 가서 코코 자. 빠빠이.”

아무렇게나 말하고는 우경은 엄마를 성공적으로 문 밖으로 내보냈다.

“얘, 인연은 모르는 거야. 세상엔 거짓말같이 연결되는 인연이 얼마나 많은데.”

문이 닫히기 전에 엄마가 말했다.

“그러게, 엄마.”

이런 거짓말 같은 더러운 우연도 인연이라면, 있네.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우경은 태준섭을 생각했다.

‘미련한데 눈치가 빠르네.’

무딘 칼날처럼 가슴을 갈라내던 태준섭의 말을, 그 말을 내뱉는 얼굴을 곱씹었다. 위험할 만큼 팽팽하게 부푼 욕망 따위 완벽하게 가리고서, 군장을 갖춘 그리스 전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사를 하며 던졌던 말들이 하나하나 꺼풀을 벗고서 남자의 욕망을 담은 언어가 되어 우경의 내부를 흔든다.

‘맛있어 보여요?’

우경은 가방 속에서 파일을 꺼내어 책상 위에 하나씩 펼쳤다.

태준섭의 기사, 태준섭의 사진, TK, 반도체 산업…….

카메라 렌즈를 곧바로 응시하는 태준섭의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취한 사람처럼 눈앞이 빙글 돌아간다.

이 일을 계속하는 건…… 태준섭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야.

우경이 부풀어 오른 아랫입술을 다시 긁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