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4화 (4/23)

4장

“미친, 미친, 미친!”

브런치의 행운은 사실이었다. 우유병을 머리에 이고 가던 어리석은 처녀의 상상은 데이드림이었지만, 현아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브런치를 먹은 그날 퇴근 시간 무렵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상상을 현실로 바꾸었다. 소운이 수화기를 내리고는 펄쩍펄쩍 뛰었다.

“TK야 TK. 미친! 이런 대박이!”

뜻밖의 행운에 복권 당첨이라도 된 듯 사무실이 술렁였다. 소운이 슬쩍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연우경 팀장이 하는 조건이긴 해. 우경이……. 괜찮지?”

회사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우경이 거절할 여지는 없었다.

“그럼요.”

“응, 일단 6개월 계약이야. 연우경 팀장이 초기 3개월은 풀타임 TK전자 전담으로 일해 달래.”

회사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면 간을 내어 달라는 용궁의 요구여도 오케이해야 할 분위기였다. 어떻든 또 TK구나. 우경이 씁쓸한 마음을 감추고서 소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TK가 기업 광고도 완전 공개 입찰을 해서 소규모 광고 대행사들이 들썩였는데 홍보도 그런가 봐요!”

현아가 흥분해서 소리를 높였다.

TK와 계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요청이 들어온 다음 날 오전, 바로 정식 체결되었고, 우경 역시 TK 관련 홍보 업무를 그 다음 날부터 시작했다. TK 요청으로 CSR 사업 관련한 피처 기사 두 건, 그와 관련하여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 채널을 통한 PR이 주된 범위였는데 전 회사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지라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해서 TK로부터 온 새로운 요청에 우경은 적잖이 당황했다.

“태준섭 상무 말씀이세요?”

“그러게. 그러네.”

소운이 곤란한 표정으로 우경을 쳐다보았다.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로열패밀리 이미지 관리를 왜 저희한테 맡기나요. 회사에서 전담하는 팀이나 직원들이 있을 텐데.”

“부담이지?”

“네, 로열패밀리 관련 기사나 SNS에 올릴 글에 대해 가이드를 준다면 매끄럽게 다듬고 배포하는 정도는 해요. 하지만 이미지 관리 요청이라면, 분명 그걸 넘어서는 범위를 요구하는 듯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리예요. 현재 태준섭 상무 담당하는 직원들과 조율하는 과정도 저희 같은 업체에겐 너무 부담이고요.”

더군다나 태준섭이라니. 우경은 준섭의 무참한 거절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조차 ‘그렇게 물어뜯으면 피 나지 않냐’ 묻던 목소리, 뭉근한 욕망 같은 열기를 품고 있던 눈동자와 기다란 검지로 툭 건드리던 남자의 육감적인 아랫입술이 떠올랐다. 불쾌한 우연은 이미 충분하다. 우경은 고개를 저었다.

“무리예요.”

“그래, 굳이 계약을 들먹이며 해야 한다고 거듭 요구하면, 내가 할게. 넌 백업하고.”

소운이 맡아 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소운이 진행하고 관리하는 고객사 일을 전부 다른 이에게 넘기고 전담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에이블은 TK의 단발성 계약 외엔 중요한 고객들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소운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라고 잘할까 싶지만 말이야.”

“대표님 그건……. 지금 하시는 일은 어떡하고요.”

“일단 우리 사정 말해 보자. 잘 말할게.”

소운이 우경의 손등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려놓았다. 저도 모르게 꽉 쥐어 뼈가 도드라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TK 내부적으로 이유가 있나 봐. 본인들도 알 거야. 얼마나 부담스러운 요구인지.”

우경이 눈을 맞추는 소운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우경이 TK CSR 사업 관련 홍보를 위해 포털 관계자를 만나고 돌아온 시각은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대체로 저녁 식사를 하며 고객사나 기자, 인플루언서들과 미팅을 하기 때문에 소운 외에 다른 직원들은 모두 자리에 없었다. 소운도 우경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연방 시계를 확인하며 빠르게 용건을 전했다.

“TK 쪽에 우리 사정 설명했어. 다행히 입장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더라. 상의한 후에 다시 알려 주기로 했고, 담당 AE와 직접 이야기하고 싶대. 외부 미팅이라고 7시 넘어야 한다고 했더니 내일 오전에 연락 달라고 하더라.”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우경이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내 꽉 막혀 있던 걱정거리가 스르륵 그 숨 속에 녹아내렸다.

“그래. 너 얼굴 보고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기다렸어. 난 지금 나가야 해. 늦었어. 너도 CSR 홍보 기사 업로드하고 얼른 퇴근해.”

“오늘 TK 건으로 정신없으셨죠.”

“당연하지. 떨려서 미치는 줄 알았다. 살다보니 TK한테 내가 군소리도 다 해 보고.”

“죄송해요.”

“아냐. 별 희한한 우연도 다있지. 너랑 TK 그 사람이랑.”

갑자기 우경의 머릿속에서 CS에서 TK 캠페인을 맡으면서 느꼈던 흥분, 은철의 모욕, 태준섭의 거부, 퇴사까지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재생되었다.

“……고마워요. 언니.”

눈물이 핑그르르 돌아 우경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소운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야아! 설마 너 울어?”

우경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울긴요!”

“그래, 파이팅이다.”

소운이 사무실을 나간 후, 우경은 소운이 습관처럼 말했던 ‘파이팅’을 한 번 더 속으로 외쳤다. CSR 피처 기사를 마무리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얼굴과 이름을 꾹꾹 눌러 지웠다.

태준섭, 재수 없어. 내가 너 이미지를 관리하라고? 그래, 맡겨 보세요. 철 지난 패션 같은 이미지가 되실 겁니다.

혼자 비웃어 주고 나니 약간은 기분이 좋아졌다. CSR의 큰 주제는 공동체와 함께하는 TK였다. ‘TK와 함께하는 미래 이야기’첫 번째 이벤트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환경 미술 대회였다. 해양 쓰레기 정화 작업을 위해 지역 사회를 환기시키고 참여하는 학생 수에 비례하여 TK의 후원금이 커지게 된다. 우선 대회 홍보에 대한 부분은 포털과 SNS로 가닥이 잡혔다.

큰 틀 안에서 소소한 세부 행사에 대한 아이디어를 정리해야 하는데 미술 대회라면 참여하는 학생들이 최대한 편안하게 즐기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야 단순한 홍보성 행사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우경은 ‘미술 대회, 필요한 준비물?’ 이라고 쓰고 붓을 씻을 물 공급, 사용한 물을 버리는 곳, 학생들의 자리 배치, 학부모 대기 장소, 대기 시간 동안 즐길 수 있는 행사, 대회를 마친 아이들을 위한 이벤트, 라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무작위로 아이디어 노트에 적어 놓았다.

미술 대회에 참여하는 어머니들과 인터뷰도 좋을 것 같았다. ‘미술 학원에 연락해 보기’라고도 써 두었다. 미술 학원 어디에 연락을 해 봐야 하나 아무래도 예중 입시생이 많은 학원이 대회 경험도 풍부할 테니…….

검색을 하던 우경이 노트에 ‘예중 입시생 학원에 홍보’라고 추가하던 중이었다. 핸드폰 벨이 울렸다.

“네.”

- 안녕하세요. 연우경 AE되시죠.

“네, 그런데요.”

- TK에서 연락드립니다.

우경은 쥐고 있던 펜을 놓고서 저도 모르게 바른 자세로 앉았다.

- 태준섭 상무 이미지 관련 건으로 뵙고 말씀을 좀 나눴으면 합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신중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긴장이 되는 면이 있었다. 우경은 떨림을 감추며 차분히 답했다.

“네, 좋습니다. 언제 어디로 가면 될까요? 편하신 장소와 시간 알려 주시면 제가 맞춰 보겠습니다.”

- 혹시 지금은 어려우십니까?

“네? 지금이요?”

우경이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7시 35분.

- 퇴근하셔서 곤란하시다면, 내일…….

“아니에요. 아직 사무실입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 괜찮으시다면, 음…….

남자가 보이는 망설임에 우경은 바싹 긴장이 되었다. 짧은 침묵 후 남자가 물었다.

- 일이 있어 근처에 있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도 좋은데 어떠신지요?

“여기, 에이블 사무실 말씀이신가요?”

- 17층 맞으시죠?

“네.”

- 그럼, 곧 뵙죠. 연우경 AE.

끊어진 핸드폰을 들고서 우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홀린 듯이 통화를 하고 보니 TK라고 들었을 뿐 누군지 이름도 직함도 묻지 못했다. 젊은 남자 목소리였으니 홍보 담당 대리나 과장 같은 실무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마 부장급 책임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잘 하고 이해를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무실에 대접할 차가 뭐가 있지. 우경이 차 종류가 비치된 선반으로 다가가던 참에 툭툭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에, 답하며 돌아선 우경은 잠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선반을 뒤로 짚고서 간신히 주저앉지 않고 서 있는 우경을 보고서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목소리만큼, 사진보다 더, 화면보다 훨씬 더 나긋한 미소였다.

태이섭이다. 태서우 부회장의 아들, 태이섭.

아무리 눈을 깜박여 봐도 착각이 아니었다.

“연우경 씨?”

“네…….”

우경은 반쯤 얼이 빠져 답을 했다.

“어디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요…….”

이섭의 시선이 빠르게 사무실을 훑었다. 자그마한 사무실엔 따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응접세트 같은 건 없다. 당혹감에 우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자리가 마땅치 않으시죠.”

“아니에요. 연우경 AE 자리가 저깁니까?”

이섭이 모니터가 켜진 우경의 책상을 보며 물었다.

“네.”

책상으로 향하는 이섭을 보며 우경이 급히 다가섰다. 옆자리 현아의 의자를 빼어 내 권하기 전에 이섭도 의자 등받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얼결에 우경의 손 위로 이섭이 손을 겹치게 되었다. 움칫 놀라며 손을 떼어 내고 뒷걸음질을 치느라 오히려 우경은 이섭에게 부딪히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이섭이 당황했는지 여자처럼 곱고 흰 볼이 옅게 물들었다가가 사라졌다. 아, 하고선 잠시 말이 없었다. 우경이 물러서서 빤히 올려다보니 그제야 조금 웃었다.

“제가 죄송하죠.”

“앉으세요. 상무님.”

“저 누군지 아시나 봐요.”

이섭이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많이 얼떨떨해요.”

우경은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 이섭을 또 빤히 바라보았다. 이섭이 약간 웃으며 손가락으로 제 뺨을 슬쩍 긁어내렸다.

“좀 무안해요. 그렇게 빤히 보시면.”

“제가 결례를 범했네요. 너무 믿어지지가 않아서, 아마도……. 꿈 같기도 하고요.”

우경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꿈까지야.”

싱긋 웃는 이섭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차 대접해야 하는데, 사무실에 커피랑 녹차 티백만 있어요.”

“차는 괜찮습니다. 앉으세요.”

아무래도 태이섭 상무 같은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은 음료였다. 조금 주저하다가 우경은 이섭과 마주 향하도록 제 의자를 돌려놓고 앉았다. 이섭이 이제 본론을 시작하겠다는 듯 양손을 소리 나게 맞잡았다.

“연우경 AE가 작성한 기사들, 그간 해 왔던 홍보 작업들을 좀 봤습니다. 마음에 들었고 충분히 일을 맡길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태준섭 상무 일 말입니다.”

“하지만 상무님…….”

이야기를 마치게 해 달라는 듯 이섭이 손을 약간 들어 보였다.

“물론 알아요. 대표님이 말씀하셨듯이 관례와 다르고 따라서 부담이 크다는 것도 압니다. 좀 특별한 경우라고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일단 잘못 인식하고 계신 부분부터 말씀드리죠. 태준섭 상무 이미지 관리 프로젝트는 사내에서는 저와 회장님을 포함해 다섯 명도 알지 못하는 사안입니다.”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우경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섭이 말을 이었다.

“회사 내에서, 더 정확히는 가족 내에서 미묘한 기류가 있기 때문이라는 정도로 말해 둡시다. 그러니 연우경 AE가 나와 태준섭 외에 TK의 어느 누구에게도 프로젝트 방향성이나 결과를 두고 관리를 받거나 사전 조율을 해야 하는 일은 없어요.”

“말 그대로 단독으로 저 혼자 하란 말씀이신가요?”

“비슷해요. 홍보실 실장의 도움 정도야 받겠죠. 다만 내가 총 책임자이니 특별한 경우 저와 상의하세요.”

이섭의 말은 부드럽지만 단호하여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있었다. 평생 사람을 부리며 그들이 결국 제 말을 듣게 만들도록 살아온 사람다운 방식이었다.

“연우경 AE가 적임자가 아니라 판단되면, 그땐 제가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습니다.”

부담스럽다거나 자신이 없다는 거부 역시 미리 막아 두는 말솜씨였다.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우경의 머릿속은 느닷없는 태이섭의 등장에 혼돈 그 자체였다. 소용돌이 같은 혼란이 조금이라도 가라앉길 바라며 우경은 이섭의 입술만 보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섭 역시 우경을 지그시 바라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으레 만드는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다소 냉랭했다.

“습관입니까?”

“네?”

“빤히 쳐다보는 것 말입니다.”

“아……. 아닙니다. 좀 혼란스럽고 무슨 답을 드려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해서…….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어떻든 좋다는 식으로 이섭이 말을 잘랐다.

“이렇게 하죠. 태준섭 상무가 내일 인도에서 개최된 모바일 포럼에 참여했다가 모레 오후 귀국합니다. 인도는 스마트폰의 마지막 남은 큰 덩어리 시장이죠. 네트워크 사업 역시 마찬가지고요. 공항에 가서 취재를 하든 앉아서 스토리를 쓰든 무엇이든 좋습니다. 기회를 살려 태준섭 상무 이미지를 홍보해 보세요. 연우경 AE 스타일과 역량을 평가하겠습니다. 그 후, 다시 이야기 나누지요.”

이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거부할 여지가 없었다. 태이섭의 방문, 간략하지만 압력이 느껴지는 요구는 계약하지 않았냐는 협박보다 더 무거운 설득력이 있었다.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우경이 돌아서려는 이섭을 붙잡았다.

“무엇이죠?”

“태준섭…….”

목소리가 갈라져 우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부어오른 듯 따끔거렸다.

“태준섭 상무님은 제가 이 일을 한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이섭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만들었다.

우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태준섭 상무님은 사진 찍는 일도 언론에 노출되는 일도 극도로 싫어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개된 사진이나 인터뷰도 거의 없고요. 제가 가서 취재 요청을 드린다면 기꺼워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하는 중에도 태준섭의 어둑한 눈이 떠올랐다. 다시 그에게 모욕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글쎄요.”

이섭의 눈에 흥미롭다는 감정이 스쳤다.

“그것도 한번 연우경 AE에게 맡겨 보죠. 나라면 소란스럽지 않게 홀로 조용히 움직이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상무님.”

우경이 곤혹스러운 마음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8년간 인이 박힌 홍보인의 직업적 자세로 마무리 인사를 더했다.

“중요한 일을 에이블에게, 또 제게 맡겨 주셔서 영광입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보진 못했지만 이섭이, TK 왕자 태이섭 상무에게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시니컬한 웃음을 흘리는 것이 느껴졌다. 우경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섭은 매끈한 미소를 보였다.

“연우경 AE, 내가 팁 하나 줄까요?”

“네?”

“태준섭 상무, 보기보다 굉장히 예민해요. 그러니…….”

이섭이 의미를 알 수없는 표정을 짓고는 우경에게 덧붙였다.

“부디 잘해 봐요.”

이섭은 우경의 답을 듣지 않고 돌아섰다.

대기된 차 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섭은 손을 들어 제 뺨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화끈거리는 느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아, 이섭을 룸미러로 살피는 기사에게 지시하는 목소리에 미세한 짜증이 묻어났다.

“괜찮아요. 출발하세요.”

“네, 출발하겠습니다.”

이섭은 차내에 비치된 생수 뚜껑을 비틀어 열며 손등에 닿았던 여자의 살결을 떠올렸다. 생수를 들이켜면서도 여자의 목덜미에서 나던 달짝지근한 와인 같은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씹.

욕설을 물과 함께 삼켰다.

최지분 때문에 강제 수절을 하면서 살다 보니 별…….

이섭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저를 빤히 바라다보던 여자의 눈동자를 지우려 애썼다.

그런 눈으로 매달렸으니, 태준섭이 후끈 달아올랐겠지.

잘해 보라고. 연우경 씨. 예민한 자식이니까. 잘해 봐.

* * *

“돌아오시는 비행기는 **항공 ***편 인도 현지 출발 시각……, 인천 공항 도착 시각은…….”

“잠시만요.”

한 손으로 이마를 괴고 있던 준섭이 비서의 보고를 중간에서 멈추었다. 귓속이 웡웡 울려 대서 스케줄을 집중해서 들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전, 송백재에서 조간 브리핑을 마친 후, 태시환 회장은 준섭에게 인도 모바일 포럼 참석을 명했다. 일반적으로 태서우 부회장이 참석하거나 요즘같이 대외적 활동을 금하는 시기라면 전자 사장이 태이섭 상무를 동반하여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

덕분에 지난 사흘간 예정에 없던 강행군이었다. 원래도 타이트한 스케줄 틈새에 TK전자 사장단과 인도 출장 건으로 사전 미팅을 해야 했고, 이틀 동안 출장으로 구멍 나는 스케줄을 메우기 위해 회의를 연속으로 잡고 약속을 이중 삼중으로 잡아 뛰어다녀야 했다.

“혹시 두통약이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준섭이 고개를 들고서 비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급히 시선을 내리까는 비서를 보며 짤막하게 지시했다.

“인도 출장 스케줄은 프린트한 걸로 봅시다. 동행하는 임원들, 실무 연구진 명단까지 같이 뽑아 줘요.”

“네, 본부장님.”

인사를 하고 나가는 비서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여기 불 좀 꺼 줘요.”

“네?”

너무 놀라는 표정을 짓는 비서를 향해 준섭이 좀 지치는 웃음을 지었다.

“나 30분만 쉽시다.”

“네?”

비서는 준섭이 불을 끄고 쉰다는 말에 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골이 울려서 그래요.”

그제야 비서는 정신이 든 듯 전동 블라인드 버튼을 누르고 사무실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비서가 나간 후, 순식간에 깊은 동굴처럼 검어진 사무실 안에서 준섭은 눈을 감고 의자에 길게 몸을 묻었다. 책상 위, 깜박이는 핸드폰 알림을 끄려다 수신된 메일을 확인했다. 간략하게 정리된 문서 파일을 훑으며 슬며시 눈을 찡그렸다. 뒤이어 수신되는 메시지나 메일은 확인하지 않고 핸드폰을 엎어두었다.

“에이블.”

준섭이 어둠 속에서 회사 이름을 되뇌었다. 연우경이 이직한 회사 이름이다. 파일에 따르면 준섭을 찾아오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CS애드에 사직서를 내고 전에 일하던 직장 상사가 하는 소규모 홍보 회사로 옮겼다고 했다.

‘CS 카피라이터예요. 곧 잘릴지도 모르지만.’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죽어라 붙어 있으라고 했더니. 제 손으로 사표를 던지긴.”

준섭이 욱신거리는 눈 위로 팔을 올렸다. 툭 힘을 빼고 팔의 무게로 경련이 일기 직전의 눈꺼풀을 억지로 눌렀다.

감은 눈동자에, 햇빛에 번들거리는 빗물 웅덩이의 기름띠처럼 푸르고 붉은 원이 어그러지며 퍼진다. 여자의 얼굴이 물그림자처럼 흔들린다.

한 손으로 넉넉히 잡힐 가느다란 발목과 흰 가루를 뿌린 듯한 목덜미, 촘촘하게 단추를 채운 블라우스,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가슴과 한 팔로 휘감아 채고 싶던 허리까지.

여자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을 때는 조만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꽤 괜찮았던 카피를 쓰고, 그걸 보여 주겠다고 회사까지 찾아와서 매달렸는데 의도와 상관없이 태준섭 본인 때문에 CS애드에서 잘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직상태라면 일자리를 제안하거나 소개를 시켜줄 의향도 있었다. 물론 어이없는 순간에도 한 번씩 떠올라 잠시 생각하게 만들던 여자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찾아가면 욕을 퍼붓겠군.”

당장 일자리는 필요 없어 보이고 준섭 역시 지금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인도 출장에서 다녀오면, 아……. 젠장, 밀린 스케줄을 해치우고서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한 후에…….

준섭이 한숨처럼 웃었다.

“욕먹기도 더럽게 어렵네.”

연우경은 이미 준섭의 행로에서 비켜 간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최일문 교수 출판기념회까지 준섭을 데리고 간 회장의 속내도 확신이 없다. 다만 이섭과 준섭을 양손에 쥔 떡처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며 즐기는 중일지도 모른다. 비위를 맞춰 주며 가끔씩 상황을 냉소하며 버텨 내면 된다.

하지만 최하영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하영의 TK어패럴 지분 5%는 TK 승계를 노리는 이섭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하다. 또한 그 지분은 TK에서 준섭의 생존 여부가 달린 것이기도 하다.

준섭은 팔을 걷고 눈을 뜨고서, 동굴 같은 어둠을 응시한다. 굴속에 버려진 어린 짐승처럼 막막했던 시간들이 밀도 높은 액체처럼 몸을 무겁게 적신다. 그래, 최하영이라는 미끼를 걸고서 낚싯대를 던지는 회장의 속마음이 무얼까 고민하지 않는다. 미끼에 흥분하여 입질을 하는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낚싯줄에 놀아나는 준섭의 모습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전부라 해도 상관없다.

회장의 의도가 그 무엇이든 상관없을 만큼 준섭은 최하영이라는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다. 지난 두 주간 불쑥불쑥 떠올라 사춘기 때도 겪지 않았던 야릇하고 간질거리는 기분에 빠지게 만들던 여자, 연우경이 머리를 풀고 풍만하고 흰 가슴을 드러낸 채 인어의 노래를 부른다 해도.

* * *

태준섭 상무가 참여한 인도 모바일 포럼에 대한 정보나 기사는 넘치게 많았다. 예상대로 태준섭 상무의 사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태이섭은 우경이 연락할 수 있는 TK 콘택 포인트로 본인과 홍보실 유인목 실장을 지정했다. 우경은 유 실장에게서 태준섭에 관한 자잘한 스케줄을 전해받고 관련된 사업에 대한 TK의 입장, 홍보 방향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태준섭이 귀국하는 비행기 편 시각에 맞춰 우경은 공항으로 향했다. 사복 경호원들과 섞여도 위화감이 없는 옷차림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태준섭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야구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공항 입국 게이트에는 유달리 사람들이 붐볐다. 웅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학생들이 들고 있는 팻말과 플래카드에는 생소한 아이돌 그룹명이 적혀있었다. 어떤 그룹인가 검색을 하려 핸드폰으로 검색창을 열었는데 딱딱한 물체가 우경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대학 신입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여학생은 소위 대포라고 불리는 커다란 망원 렌즈가 길쭉하게 뻗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렌즈 테스트해 보다가…….”

“괜찮아요. 누구, 기다리시나 봐요.”

“네. 트리플 에이치가 말레이시아 팬미팅 공연하고 귀국하거든요.”

여학생은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며 자신들의 오빠에 대해 열성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돌 그룹 데뷔 프로젝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왔다가 아깝게 최종 후보에서 탈락한 지망생들 셋이 모여 결성한 그룹이라고 했다. 들어 보니 우경도 아는 가수였다. 그중 배구 선수 출신이라는 키가 크고 고음이 폭발적이던 연습생을 우경도 꽤 응원했던지라 기억하고 있다.

“아, 하지성. 그 사람이 들어간 그룹이군요!”

“네, 네. 지성 오빠가 리더예요.”

“떨어져서 안타까웠어요.”

“미치는 줄. 며칠을 처울었는지 몰라요.”

“그러게요. 떨어질 줄 몰랐는데……. 마지막에 루머 때문에.”

“언니도 아시네요. 그거 진짜 악의적이었어요. 실력이고 인기고 울 오빠가 짱 먹었는데 말도 안 되게 견제 들어와서.”

이름이 이현영이라는 여학생은 아직도 분하다는 듯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우경이 현영의 익살스런 표정 때문에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현영이 하악,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오, 오빠다!”

막 열린 게이트를 통과하는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를 향해 현영이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피사체를 연속적으로 담았다. 우경은 숨을 멈추며 마스크를 올려 썼다. 남자는 태준섭이었다.

예정된 비행 스케줄 보다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우경이 급히 휴대 렌즈를 끼운 핸드폰으로 준섭을 촬영하려는데, 준섭이 망원 카메라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경은 핸드폰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현영이 반사적으로 셔터를 누르는 바람에 대포 카메라는 정면으로 한 번 더 준섭의 사진을 찍었다. 준섭이 상황이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는 동시에 그를 뒤따르던 경호원들이 현영을 향해 움직였다.

“됐어.”

준섭의 눈이 여학생 주변에 있는 플래카드와 팻말을 읽어 내렸다.

“그래도 사진을 찍었는데 파기를…….”

“팬클럽이 착각했나 본데.”

준섭이 약간 무안한 듯이 웃었다.

“아이돌이라 착각했다니 영광이네요. 열 살은 어려 보였나.”

“카메라 확인 안 해도 될까요. 사진 지워야죠.”

“둬요. 어차피 누군지도 모르는 잘못 찍힌 사진 지우고 말 텐데. 그러다가 쟤네들 오빠 사진 못 찍으면 더 복잡해집니다.”

준섭이 빠른 걸음으로 공항을 가로질렀다.

“우와, 저 남자 뭐죠? 지성 오빤 줄 알았네요.”

현영이 준섭의 멀어지는 뒷모습까지 지켜본 후 그제야 정신이 든다는 듯 우경에게 말했다. 우경은 준섭이 지성보다 키가 5cm는 더 크고 몸이 1.3배는 더 좋다는 팩트를 굳이 짚어 내지 않았다.

“유명한 모델인가? 보디가드도 데리고 다니고. 아까 경호원 올 때 쫄았는데 그냥 오라고 손짓하는 거 봤죠. 이야. 사진발도 짱이다.”

우경이 현영 옆으로 붙어 준섭이 찍힌 사진들을 확인했다. 무안하게 웃는 모습, 경호원을 저지하는 손짓, 빠르게 움직이는 전신 샷까지 현영 말대로 완벽했다. 팬클럽 대포 카메라의 위엄을 새삼스레 느끼며 우경이 현영에게 제안했다.

“현영 씨, 인스타나 페북해요?”

“당연하죠. 저 인스타 팔로워가 얼만데요.”

“이 사진 올릴래요? 이거, 이거, 이거. 이렇게 세 개 정도.”

“네?”

우경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 남자 TK 태준섭 상무예요.”

“네? 그게 누구? 태이섭은 아는데 태준섭은 누구죠?”

눈을 뚱그렇게 뜬 현영이 귀여워 우경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당연히 태시환 회장 손자죠.”

“와, 대박. 뭐죠? TK 3세인데 마스크 왜 저렇게 좋아. 섹시 터지네요. 피지컬이 왜 모델이고 난리. 돈도 많은데 뭐냐고요. 와와와. 쩐다. 내가 그러니까 TK 3세 태준섭을 고퀄 직찍……!”

현영이 벌어진 입을 손을 가렸다. 인스타에 올리면 최소 화제성 금주간 톱이고 순식간에 팔로워가 수십 배 늘어날 수도 있다.

“그, 그런데 이런 거 막 올렸다가 나 TK에서 초상권 침해 이런 거 걸리는 거 아닐까요?”

“아니에요. 태준섭 상무 정도면 공인이죠. 대신 나쁘게 쓰는 건 좀…….”

현영이 크게 손을 저었다.

“나쁜 소리 할 게 뭐가 있어요. 몸매 짱, 매너 짱인데. 경호원 막는 거 봐요. 겁내 멋지잖아요.”

“그래요, 그럼. 나 인스타 팔로우할게요. 주소 줘요.”

우경은 자연스레 현영의 핸드폰 번호와 인스타 주소를 확보했다.

올드 패션 같은 홍보로 태준섭을 제대로 물을 먹여 줄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모양 빠지는 복수다. 제대로 한번 보여 주고 때려치워야지. 우경은 재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인스타 사진이 화제로 떠오르면 타이밍을 맞춰 이번 인도 출장 건에 대해 홍보 기사를 올려 줘야 한다. 사무실로 향하는 마음이 바빴다. 태준섭의 사진 이미지에 부합하는 세련된 기사를 쓰는 일이 남았다. 새마을 운동 같은 낯 뜨거운 홍보 기사가 아니다. 밤을 새서라도 제대로 써 줄 테니까.

어디 또 한 번 말해 보시죠. 태준섭 씨. 철 지난 패션 같은 홍보 방식이라고.

* * *

인도 출장 건으로, 정확히는 인도 출장과 연관된 홍보 건으로 이섭과 준섭은 동시에 송백재로부터 치하를 들었다. 둘을 나란히 데스크 앞에 세워 놓고서 회장은 관련 기사와 사진들을 책상 위에 일렬로 깔아 두었다.

“인물 훤하다. 준섭이 니 이렇게 웃을 줄도 아나.”

순간을 포착한 사진에서 준섭은 아이같이 부끄러워하는 미소를 짓고 있다. 경호원을 저지하는 손짓이 실린 사진은 전신 샷과 바스트 샷 두 개였다. 최초 사진을 올린 여학생은 경호원이 다가와서 ‘겁나 쫄았는데’ 매너 좋게 저지하는 카리스마에 감동했다고 설명을 더했다.

이어진 정면 사진은 준섭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어 이목구비나 무게감 있는 눈빛이 생생히 살아 있었다. 몸에 잘 맞는 블랙 슈트를 입은 태준섭 사진의 설명으로 ‘태이섭이 구찌 향수 마티어스 라우리드센이라면 태준섭은 휴고 보스 션 오프리’라고 방점을 찍었다.

회장은 언급된 외국 남자 모델들 패션 화보 사진까지 놓고서 킬킬 소리를 내며 웃었다. 모델들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진을 한 번 보고 키가 훌쩍 커서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손자들을 한 번 보았다.

“거참 요즘 애들은 발랄하다. 이런 비유도 할 줄 알고.”

이섭과 준섭이 동시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소년미가 넘치는 모델과 남성적인 굵은 선이 매력인 모델 두 사람으로 비유되는 일은 처음이었지만 또 딱히 크게 거리감이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이섭이 홍보 신경 쓴다더니 일 잘한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지금 회사에서 누가 준섭이 홍보일 하고 있노? 김 전무도 모른다고 우연히 벌어진 일 아니냐 멍청한 소릴 하던데.”

“실은 제가 개입된 건 회장님께만 보고드렸습니다. 사내에서는 유 실장이 컨트롤하고 외부의 최소 인력으로 조용히 진행합니다.”

“외부 인력?”

“은밀하게 발굴한 소규모 업체입니다. 그편이 여러모로 나을 듯해서요.”

“여러모로……. 그래, 그렇지.”

회장이 이섭을 보는 눈빛이 봄볕처럼 따스했다. 아마도 태서우-태이섭으로 이어지는 회사 알력이 준섭의 홍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배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 듯했다.

“준섭아, 태이섭 상무가 생긴 건 여리여리해도 참말로 통이 크다.”

“네.”

준섭이 고개를 숙이고 이섭을 향해 말했다.

“고맙습니다. 태이섭 상무.”

“제가 뭘 했나요. 유 실장이 애썼죠.”

“그건 그리 말하는 게 아니다.”

회장이 이섭의 겸손한 멘트에 쐐기를 박았다.

“태이섭 상무는 기왕 맡은 거 이만큼 했다고 손 놔 버리지 말고, 끝까지 잘해 봐라. 외부 업체 인센티브 넉넉히 주고, 해당 직원은 태준섭 상무 전담으로 해서 최대한 다른 쪽이랑 접촉하지 말게 해라. 지금쯤 소식 빠른 기자들은 그 홍보 직원 찾아 들러붙었을 테니까. 아예 계약 기간 동안 우리한테로 티 안 나게 출근하게 해도 좋고. 이참에 스카웃해도 좋다.”

“네, 안 그래도 이번 건이 너무 주목을 받아서 여러 제안을 고민하던 터였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이섭이 순순히 대답을 하며 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회장은 인도 관련 기사를 손에 쥐고는 돋보기 너머 활자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누군지 몰라도 순발력도 좋은데 이 기사도 센스 있게 잘 썼다. 인터뷰를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준섭이도 준비를 해야 한다. 태준섭 상무가 간결하게 말은 하는데 돌려 말할 줄을 몰라서 흠이다. 이제 그런 스킬도 필요하다.”

“네, 회장님.”

회장이 답하는 준섭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섭에게 당부했다.

“이 사람 아무래도 데리고 와야 하겠다. 외부 기사만 손보게 하지 말고, 준섭이 인터뷰나 연설 원고 있으면 당분간은 붙어서 전략도 짜고 수정도 시키고. 태이섭 상무가 그런 면에서는 잘 알고 있으니 준섭이는 이섭이 말 무시하지 말고.”

“그럴 리가요, 회장님. 잘 따르겠습니다.”

준섭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우고서 덤덤히 답했다. 회장은 손에 프린트된 기사를 들고서 한 번 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사는 준섭이 인도에서 최고위층을 접촉하는 동시에 포럼을 통해 가난한 하위 계층의 인도 사람들이 모바일 기기를 통해 누릴 수 있는 편의와 감동을 알렸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었다. 태준섭의 역량과 인간적인 면이 동시에 부각되는 기사였다.

“태준섭 상무, 인도 가서 수고 많았다. TK가 인도에 생산 공장을 짓는 일이 인도 국부와 인도인들 모두에게 큰 혜택이 돌아간다는 공론을 잘 이끌었다. 이제 우리는 공장 착공만 순서대로 진행하면 되겠다.”

“네, 회장님.”

둘이 동시에 답을 하고는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다. 회장은 그 모습조차 즐거워하며 그만 나가 보라 손짓을 하였다.

송백재 주차장에 대기된 각자의 차에 오르기 전, 이섭이 기사들에게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라 손짓했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는 이섭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태준섭, 너 아이돌 카메라 받으니까 사진발 죽이더라.”

“내가 원래 좀 괜찮아.”

“그래, 누구 아들인데. 외모 갑이지.”

준섭과 꼭 같은 외모인 아버지를 빗대어 빈정거리는 말이다. 준섭이 피식 입술 한쪽 끝을 올리며 웃었다.

“막내 고모님 말하는 거야. 미인이셨잖아. 사진으로만 봤지만 말이야.”

이섭이 굳어지는 준섭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툭 두드렸다.

“몹시 맘에 들 거라고 했잖아. 여기엔 말야, 그런 문구를 써도 돼. 무엇을 기대해도 좋다. 그 이상일 테니.”

이섭이 손을 들어 느슨한 거수경례를 하고는 먼저 차에 올랐다.

저 자식,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준섭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차 문을 열었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우식이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런 말씀 그렇지만 제 주위에서도 TK 후계자가 이렇게 소탈하고 인간적인 매력까지 있는지 몰랐다고 다들 연락 와서 한마디씩 합니다. 실제로 봐도 모델처럼 멋있게 생기셨냐고도 묻고. TK 회사 이미지도 더 좋아졌다고. 제가 모시는 분인 건 모릅니다. 절대 그건 말한 적 없습니다.”

“운전하자. 우식아.”

준섭의 무뚝뚝한 답에도 우식은 두어 마디를 더 덧붙였다.

“정말입니다. 본부장님 덕분에 회사 이미지도 확 좋아졌습니다.”

준섭은 창밖만 내다보며 불량한 거수경례를 흉내 내는 이섭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렸다.

군대도 안 다녀온 놈이 경례는.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아직 알 수가 없다. 믿게 해 놓고서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치려는 작전일지도.

좋아, 얼마든지 받아 줄 테니. 라고 생각하며 준섭은 피식 웃었다.

* * *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서, 또 빤히 바라본다. 젠장. 그렇게 쳐다보지 말랬지.

주차장에 세워 둔 차 뒷좌석에서 나란히 앉아 여자는 한 번씩 숨을 몰아쉬기만 한다. 차 안의 좁은 공간은 금세 여자에게서 나는 향으로 가득 차 있어 숨을 들이켤 때마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제 귓등에 여자의 숨이 닿는 듯한 착각이 들어 이섭은 손으로 귓등을 문질렀다.

연우경. 빤히 쳐다보면서 숨 쉬지 말라고. 그건 태준섭한테 가서 해. 응?

이섭은 칼칼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누가 그러게 그렇게까지 잘하랬어요, 라는 말 대신 준비된 답을 사무적으로 꺼내었다.

“회장님께서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회장님이 태준섭 상무 아끼시는 마음이 각별해서, 또 연세도 있으시잖아요. 약간 지나치게 조심하고 우려하시는 면도 있으시고. 그래서 혹여나 기자들이나 다른 회사에서 연우경 AE에게 접근할까 신경을 과하게 쓰십니다. 저번에도 비밀 유지 조항이 계약서에 들어 있지만,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명시하여 추가 계약을 했으면 합니다.”

여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그런 건. 고객과 이루어진 모든 것, 일이든 사생활이든 비밀을 철저히 지키고, 절대 공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견은…….”

“그러게요. 저로서도 좀……. 귀찮다고 표현하기엔 무례하고 아무튼 약간 신경 쓸 부분이 생긴 셈이죠. 회장님 뜻이 확고하시네요.”

이섭이 숫자란이 비어 있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3개월입니다. 파견 근무, 태준섭 상무의 일만 하는 조건이고 회사에서 공식적으로는 수행비서 겸 스피치 에디터입니다. 회장님 라인을 통해 들어온 단기 계약을 한 재원이라는 정도로만 알려 두죠. 사원들과도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는 것도 조건입니다.”

우경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좀 더 벌리고서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섭이 눈썹을 찡그리며 시선을 틀었다.

“태이섭 상무님. 이건 저한테 선택권이 없는 계약처럼 들려요.”

“왜 그렇죠? 이번 건으로 제법 큰 인센티브가 에이블로 지급되었고, 지금은 지급할 금액을 공란으로 비운 파격적인 제안인데요. 매달리는 쪽은 저 같습니다만.”

“TK를 상대로 에이블이, 에이블 직원이…….”

이섭이 부드럽게 웃었다.

“다시 말씀드리죠. 부탁입니다. 제가 회장님과 연우경 AE 사이에서 곤혹스러워요. 부탁 한 번만 들어주세요. 이렇게 고개 숙입니다.”

이섭이 정말 고개를 숙이자 우경이 급히 손을 저었다.

“무슨, 세상에. 이러지 마세요, 상무님.”

이섭이 싱긋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들어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매일 출근해야 하나요?”

“상황 봐서 조정합시다. 그건 태준섭 상무 권한이기도 하니까. 내가 월권할 순 없어요.”

“저…….”

우경이 속입술을 깨물었다 떼어 내며 말했다.

“태준섭 상무님은.”

말해 놓고서 다시 입술을 물었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한 이번 PR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섭이 픽 소리 내어 웃었다.

“뭘 그렇게 어렵게 물어봐요. 당연히 좋아하겠죠. 그런 홈런을 쳤는데.”

우경이 원했던 답은 아닌 듯 고개를 열의 없이 끄덕였다.

“왜요.”

이섭이 우경에게 몸을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신경 쓰여요?”

“네?”

고개를 번쩍 든 우경의 눈이 꼭 초식 동물의 것 같다. 토끼류보다는 사슴류. 이섭의 입가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태준섭이…… 신경 쓰입니까?”

사슴의 여린 콧등을 튕기는 짓궂은 마음이었다. 여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내뱉는 감탄사에 부끄러움이 실려 있다. 마치 짝사랑을 갑자기 들킨 소녀처럼 당혹스러워한다.

그러고 보니 이섭을 보고서 붉어진 적은 없는 여자였지. 손을 스치고도 몸을 부딪치고도. 첫눈에 반한 건 준섭만이 아니었나. 이섭의 직감이 예리하게 현실을 깨우쳐 주었다. CCTV가 비추던 연우경과 태준섭을 떠올렸다. 연우경은 태준섭이 태준섭인지도 모르고 빠졌구나. TK라는 날개를 몰랐을 때에도.

“그건…… 당연합니다. PR 당사자이시니.”

“그렇군요.”

이섭이 계약서를 휙 집어 갔다. 종이가 팔락이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양복 속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빠르게 휘갈기고는 우경에게 내밀었다.

“지금 사인받고 싶어요, 연우경 AE. 금액은 TK 부장급 1년 연봉을 3개월에 지급하는 정도로 합시다. 물론 외에도 특별 인센티브도 있을 겁니다.”

“아, 이건…… 너무.”

우경이 숫자를 보더니 고개를 젓고는 이섭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찡그리면서 동시에 웃으며 물었다.

“상무님, 혹시 부장급 연봉을 잘 모르시진 않나요?”

“몰라요.”

이섭이 뻔뻔하게 말했다.

“그러니 받으라고.”

차 문을 닫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단순한 디자인의 로퍼와 슬랙스에 직선으로 떨어지는 재킷 차림이다. 목선에 맞춰 파인 라운드넥 이너 위로 작은 펜던트가 달린 은 목걸이가 여성스러운 장식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젠장. 이섭은 이마를 문질렀다.

그런데 대체 왜.

아마 CCTV 속 여자의 모습이, 그 스커트 차림이 기억에 박힌 탓이다. 이섭이 옆에 둔 계약서를 들고는 여자의 이름과 사인을 읽었다. 이섭이 건넨 만년필을 꼭 쥐고서 여자는 조금 웃으며 사인했다. 보조개까지는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오른쪽으로만 볼이 패였다.

“용꿈 꿨나 봐요. 기억은 못 하지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돈이 좋습니까, 태준섭이 좋습니까. 튀어 나가는 질문을 간신히 붙잡았다.

“노력할게요. 맡은 바 책임은 다하는 편입니다. 신경 안 쓰이시게 최대한 태준, 섭…… 상무님께 맞춰서 일하겠습니다. 언제든 부족한 점 있으면 알려 주세요.”

여자는 준섭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떨림을 감추느라 머뭇거렸지.

“미리 일러둘 테니, 내일 태준섭 상무 비서실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에이블 사장님과도 이야기는 끝났고요.”

“저, 혹시……. 상무님 출근 시간은 어떻게 되시나요?”

“나는 주로 8시 30분에.”

이섭은 우경의 표정을 보고 우경이 묻는 상무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왜 네 출근 시간을 말하니, 하는 듯한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이섭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태준섭은 제멋대로 어떤 날은 미친 듯이 빨리 출근하니까 맞출 필요 없어요.”

“그래도…….”

계약서 끝을 만지작거리며 우경이 혓바닥으로 살짝 입술을 훑었다. 준섭의 이름만으로도 여자는 긴장하고 부끄러워하고 그리고 두려워하고 또 기대하고.

씹, 이섭은 뒷좌석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태준섭이든 연우경이든 서로 눈 맞추고서 새끼손가락 한 번 까딱만 해도 바로 넘어가겠네.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대체 그 자식 어디가…….

왜, 펜 주워 줘서? 펜 가지고 장난쳐서?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질인데.

연우경은 태준섭이 얼마나 엉망인 놈인지 알 리가 없겠지. 친아버지도 잘라 낸 놈인데. 뼛속까지 야망으로 가득 차 제 부모의 원수인 늙은 회장의 발가락을 핥는 개새끼 노릇을 하는 저질.

이섭은 열이 올라 거칠해진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연우경이 태준섭에게 이미 빠졌다는 건 계획을 넘어서는 진척이다. 천우신조, 하늘이 도우시는 게지. 둘 관계가 빨리 깊어질수록, 고마운 일이다.

이섭은 헝클어진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기사를 향해 차창을 열었다.

“이제 출발합시다.”

단정한 태이섭 상무의 얼굴로 지시했다.

* * *

“본부장님, 오늘 PR 담당자가 비서실로 출근합니다.”

준섭이 유 실장의 선이 굵은 눈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송백재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그쪽 홍보 회사와 협의했고 회장님 지시대로 상무님 전담으로 3개월간 파견 형식으로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비밀 유지 조항도 강화했습니다.”

준섭이 쥐고 있던 펜으로 툭툭 책상을 두드렸다. 대체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구나. 송백재의 지시에 대해 회사 임원 앞에서 대놓고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다.

“유 실장님.”

“네, 본부장님.”

“제가 뭐 애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닌데 이런 케어까지 받아야 할까요.”

유 실장이 미소를 지었다. 호감을 이끌어 내고 동시에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효과적인 미소였다. TK 홍보실 실장다운 매너이다. 홍보실 실장이 되기 한참 전에도 준섭이 TK에 입사하였을 무렵 회장 비서실에서 직속 상사였던 유인목은 그때에도 그런 식의 매너를 이미 갖춘 사람이었다. 준섭이 누구의 아들인지 처음부터 알았음에도 단 한 번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선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유인목은 태준섭과 친밀해질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거북하고 께름칙한 감정은 입사 이후 시간이라는 바람에 깎여 나갔지만 여전히 준섭은 유 실장과는 좁혀질 수 없는 감정적 방어선을 고수하고 있다. 유 실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완벽한 예의와 처세, 사적인 관심이나 감정의 배제를 통해 같이 업무를 할 때만큼은 태준섭의 감정적 불편함을 제로에 가깝게 수렴시키는 것이 유 실장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었다.

“제가 아는 본부장님은 모든 면에서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러니 아이에게 필요한 케어는 당연히 필요 없습니다.”

“그럼 연예인 같은 케어가 필요합니까.”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회장님께서는 판단하셨습니다.”

“내가 묻는 건, 유 실장님 의견입니다.”

“어느 정도는 늘 해 오는 일입니다. 차이라면 인력 충원의 방식 정도입니다. 최대한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조처하겠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일할 수도 있습니다.”

준섭이 손에 쥔 펜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럽시다. 누구든 상관없으니 내 눈에 띄지 말라고. 비서 아니니까 비서실 출근도 보류합니다. 필요하면 제가 부르죠. 홍보실로 출근하든 아니든 그것까지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PR 자료는 사진 한 컷, 단 한 줄이라도 제 컨펌하에 나갑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순순한 대답을 하며 유 실장이 인사를 했다.

후…….

다물린 준섭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차라리 김 전무라면 상대하기가 편하다. 유 실장은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다. 이번 홍보 건도 김 전무와 태서우 부회장한테까지 알려지지 않은 걸 보면 입을 따로 놀리지 않은 모양이다. 태서우 부회장의 라인은 아닌, 그렇다고 해서 준섭의 편에 서지도 않은 유 실장을 이 일에 끌어들인 이섭의 의도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그리고 말입니다.”

“네, 본부장님.”

화를 참는 준섭의 속을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을 하고서 유 실장이 천천히 답했다. 유 실장은 편안하게 몸을 펴고서 경계심 없는 시선으로 준섭을 바라보았다. 얼마든지 화풀이든, 욕설이든 들어 삼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세처럼 보였다. 그런 면이 종종 준섭의 속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준섭을 처음 보았던 날에도 그랬다. 회장의 뜻을 전하는 말투나 눈빛에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배려와 온정이 있었다. 준섭이 감정을 실어 말했다.

“꼭 전하세요. 저번처럼 오버해서 낯 뜨거운 일 만들지 말라고.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유 실장님한테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제 책임이었습니다.”

하, 믿으라고? 준섭이 이를 꾹 물었다가 떼어 냈다.

“아이돌 쇼 같은 PR을 했던 당사자 그놈한테 한 자도 빠짐없이 전하세요. 한 건 올려 돈 땡겼으면 처먹고 조용히 놀다가 가라고. 내 취향 아니니까.”

유 실장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머뭇거리는 내색이었지만 그걸로 그만이었다.

“말씀 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나가 보세요.”

“한 번 더 단속시켜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하는 유 실장의 모습에 급격하게 불쾌감이 밀려왔다. 이유 없는 불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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