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연한거짓말-2화 (2/23)

2장

습관적으로 35를 향하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두 칸 아래 숫자 33을 눌렀다. 태 회장의 비서실이 있던 35층이 아니다. TK 혁신전략기획본부실은 건물 33층에 위치하고 있다. 일종의 테스크포스팀 개념이라 태준섭과 일부 비서진 외에는 모두 겸직이다. 그룹의 사장단과 부사장, 몇몇 핵심사업부 전무까지 전략기획실 소속으로 배정되었다.

7시 50분, 준섭은 시각을 확인하며 오늘 아침에 잡힌 회의 참석자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훑었다. 단 한 명도 만만한 사람이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두려움이 그들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태준섭이 무엇을 쥐고 있는지 모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이다.

“나는 차가운 물 한 잔이면 됩니다.”

준섭이 회의실에 들어서며 비서를 향해 말했다. 화기애애하게 아메리카노에 샌드위치를 까먹으며 노닥노닥 회의를 할 시기가 아니다.

준섭이 앉자, 일어서 있던 임원들도 자리에 앉았다. 속이야 제각각 계산으로 바쁘겠지만 태준섭 본부장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 노력하는 얼굴들이다. 냉담하지도 않지만 따뜻하지도 않은 시선들이 태준섭을 향해 있다. 태준섭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자체가 어색한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다. 경멸해 마지않던 회장의 개, 시동, 혹은 환관. 회장에게 있어 태준섭의 소용은 그 정도였다. 누구나 두려워하면서도 인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태준섭은 불과 열흘 전, 상무로 승진을 하면서 TK그룹의 임원진을 매트릭스 구조로 조직화한 기획본부실의 수장이 되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태시환 회장의 파격이었다. 두 주 전, 송백재에서 통보를 받을 때 준섭 역시 그러했다. 준섭은 회의실을 바라보며 그날을 떠올렸다.

* * *

조간 브리핑을 위해 송백재로 가는 길, 뉴스를 듣다가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준섭은 감았던 눈을 떴다. 차창 너머 푸르스름한 새벽빛에 물든 풍경이 보였다.

뻑뻑한 눈을 한 번 깜박이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는 준섭은 눈을 다시 감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우식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글러브 박스에 안대 넣어 두었습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세심함이다. 그러고 보니 차에서 풍기는 아로마향도 심신 안정에 도움을 준다고 했지. 준섭이 피식 웃었다.

“안대까지 하고 제대로 잠들면 송백재에 네가 날 업어 들여야 해.”

“네, 주무십시오.”

“자신감은.”

준섭은 안대를 하는 대신 눈을 힘주어 감았다.

룸미러를 확인하고는 우식이 오디오 볼륨을 줄였다. 빠른 속도로 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차량 내부는 마치 습하고 깊은 동굴 같다. 바퀴가 도로를 구르는 소리와 차창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크게 울렸다.

피로감이 심해지면 청각은 극도로 예민해지는 반면, 촉각은 되레 둔해져서 피부가 두부처럼 부풀어 오른 느낌이 든다. 목적지까지 10분 남짓. 부족한 수면을 채우기에도 달콤한 쪽잠을 즐기기에도 짧은 시간이다. 룸미러 속 준섭의 감은 눈꺼풀이 자잘하게 떨렸다.

“이사님.”

송백재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자, 우식이 마치 차에 잠이 든 아이라도 있는 듯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사님.”

느리게 눈을 뜨며 준섭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찡그린 눈매로 새벽 기운이 감싸고 있는 송백재를 담았다. 담 위로 솟은 노송과 잣나무들이 송백재를 둘러싼 서슬 퍼런 장막 같다. 그룹 태시환 회장의 자택이자 태 회장의 집무실을 겸하는 송백재는 권력의 상징이다. 회장의 재가 없이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주하는 장남 태서우 부회장 일가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매일 출입하는 사람은 태 회장의 비서와 고용인들에 불과했다.

차에서 내린 준섭은 곧장 송백재의 오른편 안쪽에 위치한 다이닝룸으로 들어섰다. 장방형 공간 중앙을 차지하는 커다란 식탁 위에는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아침 식사가 세팅되어 있었다.

준섭은 늘 그러하듯 상석에서 왼편으로 비스듬히 두어 발 간격을 두고서 서 있다. 오른편으로는 김세한 전무가 급한 걸음으로 들어와 막 자리를 잡았다. 김 전무가 시계를 확인하면서 준섭을 향해 가벼이 말을 건넸다.

“이거 원, 늦잠 잤어. 환절기라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해. 태 이사는 컨디션 괜찮아? 어젯밤 늦게까지 스케줄 있었을 텐데.”

어젯밤에 있었던 정무수석과의 독대를 캐는 것이다. 청와대의 뜻을 정확히 알고 싶겠지.

지난 두 주간 TK그룹은 폭풍의 가운데에 있었다. 조짐은 두 달 전부터 감지되었으나 이런 사태까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꺼번에 몰아서 터지는 악재에 연일 그룹의 수뇌부의 이름이 신문을 장식했다. 이제 칼끝은 TK의 정중앙 태서우 부회장을 겨누고 있다.

“밤에는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래? 저녁에 중요한 약속 있지 않았나?”

“고검장 말씀이십니까? 태이섭 상무도 같이한 자리였는데요.”

“그렇지. 그거 말고도 태 이사가 일이 오죽 많아. 기자고 검찰이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뒤집고 터트릴 수가 있는지 말야. 태 이사가 요즘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죽을 맛이지? 보기 안쓰러워.”

김 전무의 다정한 눈빛 아래 감추어진 멸시의 감정은 준섭에게 너무 쉽사리 들여다보인다. 준섭은 늘 그랬듯 무덤덤하다.

준섭의 머릿속에는 회장에게 브리핑할 뉴스와 동향, TK그룹의 전사적인 큰 이슈들의 진행 사항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다. 곤두세운 청각이 작은 소리를 잡아냈다. 회장이 다이닝룸으로 들어서는 중이다.

“왔나.”

회장을 향해 준섭이 깊이 머리를 숙이고 바로 뒤이어 김 전무가 그리고 양쪽으로 늘어선 고용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준섭이 자연스럽게 다가가 회장의 의자를 밀어 넣고 무릎을 낮추고는 냅킨을 펼쳐 회장의 허벅지 위로 깔았다.

“민어를 맑게 끓였습니다.”

주방일을 책임지는 최씨가 뜨거운 국그릇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말했다. 민어 토막 위로 푸른 미나리와 홍고추가 떠 있다. 회장이 숟가락을 들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을 삼켰다.

“국물 좋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 말이 신호가 된 듯 고용인들은 일제히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매일 아침 준섭과 김세한 전무 둘만 다이닝룸에 남아 조간 뉴스에서부터 회사 주요 현안까지 브리핑을 한다. 요즘은 회사에 불어닥친 우환으로 이슈의 순위가 달라졌다.

전무의 짤막한 회사 보고 뒤에 준섭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회장이 손을 들자 준섭이 보고를 멈췄다. 살집이 없어 주름이 깊지만, 기품을 잃지 않은 노인의 얼굴에서 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길고 섬세한 눈이다. 청년처럼 총기가 빛나는 눈동자는 잘 닦은 유리알처럼 매끄럽다.

“어떻노? 소환할 거 같나?”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었다. 자잘한 그룹의 현안 보고를 치우고 지난밤 독대에서 들은 말을 전하라는 뜻이다. 준섭이 쉽게 답을 하지 않자 태 회장의 치켜 올라간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어이 소환하겠다나.”

뚫어져라 바라보는 김 전무를 외면하며 준섭이 평상시와 같은 어조로 답했다.

“소환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회장의 얇은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오직 준섭의 입술에 시선을 박은 채로 침묵이 흘렀다. 김 전무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회장님, 검찰총장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금일 오전 중에 시간 약속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회장의 물음에 김 전무가 양손을 맞비비며 답했다.

“네, 회장님. 태서우 부회장님 소환만은 절대적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회장의 시선이 다시 준섭에게 꽂혔다.

“그렇나?”

“검찰총장과 회동하신 후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준섭이 무표정하게 답을 했다. 회장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었다.

한참 동안 민어지리 국물을 떠먹는 소리만 울렸다. 유난히 느리고 긴 식사였다. 그럴 때면 으레 회장은 보고 받은 상황을 홀로 정리하고 판단을 내릴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회장이 숟가락을 내렸다.

“준섭아.”

회장이 오른팔을 들어 툭툭 왼 어깨를 두드렸다. 젊은 시절 종잣돈이 된 TK어패럴을 일으킬 때 샘플 자재와 옷을 어깨에 짊어지고 매일매일 수 시간을 걸어 다니며 얻은 근육과 인대 손상이 늘 말썽이었다. 최근 들어 커진 일교차 때문에 아침저녁 통증이 심해졌다. 준섭이 붙어 서며 회장의 어깨와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회장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회장이 눈을 감은 채로 김 전무를 향해 질문했다.

“김 전무, 지방 선거가 한 달 남았나?”

“……네, 사흘 전 조사 결과 서울 시장을 비롯해서 여당 우세 지역이 전국 70%입니다. 지난달보다 10% 상승했습니다.”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뜨고서 김 전무에게 지시하는 회장의 목소리는 맑고 단호했다.

“태서우 부회장, 전자의 유 사장하고 오늘 송백재에 들르라 해라.”

“네, 회장님.”

회장의 시선이 안마를 하는 준섭에게 다시 머물렀다.

“어디 불편하신 데가 있으십니까.”

엄지로 지압점을 지그시 누르며 준섭이 물었다.

“준섭이, 니 아침밥 먹었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매일 조식 시간에 브리핑을 받으면서도 태 회장에게 준섭은 철저하게, 부리는 직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기적인 가족 식사 자리에서도 준섭의 자리는 말석이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주어진 밥그릇만 묵묵히 비우며 준섭은 노골적인 경계와 감추어진 냉대를 덤덤히 삼켜야 했다.

준섭이 짧게 답했다.

“먹었습니다.”

회장이 고개를 돌려 어깨에 머무르는 준섭의 손을, 커프스가 채워진 흰 와이셔츠 소맷단과 검은색 양복을, 결코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정돈된 얼굴과 깨끗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까지 천천히 쓰다듬듯이 바라보았다. 회장이 테이블 아래에 붙은 부저를 눌렀는지 최씨가 급하게 달려왔다.

“회장님,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요.”

“백설기 그거, 알밤 넣어서 찐 거.”

“네, 회장님.”

“하나 가져와 봐라. 커피 진하게 한 잔 내리고.”

안마를 하던 준섭의 손이 멈추었다.

“준섭이 니는 잠을 못 잔 날이면 눈자위가 파르스름해진다. 그것도 서희를 닮았지. 그런 날 아침이면 서희는 백설기랑 커피만 먹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백설기를 떨어뜨린 날이 없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태서희가 시환을 등진 이후 회장의 집과 회사 행사 모든 식단에서 백설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김세한 전무의 눈이 황망하게 벌어졌다.

‘언제, 언제 백설기가 송백재로 들어왔지?’

보고 라인에 구멍이 생겼다. 김 전무는 침 사레라도 걸린 듯이 콜록콜록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만 죄송합니다.”

김 전무가 기침을 참으며 겨우 말하고는 시뻘게진 얼굴로 다이닝룸을 나갔다. 준섭은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팔 안 아프나.”

“괜찮습니다.”

“하긴 그 정도로 지치겠나, 좋은 나이다.”

바싹 여윈 무릎을 매만지는 회장의 마른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옆으로 내리고는 준섭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었다.

“무릎이 또 불편하십니까.”

종아리와 무릎을 주무르는 손길에 회장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준섭이 너는 뭐를 맡아 할 작정이고.”

준섭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가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입사를 한 날부터 주기적으로 마음을 떠보는 시도가 있어 왔다.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하는 물음이다.

백설기 한마디에 김 전무는 사색이 되었지만 당사자인 준섭은 외려 덤덤했다. TK의 무엇을 원하냐는 파격적인 물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새카만 입속을 벌려 돌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삼켜 버리는 깊은 우물처럼 준섭은 잔잔하다.

“그런 거 없습니다.”

“뭘 제일 잘하노.”

“그런 것도 없습니다.”

회장이 주름진 입술을 늘이며 푸시시 웃었다.

“안마는 니가 제일이다. 지압 선생도 너만은 못해.”

“감사합니다.”

“그라면, 내 죽을 때까지 안마나 하며 살 거가?”

“제일 잘하는 일이라 하시니 나쁘지 않습니다.”

회장이 또 피시싯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에 이어 다이닝룸 문이 열리고 최씨가 조용히 들어와 백설기와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준섭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고만하고 앉아 먹어라.”

회장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준섭이 의자에 앉자, 회장이 물러가려는 최씨를 향해 지시했다.

“김 전무는 이제 가라 해라.”

뜨거운 커피잔을 앞에 두고 준섭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짙은 커피향에 욱신거리는 두통이 반이나마 낫는 기분이었다. 노란 밤이 박혀 있는 포실포실한 백설기에서 따스한 김이 올라왔다.

더운 김 때문일 것이다. 눈가가 뜨끈해졌다.

미국에서 서희는 집에서 늘 백설기를 만들었다. 젖은 면포를 깐 찜기에 김을 올려 멥쌀가루를 도톰하게 펼쳐 올리고 그 위에는 돌돌 말아 썰어 낸 대추로 꽃 장식을 하였다.

‘준아. 여긴 밤이 영 별로야. 대추 장식으로 만족해야지 뭐.’

준섭이 따뜻한 우유와 백설기를 아침밥으로 먹게 되는 날이면 서희의 눈자위는 파르스름했다. 그런 아침이면 준섭은 괜스레 다가가 팔을 벌렸다.

엄마.

서희는 준섭을 꽉 끌어안고서 코와 이마에 입을 맞추고 뺨을 부볐다.

내 아들. 준이.

엄마아.

준섭은 서희를 길게 늘여 부르며 품을 파고들었다. 서희가 꼭 계절이 지난 꽃처럼 풀썩 쓰러질 것만 같았다.

준섭은 포크를 들어 백설기를 크게 베어 냈다. 떡을 우물우물 씹어 삼키다가 목이 메면 뜨거운 커피를 훌훌 마셨다.

* * *

백설기를 아침으로 먹은 그날 저녁이었다. 송백재로 호출이 있었다. 태서우 부회장, 그의 아들 태이섭을 비롯한 태 회장의 일가가 모인 자리에서 회장은 짧게 선언했다.

선언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TK 회장직을 내어놓고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으로 청와대와 딜을 하겠다. 그룹 쇄신을 위한 혁신전략기획본부를 만들고 그곳에서 현재 태시환 회장의 비서실에서 주로 다루었던 그룹 총괄 역할과 컨트롤타워를 맡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회장의 말이 끝나자 시선들만 허공을 가로질렀다.

“회장님, 그렇게까지는……. 제가 책임을…….”

단단하게 시작했던 태서우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초라하게 흐려졌다. 검찰청 포토 라인에 서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수의를 입고 영어의 몸이 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범위였다.

“아니, 너무 폭탄선언이잖아요?”

태시환 회장의 장녀, 태지윤이 어색한 침묵을 깨며 웃음을 터뜨렸다. 태서우를 향한 빈정거림을 감추지 않으며 경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회장님, 책임은 이렇게 지는 거다의 표본 같은데. 혁신전략 어디? 아무튼 이름은 그럴싸하네요. 근데 이름이 뭐든 회장님 거기가 회장실을 대신하는 그룹 꼭대기네요?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먹히겠죠 뭐.”

“형님, 어떻게 말씀을 그렇게.”

태서우의 부인, 선애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상대는 돌연변이 태지윤이다. 태지윤과 말을 섞을수록 진창에 발이 빠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윤을 바라보는 선애의 눈에 경멸이 스쳤다.

지윤은 태 회장의 장녀이자 태서우의 배다른 누나였다. 기어이 이혼을 성취한 이후, 보란 듯 자유를 즐기며 산 지 10년도 넘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지윤은 그룹에 도통 관심이 없으니 태 회장이 두렵지도 않고 태 회장이 두렵지 않으니 이 집안 누구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태지윤은 선애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 댔다.

“정권이 아무리 바뀌었다 해도 울 회장님 절대 한쪽에만 안 퍼 주잖아요? 응달에 버려진 풀에도 물 주고 돌아다봐 주시죠. 죽은 나무도 쓰다듬고요. 언제 꽃피고 열매 맺을지 모른다 하시니까.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테니 뭘로 딜을 하시나요? 정말 혁신하는 흉내라도 내야 할 텐데?”

“니 말이 맞다.”

태 회장의 대꾸에 시선이 일제히 회장의 입으로 향했다.

“먼지가 쌓인다 싶더니 곰팡이도 피고, 청소를 하려 했더니 구들장이 삭았다. 청소도 하고 윤도 내고 싹 들어낼 건 들어내고 갈아야지.”

“회, 회장님, 그러면.”

얼더듬는 태서우를 바라보며 회장이 지윤을 불렀다.

“지윤아.”

“네, 회장님.”

태지윤이 서우와 회장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혁신전략 어디가 아이고, 혁신전략, 기획본부다. 니 말대로 꼭대기지. TK 임시 컨트롤타워다.”

“네, 알았어요. 기획본부. 그게 그거겠지만. 그럼 그 컨트롤타워의 꼭대기는 누가 앉아요?”

“준섭이다.”

쉼 없이 나온 답에 태지윤까지 입이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입과 달리 불처럼 달궈진 시선들이 태준섭을 향했다. 태, 준섭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준섭은 피를 받았지만 피를 받지 않은, 태씨이지만 태씨가 아닌, 다만 회장이 마음껏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시동 아니었나.

태준섭은 노쇠하고 강퍅한 회장의 귀가 되고 손이 되고 발이 되었다가 때로는 강아지가 되었다가, 노인의 변덕질에 걷어차이며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했다. 바닥에 엎드리고서 걷어차는 발이라도 핥을 수 있는 근성이 사람을 질리게 만들더니, 기어이!

차마 뱉어 내지 못하는 혐언들이 부글부글 침묵을 달구며 끓어올랐다.

“내일부로 상무 승진하고 혁신전략기획본부로 발령 조치했다.”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신호나 된 듯, 태지윤은 톤이 높은 웃음을 흘리고는 희극 배우처럼 명랑한 어조로 확인했다.

“회장님. 누구요? 저기 쟤요? 야아, 준아. 초고속 엘리베이터다. 너 용꿈 꿨니?”

“회장님, 이건.”

태서우가 얼굴이 붉어지며 주먹을 쥐었다. 그의 옆에 그림처럼 앉아 있던 태이섭은 희게 질린 채로 떨리는 양손을 숨기듯 맞쥐었다.

경악을 감추지 않으며 태서우가 소리를 높였다.

“이럴 순 없습니다. 준섭이가 어떻게 그 일을! 어떻게 TK그룹 핵심을!”

회장이 평온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서우야, 그럼 누가 맡을 거고? 니가, 니 아들이, 아님 니 사위가?”

구속을 겨우 피한 태서우도 그의 아들 태이섭도 해당될 수 없다는 반문이었다. 가볍게 혀를 차고는 회장이 전체를 향해 선언했다.

“준섭이가 비서실에 있으면서 TK 살림한 지 7년이다. 남들 두세 배는 더 열심히 했다. 그라믄, 14년, 21년 살림한 것만큼 일했으니 태 이사만 한 적임자가 없다.”

“회장님! 이섭이가 입사한 지도……. 지위를 보나 경력을 보나 준섭이보다는.”

“아버지.”

흥분한 서우의 팔에 슬며시 손을 올려놓으며 이섭이 부드럽게 말했다.

“옳으신 판단입니다. 회장님, 태준섭 이사가 위기 상황에서 그룹을 잘 수습해 줄 적임자라 생각됩니다. 여태 해 왔듯이 말입니다.”

이섭이 준섭에게 예의 바른 눈 맞춤을 하였다.

말속에 뼈가 있고 텍스트 속에는 저자의 숨은 의도가 있으며 핵심 주제는 뒤에 나온다고, 수능 지문도 아닌데 이섭의 말은 해석이 필요했다. 여태 해 왔듯, 사냥개 노릇 잘하라. 사냥이 끝나면 끓여 드시겠다는 뜻이다. 준섭은 이섭을 향해 예의 없이 피식 웃어 주었다.

“태이섭 상무 말이 옳다.”

회장이 의자 팔걸이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편에 있던 준섭이 반사적으로 다가가 회장의 손을 잡아 몸을 부축했다.

회장의 시선이 준섭을 느리게 훑어 올렸다. 크고 건장한 몸, 짙은 눈썹과 강한 콧날, 또렷한 입술선과 웃으면 가늘게 휘어지는 눈매까지 준섭은 그의 아비를 꼭 닮았다. 가장 아꼈던 보석, 가장 빛나는 보석 서희를 그 입술로 그 눈매로 눈을 멀게 하고 야생의 수컷처럼 건장한 몸으로 홀렸지.

기어이 그는 태시환에게서 서희를 빼앗아 갔고, 결국엔 완전히 망가뜨려 죽여 버렸다. 그 남자를, 준섭은 그대로 닮았다.

준섭이 회장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회장님, 재고해 주십시오.”

“뭐를.”

“아시잖습니까. 잘하는 거라곤 안마뿐인데.”

회장이 키들거리며 웃었다.

“그래, 안마도 계속해라.”

“네.”

“TK 수술도 하고.”

제대로 수술용 메스를 쥐여 주겠다는 건가. 준섭은 답하지 않았다. 회장은 천천히 한 자 한 자 점성 높은 액체를 입속에 머금은 듯 준섭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태……준……섭.”

태 회장 자신이 바꾸어 버린 이름이다. 강을 지우고 태를 세우고 태씨 가문 돌림자를 주었다.

“네.”

노인은 준섭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려 애를 쓴다. 초록빛이 도는 서희의 검은 눈동자이다. 그래, 준섭은 서희의 아들이다…….

“함 해 봐라.”

“회장님.”

“띨띨하게 굴면 다음 날로 내릴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준섭이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 * *

여름의 끝자락에서 변덕스런 날씨가 이어졌다. 일주일 동안 하늘은 어느새 쑥 높아졌다.

“연우경 씨.”

부름에 우경은 급히 눈을 맞추었다. 불편한 침묵을 피하려 창 너머로 시선을 두었나 보다. 신정호 COO는 평소와 달리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서 우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TK전자 기업 캠페인 미팅이 있었던 금요일이 지나고 그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TK 박 이사의 호출을 받고서 다녀온 은철이 말 그대로 미친놈처럼 날뛰었다. 회사도 발칵 뒤집혔다.

은철은 TK 박 이사로부터 이번 기업 광고는 경쟁 PT에서도 CS가 어려울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캐물으니 박 이사가 그날 저녁 찾아온 직원 때문에 태준섭 상무가 몹시 불쾌해했다는 내용을 할 수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우경은 은철로부터 육두문자 빼고는 들을 욕은 다 들어먹은 것 같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내내 목 끝까지 빵빵하게 부풀리며 무언가 올라와 있는 느낌이었는데 그 터질 듯한 감정이 모욕감인지 억울함인지 수치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남자의 검은 숲 같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뒤따라 재생되는 짙은 체향과 발목에 스치던 뜨거운 시선, 펜을 줍던 긴 손가락, 이만 돌아가요. 위로처럼 들리던 인사.

어울리지 않게도 배신감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내 이름 알고 있네요.’

‘연우경 씨, 그렇게 비를 맞고서 안 춥습니까.’

깊숙이 들어와 장기 내부를 긁어내는 듯한 비웃음이었다.

나쁜 자식.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뭘 얼마나 불쾌하게 했다고.

네 앞에서 펜을 떨어뜨려서? 널 감히 못 알아봐서? 진로를 막고 차를 멈추게 해서? 아니라면, 네 앞에서 비를 맞아서?

우경은 화장실 변기를 잡고 토해 낼 것 없는 위를 비우고 또 비워 냈다. 명치끝이 힘껏 차인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난 수요일에 우경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신정호 COO는 TK 일이라면 우경 씨가 책임을 질 사안이 아니라 잘라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이었고, 우경이 책임을 져 주는 게 모두에게 가장 편안한 결론이었다.

우경은 목에 걸린 사원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CS애드 연우경.

입사 후에는 꿈을 성취한 듯 기뻤는데…….

어쩌면 줄곧 제 마음이 매일매일 조금씩 다치고 헐고 멍이 들고 있다는 걸 모르는 척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경 카피, 그럼 회사 그만두면 어디 갈 거예요? 필요하면, 광고 회사 소개해 줄게요. 여기 출신 중에 잘나가던 사람들이 만든 곳 많아요. 아시죠? 어디가 좋아요.”

우경이 작게 웃었다. 웃음을 지우기 전에 눈이 붉어졌다.

“갈 곳은 있습니다. 전 직장 상사가 홍보대행사를 차렸어요. 같이 일하자고 전부터 그랬어요.”

“아, 그렇구나.”

정호의 표정이 그제야 좀 편안해 보였다. 카피라이터 우경의 사직서로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면죄부를 받는 일에 대해 껄끄러움이 덜어진 모양이다.

“연락해요.”

정호의 말은 진심이라 믿고 싶다. 우경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 * *

그룹 혁신전략기획본부는 회사에서 주로 ‘전기본’이라고 줄임말로 불렸다. 공식적인 전체 회의는 주 1회이나 사안마다 수시로 회의가 잡혔고 참여하는 사람의 범위가 회의마다 조금씩 달라졌다. 모든 회의와 사안에 투입되는 사람은 준섭이었고, 그룹 수뇌부들과 이루어지는 회의의 주관도 준섭이었다. 준섭의 직위는 상무였지만, 기획실에서는 본부장이라는 직함으로 불렸다. 무섭도록 빼곡한 스케줄을 감당해야 했다. 오늘 급히 소집된 회의는 출근 시간 전인 7시에 시작되었다.

호출된 사장들은 태시환 회장의 입이 된 준섭의 입만 바라보았다.

태시환 회장이 전하는 말뿐 아니라 혁신이라는 이름하에 준섭이 가동한 채널은 저인망 어선처럼 조직 밑바닥에서부터 차별 없이 제보를 건져 올렸다.

비자금부터 자금 유용까지 관습적으로 행해졌던 일, 은밀한 타협과 거래, TK가 주는 알량한 권력의 남용, TK 이름 뒤에 숨어 야금야금 누려 왔던 커넥션과 뒷거래 같은 자잘한 비리나 아랫사람들을 향한 험한 언사, 성차별, 주사 같은 개인적인 흠부터 그룹 내의 줄타기와 단기 성과 주의로 인한 불안정한 영업 이익이나 장기 전략의 부재까지 책임질 일은 얼마든지 충분했다. 준섭이 찍어 내기만 하면 한두 명이 그룹 비리의 책임을 덮어쓰고 언제 구치소로 보내어져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준섭이 여태 가진 것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준섭이 가지지 못한 것에는 그들에게 갚아야 할 부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섭이나 태서우 부회장과는 다르게 준섭은 그들에게 신세진 바도 빚진 바도 없으니 갚을 일이 없었다. 오로지 휘두를 수 있는 칼만 쥐고 있는 셈이다.

태준섭의 조율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니,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말만 한숨처럼 나왔다. 본부장실을 나오며, 침이 말라 하얗게 일어난 혓바닥을 놀리며 몇몇이 낮게 속삭였다.

“회장님이 80이 넘더니 판단력이 흐려지신 겁니다. 어떻게 태준섭을.”

“글쎄, 두고 봐야지. 토사구팽이란 말도 있으니. 태준섭이 또 사냥개로는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들 중 몇몇은 제 사무실로 가기 전 태서우 부회장실로 향했다. 또한 몇몇은 태이섭 상무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간 후, 홀로 남은 준섭은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 대답하는 비서에게 강우식 대리를 들어오게 하라 일렀다.

- 네에, 저…….

비서는 대답을 끌며 무언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지금이요. 부탁해요.”

- 아, 네네.

비서는 급히 망설임을 지우며 답을 했다. 아마도 스케줄 지시는 비서를 통해 기사에게 가는 방식이 맞지 않나, 왜 우식이 비서 업무을 가로채는가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을 것이다.

우식은 준섭의 기사로 일한 지 3년이 넘었다. 잠시 후, 본부장실에 들어온 우식에게 준섭은 용건만 빠르게 전달했다.

“점심 약속 12시 C호텔. 12시 50분에는 나올 거야. L호텔 들렀다가 회사에는 2시 이전에 들어올 거고.”

“네.”

준섭의 비서는 12시 C호텔만 준섭의 스케줄로 알고 있다. 우식은 급히 호주머니에서 펜과 자그마한 포스트잇을 꺼내어 빠르게 적었다.

“저녁 약속이 있어. 삼청동까지 얼마나 걸리나.”

준섭이 말을 하다 말고 검지를 까닥했다. 우식이 준섭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펜 좀.”

“아, 네.”

우식이 들고 있던 펜을 내밀었다. 준섭이 뚜껑을 뒤로 꽂아 둔 붉은 사인펜을 받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우식은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인 듯 펜을 쳐다보는 준섭과 펜을 번갈아보았다. 문구점에 가면 수십 자루씩 꽂아 놓고 파는 흔한 플러스펜이다. 회사 비품으로도 제일 만만하게 번들로 구비해 놓는 펜이지만, 생각해 보니 준섭의 책상에는 올려놓지 않는 펜이었다.

“이 펜, 잘 써지나?”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냥 펜입니다.”

준섭이 펜을 들고서 데스크 위에 둔 메모지에 빠르게 낙서처럼 글자를 썼다. 스스슥 펜과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잘 나오네.”

준섭이 우식에게 펜을 도로 내밀었다.

“쓰셔도 됩니다. 한 번밖에 아니, 오늘까지 두 번밖에 안 쓴 펜입니다. 아, 아니 제가 금방 새 펜으로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됐어.”

준섭의 손 위에서 붉은 펜이 빙그르르 돌았다. 우식은 호주머니 속에서 다른 펜 하나를 꺼내어 준섭의 이어지는 스케줄을 받아 적었다.

준섭은 우식이 나간 후에 펜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흰 종이 위 써 놓았던 글자 뒤에 한 자를 더 붙였다. 우. 붉은 색으로 이름을 쓰면 안 된다는 말이 있던가. 그래서 나머지 글자는 쓰지 않았다.

연. 우.

붉은 사인펜을 떨어뜨리고서 여자는 움직임이 없었다.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감고서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가슴과 어깨가 호흡에 따라 약간씩 들썩였다. 충동적으로 굴러온 펜을 집어 들고 다가갔다. 여자가 펜을 받아 들 때, 귓바퀴가 펜의 붉은 빛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쳐다보니 뺨까지 붉어져 버렸다. 벌어진 입술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준섭은 혓바닥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묻는 제 목소리가 수분을 잃어 까슬했다.

‘네?’

여자가 놀란 듯 눈을 맞추고, 또 벌어지는 입술.

짙은 백합향을 갑자기 들이켰을 때처럼 머리가 울렸다.

그런데……. CS애드 직원이라니.

준섭은 완성하지 않은 이름을 읽었다.

연. 우. ……경.

‘하필 오늘, 이런 타이밍에. 여기가 아니었다면.’

여자는 석류처럼 붉은 입술을 깨물면서 울음을 삼켰다.

여기, 회사 건물 안이 아니었다면, 아니, CS애드 직원인 줄만 몰랐다고 해도 말이야…….

그랬다면 아마도 수작을 걸었겠지. 이름을 알려 주고, 밥을 먹자고. 밥을 먹는 내내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겠지. 그리고…….

준섭은 무의미한 가정을 이만 끊어 냈다.

‘여기가 아니었다면 혹은 CS 직원이 아니었다면’ 하는 가정의 절정은 석류알이 제 입 속에서 터지는 환각이었다. 달고 시고 씁쓸한 과즙이 툭 터지면, 혀가 일시적으로 마비될 만큼 짜릿한 감각이 뇌를 찔러 올 테다. 바싹 말랐던 입안에 어느새 침이 고였다.

준섭은 입술을 문지르며 쓴 침을 삼켰다. 낙서를 한 종이를 구겨 버리고, 데스크 위에 올려 둔 붉은 플러스펜을 툭 손끝으로 튕겼다. 펜은 도르르 굴러가 모서리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 * *

이섭에게 차례로 들어와 보고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태준섭을 비난했다. 체면을 갖추어 점잖게 돌려 말하거나 몇몇은 과장된 표정으로 흥분하기도 했다. 내용은 다르고 집어내는 포인트도 달랐지만 태준섭을 비난함으로써 태이섭의 편에 굳건히 서겠다는 자신의 좌표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들이 보고를 시작한 지도 스무 날이 넘었다. 지난 3주간 혁신전략기획실에서 추진하는 사안이나 회의는 모두 이섭의 귀에 이런 식으로 즉각 보고되었고, 태서우 부회장에게는 정식적인 절차로 보고가 들어갔다. 공식적인 보고나 이섭이 받은 비공식적 정보는 거의 일치했다. 이섭이 태서우 부회장에게 올려진 보고서의 카피를 훑어보고는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전기본 소속들이 참새처럼 열심히 물어다 나른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네요.”

“아, 네.”

김세한 전무가 머쓱해진 표정으로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이섭이 전무를 비스듬하게 올려다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아냐는 물음 대신 답을 주었다.

“그러니까, 알맹이는 빠졌다는 소리지.”

이섭은 데스크 앞 의자를 빙글 돌려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흰 피부와 미끈하게 뻗은 콧날은 태이섭의 미모와 이미지를 동시에 완성시키는 요소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 톤이나 부드러운 미소가 태이섭에 대한 호감을 상승시킨다면 날카로운 콧날과 흰 피부는 냉랭한 기운이어서, 상대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김세한 전무는 태이섭이 포개어 올린 긴 다리만 응시했다. 이섭은 의자의 방향을 좌우로 조금씩 흔들면서 시선은 풍경 한 점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런 자가 태이섭이었다. 겉으로는 선비 같은 올곧음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이득을 취하는 데 있어서는 건달처럼 손쉬운 방식을 선호했다.

태서우와 다른 점이라면 가끔은 김 전무가 흠칫할 만큼 이섭은 감도 빠르고 머리 회전이 빨랐다. 얕은 수가 아니라 좀 더 깊고 치밀한 수를 부릴 줄 알았다. 그건 타고난 감각이자 특성이다.

태준섭이 표정 없는 코끼리처럼 움직여 가는 길에 놓인 방해물을 짓밟아 버리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면, 태이섭은 늪에서 눈만 내어놓고 있는 악어였다. 코끼리가 물을 마시러 코를 담그는 순간 숨기고 있던 커다란 입을 벌려 코를 물어 버릴 준비를 하는 악어 말이다.

“더 기가 찬 건, 태준섭 비서실 보고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이섭이 시선을 여전히 붙박은 채 말했다.

“회의에선 협박과 회유를 동시에 던져 균열을 만들고, 비서는 매끈하게 따돌리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혼을 빼놓네요. CS애드도 발칵 뒤집었고요.”

김세한 전무가 아, 네. 라고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답했다.

“새끼.”

욕설을 태연하게 지껄이며 이섭은 얼굴에 미소를 만들었다.

“내가 그 새끼가 회장을 홀렸다고 했죠. 태준섭이 이사 달고 1년, 뭐라 했습니까. 내가 상무 승진했으니 괜찮다 그러셨죠. 회장이 움직인 건 그때부터였어요. 반년 전부터 태 이사가 이사였던 적이 있나요. 무소불위였지.”

“그렇지는 않았…….”

“그래서 결과가 이렇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내가, 제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곤두세우고 주시하라 했잖습니까. 미워하신다면서요. 종처럼 부린다면서요. 해 봤자 환관이나 시동이라면서요.”

김세한 전무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쓰고 버리실 정도입니다.”

태이섭이 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전무님, 사탕은 태서우 부회장님이 좋아하세요. 저는 단 거 안 먹고요. 약 좋아합니다. 양약고어구 이리어병. 입에 쓴 약 먹고 건강하게 누리며 살아야죠. 하긴, 사탕이야 좌판에서도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지만, 몸에 꼭 맞는 보약 주기가 어렵지요.”

은근히 능력을 꼬집는 태이섭의 말에 김 전무가 바싹 긴장했다. 박 이사가 흘린 말이 시답잖은 소리라 생각해서 보고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무어라도 태준섭을 긁어낼 거리라면, 만들어서라도 보고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CS 말입니다.”

“네.”

태준섭이 기업 광고를 서둘러 제작하라고 지시하고, 이후 불쑥 미팅에 참가해서는 바로 엎어 버린 사건이라면 치를 떨면서 이미 잘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태이섭이 답했다. 태이섭의 외가, 태서우 부자의 은밀한 자금줄이 되고 있는 CS애드를 쳐내어 목줄을 쥐겠다는 의도였다.

“경쟁 PT 붙인다면서요. 며칠 안 남았네요.”

“17일, 이틀 뒤 입니다. 최대한 CS로 가도록 손쓰고 있습니다.”

“당연하죠. 왜요, 경쟁 PT에서도 밀릴 거 같습니까. 심사 참여한 사람들이 매긴 점수 하나하나 다 태서우 부회장께 보고될 거라 주지시키세요.”

“네, 물론입니다.”

김 전무가 은근히 목소리를 깔며 비밀을 발설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아니라요. 저……. 그날 미팅 날 말이죠. 들어 보니까 CS를 아예 경쟁 PT에서도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말도 나오고 했다고 합니다.”

“뭐라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요, 태준섭 눈치 보느라 그런 것도 있는데 단초를 만든 사람이 CS 직원이랍니다. 그날 저녁에 무리하게 찾아와서 심기를 건드렸다고.”

“심기? 그래서요?”

태이섭이 그제야 여태 비스듬히 두었던 의자를 똑바로 돌려 앉으며 김 전무를 쳐다보았다.

“박 이사가 그러는데 오늘 CS애드 AE를 만났더니, 그 직원을 잘랐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니 선처해 달라고. 태준섭 상무께도 전해 달라고 했답니다. 박 이사야 그런 말 전하면 뭐라고 더 꼬투리 잡을 수도 있으니 일단 보고는 안 했다고 하고요. 일개 CS애드 직원 잘리는 것까지 우리가 다 알아야 합니까 하면서요.”

김 전무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또 생각해 보니까 이게 말이죠, 대기업 오너의 갑질 중 갑질 아닙니까. 주님이라는 광고주 대기업 3세가 하청 업체를 대상으로 그것도 어린 여직원을 제 기분을 좀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밥줄을 잘라 버린 거니까요. 요즘 이슈화하기 딱 좋고…….”

태이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어린 여직원?”

“네. 팀장급 이런 직원이 아니라 카피라이터 1년차라고.”

“다시 말해 봐요. 상황을 정확히. 그러니까 그 여직원이 태준섭을 찾아왔는데 태준섭이 그에 심기가 거슬려 CS에 압력을 넣었다는 건가요?”

“아, 아 그건 아닌 듯하고요. 자세한 건…….”

이섭이 이만 알겠다는 듯 손을 들었다.

“이만 나가시고 박 이사 지금 들어오라고 하세요.”

김 전무가 주뼛거리는 걸음으로 나간 후, 이섭은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어쩌면, 아마도…….

이섭의 얼굴에 설렘이나 기다림 같은 흥분감이 번졌다. 덫을 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영리한 악어처럼 이섭은 고요하게 흥분했다.

* * *

자리에서 일어난 이섭이 환하게 웃으며 박 이사를 향해 걸어왔다.

“앉으세요, 박정우 이사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박 이사가 이섭이 권하는 응접세트 소파 앞으로 섰다. 이섭이 먼저 앉으시라는 손짓을 하자 아니, 상무님이 먼저 앉으셔야지요.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섭은 TK 후계자다운 아량을 담은 미소를 띠며 굳이 그러시다면 하는 투로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여쭤보고 싶어서요. 사소한 것이라도 말거리가 되니까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박 이사는 이섭의 부드럽고 예의 바른 말투에 상대를 배려하는 신중함을 느꼈다.

“상무님, 뭐든 물어보시면 제가 아는 대로 다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말거리라니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럴 만한 건이 전혀 없습니다.”

나눈 대화에 대해서는 결코 가벼이 발설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은 대답이었다. 이섭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좀 다른 이야기를 들었어요. CS 직원이 태준섭 상무에게 결례를 범했다는데…….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CS가 태준섭 상무를 조금 얕잡아 본다거나,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죠. 그런 속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좌시할 수는 없어요.”

박 이사는 손이라도 저을 듯이 급히 부정했다.

“아닙니다. 상무님. 제가 본 바로는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직접 본 장면은 직원이 태준섭 상무가 퇴근하는 차량을 기다리고 있다가 몇 마디 대화를 한 거, 그게 전부이긴 합니다. 제가 그때 CS애드 건으로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셔서 퇴근하시는 차에 동승하면서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직원이 차량을 세운 건 무례하지만, 그것도 조금 애매해서요.”

“그래요? 상황을 좀 더 설명해 주시지요.”

박 이사는 이마에 솟은 땀을 손등으로 누르며 답을 했다.

“직원이 차가 나가는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는데 상무님이 차를 잠시 세우라 했습니다. 창을 열자 상무님께 기회를 달라고 사정을 했고 저는 그 장면만 봤습니다. 그 전에 비서실로 전화해서 뵙게 해 달라 요청을 여러 차례 했다고는 하더라고요. 태준섭 상무님이 몹시 성가셨는지 질책을 했습니다. 무능을 저런 식으로 증명한다고도 하시고 경쟁 PT에서는 그런 무능함을 보기엔 시간이 아깝다고도. 물론 그 직원에게는 아니고 차 출발하고 나서 저한테…….”

이섭은 얼마 전 비서실 라인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떠올렸다. CS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었고 준섭이 무시했다고만 들었는데…….

“그래서 그 직원이 CS애드에서 해고당했군요.”

“음……. 네, 아마도.”

“그렇다면 혹시나 우리가 해고에 압력을 넣은 건 아닌지, 또 그 직원에게 태준섭 상무가 모욕감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그 점도 신경이 쓰이는군요. 요즘 언론이나 SNS에 일단 한번 잘못 올라가면 수습이 힘들잖아요.”

이섭이 사려 깊은 표정으로 박 이사를 바라보았다.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직원에게는 부드럽게 배려해 주셨지요. 그날 비가 많이 오고 바람도 있어서 직원이 비를 좀 맞았더라고요. 태준섭 상무님이 춥지 않냐고도 물어보셨습니다. 아, 맞다. 직원한테 약간 농담처럼 말도 거시고…….”

“농담이라면.”

태이섭의 눈이 반짝였다. 태준섭 그 새끼는 여자한테 농담을 거는 부류가 아니다. 적어도 일 관계로 엮이는 여자한테는 말이다. 꼴리는 여자에게는 농을 걸고 질펀한 섹스를 하겠지만. 물론, 섹스해도 좋을 여자일 경우에 한해서다.

“꼭 농담은 아니지만, 직원이 태준섭 상무님, 하고 부르니까 ‘이제 내 이름 아네요?’ 같은 말을 하면서 인사도 받아 주고.”

‘이제’, 내 이름이라……. 여자가 태준섭과 안면이 있는 사이구나. 이섭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혹시 CS애드 미팅에 참석한 직원인가요?”

“아닙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개인적 욕심에 대책 없이 들이댄 거 같은데, 그래서 태준섭 본부장님이 더 불쾌하셨을 수도 있고요. 또 아무리 편견 없이 보려고 해도 그……, 여자 직원인데 온통 빗물에 젖어서……. 눈살이 좀 찌푸려지는 광경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미인계 말씀이십니까?”

박 이사가 머쓱하게 웃었다.

“몹시 미인이긴 했습니다만.”

태이섭이 시원하게 따라 웃으며 덧붙였다.

“안타깝네요. 태준섭 상무, 그런 거 안 통하는 사람이잖아요.”

“네.”

태이섭이 웃음을 마무리 지으며 대화도 갈무리했다.

“이제 상황을 좀 알겠네요. 고맙습니다.”

박 이사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혹시나 CS애드 건으로 태이섭이 질책을 하거나 경쟁 PT 결과에 부담을 주면 무슨 답을 해야 할까 했던 고민을 말끔히 내려놓고 가벼운 걸음으로 상무실을 나갔다.

박 이사가 나가고 문이 완전히 닫힌 후에 이섭은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그날, CS애드 미팅한 날 말입니다. 태준섭 동선 파악해요. 회사에 언제 들어오고 나갔는지 동행이 있었는지. 퇴근 시간 근처 위주로요. 시각 확인되면 태준섭이 잡힌 CCTV 확보하시고.”

이섭의 감이 맞다면, 태준섭과 여자 사이에 반드시 무언가가 존재한다. 태준섭은 퇴근길 차에서 여자를 보기 전에 분명 여자를 먼저 만난 적이 있다. 또한 별로 놀라운 기색 없이 인사를 건넸으니 준섭은 여자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회사에 본인을 만나기 위해 와 있었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내 이름 아네요?”

이섭은 준섭이 했다는 말을 따라해 보았다. 여자한테 농을 거는 태준섭이라니. 참으려 해도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놀고들 있네.

아무튼 이제야 내 이름을 안다고 표현했으니 아무래도 정보를 조합하면 준섭은 여자를 회사 내에서나 근처에서 우연히 먼저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준섭이 누구인지 모르던 여자와 준섭, 둘 사이에 드라마처럼 어떤 남녀 간의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같은 것이 불꽃처럼 튀었을지도. 운이 좋다면 CCTV가 그 순간을 잡아냈겠지.

이섭은 늘 운이 좋았다. 그래서 운을 자신의 감만큼 믿는 편이다.

누굴까, 태준섭이 차를 멈추게 한 여자.

기왕이면 CCTV가 여자의 모습이 잘 나오는 화질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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