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굿모닝.”
우경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경쾌한 인사가 들린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김여진 미디어 플래너다.
“뭐야, 오늘 왜 이렇게 예뻐?”
바지를 고집하던 평소와 다른 차림이긴 했다. 레이스가 달린 아사 블라우스는 페미닌함을 강조하고 몸 선이 드러나는 스커트에는 기하학적 무늬가 큼직하게 들어가 모노톤임에도 화려해 보였다.
“예쁘긴요. 맘스 초이스. 거부하면 지각시킬 기세여서요.”
여진이 사각 뿔테 안경 너머로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선 봐?”
우경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홍보대행사 출신 우경이 애매한 경력직으로 국내 탑5에 드는 CS애드에 들어온 지 1년이 좀 넘었다. 입사하고 한동안 홀로 질량이 다른 분자처럼 뒤섞이지 못하고 분리되어 동동 떠다니는 느낌에 사무실에 들어설 때마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럴 때면 굿모닝, 다정하고 쾌활한 여진의 인사가 우경의 마음을 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 인사가 마치 툭툭 등이라도 두드려 주는 것만 같았다.
“오늘 TK 미팅이 2시죠?”
“응. 이은철 AE랑 신정호 COO만 참석하니까, 우린 2시 이후면 널널해지겠지? 수고!”
“네. 수고하세요.”
우경이 싹싹하게 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TK기업 광고 미팅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설렌다. 비록 미팅에 참석하지는 않지만 우경이 처음으로 참여한 거대 클라이언트 캠페인이다.
CS애드 입사는 우경의 꿈이었다. 하지만 입사 이후, 그저 그런 인서울 대학, 홍보사 출신인 우경에게 맡겨지는 일들은 제대로 된 카피라이터 업무라고 할 수 없는 리서치와 잡무, 혹은 굵직한 광고주들의 일에 우선순위가 밀려난 자잘한 광고 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TK전자 캠페인 카피를 맡으라는 신정호 COO의 제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뻤다. 그때는 우경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이은철 AE와 팀을 이루어야 하는 것도 상관이 없었다.
입사 후 첫 회식을 마치고 억지로 밀고 들어온 택시에서 은철은 TK 신제품 캠페인을 들먹거리며 우경에게 몸을 붙여 왔다.
‘팀장님, 취하셨네요.’
우경은 호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던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어 택시 기사에게 내밀었다. 택시를 타면서 확인했던 기사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성경수 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이분 취했으니 모셔다 주세요.’
택시 기사가 급히 횡단보도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이은철 AE가 담당하는 광고주에 우경이 배정되는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은철은 우경에게 추근거림 대신 증오심을 예사로이 드러내곤 했다. TK 일을 같이하면서도 그 강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닷새 전, 며칠 밤낮을 매달려 뽑아낸 카피를 앞에 두고서 은철이 마커 펜으로 탁탁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회의실 책상을 두드렸다.
“연우경, 너 이런 감각으로 무슨 카피라이터를 하겠다고. 넌 대체 카피라이터가 뭐라고 생각해? 카피라이터는 광고주가 원하는 바를 알아내서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형식으로 바꿔 주는 사람이야. 네 카피에는 대중도 없고 광고주도 없어. 뽕에 찬 너뿐이지.”
우경은 은철의 비난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팀원들 앞에서 처참하게 깨지는데, 능력 부족에 대한 부끄러움보다 반박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이 더 컸다. 인정할 수 없는 멘트라 더욱 그러했다.
은철은 우경의 카피를 걸레쪽처럼 버리며 말했다.
“TK기업 이미지 광고는 카피라이터가 참신함이나 새로움을 시험해 보는 데뷔장이 아니야. 이미지 광고가 대중을 낚기 위한 거 같아? 아냐, 광고주 대가리들이 좋아하는 이미지를 보여 주면 돼.”
광고주 대가리가 좋아하는 이미지로 카피를 만들라는 은철의 목소리가 쟁쟁 귀를 울렸다. 우경은 컴퓨터 화면에 오늘 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띄웠다.
화면을 보던 우경이 슬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은철의 요구대로 지칠 만큼 회의를 해서 만들어 낸 카피였지만, 아무리 그럴싸한 디자인으로 포장을 해도 우경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우경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내리고, 화면 구석에 처박힌 폴더를 클릭하여 시안 하나를 열었다. 은철에게서 면박을 당한 것이었다. 버려야 할 미련이었다. 우경은 시안을 닫고 폴더도 깊이 숨겨 버리고,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분주히 손을 움직이며 자잘한 건들을 빠르게 해치우고 나니 디자이너와 최종 PT 리뷰를 위한 미팅까지 30분이 남았다. 둔한 머리엔 아무래도 카페인이 필요했다. 머신 앞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진하게 내리는 동안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서동재입니다. 오늘 뵙기로 한 사람입니다.]
엄마를 지난 3주간 구름을 밟게 했던 당사자다. 이름이 동진이 아니라 서동재였구나.
서초구 아파트 상가에 안과를 열었다는, 정확히는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상가에 안과를 개업했다는 남자다. 아파트 상가 피부숍 원장이 소개했는데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의사라는 조건 하나만으로도 엄마는 이미 할머니의 시골 과수원까지 재산 목록으로 끌어모아 의사 사위를 맞을 만한 집안임을 강조하였다.
[연우경입니다. 7시에 뵙기로 했죠? 장소는 어디가 편하세요?]
[제가 우경 씨 회사 근처로 가겠습니다. H호텔 로비도 좋고, 스타벅스도 상관없습니다.]
문자를 한 번 더 읽고서 우경은 메시지를 입력했다.
[H호텔로 가겠습니다. 도착해서 전화드릴게요.]
스타벅스가 상관없다고 표현하는 사람이라면 H호텔이 더 편하다는 말이다. 전송 후에 보니 너무 사무적인 말투 같아서 이모티콘이라도 보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디자이너와 미팅 준비가 급했다. 우경은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마시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 * *
정확히 오후 2시에 TK전자에서 온 세 명의 임원진이 CS애드 회의실로 들어섰다.
신정호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우려를 했다. OT를 할 때만 해도 기존 TK전자 담당 이사와 가벼운 미팅처럼 친숙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오늘 느닷없이 TK그룹 혁신전략기획본부 소속 상무가 등장했다.
혁신전략기획본부는 TK의 새로운 컨트롤타워였는데, 정작 등장한 상무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다.
태시환 회장의 먼 일가라는 말부터 총애하는 비서 출신일 뿐 일가는 아니라는 설까지 분분했는데, 신정호는 회의실에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알아차렸다.
그는 꼭대기에 서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태준섭입니다.”
간결하고 예의 바른 인사가 전부였지만, 회의실에 있는 모든 이는 그의 시선이 멈추는 자리, 그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숨죽였다. CS애드 사장이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회의실로 달려왔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마자 상무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상무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프레젠테이션 시작하시지요.”
발표를 시작하기 전, 사장이 슬쩍 신정호에게 메시지를 확인하라 사인을 보냈다.
[태준섭, 태시환 회장의 외손자.]
태씨인데 외손자? 누구? 신정호의 의문에 대한 답이 연속적으로 왔다.
[태서희의 아들.]
[회장이 가장 아꼈던 막내딸.]
아, 그제야 떠올랐다. 태서희는 태 회장 가족의 비극사였다. 또한 비극의 시작점에는 CS애드의 모기업인 CS미디어 그룹 총수 일가가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남자의 성이 태씨라니?
그럼 수년 전 떠돌던 소문대로 그 수순을 밟아 기어이 입적을 시킨 건가.
신정호의 등줄기에 소소하게 소름이 돋았다.
프레젠테이션은 신정호와 이은철이 분량을 나누어 진행했다. PT가 끝나고 회의실 불이 환히 켜졌을 때, 태준섭은 입을 약간 벌리고 한쪽 눈을 찡그리듯 웃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신정호는 이미 닥쳐올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태준섭이 주위를 향해 물었다.
“제가 무식해서 말입니다. 광고란 만들어 낸 상품을 잘 팔아 치우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PT 말미에 넣었던 필립 코틀러의 말, ‘마케팅은 만들어 낸 물품을 영리하게 처분할 방식을 찾는 기술이 아니라, 진정한 고객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비꼬는 듯한 질문이었다.
“아, 고객 가치 창출. 좋죠.”
고상함은 완전히 벗어젖힌 말투였다.
“그런데, 이 광고는 고객 가치는 안중에도 없을 뿐 아니라 물건 처분도 못 하겠습니다. 이걸로 뭘 얼마나 처분하겠습니까. 도대체 뭐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말이지. OT 제대로 했습니까?”
“아, 저……. 물론 OT에서…….”
옆에 있던 박 이사가 긴장으로 굳어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이런 식이군요. 제가 여기 오기 전 CS애드 매출을 좀 봤습니다. TK그룹 광고가 전체 매출의 75%, 그중 TK전자가 60%더군요. 지난 몇 해 동안 해외 광고 회사들 줄줄이 인수 합병하시던데 인수한 광고 회사가 현지 TK전자 광고나 홍보 물량 소화해 내는 해외 매출을 포함한 겁니다. 이거 원, CS애드가 인하우스도 아니고. 그럼 탁월한 실력인가 했더니.”
태준섭이 픽 입술 한끝만 올리며 웃었다.
“좀 많이 어이가 없으려고 하네요.”
묘하게도 빈정거리는 웃음이 사람을 움켜쥐는 듯한 매력이 있었다.
신정호 외에 다른 사람들도 강펀치를 맞은 모양새 그대로 멍하니 태준섭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모습들을 훑어보는 준섭의 눈빛은 딱 떨어진 각 잡힌 슈트 차림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사촌 지간인데 태이섭과는 완전히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칠고 시건방졌다.
아니, 건방지다는 표현 자체를 비난으로 인식한 적이 없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무례하고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상무님, 이번 캠페인은 기존의 브랜드 이미지 광고의 시리즈 격이라…….”
운을 떼는 사장을 향해 준섭이 손을 들어 보였다.
“담당 AE랑 이야기합시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은철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 그러니까 상무님. 그저 제안일 뿐입니다. 그룹이 쌓아 온 브랜드 가치의 전통성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포커스를 두었습니다. 고견을 주시면 곧바로 실무진들과 회의하고 최대한 원하시는 방향으로 다시 제작해서 올릴 수 있습니다.”
준섭이 은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구시라고 했죠?”
“이은철 AE입니다.”
“아.”
준섭은 이름도 직위도 부르지 않고 정말 귀찮다는 듯이 답했다.
“다 치우고 하나만 말합시다. 카피 말입니다. 이런 카피를 TK의 전통성, 클래식함이라고 포장합니까? 아울렛 추가 세일에서도 처분되지 않아 결국 소각시켜야 할 다섯 시즌은 지난 패션 같군요.”
태준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사를 향해 하는 말이었지만 CS애드에 대한 통보였다.
“경쟁 PT 왜 안 합니까. 안 하는 겁니까, 못 하는 겁니까.”
CS애드가 왜 특별 취급이 되어야 하냐는 질문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해방 이후부터 근 반세기 동안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수 명의 장관과 정치인을 배출한 CS그룹의 일가는 대한민국 정치, 문화, 언론으로 연결되는 거대 파워였다. 태시환 회장과는 동향 출신이라는 오랜 인연이 있었으며, 태서우와 CS의 딸이 혼사로 연결되면서 TK의 눈부신 성장기에 CS 일가가 같이했다. 고비마다 든든한 후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지금, 태서희의 아들 태준섭이 태서우 부회장의 처가이자 태이섭의 외가인 CS에 칼을 빼어 들겠다는 공개적인 포고를 CS 본진에서 한 셈이다.
태준섭을 비롯한 TK 사람들이 나간 후, 회사는 마치 느닷없이 날아온 운석 한 조각이 바닥에 처박힌 것처럼 공황에 빠졌다.
* * *
“연우경 카피, 이게 연우경 씨 최선이었지?”
은철이 시안 프린트를 책상 위로 던지며 비난했다. 책상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종이는 분에 못 이겨 이미 구겨진 상태였다.
“그러니 TK에서 빠져. 아니, 내 팀에서 빠져. 아울렛에서 떨이 세일로 팔다 팔다 못 팔아 소각시켜야 할 무려 다섯 시즌은 지난 옷 같은 카피란다. 젊은 피 넣으라, 좀 잘 이끌어 봐라, 신정호 COO가 꽂아 줘서 받았는데, 결과가 이거다. 거참, 찜찜하더라니.”
“팀장님.”
우경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굳이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자면 우경은 새로운 색깔을 제시하는 카피를 제안했으나 모두 은철에게 잘렸다.
하지만 과정이 어떻든, 작성 책임자가 누구로 되었든 간에 아울렛 떨이로도 안 팔리는 유행 지난 패션처럼 소각시킬 카피안은 우경에게서 나왔다.
“왜.”
“다시 하겠습니다.”
은철의 넙데데하고 탄력 없는 이마에 주름이 흉하게 잡혔다.
“뭘! 최선은 이미 다했잖아! 너 뭐랬어. 홍보대행사 근무하면서 발로 뛰고 대중과 호흡하며 기사 작성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TK 맞춤으로 잘할 수 있다 큰소리쳤잖아. 그걸로 디밀어 우리 회사 들어오고, 어. 내 밑에 기어들어 왔잖아. 실력 없이 메이저 기업 광고에 꼽사리 끼고. 그래서 지금 결과 나왔잖아.”
은철이 삿대질을 하듯이 검지를 들어 허공에 꾹꾹 찔렀다.
“결과. 최! 악!”
우경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안 줬어, 내가? TK 엎어진 거나 마찬가지고, 경쟁 PT하려면 판 다시 짜야 해. 경쟁까지 간다는 건 이미 우리가 딴다고 해도 상처뿐인 영광. 개쪽이지. CS 역사를 다시 쓰게 됐어. 알아? 이게 얼마나 큰 사태인지?”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은철이 핫 소리를 내며 코웃음 쳤다.
“어떻게? 네가? 무슨 수로 경쟁 안 하고 다시 우리한테 돌릴래? 어떻게?”
사장이 매달려도 안 되는데 너 따위가, 라는 말은 생략해도 알 수 있다. CS에서 카피라이터로 자리를 잡고 싶다는 욕망이 은철에게 속없는 인간처럼 최대한 맞추는 시늉을 하게 했다. 그 더러운 노력이 이제 거품처럼 팡팡 힘없이 터지고 있다. 우경은 딱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깨문 입술에서 비릿하게 피 냄새가 올라왔다. 우경이 오기로 덧붙였다.
“방향성이 다른 카피도 있었으니까…….”
“뭐?”
은철이 발끈하며 우경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뭐. 우경 씨가 그 카피 들고서 태준섭 상무 찾아가 설득해 본단 말이야 뭐야?”
빈정거리는 말에 우경은 차분히 답했다.
“네, 가겠습니다.”
“놀고 있네. 너 나랑 장난쳐?”
“아니요.”
“왜, 내 탓이라 하고 싶어? 그 카피면 광고주가 오케이했을 거 같아?”
“꼭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여러 가지 방향으로 시도했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면.”
“그래. 가. 너 꼭 가라. 어? 가서 니가 만든 잘난 초안 들이밀어.”
은철이 의자를 돌려 앉으며 내뱉었다. 어디 한번 갈 테면 가 보라는 투였다.
“홍보 출신이라 그런가 몸으로 뛰는 건 자신 있나 봐.”
은철의 비웃음으로 뒤꼭지가 근질거렸다.
* * *
우경이 TK그룹 본사로 가는 길에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건물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가 급한 대로 우산을 하나 집었다. 계산을 하는 중에 메시지가 도착해서 확인해 보니 엄마였다.
[장소는 정했니? 연락받았어?]
아. 우경은 그제야 소개팅 약속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동재였지. 우경은 급히 연락처에서 남자의 번호를 찾았다.
약속 취소를 문자로 보내기엔 무례한 시간이었다. 우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저 연우경입니다.”
- 네, 서동재예요. ……혹시.
상대가 ‘혹시’라고 말하는 동시에 우경이 죄송하다는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아, 아. 죄송해요. 먼저 말씀하세요.”
- 아니에요.
상대 남자가 조금 웃더니 물었다.
- 혹시 우리 약속 시간을 늦춰야 할까요?
“그게, 저……. 너무 죄송하지만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요. 오늘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말씀드리기가.
- 아, 그러시군요.
“너무 늦게 말씀드렸죠. 죄송합니다. 혹시 출발하셨나요?”
- 음…….
남자가 답을 미루더니 다시 웃었다.
“출발하셨군요.”
-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거의 도착했네요.
“아, 어떡하죠.”
이런 결례를 범하다니. 엄마의 잔소리가 주르륵 떠올랐다. 아파트 상가 마사지숍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우경이 보이지도 않는 남자를 향해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오후에 갑자기 일이 터졌어요. 제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 괜찮습니다. 일찍 도착하면 잠깐 운동이라도 할까 했어요. 조금 더 길게 하면 됩니다. H호텔 헬스를 자주 이용하지는 않는데, 가족 회원권이 있거든요.
“네, 그러시군요.”
- 허세 멘트 아니고요.
“아, 아니요.”
우경이 뜻밖의 답에 약간 소리 내어 웃었다.
- 너무 미안해하셔서, 말을 덧붙이다 보니 쓸데없는 소리까지 하네요. 암튼 저는 괜찮다는 겁니다.
“네,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음에 만나면 밥 사세요.
“아……, 네. 그럼요. 제가 사야죠.”
남자의 반응을 보니 최소 소개시켜 준 사람에게 화를 내어 우경의 엄마가 얼굴을 들지 못하는 사태까지 만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행이다. 우경은 한숨을 내어 쉬고는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편의점 밖으로 나오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우산 위로 툭툭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춰 심장이 쿵쿵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눈앞에 너무 높아 고개를 꺾어야 꼭대기 층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TK그룹 신축 사옥이 보였다. TK 본사 입구로 들어서며 우경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더했다. 혹시 몰라 하나씩 더 추가해서 들고 온 자료집과 두터운 파일을 움켜쥔 팔도 조금씩 떨렸다.
* * *
기다림은 우경이 머릿속으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초조하고 비참하고 그리고 체력적으로 지치는 일이었다.
우경은 행상인처럼 TK본사 로비 앞을 서성이며, 상무실로 전화를 걸고 부탁하고 거절의 답을 반복해서 들었다. 태준섭 상무님은 자리에 없다고 똑같은 말을 전하는 비서는 훈련된 예의 속에 짜증을 감추었다.
파일을 든 팔은 저릿저릿 저려 오다가 그 감각마저 둔해진 지 오래였다. 뻐근한 고개를 뒤로 젖히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혹시나 태준섭 상무실인가 심장이 북처럼 울렸지만, 화면에 뜬 번호는 여진이었다.
“네.”
- 으응, 있지, 그거 겨우 알아봤어. 태준섭 상무 차량 번호 말야. 다른 핑계 대면서 보안팀에 가서 건물 들어오는 차량 CCTV 확인했거든. 그래도 혹시나 나중에 꼬여서 문제 삼으려면 삼을 수도 있어 좀 부담이야.
여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 그러니, 듣고 외워. 문자로 보내기도 뭐하고 나도 눈으로 보기만 했어.
여진은 외우라 했지만, 지금 우경은 마음이든 뇌든 몸의 근육이든 무너지기 직전 상태였다.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걸고 파일에 꽂혀 있던 펜을 뽑아 빠르게 메모했다.
97소2359.
- 들었어?
“네. 고마워요.”
- 그래, 너무 애쓴다. 나 전화 끊을게.
여진의 따뜻한 배려가 고마워 눈물이 핑 돌았다. 펜 뚜껑을 닫으며 한 번 더 고맙다 답을 하려는 순간 감각이 둔해진 손이 펜을 놓쳤다. 당황하며 서둘러 집으려 했지만 오히려 펜을 발끝으로 건드려 차 버린 꼴이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펜을 보며 아, 하는 순간 핸드폰도 바닥에 떨어졌다.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우경은 대리석 바닥에 나뒹군 핸드폰과 매끄러운 바닥을 잘도 굴러가는 펜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져서 잠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몸이 바닥을 뚫고 들어갈 수도 있을 만큼 무거웠다. 얼마간 눈을 감고서 그대로 서있었다.
심호흡을 하고서 겨우 눈을 뜨자, 우경의 눈에 제일 먼저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그 구두에 부딪혀 멈춘 붉은색 사인펜도.
선이 날렵한 검은색 구두 앞으로 내려와 펜을 집는 손가락은 남자의 몸집에 비해 길고 섬세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우경은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TK 태시환 회장의 경호원 혹은 비서. 어쩌면 비서 겸 경호원인지도 모르지만 직책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태 회장의 사진에 숨은 그림처럼 존재하던 우경의 이상형, 그 남자이다.
늘 엄숙한 얼굴, 긴장감이 습관처럼 배어 군인처럼 딱딱한 자세, 약간 찡그린 미간.
우경이 홍보 회사에서 일할 때에도, CS애드에서도 회사 사람들이 가끔 우스갯소리로 TK그룹은 이미지 광고 모델을 왜 연예인을 시키나, TK의 공식적인 후계자, 웬만한 배우의 외모를 넘어서는 태이섭이 하면 효과 1만 프로라고 하곤 했다.
하지만 연우경은 단 한 번의 저울질 없이 TK 사내 모델이라면 당연히 이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태이섭이야 대외적으로 알려진 대로 성품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완벽한 왕자이지만, 이 남자의 피지컬에는 한참 못 미쳤다. 아웃포커싱된 사진 속 모습만으로도 남자의 찌르는 듯한 남성성에 우경은 매혹되었다.
희미한 사진 여러 장으로 수없이 봐 왔던 남자가 움직여 걸어왔다. 망설임이 없는 걸음걸이였다. TK그룹 태 회장이 열 명이라도 지킬 수 있을 만큼 남자는 충분히 강해 보였다. 우경의 코앞까지 다가와 멈춰 서자, 남자의 주위로 공간이 미묘하게 어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우경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숨이 차 입을 조금 벌린 채로 시선이 마주쳤다. 너무 깊어 동굴 같은 검은 숲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아마도 남자의 검고 깊은 눈동자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체취가 섞인 머스크향 때문인지도.
우경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펜.”
“아, 네. 감사합니다.”
펜을 받을 생각도 없이 넋을 빼놓고 바라다보는 꼴이었다. 뺨이 달아올랐다. 한 팔은 버겁게 파일을 안고 있는지라 겨우 자유로운 한 손을 내밀었다. 펼친 손바닥 위에 남자의 손가락 끝이 닿는 순간 손과 팔목을 지나 목덜미까지 부르르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마치 우경의 변화를 읽었다는 듯 남자의 눈썹이 미미하게 올라갔다. 입술 끝을 늘이며 남자가 물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네?”
남자가 손을 약간 들어 우경의 얼굴을 가리켰다.
“안색이…….”
“아, 아니요.”
아래로 향한 남자의 시선이 우경의 구두 옆 바닥에 여전히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담았다. 남자가 핸드폰을 주우려는 듯 상체를 숙였다.
“핸드폰은 괜찮습니다. 제가…….”
우경은 오늘따라 H라인 스커트 차림이었다. 남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눈길이 닿았으리라 짐작되는 발목이 뜨거운 자갈돌이라도 닿은 듯 순식간에 뜨끈해졌다. 순간 우경의 손에서 파일이 떨어졌다.
“아.”
우경이 짤막하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흐트러진 종이들과 파일을 수습했다. 이미지 사진들, 스토리보드 콘티, 그리고 몇 날 며칠을 새며 고민했던 카피들.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릴지 모를 TK그룹 광고 기획안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파일을 정리하는 우경에게 남자가 물었다.
“CS애드에서 왔어요?”
“네, CS 카피라이터예요. 곧 잘릴지도 모르지만.”
“왜죠?”
남자의 물음이 어딘가 모르게 놀리는 듯했다. 우경이 답을 하지 않자 다시 물었다.
“왜 잘립니까.”
깍듯한 존대에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억누르는 일이 익숙한 고압적인 자세가 느껴졌다. 우경은 종이를 집다 말고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서양인처럼 각이 잡힌 이마와 부피감이 느껴질 만큼 우뚝한 콧날 때문에 남자는 전체적으로 그리스 전사 같은 느낌이었다. 콧날 아래 입술만은 선이 부드럽고 볼록해 남성적인 턱 위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전사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입술을 열며 남자가 말했다.
“왜 잘립니까. 취업 어려워 난리들 아닌가. 죽어라 붙어 있어야죠. 자, 여기.”
남자가 자료를 줍느라 다시 떨어뜨린 펜을 주워서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우경이 인사하며 펜을 쥐었지만 펜은 남자의 손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한 번 더 힘껏 당겨 보라는 듯 느긋하게 우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우경이 다시 시도했지만, 당기는 만큼 남자 역시 힘을 더해 여전히 펜은 우경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펜의 양 끝을 각자 쥐고 있는 채로 우경과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보니 남자는 마치 먹이를 쥐고 훈련을 시키는 사육사처럼 굴고 있다. 우경은 펜을 잡은 손을 탁 풀었다. 기가 막혀 왜 이래요, 따지고 싶었는데 외려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런 전투력으로.”
남자가 우경의 손에 펜을 쥐여 주며 부드럽게 충고했다.
“뭘 하겠다고.”
“전투력 넘쳐요. 원래는.”
남자는 우경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흩어진 자료를 쓸어 모았다. 종이들을 탁탁 바닥에 두드려 순식간에 매끈하도록 각을 맞추고는 우경이 들고 있는 파일 위로 똑바로 올려 주었다.
우경이 시선을 들러 투구에 어울릴 듯한 굳건한 턱선을 보며 물었다.
“이름 뭐예요?”
우경의 느닷없는 질문에 남자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터졌다.
“전투력은 이럴 때만 고조되나.”
우경은 뜨거워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필 오늘, 이런 타이밍에. 여기가 아니었다면.”
왜 오늘같이 재수 없는 날……. 지난 1년 넘게 힘들게 쌓았던 시간들이 깡그리 엉망이 되어 버린 날.
우경은 목을 달구며 솟아오르는 울음을 누르느라 속입술을 짓씹었다. TK본사 로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우경의 이상형인 남자 앞에서 바보처럼 울기까지 할 수는 없으니까.
고개를 들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경의 망설임을 읽었는지 남자가 어색함을 끊어 내는 매너 좋은 농담처럼 물었다.
“어떤 날, 어떤 곳이면 좋았겠습니까?”
이런 날이 아니라면, 이런 기분이 아니라면 남자에게 용기를 내어 제 명함을 건넸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비참한 울음을 참는 일이 고작이었다.
잠시 동안 남자는 우경의 입술만, 우경은 제 입술을 향한 남자의 눈만 보았다.
남자는 이번엔 답이 필요하지 않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몸을 펴고 똑바로 서는 남자를 한 번 올려다보고 우경도 파일을 안고 몸을 일으켰다. 평소보다 높은 굽 위에서 시달린 발이 욱신거렸다. 반쯤 일어서려다가 무거운 파일 때문에 균형을 잃은 몸이 기우뚱했다.
우경은 남자가 내민 손을 얼결에 꽉 붙잡았다. 우경의 손을 감싸 쥔 남자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남자의 체취가 호흡기를 밀고서 한층 더 강하게 들어왔다. 다른 이유로 우경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시선을 떨어뜨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뭘 해 줬다고.”
올려다보자 남자가 기다란 검지를 들어 제 아랫입술을 툭 두드렸다. 사진에서는 채 담아내지 못한 육감적인 입술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렇게 물어뜯으면 피 나지 않습니까?”
저도 모르게 다시 입술을 깨물었던 모양이다.
“이만 돌아가요.”
어쩐지 다정한 위로처럼 들렸다. 우경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눈에 언제 맺혔는지 모를 눈물 때문에 남자의 이목구비가 흐릿했다.
남자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이며 우경의 이마, 콧날과 벌어진 입술 그리고 목덜미를 스쳤다. 흰색 블라우스 두 번째 단추쯤에 시선을 멈추고서 말했다.
“이런 시도 우습잖아.”
“네?”
“설마 결과를 이런 식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경은 그가 회장과 늘 붙어 다니는 경호원이나 비서라면 오늘 오후에 있었던 CS애드의 PT 결과 정도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매달렸다.
“회장님 수행비서 맞으시죠?”
그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취재하다가 사진 봤어요. 도와주세요. 오늘 발표하지 못한 기획안이 있습니다. 보여 드리고 싶어요. 카피가, 더 있어요. 잠깐, 10분. 아니, 3분이면 충분합니다.”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비웃음이 새어 나올 줄 알았는데 단정한 음성이었다.
“핸드폰 액정에 금이 갔네요.”
남자가 파일 위로 올려 준 핸드폰에 자잘한 금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물끄러미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남자는 등을 보이며 건물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경은 남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필 오늘 같은 날에…….
남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잠시 멍한 상태였다. 우경은 이내 고개를 젓고는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액정은 깨어졌지만 다행히 기능에는 이상이 없었다.
우경은 핸드폰 버튼을 눌러 다시 태준섭 상무의 비서와 통화를 했다. 아직 외근 중이라 했지만 수화기 너머 들리는 인사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막 들어서는 태준섭에게 직원들이 건네는 인사였다. CS애드 연우경이 뵙기를 청한다고,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늦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말씀만 전해 달라고 했다.
태준섭의 비서실로부터 전화가 온 건 40분 후였다.
“네, 네. 연우경입니다.”
- 너무 기다리실까 봐 전화드렸어요. 말씀은 전해 드렸는데, 아무래도 오늘 뵙기는 어려우세요. 상무님 퇴근하셨습니다.
“언제요?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로비 앞에서.”
비서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는 만날 수가 없어요. 잘 알잖아요, 하는 웃음이었다.
- 상무님 이미 차에 타셨을 겁니다. 변동 사항이 있으면 CS애드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우경은 비서의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서 로비 밖으로 뛰어나갔다. 언제부터 이렇게나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건지, 앞이 부옇게 흐려질 만큼 굵은 비가 사선으로 내려 꽂히고 있었다.
갑자기 불어온 강한 바람에 접이식 작은 우산은 쉽사리 뒤집어졌다. 얼굴과 목덜미로 차가운 빗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파일이 빗물에 젖지 않도록 우산을 최대한 기울이자 한쪽 어깨와 등이 대신 흠뻑 젖었다.
읏, 차가워. 어깨를 움츠리고서 우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어오면서 건물 구조를 대충 파악해 두었다. 반대편 로비 쪽으로 나가 차를 탔다 해도 큰길로 이어지는 출구는 하나였다.
57소2359…….
여진이 알려 준 태준섭 상무 차량 번호를 떠올렸다. 우경은 차단기에서 1미터쯤 떨어진 지점에 멈춰 섰다. 사람이 다니거나 서 있기엔 다소 위험하고 애매한 위치에 서서 사방을 살폈다.
이쯤이면 지나는 차들을 다 볼 수 있으려나.
태준섭의 차를 본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지만, 단 1%의 확률이라 해도 태준섭 상무에게 인사만 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한 번만 기회를 달라 말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경의 뒤편에서 차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부신 눈을 찡그리며 우경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아, 우경은 낮게 탄성을 냈다. 태준섭 상무의 차 번호였다. 그리고 우경이 차를 향해 달려 나가기 전, 거짓말처럼 차가 멈춰 섰다. 우경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긴장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늦여름의 일교차 때문에 저녁이 되면서 기온이 뚝 떨어진 모양이다. 우경의 입에서 흰 김이 뿜어져 나왔다.
젖은 몸을 떨며 우경은 차 문 가까이 다가갔다. 짙은 선팅이 된 차 내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태준섭 상무님, 우경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차창을 두드려도 될까, 주먹을 쥔 손을 올렸다가 주저하며 내렸다. 차는 떠나지도 차창을 내리지도 않았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다시 주먹을 쥐어 올리는데 스르륵 창문이 내려왔다. 아아, 긴장감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혈관이 부풀어 목 끝까지 뻣뻣해 왔다.
“태준섭 상무님. 기회를 주십시오.”
우경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 이름, 알고 있네요.”
고개를 든 우경은 숨을 멈추었다. 바람이 불어 우산이 펄럭이고 사나운 빗줄기가 우경의 얼굴을 적셨다. 빗물이 속눈썹 위에 떨어져 우경은 눈을 깜박였다. 분명 태준섭 상무의 차 번호였는데…….
“상무님?”
우경이 너무 떨려 제 목소리 같지 않은 음성으로 물었다.
“태준섭, 상무님?”
차에 앉은 남자가 빗물에 젖은 우경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그리고선 느리게 이름을 불렀다.
“연, 우경 씨.”
저녁 숲처럼 검푸른 눈에 비웃음을 담고 태준섭이 물었다.
“그렇게 비를 맞고서……. 안 춥습니까?”
우경이 무어라 답하기 전, 준섭이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정면으로 틀었다. 준섭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출발할까요, 하고서 조용히 물었다. 창이 천천히 올라가 준섭의 옆얼굴을 가렸다.
차는 느리게 우경을 스쳐 멀어져 갔다. 우산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자료를 적시는 줄도 모르고, 우경은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우식은 습관적으로 준섭을 확인했다. 준섭의 눈길이 닿는 곳 사이드 미러로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비를 맞고 서 있는 모습이 거슬리는지 준섭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우식이 멈출까요. 묻는 대신 속도를 늦췄다.
준섭의 옆에 앉은 박 이사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CS에서 왔다는 직원입니까? 미팅에서는 못 본 얼굴인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준섭은 미간을 찡그렸다.
미팅 회의실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아니다.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스물여덟, 아홉? 투미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개기름 번들거리는 AE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름이 뭐랬더라. 이철?
읍소를 하려면 개기름 AE가 오든가 TK 책임 라인인 COO가 오든가 사장이 왔어야지. 어린 여자 카피라이터를 혼자 보낸 의도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무능을 저런 식으로 증명하나 봅니다.”
로비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카피 조각들이 떠오른다. 적어도 PT에서 보여 줬던 카피보다는 열 배쯤 나았다. 담당 AE의 절대적 무능이었다.
“박 이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제가 요즘 좀 피곤해서 말입니다. 경쟁 PT에서 무능을 다시 보고 싶진 않습니다만. 적어도 이번 기업 광고에서는 말이죠.”
박 이사가 아. 당황스러운 감탄사를 짧게 뱉었다. 준섭의 뜻은 이런 식이라면 CS를 경쟁 PT에서도 제외시키라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창 쪽으로만 시선을 두고 있는 준섭을 향해 박 이사가 답했다.